“살인자!”
관제탑 내에는 31858의 비명소리로 가득 찼다. 소년의 정신적 충격은 멀리서 지켜보기만 해도 꽤 크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소년은 그때까지만 해도 꺼내 보이지 않던 자신의 검을 소매에서 꺼내들어 자신의 목을 찌르려 했지만, 라이너의 지시로 대기하고 있던 스터드들이 재빨리 달려가 그를 저지했다.
짧게 한숨을 내쉰 후 빙긋 웃으며 여유있는 태도로 친구를 바라보는 맥킨리와는 달리 라이너는 어두운 얼굴로 침묵했다. 아까 13이 남학생의 목을 꺾어버릴 때쯤 들어와 잠자코 자리를 지키던 셰릴은 그 두 명의 얼굴을 살핀 후, “그럼 소각 명령 지시하겠습니다.”라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후 관제탑 밖으로 나갔다. 이미 밖에서 대기 중이던 윤이 또 셰릴의 눈치를 살폈다.
“소독 절차는 확인했겠지? 제대로 안하면 채찍으로 흠씬 두들겨 준 후에 박에게 보고하겠어.”
윤은 비명을 지르며 셰릴에게 손을 싹싹 빌었다. 그녀에게 맞는 것도 무섭지만, 그의 영원한 우상 박에게 이런 불미스런(?) 일이 귀에 들어가는 것은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윤은 박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고, 정말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니 13이 알면 또 듣기 싫은 소리를 한 보따리 풀어내겠지만 윤의 입장으로선 두 손이 발이 되도록 빌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제대로 했으니 제발 겁주지 마시라구요. 박 선배에겐 입도 뻥끗 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데요! 그나저나 저 이러다가 장가도 못가요. 등짝에 생긴 채찍 자국이 이젠 없어지지도 않는다구요!”
“흥. 미래의 마누라가 손톱자국 남길 부분 정도는 남겨 줄테니 걱정하지 말라구. 자꾸 까불면 박에게 직통전화 넣어버리는 수가 있다. 알겠어?”
셰릴은 윤의 겁에 질린 표정을 보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후 실험실 개방을 명령했다. 잠시 후 온 몸에 피를 잔뜩 묻힌 13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 그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부터 설치된 파이프로부터 수증기 형태의 소독약이 13의 얼굴과 머리를 흠뻑 적신 피를 어느 정도 씻어내었고, 혈액 침투로 인한 감염을 막기 위해 보호복을 착용한 요원들은 2차 소독을 위해 13을 소독실로 안내하려고 했다. 그러나 13은 거칠게 그들의 손을 뿌리쳤다.
“손대면 다 죽여 버린다.”
요원들이 겁을 먹고 뒷걸음질치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셰릴은 콧방귀를 뀌었다. 아니마 내부에서도 유명한 13의 성질머리가 셰릴에게는 고작 강아지 재롱떠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한껏 치켜 올라간 눈썹과 미간 사이의 주름, 그의 얼굴을 한껏 무섭고 악마처럼 보이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진실로 후회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이곳에서 버티고 있었으면 이 재미난 것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말이다.
선천적으로 폭력과 힘을 신봉하는 셰릴은 하운드 개발에 그녀의 모든 열정을 쏟아 부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하운드는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남성이 될 것이라고 그녀는 굳게 믿고 있었다. 쉽게 말해 그녀는 자신을 피그말리온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기 암 환자를 비롯한 불치병 환자를 대상으로 했던 한국에서의 하운드 개발이 계속적으로 실패하자, 그녀는 손쉽게 건강한 개체를 얻을 수 있는 중국으로 떠나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중국에서 서너 번의 실패를 경험한 후, 마치 운명의 장난인지 한국에서 세 개의 개체가 한꺼번에 성공했으며, 그 중 하나가 살아남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것이 바로 13이었다.
‘폭력의 힘으로 날 만족시켜봐. 날 만족시킬 수 있다면 네 가장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 주지. 날 만족시킬 수 없다면....... 내가 직접 네 목을 졸라 버릴거야.’
그녀는 오랜만에 흥분할 것만 같아, 잔뜩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핥았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버릴 것만 같은걸.’
윤은 겁에 질린 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셰릴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요염한 표정을 하고는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있는 것만 같았다. 윤이 헛기침을 하자, 셰릴은 매력적인 미소로 그를 바라보았다.
“윤, 어서 13의 소독을 마쳐야지. 혹시 오늘 한번 화끈하게 맞고 싶어서 일부러 빈둥대고 있는 걸까?”
셰릴의 말에 윤은 다급하게 마이크를 쥐었다.
“13씨! 제발 소독은 하고 나가시라구요. 비싼 초밥 사드릴께요! 네?”
13은 윤의 목소리에 더욱 화가 난 모양인지 옆에 서 있던 요원의 멱살을 잡은 후 윤과 셰릴이 있는 실험실을 향해 힘껏 던져 버렸다. 윤은 잠시 놀란 모양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13은 실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윤이 어쩔 줄 몰라 당황해 하는 사이, 셰릴은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을 하고는 화장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The Origin of Blood
<Blue rose in your dream>
“한심하군.”
박은 잠시 제자리에 멈춰 자신의 오른쪽 무릎을 몇 번이고 주물렀다. 1 년 전 불의의 사고로 총을 맞은 다리가 아직까지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가면 갈수록 상태는 악화되어 근 두 달간 아직 신참에 불과한 윤에게 외근 직을 전격 일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악화되어가는 것은 그의 무릎만은 아니었다. 그 사고로 인해 그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부하를 잃었고, 또 그의 커리어에 가장 큰 오류를 남기게 되었다. 또 그의 자존심과 명예, 나아가 그가 자랑스러워하고 또 지키려고 했던 그 모든 미덕을 한 순간에 져 버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그 사고는 박을 시기하는 자들에게 좋은 먹이가 되었고, 아직까지도 스터드 회의에서 자주 올라오는 논제이기도 했다.
고통이 조금 가시자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시간상으로도 늦은 시간은 아니었건만 그는 항상 약속시간에는 최소 10분 이상은 미리 가서 기다려야 한다고 굳게 믿는 지극히 고지식한 인물이었다. 1분 정도 더 걷자, 마침내 스터드 회의를 위한 전용 구역에 도착했다. 물론 이 곳은 ‘회의실’로 향하는 입구 역할에 불과했지만, 나름대로 꽤 재미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는 데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었다.
자동문이 열리자 커다란 탈의실이 시야에 들어왔다. 좌우에는 보통의 것보다 더 큰 라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 놓인 평상에는 흰 곰돌이 탈을 쓴 사람들이 주저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 한 곰돌이가 박을 알아보고는 혼을 흔들었다.
“어이! 왔어? 오늘은 곰돌이 탈이야.”
박은 그 목소리가 자신의 친구인 송이라는 것을 알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채 자신의 라커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라커를 열자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뿐이었다. 대신 바닥에 흰 곰돌이 탈이 놓여져 있었다. 박은 상의를 벗어 건 후에, 곰돌이 탈의 몸통 부분을 들고 다리를 하나씩 넣어 의상을 입어 내려갔다. 뒤이어 들어온 스터드들은 곰돌이 탈을 보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비명을 질렀다.
“저번에 그 놈의 기린 탈 쓰느니라고 얼마나 발버둥쳤는지. 아 정말 내가 이 나이에 이 꼬라지하면서 돈벌어서 자식새끼들 밥 먹이고 학교 보내고 마누라 옷사주고 화장품 사줘야 하나?”
“나는 석달만에 집에 들어갔더니 마누라가 밤일 못한다고 어디서 힘 빼고 왔냐고 하루 종일 괴롭히던데?”
“제기랄, 우리 마누라는 어디 한 놈 숨겨 놓은 거 같은데 젠장, 시간이 나야 년놈을 잡아 족치든 말든 할 거 아냐. 자식새끼들 밥 먹일 에미는 있어야겠지~. 그냥 참고 살아야지 어째. 안 그래? 정 못 참겠으면 나도 살림 하나 따로 차리던가.”
사내들은 짓궂은 농담을 하며 키득거렸다. 그러나 곧 옷을 갈아입는 박을 보고는 웃음소리를 낮춘 후 귓속말로 속닥거렸는데, 간혹 박을 보며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송은 그 모습을 보고 뭔가를 느낀 모양인지 눈을 내리깔고 박에게 속삭였다.
“모두들 네가 켈베로스라고 생각하고 있어. 아마 오늘 논제도 바로 그걸 거야.”
박은 잠시 어이가 없어졌는지, 가볍게 콧방귀를 귀고는 곰돌이 머리를 푹 눌러썼다. 그리고는 자신의 라커 안으로 쏘옥 들어가 문을 닫아걸었다. 다른 곰돌이들도 하나 둘 자신의 라커로 들어가자 탈의실 중앙 기둥에 부착되어 있는 거대한 괘종시계가 큰 소리로 추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든 라커가 마치 움직이기라도 할 모양인 듯 덜덜거리며 기계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페인트가 분사되오니 지정된 자세를 취해주십시오.”
박은 천정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음에 따라 두 팔과 다리를 넓게 벌리고는 눈을 감았다. 곧 이어 라커 내부의 사방에서 안개처럼 스프레이가 뿌려져 그의 흰 곰돌이 탈을 검게 물들였다. 연이어 일제히 모든 라커의 밑바닥이 열렸고, 모든 곰돌이들은 제각각 다양한 포즈로 바닥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커다란 수로관처럼 서로가 나뉘어져 있다가 곧 하나의 관으로 연결되어, 수십 마리의 형형색색으로 물든 곰돌이들이 한꺼번에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스터드 전용 회의실로 연결되는 것이었고, 곰돌이들은 미리 설치된 매트리스로 굴러 떨어졌다.
“제기랄....... 내가 이 나이에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정말.”
익숙한 목소리의 곰돌이가 팔을 휘저으며 투덜댔다. 박은 탈의 목 뒷부분에 부탁되어 있는 음성변조 장치를 조작한 후 미리 마련되어진 회의용 테이블로 걸어갔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을 소집한 이유는....... 아니, 모신 이유는....... 최근 우리 스터드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문사에 대한 진실규명에 대한 의견을 모으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본 회의는 켈베로스 시스템에 대한 반감이나 혹은 아니마의 7Seas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 자리가 절대 아니며, 오히려 우리 스터드의 복지를 향상시켜 아니마가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에 좀 더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차원이라는 것을 또 한번 강조하는 바입니다.”
오늘 회의의 의장은 노란 곰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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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연참대회 종료까지 완결되지 못할 길이라는 것을 사전에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