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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잎으로 칼을 얻다, 전시회 방문기

작성자이뭐꼬|작성시간14.11.24|조회수393 목록 댓글 3

얼마 전에 저는 덕수궁 전시회에 가보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습니다. 쇠뿔은 단김에 빼라고, 저는 어제(11/23, ) 오후 지하철을 타고 덕수궁에 가 보았습니다. 마침 덕수궁 정문에서 수문장 교대식이 있어서 재미있게 구경을 하고 1000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습니다. 고궁에서 느끼는 가을의 끝자락 풍경이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단풍나무 몇 그루가 아직도 빨간 단풍잎을 예쁘게 달고 있어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덕수궁 중명전에서 전시회가 열린다는데, 전시회가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리인 복장을 한 사람에게 물어보니 중명전은 정동극장 옆 골목길에 있는데 정문으로 나가서 돌담길을 돌아가야 있다는 것입니다덕수궁 돌담길에는 아직도 느티나무, 은행나무 잎이 떨어져 있어서 운치가 있었습니다.  정동극장 왼편의 작은 골목길 끝에 옛날 건물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전시회는 2층에서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회영 6형제는 대단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우당 이회영은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길러낸 독립투사였습니다. 우당은 6형제 중 4남인데, 5남인 성재 이시영은 1948년 건국 당시 초대 부통령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이시영은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대학교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원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경희대의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에서 수원대 총장의 박사논문 표절 여부를 심사하였으니까 말입니다.

 

전시회에서 다음과 같은 해설문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기록된 우리 역사 이천 년 이래 겨레가 위기에 처했을 때 떨쳐나선 숱한 인물이 있었다. 그 가운데 단기필마로는 단연 안중근, 군사조직적 대응은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 집안으로는 이회영과 6형제를 서슴없이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신분, 재산, 목숨, 자식, 우정, 눈물, 재능, 배고픔마저 조국 독립을 위해 바친 거룩한 인간상을 유산으로 남겼다.”

 

우당 이회영과 6형제는 40여명 가솔을 거느리고 경술국치(1910)를 당한 그해 12월 서울을 떠나 신의주를 거쳐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마차를 타고 서간도로 향했다. 이회영과 6형제는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고 서간도에 터를 잡자마자 경학사(耕學社)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학비는 무료였다. ‘경학은 밭을 갈면서 공부한다는 뜻이고 신흥은 이회영의 영원한 동지 이상설 등과 함께 조직한 항일비밀결사 신민회를 다시 일으킨다는 뜻이 들어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 때까지 3,500명 졸업생을 길러냈다. 전성기 때 학생은 600여명에 이르렀다. 한국 무장독립투쟁의 양대 대첩인 봉오동대첩과 청산리대첩은 신흥무관학교 사람들이 주축이었다.”

 

베이징 시절에 조선 최고의 부자였던 이회영 식구들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서간도 시절과 마찬가지로 가난, 배고픔, 질병이었다. 1주일에 세끼 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발가락이 나오는 신발을 신고 다녀야 했던 이회영은 춥고 배고픈 겨울밤을 견디기 위해 때로 피리를 불곤 했다. 명문 사대부 출신인 그는 사군자 중 묵란 또한 잘 쳤다. 추사 김정희에서 제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으로 이어지는 필법(석파란, 석파는 이하응의 아호)에 이회영은 빼어난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이 묵란을 내다팔아 이회영과 동지들은 독립운동자금으로 쓰곤 하였다. 먹으로 난초를 그리는 묵란 역사는 나라 잃은 선비의 기상을 말하는 데서 시작되었는데 이회영은 이을 잇고 있을 뿐 아니라 난잎을 칼로 바꿔낸 예술가이기도 했다. 행동을 통해 예술혼과 역사의식의 일치를 이뤄냈던 것이다.”

 

“19321117일 이회영은 고문 끝에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6형제 중 이시영만이 유일하게 해방된 조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우당 이회영과 6형제의 삶과 행동은 나라가 어려울 때 '배운 자,' '벼슬한 자,' '가진 자'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제시한 보기 드문 귀감이다

이회영의 묵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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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단풍나무 | 작성시간 14.11.24 글 가운데 "이회영과 6형제는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고 서간도에 터를 잡자마자 경학사(耕學社)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학비는 무료였다."라는 표현에 주목해봅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개인재산으로 무관학교를 세우고 학비는 받지 않았군요.
    사학을 건립하고 운영하는 지도자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바른손 | 작성시간 14.11.24 이 시대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정말 꿈깥은 인생을 사셨네요.
    교수산성을 다시한 번 생각합니다.
    언행이 다르면서도 남들 앞에 뻔뻔하게 나서는 사람들.
  • 작성자교협홍보실 | 작성시간 14.11.25 경희대학교의 교훈은 '학원의 민주화' '사상의 민주화' '생활의 민주화'입니다.
    수원대학교의 교훈은 '검소' '정의' '창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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