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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및 에세이

운길산 산행기 - 6

작성자이뭐꼬|작성시간14.10.12|조회수123 목록 댓글 0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해지는 두물머리가 눈에 선하게 들어오는 절, 경치는 아름답고 마음은 즐겁기만 했는데, 오직 현묘한 도를 논할만한 스님이 없었던 것이 서운하다 했으니 구도(求道)의 자세로 살아가던 젊은 날의 다산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수종사였건만 세월은 흘러 노인이 된 다산은 더 이상 산에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다산이 70살에, 정조대왕의 외동사위이며 39세이던 해거도위(海居都尉) 홍현주(洪顯周)가 친구들과 함께 그를 찾아와 운길산의 수종사에 오르자고 했을 때 다산은 함께 가지 못하는 늙은이의 서러움을 노래했다. 시의 제목은 임금의 사위께서 수종사로 놀러가자 했으나 내가 늙어서 따라가지 못함(都尉將游水鍾寺 余老不能從)”이다.

 

수종산의 저녁 빛은 찡그린 얼굴 모습

눈꽃 핀 나무와 얼음 샘이 초조하게 사람 기다리네.

고갯마루에 까마귀 날자 그때야 말채찍 가다듬고

역사(驛舍)에 닭 울자 벌써 수레바퀴 기름치네.

북쪽 산구비 일천 자락을 붙잡고 올라

동쪽 봉우리 만 가마 티끌 깨끗이 씻고 싶어라.

이러한 풍류놀이에 뒤따르기 어려워

백발의 노인 시 읊으며 바라보니 마음만 아프네.

 

水鍾山色暮如顰 雪樹氷泉悄待人

嶺路鴉翻初振策 驛亭鷄唱已膏輪

思攀北崦千回磴 淨洗東華萬斛塵

如此風流難附尾 白頭吟望黯傷神

 

조대왕의 인정을 받아 한동안 잘 나가던 다산은 나이 40살에 천주교도라는 이유 때문에 모함을 받아 전남 당진으로 귀양을 간다.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나이 57살에 수백 권의 저서를 안고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비록 복권되지 않아 벼슬길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학문과 인품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당대의 명사들이 자주 찾아왔다. 인생과 학문을 논하고 역사와 세상을 논하며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노년의 삶을 여유롭게 보내었다. 그렇지만 나이가 많아 산에 오르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읊은 시는 슬픔을 자아나게 한다.

 

수종사 왼쪽 옆길로 가파른 하산길이 나 있었다. 하산길에는 지팡이 2개가 큰 도움이 되었다. 등산에 비해 하산은 빨랐다. 하산은 인생의 후반부라고 비유할 수 있다. 예전에야 평균수명이 40세가 채 안 되었으니, 40살만 되어도 불혹이니 뭐니 하면서 후반부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인생을 살려면 인생의 후반부를 잘 살아야 한다. 전반부에 아무리 성공하고, 출세하더라도 후반부가 흐려지면 일생이 흐려진다. 그러므로 하산길에서 사고가 많이 나듯이, 인생의 후반부에 전반기의 명성을 유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젊은 날에 시간은 얼마나 느리게 가는가? 그러나 인생의 정점을 지나 늙어가는 시간은 얼마나 빠른가? 그렇지만 마음만 잘 먹으면 하산길은 오히려 여유가 있을 수 있다. 등산할 때에 보지 못하던 주변 풍경을 자세히 둘러 볼 수가 있다. 고은 선생의 다음과 같은 시는 그래서 의미가 깊다.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처음처럼은 최근에 소주 이름으로 유명해졌지만, 사실은 신영복 선생의 서예 글씨이다. 초심을 잃지 말라는 말도 있지만, 우리는 인생의 초반기에 가졌던 정열과 도덕성을 끝까지 유지하는 사람을 보기 어렵다. 쉬운 예로서 박정희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위인인가 독재자인가? 내 생각으로는 유신 전과 후로 나누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유신 전에 그는 검소하고, 서민적이고, 민주주의를 따르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 197410월 유신 전에 청와대에서 그는 막걸리를 즐겼으며 반대자를 탄압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신 이후 19791026일 운명의 만찬장에서 술은 시바스 리갈로 변해 있었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부마사태를 탱크를 동원하여 밀어버리자고 주장했다. 남산의 중앙정보부 취조실에서는 국회의원, 대학교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고문을 당했다. 즉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혁명을 일으키던 당시의 초심을 끝까지 유지하지는 못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나를 포함하여 보통사람들은 나이 들어 노욕(老慾)을 떨쳐 버리기가 어렵다. 나이들수록 새로운 것은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이 세어지고, 먹을 것을 탐하고, 명예를 탐하여 젊은 사람들로부터 아이고, 그저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소리가 나오지만 막상 본인은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젊었을 때에 . . ”로 시작되는 회고담과 장광설은 대개의 경우 청중에게는 영양가는 하나도 없고 듣기에 괴로운 독백이 되기 쉽다. 내가 좋아하는 옛날 속담이 하나 있는데, “나이들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는 말이다. 늙어갈수록 말수는 줄이고, 지갑을 열어서 남에게 베풀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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