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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 가는 곳

아주 멀리서 천천히 한줄기 빛이 닥아옵니다.

작성자한 길|작성시간14.02.28|조회수354 목록 댓글 0

 

 

저 석양 / 남진우

 

1

저녁

내 몸은 푸른 허기로 가득 찬다

바람의 비린내가 맡아지고

손가락 뼈마디에 와 걸리는 녹슨 석양빛이 만져지는 때

오래된 마당 구석 낡은 우물이 들어와 마을 한 켠을 차지한다

 

내 안에 기숙하던 아픔이 이리도 많아

오늘 이 저녁 만나는 모든 것들이

어두운 입을 벌리고 내 갈 길을 묻는다

 

2

한때 내 속에 살던 노래는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리고

나는 텅 빈 우물로 고요하다

푸른 물이 그립다고 간혹 되뇌어보지만

이제 누가 내 속에

제 얼굴을 비춰볼 것인가

 

춥고 어두운 내 몸속에

간혹 길 잃은 짐승이 빠져 한 줌 뼈로 변한다

내가 길들일 수 없는 길들이

저 먼 세상 어디론가 소리 없이 풀려나고

길의 끝

마른 번개 한줄기 달려가다 멈추는 곳

 

푸른 허기에 감싸인 채

나는 우물을 굽어본다

지팡이가 돌계단을 치는 소리 들리다 그치고

조금씩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3

아주 멀리서

다가오는 빛

날개 달린 짐승들이 일제히 깃을 터는

저녁의 우물 깊숙이

내려오는 빛

손에 받아

고개 숙이고 마셔보는 한 모금의 빛

아무 맛도 없이

내 몸을 푸르게 물들였다 사라지는

 

 

 

저녁의 우물 깊숙이

내려오는 빛

손에 받아

고개 숙이고 마셔보는 한 모금의 빛

 

희망이라는 이름의 빛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어둠을 밀치며 닥아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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