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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강 답사기

평창강 따라 걷기 1

작성자이뭐꼬|작성시간20.12.06|조회수1,524 목록 댓글 0

평창강 따라 걷기 - 제 1구간

 

<답사 날자> 2020년 11월 11일 (수), 오전 10:10~ 오후 4:00

<참가자> 이상훈, 우명길, 원영환

<답사기 작성 날자> 2020년 12월 5일

 

2015년 8월에 25년간의 직장 생활을 마치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면온리에 작은 집을 짓고 귀촌한 지도 벌써 5년이 지났다. 꿈도 많고 가슴이 뜨거웠던 청년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대머리 양쪽에 하얀 서리가 내린 칠십 노인이 되었다. 요즘 사람들은 옛날 사람에 비해서 힘든 일을 안 하고 잘 먹고, 또 건강 관리도 잘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주민증 나이로는 70이라고 해도 남이 나더러 노인이라고 부르면 때때로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을 부르지 않나 착각하기도 한다. 내 나이를 말하면서 고희(古稀: 人生七十古來稀를 줄인 말)라는 단어를 사용하기가 꺼려진다. 인구 통계를 들여다보면, 우리나라 남자들의 평균 수명이 2018년 기준으로 80세라고 하니, 남 만큼만 산다고 해도 아직은 10년이라는 세월이 남았다.

 

내가 산을 좋아해서 그런지, 내 친구 중에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서울사대 화학과 68학번 동창인 우명길(주: 대학교 다닐 때에 친구들이 부르던 별명이 시인마뇽이었으므로 이하 그렇게 호칭함)은 우리나라 웬만한 산은 다 오른, 문자 그대로 ‘산 사나이’이다. 그는 총길이 2800km에 달하는 남한의 백두대간과 9정맥을 5년 동안에 완주하였고, 올해에는 섬진강을 발원지에서부터 하구까지 223km를 걸었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잠시 멈추었지만 내년부터 5년 동안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을 시원지부터 하구까지 모두 걷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시인마뇽은 가지고 있다.

 

또 다른 친구 원영환(주: 호가 석주(石舟)이므로 이하 그렇게 호칭함)은 서울사대 지구과학과를 졸업한 동창인데, 그 역시 산을 좋아하기는 시인마뇽 못지 않다. 그는 교직에 있다가 정년 퇴임한 후 백수생활을 시작하면서 “1년에 100개의 산을 오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계산해 보면, 매주 2개의 산을 올라야 1년에 100개를 채울 수가 있다. 얼마 전에 석주를 만나 물어보니 지난 10년 동안 모두 1000개의 산을 올랐다고 한다. 산림청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산의 수는 4440개라는데 앞으로 30년은 더 등산할 수 있겠다고 내가 말했다. 그러자 그는 “이제는 기력이 떨어져서 앞으로 500개의 산을 더 오를 수 있으면 다행으로 생각하겠다”라고 매우 겸손하게 대답하였다.

 

산을 좋아하는 세 사람이 어느 날 만났는데 내가 제안을 하였다. “이제는 우리가 나이도 있으니, 힘들게 산을 오르는 대신 평평한 강길 따라 걸어 보자. 우리 집 근처에 220km 길이의 평창강이 흐르는데, 평창강 따라 쭉 한번 걸어 보면 어떨까?” 의외로 쉽게 두 사람이 좋다고 맞장구를 쳐주어서 평창강 따라 걷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평창강 따라 걷기는 시작은 올해에 하지만 평창강을 15구간 정도로 나누어서 내년에 본격적으로 걸으려고 한다. 한 달에 2번 정도 걸으면 내년 말까지는 끝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간혹 중간에 빠지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고, 또는 다른 사람이 참가할 수도 있어서 참가자 수는 들쑥날쑥 하겠지만 나는 빠지지 않고 걸으려고 한다. 평창강 가까이에 살고 있고, 또 내가 제안했기 때문에 여행 준비와 답사기 쓰기는 내가 맡아서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림1> 평창강의 시점에서 종점까지의 지도 (한국하천유역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평창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 있다.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의 계방산(桂芳山, 1577m)에서 속사천이 발원하여 봉평면의 흥정천과 합류하면서 평창강이 되고 이후 대화면, 방림면, 평창읍을 지나 영월군의 무릉도원면, 한반도면을 지나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강이다. 직선거리는 60km에 불과하나 총길이는 220km에 달하는 심한 감입곡류로 유명하다. 유역에는 계방산을 비롯하여 흥정산(1277m), 태기산(1261m), 백적산(1141m), 대미산(1232m) 등 1000m가 넘는 산악들로 둘러싸여 고원지대를 이룬다. 1월 평균기온은 –3.3도, 8월 평균 기온은 24.5도, 연평균기온은 10.3도이며 연강수량은 1082mm로서 건조한 편이다.”

 

평창강 따라 걷기를 시작하는 하루 전 11월 10일에, 경기도 군포시에 사는 시인마뇽은 군포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장평터미널로 오고 서울 대방동에 사는 석주는 서울역에서 KTX 기차를 타고 평창역으로 왔다. 내가 차를 운전하여 마중 나가 두 사람을 태우고 봉평 우리 집으로 왔다. 우리 집에서 하루 자고서 11월 11일 아침에, 각시는 우리에게 아침밥을 잘 차려주고 간식으로 먹으라고 시금자떡(주: 검은 참깨를 발라 만든 떡)을 싸주었다. 내가 차를 운전하여 봉평면으로 나가서 점심식사로 먹을 참치 김밥 4줄을 샀다. 그리고서 우리는 평창강이 시작되는 마을인 용평면 백옥포2리로 갔다.

<그림2> 평창강 제1구간

 

우리는 강의 서쪽으로 나있는 포장된 424번 지방도로 대신 강의 동쪽에 나있는 작은 길을 걷기로 결정하였다. 이 길은 비포장 구간도 있고 집들도 많지 않아서 한가하고 조용하여 걷기에 매우 좋은 길이다. 이 길은 산에 막혀서 끊어진다. 카카오맵을 이용하여 조사해 보니 1구간 시점에서 종점까지 거리는 6km이다. 우리는 종점에서 차가 있는 시점으로 되돌아와야 하므로, 오늘 걷는 거리는 12km가 된다. 백옥포2리 시점에는 2017년에 평창군에서 세운 비석과 안내문이 있었다. 비석 옆, 근사한 돌에 평창강의 설명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그림3> 평창강 시점 비석

<그림4> 평창강 안내판

 

“한강의 상류 평창강은 태기산 동쪽 흥정산에서 발원한 흥정천과 오대산 남쪽 계방산에서 발원한 속사천이 평창군 용평면 백옥포2리에 위치한 이곳 의풍포에서 합류되어 시작된다. 이 곳은 태기산의 이름이 유래가 된 맥국의 마지막 왕인 진한의 태기왕이 호위장군 삼형제 장군과 함께 생을 마감한 곳으로 태기왕 전설이 내려오는 삼형제 장군 바위가 위치한 곳이기도 한다. 평창강은 직선거리 60km 인데 반해 유로연장은 220km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행천으로 평창군을 가로질러 영월에 이르러 주천강과 합류되면서 영월군에서는 서강이라고 불린다. 이곳에서 시작된 평창강이 영월에 이르러 서강이 되고 오대산 우통수가 진부 오대천으로 흘러 영월에 이르러 동강이 되어 이 두강이 합수되어 남한강이 된다.”

<그림5> 삼형제 장군 바위

 

흥정천과 속사천이 만나는 곳에 바위 세 개가 나란히 서 있다. 위가 뾰족하지 않고 매우 평평하다. 바위 높이는 어른 키보다 조금 큰데 위가 널찍해서 바둑판을 놓고서 바둑을 둘 수도 있겠다. 바위 이름이 ‘삼형제 장군 바위’이다. 삼형제 장군 바위는 세 개이므로 삼형제(三兄弟)가 연상된다. 그러나 바위는 세 개이지만 삼형제는 한 사람의 장군 이름이다. <평창군 지명지>에서는 백옥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부족국가 시대 맥국(貊國)의 마지막 왕 태기(泰岐)가 춘천 지방에서 다른 부족에게 쫓겨 원주로 옮기고 세력 확보를 위해 강릉 지방의 예국(濊國)과 최후의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전력에 밀려 태기산성이 함락되고 급히 피난을 떠났다. 태기왕은 워낙 당황했고 적군의 추격이 급하여 피난하던 중 옥산대(지금의 안흥동)에서 옥새를 잃어버리고 왕을 호위하던 군사들도 모두 전멸하여 더 이상 어찌할 수 없게 되자 삼형제 장군은 단신으로 왕을 모시고 백옥포(白玉浦: 白衣장군이 옥체를 업고 물에 빠졌다 하여 백옥포라고 부름)에 투신하여 최후를 마쳤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림6> 멀리서 본 평창강 시점 (오른쪽에 비석, 왼쪽에 삼형제 장군 바위가 보인다)

 

나는 그동안 삼형제라는 이름이 세 사람의 형제를 나타내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난 2020년 5월 16일 나는 서울에서 내려온 양승국 변호사님 일행을 안내하여 이곳에 다녀간 적이 있다. 나중에 양변호사님이 쓴 답사기를 읽어보니 장군 이름이 ‘삼형제(森炯濟)’이었다. 아이고, 지금까지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은 항상 사실 확인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저지른 실수는 당연하다고 믿던 지식이 잘못될 수가 있음을 증명해주는 매우 적절한 예라고 생각된다.

 

비석이 서있는 시점에서 속사천 쪽으로 100m 쯤 떨어진 곳에 기와 지붕을 한 단정한 성황당이 보인다. 옆에 세워진 안내판의 글을 읽어보니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7> 의풍포 성황당

 

“본 성황당의 지나온 유래는 백수십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마을에 수호신으로 성황제는 정월과 칠월로 일년에 두 번씩 부락 주민들의 생기(生氣) 유사를 정하여 성황제를 올리며 마을에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마을사람들의 상호간의 화합을 다졌고 그동안 풍수해로 수차례 보수를 하였으나 여의치 않이하여 새마을사업 당시 함석지붕으로 개량하였고 2002년 마을동회에서 성황당을 새로 건립할 것을 결의하여 철거를 하였고 2004년도 터 메우기와 기초공사를 하였으며 2005년 5월 9일에 성황당 기공식을 가지게 되여 2005년 11월 15일에 목조건물로 재건립하여 마을기금과 여러 주민들의 찬조금으로 완공을 보게 되여 이 비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2006년 11월 4일”

 

흥미롭게도, 이렇게 긴 안내문이 쉼표 하나 없이 마침표가 딱 하나인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의풍포의 어원에 대해서 궁금증이 일었다. 나중에 이곳 마을에 살고 있는 임정훈 선생에게 물어보니 의풍포 지명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단다.

 

“의풍포(義豊浦)는 백옥포리의 옛날 이름이다. 평창군에 살기 좋은 명당 마을이 12곳 있었는데, 그 중의 한 곳이 의풍포 마을이었다. 이곳이 예전에는 모두 논이었고 농사가 아주 잘 되었다. 다른 곳에 흉년이 들어도 이곳 마을만은 풍년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마을 사람들이 흉년 다음 봄에 의풍포 마을에 와서 파종할 곡식 종자를 얻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의로울 義자와 풍년 豊자를 쓰고, 浦란 속사천과 흥정천의 물이 만나므로 물이 풍부한 곳을 의미한다.”

 

우리는 의풍교 다리를 지나 강 건너편 둑방길로 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속사천의 북쪽은 백옥포리이지만 남쪽은 재산리이다. 하천 둑방에 차를 주차하였다. 나는 차 트렁크에 있는 등산화를 꺼내 신고 배낭을 둘러메었다. 강 따라 걷는 길은 산을 오르는 등산과 달라서 스틱을 쓸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 “스틱은 그냥 놓고 가자”고 내가 제안했다. 그러나 등산 경험이 많은 시인마뇽이 “길을 걷다가 혹시 사나운 개를 만나면 스틱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고 말해서 한 사람만 스틱을 가져가기로 결정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젊은이에게 필요한 속담이다. 나이가 들어서는 한번 실수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으므로 매사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림8> 답사 출발 지점

 

오전 10시 10분에 걷기를 시작했다. 이날이 11월 11일이니 절기로 보면 늦가을이다. 가을 하늘이 쪽빛으로 파랬다. 이런 날에는 푸른 하늘이 배경이 되어 사진이 잘 나온다. 기온은 걷기에 좋을 정도로 적당하고 공기는 매우 상쾌했다. 밭에는 가을걷이가 끝난 곳이 대부분이었지만, 아직 배추나 무 등이 남아있는 곳이 더러 있었다. 들꽃들은 모두 다 시들어 사라졌다. 들풀의 잎과 줄기는 말라버려 초록색은 사라지고 칙칙한 갈색만이 남았다. 강을 따라 걸으니 계속해서 강물을 볼 수 있고, 소곤대는 물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거기에다가 좋은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으니 외롭지도 않고,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행복한 시간이 계속된다.

 

강 따라 조금 내려가자 삼형제 장군 바위 조금 아래 쪽으로 강가에 비슷하게 생긴 바위가 하나 서 있다. 마침 지나가는 노인을 붙잡고 “어디 사세요?”라고 물어 보니 “저기 산다”고 앞에 보이는 집을 가리킨다. 저 바위가 삼형제 장군 바위냐고 물으니, 노인은 자기들은 ‘노적바위’라고 부른단다. 바위 윗 부분이 평평한 모습이 볏단을 쌓아놓은 노적가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나보다.

<그림9> 노적 바위

 

길은 강과 멀어지면서 집이 몇 채 있는 왼쪽 마을로 구부러진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개소리가 요란하다. 길 양쪽에 개집이 있고 양쪽에서 개들이 사납게 짖어댄다. 다행히 개줄에 묶여 있어서 스틱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해도, 웬지 긴장된다. 나는 어렸을 때에 개에 종아리를 물린 적이 있어서 어른이 되어서도 항상 개가 무서웠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는 속담을 생각하면서 개소리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갔다.

 

경사길을 조금 올라가니 중앙선이 그려져 있는 찻길이 나온다. 두 길이 만나는 지점 왼쪽에 근사한 펜션이 있다. ‘럭셔리별장펜션’이라고 쓰인 커다란 간판이 보인다. 고급 펜션인가보다. 뭔가 고급스럽고, 비싸고, 좋고, 명품이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어려운 영어 단어를 가져다 붙이는 것이 요즘 유행이다. 세종대왕을 존경하고 한글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나는 이러한 유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언론 자유를 존중하기 때문에 시비를 걸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 생각은 그렇다는 것이다.

 

큰길 따라 경사길을 조금 내려가니 평창강 시점 비석이 오른쪽으로 멀리 보이고, 비석의 왼쪽편으로 커다란 기와집을 포함한 건물 3개가 눈에 들어온다. 이 건물은 한국전통음식문화체험관(다른 이름은 정강원)인데 고급 한정식집으로서 민박도 할 수 있다. 카카오맵에서는 이 식당이 ‘정강원 한옥호텔’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평창 사람들이 귀한 손님이 오면 이곳으로 데려와 고급 한정식을 대접하는 식당이다. 우리 집에서 차로 10분이면 올 수 있는 이 식당에 나는 여러 번 왔었다. 이날 답사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리(동산동교)를 건너 건물 안으로 들어가 구경을 하였다. 정원이 넓고 식당 건물 외에 숙소동과 한옥박물관까지 딸려 있는 커다란 시설이다. 각종 장류를 보관하는 항아리들이 돌담 안으로 수백 개 놓여 있었다. 지난 여름에 왔을 때에는 여러 가지 예쁜 꽃들이 피었었는데, 지금은 늦가을이라서 꽃은 다 지고 정원은 쓸쓸하기만 했다. 다음에 시간 내서 다시 오기로 하고, 이날은 한바퀴 휘 둘러보고 그냥 나왔다.

<그림10> 멀리서 본 정강원

<그림11> 정강원 정문

<그림12> 항아리들

<그림13> 정강원 앞 평창강 모습

 

동산동교 다리를 다시 건너서 강의 왼쪽 길을 따라서 걸어갔다. 우리가 가는 길을 소개하는 커다란 안내판이 서 있었다. 우리가 이날 걸을 길의 이름이 금당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림14> 금당길 안내판

 

안내판에는 14개의 민박집과 펜션들의 사진과 전화번호가 있었다. 금당길 왼쪽은 금당산이고 오른쪽으로는 평창강이 흐른다. 강가에는 갈대가 많이 보였지만, 이제는 다 시들어 스산한 느낌을 주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 갈대가 사각대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금당길은 걷기 좋은 고즈넉한 길이었는데,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다는 점이 우리에게는 아쉽다면 아쉬웠다. 그렇지만 여기 사는 주민들은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금당길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자 고가도로로 지나가는 KTX 기찻길이 나타났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을 준비하느라고 만든 철도이다. 최근에 평창군은 ‘평화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강조한다. 이전에는 ‘Happy 700 평창’을 홍보하였다. 평창군의 해발 고도가 평균 700m인데, 700m가 건강 측면에서 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고도라는 것이다. 평창이 평화의 도시가 된 것은 2018년 동계올림픽 때에 북한팀이 평창에 왔기 때문이다.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화해의 물고가 트이고, 이어서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이 판문점에서 만났다. 남북간의 평화가 평창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런 연유로 평창은 평화의 도시가 된 것이다.

<그림15> KTX 고가 철도

 

한 걸음 더 나아가 평창은 세계 평화를 연구하고 비전을 제시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평화의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 강원도와 평창군에서는 2019년 2월에 평창평화포럼이라는 기구를 만들고,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폴란드의 바웬사와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을 초청하여 국제 평화를 논의하였다. 올해에는 지난 2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 동안 알펜시아에서 ‘2020 평창평화포럼 회의’를 성공리에 개최한 바 있다. 쉽게 말해서 평창군은 평화를 홍보 전략으로 채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림16> 벌통

 

계속 길을 따라 가자 왼쪽에 수많은 벌통이 보인다. 그렇지만 웅웅거리는 벌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지금쯤 벌들은 벌통 안에서 겨울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퇴직 후에 지리산에서 벌을 키우는 고등학교 동창생에게 나중에 물어보니, 벌들은 뱀이나 곰처럼 겨울잠을 쿨쿨 자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겨울이 되면 벌들은 벌통 안에서 움직임을 최대한 줄이고 서로 협동하여 축구공처럼 뭉쳐서 몸을 바짝 붙이고 몸을 떨면서 열을 발산하여 추위를 견딘다고 한다. 겨울철에 먹이로는 꽃꿀과 설탕농축액이 3:7 정도로 섞인 사양꿀을 조금씩 먹는다고 한다. 모든 식물과 동물은 각각 독특한 방법으로 추운 겨울에도 살아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금당길을 따라 조금 더 걷자 시멘트 포장길이 끝나면서 흙길이 나타난다. 흙길이 시작되는 지점의 왼쪽에는 조림한 것으로 보이는 자작나무 숲이 보인다. 잎은 모두 떨어졌지만 자작나무는 나무 껍질이 하얗고 갈라져서 종이처럼 벗겨지기 때문에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자작나무는 불에 탈 때에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고 해서 자작나무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흙길은 포장된 도로에 비해서 딱딱하지 않고 탄력이 있기 때문에 걷기에 편하다. 길 양쪽으로는 이미 추수가 끝난 밭이 텅 비어있어 허허롭기만 하다. 흙길은 곧게 1km 쯤 계속되었다.

<그림17> 자작나무 숲

<그림18> 흙길

<그림19> 흙길 아래 평창강 모습

 

흙길이 끝나자 오른쪽에 금당교 다리가 나타난다. 금당교 건너편에는 등매초교 폐교가 있다. 금당교 건너편 왼쪽에 보이는 다리는 등매교인데 그 아래로 면온천이 흘러 평창강에 합류한다. 그러니까 면온천은 평창강의 제1 지류가 된다. 금당계곡에서는 여름에 래프팅을 하는데, 나는 4~5년 전에 면온천 합류 지점에서 출발하는 래프팅을 난생 처음으로 해본 경험이 있다.

 

<그림20> 금당교 왼쪽으로 보이는 등매초교(폐교)

 

<그림21> 면온천 합류 지점. 오른쪽에 보이는 다리 아래로 면온천이 흘러든다.

 

약간 오르막인 금당길을 계속 걸어가니 거문·금당산 등산안내도가 나온다.

<그림22> 거문·금당산 등산안내도

 

금당산 등산로는 모두 3개가 그려져 있는데, 2개는 금당산 서쪽에 있는 금당계곡에서 올라가는 코스이고 다른 한 개는 금당산의 동쪽에 있는 법장사에서 올라가는 코스이다. 금당산(높이 1173m)을 오르려면 여기서 왼쪽 길로 올라가면 된다. 금당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져 있는 거문산 정상은 금당산과 능선으로 연결되는데 산 높이가 금당산과 똑같이 1173m이다. 등산하는 사람은 금당산과 거문산을 함께 오르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등산이 목적이 아니므로 계속해서 직진했다.

 

조금 더 가니 금당사 가는 길을 알려주는 커다란 팻말이 서 있다. 여기서 왼쪽 길로 올라가면 금당사를 거쳐서 역시 금당산으로 올라갈 수가 있다. 나는 금당사를 한번 가본 적이 있는데, 절이라고 말하기가 쑥스러울 정도로 대웅전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초라한 절집이었다. 등산로 입구 왼쪽에 넓은 밭이 보인다. 그런데 웬일인지 김장배추와 양배추 그리고 무가 수확이 끝나지 않은 채 많이 남아 있다. 지금 수확하면 제대로 값을 못 받을 것이다.

<그림23> 수확하지 못한 채소밭

 

승용차 1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시멘트 포장길이 계속 이어졌다. 집들이 많지 않고 차량 통행은 거의 없어서 걷기에 아주 좋은 길이었다. 약간 경사진 길을 내려가다 보니 왼쪽으로 금당산의 봉우리들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설악산의 멋진 봉우리를 옮겨다 놓은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금당길 오른쪽에서 길따라 흘러가는 평창강의 모습 역시 그림처럼 아름답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지만 현장에서 경험한 느낌과 분위기를 담을 수가 없었다.

<그림24> 금당산의 봉우리들

<그림25> 평창강 풍경

 

오후 12시 30분에 길 오른편에 있는 이름 없는 정자에 도착했다. 정자에서 올려다보는 금당산과 내려다보는 평창강이 잘 어울렸다. 나중에 북을 가져와서 판소리 사철가를 한곡 하면 딱 어울릴 그런 장소이다. 답사길 시점에서 출발한 지 2시간 20분이 지났다. 점심 먹을 시간이다. 배낭을 내려놓고 김밥과 시금자떡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그림26> 우리가 점심을 먹은 정자

 

오후 1시 10분에 다시 출발했다. 간간이 길가에 펜션이나 농가가 나타나지만, 한적한 금당길은 걷기에 매우 편안했다. 답사길 끝부분에 가니 과수원이 나타난다. 잎이 달리고 꽃이 피어 있으면 무슨 과일나무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나무는 푸른 잎사귀를 모두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벌거벗은 줄기 모습만 보여준다. 나무 줄기만 보고서는 무슨 나무인지 내 실력으로는 구별할 수가 없다. <겨울나무 쉽게 찾기>라는 책을 쓴 윤주복이라는 나무 전문가는 줄기만 보고서도 424종의 나무 이름을 알아낸다. 나도 그 책을 사두었는데 읽지는 않았다. 이제부터라도 겨울나무 공부를 시작해야겠다.

 

산으로 막혀서 길이 끊어지는 곳 왼쪽 편에 작은 집이 하나 보인다. 이날 걷는 길의 종점이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 40분이다. 오전 10시 10분에 출발했으니, 거리는 6km를 걸었고 시간으로는 3시간 30분이 지났다. 점심 시간 40분을 빼면 6km를 걷는데 2시간 50분이 걸렸으니 대략적으로 1시간에 2km를 걸은 셈이다.

<그림27> 길이 막힌 곳 왼쪽 편에 집이 있다.

 

이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되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시간이 덜 걸릴 것이다. 돌아가는 길에서는 모든 것을 반대 방향에서 보게 된다. 같은 장소를 지나도 바라보는 방향이 반대이니 조금은 느낌이 다르다. 문득 세 줄짜리 짧은 시가 생각났다.

 

      그 꽃

                      고은 시인

   내려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짧지만 강한 울림을 주는 시이다. 같은 장소에 꽃이 있는데, 왜 올라갈 때는 보지 못했을까?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겠지만 내가 해석하기로는 마음의 상태가 달랐기 때문이다. 올라갈 때는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목표가 뚜렷하다. 아무래도 조급해지기 쉽다. 오르막길이기 때문에 힘이 들어서 주변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러나 정상을 찍고 내려가는 길은 마음이 편하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기게 된다. 그러면, 못 보던 꽃을 볼 수가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젊은 시절은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가는 시절이다. 주변을 둘러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러나 은퇴하고 나면 주변을 바라볼 여유가 생긴다. 그러면 젊었을 때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된다. 산에 가면 야생화가 아름답게 보이고, 강에 가면 물소리가 다정하게 들린다.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돌아오는 길은 시간상으로 한낮이어서 오전에 비해 기온이 더 높아진 것을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흡사 봄날처럼 공기가 훈훈하고 기분이 상쾌했다. 친구들과의 대화는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별별 주제를 다 끄집어내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끝없이 이어간다. 몸과 마음이 행복한 시간이 느리게 느리게 흘러간다.

 

돌아오는 중간에 세 사람이 셀카 사진을 찍었다. 왼쪽이 석주, 중앙이 시인마뇽, 그리고 오른쪽이 필자이다. 나의 인터넷 필명이 무심거사(無心居士)이고 친구들은 나를 무심이라고 부른다.

<그림28> 평창강을 따라 걷는 세 사람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 시간은 오후 4시이었다. 이날 평창강 제1 구간 6km를 왕복으로 걷는데 5시간 50분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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