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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사학의 종말, 상지대의 정상화, 수원대가 나아갈 길을 보여주고 있다.

작성자자유영혼|작성시간18.12.10|조회수739 목록 댓글 4

[더뉴스] '현대정치사의 축소판' 43년 투쟁 상지대는 정상화 되었나?

[더뉴스] '현대정치사의 축소판' 43년 투쟁 상지대는 정상화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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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 노종면 앵커
■ 출연 : 정대화 상지대 총장

* 아래 텍스트는 청각장애인 자막 방송 속기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내용이라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앵커

상처입은 상지대에 봄은 오는가. 대한민국 사학비리의 대명사였던 상지대가 43년에 걸친 투쟁과 갈등을 해소할 계기를 맞았습니다. 상지대는 개교 63년 만에 처음으로 총장 직선제를 도입해 이른바 민주총장을 뽑았습니다.

불과 몇 년 전 재단 측으로부터 파면을 당했던 교수가 총장으로 선출됐죠. 정대화 상지대 총장 연결되어 있습니다. 총장님, 안녕하세요?

[정대화]
안녕하십니까.

앵커

먼저 상지대 7대 총장 선출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난해 역임했던 총장직무대행과는 역할에서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정대화]
아무래도 직무대행은 과도기의 업무를 수행하는 임시직 같은 거고요. 아무래도 권한에 제한이 없지만 아무래도 역할은 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봐야겠죠.

앵커

총장 선거 하면 한때 교수들만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것인데요. 직선제 시행도 드물고 또 학생들의 반영 비율도 높아졌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정대화]
아무래도 상지대 민주화 과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되고요. 사실은 우리가 늘 상지대학교의 민주화를 교수, 학생, 직원 구성원 3주체의 연대의 어떤 성과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교수님들이 늘 열심히 하셨지만 특별히 다른 대학과 좀 비교해서 본다면 지난 수십 년간 우리 학생들의 지속적인 헌신과 기여가 우리 민주화의 큰 디딤돌이었고 이런 점들이 이번 총장 선거에서 학생들의 투표율에서도 반영되었다. 이렇게 판단됩니다.

앵커

이사회 의결이 끝난 건가요, 어떻습니까?

[정대화]
조금 전에 의결하시고요. 저는 물론 가서 앞으로 대학을 어떻게 운영하겠다라는 일종의 대학 운영 계획을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 이후에 저는 나가고 이사회에서 따로 의결을 하시고 그리고 조금 전에 임명장까지 같이 받았습니다.

앵커

그러셨군요. 이사회에 혹시 김문기 전 총장 측 측근은 없는 상황인가요?

[정대화]
저희 상지학원 이사 정수가 9명인데요. 1명이 김문기 씨 측입니다.

앵커

9명 중에 1명이요?

[정대화]
그렇습니다.

앵커

시청자들께서 왜 특정 대학의 총장을 인터뷰하나,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총장님 저서 중에 상지대 민주화 투쟁40년이라는 책이 있죠. 정말로 40년이죠.

[정대화]
정확하게 말하면 40년이 넘었는데요. 상지대는 1955년에 개교를 했습니다. 김문기 씨가 총장이 된 것은, 그러니까 김문기 씨가 학교를 인수한 것은 1974년입니다.

그런데 75년서부터 학내 민주화 운동이 시작이 되었기 때문에 거기에서부터 기점으로 따진다면 올해가 44년째가 되는 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앵커

올해가 벌써 44년째, 만 43년이요. 시작이 언제인지부터가 궁금해집니다. 워낙 오래된 일이라. 총장님께서 직접 설명을 간략히 해 주시죠.

[정대화]
김문기 씨가 1974년, 이미 오래된 얘기인데요. 그때 상지대를 인수하면서 바로 비리가 드러나고 학내 분규가 시작됐죠. 그러다가 그게 한 19년 정도 끌다가 1993년에 김영삼 대통령 취임 직후에 결국은 사학비리 문제로 김문기 씨가 구속되면서 일단락이 됐던 문제입니다.

그리고 상지대는 민주화가 됐고요. 그랬는데 2010년에 사분위 정상화 과정을 거쳐서 김문기 씨 측 인사들이 들어왔고 4년 전인 2014년에는 결국 김문기 씨가 총장이 되는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마는 교육부 감사와 대법원 판결로 결국 다시 김문기 씨 측이 물러나고 지금은 학교가 이사도 정상적이 됐고 정상적으로 선임된 이사들에 의해서 이번에 총장직선제가 도입이 돼서 끝난 겁니다.

앵커

워낙 오래된 일이고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상지대 사태를 저희 제작진이 정리를 했습니다마는 워낙 일들이 많아서 그런지 한 판으로 요약하기 어려웠습니다.

말씀해 주신 1993년 김문기 씨가 구속될 때까지 상황부터 우선 제가 간략히 짚어보고 다시 질문을 드리도록 하죠. 그래픽 보겠습니다. 보시는 대로 1974년 김문기 씨가 상지대와 인연을 맺은 첫해입니다.

임시이사로 파견이 됐고 이후에 사정이 어려웠던 상지대학교를 인수하게 되고요. 이후 사유화하는 과정이 진행이 되면서 구성원들과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1975년 교수협 또 총학생회가 김문기 퇴진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상지대 투쟁의 시작을 1975년으로 이렇게 본다고 하죠. 그리고 1981년 5공화국 시절에 김문기 씨는 인수자에서 설립자로 불법 변경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1986년에는 상지대가 비정상적인 강사 채용 문제가 불거졌지만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을 친북 용공세력으로 조작하는 이른바 용공조작 사건이 발생하고 여기에 150여 명의 학생들이 피해를 입는 그런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1993년에 김문기 씨가 사학비리, 구체적으로는 학생 부정입학 사건이 터지면서 구속되는 일이 있었고요. 이때부터 정상화의 길로 접어듭니다.

총장님께 여기까지 정리하고 좀 여쭤보고 싶은 게요. 1986년에 있었던 용공조작 사건. 이 사건이 특히 눈에 들어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정대화]
말하자면 이것은 이사장이었던 김문기 씨가 학생 150명 정도를 간첩으로 몰아간 사건인데요. 조금 전에 설명하신 것처럼 그 전에 교수 임용 비리가 있었고 그 교수 임용 비리를 학생들이 항의하면서 본관 점거농성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점거농성을 해결할 방법이 마땅치 않으니까 학교 측에서 불온삐라, 용공삐라를 뿌려서 학생이 뿌린 것처럼 해서 조작을 했고 이것 때문에 학생들 150명 정도가 그 당시 치안본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는 이런 상황이 생겼습니다.

앵커

그 일로 나중에라도 책임을 진 사람이 있었습니까?

[정대화]
없습니다. 13년 지난 다음에 그 실체가 밝혀졌습니다, 국회에서. 그랬는데 아무도 책임을 진 사람은 없습니다.

앵커

김문기 씨가 그 당시 이미 구속되던 당시에도 여당 3선 의원이었고 인수하던 시점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었죠.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그런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문기 구속 이후 상황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비극의 시작은 대법원 판결인데 어떤 맥락에서 대법원 판결이 있었는지 살펴보죠. 1993년부터 2010년까지를 그나마 민주화가 진행된 시기로 그렇게 규정들을 합니다.

이 사이에 2004년임시 이사회에서 정이사들을 선출하면서 상지대 정상화를 제도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7년 대법원이 상지대 임시이사회가 결정했던 정이사 체제를 부정하는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아까 총장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2014년 김문기 측의 복귀가 이뤄집니다. 아들이 이사장에 선출되고 김문기 씨는 총장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다가 2015년 다행히 이사회가 김문기 총장을 해임하게 되고 오늘에 이르른 상황입니다.

총장님, 2007년의 대법원 판결. 혹시 당시 주심 대법관이 누구였는지 기억하십니까?

[정대화]
국무총리를 지내시고 또 서울시장 후보로도 출마를 했던 김황식 전 대법관입니다.

앵커

그때부터 상지대 사태가 풀리다가 다시 꼬였다. 이런 해석들이 있어요. 그런 규정에 동의하십니까?

[정대화]
그렇습니다. 그 대법원 판결로 인해서 사실상 학교는 설립자 혹은 운영자의 사유재산이므로 사유재산권을 존중해야 된다는 판례와 기류가 형성됐고요.

그 연장선상에서 그 이전에 쫓겨났던 비리 인사들도 복귀시켜야 한다는 흐름이 만들어지고 결국 사립학교법이 개악되면서 김문기를 비롯해서 전국에서 쫓겨났던 사학비리 주범들이 복귀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앵커

총장님께서는 언제부터 상지대 민주화 투쟁에 함께하게 되셨습니까?

[정대화]
제가 김문기 씨가 구속된 직후에 상지대 교수로 임명이 됐고 그 이후에 지금까지 쭉 대학 민주화에 함께 참여해 왔습니다.

특히 2010년 사분위의 정상화로 김문기 씨 측 구 재단 이사들이 복귀한 직후부터는 저나 많은 분들이 거의 모든 활동을 이 대학 민주화에 집중했습니다.

앵커

복귀한 김문기 씨가 정 총장님을 파면시켰을 때 그때가 2014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많이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정대화]
2014년 8월 14일날 김문기 씨가 총장으로 복귀했고요. 총장으로 복귀하던 그날 저는 파면 징계에 회부가 됐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징계를 받거나 파면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기보다는 갑자기 김문기 씨가 총장이 되고 그 둘째 아들이 이사장이 되는 과정에서 학교가 굉장히 혼란스러워하고 갑자기 순간 침묵의 도가니로 빠져드는 것이 오히려 그것이 그때는 조금 더 힘들었습니다.

앵커

지난해 8월에 총장대행으로 선임이 되면서 이른바 정상화의 물꼬는 터진 거고요. 이제 정식 총장이 되셨습니다마는 그래도 가장 중요한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김문기 씨 측의 복귀 가능성 전혀 없는 건가요?

[정대화]
미래의 일을 여기에서, 현재에서 예단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그간 상지대와 김문기 구 재단 측 사이에서 주고받은 여러 재판의 결과들을 감안할 때 김문기 씨와 그 구 재단이 다시 복귀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이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앵커

그래도 김문기 씨가 여전히 재단을 소유하고 있다, 이게 맞습니까?

[정대화]
아닙니다. 김문기 씨는 재단을 소유한 적이 없고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설립자도 아니고 또 김문기 씨가 학교에 재정적으로 기여한 바도 없습니다.

따라서 김문기 씨가 결국 93년에 한 번 쫓겨나고 또 2015년에 두 번째로 쫓겨난 셈이고 설립자도 아니고 재정적으로 기여한 바도 없기 때문에 김문기 씨가 재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복귀할 명분이나 복귀할 어떤 법적 근거는 없다 이렇게 저희가 판단하고 있습니다.

앵커

설립자도 아니고 재정적으로 기여한 바도 없는 사람이 이렇게 오랫동안 대학 구성원들을 괴롭혔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사회의 모순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총장님, 오늘 이야기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대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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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교협홍보실 | 작성시간 18.12.11 맞습니다.
    상지대 다음은 수원대입니다~
  • 작성자석궁 | 작성시간 18.12.17 그 동안 등록금 수입은 적절히 사용되거나 분배되지 않았다면... 잘 하여야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자유영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12.12 수원대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습니다. 조용히 닦아오네요.
    그간 수모를 겪고 고생하신 분들의 노고가 빛을 발하려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와우리의봄 | 작성시간 18.12.13 자유영혼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2019년 3월이 오기 전에 수원대에 관선이사가 파견되고 정상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2019년에는 마침내 수원대가 위치하고 있는 와우리에도 오래 기다리던 봄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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