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淸溪川) 이야기
목차
(1) 조선시대의 청계천 (2) 조선시대 청계천은 시민의 빨래터
(3) 청계천의 복개계흭 (4) 청계천의 어제 오늘 그리고 미래
(5) 영조의 명에 의하여 한성판윤 홍계회가 준천사실 편찬
(6) 청계천 다리의 역사 (7) 청계천 다리 구간별 거리
(8) 청계천 다리의 유래 (9) 청계천 복원후에 11경
●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청계천
개천(開川)의 정비(整備)는 태종 때부터 시작되었다, 1407년 서울의 하천(河川)이 범람(氾濫)하여 근본적인 조치를 위해 1411년 11월 개거도감(開渠都監)(후에 개천도감(開川都監)을 설치하고 대규모 개천공사를 실시하였다, 세종은 1421년 운종가(현 종로) 행랑 뒤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내고 1441년 하천의 높이를 재는 수표교(水標橋)를 만들었다, 이후 조선중기까지 개천 관리는 대부분 임시방편적인 준설에 그쳤다가 1760년(영조36년)에 준천사(濬川司)을 설치하고 57일간 연인원 20만명이 동원돼 대규모 준설사업인 경진준천(庚辰濬川)이 시행되었다, 또한 영조는 1773년에도 개천 양안(兩岸)의 석축을 다시 쌓는 등 개천 정비에 많은 정성을 쏟았으며 준천공사는 1908년까지 2~3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준천작업을 해왔다
● 조선시대 청계천은 시민(市民)의 빨래터, 하수도 놀이터
청계천의 원래(元來) 이름은 개천(開川)으로 북악산과 인왕산, 남산, 낙산등에서 내려온 물이 모여서 서에서 동으로 도성(都城) 한 가운데를 흐르는 발원지는 백운동계곡에서부터 중랑천(中浪川) 합수지점(合水地點)까지의 길이 10,92km의 자연적인 도시 하천이었다, 일명 건천(乾川)이라고도 한다, 청계천에는 각종 고물(재활용쓰래기)들이 거래되었다, 다리밑 기둥에는 사탕(蛇湯) 살모사 등 뱀 이름이 막 갈겨 써 있고 다리 사이를 가마니로 벽을 두룬 움집에서 걸인차림에(일명 양아치) 사람이 살고 있으며 모래사장에는 닭장 우리에 닭을 키우는 풍경을 볼수있다, 수백년간 청계천은 빨래터로서 하수도로서 놀이터로서 도시생활을 뒷받침 해주는 생활터전으로 큰 묷을 했다, 1930년 초에만해도 청계천은 아낙네의 빨래 터 였으면 서울 사람들은 아이들이 호역에 걸리면 청계천물을 떠다가 먹이면 난는다고 하여 청계천물을 떠다 먹이기도 하였다,
중구(中區) 방산동(芳山洞)은 일제에 의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조선시대에는 남부 명철방에 속한 곳으로 오교동(午橋洞), 연방동에 속한 곳이며 본래의 명칭은 가산(假山) 또는 조산(造山)으로 불리던 곳이다, 조산이나 가산이란 이름은 조선시대에 청계천의 바닥이 흙과 모래로 메워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준천사(濬川司)라는 관청(官廳)을 두고 퇴적(堆積)된 모래를 파내어 산천럼 싸놓고 낮은곳을 매우고 도로를 정비하는데 사용하였으므로 간산 또는 조산이라고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방산동이다,
● 청계천(淸溪川)의 복개계획(覆蓋計劃)
영조때 준천공사가 마무리되자 개천을 깨끗이 치웠다하여 청개천(淸開川) 또는 청계천(淸溪川)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일제시대부터 이농현상이 나타나기 시작, 청계천변은 서울의 대표적인 인구밀집 지역이 돼어 청계천에 흘러드는 오폐수의 양도 늘어났다, 이때 대두된 것이 복개 방안이었다, 개천을 복개(覆蓋)하는 최초의 계획이 수립된 것은 대한제국기인 1895년 처음 시도되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일제시대인 1926년에도 일부 구간의 복개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기각(棄却)되었다,
천계천의 전면 복개 구상은 1935년 청계천을 덮어 도로를 만들고 그 위에 고가 도로를 만들어 늘어나는 교통수요를 충당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제가 용산과 영등포 공업지역에서 생산 한 군수물자의 이동을 쉽게 하기 위해서였으나 시행되지 못했다,
광복후 서울특별시는 1958년~1961년 4년간의 청계천 도심부근 광교부터 오간수문, 복개를 거쳐 1977년 마장동까지 최종 완료하였다, 청계천이 복개되자 좌우로 상가들이 들어차고 교통량이 폭주하면서 새로운 도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총연장 5,650m에 도로폭이 16m인 청계교가도로의 건설은 공사규모나 도로의 길이 면에서 서울시 건설사상 획기적(劃期的)인 일이었고 한동안 서울의 발전을 말해주는 상징물(象徵物)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 청계천의 어제, 오늘 그리고 미래(未來)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른 청계천은 조선시대 한양정도와 함께 생활하천으로 흘러 왔으며, 영조시대 대규모 준천(濬川)으로 오늘날의 청계천의 모습이 갖취졌다, 한국전쟁 이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판자촌의 형성되면서 하천은 오염되고 주변 환경은 나빠졌으나 청계천은 서민에 애환이 깃든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1960~1970년대 개발시대를 맞이하여 판자촌과 위생상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1958년부터 4년에 걸쳐 청계천은 광교에서 동대문 오간수교까지 복개되고 이어 1977년 마장동까지 최종 완료 되었다, 주변은 도심 상업의 중심지로 바뀌게 되었다, 늘어나는 상가 폭주하는 교통량을 해결하기 위해 복개도로 위에 또다시 고가도로가 건설되고 세운상가 주변이 현대적 상업시설로 변하였다,
1980~1990년대 지속적(持續的)인 발전을 거듭해온 청계천 일대는 80년대 이르러 서울의 중심상권이자 대한민국 산업의 중심지로 명성(名聲)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청계천의 복개도로와 고가도로에서 내뿜는 먼지, 배기가스 등으로 인해 복개도로 밑의 하천은 더욱 오염되고 구조물도 부식되어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게 되었다,
2000년 10월 21세기(世紀) 들어 사람이 살아가기 편리한 환경도시로 서울을 가꾸기 위해 청계천은 2003년 7월 1일 복원(復元)이 시작되어 2년 3개월 만인 2005년 10월 1일 드드어 푸르고 시원한 물길을 드러냈다, 청계천복원을 통해 서울은 자연 문화 역사가 어우러지는 세계 일류도시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 청계천 다리의 역사(歷史)
조선시대 청계천에는 송기교(松杞橋) 모전교(毛廛橋) 광통교(廣通橋) 광제교(廣濟橋) 장통교(長通橋) 관수교(觀水橋) 수표교(水標橋) 하랑교(河浪橋) 효경교(孝經橋) 마전교(馬廛橋) 오간수문(五間水門) 영도교(永渡橋) 검정다리등의 다리가 있었다, 이다리중 오간수문 다리는 1908년 일제에 의해 그 밖의 다리들은 1958년~1978년 사이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모두 살아졌다, 오직 수표교만이 장충단으로 옮겨져 제 모습을 보존하고 있고 광통교는 복개된 큰크리트속에 묻혀있었다,
청계천 복원후에 다리는 태평로 부근 무교동 입구 모전교부터 고산자교까지 차량보도(車輛步道)를 겸한 17개의 교량(橋梁)과 5개의 보도전용(步道專用) 다리가 모두 22개가 있다,
※ 청계천 다리 구간별 거리
청계천광장140m
◉모전교(무교동 )➡156m ◉광통교(광교사거리 옛다리 복원)➡157m
◉광교(광교사거리)➡260m ◉장통교(청계2가)➡173m
◉삼일교(삼일로 주변 종로 인사동)➡173m ◉수표교(수표동 임시 보도교)➡248m
◉관수교(청계3가)➡263m ◉세운교(세운상가)➡235m
◉배우개교(청계4가 동대문 시장)➡202m ◉세벽다리(방산시장 광장시장)➡170m
◉마전교(청계5가)➡210m ◉나래교(평화시장)➡197m
◉버들다리(동대문종합시장)➡261m ◉오간수교(흥인지문)➡251m
◉맑은다리(동대문신발도매상)➡303m ◉다산교(청계7가)➡312m
◉영동교(동묘앞)➡312m ◉황학교(청계8가)➡304m
◉비우당교(한국도자기)➡346m ◉무학교(무학로)➡314m
◉두물다리(성북천과 정릉천 두 물줄기가 청계천으로 함류하는 지점 청계천문화회관)➡439m
◉고산자교(고산자로)➡318m 신답철교
※ 청계천 다리의 유래(由來)
1) ▣ 모전교 =옛 교량명칭(橋梁名稱)으로 길모통이에 자리하고 있는 과일을 파는 과전(果廛)을 모전(毛廛)이라고하여 장안에 6곳이 있는데 그중 다리 모퉁이에 가게가 있었다하여 모전교
2) ▣ 광통교 = 옛 다리의 명칭이며 광통방(廣通坊)에 있는 큰 다리로서 대광통교라 불렸고, 줄여서 광교라고도 했다 원래의 위치는 (서린동 124번지 부근) 도성의 핵심 간선도로인 종로와 남대문로를 잇는 곳인 지금의 광교사거리였지만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로인해 땅 속에 묻혔다가 이번 복원 때 지금의 위치를 옮겨졌다, 처음에는 토교(土橋)였으나 태종은 태조가 죽자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복수로 1년후에 도성안에 있는 능을 현재 정릉동으로 이장하고 1410년(태종10년)에 큰 장마가 져서 도성 안 종로거리가 모두 침수되고, 청계천 광교 흙다리가 떠내려가자 정능구묘(貞陵舊墓)의 호석(護石)을 가져다 거꾸로 쌓아 광교돌다를 만들게 하였다, 도성 최대의 다리로서 어가(御駕)와 사신(使臣)의 행렬이 지나가는 중요한 교통로였고 정월 대보름 때에는 다리밥기와 연날리기등 민속놀이를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교대(橋臺)에 신덕왕후 무덤에 쓰였던 돌들의 정교한 조각이 남아있으며 교각(橋脚)에는 여러 시기에 걸쳐 개천을 고친 기록이 새겨져 있으며 12지신상(地神像)을 새긴 석재 등은 상당한 미술품으로 문화제 가치가 높다, 본래 있던 자리에서 150m 이전해 원형 그대로 복원됐다, 폭 15m 길이 13m로 장방형 돌에 신장(神將), 구름 당초(唐草) 등 경교 한 조각이 그대로 남아있다,
3) ▣ 광교 = 옛부터 광통방에 있던 크고 넓은 다리라는 의미에서 광교라고 일컬어졌으며 현재 광교 사거리가 이 위치에 해당됨
4) ▣ 장통교 = 옛부터 있던 다리 명칭이며 현재 중구 장교동 51번지와 종로구 관철동 11번지 사이에 놓어있었던 다리로서 장충교 또는 장치골 다리라고 하였다, 장통교 부근은 백악(白岳) 인왕산에서 흘려내려온 물과 남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합쳐지는 곳으로 여기서부터 폭이 약 20m이상 넓어졌다, 장통교는 다리중앙부가 높고 양안(兩岸)쪽을 낮게 처리하면서 난간을 설치하지 않아 부드럽고도 간결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다리였다, 조선시대 이 주변은 중촌(中村)이라고 하여 시전(市廛)상인과 의원 역관(譯官)등 중인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으로 그들과 관련된 이야기가 적지 않게 전해져온다, 1929년 큰비로 다리 가운데가 붕괴된바 있으며 천계천 복개가 시작되면서 1959년에 사라졌다가 다시 생긴 다리
5) ▣ 삼일교 =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한 뒤 전국에서 일제의 탄압(彈壓)에 항거하는 시위운동을 벌었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명명된 삼일로(三一路) 인근(隣近)에 다리를 위치하여 명칭을 인용한것임
6) ▣ 수표교 =1420년 (세종 2년)에 세운 돌다리로서 처음에는 소와 말을 거래하던 우마전(牛馬廛)앞에 있어 마전교라 했다, 1441년(세종 23년) 다리 서쪽에 수표석을 세우면서 수표교라 부르게 됐고 돌기등에는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는 수준(水準)을 새겨 물의 깊이를 재었다, 수표교는 1956년 청계천을 복개할 때 장충당공원(獎忠壇公園)으로 이전돼었고, 보물838호인 수표석(水標石)은 1973년 세종대왕기념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현다리는 임시보도교)
7) ▣ 관수교 = 1918년 일본에 의해 지금의 청계천 3가 사거리에 놓여있던 다리이다, 이곳 관수동 152, 153번지 일대에 준천사(개천을 청소하고 관리하는곳)라는 관청이 있어 청계천의 수위(水位)를 관측(觀測)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옛 교량 명칭이다,
8) ▣ 세운교 = 현 세운상가에 인접하여 세워지는 다리로, 세운상가의 명칭을 인용
9) ▣ 배오개다리 = 현 종로4가 네거리에 배오개(이현(梨峴)라는 고개가 있었으므로 배오개길이라 명칭한 이름에서 유래
10) ▣ 새벽다리 = 동대문 시장의 시작지점인 광장시장 인근으로 새벽 시장의 활기(活氣)와 향수(鄕愁)를 담은 명칭
11) ▣ 마전교 = 다리 부근에 우마(牛馬)를 매매하는 마전(馬廛)이 있어 붙여진 명칭 ※(처음에는 창성방교, 태평교 등으로 부른던 이다리는 영조때 수표교를 전에 부른던 마전교 명칭을 이다로 이전)
12) ▣ 나래교 = 나비가 날개를 활짝 편 형상의 다리로, 동대문 의류상권의 중심지역에 위치하는 교량, 인근 동대문 의류상권이 세계패션 1번지로 비상하는 의미를 담음
13) ▣ 버들다리 = 과거 오간수문 상류에 왕버들이 많았었다는 데서 명칭을 인용하였으나 서울시 지명위원에서 제검토 권고로 공식명칭 사용 보류
14) ▣ 오관수교 = 청계천의 물줄기가 도성 안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지점에서 있었던 다섯 개의 수문(水門)을 홍예문(紅霓門) 또는 오관수문이라고 말한다, 수문은 동대문과 광희문(光熙門)을 잇던 성곽(城郭) 하부에 명종 15년에 완료되었으며 오관수문은 도성을 몰래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자들의 통로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임꺽정도 이통로해서 달아났다는 일화가 있다, 1908년 동대문 주변성곽을 헐면서 오간수문도 같이 헐었고 그 자리에 큰크리트 다리를 놓았다, 이마저도 이후에 헐려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2003년 발굴조사때 수문의 기초석이 남아 있은 것이 발견됐다,
15) ▣ 맑은내다리=청계천을 순 우리말로 바꾼 이름
16) ▣ 다산교 = 조선중기 실학자(實學者) 정약용(丁若鏞)의 호(號)를 붙인 도로인 다산로(茶山路)에 인접(隣接)한 다리
17) ▣ 영도교 = 일명 영미다리라고도 하며 단종비(端宗妃) 정순왕비(貞純王妃 송씨가 이곳까지 나와 단종과 영영 이벌 하였으므로 영영이별다리라는 뜻으로 사용되다가 뒤에 영미교로 바뀌었는데 고종 때 대원군이 다리를 헐어 경북궁의 석재로 썻다고 한다,
18) ▣ 황학교 = 옛날 이곳에는 황학(黃鶴)이 날아왔었다는 전설(傳說)에서 비롯됨
19) ▣ 비우당교 = 조선 세종 때 대표적인 청백리(淸白吏)로 여의정 하정(夏亭) 유관(柳寬)선생댁이 이 다리 근쳐었는데 그의 청렴은 비가 오는 날에도 방안에서 우산을 받쳐들고 비를 피했을 정도였다고 하여 유래한 이름다, 그 외에도 유관이 살았던 곳을 우산각골이라고도 한다, 투칸짜리 집에서 살면서 비가 오면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우산을 펴들고 빗물을 피하면서 책을 보고 있는 것을 그의 부인이 {우리는 우산이라도 있어 새는 비를 피할수 있지만 우산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하자 유관은 쓰고 있던 우산을 이웃사람에게 주었다, 이 후부터 동리사람들은 유관의 집을 가리켜 우산각이라 불렀고 이 동네를 우산각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20) ▣ 무학교 = 조선 개국초에 이 도로의 종점지점인 왕십벌 지역에 도읍을 정하려고 태조 이성계를 따라 지상(地相)을 보러 다니던 고승(高僧) 무학다사(無學大師)에서 유래한 무학로의 이름을 인용
21) ▣ 두물다리 = 다리 위치가 성북천과 정능천 두 물줄기가 청계천 지류(支流)와 합류되던 지점으로 두 개의 물이 만나는 다리라는 의미이며 다리 모양도 서로 만나는 형상으로 되어있다,
22) ▣ 고산자교 = 조선시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든 김정호(金正浩)의 호(號)를 따서 지은 다리로 인근 같은 이름의 도로인 고산자로(古山子路)와 연관되어 붙여짐
※ 청계천(淸溪川) 복원후(復元後)에 11경(景)
◈ <1경 청계광장> = 태평로와 동아일보사앞에 1,650㎡ 규모로 조성된 청계광장은 청계천의 시작 지점이다, 광장과 수변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광장은 보자기 형태의 이색적인 디자인과 다양한 색상의 석재포장으로 전통미를 한껏 살렸다, 또한 1/600의 청계미니어처를 통해 복원된 청계천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수변공간의 폭로(瀑路)에서 4m 아래로 폭 6~8m, 길이 5,84km, 수심 40cm를 유지하면서 하루에 6만 5천 톤의 물을 떨어뜨리며 청계천의 물줄기를 만들어낸다, 시원한 물줄기와 여러 형태(形態)의 조명(照明)이 어우려진 시민들의 편안한 휴식(休息) 공간이다,
만남과 화합을 상징하기위해 전국에서 가져온 돌로 구성된 8도석(폭포 앞부분부터 모전교까지 이어지는 물가에는 만남과 화합,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를 담은 전국 8도의 돌이 깔렸는데 경기도를 상징하는 일동석, 충청도의 천안석, 전라도의 고흥석, 제주의 제주석과 독도석 등이 호안 좌우측에 국토의 서측과 동측을 형상화하며 장식되어 있다), 프로그램 분수등이 설치되었다, 또한 옹벽에는 청계천 복원의 기록인 준천사(濬川司)를 길이 6,9m 폭 0,9m크기로 새겼다, 광장분수와 폭포, 8도석 등에는 반도체발광소자(LED)가 설치돼 밤이면 빛과 물이 어우려지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팔도상징 저수호안 = 조선8도와 미래의 통일된 한반도를 상징하는 석재 조형물을 통해 팔도의 화합을 형상화 팔도산지의 석재를 이용 끊임없이 흐르는 청계천 물의 생명과 화합의 물길을 형상화) ☼석재 산지: 남한(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경기도,
충청도) 북한(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2경 정조반차도(正祖班次圖) = 광교와 장통교 구간에 있는 정조반차도는 1795년(정조 19)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릉원이 있는 화성 (현재의 수원)에 행차하는 행차도를 도자벽화로 만든 것이다, 1,779명의 수행원과 779필의 말이 호위하는 어가 행진의 모습을 담은 이 그림은 김홍도의 지휘아래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이명규 등 당대 최고의 화원들이 합작한 작품으로서 문화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고 도자벽화의 규모는 폭 2,4m 길이 192m로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크기이다 (장통교를 중심으로 좌안(左岸) 옹벽(擁壁)에 설치되었으며 가로, 세로 30cm의 도자기질 타일 5,120장에 재현하였다),
◈<3경 옥류천(玉流川) = 새벽다리와 마전교 구간에 있는 옥류천은 옥과 같은 맑은 물이 바위를 돌아 폭포(瀑布)처럼 떨어진다, 하여 붙여진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을 형상한 조형물이다,
◈<4경 패션광장 = 버들다리와 오간수교 구간에 있는 패션광장은 인간가 자연(自然)의 상생(相生)과 조화를 주제로 제작한 문화의 벽과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올리는 하천분수, 자그마한 문화공간인 수변무대(水邊舞臺)가 어우려진 휴식공간이다,
◈<5경 청계천 빨래터 = 다산교와 영도교 구간에 있는 빨래터는 아낙네들은 빨래를 하고 아이들은 멱을 감으며 놀았던 빨래터
◈<6경 리듬벽전 =화학교와 비우당교 사이에 있는 리듬벽전은 벽면(壁面) 위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색색의 조명이 조화(造化)로운 수경시설(水景施設)
◈<7경 소망의 벽 = 화학교와 비우당교 구간에 있는 높이 2,2m 길이 50m의 소망의 벽은 2만 명의 국민이 그들의 소망과 염원을 직접 쓰고 그려 넣었다, 청계천 복원사업에 서울시민은 물론 지방 광역시, 도 이북 5도민, 해외동포등 온 국민이 참여를 유도한 기념물이다,
◈<8경 터널분수 = 비우당교와 무학교 구간에 있는 터널분수는 분수(噴水)에서 뿜어 나온 물줄기가 조명(照明)과 함께 화려(華麗)한 터널을 이룬다,
◈<9경 존치교각 = 비우당교와 무학교(無學橋) 구간에 있는 존치교각은 청계천고가도로의 교각(橋脚) 중 3개를 철거(撤去)하지 않고 남겨두었다, 근대화의 상징인 청계고가도로의 교각을 남김으로써 후대에 청계천 복원의 의미(意味)를 되새기기 위한 것이다,
◈<10경 청계천문화관 = 두물다리 부근에 있는 청계천문화관은 청계천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담아놓았다, 각종 사진과 고문서(古文書), 그림과 모형 동영상 등으로 청계천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11경 버들습지 = 고산자교(古山子橋)와 신답철교 구간에는 버드나무와 각종 수생식물(水生植物)을 옮겨 심어 생물들의 서식 공간(空間)으로 조성했다, 청계천 전체 구간 중 가장 자연적이고 생태적(生態的)인 공간이다,
※ 청계천물은 = 청계광장(청계광장에서 중랑천 합수지점까지 8,14km)에서 흘러 고산자교를 지나 제2마장교, 세일교 살꽂이다리쪽에서 중랑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2005년 11월 1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에서 홍순원 편집)
☎ 영조의 명에 의하여 한성판윤 홍계희가
「준천사실(濬川事實)」편찬
◆서울 청계천 관련 중요자료, 서울시 사료 총서 제8호로 국역 간행
준천사실은 현재 청계천이라 부르는 서울시내 개천의 중요성(重要性)과 개천을 관리하기 위한 위정자(爲政者)들의 고충, 그리고 국가를 통치하는 군주가 백성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책은 한성부 중앙에 흐르고 있는 개천을 준설하고 준설공사를 하게된 배경과 준설내용, 개천의 범람을 막기위한 방법 등 현재 청계천과 관계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1760년 영조의 명에 의하여 한성판윤 註(1) 홍계희(洪啓禧)가 편찬 하였으며 어제서문(御製序文)과 준천사실(濬川事實), 준천사절목(濬川司節目)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성부 개천의 내력(來歷)을 보면 한양의 지형이 백악산, 인왕산, 목면산, 낙타산 네 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네 개의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 그리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급격히 증가되는 생활폐수를 처리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영조는 경외(京外) 각 지방 백성들에게 개천을 준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개천준설에 대한 배경을 유시(諭示)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준설(濬設)할 대천(大川)과 세천(細川)을 구분하고 대천은 송기교(松杞橋)(세종로 1번지 부근)부터, 하류 영도교(永渡橋)(숭인동)까지로 하고 세천은 네 개의 산에서 흐르는 개천으로 하며, 대천은 국가에서 관리 감독하되 거주하는 민가(民家)집 앞의 개천의 작은 문제가 생기면 민간인이 보수토록 하였다,
개천준천에는 역부(役夫) 15만명, 용정(庸丁) 5만명 전(錢)35,000 민(緡)(해석;錢孔貫) ‘’즉,, 돈꿔미 민(緡)자(字)과 쌀 2,300여석이 소요되었으며 우선 개천도감(開川都監)을 설치하고 삼남(三南) 지방역군을 동원(動員) 1개월만에 준공하였다,
준천사 절목(節目)은 모두 25항으로 구성 첫째 항목은 개천이 막히는 이유, 준천사 설치, 한성부 네개산의 관리 등을 밝히고 둘째항목은 준천사의 도제조(都提調), 제조(提調), 삼군문(三軍門) 등 조직을 설명하였고, 세 번째 항목은 준철사의 인장(印章)문제, 네 번째 항목은 개천의 관리문제 등을 기록하였고 이후 항목들은 개천을 관리하고 보수하여 준천하는데 필요한 세부사항까지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 본 번역본인 준철사실은 이왕직(李王職)에서 소장하고 있던 판본(板本)을 1930년 등사한, 규장각 소장 원본으로 하였다,
주(註)(1)
편찬자(編纂者) 홍계희(1703~1771)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순보(純甫) 호는 담와(淡窩)이며 참판 우전(禹傳)의 아들로써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이체(李締)의 문인으로 1737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언수찬을 거쳐 공조참의에 올랐다, 1747년에 대사성, 1756년에 한성부 판윤을 지냈고 1757년에 열성지(列聖誌)를 증보하고 왕명으로 해동락장(海東樂章)을 지었다, 1760년 경기 관찰사, 1764년 10월26일 재차 한성부 판윤에 올랐다,
경세치용으로 개혁실천주의자로 균역법(均役法)을 시행(施行)하였다, 저서(著書)로 삼운성휘『三韻聲彙』가 있고 편저「編著」로 준천사실『濬川事實』균역사실『均役事實』문산선생 상전『文山先生 詳傳』등 다수가 있다, ※「준천사실 편찬」내용은 남양회보 82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