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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및 에세이

이뭐꼬의 사는 이야기 (4)

작성자이뭐꼬|작성시간13.09.16|조회수528 목록 댓글 3

                                 아파트 장만기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86년에 귀국을 하자마자 외숙 댁에 들렀다. 7년 전 전세돈을 빼내어 유학을 떠나면서 장롱은 처분하고, 짐은 집이 큰 외숙 댁의 다락방에 쌓아두고 갔기 때문이다. 새로 얻은 직장(국토개발연구원)에서는 해외과학자 유치를 적용하여 대치동의 31평 은마 아파를 관사로 제공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짐을 옮겨놓고 숟가락, 젓가락, 장롱, 식탁을 사고, 소파는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중고를 샀다. 나이 서른 여섯에 마치 신혼살림을 시작하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관사로 들어간 것이 잘못이었다. 아파트라는 곳이 같은 동에는 평수가 같기 때문에 대개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산다. 30평 아파트에는 30평에 걸맞는 생활수준이 있으며 돈 씀씀이도 대개 비슷하다. 자연 주위 사람에 맞추어 소비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부터 사글세나 전세로 출발했어야 생활수준을 낮출 수 있었을텐데, 분수에 맞지 않게 큰 집에 살았던 것이다.

   집 장만을 위해서 청약저축을 들었다. 청약저축이라는 것은 매월 10만 원을 불입하면 서울시나 건설부에서 전용 면적 25.7평 이하의 국민주택을 지어 가입한 순서대로 준다는 것이다. 매우 합리적인 제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2년 쯤 지나 집값 폭등이 일어났다. 하루가 다르게 집값이 뛰더니, 1년이 지나자 3천만원 하던 관사 아파트가 1억이라고 한다. 그때 집 없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 자기 집에 살고 있는 우리 옆집 아줌마는 일년 만에 7천만 원을 벌었다고 좋아하였다. 집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억대 부자가 되었다. 그렇지만 집이 두 채가 아닌 한, 집을 처분하기 전에는 서류상의 부자일 뿐이다.

   사람들의 화제는 온통 집값 땅값이 뛴 이야기 뿐이었다.

아 글쎄, 우리 형님은 집을 산 지 한달 만에 2천만 원이 올랐다네. 그러니 하루에 얼마를 번 셈이야?”

(그 집을 판 사람은 얼마나 속상했을까?)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전세를 살고 있었는데 주인이 1천만원만 더 내고 사라고 해서 은행융자를 받아 집을 계약했는데, 집값이 뛰니까 주인이 계약금을 주면서 파기하자고 하더라나. 안 된다고 법대로 하자고 끝까지 버티어 앉아서 큰 돈을 벌었지 뭐야.”

(악착같이 싸운 것이 무어 자랑이라고.)

우리 사촌은 화성군에 논 1천 평 물려받은 것이 있었지. 그 땅이 평당 만 원이었는데, 도로가 난다고 하더니 평당 10만 원으로 열배가 뛰어, 앉아서 1억 원 벌었대.”

(그렇게 땅값이 올라서 도로를 넓히기도 어렵고, 기업들이 공장 짓기도 어렵지.)

   그 당시 앉아서 돈 번 사람이 참 많았다. 남이야 앉아서 돈을 번다지만, 당장 우리 집에 비상이 걸렸다. 아내는 매일 신문을 보면서 아이고 큰일이네”, “한달 만에 또 1천만 원이나 올랐대요”, “절약하고 저축했자 무슨 소용이야”, “언제 우리 집이 생기나”, “정부는 무얼하는거야”, “건설부 장관은 바보인가 봐”, 등등 걱정하다가 욕하다가 아내가 묻는다. “당신은 무슨 대책이 있어요?” 나는 글쎄, 큰일이야……하고 같이 걱정하는 수밖에 무슨 대책이 있나. 그 때에 수많은 가정에서 집 때문에 한숨 쉬고, 부부싸움하였을 것이다. 나는 그 당시에 집 때문에 아내에게 바가지 긁히면서 수없이 싸웠다. 그러한 괴로운 싸움들을 기억하고 싶지 않으며, 나의 기억장치에서 아주 지우고 싶다.

   당시는 제6공화국으로서 국정방침은 위대한 보통 사람들의 시대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밝혀진대로 믿어 주세요!” 하던 노태우씨는 5천억 원 상당의 뇌물을 관례라는 이름으로 받고 있었다. 집 없는 보통 사람이 볼 때는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는 경제를 잘 모르지만 그 당시에 부동산 값이 뛰고 인건비가 뛴 것이 우리나라 경제를 어렵게 만든 근본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때 우리 나라의 땅값이 전체적으로 올라서, 만일 우리 나라 땅을 모두 팔면 미국 땅의 70%를 살 수 있다나. 한마디로 우리 나라의 땅값, 집값은 대부분이 거품인 것이다.

   이렇게 되자 괜히 유학간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까지 하게 되었다. 내 친구들은 다들 자리를 잡고 부장이나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자기 집 하나는 다 마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무언가? 공부한다고 보낸 7년 동안 얻은 것은 종이로 만든 학위증 하나뿐이니 경제적으로 따지면 굉장한 손해였다. 그렇다고 아내에게까지 괜히 유학갔다고 말하기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내는 이제 본격적으로 짜증을 내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미국 가서 얻은 것이 무어에요? 이 나이에 집 한 칸 없이. 당신이야 직장에 나가 일하면 집 걱정은 잊을 수 있고, 또 점심은 직장 동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지만, 나는 자나 깨나 집 걱정, 도대체 이게 무어냐 말이에요?”

할 말이 없소. 그러나 집값 뛴 것이 내 잘못은 아니지 않소. 다 정치를 잘못해서 그렇지. 나도 최대한 절약생활을 하고 있소. 당신이 도시락 싸주면 내일부터 도시락 싸가지고 다닐게. 나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

이제 절약하는 데도 한도가 있지, 이 이상 더 어떻게 절약한단 말이에요.”

이러다가는 정말 식구들이 병 나겠소. 집 장만하는 계획기간을 1~2년 늦추고 약간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현명하지 않겠소?”

정말로 이 양반이 세상 물정 모르네, 1년 늦추다가 5, 10년 늦어질 수 있다는 것을 모르세요?”

   그러다가 직장을 옮겨 대학교수가 되었는데, 31평 관사에서 살다가 13평 전세로 이사가게 되었다. 그것도 퇴직금에다, 적금든 것을 다 보태고, 그래도 모자라서 은행에서 전세 자금을 융자받아 겨우 마련하였다. 나는 아내에게 매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남편을 잘못 만난 죄로, 자기 친구들은 이제는 멋부리고 레저를 즐기면서 우아하게 사는데 박사의 아내는 허울만 좋았지 이게 뭐란 말인가. 연탄가스 냄새를 맡으며 방 두 개에 연탄을 가는 일은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되었다. 그밖에도 상당 부분의 가사 일이 가정 평화라는 미명 아래 내 몫으로 넘겨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고 보니 청약저축제도라는 것이 맹랑한 제도였다. 청약저축과 비슷한 제도로서 청약부금이라는 것이 있다. 청약부금은 일시불로 2백만 원을 불입하면, 1년이 지나면서부터 자동적으로 국민주택규모 이상의 민영 아파트에 신청할 자격이 주어진다. 청약저축은 2백만 원이라는 목돈을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입한다. 그들은 한 달에 10만 원 이하의 불입금을 매달 납입하고, 정부에서는 상대적으로 저소득자인 이들에게 국민주택규모 이하의 주택을 지어서 납입 차수가 많은 순서대로 신청자격을 준다.

   이론적으로 보면 매우 합리적인 제도이며, 저소득자를 위한 제도이지만 실제 운영은 매우 불합리하였다. 우선 이들에게 공급할 주택 물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다. 청약저축 가입자가 늘어나면서 줄이 길어져서 8, 9년 기다려도 순서가 오지 않는 것이다. 8년 동안 월 10만 원씩 납입했다면 1천만원이라는 큰 돈이 되는데, 정부에서는 이 돈을 주택건설에 이용한다. 정부는 집을 짓되 이익이 남는 큰 평수의 아파트를 많이 짓고, 이들에게 돌아가는 소형 아파트는 적게 짓는다. 결국 정부를 믿고 꾸준히 저축하면서 기다린 사람들은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끝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청약저축 가입자들이 뭉치게 되었다. 청약저축가입자협의회(약칭 청저협)가 발족되고 회장은 남 모씨가 맡게 되었다. 남 모씨는 원래 부천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했었는데, 자신은 집이 없었다. 그러다가 집값이 뛰고, 부친이 지하 셋방에서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는 집 한 칸없이 돌아가신 부친의 한을 풀어 드려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생업을 팽개치고 청저협 일에 발벗고 나섰다. 그러나 관계기관에서는 지극히 비협조적이었다. 우선 회원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건설부에서는 청약저축가입자 명단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 20여명이 모여 우선 협의회를 발족하였다. 이들은 모두 가난하였기 때문에 한 달에 5천 원의 회비를 내는 것도 힘들어 했다. 이들은 서울시와 주택공사, 건설부, 국회의원과 각 정당을 방문하여 그들의 주장을 설명도 하고 때로는 데모도 해야 하는데, 이들은 모두 생업에 바빠서 모이기가 쉽지 않았다.

   아내는 아파트 단지에 드나드는 두부 장수 아주머니에게서 우연히 청저협을 알게 되어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그전까지는 경찰관만 보아도 무서워하던 아내였는데, 청저협 일에는 용감하였다. 정부의 주택정책은 청약저축 가입자를 우롱하는 불합리한 정책이다. 부자가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우리나라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은 알게 모르게 피해를 입고 있으므로, 작은 목소리들을 합하여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해야 정부에서 겨우 듣는 체라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용감한 아내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정신적으로 아내의 투쟁을 지원하였다. 얼마 후 아내는 놀랍게도 청저협 강남지부장이라는 엄청난 감투를 쓰더니, 과천의 종합청사에 네 살인 둘째 아들을 데리고 데모하러 가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인가 드디어 신문에 청저협기사가 실렸는데, 나는 피켓을 들고 있는 아내의 얼굴을 신문 사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끝내 이들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았다. 원하는 사람은 청약부금으로 바꾸어 주겠다는 것이 정부의 해결책이었다. 10년 동안 기다린 사람을 1년 동안 기다린 사람과 똑같은 자격으로 501, 1001의 투전판에 끼워 주겠다는 셈이다. 그들이 10년 동안 정부를 믿고 기다린 시간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가 보아도 참으로 불공평한 정책이었다. 줄 서서 기다리면 손해 보는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어떻게 국민들에게 법을 지키며 줄 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건 그렇고, 우리 가정의 내 집 마련은 언제나 이루어질지, 참으로 답답한 심정이었다.

   드디어 결단의 시기가 왔다. 우리는 청저협 사람들에게 매우 미안함을 느끼며 청약부금으로 바꾸어 민영아파트에 신청하였다. 민영아파트 신청은 분양가 외에 임의로 채권입찰액을 써내야 하는데, 그놈의 채권이라는 것이 도박 냄새가 물씬 나는 매우 불안스러운 제도였다. 채권액을 적게 써서 두 번이나 미끄러진 뒤에 우리는 우면동의 30평 아파트에 당첨되었다. 귀국 후 7년 만의 일이다. 그러나 입주는 2년 후이다. 우리 부부는 결혼한 지 18년이 되고, 내 나이 45세인 1995년에 처음으로 재산세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우리 가정에서 내 집 마련의 공은 물론 그동안 여러 가지로 맘고생이 많았던 아내에게 돌려야 한다. 나는 집 장만에 관한 한 참으로 무능한 선비일 뿐이었다.

   아파트 당첨을 신문에서 확인하는 순간, 젊어서는 그렇게 예쁘던 눈가에 이제는 주름살이 생긴 아내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나는 기쁘다기보다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내 집 마련이 이렇게 어려운 대한민국에서 사는 모든 무주택자 부부들의 한숨 소리와 싸움 소리가 귀에 쟁쟁하였기 때문이다.

(199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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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뭐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9.16 제가 그 당시 무주택자로서 느꼈던 고통과 절망감은 지금까지도 생생합니다. 저는 그 이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 유학가겠다고 하면 적극 말립니다. 현재 수원대의 계약직 교수님 중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은 보통 사람이라면 내집마련이 까마득하기만 할 것입니다.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대한민국에서 내집마련이 어려운 것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 작성자상생은끝났다 | 작성시간 13.09.17 이뭐꼬님의 글을 읽다 보면 약간 좌파 기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좌파라고 해서 기분나빠하지는 마십시요.
    여기서 좌파라 함은 공산주의나 종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수 대 진보 구도에서 볼 때에 진보쪽이라는 말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이뭐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9.17 2013년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에서 좌파라는 단어는 색갈이 들어 있어서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진보라는 단어가 무난하지 않을까요? 저는 청년 시절부터 진보로 기울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진보란 "우리 주위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도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 보자"는 주의가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라면 저는 보수주의자가 아니고 진보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정치 논쟁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치와 종교는 아무리 논쟁해도 결론이 나지 않고 논쟁하는 사람끼리 의만 상합니다. 이 정도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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