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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및 에세이

이뭐꼬의 불교 이야기 (2)

작성자이뭐꼬|작성시간13.10.02|조회수250 목록 댓글 2

색즉시공 - 2

 

   이처럼 색즉시공이 과학적으로도 맞는다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지만 나는 이러한 주장들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색즉시공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E=mC²을 미리 알고서 이렇게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20세기의 과학적 발견이 이천오백 년 전에 말해진 색즉시공과 일치한다는 주장은 불자들이 들으면 기분 좋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글쎄요, 아전인수격이라고나 할까요? 종교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는 그 영역과 표현방식 그리고 증명방식이 엄연히 다른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의 영역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때 여러 가지 혼란이 빚어집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보면 겨자씨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작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명제가 식물학적으로도 옳고, 그러므로 성경은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조금의 오류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태로운 논법입니다. 예수님을 훌륭한 식물학자로 간주하기 보다는 죄 많은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삶의 진리를 가르쳐 주신 분으로 간주하는 것이 종교와 과학의 영역을 구분할 줄 아는 현명한 자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은 20세기에 와서야 밝혀진 이 우주의 구조를 이천오백 년 전에 벌써 갈파하신 훌륭한 천문학자로 간주하기보다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상에서 해탈 할 수 있는 삶의 진리를 가르쳐 주신 분으로 간주해야 할 것입니다.

   너무 장황하게 색즉시공의 주석만 이야기했지 나의 견해는 아직 밝히지 않았군요.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색즉시공에서 중요한 것은 이 표현에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변화의 개념입니다. 변화의 개념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며 부처님의 유언에도 나옵니다. 즉 부처님의 마지막 유언은 모든 것은 변한다. 쉬지 말고 정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변하는 것으로 보는 불교의 관점은 서양철학의 관점과 대조됩니다. 서양철학의 아버지로 볼 수 있는 플라톤은 변하지 않는 것, 이데아를 추구했습니다. 칸트의 경우 변하지 않는 절대공간, 절대시간을 인정했습니다. 기독교의 하느님도 그 본체는 변하지 않는 절대자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의 속성은 변화입니다. 색즉시공이란 이 변하여 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공즉시색이라고 했으니까 이 변하여 이 된다는 말도 성립합니다. 변화의 조건은 시간입니다. 즉 시간이 지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M군도 시간이 지나면 죽어서 한줌 흙이 되고 아름다운 63빌딩도 시간이 지나면 변하여 흩어질 것입니다. 결혼한 후 10년 동안 모든 것을 참고, 절약하고, 지독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랑스럽게 마련한 20평 아파트도 시간이 지나면 돌무더기로 변합니다. 물론 남녀간의 사랑도 변하기 때문에 수 많은 대중가요는 사랑의 덧없음을 노래합니다. 심지어는 모든 사고의 기본틀이 되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 자체도 불변이 아닙니다. 즉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시간은 실제로 길어지거나 짧아지기도 합니다. 공간 또한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며 심지어는 휘어지기도 합니다.

   인간의 성장단계를 살펴보면 어린이의 사고 속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장난감 자동차가가 고장이 나 움직이지 않으면 자동차가 변한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울기만 합니다.   은 항상 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른의 사고 속에서는 모든 은 시간이 흐르면 이 된다는 인식이 가능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시간=이라는 것을 관념적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는 색즉시공을 잊고 사는 것이 대부분의 중생입니다. 색즉시공에서 에 치우쳐 만물을 으로만 보고서 사는 사람은 현실주의자라고나 할까요? 눈에 보이는 황금, 자동차, 고급 가구 등이 삶의 전부인 양 사는 사람은 이 결국은 이 될 것임을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에 치우쳐 만물을 으로만 보는 사람은 허무주의자라고나 할까요? 현실을 소홀히 하고 실존에 대한 성실성이 없는 사람은 공즉시색을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내가 이해한 색즉시공은 이렇게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은 변하여 이 되나니 에 너무 집착하지 말지어다.” 이 말을 그렇겠구나 하고 머리로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절실히 깨닫고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며느리가 자기는 인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 함께 사는 시어머니를 사랑하기는 어려운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약간 비약일지는 몰라도 으로 보고 로 본다면 생즉시사(生卽是死) 그러므로 너무 에 집착하지 말지어다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은 의학의 발달로 평균수명은 팔십세로 늘었지만, 는 시간 문제이며 우리의 가 있어야 우리 자손의 이 이어지게 됩니다. 즉 사즉시생(死卽是生)이 성립합니다.

   색즉시공 또는 생즉시사는 결코 허무한 결론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 짧기 때문에 인생이 허무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짧기 때문에 더욱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꽃은 시들기 때문에 生花라고 부르며 열흘을 못가 지기 때문에 피어 있는 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젊음이 소중한 것은 젊은 시절이 80년 인생여로에서 짧기 때문입니다. 아기의 웃음이 그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은 얼마 안 있어 아기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너무 편지가 길어졌나 봅니다. 불교를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독실한 불교신자인 M군 앞에서,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 되지나 않았을까 염려됩니다. 즐거운 여름방학을 보내고 새학기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납시다.

(19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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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뭐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10.02 이 글은 제가 1990년 8월에 실제로 써서 학생에게 보낸 편지글입니다.
    무려 23년 전의 글을 이곳에 다시 올리면서 읽어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 작성자마중물 한방울 | 작성시간 13.10.02 색즉시공(色卽是空), 불가의 핵심사상 가운데 하나로 우리 인간은 다양한 해석을 통하여 진리에 한걸음 더 다가가려 합니다.
    시간과 변화의 개념을 적용한 이뭐꼬님의 설명을 들으니, 글귀의 내용이 내 수준에서 훨씬 명료하게 이해됩니다.
    머리로서 이해하고 마음으로 공감했지만, 이 지혜의 말씀을 나의 삶에 배어나도록 실천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지만 인생의 여러 갈래길 중에서 색즉시공이라는 진리의 등불이 안내하는 길을 정진하고 싶습니다.
    평온하고 만족스런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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