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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화 *

윤두서(尹斗緖)의 자화상(自畵像)

작성자simjang|작성시간04.01.26|조회수292 목록 댓글 0

 

자화상  윤두서  지본담채  38.5cm x 20.5cm  해남 녹우당 소장

 

 

윤두서(1668-1715)는 조선 중기와 후기를 잇는 중요한 화가이다.

  본관은 해남(海南)이며,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 종애(鍾崖)로,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외증조이다.

1693년 25세에 진사가 되었으나 당쟁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포기하고 시,서,화,로 일생을 보냈으며, 죽은 뒤 가선대부·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1712년 45세 때에는 전라남도 해남의 연동(蓮洞)으로 낙향하여 그림과 글씨를 벗하며 보냈다.   회화 세계는 조선시대 후기를 대표할 만큼 높은 경지에 이르렀는데 산수, 인물, 동물 등의 다양한 소재뿐만아니라 기법적인 면 에서도 활발한 대필의 수묵에서부터 섬세한 채색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였으며, 특히 인물화와 말 그림을 잘 그렸다. 

  그의 아들 윤덕희, 손자 윤용 ( 尹溶 :1708-1770 )이 모두 그림을 잘 그렸고, 외증손인 다산 정약용에게도 은연중 영향을 미쳐 실학적인 측면에서도 주목되는 인물이다.

  현재 해남 종가(宗家)의 녹우당(綠雨堂)에는 그의 대표작인 자화상 이외에도 다양한 학문적인 경향을 알려주는 지도며 그림첩 등이 보관되어 있다.  특히 그의 소장품 중에는 남종 문인화풍의 수용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고씨역대명인화보(顧氏歷代名人畵譜)》도 있어서 그가 남종화풍과 접했음을 알 수 있다.  정선( 鄭敾 : 1676 -1759 ), 심사정( 沈師正 : 1707 - 1769 ), 과 함께 조선후기 화단의 삼제(三齋)로 일컬어 지고 있다.

  전신상이나 반신상도 아닌 얼굴만을 화면에 떠올린 자화상을 보면 세계 어느 초상화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풍만한 얼굴에 반듯한 눈썹, 정면을 응시하는 눈, 그리고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긴 수염 등은 선비의 굳건한 의지를 담고 있고, 마치 살아 있는 얼굴을 보는 듯하다.

 

 

  고산 윤선도(1587-1671)

그는 1612년 진사가 되고, 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 이이첨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 등지에 유배되었다.  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을 모두 사퇴했다.  28년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 왕자사부가 되어 봉림대군을 보도했다.  29년 형조정랑 등을 거쳐 32년 한성부서윤을 지내고 33년 증광문과에 급제, 문학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36년 병자호란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영덕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은거했다.  52년 왕명으로 복직, 예조참의 등에 이르렀으나 서인의 중상으로 사직했다가 57년 중추부첨지사에 복직되었다.

58년 동부승지 때 남인 정개청의 서원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가지고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 삼수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에 해박하고 의약ㆍ복서ㆍ음양ㆍ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에 더욱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사후인 75년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저서에 《고산유고》가 있다.

고산의 생애는 한마디로 유배와 은둔의 생활이 거듭된 굴곡 많은 삶으로 그는 이러한 자신의 삶과 시름과 흥, 원을 시문으로 풀어낸다.

 

     

윤두서(尹斗緖)자화상(自畵像)

자화상(自畵像)은 윤두서 자신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다.
초상화에서는 얼굴을 묘사하는 것이 곧 정신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를 전신사조(傳神寫照)라 한다.
그 회화 정신을 이 그림을 통해 확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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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의 개념 및 성격

초상화란 특정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특정 인물을 그려내는 회화로서, 크게 보아 인물화의 일부분에 속한다. 초상화란 단어는 근래에 만들어진 용어로서, 옛 문헌 기록이나 찬문(贊文)을 보면 초상화를 일컬어 진(眞) · 영(影) · 상(像) · 진영(眞影) · 영자(影子) · 진용(眞容) · 영상(影像) · 화상(畵像) · 영정(影幀) · 영첩자(影帖子) 등으로 지칭해 왔다.
‘상'으로 대표될 수 있는 위의 여러 가지 용어는 자연 배경 없이 인물만을 주제로 그린 그림에 사용하는 말이다. 반면에, ‘도(圖)’는 풍경과 동식물을 그린 그림에 사용하는 말이다. 그래서 인물 중심이기는 하지만 생활 상태 속의 모습을 그린 것은 ‘도’라고 한다. 예컨대, 달마가 갈대 잎을 꺾어 타고 강물을 건너가는 모습을 그린 〈달마도강도〉나, 노자가 관문을 배경으로 소를 타고 가는 모습을 그린 〈노자출관도〉 같은 그림은 ‘도’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인물만을 주제로 그리는 ‘상’은 다른 어떤 화목(畵目)보다 그리기 어렵다고 한다. 인물 잘 그리기로 유명한 동진(東晉)의 화가 고개지(顧愷之)도, “대체로 사람을 그리는 일이 가장 어렵다.”

고 실토한 적도 있고, 또 한비자(韓非子)는 “사람은 대낮에 존재하기 때문에 오히려 닮기가 어려운 까닭이다. 귀신은 일정한 모습이 없는 것으로서 대낮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이를 쉽다고 한다” 고 하였고, 《후한서》에서는, “화가는 견마(犬馬)를 그리는 것을 기피하고 귀신을 그리기를 좋아한다. 실사(實事)이기 때문에 그리기에 어렵고, 또한 허위로써는 그 모습을 완전하게 포착하지 못한다.” 고 한 바 있다. 그만큼 초상화는 산수화나 화조화와 달리 대상 인물의 정신을 터득해 내는 골법화(骨法化)라는 과정이 필요한 까닭에 그리기 어려운 것이다.

   
작품 분석

〈자화상〉은 종이 바탕에 옅은 채색을 가하여 그렸다. 크기는 세로 38.5cm, 가로 20.5cm이며, 국보 제240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해남의 윤씨 종가에 소장되어 있다.
윤두서는  “터럭 한 올이라도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 (一毫不似便是他人)

라는 정통 초상화론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안면의 윤곽선과 수염의 필선에 화력(畵力)을 집중시켰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에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힘이 있고, 그 뒤에는 선비다운 기개가 충만 되어 있다. 고개지가 인체 중에 사람의 정신이 깃들이어 있는 곳이 눈이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윤두서상〉은 사진 카메라의 눈만 가지고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인간의 심정과 내재적인 정신을 외모와 함께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자화상〉의 화면 구도는 매우 간소하다. 보통의 초상화가 전신(全身)을 그리거나 상반신을 그리고 있는데 반해, 여기서는 얼굴만 강조하여 그렸다. 어깨나 목, 또는 웃옷의 묘사 같은 것은 물론 없으며, 배경은 그냥 여백인 채로 남겨져 있다.

그러나 간소하고 화면에 빈 곳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화면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빈 곳이 그 배후를 충분한 직관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경우에는 그 빈 곳은 결코 오래 빈 곳으로 남아 있지 않고 곧 직관에 의하여 채워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화면의 빈 곳은 빈 곳이 아니라 무한한 생각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된다. 한마디로 〈자화상〉은 초상화의 묘처인 골법화(骨法化)를 성공적으로 달성해 낸 초상화라 할 수 있다.

   
감상 및 평가

초상화에서는 정신을 묘사하는 것이 얼굴을 묘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얼굴을 가지고 정신을 묘사한다는 말이 성립된다. 한 인물을 놓고 볼 때 눈에 보이는 것은 외형이다. 이 외형에 내포하고 있는 신기(神氣)를 발견하여 그것을 그림으로 전하는 것을 전신사조(傳神寫照)라 한다. 〈자화상〉은 전신사조의 묘처를 터득한 초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윤두서(尹斗緖)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

송하관폭도는 한 선비가 떨어지는 폭포의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어떤 생각으로 폭포를 바라보고 있는지,
계곡 물은 선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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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소재

〈송하관폭도〉는 《해남윤씨고화첩 海南尹氏古畵帖》(보물 제481호)에 포함되어 있는 윤두서 작품들 중의 하나로, 비단 바탕에 수묵으로 그린 인물산수화 계통의 그림이다. 《해남윤씨고화첩》은 현재 해남 윤씨 종가인 녹우당(綠雨堂)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화첩에는〈송하관폭도〉외에도〈무송관수도〉· 〈관폭도〉· 〈자화상〉· 〈채애도〉· 〈선차도〉 등 60여점의 소품들이 실려 있다.
세로 18.5cm, 가로 19cm의 크지 않은 이 그림은 이미 알려져 있는 〈관폭도〉라는 이름과는 달리 폭포가 아닌 평범한 계곡의 물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적절한 이름을 짓는다면 송하관란도(松下觀瀾圖)라 해야 옳을지 모른다. 하지만 〈관폭도〉라 하건 〈관란도〉라 하건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물을 바라보고 있는 선비’를 주제로 한 그림이라는 점이다.

                                                                                                          
내용 및 작례

〈송하관폭도〉를 보면 뭉게구름처럼 묘사된 산 뒤쪽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물이 안개 속에 잠시 숨었다가 다시 나타나 바위에 부딪쳐 갈라져 내리고 있고, 한 선비가 소나무 그늘 아래서 비스듬히 앉아 계곡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선비의 유연하고 한가한 모습에서 그가 물을 그냥 구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관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송하관폭도〉처럼 물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주제로 한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윤덕희의 〈관폭도〉·〈수하관수도〉, 이한철의 〈고사관수도〉를 비롯하여, 간송미술관 소장으로 되어 있는 정선의 〈관폭도〉, 그리고 조영석의 〈관수도〉(개인소장) 등 많은 작품들이 남아 있다.

     
선비의 물에 대한 관념

이처럼 물을 바라보는 모습을 주제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졌고, 또 선비들 사이에 널리 애호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을 얻기 위해서는 당시 선비들의 도가적 정신세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선 시대에 있어서 도가사상은 유교와 달리 한번도 국시(國是)로 고양된 바 없었으나 그것이 우리 나라 사상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것이 사실이며, 특히 선비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수기(修己)의 방편으로, 또는 인격을 고양하는데 필수적 교양처럼 숭상되었다.
도가사상의 요체는 인간의 현실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궁극적으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에 합치하는데 있다. 노자(老子)는 인간성을 속박하는 시비(是非)나 호악(好惡), 미추(美醜) 등의 대립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땅히 인간은 그의 원초적인 본성을 되찾아야 하며, 그것은 자연의 도에 일치됨으로써 가능하다고 설파하였다.
자연을 즐긴다고 감각에만 의존한다면 자연이 지니고 있는 본성을 제대로 터득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관조와 침잠의 세계에서 보면 그 실체와 본성이 스스로 드러난다.
노자는 물에 관하여 말하되, 물을 최상의 선[上善若水]이라고 했다. 그는 또 천하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고 했다(天下莫柔弱於水). 그러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는 능히 물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어떤 것도 물과 바꿀 만한 것이 없다(而攻堅强者 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弱之勝强 柔之勝剛 天下莫不知 莫能行)고 하였다. 이것은 물의 효용가치나 물리적 성질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고 ‘유’의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물의 본성을 말한 것으로, 관조에 의해서 체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선비인 채제공(蔡濟恭)은 그의 〈회룡사관폭기 回龍寺觀瀑記〉에서,

“고요히 생각하니 하늘이 물을 낳을 때 어찌 그렇게 하게 하였는가 물의 본성은 아래로 내려갈 뿐이다. 허(虛)하면서도 실(實)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모질다. 그 자연을 따라 흐르지 않을 수 없으며, 흩어지는 것은 바로 그 떳떳함이다” 라고 하였다.

조선 초의 선비인 권근(權近)은 그의 《양촌집 陽村集》 〈고간기 古澗記〉에서 물의 본성과 인간의 천성에 대해 말하되, “사람의 천성이 선함은 물의 성질이 맑음과 같은 것이다. 천성이 본래 선한 것이지만 악이 생기는 것은 물욕이 유혹하기 때문이요, 물이 본래 맑은 것이지만 흐리게 보이는 것은 오물이 더럽혀서이니 그 악을 버리고 선을 보존한다면 사람들의 성품이 그 시초대로 회복되는 것이요, 그 흐린 것을 없애고 맑은 것을 솟게 하면 물의 성질이 정상을 찾게 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물의 본성을 수기적(修己的)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는 또, 물 중에서도 특히 계곡의 물이 가장 좋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천하의 물은 못의 작은 것이나 강이나 바다의 큰 것이 모두 물이지만, 못은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모든 오물이 모여 더러워지기 쉽고, 강과 바다는 양이 크기 때문에 흐린 것을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이므로 다 극히 맑을 수 없으니, 극히 맑은 것은 오직 산에 있는 계곡 물 뿐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계곡 물을 선비의 정신 자세와 관련지어 말하되, “계곡의 물은 그 근원이 높기 때문에 오물이 모여들 수 없고 그 흐름이 빠르기 때문에 흐린 것이 머물 수 없으며, 돌이 있어 부딪치고 모래가 있어 걸러진다. 비록 쏟아져 흐름이 차서 넘치며 더디고 급하고 부딪치고 솟아오르며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웅덩이에서 소용돌이치며 평탄한 데서는 곧게 흐르고 굽은 데서는 굽이치며, 그 변화함이 한이 없으나 그 맑음은 자약(自若)하며, 졸졸 콸콸 밤낮 없이 만고를 지나도록 쉬지 아니하니 도를 닦는 선비가 마땅히 이를 보고 자강(自强)하여 그 마음을 맑게 하고 그 천성을 회복해서 선(善)에 머물러 두고 떠나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감상 및 평가

이와 같이 조선의 선비들에게 있어서 계곡의 물은 단순한 물의 차원을 넘어서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비춰주는 의미 상징물로 존재하고 있었다.
〈송하관폭도〉의 선비도 바로 이런 마음으로 물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이 마음은 물의 본성을 침잠의 상태에서 관조하는 마음이며, 그것은 또한 단순한 것에서 보다 많은 것을 보는 마음이며, 평범하고 얕은 것에서 깊은 뜻을 찾는 마음이라 할 것이다.
〈송하관폭도〉는 단순히 계곡물과 이를 바라보는 선비를 그린 자연 속의 한 풍경이 아니라, 물이라는 ‘유(有)’의 존재를 통해서 자연과 인간의 본성인 ‘무(無)’의 본체를 찾으려 했던 당시 선비들의 정신세계가 투영되어 있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이 윤두서 개인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화의에 있어서는 개성의 차원을 넘어, 자연과 인간의 도를 표현한 그림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윤두서의 인장

 

孝彦

相思一夜發

恭齋

尹斗緖字孝彦

東海上人

尹斗緖印

孝彦

尹斗緖印

 

 

 

참 고  작 품

 

윤두서는 말 그림을 잘 그렸는데, 그가 그린 말 그림이 〈유하백마도〉 외에도 상당수 전한다. 말 그림에 있어서 그의 사실적인 묘사력은 세심한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말을 좋아하여 자신이 아끼던 말을 타지도 않고 잘 길렀다고 한다. 후에 말이 죽자 말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현재도 그의 고향의 녹우당(綠雨堂
) 앞에 있는 말 무덤과 더불어 전해오고 있다. 배경의 버드나무와 언덕은 형식적으로 그렸다기보다는 실제로 말이 매여 있던 현장을 그대로 묘사한 듯 사실적인 느낌이 든다. 이는 그가 아꼈던 백마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미상처사도

 

 

 

 

 

 

 


                                비단에 수묵  25 x 21cm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

윤두서의 <쟁기질과 목동>은 본격적인 풍속을 담은 작품이다. 
수목과 산과 언덕의 표현에 화보를 통해 익힌 방식이 두드러져 있다.  풍경 처리에 반하여 중경의 산언덕에서 쟁기질하는 농부와 근경의 두 마리 소를 풀밭에 풀어 놓고 낮잠을 즐기는 목동은 비교적 풍속화의 분위기에 가깝다. 특히 목동의 모습은 화원 김두량의 작품으로 전해오는 <목동오수도>와 유사한데 김두량이 '윤두서를 공부하였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이다.


 

 

 

                         모시에 수묵  /  31.8 x 24.8cm  /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

 

<낮잠:樹下午睡圖>
큰 나무 아래 인물을 배치한 <낮잠>은 풍속화적인 소재이다.

이 작품은 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을 즐기는 윤두서 자신의 '흙인 듯 숨어 있는 옥'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생각된다. 간결한 필치지만 얼굴 모습이 '자화상'과 꼭 닮아 있다.
이 그림을 통해 볼 때 윤두서는 민중 생활상뿐만 아니라 18세기 선비 화가들이 일상적 자기 생활상을 그리는 사인(士人) 풍속도에서도 선구적 면모를 지니고 있다.

 

 


 

 

 

 

 

 

 

 

 

 

 

 

 

 

 

 

 

 

 

 

 

                 모시에 수묵 / 32.4 x 21.1cm  /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


<짚신 삼는 노인>
인물의 사실 묘사에 비하여 잎이 울창한 고목 처리나 근경의 바위와 풀 표현은
화보풍이다.
두 발을 곧게 펴고 엄지발가락에 끈을 걸어 놓고 짚신을 삼는 상투 튼 노인은 덤덤한 표정이다. 마치 서울을 떠난 윤두서의 탈속한 심경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윤두서 자화상의 비밀

 출처 : 1998/02/12일 동아일보 기사임.

 한국 최고의 초상화로 평가받는 불후의 명작 ‘윤두서(1668∼1716)의 자화상(18세기초·국보240호)’.

이 그림은 매우 특이하다. 부리부리한 눈매, 거울을 보고 그린 듯 한올 한올 사실적이면서 불타오르는 수염. 넘치는 생동감과 파격적인 생략은 보는 이를 섬뜩한 공포로 몰아넣는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있어야 할 두 귀, 목과 상체가 없다는 점. 탕건 윗부분이 잘려나간 채 화폭 위쪽에 매달린 얼굴이 매섭게 노려보고 있다. 대체 이런 그림이 어떻게 나온 것인가.  윤두서가 일부러 그렇게 그린 것일까. 아니면 그의 실수 또는 그리다 만 미완성작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가 조작한 것은 아닌지.

결론부터 말하면 안목 없는 후대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 탓. 하지만 실수든 파격이든 그것이 작품의 예술성을 떨어뜨리지는 못한다.

이 그림은 조선시대의 유교윤리나 보편적 미감(美感)에서 벗어나 있다. 사대부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 일부를 떼낸 채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윤두서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은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실학자인 정약용의 외할아버지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바로 이 대목에 윤두서 자화상의 비밀이 숨어 있다. 이같은 의문을 품어온 오주석 한신대강사(한국회화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결정적인 자료 하나를 찾아냈다. 1937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사료집진속’.

 

 

     

현재 보존중인 자화상(왼쪽) 과 1937년 촬영된 자화상

 

 거기엔 놀랍게도 목과 상체가 선명하게 남아있는 윤두서 자화상의 옛사진이 들어있다. 그 사진 속에서 윤두서는 도포를 입고 있다. 단정하게 여민 옷깃과 정돈되고 완만한 옷주름, 어질고 기품있는 얼굴. 현존하는 자화상 실물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그러면 상반신 윤곽선은 어떻게 감쪽같이 없어진 것일까. 그 비밀의 열쇠는 상체를 그리는데 사용했던 유탄(柳炭). 버드나무 숯인 유탄은 스케치연필에 해당한다. 접착력이 약해 수정하기는 편하지만 대신 잘 지워지는 약점이 있어 조선시대엔 보통 밑그림용으로 사용됐다. 그래서 유탄으로 그린 상체는 지워지고 먹으로 그린 얼굴만 살아 남은 것이다. 오씨는 “윤두서가 미처 먹으로 상체의 선을 그리지 않아 작품이 미완성 상태로 후대에 전해오다 관리소홀로 지워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미숙한 표구상이 구겨진 작품을 펴고 때를 빼는 과정에서 표면을 심하게 문질러 유탄 자국을 지워버리는 엄청난 사고를 저질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결국 윤두서의 자화상은 미완성작이었다. 두 귀가 빠진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예술성마저 미완성인 것은 아니다. 콧구멍 코털까지 그려낼 정도로 철저한 윤두서의 사실성을 오씨는 ‘성실성의 산물’이라 평가한다. “실물과 터럭 한올이라도 다르다면 그게 어찌 윤두서 자신의 얼굴이겠는가. 이 사실성은 그의 냉엄한 관찰에서 나온 것이며 그 관찰은 내면에 대한 치열한 성찰이자 선비 정신의 표출인 것이다.”

 

#  두 그림을 자세히 보면 왠지 비밀이 숨겨있는 듯  ????

 

 

 

 책자안내

 http://www.sigongart.com/bookdb/book_read.jsp?booksId=45

 

 

 변형된 윤두서의 자화상    

 http://www.majeo.com/bojagi/gallery/yoonduseo/yds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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