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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의 사진기행(29) : 겨울왕국에서의 개같은 하루

작성자한 길|작성시간14.03.19|조회수391 목록 댓글 1

혹자는 겨울왕국이 거시기 아니냐 하실지 모르겠지만 이건 진짜 겨울나라 이야기입니다.

허기사 수원대학교 만큼 추위가 엄습하고 있는 겨울왕국도 없을테지요.

봄은 봄이되 진짜 봄은 아직 멀었구나.

아무튼 추위를 견딜만 하다면 견디는 것도 그리 나쁜 방도는 아닐테지요.

  

  

자 그럼 이제부터 진짜 겨울왕국으로 들어가 보시지요.

때는 대충 1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봄이 채 오기 전이었으니 2월 하순경 어느날이었습니다.

봄이 오기전 마지막 겨울산을 즐기고 싶다는 욕심에 무작정 집를 나섰습니다.

 

  

2월말경이니 이제 얼마 안있어 곧 봄이 올거라는 생각에 혹 버들개비가 눈이라도 뜨지 않았을까 내심 기대도 하면서 동도 트지 않은 새벽에 점봉산으로 향했습니다.

예상보다 산은 눈이 많아 쌓여 있었습니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봄이 오기전 눈을 보고 싶은 욕심이 어느정도 충족될수 있었으니 말이지요.

 

  

하지만 숲으로 들어갈수록 황당하기만 했습니다.

눈이 남아있는 게 아니라 아예 한 겨울인양 모두가 꽁꽁 얼어 붙어있었으니 말이지요.

여기는 도무지 봄이 올것 같지 않은 분위기입니다.

 

  

꽁꽁언 개울을 건너 조심스럽게 산등성이를 향해 발자욱을 옮기기 시작하는데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잠시 뒤를 돌아보니 큰 개 한마리가 내 뒤를 따라 오고 있었습니다.

 

시베리안허스키 같아 보였습니다.

생각보다 순한게 내가 부르니 곁으로 옵니다.

배낭에서 육포 하나를 꺼내 상견례용으로 주었더니 어쩜 그리 잘 먹는지.

마치 며칠을 굶은 것 같이 허겁지겁 먹더니 더 없냐는 표정입니다.

 

 

어느틈엔가 내 뒤를 쫓던 개가 내 앞을 가로질러 저만치서 힐끗힐끗 돌아보며 빨리 오라는듯 하고 있습니다.

이 녀석 이름이 뭔지 모르니 그냥 머루라 불러보기로 했습니다.

 

머루야하고 부르니 아는 척을 하고 잘도 따라 옵니다.

그때마다 주머니에서 육포를 하나씩 꺼내 녀석에게 주었더니 머루는 신이난 모양입니다.

 

 

문득 머루를 보며, 모든 생명있는 존재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와 담소하며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상대방과도 금방 친해 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무언가 조건을 따지고 논리를 생각하다보면 도무지 어울릴수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느껴지는대로, 요즘말로 느낌아니까 그 느낌 그대로만 하면 되는데...

그걸 못해서 사람들은 그 모양 그 꼴로 지내야 한다는 게 너무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래서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게 되고...

 

 

문득 머루랑 지내는 이 순간이 너무 고맙고 기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을 머루랑 보낼수 있다니 말이지요.

 

예전 유학시절에 베르나르디라는 개와 한달간 같이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친구처럼 지내던 독일아저씨가 잠시 해외로 업무차 다녀오는 바람에 제가 그 개를 맡아 돌보아 주어야 했었지요.

개는 그리 크지 않은 잡종견이었는데 진돗개 비슷하게 생긴 작은 개였답니다.

 

베르나르디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답니다.

헌데 오늘 머루가 저를 감동시키는군요.

마치 오랜만에 베르나르디를 만난 것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머루는 점봉산 입구에서 부터 벌써 2시간 동안 저를 안내하면서 앞서 가고 있습니다.

녀석은 가끔 힘이 드는지 아니면 그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인지 내게 안겨 혓바닥으로 얼굴을 핥아대고 손을 빨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흡사 어린아이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베르나르디랑 지낼 때도 그랬는데...

개들은 자기를 좋아한다고 여기는 사람을 만나면 입으로 핥는 게 제일 최상의 표현인가 봅니다.

 

 

아무튼 어쩜 머루가 그리도 잘 따르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아주 오래된 사이같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입니다.

어쩌면 내가 개같은 인생이라 그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 듯 스쳐 지나갑니다.

 

 

머루는 이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내 주변만 맴돌며 나를 안내하고, 아니 어쩌면 지금 나를 자기 주인처럼 생각하고 보호하고 있는건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눈 속에 빠져 미끄러져 넘어지면 달려와 나를 핥아대고 낑낑대기까지 합니다.

얼마나 산속에서 사람이 그리웠으면 이렇게 처음보는 나를 따라다니는 걸까...

 

 

오늘처럼 숲에 사람이 드문건 오랜만입니다.

물론 겨울이니 그럴테지만 산은 등산객들로 언제나 만원입니다.

요즘에는 숲속 깊은 곳까지 엄청나게 많은 집들이 들어서고 있지요.

 

숲은 숲답게 남겨두어야 하는데 우리의 산에는 숲은 없고 그저 맛있는 차와 음식을 즐길수 있는 음식점같은 산장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산장에는 저마다 도사같은 자태를 뽐내는 사람이 꼭 한사람씩 자리를 차지하고 너수레를 떨지요.

어쩌면 머루도 그런 사람들 때문에 지금 여기서 이렇게 저와 함께 하게 된건지 모르겠습니다.

 

 

머루가 저만치서 빨리오라고 재촉을 합니다.

오랫만에 힘을 내어 뛰어봅니다.

사실 눈속에서 뛴다는 게 쉽지가 않은데, 옛날 유학시절 알프스를 거닐던 때처럼 젊은 날을 회상하며 잠시 달려 봅니다.

 

조릿대가 무성한 길을 지날 때는 머루가 아주 대견스러웠습니다.

자기가 먼저 조릿대 길을 헤집고 다니며 눈을 다 털어내거든요.

그리고는 날보고 그 다음에 따라 오라는듯 하니 말입니다.

새삼 기특한 녀석이란 생각이 듭니다.

주머니에서 남은 육포를 또 한조각 꺼내서 녀석에게 줍니다.

 

 

점봉산 정상까지 갈수 있으려니 욕심을 부려보지만 눈이 너무 많이 쌓여있어 갈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많은 눈이 있을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비도 소홀했던 게 아쉽기만 합니다.

아뭏튼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머루가 빨리오지 않고 뭐 하느냐는듯이 앞서가며 길을 재촉합니다.

머루는 여전히 기운이 넘치나 봅니다.

하지만 이제 하산을 해야하니 머루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돌아가기가 싫은 모양입니다.

 

 

오던 길로 되돌아 가자며 머루를 부르는데 녀석은 따라올 생각을 안합니다.

가던방향으로 자꾸만 올라가자고 합니다.

그러더니 개구장이 노릇까지 합니다.

아예 주저않아 버립니다.

하지만 어쩔수 없이 출발지인 단목령 입구로 되돌아 왔습니다.

 

 

여기 어디쯤이 머루가 살던 집일 것입니다.

아마 주인은 도시에 볼일이 있어 머루만 그냥 혼자 놔두고 나간 게 아닐까 추측이 들었습니다.

집안에는 인기척이 전혀 없습니다.

 

 

근처 개울가에는 황태를 걸어놓은 게 보이는데...

사람이 살고 있다는 흔적입니다.

이곳이 머루의 주인이 사는 곳이 분명할거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루가 내심 안쓰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헤어져야만 합니다.

 

 

어느새 차를 세워둔 산 입구 주차장에 다다랐습니다.

집에 있으라고 했는데도 그곳까지 머루는 나를 배웅해 주었습니다.

이미 집에서 2-3Km는 족히 내려 왔을텐데도 녀석은 돌아갈 생각을 않습니다.

막무가내로 자꾸만 따라오려고만 합니다.

이거참 난감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렇다고 데려갈수도 없고...

 

 

차를 타고 점봉산을 빠져나오는데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머루가 막무가내로 내차를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거의 5Km 정도는 내차를 따라왔지 싶습니다.

 

 

백미러에 보이는 머루를 바라보다 하는 수 없이 차를 세우고 머루를 태웠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그 녀석 집으로 데려가 주인을 찾지만 여전히 인기척은 없습니다.

하는수 없이 머루를 집기둥에 느슨하게 묶어 두고 차를 돌렸습니다.

 

 

머루야 다음에 또 만나자.”

다음에는 육포를 아주 많이 준비해 올게

집으로 오는 내내 마음 한 켠에 머루의 잔상이 떠나지가 않았습니다.

베르나르디의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겨울왕국에서 개같은 하루를 보낸 어느날의 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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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살고지 | 작성시간 14.03.19 아름다운 설경을 배경으로 한사람의 인간과 동물인 개사이에 펼쳐지는 순수한 교감은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합니다. 아무런 이해타산도 없이 서로간에 주고받는 정은 오히려 사람이 보고 배워야 할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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