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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및 에세이

이뭐꼬의 구도 이야기 (4)

작성자이뭐꼬|작성시간13.10.30|조회수251 목록 댓글 0

예수원 방문기 - 4

 

   오랜만에 기차를 탔는데, 철도청에서 일을 잘해서 그런지 기차는 내부 시설이 많이 좋아지고 쾌적했다. 바쁘게만 세상을 살다가 모처럼 가지는 한가로운 오후 시간이었다. 나는 책을 읽기도 하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깜빡 졸기도 하고, 창밖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오후 443, 도착 예정 시간에서 1분의 오차도 없이 태백역에 도착하였다. 간단한 손가방을 챙겨 들고 내렸다. 태백시는 도시답지 않게 매우 조용하고 한산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예수원가는 길을 물어보니 하장으로 가는 버스를 타란다. 5시에 버스에 올라타니 20여 명이 앉아 있다. 그 중 몇 명은 느낌이 예수원 가는 사람들 같았다. 버스로 한 30분 쯤 산길을 달려 예수원 간판이 보이는 곳에서 내렸다. 모두 9명이 예수원 가는 사람들이었다. 50대쯤 되어 보이는 중년 남자 한 사람, 외국인 남자 한 사람, 젊은 여성과 애인인 듯한 외국인 한 사람, 일행인 듯한 남학생 두 명과 여학생 두 명, 그리고 나, 이렇게 아홉 명이 산길로 접어들었다.

   조그만 가게를 지나고, 옥수수밭과 감자밭을 지났다. 한우 축사 너머로 고랭지 배추를 심어 놓은 넓은 비탈밭도 보였다. 따갑게 내리쬐는 여름 햇빛을 받으며 산모퉁이 두 구비를 지나자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쓰인 커다란 간판이 보였다. 예수원의 경제관을 나타내는 간판이라고 생각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빈부격차를 일으키는 가장 큰 요인이 부동산 문제, 그 중에서도 수십 년간 계속된 땅 투기가 아니었던가? 사회 정의를 해치는 부동산 투기를 단칼에 근절시킬 수 있는 경구라고 생각되었다. 20분 쯤 걸으니 할렐루야라고 쓰인 간판이 우리를 맞는다. 좁은 골짜기 안쪽으로 돌로 지은 몇 채의 건물이 보인다.

   야생화가 예쁘게 피어 있는 길을 따라 손님부라고 쓰인 작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오거스틴이라는 40대의 수염 난 남자가 안내를 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 도착한 우리 일행에게 설명을 하였다. “여기는 성공회 기도원입니다. 23일 동안 편안하게 쉬었다 가십시오. 여기서 진행되는 일정이 있지만 선택이기 때문에 따르지 않고 혼자 지내셔도 무방합니다. 여기서는 다른 기도원과는 달리 금식은 금지합니다. 식당에 모여서 밥을 먹되 식사 시간을 놓치면 밥이 없습니다. 숙식은 무료로 제공 됩니다. 단지 본인이 원하면 갈 때에 헌금함에 헌금을 하는 것을 막지는 않습니다.”  대개의 수련원이나 기도원이 정해진 일과표를 따라가고 개인행동을 금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느슨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임을 처음부터 느낄 수 있었다 오거스틴은 우리에게 각각 숙소를 배정하고 한 쪽에 쌓여 있는 담요보와 베개보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저녁식사 시간은 6시라고 알려 준다. 나는 그를 따라 제일 아래쪽에 있는 석송관으로 갔다. 여기에 있는 집들을 보니 지붕이 경사가 급하고 돌로 만들어져 있다. 고지대이기 때문에 눈이 많이 와서 지붕을 그렇게 만들었으며, 돌은 근처에서 나는 재료를 사용하였단다. 오거스틴의 설명에 의하면 여기 있는 건물들은 공동체 가족들이 시간을 두고서 한 채 한 채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예수원은 1965년에 대천덕(미국 이름: 루벤 아쳐 토리) 성공회 신부님 가족과 일단의 신학교 학생, 그리고 항동교회 신자들이(모두 16) 설립하였다. 이들은 강원도 산골짜기에 노동하는 것이 기도요, 기도하는 것이 노동이다라는 정신으로 신앙 공동체를 세웠다. 이들은 함께 모여 살면서 노동과 기도의 삶을 영위하는 수도 공동체로서 예수원을 운영하고 있다. 대천덕 신부님은 1918년에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로서 중국 산동성 제난에서 출생하였고, 평양에 있는 외국인학교, 중국의 연경대학,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엔지니어 회사, 철강 회사에서 일도 해 보고, 선원 생활도 하다가 1946년에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48년에 결혼해 미국에서 목회자 생활을 하면서, 건축 기사 노조 활동, 흑인 해방 운동 등 활발한 사회 운동을 펼쳤다. 그러다가 1957년 성공회 교구청의 명령으로 한국으로 건너와 성공회대학의 전신인 성 미카엘 신학원을 재건하였다. 1965년에 강원도 산골로 들어온 이래 예수원에서 청빈과 나눔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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