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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및 에세이

장편소설(53) - 최북과 고흐

작성자이뭐꼬|작성시간15.07.22|조회수248 목록 댓글 0

며칠 후, K교수는 미술대학의 사)여교수와 미녀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하게 되었다. 사)교수가 나이가 한 살 더 많고 사)교수의 남편도 잘 아는 사람이어서, K교수는 이전에도 한 학기에 한 번 정도 점심 식사를 같이 하고 있었다. 여교수와 식사를 할 때에는 2:1로 만나야 하므로  그 날 K교수는 화학공학과의 아)교수와 함께 나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은 미스K가 마침 식당에 없었다.

 

세 사람은 스파게티를 먹으면서 주로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K교수는 그림에는 재능도 없고 관심도 없었지만, 사)교수가 말하는 것을 열심히 들어주었다. 평소에도 말이 없는 H교수는 그날도 별다른 말이 없이 조용하였다. 독일에서 유학한 H교수는 봄 가을 1년에 두 번은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R석 표를 사서 부인과 같이 가볼 정도로 부유하고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아)교수는 그러나 그림에 대해서는 K교수처럼 문외한이었다. 그날 대화는 사)교수가 이끌어갔다.

 

우리나라에서 중학교 학력 이상의 사람치고 빈센트 반 고흐라는 네델란드 출신의 화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는 1890년 그 유명한 자화상을 그린 두 달 뒤 권총자살로 37세의 생을 마감한 불우한 화가였다. 그는 어느 날 발작을 일으켜 한쪽 귀를 뎅겅 자른 기행으로 알려져 있으며 퀴즈에도 많이 나온다. 그러나 조선시대 최북(崔北)이란 화가를 학생에게 물어보면 고등학생은 물론 미술을 공부하는 대학생에게 물어 보아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한쪽 귀를 잘라버린 서양의 반 고흐는 알면서 한쪽 눈을 제 손으로 찔러버린 조선의 최북은 모르는 것이다. 최북은 1712년 생으로서 숙종 때에 태어나 영조대까지 살면서 겨울밤 홑적삼 입고 눈구덩이에서 얼어 죽었다. 이름의 자를 반으로 쪼개어 자()를 칠칠(七七)이라고 했고 호는 붓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호생관(豪生館)이라고 했다.

 

최북과 고흐는 둘 다 미치광이 화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반 고흐는 새로운 화가를 세상은 광인 취급한다. 내가 돌아버릴수록 더욱 진정한 예술가로 가는 줄 모르고 . . ”라고 말했다. 칠칠이 최북도 자신을 미친 사람 취급하는 이에게 손가락질 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돈 보따리 싸들고 와 거드름 피우는 고관에게는 엉터리 그림을 던져 줘 희롱하고 좋은 그림을 몰라주면 그 자리에서 박박 찢었다. 두 화가는 자신의 미친 짓이 곧 지독하도록 말짱한 세상 때문이라 했다.

 

고흐의 발작은 뜨거운 아를르의 태양 아래 마시던 독주와 초주검에 이르는 하루 14시간의 그림노동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10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1백 점의 유화와 8백 점의 데생을 남겼으나 생전에 팔린 그림은 붉은 포도밭딱 한 점으로서 4백 프랑을 받았다.

 

최북의 주량은 하루 막걸리 대여섯 되, 그는 언제나 술에 취해 비틀거렸으며 오두막에서 종일 산수화를 그려야 아침 저녁 끼니를 겨우 때울 수 있었다. 대신 가난한 이에게는 백동전 몇 닢에도 선뜻 그림을 내주었다. 어느 날 먹물 한 방울이나마 얻으려던 세도가가 그의 붓 솜씨를 트집 잡자 네까짓 놈의 욕을 들을 바에야하면서 제 손으로 한 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고 말았다. 최북은 열흘을 굶다 그림 한 점을 팔아 술을 사 마신 겨울 날 성곽의 눈구덩이에 쓰러져 죽었다. 우리나라 미술교과서에서는 고흐는 소개하면서도 최북은 외면하고 있다. 미술가들이 앞장서서 우리나라 미술 교과서를 바꾸어 놓아야 할 것이다.

 

K교수가 사)교수에게 물었다.

그런데, 밀레나 고흐의 그림은 미술 작품이라고 보아 주겠는데, 현대 미술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어요. 교수님은 백남준의 설치 미술을 보면 아름다움이 느껴져요?”

현대 미술이 되면서 그림이 점점 더 어려워졌지요. 그림은 보는 것보다는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보면서 생각을 해야 그림이 재미있어요.” 현대미술이 전공인 사)교수가 신이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현대 미술은 마르셀 뒤샹이라는 사람이 1917년 독립예술가협회에서 주최한 미술전에 집에서 오랫동안 썼음직해 보이는 수세식 변기통을 떼어내서 제목을 <()>이라고 붙이고 작가의 이름 대신 멍청이라고 사인을 해서 출품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뒤샹은 전시회 주최 측으로부터 장난하지 말라며 변기통을 전시할 수는 없다고 거절당한다. 뒤샹은 해명서를 제출한다. 멍청이가 그 변기통 조각을 실제로 만들었느냐 안 만들었느냐, 실제로 똥 오줌이 묻어서 독한 냄새가 나느냐 안 나느냐, 똥오줌 냄새가 작품에 포함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멍청이가 변기통을 보고 그것을 작품으로 인정했느냐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다. 멍청이의 선택, 즉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변기통을 조각으로 선택해서 예술의 자리에 올려놓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변기통은 오물을 밑으로 내리는 기능만 가졌다. 이것은 단순한 생각이다. 변기통을 변기통으로만 보는 사람은 멍청이이다. 작가는 변기통을 보면서 내려 보내야 샘처럼 솟아 오른다는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 후 뒤샹은 변기통 하나로 일약 세잔과 피카소의 반열에 오르게 되고 현대미술의 창시자로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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