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로 광화문 광장에 들어서면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이 겹쳐져 줄서 있는 것도 모자라 익숙해질만하면 광장 바닥을 다시 뜯어내고 고치고, 새로운 것을 설치하는 공사를 반복한다. 도심 한복판을 그냥 널찍한 공터로 남겨놓는 여유로움이 불가능해 보이는 쓸모없는 행정의 부지런함이 야속하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시위대의 고함과 분노에 시달리는 광장은 마음의 상처로 포악해진 자식을 당신의 업보라 여기며 인내하는 부모의 척박한 가슴을 닮았다.
광화문 광장이 도시의 힘겨운 삶 속에서 누구라도 와서 마음의 무게를 덜어내고 용기를 담아갈 수 있는 위안의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헛 꿈을 꾸며 걸음을 재촉한다. 그래도 북악산과 북한산 줄기가 도심을 품어 안고 있는 듯한 세종로를 걸을 때면 나의 뒤에 부모님이 버티고 서 계신 것처럼 든든하고 감사하다. 도심 지역의 변화를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우습게도 문득 내가 오래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생대회 때 주로 그리던 경복궁의 경회루, 글쓰기 대회 때 궁궐의 회랑에 기대어 써지지 않는 글을 꾸며 대느라 끙끙 대던 기억이 선명하다. 국립 중앙 박물관으로 쓰여 졌던 옛 총독부 건물 중앙청도 심심치 않게 드나들던 곳인데 내가 해외에 있던 1995-1996년 2년 동안에 걸쳐 철거되어 지금의 경복궁 모습을 갖추는데 커다란 모멘텀이 되었다.
기린의 눈을 좋아하던 나는 학교가 끝나고 창경원에 들러 기린만 보고 나오기도 했고, 봄에는 온 가족이 창경원 벚꽃 놀이를 가기도 했다. 덕수궁 돌담길은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지각하지 않으려고 매일 아침 종종 걸음 치던 길이다. 석조전에 전시라도 있으면 하교 길에 덕수궁 후문으로 입장해서 하염없이 그림을 보곤 했다.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창덕궁, 경희궁, 북악산과 북한산 줄기에 둘러싸인 궁궐들은 세월의 풍파를 겪고 일제 강점기에 용도 변경되거나 철거되는 수모를 겪었고, 지금도 계속 상처의 흔적을 지우는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이렇게 역사는 흔들리고 재건되고 상처받고 치유되면서 흐르고, 그 흐름 속에 나의 삶도 함께 하고 있었다.
끝도 없이 평지뿐인 상해에서 살다가 한국에 다니러 오면 도시를 감싸 안고 있는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의 너그러움이 잘 숨겨놓은 나의 노스텔지어를 건드린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상해에 거주 중인 외국인 친구가 한국을 방문해서 삼청동, 북촌, 서촌, 청와대길을 휩쓸고 다녔다. 친구는 도심에 궁궐이 5개나 밀집되어 있고, 어느 방향에서나 산이 보이는 서울이 인상적이었나 보다. 경복궁을 둘러보던 친구가 북경의 ‘자금성’과 경복궁의 건축적 차이를 물었다.
내 몸속의 DNA는 두 나라 궁궐들의 차이를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외국인의 눈으로 경험한 자금성과 경복궁은 닮은 듯, 안 닮은 듯, 동양의 궁궐은 모두 비슷해 보였나 보다.
자금성에 들어섰을 때 황금빛 기와와 붉은 벽돌의 화려함, 천하를 호령하는 듯한 장대한 스케일에 압도되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자금성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인공 질서’를 통해 권위를 하늘 높이 치켜세운 건축이라면, 경복궁은 자연에 순응하는 조화로운 정치 공간으로 유교적 이상을 구현한 인간 친화적인 건축이다. 건축 철학이 달랐던 때문인지 우여곡절을 격어낸 경복궁의 운명에 비해 자금성은 별다른 수난 없이 지금까지 건물의 상태를 무난하게 유지해 오고 있다.
일본의 손길로 어지럽혀진 경복궁의 원형을 그리움과 애잔함으로 그려낸 듯한 안중식(1861-1919)의 그림, 백악춘효(百岳春曉)가 생각이 난다. 그의 그림은 ‘광화문 광장‘이 고요한 공간으로 남겨지길 바라는 나의 희망과도 맞닿아 있다.
밥 한그릇 안의 우주(yiemisook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