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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군수의 임진왜란 기록 <호구록>

작성자이뭐꼬|작성시간21.04.18|조회수314 목록 댓글 0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에 왜군의 일부는 평창까지 진출하였다. 당시 평창군수 권두문은 근처의 절개산으로 피신하여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다. 그는 왜군에 이끌려 영월까지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였는데, 탈출 후에 38일 동안에 겪은 일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여 <호구록>을 작성하였다. 이 기록은 임진왜란의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주: 호구록은 평창군수 남천(南川) 권두문(權斗文) 선생이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인 1592년 8월 7일부터 9월 13일까지 겪었던 일을 한문(漢文)으로 기록한 일기이다. 호구록은 남천문집(南川文集)의 일부로서 권씨 집안에 전해 내려오던 것을 권두문 선생의 후손인 권영식(權寧植) 선생이 알기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4백 주년이 되는 1992년에 지준태(평창읍 응암이장) 선생이 평창군청의 지원을 받아 호구록 1쇄를 발행하였다. 2013년에는 2쇄를 비매품으로 발행하였다. 2020년에 자원봉사자가 평창군의 향토사학자인 정원대 선생의 도움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컴퓨터에 입력하여 한글파일로 만들었다.)

 

호구록 (虎口錄)

 

임진(서기 1592년) 음력 3월에 평창군수(平昌郡守)로 임명받고 그해 4월에 왜란을 당하였다. 군(郡)의 남쪽 15리 지점 험한 곳에 군민을 이끌고 방비 시설을 하였다. 그 지점은 응암(應岩) 아래 산이 몹시 높고 험하여 골이 깊고 깍은 듯한 절벽이 마치 병풍을 두른 듯하여 절벽 아래로는 둘레가 10여리 정도 되는 못 같은 강이 가로 놓여 있고 절벽의 중간 쯤에 상(上), 하(下) 두 굴이 있는데 위쪽 굴에는 10여 명, 아래쪽 굴에는 약 100여 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다. 평지에서 위쪽으로 올려봐서는 굴이 있는지도 모르나 굴에서 밑을 내려다 보면 마치 배를 띄워 놓은 듯 하다.

 

못 둘레를 따라 1~2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언덕이 있고 언덕에서 동쪽으로 작은 곳으로 10여 걸음 들어가서 사다리를 잡고 올라가면 암대(岩臺)가 있어 그곳에 약 100여 명 앉을 자리가 되니 이것이 외대(外臺)다. 그곳에서 다시 서쪽으로 약간 높아 10여 걸음 나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아랫굴이다.

 

아랫굴에 피난민을 수용하고 윗굴에는 관청 사람들의 가족을 수용했다. 전봉사(前奉事: 관직명) 지사함(智士涵)으로 대장(大將: 고을원이 지명)을 정하고 심복 부하 100여 명으로 사병을 삼아 굴 바깓 대(外臺)에 울타리를 만들어 방패(防牌)를 하고 군기(軍器)와 석차(石車: 돌을 실어 나르는 나무 수레)를 나열해서 적을 방비토록 준비하였다. 그 계곡의 양쪽 언덕은 마치 돌로 세운 문처럼 되어 있고 그 안에서 마실 물이 솟아나고, 또 굴 안에 먹을 양식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기갈(飢渴)을 면하는 데는 조금도 걱정할 게 없었다. 또 산의 사방(四方) 어느 쪽도 적이 통행할 수 없고 오직 이곳으로 들어올려면 그 돌문으로만 출입할 수 있으니 비록 적이 이곳으로 온다 해도 배를 감추고 사다리를 떼어버리면 올라오지 못할 것이고 한꺼번에 화살을 쏘고 석차(石車)로 대항한다면 한 사람으로 능히 여러 사람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니 천연의 요새지이다. 혜정(惠正) 승(僧)의 초가삼간이 굴 남쪽 얼마쯤 떨어진 곳에 절벽을 의지하고 있고 못같은 강옆에 있어서 얼마 전부터 아권(衙眷)들을 그곳에 유숙(留宿)하게 하였다.

 

8월 7일 (맑음)

 

영동(嶺東)의 왜적이 모두 큰재(大領)를 넘어 무기와 장비를 정비하고 형세(形勢)를 정찰하였다기에 강녀(康女: 선생의 부실)를 보고 말하였다. “나는 국토를 지켜야 하는 신하로서 이곳을 비운다는 것은 의(義)가 아닌 일로 험한 굴에 들어가 버티면서 이곳을 지켜야 하니, 그대는 동촌(東村)으로 가서 숨도록 하오”하니 강녀는 “나으리께서 죽느냐 사느냐 하시는 판국에 소첩이 어찌 나라를 버려두고 혼자만이 갈 수 있습니까? 동촌도 적과의 거리가 멀지 않은 곳이니 장차 이 일을 어찌 하오리까” 하니 주(역자 주:黑+主를 합쳐놓은 글자인데 해당하는 한자를 찾지 못하였다. 선생의 작은 아들의 이름이다)와 고언영(高彦英: 中房京人)을 비롯하여 모두 말하되, “정동(井洞)에 있는 굴에 들어가서 방어하는 것이 이롭다고는 하겠으나 적을 물리치는 데는 오히려 어려우니 아직은 형세를 두고 보는 것이 좋은 듯합니다. 아마 삼도(三都: 경주, 서울, 평양)를 잃고 각성이 바람에 촛불 꺼지듯 하는데 여기 몇 안 되는 병사로 대항한다는 것은 나방이 불속에 뛰어들 듯 그저 헛되이 죽을 뿐입니다. 동촌도 평창군(平昌郡) 땅이고 또 험한 곳이며 영향(榮鄕: 선생의 榮川本鄕으로 지금의 영주시)과도 인편이 잦고 하니 우선 동촌으로 가서 병사를 조련하고 복병도 하였다가 밤을 타서 적을 습격할 수도 있을 줄 생각되오며 만약 형세가 급하고 불리할 때는 그때 가서 응암(應岩)굴로 대피하셔도 좋을 줄로 아오니 성주께서는 동촌으로 먼저 가심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지봉사(智奉事) 및 여러 군관(軍官)들이 모두 주먹을 쥐고 팔을 올리면서 큰 소리로 “응암 하험굴(下險窟)은 난공불락의 요새이며 군기와 장비도 그만하면 비록 많은 적이 온다한들 겁낼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성주께서는 동촌으로 가시어서는 아니되옵니다” 하기에 나는, “내 뜻도 그러하다” 하고 응암으로 가기로 하였다.

 

이날 밤을 타고 적 선발대가 정선으로부터 입군(入郡)하였다. 급기야 배를 불러 강녀(康女), 주 및 고언영(高彦英)외 노비 4~5명을 굴에 들게 하고, 지사함(智士涵)과 품관(品官) 지대성(智大成), 우응민(禹應緡) 지대용(智大用) 지대명(智大明), 이인서(李仁恕), 이대충(李大忠), 충주에서 피란 온 최업(崔嶪), 우윤선(禹胤善) 및 관속(官屬), 백성 수백 명, 집안 권솔들과 함께 굴로 들어갔다.

 

8월 8일 (아침 비, 오후 맑음)

 

상호장(上戶長: 관직명), 이응수(李應壽), 병방(兵房: 관직명) 이난수(李蘭秀)가 군으로부터 와서 왜적이 군내에 깔려 있다고 하기에 밤에 지사함(智士涵)과 대성(大成) 우응민(禹應緡), 윤선(胤善), 고언영(高彦英) 등을 왜군 진지에 보내 잠복하고 있다가 활을 쏘라고 하였으나 겁을 먹고 돌아왔다.

 

8월 9일 (맑음)

 

아침에 조파(潮派: 지명) 복병군집(伏兵軍執: 관직명)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왜국에 붙은 한 사람을 잡아오기에 물은즉, 왜서(倭書)를 가지고 온 자다. 즉시 명하여 목을 끊었다. 왜장 풍신수길(豐臣秀吉: 毛利吉成)이 강원감사(江原監司)라 자칭하며 지나는 고을마다 글을 먼저 보내고 방을 붙이니 산골의 어리석은 백성들은 모두 그에게 쏠려 따른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나는 분연히 지사함(智士涵)등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모두 임금으로부터 주신 옷을 입고, 먹고 하거늘 어찌 자기의 몸만을 돌아보는가, 장차 나라와 가정의 존망이 눈앞에 있고 인간의 사생(死生)이 경각에 있는데 어찌 마음과 힘을 합하지 못하는가” 한즉 모두 “어찌 명을 따르지 아니하겠습니까?” 하기에 나는 다시 말하였다.

 

“나도 몇 안 되는 병사로 험한 곳에 웅거해서 많은 수의 적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바 아니나, 다만 여기서는 적을 피해 백성을 보호코자 함이니 신중을 기해 적을 가벼이 보지 말고 경거망동치 말지어다” 한즉, 지사함(智士涵)이 아뢰기를,

 

“우리 관동(關東)은 원래 험준한 곳이기 때문에 적들은 무인지경(無人之境)으로 종횡함으로 우리에게 괘념(掛念)치 않으니, 다만 응원을 기다려 때를 타고 격파하면 될 것이니 너무 격분하시지 마시옵고, 이제 이 굴에는 만 명의 적이 온다한들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니 성주께서는 저희들을 믿고 너무 염려하지 마소서”한다.

 

나는 다시 말하여, “망령된 말을 하지 말고 신중하라”하고 밤에 지사함(智士涵), 지대성(智大成), 우윤선(禹胤善), 최업(崔嶪), 지대명(智大明), 관노(官奴), 흑수(黑守) 등을 보내 잠복하고 사격하라 하였으나 역시 크게 놀라기만 하고 헛되이 돌아왔다.

 

8월 10일 (맑음)

 

적은 열나흘 밤낮으로 거의 집결된 모양이다. 낮에 약수(弱水: 지금의 藥水) 정동(井洞: 지금의 泉洞) 등지에도 역시 진을 쳤다. 민가가 희소하므로 많은 수의 군막을 친다. 바라보니 놀랄만큼 어마어마하다. 밤에 미쳐 배와 사다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것을 거두려는 즈음 홀연히 왜병 2명이 길을 찾아 바로 굴 앞에서 손을 이마에 얹고 좌우를 돌아보며 한 놈은 숲속에 감추어 둔 반기(盤器)를 발견하고 돌로 때려 부순 후 물로 뛰어 오르려 한다. 그때 지대성(智大成)이 술에 취해 활을 잡고 쏠려고 하기에 나는 이를 만류하여 “경솔히 화살을 당기지 말고 적이 절반 쯤에 오르거든 그때 가서 돌을 굴려라” 하였으나 대성(大成)은 활을 강하게 당겨 쏘았다. 그러나 바로 맞지 않고 놈의 옷만 스치고 지나쳤다. 적은 처음 굴에 사람이 없는 줄 알았다가 화살을 보고서는 크게 놀라 쫓기어 달아났다.

 

조금 후 30여 명의 적의 무리가 물을 사이에 두고 삼엄하게 서서 크게 아우성을 치니 굴 속의 사람들은 모두 혼 빠진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 버렸다. 지대성(智大成)이 일찍이 매를 한 마리 길렀다. 굴벽(窟壁) 위에 매를 들고 앉으니 왜들이 매를 달라고 한다. 나는 매를 주라고 하였다. 매를 놓으니 훨훨 푸른 하늘 구름 속으로 날아갔다. 이미 날이 저물었다.

 

적들은 일단 물러갔으나 산(山)의 앞뒤로 복병을 하였다.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 족종(族從)인 계옥(啓沃)이가 신을 한 짝 나에게 주는 꿈이었다. 심기가 좋지 않은 차에 강녀(康女)도 왜장(倭將) 앞에 허리를 묶여 끌려가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꿈이 모두 불길함을 예고하는 듯 했다. 그러나 어찌 하랴 천명(天命)만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

 

굴 안의 군사 비록 수는 적다고 하겠으나 모두 다 정용(精勇)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태평세대(太平世代)에 훈련을 하지 않아서 적만 보면 미리 겁을 먹고 오들오들 떨기만 한다. 벌써 군기(軍紀)를 잃어 배와 사다리를 빼앗겼으니 위태함이 미구(未久)에 와 있다. 어찌하랴. 천월대(天越臺: 지명)에서 두 군데 갈라서 지키던 군사가 크게 겁을 먹고 쫓겨오는 것을 외대(外臺)에서 바라보니 군세(軍勢)는 또다시 믿을 수가 없었다.

 

8월 11일 (맑음)

 

미명(未明)을 기해서 왜장(倭將)이 맞은 편에 포진하니 왜병이 산의 위 아래로 가득차고 적의 선봉은 이미 산곡을 지나 외대에 오르려 한다. 산마루에서 큰 돌을 굴리고 작은 돌과 모래를 퍼부었으나 왜(倭)는 대(臺)에 오르려고 총을 쏘니 탄환은 비오듯 하며 양군(兩軍)이 함성을 외치니 천지가 캄캄하고 천악(川岳)이 진동을 한다. 아군은 외대를 차단하고 양군이 일진일퇴 치열하게 공방하는데 활과 돌에 맞아 쓰러지는 자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지사함(智大成), 우응민(禹應緡), 이인서(李仁恕), 지대충(智大忠) 모두 총을 맞아 쓰러지고 고언영(高彦英)의 활은 탄환을 맞아 부러졌다. 다른 활을 잡아 쏘려고 할 때 또 탄환을 맞아 부러졌다. 겨우 몸만 피했다. 나머지 병사는 대오(隊伍)를 잃고 겁을 잔뜩 집어 먹은 체 굴 안으로 쫓겨 들어왔다. 적도(賊徒)는 이미 외대에 오르고 선봉은 나무로 잔도(棧途: 징검사다리)를 만들어 아랫굴로 들어갔다. 굴 안의 남녀들은 손을 묶어 구금하였다.

 

적은 상굴(上窟) 입구에서 칼을 뽑아들고 나오라고 독촉하였다. 나도 장창을 들고 용맹을 보이며 “물러가라. 물러가지 않으면 이 창으로 너희들을 찌르리라. 나는 죽을지언정 이 굴에서 내려가지 않으리라” 하고 분전하며 꾸짖었다. 아랫굴에서 윗굴까지는 세척(三丈)이나 된다. 아래와 위의 사다리로 적이 오르려 한다. 나는 언영에게 활을 쏘라고 명령하였다. 언영이 활을 당기니 적들은 자빠지며 엎어지며 언덕 밖으로 물러갔다. 이렇게 하기를 8~9차 반복하였다. 상,하굴을 연결하는 사다리가 심히 높아서 나란히 기어오를 수는 없다. 굴의 입구에서 1~2명의 왜병이 보이고 나머지는 언덕 아래에 있다. 언영이 굴 입구에서 보이는대로 화살을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자빠지며 감히 들어오지 못하고 마치 조개와 황새들 싸움같이 서로 대치하는 동안 벌써 한나절(日午)을 넘겼다. 상·하굴 사람들은 거의 포로가 되었고 남은 것은 나와 강녀(康女) 아들 주 그리고 언영과 노(奴) 언이(彦伊) 등 몇 명뿐이다. 쳐다보니 굴벽 가장 높은 곳에 들새의 구멍이 있고, 이곳에 오르려다가 떨어지는 사람을 몇 차례 보았다. 삶에 대한 애착이란 끝이 없는 것이다.

 

형세는 급박하여 차라리 자결하리라 맘먹고 칼을 들었다. 주가 울부짖으며 손을 붙들고 조금만 참으시고 형세를 보자고 한다. 나는 언영(彦英)이를 책하였다. “왜 화살을 쏘지 않느냐? 먼저 화살을 맞은 적들은 모두 북으로 쫓겨 가지 않았느냐?” 한즉, 언영은 “형세를 보아가며 화살을 쏘겠습니다. 적들은 지세가 험하고 또 전비(戰備)도 있는 줄 알고 아주 간 것이 아니고 경솔히 달려들지 않습니다.”

 

이때에 포로 중에 왜말(倭語)를 배운 자가 와서 통역하되 “상관(上官)이 나오지 않을 때는 죽일 것이고 나오면 죽이지는 않고 생명을 보전할테니 나오라. 나를 믿으라 굳게 맹세한다” 하며 “팔도(八道)를 누벼도 아군을 당하는 자가 없거늘 무엇을 믿고 대항하느냐” 하기에 나는 “나가면 무엇 하느냐 차라리 자결할지언정 너희들에게 잡혀 죽지는 않겠다” 하며 언영이와 말을 주고 받는 동안 순간에 왜 한명이 몸을 던져 돌입하여 언영이의 옷소매를 잡아 묶으매 나는 두 손에 창을 들어 오는 왜를 찌르러 할 찰나 적의 칼은 먼저 나에게 내려온다. 순간에 강녀(康女)가 나의 등에 엎드려 “나를 죽일지언정 나의 남편은 아니 된다”하니 주는 나를 껴안고 통곡한다.

 

굴 안이 좁아서 칼이 벽에 부딪치고 나에게는 닿지 않았다. 내가 몸을 일으켜 서려할 때에 칼이 내 팔에 맞아 피가 물같이 흐른다. 적은 나를 먼저 묶고 강녀를 잡으니 강녀(康女) 평상시의 안색과 말투로 “내가 어디 가리오” 하며 나를 따라 굴을 내려오다가 왜병이 손을 잡으려 하니 장차 왜병에게 욕볼 것을 미리 짐작하고 사다리에서 천인절벽에 떨어지니 왜장도 탄식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다 보니 주도 묶여서 따라오고 있다. 노비들은 어디 간 줄을 몰랐더니 어느새 묶여서 강변의 배 위에서 강녀(康女)가 투신하는 것을 바라보고 눈을 가리고 비명을 지른다.

 

왜장은 바위 위에 우뚝 섰고 강변은 적의 칼과 창, 깃발이 푸른 빛으로 삼엄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정동(井洞) 지대성 집 앞길에서 적(敵)은 나에게 네가 상관(上官)이냐 하기에 나는 상관이 아니고 품관(品官)이라고만 대답했다. 밥을 한 사발 주며 먹으라 했다. 먹지 아니하였다. 주를 보니 입은 옷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주도 굴신(屈身)을 못하고 가래를 뱉으니 목에서 붉은 피가 나온다. 필시 포박할 때 밟고 차고 하여 오내장(五內腸)이 상한 모양이다. 가련하기 짝이 없다. 왜(倭) 한 사람이 주를 이끌고 저희 대장 앞에 갔다. 다시 오기에 물으니 많은 것을 물었으나 말을 몰라서 한마디 대답도 못했다고 한다. 그때 왜복(倭服)을 입은 소년이 와서 말이 통하기에 물은 즉 자칭 중추부하인(中樞府下人)이라 하며 성명(姓名)은 말하지 않는다. 아마 추측컨대 서울 양반일 것이다.

 

적이 말을 타고 앞서 가는데 위엄과 의식이 성대하여 구름이 옮기는 듯하며 나를 말에 올려 놓고 목을 묶은 끈으로 말 안장에 매고 끈으로 다시 허리와 다리를 묶어 꼼짝 못하게 했다. 약수(藥水)를 지나니 많은 왜병들이 길옆에 주둔하여 서로 쳐다보고 상관이냐고 묻기에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주와 언영(彦英)이는 결박하여 보행(步行)하게 하고 다른 여러 포로들도 그 뒤를 따르게 했다. 관노(官奴) 언이(彦伊), 임손(林孫)과 지대성(智大成)은 오는 중에 도망쳤다.

 

군내(郡內)에 이르니 창검과 깃발이 뜰을 덮어 딴 곳인 듯하다. 군청 밖에서 나를 풀어 말에서 내리게 한 후 동상방(東上房)으로 끌고 갔다. 적의 괴수 2명이 창 옆에 마주 앉았고 비단옷을 입은 30여 명의 왜군이 시립(侍立)하고 좌우에 왜인으로서 우리말을 아는 놈이 눈을 부릅뜨고 큰소리로 재촉하여 나를 꿇어 앉으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꿇어 안지 않고 평좌(平坐)했다.

 

왜병이 쇠자물쇠(鐵鎖)를 가지고 나의 목을 채우려 했다. 목이 굵고 자물쇠가 적어 채울 수가 없었다. 왜병이 그 자물쇠로 언영(彦英)의 목을 채웠다. 쇠자물쇠란 몇 자나 되는 긴 쇠가지(鐵枝) 두 개로 그 머리를 합해 못을 쳐 자루를 만들고 대나무통(竹筒)으로 그 자루에 씌워 자기 손으로는 열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와 주는 삶은 삼(熟麻)을 꼬아서 목과 양어깨를 얽어 묶고 그 묶은 끈을 뒤로 올려 기둥에 메고 차례로 앉게 했다.

 

적의 괴수가 통역을 시켜 나에게 묻기를 “네가 상관(上官)이냐?” 하기에 “나는 품관(品官)이다” 대답하니 다른 왜병들이 서로 웃으며, “먼저 심문한 포로들이 모두 네가 이 고을의 상관이라 말하는데 왜 속이느냐”하며 손으로 주를 가리키며 “저 아이는 누구냐?”고 하기에 “내 아들이다”라고 대답했다. 또 언영에게 물으니 언영이는 “나는 서울 사는 상인(商人)인데 장사 때문에 여기 왔다가 이 꼴이 되었다”고 거짓 대답을 한다. 주에게 또 묻되, “너는 상관의 아들이니 필시 글자(文字)를 알 것이로다. 그러하냐?” 주가 머리를 가로 흔들며 “모른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여러 왜병들이 손을 쥐고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또 나에게 묻되,

“우리나라가 너희 나라에 들어와서 가는 곳마다 저항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너희 나라는 지금 우리나라 일본(日本)이 되었다. 일본 천왕(天王)이 나로 하여금 강원(江原) 감사로 삼으니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나를 따르는데, 너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데 홀로 험한 바위 절벽굴에서 나에게 항거하느냐? 너는 나의 힘을 모르는 자다. 너를 잡을 때 우리 군사의 사상자가 적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목은 이제 너의 목이 아닌 줄 알라.”

 

나는 말하였다. “왜 말이 많은가? 속히 나를 죽여라. 우리나라가 비록 너희들에게 유린된 것은 하늘의 뜻이며 고을을 지키다 죽어도 가지 않는 것은 의(義)라, 이제 너희에게 잡혀 군명(軍命)을 욕되게 하였으니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느냐? 나에게 어서 속히 죽음을 다오.” 언영(彦英)이 옆에 있다가 눈물을 흘리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이제 우리는 다 살았습니다”하고 울기에 나는 정색으로 꾸짖어 말하기를 “군주(君主)가 욕보는데 신하가 죽는 것은 마땅한 일이거늘 무엇이 아까우냐. 너무 슬퍼하지 말라.” 그들이 주에게 묻기를 “굴에서 내려올 때 투신한 여인은 누구냐?” “나의 서모(庶母)다”하고 주가 울면서 대답했다.

 

왜장들은 서로 돌아보며 “아깝다.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왔어도 네 어미같은 여자는 처음이다.” 하면서 자못 한탄하는 표정이다. 왜들은 나무를 쌓아놓고 그 위에 시체를 얹어 놓고 불질러 태웠다고 한다. 화장(火葬)은 왜(倭) 민족의 예의니 사절(死節)을 찬미하고 예(禮)로서 장사를 지낸 듯하다. 적장은 끝끝내 우리가 굽히지 않을 것을 짐작하고 곧 죽이지는 않을 듯하다. 아마 우리를 저희들 대장(大將)에게 맡길는지 모른다.

 

저녁밥이 왔지만 먹지 않았다. 뜰에는 여염집에서 가져온 재목으로 우물 정(井) 자로 10여 칸 방을 만들고 포로로 잡힌 남녀를 묶어서 넣는다. 그 안에서는 수직(守直)하는 왜(倭)가 다시 더 든든히 묶어서 꼼짝 못하게 하였다. 몹시 아파 참을 수가 없다. 양팔과 목이 졸려 몸을 굽혔다 펼 수도 없고 근처에서는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8월 12일 (맑음)

 

아침밥을 주었으나 먹지 않았다. 동상방(東上房) 부엌 빈 곳에 우리(柵)를 만들고 옮겨 가두었다. 우리 세 사람은 맨땅에 앉아있어 몹시 찼다. 마침 방 시렁에 호피(虎皮) 방석이 깔려 있었다. 주가 직왜(直倭: 당직하는 왜병)에게 사정을 해서 내게 깔아주었다. 오른편 칼 맞은 쪽 소매가 무거워 팔을 들 수가 없다. 한 왜병이 냄새를 맡고 칼로 베어 소매를 가르니 갇쳤던 피가 마치 병에서 물이 쏟아지듯 한다.

 

낮에 통역하던 왜인이 주를 불러 적괴 앞에 세우고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주가 대답했다.

“내 이름은 한신(漢臣)이다.” 하니

“너는 문자(文字)를 아느냐?”

“나는 글을 배우지 못했다.”

왜인은 다시 순순히 달래면서 말하였다.

“너는 상관의 아들로서 용모도 곱고 훌륭한데 어찌 문자를 배우지 않았다고 하느냐? 네가 만약 문자를 안다면 죽이지도 않고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을 줄 것이며 좋은 칼과 말(馬)을 주어 후대(厚待)할 것이며 만약에 우리를 따라 일본(日本)으로 가게 되면 높은 벼슬도 시켜 오래도록 부귀를 누리도록 할 터이니 오죽 좋으냐?”

그러나 주가 단호히 말하기를,

“부자 인륜(父子人倫)이 사지(死地)에 처해서 어찌 나 혼자만이 편하기를 바라겠는가? 혹 나의 부친을 석방한다면 내가 여기 있어 당신들의 말을 따르겠지만 아버지가 죽고 자식인 내가 홀로 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하니

“네 아비가 지금까지 산 것도 다 너 때문이다. 그렇다면 네 부친과 함께 네가 일본으로 가면 어떠냐?”

주는 다시 말하여

“나의 부친은 노부모가 계시고 형제도 없으므로 따로 노부모를 봉양할 사람이 없어 떨어지시지 못하고, 더구나 병에 이미 지쳐서 가시지 못할 터이니 즉시 석방하라. 그렇게 하면 나는 틀림없이 따를 터이니 의심치 말라” 한즉

“좋다. 그렇다면 너의 부친의 양친에게도 통서(通書)를 해서 온 가족이 함께 일본으로 가면 더욱 좋지 않으냐” 하니 주는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서럽게 울 뿐이다. 왜인이 다시 위로하며

“너무 울지 말아라! 네 말은 모두 부모를 위한 지극한 효성에서 우러나는 말이니 한 마디가 그르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는 지필(紙筆)을 꺼내 사유(事由)를 기술(記述)하라 하니 주가 붓을 들고 “우리 아버님은 원래 병환이 잦으시고 이번 검상(劍傷)으로 인하여 죽이지 않더라도 저절로 돌아가실 터이니 어서 빨리 아버님을 석방한다면 나는 여기서 묵(留)겠다”고 쓰니 왜인이 그 글 뜻을 글을 아는 자로부터 듣고서

“너의 뜻을 잘 알았으니 너의 뜻을 우리 대장(大將)에게 품(稟)할 터이니 너무 울지 말아라”고 했다.

 

주의 글을 보고 난 후부터는 결박을 풀어 주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주를 더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노비 언진이, 피발이, 지봉사(智奉事), 지대성(智大成), 우응민(禹應緡) 등의 가속(家屬)과 관비(官婢) 수 명이 뜰 안의 우리에 묶여 앉아서 간간이 나를 건너다보면서 울기만 한다. 나도 눈물이 흘러 양 볼을 적시는 줄도 모르고 마음이 심란하여 종일 기대어 누워 혼수상태에 의식이 오락가락 할 뿐이다. 저녁밥이 왔으나 먹지 않았다. 우리(柵) 가운데 곳곳에서 여인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밤새도록 들린다. 아마도 왜병이 밤을 타서 여인네를 침범하는 모양이다. 비통한 광경이다.

 

8월 13일 (흐림)

 

아침이 왔으나 먹지 않았다. 왜병은 “왜 아침을 먹지 않느냐?”고 하기에 나는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러 먹으면 무엇 하느냐. 다만 죽기를 바랄 뿐이다.”고 했다. 낮에 왜적의 괴수가 부하를 데리고 우리가 싸웠던 굴 안을 순시하고 와서 참으로 천험(天險)의 요새라고 했다. 왜진(倭陣)이 이진할 때 상인(常人)들은 모두 풀어 주었다고 한다.

 

출입하는 관리들에게 지필을 얻어 집으로 보내는 서찰을 만들어 노비 언진(彦眞)을 시켜 부치려 하니 왜병이 눈치 채고 가까이 오지도, 말도 못하게 한다. 나는 언영(彦英)을 보고 “상인(常人)들은 모두 놓아 주는데 너만은 풀어주지 않는 것은 네가 아마 서울 양반인 줄 알고 그러는 모양이다.” 하니 언영이는 “저는 굴 안에서 활을 쏘며 싸웠으니 필시 미워서 놓아 주지 않는 듯 합니다.” 하며 울먹였다. 가련하기 짝이 없다. 관리 손수천(孫壽千), 이응수(李應壽), 이순희(李順希), 이붕(李鵬), 관노(官奴) 명천(命千)이, 몽현(夢賢)이가 또 포로로 들어온다.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심신(心身)이 곤하고 혼란하여 종일 깊은 잠에 빠져 저녁밥도 주는 것을 먹지 않고 몇 번이나 목을 메어 죽을까 하였으나 주가 잠을 자지 않고 지키고, 한번은 틈을 타 목을 메었으나 언영(彦英)이가 풀어서 나는 기절하였다가 소생하였다.

 

근처에 민가(民家)를 헐어서 그 재목으로 횃불을 놓고 우리(柵) 안에는 기름등을 달아 낮과 같이 밝게 하고 수직(守直)하는 병졸이 서로 교대 해가며 한 시각도 어김없이 감독하고 살피어 어쩌다 잠이 들면 흔들어 깨우며 자살할까 겁을 내고 있다. 그들 수직은 밤마다 총을 들고 교대하는데 그 의식이 자못 정연엄숙(整然嚴肅)하다.

 

8월 14일 (맑음)

 

아침에 통역하는 왜인이 지나가기에 내가 불러 “왜 죽이지 않느냐, 속히 죽는 것이 원이다”라고 했다. 통역 왜인이 말없이 가더니 적괴에게 내 말을 한 모양이다. 되돌아와서 적괴의 말을 전하는데,

“죽이고 살리는 것은 제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서울에 주둔한 천장(天將)에게 품(稟)한 후에 그 결정에 따라서 처결한다.”고 한다.

“서울은 아직도 먼데 그동안 어찌 구차하게 살겠는가. 속히 죽여 달라.”고 하니 왜인은 화를 내면서 돌아갔다.

 

저녁밥이 왔으나 먹지 않았고 언영이는 낙일귀심절(落日歸心絶)이라는 옛날 시 귀절은 지금 우리를 두고 읊은 듯하다기에 나는 너가 옛 시를 취하나 나는 “당지소무절(當持蘇武節)은 막학이릉심(莫學李陵心)”이라고 평했다. 언영이는 참으로 나으리 말씀에 감복(感服)치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밤은 깊어가고 밤 수직을 서는 왜병은 자는 듯하다. 불빛도 희미해진다. 나는 가만히 몸을 움직여 부뚜막에 올라서 새끼를 시렁에 메고 목에도 두어 겹 감은 후 부엌으로 떨어졌다.

 

그때 주가 내 목이 조여 키득키득하는 소리에 잠이 깬 모양이다. 급히 일어서서 새끼를 풀으니 나는 그대로 쓰러졌다. 소란한 소리에 수직하는 왜병이 등불을 들고 들어왔으나 나는 그대로 누웠고 언영(彦英)이와 주가 묵묵히 앉았으니 한번 돌아보고는 코를 킁킁거리며 물러갔다. 나는 두 눈알이 튀어나오고 목구멍에서는 피가 흘러 나왔다. 잠시 동안 질식이 되었던 모양이다. 주는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며 그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8월 15일 (비)

 

아침밥이 왔으나 먹지 않았다. 통역하는 왜인이 정선(旌善) 관리를 불러 “너는 속히 가서 곡식을 거두어 마치도록 하라. 10월에는 두어 번 정도 해야 할 것이다” 하고 본군관리(本郡官吏)를 불러 촌사람들을 속히 불러 모으라고 했다. 관속(官屬)은 벌써 여기에 들어왔고 겨우 5~6명이 올 뿐 그 외에는 다시 보이지 않는다.

 

낮이 되었다. 양볼 위로 처련한 눈물이 샘물 솟듯 흘러내렸다. 언영(彦英)이가 나를 위안하는 말로 “저놈들은 우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고 하오니 눈물을 거두소서” 한다. 나는 “성주(聖主: 임금)께서 몽진파천하시고 늙으신 부모님께서는 난리에 쫒기면서도 자식을 생각하고 슬퍼하실 텐데, 지금의 내 처지에서 어찌 눈물이 없겠느냐?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죽음보다는 의(義)가 중한 것이다.” 하고 아들 주를 어루만지며 “너 아직 나이 어려서 장가도 보내지 못하고 또 잘 가르쳐서 국가에 좋은 재목이 되기를 바랐더니 이렇게 끝장이 나는구나.” 하고 탄식하였다. 주가 목메인 소리로 “목숨이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사온데 어찌 아버님께서는 자식 때문에 상심하십니까? 저는 다만 아버님께서 호구(虎口)만 벗어나신다면 저 한 몸이 적들의 칼에 처단된다 한들 한이 없겠습니다.” 하며 부자(父子)가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우리나라 양반집 아들로 보이는 17~18세의 소년이 벌써 삭발을 하고 왜인들의 옷을 입고 우리(柵) 앞에 와서 “가련하기 그지없다”고 한다. 나는 그들에게 “왜들은 언제 나를 죽이겠다고 하더냐?” 하고 물으니 그 소년의 답이 “내일 대진(大陣)이 옮길 때 목을 자를 것이고 저 아이(아들 주)는 왜장이 사랑하니 죽이지는 않을 것 같다며, 오늘밤이 이 세상에서 부자영별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 했다. “나는 속히 죽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다.” 대꾸하니 주가 목이 메어 울부짖으며 하는 말이 “차라리 저도 한 칼에 죽을지언정 저 혼자만은 살지 않겠습니다.” 한다. 언영(彦英)이는 “그것이 모두 명(命)이니 어떻게 하십니까?” 한다. 나는 “살아서 부모님과 가족들을 다시 보지 못하겠구나” 하며 서로 슬픈 문답(問答)이 오가는 즈음에 왜병들의 무리가 큰소리로 지껄이며 들어오기에 미쳐 그 소년의 성명을 물을 겨를도 없었다.

 

통역 왜인이 주를 이끌고 서상방(西上房 적의 부장(副將: 源介綠之)) 앞에 세우고 묻되, “너는 지금부터 부장님을 친근히 모시고 여기서 자고 여기서 놀게 할 터이니 다른 마음을 먹지 말라” 한다. 주는 아비는 죽이고 자식은 살린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부친이 병이 중하시기 때문에 잠시도 떨어질 수 없습니다. 병가(兵家)께서는 효제(孝悌)를 위주(爲主)로 하거늘 아비를 죽이고 그 자식의 마음을 얻으려 함은 불가한 일이오니 만약 내 아버지를 죽이신다 하면 저도 함께 죽을 뿐입니다” 하니 왜적의 무리는 서로 뭐라고 오래 얘기한 끝에 주를 내보내며 “네 아비의 곁으로 가라. 그러나 때때로 이곳에 와도 무방하다.”고 했다.

 

저녁에 들으니 선봉을 선 왜병은 이미 어제 둘로 나뉘어 영월(寧越) 주천(酒泉)으로 향하고 내일 대군이 출발할 즈음 우리를 죽인다 하니 마음이 동요됨을 억제하지 못할 때 손수천(孫壽千)이 뜰 앞을 지나가기에 불렀으나 왜병이 겁나서 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잠시 섰기에 물으니 “오늘 밤에는 혹 도망가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곳곳에 복병을 시켜놓고 도망치는 사람은 잡히는 대로 죽인다.”고 한다.

 

“나는 속히 죽는 것이 내 원이니 나갈 것이다” 하니 수천(壽千)의 말이 “산으로 올라간다 한들 누가 따라 붙겠습니까? 아무쪼록 무사히 빠져 나가십시오”한다. “그래 내가 무사히 빠져 나간다면 너의 덕인 줄 알겠다.” 하니 언영(彦英)이가 “두 분만이 도망쳐 나가시면 그 해가 저에게 미칠 것입니다.”하며 두려워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언영(彦英) 때문에 우리만이 살자고 도망할 수도 없었다. 수직하는 왜병이 바뀌어 감시가 더 심하므로 계획도 하기 전에 저녁 때 뭇 왜병이 깃발과 창으로 대열을 정비하여 출행(出行)하려 한다. 이때 심신이 막막함을 참으로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8월 16일 (맑음)

 

새벽에 밥을 주었으나 먹지 않았다. 파수를 서는 왜병의 무리가 먼저 아들 주를 끌어내어 목자물쇠를 가지고 온 왜병이 나의 목을 걸어 잠그려 한다. 자물쇠는 적고 목은 커서 잠글 수가 없다. 큰 소리로 항거하니 그 왜병이 상사에게 그 사실을 고한 모양이다. 그 왜병이 다시 돌아와서 나와 언영이를 줄로 묶었다. 나와 언영이가 대문을 나가니 주는 벌써 말을 타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에게도 말을 타라고 한다. 나는 전에 깔던 방석을 말안장에 올려놓으니 적이 못하게 한다. 그러나 듣지 않고 완강히 버티니 하는 수 없는 모양이다. 말은 적은 새끼말로서 십오리(15里)를 가는 동안 몇 번이고 떨어지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파수를 서는 왜병 둘이 따르고 또 한 명의 왜병은 검은 헝겊으로 얼굴을 가리고 붉은 갑옷을 입은 살찌고 잘 가는 말을 타고 앞에서 가며 우리를 거느리고 지껄이니 마치 그 소리가 경을 외우는 소리 같아 못 알아듣겠다. 그놈은 때때로 돌아보며 구박하니 말은 잘 가지 않고 곤욕스러움을 말할 수도 없고 괴롭기가 그지없다.

 

약수(藥水)를 지나서 돌밭 길 험한 곳에 이르니 새끼 말은 꿇어 엎어지고 해서 몇 번이나 내동댕이 쳐졌다가 일어나는 바람에 오른쪽 발이 말 등자(鐙子)에 걸려 미처 빼지 못하고 말의 배 밑에 깔려 칼날 같은 돌에 찔리는 바람에 발가락이 몹시 아프다. 더구나 몸을 얽어 메어 자유롭지도 못하다. 파수지기 왜병이 와서 누운 말을 차서 일으키니 또 다른 말이 길을 다투어 가느라고 또 밟는 바람에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얼마 후 소생하니 다른 말로 바꿔 주는데 왜가 타던 말이다. 주인놈이 흉악하니 말 또한 흉악한 모양이다. 횡포하고 범같이 무서웠다. 응암굴(鷹岩窟)을 바라보니 굴 절벽에서 떨어지던 곳이 물을 사이에 두고 보인다. 강녀(康女)가 몸을 날려 바위 밑으로 투신하던 곳이다. 눈에 보이듯 선하다. 그 때를 회상하니 마음 아프기 그지없다. 저 유유히 흐르는 강물도 애통함을 알리라.

 

마침 주가 탄 말이 뒤따라 왔다. 서로 만나니 반갑다. 말에서 떨어진 얘기를 했더니 주가 말에서 내려서 상처를 보려 하였으나 따라오던 왜병이 말을 달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통에 서로 말도 나눌 수 없었다. 주는 민망하고 놀라서 그저 흐느껴 울기만 했다. 겨우 재를 넘었다. 한 무리의 왜병이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와서 우리를 노려보며 노발대발하며 말을 달려 우리 말에게 부딪치게 한다. 우리를 괴롭히려고 하는 짓들이다. 상한 발이 혹은 길옆의 돌에 부딪치고 나무에 스쳐서 몹시 아파 내 몸이 내 몸인 줄도 모를 지경이다. 또 피는 끊임없이 흘러 소매를 적시고 이제는 실낱같은 목숨만이 붙어 있을 뿐이다. 적은 더욱 말을 달려 마치 날아가는 듯 했다. 종(奴) 희수(希守)도 머리를 깍고 왜복(倭服)을 입고 깊 옆에 말을 타고 섰다. 서로 눈이 마주쳐 울기만 하고 지나쳐 다시 보지 못하였다.

 

고덕(古德)고개 (지금의 원동재)에 이르니 길이 좁고 깊어서 사람과 말이 서로 충돌하고 아우성이 처절(悽絶)해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고개를 넘으니 고개 밑 길 옆에 벌써 하나가 먼저 와서 땅을 파고 솥을 걸어 국(湯)을 끓이며 누워있다. 여기는 왜병들이 점심 식사를 하는 곳이었다. 연평역(延平驛: 지금의 영월군에서 북쪽 30리에 위치해 있는 북면 연덕리)을 지나니 영월(寧越)이 멀지 않다. 행군을 더욱 재촉한다. 몹시 목이 마르다. 물을 얻어먹을 수가 없다.

 

노산묘(魯山廟: 지금의 장릉) 앞에 이르러 왜병들은 잠시 쉬면서 말에게 물을 먹이려 하였다. 너무 탁해서 나는 먹을 수가 없었다. 왜병의 무리가 나를 부축하여 말에 올려놓았다. 노산묘(魯山廟: 端宗陵)를 돌이켜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셨다. 파수지기 왜병이 나와 언영(彦英)이를 끌고 창고 앞에 이르니 한나절이 넘었다. 주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저녁때가 되니 파수지기 왜병이 우리에게 밥을 준다. 며칠을 계속 굶고 시달려서 허기가 심하다. 한 숟가락 입에 떠서 넣으니 돌이 두서너 개가 되고 쌀겨가 반이나 섞였다. 물에 말아서 겨우 먹었다. 매식(每食)에 밥은 4~5홉 정도고 간장과 무잎파리 한 두 쪽 뿐이다. 혹 더운 물과 찬물도 준다. 항상 식사는 이뿐이다.

 

그러나 괴수들은 달랐다. 깨끗하고 간편하다. 한 왜병이 작은 소반에다 종자(鍾子) 모양을 한 붉은 칠을 한 그릇을 적 괴수 앞에 나란히 놓고, 또 한 명의 왜병이 큰 나무그릇에 흰 쌀밥을 퍼담아 유지(油紙)로 덮어오면 그것을 받아 왜 괴수 앞에 가서 빈 나무공기에 나누어 놓아 올리면, 괴수가 먼저 들고 서열에 따라 차례로 들고 먹는다. 그 다음에 국과 채소가 갖추어지고 바다 생선을 구운 반찬이 나온다. 나무공기로 4~5개 정도씩 먹는다. 그리고, 탕(湯)과 따뜻한 물이 나온다. 낮에는 수박 몇 조각과 밤(栗)도 얼마쯤 먹고 고기와 술을 먹는 것은 보지 못했다.

 

포로가 된 어떤 이가 길가에 소가 죽었는데 칼로 가죽을 헤치고 고기를 끊어먹으려 하니 왜가 지팡이로 등을 치며 크게 성을 내고 침을 뱉어 못 먹게 한다. 아마도 왜들 풍속에는 소고기 먹는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다. 적들은 밤이 되니 미리 만들어 놓은 나무우리(木柵) 안에 우리들을 가두었다. 본군(本郡)에서 포로로 잡혀 온 사람이 많았다. 밤새 도망칠 작정을 하고 주위를 살피니 곳곳에 왜병을 매복시켜서 다만, 허망하게 바라볼 뿐이다.

 

8월 17일 (맑음)

 

오후에 잡혀 오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중에서 묶여서 오는 사람 하나가 용모가 준수하고 아름답다. 왜적은 영춘현감(永春縣監)인줄 오인하여 우리들과 함께 가둔 모양이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저는 사산감역(四山監役) 이사악(李士岳)이라고 합니다.” 나는 일찍이 그 이름을 듣기는 하였으나 보기는 처음이다. 서로 잡고 울기만 하고 다른 말은 나누지 못하였다. 몹시 곤하고 상한 발이 아파서 그대로 쓰러졌다. 저녁과 아침은 주지 않았다. 주가 포로로 되어 들어오는 사람에게서 무를 하나 얻어왔다. 그것을 씹으니 목과 장(腸)을 약간 축일 수 있었다.

 

8월 18일 (맑음)

 

아침에 이감역(李監役)은 나의 자(字)를 묻는다. 나는 “이 처지에 자(字)는 물어 무엇 하는가? 그대와 나는 같은 녹을 먹는 신하로서 죽지 못하고 다만 며칠 동안이나마 이렇게 살며 하늘과 해를 보게 됐다.” 하니 이감역(李監役) 하는 말이 “적은 우리를 죽이지 않고 생포를 기화로 해서 저희 나라에 공을 자랑할 뜻인 듯하다.” 하며 “귀윤(貴胤)을 사랑하기 보배처럼 여겨 어른(尊丈)에게는 참(斬)을 유예하는 듯하다” 하기에 나는 “의(義)가 아닌 행위로 사는 것보다 의로써 죽는 편이 나으니 형세를 보아가며 죽을 곳을 얻을 뿐이다.” 하고 했다. 소무(蘇武)나 문산(文山)도 충신의사(忠臣義士)이지만 형세가 어려우니 하는 수 없지 않은가? 하며 서로 손을 잡고 울었다.

 

그때 한 노구(老嫗)가 무를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주었다. 기갈이 심하던 차에 씹으니 잠시 기갈을 면할 수가 있었다. 그 늙은 할미는 충주(忠州) 북촌(北村) 사람으로 이름은 덕비(德非)라고 한다. 군리(郡吏) 엄수일(嚴守一)이 불콩(黃太) 볶은 것을 두어 되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주었다. 수일(守一)이는 왜들 숙소에 출입할 때 관청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했다.

 

주는 돌아앉아 군기철두(軍器鐵頭) 쇠로 콩을 부수고 있었다. 혹 탈출을 하게 되면 그때 가서 기근을 면할 먹을거리로 장만하는 것이다. 또 아까 늙은 할미 덕비에게 부탁해서 조그마한 주머니(袋)를 네 개 지어 달라고 하여 콩, 무, 밤 등을 넣어 네 사람이 나누었다. 평창 관리 4~5명이 왜적에게 붙어 복역하는 것을 보았다. 심히 분하나 어쩔 수가 없었다.

 

8월 19일 (맑음)

 

낮에 영월(寧越) 선비인 고종원(高宗遠), 종길(宗吉) 형제가 잡혀 왔다. 먼저 내 앞에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공께서 어쩌다 이렇게 되었오.” 한다. 나는 “평생에 악을 쌓은 게 많아서 골육(骨肉)과 떨어져 부자(父子)와 함께 호랑이굴에 들어왔으며 늙으신 아버지께서는 올해 연세가 71세인데 난리에 쫓겨 어디에 계신 줄도 모르니 나는 속히 죽는 것이 원이나 그대로 되지 않고, 적의 칼날이 머리에 떨어질 때 내 소실 강녀(康女)가 나를 덮어 살리고 그는 죽고 여기에 잡혀 온 후는 왜들이 내 아들 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오늘까지 나를 죽이지 않았으나 내일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오.”라고 했다. 고군(高君)은 “소무(蘇武) 문산(文山)같은 분이 모두 악을 쌓아 그런 것이 아니고 다 운명이로소이다. 공의 처지도 비슷합니다. 저도 팔십노부(老父)가 난리에 쫓기시어 방금 산곡(山谷)에 계시고 아우 종경(宗慶)이가 의병(義兵)을 불러 모으다 비명(非命)에 죽고 처는 나를 살리려다가 응암굴에서 죽었으니 처지가 어찌도 그리 흡사합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영제(令弟) 종경(宗慶)의 죽음을 생각하면 슬프기 한이 없고 지금 생각하면 나의 과실(過失)도 적지 않다고 하리다.” 하니 고군(高君)의 말이 “내 동생의 죽음은 비록 애매하다고는 하나 본읍(本邑)에서 구명(救命)의 첩(牒)이 영문(營門)에 도달하기 바로 직전에 이미 형이 집행되었다고 하니 그 어찌 운명이라고 아니할 수가 있으며 공의 과실이라고 탓하겠습니까?” 한다.

 

고종원(高宗遠)은 횡성(橫城)의 세족(世族)으로서 영월(寧越)로 이거(移居)해서 왜변(倭變)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그 아우 종경(宗慶)이가 고향마을(鄕中)에 통고해서 병사를 모으니 온 마을이 모두 종경(宗慶)의 문무(文武) 재주를 추앙해서 그를 우두머리로 삼으니 (鄕兵)이 수백 명이라. 장차 홍천(洪川), 영춘(永春) 사이의 험한 곳을 거점(據點)으로 하여 왜군의 진로를 차단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도백(道伯: 지금의 도지사)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의(義)를 장하게 여겨 흥원진(興原陣)이 약함을 보고 영군(營軍) 5백 명으로 하여금 흥원(興原)을 도우라 하고 이 뜻을 흥원진(興原陣)에 명령을 하였는데, 영군(營軍)이 중도에서 그만 흩어지는 바람에 시기를 놓쳐 버렸다. 흥원진장(興原陣將)은 이 사실을 도영문(道營門)에 보고하니 영문(營門)에서는 종경(宗慶)이 군율(軍律)을 범하였다고 본군(本郡: 평창군)에 이송하여 행형토록 지시했다.

 

종경이 처음에는 비록 모병(募兵)한 공과 의가 있다 해도 영문절제(營門節制)에 부진망진(赴陳亡陳)하고 실기(失期)를 하였으니, 사형을 집행하라는 것이다. 그때 마침 나도 관직을 겸하게 되어 군(郡)에 당도해 보니 온 읍내에 많은 사람들이 군청 뜰에 가득 모여 진정과 호소를 하는데 종경(宗慶)에게는 가상(嘉尙)한 의는 있을지언정 죽일 죄는 없다고들 하며, 영진(營陣)이란 오늘 모였다가 내일 흩어진다고 해도 종경(宗慶)이 사율(師律)이 엄하지 못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군(軍)의 신망을 잃어서 그런 것도 아니며 그의 재주와 혈기는 가히 한 구석을 막을 수 있으니 지금 같이 나라가 위급한 때에 죄 없는 의사를 죽인다면 원통하고 아깝다고들 하였다.

 

그때 마침 이곳에 피란을 온 완산군(完山君) 이축(李軸)과 전 부사(府使) 윤면(尹勉), 선전관(宣傳官) 신경등, 교관(敎官) 홍식재(洪湜在) 등과 함께 앉아서 모두 말하기를, “이 사람은 먼저 창의(倡義)를 했으니 가위(可謂) 쓸만한 인물이니 석방하여 국가에 이롭게 함이 옳다.”라고 하니 나도 이 뜻을 위에다 보고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후에도 오래 동안 회신이 없어 수령의 도리로 윗 사람의 명을 어기고 오래 기다릴 수 없어 부득이 형을 집행하였다. 그러나 사형을 집행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도백(道伯)으로부터 형을 정지하고 무죄 석방하라는 첩문(牒文)이 왔으니 놀랍고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내가 “애매하다” 한 점이 바로 그런 뜻이다.

 

고군(高君)이 주를 보고 한숨 지며 하는 말이 “충효의 가문에는 기(氣)가 서로 통하는 것이니 하늘이 반드시 도울 것이며 왜들도 해하지 못할 것이다.” 한다. 나도 대꾸하여 “고형(高兄)도 역시 이 나라 사직에 은혜가 있고 의병을 돕다가 이루지 못한 한을 품고 죽은 동생의 의가 형제간에 서로 통할 것이니 하늘이 만약 우리 부자를 도우신다면 고형(高兄) 형제분도 도우실 것입니다.” 하고 서로 위로하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어갔다.

 

“나의 종조부(從祖父) 익장공(翼莊公)을 생각한다면 삼도(三道)의 감찰사(監察使)로 그 이름이 온 지방에 진동하여 왜구들이 스스로 겁을 먹고 접근하지 않아 임금께서도 교지(敎旨)로 지용(智勇)을 겸비한 인물이라고 칭찬하셨는데 이제 그 자손이 오히려 왜노(倭奴)에게 잡혀 와서 땀을 흘리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며 흐느껴 우는 지라 무슨 말로 위로할 줄을 몰랐다.

 

8월 20일 (맑음)

 

평창(平昌) 의시사(擬是寺) 스님도 묶여 들어 왔으나 조금 후에 놓아 주어 돌아갔다고 한다. 엄수일(嚴守一)에게 종이와 붓을 찾아 오라고 하니 어디 두었는지를 모른다. 조금 후 찾아서 점아(點兒: 선생의 長者로서 영천(榮川) 고향에서 선생의 부모님을 모시고 계셨음)에게 겨우 몇 자를 적으니 흐르는 피가 종이를 다 적신다. 늙으신 부모님께서 보시고 비통해 하실 일을 생각하니 망극(罔極)하고 병든 처(선생의 本夫人)가 볼 때는 더욱 가슴이 아프리라 생각하여 그대로 붓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주가 붙들어 일으켰다. 왜군은 전부 글자를 모르는 모양이다. 우두머리들 앞에서 1~2명이 겨우 옮겨 쓰나 역시 모르는 모양이다. 글을 아는 사람을 존경하고 귀히 여길 줄은 안다. 혹 문자(文字)를 써서 나에게 보이나 글씨 모양이 되지도 않고 또 글의 뜻이나 이치가 통하지 않는다. 나머지 졸개들은 문자에도 소경이 귀머거리다. 혹, 편지나 일기를 써도 신기하다는 듯이 보고 웃기만 하고 의심하지 않는다.

 

주가 기둥 모서리에다 일부러 머리를 박이 피를 흘리면서 “늙으신 아버님께서 오랫동안 묶여 계셨고 또 병이 날로 더 심하여 목숨이 오늘 내일 하시니 원하오니 속히 풀어드려라.” 하며 눈물이 비오듯 하니 뭇 왜인들이 함께 나를 일으키며 그 효성이 참으로 가상하다 하여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잠시 결박을 풀어준다.

 

통역하는 왜인이 본군(本郡)에서 난 공물(貢物) 목록을 가져와서 마루 위에서 엄수일(嚴守一)에게 베껴 쓰라고 명령한다. 엄수일이 울면서 괴로워한다. 왜는 본 목록을 가져가지 않고 베껴 쓰게 하겠냐고 물으니 왜인이 본책(本柵)은 본군장(本郡將: 군에 남아서 군을 다스릴 장수)에게 주고 사본은 자기가 가지고 가기 위함이라고 한다. 수일(守一)이 베껴 쓰기에 괴로워 그것은 옛날 것이어서 모두 못쓰는 것이니 굳이 베껴 쓸 필요가 없다고 여러 번 강조하니 그제서야 책상 위에 올려 놓게 했다. 명령을 통역하는 왜인은 자기가 대마도(對馬島) 사람이라 하며, 평상시에 자주 우리나라에 내왕했다고 한다. 우리말이 겨우 되며 열 마디 중에 겨우 한두 마디 알아들을 정도였다.

 

적의 괴수가 명령하여 글을 아는 왜인을 시켜 아들 주에게 우리나라 임금의 이름 자를 써서 보이면서, “이것은 어느 사람의 이름인가?” 하고 묻는다. 주가 답하여 “아들이 아버지의, 신하가 임금의 함자를 어찌 말하겠는가?” 하니, “너의 왕(王)은 나라를 버리고 멀리 도망갔다.” 한다. 주는 “국운(國運)이 불행하니 사세부득(事勢不得)이다.” 했다. 또 김성일(金誠一)의 명(名)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분은 내 아버지의 벗이다.” “지금은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느냐?” “왕명을 받들어 일본에 갔다 오셔서 지금은 왜적 정벌의 임명을 받으시고 영남에 가 계신다.” “이덕형(李德馨)은 어디 있느냐?” “임금님을 모시고 피난 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성일, 이덕형 같으신 분은 참으로 너희 나라의 어진 재상들이다. 그런 사람이 몇이나 있느냐?” “내가 아는 분은 두 분이시지만 그 외의 장수와 재상들이 수없이 많다.” 주가 당당히 말하니, 적 우두머리는 머리를 끄덕일 뿐이다. “너희 나라에서 명(明)나라에다 원병을 청하여 우리를 칠려고 하나 명(明)의 군사가 얼마든지 많다고 해도 나는 겁나지 않는다.” 했다. “원래 명나라와 우리는 한 집안 같으니 걱정을 같이 한다. 지금 천자(天子)께서 천하의 병을 일으켜 해뜨는 곳을 치려고 한다.”고 주가 말하니 왜병들은 서로 돌아보며 크게 웃고 한 왜병은 늘어진 치마같은 옷을 오금까지 걷어 올려 보이면서 겁나지 않는다고 약을 올렸다.

 

8월 21일 (맑음)

 

무당(巫女) 점바치도 잡혀서 끌려왔다. 죽고 사는 것을 점친다고 야단이다. 경진(景鎭: 李士岳의 字)이가 누워서 울고 있다가 점친다는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 우리 네 사람의 길흉(吉凶)이 어떠냐고 하니, 무녀가 좀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 길(吉)하다” 하며 쌀알을 반상 위에 던지고 가르며, “묘문(墓門)이 없다.”고 한다. 주가 물으니 역시 좋다고 한다. 내가 맨 나중에 물은 즉, 역시 좋다고 하기에 “네 사람이 모두 호랑이 입에 들어 왔는데 무엇이 좋으며, 만약 한두 사람이 탈출을 한다면 모르지만 네 사람이 모두 좋다니 믿을 수 있겠는가?” 한즉, “자기를 못 믿을진데 5~6일 후 두고 보면 아실 것”이라고 한다. 서로 웃고 반상을 치웠다.

 

8월 22일 (맑음)

 

경진(景鎭)이는 돼지 가죽으로 귀를 가리고 자주색 명주로 긴 옷을 해 입고 있었다. 왜들이 양반인 줄 알면 죽이기 때문이다. 상놈의 옷으로 바꾸어 입었다. 또 명주옷은 무명으로 바꿔 달라고 덕비(德非)에게 이야기 하니, 덕비는 “왜 하필 상놈의 옷으로 바꾸어 입어야 합니까?” “왜들이 상놈은 놓아주고 양반은 그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면서 덕비가 옷을 구해다가 바꾸어 주니 경진이는 몇 번이고 고맙다고 한다. 군데군데 깁고 남루하기 짝이 없지만 그 뜻만은 신중한 것이다.

 

나도 실은 벗은 것이나 다름없다. 떨어진 명주와 무명쪽 옷으로 겨우 몸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평창군 관리들을 불러 “너희들 중에 누구든지 너희 옷을 벗어 나를 구할 사람이 있다면 뒷날 나의 집에서 그 뜻을 갚을 것이다.” 했다. 그러나 평창 관리들은 나의 말에 응하는 이가 없고 옆에 있던 어떤 아낙네가 가련히 생각하고 “제 보따리 속에 남편의 떨어진 저고리와 중의(바지)가 있긴 하나, 너무 남루합니다.” 한다. 주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빌려 달라고 하니 여인은 아까워하지 않고 바로 내어주었다. 짧은 바지나마 살을 가리기에는 족하다. 여인은 “저고리는 너무 떨어져서 감히 내어 놓지 못한다” 하기에 나는 무관하다고 했다. 저고리도 내놓았다. 그리고 버선도 주었는데 버선이 커서 아픈 발이 신기에는 아주 알맞았다.

 

여러 번 감사하다고 말하고 그 이름을 물은즉 석개(石介)라고 한다. 그 여인의 남편은 언복(彦福)인데 적지로 심부름을 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전라도 영광(靈光) 사람으로 수년 전에 얻어 먹으며 여기를 왔다고 한다. 저고리와 바지를 갈아 입고 버선도 신고하니 찬찬히 옷을 입고 띠를 매는 것보다 오히려 편하다. 옆에 있는 경진에게 나도 옷을 얻어 갈아입고 그대도 옷을 얻어 갈아 입었으니 천만다행이라 했다. 또 여인이 지금 내 앞에 앉았으나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고 뒷날 죽을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후 평창 상호장(上戶長) 이응수(李應壽)를 불러 종이와 붓을 얻어 입은 은혜를 적어 집에 전하기로 하였다.

 

주와 손을 잡고 울기만 했다. 저녁에 들으니 왜적들은 내일 주천(酒泉) 아니면 제천(堤川)으로 떠나리라 하지만 확실치 않다. 그래서 평창 관리를 불러서 말하였다. “내가 지금까지 죽지 않았으니 원주(原州)에 가면 나를 죽이는 것이 틀림이 없으니 내 서찰을 속히 나의 집으로 전하라. 그러면 내 자식과 종이 나의 시신을 거두어 갈 것이다.” 하니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지체하지 말라고 당부만 하고 강절부(康節婦) 시체는 이미 너희들 땅에 버린바 되었으니 이제 뼈골이나 찾는다면 흙으로 덮어 두었다가 우리 집으로 가져간다면 뒤에 너희 군(郡)으로서는 좋은 일이 될 것이다.“ 하니 그 관리들은 말씀대로 따르겠다고 한다. ”내가 포로로 잡힐 때에 관인(官印)과 병부(兵符)를 적들에게 잃을까 염려해서 굴 속의 작은 구멍 안에 숨겨 놨으니 잘 찾아보라.“ 하며 물러갔다.

 

8월 23일 (맑음)

 

밤이 깊어 자정 쯤에 저녁밥이 왔으나 먹을 시간 여유도 없이 우리를 끌어내어 말에 태웠다. 대문 밖에 나서니 다른 진영은 길을 따라 떠나고 있었다. 북내(北川) 앞에 이르니 먼저 온 왜병들이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며 남쪽을 가리켰다가 북쪽을 가리켰다가 손짓을 하면서 무엇이라고 지껄여 댔으나 무슨 말인지 몰라 대답을 못하였다. 우리를 물에 던져 죽일지도 모를 일이다. 거기서 제천(堤川)과 주천(酒泉)의 갈림길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서쪽을 가리키니 왜병들은 물을 건너서 곧 마을을 넘어 고갯마루에 오르니 고개 너머에는 적군이 가득 깔려서 그 수가 몇 천이나 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도망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말에서 떨어져 죽을까 했으나 험한 곳이 없을뿐더러 몸은 밧줄로 꽁꽁 묶어 놓았으니 어찌할 수도 없다.

 

지나가는 길에 나뭇가지를 베어 눕히기도 하고 종이 조각을 달아 놓기도 한다. 아마 먼저 간 사람이 뒷사람에게 길을 알려주는 암시인 듯 했다. 잠시 쉬어서 조금 더 가니 왜병 한 사람이 탕(湯)을 끓이며 누워 있다. 아마도 왜장의 식사를 마련하는 것인가 보다. 길 옆의 촌가(村家)에는 왜들이 깃발을 세워 놓고 큰 솥에 국을 끓이느라 불을 지피는 것도 보았고, 재물을 약탈하느라고 방을 모두 뒤지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간혹 여자를 말에 태우고 가는 자도 있었다.

 

오후에 제천 땅에 이르니 파수지기 왜병이 나와 경진(景鎭)을 선정비(善政碑) 앞에 세워 두었다. 비석은 세 개가 있었는데, 그 하나는 김홍민(金弘敏)의 비석이었다. 그것을 보니 심기가 더욱 불편했다. 왜의 괴수가 들어간 다음 우리들은 구관사에 가두고 저녁을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아니하였다.

 

밤이 저물어 동상방(東上房) 북쪽 빈 뜰에 우리를 만들어 주와 언영(彦英)이와 함께 가두었다. 내일 새벽에 다시 출발한다는 것이다. 언영이 통역 왜군에게 왜 여기서 오래 머물지 않느냐고 했더니 자기들은 강원도 지역 군대이고 여기는 충청도로 자기네가 소관하는 지역이 아니므로 간다고 했다.

 

늘상 행군(行軍) 때에는 포수(炮手)가 앞장을 서고 활이나 화살을 든 병은 하나도 없다. 겨우 있다면 큰 장목궁(長木弓)을 가진 자가 있고 기(旗)는 갑옷을 입은 자가 드는데 갑옷 뒤에는 구멍이 있고 그 구멍에 깃대를 꽂고 깃대를 잡아매어 손에 잡는다. 말을 탈 때도 마찬가지로 한가지다. 갑옷을 입은 자는 가면을 쓰고 큰 칼과 작은 칼을 두 개씩 찬다. 그 외에 칼을 안 찬 사람은 하나도 없다. 큰 짐이나 작은 짐을 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사람은 반 이상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왜 모양새를 하고 있을 뿐이다. 떠들고 웃고 하는 소리가 우리말이다.

 

왜병들의 점심은 모두 배낭 속에 들어 있다. 깃발을 크게 벌리고 행군할 때 보면 위세가 마치 장수가 행차하는 것 같다. 그러나 허세(虛勢)다. 괴수는 보통 옷을 입고 말만 타고 중간쯤 대열에 섞여 간다.

 

8월 24일 (맑음)

 

첫닭이 울 때쯤 아침을 주었으나 먹지 않았다. 왜병들이 우리를 끌어내어 말을 태우고 신림(新林) 땅에 이르니 왜의 괴수가 바로 우리 뒤에 따라오고 있었다. 파수지기 왜병은 우리를 길 옆에 밭 가운데로 데리고 갔다가 왜괴가 지나간 뒤 우리를 그 뒤를 밟게 했다.

 

한 장교가 따라오기에 바라보니 응암(鷹岩)굴에서 나를 붙들던 괴수였다. 비단옷을 입고 그 뒤에 따르던 자를 보니 응암(鷹岩)에서 중추부하인(中樞府下人)이라고 하던 자이다. 신림 땅에서 말을 갈아 태우면서 말안장에 깔았던 방석을 길 가운데로 던져 버린다. 아마 말이 무거워할까 그런가 보다. 경진(景鎭)이를 따르던 왜병이 경진이 말을 빼앗아 타고 경진의 목을 메어 말안장에 붙잡아 매었다. 경진이 끌려가며 엎어지고 혹 느리게 걸어가면 앞서가던 왜병이 몽둥이로 후려친다. 그 괴로워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다.

 

나를 따르던 왜도 내가 탄 말을 뺏으려 했으나 나는 상한 발을 보이고 겨우 면했다. 가리현(可利峴)에 이르니 왜병 몇 명이 주변 방비할 때 사용하던 초막과 울타리를 태우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조방장(助防將) 조대곤(趙大坤)이 지키던 곳이니 어제 앞서 간 왜병들이 우리 군사의 목을 자른 곳이 분명하다.

 

오후에 원주에 들어가니 왜병들은 저희가 먼저 와서 잠시 거처하던 집에서 저녁밥을 주었다. 하도 배가 고파 그대로 먹었다. 조금 후에 거르지 않은 막걸리를 한 사발 주었으나 먹지 않고 되돌려 주었다. 이 술은 주인집에서 추석 제사에 쓰고 남은 술 같았다.

 

황혼녘에 바깥채의 책 보관 창고에 언영(彦英)이를 먼저 가두었다. 창고는 4칸 정도 크기로서 사방으로 책을 가득 쌓아 놔 중간만 비었는데 겨우 네 사람을 수용할 공간이 있었다. 목 자물쇠를 하게 하고 그 끈을 대들보 기둥에다 묶었다. 동쪽으로 나무 창문이 둘이 있으나 마음대로 여닫을 수가 없다. 닫기만 한다면 대낮이 칠흑같이 깜깜할게다. 창밖에는 사다리가 아래 위로 이은 것이 있었으나 우리를 가둔 뒤에는 거두어 버렸다. 비록 변소처럼 지저분하지만 말은 밖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다. 옛말에 “마루 밑에서 3년을 지낸다.” 하더니 오늘의 우리를 보고 하는 말인가 보다.

 

8월 25일 (맑음)

 

아침에 통역하는 왜인이 와서 목사(牧使)는 어디 있느냐고 묻기에, 우리는 이 고을 사람이 아니어서 모른다고 했더니 좋지 못한 얼굴로 들어갔다. 빙허루(憑虛漏) 밑에 임시 방패(防牌)를 하고 사람들을 잡아오는데 꼬리를 달고 있었다. 그 중에 한 노인과 소년을 끌어내어 “목사(牧使)란 자는 어디 있느냐?”고 엄포를 놓는다. “우리는 모르오. 정말 모르오.” 왜병 궁노 한 사람은 칼로 또 한 사람은 창으로 소년의 목에다 대고 다그치니 “영감(令監)님은 영원성(靈原城)에 계십니다.”고 대답한다. “창고 곡물을 어디다 숨겼느냐?” “영원성으로 다 싣고 떠나갔습니다.” 노인의 대답 또한 소년과 같으니 소년의 어머니와 노인의 처만 가두고 두 사람에게 배자(牌字)를 써 주면서 영원(靈原)에 가서 목사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고 이속(吏屬)들을 불러오라고 하며 그들을 영원성으로 보냈다.

 

적의 우두머리 2명은 동상방(東上房)에 거처하는데 주위에는 방패(防牌)로 둘러싸고 그 속에 장막과 병풍을 둘러 외환(外患)을 막게 해 놓았다. 뜰 가운데는 우리(柵)를 만드는데 먼저 짚으로 둘러싸고 그 밖에는 일척(一尺) 사이로 서까래를 세우는데 왜병 50여 명이 나가서 한 개씩만 가져와도 눈깜짝할 사이에 만들 수 있었다. 서까래는 민가(民家)의 것이고 견고하게 만들어 전면(前面)에 겨우 드나들 정도의 통로를 두었다. 나무를 곧게 세우고 난간도 만들고 돌로 축대를 쌓아서 아주 모양 좋게 잘해 놓았다. 왜 괴수는 여기를 거닐면서 매를 다섯 마리나 두고 혹 사냥도 하는 모양이다. 매에는 긴 끈을 묶어매어 잃어버리지 않도록 단속도 해 두었다. 왜들은 천성이 매를 무척 좋아하는 모양이다.

 

8월 26일 (맑음)

 

아침에 뜰 한쪽에 벽돌을 모두 주어내고 가지런히 우리(柵)를 짓는데 3면은 낮은 담 만큼만 난간을 높게 하고 거기에 크고 작은 깃발을 꽂고 연못가에도 우리를 짓고 난간을 만들어 낮이면 긴 백기(白旗) 20여 개를 갖다 꽂아두고 밤이 되면 거두어들인다. 조총(鳥銃)과 긴 창을 밤에는 거둬 동상방 큰 대들보 아래 시렁(架)을 만들어 걸게 하고 낮에는 각자에게 나누어준다. 큰 칼과 작은 칼은 앉을 때나 서있을 때나 출입시에는 항상 소지한다. 담 안에서 바라보기 좋은 장소에 크고 높은 나무로 망루를 만들어 보초가 올라가 지키며 그 바깥의 매복하는 병사와 서로 암호(暗號)로 통하는데 밤새도록 그렇게 수비하고 있다.

 

아침을 먹고 왜의 괴수 두 사람이 영원으로 향한다. 군사들이 어제 먼저 갔으니 그 숫자는 알 수가 없고 군사기밀 또한 헤아릴 수 없다. 낮에 한 젊은 왜병이 사람 머리를 가져와서 우리에게 보이며 누구의 머리냐고 물으나 모두 말이 없으니 저희끼리 서로 다투어 볼려고 한다. 늙은 기생이 잡혀 왔다가 그것을 보고 우리에게 영감(令監)의 아드님 머리라고 귀뜸한다. 나는 “순초(順初: 牧使 金悌申의 字) 공(公)은 죽어서 영광이오, 나는 죽지 못해서 그 영광도 못하는 게 한이오. 부디 명복 비오.”

 

밤이 되자 두 군데 불을 놓는다. 하나는 우리가 있는 곳이고 또 한군데는 일반 포로들이 있는 곳이다. 넓은 뜰에 낮같이 불을 밝히고 수직하는 왜병은 교대하면서 잔다. 매번 두 사람씩 교대한다. 망루 위에서는 앉아서 내려다 보며 우리 네 사람이 자는지 안 자는지 까지도 살핀다. 날씨는 점점 쌀쌀해 가는데 주는 홑옷 바지 저고리 뿐이다. 책과 장부를 쌓아 놓은 껍데기 헝겊을 벗겨 종이로 꼬아 심을 만들어 송곳으로 뚫고 꿰매어 버선을 만들어 신었다. 그리고 종이를 비벼서 신을 만들었다. 네 사람이 똑같이 만들어 신었다. 주가 솜씨가 좋았다. 대단히 다행스런 일이다.

 

8월 27일 (맑음)

 

왜적은 포로로 잡혀온 사람을 나누어 군량(軍糧)을 나르는데 배자(牌子)를 써주고 갔다 오라고 한다. 가는 사람은 모두 자기의 처자식이 인질로 잡혀 있기 때문에 달아나지 못한다. 남녀 노약(老弱) 식솔에게는 먹을 것을 가져오면 놓아준다 하니 어리석은 백성들은 복숭아, 밤, 참외, 수박 등을 왜 앞에 가져다 바치니 원통한 일이다.

 

늙은 종친 뻘되는 선비 한 분도 영원(靈原)에서 포로로 들어와 곤욕을 당하면서 며칠을 굶었으나 떨어져 있어 인사를 못했으나 가련하기 짝이 없다. 피장(皮匠: 가죽 다리는 사람) 한 사람이 포로로 들어오는데 우리를 보고 봉화현감(奉化縣監) 황시지(黃是之)의 종이라 하며, 이름은 천우(天祐)라고 한다. 드나들며 서로 보고 이야기 하니 조금은 위안이 되는 듯하다.

 

밤에 나귀 두 쌍이 뜰 가에서 울고 있다. 물어본 즉, 목사(牧使)가 기르던 것이라 한다. 울음소리가 자못 비창(悲愴)하기까지 하다. 아마 돌아가신 주인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미물이 저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감회가 더욱 깊어만 간다. 호랑이 가죽 방석과 곰 가죽 방석을 왜장 앞에 내놓았다. 왜병들이 신기한 듯이 보고 있다. 이것도 여기 목사(牧使)가 애용(愛用)하던 것인가 보다. 왜병은 오늘 밤 수직을 서면서 불을 밝게 하고 망루에는 올라가지 않는다. 우리는 밤마다 이렇게만 하면 탈출할 수도 있겠구나 하며 서로 말을 나누었다.

 

8월 28일 (맑음)

 

아침에 정주(定州) 사람 5명과 왜병 두 사람을 서울로 보냈는데 봉물과 서간(書簡)의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새로 만든 궤짝 2개도 봉하여서 보냈는데 그 궤 속에는 목사(牧使) 부자의 머리가 들어있다고 한다. 양식을 주며 속히 다녀오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나는 경진(景鎭)에게 수령의 머리가 저렇게 봉하여져 상납된다면 내 머리도 저렇게 될 터인데 자결도 할 수 없고 죽이지도 않으니 어떻게 하느냐 하니 경진이 자신도 속히 죽는 것이 원이고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한다. 또 들으니 원주목사(原州牧使)는 참수(斬首)하여 위에다 바치고 평창(平昌)과 영춘군수(永春郡守)는 생포하였으니 대장의 명령을 받아 참수하라는 분부라고 한다.

 

식후에 적 괴수 두 사람이 대문 밖에 나와 졸병 등에게 도로 보수를 하게 하고 통나무를 베어 판대기를 만들어갔는데 무엇에다 쓰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엄수일(嚴守一)이 돌아간다고 잠시 들렀는데 서로 눈물로 눈인사만 하고 집에 보내는 서신을 전하였다. 그 서신에는 상불사(尙不死: 아직 죽지 않았음) 세 글자만 썼다.

 

백성들이 연락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왜괴는 복숭아와 밤을 나눠주며 위무(慰撫)하고 장표(章標)를 만들어 주는데 뜰이 온통 떠들썩하다. 복숭아와 밤은 백성들이 스스로 바친 것도 있으나 왜병들이 따온 것도 있다. 나가는 사람들은 볼 때마다 마음이 우울해져 마치 새장 속에 갇친 새가 큰 날개를 가지고도 하늘을 날지 못하는 듯하다.

 

파수를 보는 왜병도 처음같이 의심하지 않고 때때로 결박을 풀어줄 때도 있고, 다시 결박할 때도 있다. 그렇게도 자주 살피더니 그 또한 많이 뜸해졌다. 우리는 서로 좋아하며 도피할 목적으로 빠져나갈 곳을 두루 살피기도 했다. 사방 구석구석을 살펴보니 벽 밖에는 긴 마루방이 있고 마루방과 벽이 닿는 곳에 성주 기둥이 있고 기둥 위에는 빈 구멍이 있다. 우리는 일단 벽을 뚫고 마루방을 지나서 성주 기둥 위에 빈 구멍을 통하여 다시 부엌 천장을 타고 내려와 수채 구멍을 따라 빠져 나간다면 적의 보초가 망루에서 지킨다 해도 우리가 빠져나가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하기로 하고 주는 벽을 뚫고 나머지는 문에 앉아 적이 오는 것을 살피며 적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한다. 벽의 흙이 방안에 떨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흙은 한 웅큼씩 집어서 문 돌쩌귀 사이로 밖에 버려야 한다. 마침 주가 손이 조그마해서 방안에 하나도 흘리지 않으니 모두들 신통하다고 했다.

 

어느 정도까지 파헤친 다음은 돌쩌귀에 박힌 기둥을 빼야 하는데 소리가 날까봐 조금씩 흔들어서 조심스레 뺐다. 그러나 가로지른 방(榜)은 통나무로 튼튼히 만든 것이기 때문에 도저히 빼낼 수가 없다. 세 사람이 각각 빼고자 힘을 주어 흔들어 보았으나 꼼짝도 않는다. 내가 살펴보니 두꺼운 책 표지에 쇠를 굽혀서 박은 것이 있었다. 이것을 절반 부러뜨려서 들어내고 갈아서 날(刀)을 세워서 끊어 볼 작정을 하고 주에게 시켰다. 종일토록 갈아서 날을 세웠으나 그 작은 날로써는 도무지 될 가능성이 없었다. 경진(景鎭)이는 낙심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얼마 후에 주가 말했다. 불로 태우자는 것이다. 마침 나의 발(足)의 상처를 불에다 지지기 위하여 기왓장을 달구고 있었다. 기왓장을 새빨갛게 달구어도 적들은 발을 지지는 줄 알고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 빨갛게 단 기왓장으로 태우니 오래된 나무라서 쉽게 탔다. 우리 네 사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선 창고 안의 장부와 책들로 그곳을 가리웠다. 왜적은 순찰을 했지만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경진(景鎭)이는 우리가 무사히 탈출해서 해를 쳐다보고 부모형제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모든 것이 주 그대의 힘이라고 칭찬했다. 주는 죽고 사는 것이 다 명에 따르는 것인데 어찌 저의 힘이라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날 밤에도 왜적은 망루에 오르지 않고 밑에서 잔다. 밤 보초가 점점 게을러간다. 밤이 깊어 왜병은 칼을 풀어놓고 곤히 잠들었다. 우리는 책으로 막았던 곳을 옮기고 바깥으로 나가보니 뜻밖에도 방해하는 대들보가 또 하나 가로질러 있었다. 그래서 네 사람 중 몸이 가장 큰 내가 먼저 빠져 나가보니 별로 허리 위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생사를 판가름하는 곳에서 경솔히 할 수는 없다. 모두 손을 모아 하늘을 향해 내일 밤에 탈주하기로 결정하고 곤해 떨어지니 언제 날이 샜는 줄도 몰랐다.

 

8월 29일 (맑음)

 

아침 식사 후에 두 적괴는 군사를 인솔하고 어디엔가를 다녀온다. 들은 즉, 횡성(橫城)을 비롯한 각 지방에 노략질을 하러 갔다 왔다고 한다. 영원(靈原)의 양식도 오지 않는다. 낮에 이덕수(李德守)가 참외를 가지고 와서 네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문산(文山)이 연(燕)나라 옥에서 먹었다는 맛과 다름이 없이 좋았다. 덕수(德守)는 이참판(李參判) 기(墍)의 노속(奴屬)이며, 충주품관(忠州品官) 이윤성(李允成)의 사촌동생이다. 그 후의는 오래도록 잊을 수가 없다.

 

서상방(西上房) 부장이 거처하는 방에 영원(靈原)에서 잡혀 온 부녀자 4~5명이 떨어지고 찢어진 옷을 깁는데 조금만 잘못하면 사정없이 등과 머리를 때린다. 그 괴로워하는 모양은 차마 볼 수가 없다. 또한 처녀는 15~16세 쯤 되어 보이는데 뜨거운 물을 끓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벌거숭이가 목욕을 하는데 물을 길어 퍼부어도 준다. 어린 것이 부끄러워하는 모양이 가슴이 메어지는 듯 아프게 한다.

 

나이 15~16세 쯤 되어 보이는 왜아(倭兒)가 붓 네 자루와 먹 하나를 가져와 주에게 준다. 관대한 대접이나 붓과 먹은 영원에서 빼앗아 온 것이다. 적괴의 잠자는 방에는 침상(寢牀)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서 자며 온돌은 사용치 않는다. 밤이 되면 사방에 불을 밝히고 경비하는 왜병이 잠을 자지 않고 졸고, 왜졸들은 농담도 하며 서로 웃고 지껄이는 것이 계급도 없고 마치 친구 같지만 일단 명령을 내리고 출군(出軍)할 때는 엄숙하기 짝이 없고, 그 위엄은 찬바람이 나는 듯하다.

 

언영의 목 자물쇠가 부러졌다. 왜병들이 보면 크게 노할 것이고 또 어떻게 할지 몰라서 손으로 잡고 떨어지지 않게 했다. 나는 하늘이 너를 살리기 위해서 그것이 부러졌다고 위로했다. 사령(使令)을 불러서 호소사(號召使) 이기(李墍)와 관찰사(觀察使) 강신(姜紳), 조방장(助防將)에게 정보를 전달해 보내기 위하여 지필을 구하여 경진에게 쓰라고 하니 손이 아파서 못쓴다고 하니 나는 여기가 어디냐며, 이 전란 중에 초서(草書)라도 좋으니 쓰라고 했다. 내가 부르고 경진이 써서 원주 관리 원점수(元店守)에게 주고 신신부탁하여 잘못 전해짐이 없도록 하였다.

 

마침 방에 불을 켜지 않고 캄캄한데서 왜병들은 잠이 든 듯했다. 내가 먼저 일어나 주를 흔들어 깨우니 언영이가 먼저 일어나고 경진이는 잠자지 않고 있기에 주로 하여금 벽의 구멍을 열게 하고 내가 먼저 나갔다. 그때 마침 왜병이 등불을 들고 점검하러 오는 것이다. 나는 얼른 다시 들어와 원상태로 해놓고 서로 누웠다. 왜병은 우리 네 사람을 점검하고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다.

 

우리는 놀라고 떨면서 서로 말했다. 오늘 밤에는 다시 오지 않을 터이니 나가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나의 상한 발이 아직 아파서 걷기가 힘들다. 만약 도주하다가 잘못된다면 어떻게 하느냐? 내일 밤에 하자고 하니까 모두 좋다고 했다. 주는 말했다. “아버지의 발이 상하지 않았다면 왜적들이 이제껏 이대로 두지 않았을 터이고 여기의 경비도 이토록 해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오히려 발이 상한 것이 복이 된 셈이라.” 한다. 모두 서로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또한 좋은 길조라고 했다. 언영이의 목 자물쇠가 부러졌기 때문이다. 경진이도 올 때 목 자물쇠가 부러져서 마음 속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9월 1일 (맑음)

 

아침에 주내(州內)에 사는 장동(張同)이라는 관아의 이방이 포로로 잡혀 들어왔는데, 생밤 두 되와 참외 몇 개를 가져왔다. 그는 원래 삼척에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를 왔으며 장동(張同)은 장관(張寬)의 변명(變名)이며 장근(張謹)의 사촌이라고 한다. 원점수(元店守)도 참외 두 개를 주었다. 모두 고마운 마음으로 받았다. 상처난 발이 몹시 아파 기왓장을 달구어 지졌다.

 

촌사람들이 왜들에게 잡혀 쌀을 운반하는데 고생을 많이 하였다며 이번에 다시 보내면 나가서는 다시 들어오지 않겠다고 한다. 참외, 콩, 녹두 등 갖가지 곡식을 운반하는데 원성(怨聲)이 여간 아니라고 한다.

 

원점수(元店守)와 촌사람들이 우리를 보러오자 눈을 부릅뜨고 “너희들 무엇 때문에 여기 오느냐? 우리나라가 망해서 끝내 왜 나라가 될 줄 아느냐?” 하며 꾸짖어 쫓아 버리고는 우리에게 나직히 말한다. “나는 오늘 여기를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오.” 한다. “우리도 탈주할 뜻을 가지고 있으니 길을 좀 가르켜 주시오.” 하니, 미덥다고 말했다. “제천(堤川)으로 가는 길에는 적이 없습니다.” 장동(張同)이도 가르켜 준다.

 

조금 지나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큰일이 났다고 그런다. 무슨 까닭인가 했더니 탈주할 길을 언문으로 적은 것을 망루 위에 있던 왜병이 뺏어갔다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 언문(諺文: 한글)은 왜병들이 알 턱이 없는데 뭘 그러느냐 했더니 왜 부장(副將)이 있는 방에 잡혀온 여인들이 많으니 그들에게 보이고 물으면 말할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 나는 그 여자들도 다 우리나라 사람들이니 읽어주더라도 진심으로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라 했다.

 

조금 뒤 누군가 창밑에서 종이에 참외를 싸서 던져 주는데 그 종이에 “압각수 나무 밑 둘째 문 뒤로 빠져나가면 남산에는 적이 없습니다.” 고 적혀 있었다. 우리는 무척 기뻤다. 나는 파수지기 왜병에게 대변이 보고 싶다고 했다. 왜병이 안채에 붙어 있는 변소로 인도하는 것을 거절하고 대문 밖의 변소로 가겠다고 했다.

 

밖에 나가서 살펴보니, 아까 그 언문 종이에 적힌 길이 저만치에 보였다. 임의로 대문 밖에 나갔기 때문에 독촉이 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뒤를 보는 척 하면서 형세를 살폈다. 그리고 들어오면서 발이 아프다는 핑계로 조용히 걸어 들어왔다. 우리 세 사람은 가끔씩 탈주로를 살펴보며, 길을 살피는 것을 좋아했다.

 

또, 일리(一吏)가 와서 내가 발이 아파서 괴로워하는 것을 동정하기에 “너는 누구냐?” 하였더니 “나으리께서 지난 달 초나흗날 치악산당(雉嶽山堂)에서 왜변(倭變)을 기도하는 산당국제(山堂國祭)를 지내셨을 때 제가 헌관(獻官)으로 모시고 갔었지요.” 라고 한다. 갑자기 망루 위나 아래로 경비를 강화하고 파수지기하던 왜병을 딴 사람으로 바꾸어 4~5명으로 증강시켰다. 언영은 울며불며 “우리 네 사람의 목숨이 어찌 이렇게도 야박해서 탈주할 길조차 막힌단 말인가?” 하며 하늘을 원망한다. 나는 “나라 운세가 이러하니 어찌 비극이 우리뿐이겠는가? 비명(非命)에 가더라도 떳떳이 죽어 나라에 욕됨이 없어야 할 것이다.” 하니 경진이 “어르신 말씀이 옳습니다. 군자의 생과 사는 하늘에 달렸을 뿐입니다.” 한다. 주는 밤새도록 하늘에서 비가 내려 나의 아버님이 도피하시게 해 달라고 빌었다.

 

9월 2일 (맑음)

 

왜병들은 빙허루(憑虛樓)를 수선하고 망루 위에는 방패(防牌)를 증가시킨다. 빙허루 사방에는 견고한 난간을 만든다. 아마 오랫동안 주둔할 계획인 듯하다. 갑자기 통역하는 왜인이 와서 “요즈음 너희들의 포박을 풀어주고 너희들을 편안하게 해 주었는데 너희들은 우리 상관 앞에 친근할 뜻이 없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냐?”고 한다. 주가 “아버님의 발 통증이 날로 심하여 내가 아니면 돌볼 사람이 없으니 지금이라도 아버님을 풀어주면 나는 이곳에서 사역을 해도 마음이 놓이겠다.“고 했다. 그러나 통역 왜인은 상관의 명이라면서 나를 굵은 밧줄로 큰 기둥에 묶는다. 그리고 서울로 사람을 보냈는데 곧 그 답이 올 것이라고 하니 우리의 생사는 밤을 사이에 두고 있는 듯하다.

 

빙허루의 수리가 다 끝나서 우리를 그쪽으로 옮긴다고 한다. 그렇게 된다면 적들은 반드시 우리가 파놓은 벽의 구멍을 발견하게 될 것인즉 우리를 죽일 것이 분명하다. 왜병이 창가로 급히 다가오기만 해도 겁이 나고 떨려서 불안 속에 밤을 맞이했다. 어두워지면 옮길 것이라 생각했던 때에 왜병이 왔다가 말없이 다녀감으로 비로소 안심했다. 또 왜병 두 사람이 등불을 들고 와서 대들보에 매달고 포장을 치고 앉는 것을 보니 잠을 잘 듯싶었다.

 

우리가 서로 떨고 있을 즈음 갑자기 천둥이 치며 큰 소나기가 쏟아진다. 밖은 캄캄하여 지척을 분별치 못한다. 그때 왜병 2명이 다가와서 무언가 지껄이며 우리를 살펴보고 등을 들고 곡식 쌓아 둔 곳으로 내려가고 다른 왜병 군졸들은 마루 바닥에서 잠을 잔다. 파수지기 왜병들은 뇌우(雷雨)가 심하니 우리가 도망치지 않으리라 믿고 간 듯하다. 경진이는 “오늘 밤 주가 그렇게도 빌어서 내린 비니 지성감천(至誠感天)이란 말이 빈 말이 아닙니다.” 하며 좋아한다. 우리는 서로 귓속말로 오늘 밤, “하늘의 뜻이니 어찌 탈출하지 않으리요,” 하며 다짐했다.

 

모두들 나의 발의 상처를 염려하기에 나는 끈을 풀며 말했다. “하늘이 우리를 살리시려고 하는데 발의 상처가 심하다 하더라도 못할 일이 무엇이냐? 만약 왜병에게 들키면 지붕 위에서 떨어져 자결(自決)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비가 이렇게 심하니 적이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용기를 내라고 격려했다.

 

벽의 구멍으로 나가서 긴 마루를 지나 이번엔 다시 성주 기둥을 타고 천정(天井)으로 올라가 까치구멍을 통하여 지붕으로 나왔다. 기왓장을 몇 장 걷어내고 우리를 결박했던 줄을 풀어 이어서 줄을 타고 내려갈 수 있도록 묶었다. 흙이 떨어지는 소리가 약간 났으나 빗소리와 천둥소리 때문에 적들이 듣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지붕의 기왓장을 밟고 줄을 타고 내려와 문 밖으로 나오니 그렇게 아프던 발도 가벼워지고 아픈 줄조차 몰랐다. 동쪽 벽에 붙어서 살펴보니 파수병은 없고 아들 주가 따라온다. 무사히 내려왔다. 서로 손을 잡고 대문 밖을 나오니 그때의 부자의 정은 형언할 수 없었다.

 

대문에 파수 보는 왜병 한명이 잠이 들어 코를 골고 있다. 바로 압각수(鴨脚樹) 밑으로 왔다. 장동(張同)이가 언문으로 시켰던 대로 온 것이다. 경진(景鎭)이도 뒤따라 왔다. 언영(彦英)이는 때를 놓쳐서 그들에게 들킬까 겁이 나서 나오지 않은 모양이다. 세 사람은 안간힘을 다하여 남산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 달려갔다. 주는 남산은 여기서 가까워 적들이 있을 것 같고 또 풀과 나무가 무성해서 피하기에는 오히려 곤란하니 큰 길을 택하여 멀리 달아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적들은 내 발이 아픈 것을 아는 까닭으로 우리가 멀리 못 갔으리라 여기고 근방을 찾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점수(元店守)가 가르켜 주던 큰 길을 택해서 날이 밝기 전에 더욱 멀리 달아나려고 속히 걸으니 발이 몹시도 아팠다.

 

경진(景鎭)에게 “너는 늙은 아버지가 계시니 나와 함께 가다가 보면 적에게 붙잡힐 지도 모르니 혼자서 속히 달아나라.” 하였다. 경진이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완강히 고집하여 함께 달리는데 걸음이 빨라 날아가는 듯했다. 언영이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기 그지없다. 아픈 발을 쉬느라고 기다리며 돌아봤으나 영영 오지 않는다. 상처난 발의 통증을 이기지 못해 엎어지니 주가 일으키고 붙들고 하여 겨우 사창(司倉: 지명)을 지나다 서까래 나무를 많이 모아 놓은 것을 보았다. 왜적들이 불을 놓고 지키던 곳이다. 비가 너무 심하게 쏟아지니 근처 민가에 들어간 모양이다.

 

주가 울타리 나무를 꺽어 지팡이를 만들어 주어 그것을 짚고 힘을 얻었다. 조그마한 나무다리(木柵)가 있는데 한 귀퉁이가 무너져 물인지 다리인지 모르고 가다가 그만 엎어졌다. 주가 겨우 일으키니 옷은 흙투성이가 되었다. 몸은 무겁고 옷은 젖어 걸을 수가 없다. 중의 적삼을 한 벌 벗어 저고리는 주가 지니고 중의는 너무 떨어진 것이기에 버렸다. 조금 가다가 상처난 발의 통증이 심해서 기절하였다. 주가 주무르고 해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우리는 서로 손을 붙들고 가면서 뒤를 돌아보며 혹시 왜적들이 따라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쌓여 있었다. 조금을 가다보니 무언가 가로막는 것이 있었다. 깜짝 놀라서 자세히 보니 말(馬)이다. 왜적들이 버린 것이다. 안장이 없었다. 주가 기뻐하며 목을 긁으며 챙겨보니 발을 저는 말이다. 왜적들이 버린 것이다. 나직한 소리로 나를 부르는 듯하다. 분명치 못해 대답치 않고 있으니까 다시 주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언영이었다. 서로 반갑기 그지 없으나 말할 겨를도 없이 달리기만 했다.

 

언영은 혹시 왜병이 눈치챘을까 싶어 조금 늦게 따라 나와 남산으로 오르니 (원래 계획은 남산으로 오르기로 하였음) 우리를 만나지 못해 이 길을 택하였다고 한다. 남산에 오르니 적들은 횃불을 들고 근방을 왔다갔다 하며 점점 먼 곳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보니 아마 우리가 탈출한 것을 알고 찾는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얼마쯤인가 4~5명의 사람 인기척을 느끼고 왜적으로 의심하였으나 우리나라 말이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단구(丹邱: 지금의 원주시 단구동)라고 한다. 언영이가 겨우 심장부를 벗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원주 땅을 벗어나려면 오리(五里)는 더 가야 한다고 했다. 날이 밝으면 적이 말을 타고 쫓을 터이니 한 걸음이라도 더 가야한다. 그러나 상처난 발의 통증이 심하고 피까지 흘러서 도저히 걸을 수가 없다. 주가 앞에서 당기고 언영이가 뒤에서 밀고 하여 겨우 걸음을 옮긴다.

 

그때 원주 쪽에서 몇 사람이 오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왜병인 줄 알고 길옆에 숨어 자세히 보니 왜는 아니다. 그들도 우리를 의심하는 모양이다. 주가 물으니, 자기들도 원주에서 자고 나오는데 왜병들이 둘러싸서 겨우 빠져 나온다고 했다. 천천히 걸어서 월논리(月論理: 지명)에 이르니 시체 썩는 냄새로 코를 들 수 없다. 발이 아파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 길섶의 숲속에서 물을 두어 모금 마시고 잠시 쉬었다. 시체 썩는 냄새로 코를 돌릴 수도 없다.

(주: 영원산성(靈原山城)에서 원주목사(原州牧使) 김제갑(金悌甲)이 이끄는 군민(軍民) 4,000여명이 8월 24일~25일 사이에 왜장 모리길성(毛利吉成)이 이끄는 3,000여명의 정병과 싸워 장렬히 전사한 조선군민(軍民)의 시신이 그곳에 버려졌다고 한다.) 곧 일어서서 걸으려고 하니 상처난 발에서는 피가 쏟아지고 날이 밝으려 동쪽이 환하게 트여지고 있다.

 

9월 3일 (비)

 

비는 그칠 줄 모른다. 바위를 잡고 산으로 오르는데 험하기 짝이 없다. 언영이가 앞에서 당기고 주가 밀고 해서 겨우 5~6 걸음 가다가는 쉬고 또 3~4 걸음 가고 하며, 산 중턱 허리를 오르니 어느새 늦은 아침 때였다. 초목(草木)이 무성한데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다. 적이 지나간 자리인가 해서 걸음을 멈추고 살펴보니 풀이 넘어진 상태로 보아 왜병들이 다녀가진 않은 것 같다. 그 길을 따라 산허리가 구부러진 언덕을 넘어 가장 높은 곳에 오르니 바위 봉우리가 험하고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피란하기에는 좋은 곳이었다.

 

큰길은 저 멀리 아득히 내려다보이고 깊숙한 곳에서 사람과 말 소리가 들린다. 아마 그들도 피란민인가 보다. 언영에게 가서 알아보고 밥을 좀 얻어오라고 하였으나 다리가 아파 꼼짝 못한다고 했다. 상처난 발이 더욱 아프기 시작했다. 우리는 바위에 둘러앉아 주가 내어놓은 볶은 콩을 한 웅큼씩 씹었다. 콩은 영월에 있을 때 엄수일(嚴守一)이 밤과 함께 준 것과 원주(原州) 관리 원점수, 장동, 이덕수가 준 것들이다. 모두 뜻이 있어 준 것인데 이제 그것을 가지고 요기를 하니 그 사람들의 고마움이 다시 생각난다. 어젯밤에 도피하는데 짐이 너무 거추장스럽다고 언영이가 버린 것을 주가 다시 주워 온 것이다. 심히 배가 고플 때 씹으니 끼니가 된다고 서로 보고 말하며 웃었다.

 

해가 났다. 모두 하늘을 우러러 절을 하며 감사했다. 목이 몹시 말랐다. 산이 높아 물이 없었다. 산머루 줄기를 뜯어왔다. 그것이라도 씹었다가 뱉으니 목마름이 좀 풀린다. 바위 뒤에서 숨어서 보니 왜적 약 200여 명이 말을 타고 가리(可里) 고개로 급히 달린다. 우리를 잡으러 오는 줄 알고 기겁을 하였다. 주가 저쪽 산봉우리에 가서 지켜본즉 적들은 이미 고개를 넘어갔다고 한다. 망을 보던 사람에게 물으니 왜군들은 제천 쪽으로 가는 듯하다고 했다.

 

주를 기다리고 있을 즈음, 한 사람이 앞산 위에 짧은 바지를 입고 관을 쓰지 않고 서서 이쪽을 살피고 있다. 언영이가 먼저 보고 왜들이 아니냐고 한다. 나도 그런 줄로 알았다. 그 사람 뒤로 몇 사람이 뒤따르고 있었다. 왜들이 좌우로 둘러싸고 우리를 잡으러 오는 줄만 알았다. 주가 햇볕에 말리기 위해 바위 위에 널어 놓은 옷 두벌을 챙겨 가지고 갔다. 그들이 그 옷을 알아보면 내가 도망한 평창군수라는 것을 알 것이다. 큰 일이다. 언영이는 어느새 바위 틈새에 숨었는지 보이지를 않는다.

 

도망가는 모양새가 이렇게 되니 왜적의 손에 붙잡혀 죽기보다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바위 위에서 몸을 굴렸다. 높이는 사람의 키로 7~8키나 되는 높이였으나 굴러서 떨어졌기 때문에 온몸에 찢어진 상처는 심했으나 목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조금만 더 구르면 낭떠러지가 되는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안간힘을 다하여 떨어지려 할 즈음 바위 위에서 언영이와 주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비로소 아까 그 사람들이 왜적들이 아닌 것을 직감했으나 몸이 바위 틈새에 끼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겨우 주를 불러 몸이 바위에 끼어 오르지도 못하고 내리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주가 울면서 칡덩굴을 구해다가 이빨로 끊어 한 끝은 산위의 나무에 매고 한 끝은 내려주었다.

 

그제서야 겨우 그곳을 빠져 나와 우리는 서로 붙들고 울었다. 소리가 멀리 들리는 줄도 모르고 큰 소리를 내어 울었다. 주가 바위 위에 둔 옷 2벌은 바위 뒤에 있던 사람이 가져가고 다시 보지 못했다. 언영이의 말이 바위 뒤에서 옷을 가져간 사람도 망을 보던 사람이라 하며 옷 두벌 잃어버린 것이 아깝다고 했지만, 나는 조그마한 물건에 연연하지 말라고 했다. 산머루와 다래, 솔잎 등을 씹고 콩을 씹어 겨우 시장기를 면했다. 날이 저물자 세 사람은 바위 위에다 낙엽을 주워 깔고 자기로 했다.

 

산이 무척 험해서 새도 있고 호랑이도 있다 해도 무서운 줄 몰랐다. 밤에 비가 약간 오더니 다시 갠다. 이 산이 이렇게 험하긴 하지만 고을과 크게 멀지 않고 또 큰 길과도 가깝기 때문에 적이 수색만 한다면 다시 도주할 길이 없었다. 어떻게 하던 다른 산으로 빨리 옮겨가야 하겠다.

 

9월 4일 (맑음)

 

아침에 산을 넘다가 산등성이에서 장년 두 사람과 젊은이 두 사람을 만났다. 물은즉 한 사람은 이 고을의 취수(吹手: 퉁소 부는 사람)라 하며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한 사람은 강판서(姜判書)의 종으로 피란을 왔다고 한다. 취수란 자는 눈을 부라리며 무뚝뚝하게 말하는 투가 금방이라도 우리에게 해코지를 할 듯 시비를 걸려 한다. 우리는 좋은 말솜씨로 우리는 모두 한양 선비 집안으로 이 고을 목사 김제갑(金悌甲)의 친우로 함께, 영원(靈原)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패하고 겨우 목숨을 살려 여기에 왔다고 했다. 취수는 전부터 목사(牧使)에게 원한이 많았다 하며 노발대발 우리를 해하려 한다. 간곡히 말려서 겨우 화를 면하였다.

 

내가 왜적에게 잡혀 있을 때 원점수(元店守)에게 들은 이야기도 강판서(姜判書)의 아들 강신(姜紳)은 이번에 새로 강원감사(江原監司)가 되었다고 하는 걸 들었기에 알려 주었더니 강노(姜奴)는 반가워하며 우리의 앞길을 소상하게 가르켜 주었다. 젊은이가 표주박을 차고 있었다. 마침 하나는 나에게 주었다. 고맙기 그지 없다. 상처난 발이 몹시도 아픈데 천신만고(千辛萬苦)로 밭고랑을 빠져나가 기장과 조 밭에 이르러 이삭을 따서씹고 표주박으로 물을 떠서 마시니 겨우 굳은 창자가 펴지는 듯 했다.

 

하루 종일 걸은 거리가 겨우 언덕 하나를 넘었을 뿐이다. 언영이는 기왕 탈출하였으니 속히 가야 하는데 이렇게 더디게 가니, 아직도 왜적의 소굴 근방이라 다시 붙들릴까 위태롭다고 한다. 나는 “나도 속히 가서 먼저 관(官)에 가서 보고하는 것도 급하고 노친 처자를 만나는 것도, 사당에 배알하는 것도, 친구 친척에게 이 사연을 이야기하는 것도, 고향의 산천초목을 다시 보는 것도 모두 다 급한 일이지만 발이 아파서 걷지를 못하는 것을 어찌하느냐?” 하며 탄식하였다.

 

가다 보니 산밑에 초가집 두 셋집이 모여 사는 마을이 보였다. 그곳에 투숙(投宿)할까 하였으나, 혹 왜적이 올까 해서 저쪽을 바라보니 숲속에 불빛이 반짝반짝하며 사람 소리가 나기에 들어보니 피란민인 듯싶다. 발이 아파서 한 걸음도 옮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소나무 밑에서 자기로 했다. 밤에 비가 와서 옷이 젖으니 춥고 목이 말랐으나 마실 물이 없다. 빗물이 나뭇잎에 고인 것을 표주박으로 모아서 마시니 갈증이 덜 했다.

 

9월 5일 (맑음)

 

아침 일찍 산에서 내려와 비로소 개울물을 표주박으로 떠서 마셨다. 언영이에게 이끌려서 조금 올라가니 숲이 우거진 곳이다. 자세히 보니 어제 저녁 불빛이 반짝이던 곳이다. 피란민들이 모여서 초막(草幕)을 짓고 있었다. 서로 멀뚱히 쳐다보고 말을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황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활을 겨누며 “우리는 왜적을 피하여 깊은 계곡에 숨으려 하는데 그대들은 어찌하여 감히 우리가 있는 곳으로 왔는가” 한다. 나는 “그대들은 의심을 거두시오. 우리도 피난민으로서 이틀 동안이나 산속에서 굶고 연기가 나기에 여기까지 왔노라.”고 했다. 그제서야 그들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는 근본(根本)을 속임이 없이 실토했다. 초막의 모든 사람들은 놀라며 아침밥도 나누어 주고 죽도 주면서 좋은 대접을 한다. 며칠 굶어서 납작해졌던 배가 비로소 일어나는 듯했다. 그들의 성명을 물으니 신림역자(新林驛子) 이흔손(李炘孫), 박벌거지(朴伐去之), 이일산(李一山) 등이다.

 

그리고 나중에 김주질동(金注叱同), 박금손(朴今孫) 등이 산에서 내려와 내가 관(冠: 갓)이 없는 것을 보고 패랭이를 벗어주고 주막에 가더니 흰쌀을 한 되 얻어다 주었다. 금손(今孫)이도 자기 패랭이를 벗어 주에게 씌웠다. 흔손(炘孫)이도 쌀을 한 됫박 준다. 나는 “죽을 처지에 너희들을 만나 살길을 얻었으니 이것은 하늘이 도우신 것이라 만약 내 목숨이 끊기지 않고 살아난다면 내가 두고 두고 너희들에게 후하게 갚을까 한다.” 했더니 “나으리를 이런 모습으로 뵈오니 슬프기 한이 없습니다. 어찌 갚음을 바라겠습니까? 부디 몸조심 하십시오.” 한다. 왜적들은 우리를 잡기 위해 제천과 주천 쪽으로 나누어 갔다고 한다. 그런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초막 뒤에서 지나가는 한 소년을 만나 낮은 소리로 물은즉 “왜병들은 사잇길로 지나갔다.” 하며 소년의 허리에는 주먹밥을 차고 있었다. 언영이가 사정하여 좀 얻고 그의 성명을 물으니 역자(驛子) 복지(福只)라고 한다.

 

얼마 안 가서 남쪽으로 한 고개를 넘어가니 구리파(求利坡) 마을에 다다랐다. 초가집에 4~5집이 모여 있는데 문밖 길 가운데 4~5명의 사람이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를 보고 수상히 여긴다. 나와 주는 관을 썼으나 언영이는 맨 머리니 더욱 의심한다. 언영이는 “의심치 마시오. 한양 양반이 피난으로 여기까지 왔오.” 한다. 주인 늙은이는 대답도 없이 함께 앉았던 사람들을 물러가라고 손짓하며 물리친다. 우리는 길가에 앉았다. 주가 썰어 말리고 있던 무 채를 보고 이것을 좀 주시면 병든 아버지께 드리고자 한다고 하니, 늙은이는 돗자리를 펴주며 행색(行色)이 곤란한 듯하니 잠시나마 쉬어 가라고 한다.

 

“난리에 쫓기는 이가 무슨 돗자리요?” 하며 앉아 발을 만지며 신음하니 주인 늙은이는 속히 밥을 지어서 드리라고 한다. 소고기국과 찜을 해주면서 남녀 10여 명이 모두 은근한 정으로 먹기를 권한다. 모두가 주인 늙은이의 자녀이고 사위들이라고 한다. 주인 늙은이의 성명은 임원(林元)이라고 하며 보병(步兵)으로 늙어서 제대를 했다고 한다. 나이는 65세인데 그의 아들은 수원(守元), 수정(守丁), 은희(銀希), 쉰동(오십동)이라 한다. 그 사위는 장(張)쉰금(오십금)이라 한다. 나는 “노인장께서 이렇게 관대하고 공손하니 그 밑에 자녀들과 사위도 정성을 다하는가 보다.”고 했다.

 

주인 늙은이가 은근히 나에게 말하되 “벌써 인편에 들으니 평창 군수께서 자제(子弟)와 함께 탈출을 했다고 해서 제 생각이 이 길이 유심(幽深)하니 혹시 지날까 했는데 이제 용모를 보니 짐작이 가서 먼저 그 사람들이 알게 되면 말이 퍼질까 해서 보낸 것입니다. 왜적들이 따라 잡으러 올지도 모르니 가벼이 행동하지 마시고 이곳은 아주 벽지이오니 형세를 살피면서 쉬어 가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한다. 나는 “발이 아파서 걷지도 못하는 판국에 쉬어가는 것은 좋으나 이 마을 사람들이 적들과 내통하여 아부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 때문에 노인장이 화를 입을 것이니 그것을 어찌하겠느냐?” 했다. “적에게 붙어 먹는 자는 이 마을에는 한 사람도 없으니 염려하실 일이 아닙니다. 마음 놓고 쉬어 가십시오.” 한다. 정성들인 밥상도 잘 받고, 따뜻한 온돌방에서 주에게 다리를 주물리면서 모처럼 편안하게 쉬었다.

 

9월 6일 (맑음)

 

아침 일찍 산으로 올라 제천(堤川) 땅 경계까지 갈려고 하니 주인 노인은 더 머물라고 권한다. 노인의 네 아들과 사위 하나가 모두 영원(靈原)에 버린 곡식을 가지러 갔는데 동네는 비어 사람이 없고 신림(新林)은 왜적들이 다니는 길과 가까워 위험할 것 같으니 낮에는 집 앞 산에 가서 숨어있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우리 셋은 그렇게 하였다. 오후에 주인 노인이 불러서 내려오니 죽을 끓여 놓고 기다리며 점심이 늦어 미안하다고 하길래 나는 목숨만 이어가도 고맙다고 하였다.

 

저녁에 햇조로 밥을 지어 주었다. 너무 많이 먹어 과식(過食)을 했다. 주인 노인의 성격이 온후하여 장자(長子)의 기풍이 있으니 자녀들도 그렇다. 처음 한양 양반들이 길이 가득차게 피란을 나오며 발이 아파하는 것을 보고 민망히 여겨 큰길을 가르켜 주기도 하고, 먹지 못해 배고픈 이에게는 밥도 지어주고 옷이 없는 사람에게는 옷도 주고 헤진 데는 꿰매주기도 했다고 한다. 참으로 좋은 일을 하는 노인이다. 막내 쉰동(오십동)이 산(山) 과일을 따가지고 왔다. 머루 다래 등을 우리에게 대접했다. 감사하기 그지없다.

 

9월 7일 (맑음)

 

저녁에 사위 장(張)쉰금(오십금)이 우리 세 명을 저희 집으로 초대하여 고깃국과 밥으로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 소고기는 두 자녀들이 노인장을 드리려고 준비해 두었던 것이라 한다. 이곳은 적이 다니는 길과 가장 가까운 곳이니 오늘 밤을 타서 꼭 떠나야만 한다. 주인 노인장은 그의 아들과 상의하여 나를 호송(護送)하기로 하고, 신림역자(新林驛子) 박연(朴連)의 말을 몰게 하였다. 주인 노인이 나를 타라고 권유했으나 박연은 영원에 곡식을 가지러 간다면서 거절한다. 나도 그저 공짜로 타려는 것이 아니고 대가(代價)를 치른다고 하니 그제야 박연은 말을 빌려주었다. 주인 노인은 손수 만든 짚신 세 켤레를 주며 도시락에 밥을 싸고 큰아들 수원(守元)으로 하여금 인솔토록 했다. 박연이도 도시락을 싸가지고 뒤따랐다. 주인 노인과 서로 작별하는데 고마움과 아쉬운 마음이 그지없었다. 주인 노인의 늙은 처는 경진이와 적의 수중에 있을 때 검은 옷 한 벌을 주던 덕비(德非)이다. 지금은 그 옷을 언영이가 입고 있다.

 

황혼이 되어 홍고개(紅峴)를 넘어 신림을 지나 석남(石南)에 들어서니 밤이 어두워진다. 추현(椎峴)에 이르러 소와 말을 모는 5~6명을 만나니 영원에 가서 곡식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계여리(溪餘里)에 이르니 개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피란갔던 사람들이 돌아왔다고 한다. 송현(松峴)을 지나니 수원(守元)이와 박연(朴連)이 말대로 어디서 잘까 하고 이집 저집 문을 두드렸으나 대답이 없다. 한 집을 두드리니 중(僧)이 먼저 나오고 주인이 뒤따라 나온다. 불을 들고 맞아주며 우리가 배고프고 피곤한 줄 알고 죽을 쑤어 먹게 해 주었다. 승명(僧名)은 서진(西珍)이고 주인 이름은 김언야(金彦也)라고 했다. 중은 소문으로 경진 탈출 소식을 듣고 놀라웠다 하며 서로 이야기 하는 중 밤이 깊어갔다.

 

나는 서진에게 곧 떠나야겠다고 했더니 서진이 길 안내를 해준다. 고마운 일이었다. 사잇길로 중방리(中方里)에까지 와서 서진이가 알고 지내는 안백령(安白齡)의 집으로 인도했다. 빈 마루에 들어가 죽 한 대접을 받았다. 밤 날씨가 매우 차다. 주인의 두터운 옷을 빌려 입고 눈을 붙였다. 날이 새기 전에 주천(酒泉) 교생(校生) 이몽길(李夢吉)이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그도 왜적에게 잡혔다가 탈출한 사람이다. 서로가 위로하였다.

 

9월 8일 (맑음)

 

날이 새기 전에 갈현(葛峴)을 넘어 고개 밑에 이천복(李千福)의 집에 들리니 밥을 주고 현(縣)에 사는 원(元)씨라는 사람이 안백령(安白齡)으로부터 우리 일행이 춥고 배고프다는 소문을 듣고 도포와 쌀 몇 되, 마른 명태 5마리 등을 이천복의 집에서 보내왔다. 원씨라는 사람은 나와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이렇게 후의를 베풀어 주니 참으로 감사하기 그지없다. 천복이도 마늘 두 단을 우리에게 주었다. 우논리(于論里)를 지나 입탄(入呑)으로 들리려 할 때 남녀 4~5명이 우리를 불러 세워 말하되 왜군들이 대화(大和)로부터 평창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그쪽으로는 가지 말라고 한다. 그들은 내가 평창군수임을 아는 듯 했다.

 

어느 한 집에 들어가니 집주인은 주천의 호장(戶長)이었던 윤희경(尹希京)이라고 한다. 낮에 중(僧) 서진이는 평창으로 가고 우리는 그 집에서 자기로 했다. 원씨가 보내온 쌀로 밥을 짓고 수원이와 박연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밤에는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9월 9일 (맑음)

 

식후에 사오질(沙五叱) 고개를 넘어가다가 고개 위에서 평창에 갔던 서진이가 이끌고 온 평창관리 손수천(孫壽天), 관노(官奴) 만천, 학지 등을 만났다. 말에서 내려 서로 붙잡고 울었다. 서진이는 돌아가도 좌수(座首) 나수천(羅壽天), 별감(別監) 나사언(羅士彦)도 나와서 맞아 주었다.

 

입탄에서 손수천이가 김막석(金莫石)이를 시켜 보내준 도시락과 금방 지어서 보내 온 조밥으로 좌수(座首) 이하 모두가 한데 모여서 먹었다. 밥상에 민물고기는 별감(別監) 이경조(李敬祖)가 구하여 보내 온 것이다. 막대(莫大)는 특별히 단술(糖酒)을 가지고 왔다. 막대는 김막석의 동생이다. 어두워서 남도년(南徒年)의 무녀(巫女)도 단술과 떡, 과일 등을 가지고 왔다. 밤에 아리(衙吏) 이미수(李尾壽), 이신(李信), 가리(假吏) 이득춘(李得春), 정산사령(鄭山使令) 금천(今千)이 나를 보러 왔다. 관노(官奴) 학지(鶴只)로 하여금 영천(榮川: 지금의 榮州) 고향집에 보내 탈출이 성공한 것을 알리도록 하였다.

 

9월 10일 (맑음)

 

새벽에 막석(莫石)이가 국수를 해 주었다. 모래고개(沙峴: 현재의 평창읍 입탄리 노래재)를 넘어 약수를 지나니 날이 환하게 밝았다. 이여림(李汝霖)의 집 길가 말머리에서 내려 살아서 평창 땅에 온 것을 감사하는 큰절을 하늘을 향해 했다. 곧 박옥손(朴玉孫)의 집에 이르니 훈도(訓導) 이상림(李商霖)이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해 주었다. 김성경(金成慶), 나사언(羅士彦)과 이경조(李敬祖), 이시림(李時霖)은 점아(點兒: 南川 先生의 長子, 작은 아들 주의 兄)가 나의 탈출을 이미 알고 영월까지 왔다면서 울더라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나사언(羅士彦)은 박연(朴連)이 돌아간다기에 수원(守元)에게 베 한 필 박연에게는 한 필 반을 간신히 구해 주었다. 박연은 불만족한 기색이다. 향교(鄕校)에서 묵기로 하고, 좌수도 함께 잠을 자기로 했다.

 

원주에서 온 피란민 편에 들으니 우리가 탈주한 후 왜적 괴수는 당일 보초를 섰던 왜병 몇 사람을 목베고 수백 명을 풀어 근처를 수색하고 야단이 났던 모양이다. 못잡아 오면 죽음으로 다스리겠다고 하고 갑자기 제천까지 습격해 갔다고 한다. 그때 우리와 떨어졌던 경진이 제천 향교에 묵고 있다가 혼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를 찾으러 온 왜병들은 우리들을 찾지 못하자 두려워서 본진에 돌아가지 못하고 충주로 가서 타진(他陳)에 붙어 있다가 나중에 탄로가 나서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우리를 생포하였다고 한양에 있는 왜군 대장에게 보고를 자랑스럽게 올렸는데 탈주하게 하였으니 적 괴수에게도 무거운 벌이 떨어질 게 뻔하다. 그래서 적 괴수는 보초의 목을 끊어 눈을 뒤집고 찾으려 한 것이다. 좌수(座首)와 교궁(校宮)은 말하되, “보초를 섰던 왜들은 다 총잡이들이며 또 똘똘한 놈이었을텐데 이번 일로 한 200명을 자기들끼리 죽이고 죽고 하였으니, 모두 성주(城主) 어른으로 하여금 이루어진 일입니다.”라고 했다.

 

강녀(姜女)의 절개로운 죽음(死節), 성주의 포로로 잡힌 일, 그리고 지사함(智士涵), 우응민(禹應緡), 이인서(李仁恕) 등의 전사(戰死)와 적병이 참수(斬首)당한 모든 사실을 도백(道伯)은 이미 상감이 계시는 행재소(行在所)에 알렸다고 한다.

 

9월 11일 (맑음)

 

아침을 재촉하여 먹고 곧장 우논리(于論里) 김석진(金石陳)의 집으로 갔다. 낮에 김방복(金方福)이가 소고기를 가지고 오고 신말토정(申末吐丁)이는 생밤, 김옥경(金玉京)이는 마늘 일곱 단을 가지고 오고, 집종(家奴)인 석문(石文), 원정(元丁), 임손(林孫), 개석(介石)이가 영천으로부터 왔다. 서로 울면서 먼저 늙으신 부모님 안부와 본댁과 두청(斗廳)의 말을 하고 마을 안부만 묻고 울다가 왜적들이 사례(沙禮)의 문단(文丹) 일가(一家)를 침범해서 모두 쫓기고 숨어서 목숨은 겨우 보전했으나, 의식물(依食物)을 모두 약탈당해 배고픔과 추위에 갖은 고생을 다한다고 했다.

 

임손(林孫)과 개석(介石)이를 응암(鷹岩)으로 보내 강녀의 무덤에 가토(加土)를 시켰다. 처음에 너무 허술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 뒤에는 관인(官人)이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고 내가 물으니 잘 모른다고 할 뿐이다. 몹쓸 이속(吏屬)들이다. 내가 이미 죽은 줄 알고 사절(死節)한 아속(衙屬)의 묘를 길가다가 죽은 사람 시체같이 방관하다니 슬픈 일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영월에 잡혀 있을 때 영천 집으로 봉한 편지는 이순희(李順希)에게 즉시 전하라 하였으나 보내지 않았다니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지금껏 본집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본가에서는 그 뒤 오랜 후에야 전해오는 소식으로 알았는데 하물며 죽은 첩의 해골(骸骨)까지 어떻게 챙겼겠는가? 큰 아들 점(點)과 동생 경성(景星)이 나를 찾아 영춘으로 향했다고 하니 혹시 왜적들에게 들키지는 않았는지 자못 근심이 된다. 오후에는 칡발고개를 넘어 북동(北洞)에 이르러 엄근신(嚴謹臣)의 집에서 잤다.

 

9월 12일 (맑음)

 

나사언(羅士彦)이 정선(旌善)으로부터 서신을 가져왔다. 정선군수(旌善郡守) 정사급(鄭思伋)이 위문 서신을 보낸 것이다. 언영이는 몸이 피곤하여 덕천(德川)으로 곧바로 오겠다기에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 주었다. 양식을 약간 주선해 가지고 아침 일찍 불비고개(火乞峴)을 넘어 도루목(石乙項)을 지나 점심을 영월 상동면(上東面)의 이향 집에서 먹고 노곡(魯谷) 직곡(直谷)을 지나 상을고개(上乙古介)에 이르러 미사리(彌沙里) 김세후(金世厚) 집에서 잤다. 산과 계곡이 험하고 깊어 사람 흔적이 없으니 참으로 피란처로는 기가 막힌 곳이다.

 

9월 13일 (맑음)

 

아침밥을 재촉해 먹고 마해천(馬該川)의 늙은 중(僧) 신관(信官)에게 길을 물어 길 옆집에서 밥을 대접하는 것을 얻어먹고 마아제(馬兒峴)을 넘어 가다가 고개 위에서 김덕만(金德灣)을 만나 말에서 내리려 하니 김(金)은 말에서 못 내리게 만류하면서 붙잡고 운다. 그러다가 함께 우수동(憂叟洞) 류숙치운씨(柳淑致雲氏) 집에 들렀다.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동생 경성(景星)이와 큰 아들 점(點)이 영춘으로부터 당도하였다. 서로 길이 엇갈려 만나지 못한 모양이다. 서로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권회인(權懷仁), 민조숙(閔肇淑), 박경승(朴景承) 등이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해 주었다.

 

저녁식사 후 류여신(柳汝新)의 말을 갈아타고 어둡기 전에 광현(廣峴)에 와서 송정(松亭) 선조묘에 재배(再拜)하고 조와동(助臥同)까지 오니 노상(路上)에서 권경섭(權景涉), 이여옹(李汝翁)과 조카 묵(黙)과 아(兒)의 여종 배(輩)가 맞아 죽었다. 서로 울며 통곡하였다. 능동(陵洞) 묘 앞에서 말에서 내려서 울면서 절하였다.

 

조금 후에 노처(奴妻) 춘영(春英)이 그 어미와 그의 할미가 길 밑에 있는 이옥개(李玉介)의 집 앞에서 통곡하며 내 자식은 어찌 못 오느냐고 통곡한다. 나는 눈물만 흘렸다. 그의 아들은 나하고 같이 평창에 있던 종 희수(希守)이다. 잡혀서 서로 흩어지고 아직까지 생사(生死)를 모른다. 원당(圓塘)에 이르니 벌써 밤이 깊었다. 노친(老親)께서는 사립문 밖까지 나오시어 내 손을 잡으시고 하염없이 우신다. 나는 가슴이 메어지고 목이 메어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울음을 참고 처자비복(妻子婢僕)들이 소리 내어 우는 것을 못하게 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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