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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석양 / 남진우
1
저녁
내 몸은 푸른 허기로 가득 찬다
바람의 비린내가 맡아지고
손가락 뼈마디에 와 걸리는 녹슨 석양빛이 만져지는 때
오래된 마당 구석 낡은 우물이 들어와 마을 한 켠을 차지한다
내 안에 기숙하던 아픔이 이리도 많아
오늘 이 저녁 만나는 모든 것들이
어두운 입을 벌리고 내 갈 길을 묻는다
2
한때 내 속에 살던 노래는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리고
나는 텅 빈 우물로 고요하다
푸른 물이 그립다고 간혹 되뇌어보지만
이제 누가 내 속에
제 얼굴을 비춰볼 것인가
춥고 어두운 내 몸속에
간혹 길 잃은 짐승이 빠져 한 줌 뼈로 변한다
내가 길들일 수 없는 길들이
저 먼 세상 어디론가 소리 없이 풀려나고
길의 끝
마른 번개 한줄기 달려가다 멈추는 곳
푸른 허기에 감싸인 채
나는 우물을 굽어본다
지팡이가 돌계단을 치는 소리 들리다 그치고
조금씩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3
아주 멀리서
다가오는 빛
날개 달린 짐승들이 일제히 깃을 터는
저녁의 우물 깊숙이
내려오는 빛
손에 받아
고개 숙이고 마셔보는 한 모금의 빛
아무 맛도 없이
내 몸을 푸르게 물들였다 사라지는
저녁의 우물 깊숙이
내려오는 빛
손에 받아
고개 숙이고 마셔보는 한 모금의 빛
희망이라는 이름의 빛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어둠을 밀치며 닥아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