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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상식

일심법계, 돈오

작성자정수욱|작성시간26.06.21|조회수0 목록 댓글 0

일심법계

붓다가 깨달은 연기하는 법계는

자타 분별없이 함께 어울려 사는 한생명, 한마음의 세계,

一心法界이다.

한마음의 세계를 알지 못하고 개별적인 자아를 분별하여

집착하고 살면 중생이다.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나도록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설한다.

오온무상을 깨닫는 것이 궁극은 아니다. 연기하는 생명세계를

깨달아 그에 상응하는 삶을 사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여래는 이전에 없는 새로운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니고,

우리의 현실을 통찰하여 우리가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쳤다.

생명의 실상에 무지하여 허망하게 사는 삶과 생명의 실상을

깨닫고 진실하게 사는 삶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허망하게 사는 삶도 삶의 참모습을 깨달으면 언제든지 진실하게 살게된다.

중생들은 법을 존재로 착각하여 생사의 세계에 빠져 고뇌한다.

연기하는 법계를 깨닫고 살면 생사의 세계가 그대로 열반이다.

생사를 버리고 열반을 얻는 것이 아니다. 번뇌를 자각하면 보리이다.

허망하게 살던 삶도 삶의 참모습을 깨닫기만 하면

언제든지 진실하게 살 수 있다.

 

자아망상

이전에도, 지금도, 나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가르친다.

괴로움은 자아라는 망상이고, 괴로움의 소멸은 아상의 소멸이다.

오온을 자아라고 생각하는 망상에서 벗어난 사람을 여래라고 한다.

무명에서 연기한 허망한 생각들, 즉 유전문을 유위라 하고,

무명이 사라져 망상이 사라진, 즉 환멸문을 무위라 한다.

유위와 무위는 인식론적으로 진실과 허위에 대한 명칭이다.

생사(samsara)는 망상일 뿐, 버려야 할 생사가 있을 수 없다.

생사가 본래 없음을 체득하고 자아망상에서 벗어나면 부처이다.

'나'라는 것은 오온이고, 이 것은 무상하고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변하기 마련인데 그것을 "나이다, 나의 것이다,

나의 자아이다"라고 착각하고 애착하는데서 괴로움이 온다.

이렇게 자아가 존재한다는 생각때문에

자기에게 좋은 것을 찾고 자기에게 나쁜것을 싫어한다.

연기를 깨닫지 못하므로 나와 남을 분별하고 대립한다.

우리의 모든 고통과 문제는 이러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돈오

닦을 것도 없어 돈오이다. 못 깨달으니까 딱기만 한다.

마음이 오염되지만 않으면 '지금 이대로가 부처’(卽佛)

부처님은 깨치기 전에는 뭔가 얻을 게 있고

깨칠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깨치고 보니 이미 모든 걸

갖추고 있더라는 것이다.

‘하나도 얻을 것이 없었구나’

‘모두 완성되어 있었구나’.

착각을 없애면 될 뿐 다른 수행이 필요 없다.

뭔가 있어서 얻는 게 아니라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다.

‘깨칠 게 있다, 닦을 게 있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이 세상에 출현하여 따로 법을 준 일은 없고

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푹 쉬어 중생들에게

스스로 자기 본마음을 보게 했을 뿐이다.

덕산은 입문하는 이에게 방망이로 대했고,

임재는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 밖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우리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다 본성이며,

견성이라는 것은 볼 때 보는 것만 하고, 거기에 좋아하고

싫어하는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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