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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의 사진기행(24) : “똥누는 일, 그 안간힘 뒤의 행복”(2)

작성자한 길|작성시간13.11.03|조회수173 목록 댓글 1

 

 

1751년 중수된 대웅보전은 오랜 세월에 건물 외부의 단청이 지워지고 나뭇결이 드러나 있어 대웅보전의 소박한 아름다움과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천천히 대웅보전을 둘러보는데 대웅보전의 문살 문양들이 참 곱습니다.

채색하지 않은 자연상태의 문양들이 미황사의 멋을 더해줍니다.

 

 

단청을 하지 않은 대웅보전은 그야말로 꾸밈없는 남도의 색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 바로 이거로구나...

남도의 빛이 바로 여기에 머물러 미황사를 낳았구나 하는 생각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진도바다로 떨어지는 석양이 미황사의 빛바랜 벽들을 황금색으로 물들이는 해질녘이면 미황사는 표현불가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펼쳐준다고 합니다.

 

 

 

미황사(美黃寺) / 강제윤

 

달마산에서 바라본 다도해의 섬들

 

스님들은 모두 달마산을 떠나 바다로 갔다

어란에서부터 배는 가뭇없이 흔들린다

출렁이는 섬들 섬들 섬들

서역에서 온 스님처럼 스님들은 가랑잎을 탔다

사십개의 몸을 실은 잎 잎 잎

저 수십 수백의 섬을 돌고 돌아 경을 외고

배는 청산도 앞에서 큰바람을 만난다

닻을 내리고 스님은 뱃머리에 올라 먼 곳을 본다

스님들은 노젓던 손을 멈춘다

저 거대한 물결 물결 물결

 

기립하여 사십의 스님은 목어를 친다

이제 돌아갈 때가 온 것이다

 

폭풍 속으로

닻줄을 자르고 스님들은 몸을 던진다

 

(이 시는 미황사에 실제로 있었던 100여년 전의 사건을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대웅전을 황금법당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대웅전의 대들보와 벽면에 그려진 천 분의 부처님이 응답하여 나오신다 합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미황사(美黃寺)란 이름이 매우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는 미황사 창건 설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조선 숙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이 쓴 사적기(숙종 18, 1692)에는 미황사의 창건설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경덕왕 8(749) 돌배(石船) 한 척이 사자포(땅끝마을) 앞 바다에 나타났다.

며칠동안 사람들이 다가가면 멀어지고 돌아서면 다가오기를 반복하였다.

이에 의조(義照)화상이 제자들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하자 배가 육지에 닿았다.

배 안에는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있었고 금함(金函)과 검은 바위가 있었다.

금함 안에는 화엄경·법화경과 비로자나불·문수보살·보현보살 등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검은 바위가 깨지면서 검은 소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그날 밤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 "나는 우전국(인도)의 왕이다.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안치하면 국운과 불교가 크게 일어날 것이다"고 하였다.

다음날 의조화상이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달마산 중턱에서 한번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한참을 가다가 다시 넘어지더니 소는 일어나지 못했다.

의조화상은 소가 처음 멈췄던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짓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세웠다고 한다.

 

 

미황사의 ()’는 소 울음소리가 아름다워서 붙인 것이고, ‘()’은 금인의 아름다운 황금색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결국 하니 하고 아름다운 빛이 번쩍였다는 것이겠지요.

그 아름다운 빛은 결국 미황사를 낳고 주변 달마산 동백숲을 붉게 물들인게 아닐는지요.

 

달마산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미황사를 품고 있는 이 산은 달마대사와 인연이 많은 듯합니다.

()을 주로하는 동아시아의 불교에서 달마는 조사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이곳 달마산 외에는 지명에서 달마대사의 체위가 남아있는 곳은 없다고 합니다.

 

흔히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라는 말을 하고는 하는데 달마대사가 깨달음을 얻고 선을 전파한 후 종적이 묘연해진 것은 어쩌면 달마대사가 동쪽(우리나라)으로 와 이곳 달마산에 안거한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인지 달마산의 산세와 능선의 늘어진 선이 달마대사의 이마와 눈매를 닮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대웅보전 뒤로 흐르는 달마산 능선의 흘러감에 눈을 떼지 못합니다.

 

 

이번에는 대웅전 뒤쪽에 고요히 기도하고 있는 법당 응진당으로 올라 갑니다.

보수한지 얼마 안되었는지 단청이 참 곱게 칠해져 있습니다.

 

응진당(應眞堂) 마당은 사찰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이 응진전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은 일품입니다.

특히 이곳에서 바라보는 해질 녘 진도와 그 밖의 뭇섬들이 붉은 바닷물 위로 떠 있는 모습은 가히 절경이라고 합니다.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그냥 이곳의 분위기만 접하고 물러나와야만 한게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이번에는 근처 삼성각으로 발길을 잡습니다.

삼성각 앞 석탑에는 이상하리만치 빼곡하게 들어찬 돌조각들이 보입니다.

아마 누군가 치성을 드리며 석탑에 하나씩 채워넣은 게 그리 된 모양입니다.

저 많은 염원과 기도의 돌조각들이 부처님 만큼이나 경건해 보입니다.

 

 

근처에는 불도를 닦는 스님들의 공부방이 보입니다.

아마 지금도 저곳에서는 묵언의 매질이 계속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응진전 앞마당 한켠 숲속에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 불상하나가 놓여있습니다.

후광을 장식한 돌조각이 떨어져나간 게 안쓰럽기만 합니다.

 

 

 

모든 악은 짓지 말며(제악막작/ 諸惡莫作)

모든 선은 받들어 행하며(중선봉행/ 衆善奉行)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한다면(자정기의/ 自淨其意)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시제불교/ 是諸佛敎)

 

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게 되면 지옥에 가게 된다고 합니다.

 

명부전

 

저승의 염라대왕 앞에는 업경대가 놓여 있는데 이는 저승에 당도한 망자가 평생에 있었던 사소한 일까지 업경에 영상으로 비치며 지나가고 그에 따라 서기가 옆에서 죄목을 일일이 두루마리 문서에 받아 기록을 한다고 합니다.

이 문서를 저울에 달 때 무게가 나가는데 죄가 무겁다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지장보살은 바로 이 업경대 옆에서 죄를 가볍게 처리하도록 변호하여 주는 일을 전담하고 계시는데 바로 이 지장보살을 모신 곳이 명부전입니다.

미황사의 명부전은 대웅보전 옆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명부전에서 스님들 공부방으로 오르는 길에는 작은 개천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흡사 스님들이 욕망을 벗어놓은듯 붉은 동백이 피어있습니다.

동백꽃이 너무 붉어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도대체 스님들은 어찌 저리도 붉은 정념을 잘도 견디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봄날 미황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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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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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다니엘 | 작성시간 13.11.07 한길 님
    올려주시는 사진 잘 보고 있습니다.
    사진들이 너무 예뻐서 당장이라도 사진 속으로 달려가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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