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요가
The Yoga of the Christ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의 후속편
a continuation of and a sequel <Beyond the Himalayas>
맥도날드 베인 지음.
By Murdo Macdonald-Bayne
저작권에 대한 참고 사항
맥도날드 베인의 저서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Beyond the Himalayas)”와 그 책의 후속편인 “그리스도 요가(The Yoga of the Christ)”, 이 두 책을 둘러싸고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법적 정신”에 대해 별반 아는 바 없지만, 내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 저작권 문제를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사항은 다음과 같다. 영국에서 이 두 저서에 대해 철회 및 압수 명령을 내린 것은 1950년 대 중반 맥도날드 베인 사망 후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쯤 전인 이 때, 이 저서의 원 출판업자들과 연락을 취했었다. 이에 편집장은 법원 결정이 회사에 미칠 경제적 손실 예상액이 얼마인지 아느냐는 통탄의 편지를 보내왔다. 요컨대 이 법원 결정은 이 책에 관한 어떤 저작권자도 법적 권한 소유자도 없으며, 따라서 조만간 공공의 소유로 전환될 것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출판권을 비롯해 국제표준도서번호(ISBN)등을 이유로 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몇 몇의 기회주의자들이 등장했었다. 뻔히 예상되는 일일 테지만, 10년 쯤 전인가, 엄청난 금액을 요구한 사례도 있었다.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소유권을 주장한 이들이 분명 이 외에도 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법정이 이 책의 저작권 및 소유권 인정을 거부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의 전부이다.
그 법원 결정 후 수년 동안 이 두 책은,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읽고 다운 받을 수 있게 조처 되었고, 몇 몇 웹 사이트에서는 관심 있는 독자를 위해 이를 무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나 역시도 무료배포에 동참했는가 하면, 이에 대한 어떤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법적 문제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현재 나는 이 책이 공공의 소유이며 누구도 이 책의 저작권으로 인해 수익을 내고 있지 않다는 소신을 갖고 있으며, 내가 아는 한에서는 이제껏 저작권이 행사된 경우는 없었다. 만일 내가 이해한 이 사실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 주기 바란다.
현재 맥도날드 베인 이름으로 나온 서적 및 음성 기록을 비롯해 내가 제작하고 펴낸 이 외의 다른 모든 출판물들에는 저작권이 있으며, 저작권료는 영국의 랜덤 하우스(Random House)를 통해 저작권자에게 지불되고 있다.
이 사항을 참고해두길 바란다.
L. Mendel, Webmaster & Publisher
서문
그리스도 요가(Christ Yoga)란 그리스도 의식을 뜻하며 이것은 다른 모든 요가들 너머에 있다. 그리스도 요가는 자유로움 그 자체이며, 자유가 없다면 그리스도 의식도 있을 수 없다. 자유가 없다면, 그 자리에는 다만 체계와 지식과 기술을 힘겹게 매고 다니는 자아가 있을 따름이다.
이 책을 중심으로 우리가 함께 탐구해나감에 따라, 욕망과 추구는 자신과 반대되는 것들, 자신에 저항하는 대립물을 갖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모든 형태의 욕망과 추구는 자아가 확장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자아는 실재(實在)가 아니다. 그리스도 요가는 실재, 즉 그리스도를 가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요가는,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하면서 맹목적인 추구만 요구하는 다른 모든 형태의 요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따라서 “되어감(becoming)”은 환상이다. 실재는 지금(NOW)인 것이다.
새로운 그 무엇을, 항상 새로워지는 그 무엇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을 이제부터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을(what the mind is made up of)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새로운 그 무엇, 즉 실재에 저항하는 모든 것을 초래하는 것은 바로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을 때, 다른 누군가의 말을 반감이나 편견 없이 주의 깊게 들을 때처럼 스스로 이 책을 직접 소리 내어 읽어가며 그 내용을 주의 깊게 듣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이 방법을 통해서만 마음은, 자신과 대립되는 것들과 자신의 믿음과 자신이 지어낸 것들과 더불어 스스로를 알게 된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려는 것들은 자유, 즉 그리스도 요가에 이르는 길을 떠나려하는 그대에게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듣는다. 그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들만 듣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건과 믿음과 견해를 파헤치거나 방해하는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닫아버렸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의 조건을 만족시키거나 듣기 좋은 것들에만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듣기 좋은 이야기들과 우리의 믿음과 생각을 기쁘게 하고 강화시키는 것들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참된 이해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을 편견 없이 듣는 것은 기예(art)이다. 우리 자신의 무지와 굳어버린 믿음과 타고난 지식과 자신의 고유한 특질과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 등을 보호하기 위해서 심리적인 방어막을 치지 않고 다만 자신이 처해 있는 상태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기예라 하겠다. 우리를 밑바닥으로부터 철저하게 자유롭게 하는 것은 진리이며, 이는 결론이나 추측이 아니라 참이 아닌 것들을 지각하는 것을 뜻한다. 마음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진리(Truth)가 아니다. 진리는 마음 너머에 있고, 따라서 진리가 드러나기 전에 마음은 생각을 지어내는 것을 반드시 멈춰야 하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은(the truth of the matter) 편협하고 아집으로 가득하며 믿음과 지식이라는 틀로 굳어져 버린 마음에는 결코 드러날 수 없다. 그리고 믿음과 지식은 마음을 묶고 눈멀게(bind and blinding) 한다.
자신만의 결론과 편견과 경험들로 어지러운 마음을 갖고 그리스도 요가에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 요가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 요가는 사랑이자 신의 지혜이며, 그리스도 자체로서 자유롭고 활기차게 움직이는 무엇이지, 그리스도에 대한 관념이 아닌 것이다. 관념(idea)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창조성을 방해할 따름이다. 관념이란 자신을 제한하고 있는 조건들에 의해 구속되어 있는 자아가 투사(projection)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의 깊게 들을 때, 그저 말(word)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말이 담고 있는 내적 의미까지 들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그대는 사물의 진실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음이 자신이 지어낸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진리는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날마다 일어나는 다툼, 두려움, 사업에 대한 걱정, 식구들끼리의 싸움, 사회적 증오와 좌절 등에 그대가 묶여 있을 때, 이 모든 것들은 그대가 감당하기에 너무 벅차다. 그래서 그대는 위안의 수단으로서 소위 진리라 부르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식의 회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이렇게 할수록 마음은 둔감해지고, 혼란스러운 상태는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음이 자극이나 소위 영감이라 부르는 것들을 통해서, 그리고 기도를 하거나 주문(mantrims)을 반복하는 행위를 통해서 회피하고자 하는 한, 마음은 스스로의 사고 과정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는 것은 자유에 이르는데 매우 중요하다.
자기-이해(self-knowledge)만이 유일한 길이다. 회피의 성격을 띠고 있는 모든 방법들은 그리스도 요가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근본 원리로부터 그대를 멀리 떼어놓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깊게 듣는 데 있어서, 관념을 쌓거나 결론이나 가설이나 추측을 내리는 행위들은 그대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진리의 창조성에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자아와 그것이 지어내는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 것만이, 자기-이해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문이자 그리스도 요가에 이르는 입구라는 것을, 깨닫게 할 것이다.
1장
<그리스도의 요가>는 내가 마지막으로 집필한 책,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Beyond the Himalayas>의 후속편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내 친구와 함께 머물렀던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기억들과, 잠사르(Zamsar)까지 가는 여정과, 나에게 맡겨진 임무를 완수하고자 소위 문명 세계라 부르는 곳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져 있다.
링-쉬-라 은수자(the Hermit of Ling-Shi-La)와 헤어지고 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요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잠사르에 있는 내 친구의 고요한 안식처(sanctuary)에 들리는 것이 낫겠다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을 떠나 안식처로 향했다. 그리로 이동하는 동안에 우리는 같이 길을 걸으며 서로의 우정을 돈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길에 내가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진리는 나에게 자신을 드러내었다.
창포 강을 건넌 뒤에 우리는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강 근처에 있는 동굴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서 우리는 마른 장작을 찾아내었고 불을 피워 가져온 음식을 요리해서 먹었다. 우리는 밤새 불길이 줄어들지 않도록 땔감을 집어넣었고, 은수자님과 그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러다 나는 잠들었고, 태양이 뜨고 나서야 눈을 떴다. 추운 날씨였지만 나는 기력을 회복해 있었고, 씻기 위해 강가로 내려갔다. 씻고 돌아오니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고, 내 친구와 함께 아침을 들었다. 그러고 나서 라사(Lhasa)에 닿는 무역로(trade root)를 향해 출발했고 디킬링이라 부르는 곳까지 되돌아갔다. 여기서부터 랑 추(Rang Chu)라 부르는 강 왼쪽으로 이어져 있는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얌드록 초(Yamdrok Tso)라 부르는 거대한 호숫가를 따라 걸었고 그 길은 무역로로 이어져 있었다. 얌드록 초 호수는 때로는 호수의 색깔 때문에 호수 팔티(Lake Palti)나 투르쿼즈 호수(Turquoise Lake)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까지 이르는데 사흘이 걸렸고, 길은 매우 험해서 발 두 개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폭이 좁은 길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는 무역로에 도착했고, 무역로라는 말의 뜻이 그러하듯 이 길은 상대적으로 편한 길이었다. 페데 드종(Pede Dzong)이라 부르는 작은 촌락에 도착하자 내 친구는 그가 잘 알고 지내는 이장(headman)의 집에 들렸고, 그는 우리에게 조랑말(pony) 두 마리를 내어주었다. 잠사르까지 오가는 길 내내 믿음직스런 티베트 조랑말을 타고 갈 수 있다는 것에 나는 기뻤다. 내 조랑말은 씨말(stallion)이었으며, 흰 점이라고는 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새까만 색으로서 매우 듬직하였다. 나는 그 말에게 검은 왕자(Black Prince)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 말은 처음에는 조금 긴장한 듯 보였으나, 서로를 알아감에 따라 말도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나에게 항상 있던 재능들 중 한 가지는 말을 썩 잘 탄다는 것인데, 이는 어릴 때부터 말들을 가까이 다루며 자랐기 때문이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우리 집에 검은 왕자라고 이름을 붙였던 매우 사나웠던 검은색 말이 있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 누구도 그 말 근처에는 가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고삐 없이 풀려져 있던 칸으로 들어가서 아마인 케이크를 먹일 수 있었는데, 그 말은 참 맛있게 씹어 먹었다. 어느 날 부모님께서는 내가 말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것을 보시고는 심히 염려하셨고, 나에게 다시는 그런 짓을 다시는 하지 말라며 엄하게 이르셨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정말로 사랑했고, 그 말 역시 단 한 번도 나를 물거나 발로 차려고 한 적도 없었다. 내가 말을 잘 다룬 것만 보자면, 내가 마부들이 쓰는 용어(horseman`s word)를 알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용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몰랐고, 그 당시에 그것은 비밀로 다루어졌다. 나에게는 마부들의 용어 따위의 것들은 없고 다만 동물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반응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내 티베트 조랑말을 보고 있노라면 검은 왕자가 떠올랐고, 그래서 그것이 내 조랑말의 이름이 된 것이다.
내 친구와 나는 길을 걷는 동안 일반적인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우리가 잠사르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가 정녕 하려는 일은 착수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본 것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몇 마일이곤 누비고 다녔다. 내 생각은 종종 링-쉬-라 은수자의 안식처와 거기서 나에게 드러난 모든 것들에 머물곤 하였다. 나에게 있어 그 은수자와의 만남은 꿈이나 상상이 아닌 실재의 기억이었으며, 그분께서 말씀하셨던 것들 중 많은 부분이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내 마음 안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내 생각들과 내 친구의 생각들이 동시에 거의 일치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으며, 우리는 그 생각들에 대해 수없이 이야기하곤 하였다.
세 번째 날 우리는 투르쿼즈 호수에 도착하였다. 나는 “여기가 얌드록 초 호수이군요.”라 말했다. 그곳은 내가 태어났던 스콧틀랜드 고지(the Highlands)에 있는 호수(loch)와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호숫가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섬이 있고 저 너머에 산들이 눈으로 덮여 있는 모습까지도 비슷했다. 호수의 물은 녹색을 띠면서도 푸르렀다. 그래서 사람들은 투르쿼즈 호수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호수 표면은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매우 잔잔했다. 나는 말에서 내려 물 가장자리로 내려갔는데, 수 백마리나 되는 고기들이 헤엄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낚시를 잘 하는 나는 물고기 중 몇 마리에 시선을 고정하였으며, 낚싯대와 낚싯줄이 이곳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낚싯꾼들에게는 그야말로 천국이군요!” 나는 내 친구에게 말했다.
“그렇지.” 그는 대답하였다. “나는 자네의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을 보았지만, 아쉽게도 여기서 낚시할 시간은 없다네.”
우리가 있었던 곳은 해발 14000 피트(426m)에 이르는 곳으로서,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 있는 물은 담수(fresh)였다. 호숫가는 야생꽃들로 덮여 있었으며 수많은 색깔들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나는 “참으로 안식처라 할 만하군요.”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 호수에는 수 백 마리나 되는 오리와 거위들이 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돌멩이를 하나 집어서 그 근처로 돌을 던졌고 오리와 거위들은 꽥꽥 소리 지르며 반 마일 정도 떨어진 섬으로 날아갔다.
나는 참으로 기뻤다. 그곳의 풍경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으며, 우리 주위로는 아름다운 생명들로 가득했으며, 여정 중 가장 고된 일정이 끝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 종일 호수 주변을 따라 말을 타고 앞으로 나갔으며, 도중에 짐을 실은 야크와 당나귀 떼의 행렬을 진행 방향과 진행 반향 반대편 모두에서 수 차례 만나곤 했다. 어느 한 행렬에서는 나는 500 마리 넘게 야크를 셀 수 있었으며, 다른 행렬에서는 150 마리의 당나귀를 세었다.
페데 드종 마을은 호수 안쪽으로 불쑥 튀어나와 있었으며, 가장 튀어나온 곳 오른쪽에는 오래된 성채(fort)가 하나가 서 있었다. 그 성채를 바라보니, 스콧틀랜드 인버네스 주에 있는 네스 호수 근처에 불쑥 튀어 나와 있는 글렌 우르쿠하르트(Glen Urquhart) 성이 연상되었다. 이제는 폐허로 변해버린 그 성채의 주위로는 야생꽃들이 옹기종기 피어 있었다. 파랑색의 참제비고깔과 보라색의 참제비고깔이 젠시안(gentian) 등과 같은 야생꽃들과 함께 엄청나게 많이 피어 있었다.
우리는 가는 길에 두 번 쉬었는데, 한 번은 요리를 하기 위해서 쉬었고 다른 한 번은 침낭에서 잠을 자느라 쉬었다. 모기들만이 나를 괴롭혔다.
우리는 냡소 라(Nyapso La)를 가로지른 후 창 포(Tsang Po) 강을 다시 만날 때까지 호수 주변을 여행하였다. 해발 16000 피트(5181m)가 되는 이 길에서 우리는 창포 강 골짜기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골짜기가 창 포 강이 흐르는 주변에 늘어서 있는 밭떼기들로 푸른색과 붉은색과 갈색 등으로 온통 뒤덮여 있는 모습을 내 눈이 닿는 모든 곳에서 볼 수 있었다.
강 양쪽을 따라 늘어서 있는 높은 지역마다 빨강색 지붕을 이고 있는 집들이 흩어져 있었으며 그 너머에는 웅장한 산맥들이 눈으로 덮여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잠시 응시하고 있었는데, 잠시 뒤 친구가 “자네 어디 있나?”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이미 앞서 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가고 있습니다.” 라고 답하였는데, 그때 내 목소리가 계곡에 메아리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참 야릇한 경험이었고, 지금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그 때의 소리가 생생하다.
우리는 거의 5000 피트(1524m) 가량 되는 꼬불꼬불한 길을 계속해서 내려갔으며, 이윽고 매우 비옥한 계곡에 도착하였다. 2 피트(60cm)를 넘는 야생화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는데, 나는 그토록 아름답게 늘어서 있는 색깔들을 본 적이 없다. 파랑색 참제비고깔, 보라색 참제비고깔, 프리뮬러, 젠시안, 야생 장군풀, 중국 양귀비 등 다른 야생화들도 늘어서 있었다.
길이 창포 강과 만나는 곳에 이르자, 강은 그 폭이 1/4 마일(400m)도 넘는 듯 했으며 매우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나는 엄청 넘실거리며 흐르고 있는 그 강에 나무 한 조각을 던져 넣었는데, 나무조각은 이내 시속 30 마일(48km/h)의 속도로 떠내려갔다.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에 쌓여 있던 눈들이 녹아내리기도 있었고, 최근 며칠 동안 심하게 내렸던 폭우로 인해서 창 포 강은 홍수로 범람하고 있었다. 우리는 창다 드종(Changda Dzong)이라는 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내 친구는 무역로 주변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으며, 창다지역에서는 도르 창(Dor chang)이라는 이름의 이장의 집에서 환대를 받았다. 거기서 우리는 잘 먹고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우리는 강을 따라 나 있는 길을 따라 착삼(Chaksam)이라는 곳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우리는 통나무를 엮어 만든 나룻배를 타고 어떤 사고도 없이 안전하게 강을 건넜다. 이 시기에 강은 매우 위험하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우리는 반대편으로 안전하게 건넜다. 출발한 지점보다 반 마일(800 미터) 정도 아래쪽 되는 지점에 도착해 있었다.
이 지점에서부터 강은 수 마일에 이르기까지 넓어졌으며 한없이 펼쳐져 있는 모래 황무지 사이로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강 반대 편에 있는 이 길은 꼬불꼬불하기도 하고 오르내림도 심하였다. 키 추(Kyi Chu) 강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때로는 강보다 높은 곳을 지나기도 했고 이내 다시 강가 아래쪽으로 이어지기도 곳을 지나기도 하였다. 키 추 강은 창 포 강 만큼이나 넓은 강이었다. (키 추라는 말은 행복의 강이라는 뜻이다.) 이 지점에서 이 거대한 두개의 강이 만난다. 키 추 강은 라사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강이고, 여기서 창 포 강은 키 추 강과 합류하여 흐른다. 눈이 녹아 생긴 이 거대한 두 개의 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강물은 엄청나게 요동을 쳤으며, 수 백 피트나 되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불어난 강물로 그 기세를 힘입어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넘실거렸다. 어떤 생명체도 강물의 이 엄청난 급류 속에서는 단 일분도 살아있을 수 없을 듯 보였다. 심지어는 배조차도, 한때는 얼음과 눈이었던 이 엄청난 소용돌이 물 속에서는 금방 물에 잠겨 아래로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두 강줄기가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런 광경은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내 친구는 내 말에 동의하였다. “과연 이 광경은 세계의 가장 위대한 절경 중 하나일테지만, 바깥 세계에서 온 사람들 중에서 이 모습을 본 사람은 극히 드물단다.”
두 강은 이제 하나가 되었고, 오른쪽으로 굽이쳐 흘렀다. 이제 이 강은 브라흐마푸트라(Brahmaputra)강이였으며, 키 추 강까지 합류하여 거대한 강이 되었다. 그리고 이 강은 티베트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을 통과하면서 바다로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는 제법 멀리 떨어진 그 곳에서도 그 강 양 옆으로 비옥하게 경작된 밭을 볼 수 있었다. 이 지역 곳곳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나루터들이 있었다. 첫 번째 나루터는 도르예트라(Dorjetra) 라고 불리는 곳에 있었으며, 그 다음은 더 아래 쪽에 치티시오 드종(Chitishio Dzong) 이라고 부르는 곳에 있었으며, 그 이후로 제르바(Gerba)에도 있었고, 티멘(Timen) 지역에도 나루터가 있었다. 40~45마일(64~72km) 이나 되도록 늘어서 있는 이 지역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어떤 서구인의 방문도 받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여전히 라마승들이 입는 긴 예복을 입고 있었으며, 예복 덕분에 가는 곳마다 많은 혜택을 받았다. 말은 주로 내 친구가 하였고, 나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만 티벳말로 대답은 하되, 대화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나 자신을 자제하였다. 가는 도중에 우리는 몇 몇 라마승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내 친구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현인(sage)으로 대접하였다. 이처럼 내 친구는 어디에 가나 두드러졌다.
다음 날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수도원인 드레풍 수도원(Drepung Monastery)에 도착했다. 내 친구는 거기에 있는 수도원장들과 잘 알는 사이였고, 그래서 우리는 무척 환대를 받았다. 내 친구는 그들에게 내 일에 대해 이야기했고 내가 왜 티벳에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수도원장들 사이에서 큰 관심거리가 되었다. 내 친구는 문두(그의 이름은 이렇게 발음되었다)라는 이름의 라마승에게 나를 소개하였다. 그는 인도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영국에 가서 광산과 관련된 학문(mining engineering)을 배워 왔다. 그는 유쾌한 친구였다. 그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으며 우리는 대화를 활기차게 나누었다.
나는 드레풍 수도원의 크기에 참으로 놀랐다. 그곳은 꽤 큰 도시였으며, 자급자족이 가능하였고(self-contained), 9000 명이 넘는 라마승들이 살고 있었다. 본부라 부를 만한 건물 안에는, 한 번에 6000명이 넘는 라마승들이 자고 먹을 수 있는 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다. 또한 기도문통들(prayer wheels)도 내가 티벳에서 본 것 중에 가장 컸다. 그것들은 대략 직경 10 피트(3m)가 넘었으며 톱니바퀴로 움직여지고 있었다. 커다란 톱니바퀴를 손잡이로 돌리면 그것은 차례대로 다른 톱니바퀴들을 돌렸으며 이로써 가장 큰 톱니바퀴를 손쉽게 돌릴 수 있는 것이었다. 기도문통이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면 징이 울려 기도문통이 서 있는 현관에 그 소리가 울려퍼지게 되었다. 이 소리는 그대들의 모든 죄가 사해졌음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의식이라든지 의례용품들은, 내가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Beyond the Himalayas>에서 설명했던 다른 수도원들과 거의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아늑한 숙소와 음식을 제공받았다. 드레풍에서 우리는 하루 밤낮을 묵었을 뿐인데, 우리 둘은 잠사르에 있는 내 친구의 안식처로 최대한 빨리 가길 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통행 검문 따위의 일로 티벳의 정부 관리들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라사에 있는 포탈라 사원(the Potala)을 방문한 후 계속 가기로 결정하였다. 수도원장들은 우리의 결정에 놀랐었는데, 그들에게 있어 정부의 관리들은 매우 중요한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저 시간 낭비일 따름이었다.
우리가 라사로 이어지는 관문(gateway)에 도착하자 길가를 따라서 앉아있는 거지떼를 마주치게 되었다. 그들은 돈을 받기를 바라며 고맙다는 인사의 상징으로 혀를 내밀고 있었다. 이 거지들은 나름대로 전문가였으며 구걸 이외에는 다른 어떤 일도 하려고 들지 않았다. 내가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에서 말했듯이, 그들은 산적(bandit)들의 감독을 받고 있었다. 그들도 도둑질과 구걸하는 일이이야 말로 신사의 직업이라고 믿고 있었다.
라사의 변두리에서 보니, 포탈라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색 지붕들로 인해 장엄해보였다. 포탈라는 거대한 바위 위에 매우 오래 전에 세워져 우뚝 서 있었고, 아메리카 대륙이 알려지기도 훨씬 전에 건물의 높이는 17층이나 되었다. 아마 온 세계를 통틀어 포탈라는 단독 건물로써 가장 큰 건물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출입허가증을 들고 포탈라로 갔다. 이 당시 티벳은 섭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the Regent was then in charge). 그 당시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 있는 다즐링(Dajeeling)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당시 목숨이 위험하여 망명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곳에 있는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다 보았는데, 그 중에는 신비의 정원(the Garden of Mystics), 달라이 라마의 무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특히 관심을 갖고 본 것은 그들의 종교를 이루고 있는 것들로써, 달라이 라마의 옥좌와 그밖의 다른 것들도 많이 보았다. 나는 종교의 본질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종교적 감흥을 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거지에게 동전을 던져 줌으로써 그 문제를 다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자선(charity)이라 부르고,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대단하고 숭고한 사람이 된 듯 느낀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고상한 행위인가? 과연 우리 모두는 인간이 소외되는 이 비극을 내버려두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해 책임이 없는가?
우리는 늙은 사람들, 눈먼 이들, 불구가 된 이들, 병에 걸린 이들을 날마다 본다. 또한 우리는 돌로 지은 이 웅장한 건물들, 그 안은 각종 보석으로 휘황찬란하게 장식되어 있는 이 건물들과 그 바깥에 있는 이 불편한 모습들을 (날마다) 본다. 그러나 이 생명들은 섬뜩하리만치 비참한 자신의 고통 속에서 썩고 죽어가도록 내버려지고 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가슴에 깊은 인상이 박히지만,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이 비참함에 대해서는 부끄러러워하지 않는다. 조직화된 종교 역시, 이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였고, 이 사태에 책임이 있는 이 사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떳떳할 수 없다.
그렇다. 라사는 거지들의 도시요, 오물의 도시요, 음모의 도시이다. 이곳에는 위생에 대한 관념이 아예 없으며, 남자건 여자건 길거리에서 개들처럼 웅크리고 앉아 볼 일을 본다. 그나마 추운 날씨 덕택에 전염병이 퍼지지 않는 것이다. 죽은 개들이 길 위에 늘어져 있으며, 살아 있는 개들은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야위었고 온몸에 종기가 가득했다. 나에게 총이 있었다면, 저 비참한 동물들을 쏴죽여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고 싶었다. 죽은 개들은 살아 있는 개들이 먹이가 되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것들이 개들이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먹이였기 때문이다. 새끼 강아지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걷기 조차 힘들어하는 심하게 야윈 어미개의 배에서 태어난다. 세계에서 가장 종교적이라 부르는 곳들 중 하나라는 곳에서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광경이다. 모든 종류의 생명체, 심지어는 인간 생명에 대해서도 경시하는 풍조는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다.
티베트 사람들은 그들의 “죽은” 종교 예식에 엄청난 시간과 돈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자신들 주변에 있는 생명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거의 없다. 그곳에는 가장 원시적인 의료용품조차도 심각하게 부족하다. 우리는, 죽은 달라이 라마들의 시신 위에 세워진 웅장한 건물들과 금색 지붕을 한 사원들 등 많은 것들을 보았다. 그러나 이곳은 가장 기본적인 친절함조차도 부족하다. 이런 종교들 안에 과연 사랑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결코 없다! 아무리 좋은 종교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차가운 교리만이 있을 뿐 어떤 사랑도, 어떤 생명도 그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상점들은 대부분 여자들이 운영하는데, 마굿간(stall)을 그대로 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그곳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사업을 운영하는데 더 낫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우리는 우체국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영어를 할 줄 아는 한 라마승을 만났다. 그는 인도에서 교육을 받았다. 나는 요한네스버그에 살고 있는 (지금은 고인이 되어버린) 나의 소중한 벗, 댄 원버그에게 편지를 부쳤다. 그의 아내 테디는 지금도 그때 받은 편지를 간직하고 있으며, 그 편지를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물품 중 하나로 여기며 보관하고 있다.
라사(Lhasa)라는 이름은 “신들의 장소”를 뜻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인 조-캉(Jo-Kang) 사원을 방문하였다. 이 사원은 금빛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었으며, 지붕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 사원은 기원후 650년에 송-첸 감포(Song-tsen Gampo) 왕의 부인들이 들고 왔던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다.
1925년에 천연두가 라사를 휩쓸었고 그 당시에 8000 여명이 죽었다. 시체들은 마구 내버려져 무더기로 쌓였었고, 도시 바깥 지역에서는 이 시체들을 태웠다. 그 때 악취는 참으로 역겨웠다고들 말한다.
조캉 사원을 지나가다 거지들과 순례객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사원 앞이 오물 천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몸을 엎드리며 계속해서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들은 그 앞을 배로 기어다녔는데, 걸어다니는 것은 사원을 모독하는 행위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손으로 지은 건물을 숭배하게 될 때 사람의 마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때 사람은 더러운 곳에서도 넢죽 엎드리며 정작 살아 있는 신의 진정한 성전인 자신의 영혼은 하찮게 여기게 된다. 내가 본 장면들은 매우 메스꺼웠기에 그 거대한 도시인 포탈라는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다.
우리는 한 사원에 들어갔는데, 그 안에는 다이아몬드와 귀한 보석들로 뒤덮인 거대한 불상이 있었다. 그 불상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불상일 것이다. 이 불상 주변에는 금으로 만들어진 램프들이 놓여져 있었는데, 수 백 년 동안 한 번도 꺼지지 않고 버터를 태워가며 그 빛을 유지해왔다. 가는 길에 다른 사원들도 지나쳐왔는데, 그것들까지 다 설명하자면 그것만도 책 한 권이 될 것이다.
그래도 한 곳만 반드시 더 이야기하자면, 팔덴 라모(Palden Lhamo)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 불상은 힌두교의 시바신의 아내인 칼리 신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겠다. 거기에는 두 개의 상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불상은 팔덴 라모를 소름끼칠 만큼 무서운 괴물로 묘사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바쳐진 사람들의 피부로 옷을 해입고, 사람의 두개골에서 골을 먹고 있는 괴물로 말이다. 그녀의 주위로는 질병과 죽음의 상징물, 무시무시한 가면들,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되는 잔혹한 기구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무서워 올려다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빈약한 자들은 사람들을 현혹하여 그 상을 숭배해야 한다고 떠들고 다닌다! 이런 것이 종교라면 최대한 빨리 없애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리고 차라리 이제는 공산주의자들이, 음모를 먹고 살면서도 소위 거룩하다고 자처하는 이 도시를 차지하여, 이곳을 신봉하라고 쇄뇌시켜왔던 가난한 신봉자들을 아무런 자비나 관심이나 사랑도 없이 내버렸던 시체더미에다가 이 종교를 내다 버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내가 포탈라에서 본 것들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보다 자세하게 기록하겠다.
* * * * *
티베트의 농사짓는 방법은 오늘 날에도 수천 년부터 전해 내려오던 방식과 다르지 않다. 오늘날에도 원시적인 쟁기들로 땅의 표면을 갈아 엎는다. 그러나 토양을 잘게 부숴주는 겨울철 추위가 없다면 이런 쟁기질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전통적인 농경법도 그 나름의 매력이 충분하기는 하나, 야크나 드조(dzo)의 목 주변에 걸려 있는 깊이 있는 종소리가 이 황홀한 광경에 매력을 더한다. 여자들은 치마를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쟁기 뒤를 따라 걸으며 맨발로 씨앗을 뿌린다. 그러면 씨앗들은 전통 써레(harrow)에 의해 곧장 흙으로 뒤덮이게 된다. 써레는 통나무로 만들어지는데, 불에 그을린 구멍들 사이 사이마다 단단한 나무 심들이 나란히 박혀 있다.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표면 위로 올라오게 되면, 느각-파(Nga-Pa) 즉, 주술사가 진흙덩이들을 잔뜩 들고 밭에 나타난다. 그는 땅에 주문을 외우고나서는, 근처에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 수많은 정령(spirits)들에게, 티벳에서 자주 일어나는 우박과 폭우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해주기를 바라며 기도를 바친다. 지평선에 구름이 나타나면, 주술사는 자신의 오른손 약지를 펼치고 사람의 넓적다리 뼈로 만든 트럼펫을 강하게 훅 불면서 폭풍에게 돌아갈 것을 명한다. 만약 폭풍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우박이 떨어지면, 그는 극도로 흥분하면서 염주를 돌리면서 주문(mantrims)을 외운다. 그리고 주술을 걸어놓은 진흙 덩어리들을 한줌 집어서 폭풍을 향해 던진다.
우박이 농작물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고 지나가면, 주술사는 농사짓는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술사의 일에 대한 댓가로 그들의 수확물의 일부를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정부가 부과한 벌금도 내야만 한다. 이런 모습들은 아무리 좋게 포장한다 할지라도 바보같은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추수 때가 되면 모든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농작물을 벰과 동시에 탈곡을 하면서 곡식들을 정리한다. 그리고 곡식을 갈기에 적당한 장소가 마련이 되면, 사람들은 황소들을 끌고 와서 옥수수건 뭐건 어떤 곡물이건 다 빻는다. 그렇게 곡식을 빻는 동안에 그들은 한껏 배불리 먹는다.
탈곡은 도리깨를 사용해서 하는데, 도리깨는 야크의 가죽 이음매로 연결이 된 나무조각 두 개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게 탈곡을 하고 나면, 곡식의 껍질과 낟알이 분리가 되고, 껍질은 따로 모아 가축들의 겨울철 양식으로 삼는다.
추수가 끝나고 나면 마을에는 기쁨이 가득하다. 사람들은 춤을 추고, 한껏 술을 마셔 나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이 “행사(occasion)”는 노래와 춤으로 마무리된다.
2장
이제 나는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종교 건축물 네 개를 다 보았다. 런던에 있는 바오로 대성당, 로마에 있는 베드로 대성당, 바그다드에서 14 마일(22.5km) 위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티그리스 강 위에 있는 칸디마인(Khadimain)에 있는 회교 사원, 그리고 독특하면서도 찾아가기 가장 힘든 라사에 있는 포탈라 사원 이 네 가지를 내 일생에서 모두 보았다. 이와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온 세계를 통틀어도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포탈라 사원은 세계 인구의 오분의 일을 대표하는 종교적 중심지이다. 불교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라사에 있는 포탈라 사원과 온 불교의 영적 지도자인 위대한 달라이 라마의 의자(seat)에 대해 동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포탈라 사원은 라사 평야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워졌다. 그리고 키 추 강이 라사 평야 사이로 흐르고 있다. 이 웅장한 건물인 포탈라 사원은, 머리에 눈을 이고 있는 산들에 둘러 쌓여 있으며, 그 높이는 400 피트(122m)를 넘으며, 폭은 거의 1000피트(305m)에 달한다. 그리고 별채까지 포함한다면, 그 넓이가 1~1.5 평방마일(2.5~5.76km2)에 이른다. 겉은 회칠로 하얗게 칠해졌고, 높이 솟아오른 17층 짜리 이 건물은 16 세기에 지어졌는데, 이는 서양의 고층 건물 건축가들이 이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이다. 수 세기가 지나도 굳건하게 서 있는 저 모습을 보건데, 이곳의 건축 기술이 세계 최고가 아닐까 한다.
포탈라 사원은 주변 몇 마일 반경 이내에 있는 모든 것들보다 두드러져 보였다. 달빛에 비친 그 모습을 올려다 보았을 때, 회칠한 하얀 벽은 보이지 않는 영롱한 빛을 반사하며 찬란한 광휘를 내뿜는 듯 했다. 포탈라 사원에는 매력적인 면이 있었으며, 그대가 그것을 바라본다면 그대 역시 그 신비에 사로잡힐 것이다.
하늘 저 파란 창공에는 반짝이는 수 백 만 개의 별들이 비추고 있었으며, 보름달의 빛은 영롱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마치 우리가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 했다. 우리는 저 멀리서 승려들이 저 친숙한 옴-마니-받메-훔(Om Mani Padme Hum) 문구를 낭랑한 목소리로 반복해서 노래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승려들의 기도문을 바칠 때 그와 동시에 거대한 징의 깊은 음색도 함께 들렸다. 그리고 총하(chongha)들은 딸랑거리는 수백 개의 작은 종과 함께 어우러져 울렸는데, 그 소리는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전에도 이 모든 소리를 들은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 그 소리들은 훨씬 경이로우며 깊은 느낌을 전해주었다. 단언하건데, 이는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가장 매혹적이고 신비스러운 장면과 소리일 것이다.
“정말로, 세상에서 이런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내 친구에게 말했다. 그는 깊은 사색 중이었고, 내 목소리가 깊은 내면 세계에서 잠겨 있던 그를 깨웠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는 놀라서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답했기 때문이다: “방금 뭐라 말했나?”
나는 같은 말들을 반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대답했다: “참으로 아름답다구요.” 그러자 그는 오래된 기억이 그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간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포탈라 사원은 순전히 티베트의 건축물임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고 있자니 나는 아라비아와 이집트의 건축물들이 생각이 났다.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숨이 탁 막혔던 것은 물론이고 색깔과 아름다운 구조의 매력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도 닮아 있었다.
그것은 주변 환경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겠으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그저 거기에 갖다 놓은 듯한 인상을 주었다. 나무들과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산들, 근처에 있는 호수,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는 금빛 지붕, 반짝이는 별들, 라마승들이 입을 모아 기도하는 소리, 거대한 징들이 깊게 울려 퍼지는 소리와 총하의 소리, 그리고 수 백개의 작은 종들이 딸랑거리는 소리,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내 가슴에 벅차올랐으며, 이는 지울래야 지울 수 없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어 영원까지 살아 있을 것이다.
내 친구는 많은 관리들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 날 우리가 포탈라 사원 내의 여러 곳을 돌아다녀도 된다는 허가를 받아냈다. 그토록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들을 보았기 때문에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들만 언급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달라이 라마의 아름다운 방들이다. 금으로 만든 수많은 불상과 금으로 만든 부조(golden facing)와 모노그램과 돋을새김으로 장식된 금붙이들이 방의 벽을 장식하였다.
달라이 라마의 권좌(throne)가 있는 방은 금으로 천장이 장식되어 있었다. 화려한 금빛 실크실로 짠 브로케이드, 깊은 보라색과 금색빛들, 이 모든 것들이 장인들의 손에 의해 절묘한 모습으로 어우러졌다.
달라이 라마의 무덤에는 수 백개의 금과 은으로 만든 잔과 그릇, 금과 은으로 만든 불상, 벽에 붙어 있는 금으로 만든 부조, 상자에 박혀있는 절묘한 세공품들, 그리고 그 안에 각종 보석으로 장식된 불상들이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다 보니, 죽어 부패하는 몸을 위한 집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이 낭비되고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은 내 숨을 탁 막히게 했다. 그와 같은 것들은 전에 결코 본 적이 없지만, 생각하건대 다시 보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갇혀져 있는 재산은 그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의 둥근 무덤 바깥 쪽은 금판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는 확신하건대, 이 무덤 하나에서만도 수 백만 파운드에 맞먹는 금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계가 있었고, 이 값비싼 유적들을 둘러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곳을 떠나 다음날 아침에 잠사르로 길을 나섰다.
우리는 그날 저녁에 트락체(Tragtse) 수도원에 도착했다. 이 수도원은 산중턱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수도원이 눈으로 보이는 반경에 들어섰을 때 나는 내 친구에게 이야기했다: “바위 위에 저렇게 높고도 웅장한 건물을 짓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저 육중한 목재들과 돌들을 올려다 놓을 수 있던 것일까요?” 나에게 이 일은 인간의 노력을 넘어선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내 친구가 대답했다: “지금 자네가 보고 있는 저 건물은 지은 지 600년이 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처음 지었을 때처럼 견고하게 서 있지. 앞으로 600년이 흘러도 오늘날처럼 굳건히 서 있을거야.”
참으로 놀랄 만한 선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쉬 림포체(Geshi Rimpoche)가 우리를 만나기 위해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분명 내 친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으나 나에게까지 그 사실을 “알리지는”(let on) 않았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깊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온화한 얼굴을 나는 보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결국 내가 다시 네 앞에 여기 이렇게 서 있게 되었단다.” 라고 말하는 듯 하였고, 내 가슴은 기뻐 뛰었다.
그를 다시 보는 기쁨 때문에 나는 그동안 느껴왔던 피로를 싹 잊었다. 우리는 그 날만 15 마일(24km)을 걸어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제서야 내 친구가 계속해서 서둘러야만 한다고 말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수도원의 정문에 이르렀을 때, 수도원장이 나와 우리를 환대해주었다. 그는 키가 컸으며 어깨가 벌어진 사람으로서 짐작하건데 55살은 되는 듯 했다. 그가 환하게 웃자 완벽하게 가지런한 치아가 보였다. 그의 얼굴은 친절함 그 자체였고, 그의 이마는 그가 대단한 지성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참으로 깊으면서도 부드러웠다. 아쉽게도 그는 티벳말만 할 줄 알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로부터 나오는 온화한 기운을 느꼈으며, 게쉬 림포체가 나를 위해 사전에 그에게 어떤 조치를 취해놓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친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통역하는 역할을 맡았다. 나는 티베트 말로 오가는 대화의 일부분은 파악할 수 있었지만, 아직 대화를 완전히 따라가기에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대화 중에 잠깐 잠이 들었음에 틀림없다. 내 친구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곧 저녁을 먹을테고, 식사 후에 자러 가면 된다네.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나세.”
너무 피곤해서 많이 먹지도 않았다. 수도원장의 침실로부터 떨어진 작은 방에 마련된 아늑한 침상으로 들어갔다.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전날 너무 피곤해서 그런지 그날 아침에는 마치 약기운이 도는 듯 했다. 혹시 그대도 이런 건강한 피곤함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누워서 잠을 자는 것 말고는, 심지어 옷도 벗지도 않고 오로지 잠 이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그런 피곤함을 말이다. 그날 밤 내가 그토록 피곤했던 것이다.
라사에서 이틀 간의 여정은 일주일에 맞먹을 듯 싶다. 그리고 게쉬 림포체를 다시 만나는 것 자체가 내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었다. 게쉬 림포체가 티베트 말로 수도원장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내 아들은 지금 무척 피곤하여, 휴식을 반드시 취해야만 하네.”
나는 내가 그토록 피곤함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고, 나는 그 말을 듣고 기꺼이 잠을 잘 수 있었다.
머리가 베게에 닿자마자 나는 단단히 잠들어 버렸고 다음 날 아침 총하가 울리는 소리를 듣고 깰 때까지 밖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 것도 몰랐다. 우리 모두는 수도원장의 숙소(quarters)에서 함께 아침을 들었으며, 저 아래에 펼쳐져 있는 계곡을 내려다 보기 위해서 바깥으로 나섰다. 나는 정말이지 여기서 하루를 꼬박 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느꼈고, 내 친구에게도 내 바람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나도 기쁘단다. 게쉬 림포체도 우리가 그와 함께 하루 더 지내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말이야.”
나는 물었다: “그분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시게 된 건가요?” 내 친구는 설명해주었다: “그분은 너를 무척 아끼고 있단다. 그가 이 먼 거리를 여행해서 온 것도 순전히 너를 보기 위해서이지.”
바로 그때 게쉬 림포체는 우리가 있던 곳으로 왔다.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이렇게 물었다: “나를 여기서 보게 되서 놀랐나 보지?”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기쁘다고 말씀드렸다 “사실 어제 계곡을 올라오면서 당신이 제 마음에 너무나도 강하게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제 친구에게도 그렇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제 친구는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미소를 지으실 뿐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대사님을 보게 되었을 때 제 가슴은 기뻐 뛰었습니다.”
나는 이보다 더 낫게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인다. 왜냐하면 그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내 가슴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도 이를 알고 있었는데, 내가 말을 하는 동안 그이로부터 갑작스레 따뜻한 광채가 나와, 전기처럼 나를 통과하는 듯 느꼈기 때문이다. “저리로 가서 앉자.” 그는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캬추(Kya Chu) 강이 토빙추(Tobing Chu) 강으로 합류되는 계곡과 마주하는 곳에 있는 정자(alcove)로 올라갔다. 거기서 보았을 때 강물은 어떤 부분에서는 부드럽게 굽이쳐 흘렀으나 다른 부분에서는 강물이 바위들을 향해 질주하며 하얀 물보라를 대기 중으로 뿜어올리기도 했다.
수도원장과 내 친구는 활기차게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래서 게쉬 림포체와 나만 따로 남겨졌다.
게쉬 림포체는 말했다: “내 일생의 과업을 통해 얻게 된 좋은 모든 것을 너도 역시 갖게 되길 참으로 원한단다(I do want you to have the benefit of my life`s work). 나는 네가 거짓인 모든 것을 보기를 바라는데, 이런 방법을 통해서만 너는 참인 것을 알게 될 것이야.”
나는 대답했다: “예, 제가 대사님(you)을 떠나고 난 후부터 줄곧 제 마음은 줄곧 변화(transformation)되는 상태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마음에 있는 그 무엇도 진리를 드러낼(reveal)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관념도 어떤 경험도 심지어는 수 세기를 걸쳐 축적되어 온 지식들조차도 진리를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내 아들아, 그건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는 말했다. “마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진리란 마음 자신이 투사된 것에 지나지 않지. 그런데 그것은 진리가 아니거든.”
그때 나는 그가 그리스도의 요가에 대한 말을 계속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이런 내 생각을 알아차렸음이 분명한데, 이런 주제의 이야기를 할 때면 늘 말하던 방식으로 이내 그는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곧 그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고, 그가 말하는 단어 하나 하나는 모두 나를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저 그가 말하는 것들만 듣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myself)을 이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 주의를 기울여 들었는데, 그것은 자아가 실재를 가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할 때 그의 목소리는 음악처럼 들렸다. 그대가 내가 쓴 책,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를 전에 읽어보았다면, 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것이다.
그는 이런 말들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참된 명상만이 실재(the Real)를 드러낼 수 있다네. 비록 너는 그것이 무엇인지(what it is) 결코 알지 못할 것이지만, 마음으로는 결코 그것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이란다. 마음, 즉 알려진 것(the known)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것(the Unknown)을 결코 드러낼 수 없단다. 마음이란 그저 관념, 기억, 경험들일 뿐이고, 이것들이 마음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지(this is all the mind is made up of). 그런데 이런 것들로는 결코 진리를 밝혀낼 수 없지. 대부분 사람들이 진리라 생각하는 것은 자신들의 마음이 투사된 것에 지나지 않아. 그들은 진리에 대한 책을 읽을지도 모르고, 순전히 다른 사람들의 관념에 불과한 이야기들을 들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너는 그런 것들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진리는 오로지 내면으로부터만 드러날 수 있는 것이야. 진리는 결코 바깥에서 오지 않아.”
나는 대답하였다: “예, 지난 번에 제가 대사님(you)과 링마탕(Lingmatang)에 있었을 때, 저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관념이라는 것은 그저 마음을 편협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과, 편협해진 마음은 무한하고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엇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심지어는 기도조차도 참된 명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말이나 문장을 되풀이함으로써 마음을 잠잠하게 만들 수도 있겠고, 그 고요함 속에서 어떤 응답을 받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응답은 실재에서 나오는 응답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의식하지 못한(unconcious) 마음에서 나오는 응답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란 다만 무엇인가를 구걸하고(begging) 기원하는 것으로서, 기도는 결코 창조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할 때에는 항상 이원성(duality)이 존재하는데, 무엇인가를 구하는 자와 그것을 허락해주는 자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것들, 이를테면 자동차나 덕이나 그런 것들을 위해 기도할 따름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구하는 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어라. 이 말씀은 즉각적인 현재(the immediate present)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지금 이 순간 존재합니다(Everything is now). 명상이란 참으로, 마음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알아내는 과정입니다. 바로 지금, 얼마 시간이 지난 후가 아니라 바로 지금(NOW) 이 순간에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곧 그를 제한하고 있는 조건(conditioning)이며, 그것들은 지금(Now) 이 순간 생각의 형태로 자신을 표현하려고 항상 애를 쓰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한다면, 지금(Now)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반드시 알아차려야(aware of) 합니다. 그러면 어제도 과거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재잘대는 것을 멈추었을 때 비로소 실재가 거기에 들어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재는 항상-현존하고 있는 지금입니다(Reality is ever-present Now).”
“그렇지.”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참된 명상이란 재빠르고도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마음을 뜻하고, 그 마음은 드넓고 폭넓게 모든 것을 의식하고 있으며 무한하단다. 그래서 (참된 명상의 상태 안에서) 모든 문제는 그것이 발생함과 동시에 그 즉시 해결되어 없어져 버리고, 모든 도전은 어제의 반응이 없는 지금 속에서 순간순간 이해되어 버린단다. 참된 명상이란 자아를 밝혀내는 과정(self-revealing process)이야. 자아를 밝혀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명상이 아니야. 그건 다만 마음이 좁아지는(contracting)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명상은 아무 것도 밝혀낼 수 없지.”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나는 말했다. “마음의 모든 내용물을 알아야 합니다. 의식적으로 활동하는 부분은 물론 무의식적으로 활동하는 부분들, 즉 마음이 깨어있을 때와 소위 말해 잠들어 있다고 말하는 부분까지도 말입니다. 당신께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저에게 보여주셨지만, 아직도 저는 가끔씩 그것이 쉽사리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곤 합니다.”
“아들아, 그건 네가 결과를 구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는 설명해주었다. “그럼 이제 같이 실험해보자. 네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면, 너는 항상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게 될 것이야. 그런데 새로움(Newness)은 결코 기억을 통해서는 오지 않아. 그렇지 않니? 기억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내가 하고 있듯이 너도 나와 함께 명상을 해보자꾸나. 그러면 너도 내가 하는 것들을 차례대로 경험하게 될 거야. 우리는 내일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존(the Living Presence)을 알아내기 위해 실험하고 있는 중이란다.”
“무엇보다 먼저 자기-이해(self-knowledge)가 없는 명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단다. 자기-이해란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아니야. 상위 자아나 하위 자아와 같은 것들은 다만 관념이자 마음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란다. 그리고 마음이란 곧 시간인 것이고. 시간은 시간을 넘어서 있는 그 무엇(the Timeless)을 결코 밝혀낼 수 없단다. 그러므로 참된 명상을 할 때, 상위 자아에 집중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행위이지. 참으로, 명상이란 생각의 모든 과정을 밝혀내는 것이란다. 그리고 생각이란 곧 기억을 말하는 것이지. 그리고 이 작업은 지금 당장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란다. 진리란 시간에 속해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지. 진리는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이 지금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어디에도 결코 존재할 수 없단다. 시간은, 시간을 넘어서 있는 그 무엇을 결코 밝혀낼 수 없단다. 기억-생각은 시간의 산물일 뿐이야. 과연 그렇지 않니? 자, 그럼 자아(self)란 무엇일까? 명백하게도 그것은 기억일 따름이네. 높은 차원이든 낮은 차원이든 할 것 없이 그것은 여전히 기억일 뿐이지. 내가 전에 말했듯이, 상위 자아와 하위 자아에 대한 관념은 단지 추측에 불과하며, 그것들은 마음의 산물이지. 그렇지 않니? 네가 자신 안을 들여다본다면 과연 그렇다는 것을 알게(find out) 될 것이란다. 고차원의 자아와 저차원의 자아는 그저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전에 네가 어디선가 읽은 관념일 따름이지. 너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이 실재라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실재가 아니야.”
“너는 상위 자아를 아트만-영(Atman-spirit)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만, 그것은 여전히 마음 안에 있는 관념일 뿐이야. 네가 그것을 아트만이라 부를 때, 너는 그것을 높은 차원으로 올려다 놓는 것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기억의 한 부분에 불과하단다. 그러므로 “나(myself)”의 모든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반드시 기억, 관념, 생각들을 이해해야 하는데, 사실 이것들은 모두 같은 것이란다. 생각이나 기억이 없다면 자아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방금 전이나 최근에 획득한 기억뿐 만 아니라, 세기의 기억(the memory of centuries)까지도 이해해야 한단다. 세기의 기억이란, 시간을 통해 경험된 것들의 축적이자 과거의 모든 영향력을 모아놓은 것의 결과를 말한단다. 의식의 표면에 있든 심층에 있든지 간에 이 모든 것들이 바로 기억이란다.”
“그러나 기억의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세세히 탐구(investigate)하자면 시간이 소요될 것이란다. 그런데 시간은 결코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단다. 왜냐하면 진리는 시간을 넘어서 있고 지금 이 순간 존재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므로 시간을 사용하여 분석하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을 넘어선 그것을 밝힐 때에도 시간을 사용하는 습관에 젖어 있단다. 그러나 그들에게 진리는 언제나 저 멀리에 놓여 져 있을 것이야. 이제 우리는, 생각이란 기억의 결과라는 것과, 기억은 반드시 즉각적으로 사라져야(dissolved) 한다는 통찰(realization)에 이르게 되었단다.”
“이제,”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너는 자아, 즉 바로 네(the you)가 기억의 다발에 불과하며, 그것들은 생각의 형태로 자신을 투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생각과 자아란 분리되어 있지 않아. 그것들은 하나이지. 이것은 결코 진리 그 자체가 될 수 없고 또한 진리를 드러낼 수도 없단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마음을 넘어서고, 기억을 넘어서고, 시간을 넘어선 그 무엇에 이르러야만 한단다. 그러나 기억이 작동하고 있는 한, 거기에는 다만 시간이 있을 따름이고 시간은 실재가 될 수 없지.”
나는 어떤 방식으로도 그가 하고 있는 말에 답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그 사실이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었으며, 내 안에서 변혁(transformation)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에 결코 알지 못했던 그 무엇을 이제는 이해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마음이란 시간과 기억과 관념의 산물이라는 것을 이해할(see) 수 있었다. 자유로워지고자 한다면, 마음은 자신이 결코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높은 차원이든 낮은 차원이든, 기억은 결코 자신을 넘어서 있는 그것을 드러낼 수 없다. 나는 마음, 즉 내(the me)가 진리를 결코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을 볼(see) 수 있었다. 오로지, 진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출 때라야 비로소 나는 진리를 경험할 수 있었다. 내가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을 때, 마음은 고요(still)해졌다. 그 고요함은 힘에 의해 강요된 고요가 아니라 자유를 통해 온 고요함이었다. 나는 더 이상 무엇인가가 되어야겠다고 바라지 않았다. 무엇인가로 되어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져버렸다. 내 마음은 결코 자신을 진리로 변모(transform)시킬 수 없었다. 또한 마음은 진리를 찾아낼 수도 없었다. 진리를 드러내고자 한다면, 마음은 고요해져야만 한다. 그러면 그때 시간에 속해있지 않는 고요함이 들어서게 된다. 그 고요함은 힘이나 강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 자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찾아오는 고요함이다. 마음이 생각을 지어내며 재잘대는 것을 멈추었을 때, 그 침묵 속에 실재가 존재하며, 알려지지 않은 그 무엇(the Unknown)이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성(creativeness)이다. 나는 결과에 대한 그 어떤 욕구도 갖지 않았다. 모든 행동이 멈췄고, 생각도 멈췄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생각의 최고 형태인 것인데, 왜냐하면 이제 그 자리에 창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이제 더 이상 기억이나 과거도 아니었으며, 전에 참이나 거짓이라 생각했던 것의 표현도 아니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고, 더 이상 그것들에 사로잡히지도 않았다. 모든 지적 행위가 멈췄다. 나는 더 이상 방황하지도 뭔가를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wander or wonder). 이제 생각도 생각하는 자도 없었고, 경험도 경험하는 자도 없었다. 기억이나 시간을 통한 경험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소멸된 가운데 경험의 상태만이 지속될 따름이었다. 어제, 오늘, 내일은 완전히 멈추었다. 그것들은 마음의 바깥에서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더 이상 시간에 사로잡히지 않는 마음은 시간 없이 존재하며, 시간 없이 존재하는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고, 원인도 없고 따라서 결과도 없이 존재하는 영원한 것이었으며, 원인을 갖고 있지 않은 그것(that which is without cause)이 바로 실재이다. 아버지(the Father)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고 계실 따름이다. 여기에 바로 창조성, 즉 완전함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진리가 거기에 즉각적으로 들어섰다는 것과(I saw now that the Truth was immediate), 시간의 산물인 마음이 완전히 멈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생각은 시간에 속해있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아보는 순간, 모든 인간의 문제는 시간을 통해서가 아니라 지금 즉시 해결될 수 있었다. 실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for Reality had no problem). 오직 사람만이 자신의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었고, 이것을 아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또한 나는 모든 인간의 문제들이란 기억과 경험과 시간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억은 결 결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문제들은 문제 자신이 발생한 차원에서는 해결될 수 없었다. 오직 기억이 작동하길 그쳤을 때, 문제들은 그 순간 즉각적으로 해결되었다. 그것들은 시간을 넘어선 무엇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시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으며, 시간은 문제가 존재하고 있는 곳인 마음 바깥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신만 홀로 존재하고 그밖그밖닸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될 때,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모든 문제는 사랑과 지혜이신 신 안에서 사라져 버린다.
내가 이 사실을 이해하게 되자, 창조성이 들어섰으며(came into being) 나는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한자(Infinity) 만이 유일한 실재였다. 나는 더 이상 되풀이 하는 기계가 아니라, 어디에나 존재하며 시작도 없고 따라서 끝도 없는, 활발히 움직이는 창조 원리(active Creative Principle) 그 자체였다. 이제 나는 자기-이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다. 자아는 실재 안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나는 실재가 곧 자유로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이 유일한 시간이다. 내일도, 어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와 과거가 현재를 가리고 있을 때, 지금(the now)은 깨달아질 수 없다. 그러므로 명상이란, 자신을 구속하고 제한하면서 다른 것들을 배제시키는 집중의 수단이 아니다. 명상이란 자유로움이다. 시간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the time).
이제 나는 오직 하나(One)만이, 항상 새로워지는 그것(the Ever New)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원성도, 대립되는 것도, 욕구도, 갈망도,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것들은 모두 마음에서 속한 것이었고, 분리(separation) 속에 살고 있는 것은 바로 나(the me)였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였으며 그리스도의 요가만이 유일하게 참된 요가였다. 이제 나와 내가 소유한 것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고, 오로지 전체만이 실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물방울이 바다가 된 것이다. 이제 나는 주(Master)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말씀하신 뜻을 알았다. 이 말은 단순한 관념이 아닌 생생한 실재였다. 생각하는 것(thinking)만으로는 결코 실재를 창조해낼 수 없는데, 생각은 시간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각은 시간을 넘어선 그것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나는 이 사실을 이제 알았다. 기억의 산물인 생각이 그쳤을 때에만,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생각이 끝장이 나야만, 영원한 그것이 들어서게 된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지 않은 이 고요함 속에 존재자(Being)가 있었다. 이 고요함 속에 기억으로부터 자유롭고,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순간에서 순간으로 항상 지금에 현존하는 그것(the Ever-Present-Now)이 있었다.
이제 나는 상위 자아도 하위 자아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것들은 분열의 또 다른 형태로써 정신으로 만들어낸 개념일 따름이었다. 자아가 어떤 차원에 속해 있든지 간에, 자아는 단순한 관념에 불과했다. 시간의 관념은 환상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내 친구와 수도원장이 와서 우리 옆에 앉았다. 내 친구가 말했다: “우리는 그대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둘 다 세상의 시간으로 돌아오는 것을 볼 때까지 기다렸단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그는 말했다. “이곳은 게쉬 림포체가 가장 아끼는 안식처 중 한 곳이란다. 네가 잠사르에서 돌아오게 될 때 그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리고 링마탕까지 그와 나는 너를 배웅해 줄 것이란다. 네가 혼자 가게 내버려 둘 수 없거든.”
나는 대답했다: “저에게 있어서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 것입니다.”
오전의 나머지 시간 동안은 라사와 포탈라 사원 등과 관련된 일반적인 주제로 대화가 흘러갔다.
곧 정오가 되었고 한 라마승이 와서 음식이 준비되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식사가 어떻게 나올지 기대했었는데, 맛있는 보리죽과 아름답게 요리된 양고기와 보리밀로 만든 빵과 신선한 버터와 그리고 (약방의 감초처럼 항상 등장하는) 티베트 차가 있는 것을 보고서는 굉장히 기뻐했다. 이제 나는 이 차에 길들여졌고 좋아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주까리기름(castor oil)을 먹는 듯 역했지만 말이다. 차와 야크 버터와 소금을 끓는 물에 넣으면 이 훌륭한 혼합물들이 티베트 차가 되는 것이다!
게쉬 림포체는 이미 수도원장에게 나에 대한 모든 것들을 말해주었고, 수도원장은 티베트말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당신의 언어로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당신께서 하고 계시다는 일과 당신이 계시던 곳에 대해 모두 듣고 싶습니다.” 이 질문에 대답을 하다 보니 너무나도 우습게도 나도 모르게 티베트말로 그럭저럭 대화를 하고 있었다. 어떤 단어들은 강세를 제대로 넣어 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의 대화가 끝났을 때, 내 친구와 게쉬 림포체는 둘 다 내 티베트어 실력에 대해 인정한다는 의미로 박수를 쳐주었다.
오후에는 수도원을 둘러보았다. 트락체 수도원 안에는 500명의 라마승들이 있었다. 수도원의 정면은 거대한 바위면의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깎아지는 절벽의 높이는 계곡까지 1000 피트(300m)는 넘어 보였다. 수도원을 짓는 것 자체가 초인적인 임무였을 것이다. 사원 건물에는 거대한 나무줄기가 있어 지붕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어떻게 저 나무들을 끌어올렸지요?” 나는 물었다.
“모두 손으로 작업한 거라네.” 그는 대답했다. “여기에 사용된 나무들은 모두, 한 그루씩 여러 개의 밧줄로 고정시킨 다음, 기꺼이 이 공사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의 협력으로, 손으로 끌어올린 거란다. 저 거대한 돌들은 바위 표면에서 잘라내어 토막을 낸 것이지. 너도 알다시피, 아마 티베트의 건축가들이 이런 종류의 공사에 있어서는 단연 세계 최고일 것이야.”
모든 수도원들은 서로 매우 닮아 있었지만, 이 수도원은 바로 산 위에 있는 바위 표면 위에 높이 세워졌다는데 있어서 독특했다. 계곡 아래로는, 수도원의 정면에 해당하는 곳에서 캬 추(Kya Chu) 강은 로빙 추(Robing Chu) 강과 합류하고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강물은 거대한 바위들과 부딪히며, 급행열차가 지나가는 듯 굉음을 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 우리가 가야할 길은 캬 추 강을 따라 나란히 나 있었다. 이제 우리는 잠사르까지 이틀만 더 여행하면 도착하게 된다.
상쾌한 하루였으며 나는 여행의 마지막 단계를 앞두고 기력이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동안 내 친구가 그토록 많이 이야기 해주었던 그의 비밀 안식처를 보기를 열망했다.
* * * * *
그날 밤 나는 전날처럼 깊이 잠들었으며, 이틀간의 여정을 하루 만에 다 소화할 수 있을 듯 느꼈다. 나의 이런 기분을 내 친구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남아있는 거리는 족히 30 마일(48km)을 넘으며, 길도 험하단다. 길을 걸을 때에는 반드시 안전한 부분을 디디고 걸어야 한단다. 굉장히 위험한 곳들이 군데군데 있기 때문이고, 그 부분에서는 조랑말을 탄 채로 건너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단다.”
다음 날 아침 6시경에 우리는 그곳을 떠나 출발했다. 우리는 그날 밤까지 데첸 드종(Dechen Dzong)이라 부르는 곳까지 도착하고, 다음 날에는 잠사르에 도착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우리가 타고 왔던 조랑말들은 수도원 소속으로 되어있는 마구간에 있었으며, 우리는 게쉬 림포체와 수도원장에게 Au revoir 라고 기쁘게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음식으로 가득 차 있는 양식자루를 맨 상태로 표면이 돌로 되어있는 계단을 내려가는 것은 올라가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조랑말을 탔고, 그곳을 떠났다. 아침에 불어오는 신선한 산들바람을 들여 마시면서 강물이 바위에 부딪혀 사방으로 물보라를 품어내는 것을 보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게다가 아름답고 장엄한 자연의 모습은 그 자체가 큰 활력이 되었다.
라사를 넘어선 곳까지 여행한 서구인이 과연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있더라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이다뀮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내가 해왔던 일들의 중요성을 느꼈다.
3장
트락체 곰파(곰파란 수도원을 뜻한다)를 떠나 조금 걷다보니, 장엄한 폭포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 물은 좁은 계곡을 통과하여 이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물은 50 피트(15m) 되는 곳에서부터 아래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으며, 귀가 멀 정도로 굉음을 만들어 냈다. 물이 절반 정도까지 내려왔을 때, 그 물은 다른 바위 턱에 부딪혔고, 그 물이 쏟아진 곳 바닥에는 거대한 웅덩이가 파여 있어 그리로 물이 들어갔다. 우리가 가는 길은 여기에서부터 산허리로 올라가는 길로 이어져 있었으며, 거기를 빠져나가면 오른쪽에 있는 젠쉬(Zenshi)라 부르는 비옥한 넓은 지대로 들어서게 되어 있었는데, 그 곳은 농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캬 추 강이 통과하는 이 계곡을 따라서 꽤 많은 티베트 사람들의 집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거위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 거위는 머리에 검은색 줄무늬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으며 목 뒤로도 검은 줄무늬가 나 있었다. 그것들은 우리를 보자 엄청나게 소리를 질러대었다. 내 친구는, 이 지역에서는 그 거위들을 머리줄무늬 거위(bar-headed geese)라 부른다고 말해주었다. 또한 오리들도 엄청 많았으며, 독수리들(vultures)과 팔라스(Pallas)라 부르는 물고기 독수리들(fish eagles)도 좀 보였다. 팔라스라는 새들의 부리는 길쭉하면서 끝부분은 아래쪽으로 살짝 휘어있었는데, 강에 사는 물고기들을 급강하하면서 낚아채고 있었다. 다른 종류의 새들도 엄청나게 많이 있었으며 우리 머리 위를 돌며 울어대었다.
형형색색의 많은 나비들도 주변에서 나풀거리며 날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나는,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나비들을 모으는 수집가들에게는 이곳이 천국이겠거니 생각했다. 농사를 짓지 않는 곳에서는 야생화와 철쭉(rhododendron tree)이 자라고 있었다. 많은 종류의 도마뱀들도 보였는데, 그 중에 위험한 종은 얼굴이 모가 나 있는 것이었다(one dangerous if cornered). 그것은 검은큰바위 도마뱀(big black rock lizard)이었으며, 3 피트(90cm) 가량의 길이에 커다란 발과 긴 턱을 갖고 있었다. 주변 경관은 뛰어나게 아름다웠다. 사방이 다 산이었고, 만년설이 그 위를 덮고 있었다.
햇빛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으며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그러나 정오 때가 되면 항상 바람이 일어났듯이 이제 곧 바람이 불어올 것이었다.
이 지역을 떠날 당시 우리는 험하게 등산해야 할 곳이 있었다. 한 번은 강가 근처로 내려갔다가 산허리께로 높이 올라가야 했다. 이제껏 우리가 걸어 온 길은 꽤 좋은 편이었으나, 앞으로 가야할 길 중에는 위험한 곳들이 많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이 여행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수많은 강들이 캬 추 강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는데, 이 강들은 주변에 있는 산들로부터 내려온 것들이었다. 일 년 중 이 시기에는 눈이 녹기 때문에, 언제나 엄청나게 많은 양의 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겨울이 오면, 이 강들은 다시 얼어붙게 된다. 그때에는 강이나 호수를 건너는 것이 훨씬 쉬워지기는 하지만, 두텁게 쌓인 눈을 헤치고 가야 하기 때문에 여행 자체는 훨씬 어려워진다.
우리는 수많은 티베트인들을 마주쳤는데, 그 중에는 여자들도 있었고 남자들도 있었으며, 야크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었고, 당나귀를 타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야크의 행렬 중 팔 물건을 실고 라사를 향해 가는 야크들도 좀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당나귀보다는 야크를 주로 이용했는데, 야크가 당나귀에 비해 먹이기도 쉽고 다리 힘이 좋아 잘 넘어지지 않아 보다 무거운 짐을 나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 딸 둘로 이루어진 한 가족을 만났는데, 내 친구가 알고 지내는 집안이었다. 그들은 이제 곧 열리는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잠사르에서 라사(Lhasa)로 여행하는 중이었다. 거대한 수도원들은 일 년 중 이 시기에 큰 축제를 열었으며 사람들은 거기에 참여하기 위해 멀거나 가깝거나 할 것 없이 그리로 모여들었다.
내 친구는 나를 그 가족에게 소개시켜주었다. 딸 두 명은 모두 전형적인 히말라야인으로서, 아름다운 티베트 여인들이었다. 그들이 웃을 때 눈은 반짝였으며, 아름다운 입술이 미소를 지을 때, 완전히 가지런한 치아가 보였다. 나는 언니에 해당하는 여인에게 내 빈약한 티베트말로 말을 걸었는데, 그녀는 놀랍게도 영어로 대답하였다. 그녀는 내게 자신이 다즐링에 있는 학교에 다녔었고 자신의 이름은 노르부(Norbu)라고 말했다. 노르부라는 이름은 티베트인들 사이에서는 많이 쓰는 이름이었고, 귀한 보석이라는 뜻이었다. 노르부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그녀만큼 예쁜 다른 여인도 알고 있다고 내가 그녀에게 말하자, 그녀는 머리끝까지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영어로 더 많이 이야기” 할 기회를 얻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아마도 내 친구를 제외하고는 그녀가 잠사르 지역에서 영어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내 친구는 티베트말로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많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가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녀와 나는 전에 인사를 나눈 것을 바탕으로 더 친해질 수 있었다. 그녀는 우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몇 번이고 돌아보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는 내 친구에게 말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군요!”
“그렇지,” 그는 말했다. “그녀는 의심할 바 없이 티베트 미인이지. 그녀의 모습은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완전히 달라. 이 지역 사람들의 모습은 네가 보았듯이 얼굴이 좀 넓적하고 코가 평평하게 퍼져 있단다. 반면에 그녀는 야퉁 지역 출신인데, 그 지역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아름답게 생겼단다.”
티베트의 여성들은 다른 모든 서구 여성들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다른 동양 여성들이 뒤로 물러나듯이 자신을 비하하지 않는다. 그들은 남성들과 대화할 때에도 동등한 위치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티베트 여성들은 자유로우며 개방적이고, 이것 때문에 그들은 매력이 넘칠 정도로 다른 나라의 여성들과 다른 것이다. 우리는 오후 2시 30분경에 탕캬(Tankya)라는 곳에 도착해서, 그 날의 첫 휴식을 취했다. 이곳에서 점심을 들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몇 분도 지체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어두워지기 전에는 반드시 데첸 드종(Dechen Dzong)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밤에 다니는 것은 매우 위험했고, 낮에 걸어도 힘들고 위험한 구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소한 네 시간 이상 여행을 해야 했고, 자연스레,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을지 염려하였다.
우리는, 한 사람이 앞서가고 다른 사람은 그 뒤를 따르는 방식인 인도 방식으로밖에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 친구는 항상 앞서가겠다고 하였으며, 나는 그의 뒤를 곧장 따라갔다. 우리는 여전히 캬 추 강을 따라서 여행을 하고 있었다.
탕캬를 떠난 후, 길은 강가를 따라 나 있었으며 그 거리는 수 마일에 이르렀고, 오늘의 가장 긴 여정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여행하는 길 중 어느 부분은 강물이 매우 부드럽고 깊게 흘렀다. 그러나 다른 부분에서는 산에서 굴러 내려온 거대한 돌들이 강물에 실려 떠내려 오기도 하였다. 이는 매우 자주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였고, 우리는 이를 항상 조심해야 했다. 무엇인가 와르르 굴러오는 소리가 난다 싶으면 우리는 반드시 길에서 벗어나거나 피할 곳을 찾아야 했다. 염소나 야생 야크들이 밟고 지나다니다보면 돌들이 헐거워졌고, 그것들이 굴러 내리면서 다른 돌들도 헐거워지게 하여 같이 굴러가게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등에 작은 짐을 얹고 다니는 양들을 보았다. 티베트에서 양들이 짐을 실고 다니는 것은 꽤 흔한 일 중 하나였는데, 소금 호수(salt lake)에서 나오는 길에서는 특히 더 자주 있는 일이었다. 티베트에 있는 소금 호수는 해발 15,000 피트(4500m)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강가를 따라서 몇 마일을 걷은 후, 길이 생각보다 편해서 나는 이 길이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너무 좋다고 생각했다. 그때 우리는 갑작스레 멈춰야 했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산허리로 올라가야 하는 곳을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반쯤 가다가 내 친구는 멈추더니 조랑말에서 내렸고, 나 역시 그를 따라서 똑같이 행동했다. 이곳은 사실상 길의 한 부분이 강 아래로 무너져내려 있었다. 이 경사진 곳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였으나 걱정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기 불과 몇 분 전에 길의 한 부분이 붕괴된 듯 하였다. 나는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반 마일(800m) 정도 되돌아가서, 아까 시냇물이 흐르던 쪽에 있던 다른 길로 가자.” 그는 대답했다. “거기에 더 높은 곳으로 이르는 길이 있고,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란다.”
우리는 그가 말했던 지점까지 되돌아갔다. 그때 그는 기도문이 적혀진 깃발(prayer tag)을 찢더니, 그가 갖고 다니던 검은색 초크(chalk)로 경고문을 적었다. 그 길을 걷게 될 사람들이 혹시라도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왜 우리가 어두워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야만 하는지 알았습니다.” 나는 말했다.
우리는 아까 그 길보다 1/4 마일(400m) 정도 위에 있는 길에 도착할 때까지 하천의 바닥을 올라갔다. 이 길은 산을 넘어 반대편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어떻게 이런 길까지 알고 계세요?” 나는 물었다.
“이 지역에서 내가 모르는 길이란 존재하지 않아. 나는 이 길로 꽤 자주 다니지.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고 말이야.” 그는 대답했다.
우리는 이 길로 쭉 갔고, 이 길은 꽤 좋은 편에 속했다. 한 3-4 마일(5-6km) 정도 갔을 때, 하천바닥으로 내려가는 오래된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데첸(Dechen)까지 가는 길은 내내 꽤 쉬운 편이었다. 우리는 데첸에 저녁 7시 정도에 도착했는데, 이제 땅거미가 막 지려던 참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 주위로 몰려들었다. 나는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 싶어서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들은 내 친구를 환영해주러 나온 것이었다. 그는 데첸 드종 지역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덕 중턱에 있는 예쁜 집으로 갔는데, 맑은 시냇물이 집 옆으로 흐르고 있었다. 집 주변에는 기도문이 적힌 깃발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는 그때 그 광경을 주의 깊게 보았기 때문이다.
내 친구는 말했다: “이 사람은 이 지역의 이장(headman)이란다. 그의 이름은 이암초(Iamtso)이지. 이 집은 꽤 아늑하고 오늘 밤은 여기서 쉴 거란다.” 우리가 조랑말에서 내리자, 문이 열렸으며 티베트인이 달려 나와 살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내 친구의 손을 잡고는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는데, 이는 티베트에서 그 사람을 존경한다는 의미로 하는 최고의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이장의 부인이 이내 저녁 식사를 차려주었고, 우리는 양고기, 보리빵, 감자, 티베트차를 먹었고, 좀 지나서 보리로 만든 티베트 맥주도 마셨다. 우리는 밤 11시까지 거기에 앉아 있었는데, 그때까지 이암초가 자신이 직접 만든 곡을 현악기로 연주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는 꽤 능숙하게 악기를 다루었다. 그가 연주하는 선율은 너무나도 황홀하여 나는 조금 더 듣고 싶었지만, 내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좀 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단다. 내일도 꽤 힘든 하루가 될 것이기 때문이지.”
내가 몸을 뉘인 침대(couch)는 대나무와 야크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 침대는 링-쉬-라 은수자의 암자를 떠난 이후로 최고로 편안한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음식 냄새가 풍겨왔는데, 야크 스테이크와 계란과 보리빵과 티베트 차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리겠다는 약속을 한 후 작별 인사를 하면서 그곳을 떠났다.
이암초는 가는 길에 먹으라고, 요리를 한 닭 두 마리와, 삶은 계란과 보리빵을 챙겨주었다. 우리는 음식을 가져가기를 원치 않았으나, 그는 막무가내로 우리 손에 쥐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잠사르까지 가는 여행길의 마지막 여정을 떠나게 되었다. 다음 몇 주 동안 나를 위해 마련되어 있는 일들을 생각하니 나는 행복해졌다. 우리는 강을 따라서 5 마일(8km) 정도 여행한 후에 강을 건너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작은 배(coracle)를 타고 강 반대편으로 건넜는데, 잠사르까지 가는 길은 강 반대편을 따라 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2 마일(3.2km)을 더 간 후 강가에서 점심을 들었다. 강변은 야생화들로 뒤덮여 있었고, 강 양 옆에 있는 산허리에는 철쭉이 활짝 피어 거기를 뒤덮고 있었다. 나는 결코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것이다. 언제나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친구에게 말했더니, 그는 나에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제 나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게 되었는데, 캬 추 강 옆에 있는 내 친구의 안식처를 보았을 때 그곳은 내 숨을 멎게 할 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곳은 링-쉬-라 은수자가 있는 곳에 비길 만큼 아름다웠지만, 완전히 다른 식으로 아름다웠고,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말하겠다.
점심을 먹고 나서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났다. 우리는 캬 추 강의 수원에 해당하는 잠사르에 도착했다. 높이 솟아올라 눈으로 뒤덮인 산들 사이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크고 작은 다양한 빙하로부터 흘러내리는 수많은 물줄기들이 캬 추 강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잠사르 주변에는 녠첸탕글라(Nyenchentangla) 산맥이 솟아올라 있었는데, 그것은 평균 높이 23000 피트(7Km)에 달하는 가장 장엄한 산맥으로, 히말라야 산맥을 훨씬 넘어섰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나는 이 광경을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내 친구가 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웅장한 곳에 살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이곳은 도저히 말로 담아낼 수 없다.
그는 다양한 산들을 가리키면서 그 이름과 높이를 말해주었다. 산들을 하나하나 볼 때마다 그 다음에 보는 산이 훨씬 더 아름다워 보였다. 그 모습은 참으로 장엄했다. 지금 책을 읽고 있는 그대도 이 절경을 볼 수 있다면, 높이 솟아오른 산들이 너무나도 가까이 있는 듯이 보여, 산들이 그대 위로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잠사르 지역만 하더라도 해발 14000 피트(4267m)에 위치하고 있었다.
산허리에서 나는 홀로 우뚝 서 있는 하얀 건물을 보았는데, 순수한 티베트 건축물로서 연구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자, 나는 야생화와 철쭉이 활짝 핀 것은 물론이고 거대한 야자 무와 잘 가꾸어진 정원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정원에는 노란 중국 양귀비와 젠시안(Gentian)과 세네치오(Senecio)와 다른 꽃들도 있었는데 모두 활짝 피어 있었다.
강 근처에는 수로가 만들어져 있어서 집까지 물을 댈 수 있게 하였다. 관개 시설은 곳곳으로 뻗어있어서 백합이 있는 못에도 물을 대고 있었다. 그것보다 더 큰 못도 있었는데, 그곳은 흐르는 물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조금 더 위쪽으로는 온천들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부터 뜨거운 물이 방금 전에 언급한 커다란 못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뜨거운 물은 집에서도 쓸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여기서 평생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는 감탄하여 외쳤다. “이 곳이 바로 내 지상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싶은 곳이에요. 서구 세계에 이곳에 대해 기록해서 알린다면, 수 백 만 명의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 겁니다. 그러나 돈으로도 이런 아름다운 곳을 결코 살 수는 없지요.”
그렇다, 나는 흥분하여 내 친구에게 마구 지껄였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이젠 네 것이란다. 지상에서 남아 있는 시간 동안 이 곳은 네 것이야. 이제 이곳을 너에게 맡길게.”
잠시 동안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뒤 나는 말했다: “그런데, 아직 제가 할 일이 많이 있는데, 어떻게 여기로 돌아와 지낼 수 있을까요?”
그는 대답했다: “자네가 이곳으로 되돌아올 때가 올 걸세.”
“육신을 입고 살아 있는 동안에 말입니까? (In the physical?)”
“그렇다네.” 그는 대답했다. “살아 있는 동안에 말이지(In the physical).”
아마도 미래의 어느 날 나는 그리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아직 그 때가 오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아무도 미래를 모른다. 지금으로써는 최소한 이 사실 하나만을 알고 있을 따름이다.
나는 말했다: “그동안 예기치 못했던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일어났고, 이제는 이런 일도 벌어지는군요.” 이런 곳을 안식처로 삼고 쉴 수 있다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곳을! 그렇다, 잠사르는 내가 기대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이게 정말 사실인가요?” 나는 너무나도 놀라워 물었다. “설마 지금 저를 놀리시려는 것은 아니겠죠?”
“아들아, 절대 그렇지 않단다. 평생 너를 따라다니며 함께 지냈던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니. 내 삶은 네 삶이고, 네 삶은 곧 내 삶이야. 우리 삶이 어떻게 다를 수 있겠니(How could it be otherwise)?
눈에서는 눈물이 솟아났으며 나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침을 삼켰다! 그는 이런 나를 보더니 내 어깨 위에 팔을 올려놓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가 나와 함께 이곳에서 지내고, 너를 내 곁에 둘 수 있는 이 날이 오기만을 오랜 동안 기다려왔단다. 그런데 아직은 그 때가 아닌 것 같구나. 이 일 뒤에는 너와 나 말고도 더 높은 영적인 힘들(higher forces)이 있단다. 후에 너와 이별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네가 떠나왔던 세상으로 돌아가 네 일이 끝날 때까지 너는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한단다. 신께서 너를 지켜주고 보호해주실 거란다. 너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던 그 생명(the Life)은 결코 너를 실망시키지 않기 때문이지.”
그가 이 말을 마치자 우리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태피스트리가 걸려있는 홀로 이어져 있었다. 마루에는, 매우 값지고 매우 커다란 고대 중국 도자기들이 몇 점 있었다. 그리고 마루는 나무로 되어 있었고 윤이 났다. 벽은 정교한 디자인에 광택이 나는 나무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홀의 끝에는 문이 있었는데, 그 문은 중앙에 있는 커다란 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 방을 중심으로 사방에는 작은 방들(alcoves)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각각의 작은 방들에는 브로케이드가 커텐으로 걸려 있었다.
중앙에 있는 큰 방의 바닥에는 귀한 중국 양탄자가 봉긋하게(embossed) 깔려 있었다. 그리고 작은 방들에는 티베트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어떤 방들에는 탁자가, 다른 방들에는 침대가 있었다. 이 방의 뒤쪽으로는 다른 개인적인 공간들도 있었는데, 침실 겸 거실도 있었고, 모든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주방과 별채는 본 집과 떨어져 있었고, 고기를 몇 주 동안이고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는 밀폐된 저장소도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덕분에 냉장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온천에서 집안으로 끌어온 따뜻한 물로 깨끗하게 씻었다. 그러고 나서 준비된 저녁 식사를 들었다.
내 친구는 내가 지낼 특별한 숙소를 보여주었는데, 그 방은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작은 방들 중 하나였다. 내 친구는 내가 피곤하다는 것과 그래서 어서 침대로 가 잠을 자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고, 아침이 될 때까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내가 일어났을 때 태양이 막 뜨려던 참이었다. 나는 집 앞에 나 있는 계단으로 갔다. 그 아름다운 장면은 결코 말로 담아낼 수 없을 것이다. 안식처의 정면은 떠오르는 태양과 마주보고 있었으며, 태양 빛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는 만년설에 반사되어 모든 색깔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으며, 짙은 붉은 색에서 노란 색으로 바뀌면서 파란 하늘과 어우러지고 있었다.
다채로운 야생화들 위에 내린 이슬방울들은 태양빛을 반사하며 반짝이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아침식사로 우리는 야크 스테이크와 계란 프라이와 보리빵과 신선한 버터를 먹었다.
내 친구가 말했다: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단다. 잊지 않도록 네가 묻고 싶은 질문은 모조리 적어놓아라. 우리가 여기 계속 지내는 가운데, 그것들에 대해 함께 토론을 하게 될 것이란다.”
나는 그렇게 했고, 많은 질문들을 준비해 놓았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내는 가운데, 나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모두 받았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가 나에게 처음 던졌던 말이 번개처럼 스쳐지나갔다. “그게 사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그건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네. 그렇지 않은가?” 이제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내가 마음에 갖고 있던 것들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정신적 개념이거나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많은 일들이 나에게 이루어졌고, 내 마음에는 완전한 변화가 일어났다(my mind had been completely transformed). 왜냐하면 내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은 실재가 아니라는 것과, 그것은 그저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4장
우리는 건물 내부에서 앞쪽에 위치해 있는 홀에 놓여 져 있는 탁자에 앉았다. 우리는 그곳의 문을 열어놓았으며 거기에 앉아 웅장한 산들을 마주보고 있었다. 이제 나는 우리의 일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 친구는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 마음을 관념들로 채우려 하는 것이 아니란다. 그건 오히려 실재를 드러내는데 방해가 될 뿐이지. 너는 지금껏 모든 형태의 요가 수행 체계들을 거쳐 왔고, 마음의 발달 단계들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갖추어 왔지. 그러나 우리가 이제 하려는 일은 그런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의 것이야. 우리는 이것을 편의상 그리스도의 요가라 부르겠지만 이름 그 자체로는 별 다른 의미가 없단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 굳이 이름을 붙이는 것이란다.”
“무엇보다 먼저 너는 시간의 문제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단다. 시간을 철저하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지. 나는 지금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진실이란다. 시간이란 오직 인간의 마음 안에서만 존재하지 실재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단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시간도 있지. 시각이라든지, 날과 주와 달과 그러한 시간 체계를 말하는 것인데, 이런 시간 체계는 약속을 잡거나 약속을 지키는데 도움이 되지. 이런 시간 체계가 없다면, 열차 시간이나 배 시간이나 어떤 곳에서 열리는 모임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는 것에 대해 확신할 수 없을 것이야. 그래서 앞으로 우리는 이런 시간에 대해서는 물리적 시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이란다. 자, 이와는 다른 성격의 시간이 존재하는데, 이것을 마음의 시간이라 부르자꾸나. 마음의 시간은, 과거이자 미래이며 기억이자 생각이며, 언젠가는 자유롭게 될 것이라는 등의 믿음과 관련된 시간이란다. 또 다른 표현으로 이것을 심리적 시간이라고도 하지. 자,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시간이란 바로 이 심리적 시간을 말하는 것이야. 만약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실재에 대한 깨달음은 결코 있을 수 없단다. 왜냐하면 실재, 즉 시간을 벗어나 있는 그것은 시간을 통해서는 결코 깨달아질 수 없기 때문인 것이지.”
“기억이란 시간에 속해있는 것이며, 네 생각이란 시간의 결과이며, 자네의 경험 역시 시간의 결과란다.”
“기억들, 이것들은 대체 무엇일까? 기억이란 시간 속에서 네가 겪은 경험들의 결과야.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이야기했던 모든 것들, 네 생각들, 네 믿음들 그리고 네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 이것이 바로 심리적인 시간이란다.”
“너는 진리를 원한다고 하지만, 진리는 시간의 결과물이 아니며 또한 생각이나 믿음 또는 시간을 통해서도 결코 깨달아질 수 없는 것이지. 오히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야. 이런 것들이 진리를 가리고 있는 동안에 진리란 나타날 수 없어. 이런 것들이 벗겨지고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라야 비로소 진리는 나타날 수 있는 것이야.”
“내가 몸을 입은 상태에서 칼림퐁에서 너를 만났을 때 너에게 주었던 첫 번째 가르침은 명상에 대한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에 나는 이 문제를 다시 다루고자 한단다. 우리가 진리를 찾는데 있어서 이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바르게 명상한다는 것은 지극히 본질적인 문제이지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일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지. 요가를 처음 배울 때, 하나의 생각에만 집중하고 다른 생각들은 배제시키는 방법으로 요가를 배웠을 것이야. 그런데 이런 방법의 명상으로는 결코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네 앞에 증명할 것이란다. 이런 방법으로 명상했을 때 네가 어떤 결과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네. 분명 어떤 결과를 얻기야 하겠지만, 진리란 결과가 아니거든. 이런 결과는 앞으로도 정신적인 어떤 개념일 뿐이지 진리는 결코 아니란다.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니?
“네, 분명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하였다.
그는 대답하였다. “올바른 명상이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생각의 모든 과정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단다. 자, 너의 생각이란 네 알고 있는 것들의 결과일 따름이지. 너는 네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어. 그렇다면 내 생각이란 마음과 마음이 알고 있는 것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며, 생각이란 여전히 정신적인 개념이나 어떤 결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그러나 이것은 진리가 아니지.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가?”
“예, 분명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진리란 결론이나 생각이나 정신으로 만들어낸 어떤 것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이고, 진리란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란 다만 지금 존재할 뿐 진리는 시간에 속해 있지 않고, 시간은 진리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있는 그 무엇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있는 그 무엇에 대해 추측할(speculate) 수는 있겠지만, 실재에 대한 생각이 실재 자체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야.” 그는 말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네가 스스로를 이해하도록 돕고 있는 거란다. 자아(self)-자신(the me)- 네가 그걸 뭐라 부르든지 간에, 나(the I)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실재는 결코 드러날 수 없기 때문이란다. 자신(the me)-나(the I), 기억, 생각, 다른 것들도 모두 마음에 속해 있는 것들이고, 이러한 모든 것들은 실재가 경험되기 전에 반드시 끝장이 나야만 한단다.”
“이제 너는, 집중을 통해 명상을 하고자 할 때면 언제나, 자신의 생각들이 정처 없이 떠돌며 서로 부딪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네가 중심 생각(central idea), 즉 깊이 생각할 볼 무엇인가를(thought to dwell upon) 선택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사실상 배제(exclusion)란다. 그렇게 할 때 너는 네가 선택한 중심 생각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든 것들은 배제시키고 있는 것이야. 이렇게 하면 자신이 곧 실재를 찾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그건 불가능하다네. 게다가 너는 네 마음이 계속해서 떠돌게 된다는 것과, 네가 선택한 중심 생각에 마음을 유지시키려 할 때, 생각들끼리 서로 끊임없이 부딪힌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란다. 지금 나는 집중이 마음에 해롭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는 일에 관해서는 집중은 그릇된 과정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란다. 그러므로 바른 결과(right ending)를 얻기 위해서는 시작부터 바른 방법(right means)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지, 왜냐하면 이 둘은 하나이기 때문인 것이고, 그렇지 않더냐?
“예,” 나는 말했다. “이제 저도 명확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어떠한 생각도 일으켜서는 안 된단다(do not be making ideas out what I am saying).” 그는 말했다. “네가 이해해야 할 본질이란, 마음의 모든 과정과 마음이 어떻게 생각들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것이란다(the whole process of mind and how it formulates ideas).”
"다시 묻겠다.” 그는 말했다. “너는 왜 집중하려는 중심 생각을 선택하려 하는 것이지? 그렇게 할 때 어떤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이 아니냐? 그래서 너는 특정한 생각에 머무는 것이지. 너는 어떤 결과를 바라고 있지만, 진리란 어떤 결과물이 아니야. 그러므로 집중이라는 방법은 올바른 방법이 아닌 것이지.”
“네 마음 안을 들여다보기만 한다면, 그 안에서 자신이 선택한 생각과 자신들을 표현할 기회를 얻고자 꿈틀대는 다른 생각들 사이에서 마찰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란다. 너는 특정한 생각에 집중을 하면서, 다른 모든 생각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통제하려고 한 적도 있을 테지. 그러나 그렇게 했을 때 너는 진리를 밝혀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단다. 그렇지 않더냐? 만약 네가 어떤 생각은 옳고 어떤 생각은 그르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진리를 드러내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마음이 정처 없이 떠도는 이유를 알아내야 하는 것이지. 마음은 왜 떠도는 것일까? 나에게 그 이유를 말해볼 수 있겠니?”
“글쎄요,” 나는 대답했다. “그건 대부분의 생각들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각들에는 나름의 중요성이 있고, 나름의 가치가 있고, 숨겨져 있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들은, 마치 잡초처럼,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것이고, 그것들을 잊어버리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그것들을 더 활발하게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건 마치 끓어 넘치고 있는 주전자의 뚜껑을 억누르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지.” 그는 말했다. “네가 지금 하는 말들을 들어보니 네가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겠구나. 그런데 그건 아직 내가 던진 문제에 대한 완전한 대답은 되지 못해. 각각의 생각들이 일어날 때, 네가 그것을 편견 없이 두려움 없이 비난하지 않고 지켜볼 수 있다면, 또한 자유롭게 그것을 바라보되 저항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을 멀리 치워버리려 하지 않고 다만 그 의미를 밝혀낼 수만 있다면, 이 생각들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며, 그것으로 끝장나는 것이란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은 결코 실재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단다. 왜냐하면 실재는 마음 너머에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네가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을 때, 너는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이렇게 자유로워진 마음은 고요해진단다. 그리고 이 고요함 속에서 실재가 드러나게 되지. 왜냐하면 실재는 마음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너머에 있기 때문이고, 마음은 실재가 들어서기 전에 반드시 고요해져야 한단다.”
“그러므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들을 통제하거나, 제한하지 않고 다만 그것들을 이해하는 것이란다. 무엇인가에 저항하고 있을 때, 우리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지. 집중은 마음을 협소하게 할 뿐 그것은 마음을 자유롭게 하며 진리를 드러내는 과정이 되지 못한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것을 명상이라 부르고 있지만, 그것은 다만 자신을 고립(self isolation)시키는 과정일 뿐이야. 그리고 자신을 고립시키려 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self-protection)하려는 것이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은 두려움에 가득 차 있음에 틀림없지. 자, 그렇다면 두려움으로 가득 찬 마음이 실재인 것들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것들에 대해 어떻게 그 마음을 열 수 있게 되겠니?
“네가 정신으로 만들어낸 것들(your mental creations)을 조사하고 이해한다면, 그것들은 너의 생각과 기억과 경험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란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자와 그가 하는 과라는 결코 서로 떨어질 수가 없는 것이란다(So there can be no separation between the thinker and his thought). 과라는 생각하는 자의 산물일 뿐이지(One is the product of the other). 과라하는 자가 그가 하는 과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게 될 때, 너는 자유롭게 될 것이란다. 왜냐하면 그 둘은 모두 네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이기 때문이지. 과라과 과라하는 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야. 그 둘을 구분하는 태도가 자신의 정신적 갈등의 원인이 되etween 이것을 자라하게 될 때(aware of), 마음은 고요해지게 되고, 따라서 더 이상 생각하는 자와 생각 사이에 있는 갈등도 있을 수 없게 되며, 다만 생각의 총체적인 과정에 대한 이해만이것을을 따름이란다. 그리고 생각의 총체적인 과정을 이해하고 있을 때, 이것이 바로 자기를 안다고 할 수 있는 것(self-knowledge)이지. 지금 내 말을 이해하고 있니?”
“네.” 나는 대답했다. “저는 이제,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고 애쓰지 않을 때, 마음이 고요해진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과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는 자 사이에 존재하던 자기 분열이 끝장났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자신에게 알려진 것(the known) 안에서만 기능할 수 있을 따름인데, 알려진 것은 알려지지 않은 것(the unknown)을 결코 알아낼 수 없습니다. 미지의 그것을 마음이 결코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될 때, 마음은 생각들을 마구 지어내기를 그치고, 자신을 넘어서 있는 것에 스스로를 열게 됩니다. 편협한 마음은 보잘 것 없는(petty) 마음이며, 그 마음이 신에 대해 지어내는 관념도 자신의 한계에 틀 지워져 있어 보잘 것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말을 계속했다. “네 마음이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지 않니?”
“네.” 나는 대답했다. “지금 이 순간 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고요한 느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글쎄.” 그는 말했다. “진리란 시간에 속해 있는 문제가 아니야. 진리는 지금 이 순간 있는 것이고, 지금이 아니라면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지. 그리고 이것은, 마음을 억지로 고요하게 만들 때가 아니라, 마음이 스스로 고요해졌을 때라야 비로소 깨달아질 수 있는 것이란다. 마음이 강제적으로 스스로를 고요하게 만들려고 할 때, 마음은 계속 갈등을 겪게 되지. 그러나 스스로를 이해함으로써 고요해지게 되면, 그때 진리가 들어서게 된단다. 이제 생각과 생각하는 자, 경험과 경험하는 자를 둘로 나누어 보던 이원성(duality)은 존재하지 않고, 이원성도, 저항도 없는 상태 속에서 경험하는 상태(experience)만 있을 따름이란다. 예수께서는 이를 이런 말씀으로 표현하셨단다. ‘내 안에 언제나 계신 분은 바로 아버지이시다. 그분께서 일을 하고 계실 따름이며,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너는 이성의 가장 높은 차원에서 신에 대해 이렇게 추리하고 그에 대해 말할 수도 있겠지: 신은 본성상 무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 바깥에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고, 그분은 모든 곳에 있어야만 하며, 그분의 실체 말고는 다른 실체(substance)도 없고, 그분의 생명 말고는 그밖에 다른 생명이란 없으며, 그분을 벗어나서는 어떤 창조성도 존재할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분은 무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reason)도 반드시 멈추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이 추론의 과정에서조차 마음은 여전히 자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노력어떤 창기 때문이라네. 이성이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음은 여전히 기능하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있어서, 마음 너머에 있는 진리를 드러낼 수 없게 되는 것이란다. 가장 높은 차원의 생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멈추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생각은 결코 진리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자기를 이해하는 과정이 바로 명상의 시작이란다. 여기에는 어떤 특별한 기술도, 어떤 특별한 자세도, 어떤 특별한 호흡법도 없단다.”
“자신을, 곧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은 실재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은 것이라 실재성(reality)이 없단다. 이제 너는 이 점을 이해하게 되었단다. 그렇지 않니?”
“네.” 나는 말했다. “이제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자 이제,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는 부단한 자각(constant awareness)을 해야 한단다. 이것은 강박관념에 시달려 스스로를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비난하거나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야. 이것은 그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수동적인 깨어있음이지(just a passive alertness in which you see things as they are). 이렇게 할 때, 그 어떤 문제도 존재하지 않게 되며, 문제는 존재하기를 그치게 된단다. 왜냐하면 네가, 다시 말해 마음(the you - the mind)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지. 실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오직 혼란 속에 있는 인간의 마음만이 문제를 갖고 있을 따름이지. 오직 실재만이 존재할 따름이고, 그밖에 다른 모든 것들은 허상일 뿐이야. 이 완벽한 평온함(tranquility) 속에, 가슴과 마음이 멈춰버린(stillness) 이 상태 속에서 실재가 존재한단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요가이며, 이 상태가 곧 아버지 자체이며, 그분 홀로 실재이시란다. 그분의 일(operation)은 드넓고, 광대하며, 무한하고 완벽하단다.”
“이제,” 그는 말했다. “명상을 할 때에는, 어떤 방법도 어떤 체계도 필요하지 않단다. 방법이나 체계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양식(pattern)을 만들어낸다는 것인데, 진리는 양식에 담을 수 있는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Truth is not a pattern). 명상을 시작하는 첫 단계에서 사용하는 올바른 방법이란 다름 아닌 자유로움 그 자체이어야만 하는 것이고, 그래야만 자유가 들어서게 된단다. 이제 네 스스로 시간을 갖고,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려무나(discern).”
명상을 하는 가운데, 마음은 결코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고, 따라서 이제 더 이상 마음은 휩쓸리거나 결과를 얻기 위해 분투하기를 멈췄다. 그때 나는 실재가 그 순간(now)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시간에 속해 있지 않았으며, 이제 시간을 넘어서 있는 그것(the Timeless)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때 마치 알려지지 않은 것(the Unknown)이 스스로를 한껏 표현하도록 나를 내맡기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 때 감각(sensation)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종종 방해가 될 뿐이었지만, 내가 누워 있던 침상 위로 내 몸이 떠올라 있는 것을 느끼기도 하였다.
이제 내가 참으로 알게 된 것은, 진리는 즉각적으로(immediate) 존재하지만, 시간에 속해 있지는 않다는 것과, 지난 세기 동안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의 기억을 모두 모은다 하여도, 기억은 실재를 결코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으로는 제 아무리 탐구한다 하여도, 억겁의 세월이 흐른다 하여도, 실재를 드러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는 지금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시간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내 마음의 산물이었고, 내 마음은 시간의 산물이었다. 모든 것을 배우고, 모든 지적인 말과 개념을 안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진리를 드러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진리는, 마음의 높은 차원이든 낮은 차원이든 그 모든 측면들을(all the phases) 넘어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고, 또한 마음이 생각해낸 것은 그것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실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내 마음이 지껄여대는 것을 비로소 그치게 되었을 때, 내 생명(my livingness)이 드러났으며, 그 유일한 실재가 바로 나의 생명(Livingness)이었고, 그것은 기억도 관념도 아닌 무엇이었다. 실재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한다면, 실재를 시간의 틀 속에 넣고 따져보아야 하는 것이겠지만, 그건 불가능했다(To know what is was would to put it in time, and that was impossible). 이제 나는 주(the Master)를 이해할 수 있었고, 왜 그가 비유로 이야기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이 역시도 다른 이들에게 실재를 드러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이는 자기 힘으로 홀로 그것을 찾아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요가이며, 모든 요가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요가이다.
그대가 그리스도의 요가에 이르게 될 때 그대는 자기 뜻대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된다. 자아는 사라져버리고 그것은 더 이상 실재에 방해물이 되지 않는다. 영원하시며, 유일한 실재이신 분은 바로 아버지이시며, 그분께서 일을 하고 계실 따름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이것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인데, 왜냐하면 문제들은 자신이 발생한 차원에서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의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할 때, 오히려 우리는 더 많은 문제를 만들어낼 따름이다. 이 일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며, 그 원인이란 바로 자아(the self)이다. 자아란 보다 높은 지위와 힘을 얻기 위해 음모와 탐욕과 욕망이 결집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 자아가 존재하는 그 근본 원리는 분리(separation)에 있으며, 이 분리가 인간의 모든 문제를 계속해서 유지시키고 증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자신을 들여다본다면, 그대 자신이 문제의 뿌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비난하고 모든 사람을 비난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비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유지시키는 조건들에 대해 책임이 있다.
재산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나서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준다는 것은 환상일 따름이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될 때라야 문제는 비로소 사라지게 된다. 우리 자신이 곧 문제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자아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자아의 모든 기억, 경험, 탐욕, 시기, 욕망,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바라는 것과 바라지 않는 것, 관념과 이상들 등 이러한 모든 것들이 뒤섞여 있는 자아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들을 그저 생각으로만 주위에서 맴도는 것이 아니라(not merely thinking around them) 있는 그대로 보게 될 때, 그때, 비로소 그때에, 문제의 원인인 자아가 문제를 이해하게 된다. 실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자아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만 문제가 있을 뿐이다.
* * * * *
일어나보니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내 변화 상태에 대해 한 마디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내 친구는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는 직접, 나에게서 나오는 이전보다 훨씬 밝은 빛을 보고 있었다. 예수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서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가 의식적인 자각(consciously aware)의 상태에 있었던 것처럼, 나도 의식적인 자각을 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탄이란, 자아의 바깥에 존재하는 신학적 개념(concoction)이 아니라, 자아라는 사탄(the satan of self)이었다. 자아는 언제나 앞에 나서기를 원하고 있다. 만약 그대가 자신을 들여다본다면, 그리고 그대가 생각의 과정을 자각하고 있다면, 언제나 앞에 나서기를 원한다는 것은 바로 자아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대가 자아를 알게 되면(know), 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자아로부터의 자유가 찾아온다. “내 뒤로 물러서라. 사탄아.”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버지 홀로 실재이시다. 그렇다. 자아가 바로 자신을 속이는 핵심 요소이었으며, 이 점에 대해서는 의심할 바가 없다.
우리 둘 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친구의 지혜는 완전했으며, 나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 자유는 어떤 자극이나 자기 최면(self-hypnosis)의 결과가 아니었으며 다만 이해를 통해 오는 자유였다.
점심을 들고 난 후, 우리는 등산화를 신고, 니이블룽 리충(Nyiblung Richung) 계곡으로 올라갔다. 그 계곡은 우리가 있던 곳의 정면 오른편에 있던 것이다. 이 계곡에 있는 빙하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고 몇 마일 이내에 있었다. 우리는, 이 거대한 얼음이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만들어내는 굉음을 들을 수 있었다. 빙하의 가장자리에 도착했을 대, 우리는 거대하게 갈라진 틈들을 보았는데(crevasses), 말 한 마리가 지나가기에도 충분한 크기였다.
많은 산들이 잠사르를 에워싸고 있었으며, 내 친구는 다양한 봉우리들을 가리키며 그 높이를 자세하게 말해주었는데, 20000~24000 피트(6096-7315m)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자연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전혀 꾸미지 않는다. 어떤 서구인도 눈길을 둔 적이 없던 그 아름다움을 말이다. 예수께서는 들에 피어있는 백합들을 바라보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영화를 입은 솔로몬도 여기 있는 이 꽃들 중 하나보다도 차려입지는 못했다.”
내 친구는 여기 있는 산들을 올라갔을 때의 경험들을 좀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성취감을 느끼기에 충분할 만큼 최고의 등산 코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나 역시 거기를 오를 수 있다는 성취감을 느꼈는데, 이제껏 나도 등산을 많이 했었기 때문이다.
내가 예전에 기억하기로는, 알프스 남쪽을 하산할 때, 나는 지름길을 찾아 빨리 내려가야지 생각하며 길을 찾아 내려가고 있었는데, 그 길로 내려가다 보니 도저히 내려가기에는 불가능한 곳에, 얼음과 암석의 절벽의 낭떠러지에 내가 서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때 내가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되돌아가느라 몇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많이 염려하게 만들었다.
난관에 부딪힐 때의 느낌은 직접 그것을 겪어봐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저 봉우리는 높이가 얼마나 되지요?” 나는 물었다.
“2300 피트(7010m)란다.” 내 친구는 대답했다.
“우리도 언젠가는 저 곳을 오를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물었다. (등산에 대한 욕심이 다시 나를 휘어잡고 있었다).
“아니.” 그는 말했다. “이 봉우리는 이제껏 그 누구도 오른 적이 없다네. 몇 몇 사람들이 시도해보았지만 실패했지.”
“그렇다면 저도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데요.” 나는 말했다.
“지금은 말고 나중에는 시도해볼 수도 있을 걸세.” 이제까지는 등산가들의 모든 시도를 좌절시켰던 높이 솟아오른 그 봉우리에 그이도 역시 도전해보겠다는 시선으로 그 봉우리를 바라보며 그는 대답했다.
내려오는 길 내내 내 마음 안에서도 도전하고픈 생각이 계속해서 솟아났다.
나는 말했다: “6인치 망원렌즈가 장착되어 있는 내 카메라를 들고 와서 그 봉우리 사진을 많이 찍어보겠습니다. 그러면 아마도 우리는 돌출되어 있는 곳(spur)을 찾아내서 그 버섯모양으로 생긴 봉우리에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의 쌍원경을 통해서 정상 부분이 버섯 모양처럼 생겼다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버섯 모양으로 생긴 그 부분 위로 어떻게 올라서느냐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어려움이었다.
“저것 때문에 이제껏 시도했던 모든 사람들이 실패한 거라네.” 그는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나는 꼭 시도해보아야겠다는 욕구가 더 강해졌다.
나는 그대가 등산하고 싶은 강한 열망을 느껴본 적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일단 등산하고 싶은 마음이 그대의 피부 밑으로 파고들기 시작하면, 그것은 그대를 사로잡는 충동이 되어 계속해서 산에 오르길 시도하고 또 시도하게 만든다.
그 날 저녁에 해가 지려고 하자 우리는 돌아왔고, 햇빛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모습을 앉아서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태양을 등지고 산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지자 핑크빛을 띠던 구름의 색깔이 점점 더 어두워져 마침내 어두운 자주색으로 변했다. 색깔이 변하는 그 모습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점점 더 많은 구름이 계곡에 모이기 시작했으며, 구름은 산허리를 따라 서서히 기어오르며 점차 산을 덮더니 마침내 눈으로 덮인 정상만 남게 되었다. 산 정상은 태양의 빛을 반사하며 무지개의 온갖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 하늘은 점점 어두운 푸른색으로 변해갔으며, 반짝이는 별들이 나타나, 마치 우리 머리 위에 있는 둥근 지붕(canopy)에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처럼 빛났다. 그리고 구름은 눈으로 덮인 산봉우리들을 잠재우려는 듯 자신의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참으로 맛있는 저녁 식사를 먹었다. 계곡을 따라 산책을 하고 난 뒤라 나는 배가 고프기도 했고, 신선한 공기가 내 식욕을 돋구어주었기 때문이다. 식사를 하고 난 뒤, 내 친구는 그의 등산 사진을 꺼내 보여주면서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 사진에 담겨진 모습들은 너무나도 특이하였고 나에게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전에 찍었던 사진들과 함께 그 사진들 중 일부를 가졌으면 하고 생각했다.
한 시간 정도 흐른 후, 나는 그의 말을 다시 듣고 싶은 열망에, 오늘 저녁에 더 공부를 할 것인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오늘 내가 하루에 할 만큼의 양을 충분히 했다며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내일 아침 자네가 원기를 회복하면, 우리의 일을 새롭게 다시 할 걸세.”
우리 둘 사이에는 참으로 친근함(real affinity)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로 이야기를 하거나 함께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에도 말이다. 단 한순간도 심기가 불편했던 적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심지어는 가장 가까운 친척과 가까이 있을 때조차 가끔 불편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내가 전에 알고 있던 조화로움을 넘어선 조화로움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내가 거기서 지내는 동안 그것은 내내 이어졌다.
뭐가 있었으면 하고 내가 바랄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이루어졌다. 그의 소망은 나의 소망과 언제나 일치했으며, 내 소망도 그의 소망과 항상 일치했다. 그의 심오한 지혜는 나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그는 부드럽고 쉽게 인도해주었으며, 나는 그를 점점 더 흠모(love)하게 되었고, 그의 심오한 이해에 감탄하곤 했다. 우리는 쌍둥이 영혼들(twin souls)이었으며, 내가 그에게 이 느낌에 대해 말하자, 그는 대답하였다. “아들아, 그래서 내가 너를 택한 거란다.”
그토록 위대한 현자(master)로부터 지혜를 빨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특권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자신이 나와 같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그날 밤 피곤하였으며, 징이 울리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거기서는 태양이 떠오름과 동시에 징을 울리는 규칙적인 관습이 있었다.
5장
날씨는 그날그날 아침마다 달랐다.
계곡에는 밤새 비가 내렸으며, 산은 더욱 더 많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안개가 얇게 깔려 있었으며, 신선한 바람이 그것을 불어내고 있었다. 햇살이 안개 사이를 통과하며 빛나고 있었다. 그날 아침은 스코틀랜드 북부 고지의 아침과 비슷했다. 이곳의 산들이 훨씬 더 크고, 모가 더 심하게 났으며, 경치가 보다 웅장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내 친구는 이미 마을에 내려가 있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모든 이는 그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으며, 삶에 대한 이해를 돕는 조언을 그에게 구했다. 그들은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가 계단을 밟고 올라오자 나는 그에게 말했다: “오늘 하루를 일찍 시작하셨네요.”
“그렇지.” 그는 말했다. “나는 오늘 아침 일찍, 한 새벽 3시 정도에, 이장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는 것을 돕고 왔다네. 쌍둥이 둘 다 건강하다네. 이틀 안으로 그녀는 또 출산하게 될 거야.” 이 말을 듣고, 나는 그의 삶 안에서 전혀 다른 새로운 면을 발견하였고, 다방면에 걸쳐 있는 그의 능력에 경탄하였다.
“그렇지.” 그는 말했다. “네가 주변에서 보고 있는 아이들 중 대부분은 내가 직접 받은 아이들이지. 그래서 이제 애를 받는 데 있어서는 꽤 전문가가 되었네.”
“아침은 들었나?” 그는 물었다.
“아직요.” 나는 대답했다. “이제 막 일어나서, 면도하고 씻고 연못에 가서 몸을 담그고 있었습니다.” 연못은 온천에서 나오는 물로 꽤 따뜻했었다. “실은 스승님(you)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승님(you)이 어디에 가셨는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그렇구만." 그는 대답했다. 나는 오늘 새벽 2시부터 일을 하고 있었다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서 마을이 잘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러 갔다네. 모든 것이 다 잘 돌아가고 있어.”
나는 말했다. “티베트에서 태어나는 갓난아이들의 사망률이 높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맞는 말이라네.” 그는 대답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는 사정이 다르다네. 갓난아이 때 죽는 아이는 거의 없다네.”
“주변에 있는 아이들의 수를 보아하니, 그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이게 다 스승님께서(your) 치유하고 사랑하시는 놀라운 재능을 갖추신 덕분일 것입니다.”
“어서 아침이나 같이 드세.” 내가 칭찬하고 감탄하는 것을 막으려는 듯 그는 말을 꺼냈다.
그는 언제나 나에게, 모든 사람 안에 신의 영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 안에서 신의 영은, 종교의 교리나 믿음과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것들로 막혀 있었다. “그대가 이해하기만 한다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들보다 더 큰 일들도 하게 될 것이야.” 그는 말했다. “이와 비슷한 말이 거의 이천년 전에도 있었지만, 그때 이후로도 사람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단다. 그 이유는 주로 사람들이 눈먼 이들을 모방하기 때문이지(mainly because they are imitators of the blind).
“어떤 형상도 숭배해서는 안 된단다. 또한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만든 돌이나 나무나 사람의 형상을 숭배해서도 안 될 것이야.”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는 자네를 실재로부터 먼 곳으로 이끌게 될 것이야. 자기 내면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남아있는 한, 사람들은 거짓 예언자들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될 뿐이야. 거짓 예언자들은 그들을 통제하고, 속이고, 착취할 뿐이지. 사람들이 스스로 눈을 떠야만, 이 노예 생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킬 수 있을 거란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나는 침묵을 깨고 말을 했다. “오늘 아침으로 우유 한 잔을 먹을 수 있다면, 오늘 아침으로는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거 좋지. 내 아들아, 곧 먹게 될 거야.”
야크의 젖은 유지방이 풍부하며, 더껑이(cream) 가 특히 맛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아침식사로 대부분 보리죽(porridge)과 우유를 함께 먹었다. 그러나 이 특별한 아침에는 다만 우유 한 잔이면 족했다.
아침을 들고 나서, 우리는 그곳을 빠져 나와 산을 마주보고 있는 앞쪽 홀(front hall)로 들어갔다. 그 웅장한 장면 앞에 서서 풍치를 느끼고 있노라면, 나는 항상 마음이 예민하게 깨어 있게 되는 것을 느꼈다.
“오늘 아침에는 너에게 희망(hope)에 대해 말하려 한단다.” 그는 말했다. 그때 그는 나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그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희망이란 불안(uneasiness)을 느끼고 있는 상태이지. 불완전한 상태에 있을 때, 사람은 희망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야. 성서의 잠언 17장 10절에서 한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지. ‘현명한 이에게 하는 한 마디의 꾸짖음이 어리석은 이에게 하는 백 번의 채찍보다도 낫다.’ 현명한 이는 잘못을 알아차리고 인정하지만(recognize), 어리석은 이는 잘못을 반복한단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외적인 안전(outward security)을 구하고 있지. 그러나 바깥에서 어떤 불안함이 있다면, 내면의 마음에도 언제나 불안함이 존재할 수밖에 없지. 또한 내면이 불안해지면, 바깥에도 불안함은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단다. 왜냐하면 내면(inward)은 언제나 자신을 바깥으로(outwardly)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지. 이 사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인류는 희망이라는 철학을 발전시켜 온 것이란다.”
“이제 희망에 매달려 살고 있는 사람은 사실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너에게 보여 주련다: 그렇게 할때 그는 살고 있는 게 아냐. 왜냐하면 그때 그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이지,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what is now)이 아니거든. 그러므로 희망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전혀 살고 있는 것이 아니지. 그는 미래의 어느 곳에선가 살고 있는 것이야. 그리고 미래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러나 지금이 유일한 시간이란다. 지금이 유일한 실재이기 때문이지: 네가, 존재하지도 않는, 어제나 내일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거든. 만약 네가 미래나 과거 속에서 살고 있다면, 너는 다만 자신의 마음 안에서 살고 있을 따름이야. 그때 생명(Life)이란 개념에 불과한 것인데, 시간 속에서 산다는 것은 사실 환상일 뿐이거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반대로 생각하지. 그들은 어떤 불안(disturbance)도 없는 상태를 추구하고 있어. 왜 그럴까? 그건 너무나 단순하게도, 그들이 불안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란다. 자, 너 역시 불안함을 느끼고 있다면, 너는 반드시, 왜 자신의 마음이 불안한지 알아내야 할 것이야. 그렇게 한다면 왜 자신이 무엇인가를 희망하고 있는 지 이해하게 될 것이란다.”
“사실 네가 자신을 이해하게 되기 전까지는, 뭔가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해 상당히 두려워하지 않았더냐? 그건 네가 생각(thought)과 생각하는 자아(thinker)가 실제로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보지(distinct) 못했기 때문이란다. 또 너는 자신의 생각을 바라볼 때 마치 그것이 생각하고 있는 자신과는 다르다는 듯이 바라보았던 것이고. 이렇게 해서 너는 자신의 생각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지. 그러나 이제 너는, 생각이 생각하는 나를 창조하여 마치 생각하는 내가 있다는 듯이 믿게 만든다는 것과, 그렇게 만들어진 자아는 그 생각을 중심으로 맴돌며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단다(But now you see that the thought creates the thinker and the thinker thinks around it). 이렇게 그 둘은 분리되어 있지 않은 거란다.”
“너는, 자신을 조건 지우고 있는 이 모든 생각들을 벗겨내야 하는데, 이는 그 생각들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함(seeing)으로써 가능하단다. 생각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지? 나에게 말해볼 수 있겠니?”
“음.” 나는 말했다. “생각은, 기억과 주변 환경에 대한 반응을 통해 생겨납니다. 그것이 물려받은 것이든 직접 자신이 습득한 것이든 간에 상관없이 말이지요.”
“그렇지.” 그는 말했다. “자아는 반드시 자신이 움직이는 방식을 주의 깊게 살펴야(discern) 한단다. 자아와 생각은 하나이고 사실 같은 것이기 때문이지. 이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평온함이 들어서게 된단다.”
“이제 너는, 자아에게는 그 어떤 실재성(reality)도 있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야. 자아란 그저 기억과 경험의 다발일 뿐이고, 자신을 끊임없이 생각의 형태로 투사하고 있을 뿐이지. 그래서 자아는 스스로의 생각과 경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고, 이것들이 바로 마음을 구성하게 되는 거란다. 이제 너는 이 모든 것이 마음에 속한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단다. 이것을 분별(discerned)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때, 두려움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지. 그리고 너는 두려움을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희망하게 되는 것이란다. 그래서 희망과 두려움은 둘 다 마음 안에 있는 것들로서, 대립되는 짝들(opposites)이란다. 마음이 이 둘의 대립으로 혼란스럽기 때문에 항상 현재에 존재하고 있는(ever-present) 실재가 결코 드러날 수 없는 것이지. 이러한 조건이 남아있는 한, 살아있는 현존(Living Presence)은 깨달아질 수 없는 것이란다.”
“과거와 미래가 이해를 통해서 현재 안으로 녹아 없어지게 될 때, 거기에는 평온함이 깃들게 되고, 그 평온함 안에 바로 실재, 즉 창조적인 대생명(the very livingness)이 있는 것이야. 창조성이란 언제나 현재 속에, 지금 안에 있는 것이지, 미래나 과거 속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란다. 그러므로 철학이나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너도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거란다.”
“예.” 그의 말에 동의하며 나는 말했다. “지금 제 마음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화되고 있으며, 제가 갖고 있던 두려움이 사라졌다는 것을, 저 스스로도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는, 아무런 비판이나 검토도 없이,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들과 무엇인 영적이고 영적이지 않은지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그러한 것들이 단지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는 어떤 생각은 두려워하고 어떤 생각은 검토하지 않은 채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영성(spirituality)은 사랑(Love)이자 지혜(Wisdom)이며 친절(Kindliness)입니다. 마음 내부의 갈등이 이해를 통해서 사라질 때라야, 사랑과 지혜와 친절이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렇지.” 그는 말했다. “이제껏 너는 숱하게 단정들(conclusions)을 지어왔고, 그것들을 자기 주위로 쌓아올렸단다. 이제껏 너는 이렇게 내린 결론들(conclusions)을 이해라 불러왔지만 말이야. 그런데 이제 너는, 이러한 결론들이 참된 이해에 있어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그것들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것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방해물이 될 뿐이지.”
“그동안 너는 두려움에 떨면서 종교 예식에 매달려 왔고, 예식을 통해 두려움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지.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스스로 만들어낸 조건에 더 갇히게 될 따름이었지. 네가 내린 결론들은, 스스로를 가두는 벽이 되었고, 결론들을 내릴 때마다 자신의 주위에 더 많은 벽을 쌓아올리는 것이란다. 너는 스스로에 의해 묶여 있고 갇혀 있었던 것이지.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너는 관념이라는 벽을 세우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고, 그것들끼리 서로 비교해보기도 하고, 억누르기도 하고, 새롭게 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할수록 더 큰 혼란만 만들어낼 뿐이었지. 그런데 사실 그 혼란은, 두려움과 모순에 가득 차 있으면서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있는 자아가 투사된 것일 따름이야. 자아를 이해할 때에만, 자아에 일어나는 일들을(what the self undergoing) 이해할 때에만, 비로소 스스로를 가두는 이러한 조건들은 사라질 수 있단다. 오직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만 자아는 자신이 만든 환상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거란다.”
“자아란, 다만 기억들과 경험들과 제한들과 믿음들과 적응기제(conformities)들의 다발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이러한 자기 폐쇄(self-enclosure)를 벗어나게 하는 자유가 찾아온단다. 자아가 왜 자신이 허우적대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될 때, 마음의 동요는 정지하게 된단다. 그리고 이 고요함 속에 실재가, 생명(the Life)이 있다네. 그 생명은 영원하며 드넓고 무한정 자유롭게 기능하고(operation) 있지. 일단 의식이 자유롭게 풀려나면, 의식은 자신이 시간과 기억과 경험과 과거와 미래의 환상을 받아들일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자유로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단다. 현재를 순간순간 살아가는 그 찰나에서만 자유는 존재하는 것이란다(only in living in the present is there freedom). 그러므로 생각의 환상을 순간순간 알아볼 때, 환상은 본래 무(無)의 상태로 사라져버리고, 이러한 알아차림(awareness) 속에서 실재는 그저 있게 될 따름이지. 그리고 바로 여기에 창조성(the Creative)이 들어서게 되는 것이란다.”
“자아가 스스로에게 묶여있을 때, 자아는 자기 바깥에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신에게 기도하게 되지.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믿음에 묶여 있는 자들이, 결코 신을 알 수 없게 되는 이유라네. 알려지지 않은 그것(the Unknown)을 말이야.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 바깥에 있는 신을 믿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들은 결코 신을 알 수 없을 것이란다. 그러나 신을 믿지 않는 자들, 그들도 역시 다른 형태의 믿음을 갖고 있을 뿐이란다. 그리고 또 다른 형태의 이 믿음도 역시 알려지지 않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단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믿고 믿지 않고는, 조건에 대한 반응에 불과하거든. 믿음이란 자아에게 알려진 것, 자아가 알한 반응에 의 결과란다. 믿음 역시 알한 반응에 , 기억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거든. 하지만 기억은 결코 알려지지 않는 그것을 깨달을 수 없단다.”
“그렇다면 기억은 이렇게 말하기도 하겠지. ‘그래, 나는 신을 알지 못해. 그것은 알 수 없는 무엇이지.’ 이렇게 기억은 알려지지 않는 그것을 개념으로 창조하고는, 알려지지 않는 그것을 경험하기 위한 수단으로 창조한 개념을 믿어버리게 된단다. 그러나 그건 아무런 실체가 없는 것이고, 그저 정신으로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라는 것을 너는 이해하게 될 것이란다. 마음이 자신이 지어내고 있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라야 비로소 알려지지 않는 것이 발견될 수 있는 거란다. 그리고 이러한 발견은 내면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결코 바깥을 통해서는 오지 않는 거란다.”
“이제 분명히 알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무엇인가에 대해 결론들을 내린다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데 있어 오히려 걸림돌이 됩니다. 자아는 그 결론들에 사로잡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자아의 중심 이미지가 되어 버리고, 자아는 환상 속에 사로잡히게 되면서 눈이 멀게 됩니다.”
“그렇지.”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결론과 자아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야. 이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해방(release)과 변혁(transformation)이 찾아오고, 모든 결론들은 단번에 떨어져 나간단다. 이렇게 해서 마음은 한없이 유연해지는 것이고, 이렇게 한없이 유연한 마음 안에서만 실재는 발견될 수 있는 것이란다.”
“무엇인가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나면, 우리는 그 결론들로부터 결심들(resolutions)을 세우게 된단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결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결심이란 그저 욕망을 억누르는 것뿐이란다. 그리고 욕망을 억압할 때, 그 욕망에 대한 이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 현재 속에서 깨어 살피다 보면, 너는 각기 다른 마음의 층(layer)으로 자신의 가지들을 뻗고 있는 마음을 보게 될 것이란다. 바로 그때 자아가 움직이고 기능하는 방식(the ways of the self)이 발가벗겨져 드러나게 된단다. 높은 차원(layer)이든 낮은 차원이든, 질투심을 갖게 되면, 그것에 의해 묶이게 될 뿐이야.”
“피상적인 차원의 시기심에서부터 보다 복잡하고 미묘한 정신적ㆍ영적 차원의 시기심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내면의 창조성을 드러내는 것에는 방해가 될 따름이라네.”
“창조성이란 존재의 상태이므로, 제 아무리 생각을 한다 해도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 아니야. 창조성은 거짓된 것들을 이해함으로써 자연스레 일어나는 변혁의 결과물인 것이지.”
“우리는 사물 그리고 사람들과 관련을 맺고 있는데, 만약 우리가 이러한 관계 속에서 우리의 반응을 살핀다면(watch), 우리는 자아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자각하게 될 것이란다. 너는, 자신이 보이는 각각의 반응에는 무엇인가에 대한 기억, 두려움, 허영심, 탐욕, 저항, 수용, 믿음 등등의 것들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란다. 네가 맺고 있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 자신이 나타내는 이러한 반응들을 통해 자신이 무엇인지(what you are)를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자신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바로 자기-이해이며, 이것만이 홀로 자신을 자유로 이끈단다.”
“이러한 앎을 통하여 네 마음에 떠오르는 각각의 생각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살피고, 알아차릴 수 있다면, 실제 있는 그대로의 자신(as you really are)을 알게 될 것이란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을 단죄하거나, 결과를 두려워하거나, 스스로를 판단하지도 않는다면, 너는 마음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란다. 그러면 그때 거기에 창조되지 않은 실재가 존재하게 된단다. 그때 자아란 오간데 없고 다만 아버지 홀로 일을 하고 계실 따름이지. 아버지께서는 창조된 모든 것들(all creation) 배후에 계신 유일한 지성(the only intelligence)이시며, 지금 안에서 영원한 현재(ever-present)로서 모든 곳에 계신단다.”
“이제 네 마음을 들여다봐야 한단다. 그러면 너는, 다른 이들의 생각에 의해서, 종교 영역과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그동안 자신이 어떻게 조건화되어 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영향을 받아왔는지 알게 될 것이란다. 이러한 모든 조건들은 진리를 알기 위한 도구(instruments)가 되지 못해. 오히려 정반대이지. 유일하게 자신 안에 창조성을 품고 있는 실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제껏 자신이 받아온 그 모든 영향들과 자신이 그것들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매우 세심한 부분까지도 알아차려야만 한단다.”
그제야 나는 그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유일하게 참된 영향력(True influence)이란 어디에도 매여 있지 않아 자유로운 영의 영향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 기계적으로 나를 표현하게 내버려두는 대신, 사랑과 지혜 자체인 실재가 나를 표현하도록 내맡기게 되었다. 이 안에서, 바르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품고 있는 엄청난 힘이 존재했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요가의 비밀이었다.
“네.” 나는 말했다. “이제 저는 세계가 왜 혼란스러운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세상의 혼란을 없애는 그 작업은 나와 너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단다. 혼란의 원인을 자기 바깥에서 찾으면 안 된단다.”
“네.” 나는 말했다.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멈출 때라야, 비로소 창조성(Creativeness)은 경험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자신 안에 있는 모든 모순과 한계와 더불어 스스로를 이해하게 될 때라야 비로소 마음은 한없이 고요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 너머에 있는 그것이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면 ‘나’는 무한하신 ‘하나’(Infinite ‘One’)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무엇인가로 되고 싶어 하는 욕망(desire)이 있을 때, 어떤 결과를 이루고자 하는 바람(desire)이 있을 때,” 그는 설명해주었다. “거기에는 반드시 모순(contradiction)이 있기 마련이고, 그리고 모순이 자리 잡고 있는 한, 고요한 마음이란 있을 수가 없지. 그런데 고요한 마음이란 생명(Life)의 중요성을 총체적으로 깨닫는데 있어 꼭 필요한 것이거든. 그러므로 시간의 결과물인 생각(thought)은, 영원한 그것(the Timeless)을 결코 깨달을 수 없고, 시간을 넘어서 있는 그것(which is beyond time)을 알 수가 없다네. 생각의 본성은 과거와 미래에 속해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는 현재(Living present)를 충분히 자각할 수 없는 것이야. 또 그렇기 때문에 지금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완전하게 자각할 수 없는 것이지. - 왜냐하면 시간의 산물인 생각은, 자신과 반대되는 것을, 자신과 모순되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직접 창조하고 있는 그 모든 문제들을 제거하려고 하기 때문이란다. 생각은 언제나 어떤 목적을 그저 추구하고 있을 따름이란다. 생각의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생각과 생각하는 자(the thinker and the thought)가 동시에 끝장이 나야지만, 실재는 비로소 깨달아질 수 있는 거란다.”
“알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래서 만약 제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소위 영적이라 부르는 것들을 수단으로 해서 행복을 추구하고 있을 때, 저는 스스로의 욕망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는 것이군요. 또한 제 자신이 스스로를 착취하고 착취당하고 하는 행위의 원인이라는 점을 알겠습니다. 나 자신 바깥에 있는 행복을 추구하게 될 때,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또는 영적이든 어느 차원이든 상관없이, 나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착취하는 자(explioter)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런데 착취하는 자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연의 변덕으로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그 착취자는 다만 물질적, 정신적, 영적인 만족을 얻고자 내 욕망들(demands)이 모인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나 욕망이 날뛰는 곳에서 자유란 존재하지 않으며, 착취자는 만족을 느끼기 위해 욕망을 추구하나 결코 그것을 얻지는 못합니다.”
“그렇단다.” 그는 말했다. “그건 전적으로 옳은 말이지. 그런데 거기에는 좀 더 살펴봐야 할 미묘한 문제가 있단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저항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갖고 있는데, 그것들은 그들이 악이라고 부르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결과이지. 그리고 어떤 이들은 악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악(the evil)을 파괴시켰다고 생각한단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이 사회의 악에 대해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죽이고 감옥에 가두는 것으로써 악을 없애려 한단다. 그러나 그들은 악을 더할 뿐이야.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도 악을 창조하는 일에 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릇된 방법으로는 결코 올바른 행동이 자리 잡히게(establish)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살인자들을 그저 똑같이 죽인다고 해도 평화는 결코 오지 않는단다. 그렇게 한다면, 너 역시 살인자가 된다는 것이거든. 우리가 서로를, 집단에 따라, 민족에 따라, 서로 다른 종교에 따라, 서로 다른 사상에 따라 편 가르기를 계속하는 한, 거기에는 언제나 공격하는 자들과 방어하는 자들이 생기기 마련이지. 그리고 방어하는 자들은 기회가 되면 공격하는 자들로 변할 테고. 그동안 무지와 전통에 따라서, 자신이 직접 습득한 지식에 따라서, 사상에 따라서, 다른 이들을 추종하는 것에 따라서 자신이 얼마나 묶이게 되었고 어떻게 조건화되었는지를 사람이 스스로 알아보기 전까지는, 평화와 자유란 결코 있을 수 없단다.”
“악은, 또 다른 악으로써도, 그것과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고 해도 결코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그렇게 하면 사람은 더욱 더 공격적으로 변하고, 더 많은 악이 생겨날 뿐이지. 이러한 분열(division)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때라야 비로소 평화는 사람과 세상에 깃들게 되는 것이란다. 악 혹은 다른 무엇을 공격한다고 해서 그 결과로 평화가 올 수는 없는 법이지. 또 평화는 전쟁을 통해서도 결코 오지 않는 것이란다. 평화는 오로지, 전쟁의 원인들, 즉 공격성, 민족, 서로 다른 종교로 나누는 태도 등 이러한 모든 것들이 다 이해되고 나야지만, 찾아올 수 있는 것이며, 그래야 그것들은 사라질 수 있단다. 그러면 인간의 마음으로 창조되지 않았으며 다만 영원하고 항상 현재에 머물고 있는, 사랑-신-평화가 들어서게 된단다. 너는 평화를 창조할 수 없단다. 사랑-평화는 세상이 있기 전부터 존재해왔던, 모든 것을 하나로 묶고 있는 통일성(unity) 기초 원리이자, 지금 존재하는 유일한 실재이기 때문이지. ‘내가 바로 유일하게 존재하는 “하나”이다. 나 말고는 다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I am the Only "One", there is none besides Me)”
“영성(spirituality)이란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으로서, 그 안에는 어떤 차별도, 어떤 분열도, 지위나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욕망도 없단다. 무지의 그물을 벗어나 자유롭게 남아있고자 한다면, 너는 반드시, 모방이나 전통 또는 자신보다 모르고 있는(less informed) 권위의 노예가 되는 것을 거부하면서, 자기 자신만의 생각의 자유로움을 지속시켜(maintain) 나가야만 한단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나무는 이기심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자신의 환상과 두려움과 모순 등 이 모든 것들이 뒤얽혀 있는 가지들이 뻗어있는 것에 지나지 않단다.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그렇게 하면서 점점 더 무책임하게 변하지. 이로써 더 큰 혼란과 무질서에 이르게 되는 것이란다.”
“이해와 조정(adjustment)을 통해서 나오는 의식적인 행동은 순수한 생각(pure thinking)에 이르게 한단다. 또한 순수한 생각은, 더 이상 그 어떤 공격성이나 이기심이나 미움이나 살해도 그 안에 품고 있지 않는, 순수한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지. 그때야 비로소 언제나 현재에 그저 있는 현존에 대한 깨달음(realisation of the Presence that is Ever-Present)이 깃들게 된단다. 그리고 그것 안에는, 어느 경우에라도 결코 자신을 개인, 민족, 집단 따위 등으로 나누어 대립되게 하는 성향을 그 안에 품고 있지 않단다.”
“너도 곧 선과 악이 그것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게 될 것이란다. 그것들은, 우리 행동들의 결과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단순한 말들에 불과하지.”
“그리고 사실 우리의 이런 행동들은 우리의 생각의 방향성(character)에 따라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지. 그리고 어느 특정한 방향으로 쏠리는 이런 생각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자아의 무지 때문으로서, 자아가 스스로 그 안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란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슬픔과 갈등을 없애는데 있어서 자아를 이해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paramount) 일이란다.
“그리스도 의식(Christ Consciousness)이란 실재가 있는 그대로 표현되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 그리스도의 의식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단다. 이것이 바로 네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임무이며, 달콤한 말이나 생각으로 사람들의 무지를 지속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란다. 믿음이란 마음을 편협하게 만들 뿐이야.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어떻게 해서 그것들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만이 마음을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단다.”
“현상 그 배후에 있는 원인을 이해할 수 있는 명료한 마음, 비난이나 반대, 애국심, 종교의 형식, 정치의 속임수 등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지지 않는 마음, 인류가 어떻게 조건화되어(conditioned) 왔는지를 살펴보는 마음으로, 이러한 조건들을 분명하게 알고 있을 때, 그것들은 떨어져 나가버린단다.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그 마음 안에 참된 영감이 떠오르게 되지.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요가란다.”
“기도할 때, 신과 자신이 서로 떨어져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단다. 또한 영감을 밖에서 구해서는 안 된단다. 행여나 그렇게 한다면 너는 분리의 환상 속에서 길을 잃게 될 것이란다. 다만 하나의 생명만이 있다는 것과 이 생명은 너의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네 형제들과 자매들 안에도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단다. 자기는 무한하신 이의 어떤 부분이고, 다른 형제는 다른 부분이라는 식으로 그 생명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단다. 하나의 생명(One Life)은 그 안에서 그 무엇으로도 나뉘어 있지 않기 때문이지. 하나의 몸에 수많은 장기들(members) - 심장, 폐, 간, 신경조직, 뼈, 손, 발 등은 다 그 안에 있지만, 몸은 하나일 뿐이지. 또한 하나의 피만이 하나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지체들(members) 사이를 순환하며 영양분을 공급해주고 있단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민족들도 모두 다 같이, 하나의 몸 안에 있는 같은 구성원들(members)이란다. 그리고 그 하나의 생명은 모두 안에 깃들어 있지.”
“네가 거짓인 것(what is false)을 다 이해하고 나면, 그때에 비로소 진리가 있게 된단다. 진리 이외의 것들은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단다. 진리가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바탕이 없기 때문이지. 거짓인 것은 진리 안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단다. 진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진리 안에서는 어떤 분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 분리는 사람의 마음이 만들어 낸 환상이야.”
이 말과 함께 그는 말하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나 역시 침묵했다. 침묵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은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나는 제대로 듣는 법(art of listening)을 배웠다. 나는 그이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에 대해 생각을 만들어내려 하지 않고, 다만 나 자신을 이해함으로써 내 안에서 변모(transformation)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들었다. 이제 나는 이런 자기-이해야말로 지혜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것과, 자기-이해 없이는 어떤 지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대는 온 존재를 뒤흔들어놓는 이야기(inspiring talk)를 들으면서 다만 말없이 가만히 있어본 적이 있는가? 그때 들은 내용을 그대로 기억해서 되풀이해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때 들은 내용이 앞으로의 그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 그런 경험을 말이다. 거대한 변화가 안에서부터 일어나고, 그 변화와 함께 결코 설명할 수 없는 해방감(sense of freedom)이 온 존재를 휘감게 된다. 이것이 내가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느꼈던 바이며, 그 해방감은 언제나 신선했다. 나를 묶어 놓았던 과거라는 사슬은 계속 헐거워지며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나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서, 과거와 미래는 현재(now) 속으로 녹아 없어졌다. 그리고 지금만이 유일한 시간이었다. 이 깊은 침묵 속에 실재가 있었다. 그것이 모든 것이었으며,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힘이 바로 그 순간(Now) 존재했으며, 그 힘이란 바로 사랑이었다.
사람들은 현재 속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희망이 그들에게 더 중요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대가 이 문제를 깊이 들여다본다면, 희망이란 언제나 미래의 어느 곳에 놓여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미래라는 시간은 마음 안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대의 삶(Livingness)은 결코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언제나 오직 현재 속에 있을 뿐이다. 지금만이 창조적이며, 유일한 바로 이 순간이며, 언제나 새롭고, 순간에서 순간으로 존재하며, 지금 안에서 기억은 녹아 없어지고, 사랑이 유일한 실재가 되는 것이다.
아마 그대도 그런 순간을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이 너무나 경이로워 다시 붙잡고자 하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그 순간을 다시 잡으려할 때, 그대는 지금 이 순간을 결코 경험할 수 없게 된다. 지나가 버린 순간은 이제 경험이자 기억일 뿐이다. 과거와 미래는 그대의 마음 안을 제외하고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바로 이 순간은 창조적이고, 창조성 자체이며, 매 순간마다 자신을 새롭게 한다. 그러므로 마음 안을 제외하고는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옳고 그름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분리도, 국가나 민족도, 서로 다른 종류의 교리도 사라지게 되며, 유일한 실재인 살아있는 현존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것이 바로 만물의 아버지이신 신이다. 그리스도의 요가는 다른 모든 요가들보다 위에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감싸 안으며(all-incrusive), 존재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며, 지금, 다만 지금 존재한다(exists NOW, ONLY NOW)!
신은 그분의 완전함 속에서 지금(NOW) 존재하다! 지금! 그리고 그분 홀로 계신다!
그대가 이것을 깨닫게 되면, 실재 안에서는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런 것들은 다만 사람의 마음 안에서만 존재할 뿐이며, 이것이 사람을 제한하고 있는 조건들이다. 그대가 자아를 알게 될 때, 이미지와 믿음, 관념, 분리, 숱한 어제와 미래, 마음이 만들어내는 모든 환상들 등 이 모든 것들이 온통 뒤섞여 있는 마음을 알게 될 때, 그리고 비난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또 다른 자아를 창조하지 않고 이 사실을 보게 될 때, 마음은 자신의 내용물을 넘어서기 위해 생각을 지어내는(fabricate) 것을 멈출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마음 자체가 거대한 환상이며, 그 환상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알지 못하며, 마음이 알고 있는 것은 실재가 아니며, 마음이 알고 있는 것이란 실재에 대한 생각들(ideas) 뿐이지만, 마음은 그것을 실재라 믿고 있다. 그러나 신에 대한 생각은 신이 아니며, “신”이라는 말 자체는 신이 아니다. 신은 다만 영원하며, 그분의 완전함 속에서 항상 현재에 있으며, 그분이 유일한 하나이시다. 이것은 마음이 고요해질 때라야 비로소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마음은 혼자 분투하는 것을 그만두게 된다. 오직 그때에만, 지금 속에 존재하는 실재가 있게 된다! 이때 그 실재는 오직 마음 안에서만 존재하는 미래, 그 안에 있는 그 무엇이 결코 아니다.
그대는 이것을 스스로 경험해야만 한다. 아무도 그대를 위해 그것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어떤 선생이나 영적 지도자(guru)의 도움도 받지 말고, 그대는 홀로 그 길을 가야만 한다. 홀로 있을 때에만 비로소 그대는 알려진 바 없는 그곳(the Unknown)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 말고 다른 길이란 없다. 이것이 내가 경험한 바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스스로 직접 보고 이해한 바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요가인 것이다.
알려진 바 없는 그것을 경험하는 데 있어서 선생이란 방해물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선생이 있는 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항상 있기 마련일 것인데, 마음이 고요해지는 순간 가르치는 자도 배우는 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거기에는 경험하는 자(experiencer)와 경험(experience)도 존재하지 않으며, 자아는 영원한 순간 속으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들은 전적으로 부적합하며, 내 말은 결코 알려진 바 없는 그것을 드러낼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바깥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드러날 수 있을 따름이다.
진리는 결코 이용될 수 없다. 진리를 세상의 일에 이용하려는 욕망을 갖고, 진리에 접근하는 순간 그대는 진리를 잃게 되며, 그대와 진리는 분리가 되는 것이다. 그 때에는 자신(the you)이 있고, 진리가 있어 서로 분리되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진리가 될 수 없고, 다만 진리에 대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보게 될 때, 그때 진리는 그저 있게 된다. 그대는 진리를 마치 삽이나 곡괭이처럼 이용할 수 없다. 그럴 경우에는 그대가 진리보다 더 크고 위대하여야 할 것인데,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다만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사용하려는 마음을 품지 않고 다만 진리가 스스로 일하도록 내맡긴다면(allow), 진리는 그대의 삶과 그대가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것이 일하는 그 영역은 드넓고, 무한하고, 광대하여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its operation is wid, unlimited, extensive).
진리를 어떤 욕망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며, 지적 행위에 불과하다. 그 지적 행위 안에는 기억, 분리, 선과 악, 마음이 지어낸 모든 환상, 미움, 시기, 적대가 있을 따름이며, 이것들은 자아가 투사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진리가 그대 안에서, 그대를 통해서, 마음의 방해를 방해받지 않고 스스로 일하게끔(operate) 그것을 내버려둘 수 있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중에 진리는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곳까지 드넓게 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면 그대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하는 진리의 힘(effect)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진리, 알려지지 않은 바의 것, 신 등 무엇이라 부르는가에 상관없이 말이다. 알려지지 않은 그것은 이름을 갖고 있지 않으며, 또한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에, 마음은 결코 그것을 이용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대는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마음이 고요해진다면, 진리는 스스로 일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일하는 그 영역은 광대하고, 드넓고, 무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안에, 언제나 현존하는 무한한 생명의 힘과 영광과 자유와 최상의 행복이 놓여 져 있다.
“나는 너희에게 참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신의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코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루가 복음 18장 17절)
6장
우리는 둘 다 모두 참된 명상의 상태에 있었다. 그 상태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모르겠다. 세상의 시간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도로 젊어졌음을 느꼈다. 나는 전보다 훨씬 더 젊어졌음에 틀림없다. 내 친구도 그가 느낀 바를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너에게 참으로 현저한 변화가 일어났구나. 훨씬 젊어진 것 같아.” 나도 이를 느꼈다. 이전보다 몸은 가벼워지고, 마음은 보다 민첩해지고(alert) 명료해진(clear)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실재가 나를 통해 기능(function)할 수 있는, 보다 좋은 도구가 되어 있었다. 실재는 이 목적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것이 잘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 삶의 안내자로서 더 이상 내 지난 경험이나 기억에 의존하지 않이상 었다. 이제 내 자신 바깥에는 사실상 그 어떤 안내자도 없었고, 그때 내 친구는 나에게 이런 말들을 해주었다: “내 아들아, 너의 유일한 안내자는 알려지지 않은 그것, 창조되지 않은 그것 이인 그것아무 것도 없단다. 아직은 내 경험이 네 경험보다 훨씬 더 많기야 하겠지만, 내 경험으로도 이제 너를 안내해줄 수 없단다. 너와 함께 있고자 하는 진실한 내 마음만이, 네 가슴이 원하는 바를 줄 수 있을 거란다. 그러나 너를 인도하는 그 소리는 내면에서 온단다.”
“장차 우리는, 아직은 명쾌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 함께, 스스로의 자아에 대해 자유로운 상태에서(impersonally), 토론하게 될 것이란다. 그리고 우리 둘 안에 있는 생명(Livingness) 자체이신, 신의 사랑과 지혜를 통해서 그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이 드러나게 될 것이란다.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니야. 일을 하고 계시는 분은, 바로 우리 둘 안에 계신 신의 생명이지. 주(the Master)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나 혼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내 안에 언제나 계시는 분은 바로 아버지이시며, 그분께서 일을 하고 계신 것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란다. 자아란 어디에도 없으며, 다만 신 홀로 살고 계시는 거란다. 그러므로 이 생명을 방해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더 이상 그것은 방해물이 될 수 없는 거란다.”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앞쪽 홀에서 죽 있었으며, 이제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는 말했다: “저는 그동안 음식을 너무 많이 먹은 듯합니다. 그래서 오늘 점심으로는 그냥 우유 한 잔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둘 다 점심으로 우유를 마셨다.
우리는, 내가 앞으로 세상에 나가 해야 할 일들과 앞으로 내가 다녀야 할 지역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미국, 캐나다, 영국, 스코틀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중국, 일본, 중동 곳곳을 돌아다녔다.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치유는 참으로 놀라웠으나(phenomenal), 그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님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이 내가 그토록 분명하게 배운 바이다. 그래서 나는 나 좋을 대로 한 것이 아니라 영(the Spirit)께서 이끌어주시는 대로 갔을 따름이다.
점심 식사 후 나는 니블룽 리충 산 정상을 오르는 것에 대한 화제를 다시 꺼냈다. 그 산은 우리를 정면에서 마주보며, 우리의 도전을 권하고 있는 듯 했다.
“음.” 내 친구는 말했다. “그렇다면 정비(arrangement)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단다. 우리가 그 산을 직접 오르는 시도를 하기 전까지, 너는 결코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이제 나도 충분히 알겠다. 일단 우리에게는 좋은 짐꾼들이 필요하단다. 세상 그 어느 곳에 내놓더라도 손색이 없을, 좋은 짐꾼들이 많은 지역에 가서 그중에서도 좋은 짐꾼들을 택해야 하지. 우리는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산을 오를 것이란다. 그 산을 오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고, 최소 10일은 걸릴 거란다. 우리는 올라가는 길에 캠프도 몇 개 마련해야 할 것이야. 등산용 밧줄과 도르래(tackle)도 필요한데, 그것들은 다행히 이곳에도 있단다. 그 산을 오르려면 지금 당장 해야 하지. 그렇지 않는다면 곧 겨울이 들이닥칠 테고 그러면 성공할 가능성은 아예쉽지 않은 뉼이 엄청 쌓이거든은 또 폭풍우의 위험도 있는데, 그건 엄청 사납고 일단 불기 시작하면 며칠이고 지속되지. 이런 악조건 중 하나라도 걸리게 되면, 산에서 생존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네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데, 나로서는 이를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란다. 또 우리가 너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등산 때문이 아니라 네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는 내 대답을 요구하는 듯한(inquiringly)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말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스승님(You)께서 저에게 해주신 좋은 이 모든 일들이 위태롭게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는 말했다. “만약 버섯 모양으로 솟아오른 저곳을 지나갈 수 없다면, 더 이상은 등산하지 않기로 동의하자꾸나.”
“네, 동의합니다.”
등산 준비는 단번에 착착 진행되었다. 예전에 알프스 남쪽을 오르기 전에, 스코틀랜드에서 어려운 암벽 등반을 하기 전에, 그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벅차올랐던 기억이 살아났다. 나는 뼛속까지 등산을 좋아하여, 내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언제나 도전을 향해 나아가게끔 자극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스스로에게, 예전에 한 것처럼 위험을 무릅쓰면서 까지는 하지 말자고 타일렀다. 나는 젊은 시절에 무모한 짓을 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분별이 없었는지를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이 책에서는 굳이 그런 옛 기억들까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모든 준비를 마치자, 등산을 할 일행은 스무 명의 노련한 짐꾼들, 내 친구 그리고 나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 산을 향해 출발하게 되었다. 나는 그 날 아침을 너무나도 잘 기억하고 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했다. 오늘 처음으로 여행해야 할 코스는 저 빙하의 바닥에 이르는 곳까지였는데 거리는 5 마일(8km) 정도로서, 태양이 뜨기 전에 출발하는 것이 그나마 거기에 도착하는데 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침 7시 경에 그 빙하의 바닥 부분에 도착했다. 그때 내 친구는 그 빙하의 오른쪽 부분에 돌출되어 있던 곳에다가 첫 캠프 기지를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이 빙하는,” 그는 설명해주었다. “15 마일(24km)에 이른다네. 우리는 설선(snow-line)에 첫 캠프 기지를 설치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의 대부분을 비축해 놓을 거란다. 그리고 저 곳에 이르게 되면 더 자세하게 계획을 짜보자꾸나.”
그래서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의 경계선(wood-line)을 통과하여, 이제 우리는 탁 트인 곳(in the open)으로 나오게 되었다. 바람이 몹시 사납게 불어대며 우리의 가는 길을 방해하였다. 우리는 빙하 위로 걷지 않고 대신 빙하 주변을 따라 걸어갔는데, 빙하가 갈라질 수도 있겠다는 위험이 있었고, 또 빙하가 갈라져 있는 틈 위를 건널 수 있는 수단도 없었기 때문이다. 빙하가 녹아 흘러내리는 강물은 짙은 파란색과 흰빛을 내어 특히 아름다웠다. 갈라져 있는 틈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그 폭이 최소 20 피트(약 6m)도 넘었다. 그 사이로 떨어진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높은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the high wind)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꽤 잘 가고 있었다. 암석 지대를 지나가는 것은 쉬웠으며,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바위 사이에 가려져 숨겨져 왔던 빙하 지대에 이르게 되었다. 그곳은 마치 유리와도 같아 너무 미끄러웠다.
우리에겐 특별한 빙하용 등산화가 있었다. 내 등산화는 내 발에 꼭 맞았으며 너무나도 편안했다. 내 친구와 나는 발 크기가 너무나도 비슷해, 나는 그가 전에 사용했던 등산화 중에서 한 켤레를 선택했던 것이다. 나는 야크 버터로 등산화를 부드럽게 길들여, 발목 주변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 등산화는 발에 잘 맞아 편안했으며, 손에 끼는 장갑처럼 발에 꼭 들어맞았다. 등산을 하고자 할 때에는 발목 주변을 편하게 감싸주는 등산화가 있어야 하며, 이런 등산화를 신고 등산을 해야 얼음 부분을 헤치고 나갈 때 발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내 친구가 앞장서 갔는데, 그는 얼음을 파내며 걷는데(cutting step in the ice) 있어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나는 전에도 수많은 등산가들과 함께 등산한 적이 있지만, 내 친구와 같은 전문가는 결코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토록 정확한 판단력을 지닌 등산가는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정상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채 우리는 올라가는 길 중 어느 한 지점에서 첫날밤을 보내며 쉬었다. 짐꾼들은 짐을 메고 우리를 따라 왔으며, 우리는 거대한 바위 사이에 있는 안식처에서 야영을 했다. 얼음벽 옆에 알코올램프를 밝혀 놓고는 커피와 고기와 보리빵과 버터와 치즈를 들었다. 우리는 맛있게 저녁을 먹었는데, 배고프기도 했거니와 공기도 서늘하고 신선했기 때문이다. 또한 내 친구가 선택한 그 장소는 눈사태가 나더라도 안전한 곳이었다. 우리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에게 기도에 대해 말해주기를 원했으나 그는 말했다: “지금은 자는 것이 더 낫겠구나. 그게 지금으로서는 너에게 최선의 기도란다. 잠을 잘 자야 다음 날 아침에 기분이 상쾌할 테니 말이야. 날이 밝아와 지형을 식별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곧 출발하게 될 거란다.” 그러나 나는 말했다. “지금 우리가 등산을 한다고 해서 우리의 일을 완전히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아니야.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이 전혀 없단다. 보다 적당한 때가 오면 그때 우리의 일을 하도록 하자꾸나.”
우리는 침낭 안으로 들어가 장갑과 발라클라바 모자(balaklava headgear)를 쓰고는 이내 푹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내 친구가 내 발라클라바 모자를 당겨 깨우기 전까지도 나는 잠들어 있었으며, 눈을 뜨자 햇살이 이제 막 뻗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침을 먹고 나면 지형을 식별하기에 충분할 만큼 날이 밝아올 거란다.” 그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등산화와 재킷을 입었다. 우리는 30분 만에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떠났다.
한 시간 동안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다가 우리는 곧은 절벽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는 얼음과 바위가 엉겨 붙어 있으며 깎아지는 절벽 앞에 서게 된 것이었다. 이 어려움을 뚫고 나갈 방법이 나에게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내 친구는 말했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지. 오늘 아침에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내려가 이 절벽의 반대편을 따라 가는 방법을 제외한다면 말이야. 그런데 그렇게 하면 꼬박 하루가 소요되지. 그렇다면 지금으로서 유일한 방법은 이 절벽을 오르는 것이야. 저기 튀어나온 부분이 우리를 지탱할 만큼 튼튼하다면 우리는 해낼 수 있을 거란다. 저 부분 위로 밧줄을 걸 수 있다면 이곳을 오르는 일은 훨씬 쉬워질 거야. 내가 저기 올라가면 너를 끌어올릴 거란다. 그리고 나머지 두 짐꾼도 그렇게 끌어올리고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과 짐들은 저 둘이서 감당할 수 있을 거란다.”
계획한 대로 모든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바위가 튀어나온 그 부분은 튼튼했으며, 그는 바위와 암석으로 엉겨 붙은 단단한 절벽을 타고 올라갔다. 그 뒤에 내가 올라갔으며, 짐꾼들과 짐들도 모두 안전하게 끌어올렸다.
그 빙하의 정상에 도달하자 짐꾼의 우두머리는, 저기 튀어나온 곳 아래에 캠프를 친다면 어중간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보다 더 먼 곳에 또 다른 캠프를 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던 그 튀어나온 곳을 향해 건너갈 수 있었다. 우리는 수 세기 동안 바람과 눈으로 인해 단단해져 얼음처럼 되어버린 눈에 발을 디딜 곳을 찍어가며 나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던 그 튀어나온 곳에 올라서게 되었고, 거기서 야영을 하였다. 이제 우리는 산 정상으로부터 6000 피트 (1800m) 내에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위험한 여행의 세 번째 날을 보냈다.
내 친구는 말했다. “우리는 반드시 삼 일 이내로 정상에 도착해야 한단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너무 늦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 여기서는 바람이 허리케인처럼 엄청난 속도로 불어대는데, 이런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거기를 지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아예 사라져 버리지.”
그렇게 그날은 거기서 캠프를 설치한 후, 다음 날 우리가 정말로 하고자 했던 등산을 시작하게 되었다. 두 명의 짐꾼과 내 친구와 나, 이렇게 네 명은 언제나 로프(rope)를 사용해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다른 짐꾼들 여덟 명은 그 뒤에 따라왔다. 그들은 등산에 있어서 전문가들이었으며, 난 그들의 로프를 다루는 솜씨가 꽤 훌륭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다음 번 묵을 곳에서 필요한 것들을 운반하였다.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저 아래에 있는 캠프에 남아 있었다.
내 친구가 앞장서 갔으며, 그 뒤로 남자라는 이름의 짐꾼이, 그 뒤로는 내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파호라는 이름의 짐꾼의 순서로 우리는 등산을 하였다. 시파호((Sipaho))는 “악이 비껴간다(evil averted)”는 뜻이고 남자는 “덮다(cover)”는 뜻이다.
내 친구의 피켈(ice-axe)을 다루는 솜씨는 훌륭했다. 그는 한 걸음을 내딛을 때 마다 그의 도끼로 두 번 내리쳤다. 우리는 꾸준히 나아갔고 마침내 버섯 모양의 정상에 이르렀다. 내 친구는 말했다: “저곳에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는지 내가 올라가서 확인해보겠네.”
그러나 나는 말했다: “혼자서는 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제가 같이 갈게요.”
“아니야.” 그는 대답했다. “혼자 가는 게 더 좋을 거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지난밤에 말했던 네 믿음은 어디로 사라졌니? 이곳의 바람에 흩날려 가기라도 했니?”
나는 한 바퀴를 돌아서서 스스로를 추스렸다. 아직 나에게는 벗겨내야 할 자아의 껍질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렇게 내 친구는 혼자서 갔다. 그가 떠난 지 30분 정도 지나자 우리는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동안 눈사태가 한 번 크게 일어나 산 아래로 들이닥치기도 했다. 그는 얼음과 눈으로 뒤엉킨 그 길을 그토록 빨리 발을 디딜 홈을 척척 파내며 걸어갔고 몇 분이 지나자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돌아오자 나는 기뻤다. 나는 말했다: “아직 저에게 산을 움직일만한 믿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제 믿음을 확인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는 나를 쳐다보았으나 바로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조금 지나서 그는 말했다: “내가 확인한 바로는 이곳을 지나갈 방법이 딱 한 가지 있단다. 저 바위 면을 타고 올라간 후 눈으로 덮인 저 원뿔 모양의 윗부분을 건너, 정상으로 이어지는 돌출된 곳으로 가는 거란다. 길에 쌓인 눈이 충분하게 단단히 굳어 있다면 해낼 수 있을 테고, 행여나 그렇지 못하거나 실수를 한다면 우리는 미끄러져 100 피트(30m) 아래에 있는 저 암초 위로 떨어지게 될 거란다. 내 생각에 여기 쌓인 눈들은 부드러우면서도 깊게 쌓여 있단다. 이것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란다. 그러나 우리 모두 이 원뿔 모양의 사면을 잘 지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단다. 상황은 이러한데 너는 어떻게 느끼고 있니? 너도 계속 갔으면 하니?”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설마 이제 와서 제가 돌아가겠다고 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단다.”
우리는 서로를 밧줄로 다시 연결시키고 위험한 얼음과 바위 면을 조심스럽게 걸어 나갔다. 가까이 오는 것을 감히 허락하지 않던 그 원뿔 모양의 면에 우리는 도착했다. 눈은 단단히 굳어 있어 우리를 붙들어 주었으며 곧이어 그 돌출된 곳(the spur)에 도착했다. 내 친구는 돌아오는 길이 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런 이야기도 해주었다: “다음번에는 여기에 캠프를 설치해야 할 거야. 장담하건데 이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어. 이제껏 그 누구도 여길 올라가는 길을 발견한 적이 없단다.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이 가파른 바위 면을 오를 수 없었던 것 같아.”
“스승님(you)께서는 어떻게 거길 오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저 바위 면을 오르려는 사람은 스승님 말고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우리는 가슴으로부터 웃었는데, 그 웃음은 몇 시간 동안 지속되었던 긴장이 풀리면서 나오는 안도의 웃음이었다.
우리는 그 돌출된 곳에 도착했고, 다른 사람들도 뒤이어 도착하자 우리는 밤을 보내고자 캠프를 설치했다. 이제 우리는 산의 정상으로부터 2000 피트(600m) 가량 떨어진 곳에 와 있었으며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는 전날 푹 쉬었기 때문에 다음날 있을 마지막 강행군을 할 수 있을 만큼 기력이 충만했다.
마지막 날 우리는 해가 뜸과 동시에 출발했고 정오에 산의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 서자 녠첸탕글라(Nyenchentangla)의 봉우리들이 줄지어 있는 산맥들을 모두 볼 수 있었고, 반대편에 있는 계곡 아래쪽으로 거대한 호수가 보였는데, 길이는 50 마일(80km), 폭은 30마일(48km)에 달했다. 산줄기는 그 호수의 오른편으로 죽 이어지고 있었으며, 그 호수만 하더라도 해발 15,000 피트(4572m)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호수는 남초(Namcho) 또는 텡리 노르(Tengri Nor)로 불렸다. 이 호수로 흘러드는 강줄기가 서른 개에 이른다는 것을 나는 일일이 세어보아 알게 되었다. 그 강줄기들 중 두 개는 현저하게 컸는데, 그 이름은 느강 추(Ngang Chu)와 트리 추(Tri Chu)였다. 왼편으로는 아직 탐사되지 않은 지역이 보였다. 거기에는 단 한 명도 살고 있지 않은 듯 했다. 반면에 호수가 있는 편 아래쪽으로는 집이 몇 채 보였다. 우리는 산 속에 있는 그 집들을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것들은 수천 피트 아래에 있어서 마치 바늘의 머리처럼 보였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티베트의 모습이었다(This was Tibet in the raw). 내 친구가 말해주기를, 수 세기 동안 그곳 사람들은 거기서 태어나서, 거기에 살다가, 거기서 죽었고 아마 거기 사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 마을 바깥을 나가 본 적이 없을 거라고 했다. 나는 대답하기를, 그들은 굳이 바깥에 나가고픈 마음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거기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렇지.” 그는 대답했다. “저곳은 참으로 기묘하고 낯선 땅이지.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는 바깥세상이 더 낯선 곳일 거야.”
우리는 하고자 했던 것을 이뤄냈다. 이번 등산은 참으로 전율이 끼치는 경험으로서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 알려진 사람들 중에서는, 우리가 뉘블룽 리충(Nyiblung Richung) 산을 오른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모두 행복했고 가슴으로부터 만족감이 차올랐다. 우리는 하고자 했던 바를 이뤄냈다. 이건 매우 좋은 조짐이었고 나도 이를 알았으며, 내 친구도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그날 오후에 우리는 내려가기 시작하여 해가 질 때 즈음해서 캠프에 도착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도저히 말로는 그려낼 수 없을 것이다.
내려가는 것은 예상한 것보다 쉽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잠사르를 떠난 지 십 일 만에 다시 잠사르로 돌아오게 되었다. 나는 결코 그 경험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경험은 말 그대로 내 수련의 일부였다. 우리가 산을 내려올 때 모든 어려움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도 죽 그러했다. 어려움들은 참으로 놀라운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그대가 신을 자기 자아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 하지 않을 때, 신께서는 직접 일을 하게 되신다. 또한 그대가 진리-신이 몸소 일하도록 허락할 때, 그분의 일은 광대하고 드넓으며 무한하며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여기에 바로 그리스도 요가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 신께서 몸소 일하신다(God does the work). 이것이 참된 믿음이며, 나는 뉘블룽 리충 산을 오르내리는 동안 이것이 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저녁에 우리는 돌아왔으며, 마을(town) 전체 (이곳을 마을이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사람들이 바깥에 나와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는 뜻이기도 했고, 또한 좋은 소식을 듣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거기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서로 친척 관계였다. 기쁨이 흘러 넘쳤으며, 소식은 하룻밤 사이에 잠사르의 끝에서 끝까지 퍼져나갔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마을 중앙에 있는 회관(hall)으로 모여들었다. 모든 이들이 먹을 것을 들고 왔는데, 창(chang)이라는 이름의 전통 보리 맥주와 참파(tsampa)라는 이름의 티베트 빵이 엄청 많았다. 달걀도 서로 주고받았는데, 이는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념품으로서 주고 받는 것이었다. 이 달걀들 중 어떤 것들은 일 년이나 그 이상 된 것도 있었다! 마을은 밤새 조화로운 행복 속에서 시끌벅적하였다.
내 친구와 나는 그의 안식처로 갔다. 우리는 십 일 동안 씻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전에 이보다 더 오랜 기간 동안 씻지 못한 적도 있었다.
우리는 물이 흘러들어 오고 있는 수영 연못(swimming pool)으로 들어갔다. 물은 상쾌하고 따뜻했으며, 우리는 물이 들어오는 곳에서 몸을 씻었다. 그러고 나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마을 회관으로 내려갔다.
내 친구는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여기서(at hall) 우리에게 준 음식부터 좀 들어야겠구나.” 그래서 우리는 맛있게 먹었다. 놀랍게도 음식 중에는 구운 닭고기와 구운 감자도 있었는데, 이것들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참으로 맛있었다.
내 친구는 티베트말로, 전에는 결코 정복된 바 없는 그 산의 정상에 우리가 어떻게 도착했는지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가 설명할 때 주위는 지극히 고요하여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으며, 가장 어린 아이도 뉘블룽 리충을 오르내리는 그 이야기에 깊이 몰입되어 있었다. 게다가 내 친구의 목소리는 참으로 근사했으며, 그대도 거기에 있었다면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내 친구가 말할 때, 그 목소리는 그대를 매혹시킬 것이다.
티베트 여자들은 모든 면에 있어서 남자들과 동등하며, 여자들 중 대부분이 훌륭한 산악인이기도 하다. 여자들 역시 쟁기질을 하고 땅을 파고 물을 나르고 나무를 한다. 집 안에서건 집 밖에서건 여자들은 남자들만큼 모든 면에서 능숙하며, 오히려 물건을 사고파는 일에 관해서는 남자들보다 훨씬 낫다.
어린 사람이나 나이든 사람이나 가릴 것 없이 모든 이들은 보리 맥주(chang)를 한껏 마셨다. 티베트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즐거움에 넘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싸우는 일은 좀처럼 볼 수 없고, 술을 마실수록 그들은 더욱 즐거워진다.
티베트 농부들 사이에서 도덕에 대한 관념(morals)은 상당히 느슨한 편이다. 그들은 도덕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으며, 그날 밤 거기서는 그 어떤 거리낌도 없었다. 티베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아이들을 열정적으로 좋아한다. 그리고 결혼하기 전에 소녀가 임신을 하더라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혼 유무와는 상관없이 일정한 연령에 이른 여자에게 아이가 없는 모습을 그대는 좀처럼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보다 행복한 민족은 세계 다른 어느 곳을 가더라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겨울에는 특히 가혹할 정도인데, 대부분의 기간 동안 기온은 영하 상태로 유지된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이 기후 조건에 적응하였다. 이들은 다른 곳의 날씨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으며 그래서 이곳 날씨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내 친구는 잠사르의 왕이라 할 정도였다.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이 그를 존경하였다. 그가 지닌 지혜와 사랑과 이해가 그 비결이었다. 나는 그가 다른 이를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말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그는 참으로 진리의 화신이었다. 모든 조건에서 자유로운 그의 마음을 통해서 진리는 어떤 방해나 제한도 받지 않고 몸소 일을 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 되어서야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피곤한 줄 몰랐는데 일단 잠이 들자 만족감에 젖어들어 통나무처럼 죽은 듯이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이미 해는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나는 뉘블룽 리충 산을, 이제는 거기를 오르려는 열망이 아니라 해냈다는 성취감으로 올려다보며, 내 친구에게 말했다: “오늘 아침에 저 산을 보고 있자니 뭔가를 해냈다는 만족감이 차오릅니다.”
“그렇지.” 그는 대답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다시 우리의 일을 시작할 거란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지난 번 산에서 저는 기도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를 위해 기도라는 주제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는 말했다: “너에게 있어 기도란 무엇을 뜻하니?”
“음, 보통 저는, 뭔가가 필요하거나 고통 중에 있거나 아플 때에 기도를 하곤 합니다. 때로는 감사를 드릴 때도 하구요.”
“그렇지.” 그는 말했다. “너는 기도하고 있을 때, 너는 대체로 뭔가가 불확실한 상태에 있지는 않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있거나, 불행하거나, 혼란스럽던가 말이야.”
“예, 행복하거나 만족을 느낄 때 기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그렇다면 말이야.” 그는 말했다. “기도가 어떤 만족감을 가져다주는 것에 틀림없다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에 기도를 그만두었을 테니까 말이야. 구하면 받는단다. 자신의 믿음에 정도에 따라서 구하는 것을 받게 되는 것이지. 이것이 기도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이고. 그렇지 않은가? 예수께서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한다면 받게 될 것이다’ 말씀하셨는데, 이는 진리란다.”
“그러나 자신이 기도할 때를 살펴보면, 너는 어떤 형태로든지 만족감을 추구하고 있단다. 높은 수준이건 낮은 수준이건 만족감을 추구하고 있는 마음은, 그 믿음의 정도에 따라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얻게 되지. 그리고 그런 믿음이란 거의 맹목적인 믿음이지. 그러나 기도에는 이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 있고, 우리가 기도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을 밝혀낼 수 있을 거란다.”
“자, 너는 기도할 때 무엇을 하게 되니? 응답을 구한다 하면서, 어떤 단어들을 반복해서 말하거나, 특정한 자세를 취하거나 무엇인가를 하고 있지는 않더냐? 이런 식으로 응답을 구하다보면 마음이 다소 고요해지기는 하겠지. 그리고 그런 고요한 상태 속에서 너는 만족감도 느끼게 될 것이고 말이야. 그리고 고요한 상태에서라야 마음은 응답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하는 기도는 뭔가를 끊임없이 청하고 있는 자신을 이해하도록 돕지는 못한단다. 뭔가를 바라고 구하며 결과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등의 상태를 넘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를 이해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란다.”
“기도할 때” 그는 또 말했다. “너는 언제나 도와달라며 손을 바깥으로 뻗치면서 뭔가를 기다리거나 바라고 있단다. 그러나 희망이 있는 곳에는 절망이라는 상태도 같이 존재하게 된단다. 너는 어떤 상태를 벗어나게 해달라고 그리고 다른 무엇인가를 얻게 해달라고 분투하고 있단다(You are striving to lose one and gain the other). 그러나 네가 보고 있듯이, 기도란 결코, 자신을 기도하게 만드는 그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단다. 그러므로 언제나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고, 이 불안한 상태가 마음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기도하게 만드는 것이지. 그렇다면 이를 해결할 방법이란, 스스로의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겠니?”
“기도란 기도하는 자에게 달려 있단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청할 때 그는 무의식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단다. 그리고 그 반응이란 여러 세기에 걸쳐 쌓여 있는 무의식적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고 말이야. 그리고 기도하는 이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그는 청하는 것을 받게 되어 있다네. 예수께서 ‘받았다고 믿기만 한다면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듯이 말이야.”
“그러나 마음이란 언제나 대립되는 긴장 속에서 살고 있지 않더냐? 가지고 있는 것과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건강과 질병, 성공과 실패, 선와 악 등과 같이 말이야. 마음의 모든 과정을 다 이해하고 나서야 너는 이 대립의 상태를 넘어갈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이 기도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란다.”
“기도는, 기도하는 자에게 그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기도 자체도 해결책이 되지 못한단다!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기도는 네가 무엇인가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그 상태를 마음이 다시 만들어내는 것을 막지 못한단다.”
“세상은 오랫동안 평화를 위해 기도해왔지만, 평화는 언제나 저 먼 곳에 있어왔지. 전쟁의 원인을 이해하지 않으면서 왜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거지? 실패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왜 성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일까? 질병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왜 건강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지? 슬픔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왜 기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인가?”
“사람들은 기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에는 기도하지 않는단다. 사람들은 갈등에 빠지거나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을 때에만 기도한단다.”
“정말로 중요한 일이란 마음의 모든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란다. 마음, 자아가 바로 문제의 원인이거든. 그렇게 되면 마음은 더 이상 떠들지 않게 되고, 마음을 강제로 고요하게 만들 필요도 없게 되며, 전에 내가 설명했듯이, 다만 바른 명상을 통해서 마음은 고요해지게 되는 것이야. 그 고요함 속에 실재가 있단다. 그리고 실재는 그 어떤 문제도 갖고 있지 않지. 자아만 스스로가 기도하고 있는 문제를 만들고 있을 따름이지. 그러므로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문제의 원인을 이해하는 것인데, 문제의 원인이란 바로 나(the you), 자아(the self)란다. 실재 안에서는 존재를 갖고 있지 못한 자아의 본래 상태를 이해하고 나면 자아는 사라져 버리고 따라서 문제 역시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 그러면 네가 창조하지 않은, 그러나 창조성 자체인 실재가 그 즉시 들어서게 된단다. 이것이 참된 기도야. 이것이 존재자(Being)이고. 이 ‘존재자’를 깨닫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이뤄내고, 모든 곳에 두루 일하며, 그 어떤 한계도 갖고 있지 않은 ‘존재자’의 상태를 먼저 경험해야만 한단다.
나는 자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침묵(silence)의 상태에 있었다. 이 침묵은 자아가 움직이는 방식과 자아가 무엇인지를 이해함으로써 오는 것이었다. 이 깊은 침묵 속에서 내 마음은, 그가 말하듯이, ‘재잘대는(chatter) 것’을 멈추었고, 실재는 거기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실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문제는 자신이 본래 속해 있던 무(無) 속으로 돌아갔다. 실재만이 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코 창조속으수 없는 창조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모든 것은 마음이 스스로 만들어낸 문제였으며, 마음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다. 그다., 곧 내가 이 사실을 이해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재잘대지 않았고, 따라서 문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자기-이해를 드러내는 것이며, 자기-이해가 없다면 그 어떤 해결책도 없다. 이것이 참된 기도이다. 이것이 참된 명상으로서, 실재는 그 명상의 상태 안에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실재는 드넓게, 아무런 제한 없이 일을 한다. 신 홀로 그분의 집을 완전하게 차지하시게 된 것이다(God occupied His own House completely).
7장
나는 “그리스도의 요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요가란 그저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이름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제야 나는 이를 이해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쓰고자 했던 이 책에 붙일 이름을 항상 원했었지만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름이나 제목, 지위, 서열, 관념 등 어리석은 마음이 먹고 사는 모든 것들(all that the stupid mind feeds on)에 쉽게 현혹된다. 마음은 스스로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을 먹고 살 수 있을 따름인데, 그저 생각, 단어, 믿음에 지나지 않는 그런 것들이 마음이 먹고 사는 것들이다. 그리고 마음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보지 못할 때, 마음은 자신을 휘저어대는 문제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이렇게 마음은 계속해서 지껄여 대기만 하는데, 자신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과 자신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은 멈추게 된다.
미숙한 마음은 언제나 문제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마음은 자신의 수준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창조해낼 뿐이며, 이렇게 해서 원인과 결과라는 끝없는 사슬이 계속해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마음 자신이 이 모든 사태의 원인으로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를 스스로 이해하기 시작할 때 인과의 사슬은 끝나게 된다.
정치가들, 경제 전문가들, 교조주의자들(dogmatists) 그리고 다른 모든, 무슨 무슨 주의자들은 성숙하지 못한 마음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행동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따르고 있는 지도자들의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과 똑같은 것들로 마음이 꽉 차 있다.
이를 스스로 생각해보기 전까지는 우리는 이 자기 최면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단어들을, 세상에 있는 모든 책들을 모아 놓는다 할지라도 이 최면 상태를 빠져나오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그것들은, 자신의 조건을 강화시키고자 여기 저기 떠돌며 관념들을 추구하는 조건화된 마음에 양분을 줄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런 마음은 결코 창조적(Creative)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다.
자,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그대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창조성(Creativeness)을 얻게 되는지를 알고 싶어 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그대는, 어떻게 해야 그대가 창조적으로 될 수 있는지를 내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련다. 그대는 어떤 기술(technique)을 연습함으로써 자신이 창조적으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잠시 내 말을 들어보겠는가.
하루에 여덟 시간씩 악기를 연습하면 그대가 창조적으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책을 쓴다 해도, 작곡을 한다 해도, 시를 쓴다 해도, 발언을 한다 해도, 연설을 한다 해도, 그 행위 자체가 창조성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대는 완벽한 연설가이며, 유능한 작가이며, 좋은 화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 여전히 ‘나’(the me)가 존재하고 있다면, 창조성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마음을 넘어서 있는 그것, 홀로 창조적인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바로 나-자아가 아니던가? 자아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창조성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자아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을 확인하기란 쉬운 일이다 : 이를 위해 그대가 해야 할 일이란 다만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갈등이 지속되는 한 창조성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갈등이 창조적 행동을 방해하고 있지 않던가? 마음이 대립되는 것들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고, 갈등은 창조성을 몰아낸다. 마음이 고요해질 때라야 창조적 상태가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창조성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창조성은 그저 있을 따름이다(Creativeness is not created. Creativeness is). 마음이 스스로를 이해하게 될 때, 자신이 움직이는 방식을,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구를, 갈등을 일으키는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자신을 이해할 때, 비로소 창조성이 그 마음 안에 들어가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 안에 있는 신의 그리스도-영 홀로 창조적이며, 그대는 이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마음이 전적으로 고요해질 때라야, 마음 자신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질 때라야, 창조성이 들어설 가능성이 열린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있어서, 창조성이란 그저 자기-표현(self-expression)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가 중요한 듯 여겨지고, 다른 누군가가 된 듯한 느낌만 주는 자기-표현 말이다. 이렇게 하는 행위는 공허함과 무지 자체이며, 자아를 계속 키울 뿐이며, 자아는 창조성을 파괴시킨다.
그러나 창조성은, 자아가 부재할 때, 모든 대립이 사라져 고요해질 때, 순간에서 순간으로 그저 있을 따름이다. 자아가 스스로 창조적으로(creative) 되려고 추구하는 한, 창조성(Creativeness)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자아가 끝장이 나야만 창조성은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홀로 창조적이신 분은 바로 아버지이시며, 그분께서 몸소 홀로 일하실 때, 거기에 참된 창조성이 있는 것이다. 로 창내가 쓴 이 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바를 사람의 손으로 기록하여 성서에 실려 인쇄되어 있는 말들처럼 정확하지는 못할지라도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그대에게 전해 정확하지. 말이나 말의 의미 자체로는 결코 창조성을 전할 수 없다는 것과, 자아가 부재할 때라야 창조성이 스스로 일하게 되며, 그때 창조성은 어떤 대립이나 갈등도 없이 광대하고 무한하게 일하게 된다.
* * * * *
만약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책이 이것을 읽게 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지 그렇지 못할지에 대해 마음을 졸였다면(concerned), 이 책은 결코 씌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자아가 이를 가로막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가 스스로를 알고 있을 때, 모든 것들은 있는 그대로 보이며, 더 이상 그것들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욕구도 없게 된다.
만약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가 자신이 선호하는(pet) 생각이나 믿음 때문에 이 글에 반응하고(reacts) 있을 뿐이라면, 또 이 내용을 무조건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고 있다면, 그대는 아직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에 따라 반응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대가, 자아를 이해하고, 어떻게 마음이 묶여있는지를 이해하려는 수단으로써 이 글의 보다 깊은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면 그때 변혁(transformation)이 찾아온다. 변혁은 마음 안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변혁은, 실재가 일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던 자아가 소멸되는 결과로써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그것들이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게 될 때, 비로소 마음은 재잘대는 것을 그치게 된다. 그리고 그 고요함 뒤를 따라서 실재가 있게 된다.
우리는 날마다 꾸준히 공부했다. 우리는 토론을 하면서, 단어가 전달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를 밝혀냈고, 이는 나에게 꼭 필요했던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그동안 나는 정신적 개념에 불과한 다양한 요가 체계들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도 나는 놀라운 일을 많이 할 수 있었지만, 이제야 왜 그것들이, 신의 사랑과 지혜 자체인, 그리스도의 자유에 이르는데 방해가 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책들이 진리에 대해서 씌어졌다. 그대가 살펴보기만 한다면, 새로운 사상(thought)이란 사람들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지 간에 그것들은 모두 지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지적(mental)”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그것들은 모두 마음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며, 마음이 만들어낸 것은 진리(Truth)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관념일 따름이다. 마음은 집중과 요가 수행을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자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요가는 자아, 즉 마음이 고요해질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내 친구는 이런 말들로 우리의 공부를 시작하곤 했다: “마음의 내용물들(What the mind is made up of)을 이해함으로써만이 마음을 넘어서 있는 실재는 드러날 수 있는 것이야. 그러나 자아가 있고 자아와 대립되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면, 진리란 결코 있을 수 없는데, 그것은 자아가 언제나 앞에서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지. 그럴 때 진리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단다. 그러나 진리란 수단이 아니며 시작도 끝도 갖고 있지 않단다. 그러므로 네가 지금 마음에 갖고 있는 것들은 자아가 투사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야.”
이 말이 끝나면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토론을 시작하곤 했다.
한 때 나는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생각이 그친다면, 그때 우리는 생각의 도움을 받지 않고 어떻게 뭔가를 알 수 있을까요?(How can we know anything if thought ceases?)” 이 질문은 그대 역시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묻고 싶은 질문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와 똑같은 질문을 받은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만약 지금 내가 너에게 그 질문을 던진다면, 너는 이 도전(challenge)에 즉각적으로 응답(respond)하게 되고, 그러면 너는 생각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지!” 내 친구는 말했다: “그러므로 네 생각이란 도전에 대한 반응이야. 그런데 반응(response)이란 언제나 과거의 결과일 따름이지. 왜냐하면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은 전부 과거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마음은 새로운 그 무엇을(the New) 알지 못한다네.”
“맞습니다.” 나는 말했다. “저도 그 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몇 분 후에 또 다른 질문을 너에게에게 묻는다면, 그것은 너에게 또 다른 도전으로 다가오겠지. 그리고 너는 다시 생각하기를 시작할 테고.”
“예, 맞는 말씀입니다.”
“자,” 그는 말했다. “그런데 반응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도전은 언제나 새로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의 반응, 너의 대답은 기억과 경험으로부터 나오고 있지. 그러면 그런 반응이란 언제나 오래된 것일 테고 말이야. 그렇지 않겠니?”
“자 이제,”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너에게 묻겠다: 너는 신을 믿고 있니? 그러면 너는 이 질문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일 테지만, 그것은 너를 제한하고 있는 조건들을 통해 나온 반응일 뿐이야. 네가 신을 믿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하게 되는 이유는 네 마음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음에 의해 묶여(conditioned) 있기 때문이지. 또 반대로 너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신을 믿는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네가 그렇게 무엇인가를 믿고 믿지 않고 하는 것은, 네 기억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지.”
“자신의 기억이란 경험의 결과이며, 경험이란 곧 지식이고, 지식은 과거에 속한 것이지. 그러나 지식이나 경험을 통해서는 결코 신을 알 수 없단다. 그러므로 생각(thinking)이란 과거를 바탕으로 나오는 반응인 것이지. 생각이란, 사람의 배경, 인종, 종교적 신념(creed), 믿음, 지식, 관습, 의식과 무의식 등과 같은 것들에 따라서 개인적, 집단적으로 각기 다른 차원에서 반응하는 것이란다. 그러므로 생각이란 결코 새로울 수 없는 것이지. 네 마음이 지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잠깐 시간이 지나면 오래된 것이 되어버린다네. 너는 지나가버린 순간, 즉 기억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단다. 마음이 고요할 때에만 비로소 너는 지금 이 순간을 알 수 있는 것이지. 우리는 지금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단다. 만약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면, 생각하고 있는 그것은 과거란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the living moment) 동안 너는 그것을 알아차리고는(aware) 있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할 수는 없단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는 자아가 사라져, 자신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지. 지나가버린 순간은 기억일 뿐이야. 그러나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은, 여전히, 현재 속에서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일 따름이란다(but the living moment is still the living moment in the present). 너는 지금 이 순간을 경험하는 상태에 대해 생각하기를 원할 텐데, 그렇게 하는 동안에 자신이 있고, 경험이 있게 되어 버리지. 그러나 그런 경험이란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야.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은, 자아가 부재할 때 다만 살아있는 현존, 실재, 영원이 그저 존재하고 있는 순간에서 순간으로 언제나 있을 따름이야. 그러나 너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단다. 그것이 지나가버리고 나면 다시 붙잡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지. 그것은 기억일 따름이고 이미 지나가버렸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너는 과거, 알려진 것(the known)을 생각하기 시작하는데, 알려진 것은 언제나 과거이지. 그러나 항상 현존하는 순간(ever-present moment)은 언제나 새로운데(New), 이것이 바로 네가 그것(It)에 대해 생각할 수 없는 이유이며, 그것은 언제나 마음을 넘어서 있단다. 마음이 고요할 때라야 그것이 있게 되는 것이며, 그때에는 경험자는 사라지고 다만 경험만이 있을 뿐이지.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자신이 있고, 경험이 있어 분리가 일어나게 되지. 그러나 그것은 과거일 뿐이야.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네가 이해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것이며,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너는 그리스도의 요가를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란다.”
“이제 너는, 생각하는 행위(thinking)는 결코 스스로를 새롭게(renew)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생각이란 언제나 오래된 것이지. 그리고 생각이 새롭게 만든 것들도 모두 오래된 것들이고. 그 오래된 것들이 자신의 조건이 되고, 자신의 전통, 자신의 인종, 자신의 경험, 자신의 믿음이 되는 것이야. 그러므로 생각(thought)이란 오로지 스스로를 투사시킨 것만 알 수 있단다. 생각은 자신이 전에 이미 경험해본 것들만 인식할(recognize)할 수 있을 뿐이야.”
“그렇다면 생각이란 그저 전에 알았던 것을 다시 인식하는 것뿐이야. 생각은 자신을 넘어서 있는 것은 결코 아무 것도 알 수 없지. 이제 네가 이해하고 있듯이, 생각이란 그저 상징, 말들, 단어들, 이미지들, 경험들일 뿐인 것이고, 이런 것들이 없다면 생각이란 존재할 수 없단다. 그러므로 생각이라는 것은 결코 창조적일 수 없는 것이지. 왜냐하면 생각은 지나가버린 것들만 알고 있을 따름이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생각할(think on) 수 없기 때문이란다. 또 생각은 자신을 넘어서 있는 것을 경험할 수 없단다. 왜냐하면 생각은 오로지 오래된 것만 알아보고(recognize) 새로운 것을 결코 알아보지 못하거든. 네가 경험하고 있는 것들은 기억이 되어가고 너의 생각이란 기억의 산물일 따름이지.”
“네, 맞습니다.” 나는 말했다. “스승님(you)께서 이토록 쉽고 분명하게 제 앞에서 말씀해주시니, 생각은 마음 안에 있는 것들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생각은 새로운 것들은 결코 알지 못하고 다만 오래된 것들만 알 뿐입니다. 생각은 마음을 넘어서 있는 그것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생각은, 마음 안에 있는 것들을 투사할 따름인데, 그것들은 바로 기억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 모호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단다.” 그는 말을 이었다. “네가 자기 자신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스스로를 정신적 개념으로 인식하는 ‘나’를 이해하게 될 것이야. ‘나’는 기억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러한 기억들을 말(words)과 이미지와 상징의 형태로 경험하고 있지. 그런데 생각이라는 것은 지나가버린 것만(the past) 경험할 수 있을 뿐이고, 그것은 결코 새로운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단다. 그러므로 생각은, 신 또는 실재를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인데, 신 또는 실재는 앎을 넘어선 것이며, 창조될 수 없는 것이자 형태를 넘어서 있는 것으로서 어떤 상징이나 말도 갖고 있지 않단다.”
“ ‘신’이라는 말 자체는 신이 아니야. 또한 신은 이미지도 아니지: 신은 생각(a thought)이 아니야, 만약에 신이 생각이었다면, 너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what he was) 알았을 것이야. 그러나 이제 너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단다. 왜냐하면 신은 마음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지. 마음은 오직 자신에게 알려진 영역 안에서만 기능(function)할 뿐이야. 자신을 넘어서 있는 곳에서는 활동할(function) 수 없지.” 기능(저도 분명히 알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제가 알려지지 않은 그것(the Unknown)에 대해ctio려 하는 ti즉시 마음이 활동하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니다.”알려지지 않은 그것을 자신에게 알려진 영역으로 집어넣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불가능합니다. 알려지지 않는 그것은 결코 마음에게 알려진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링-쉬-라 은수자께서도 저에게 그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단다.” 그는 말했다. “앎을 넘어서 있는 그것(the Unknown)이 들어서게 되는 것은, 생각이 그칠 때라야 가능하단다.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해야 알려지지 않은 그것을 경험할 수 있겠느냐와 같은 질문은, 아예 있을 수가 없는 것이란다. ‘나’, 마음, 자아, 이것들은 모두 하나이며 같은 것이야. 자아란 그저, 관념과 이미지와 말(words)과 상징의 다발에 지나지 않으며, 이것들은 그저 기억일 뿐인 것이며, 그것은 스스로를 투사한 것에 대해서만 인식할 수 있단다.”
“자신은, 알려지지 않은 그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마음이 말하고 있다면, 마음이 경험한 것은 알려지지 않은 그것이 아니라 자신이 투사된 것을 경험한 것뿐이야. 그런데 그것은, 알려지지 않은 그것(the Unknown)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그것(the Unknown)이라 믿고 있는 것뿐이지. 그러나 마음이 스스로, 자신이 투사된 것일 뿐인 그것을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그것으로 착각해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마음은 고요해지게 된단다. 실재를 찾느라 더 이상 마음이 동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 그리고 그 고요함 뒤에 알려지지 않은 그것이 들어서게 된단다. 그러면 그때 알려지지 않은 그것은 아무런 방해 없이 일을 하게 되는 것이며 그 일은 무한하게 뻗어나가지. 생각은 과거, 기억에 제한되어 있지만, 알려지지 않는 그것은 언제나 지금 있을 따름이란다. 그것은 어떤 제한도 받지 않으며 순간에서 순간으로 항상 새로울 따름이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알려지지 않은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그저 마음의 새로운 감각 상태(new sensation)를 표현하고 있는 것뿐이야. 그러나 감각(sensation)이나 관념은 알려지지 않은 그것이 아니란다. 알려지지 않은 그것은 결코 인식될(recognize) 수 없단다. 알려지지 않은 그것은 그저 있을 따름이지. 그것은 마음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야. 자신이 만들어낸 것은 그저 알려지지 않은 그것에 대한 관념이며, 마음 즉 자아가 투사된 것일 뿐이야. 너는 결코 알려지지 않은 그것을 창조해낼 수 없단다. 이제 너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 그렇지 않니?”
“네.” 나는 말했다. “모든 것이 훨씬 명확해졌습니다.”
“실재가 들어서기 위해서는,” 그는 설명해주었다. “너는 반드시 생각의 모든 과정(the whole process of thinking)을 이해해야 한단다. 그리고 생각의 모든 과정이란, 자아 즉 마음이 활동하는(working) 것이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그저 기억, 경험, 관념, 이미지, 상징들의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이 스스로 분명히 보고 나면, 마음은 더 이상 미지의 것을 경험하려고 애쓰지 않게 되고 고요해지게 되지. 마음이 고요할 때라야, 강제로 고요해지게 만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완전히 고요해질 때라야, 그 고요함, 그 평온함 속에서 실재가 있게 되는 것이란다.”
자아와 실재를 낱낱이 밝혀 드러내는 이 토론(discussion)에 참여하는 동안 나는 즐거웠다. 토론 과정에서 내 친구가 말하곤 했던 내용들을 나는 주의 깊게 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 대화의 기록이 그대에게, 마음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결코 미지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대 역시 생각(thinking)이란 오직 지나가버린 것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NOW), 언제나 현존하는 지금 이 순간(the ever-present NOW) 실재는 존재한다. 생각이 멈춰버리는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그저 있을 따름이며 그때 시간은 사라져버린다. 그대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 때라야, 마음이 창조해낸 과거나 미래로부터 자유로울 때라야, 그대는 이를 경험할 수 있다. 과거란 기억이며 미래란 과거가 투사된 희망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서만 미래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생각은 영감을 통해서 오는 것이며, 영감이란 순간에서 순간으로 그저 존재하는 지금(the now)이 스스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Pure thinking comes through Inspiration which is the expression of the now, moment to moment).
예수께서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래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 순간의 괴로움은 그 순간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Take no heed for the future, sufficient unto the moment is the evil thereof).”
다른 기회에 나는 이런 질문을 했었다: “우리가 지금 이해하고 있는 바의 눈으로 볼 때, 예수의 말들을 포함해서 예언자들의 말들이 어떻게 해서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일까요?”
“그건, 아들아.” 그는 대답했다. “말(words)이 결코 진리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지.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뜻을 죽이는 것은 바로 말이다(It is the word that killeth).’라고 하셨는데, 이는 말이 진리를 가리고 있음을 뜻하고 있단다. 물론 우리는 진리를 향해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단다. 그러나 이성(reason)은, 우리가 침묵의 문(the door of Silence)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멈춰야만 하지. 그리고 침묵의 문이 바로 진리로 들어서는 입구인 것이고.”
“아들아, 네가 알고 있듯이, 소위 성서라 부르는 거룩한 말씀은 사람의 손에 의해 씌어진 것이란다. 이것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이지. 신약성서는 예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고 나서 150년 뒤에 씌어졌지. 십자가형은 그 당시에 사람을 죽이는 수단이었고 말이야. 오늘날 서구 세계에는 사람들을 죽이는 여러 방법들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지. 교수형 밧줄, 단두대, 전기의자, 총, 폭탄, 그밖에 다른 도구 같은 것들 말이야.”
“만약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죽인다면 너는 그를 살인자를 부르지. 그렇지 않니? 그러면 너는 그 살인자를 죽이고. 그런데 그렇게 되면 너도 살인자가 되는 것이 아니겠니?”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방식대로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을 죽임으로써 신에게 봉사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대량 학살은 바로 이런 믿음의 결과로써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야. 사람들의 동의 없이 살인한다면 교수형에 처해지겠지만, 사람들의 동의를 받아 살인을 하면 훈장을 받게 되겠지. 그러나 그것은 똑같은 살인일 뿐이야. 너는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거야. 그렇지 않니? 또한 너는, 신을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죽이라고 내보내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살인을 위해 생산된 무기들을 축복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거야. 그들은, 나와 당신은, 시대에 역행하는 이 야만적인 행위에 어떤 책임도 없다 말하면서 이 모든 것을 신의 탓으로 돌려버리지. 자네들의 성서를 읽는다면, 내가 말한 것이 옳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성서(a Holy Book)라 부르고 있지.”
“어떤 이들은, 이제 시대가 변했다고, 인류(man)는 보다 진보했다고 말하기도 할 거야. 그런데 과연 그런가? 인류는 보다 음흉(subtle)해졌지. 인류는 지난 백 년 동안 죽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서로 죽였지. 그것도 순식간에 이루어졌고 그 결과는 훨씬 더 파괴적이지.”
“오늘날 우리는, 활과 화살 대신 총과 폭탄을 가지게 되었지. 우리는 한 번에 수천 명을 죽일 수 있는 폭탄을 갖게 된 거야. 또 우리는 소이탄(燒夷彈, incendary bombs)을 갖게 되었는데 이 폭탄은 엄청난 화력으로 불에 타는 고통을 느끼게 하지. 그리고 이 고통은 과거에 화살로 입힐 수 있는 그 어떤 고통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느끼게 한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보했다고 말들을 하지. 그렇지. 우리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수단을 발전시켜 온 것이야. 그러나 이것 역시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아닌가?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죽인다 할지라도 살인은 살인일 뿐이야. 그 결과는 달라질 것이 아무 것도 없단다. 무기는 더욱 치명적으로 발전되었고 우리는 그걸 인도적 조치라 부르지. 그러나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것이 보다 인도적인(humane) 조치인가? 이 모든 대량 학살은 바로 너와 나를 가르는 분리 의식 때문에 일어난단다. 국가와 민족을 나누고, 인종을 나누고, 종교를 나누고, 믿음을 나누고, 사상(ideals)을 나누는 분리 의식 말이야. 이상주의자(idealist)야 말로 가장 위험한 사람이란다. 왜냐하면 자신의 일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그는 무자비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 그는 자신에 맞서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게 된단다.”
“오늘날 사람들은 다른 것들보다도 자신들의 이념(ideals) 때문에 서로를 더 많이 죽이고 있다네. 자신들의 이념을 지키려고 사람들은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것이지. 그래서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대량 학살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보다 교회에 다니며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사랑의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해 조정(directed)되고 있는 것이란다. 그들은 진리를 이토록 볼품없이 만들어버렸단다! 그러나 영성이란 모든 것을 감싸 안는 것이야(Spirituality is all-inclusive). 만약 네가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한다면, 너는 결코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loving person)이 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너는 영적으로 될 수도 없는 거야. 그때 너는 모순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지.”
“예언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그대의 신을 사랑하고 그대의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나 신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란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그건 단순히, 그들이 우리와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다른 문화(code), 다른 종교, 다른 민족이나 국가에 속해 있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이념이란 무엇인지, 믿음이란 무엇인지, 민족이나 국가라는 정체성이란 무엇인지, 조직화된 종교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란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성숙하지 못한 마음들이 만들어낸 산물일 뿐이야. 그렇지 않니? 분별 있는 사람(a man of sense)에게는 이 사실이 너무나도 분명하지.”
“열왕기 상권 7장 21절은, 성전의 입구에 솔로몬에 의해서 세워진 두 기둥이 있다고 알려주고 있단다. 오른쪽에 있는 것은 자킨의 기둥(the Pillar of Jakin)이고, 왼쪽에 있는 것은 보아즈의 기둥(the Pillar of Boaz)이라네. 여기서 언급된 성전(the Temple)이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 신께서 몸소 지으신 살아계신 신의 성전을 말하는 것이야. 생명은 몸을 창조하였으며, 생명은 곧 신이란다. 생명 자체이신 그분으로부터 떨어져 살 수 있는 생명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지.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네. ‘영원하신 이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홀로 존재하는 하나(the only One)이며, 나(Me) 이외에 다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아버지께서는 당신 안에 생명을 갖고 계시듯 아들도 자신 안에 생명을 갖도록 허락하신다.’ ”
“자, 그러면 자킨(Jakin)과 보아즈(Boaz)라는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영어에서 ‘J’는 동방에서의 ‘Y’(the Oriental ‘Y’)를 나타내지. 그러므로 자킨(Jakin)은 야킨(Yakin)을 말하는 것이며, 야킨은 ‘하나’라는 뜻이란다. 이는 모든 것들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통일의 원리(the pinciple of unity)를 상징하지.”
“온 우주를 관통하고 있는 보편적 수학적 요소들은 그 하나로부터 펼쳐져 나온 것이며 그것들은 그 하나로 다시 모아져 들어간단다. 이 수학적 요소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생명이 빚어내는 모든 것들을 알아보는 것이란다(The Universal mathematical elements throughout the Universe are evolved from the One and resolve themselves back into One again. This mathematical element is not the living Life but the recognition of what the One Life gives rise to).”
“이제 수학적 요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생명의 요소(vital element)라는 짝이 있어야 할 것인데, 이것이 바로 ‘보아즈(Boaz)’라 부르는 기둥으로서, 이는 목소리라는 뜻이란다. 목소리란 창조주의 생생한 표현인데, 이는 홀로 영만이 목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지(Voice is the Living expression of the Creator, for Spirit alone has Voice). ‘말씀은 시초에서부터 있었고, 그 말씀은 신과 함께 있었고, 신이 곧 그 말씀이었다.’ ”
“이 구절의 의미는 명백하한다. 성전(the Temple)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두 기둥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지. 이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닌, 살아 계신 신의 성전에 있는 조화의 원리를 나타내는 것이지.”
“예수께서 이 성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진리에 무지한 자들은 예수께서 회당(synagogue)을 두고 한 말이라 생각했지만, 예수께서는 살아계신 신의 성전을 가리키신 것이었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돌무더기들을 보고 신의 성전이라 말하지만 말이야. 그들에게는 돌로 지어진 저 건물이 손으로 짓지 않은 마음의 성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겠지. 신에 대한 자신의 관념이 신 그분보다 더 중요하게 되어버린 것이야.”
“교리(dogma)와 신조(creed)는 좁고 편협한 길로서, 우리를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로 이끌게 된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면의 성전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고 계시지. 그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이 아니야. 그 성전 안에서 생명의 모든 신비가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된단다. 참이 아닌 것들, 즉 거짓인 것들을 우리가 알아보기(discern) 시작할 때, 생명의 모든 신비는 언제나 그랬듯이 차례차례 연속적으로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된단다.”
“그 의미는 명확하단다: 신에게 이르는 길은 교회나, 영적 지도자나(gurus), 성직자를 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이신, 하나의 생명으로 녹아들어 하나가 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야. ‘다른 길로 넘어오는 자들은 모두 강도이며 도적이다.’ ”
“이러한 내적 신비가 열리게 되는 것은 자기만족이나 호기심을 더 채우려는 마음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단다. 또한 대부분 사람들이 바라듯 물질적 이익이나 영적인 이익을 채우려는 마음으로도 불가능한 것이고. 사랑과 동질감(Love and compassion)을 느끼는 가운데 우리가 거저 받은 생명을 더욱 나누어주고자 할 때 내적 신비의 문은 열리게 된단다. 그리고 이것은, 마음이 자신이 지어내는 것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스스로 볼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단다.”
“모든 개념 너머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는 목자(the Shepherd)이며, 아버지의 생명은 아들 안에 있는 생명과 같단다. 홀로 살아계신 분은 바로 아버지이시지.”
“문을 지키고 계시는 이는 바로 아버지이시며, 그분께서는 모든 이를 알고 계시지. ‘여기 있는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도 잃어버릴 수 없다.’ 그들은 그분의 목소리(Voice)를 알게 될 것이며 결코 낯선 이를 따라가지 않을 것이란다. 진리를 알고 있는 그들은 분리를 설교하는 이들로부터 몸을 돌릴 것이야. 낯선 이들을 따라가는 자들은 염소들이지.”
“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자는 누구나 다 이방인(stranger)이지. 그렇지 않니? 그러나 신의 그리스도는 모든 영혼 안에 있는 생명(the Livingness)이란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안으로 들어가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자유로워지게 된단다(When this is known, it is possible to go in and out). 안팎을 넘나든다는 말은, 일단 진리가 자신 안에서 드러나게 되면, 사람은 절대적 생명에 대해 상대적 세상 속으로 나아가 신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마련해놓으신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란다. 인류의 구원인 생명나무는 여전히 붙잡고 있으면서 말이지.”
“예수께서는 (이 점에 대해)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지. ‘그래, 이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했던 그 말들은 참으로 그대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성서에 적혀 있기를, “이 사람들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들의 가슴은 나에게서 멀리 있구나. 그들이 나에게 하는 경배는 헛되도다.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다만 사람의 머리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 예수께서 인용한 본문은 이사야 29장 13절이었단다. ‘영원하신 이께서 말씀하신다. “이들은 입으로는 나(Me)를 가까이 하면서도 정작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구나. 그래서 이들의 종교는 웃음거리가 되어버리고, 단순한 예배 형식만 기계적으로 배워 가는구나.”
“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나에게는 이 무리에 속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하며 그들은 내 목소리(내면에 있는 그리스도의 음성)를 들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무리, 하나의 목자가 되게 할 것이다.’ 이 말은, 세상의 모든 국가, 모든 민족들이 마침내 바깥에서부터 안으로 눈을 돌려 모든 이 각자 안에 계신 신의 영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임을 뜻하는 것이란다. 이렇게 해서 (어떤 분리도 없이) 하나의 생명, 하나의 신, 하나의 목자, 하나의 양떼가 있게 되는 것이지.”
“보편적인 생명과 개별적인 생명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란다(The Universal Life and the individual Life are one and the same). 분리란 결코 있을 수 없지. 분리란 사람의 마음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단다. 이 생명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고 있지.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내 안에 계시는 아버지의 영께서 일을 하실 따름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요가인 것이야. 요가(Yoga)라는 말은 묶는다는 것으로써, 사람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즉 오직 하나인 신의 영으로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그러므로 그리스도 요가란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말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는 신의 영으로서 모든 이 안에, 각자 안에 계신단다.”
“자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자아가 움직이는 방식을 이해할 때라야 비로소 사람의 모든 어리석은 행동은 사라지게 된단다. 마음이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 내면의 성전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 창조되지 않는 그 침묵 속에 창조적 이해와 동질감과 사랑이 있게 되는 것이란다(there, in that Silence that is not created, is Creative Understanding, Compassion and Love).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사람들 간에 선의(goodwill)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야. 오직 바른 방법을 통해서만이 바른 행동이 나올 수 있는 것이지. 그릇된 방법은 오로지 공허함과 죽음을 가져올 따름이야. 평화와 사랑은 내면(within)에서 오는 것이지 바깥(without)에서 오는 것이 아니야. 이것들은 사람에 의해 창조되는 것들이 아니란다. 그것들은 사람이 스스로를 이해할 때 즉시 들어서게 되는 것이지.”
이 말로써 그는 말씀을 맺었다. 그의 말씀은 예언자들이 전한 말들이 인간의 구원을 위한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어, 새로운 측면을 알게 하였다.
이 대화 뒤에 고요한 시간이 이어졌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바로 나였다. “그렇습니다.” 나는 말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대량 학살을 조직합니다만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더 많은 살인자들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 자신의 불행과 비참함과 타락과 파멸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대량 학살하는 일에 우리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관계되어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삶에 다른 재난들을 무더기로 들여오게 되는 셈이며, 이는 결코 그칠 줄 모릅니다. 우리는 그릇된 가치들을 선호하고 영원한 가치들을 경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돌아오는 것은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듯, 신의 징벌(the act of God)입니다. 그러나 신의 뜻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입니다. 타인을 정복하려는 욕망,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 권력(power)을 얻으려는 욕망, 자신의 사상을 지키려는 욕망은 계속 확장되기만 할뿐 결코 그칠 줄을 모릅니다. 참으로 눈먼 자가 눈먼 자들을 파멸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성서의 이 말을 인용하여 말했다: “진실히(Truly) 진실히 그대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고 우리가 실제로 본 것들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그러자 그는 이제껏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진실함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오 거룩한 영이시여, 우리에게 당신의 현존을 가리고 있던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오직 사랑으로써만 우리는 거짓된 것들을 알아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여, 이제 모든 두려움과 미움과 다툼은 자아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이제 우리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하는 모든 어리석음과 잔인함을 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로지 당신 안에 머물 것이며, 이제 우리의 모든 행동은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당신의 현존만이 우리의 기쁨이며, 당신의 현존 안에서 모든 내적인 빈곤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당신의 가슴 안에서 우리는 사랑하나이다. 오 거룩하신 가슴이여.”
“당신의 사랑, 우리의 사랑, 오 거룩한 사랑이여.”
* * * * *
그의 몸과 얼굴은, 사람의 머리를 넘어선 신의 사랑과 영광스러운 빛으로 빛났다. 그의 말씀은, 사랑이라는 옷에 달려 있는 굉장히 아름다운 진주와도 같았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친구이다(He was indeed a friend to the whole world).
8장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는 내 친구에게 말했다: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말에 담긴 뜻을 가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높은 영적인 이해에 도달한 사람들만이 그 숨겨진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렇단다.” 그도 동의를 하였다. “지금까지는 그런 방식으로 죽 전해져 왔지.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의 말을 돌려 말하지 말고(without veiling our words)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한단다. 거짓된 모든 것들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야 할 때가 온 것이지. 이렇게 해야 거짓인 것들을 이해할 수 있고, 그것들이 사라질 수 있단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불행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게 된단다. 어떤 경우에라도 너는 말의 뜻을 일부러 가리거나 진리에 대한 관념을 만들지 말아야 해: 너는 거짓된 것들을 밝혀 드러내야 한단다(reveal). 거짓된 모든 것들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을 때, 그때 진리는 그저 있게 된단다. 왜냐하면 진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저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지.”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이란 더욱 더 자세하게 마음을 탐구하는 일이라네.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사람 마음의 모든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야. 사람의 마음이 오늘날 세상에 있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거든. 우리는, 이제껏 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거짓(the false)을 이해해야(see) 한단다.”
나는 그날 아침에 그가 했던 말로부터 이제껏 우리가 해왔던 공부보다 훨씬 더 강도 높게 공부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고, 과연 그러했다. 남은 기간 동안 나는 더욱 더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설명하고 있는 요점들을 놓치게 되었을 것이다.
내 마음은 명료해졌고 민첩하게 깨어 움직이고 있었으며, 스스로도 이를 자각(aware)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말하는 것들의 더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그는 말을 시작하였다:
“오늘 우리가 다룰 주제는 기억인데, 왜냐하면 나는 네가 기억의 의미를 철저하게 이해하길 바라기 때문이지. 기억이 바로 그토록 많은 갈등의 원인이란다.”
“네가, 특정한 과학 분야와 관련되어 있는 기술적(technical) 지식을 배우는(acquire) 경우를 언급할 때에는, 앞으로 그것을 사실적 기억(factual memory)이라 부르겠네. 이런 사실적 기억이 없다면, 사람들은(you) 다리라든가, 기차의 엔진이라든가, 자동차라든가, 집과 같은 특정한 어떤 것을 만들어낼 수 없을 거야. 이런 종류의 기억은 사람들을 유쾌하게 하거나 불쾌하게 만드는 종류의 기억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지.”
“만약에 어떤 이가 너에게 뭔가 언짢은(unpleasant) 내용을 말했다 가정해 보자. 다른 누군가는 너에게 뭔가 듣기 좋은(pleasant) 내용을 이야기했고 말이야. 그러면 너는 스스로의 반응에 사로잡히게 되지. 그때 네가 보이는 반응은 다시 기억이 되어버리고 말이야. 다음번에 너에게 언짢은 말을 했던 사람을 만나게 되면, 너는 그 때의 불쾌했던 기억을 갖고 그를 만나게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가? 그러면 그 순간 자네가 느끼게 될 감정(feeling)은 지난날의 기억에 대한 반응이 될 것이고 말이야. 아마도 너는 분노를 느끼게 될 것이지. 또한 너는 듣기 좋은 말을 했던 사람을 만날 때에도 지난날의 기억을 가지고 만나게 될 것이야. 그러나 이때 너의 반응은 상당히 달라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둘 다 기억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란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이것을 심리적 기억(psychological memory)라 부르자꾸나.”
“우리에게는 이처럼 두 가지 종류의 기억이 있단다. 하나는 사실적 기억 또는 사실에 대한 기억이라 부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심리적 기억으로서, 우리는 이 기억 안에서 틀에 박힌(definite) 반응을 하게 되는데 이 반응 역시 기억에 지나지 않아. 만약 네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면, 자신이 유쾌한 기억들은 계속 붙잡으려 하고 불쾌한 기억들은 떨쳐내려고 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야. 이런 식의 반응은 항상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거야. 높은 수준이든 낮은 수준이든 가릴 것 없이, 마음은 곧 기억이며 기억은 곧 마음이며, (마음-기억은) 실재 안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네가 깨닫게 될 때까지 말이야.”
“이제 너는, 심리적 기억이든 사실적 기억이든 가릴 것 없이, 기억-마음은 과거의 결과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단다. 기억-마음의 기초는 과거이며, 과거는 현재를 규정짓고(conditioned) 있는 상태란다. 너는 이제 이 점을 이해하게 되었지. 그렇지 않니?”
“이제 우리 이 사실을 매우 주의 깊게 살펴보도록(look into) 하자꾸나. 우리는 새로운 지금을 만날 때 오래된 것, 즉 기억에 반응하면서 만나고 있단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던가?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그것은 새로운 그것(the new)이 아닌 게 되어버리고, 과거에 의해 조건 지워져 오래된 것(the old)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시시각각 우리에게 오는 도전은 항상 새로운 것이란다. 그러나 새로운 그것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그것은 오래된 것에 의해 제한을 받게 된단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새로운 그것은 결코 철저하게 깨달을 수 없게 되어버리지. 왜냐하면 너는 새로운 그것을 오래된 것의 반응으로 만나게 되고, 이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그것을 오래된 것으로 만들어 버려 오래된 것들에 하나를 더하게 될 따름인 것이지. 이렇게 해서 너는 결코, 새로운 그것을 자유롭게 깨달을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지. 왜냐하면 너의 경험은 과거에 의해, 오래된 것들에 의해 틀에 집어넣어지고 있기 때문이지.”
“이제 네 마음을 들여다본다면, 너는 자신이 새로운 그것을 어떻게 만나는지 알게(see) 될 것이야. 만약 자신의 마음이 종교적 편견이나, 국가주의, 민족주의, 사상들로 묶여있다면, 결코 새로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단다. 왜냐하면 오래된 것들이 이해를 가로막는 장벽으로 서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기억이라는 장벽은 새로운 지금에 반응하면서 계속해서 스스로를 강화하고 있단다. 너도 곧 알게 되겠지만, 이 모든 것들은 불완전한 경험이야. 그러므로 이 불완전한 경험은 언제나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라 너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지. 이것이 바로, 어떤 하나의 생각(one idea)에 집중하고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다른 모든 생각들을 억압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지.”
“그렇다면 이 불완전한 경험은 왜 자신을 괴롭히게 되는 것인가? 왜냐하면 불완전한 경험이 곧 기억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기억이란 마음에 새겨진 인상인 것이고. 그러나 만약 네가 사태(matter)의 모든 진실을 이해하게 된다면, 진리란 결코 기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see) 될 것이란다. 왜냐하면 진리란 마음 너머에 있기 때문이지.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을 때라야 비로소 너는 완전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란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을 왜곡하지 않고 참되게 알아보기(true discernment) 때문인 것이지.”
“만약 자신의 기억이 새로운 것을 만나는 데 있어서 해석의 틀로써(as a guide) 사용된다면, 새로운 그것은 곧 오래된 것으로 되어버릴 것임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란다. 그렇지 않겠니? 네가 오래된 그것들, 즉 기억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때, 너는 그 기억을 유지하기를 원하게 되지. 그렇지 않니? 사실상 너는 그 기억을 계속해서 갖고(retain) 있을 수밖에 없을 거야. 어떤 무엇인가에 대한 진리를 완전히 볼(see) 때에만 비로소 그것에 대한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는 알게 될 것이야.”
“자, 이제 우리가 기억을 어떤 식으로 계속해서 키우고(cultivate) 있는지를 살펴보자꾸나. 너는 주문(mantrims)을 되풀이해서 말하고, 책을 읽고, 종교적 믿음과 사상과 자신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다른 모든 쓰레기 같은 지식들을 갖고 있지. 자, 그러면 새로운 것을 만날 때 어떻게 되겠는가? 너는 오래된 기억들로써 새로운 지금을 만나고 있는 것이야! 이제 기억이 새로운 지금보다 더 중요하게 되어버린 것이지. 그렇지 않니?”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내 혀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변혁(transformation)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 순간 나는 전에는 결코 깨닫지 못했던 무엇을 이해하고 있었다. 마음이 곧 내 자아라는 것과, 내가 바로 환상의 유일한 창조자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마음과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이 보다 명확하게 이해되었다.
“자(Now),”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어릴 때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고, 늙었을 때에는 과거 속에 살게 되지!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그건 매우 단순하단다. 우리가 지금을, 현재 속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인 것이지. 미래를 더욱 중요한 것으로 여길 때 우리는 현재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단다. 이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게 될 때, 너의 자아-내 자아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들어서게 된단다(there is a complete understanding of yourself-myself). 그리고 내 자아를, 즉 내가 지금 정확히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기억이 필요하지 않단다. 기억이란 무엇인지를 내가 알고 있을 때라야 자신이 기억에 부여한 중요성은 사라져버리게 된단다.”
“만약 네가 주의 깊게 지켜본다면(watch carefully) 새로운 생각, 새로운 느낌은 오직 마음이 기억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에만 찾아온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거란다.”
“너에게 어떤 기억도 없다면, 자신이 소유한 것들, 자신의 믿음, 자신의 종교, 자신의 민족성 등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단다. 그러므로 기억이란 자아를 강화시킬 따름이고, 자아가 바로 갈등의 원인이지. 그렇기 때문에 너는 반드시 기억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야. 그리고 네가 기억을 이해할 때 기억의 중요성(significance)은 사라져 버리지.”
“그러나 만약 네가 기억이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창조하고 있다는 것과 기억이 오늘과 내일의 형태를 빚어가고(shape)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면, 현재와 미래 속으로 자신을 투사되고 있는 것은 바로 과거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야. 왜냐하면 살아있는 현재가 아직 자신 안에서 깨달아지지 못했기 때문이지(because the living Present is not realized).”
“과거를 통해서, 기억을 통해서 영원한 그것(the Eternal), 알려지지 않은 그것을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것일까? 그런데 이게 바로 소위 진리를 공부한다고 하는 사람들(Truth students)이 계속해서 하고자 시도하고 있는 일이란다. 그들은 기억을 통해서 실재를 알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들이 늘 뭔가를 찾고는 있지만 결코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란다(THEY ARE TRYING TO KNOW REALITY THROUGH MEMORY, AND THAT IS WHY THEY ARE EVER-SEARCHING BUT NEVER-FINDING). 네가 해야 할 일이란, 바로 이런 식으로 자아 곧 기억을 투사하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밝혀 드러내는 것이란다. 또한 이런 식으로 기억을 투사하는 것을 사람들을 실재라 가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기억일 뿐이라는 것을 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란다.”
“실재(the Real)가 들어설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the me) 즉 기억이 존재하기를 그쳤을 때라야 가능하단다. 기억을 통해서는 결코 실재를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너는 이러한 심리적 기억이 자아를 유지시키고 있다는 것과 자아가 곧 실재가 나타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야. 이 진실을 네가 이해하게 될 때, 거짓된 것들은 떨어져 나간단다.”
“그렇지, 기억은 삶을 무미건조하고 공허하게 만들어 버리지. 바로 기억 때문에 우리는 갈등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거든. 이제 너는, 심리적 기억이 실재를 깨닫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과, 반면 사실에 대한 기억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만약 사실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 대화조차 할 수 없을 것이야.”
“예.” 나는 말했다. “이제야 기억이 무엇인지, 그리고 기억은 무엇을 위해 있는지를 제가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기억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새로운 그것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그것이 언제나 새롭기 위해서는, 어제의 기억을 통해서 반응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그는 대답했다. “이것을 이해하고 나면, 실재 곧 지혜(Wisdom)는 네 안에서, 네 주위에서 일을 하게 될 것이야.”
“너는 자신에게 영적인 동반자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네가 영적인 동반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그저 영적인 동반자에 대한 개념에 지나지 않아. 네가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을 때, 너는 그 개념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니? 이것이 자유이며, 자유 안에서 실재가 존재하는 것이야. 이 말을 이해하겠니?”
“예.” 나는 대답했다. “이제 정말로 이해했습니다(I do understand now).”
이 말이 끝나자 그는 그의 법복(robes)을 걷어들고는 가버렸다. 홀로 남아서 이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도록 나를 두고 자리를 피해주신 것이다.
* * * * *
내 마음은 기억의 오래된 상처들을 놓아 버리고 있었다. 스스로를 중요하게 여기며 환상에 사로잡혀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았었다. 내 앞에서 기억이 계속해서 떠올랐으며 이제 나는 생각의 모든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불완전했던 모든 경험들은 이제 완전하게 이해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 자신(my self)이 바로 갈등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모든 기억들은 사라져가고 있었으며 기억 스스로의 중요성은 이제 없어졌다. 나는 기억들에 달라붙지 않고 그것들을 하릴없이(impersonally) 바라보았으며, 그것들을 두려워하거나 분노하거나 비난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나라는 것을 이루고 있던 것들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나 자신(what I was)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그 순간 나는 자유로워졌다. 내가, 곧 내 자아가 바로 모든 문제의 원인이었다. 그동안 내가 보인 반응들은 나를 규정짓고 있는 틀(conditioning)을 보호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틀은 결코 실재가 될 수 없었는데도 말이다. 실재에는 반응이라는 것이 없다. 오직 자아만이 반응을 했을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나는 내 자아를 이해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자아를 밝혀내는 것(self-revealing)이 곧 자유였다. 기억, 생각, 과거, 미래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내 자아였으며, 나는 그것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saw) 되었다. 나 자신이 기억, 생각, 반응들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모든 두려움, 미움, 허영심, 질투를 놓아 버렸으며(lost) 더 이상 판단하지도 비난하지도 않게 되었다. 기억, 생각, 반응 이러한 모든 것들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었으며, 기억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스스로 실재하고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제야 나는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그가 무엇을 뜻하였는지 알게 되었다: “비난받지 않으려거든 비난하지 말라.” 그때 이 모든 조건-기억-생각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것은 실재가 아니었으며, 스스로 만들어 낸 것들에 묶여있는 것은 바로 자아였다.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가 역시 자아를 이해함으로써 오는 자유를 느낄 수 있는지 궁금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변혁은 일어나게 되는 것이며 실재가 아무런 제한 없이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실재가 일하는 영역은 참으로 거대하다(great is Its operation).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순간에서 순간으로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현재(the Living Present)로서 그 어떤 제한(conditioning)도 없을 때 그저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때 이렇게 현재 속에서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요가이다.
* * * * *
점심시간을 알리는 징(gong)이 울리고 나서야 나는 이 세상의 시간으로 돌아왔으며 그때가 점심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너무나도 생생했던 영원에 대한 느낌이 나에게 남아 있다.
그동안 내 친구는 마을에 내려가 있었으며 나는 그를 마을 회관(hall)에서 만났다. 그는 내 어깨 위로 팔을 두르고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얼굴을 볼 때마다 변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보이는구나.”
그리고 그는 또 말했다: “너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하겠네. 노르부(Norbu)와 그녀의 가족이 축제에 갔다가 마을로 다시 돌아왔고, 그들은 다시 자네를 만나기를 몹시 열망하고 있다네. 노르부는 참으로 아름답지. 나는, 네가 그녀 안에 잠들어 있던 사랑을 깨운 거라고 생각하네. 그 사랑은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이며 반드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이지(a love that is of the heart and must be understand). 그녀가 오늘 너에 대해 말할 때 그녀의 눈 속에서 나는 그것을 읽었단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나는 너에게 미리 주의를 주고 싶단다. 너에게는 자석과도 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힘이 있기 때문이란다(because you have magnetic power).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치유자(healer)가 될 수 없었을 테니까. 자! 노르부가 나에게 부탁을 했는데, 그녀가 이리로 와서 집안일을 하면서 네 빨래도 하고, 네가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이것저것을 도울 수 있겠냐고 물어봤단다. 나는 거절하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아낌없이 하는 봉사(the gift of service)를 거절하지 않기 때문이지. 조건 없는 봉사를 통해서 사랑이 들어서게 되기 때문이지.”
나는 대답했다: “스승님(you)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완전히 이해했습니다. 저도 전에 조건 없이 봉사하는 가운데 사랑이 안에서 움터 나오는 것을 경험하였고, 이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압니다.”
“그렇단다.” 그는 말했다. “참된 사랑은 가슴으로부터 나오지(true love is of the heart). 머리(mind)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말이야. 사랑은 생각이 아니야. 사랑을 그보다 훨씬 깊은 것이고 훨씬 심오하지. 사랑이 없다면, 삶(Life)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이 세계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슬픔이지. 그들은 나이는 먹지만 미숙한 채로 남아 있단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읽고 이야기하지만 생명(Life)의 진정한 향기를 결코 경험해 본 적이 없단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가슴의 온기가 빠져 있는 것이지. 사랑의 본질(the quality of Love)이 없다면, 우리가 뜻한 일들을 하려고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단다.”
“생각으로만 순수해지려 애를 쓸수록 불순해질 수밖에 없단다(The struggle to be chaste in thought is to be unchaste). 왜냐하면 거기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지.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고귀해지고 순수해지며 결코 부패하지 않는 것이란다(To truly Love is to be chaste, pure, incorruptible). 머리(logic)로써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이지. 또 종교를 통해 문제에 접근하는 것도 유치하고 어리석은 일이고. 육체적인 힘이나(glandular action) 문제를 금기로 봉해버리는 등의 행위로 상황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시도는, 자신을 둘러싼 서로 간의 관계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야. 우리의 관계 속에서 생각-느낌-반응의 일련의 과정을 자각하는(aware of) 것이야말로 자아를 밝혀 드러내는 과정인 것이며, 자아를 드러내는 과정 안에 실재가 존재하는 것이란다.”
“우리 자신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통해서만 우리는 자아를 넘어선 그것에 이를 수 있단다. 우리는 사랑을 창조하지 못하지. 자아가 스스로를 밝혀 드러내는 과정에서 죽어야만 사랑은 들어서게 되는 것이지.”
* * * * *
내 친구는 보면 볼수록,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그에게 엄청난 지혜와 이해력이 있다는 것을 더욱 알아보게 되었다. 심지어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아도 나는 그와 함께 있을 때 자아를 넘어선, 마음을 넘어선 그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마음 안에 있는 것들은 말로 담아낼 수 있지만 마음을 넘어서 있는 그것은 결코 말로 담아낼 수 없다. 그것은 다만 경험될 수 있을 뿐이다.
9장
오후에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즈음해서 노르부는 도착했다. 그녀는, 계곡에서 자라는 중국 양귀비를 머리에 꽂고 있었다. 그녀는 참으로 진귀한 그림과도 같았다. 그녀는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우리에게 말하는 방식의 자연스러움에 나는 놀랐었다. 전에 내가 이성 앞에 있을 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자유로움이 그녀에게 있었으며, 그리고 나는 그녀가 그 자유를 습득했는지(acquire)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되기까지 내 친구가 많은 것을 안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려움 없이 진솔하게 내 눈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넓고 활짝 열려 있는 파란 두 눈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의 마음은 기억이 지어내는 환상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둘 사이에 불편한 느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완벽한 억양과 함께 영어를 훌륭하게 구사했으며, 그녀는 이야기할 때 예쁘게 생긴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치아를 내보이며 매력적인 웃음을 지어보이곤 했고 그때 그녀의 얼굴은 환하게 빛났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자유로움으로 한껏 고양된 그녀의 인품(personality)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은 참으로 아름다워요. 노르부.” 그러나 내가 말한 내용이 어떤 식으로든지 그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은 없었다.
그때 그녀는 말했다: “제가 이 집에 와서 당신을 돕고 싶은데, 허락해 주실래요?”
“당신이 이 집에 있어준다면 정말 좋지요. 노르부.” 나는 말했다. “그런데 제가 할 일이 많아서, 제가 당신과 함께 있고 싶은 만큼의 모든 시간 동안 함께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죠.”
“저는 열두 살 때부터 제 스승님(Master)께 가르침을 받아왔는걸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은혜에 감사하다는 얼굴로 내 친구를 쳐다보았다.
“예.” 나는 말했다. “저 역시 그분에게 상당히 많은 빚을 지고 있는걸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지요. 하나만 말하자면, 자아를 이해하는 것을 배우고 있어요. 어리석은 자아에 대해서 말이지요. 이제는 뻥하고 터져버렸지만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자 우리는 모두 가슴으로부터 웃었다. 우리 모두 자아가 어떻게 소멸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셋 사이에는 어떤 긴장감도 없었으며, 거기서 나는 진정한 관계가 정녕 어떠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사랑이 없다면 관계맺음(relationship)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껏 그 어떤 가정에서 본 그 누구보다 노르부는 일을 척척 잘 해냈다. 날마다 그녀는 계곡에서 가져온 야생화들로 탁자를 장식했다. 그녀는 모든 방면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잘 챙겨주었으며 그녀가 쓸 수 있는 제한된 음식 재료들로 맛있는 음식을 요리해서 내놓았다. 그녀는 내 옷과 양말과 셔츠까지도 맡아서 빨아주었다. 그녀는 우리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모든 일을 해주었다.
어느 날 나는 말했다: “노르부, 당신은 지금 나를 완전히 망쳐놓고 있어요. 지금 당신이 나를 위해 하고 있는 그 모든 일들 때문에 앞으로 나는 그 누구의 도움을 받아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에요.” 내가 이 말을 하자 그녀의 얼굴은 기쁨에 차 환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전보다도 더 예뻐 보였다. 사실상 내가 거기에 머물고 있는 동안 그녀는 날마다 아름다워졌으며 이 사실을 그녀에게도 말해 주었다.
우리가 공부를 하고 있지 않는 저녁이 되면 그녀는 기타를 치며 높은 목소리로 부드럽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인도와 티베트 노래를 불러주었다.
할리우드에 영화 제작자로 있는 내 친구에게 그녀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녀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그녀를 할리우드로 데려와 영화를 찍고 싶어 했다. 내가 그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히말라야를 그는 마음에 품었지만, 나는 그녀를 데려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어느 날 저녁에 우리는 바깥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나는 노르부에게 말했다. “내가 온 바깥세상은 현학적이고 위선적인 사람들로 넘쳐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에서는 친절한 척 행동하지만, 등 뒤에서는 험담을 하지요. 사실상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선적이고, 꽤나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러 저러한 틀에 갇혀 있어요.”
“그래요, 노르부. 그 사람들은 멀리서 당신을 볼 때에는 사랑해줄 것이에요. 왜냐하면 당신은 너무나 아름다워 미의 상징이라 할 만 하니까요(because to them you would be a symbol, ideal). 그러나 당신이 그들 가운데 지내게 되면 그들은 험담을 하고 질투하게 될 거에요. 그러나 그들이 당신에게 부여한 이미지(symbol)는 어느 한 순간에 끝나 버릴 것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의 문제로부터 회피할 또 다른 이미지를 찾아 나서게 될 거에요. 그들의 마음은 관념으로 꽉 차 있지만 가슴은 텅 비어 있어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바로 가슴 안에 있는 것인데 말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되고 싶어 하는 관념에 매달리고 있어요. 그러나 정작 실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보기는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관념은 멋진 탈출구가 되기는 하지만 자유를 결코 가져달 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들이 실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게 될 때, 그들이 거짓된 상태는 떨어져 나갈 것이고, 창조되지 않은 실재가 들어서게 될 것이에요. 자신의 생각-느낌-반응의 모든 과정을 식별해(discern)내는 사람은 거의 없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보기보다 스스로 만들어낸 관념 뒤로 숨으려고 할 거에요. 그러나 자기 자신을 보고 이해하는 것을 통해서만 자유와 아름다움과 사랑은 존재하게 되지요. 이러한 것들은 만들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항상 현재에 머물고 영원하며, 거짓된 것들이 떨어져 나갔을 때 들어서게 되는 것이지요.”
그때 나는, 진리에 관해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와 여자는 모든 면에서 동등하며, 진리를 가리고 있는 것을 자각하는(awareness) 정도에 따라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진리를 가리고 있는 것이란 바로 자아이다.
노르부가 우리의 작업에 있어서 방해가 되었다고 생각한 적은 결코 없으며, 오히려 그녀는 나에게 있어 귀한 보물 같았고 나는 그녀가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지혜를 얻었다. 그녀의 행동은, 의식의 검열을 거치지 않은 자연스러운 생각(unconscious thinking)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아의 속박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졌기에 그것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한 시도조차 결코 하지 않았고 다만 언제라도 거리낌 없이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스스로를 아낌없이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유로웠기에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었다. 나는 그녀가 마음의 이원성(in opposites) 속에서 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인생의 동반자로서 그녀보다 더 완벽한 사람을 찾기란 어려울 듯했다.
우리와 함께 지내는 동안 그녀는 기쁘고 행복하게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때때로 그녀는 우리의 토론에 참여하곤 하였는데, 그녀의 말 속에서 배어 나오는 지혜와 이해를 보고 나는 놀랐다.
어느 날 내 친구는 노르부 없이 우리 둘만 남아 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이곳을 떠나게 될 때 네가 느끼는 것보다 노르부는 훨씬 더 자네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란다. 너란 사람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들어가 어느새 자리 잡고 있지.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라도, 나 역시 자네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야. 네가 몸을 입고 이곳에 온 이후로 너는 만났던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단다.”
“여기,” 그는 말했다. “오크 수도원장의 편지란다. 다른 편지들은 하나는 게쉬 림포체로부터, 다른 하나는 퉁 라(Tung La)로부터 온 것이지. 그들 모두 자네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거기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는 것을 알 수 있단다.”
“네.” 나는 말했다. “저 역시 스승님과 그분들 모두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도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이별의 아픔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이별을 생각하기만 하면 가슴 깊이 저려 옵니다. 사실 저는 종종 제 자신에게 묻곤 합니다. 나의 진정한 친구들이 있는 이곳을 내가 왜 떠나야 하는 거지? 그러나 스승님(you)께서 뭐라 말씀하실지 알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단다. 내 아들아. 나도 네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알고 있단다. 그러나 우리 역시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여기에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이 많듯이 네가 온 세상으로 돌아가 해야 할 일도 많단다. 그래서 너를 여기에 둘 수 없는 것이지.”
그 순간 나에게 부어주시는 그분들의 무한한 신뢰를 받기에 나 자신은 참으로 보잘것없다고 느꼈다. 그 순간 내 자신이 저 수평선에 떠다니는 작은 한 점과도 같이 작게 느껴졌다. 그때 내 친구가 다시 말을 했다. 내 생각을 읽었음에 틀림없으리라.
“기억해라.” 그는 말했다. “자아는 아무 것도 아니야. 참으로 일을 하시는 분은 바로 영(the Spirit)이시란다. 자아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 그것은 오히려 장해물이 될 때가 더 많지. 이 사실을 깨닫고 나면 자아는 영께서 일하시는 것을 방해하지 않게 된단다.”
그 말을 듣자마다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 순간 내가 이 모든 감정과 내 일들을 다루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자유로워졌다(I was no longer responsible). 이 일 뒤에는 훨씬 더 거대한 힘이 뒷받치고 있었으며 내가 자아를 벗겨낼수록 더욱 더 큰 힘이 따라붙게 되는 것이었다. 두려움은 나에게서 떠나갔으며 나 자신을 하찮게 보는 느낌도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가 오래 전에 나의 자아의 껍질을 벗겨주었을 때의 나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두려움이란 자아가 있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Only when the self is in evidence is there fear). 그때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그도 내 얼굴을 보면서 이해하고 있었다.
그날 밤 노르부가 우리에게 왔고, 우리는 그녀가 리자 지방까지 갔다고 돌아온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거의 자정까지 앉아 있었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서 기뻐요. 숱한 종교 물품들(paraphernalia) 과 종교 예식에 둘려 쌓여 있다 보니 자신감을 모두 잃어버리는 듯 했거든요.”
“그렇단다. 노르부.” 내 친구는 말했다. “두 가지 종류의 자신감(confidence)이 있단다. 하나는 사람이 기술자로서 어떤 기술을 숙달했을 때 느끼는 자신감이란다. 너도 알게 될 테지만, 이런 자신감은 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아. 그리고 이와는 다른 종류의 자신감도 있는데, 이 자신감은, 마음의 활동적인 영역 또는 의식적인 영역, 그리고 잠재되어 있는 영역 또는 무의식적인 영역 모두에 걸쳐 자기 자신을 알게 될 때 나오는 것이란다. 마음이 활동하고 있는 표면적인 영역과 잠재되어 있는 영역 전체를 다 이해하게 되면, 감이란 자신감이 있게 된단다. 그 자신감은, 독단적이지도(self-assertive), 약삭빠르지도(shrewd) 않으며, 또한 뭔가를 성취했다는 기억에서 나오는 자신감도 아니야. 그 자신감은 사물을 실제 있는 그대로 보게 될 때 나오는 것이란다.”
“자기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든지, 자신은 대단한 사람이라든가 뭔가를 성취할 수 있을 거라는 등의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자신감은 그 안에 두려움도 반드시 있기 마련이지. 그러나 종교의 예식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이해하고 나면, 자신이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사물과의 관계, 관념과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고, 그 이해가 모든 권위로부터 너를 자유롭게 할 거야. 그렇게 되면 스승도 제자도 존재하지 않으며, 강단에 앉아 있는 구루도, 저 아래에 앉아 있는 입문자(chela)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네. 이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너는 모든 시간 감각과 권위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야.”
“이런 자신감은 사랑과 애정으로 충만하단다(pregnant with). 그리고 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때에는 높음도 낮음도 존재하지 않아. 사랑은 그 자체로 영원함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
“사랑과 친절과 관대함과 자비가 있는 존재의 상태 속에서는 내적 평온함이 자리를 잡게 되지. 존재의 이런 상태가 바로 아름다움의 본질(the essence of beauty)이지. 이러한 가치들이 없이, 스스로를 종교 예복이나 종교 물품들(paraphernalia) 따위로 치장한다면 결과적으로 감각의 가치만 강조하게 되어 버리지. 높고 낮음의 환상, 갈등과 분열로 이끄는 감각의 가치로 말이야.”
“그리스도 또는 붓다의 자신감이란 신속하고 유연하게 움직이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란다. 이 자심감이 특권을 받은 소수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야. 다만 하나의 생명이 있을 따름이고, 그 생명은, 생명이 일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들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라 할지라도 그 사람 안에서 충만하게 일하게 될 것이야.”
그때 나는 노르부가 어떻게 이해로부터 나오는 자유로움을 얻었는지, 그리고 그녀가 그 순간 뿜어내고 있던 존재의 향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말했다.: “지혜의 샘과 같은 이런 분이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당신도 알 거에요. 노르부.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되요. 우리도 언제나 당신을 우리 곁에 두고 싶은 걸요.”
내 친구는 그녀를 쳐다보고는 딱 한 마디로 이야기했다. “노르부.”
그러자 정적이 흘렀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몸을 넘어선 조화로운 사랑의 느낌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침묵을 깨고 말을 했다: “어디에도 분리란 존재하지 않아요. 노르부. 영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함께 묶여 있는 걸요. 언제나 지속되며 결코 끊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강력한 사슬에 묶여 있는 진주들과 같이 말이지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으며 그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솟아올랐다: “저도 알아요. 제가 잠시 당신을 소유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소유하려는 마음이 사라졌어요. 왜냐하면 분리란 마음 안에서만 존재할 뿐, 가슴 안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러자 내 친구는 말했다: “저녁을 차리는 것이 어떻겠니. 노르부. 저녁을 들고 나서 우리는 좀 쉬어야겠구나. 이제 거의 자정이 다 됐고 너도 좀 피곤해 보이는구나.”
그러자 노르부는 차가운 구운 닭고기와 버터를 발라 찐 감자로 맛있는 식사를 내왔다. 그리고 우리 모두 자정 식사를 맛있게 들었다.
다음날 아침 그곳에는 즐거운 기운이 가득했다. 셋 다 모두 즐거움에 가득 차 있었다. 밤 동안 잔 잠이 기적을 이뤄낸 듯 했다. 나는 노르부가 즐거운 티베트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무슨 노래인지 물어보았고, 그녀는 대답했다. “이건 제가 직접 지은 노래에요.”
“그 노래 가사를 영어로 말해줄래요, 노르부?”라고 나는 물었다. 그녀는 (활짝) 웃더니 아침 식사를 차리러 주방에 들어갔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난 후 내 친구는 나에게 말했다. “오늘 우리는 계곡으로 올라갈 걸세. 보다 자세하게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는데, 오늘 나눌 이야기들이 너의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야.”
그래서 우리는 계곡으로 올라갔으며 이끼로 덮여 있는 바위 위에 앉았다. 우리 발 주변으로는 온통 야생화와 야생 양귀비와 야생 장군풀이 있었고, 우리 주변으로는 철쭉나무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이토록 위대한 현자의 말씀을 듣기에 참으로 적합한 장소였다.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는 다음과 같은 말들로 말문을 열었다: “나는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있는 형제들 중 하나에게 한 만큼, 가장 미천한 이에게 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고, 나는 네가 이 말의 참된 의미를 자네의 일상생활에서 살펴보길 바란다. 이를 관찰할 때 참된 행복이 들어서기 때문이지.”
“이 위대한 진리를 사람들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분리와 관념과 믿음으로 묶여 있거든. 그리고 이런 것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떨어뜨려 놓게 되지.”
“신과 인간과 우주가 하나라는 관념을 믿는다고 해도 그 관념이 진리를 드러내 보이지는 못하지. 사실상 그것은 그저 자네가 습득한(acquire) 정신적 이미지에 지나지 않아.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본 모습을 피해 달아난 도피처일 뿐이고. 그리고 이런 관념이 실재를 보지 못하게 자네의 눈을 가리고 있다네. 그러나 이것이 그저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자네가 알아보게 된다면, 너는 그 너머로 가서 그 관념이 가리키고 있는 진리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네.”
“자신을 주의 깊게 살피다 보면, 자신의 생각이란 자신을 묶고 있는 특수한 조건(conditioning)이 표현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네. 그리고 자신을 묶고 있는 조건이 없다면 생각이란 존재할 수 없단다. 자신이 무엇인지에 따라 자신의 생각도 그것을 닮아 있는 거란다(According to what you are, so is your thought). 만약 자신이 사회주의자라면 너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겠지. 네가 만약 자본주의자라면 그런 식으로 생각하겠고. 프로테스탄트 신자이든, 힌두교 신자든, 가톨릭 신자든 간에 너의 생각은 자신의 믿음에 따라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 네가 이제껏 축적한 모든 지식과 배운 것들이 기억으로 저장되는 것이고, 이런 조건들을 통해서 자네의 생각이 형성되는 것이란다.”
“이러한 조건들을, 이것들이 곧 자기 자신인데, 이러한 조건들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네가 무엇을 생각하든 무엇을 행동하든 그것은 그 조건들을 바탕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란다. 너는 이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그렇지 않니? 그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기만 하면 된단다. 그러면 너는 그들이 스스로의 조건에 묶여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야. 이와 같은 방식으로 너는 자기 자신을 살펴볼(see) 수 있단다. 자신 안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 스스로를 묶게 된 이 조건화(conditioning)가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반드시 철저하게 이해해야 한단다. 이 조건화의 과정을 이해하게 되면, 거기에는 자아에 대한 이해와, 자아가 조건들에 어떻게 휩싸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해가 들어서게 된단다. 이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하릴없이(impersonally) 볼 수 있다면, 자유가 있게 되고, 그 자유 안에 다른 어떤 형태의 제약(condition)도 아닌 실재가 들어서게 되지.”
“대부분 사람들은 책을 통해서 지혜를 찾고 있단다. 그들은, 자신이 뭔가를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소위 전문가들을 따름으로써 생명(Life)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그러나 자신이 뭔가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알고 있지 못하다네. 어떤 이들은 철학 모임에 가입하거나 종교 단체에 들어간다네. 그런 식으로 끊임없는 탐구(search)가 계속해서 반복되지. 그런데 분명하게 이야기하건데, 이런 식으로는 이해와 지혜를 결코 발견할 수 없지.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은 모방일 뿐이고, 누군가를 따라하는 것은 이해가 아니기 때문이지. 어떤 관념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이해가 아니야.”
“나라고 규정짓고 있는 것들을 강화시키는 것들(that which confirms your conditioning)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받아들이거나, 자신의 의견과 상충되는 것들을 만났을 때 스스로를 닫아버린다면, 이해란 존재할 수 없단다. 어떤 이들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의 생각을 또 다른 것으로 바꾸거나 변화시키는 것에 불과하지.”
“네 생각이 일어나는 그곳부터 바라보기 시작할 때 변혁이 일어나게 된단다. 그러면 자아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있게 되는 것이고. 자아란 자네를 묶고 있는 조건들이고, 자아란 너를 규정짓고 있는 조건들이 투사된 것이야(The self is your conditioning, the self is the projection of your conditioning). 그렇지 않니?”
“예.” 나는 말했다. “이제 그 점을 보다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생명(Life)은 조건화로부터 자유롭단다. 그래서 생명은 창조적(Creative)인 것이고. 창조적이고 싶다면, 너는 반드시 생명의 표현을 방해하고 있는 자아를 이해해야 한단다. 바른 생각이란, 우리가 자신을 알고 있을 때에 찾아오는 것이란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느낌-반응에 대해 알아차려야(aware) 하는 것이란다. 그리고 생각-느낌-반응, 이것은 우리가 그동안 축적해온 기억들의 반응일 뿐이고. 자신 안에서 기억 축적의 과정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이해하게 되면, 거기에 자유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란다.”
“그 사실들이 점점 더 명확하게 이해되고 있습니다.” 말씀 도중 나는 감히 말씀드렸다.
“우리는 자신의 관념, 믿음, 욕망, 두려움, 반감 등에 대해 자각하고(aware of) 있어야 해. 그리고 우리의 생각-느낌-반응의 모든 과정이 현재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알아보아야(discerned) 내야 한단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다시 스스로를 규정짓고 있는 조건들에게 표현할 기회를 내어주게 되는 것이지. 이 사실도 분명하지. 그렇지 않니?” 그리고 그는 말을 계속했다. “자신의 생각은 자신의 바탕이 되는 것들에 따라 스스로 꼴을 갖추게 된단다. 네가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을 때, 거기에는 창조되지 않은 고요함이 존재하게 된단다. 마음-자아가 자신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봄으로써 어떠한 강요도 받지 않으며 마음이 고요해지게 되면, 스스로를 투사하는 것을 그치게 된다. 그때 자아는, 바로 자신이 스스로를 묶고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내고 유지시키는 원인이라는 것과, 자신이 결코 그 조건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그러면 자아는 자신의 본 모습으로부터 회피하려는 것을 그만두게 된단다. 사물들(things)이 실제 있는 그대로 보이게 될 때 그것들에 대한 이해가 있게 되고, 이러한 이해 속에 자유가 있단다. 그리고 그 자유 속에 실재가 존재하는 것이고. 마음이 더 이상 과거라는 기억의 짐들을 짊어지지 않게 될 때, 너는 이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이야.”
“예수 또는 다른 마스터(Master)들이 보여주었던 힘의 신비는, 예수께서 아버지라고 불렀던 생명(the Life)이 깨달아졌을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단다. 이것은 결코 마음의 산물-단순한 관념이 될 수 없고, 생명 자체 안에 있는 살아계신 의식인 것이지(This could not be the product of the mind - a mere idea - but a living Consciousness in Life itself).”
“예수께서 인간 안에 있는 불완전함을 보았을 때 그는 인간 자신이 곧 그 원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단다. 그러므로 우리를 규정짓고 있는 바탕(background)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들은 그 바탕이 투사된 것에 지나지 않아. 이러한 자기 이해가 없다면, 깨달음(enlightenment)은 불가능하단다.”
“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마음이 스스로 자유로워지지 않는다면, 실재를 깨닫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단다. 거기에 다만 실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념만 그저 있을 따름이겠지만, 그것은 진리(the Truth)가 아니야. 하나의 관념이 다 닳아 없어지면, 다른 관념이 만들어지게(created) 되거든. 실재는 관념 너머에, 마음 너머에 있는 것이지. 그리고 안에서부터 들어서게(come into being) 것이지 밖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야. 마음의 모든 환상들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함으로써 그것들이 스스로 모두 사라져 버릴 때에만 실재는 깨달아질 수 있는 것이란다.”
“예, 알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리스도의 요가란 자아로부터의 자유이군요. 자아가 죽어 없어지게 되면, 신께서 그분의 일을 수행하시게 됩니다. 모든 것들의 창조자이자, 인간의 마음을 넘어선 지성을 갖추고 있는 그것이 일을 하게 되는 것은 오직 마음이 스스로 결론들을 만들어 내는 것을 중단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는 대답했다: “그래, 아들아. 그러나 지금 네가 말한 것은 아직도 관념에 지나지 않는구나. 네가 말했던 것은 진실(a truth)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진리(the Truth)는 결코 아니야. 진리란 마음이 고요해질 때라야 경험될 수 있는 것이지. 그리고 나는 네가 그것을 경험하길 바란다. 직접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거든. 지적인 앎은 여전히 정신에 속해있을 뿐 영적이지는 못해. 영적인 것(the Spiritual)은 참된 명상을 통해서만 올 수 있단다.”
우리는 잠시 앉아 명상을 하였다. 관념이나 이미지에 대해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진리가 아닌 모든 것들을 바라보았다. 거짓된 그 모든 것들을 보고, 마음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knowing), 마음이 소중히 여기는 희망과 관념들을 알아차리며 거기에 앉아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자아가 투사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 나감에 따라 그것들은 이제 사라져 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존재”(“BEING”)가 더욱 더 깨달아지고 있었다.
모든 힘, 모든 지성, 모든 사랑은, 자신이 일할 수 있도록 자아가 죽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직 자아만이 그 일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 *
얼마나 오래 동안 내가 이 축복의 상태에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내가 만들어내지 않는 고요함이 그저 있었다는 것이다. 그 고요함이 문득 들어섰고, 그 침묵 속에 영원한 창조성(the Eternal Creativeness)이 있었다.
말로는 이 상태를 결코 설명할 수 없다. “나”(“the I”)는 거대한 “그저 있는 나”(“I AM”) 속으로 없어져 버렸다. 아버지께서 몸과 마음의 성전을 통해서 일하시고 계셨으며, 아버지께서는 그 목적으로 그 성전을 창조하신 것이다. 모든 힘, 모든 지혜, 모든 사랑은 영원하였으며, 언제나 현존해 있었다(All Power, all Wisdom, all Love was Eternal, Ever-present).
나는, 자아란 아무 것도 아니며,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아는 그 자체로는 아무 힘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마음의 번뇌가 그쳤기에 나는 기쁨에 차올랐다. 창조되지 않는 그것(the Uncreated)만이 홀로 창조적이었다. 내가 지녔던 과거의 생각들과 기억들은, 언제나 새로운 살아있는 현재(the living Present) 안에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살아 있는 현재란 살아 있는 순간이며 그것이 곧 실재이다. 그 순간 나는 내 친구가, 자아는 스스로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던 바의 뜻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말에 대해 수백만 단어라도 쓸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정신적 개념을 넘어서 있는 이 존재의 황홀함(this ecstasy of BEING)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10장
우리는 계곡을 따라 안식처를 향해 내려왔고 걸어오면서 나는 커다란 만족감을 느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내 생각을 느꼈음(sense)에 틀림없다:
“네가 부드럽고 조화롭게 진보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참으로 기쁘단다. 네가 여기를 떠날 때가 온다면 나도 퍽 섭섭할 것이야.”
나는 대답했다: “동감입니다. 그리고 스승님(you)께서 보여주신 친절과 배려와 사랑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말로는 할 수 없을 만큼 정말로 고맙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제 자신이 참으로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느껴집니...” 그가 다시 말을 시작하여 나는 내 말을 마치지 못했다.
“자신이 가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세상에 위대한 것들을 주는 자들은 자신이 가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단다. 그들은 자신들이 통로라는 것을 깨닫고 있단다. 무한한 지성(the Intelligence)이 현현(manifests)될 수 있도록 하는 통로말이야.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 따위는 그들 마음에 들어가지 못한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너는 지금 마음 저 뒤쪽에 자신이 가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단다. 지금 네가, 이러한 생각이 자신을 규정짓고 있는 배경, 조건들의 결과라는 것을 안다면, 다시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야.”
그 말씀은 나에게 따끔한 회초리와도 같이 나를 견책하시는 것이었으나, 그분께서는 연민(compassion)과 사랑을 담아 말씀해주셨고, 그 말씀을 듣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어렸을 때 종종 들었던 말들이 만들어 낸 조건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너는 내 눈에 보이는 곳에만 있어야 해. 떠들지 말고(you should be seen and not heard).”나는 이제 더 이상 그 때의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었다. 그 감정은 스승님의 말씀을 들은 그때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사실 이 상태에 대해 지적을 당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링-쉬-라 은수자께서도 나에게 조용하고도 온화하게 타일러 주셨다. 그는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우리는 네가 갖고 있는 가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단다. 우리는 다만 어떻게 해야 진리가 세상에 가장 잘 알려질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관심을 모으는 것이야. 너는 좋은 도구이고, 이곳을 떠나게 될 때에는 보다 좋은 도구가 되어 있을 것이야.”
우리의 안식처로 돌아왔을 때 노르부는 현관의 계단까지 나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환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녹색과 흰색 체크무늬가 들어가 있는 빨간 양털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은 그녀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에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야생 양귀비가 꽂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행복에 젖어 환하게 빛나고 있었으며, 그녀가 웃을 때 눈도 예뻤으며 가지런한 치아도 아름답게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당신은 참으로 미인이군요. 노르부. 나를 위해 이렇게 차려 입은 건가요?”
그때 내 친구가 끼어들며 말을 했다: “이거 둘 사이가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것 같은데?”
이렇게 말한 그는, 그의 마음의 뒤편에서, 노르부와 나 사이에 깊은 애정이 잠재되어 있어 어느 순간에라도 활활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언젠가는 서로 헤어져야 할 날이 올 것인데 이별이 힘들어지지 않을까 그는 염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나에게는 거대한 사랑의 능력이 있었으며, 그 순간 내 팔로 노르부를 감싸 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for I have a great capacity to love and felt at that moment I could put my arms around Norbu).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내 친구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정말로 깊이 사랑해요, 노르부. 그리고 당신을 언제까지라도 사랑할게요.”
웃고 있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솟아나왔고 그녀는 말했다: “나도 당신을 정말로 깊이 사랑해요. 그리고 당신이 우리 곁을 떠날 때 나는 몹시도 당신을 그리워하게 될 테죠. 그러나 슬퍼하지는 않을게요.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기도 하고, 당신이 우리와 함께 보낸 시간을 기억으로 간직할 수 있을 테니 말이죠.”
나는 그때 모든 일이 잘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손으로 그녀를 잡고 내 친구에게 우리 둘을 축복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주는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이, 너희도 서로를 사랑하여라.”
우리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육체를 넘어선 영적인 참된 사랑을 뜻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점심을 들기 위해 자리에 앉았으며, 우리 안에 있는 생명(Life)과 웃음으로 대화는 활기찼다. 그때 우리는 행복하였고 모든 근심 걱정을 놓아버렸는데, 그것은 우리 셋을 묶고 있는 영원한 사랑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오후에 노르부는 (우리가 있는 곳으로) 들어와 우리와 함께 앉았다. 그녀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며(for she was an adept in her own way), 우리의 토론(내 친구는 우리의 대화를 그렇게 불렀다)으로부터 그녀가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 친구는 어떤 경우에라도 자신이 내 선생이나 스승이라고 암시조차 결코 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거짓된 것들을 밝혀 드러내는 방식이었고, 그럼으로써 우리 스스로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내 친구는 이 말로써 대화를 다시 시작해 나갔다: “이것은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 둘 모두를 바라보시며 그는 이 말을 하였다. “이 말은 주 예수(Master Jesus)께서도 하신 말씀이고 또 동시에 너희 둘을 위해 내가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요가란 자유 그 자체야.” 그는 말했다. “거짓된 모든 것들(all the false), 나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all the me)-자신(I)-자아(the self)를 다 이해하고 나서야, 자유는 찾아오게 된단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같은 것이기 때문이지. 나-자신-자아가 이해되지 못할 때, 그리고 마음 스스로 만들어 낸 희망과 욕망에 자신이 붙잡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때에는, 마음은 이 혼란을 극복하려고 바깥으로 뻗어나가며 뭔가를 계속해서 찾고 뭔가를 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반복하게 되지. 그런데 이렇게 하는 시도가 자유로워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지. 그러나 이해를 하게 되면, 뭔가를 극복한다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일이 되어버리지. 너희 둘은 이제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을 거야. 그렇지 않니?”
“예” 우리는 마치 한 사람처럼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계속해서 말을 했다: “욕망을 하나 정복(conquer)하고자 하려면, 앞으로도 그 욕망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서 정복해야만 할 것이야. 이는, 우리가 누군가를 적으로 두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서 그를 정복해야만 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란다. 하나의 욕망을 극복(overcome)하려고 하는 순간 정복해야 할 다른 욕망이 나타나게 되고, 그래서 정복하려는 하는 것은 결코 이해되지 못하는 법이지(so which is overcome is never understood).
“이제 너희는, 사실상 뭔가를 극복한다는 것은 그저 억압(suppression)의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억누르고 있는 생각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야. 그러므로 자신이 계속해서 억누르려(repress) 하는 생각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게 되는 것이야. 너희도 최근에 이 사실을 경험하였지. 그렇지 않니? 이제 너희는 더 이상, 자신의 애정을 억누르지 않을 수 있게 되었지(there is no longer the repression of your affection). 이제 너희는 애정(affection)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오히려 애정이 있음으로 해서 참사랑(Love)과 더불어 그 자유로움을 더욱 활기차게 만들게 되는 것이지. 참된 사랑이 있을 때, 거기에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자유로움 안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사랑만이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지.”
노르부가 대답했다: “이제 저도 알아요, 스승님(Master). 이제 저도, 제 온 가슴을 다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이제 저는 마음(mind)이 아니라 온 가슴(heart)을 다해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스승님, 당신께서는 저에게 참된 사랑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니란다, 내 딸아.” 그는 대답했다. “네 스스로 그것을 찾아낸 거야. 나는 그 길을 너에게 보여줄 수가 없단다. 왜냐하면 사랑의 길은 혼자서 직접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분명히 말하는데 그것은 네가 스스로 경험한 것이지 내가 전해줄 수 있는 경험이 아니란다.”
나도 역시 사랑의 자유로움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겪었던 경험 이후로, 가슴의 사랑은 자신을(you) 자유롭게 하지만 마음의 사랑은 자신을(you) 얽매이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슴의 사랑(Love of the heart)은 주는 것이지만, 마음의 사랑(Love of the mind)은 바라는 것(desiring)이다.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는데, 앞의 것은 신에게 속해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아에 속해 있는 것이다. 신의 사랑은 언제까지나 살아 있으며 영원하다(Eternal). 반면에 자아의 사랑은 자아가 죽을 때 자아와 함께 죽는다. 자아의 사랑은 사랑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자아가 실재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그대는 참된 사랑을 결코 경험할 수 없다. 누군가를 온 가슴을 다해, 온 영혼을 다해 진심으로 사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렇게 할 때에만 비로소 그대는 사랑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게 된다. 두려움을 극복한다는 것은 두려움을 지연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대부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공포는 무엇인가?”
나는 대답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공포는 바로 죽음에 대한 것이라고 감히 말하렵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이 바로, 사람이 스스로를 자유롭게 해야 하는 마지막 두려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분은, 사람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그는 정말로 자유로워진 것이라고 뜻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참으로 옳은 말이란다. 가장 큰 두려움은 바로 죽음의 두려움이지. 그리고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져 있는 문제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아니라 죽음의 모든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란다. 이것은 늙은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젊은 사람도 포함해서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지.”
“사람이 죽음 후에도 살아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믿음에 그저 집착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네.”
“자신들이 영적인 존재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죽음 이후에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네. 그들은 자신들이 그저 환경의 부산물(product of environment)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그런데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 생각으로만 믿고 있는(thinking-believing) 것이고, 이런 방식으로는 죽음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단다.”
“자,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 후에도 삶이 이어지길 갈망하게 하는 것일까? 또 실제로 이어지는 그것은 무엇일까(what is it that continues)? 사람들이, 지속되길 바라고 있는 것은 이름, 형태, 경험-지식-기억에 지나지 않아. 그런데 이것이 곧 자아인 것이자 자신(the me)인 것이며 곧 나(the me)인 것이거든.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실상 똑같은 것으로 하나인 것이고, 사람들은 이것이 지속되길 바라는 것이야. 깊이 들여다본다면, 이것이 얼마나 참된지 알게 될 것이란다.”
“너는 이제, 자신이라 믿고 있는 그것은 자신의 기억이자 경험이자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단다. 높은 수준이든 낮은 수준이든 가릴 것 없이 어느 수준에서 사고 과정을 한다 하더라도, 그때에 너는 여전히 사고 과정 안에 있는 것이란다. 그리고 사람들은(you), 죽음이 온 후 나라고 믿고 있는 것을 끝장내 버릴 거라는 사고 과정을 두려워하고 있거나, 죽음 이후에 어떤 다른 형태로든지 살아 있어서 다음 생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단다. 너도 곧 알게 되겠지만, 이것은 사람들의(your) 믿음이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정신적 사고 과정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 나는 지금, 죽음 이후의 생명(after-Life)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It)에 대한 단순한 개념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란다.”
“명백하게 말을 하건데 생명-영(Life-spirit)은 결코 연속될(continue) 수 없단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 너머, 시간 너머에 있기 때문이지. 연속성(continuity)이란 말 안에는 시간이 함축되어 있단다. 어제니 오늘이니 내일이니 하는 것들 말이야. 그러므로 초(超)시간적(timeless)인 그것은 결코 연속성을 갖고 있을 수 없단다. 시간에 속해 있는 것들만 연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지. 영원하고 항상 현재에 있는 그것은 시작도 없고 마침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것은 연속성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지.”
“너는 오직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을 표현할 수 있단다. 자신의 생각, 자신의 기억, 자신의 지식, 자신의 경험 같은 것들 말이야. 너는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은 표현할 수 없고, 오로지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것만 표현할 수 있단다. 너는 자신의 마음 너머에 있는 것을 표현할 수 없고, 실재를 표현할 수 없단다. 그것이 무엇인지 너는 모르고 있기 때문이지. 이런 이해를 통하여 마음이 고요해지면, 그때 실재이며 영원한 그것이 깨달아지고, 즉각적으로 광대하고 무제한적으로 일을 하게 된단다.”
“자신이 영적인 존재(entity)라 말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위안이 되는 생각(thought)이겠지. 그러나 그것에 관하여 생각하는(thinking) 과정에 있어서, 그 생각은 시간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란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시간을 넘어서 있는 그것(Timeless)이 될 수 없는 것이라네. 그러므로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영적인 것(Spiritual)이 들어서는 것도 아니고. 시간은 상대적이야(relative). 그러나 시간을 넘어서 있는 그것은 상대적인 것들 너머에 있고, 그러므로 시간에 종속되어 있지도 않단다. 앎을 넘어서 있는 그것은 마음이 알고 있는 것들에 종속되어 있지 않지(being Unknown is not subject to the known). 그러므로 마음은 자신에게 알려져 있는 대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
“네가, 무엇인가 연속되길(continue) 바라고 있다면 그 무엇은 네가 알고 있는 것이란다. 만약 네가 다시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네가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연속되기를 바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야. 만약 네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깊이 들여다본다면, 너는 이에 대한 진실(Truth)을 알게 될 것이란다. 그러므로 네가 갖고 있는 것들이란 그저 자신의 생각-느낌일 뿐이고, 네가 연속되길 바라고 있는 것들이란 바로 이것들이야. 왜냐하면 이것 말고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지.”
“너무나 명백하게도, 너는 앎을 넘어서 있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네가 지속되길(continue) 바라는 것은 마음에게 알려져 있는 것들(the known)이지. 그래서 너는 마음이 알고 있는 것들이 끝나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그러나 지속되고 있는 그것이 끝장이 나야 그때에 유일하게 있는 실재(only Real)가 존재하게 된단다. 그러나 너는 이것을 끝장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어.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기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지. 너는 과거라는 짐을 어제에서 오늘로, 오늘에서 내일로 나르기를 원하고 있지. 그래서 사람들은(you) 이상적인 사회(Utopia)를 건설하려 한다고 하면서, 미래를 위해서 살아 있는 현재를 제물로 바치고 있고(sacrifice), 사람들을 없애버리고 있는 것이란다. 이 모든 것이 바로 과거에 알고 있던 것들이 지속되길 바라는 욕망 때문인 것이지.”
“자, 그러나 너무나도 명백하게도, 지속되는 것은 결코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없단다. 언제나 현존하고, 순간에서 순간으로 그저 있는 그것만이, 새로 나고(reborn), 새로워지는(renewed) 것이란다. 이 안에서는 기억도 과거도 선도 악도 존재하지 않지.”
“우리가 이 문제를 가까이 들여다본다면, 지속되고 있는 것이란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기억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야. 왜냐하면 네가 기억에 달라붙고 있고,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지. 너는 곧, 시간을 넘어서 있는 그것(That which is beyond Time)이 들어서기 전에, 시간에 속해 있는 기억-자아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야.”
“마음은 시간 너머에 있는 그것을 만들어 내지도, 생각할 수도 없단다. 마음은 오직, 시간의 결과물이자 과거의 결과물인 것을 알고 있을 따름이지. 자신이 읽고 있는 것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 자신이 믿고 있는 것들, 이것들이 곧 마음인 것인데, 마음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만들어 내고(formulate) 있단다. 그러나 마음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그저 있는 그것은) 만들어내지 못한단다. 영원한 현존(ever-present) 안에서 살고자 한다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있을 수 없는 거란다. 오직 지금만이 있을 뿐이야. 그래서 마음은 자신이 끝장나는 것을 두려워한단다. 왜냐하면 마음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 집착하고(cling) 있으며, 또한 자신의 믿음, 자신의 이론에도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마음이란 믿을만한 것이 못되는데, 그것은 하나의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변하기 쉽기 때문이란다.”
“너의 어려움이란 네가 축적해놓은 것들에 대해서, 지난날의 모든 경험들, 자신의 믿음, 자신의 관념, 자신의 희망,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에 있단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이 곧 죽음이거든. 그렇지 않니? 너는 바로 그것들에 대해 죽어야 하는 것이란다.”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은, 앎 너머에, 시간 너머에 있는, 알려지지 않은 그것을 결코 드러낼 수 없단다.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은 시간에 속해 있는 것이고 시간은 결코 시간 너머에 있는 그것(the Timeless)을 결코 드러낼 수 없단다.”
“이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나는 네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고 싶단다.”
나는 대답했다: “예, 이해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것들에 대해 매 순간 죽을 때, 거기에 앎을 넘어선 그것, 실재가 있게 됩니다. 과거로부터 죽 지속되고 있는 것은 진리-실재-앎을 넘어선 그것-새로운 그것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자신이 투사된 것들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you) 시간 안에 살고 있을 때, 유일하게 창조적인 살아있는 현재(the Living Present)보다 어제와 내일이 더 중요하게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지나가버린 순간에 대해서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이며, 살아있는 현재 안에서 살고 있어야 합니다. 지나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죽을 때 거기에 생명(Life)이 있습니다.”
“그렇지.” 내 친구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말을 이었다. “만약 네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면, 살아있는 현존(the Living Present) 안에서 살 때, 어제도 내일도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거란다. 이것이 참된 활동-행동(activity-action)으로서, 기억의 결과나 과거의 결과로부터 나오는 반응(reaction)과는 다른 것이란다. 너는 또한 영원하면서 살아있는 현재(the living Present which is eternal) 안에서는 죽은 자들이(dead)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거란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묻도록 내버려 두어라’ 라고 말씀하신 이유란다.”
“창조성이란 행함 속에 있는 생명이란다. 사람은 생명을 창조하지 못하지. 사람이 신을 창조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 못(CREATIVENESS IS LIFE IN ACTION. MAN DOES NOT CREATIVE LIFE, NO MORE THAN HE CAN CREATE GOD). 사람이 하는 것이란 신에 대한 관념을 만들어´VEN지 란다. 그리고 그것이 진리라고 그하면서 말 못. 이런고 그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스스로 알게 될 때에만 비로소 사람(he)은, 진리를 보지 못하게 자신을 가 CRE던 그 환상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란다. 시간은 생명(Life)을 창조할 수 없지. 그렇지?”
나는 대답했다: “저는, 시간의 경과를 통해서 자신이 창조적으로 될 수 있다고(in time they can be creative) 생각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시간을 통해서 기술 같은 것들은 완전히 체득할 수야 있겠지만, 그것은 창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기술을 체득하기(master) 한다는 것은,” 그는 말했다. “그저 습관에 지나지 않아. 그런데 습관은 창조적이지 않단다. 그렇지 않니? 어떤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에는 언제나 노력이 있고, 갈등이 있기 마련이란다. 그러므로 기술(technique)은 창조적일 수 없는 것이지. 자아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로 갈등 속에 있는 한, 창조적 상태는 존재할 수 없단다. 마음이 대립되는 것들(opposites)에 붙잡혀 있을 때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기 마련이고, 이것이 창조성을 거부하는 것이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창조성을 획득(achieve creativeness)하는 것이 가능하죠?” 나는 물었다.
“창조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단다.” 그는 대답했다. “네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것이란, 바로 창조성을 거부하는 것들이고, 그것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자아를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지. 마음이 자아의 요구로부터 자유롭게 되면, 거기에 평화가 있기 되고, 그 평화 안에 바로 창조성(Creativeness)이 있게 되는 것이란다. 창조성은 자아의 노력(effort)과 분투(struggle)가 없어야 들어서게 되는 것이란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현재(ever-present)에 있기 때문이지. 창조성이란 순간에서 순간으로 그저 있을 따름이란다. 그러나 너는 창조성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 그것을 붙잡으려 해왔단다. 그러나 너는 결코 이를 할 수 없단다. 왜냐하면 창조성은 마음 너머에, 시간 너머에 있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창조적으로 되고 싶다면, 너는 반드시 시간 안에서 기능하는 것을 멈추어야 하는 것이란다(Therefore you have to cease functioning in time to become creative). 자아가 죽을 때 거기에 생명이 있게 되며, 그래서 창조성 또한 있게 되는 것이지. 예수께서는 이를 다른 표현으로 말씀하셨는데, 자기 생명(상대적인)을 살리려고 하는 자는 잃게 될 것이며, 자신의 생명(life)을 버리는 자는 참생명(It)을 얻게 될 것이다.”
“바람이 그치면 호수가 고요해지는 것처럼, 마음의 문제들이 모두 끝장나버리면, 창조적 존재(Creative Being)가 있게 되는 것이란다.”
“나 자신으로는 아무 것도 아니야. 내 안에서 이 일들을 하고 계시는 분은 바로 아버지의 영이시란다.”
그때 그는, 기도할 때처럼 눈을 감았고, 생각의 과정 없이 그로부터 이 말들이 흘러나왔다:
“오 영원하며 살아계신 현존이여, 저 혼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입니다. 당신과 나는 나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이치를 헤아리며 거짓된 것들을 살핌으로써, 당신의 살아 계신 현존이 들어설 길을 마련하였습니다.”
“당신의 살아 계신 현존 안에 있을 때 시간 감각은 나에게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당신은 시간을 넘어서 있는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제 마음 안에만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나이다.”
“인격 안에서(in personality) 실재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당신 홀로 실재하고 계시며 결코 나누어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 안에 실재란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당신 안에서 죄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는 오직 사람의 마음 안에서만 살고 있을 뿐이며, 죄는 사람이 마음으로 스스로 지어낸 것일 따름입니다.”
“당신이 곧 진리이며, 진리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입니다. 당신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신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당신의 살아계신 현존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어제에 대해 죽었습니다.”
“이제, 살아 있는 진리(the Living Truth)가, 자아 자체가 곧 오류라는 것과, 그동안 거짓된 것들을 참이라 믿어왔다는 것을 알게 된 나를 자유롭게 풀어주었습니다. 이제 자아는 죽어 없어졌고, 당신의 생명만이 영원토록 나의 것입니다.”
“오 복되시며 영원하신 살아계신 현존이여.”
* * * * *
우리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을 때, 우리 둘 다 마스터 중의 마스터(the Master of Masters)이신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그의 얼굴은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빛으로 휩싸였다.
나는 노르부의 손을 잡았으며, 우리는 그 환희(ecstasy)의 상태 속에 앉아 있었다. 얼마나 오래 동안 그렇게 있었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사라져 버 더 이상 죽음이 없다는 것과 영원한 생명(Life Everlasting)이 죽음을 삼켜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평화 속에, 그 고요함 속에 실재가 존재했으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11장
시간은 자꾸자꾸 흘러 참으로 티베트 날씨 같은 겨울이 시작되었다. 밤 동안 눈이 내렸으며, 눈은 이불처럼 잠사르 지역을 덮었다. 이제 땅을 이불처럼 덮은 눈은 최소한 육 개월 이상 동안 녹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낮에는 햇살이 따뜻하기는 했으나 밤이 되면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다.
내가 온 세상으로 다시 곧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떠나온 그 세계는 멀리 있는 듯 보였다. 최근 몇 달 사이에 나는 바깥세상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이란, 엄청난 변화(transformation)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쉽사리 바뀌는 생각은 내게서 사라져버렸으며, 나는 더 이상 진리(Truth)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가 저렇게 생각했다 하지 않게 되었다. 그토록 어리석은 갈등은 완전히 사라졌다. 가장 높은 차원의 생각(idea)이라 할지라도 그것 역시 생각일 뿐이고 그것 자체가 진리(the Truth)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즉각적으로 알아보는 순간, 진리에 대한 모든 관념이 사라졌다. 영적인 것 또는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갈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한 쪽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유연한 마음 안에 자유가 있고, 자유 안에 진리가 있으며, 진리 안에 사랑이 있다.
사랑이 곧 진리이다(Love is Truth). 그러나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따라서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말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머리로 만들어 낸 개념에 불과하며,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을 때, 그것은 사랑이 아니며 다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사람을 그저 소유하고 있는 것인가?
소유하려는 욕심(possessiveness)이 있는 곳에는 질투와 두려움이 있기 마련인데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 아닌 것들(what is not Love)을 밝혀내고 나면, 그때 우리는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분명히 말을 하건데 사랑은 소유욕도 질투도 두려움도 아니다. 그대가 무엇인가를 소유하려 들 때, 거기에는 두려움이 있고, 질투가 있게 된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들을 그대가 크게 소리 내어 읽는다면, 그대는 자신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오는 결과인 변화(transformation)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랑이 아닌 것들을 그대는 곧 이해하게(see)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거짓된 것들은 떨어져 나갈 것이며 그 자리에 사랑이 즉각적으로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이며, 사랑이 들어올 길을 그대가 깨끗이 마련하고 나면 그 즉시 움직임을 시작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결혼을 해서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자녀가 있는데, 그대는 그들을 소유하고, 이용하고 있으며, 두려워하거나 질투하고 있다(If you are married, have husbands, wives, children whom you posses, whom you use, of whom you are afraid or jealous). 만약 그대가 이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면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appeasement)은 사랑이 아니다.
걸인을 만났을 때 그대는 동전을 주고는 다시 걸어가 버린다. 그런데 이것이 사랑인가? 그 날의 선행을 했다고 그대는 느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이 사랑인가? 그대는 자신이 인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가?
지금 우리는, 사랑에 대한 질문 안으로 탐구(inquire)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the question of Love) 안으로 탐구해 들어갈 때, 사랑이 아닌 것들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사랑과 관련하여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이 아닌 것들로부터 벗어난 자유가 있게 되며, 그 자유 안에 사랑이 있게 되는데, 그대는 사랑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사랑을 소유(posses)할 수 없다. 사랑이 그대를 소유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그대를 소유할 때 그대는 더 이상 두렵지도 질투하지도 소유하려 들지도 않게 될 것이다.
혹시 그대는 자신과 거지와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 적이 있는가? 거지는 누더기를 걸치고 있을 것이고 아마 그대는 좋은 옷을 입고 있을지 모른다. 그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반면 그대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차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본다면, 그도 역시 그대와 마찬가지로 만들어졌으며, 살아 있고, 같은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며, 그대가 살아 있듯이 그 역시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도 역시 거지이다. 조금 더 처지가 나을지는 몰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거지이다.
그대에게서 그대라 규정짓고 있는 조건들을 제거하고, 거지에게서 거지라 규정짓고 있는 조건들을 제거하고 나면 서로 같지 않은가? 그대 안에 있는 생명(Life)과 거지 안에 있는 생명에 과연) 다른 점이 있는가? 과연 그렇다.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의 조건들(conditioning)을 통해서 창조한 이 사회 때문이며, 이 사회가 우리의 조건들을 지속시키고 있다.
자선을 할 때 그대는 그 행위를 고상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행위 속에 여전히 그대가 중심에 있지 않은가?(Are you still the central figure?) 그대는 그대와 다른 조건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동정(sympathize)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인가? 누가 그 조건을 만들어내는데 원인을 제공하였는가? 바로 그대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그대의 동기와 행동에 대해서 질문하지는 않으려 한다. 그렇게 한다면 그대는 이를 두려워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대는 심히 불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대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조건들이 어떻게 사라질 수 있겠는가? 그대를 옭아매고 있는 조건들을 알지 못하다면, 자신이 스스로 걸려들은 조건들을 통해서 이런 조건들을 영속시키는 것이 않겠는가?
그대는 이런 조건들의 책임에 대하여 사회를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회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는, 자신이 실제로 어떠한가를 알아내지 않을까 하여, 탐구하기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일깨워주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사회의 희생자들을 동정한다. 그러나 그대가 그들을 희생시킨 것이 아닌가? 그대가 자신 안을 들여다보며 질문한다면, 그대가 어떻게 이 사회를 만들어 왔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용서가 사랑인가? 그대는 자신이 누군가를 용서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다정다감한 사람(loving person)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용서의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바라보았으면 한다. 그대는 왜 용서를 하는가? 내가 그대를 모욕하고 나면, 그대는 상처를 받고, 분개하고, 그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그대는 용서를 하게 된다. 왜인가? 용서하는 행위 속에서 그대는 여전히 그 중심에 있는 핵심 인물이기 때문이며, 용서를 하는 행위가 그대의 도덕성을 드높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랑인가? 용서의 행위와 과정 속에서 그대는 여전히 중요한 사람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랑이란 자신을 부풀리는 것이 아니다. 내적으로든지 외적으로든지 말이다(Love is not personal aggrandizement within or without). 사랑은 자아가 사라졌을 때라야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대는 동정, 용서, 소유욕, 질투 그리고 두려움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로 사랑을 하고 있는 자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무관심하다. 마음이 사랑을 갖고 장난치는 한, 거기에 사랑이란 없다. 마음은 사랑을 타락시킬 뿐이다. 마음은 사랑을 낳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사랑에 대해 글을 쓰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대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인가? 그대는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그들 안에 과연 사랑이 있는지 살펴보고 확인해 보라.
사랑이 그대 안에 있을 때, 그대는 사랑에 대해 결코 말하지 않는다.
사랑을 사고 팔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시간을 넘어서 있다. 시간에 속해 있는 것들만이 사고 팔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고통과 불행이 계속해서 커지는 이유다. 마음은 문제를 만들어 놓고는,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 자신이 직접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게 될 때라야 비로소 거기에 사랑이 있게 되는 것이고, 사랑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마음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가슴은 사랑이 없어 공허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 마음이 활발하게 움직일 때, 마음은 자신 안에 있는 것들로, 시간에 속해 있는 것들로 가슴을 채우게 된다. 그러나 사랑은 시간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시간에 속해 있는 것들이 잠잠해 졌을 때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란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이며,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을 이해하고, 자신이 무엇인지 또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이 문제라는 것을 알아보는(see)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을 마주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하게 되는가? 우리는 교회를 짓고, 새로운 조직을 고안해내고, 글을 쓰고 설교하고, 새로운 슬로건을 적용시키고,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고, 회의를 한다. 우리는 이런 저런 모임을 만들고는, 이런 모임이 세계 평화를 위한 것이니, 세계의 무엇 위한 것이니 하고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였는가? 아니다! 우리는 문제를 보다 복잡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문제가 마음의 산물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보게 되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마음은 자신의 오래된 기억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내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러면 그때 사랑이 있게 된다. 이렇게 하기 전까지 사랑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사랑으로써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우리는 형제적 의식(Brotherhood)과 형제적 사랑(Brotherly Love)의 실천에 대해 말하곤 한다. 우리는 각종 모임을 만들곤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여전히 마음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대가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나면, 마음이 만들어내는 이 모든 소동은 그치게 된다. 그러면 그 자리에 사랑이 들어서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지금 이 순간 그저 있을 따름이고, 우리는 그것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Love comes into being because It Is now and we don`t create it).
그때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One)”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모르고 있다면 말이다.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을 때라야, 그 사랑 안에서 그대는, 어떻게 해야 전체를 사랑하는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도 사랑할 줄 모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인 것이다.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을 때 그대는 모두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 가슴은 사랑으로 가득해지고 마음은 생각을 지어내기를 멈춘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어 사라져 버린다. 그때 우리는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 여기에 우리의 참된 행복이 놓여 져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수업이야말로, 내 친구와 게쉬 림포체로부터 받은 최고의 수업이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말들이 그대가 사랑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기를 바란다. 내 친구와 게쉬 림포체의 말들이 내가 사랑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 * * * *
나는 내 친구에게 말했다. “제가 스승님(you)을 떠나야 할 날이 오고 있다는 것에 대해 당신께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스승님께서도 제가 떠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가야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단다.” 그는 말했다. “네가 먼저 그 말을 꺼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사실상 내가 너의 마음 안에 그 말들을 집어넣은 것이란다. 내가 아니라 너의 입으로부터 그 말이 나올 수 있도록 말이지. 내가 너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사실상 우리 모두가, 네가 다시 몸을 입은 상태로 이곳에 돌아와 함께 있기를 참으로 간절하게 바랄 거란다. 그러나 너도 알겠지만, 네가 세상 안에서 너의 일을 하고 있을 때 나 역시 너를 따라 다니며 함께 할 거란다. 그것은 내 일이기도 하거든. 이미 육체를 떠나있지만 여전히 너를 돕고 있는 다른 이들과 함께, 나 역시 네 옆에 있을 것이란다.”
“이제 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상적인 의식의 상태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란다. 사회적 문제들과 각자의 근심거리라는 소음에 휩싸인 상태로 일상의 행동을 기계적으로 되풀이하는 의식의 상태로 말이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신들을 규정짓고 있는 조건들에 따라서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보다 깊은 의식의 층에 대해 자각하고 있을 따름이지.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 행동, 남들보다 내가 낫다고 믿고 싶은 허영심, 욕구, 미움, 질투,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어 너무 바쁘기 때문이란다. 그들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자신들의 조건에 대해 모르고 있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다 나은 위치, 힘, 부, 그리고 육체가 줄 수 있는 모든 쾌락을 위해 분투하고 있단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을 옭아매는 더욱 깊은 층에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보다 깊은 이 의식의 층이, 의식의 표층에 스스로를 투사하면서, 마음과 몸을 요동케 하는 모든 종류의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단다.”
“또 사람들 가운데는 낮은 의식과 높은 의식을 구분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보다 높은 의식이 영적인 존재(Spiritual entity)라 말하면서 말이지. 그러나 이것 역시 그들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이 투사된 것이 아닌가? 네가 알고 있듯이, 이것은 믿음에 지나지 않아. 이것은 마음에 속해 있는 것이고, 정신적 개념에 지나지 않아. 그렇지 않니? 영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은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 조건들로부터 회피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렇게 한다고 해서 자신들의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자신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조건지어 왔는지를 알아보기 전까지, 그들을 제한하고 있는 조건들(conditioning)은 남아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란다.”
“나는 네가 마음이 활동하는 모습을 관찰하고(see), 마음을 철저하게 이해하기를 바란다. 네 마음이 지어내는 정신적 활동을 보다 깊은 층위에서 이해하지 못한다면, 너는 스스로의 생각과 다른 이들의 생각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야. 이것들이야말로 네가 꼭 피해야 할 것들인 것이고. 그래서 너도 알겠지만, 네가 무엇을 생각한다 할지라도, 영적인 실체(spiritual entity)에 대해 어떻게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네 사고 과정의 산물에 불과하단다. 따라서 그것은 시간의 산물인 것이고, 시간의 산물인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 그것(the Timeless)이 될 수 없단다. 그런데 오직 시간을 초월해 있는 그것 안에서만 영적인 존재가 있게 되는 것이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존재하지! 그리고 너는 영적인 존재를 창조하거나 만들어내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지.”
그가 지금 나에게 드러내고 있는 위대한 진리를 이해하기를(grasp) 갈망하였으며, 그래서 감히 이렇게 말했다. “제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조건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잠재의식(subconsciousness), 그것을 뭐라 부르든 간에, 잠재의식에 숨겨져 있는 모든 것들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런 저런 방법을 이용하여 의식의 표면으로 끌어올려야 하는데, 이렇게 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단다.” 그는 대답했다. “이와 관련된 모든 것들, 불분명하고 복잡한 이 혼란은 반드시 이해되어야 하지. 그리고 그 혼란스러운 것이란 바로 잠재된 기억을 말하지. 그러나 이를 밝혀내는 일에 있어서 시간을 그 수단으로 사용할 수는 없단다. 만약에 자아를 밝혀내는 이 일이 시간에 속해 있는 것이라면, 결코 시간을 넘어선 그것(the Timeless)이 될 수 없단다. 그러므로 시간에 속해 있지 않으며 다만 즉각적인(immediate), 다른 방법이 있어야만 한단다. 그리고 참나가) 즉각적으로 풀려나는 그곳에 실재가 있게 된단다. 그러므로 시간에 속해 있는 방법인 분석은, 결코 시간을 넘어서 있는 그것을 드러낼 수 없고 다만 자신을 더 옭아매는 더욱더 심화된 조건들을 만들어내게 된단다. 우리가 토론을 계속하다보면 너도 이를 곧 알게 될 것이야.”
“너도 이제 알고 있지, 그렇지 않니? 너의 행동의 원인은 바로 자신의 기억이라는 것을 말이야. 너는 뭔가가 되고 싶어 하지. 그리고 이렇게 뭔가 되고 싶어 하는 것 자체가 기억을 강화하게 된단다. 그런데 기억이 바로 실재를 가리고 있는 것이거든.”
“이제 우리 기억과 반응이라는 이 정신적 과정(mental process)을 철저하게 살펴보자고. 무엇보다 먼저, 사람에게는(you) 표층의(superficial layer) 의식이 있단다. 표층 의식 안에서 사람들은 살고 반응하지만 이 의식에 대해서는 거의 의식하지(know) 못하고 있지. 그 다음 층에는 기억이라는 층이 있단다. 네가 뭔가를 알고 싶어 할 때, 사람들이나 사건이나 사물에 반응할 때, 기억이 작동하게 되고, 너는 기억에 따라 행동하게 되지. 왜냐하면 기억이 없다면 반응(reaction)도, 행동(action)도 없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던가? 너의 행동은 기억의 결과이고, 그 순간 기억이 네 행동의 기준이 될 따름이야. 왜냐하면 너는 기억 말고 다른 것은 거의 모르고 있기 때문이지. 너는 자신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고, 이것이 너를 제한하고 있는 것이란다. 그리고 너는 너의 조건에 따라 반응하고 행동하게 되지. 너도 이 점을 알고 있지. 그렇지 않니?”
“네, 그렇습니다. 저도 그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기억 너머에 있는 더 깊은 층에 이르렀다고 생각해 보세나. 그러면 우리는 아주 고요한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며, 본디 그랬듯이, 거기는 뭔가 텅 비어 있는 듯(a sort of void) 할 걸세. 그럼 거기에는 총체적인 그 무엇이 완전한 그 무엇이 의식에 들어서게 되고, 그리고 이 의식(the Consciousness)은 마음의 모든 층위를 관통하고 있단다.”
“네가 뭔가가 되고자 할 때, 그것을 이루고자 너는 어떤 행동을 하게 된단다. 그리고 그 행동이란 자신의 기억의 결과인 것인데, 왜냐하면 자신의 기억 말고 다른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숨겨진 곳에서 자신을 묶고 있던 조건을 이해하게 되면, 이 모든 것들을 다 이해하고 나서야, 자신이 만들어 내지 않은 고요함이 들어서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란다. 이제 더 이상, 기억으로부터 의식의 표층으로 솟아나오는 생각의 물줄기는 흐르지 않게 된단다. 기억이란 너를 조건 짓고 있는 것인데, 기억이 생각의 형태로 흐르는 한 거기에 침묵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단다. 자기 암시나 어떤 것을 반복해 말함으로써 의식의 표층이 고요해지도록 강제할 수도 있을 거란다. 그러면 잠시 동안은 마음이 잠잠해지겠지. 그러나 너는 여전히 제한된 기억을 가지고 있고, 이 기억이 곧 혼란 자체란다. 그리고 이 기억들은 자신이 의식의 표층에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며 싸우게 된단다. 그리고 마침내 너는 그 영향력에 굴복하게 되지.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바를 이해하고 있는가?”
“네. 이해하고 있습니다(Yes, I am following).” 나는 말했다. “변화가 제 안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나는 내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하게 들여다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곧 그 모든 과정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기꺼이 기다릴 수 있었다.
그는, 마치 책을 읽듯이 내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말을 계속 하였다.
“자,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한, 그런 상황 아래에서는 자아(the self), 나(the me), 자신의 것(the mine)에 대한 관념을 강화시킬 뿐이며 따라서 자신의 조건(conditioning), 자신의 기억, 즉 자아를 강화시키게 될 따름이란다.”
“그러나 의식의 이 모든 층이 떨어져 나가는(emptying) 것은, 더 이상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존재하지 않을 때라야 찾아온단다. 그래서 네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것이란, 바로 무엇인가 되어가는 과정(the process of becoming)에 대한 것이며, 또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무엇으로) 되어간다는 것은 실재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란다. 무엇인가로 되고자 하는 것은 참으로, 실재를 가리고 있는 것을 다만 강화시키고 있을 따름이네. 그래서 네가 무엇이 된다고 할 때, 너는 자신의 기억의 연장선 위에 있을 뿐이고, 네가 얻고 있는 것이란 실재가 아니라 실재가 타버리고 남은 재(ashes)에 불과하단다. 너는 신이 자신의 안내자라고 말할지도 모른단다. 그런데 이것 역시 생각일 뿐이야. 네가 충분히 깊이 들여다본다면, 너도 곧 알게 되겠지만, 그것은 여전히 자신의 기억일 따름이거든. 이 점을 이해하고 있니?”
나는 참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내 마음에서 새벽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보여주고 있는 그 모든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내 마음은 변화의 상태 속에 있었다.
“생명이란,” 그는 말했다. “나무에 달려 있는 가지 하나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란다. 생명(Life)이란 나무에 달려 있는 모든 가지이며, 나무에 생명을 주고 있는 그것까지 포함한 것이란다. 그러므로 생명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모든 과정을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
“자, 네가 알고 있듯이, 자기 존재(your being)의 모든 상태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한단다. 자신을 제한하고 있는 모든 형태의 조건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단다. 의식의 표층의 차원은 물론이고 정신적인 차원, 소위 영적이라 부르는 차원까지에 걸쳐서 말이야. 잠재되어 있는 의식의 모든 내용물을 다 이해하고 나면, 너는, 기억이란 무엇인지, 자신의 생각이란 무엇인지, 가족생활과 관련된 자신의 생각, 인종에 관련된 관념, 자신의 종교적 믿음, 자신의 다양한 모든 경험들을 이해하게 될 거란다. 이 많은 모든 것들을 말이지! 그때 너는 그것들이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거란다. 왜냐하면 너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고 알 수 있기 때문이지. 그러나 실재를 알 수는 없는 거란다. 다만 실재가 아닌 이 모든 것들이 다 이해되고 사라지고 난 상태에 실재를 경험할 수 있을 뿐이란다.”
“이제) 분석의 과정에 대해 살펴 보세나. 분석을 하는 과정에서, 너는 모든 기억과 모든 반응과 반응의 원인을 풀어헤치려고(unravel) 하지. 그리고 그것들을 해체하고자(dissolve) 그 문제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되지. 그런데 거기에는 시간이 무한정 필요하고, 인내도 필요하고, 신경도 많이 쓰게 되지. 분석의 과정은 오래 걸리면서도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고, 결코 끝날 줄 모르는 시간의 과정에 속해 있단다. 그리고 분명히 말을 하건데, 시간의 경과를 기다리는 방법으로는 시간 너머에 있는 그것을 결코 드러낼 수 없단다. 그래서 자아의 조건을 벗겨내기는커녕 자신의 조건을 더 깊게 강화시키게 될 따름이지. 이 점을 이해하고 있지. 그렇지 않니?”
“너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너는, 현재 즉 새로운 그것을 기억을 가진 상태로 만나게 된단다. 과거와 오래된 기억과 오래된 전통과 오래된 관념 믿음 등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기억으로 현재를 만나고 있지.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너를 제한하고 있는 조건들이란다. 그래서 너는 현재를, 새로운 지금(the new)을 자신의 조건에 매여 있는 상태로 만나게 되는 것이란다.”
“네.” 나는 말했다. “그 점을 알겠습니다. 나는 어제의 반응으로 오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렇지.” 그는 말했다. “너는 이미, 하나씩 단계를 밟아가며 분석해가는 이 낡아버린 방법은, 각각의 반응을 분석하고, 하나를 풀어헤친 후 그 다음 것, 그 다음 것 등을 끊임없이 풀어헤치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단다. 너도 알겠지만, 이러한 분석의 방법을 사용할 때, 자아를 자유롭게 하려는 과정 자체가 오히려 자신을 제한하는 조건들을 심화시키게 된단다. 왜냐하면 여전히 너는 어제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으며, 앞으로도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내일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
“자, 그러므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시간 속에 놓여 져 있는 자유가 아닌 즉각적인 자유(instant freedom)가 반드시 있어야 한단다. 왜냐하면 시간에 걸쳐 있는 자유란 오히려 자신을 묶는 것이거든. 그러므로 너는 이 모든 문제를 접근하는데 있어서 시간의 요소와 기억을 반드시 배제시키고 접근해야 한단다. 쇄신이라는 것(regeneration), 변혁이라는 것은 시간에 속해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지. 그것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있는 것이야.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게 바로 문제인 것이지.”
“만약 네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들을 잘 따라오고 있다면,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깨끗하게 텅 비워지는 것을 직접 경험하게 될 거란다.”
“자신의 기억이란 모두 과거(yesterday)에 속해 있는 것이며, 새로운 지금(the NEW)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 자신의 마음에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단다. 실재는 지금 이 순간 있단다. 너는 실재를 만들어내지(create) 못해. 오직 기억들만이 만들어질 따름이고 그것들이 무한한 실재가 일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을 뿐이란다.”
“지금 너의 마음의 상태를 살펴봐라. 네가 오늘을 있는 그대로 만나고 있을 때, 더 이상 어제에 매달리지 않게 된단다. 네가 이 진리(Truth)를 이해하고 있을 때, 거짓된 것들을 이해하고(see) 있을 때, 거짓된 것들은 떨어져 나간단다. 자신에게서 조건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밖에 없단다. 그래서 네가 거짓된 것들에 대한 진리를 알아보는(see) 순간, 그 즉시 너는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단다. 과연 그렇지 않니?”
“네.” 나는 말했다. “지금 이 순간 그 자유로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선택하려는 욕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더 이상 매달리고자 하는 중심 이미지도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욕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에 관한 진리를 이해하는 순간, 나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영원한 현재(the Ever-present)가 지금 이 순간 저에게 생생한 실재(Real)입니다.”
“그렇단다.” 그는 내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네가 어떤 것에 대한 진실(Truth)을 보게 되는 순간, 너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논쟁(argue)하지 않게 된단다. 비난하거나 판단하지 않으면서, 기억과 믿음과 국가에 대한 진실(the truth)을 이해하고, 그것들이 거짓이라는 진리(the Truth)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 너는 이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단다.”
“아들아, 너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바로 진리(the Truth)란다. 거짓된 것들에 대한 진실(the Truth)을 이해하면, 즉각적인 자유가 찾아오게 되지. 그리고 이 자유로움 안에서 실재가 몸소 일을 하게 되는데, 그 일에는 제한이 없으며 모든 것을 이뤄낼 만큼 강력하지. 우리의 가슴과 마음이 진리를 통해 자유롭게 되는 순간, 거짓인 것들에 대한 진리를 앎으로써 자유로워지는 순간), 그때 진리(the Truth)가 존재한다! 진리는 그저 있을 따름이기에, 너는 그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단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자유를 느꼈다. 현재란 언제나 새로우며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살아 있는 현재였다(the present was the Living Present freed from the past, always new).
어제의 기억을 갖고 새로운 지금을 만나게 되면, 그것 역시 오래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오래된 그것이 바로 자아라는 것을 이해하고, 자아의 거짓됨을 이해하는 순간, 나를 제한하고 있는 조건들, 그것이 곧 내 자아인데, 그것이 그 때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자아란 애초부터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the nothingness of the self was realized), 그 순간 실재가 그 자리에 즉각적으로 들어섰다.
나는 내 친구가 뜻한 바를 알게 되었다. 시간에서 벗어난, 과거에서 벗어난 자유를 직접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이 말을 여기에 옮겨 적고 있으면서, 그대 역시 과거를 벗어난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임을 느끼고 있다. 그리하여 그대는 순간에서 순간으로 새로운 지금을 있는 그대로 만나게 될 것이며, 이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대는 과거에 의해서 방해를 받고 않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를 괴롭게 하는 것은 바로 과거이다. 그렇지 않은가?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스스로를 미래로 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재(the Real)는 과거나 미래보다도 더 위대하다. 실재는 언제나 현존하고 있는 살아있음 자체이다(It is a Livingness that is ever-present).
그대가 알아차리지(know) 못하는 동안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거 때문에 그대는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으며, 과거 때문에 그대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대는 과거의 거짓됨을 알아보고(know)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제한하고 있는 조건을 알아보고 그것을 이해하게 될 때, 그대는 과거와 마음의 내용물로부터 즉각적으로 풀려나 의식의) 가장 깊은 층으로 다다르게 되며 거기서는 모든 것이 훤히 드러나 있다. 그제야 나는 링-쉬-라 은수자께서, 그가 전에 전체성(the Whole)에 대해 말했던 것들에 대해서 내 친구가 세세하게 설명해줄 것이라고 말했던 바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그리스도의 요가인 것이다.
완전한 자유
이처럼 사람의 아들은 신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The son of man becomes the SON OF GOD)!
12장
계곡 전체가 눈으로 뒤덮여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올라갔다. 그 장소는 빙하 옆에 있었다. 니불룽 리충 산맥으로부터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으나 우리는 추위에 굴하지 않고 거기에 있었다. 거기에 서 있으면서 나는 동시에 조만간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내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해야 할 것인데, 한겨울에 거기를 넘는다는 것은 결코 소풍처럼 즐거울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기간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서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잘 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당시에 나는 어떤 자신감을 느꼈는데, 이 자신감은 링-쉬-라 은수자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얻은 것이며, 그 이후로 이 자신감은 결코 나를 떠난 적이 없다.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9장을 보라). 게다가 산중턱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시에 게쉬 림포체가 기다리고 있는 트락체 곰파 수도원으로 돌아갈 때에 내 친구도 동행할 것이기 때문에 여행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게쉬 림포체와 같은 위대한 현인을 다시 뵙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 따름이었다.
우리가 집 근처로 돌아왔을 때 나는 노르부가 그녀만의 신비한 주법으로 자신이 가장 아끼는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연주에는 살아 있는 무엇인가 있어 가슴에 곧장 꽂혔다. 기타 소리가 어떠한지에 대해 말할 수는 없고, 연주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경이로운 느낌만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녀는 자신의 영혼이 느끼고 있는 바의 것을 토해내고 있었다.
내 친구는 말했다: “저것 좀 들어봐라! 나는 이제껏 노르부가 저토록 깊은 느낌으로 연주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단다. 오늘밤 그녀의 영혼은 자신의 느낌을 토해내고 있단다. 그녀가 기타를 독학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을 거야.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음악가인 동시에 음악 자체야(she is the musician and the music all in one). 만약 그녀가 서양에 있었다면, 수 천 명의 사람들이 그녀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으러 모여들었을 거야. 그녀는 참으로 창조적인 예술가야.”
나는 말했다: “이게 다 스승님 덕분이 아니겠습니까(She has to thank you for that).”
“아니야.” 그는 대답했다. “네가 여기에 오고 나서야 그녀가 가슴으로부터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란다. 너는 그녀 안에 잠들어 있던 어마어마한 사랑의 힘을 깨어나게 했고, 그 사랑은 어머니이자 연인이자 아이의 사랑이 모두 하나로 어우러져 있는 것이지. 나는 이토록 사람이 완전히 변하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단다. 그녀는 거의 성모 마리아라 할만 해(she could almost be the Madonna).”
“네.” 나는 말했다. “과연 그렇습니다. 그녀는 이제껏 제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으로 그녀를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녀도 너와 함께 기꺼이 가고자 할 테지만, 그럴 수는 없단다. 의심할 여지없이 너희 둘은 쌍둥이 영혼이야. 그리고 곧 그때가 올 것이야. 아마 이번 생에서는 아니겠지만 반드시 올 거야. 너희 쌍둥이 영혼이 보다 가까운 곳에서 가까운 시간대에서 다시 만나게 될 때가 말이지. 그리고 나는 네가 이 사실을 그녀에게 말해주기를 원한단다. 그러면 네가 떠나고 난 후에 그녀가 받을 고통을 덜 수 있을 거야. 이 말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지탱하게 해줄 거야.”
우리가 현관에 도착하자 노르부는 마중을 나왔다. 그녀는 이전보다도 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노르부, 나는 당신이 연주하는 것이 그저 사랑스러울 따름이에요. 당신은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에요. 당신을 데려가면 좋겠지만, 스승님(the Master)께서 말씀하시기를,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답니다. 노르부, 당신도 알고 있듯이,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고, 이 사실을 당신이 기억해주었으면 해요. 내 사랑은 소유하려는 사랑이 아니라 영혼을 밝혀주는 사랑이랍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빛은 결코 희미해지지 않을 것이에요. 나는 당신이 사랑의 불꽃이 계속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간직하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안에 머물고 계시며 우리를 함께 묶어주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 영(the Christ Spirit)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곳에 없게 될 때 스승님(the Master)께서 말씀하시겠지만, 영 안에서 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저도 이미 알고 있는 걸요.” 그녀는 말했다.
그때 나는 내 친구가 말했던 내용을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은 환하게 빛이 났으며 그녀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활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아요! 저는 지금 만족해요! 영 안에서 분리란 결코 있을 수 없어요.”
우리 셋은 모닥불 주위로 둘러앉았으며, 거기서 내 친구는 이제껏 그가 한 말 중에서 마음을 일깨우는 가장 고무적인(enlightening) 이야기들 중 하나를 하였다.
그는 게쉬 림포체가 하던 것처럼 말을 시작하였고,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여행에 대해 말해주었다. 사실상 나는, 그가 게쉬 림포체가 되어 몸소 말하는 듯 느껴졌다.
그는 이런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내가 너를 칼림퐁에서 만난 지 이제 21주가 지났고, 네가 이곳 잠사르에 도착한 지는 오늘로써 정확하게 8주가 되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 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지. 지난 몇 주 동안 우리는 참으로 많은 일들을 했었고, 이로 인해 나는 기쁘단다. 네가 칼림퐁에 다시 돌아갈 때 즈음에는 정확히 30주가 될 거야. 이게 바로 우리가 짠 계획이란다.”
“노르부와 나는 트락체 곰파 수도원까지 너와 함께 갈 것이야. 그리고 거기서 너는 게쉬 림포체와 2주 동안 머물게 될 것이고. 그러면 게쉬 림포체가 오크(Ok) 계곡까지 동행할 것이고, 거기 도착하면 게쉬 림포체와 그곳의 수도원장과 함께 3주 동안 있을 것이란다. 게쉬 림포체는 너를 더욱 철저하게 준비시키기 위하여 너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고 있단다. 그리고 네가 이곳을 완전히 떠나기 전에 특별한 모임이 준비될 거야. 그 모임에는 퉁 라(Tung La), 창 타파(Tsang Tapa), 말라파(Malapa), 다르 창(Dar Chang), 그리고 나도 역시 있게 될 것이란다. 게쉬 림포체는, 링-쉬-라 은수자께서도 그 모임에) 와서 너에게 말할 수 있을 때 모임을 갖고자 열망하고 계신단다. 전에도 링-쉬-라 은수자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셨던 것처럼 말이야. 그러고 난 후에 내가 너를 처음 만났던 곳인 칼림퐁까지 돌아가는 것을 배웅할 거란다. 그러고 난 후에는 너 홀로 가게 되겠지. 몸으로는 혼자 가는 것이겠지만 영적으로는 혼자가 아니란다.”
“너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너와 함께 갈 것이란다.” 그는 노르부를 보면서 말했다.
“예. 참으로,” 그녀는 대답했다. “당신을 사랑하는 우리의 생각이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할 것이에요.”
“그리고 나도 역시 내 생각에 사랑을 담아 여러분에게 보낼 것입니다.” 나는 말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스트랄체(in the astral)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여 여러분도 방문할 것입니다. 이곳은 우리가 서로 만나고 사귀었던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어요. 너무나도 생생하고 사랑스러운 기억을 말이지요. 바로 이곳에서, 참된 사랑(true Love)이 무엇을 뜻하는지 배워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렇단다.” 내 친구는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바로 사랑이란다. 사랑은 그밖에 다른 모든 것들 너머에 있단다. 사랑은 우리에게(you) 완전한 자유를 줄 뿐만 아니라 모든 문을 열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기도 하단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의(your) 가슴과 마음은 둔감하게 된단다. 너는 사회적으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종교 예식이나 그밖에 다른 것들에 자신의 모든 시간을 할애하기도 할 거야. 그러나 너에게 사랑이 없다면, 네가 하고 있는 도덕적 가치(virtue)란 그저 관념에 지나지 않는단다. 그리고 사랑이 없다면 그 어떤 활동을 한다고 해도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는 없는 것이란다.”
“자신이 신을 믿는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네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Love)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못한단다. 자기가 신을 믿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절반을 파괴하고 지금도 고통 받고 있는 수 백 만의 사람들을 불구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던가? 소위 믿는다고 하는 자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조금이라도 사랑을 품고 있기는 하던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단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종교적 갈등(intolerance)은 소위 믿는 자들에 의해서 야기되고, 이것이 종교적 분쟁으로 이어지게 된단다. 그들은 신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가슴은 사랑이란 전혀 없어 공허하단다. 세상 사람들의 절반은 나머지 절반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소위 무엇인가를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니던가?”
“우리가 관념이나 믿음에 휘둘리지 않고 다만 인간으로서 존재할 때에만, 우리는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거란다(We can only live happily together when we are human being). 그때 우리는, 우리 모두를 위해 필요한 음식과 옷과 기타 생필품을 만들어 내기 위한 생산 수단을, 인색한 마음이나 이기심 없이, 공유할 수 있을 거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수 백 만 명의 사람들이 신이라 부르는 초월적 지성(super Intelligence)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단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이 관념에 동일시한단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고 과정을 투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렇게 하는 것으로는 사랑을 결코 알 수 없단다.”
“한 사람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 너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란다. 그때 자신의(your) 가슴은 사랑으로 가득 차오르고 모든 사람을 향한 애정(affection)으로 따뜻해지게 되지. 너에게 사랑이 없을 때, 너는 말(words)로 먹고 사는 것이고, 말에 의해 삶이 유지되는 것이야. 모든 것의 아버지가 되시는 신을 자신이 경배한다고는 하나, 너는 종교적 편견과 사람들을 여러 부류로 나누려는 마음을 버리려 하지는 않는단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슴은 공허하고 마음은 관념과 믿음들로 꽉 차 있기 때문이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너는 반드시 가슴에 사랑(Love)을 품고 있어야 한단다. 그리고 지금 이 말은 어떤 개념에 대한 진술(statement)을 넘어선 불멸의 진리란다. 너 자신이 마음으로써 사랑을 길러내고 키워낼 수는 없는 것이란다(You cannot cultivate Love). 마음이 사랑을 방해하지 않을 때, 사랑은 즉각적으로 머뭇거리지 않고 직접 들어서게 된단다. 너의 가슴이 사랑 없이 텅 비어 있을 때, 자신과 다른 이들 사이에 친교(communion)란 존재할 수 없는 거란다.”
“친교가 없을 때에는 사랑 역시 존재하지 않는단다. 사랑이 있을 때에는 거기에는 가슴에 불을 지피는 따스함(warmth)이 있게 되며, 그때에는 말로만 풍성한 심리학이나 철학이 들어설 필요가 없게 된단다. 사랑은 그 자체로 영원하기 때문이지.”
“사랑은 사람들의 삶에 꼭 필요한 핵심 요소(factor)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의 삶 속에는 이 요소가 빠져 있단다. 사람들은 서로 관계 맺고 살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온화함이, 친절함이, 자비가 결여되어 있단다. 그래서 어떤 문화를 공유하고 세계를 재건한다면서 어떤 단체에 들곤 하지만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단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을 제외하고는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지. 그들의 마음과 가슴은 세계 재건에 대한 계획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들에게는 꼭 필요한 한 가지 요소(one ingredient)는 텅 비어 있단다. 그런데 그것 없이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데 말이지.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지, 제도나 어떤 일에 대한 청사진, 또는 소위 개혁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야. 전에 계속해서 실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you)은 그 실패의 연장선상에서 단체를 만들고 또 만들고 한단다. 그리고 이런 실수는 언제까지고 반복될 것이란다. 왜냐하면 그 시도들 속에는 선의(goodwill)와 사랑이라는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이란다. 선의와 사랑만이 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도 말이지.”
“관계맺음(relationship)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며, 사랑과 선한 마음(Love and goodwill)이 없다면 관계맺음도 있을 수 없단다. 그래서 이는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 더 큰 혼란으로 끝나버리는 제도나 개혁에 대한 문제가 아닌 거야. 관계에 대한 이해가 존재하지 않는 한 올바른 행동(right action)도 있을 없는 것이란다. 마찬가지로 자아에 속해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는 것이고. 자기-이해(self-knowledge) 없이는 참다운 관계맺음도 존재할 수 없단다. 자신을 진정 이해하고 있을 때라야 지혜가 있게 되고, 지혜가 있는 곳에 사랑도 있게 된단다.”
“사랑이 없으면, 마음이 제 아무리 명석하다 하더라도,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란다. 사람들 서로 간에 참다운 관계맺음이 없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더 큰 혼란을 지어내게 될 따름이란다.”
“너는 이제껏 사랑과 선의에 관한 책들을 읽어왔을 테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그저 말의 잔치로만 풍성하거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란다. 너는 자신 안에서 실재를 재발견해야(rediscover) 한단다. 신에 대한 믿음 뒤로 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가슴이 공허(empty)하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실재를 재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란다. 세상에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창조적 지성(Creative Intelligence)과 창조적 이해(Creative Understanding)밖에 없단다. 그렇다면 세상이란 무엇인가(and who is the world)? 너와 나, 그리고 우리와 같은 다른 모든 사람들, 이렇게 우리 모두가 세상인 것이란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말했다: “내가 지금껏 말을 했는데, 나는 마치 너희 둘에게 직접 말을 하는 것처럼 표현을 사용했단다. 이는 너희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지. 자신이 아니라 제 3자에 관해서만 말을 하면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효과가 사라지게 되거든.”
“네. 맞습니다.” 나는 말했다. “스승님(you)께서 말씀하실 때, 내 자신을 제한하고 있는 조건들에 대해 깊이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그는 말했다. “자기-이해(self-knowledge)만이 지혜를 가져오게 된단다. 그리고 그 지혜와 더불어 자신에게 사랑(Love)이 있게 되는 것이고, 사랑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란다.”
이렇게 밤에 함께 모여 나누는 대화(talks)는 내 삶의 크나큰 기쁨이었다. 이렇게 나누는 대화는,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단죄하지 않으며 두려움 없이 스스로를 보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나는 노르부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토록 완전한 친교 속에서 대화를 하며 보내는 아름다운 밤을 더 이상 당신과 함께 지낼 수 없어 아쉽기도 하고 당신이 부럽기도 해요. 이렇게 스승님과 당신과 대화를 나누면, 그 대화는 나를 놀라울 정도로 변화시키는데 말이죠.”
“나에게 있어서는 말이에요,” 그녀는 대답했다. “나는 당신이 오기 전까지 참된 사랑(true Love)이 무엇인지 몰랐어요. 나는 마치 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꽃봉오리와도 같았지요. 우리는 함께 여기에 앉아서 사랑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들었고, 그 진리는 우리를 흠뻑 적셨어요. 그리고 이제 내 가슴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요. ‘한 사람(one)’을 진정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사랑을 이해하고 있는 지금 나는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고, 내가 이해하고 있듯이 다른 이들도 스스로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어요.”
이 말을 마치고 그녀는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준비하였다.
서로를 소유하려는 마음 없이 완전한 자유 안에서 우리 모두 참된 사랑(Love)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과, 뭔가를 숨기거나 숨기려 하는 것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지 간에 부끄러워하지(self-conscious) 않고 서로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경험(thing)이었으며, 이에 대해 내 친구에게 말했다.
“맞는 말이란다.” 내 친구는 말했다. “우리는 거짓된 것을 믿고 있고, 그럼으로써 사실상 우리가 그것을 유지시키고 있는 것인데,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는데 실패하게 되는 것이지. 우리는 마음이 있다고 믿고 있어 거기에 붙들리고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 계속해서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것이란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비참한 이 처지를 만들어 낸 원인을 이해하는데 실패하게 되는 것이지. 이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자유가 즉각적으로 들어서게 된단다.”
“우리는 계속해서 자신만의 의견이나 믿음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이고, 새로운 지식이 마음에 알려짐에 따라 변하게 되는 것이란다. 그러나 변할 수 있는 것(changeable)은 실재가 아니야. 왜냐하면 실재는 결코 변할 수 없기(unchangeable) 때문이지. 실재-신-사랑은 결코 변할 수 없으며 우리 안에 언제나 현존(ever-present)하고 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변하는 것은 결코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볼(discern) 때라야 이를 깨닫게 될 거란다.
“질병과 죽음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 관념을 건강과 생명에 관한 생각으로 바꿈으로써 자신을 보다 낫게 만든다 할지라도, 이것 역시 마음의 영역에 속해 있는 일이란다. 네가 이 사실을 깨닫고 있을 때, 이러한 관념과 관념과 대립되는 것들이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에 실재가, 자아가 애쓰지 않아도(without effort) 들어서게 된단다.”
“실재는 선도 악도 모르며 또한 질병이나 죽음도 모른단다. 사람만이 이러한 믿음들을 만들어 내어 자신을 슬픔과 갈등 속에 묶고 있는 것이란다.”
“자기 자신을 이해함으로써 진리-실재(Truth-Reality)를 경험할 때, 너는 더 이상 그것(It)에 대해 견해나 생각 등을 갖지 않게 된단다. 그저 알고 있을 따름이지. 그러나 네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다른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이해의 근원은 자신 안에(within you) 있기 때문이란다.”
“자신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너는 반드시 네가 다른 이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이해해야 한단다. 또한 자신의(your) 반응, 자신의 두려움, 타인이나 다른 집단을 향한 적개심, 자신의 믿음 등과 같은 것들도 이해해야 하며 방금 말한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지도 알아야(see) 한단다. 자기가 다른 이에게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자신의 생각-느낌-반응(thought-feeling-reaction)의 모든 과정을 알아보게 되고, 이로써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단다. 네가 자신을 이해하게 될 때,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스스로 만든 조건들에 의해 제한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란다. 이런 자신의 조건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계속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도 알게 될 것이란다. 너는 자신의 조건, 자신의 믿음, 자신의 견해, 자신의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야. 이 모든 것들은 오직 너의 마음 안에서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지. 그리고 그것들은 네가 그것들에게 부여하는 힘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힘도 갖고 있지 않단다.”
“만약 너의 마음이 고정 관념(fixed ideas)과 믿음들에 의해 통제를 당하고 있다면, 너는 그 어떤 것에 대한 진리도 결코 알 수 없게 된단다. 왜냐하면 너는 거짓된 것(what is false)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지. 그러나 너의 마음이 이해를 통해 유연하고 자유롭다면 너는 참된 의미(the True meaning)를 경험하게 될 것이야. 왜냐하면 그때 너는 거짓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란다. 거짓된 것(the false)은 네가 창조하는 것이지만, 참인 것(the True)은 네가 창조하지 못하는 것이란다. 참인 그것은 언제나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란다(for It is Ever-Present). 그때 너는 자신이 어떻게 다른 이들과, 세상과 어떻게 연결(relationship)되어 있는지 알게 될 것이란다. 네 안에 있는 완전한 그것(the Whole)은 다른 모든 이들 안에 있는 완전한 그것과 같기 때문이란다. 너는 완전한 그것 자체로 말미암은 결과인 것이야. 완전한 그것의 한 부분으로서의 결과가 아니란 말이지. 왜냐하면 완전한 하나(Wholeness) 안에서 분리(division)란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란다. 이것이 바로 실재로서 너는 이에 대해 아무런 생각(opinion)도 할 수 없으며 의심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실재란다. 이 사실에 대한 이해만이 홀로, 자신과 세상에 꼭 필요하면서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란다. 개인에게 먼저 그 변화가 올 것이고 그리고 나서 곧 세상에 그 변화가 나타날 것이란다. 세상이란 개인들이 모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 만약 네가 이 사실을 깊이 들여다본다면, 지금 세상이 있는 모습대로 만든 것은 바로 우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란다. ‘우리가 씨를 뿌린 대로, 우리는 거두게 된다.’ 내면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바깥도 그와 같이 될 것이란다(What the inner is, so will the outer be)”.
“너의 마음을 들여다보아라. 그러면 사회를 지금의 모습대로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생각-느낌-반응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란다. 사회란 우리들 자신이 투사된 것이며, 세상 역시 그러하단다.”
“자신이 잔인하고, 적개심으로 가득하고, 독단적이고, 탐욕스럽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움으로 가득할 때, 너의 몸과 환경 역시 자신의 그런 마음 상태에 따라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란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너는 철저하게 정직해야 한단다(To study oneself requires complete honesty). 너는 반드시 자신의 생각-느낌-반응에 대해 자각해야 해. 특히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유심히 살펴야 한단다. 그러면 자신이 무엇인지 너는 알아보게 될 것이야. 또한 무엇이 실재를 가리고 있는지도 알게 될 것이고. 자아가 얼마나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지 알게 될 것이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내 뒤로 물러서라. 사탄아.’ 사탄이란 곧 자아를 뜻하며, 자아는 거짓말쟁이요, 속이는 자이며, 실재를 가리고 있는 것이란다.”
“실재가 직접 일하는 그 장엄함과 비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단다. 그것은 창조적 지혜이며, 사랑이자, 권능(Power)으로서, 사람의 마음을 넘어서 있단다. 거짓된 것이 죽고 나면, 그 자리에 실재가 나타난단다(manifest). 그때가 되면 거기에 참된 관계맺음이 있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관계란 자유와 행복과 번영과 사랑과 애정을 뜻한단다.”
“마음은 수많은 껍질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마음의 보다 깊은 곳에 있는 껍질들 속에서 숨겨져 있는 자아도 있단다. 그것은 아기 때부터 자신을 가두는 관념의 껍질들을 계속해서 쌓아 왔으며,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때 그 일을 하도록 만드는 동기의 대부분은, 오해의 연속이라는 사슬 뒤편에 숨겨져 있단다(most of our motives are hidden behind a series of misconceptions). 이것이 바로 자신의 내면이 혼란스럽고, 화로 가득 차며, 편견에 사로잡히게 되는 원인이란다. 그리고 서로 충돌하는 욕망들 사이에는 매우 격렬한 다툼이 있게 되는 것이지. 우리는 칭찬하기도 하고, 수긍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고, 단죄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되는 이 모든 이유는 바로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 조건들 때문이고, 우리는 이 조건들이 실재(real)로 존재한다고 믿어버림으로써 이런 조건들을 영속시키고 있는 것이지. 이것이 얼마나 거짓된 것이며, 어떻게 해서 이런 조건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전까지는 거기서 풀려날 수 없단다. 자아가 이 모든 것들이 허구라는 것을 이해하는 순간, 자아가 얽매여 있던 조건들이 자아와 다른 것이 아니라 곧 자아 그 자체라는 것을 이해하는 순간, 자아는 스스로를 투사하는 것을 멈추게 되어버리지. 왜냐하면 그 순간 자아는 자아 자신이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자아가 곧 악마(the devil)이며, 자아는 반드시 이에 대해 알아야 한단다. 그러면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을 투사하기를 원하지 않게 되고 따라서 활동을 멈추게 된단다. 그때 사람의 생각이나 의지로 만들어 내지 않은 침묵이 존재한단다. 자아가 활동을 멈출 때, 사랑이자 지혜이자 창조성(Creativeness) 자체인 실재가 자아의 노력 없이 들어서게 된단다. 자아가 의식이라는 길 바깥으로 사라지게 될 때 실재는 활동하게 된단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오실 길을 깨끗하게 하라’는 말이란다(Reality operate when the self gets out of the way. It is ‘clear the way for the Lord’).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가?”
“네.” 나는 말했다. “지금 말씀하고 계신 내용들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마음의 표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차리고 있을 때, 저는 제 마음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아보게 된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표면을 이해하고 나면 보다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의 층들은 자기 안에 숨겨져 있던 갈등들, 그리고 복잡한 생각-느낌-반응의 사슬들을 내보이게 됩니다. 이것이 이해되고 나면, 마음은 그 어떤 강제(compulsion)도 없이 침묵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침묵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실재를 가리고 있던 것은 이제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에는 실재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참으로 맞는 말이야. 내 아들아. 그러나 지금 네가 말한 것은 지적인 앎에 그쳐서는 안 되는 것이야. 반드시 그것은 실제적인 변모로 이어져야 해(it must be active transformation). 생명이란 하나 없는 개념이라는 나무 토막을 마음이 포기하게 되면, 실재 생명(Real Life)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지. 그러나 네가 그저 말만 지어내고 있다면(spin), 이내 너의 마음은 관념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고 너의 가슴은 사랑이 없어 공허해지게 될 것이란다.”
“네.” 나는 말했다. “사람은(you) 자신이 무엇인가를 어떠한 방식으로 믿고 있을 때, 어떻게 해서 자신이 그러한 방식으로 믿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반드시 알아내야 합니다. 만약 자신의 믿음과는 다른 종류의 믿음에 대하여 반감(antagonistic)을 갖고 있다면, 왜 그런지를 살펴보아야합니다. 그러면 이런 것은 그저 믿음의 문제일 뿐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앞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왜 아무 것도 믿지 않는지에 대한 문제를 다뤄야 합니다. 자신이 어떤 편견을 갖고 있을(prejudiced) 때에도 마찬가지로 왜 그런지 반드시 그 이유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단다.” 그는 말했다. “그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단다. 문제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너는 반드시 그것에 직면해야(face) 하는 것이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관념이라 할지라도 예외 없이 반드시 이해되어야 한단다. 그러면 자신이 스스로의 생각에 의해 어떻게 묶여 있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란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자유란 결코 있을 수 없단다. 이는 마음을 완전히 비워내는 과정(thorough cleansing process)으로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란다. 그리고 종종 이 작업은 소위 뭔가를 믿고 있는 자들에게 더 어렵게 느껴진단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내 생각-느낌(thought-feeling)을 그저 통제하려 하고 제동을 걸려고 하거나,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식으로 그저 말만 하는 것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런 조건들에 얽히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제 생각-느낌을 마냥 통제하려고만 든다면, 그것들에 대한 이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규정하고 있는 조건들에 대한 이해만이 나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렇단다. 내 아들아. 참으로 맞는 말이란다. 저항하는 태도 그리고 뭔가를 거부하거나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태도는 자신을 규정하고 있는 조건들을 지키려고 분투하는 과정에서 자신을(you) 더욱 더 분별없고(thoughtless) 편협하고 보잘것없게 만든단다. 자신의 무지를 지키겠다고 싸우고(struggle) 있는 셈이지.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진리(the Truth about yourself)를 알게 되는 순간, 이러한 투쟁은 그치게 된단다. 그때 마음은 한없이 고요해지고, 그 고요함 속에 실재가 있게 되는 것이지.”
“지금 말씀하신 그것을 지금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신 말씀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렇단다. 내 아들아. 자신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그 안을 반드시 들여다보아야 한단다. 그러면 마음은 스스로 속도를 늦추게 된단다. 그러나 마음을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생각을 통제하기 위해 완력(force)을 사용한다든가 마음을 분석하려든다면, 이에 대립되는 것들을 만들어 내게 된단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혼란만 더욱 가중되는 것이지. 그러나 만약 네가 자신의 생각-느낌을, 통제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으며 알아차린다면(discern), 그리고 이와 동시에 마음을 이루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하릴없이 바라볼 수 있다면, 심지어는 고차원적 생각(이것 역시 자신의 사고-과정에 한 부분일 따름이다)마저도 이렇게 이해하고 바라볼 수 있다면, 너는 그것을 자각하게 될 것이야. 통제(restraint)에서 자유롭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판단에서 자유로우며, 비교에서 자유롭고 결코 변하지 않는 그것을 말이야. 그러면 너는 의미심장한(significant) 그것을, 모든 사고 과정을 넘어서 실재이며 영원하고 항상-현존해 있는 그것을 자각하게 될 것이란다.”
“실재를 자신과 독립된 실체로서가 아니라 자신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전체로서 자각하는 가운데, 이 모든 생각의 과정을 끝까지 따라가야 한단다(You must follow this up with awareness of the Real, not as a separate entity but as the whole). 이렇게 할 때, 지적인 혼란과 믿음과 견해와 분리에서 벗어난 완전한 자유가 주어지게 된단다. 너 역시 그리스도의 요가를 깨닫게 될 것이야. 마스터 예수께서 깨달으셨던 것처럼 말이지(You will know the Yoga of the Christ as the Master himself did). 네 안에 언제나 계시는 아버지께서 몸소 일을 하시게 될 것이며, 이는 자아(your)의 어리석고 보잘것없으며 편협한 조건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직접 당신의 일을 수행하시게 되는 것이란다.”
“종교적으로 된다(Being religious)는 말을 그 근원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의 요가 안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을 뜻한단다. 종교적으로 된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종교 조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그렇게 한다면 너는 종교적이지 못하게(irreligious) 된단다. 특정 종교 조직에 의존하게 될 때 거기서 네가 갖게 되는 믿음 때문에 다른 이들과 분리되고 다른 이들과 싸우게 되는 것이지.”
“분리 의식은 각종 불화, 경제적 재난, 전쟁, 기아, 탄압을 정당화해온 것에 책임이 있단다. 그리고 사람 자신이 바로 그 원인이지. 사람은 자신의 바깥으로 눈을 돌릴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마음 안을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며, 자신을 정면에서 똑바로 응시하면서,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인, ‘분리(separation) 의식’ 알아보아야만 한단다.”
“사람은 스스로에게 이런 저런 이름과 소속을 갖다 붙이고 있지만, 하나의 생명(Life)만이 있을 따름이고 그 생명이 모든 이를 살게 하고 지탱하고 있는 것이란다.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을 때, 모든 이에게 자비로우며 연민을 느끼는 인간(the Man)을, 어떤 종교나 교리, 사회 단체에 의해서도 속박당하기를 거부하는 자유로운 인간을 이해하게 될 것이란다(when you understand this you will understand the Man who showed mercy, compassion to all, and refused to be limited by any nation, dogma or society).”
“내 아들아, 참된 종교는 온갖 교의와 민족(nationalities)과 관념 저 너머에 있는 것이란다. 이를 아는 것이, 만물 안에 있는 하나(the One-in-All), 하나 안에 있는 만물(the All-in-one)을 깨닫게 되는 출발점이란다. 그리고 이 앎이 세상의 평화와 번영으로 가는 길이며, 각자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란다. 우리가 본래 말의 의미처럼 참으로 종교적일 때, 그 결과로서 영혼과 세상 안에 평화가 깃들게 될 것이야. 그렇게 되면 분리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모든 영혼들 안에서 그리스도-영(Christ-Spirit)은 깨어나게 되고, 내적인 평화와, 그리스도-영의 지혜와 사랑이 반드시 나타나게 될 것이란다.”
“네.” 나는 말했다. “그저 분리와 교의만을 설교하는 자들이 가르치는 방식을 두고 주(the Master)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이 위선자들아.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이사야가 예언한 말은 참으로 너희들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입술로는 나를 공경한다고 하나 그들의 가슴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그들의 예배는 공허하도다. 그들이 가르치고 있는 교리(doctrine)란 사람의 가르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렇단다. 내 아들아.” 그는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전통과 교의와 교리가 사실상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셨단다. 오히려 그것들은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지. 사람들은 그것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지한 상태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자신이 그것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란다. 그들은 화려한 행렬(pomp), 종교 예식, 전통 등을 숭배하고 있지만, 그들이 숭배하고 있는 그것이 그들을 파괴시키는 것이란다. 사랑과 애정이 참혹할 정도로 부족한 곳에서 그들은 입으로만 떠들어 대고 있지만, 분리, 적개심, 다툼, 전쟁, 비참한 이 상태는 여전히 남아 있단다.”
“올바른 생각(right thinking)이란, 네가 거짓된 것을 이해하고 있을 때라야 올 수 있는 것이란다. 거짓된 것들을 이해하고 나면, 거짓된 것들에 관한 진실(the truth)을 알게 된단다. 마음이 이 진실을 스스로 이해하고 나면, 그때 올바른 생각이 가능해진단다. 올바른 생각이란 곧 자유이며, 조건들로 제한된 생각이란 곧 억압이란다.”
“네.” 나는 말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들은 우리가 그토록 빠져 있는 심리학이나 철학, 체계나 관념으로도 결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분리 의식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날마다 목격하고(see) 있지만, 그 안에 있는 위험성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정체성(nationalities), 종교적 믿음, 정치적 이상들에 의해 묶여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도살하는 이에게 끌려가는 양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맞는 말이란다. 아들아. 그런데 거기에는 조금 더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단다. 자아와, 자아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aware of) 것을 통해서만 너는 자신의 제한된 생각을 발견(discover)하게 된단다. 너 자신(you)은 그저 다른 사람을 베끼고 있을 뿐이며, 자신은 아직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없고 다만, 너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큰 불행을 초래하는, 적개심을 품고 생각하는 습관에 젖어 있을 뿐이라는 것을 너는 반드시 이해해야 한단다.”
“사물을 볼 때 너는 반드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단다. 그 사물을 보는 본래의 참된 관점에서 말이지(You must see things as they are, in their true perspective). 그러면 마음 자신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참으로 알아차린(discern) 그 마음 안에서 모든 혼란은 없어지게 된단다. 마음에 있는 이 모든 것들을 마음 저편으로 털어버리고 나면, 지혜이자 사랑이며, 항상 현존해 있는 실재(the Ever-Present Reality)가 온 인류 모든 이의 가슴마다 들어서게 된단다.”
그이께서 눈을 감고, 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는 이러한 말들을 하셨을 때,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를 보내신 그분은 언제나 내 옆에 계십니다.”
“그분께서 기뻐하실 일을 내가 항상 하고 있기 때문에 그분은 결코 나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나는 있는 자 그로다. (I AM THAT I AM)’
“나는, 내 생명의 나무에 달려 있는 수많은 가지 위에서 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푸른 잎들 사이로 내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고, 내 노래를 들은 자들은 자신들이 나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 생명만이 그들의 진정한 양식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모두 흘러간다 할지라도, 나는 시간을 넘어서 변함없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 잠들어 있는 영혼들이 언제라도 내 말을 듣고 깨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노래의 리듬은 ‘나의 무한한 자유로 들어오라’고 부르는 내 목소리를 들으려 기다리고 있는 모든 영혼들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그래서 나는 잠을 깨고 일어나서 그리로 갔습니다(So I arose and went).”
“나는 일어나, 갔습니다.”
* * * * *
그가 장엄하게 말하고 있을 때 노르부는 내 곁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 손으로 노르부의 손을 잡고 그의 얼굴을 응시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얼굴에서 그리스도 그분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and there we could see the face of the Master himself, shining like the sun). 앞으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강렬한 경험이었다.
그날 저녁은 마치 최후의 만찬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위해 마련된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내가 온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히말라야를 넘어야 하는 긴 여정을 시작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의 기도는 내가 잠사르에 있는 그분의 암자에서 함께 머물며 경이로움을 체험한 것에 대해 드리는 감사의 기도였다. 그곳에 언제까지라도 머물 수 있기를 나는 얼마나 원했는가.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내 친구는 내 생각을 읽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언제나 머물 수 있기만을 우리 역시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바라고 있단다. 그러나 너도 알고 있듯이, 이 일을 지도하고 있는, 우리보다 높은 존재들이 우리와 함께 있단다. 그 존재들 안에도 우리와 같은 생명이 흐르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우리 자신의 개인적 욕망보다, 더 높은 것들을 먼저 하는 우리에게 마침내 크나큰 축복이 있게 될 것이란다.”
함께 식사를 들기 위해 우리는 최후의 만찬 식탁에 앉았다. 우리 모두 이것이 마지막 식사라는 것을 알았지만, 우리는 모두 행복했다.
노르부는 그녀의 특별 요리들 중 한 가지인 차가운 닭고기에 소스를 끼얹은 것(cold-jellied chicken)과 삶은 계란과 그녀가 직접 만든 특별한 빵과 교유기에서 갓 꺼낸 야크 버터를 마련해 내놓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해야 했지만, 그날만큼은 다른 날보다 더 늦게까지 거실에 남아 있었다. 나는 밤을 샐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내가 생각하기에 내 친구와 노르부도 그렇게 느꼈을 것 같다. 그녀는 기타를 치며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가락을 연주하면서 그녀가 직접 작곡한 그녀만의 사랑 노래를 불렀다. 그때 그녀는 그토록 아름답게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녀는 타고난 창조적 예술가였다. 그녀는 악보 없이 절대 음감으로 연주하고 노래 부를 수 있었으며, 그녀의 음악에는 크나큰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었으며 또한 창조적이며 독창적이었다. 그녀의 음악은 음악의 모든 영역의 색깔들을 그 안에 갖고 있었다.
장작은 이제 거의 다 타버려 방 전체를 붉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셋이 가깝게 모여 앉아 있을 때 평화가 이 모든 장면(scene)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면서 나는 노르부가 채웠던, 그러나 이제 그와 똑같이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내 마음의 빈 공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의 생각이 같은 영의 지도하에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을 동안 침묵이 거기에 있었다. 우리 모두 헤어짐(parting)의 순간이 그토록 가까이 왔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영혼 안에 계신 하나(One)이신 그리스도 영 안에서 헤어짐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이 우리를 함께 연결시켜주었으며, 우리의 기억은 아침 이슬처럼 언제나 새로울 것이다.
내 친구는 먼저 일어나더니 내일 아침 여행을 준비하러 간다고 말하면서 나갔다. 그러자 노르부가 내 옆으로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었다. 그녀가 이렇게 한 것은 처음 있었던 일이며, 그때 깊은 만족감과 오랫동안 바래왔던 것을 이뤘다는 성취감이 그녀에게서 느껴졌으며, 나 졌으며느꼈다. 그녀는 얼마 안 있어 잠들었으며 나 졌으며잠들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는지 모르겠다. 한 순간이었는지, 한 시간이었는지, 한 세기였는지 말이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수 세기 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었으며 노르부 졌으며같은 경험을 하였다. 우리 둘 다 동시에 깨어난 듯하였다.
내 친구가 우리 앞에 서 있었으며 우리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아들아, 딸아(My children). 너희 둘은 몸을 벗어나 있는 상태(out-of-the-body state)를 함께 동시에 경험한 것이란다. 이는 참으로 완전한 축복이지. 그 상태는 너희들이 몸을 떠나 있을 때 겪을 수 있는 상태란다. 너희는 보다 높은 상태에서 영혼의 경험 상태로 들어간(embraced) 것이란다. 서로 하나가 되고자 하는 너희 바람의 표현이 영적으로 성취되어 결합하게 된 것이란다. 그러나 그 경험이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말로 옮겨낼 수는 없으며 다만 그 향기만 가져올 수 있을 뿐이란다(The expression of your desire has been consummated spiritually but you can bring back with you only a fragment of what it is really like).
나는 너희를 지켜보았는데, 너희 둘 다 동시에 몸을 떠났으며 또한 동시에 몸으로 돌아왔단다. 그리고 너희는 완전하게 동일한 것을 경험한 것이야. 영혼의 상태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서 너희의 바람을 성취한 것이지(the consummation and culmination of your desire in the soul-state). 이것은 몸 안에 있는 생명의 힘(the Life Force)이 자신의 영적 근원(its Spiritual Source)으로 거슬러 올라갈 때 모두가 경험하게 될 환희의 절정(ecstasy)이라 할 만 하지.
노르부는 이제 자신은 완전히 만족하여 행복하며 결코 그 어디에도 매여 있을(defined) 수 없다고 말을 했다. 더 이상 이별에 대한 생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생각은 사라져버렸다. 이는 영혼의 포옹(embrace)에 따른 결과였으며, 신체적 접촉을 계속하고 싶다는 욕구는 사라져버렸다.
이 경험은, 가슴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고 소유하려는 욕심이 마음에 텅 비어 있을 때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참된 사랑은 주는 것이자 받는 것으로서, 이에 대해 의식하지 않는 상태이다. 그것은 설명이 아니라 다만 경험될 수 있을 따름이며, 이를 경험할 때 그 결과로 깨달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말을 모두 사용한다 하더라도 결코 설명될 수 없는 그것을 결코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경험은 참으로, 살아계신 현존의 축복이었단다.” 라고 내 친구는 말했다. 나를 깨우치게 하기 위한 그의 지극한 수고는 크나큰 기쁨으로 보답을 받았다. 이것이 요가를, 그리스도의 요가를 수행해 나가면서 성취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것이다(“It was truly a benediction of the Living Presence,” said my friend, and the culmination of his efforts was crowned with exaltation. This is the highest attainment of the Yoga - the Yoga of the Christ).
13장
머리 위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짙푸른 빛을 내며 맑았으며, 수 백 만 개가 넘는 별들이 하늘이라는 판 위에 돋아 있는 듯 반짝이며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산과 계곡은 겨울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그토록 매혹적이며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진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하얗게 눈으로 뒤덮인 산들이 짙푸른 아침 하늘을 배경으로 도드라져 있는 모습이 눈에 띠었으며,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파수꾼과도 같았다. 산들이 너무나도 가까이 있는 듯 보였으며 내 손을 뻗으면 거기에 닿을 수 있을 듯 했다. 눈을 이불로 삼아 덮고 있던 계곡과 빙하 전체가 잔잔한 햇빛을 받아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거기 서서, 해가 떠오르면서 내보내는 첫 햇살들이 니불룽 리충 산 봉오리에 부딪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점점 더 많은 햇빛이, 몇 주 전에 내가 올라가 뿌듯했던 그 산봉우리에 점점 와 닿을수록 별들은 희미해져갔다. 산들 뒤편으로 해가 점점 솟아오르더니 이내 햇빛은 우리 안식처의 현관까지 들어왔다. 나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내 마음은 여기서 일어났던 아름다운 모든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거기에 서 있으면서, 태양의 짙붉은 광선이 시나브로 오렌지 빛으로 색깔을 바꾸는 그 놀라운 광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있던 모든 산봉우리들은 햇빛을 반사하기 시작하였는데 마치 불에 타고 있는 듯하였다. 해에게서 나온 첫 햇살이 우리의 안식처로 들어오자 나는 누군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conscious of). 내 친구가 거기 서 있었다. 그는 내 어깨에 그의 팔을 두르고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우리의 여행이 이와 같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단다. 오늘 아침처럼 말이야.”
나는 말했다: “그 말씀을 언제나 기억하겠습니다. 지금 저로서는 스승님(you)을 떠날 수밖에 없고 저에게 그토록 소중한 그 모든 것들을 두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가슴 저립니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히말라야를 넘어서, 지금은 너무나도 멀리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더라도 당신께서는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실 거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친숙한 징(gong) 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그것은 노르부가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우리는 부르는 신호였다. 그 소리는 계곡 위 아래로 울려 퍼졌고 곧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는데) 마치 산들이 웅웅거리며 “가지 마라, 가지 마라” 말하는 듯 했다.
잠시 후 노르부는 우리가 서 있는 곳으로 왔다. 그녀는 환하게 빛났다. 다소 차가운 공기를 쐬어서 그런지 그녀의 볼은 장밋빛(rose-pink)으로 붉어졌는데, 그녀에게 딱 들어맞는 빨간색 모직 조끼(jersey)와 잘 어울려 그녀에게 이를 말해주었다.
나는 말했다: “오늘 아침에 해가 떠오르는 거 봤어요?”
“그럼요.” 그녀는 말했다. “당신 뒤편에 서 있었는걸요. 그런데 워낙 깊은 생각에 빠져 계신 것 같아서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랬군요. 노르부. 하지만 당신도 제가 보고 있는 이 아름다운 경치의 한 부분인 걸요. 당신은 이곳과 정말로 잘 어우러지고 있어요. 산들이며, 계곡들이며, 은빛 달이며, 별이며 그리고 당신(Norbu). 나는 이 추억 가운데 당신을 담아놓았어요. 그리고 내 가슴 안에서 당신을 언제까지나 기억할게요.”
사랑스러운 그녀의 큰 파란 두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으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녀의 얼굴은 행복에 가득 차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가 가슴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마을의 지도자인 다스 체링(Das Tsering)이 조랑말들과 내가 검은 왕자(Black Prince)라고 이름을 지어준 검은 수말을 끌고 우리 안식처로 올라왔다. 그리고 이제 나는 이 말을 본래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하리라. 그리고 노르부의 아버지께서도 그녀가 라사를 갈 때 타고 갔던 아름다운 밤색 암말을 데리고 올라왔다. 그 말은 혈기 왕성했으며 노르부를 보자 반갑다는 듯이 고삐를 자기 쪽으로 잡아 끌었다(it was full of spirit and tugged at the rein when it saw her). 내 친구는 그의 친근한 하얀색 조랑말을 택했으며, 페데 드종(Pede Dzong)에서 짐을 나르는 용도로 고른 비상용 조랑말(spare pony)을 그 뒤로 끌고 갔다. 다스 체링은 커다란 갈색 조랑말을 탔으며, 그 뒤로 짐을 나르는 노새를 끌고 갔다.
그는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지 도와 드리려고 함께 따라 갑니다.”
나는 그에게 티베트 말로 물었다: “산모와 아이의 건강은 좀 어떻습니까?”
“둘 다 건강합니다.” 그는 감사를 표시하는 듯 내 친구를 쳐다보며, 티베트 말로 대답을 했다. 산모의 애를 받아준 것은 답을 내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여행을 출발하게 되었다. 내 친구가 앞장섰으며, 그 뒤로 노르부, 그 뒤로 내가 뒤따랐고, 마지막으로 다스 체링이 맨 뒤를 맡았다. 출발할 때에는 날씨가 추웠는데 해가 높이 솟자 매우 더워졌다. 지표면에 쌓인 눈에서 반사된 햇빛으로 눈을 따금거리게 만들기 때문에,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선글라스를 썼다.
노르부가 말 위에 걸터앉은 모습은 참으로 사랑스러웠으며, 말을 꽤 잘 탔다(Norbu rode astride and a lovely rider she was). 캬추 강을 따라 나있는 가파른 경사길을 오르내릴 때 그녀는 포니의 한 부분이 된 듯 했다. 여름이 되면 산에 쌓여 있던 얼음과 눈이 녹아내리면서 물이 불어 이 강은 매우 빠른 속도로 흐르게 된다. 그러나 겨울에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물결이 잔잔한 곳이나 강물의 폭이 좁은 곳에서는 표면이 얼어붙게 된다.
우리는 그 날 오후 4시 경에 데첸 드종(Dechen Dzong)에 도착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의 거의 대부분이 눈으로 뒤덮여 있었던 것에 비하면 우리는 상당히 이른 시간에 도착한 셈이다. 겨울에 눈보라가 휘몰아칠 때 그 사이로 여행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리고 봄과 여름에는 눈과 얼음이 녹아내려 불어난 강물 때문에 위험하다. 서양에서 자동차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티베트 사람들도 지형과 기후와 관련된 사고로 목숨을 잃곤 한다. 그러나 목숨을 잃은 사람의 친척들을 제외하고는 그 일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우리는 그날 밤 데첸 드종에 있는 이장의 집에서 묶었는데, 내 친구가 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거기서 우리는 황송한 대접을 받았다.
데첸 드종은 딩아 레(Dinga Lhe) 강이 캬 추 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딩아 레 강을 건널 수 있는 대나무 다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 다리를 건너지는 않았다. 강물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고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 위로 쉽게 건너갈 수 있었다.
다음 날 우리는 젠쉬(Zenshi)라 불리는 곳에 도착했다. 그 지역에서 그 당시 우리가 여행하던 지점에는 굉장히 비옥하며 거대한 계곡이 있었다. (3장에서 묘사한 바 있다). 그곳에는 노르부의 친척 아저씨와 아주머니도 있었는데, 그들은 그 지역 내에서 무역을 주도하였다. 그들에게는 대여섯 개 가량 되는 야크와 당나귀 행렬이 있었으며, 그 동물들은 다 하면 2000마리 가량 되었다. 이렇게 티베트 상인들 가운데 상당히 부유한 사람들도 있었다. 상품들을 멀리 나르는(transport) 대가로 그들은 그것들의 일부를 운임으로 받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런 물건들은 무척 싼 편이다.
트락체 곰파, 즉 게쉬 림포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수도원은 3 마일(4.8km) 가량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나와 내 친구는 그곳으로 계속해서 갔고 노르부는 그곳에서 친척들과 함께 남아있었다.
수도원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는 게쉬 림포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마음이 즐거워졌다. 그와 함께 있으면서(to be in his presence) 귀한 진주와도 같은 지혜의 말씀을 듣는 것은 참으로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수도원이 세워져 있는 산기슭에 이르자 여러 라마승들이 우리를 맞아주었는데, 그곳 수도원장이 우리의 짐을 나르는 것을 도와주라고 내보낸 것이었다. 우리는 아래쪽에 위치해 있는 마구간에 우리의 조랑말을 데려다 놓은 다음, 바위 표면을 쪼아 만든 가파른 숱한 돌계단을 오르고자 계속해서 걸어갔다. 우리가 중간 정도에 이르렀을 때, 게쉬 림포체와 수도원장이 우리를 마중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게쉬 림포체가 기쁘게 맞아주는 그 모습은 언제까지라도 기억할 것이다. 그는 나를 몹시 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면서 나에게 이를 말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사랑스러운 아들(beloved son)이었으며, 그는 오크 계곡까지 가는 길에 나와 함께 하고자 그 먼 길을 달려온 것이다.
나는 말했다: “영체가 아니라 몸을 입은 상태에서 당신을 만나 뵙고 당신의 말씀을 다시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당신을 만나 뵙고 싶어 하는 매우 사랑스러운 여인도 있는데, 나는 그녀에게 당신에 대해 참으로 많이 말해주었답니다.”
그는 대답했다: “그래. 나도 알고 있지. 그녀의 이름은 노르부이고. (‘귀한 보석’) 너는 그녀를 나에게 데려와야만 할 것이야.”
“그럼 그녀를 알고 계셔요?”
“물론이지, 아들아. 나는 너를 항상 지켜보고 있으며 너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단다.” (나는, 게쉬 림포체가 아스트랄 체로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을 순간 잊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는 그녀를 게쉬 림포체에게 데려갔다. 그녀는 그를 보자, 그의 외투의 끝자락을 잡고는 그녀의 입술을 거기에 갖다 대었다. 그러자 그는 그녀를 축복하며 이렇게 말했다: “일어나라, 아이야. 너를 보니 참 즐겁구나. 너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미래가 펼쳐져 있구나. 남자들만 요가 마스터(Yoga Masters)가 되는 것은 아니란다, 노르부.”
노르부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해 준 것은 참으로 크나큰 축복이었다. 나는 그녀로 인해 매우 기뻤으며 나도 모르게(spontaneously) 게쉬 림포체와 내 친구와 수도원장이 있는 앞에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 모든 행동은 참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다. 게쉬 림포체는 이 자연스러운 행동(spontaneous action)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신께서 너희를 축복하시길, 내 아이들아.”
그러자 내 친구는 전에 나에게 해주었던 말을 다시 한 번 말하였다: “그분의 뜻(His Will)대로 하도록 우리 모두를 함께 묶고 있는 것은 바로 신의 사랑이란다.”
그 뒤에 게쉬 림포체는 우리 모두를 그의 안식처(Sanctuary)로 안내했고, 거기서 매우 고무적이며(instructive) 경이로운 그의 강론들 중 하나를 들려주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몇 시간이고 들을 수 있었고, 그가 말을 마칠 때 아쉬워했다.
그는 이러한 말들로 계속 그의 강론을 이어나갔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이란다. 그들이 누구일지라도, 살면서 그들이 어느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부유하든 가난하든, 어떤 직함이 있든 없든 그런 것에 상관없이 말이야.”
“겉으로만 보자면 남자와 여자 사이에, 남자들 사이에, 여자들 사이에 차이와 불평등이 있어 보이지. 그러나 사랑 안에서는, 실재 안에서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지(but in Love, in Reality, there is none).
“우리는 모두 다 똑같이 누구나 고통을 겪고 있고 문제들을 안고 살아간단다. 그리고 우리는 걱정, 슬픔, 기쁨, 만남과 헤어짐, 아픔과 건강 등의 문제를 등에 지고 살아가고 있지.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들이야. 모든 사람들은, 그가 누구라 할지라도, 그가 무엇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자유로워지길 원하지. 그들은 자신의 비참함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을 찾고 있는 거야. 이 점에서 우리는 모두 같으며, 여기에 차이란 존재하지 않단다.”
“자,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슬픔과 고통 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으로부터 회피하고자 한다면, 슬픔과 고통의 무게를 더하게 될 뿐이야. 슬픔과 고통은 회피하려는 태도를 통해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것이거든. 그것은 오로지 사랑(loving)과 이해(understanding)를 통해서만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이야. 그대들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라야 그대들은 그들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란다. 그대들이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대들이 그것을 사랑하고 있을 때란다(you can understand anything when you love it). 그러나 마음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대고 가슴에는 사랑이라곤 하나 없어 텅 비어 있을 때에는 ‘사랑’이라는 말장난에 휩쓸려 갈 수 있단다.”
“그대들이 참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 그때 그대들 가슴에 민족의 정체성이나 국가의 정체성(nationality)이 하나라도 있던가? 그러나 가슴이 사랑이 없어 텅 비어 있을 때에는, 사람들을 이러저러한 집단들로(types) 나누는 것이 중요하게 된단다. 우리는 사람들을(beings) 계급으로 나누고, 민족이나 국가로 가르고 있단다. 그러나 그대가 정녕 사랑하고 있을 때, 너와 내가 과연 서로 다르던가? 마음이 그 무엇에도 붙들리지 않고 관대할 때, 그때에는 그 무엇도 다르지 않아. 그때 그대들은 자신을 아낌없이 주고 있을 따름이야(you give of yourself). 진실하게 진리를 구하고 있는 자들에게 다름이란 존재하지 않단다. 왜냐하면 진리(Truth)란 사랑(Love)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지. 그러나 만약 그대들이 특정한 방법이나 길을 추구하고 있다면, 사랑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단다. 왜냐하면 특정한 방법이나 길에 집중한다는 것은 배제를 의미하고, 진리란 모든 것을 통합하는 것이기 때문이지(for the path means exclusion, and Truth is all-inclusive). 다른 집단에 대항한다며 우리라는 집단 의식에 호소하는 것은 정치가들이나 성숙하지 못한 자들이나 하는 값싼 속임수란다.”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그것을 직면하고, 그것으로부터 회피하는 것을 바라지 않게 될 때란다. 회피하려는 마음이 사라졌을(free) 때 우리는 이해하게 되는 것이지. 행복해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 곧 행복해지는 것이야. 그때에는 분열도(no division) 분리도(no separation) 존재하지 않게 되지. 왜냐하면 사랑은 시간과 공간의 간극도 메우기 때문이란다(because Love bridges time and distance). 사랑하고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이 풍요로워짐을 느끼고 모든 것을 기꺼이 나누려 한단다. 가슴이 사랑으로 가득할 때, 우리를 서로 가르고 있는 마음에 속한 것들은 사라져 버리게 되지.”
“마음은 세계를 바꾸어놓겠다는 계획들로 가득 차 있고, 또한 종교 예식들, 순결(chastity), 갖가지 덕목(virtue) 등에 대한 생각들로 꽉 채워져 있단다. 그러나 거기에 모든 것을 녹여(resolving) 하나로 묶어주는 사랑이라는 핵심 요소가 빠져 있다면, 참된 관계맺음이란 존재할 수 없단다. 그대가 하고자 하는 것들을 다 한다 하더라도,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산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산꼭대기에 홀로 앉아 있거나 외떨어진 곳에서 홀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관계맺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올바른 행동(right action)이란 있을 수 없지. 그러므로 그대들이 직면하고 다루어야 할 문제란 바로 관계맺음에 대한 것이지. 그리고 자기-이해 없이는 참된 관계맺음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이러한 관계의 그물(relationship)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어쩌면 그대들은 정글이나 산으로 숨어 들어갈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그대들은 여전히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고 있단다. 관계라는 그물 안에서 그대들은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지. 이러한 관계 안에서 그대들은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지를 볼(see) 수 있게 되는 것이야. 생각은 자기 자신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한단다(Thought must know its own activity, its own action).”
“사랑이 있을 때라야, 참된 종교가 있고, 참된 순결이 있는 것이란다. 참된 사랑이 존재하고 있을 때, 순결은 문제가 되지 않아. 그러나 사랑이 없을 때, 그대들은 순결에 대한 관념들을 추구하게 되지. 그러나 사랑이 가슴에 자리 잡게 될 때, 마음에 속해 있을 따름인 순결에 대한 단순한 관념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순결이란 문제는 해결되어 버린단다.”
“가슴을 풍요롭게(nourishing) 하는 것은 마음의 과정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러나 마음 스스로 자신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면, 그때 사랑이 들어서게 된단다. 사랑은 말이 아니야. ‘사랑(Love)’이라는 말은 사랑(Love)이 아니야. 그대들이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그것은 그저 마음에 속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야. 말(the word)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그대들이 깨닫게 되면, 마음은 자신의 옳고 그름에 대한 잣대들, 자신의 덕목과 다른 가치들로써 사랑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하던 것을 그치게 되지. 그러면 그때 사랑이 있게 되는데, 그것은 마음 안에서 생각들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고, 다만 언제나 새롭고 언제나 신선할 따름이지. 이러한 사랑 안에서만 홀로 진정한 의미의 덕(virtue)과 진정한 의미의 순결이 있게 되는 것이란다.”
이 말을 마치자 그는 눈을 뜨고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너는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고 있지, 그렇지?”
나는 말했다: “네,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언제나 새롭고, 언제나 신선할 때에는 그 어떤 문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자신의 실재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사랑이란 어떠해야 한다는 것들에 대한 관념들을 마음이 형성하려고 할 때입니다.”
“그렇단다. 아들아. 너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바로 진리란다.”
나는 게쉬 림포체의 위대한 지혜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사랑에 대한 관념이 아니라, 사랑의 실재(the Reality of Love)를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을 계속해서 억누르고(repression), 억압하며(suppression), 소위 덕이라 부르는 것들과 같은 단순한 관념들로 이루어진 것은 사랑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품고 있는 순결이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맺음 대한 이해 없이 성적이 충동을 억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참된 관계맺음을 이해하고 나면, 마음은 생각들을 지어내고 있는 자신을 알아보게 되고, 그리하여 사랑이 나타나 작용하는 것을 방해하기를 멈추게 된다. 그러면 그때 언제나 새롭고, 언제나 신선하며, 마음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속해 있는 사랑이 들어서게 된다.
우리는 사랑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We do not creat Love). 사랑이란 항상-현존하고 있는 것으로서, 마음 안에서 만들어 진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게 될 때, 사랑은 들어서게 된다. 마음 스스로, 자신은 사랑을 창조하지 못하며 다만 사랑은 어떠해야 한다는 등의 관념만을 창조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그때 마음은 고요해지며 사랑이 그저 존재하게 된다. 그때 어떤 문제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데, 모든 문제는 사랑 안에서 해결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랑이 곧 신이며, 신이 곧 사랑이기 때문이며, 이것 말고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밖에 다른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마음이 지어낸 환상일 따름이며, 이것이 마음에 이해되고 나면, 환상은 떨어져 나간다. 그러면 그때 사랑이 들어와 자신의 완벽함을 이루어내며 일을 하게 된다. 사랑은 그 자체로 영원하기 때문이다(then Love worketh Its own perfection, for It is Its own Eternity).
게쉬 림포체가 말하는 내용에는 언제나 보기 드문(rare) 무엇인가 있었다. 그는 문제의 중심으로 곧장 들어갔으며(He went straight to the heart of the problem), 우리는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만 있는 보기 드문 무엇인가란 바로, 말이 본래 전하고자 하는 보다 깊은 의미에서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작용이며, 그 순간에도 변화는 일어나고 있었다(It was the transforming action, in the deeper meaning of the word, that was taking place). 전에도 비슷한 말들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했던 말들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아름다움으로서, 그것은 언제나 새롭다.
수도원장의 방 안에 우리의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으며 우리는 모두 같은 식탁에 앉았다. 그곳의 주인인 수도원장이 식탁의 정중앙에 앉았으며, 그 오른쪽에는 게쉬 림포체가, 그 왼쪽으로는 내 친구가 앉았다. 그리고 노르부와 나는 수도원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날의 식사는 마치 가족들의 행복한 모임 같았다. 게쉬 림포체가 노르부에게 티베트말로 물었다: “우리와 며칠 더 남아 있지 않겠니?” 그는 이에 대한 허가를 구하고자 수도원장을 쳐다보았다. 나는 수도원장이 동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사실 수도원 내에 여자를 들이지 않는 것이 그 당시 관습이었다. 티베트의 가장 위대한 현자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에 대해 노르부는 기뻐 뛰었다. 이는 참으로 큰 영광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노르부는, 내 친구와 함께 잠사르로 되돌아가기 전에, 우리와 함께 4일을 같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게쉬 림포체는 최고의 상태에 있었다. 나는 그가 그토록 영적으로 고양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내 친구와 노르부가 떠나야 하는 날이 왔다. 게쉬 림포체와 나는 각자의 조랑말을 타고 젠쉬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날 아침 노르부는 나를 안아주었는데, 지금 이 순간도 잘 기억할 수 있다. 나는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밝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자 게쉬 림포체는 그의 손을 내 어깨에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베인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야. 그리고 나 역시 그와 몸을 입은 상태로는 헤어져야 할 것이고. 그리고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란다, 노르부(This is my beloved son and I will have to part with him too in the flesh, and you are my beloved daughter, Norbu).”
그러고 나서 그는 그녀의 손을 잡더니 내 손에 쥐어 주며 이렇게) 말했다: “신께서는 그분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bound)주셨단다. 그리고 그분의 생명(His Life)은 우리를 영원한 사랑이라는 하나의 튼튼한 사슬로 결합(unite)하고 계신단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는 어떠한 분리도 존재하지 않지.”
나는 오크 계곡에서 내 친구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한 그는 내가 돌아가는 길에 칼림퐁(Kalimpong)까지 바래다 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리더니 평소에 그이께서 하시던 애정 어린 방식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조만간에 다시 너와 함께 있게 될 것이란다, 아들아.” 그러고 나서 그들은 잠사르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때 나는, 내가 두고 떠나온 것들 중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매일 아침 이슬처럼 신선한 무엇인가를 말이다. 게쉬 림포체가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내 생각을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랑은 곧 신이며, 신이 곧 사랑이야. 그리고 신께서는 결코 죽거나 사라져 버리지 않으신단다. 그분의 사랑은 언제나 신선하고 새로우며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존재하고 있단다.”
우리가 그날 오후 늦게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 수도원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역시, 노르부의 얼굴을 통해 바깥으로 빛났던 그녀의 아름다운 영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게쉬 림포체는 말했다: “노르부보다 더한 아름다움을 아시아 안에서 찾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네.”
노르부의 매력(influence)은 그녀를 만났던 모든 사람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으며, 시간이 흘러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남겨주었다.
노르부와 내 친구가 떠나고 난 후 그 다음 주 동안 게쉬 림포체와 나는 매일 함께 걸으며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나는 그의 충고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순간을 사랑했으며, 그분의 현존(a presence)은 그 자체로 나를 고양시키는 것이었으며, 그분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실 때조차 그러했다.
하루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이토록 사랑하는 이 모든 사람들을 뒤로 하고 왜 저는 떠나야 하는 건가요?”
그때 그는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신께서는 이토록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분은 당신의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주셨는데, 이는 그 아들의 말씀에 귀 기울일 자들이 거짓된 것을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참된 것(what is True)을 알게 하려는 것이지. 그러면 진리(the Truth)는 그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란다. 너는 세상을 사랑해야 한단다, 아들아. 모든 마스터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이(the greatest of all Masters)께서도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말이지. 육체로 난 것도 아니며, 사람의 의지로도 난 것도 아니며, 다만 항상-현존하고 계시는 신의 영으로부터 난 신께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영원토록 살고 계신단다(God, not born of the flesh or the will of man but born of the Ever-Present Spirit of God which liveth now and forever in Love beyond time and space).”
14장
트락체(Tragtse) 곰파는 티베트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들 중 하나였다. 트락체 곰파는 산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토빙 추 강의 계곡을 계곡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다. 저 멀리에는, 라사에 있는 포탈라 사원의 금색 지붕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지붕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일 년 중 이 시기가 되면, 밤에는 엄청 추웠으며 해가 지고 나면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밤이 되면) 하늘은 대체적으로 구름 없이 푸르렀으며, 수 백 만 개나 되는 별들은 하늘을 밝히며 바삭바삭 부서지는 수정같이 맑은 눈에 반사되면서, 계곡 전체로 은은한 빛을 비추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시기도 있었는데, 그때에는 강한 눈보라(blizzard)를 일으킬 정도의 모진 바람을 동반하였고, 어떤 지역에서는 10 피트(약 9m)도 넘게 눈이 쌓이곤 했다. 이러한 강한 눈보라가 몰아칠 때면, 바로 몇 야드 앞도 거의 볼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날마다 야크와 당나귀의 줄지어 가는 행렬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들은 계곡을 터벅터벅 오르내리며 티베트 안팎으로 짐을 나르고 있었다. 겨울과 여름은 마치 시계처럼 규칙적으로 이렇게 흘러갔다. 강한 눈보라가 몰아치든,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이런 것들에 관계없이 말이다. 때가 되면 어느 날 나는 오크 계곡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는 200 마일(약 320km) 가량 떨어져 있는 링마탕과 칼림퐁으로 가게 될 것이다. 오크 계곡까지 가려면 2 주일가량 소요될 것인데, 거기에 가려면 얼음과 눈으로 덮인 강과 산길(passes)을 넘어야 한다.
게쉬 림포체는 겨울에 여행을 할 때면, 수많은 야크들을 같이 데리고 갔다. 야크 떼가 앞서 가면서 길을 내게 되는 것이다. 히말라야의 눈길을 가르며 가는 데 있어 야크는 최고의 쟁기 역할을 해주었다. 몇 마리의 야크가 쌓여 있는 눈을 가로 질러가다보면, 이내 그 위험천만한 눈 위로 길을 만들곤 했다.
우리는 이미, 돌아가는 길에 라사(Lhasa)는 들리지 않고 지나쳐가기로 동의했다. 자기들이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 여기는 관료들을 상대로 시간을 낭비한다 해도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as nothing could be gained by wasting time on a few officials who thought themselves Christmas)!
그렇게 마침내 우리의 여행을 시작할 날이 왔을 때 우리는 무척 고무되어 있었다(in high spirits). 우리는 수도원으로부터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동물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무역로는 캬 추 강이 토빙 추(Tobing Chu) 강에 합류하는 지점부터 캬 추 강을 따라 나 있었다. 우리는 가다가 오른쪽으로 빠졌으며, 얼음을 찍어가며 토빙 추 강과 키 추 강 사이에 있는 삼각지를 통과하면서 길을 만들어 나갔다. 그렇게 우리는 남파(Nampa)라 부르는 곳까지 눈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길에 쌓여 있는 눈을 파헤치며 갔다. (무역로로 간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갔던 이 길은 사람이 자주 다니는 길은 아니었으나 꽤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그 길은 토빙 추 강과 키 추 강이 합류하는 삼각형 모양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라사(Lhasa)에서 끝이 나 있었다. 우리는 룽상 관문(Lungsang Pass)을 통과하였으며, 라사보다 10 마일(약 16km) 가량 더 먼 곳에 있는 키 추 강에 도착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20 마일(약 32km) 여행을 하는 수고를 덜게 되었다. 무역로는 겨울이 되면 길이 질퍽해져 상당히 그 위로 걷는 것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날 4 시 정도에 우리는 종토 곰파에 도착했으며, 이 날은 거기서 쉬면서 밤을 묵었다. (곰파란 수도원을 뜻한다.) 이렇게 수도원을 거쳐 가는 길 역시 우리가 키 추 강을 가로지는 수고를 덜게 해 주었다. 키 추 강은 겨울에 상당히 위험한데, 어떤 부분은 얼어있고 어떤 부분은 얼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라사를 거치지 않고 가는 길을 골라 가고 있었는데, 이는 그 지역 관리들에게 있어서는 결코 허용될 수 없는 길이었다(We had taken a completely unorthodox route by by-passing Lhasa). 그러나 우리에게는, 진리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거나 아무 것도 모르는 관리들보다, 시간과 정력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은 전통과 예식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래서 그들에게 진리(Truth)란 하나도 없었다.
다음 날 우리는 추-수르 계곡(Chu-Sur Valley)이라 부르는 곳에 도착했다. 이 지점에서 키 추 강은 옆으로 넓게 퍼졌으며, 수심이 얕아지고 물살이 약해지면서 수많은 섬들을 만들어냈고, 장소에 따라서는 그 폭이 2 마일(약 3.2km)도 넘었다. 추-수르에 있는 마을에는 기도의 벽(prayer wall)이 있었는데, 그 벽은 50 야드(약 45m) 가량 되었으며 거기에는 갖가지 색으로 색칠된 각종 신들(deities)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 계곡도 상당히 기름진 땅이지만, 우리가 갔던 그 때에는 눈으로 만들어진 겨울 담요로 덮여 있었다.
우리는 캄바 라(Kamba La) 관문을 지나갔는데, 그 길은 강가로부터 시작되어 지그재그로 왔다갔다하면서 오르내림이 심한 길이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우리는 착삼 나루터(Chaksam Ferry)에 도착했다. 우리는 이곳에 있는, 초코량체 곰파(Chokoryangtse Gompa)라 부르는 언덕 위쪽으로 오른편에 세워져 있는 아름다운 수도원에서 묵게 되었다. 그곳 수도원장은 게쉬 림포체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꽤 아늑한 방을 제공받았다. 나는 밤 동안 푹 쉴 수 있어 너무 기뻤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나루터를 건너 창 포(Chang Po) 강의 오크 계곡이 있는 쪽으로 갔다. 그리고 냡소 라(Nyapso La) 길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 길은 17,000 피트(약 5.2km)의 높이에 이르렀다. 냡소 라 길의 정상에 오르자 우리는 창 포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을 훤히 볼 수 있었다. 또한 거기에는 온 세계에서 가장 성스럽다고 불리는 저 위대한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 강이 눈에 아랑곳하지 않고 굽이쳐 흘러가고 있었고, 그 강의 양 쪽에는 산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과묵한 파수꾼들이 오랜 세월 동안 빠른 속도로(this swift-flowing river) 흐르는 이 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하였다.
이곳에서부터 몇 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곳에, 얌드록(Yamdrok)이라 부르는 청록색 호수와 페데 드종 마을이 보였다. 게쉬 림포체는 나에게, 그 날 저녁을 저곳에서 묵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동안 내가 사용했던 조랑말을 그곳 이장에게 돌려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은 매우 기쁜 마음으로 환영해 주었다. 내 친구가 사람들로부터 받는 환대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게쉬 림포체가 받는 환대는 그보다 훨씬 더 했다. 우리는 식사를 제공받았으며, 그날 밤을 거기서 묵을 수 있도록 숙박 시설도 제공받았다.
참으로 친절하게 빌려주셨던 조랑말을 다시 가져왔다고 그 마을 이장에게 말을 했더니, 그는 그 조랑말은 나중에 어떻게든 돌아올 테니, 일단은 내 여행이 끝날 때까지 타고 다니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그 느낌을 최소한도로 표현하자면, 매우 기뻤는데, 블랙 프린스는 여행하는 동안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으며, 나도 이 시점에서 다른 조랑말로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게쉬 림포체는 이장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너의 조랑말은 다시 너에게로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을 나도 알겠네.”
참으로 화려한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요리가 나왔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열 개는 넘었던 것 같다.
우리는 먼저, 잘게 다진 고기를 밀가루 반죽을 구운 것으로 싸 먹었으며, 그 다음으로는 얇게 뜬 생선을 소금으로 절인 양파와 함께 먹었으며, 그 다음으로는 민달팽이 수프(slug soup)를 먹었다. (이 수프는 맛이 참 좋았다. 그러나 내가 먹은 것이 민달팽이 수프라는 것은 나중이 되어서야 알았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삶을 계란을 잘게 부순 것을 먹었고, 그 뒤로는 건포도가 들어있는 쌀밥을 먹었다. 다음으로는 잼으로 만든 푸딩(jam dumpling)을 들었다. 그 뒤로는 삶은 돼지고기와 얇게 썬 양고기를 먹고 다른 음식들도 먹었다. 티베트 맥주인 창(Chang)은 마음껏 마실 수 있었다. 오늘날 만약에 내가 그때처럼 식사를 한다면 소화하느라고 엄청 애를 먹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때 당시로는 딱 적당했다.
페데 드종은, 내가 지난번에 여름이 끝날 무렵에 보았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 마을은 겨울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었으며, 땅은 눈으로 덮여 있었고, 풀을 뜯기 위해서 눈을 파고 있는 야크들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호수는 여름보다 훨씬 더 짙은 청록색(turquoise)을 띠었다. 그 모습은 참으로, 기억에 오래 남을 장관이었으며, 지금 이 순간도 그때 보았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낼 수 있다. 여름이면 이곳은 다양한 색깔의 꽃들로 뒤덮이는데, 겨울인 그때 그 순간은 하얀 담요로 덮여 있었다. 물고기들은 여전히 호수 안에서 여기저기 헤엄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물에 소금기가 많아 얼지 않기 때문이다.
페데 드종에서 날씨는 몹시 추웠는데, 그나마 날씨가 좋아 다음날 다시 여행을 계속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런데 태양이 떠오르자,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매우 더웠다. 그리고 이 시간 전후로 기온은 영하로 뚝 떨어지게 된다. 기온차가 심한 이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눈이 내리거나 돌풍이 불지 않을 때는, 날씨가 상당히 좋은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그 날 걸은 길은 나에게 새로운 길이었는데, 지난번에 내 친구와 함께 여행을 할 때에는 랑 추(the Rang Chu) 지역을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낭가르체 관문(the Nangartse Pass)을 통과하고 있었다. 눈이 내리고 날씨가 몹시 추웠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 거의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홍고(Hongo)라 불리는 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 이장은 숙박을 제공하겠다면서 우리를 초대하였다. 그의 집 정중앙에는 커다랗고 둥그런 난로가 있었고, 우리는 밤에 그 난로 주위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앉았던 자리에서 별로 이동하지 않고 그대로 잠들었다.
다음 날 우리는 15000 피트(약 4600m) 높이에 있는, 카로 관문(Karo Pass)이라 부르는 또 다른 관문을 통과했다. 정상에 서자 우리는 저 멀리에 하얀 눈을 바탕으로 빨간 지붕을 이고 있는 집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강이 계곡 안으로 들어왔다 나가며 굽이쳐 흐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우리의 양쪽으로는 20000피트(약 6100m) 높이에 달하는 산들이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게쉬 림포체는 여행 계획에 대해 말해주었는데, 그날 저녁에는 곱시(Gobsi)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는 다음 날 저녁에 쟌체(Gyantse)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고, 거기에 있는 수도원에서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하게 될 것이라 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기뻤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우 빠른 속도로 여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겨울 날씨인 것을 특별히 감안하고, 가는 길의 일부가 매우 험했다는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딱 하루만 여행을 하지 않고 쉬었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아들아.” 그는 말했다. “세상의 지붕이라 부르는 이곳을 겨울에 너 혼자서 여행하지 않도록 내버려둘 수 없는 이유를 너도 이제 알았겠지.”
“예” 나는 말했다. “이 여행을 마치고 나면 세계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여행의 모든 순간을 즐기고 있으며 이 여행에 다른 목적을 두지 않으렵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 완전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 내 아들아.” 그는 대답했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을 사람이 아니라 신에게 두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다음 날 밤에 쟌체에 도착하였고 그곳 수도원장도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지난번에 이곳에 왔을 때에는 내 친구와 함께 있었는데, 이번에는 게쉬 림포체와 함께 있게 되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나는 같은 방들을 제공받았으며 집에 있는 듯 편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다음 날도 거기서 하루를 쉬었다. 나는 오전 10시에 일어났으며, 오크 계곡까지 남은 여행을 무리없이 할 수 있을 듯 원기가 회복된 것을 느꼈다. 휴식을 취하고 나자 여행길은 쉽게 느껴졌다. 야크와 당나귀의 수많은 행렬들이 길 위로 오가는 통에 길은 잘 닦여 있었다. 낮 동안은 길이 진창이었지만 해가 지고 나면 서리가 내려 날카롭게 굳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해가 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고자 했던 것이다. 티베트를 겨울에 여행한다는 것은 결코 소풍처럼 만만한 것이 아니다. 오 일만 더 여행하면 오크 계곡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 마지막 여행이 될 것이다. 최소한 한동안은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거기서 게쉬 림포체와 몇 주 동안 지내게 될 것이고, 내가 완전히 이곳을 떠나기 전에 다른 친구들도 여기에 도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다시 만나보고 또 한 번의 경이로운 만남을 갖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수도원장은 우리를 보고는 기뻐했다. 그때 그는 매우 기뻐하며 나를 환영해주었고, 자신이 얼마나 나를 보고 싶어 했는지 말해주었다.
게쉬 림포체는 말했다: “내가 너에게 전에 말했지 않나. 너는 사람들을 만날 때 도대체 뭘 하기에 이토록 다들 다시 너를 보고 싶어 안달이 나는가?(I told you so. What do you do to people you meet when they are so eager to see you again?)” 그러고 나서 그는 진심으로(heartily) 따뜻하게 웃었다. 나는 그가 노르부를 두고 나에게 농담을 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너를 기억할 거란다. 내 아들아.”
그곳에서 나는 매우 행복했다. 날마다 게쉬 림포체는 더 많은 가르침을 주곤 했으며, 수도원장은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이후 스스로 엄청나게 영적으로 성숙해 있었다. 내 친구가 그에게 해주었던 말들은 그를 변하시키는 효과를 일으켰던 것이다.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7장을 보라).
게쉬 림포체는 종종 수도원장에게 우리와 함께 걷고, 자신의 말도 같이 듣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나는 수도원장이 그렇게 해주어서 기뻤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도 우리에게 속해 있다는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대개는 내가 먼저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되곤 하였다. 그러면 게쉬 림포체는 이야기를 풀어놓곤 하였다. 매일 저녁 식사를 마치며 우리 셋은 모여 앉았고, 하루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완고한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합니까?(What can you do with a rigid mind?)”
그는 대답했다: “전에 우리가 그 주제를 다룬 적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네가 질문을 다시 던졌으니, 다시 한 번 대답하도록 하겠네.” 그러고 나서 게쉬 림포체는 말을 계속 이었다: “완고한 마음은 자신의 고정된 관념들로써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고 있지. 이러한 마음은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의 상태란다. 왜냐하면 굳어버린 마음은 아무 것도 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란다. 또한 그 마음은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는 조건들에 사로잡혀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은 진리는 드러낼 수 없고, 다만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는 조건만을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완고한 마음은 참으로 무지한데, 왜냐하면 그 마음은 자신의 관념, 자신의 믿음을 넘어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네가 이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다른 이들의 생각들로만 꽉 채워져 있는 완고한 마음을 지닌 이들을 재빨리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이란다. 완고한 마음이 자기 스스로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란다. 따로 애쓰지 않아도, 흔히 배웠다 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기만(look into) 한다면, 그들이 다른 이들의 생각들로 얼마나 많이 꽉 채워져 있는지 알게 될 것이란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다른 이들의 생각이 아닌 자신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될 것이고. 그래, 그들은 많이 배운(well read) 자들 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많이 배웠다는 것이 도대체 뭘 뜻하는 것인가? 그들은 자신이 배워 알게 된 것에 의해 묶여있게(conditioned) 된 것이야. 그리고 새로운 것은 하나 표현하지 못하고 다만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는 조건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지.”
“맞습니다.” 나는 말했다. “저는 이제, 소위 지식인(the intellectuals)이라 하는 사람들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결코 할 수 없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며, 그들은 언제나 권위자들의 말을 인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단다, 아들아. 맞는 말이야. 마음에 유연성이 없다면 이해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지. 사람이 고정된 생각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면, 굳어버린 마음을 알아보기란 정말 쉬운 일이란다(When one is freed from fixations, it is easy to detect the mind that is rigid). 그리고 완고해진 마음 안에 진리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지. 진리는,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는 자신의 조건을 자각하고 있는 마음을 언제나 펼쳐내고 있단다(Truth is always unfolding the mind that is aware of its own conditioning). 진리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움직이는 힘으로써 우주 안에 있으며, 또한 사람 안에서도 사람을 활기 있게 하는 힘으로 존재하고 있음이 확실하단다. 우주를 활기 있게 하는 생명(Life)과 인류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생명 사이에 분리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지.”
“사람이 스스로의 제한된 생각으로부터 풀려나게 되면, 생명은 사람의 신성한 본성을 펼쳐내게 된단다. 그 본성이란 바로 영원하고 항상-현재에 존재하며 죽음도 질병도 모르는 그리스도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대립된 상태 안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란다(for It does not live in opposites). 그는 지금 이 순간 ‘존재’할 따름이야(This is 'Being' now). 그러나 마음 안에, 무엇인가로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 때, 대립되는 것들 사이에 끊임없는 다툼이 있게 되지. 생명-죽음, 건강-질병, 성공-실패와 같은 것들 말이야. 이러한 다툼이 그치게 되면, 실재는 그 즉시 들어서게 되는데, 왜냐하면 실재는 항상-현재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란다(for It is Ever-Present).
“네” 나는 말했다. “의식(the Consciousness)이 제한된 생각으로부터 풀려나 자유롭게 될 때라야, 그때야 비로소,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존재자에 대한 자각이 있게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존재자’(‘Being’)는 ‘되어감’(‘becoming’)의 과정을 통해서는 결코 깨달아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것으로 된다는 것은 언제나 미래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되어감’, 그것은 언제나 내일에 있으며, 내일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자’가 깨달아지기 전에 반드시 그쳐야만 하는 마음의 갈등인 것입니다. ‘나’라는 독립된 개체는 사라지고 온전한 ‘존재자’가 그저 있게 되는 것은, 내가 제한된 생각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해서 그것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함으로써, 과거와 미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제한된 생각으로부터 풀려날 때라야 가능합니다.”
“맞는 말이로구나, 아들아.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너는 존재자를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바깥세상을 보며 마음이 향해 있구나. 너는 신체뿐만 아니라, 자신이 정신으로 만들어낸 관념과 생각들에 대해서도 자각할 수 있을 테지. 그리고 네 눈을 감으면, 생명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고. - 이것은 바로 마음에 알려진 것들이야. 이것은 상대적인 것(the relative)이지, 실재(Reality)는 아니야. 이러한 모든 것들, 즉 알려진 것들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라야 너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을 넘어서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단다. - 이것이 곧 마음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the Unknown)이지. 네가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들이 창조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존재자가 그 즉시 있게 된단다(Being now is). 그러면 마음으로결코 설명할 수도 알 수도 없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자각이 있게 되지(then there is an awareness that is Unknowable). 그 자각은 지금 이 순간 존재한다! 그리고 이 자각은 생각이나 기억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창조성 그 자체야!(It is now! And is not the created but is Creative!)”
“너도 알고 있듯이, 존재자를 자각하고 있는 자와 그저 무엇인가로 되어가는 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단다. 소위 진리를 공부한다고 하는 자들의 대부분이 이러한 단계에 놓여 져 있단다. 그들은 끊임없이 무엇에서 무엇인가로 되고 있지. 무엇인가로 되어가고 있는 자는 시간(time)에 사로잡혀 있지만, 존재자를 자각하고 있는 자는 더 이상 시간(Time)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지. 왜냐하면 그는 시간(time)은 시간을 넘어서 있는 그것(the Timeless)을 결코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란다. 과거와 미래에서 벗어난 자유로움 안에서만 항상-현존하고 있는 그것(the Ever-Present)이 드러나게 되지. 찰나의 순간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 마음이 고요하고 시간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그 찰나의 순간 안에서 항상-현존하는 그것이 깨달아지게 된단다.”
“흔히들 요가를 수행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바깥 세상에 대해 감각의 문을 닫고 내면의 감각에 집중하는 방식 중 하나를 뜻한다지만, 이러한 방식은 마음을 넘어서 있는 항상-현존하고 있는 그것을 결코 드러낼 수는 없는 것이야.”
“네, 알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저도, 정신적 활동일 따름인 집중의 방식으로는 정신적 활동이 아닌 그것을, 마음을 넘어서 있는 그것을 결코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집중의 방식을 통해서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었을 때 오는 자유의 느낌도 경험한 바 있습니다. 또한 의식(Consciousness)이 마음이 변하는 모든 양상과 국면을 관통하여, 삼매라 할만한 생각의 집중 상태도 경험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여전히 되어감의 과정이며, 마음에 알려져 있는 것으로서, ‘존재자’에 대한 자각은 여전히 아닌 것입니다. 마음에 알려져 있는 것은 알려져 있지 않은 그것을 결코 밝혀낼 수 없으며, 창조된 것은, 창조되지 않았으며 다만 홀로 창조할 따름인 그것을 결코 드러낼 수 없습니다(The known can never reveal the Unknown, the created can never reveal the Uncreated, which is alone Creative). 여러 스승들의 도움으로 되어감의 허구성을 직접 보고 나서야, 항상-현존하고 있는 그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al입니다버지와 나는 하나|그것을입니다. whi조건으로 묶여 있는 마음 안에 있는 없이 아닙니다. 이는따름인아가 영원한-현존(Ever-present) 속으로 사라져 버린 자리에, 지금 이 순간 실제로 창조하고 있는 그 무엇입니다. 빗방울이 바다에 합쳐지면 그방울이 바다가 되어, 바다와 똑같은 성분을 포함하고 있듯이, 사람 안에 계신 영도 모든 곳에 계신 영과 똑같습니다. 영은 나누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just as Spirit in man is the same as all Spirit, for Spirit is not divided).”
“그리고,” 나는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순간 저는 거룩한 것들에 대해 이성적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이런 신성한 이성적 접근조차도 이성을 넘어서 있는 그것을 결코 드러내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성한 이성적 접근(Divine reason)조차도 마음에 속해 있는 것이며, 마음이 자기 스스로는 결코 알려져 있지 않은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고요해지기 전에, 이성은 멈추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성적 활동이 멈추게 됨으로써 갈등(struggle)은 끝이 나게 됩니다. 갈등이 끝나게 될 때 마음은 한없이 고요해지며, 그 고요함 속에 실재가 존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실재는 언제나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항상-현존하는 것으로서, 시간에 걸친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마음 스스로 자신은 결코 실재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그 즉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덧붙여 말했다: “마음이 생각을 지어내기를 멈추었을 때, 저는 제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실재가 그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실재가 무엇인지 나는 결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역설적으로 나는 실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나의 갈등은 그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토론을 가슴 깊이 귀 기울여 듣고 있어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수도원장이 말했다. “변모(transformation)가 뜻하는 바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제가 당신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변모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제 나는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며, 무엇이 실재가 일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을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내가 갖고 있던 믿음과 관념들의 허구성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얻은 이 자유의 느낌을, 저는 도저히 말로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저 제가 아는 것이라곤, 내가 변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는 내 오래된 생각과 믿음들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었고, 그동안 내가 지고 다니던 무거운 짐이 참으로 떨어져 나갔습니다.”
게쉬 림포체는 나와 수도원장의 말을 듣고 기뻐하였는데,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내 아들아, 네가 수도원장에게 그토록 깊은 인상을 새겨 주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네가 네 말에 귀 기울일 이들에게도 그와 뻐하였인상을 새겨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단다.”
잠시 침묵한 후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아들아. 순수한 생각이란 과거나 미래에 의해서도, 건강이나 죽음, 성공이나 실패, 선과 악, 신과 악마에 의해서도 제한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것인데, 이러한 모든 것들은 마음의 산물이기 때문이지. 이러한 모든 것들은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는 조건들의 결과인 것이며, 이렇게 해서 마음은 서로 대립되는 이원성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지(caught up in opposites). 그리스도는 사람을 속박하는 이러한 모든 조건들로부터 자유롭단다. 그리스도는 신의 아들로서, 그 무엇에도 어떠한 방식으로도 조건들로 묶여 있지 않단다. 아버지의 생명(the Life of the Father)은 아들(the Son) 안에 있으며, 그 생명은 지금 존재하고 있단다. 아들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지. 너는 이 생명이 네 안에서 일어나길 기다리지 않아도 된단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지금 현존하고(Present) 있기 때문이지.”
“사람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성(active Intelligence)이 있는데, 이 지성은 몸 안에 있고, 또한 모든 생명체의 몸 안에 존재하고 있지. 이 지성은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이란다. 그것은 몸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넘어서 있는 것이고. 그러나 너는 그것이 무엇인지(what It is)를 알지 못한단다. 다만 그것이 그러하다는 것(that It is)을 알고 있을 따름이지. 그렇지 않니?”
“네.” 나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I exclaimed). “그것에 의해(by It) 내가 먹은 음식을 소화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에 의해 내 심장은 몸의 모든 구석까지 피를 돌릴 수 있게 됩니다. 이로써 세포들을 활기차게 하고 노폐물을 제거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이 지성이 몸 내부를 조정함으로써 여름이든 겨울이든 몸은 일정한 온도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창조된 것들은 창조되지 않고 다만 창조하는 그것(the Uncreated-Creative)에 대해 언제까지나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몸은 다른 도구들처럼 언젠가는 닳아 없어지겠지만, 실재인 그것, 의식(the Consciousness)이자 생명 자체(Life Itself)인 그것은 영원토록 남아 있으며 항상-현존합니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제껏 만들어진 기계 가운데 사람의 몸에 대응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몸 바깥에는 이토록 놀라운 일들을 할 수 있는 힘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모든 일들은 몸의 바깥이 아니라 그 안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 의해 창조된 가장 정교한 기계라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의 마음 그 안에서부터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된 것은 그것을 창조한 자(Creator)에 결코 비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The most intricate machine created by man is created from within man himself, and therefore we realise that the created can never match its Creator). 창조된 것들은 끊임없는 변화의 m정 중에 있는 반면, 창조하는 그것(the Creative)은 변치 않고 항구하게 남아있습니다. 창조된 것은 상대적인 반면, 창조하는 그것은 영원하며 항상-현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영감과 창조성의 원천이자, 사랑과 지혜와 권능의 무한한 원천과 변함없이 닿아 있는 것입니다(Thus we are in constant touch with the Source of inspiration, genius, the limitless Source of Love, Wisdom and Power).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말을 부득이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우리는 절대적인 그것에 대해 말을 하고 있지만, 말을 함과 동시에 그것을 상대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그것에 대해 말을 하는 것도 마음 안에 있는 관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생각을 지어내기를 멈추었을 때, 나는 이 영감(Inspiration)과 창조성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과 지혜(Love and Wisdom)를 말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경험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단다. 내 아들아.” 게쉬 림포체는 대답했다. “만약 네가 관념, 이미지, 믿음, 전통 (같은 것들에) 사로잡혀 있다면, 자신이 그것들에 묶여 있다는 것과, 따라서 더 이상 자유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너도 쉽사리 알게 될 것이야. 왜냐하면 그때 너는, 자신의 믿음, 관념, 전통, 한계(limitation) 같은 것들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 그런데 바로 이런 것들이 그 무엇보다 위대한 실재가 일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야.”
“이제 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을 창조하고 그 안에 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단순하게 자신의 관념, 자신의 믿음 같은 것들만 바꾼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던 감옥을 다른 감옥으로 대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동안 믿고 있던 종교를 다른 종교로 바꾸기도 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 종교의 교리가 자신들을 가두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only because they find orthodoxy restricting).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형식의 종교를 취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여전히 마음에 속해 있는 일이며, 또 다른 감옥을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그러나 실재에 대한 관념은 실재가 아닌 것입니다. 새로운 감옥이 이전의 감옥보다 조금은 더 편안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똑같은 감옥이며, 그 안에는 여전히 마음을 제한하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이루고 있는 내용물들을 이해할 때라야 비로소 우리 자신이 만든 감옥으로부터의 자유가 있게 됩니다.”
“그렇지.” 게쉬 림포체는 그이께서 하시던 방식으로 말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자’를 알고 있지 못하단다(most people are not aware of 'Being'). 숱한 사람들이 무지의 바다 위에 떠다니며 변덕스러운 마음, 생각, 감정이 일어날 때마다 방향을 바꾸며 표류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지. 그리고 결국은 그런 변덕스러운 마음, 생각, 감정의 결과들로 인해 무지의 바다에 빠져 잠기게 되는 것이지. 그들은 건강과 행복을 찾는다며 이곳저곳으로 달려들지.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신을 자유롭게 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자신들의 환경을 바꾸기까지 한단다. 건강과 부를 얻으려는(demonstrate) 노력 속에 그들은 자신을 제한하고 있는 조건들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단다. 애초부터 그릇된 방향으로 잡힌 상황 속에서 분투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조건들은 더욱 강화된단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그들은,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달려들고 있자. 그러나 진리를 가르칠 수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란 그들에게 온 사람들을 방향타가 부서진 배에 태우고는, 여전히 무지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폭풍우와 파도에 흔들리게 내버려 두는 것이 전부란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리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란다.”
“맞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저도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직접 들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신과는 분리되어 있는 듯 말합니다. 그들의 신은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이란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존재(some Being)에 대한 관념에 불과하며, 그들의 신은 그들 자신과 분리되어 있고 구별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네 말에 공감한단다. 내 아들아. 그들은 대립되는 것들에 사로 잡혀 있지. 신과 악마, 선과 악, 건강과 질병(health and ill-health), 성공과 실패, 소유와 소유하지 못함, 고통과 죽음 같은 것들 말이야.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것들이 실재인 것이지.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오류란다. 그들은 언제나 무엇인가로 되어가고 있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고 바로 이 때문에 결코 무엇인가로 되어있지는 못한단다(They are always becoming and therefore never Become). 그러나 ‘존재자’ 안에는 죄책감도 감각의 오류도 없단다(But in 'Being' there is neither sense of error, nor error of sense). 따라서 파괴적인 요소도 하나 없는 것이지. 왜냐하면 존재자 안에는 대립되는 것이 없으며, 극복해야 할 것도, 정복해야 할 것도 없고, 따라서 두려움도 의심도 선도 악도 없기 때문이란다. 이러한 것들은 마음 안에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지. 그래서 만약 네가 자신을 들여다본다면, 너는 마음 안에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야. 그러한 것들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만 활개를 칠 수 있는데(flourish), 왜냐하면 사람은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어버림으로써 그것들에 먹이를 주어가며 키우고 있는 셈이지. 그러므로 그는 그것들에 의해 갇히게(conditioned) 되는 것이란다.”
“자, 그런데 진리와 오류(Truth and error)가 뒤섞이게 되면, 그 결과로 건강과 질병, 선과 악, 삶과 죽음과 것들이 나오게 된단다. 그렇다면 진리와 오류 중에 무엇이 더 위대한지 말할 수 있는 자 그 누가 있겠는가? 그릇된 것을 알아볼(discernment) 때라야 그릇된 것은 떨어져 나간단다. 왜냐하면 그것은 조건들로 갇혀 있는 마음 안을 제외하고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지. 진리는 마음 너머에 있으며, 자유로운 것이란다. 우리가 그릇된 것을 알아보고 이해하는 즉시 진리는 들어서게 된단다. 너는 지금 이 말을 이해하고 있지, 그렇지 않니?” 게쉬 림포체는 수도원장을 쳐다보며 말을 했다.
“네,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수도원장은 대답했다.
그러자 게쉬 림포체는 다시 말을 이었다: “사물을 보고 들을 수 있는 힘은 물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란다(The power to see and hear does not originate in matter). 그 힘은 마음 안에서 나오는 것이란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을 인식할 수 없을 것이야. 그래서 마음이 조건들로 묶이게 되면, 몸 역시 그에 따라 묶이게 되는 것이란다. 그러나 마음은 물질에 대해 영향력을 전혀 없으며, 마음이 느끼는 것들을 나타낼 때에만 마음에 대해 몸이 반응하는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란다(Yet there are those who will say that the mind has no say in the matter, and that the body talks back only when it reproduces what the mind feels).”
“우리는 이를 몸과 관련된 문제라 말하지만, 나의 과학적 앎은, 몸은 이러한 것들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에너지일 뿐이고, 에너지를 조정하며 형성 과정 배후에 있는 것은 바로 대생명(Life)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단다(We call the body matter, but my Science has proved that the body is energy in formation and the directing power behind this formation is Life). 무지한 자들은 가장 높은 차원에서 시작하는 대신 가장 낮은 차원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하지. 그러나 우리는 이 과정을 반대의 방향에서 생각하여, 모든 것들의 원천이 되는 그것에서부터, 형성되어 나온 것들을 바라본다고 가정해보자꾸나.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우리는 언제나 무한한 존재자(Infinite Being)에 이르게 될 것이란다. 무한한 존재자 안에서는 분리도, 오류도, 대립되는 것도 없단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오류-환상이 존재하는 육체의 의식(the physical consciousness)은 사라져 버리고, 실재의 의식(the Consciousness of Reality)이 그 자리에 즉각적으로 들어서게 된단다. 몸은, 영원하며 항상-현존하고 있는, 한 생명(One Life)을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단다. 그러므로 만약 네가 몸에 집착하게 된다면, 실재 생명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란다. 그리고 그 생명은 우리가 몸 안에 있는 동안에도 자유롭단다. ‘나는 생명이다’.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며, 나는 이제와 영원토록 그대의 신, 주이다('I am the Life'. He who sees me sees the Father, I am the Lord thy God now and forever).”
게쉬 림포체를 지켜보는 동안, 나는 그의 얼굴이 빛에 휩싸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일어서더니 우리와 세상을 축복하려는 듯 팔을 뻗었고, 그 순간 나는 수천 볼트나 되는 강력한 전기 에너지로 가득 채워지는 듯했다.
다음과 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에게 하는 강론을 마쳤다:
“오 무한하신 하나여, 당신께서는 모든 농작물에 물을 주시며, 그것들은 사람의 도움 없이 자라납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란 그저 씨를 심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땅을 만드시고, 땅에 햇볕을 비추시고 비를 내려주십니다.”
“당신에게 이르는 길을 찾지 못했다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 길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찾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나의 것이기에 나는 기쁨에 넘칩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 무한하신 하나여.”
* * * * *
거기 앉아 있는 동안 우리는 변모의 과정 중에 있었으며, 우리의 의식은 고양되었다. 그리고 내 마음은 멈춰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거나 움직이는 것조차 바라지 않았다. 다만 그 순간 느꼈던 환희의 상태 속에 머물러 있기만을 바랬다.
말로는 그이의 지혜와 사랑이 뿜어내는 완전한 아름다움을 결코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 써놓은 말들은 그가 말했던 내용들의 향기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그 환희(ecstasy)를 다시 느낄 수 있다.
시간이 다소 흐른 후 그는 일어서서 바깥으로 나갔다. 해는 지기 시작했으며 우리도 그를 따라 발코니에 서서 계곡을 바라보았다. 코몰하리는 오렌지 빛으로 물 들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거대한 조각상처럼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해가 짐에 따라, 하늘은 영롱한 분홍빛과 빨간 빛이 어우러진 색깔로 변해갔다. 계곡 전체를 덮어주고 있던 눈 위로 모여들고 있는 구름이 계곡을 감쌌다. 그리고 하늘빛은 점점 더 어두워지더니 짙은 푸른색과 보라색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구름은 저 장엄한 코콜하리 산을 덮기 시작하더니 정상만 간신히 구름 위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수도원 뒤쪽으로 해는 완전히 넘어갔으며, 별들이 저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저 아래에 있는 구름에 은은한 빛을 비추고 있었다.
게쉬 림포체의 말로부터 우리 안으로 빨아들인(gleaned) 황홀한 생각 속에서 우리는 자연의 그 모든 변화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자연(Nature)이 그려내는 이 장엄한 광경이 뿜어내는 매력은, 나를 전혀 다른 세계로 옮겨놓은 듯했다. 그렇다. 나는 그 순간 지상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듯 느껴졌다.
15장
오크 계곡에서 시간은 스멀스멀 흘러가고 있었다. 날마다 게쉬 림포체는 세상에서 내가 잠시 떠나온 세상으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오크 계곡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도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나를 다소 슬프게 했는데, 왜냐하면 그곳에는 언제나 조화로움과 사랑이 머물고 있었는데, 이는 내가 알고 있던 세계에서는 결코 알려지지 않은 사랑과 조화였기 때문이다.
내가 떠나기 7 일 전에, 나의 친구들이 모두 그곳으로 모였다. 양탕 수도원에서 온 게쉬 다르 창(Geshi Dar Tsang)도 왔고, 곤사카 수도원에서 온 게쉬 말라파(Geshi Malapa)도 왔고, 게쉬 퉁 라(Geshi Tung La)도 왔다. 또 오크 수도원의 창 타파(Tsang Tapa)도 왔었는데, 그는 몇 주간 라사 지방에서 지내다 돌아왔다. 그리고 잠사르에서 그 먼 거리를 몸소 여행해 온 내 친구도 있었는데, 그는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처음 그가 나를 만났던 곳인 칼림퐁까지 배웅해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이 중에 내가 누구를 제일 좋아하는지 말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같은 사랑과 애정을 드러내었다. 굳이 순서를 매기자면 이런 순서로 말하고 싶다: 게쉬 림포체, 내 친구, 퉁 라,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다 똑같이 좋았다. 링-쉬-라 은수자(the Hermit of Ling-Shi-La)는 이 자리에 계시지 않았지만, 조만간 그를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친구가 나에게 편지 한 통을 건내 주었을 때, 나는 단번에 누가 편지를 썼는지 알아차렸다. 그 편지는 노르부로부터 온 것이었다. 나는 편지를 읽고는 그것을 내 친구에게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우리 둘 사이에 비밀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오늘로부터 해서 3년 안으로 제가 칼림퐁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그녀에게 전해주세요. 저는 거기서 그녀와 스승님(you)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 내 아들아. 우리는 거기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란다.” 그리고 실제로 정확히 3 년이 되는 날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우리 셋 중 그 누구도 나이를 먹거나 어떤 식으로든지 변하지 않았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는데(that was the most astounding revelation), 단 한 번도 서로 헤어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리 8명은 참으로 식구라 할만 했다. 게쉬 림포체, 내 친구, 퉁 라, 창 타파, 다르 창, 말라파, 수도원장 그리고 나. 우리는 함께 웃었으며, 많은 것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서로 지냈던 시간들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진지함으로 회고하였다(Old times were reviewed with greater interest than ever before).
나는 그동안 각자가 했던 일 모두를 자세하게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특히 흥미진진하고 기뻤던 것은, 퉁 라와 내가 전에 했던 것처럼 쉽게, 나는 퉁 라의 생각을, 퉁 라는 내 생각을 쉽게 읽을 수 있으며,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더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수도원장은 예전처럼 우리의 이야기에 자신의 생각을 보호하기 위해 움츠려들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우리의 토론에 활발하게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그가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교리라는 껍질의 대부분을 벗겨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변모에 관한 이야기!(Talk about a transformation!) 나는 수도원장에게 이에 대해 말했다.
“그래요.” 그는 말했다. “당신이 떠난 이후로 나는 게쉬 림포체와 장시간의 토론을 많이 가졌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저는 제 마음이 되풀이하고 있는 생각들과, 지어내고 있는 생각들과 믿음과 같은 것들의 허구성(falseness)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그것들은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때 제가 느꼈던 자유로움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 이상입니다.”
“그래요.” 나는 말했다. “당신을 보자마자 달라졌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는 설명했다. “마음의 근본적인 변모(transformation)는 당신이 나에게 오고 난 후에야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보다 가장 이상한 점입니다. 게쉬 림포체는 전에 저에게 이러한 것들에 대해 말씀하신 바 없습니다. 제 어리석음으로부터 빠져 나오도록 저를 호되게 꾸짖어주신 분은 (내 친구를 돌아보더니) 바로 당신이셨습니다. 당신께 받았던 호된 꾸지람을 지금 이 순간도 너무나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8장을 참고해보라.)
게쉬 림포체는 사물의 본질(the heart of the things)로 곧장 들어갔지만, 설명할 때 있어서는 매우 온화하였다(quite). 내 친구는 정반대였다. 그는 거짓된 것의 본질(the heart of the false)로 곧장 들어가, 그것의 본래 색깔을 환하게 바깥으로 드러내었다. 본래 그것은 처음부터 거짓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게쉬 림포체는 내 친구보다 부드러웠는데,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부드러운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내 친구는 문제의 뿌리를 곧장 내리쳐 그것의 목숨을 끊어놓았다. 둘 다 모두 영혼을 일깨우는데 있어 위대한 숙련자들이었으나, 나는 그들이 가르치는 방식에 있어서의 커다란 차이를 구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 둘의 가르침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말하자면, 링-쉬-라 은수자는 앞의 두 사람과도 또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내 친구나 게쉬 림포체보다 더 위대한 마스터(Master)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에게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으며, 그대도 이 말을 접하면 내 마음에 새겨진 인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단다.” (but there was something about him that gave you the impression, "I am not of this world.")
일곱 명 모두는 각자 내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각각 어떻게 내 삶에 영향을 끼쳤는지 완벽하게 말할 수 있다. 퉁 라, 다르 창, 말라파, 창 타파 그리고 수도원장은 나를 단련시키는 데 있어서 모두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때를 되돌아보는 지금 이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인다. 이 모든 것이 사람의 마음에 의해 고안된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미치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 있는 어떤 계획이 있어, 그에 따라 꼭 맞게 일어났다는 것을 이제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충분히 깊게 들여다 볼 때, 이 땅 위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의 이해 범위로는 도저히 닿을 수가 없는 신비이며, 사람의 의지도 훨씬 넘어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신의 영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 땅 위의 그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는 단 한 분이기 때문이다.”
어느 저녁 우리는 수도원장의 방에 모여 있었는데, 그때 우리는 모두 코몰하리 산을 내다보고 있었다. 달이 거기를 비추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으며 계곡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거대한 통나무로 태운 불길은 매우 약하게 잦아들었고, 방에 어두운 붉은 색 빛을 전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여덟 모두 그 자리에 있었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에 링-쉬-라 은수자가 우리의 한가운데에 나타났다. 이에 대해 나는 놀라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 순간 나는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 자리에 그가 자신을 나타내 보일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엑토플라즘이 모아져 있었음에 틀림없다. 물론 우리가 그런 목적으로 앉아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때 그는 말을 했고, 나는 그때 그가 말했던 것들을 언제까지라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전에 제가 오겠다고 말했던 대로 지금 여기에 왔습니다. 물론 그동안도 여러분들과 다소 함께 있었지만, 내 자신의 모습을 여러분이 볼 수 있도록 드러내서 직접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오늘 저녁에만 가능합니다.”
나는 그가 그 말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뜻을 이해했다. 물론 그는 우리 여덟 명이 함께 보냈던 모든 저녁마다 우리와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그이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현존을 감지하고 있었다(my thinking of him was no doubt the sensing of his presence). 그리고 마침내 우리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코몰하리를 쳐다보기 시작할 때서야 그가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엑토플라즘이 형성된o doub그날 밤은 참으로 잊기 어려울o doub그날 모임을 위해서 아무런 준비도, 자리 배치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특별한 일이었다. 링-쉬-라 은수자는 그날 참으로 자연스럽게, 예기치 않게 방문하였던 것이고, 이렇게 한 것이 그가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날 밤 은수자께서는 나에게 말을 걸으며 말씀하셨다. “내 아들아. 네가 우리를 떠나, 현재로서는 아득하게 멀리 있는 듯 보이는 바깥 세상을 향해 가기 전에, 너에게 말을 하기 위해 나는 온 것이란다.”
그는,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천천히 차분하게,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이 진리(the Truth)라는 것에 확신을 갖고 말을 했다. 그리고 우리들 모두도 그의 말이 진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생명의 나타남이야(We are the expression of Life).” 그는 말했다. “살아계신 현존을 표현한다는 것은(the expression the Living Presence) 관념도 아니고, 자신의 바깥에 있는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는 것이 아니지(not dependent on any outside agency). 모든 창조물을 책임지고 있으며 보살피고 있는 것은 단일한 살아계신 현존(the same Living Presence)이란다. 네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그때 너는 바로 이 생명 속에서(in this living), 자신의 마음 안에서 스스로 창조해낸 것들이 살아 계신 현존에 의해서 창조되고 있는 것들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야. 너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곤, 이제껏 자신이 들었고, 배웠고, 경험하거나 믿고 있는 것들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이러한 기억들은 곧 사라져 버리지만, 살아 있으며 바로 그대의 생명(your Livingness)이 되시는 살아 계신 현존은 영원한 창조성이자, 유일한 실재이란다.”
“그래서 지금 너는, 몸을 지어낸 지성(the Intelligence)은, 몸을 지어내기 전에도 존재했으며, 몸이 본래 자신을 이루고 있는 물질로 환원되고 난 후에라도 여전히 존재할 것임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단다. 형태를 갖추어 나타나게 된 생명체들은, 지성과 질료(the Intelligence and Substance)로부터 나왔으며, 또한 그 안에서 지어진 것이야. 영원하신 이(the Eternal) 바깥에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 모든 것은 영원하신 이 안에 존재하고 있단다. 네가 영원하신 이에 대해, 자신의 마음 안에서 만들어 낸 가장 위대한 관념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하신 이 자체가 될 수 없는 것이란다.”
“지금 내가 너에게 말을 하고 있으면서, 내가 너와 함께 이치를 헤아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너는 생각들을 만들어내고 있구나. 네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고만 있다면 이 역시 좋은 것이지만, 아직 충분히 멀리 가고 있지는 못하구나(That is good so far as it goes but it does not go far enough). 너는 여전히 마음 차원에서 기능하고 있으며, 내가 말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들을 너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 내고 있단다. 그러나 네가 보다 깊어진 상태에서(in the deeper sense) 내 말을 듣게 된다면, 네 마음 안에서 진리가 드러나는 과정이 펼쳐질 것인데, 이는 자신의 생각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란다. 나는 네가 바로 이것을 경험하기를 바라는 것인데, 그리하여 생각(idea)이란 무엇인지 네가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란다. 왜냐하면 만약 네가, 생각이란 무엇인지, 그것이 자신 안에서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지를, 이해하지(aware of) 못하고 있다면, 너는 결코 생각들을 넘어서 있는 그것을 결코 경험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아직도 너는 다른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그지만,함 이써 너는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환무엇인영속시키고 있구나. 하지만 그지만,의존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단다. 이런 상태에서는 너는 그저 이 환무 뒤로 숨은 상태에서 ‘신은 사랑이다, 신은 지혜이다, 신은 생명이다’ 와 같은 말들만 되풀이하게 된단다. 그런t 이런 말들은 그저 관념에 지나지 않네가 그지지 않니? 너는 전에는 이런 사실엇인깨닫지 못했단다. 왜냐하면 너는 다른 이들러나 아직들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다른 이들러나 하는 것을 아무 생각 없러나받는 이기만 하거나, 자신고 있었기 때문. 다권위자에 없에 의존하게 될 때, 신은 너에게 결코 실재(a Reality)가 될 수 없단다. 그 권위자가 아무리 학문이 높다 할지라도 말이야.”
“지난 삶 동안에 너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의존해 왔었단다. 그동안 너는 다른 이들이 너의 생각(thinking)에 영향을 끼치도록 내버려두었으며, 네 삶에서 어느 정도의 범위까지 전통, 믿음, 민족과 국가라는 정체성(nationalities)들이 네 삶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이러한 것들이 분리, 두려움, 한계(limitation), 혼란, 슬픔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지.”
(그 순간 나는 은수자님을 매우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나 말고도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들에 대해 물론 관심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가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이자 엑토플라즘의 농도는 더욱 짙어졌다. 그리하여 나는 그 순간 그곳에서부터 링-쉬-라 은수자의 암자로 옮겨진 듯 했다.)
“자 그러면,” 그는 말을 계속했다. “그대 영혼의 병에 대한 치료법은 과연 무엇이겠니(what is the remedy)? 너는 반드시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을 해야 한단다. 전통으로부터 자유롭고, 믿음으로부터 자유롭고, 제한으로부터 자유롭고, 분리로부터 자유로운 생각을 말이다.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진리(the Truth)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것이란다. 만약 네가 자신의 믿음과 관념들로 사로잡혀 있다면, 너는 결코 진리를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란다. 너를 계속 노예 상태로 가두고 있는 그 근본 원인을 너는 반드시 알아내야(discern) 한단다.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면, 너는 다른 이들 역시 자유롭게 할 수 없단다. 너는 반드시 자아 스스로의 환상을 분명하게 알아보아야(discern) 한단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자유로움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단다. 자유는 지금 이 순간도 존재하고 있지만, 타인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환상이 너를 속박의 상태에 계속 남아있게 하고 있구나. 네 마음 안에 있는 것들은 오래된 것들(the old)이야. 너는 반드시 오래된 것들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태에서 새로운 지금(the new)을 만나야 한단다. 그리고 이는 오래된 것들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이해(knowing)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지. 그러면 너는 새로운 지금을 만날 때 오래된 것들을 내버려두고 만나게 될 것이란다.”
“예수께서 알고 계셨던 생명(the Livingness), 그리고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그 생명, 그리고 너 역시 완전히 알게 되기를 바라는 그 생명은, 미래에 있거나 과거에 속해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항상-현존(Ever-Present)하며 매순간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이란다. 네가 만약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면, 미래란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란다. 그리고 미래에 관한 진실(the Truth of this)을 이해하는 순간, 그것은 너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되지. 그렇지 않니? 지금 이 순간 너는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는데, 이는 네가 미래와 과거에 관한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란다. 미래의 어느 순간에 성취하게 될 자신의 생생한 어떤 모습은(your Livingness in the future) 마음 안에 있는 관념에 지나지 않는단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생명에 대한 관념을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너의 생명 그 자체가 되지는 못하는 것이고. 실재에 대한 자신의 관념이 실재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을 때, 너는 지금 바로 이 순간 자신의 생명(Livingness)을 자각하게 된단다. 왜냐하면 지금 바로 이 순간 너는 그것(It)을 관념으로 만들어내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을 다 이해하였니?”
“예.” 나는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심장을 계속해서 뛰게 만드는 그 무엇은, 자신의 가족도 아니며, 자신의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관념도 아니며, 자신의 교회나 믿음이나 전통도 아니라는 것을 네가 이해하고 있을 때, 이러한 한계들을 넘어서 있는 그것을 보게 될 것이란다. 너는, 그것이 자신의 내면에서 항상-현존하는 그 어떤 것(something)이며, 관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란다. 또한 그것은 이토록 놀라운 일을 하고 있지만, 너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란다. 그런데도 왜 자꾸 너는 자신의 바깥에 있는 권위(source)에 의존하려 하는 것이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지: ‘나에게 오면서도,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와 자매, 아내와 자식,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life)까지도 제쳐두지(put aside)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 말씀의 의미를 말하자면, 만약 네가 어떤 것이든 어떤 사람이든 그러한 것에 의존하게 되면, 그것들이 너에게 아무리 가깝고 소중하더라도(near and dear) 너는 자신의 자유로움을 잃고 의존적인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란다. 이렇게 해서 너는 실재를, 즉 항상-현존하는 생명(the Ever-Present Livingness)을 결코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란다. 그것은 모든 것들의 배후에 존재하며, 모든 것 안에 있으며, 이 모든 것보다 위대한 것이지. 이 세상에 오게 된 모든 영혼 안에서 신의 영(the Spirit of God)께서 태어나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너는 결코 신의 그리스도(the Christ of God)를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없단다. 만약 네가 바깥에 있는 어떤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면, 이로써 너는 결코 신의 그리스도의 제자(disciple)가 될 수 없게 되는 것이란다.”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말하는 바깥의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너는 결코 그것들을 경배해거나, 그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너는 반드시 진리와 실재 안에서 신을 경배(worship)해야 하는 것이란다. 자신 바깥에 있는 것을 숭배(worship)하기 시작할 때, 너는 노예가 되는 것이며, 네가 숭배하는 것의 환상에 묶이게 된단다.”
“거짓된 것에 대한 참된 자각(awareness of the false)은, 네가 거짓된 것을 이해하고, 그것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때라야 자신 안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란다. 이러한 자각을 바깥으로부터 끌어 들여서는 안 되며, 다만 네가 스스로 거짓된 것을 알아보는 노력을 통해서 이러한 자각이 피어나게 해야 한단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너는 또 다시 바깥의 권위에 의존하게 될 것이란다.”
“아직도 너는 외부의 자극에 의해 쉽게 마음이 동요될 수 있으나, 네 마음을 흥분시키는 것들은 언뜻 보기에는 다르게 보일지언정 그 결과에 있어서는 다 같단다(You can be stimulated by an external reaction, but all stimulants are similar in effect). 술을 마시든지, 그림을 보든지, 연주회에 가거나 종교 예식에 참여하든지, 고상한 일이나 고상하지 못한 일이든 간에 그 종류를 가릴 것 없이 어떤 종류의 일에 대해서 몰입을 하든지 간에, 이러한 모든 것들은 네 마음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야(they are the same, merely stimulants). 네가 이 사실을 참으로 이해하게 될 때, 그것들은 너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란다. 그러면 그때 이러한 모든 것들보다 위대한 그것이 들어서게 된단다. 이는 바로 모든 환영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지. 그때 너는 네 마음을 자극하는 것들은, 그것이 높은 차원 낮은 차원 가릴 것 없이, 가치 있다 가치 없다 하는 것 등에 상관없이 너를 환상으로 이르게 할 뿐이며, 결코 자유와 진리로 이끌지는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란다.”
“너도 이미, 조직화된 종교, 정치, 형식적인 예배(cults), 국가나 민족이라는 정체성(nationalities), 전통 같은 것들이 사람을 구속하는 족쇄가 된다는 것과, 이러한 것들을 믿고 있는 자들이 자신과 동일한 것을 믿고 있지 않는 자들에 대해 잔인하게(fiendish) 행동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단다. 우리가 서로 싸우고 우리 삶이 불행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 것이지. 양의 털을 뒤집어쓰고 있는 이 늑대를 볼 때, 관념이라는 털옷을 뒤집어쓴 이기심이라는 늑대의 겉모습에 속지 말고,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자 뒤집어쓴 털옷을, 그것이 제거된 상태로 반드시 바라보아야 한단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일들은 너 혼자서만 할 수 있는 것이란다(you alone can do what is necessary). 너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이 아니란다.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은, 네가 벗겨내야 할 관념과 믿음에 반대되는 것뿐이지, 그것들도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관념이자 믿음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그것들은 다 똑같은 것이란다. 네가 스스로 생각할 때라야, 다른 이들에게 의존하고 믿음, 관념, 예식, 그 나머지 것들에 의존하려는 성향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단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어려워하는 자들도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자기 스스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for they cannot think for themselves). 굳어버린 그들의 관념들은 마음에 너무나도 깊이 박혀 있고, 그래서 그들은 그것들에 사로잡혀 있단다. 이것이 그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그들은 이 바탕에 따라서만 생각할 수 있단다.”
“아들아, 너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마음을 뒤틀리게 하고, 편협하게 하고, 독단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란다. 그래서 마음 안팎으로 갈등이 일어나고, 이 갈등이 생각-느낌이라는 조건을 더욱 심화시키게 되면서, 그것은 더욱 더 많은 불행을 생겨나게 하고, 원인과 결과라는 결코 끝나지 않는 사슬을 작동하게 한단다. 네가 생각과 관념의 거짓됨(falseness) 알아볼 때라야 이 모든 것이 멈추게 된단다. 네가 그것의 거짓됨을 알아보게(see) 되면, 그것은 저절로 떨어져 나간단다. 그러면 그 즉시 자유와 실재가 존재하게 된단다. 왜냐하면 자유와 실재는 항상-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느낌이라는 반응(thought-feeling reaction)을 부단히 자각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란다. 내 아들아,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너는 환상의 그물에 걸리지 않게 될 것이란다.”
“만약 너에게 격려와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사람들에게 네가 의존하고 있다면, 그들이 아무리 숭고하다 할지라도 너는 분리와 의존이라는 환상 속에서 길을 잃게 될 것이란다. 집단(groups)이라는 것은 시작과 끝이 있게 마련이고, 자신이 아닌 다른 집단에 대해서는 대개 대립의 날을 세우고 있고, 이로써 혼란을 더욱 심화시킨단다. 그러나 시작도 마침도 없는 그것을 찾고자 한다면, 네 자신 안에서 이를 찾기 위한 여행을 해야 한단다. 자신 안을 향하는 것이 아닌 다른 모든 길들은 환상으로 이르게 하는 어지러운 것들이며, 이 환상 안에는 자유도 진리도 없단다(To seek that which has no beginning or ending, the journey lies in yourself. Every other way is distraction in which there is no freedom, no Truth).”
“갈등과 슬픔을 해결하고자 할 때 그것들이 일어나고 있는 같은 수준의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한다면, 오히려 더욱 더 깊은 슬픔과 갈등과 좌절에 빠지게 된단다. 그러나 네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부단히 자각하면서(aware of what is happening around you), 멈추지 않고 참을 찾기 위한 여행 계속하다 보면, 너는 항상-현존하고 있는 실재, 즉 사랑이 표현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게(discern) 될 것이란다. 그때 너의 여행은 거짓과 참을 드러내는 과정이 될 것이며, 계속해서 자유로워지며 창조적으로 되는 경험이 될 것이란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에만 자유와 진리(Truth)가 있게 되는 것이란다.”
“아들아.”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 자유로움을 경험하고자 한다면, 너는 그 어떤 권위, 그 어떤 개인에게도 의존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야. 그 권위나 개인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야(however learned that authority or individual may be). 어떠한 형태로든 무엇인가에 의존하게 되면, 혼란(uncertainty)과 두려움이 생겨나게 되고, 따라서 이것들이 실재를 경험하는 것을 방해하게 되는 것이란다.”
“아들아, 오늘날 네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흔히들 높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창조적 이해는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아주 조금 밖에 있지 않단다(In your world today, my son, there is little or no creative understanding in high places). 그들에게는 자기-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나 저 멀리 있는 희망은 땅바닥에 내팽겨지게 되는구나(What hope there is, is dashed to the ground through lack of self-knowledge). 자기-이해가 없을 때, 우리는 갈등과 슬픔과 유혈극(bloodshed)에 빠지게 된단다.”
“자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있을 때라야, 너는 자아를 넘어서, 고요하고 흔들림이 없으며 잔잔한 존재자(Being)의 상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단다. 거기에는 항상-현존하는 실재, 즉 사랑과 지혜가 언제나 확고하게 있단다(state of Being which has the assurance of the Ever-Present Reality - Love and Wisdom).”
“너는 항상-현존하는 실재를 만들어내지 못한단다. 그러나 자아 자신이 실재의 나타남을 방해하고 있는 걸림돌이라는 것을 이해하게(know) 될 때, 항상-현존하는 실재는 일을 하게 된단다(become operative).”
“자아가 바로 악의 근원(the cause of the evil)이란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가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이 사실을 깨닫고 계셨지: ‘내 뒤로 물러서라, 사탄아.’ 그리고 네가 자아를 지켜봄에 따라, 너는 현상 저 너머에 있는 내면(the Inner)의 영을 자각하게 될 것이란다. 그리고 내면의 영은 곧 사랑이자, 실재의 지성적 표현이란다(the Intelligent expression of Reality). 그리고 내면의 영을 깨닫게 될 수록 그 결과로 외부도 분명해지게 된단다(as the Inner becomes realised, the outer becomes clear). 자, 그리고 이 내면의 영은 다른 이 안에 있는 영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무엇인가가 아니란다. 그것은 네 안에서 실재(Real)인 것처럼, 다른 이 안에서도 그러하지. 실재 안에서는 분리(separation)도, 분열(division)도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때에 너는, 악이라 부르는 것은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인간의 마음이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과 악은 자아를 제외하고는 자아 밖에 있는 그 어떤 공간에서도 존재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란다. 그리고 자아란 환상일 뿐이며 모순(conflict) 상태에 있는 기억과 관념의 묶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란다.”
“아들아, 네가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너는 영 바깥에서 자아가 만들어내는 현상들을 제대로 알아보게 될 것이란다. ‘바깥(the outer)’이라는 자아는 그 교활한 속임수와 현혹시키려는 시도와 허구성(unrealness)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 안에서 그토록 많은 이들이 길을 잃고 있는 것이지. 사람들은 이러한 혼란과 불행에 대한 근본 원인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흔히 여론(public opinion)이라 부르는 것을 무턱대고 받아들이고는, 그것들이 생각-느낌-반응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들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것이란다. 지금 너는, 자아와 실재를 밝혀내는 과정(a revealing process)이라는 말을 통ㅎ 내가 무슨 뜻을 전하고자 하는지 이해하고 있구나.”
“우리는 너무나도 흔하게, 자신들을 구속하고 있는 조건들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단다. 그 조건들은 자기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느낌-반응이라는 과정으로부터 발생하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란, 너 자신의 생각-느낌-반응을 알아보고(discern)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란다. 그때라야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움이 있을 수 있는 것이지.”
“아들아, 너는, 만약 어떤 사람이 특정한 믿음을 따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note) 될 것이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믿음에 반해서 일어나는 어떤 생각이나 의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유도 묻지 않고 즉각 폐기시켜(rejected) 버린단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함이 없이 꿈틀대며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무지는 계속해서 남아있게 되는 것이란다.”
“네가 실재의 즉각적인 현존을 깨닫게 되면, 그때에는 그 어떤 구별도, 그 어떤 분리도 존재하지 않게 된단다(There is no distinction, no separation, when you realise the immediate Presence of Reality). 그때에는 모두가 같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란다. 첫째와 꼴찌, 꼴찌와 첫째, 모두가 다 같단다. 왜냐하면 그들은 살아계신 현존(Living Presence) 안에서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란다.”
“분리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서로를 구별 지을 수도 없는 것이란다. 모든 이는 항상-현존하는 사랑(Ever-Present Love)이라는 왕국에서 하나란다. 이 사실을 깨닫는 마지막 사람도 이를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과 똑같단다. 우리는 모두, 지금이라는 순간 안에서 언제나 무한한 그것(the Infinite) 안에 있는 것이란다. 그것 바깥에서는 우리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데, 무한자(Infinity) 바깥에는 그 어떤 존재도 없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단다. 왜냐하면 그들은 분리와 구별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란다.”
“자, 아들아. 모두가 이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모두, 살아계신 신의 드넓은 성전에서, 아버지의 영광과 모든 인류의 형제애만을 위하여, 기쁨에 넘쳐 살게 될 것이란다(Now, my son, when all understand this, we will all live joyfully in the Cosmic Temple of the Living God, to the glory of the Father and the Brotherhood of all mankind).”
이 말을 마치고 그는, 주(the Master)께서 모든 이를 축복하실 때처럼, 그의 팔을 들고는 이렇게 말을 했다:
“오 거룩한 하나여, 그동안 우리가 무지 속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당신을 바깥에서 찾았으나, 당신을 발견할 수 없었나이다.”
“바깥이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보았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귀한 진주를 찾고자 우리 자신의 존재(Being)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나이다.”
“당신으로부터 오는 영감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믿었으나, 우리가 발견한 것이라곤 두려움과 의심이라는 바람 앞에 흩날리는 낙엽이었나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리의 경계선 너머로 당신 사랑의 날개를 펼쳤을 때, 당신께서는 우리의 가슴에 어느새 들어와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셨나이다.”
“그제야 우리는 당신을 내면에 계시는 그리스도, 당신에게서 난 유일한 아들로서 알아보았나이다. 오 거룩한 하나여, 오 거룩한 하나여(Then we knew Thee as the Christ within Thy only begotten son, O blessed One, O blessed One).”
* * * * *
은수자께서 말씀을 마치신 뒤에 잠시 깊은 침묵이 흘렀다. 잠시 뒤 그는 게쉬 림포체에게로 돌아서서 말하였다:
“삼 일 뒤에 그대들이 정기 모임을 하게 되면, 그때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이 모임이 끝나고 나면 우리의 아들은 그가 떠나왔던 세상을 향해 다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일이 완수될 때까지 그를 지켜보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마치고 그는 우리를 떠나갔다. 나는 그의 장엄한 모습이 안개처럼 희뿌연 그 무엇 안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분이 사라질 때 나도 역시, 아시아를 통틀어 가장 지혜로운 그분과 함께 가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16장
참으로 아름다운 겨울 아침이었다. 공기는 상쾌했으며, 해는 코몰하리 산 뒤쪽에서부터 떠오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신들이나 볼 수 있을 법한 경치였다. 그날따라 아침은 더욱 환해 보였으며, 해가 떠오르는 그 모습은 더욱 장엄해 보였고, 코몰하리 산도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아침 햇살은 산 뒤쪽으로부터 해서 하늘로 퍼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뒤로 아직 숨어들지 못하고 반짝이는 별들을 바탕으로 해서 온갖 색으로 반짝이며 산 정상에 박혀 있는 거대한 다이아몬드를 보여주는 듯 했다.
나는 발코니에 서서 대자연의 이 파노라마가 점점 더 밝은 색조로 바뀌면서 머리 위에 있는 창공(canopy)을 시나브로 밝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그때 나는 라마승들이 “옴 마니 받메 훔”을 노래하며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나는 꿈을 꾸고 있는 듯 했다. 그 순간 나는 링-쉬-라 은수자를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의 말을 다시 들을 수 있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누군가 내 뒤에 있는 것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내 친구였다. 그도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이 장엄한 모습을 즐기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그는 그가 평소에 하던 친근한(affectionate) 방식대로 내 어깨 위로 팔을 두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늘 아침, 네가 여기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단다. 아들아. 나는 네가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는 모습을 보았단다. 그때 너는 눈으로 하얗게 덮인 코몰하리를 배경으로 서 있는 검은 실루엣의 형태로 서 있었으며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 너를 감싸고 있었단다. 그 모습은 이제껏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inspiring) 그림이었단다. 너는 햇살이 퍼져나가는 그 중심에 서 있었는데, 햇살이 네 주위로 더욱 더 넓게 퍼져나갔단다. 하얗게 눈으로 덮인 산을 배경으로 네가 두드러지게 서 있었을 때, 너의 머리와 어깨는 더욱 커보였단다. 그리고 산의 정상은 온 세상에 자신이 받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단다. 나는 이 모든 장엄한 모습에 깜짝 놀랐단다. 해오름을 보는 동안 나는 너와 네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단다. 아들아, 내가 몸으로는 너와 함께 하지 못하겠지만 영으로는 함께 할 것이란다.”
“오늘 아침에는 너에게 행동(action)에 대해 말하고 싶구나. 그러니 어서 앉도록 하자.” 그는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떠오르는 해를 마주하고 있는 자리로 가서 함께 앉았다.
그는 곧장 시작하지 않고 잠시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실제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나는 모른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 시간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 고요한 변모가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그 침묵의 한가운데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을 내 안에서 깊숙하게 듣고 있는 듯 했다.
“개인이 곧 세상의 모습이며, 개인의 변혁 없이는 세상의 변혁도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란다. 세상은 지금 엄청난 투쟁 속에서 살고 있는데, 이 투쟁의 원인은 바로 개인 안에 있기 때문이란다(The individual is what the world is, and without transformation of the individual there can be no transformation in the world, for the individual is the root of the strife in which the world now lives).”
“자, 아들아. 사람들은 개인이 혼란과 갈등에서 자유로워지기 전에 앞서 집단적인 변혁(regeneration)이 반드시 먼저 와야 한다고 믿고 있단다. 그러나 사실(the case)은 그와 정반대란다. 개인의 변혁(regeneration)이 없다면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 역시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왜냐하면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변혁도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인데, 이는 개인이 전체와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지.”
나는 그분의 나지막한 음성을 영원토록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때 이렇게 느꼈던 것이다.
“우리는 인류 전체의 산물이란다(We are the product of the whole).”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물론 개인 각자는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에 따라서 사회적, 종교적, 인종적, 정치적인 조건들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묶여있지만 말이야. 개인으로서는 각자 서로 다르게 조건화되어(conditioned)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인류 전체를 제한하고 있는 이 모든 조건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믿고 있는 총체적인 과정에 속해 있다는 것을 너는 곧 알게 될 것이란다(You will see that, though each one may be conditioned differently, the total process of separation is this conditioning). 네가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을 때라야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된단다. 왜냐하면 어떻게 해서 네가 스스로 조건들로 인해 묶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자, 아들아. 세상은 어떤 종류의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단다.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를 행동하기를 바라고 있지.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싶어 하지. 특히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로 세상이 나누어져 있고, 소위 종교 단체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고 있는 지금의 경우에는 특별히 더 그렇지. 세상이 이토록 혼란스럽고, 이토록 불행하고, 이토록 큰 혼돈에 빠져 있단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사실 우리 자신의 행실(behavior) 때문에 일어난 것이란다. 이는 우리가 곧 세계이기 때문이란다.”
“자, 행동(action)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단다. 행동이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 관념에 대한 관계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란 행동(action)을 이해하는 것이란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바르게 행동할(act rightly) 수 있게 될 것이란다.”
“행동이란 뭔가를 한다는 것(behavior)에 지나지 않아. 그렇지?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는 조건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패턴에 따라 그 조건을 강화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은 사실 행동이 아니라, 반응(reaction)하는 것에 불과하단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런 패턴(pattern)을 습득하였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패턴에 속해 있는 그물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란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행동을 관념에 맞추려고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올바른 행동(right action)이 아니란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그 패턴에 순응(conforming)하는 것일 따름이지. 그렇지 않니? 나는 네가 이 문제를 주의 깊게 지켜보길(watch) 원한단다. 그래야 너는 지극히 중요한 이 질문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란다. 또한 네가 이제 곧 돌아가야 할 세상 안에서 너는 이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므로 행동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너는 반드시 일정한 패턴에 순응하는 그 그릇된 과정(false process)을 이해해야 한단다. 순응(conformity)이라는 공격적인 행동은 결코 올바른 행동이 될 수 없단다. 올바른 행동 안에는 반응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 일정한 패턴에 순응하는 것이 바로 혼란과 갈등(strife)의 원인이 되는 것이란다. 왜냐하면 그때 너는 순응이라는 과정의 거짓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될 때 네 행동은 자신이 따르고 있는 패턴의 연장선상에 있을 뿐이며, 그 패턴이라는 것도 다른 패턴에 반대되는 것일 뿐 그것을 넘어서지는 못한단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평화와 조화로움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란다. 그러나 네가 그 거짓된 것을 거짓된 것으로 알아보게 된다면, 거짓된 것은 저절로 떨어져 나갈 것이며 너는 참인 것을 갖게 될 것이란다(But if you know the false as the false, the false will fall away and you will have the True).”
“올바른 행동이란 생명 자체에 대해 평화롭게 접근하는 것을 말한단다(Right action is your peaceful approach to Life Itself).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생명을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생명에 공격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결코 아니지. 자아를 표현하게 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슬픔과 갈등을 가져오게 된단다. 자아를 표현하는 이러한 행동은 관념의 결과일 뿐 참된 행동은 아니란다. 참된 행동은 네가 거짓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그 무한한 상태에서만 발휘되는(operates) 것이란다. 거짓된 것을 네가 이해하고 있을 때라야 너는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란다. 그리고 이는 관계를 통해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는 것이고. 아들아, 너는 이 점을 이해하고 있니?”
“네.” 나는 대답했다.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삶을 걸어 나가면서 서로 맺고 있는 관계 안에서, 완전한 변혁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사물은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과 동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because things cannot go on as they are). 이 사실은 관념, 전통, 체계, 패턴 등에 순응하는 과정 속에 있는 개인적 그리고 집단적 활동에 대해 깨어 있으며(alert), 이를 지켜보고 있는 자에게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관념, 전통, 체계, 패턴 등은 그것들이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은 우리를 재난의 벼랑 끝으로 이르게 하며, 우리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간단히 무시하거나 거기에 만족하는 행동은 이 절박한 눈사태를 저지하지 못합니다. 그 원인을 이해할 때라야 비로소, 변혁(regeneration)으로 이어지게 하는 올바른 행동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했다. “변모(transformation)를 일으키는 행동은 우리 삶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변모이어야지 시간에 걸친 변화여서는 안 됩니다. 시간은, 시간을 넘어서 있는 그것(the Timeless)을 결코 밝혀낼 수 없기 때문인데, 오직, 시간을 넘어서 있는 그 상태 안에서만 평온함(tranquility)과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단다. 아들아.” 그는 대답했다. “네가 말한 그것이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있는 내용이란다. 세상 모든 곳에서는 다툼(strife), 빈곤, 비열함(dirt), 서로 다른 집단 간의 분쟁(struggle), 파업(strikes), 소규모 전쟁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며 존재하고 있단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에는 지구 차원의 분쟁으로 발전할 뿐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단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것을 일어나게 한 허구들(the false)이 이해되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이 문제를 지적으로만 토론하는 것은 아무런 쓸모없단다. 이제껏 우리가 서로 말했던 내용들을 실제로 내면에서부터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지.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변혁이란 있을 수 없지. 너는 다른 사람들이 말했던 내용을 반드시 다 잊어야 한단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누구의 말도 인용하고 있지 않단다. 그렇게 한다면 어리석은 일이겠지. 누군가의 말을 인용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네가 그 누구도 따르지 않게 될 때라야 너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란다. 너는 반드시 네 스스로 이를 알아내야만(find out) 한단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너는 다른 이들이 믿고 있는 것에 순응(conforming)하고 있을 뿐이야.”
“만약 네가 어떤 관념을 따르고 있다면, 그때 이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단다. 그때 너는 그저 순응하고 있을 따름이야. 그러므로 관념과 행동 중에서 자신에게 무엇이 먼저 오는가를 알아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란다. 만약 관념이 먼저 온다면, 너는 그 관념에 순응하고 있는 것이며, 이렇게 한다는 것은 그저 그 관념을 따라 모방한다는 것인데, 이는 다른 관념을 지닌 사람들에 대해 적개심(antagonism)을 갖게 되는 것을 뜻한단다. 소위 우리의 문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의 전체 구조는 서로 대립하고 있는 관념들 위에 세워져 있단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혼란과 갈등이 있는 것이지. 세상은 서로 반대되는 관념들 때문에 나누어져 있지 않더냐? 관념의 모든 구조를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어떤 편을 든다는 것은 어리석으며 유아기적 행동이지. 그렇게 한다는 것은 그가 성숙치 못했다는 증거지. 성숙한 사람은 인류의 고통, 전쟁,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try)한단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조건에 묶여 있는 이런 저런 사람이 된다는 것이지. 그렇게 되면 그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게 된단다.”
“만약 관념이 너의 어떤 행동을 형성하게 되면, 바로 그 행동 때문에 너는 더욱 큰 불행과 혼란만을 만들어내게 된단다. 그러나 네가, 어느 순간에 자신의 행동이 관념이나 기억에 근거해 있지 않음을 알아보게 될 때,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모든 일들은 평화로운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오늘날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방식처럼, 모든 것을 뒤엎거나 새로 지을 필요가 전혀 없게 된단다.”
“너는, 이러한 상태가 어떤 관념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란다. 그리고 관념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관념의 틀이 어떻게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mould) 있는지를 이해하게 될 때라야 그 상태는 가능해진단다.”
“관념이라는 틀에 따라 주형된(moulded) 행동은 참된 행동을 해친단다(detrimental).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해결책을 찾는 것은 헛수고일 따름이야. 변혁이란 스스로 항상-새로워지며, 다툼(struggle)으로부터 자유롭고, 서로 갈등되는 관념들이 갖게 만드는 적개심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인데, 관념에 근거하지 않은 행동이라야 이러한 변혁을 가져올 수 있단다. 아들아, 내 말을 이해하겠니?”
“네.” 나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권력(power)에 대한 욕망이나 계획을 품는 것이 전적으로 사악하며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너도 알 수 있을 것이란다. 다른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생각하길 바라면서, 남들에게 그렇게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행위는 결국에는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재앙을 초래하게 된단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이것이 수없이 되풀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사람들은(you) 미래에 어떤 비전이 있다고 자처하는 책략가와 지도자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그들이(you) 혼란스럽기 때문이지. 그리고 자신이 혼란스럽기 때문에 그들은(you) 지도자와 책략가를 갈아치우고 색깔을 나누곤(rend) 하는 것이지.”
“유일한 힘은 바로 사랑의 힘이며, 이해와 친절함과 자비의 힘이란다. 실재의 이런 힘만이 홀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지.”
“계획(scheme), 권력(power)에 사로잡혀 있는 마음은 결코 사랑(Love)을 알 수 없단다. 그리고 사랑이 없다면 문제에 대한 해결책 역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야. 너는 이해(understanding)를 미룰 수도 있고, 머리를 써서(intellectually) 가슴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회피하려 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이해가 결여되어 있는 그 공간 위로 일시적으로 관념이라는 다리를 지어 건너뛰려고 할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러나 가슴에 선의(goodwill)가 없다면 불행과 파괴는 계속해서 늘어갈 수밖에 없게 된단다. 이것은 지각 있는 사람(man of sense)에게는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지. 오늘날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관념도, 미래에 대한 더 많은 청사진도, 더 위대하거나 더 나은 지도자가 아니야. 다만 선의(goodwill), 애정(affection), 사랑(Love) 그리고 친절이 필요할 뿐이지.”
“그러므로 오늘날 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란, 바로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들, 친절한 사람들이야. 그리고 이런 사람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너, 바로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야. 왜냐하면 나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고서, 다른 사람들만 그렇게 변하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지. 만약 너 자신이 사랑으로 가득하지 않고 친절하지 않다면, 어떻게 다른 이들보고 사랑하고 친절하라고 기대할 수 있겠니?”
“사랑이란 특정한 신(a God)을 숭배하는 것도 아니란다. 왜냐하면 사람들(you)이 모두 다 똑같이 특정한 신을 숭배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 사실 신이라 하는 것도 사람들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한 것이고, 이렇게 신을 숭배하는 태도는 또 하나의 관념이 되어버리고, 이는 다른 신을 숭배하면서 다른 믿음을 만들어내고 있는 사람들과 대립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더냐?”
“어떤 이들은 성화(an image)를 숭배하기도 하고, 돌이나 나무로 만든 상(statue)을 숭배하기도 하고, 신성(deity)에 대한 어떤 개념(conception)을 숭배하기도 하지.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잔인함 또는 다른 이들의 잔인함으로부터 회피하려는 기가 막힌 시도일 뿐이야. 그러나 이렇게 한 회피해서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단다. 사랑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이야(To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그리고 네 이웃이란 네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진리란다(That is Truth). 아들아... 이는 단순한 관념. 네쳐서는 결코 안 되고 내면으로부터 일어나는 역동적인 변혁이어야만 한단다. 내면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바깥 역시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for what the inner is, so the outer shall be).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요가란다.”
게쉬 림포체와 수도원장이 건물 바깥으로 나와 우리 옆에 앉았을 때 그는 말을 끝마쳤다. 잠시 뒤에 다른 이들도 따라 나왔다. 이 시간이면 해가 떠올랐고, 해가 높이 솟아오르면 언제나 그러하듯 꽤 따뜻해지고 있었다.
이 발코니는 게쉬 림포체가 아침 해를 볼 때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으며, 그는 대개 여기서 아침 차를 들곤 하였다. 잠시 뒤에 몇 몇 라마승들이 티베트에서 보통 마시는 차를 들고 나왔다. 다른 이들이 이 차를 좋아하는 만큼 나 역시 이 차를 즐기게 되어 버렸다.
일상적인 대화가 오갔으며, 퉁 라가 천천히 내 옆으로 다가올 때(edged in), 나는 그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느꼈는데, 나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티베트어로 말을 시작했고, 나는 연습 삼아 영어로 대답했다. 그러자 게쉬 림포체가 우리에게로 오더니 웃음을 지으며 기쁘게 말했다. “지금 또 서로 마음-읽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You two mind-reading again)?”
나는 공손하게 대답하였다: “마음-읽기를 먼저 시작한 것은 바로 대사님이십니다. 대사님도 알고 계시잖아요(It was you who started it, you know).”
이 말에 우리 모두는 웃었다. 이제 퉁 라와 내가 서로 마음을 상당히 쉽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며, 저녁이 되면 종종 마음 읽기로 게임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퉁 라나 내가 틀리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동등한 사람들로서, 세상 사람들 가운데 초인적 존재(superhuman being)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전에도 알고 있었듯 그 순간에도 알고 있었다. 초인적 존재라는 것은 관념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진리(the truth)가 아니었다.
모든 것은 자연(natural)스러웠다. 자신의 어리석은 자부심(conceit)에 사로 잡혀 있는 자들만이 모든 것을 부자연스럽게 만들었으며, 이런 무지가 구체적 상황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이런 부자연스러운 모습인 것이다(that is ignorance personified).
참으로 사랑스러운 아침이었으며 우리는 해를 즐기며 발코니에 계속 앉아 있었다. 점심시간이 오자 게쉬 림포체는 말했다: “가자, 아들아. 점심을 들자꾸나.” 나는 항상 그의 오른편에 앉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앞서 먼저 나에게 말씀을 하신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탁자에 둘러 앉았으며, 지난번에 우리가 모였을(seance) 때처럼 각자 동일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자리 배치는 우리가 다 함께 모일 때면 언제나 같은 상태로 유지되었다. 내 친구는 탁자의 반대편 끝에 앉았고, 다르 창은 그의 오른편에, 말라파는 그의 왼편에 앉았다. 게쉬 림포체의 왼편에는 수도원장이 있었다. 퉁 라는 내 오른 편에, 창 타파는 수도원장의 왼편에 있었다. (만약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9장을 보면 어떻게 자리가 배치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둔감해질(dull) 때는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깨어 있었으며,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명료하며 민감해(clear and sensitive)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내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식사 후에 게쉬 림포체는 대생명으로부터 우리가 받은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 기도를 드렸다.
점심식사 후 그는, 조만간 우리의 다음 번 모임을 갖게 될 것이며 지난번에 그러했듯이 그때에 우리의 친구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공지하였다. 우리는, 이미 몸을 떠나 있는 분들은 물론이고, 링-쉬-라 은수자처럼 아직 몸을 입고 계시는 분들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만남은 삼일 뒤인 일요일 저녁에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는데, 이는 전에 링-쉬-라 은수자와 그 사이에 일정을 잡아 놓은 것이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기쁨에 넘쳤다. 왜냐하면 최근에 나는 게쉬 림포체에게, 다음 번 우리의 만남이 언제 잡혀 있는지를 몇 번이고 물어보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제 곧 내가 떠나야 때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나에게는 6일 밖에 남지 않았으며, 나는 내 친구들 모두와 함께, 특히 게쉬 림포체와 이 소중한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하고 싶었다. 참으로 그는 이 목적을 위해 트락체 수도원(Tragtse Gompa)을 떠나 라사를 넘어 그 먼 거리를 여행한 후, 내가 잠사르로부터 내 친구와 함께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점심 식사 후 게쉬 림포체는 나를 그가 묶고 있는 숙소로 안내하였다.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매일 오후가 되면 그는 이렇게 나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 시간대에 나에게 말을 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이 날은 그가 나에게 뭔가 굉장히 중요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렇게 말을 이어나갔다: “아들아, 이제 네가 우리를 떠날 때가 다가오고 있구나. 한편으로는 슬프고 다른 한 편으로는 기쁘단다. 내가 슬프다는 것은, 이제 몸을 입은 상태(in flesh)로는 너를 볼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영 안에서(in spirit)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에 기쁜 것이란다. 내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 육신(earthly body)을 떠나야 할 때가 나에게도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가 이 말을 할 때 나는 슬펐다. 그러나 그가 몸을 입고 있든, 몸을 벗게 되든지 간에 상관없이 죽음도 분리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쁘기도 했다. 그리고 그에게도 나는 이렇다고 말을 했다. 내가 이것을 이야기할 때 그의 얼굴은 환해졌다. 나는 그를 매우 흠모하게(attached) 되었으며 그도 이를 알고 있었다.
“자, 아들아.” 그는 말했다. “다른 사람을 따르는 방식으로는 너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라. 이렇게 하는 행동은 자신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기 때문이지. 어떤 사람을 따른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란다. 위대한 사람일수록, 더욱 더 쉽게 그를 따라가게 되는 것이지(the greater the personality, the easier it is to follow). 그러나 이렇게 되면 창조성을 막아버리게 된단다. 왜냐하면 추종자(the follower)는 결코 창조적일 수 없기 때문이란다. 네가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을 때, 너는 더 이상 축음기에 올려놓은 레코드가 아니라 독창적으로 자신의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란다. 나는 지금 너에게 돌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단다. 이것이 변모(transformation)가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란다. 그렇지 않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계속 말했다: “자신이 다른 이들과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직면하고 있을 때, 너는 자신이 무엇인지(what you are)를 알게 될 것이란다. 관계(relationship)란 자신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관계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본다는 것은 종종 불쾌한 감정을 일으키고 그래서 너는 자신을 보는 것을 원하지 않게 된단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따름으로써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부터 회피하려고 시도하는 것이지. 이렇게 해서 너는 계속해서 누군가를 단죄하고 비난하면서 다른 이의 그늘에 가려 살게 되는 것이지(and thus you live in the shadow of another while you condemn and criticise). 어떤 이들은 회피의 수단으로 새로운 사상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것들(the latest phase of new thought)을 찾아 거기에 의지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한다고 해도 이 역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을 회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야.”
“자기 자신을 보고자 한다면, 자신을 단죄해서도 안 되고, 무턱대고 수용해서도 안 되고, 정당화해서도 안 되며, 또한 거기에 동화되어서도 안 된단다(To see oneself there must be no condemnation, no acceptance, no justification, no identification). 네가 이러한 방식으로 하릴없이(impersonally) 스스로를 자각하고 있다면, 너는 마음의 표층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과, 그동안 네 앞에 가려져 있었으며 네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반응들도 알아볼 수 있을 거란다. 이는 오로지 네가 생각의 모든 과정을 이해하고 있을 때라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란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your thinking)은, 네가 그동안 축적해 놓은 기억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너를 가두고 있는 조건(conditioning)인 것이지. 네가 이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그때에는 자아와 그것이 행동하는 방식에 대한 자각(awareness)이 있게 된단다. 생각하는 자는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결코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지(for the thinker is not separate from his thoughts). 네가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을 때, 너는 자기 자신을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분리하려고 노력하지 않게 된단다. 이제 너는 그것들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지. 그리고 네 생각을 이해하고 있을 때, 너는 자기 자신을, 자신을 규정하고 있는 조건(conditioning)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란다.”
“너는 왜 생각을 자신에게서 떨어뜨려(isolate) 놓고 그것을 바라보길(look at) 원하는 것이냐? 왜 어떤 생각 하나만을 붙잡으려 하려 그것 이외의 다른 모든 생각들로부터는 도망치려 애쓰는 것이냐? 만약 네가 네 마음 안을 들여다본다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야! 너는 하나의 생각에 몰입하고(dwell upon) 그것 이외의 다른 모든 생각들을 억누름으로써 생각들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란다. 그러나 이렇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억압된 생각들은 네가 선택한 하나의 생각으로부터 네 주의를 돌리기(distract) 위해 계속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란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자신 혹은 자신의 생각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너도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란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생각(right thinking)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란다.”
“지난 날 너는 이렇게 하는 것을 명상(meditation)이라 불렀단다. 하나의 생각을 선택하고는 그것을 다른 생각들로부터 따로 떨어뜨려 놓은 후 거기에 집중하는 것을 말이야. 이렇게 하면서, 자신이 명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명상은 결코, 자신의 제한된 생각들(conditioned thinking)로부터 너를 결코 자유롭게 할 수 없단다.”
“왜 너는 집중해야겠다는(dwell upon) 특정한 생각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냐? 그것은 네가, 그렇게 하게 되면 그 결과로써 어떤 보상(reward)이나 만족(pleasure)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고, 그 결과물 뒤로 숨어 다른 생각들로부터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지. 그러나 하나의 생각에 집중(dwell on)하려는 바로 이 욕구(desire)가 자신의 마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다른 모든 생각들에 대한 저항(resistance)을 만들어내게 된단다. 이렇게 해서 네가 선택한 생각과 네가 억누르려고 애쓰는 다른 모든 생각들 사이에 끊이지 않는 싸움을 네 스스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란다.”
“바라건대, 이러한 방식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너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야. 또한 이러한 방식은 네가 찾고 있는(looking for) 자유를 가져다 줄 수도 없단다. 그러나 네가, 생각이 각각 일어남과 동시에 그 의미를 밝혀낸다면(uncover) 이러한 생각들이 다시는 결코 떠오르지 않게(come up)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란다. 이제 그것들은 다 마무리가 된 것이지(They are finished with). 아직 마무리되지 못한 생각들만이, 이해되지 못한 생각들이 계속해서 마음속에 떠오르게 되는 것이란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란, 자신의 생각들(your thoughts)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thought)을 이해하는 것이란다. 만약 너의 마음이 편협하고(narrowed down), 제한되어 있고(limited), 통제받고 있으면서, 스스로의 욕구와 마음이 속해 있는 환경의 영향과 마음 자신이 축적해 놓은 지식들에 따라서 틀이 형성되어 있다면, 너무나도 명백하게 마음은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이란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for self-protection) 자기 자신을 고립시키는 이러한 과정은 정확히 이와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단다.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반드시 두려움을 일으키게 될 수밖에 없단다. 그런데 두려움으로 가득한 마음이 어떤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는 실재인 그것(which is Real)에 마음을 과연 열 수 있을까?”
“네가 곧 네 생각들이라는 것을 네가 이해하기 시작할 때, 너는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란다(When you see that you are your thoughts you will begin to understand). 그러나 만약 네가 자신의 생각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상상하고 있다면, 너는 생각들은 너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다른 무엇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고 그것들을 두려워하게 된단다. 그러나 생각들이 네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 네가 만들어낸 이러한 것들은 더 이상 너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단다. 이것을 이해하고 있을 때라야 자유로움이 있게 된단다. 그리고 이 자유로움 안에 실재가 있게 되는 것이고. 그때에는 생각하는 자와 그의 생각 사이에 어떤 갈등도 없다는 것을 너는 알아보게 될 것이란다(Then you will see that there is no conflict between the thinker and his thought). 그렇게 되면 마음은 더 이상 동요하지 않게 된단다.”
“이러한 것이 이해되고 나면 마음은 고요해지게 된단다. 그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고요함이 아니란다. 억지로 고요하게 만들어지거나 훈련에 의해 고요해진 마음은 결코 실재를 알 수 없단다. 그러한 마음은 실재를 받아들일 능력이 없단다.”
“너는 스스로의 생각에 의해 제한되어 있는 마음을 식별(discern)할 수 있을 거란다. 그런 마음은 묶여 있으며, 보잘것없단다(petty). 그리고 신 역시 그 보잘것없는 마음에 의해 보잘것없게 되어버린단다. 사고-과정(thought-process)이 끝장이 나고 자신 안에 대립되는 것들과 싸우지(fight) 않고 갈등(struggle)하지 않게 될 때라야, 마음은 자유로워지고 고요해지게(still) 된단다. 바로 그 멈춤(stillness) 속에 더 넓고 더 깊은 존재의 상태(the states of Being)가 있게 된단다. 그러나 만약 보다 깊은 그것을 그저 추구하려든다면, 그것은 상상(imagination)과 추측(speculation)에 의해 만들어낸 관념으로 되어버린단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실재가 들어서기 전에 반드시 그쳐야만 하는 것이지(and this must cease before the Real is).”
“그러므로 이해가 곧 명상의 시작이며, 참된 명상은 실재에 이르는 입구란다. 여기에는 배워야 할 기술(trick)도 없으며, 따라야 할 기법(technique)도 없단다. 어떤 방법을 찾게 되는 그 순간 그런 시도는 너를 자유로움과 자기-이해를 향한 제일원칙이라는 길에서 멀어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자기-이해가 없다면 자유로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단다(Therefore understanding is the beginning of meditation, and true meditation is the gateway to Reality. There are no tricks to learn, no technique to follow, for that would lead you away from the first principle of freedom and self-knowledge, and without self-knowledge there is no freedom).”
“너는 반드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단다. 그러면 너는 너 자신을 이해하게 되지. 오직 이렇게 했을 때라야 마음이 멈추게 되는 것이며, 이 멈춤(stillness) 안에서 실재는 자신(Its)의 무한한 존재(Being)의 상태 안에서 일하게 되는 것이란다.
“아들아, 이렇게 할 때 참된 영감(true inspiration)이 있게 된단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정말로 원하고 있는 것이지. 자유로운 마음, 과거에 축적해놓은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실재 즉, 새로운 그것(the New)을 방해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 있는 그 마음 말이야. 너는 반드시, 과거(the past) 즉, 오래된 그것(the old)의 방해를 받지 않고 새로운 그것을 만나야 한단다.”
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순간 그 말들은 보다 깊은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그 말들은 내 마음 속으로 보다 깊숙하게 파고 들어와 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효과를 갖고 있었다. 나는 전에도 어떤 단일한 관념이나 생각에 마음에 다양한 형태로 집중한 바 있으나 그때에는 결코 경험해본 바 없는 이해와 자유가 그 순간 있었다. 그 일이 일어나는 동안 나는, 모든 과거가 내 앞에서 떠오르는 듯 느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자아라는 것을 알았으며, 자아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으며, 내가 그것에 힘을 부여할 때에만 힘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이란 나 자신의 환상으로서, 그 환상은 나를 규정하고 있는 나의 조건에 의해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러한 자유로움을 느꼈던 것이다. 이 자유로움은 다른 어떤 방법을 통해서 들어서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아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 들어서게 된다.
17장
우리의 모임을 갖기로 했던 날의 저녁이 되었다. 머리 위로 하늘에는 달빛이 비치고 있었으며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하늘은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고 있는 별들로 가득했다. 달은 보름달이 되어 있었으며 지난번에 모임을 가졌을 때와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듯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계곡과 코몰하리 산이 완전히 눈으로 뒤덮여 모든 것이 하얗다는 것이었다. 그 아름다운 산은 새하얀 수호신(guardian)처럼 보였는데, 그것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반사하며 달빛 속에 실루엣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산의 배경으로는, 달빛어린 파란 하늘 속에서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수 백 만 개나 되는 별들이 있었으며, 잔잔한 빛을 비추어 땅 위에 있는 것들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이 모든 풍경은 절묘하게 아름다웠다. 비록 바깥은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지만, 우리들 주위로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지 않은 온기가 있었다.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투모 숙련가들이어서 따로 투모를 쓰지 않아도 충분한 열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행복하고 조화로운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으며, 방안의 공기도 발현이 되기에 충분하게 전기적인 성질을 띠고 있었다.
이 날 밤 모임이 크게 성공하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보다 조건이 더 완벽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게쉬 림포체는 지난 번 모임에서 그가 했던 방식대로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나의 책,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에 기술되어 있다.)
그는 말했다: “사랑이란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닙니다. 단어가 사물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은 ‘신’이라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단어가 자신 안에 만들어내는 반응 때문에 그 말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신이라는 말은 어떤 신경에 의한 반응(nervous response)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그들이 말에 의지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words)은 공허합니다. 말은 신경조직에 의한 반응(nervous response)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도 아니며, 신도 아닙니다. 그대들이 말(word)이란 무엇인지, 말이 어떻게 해서 마음속에 관념들(ideas)을 형성하는지를 알고 있을 때라야, 그대들은 신이란 말이 아니며 또한 사랑 역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말이란 반응을 창조할 뿐입니다. 그래서 반응(reaction)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action)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문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행동이란 ‘사랑’이라는 말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과 ‘신’이라는 말은 신이 아니라는 것을 그대들이 이해하고 있을 때라야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느낌과 고통에 대해 민감하게 알아차릴 때에만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을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서, 구세주(Savior)를 통해서, 관념들을 통해서, 집중을 통해서, 환생을 통해서, 음주를 통해서, 다른 종류의 탐닉을 통해서 등 그들이 도망칠 수 있는 곳이라면 그 모든 수단을 써서 고통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대들은 정녕 배고플 때,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에 대해 토론하지(discuss) 않습니다. 그냥 음식을 원할 뿐이지 어떻게 해야 음식을 얻는가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지(concerned)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자신의 분별없음(thoughtlessness)과, 자신의 어리석음과, 자신의 편협함과 잔인함을 똑바로 바라볼 때, 그대들은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 그대들은 고통을 똑바로 바라보게 될 것이며, 이제 고통으로부터 달아나려 하지 않고 다만 이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대들은 고통의 원인에 대해 예리해지며(keen), 조심스러워지며(watchful), 깨어있게(alert) 됩니다. 그때 그대들의 마음은 더 이상 무뎌 있지 않으며, 그대들은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친절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게 됩니다.”
“그대들이 고통(suffering)을 이해하고 있을 때, 그대들은 다른 이들이 겪는 고통들에 대해서 민감해지게 됩니다. 그대들은 더 이상 회피하려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무엇도 회피하려 하지 않을 때, 그대들 가슴에는 친절함과 애정(affection)이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애정-사랑은 가장 높은 수준의 지성을 요구하며, 다른 이들의 느낌과 고통을 민감하게 느끼지 않고서는, 위대한 지성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Affection-Love demands the highest intelligence and without being sensitive there can be no great Intelligence). 지성이 알고 있는 것이란, 다만 ‘사랑’이라는 말은 사랑이 아니며, ‘신’이라는 말은 ‘신’이 아니라는 것뿐입니다. 이를 이해하고 있을 때, 사랑이 존재하고, 신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이 참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의 말을 내 안에서 깊이 느꼈다. 저 깊은 차원에서부터 변모(transformation)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우리는 몇 분 동안 이 침묵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그때에 나는 ‘신’이라는 말은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알았다고 말한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우리 모두 같은 것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잠시 뒤 그는 다시 말을 하였다: “지난번에 우리가 모였을 때보다 오늘 모임을 갖기에 조건은 더욱 완벽합니다. 그리고 오늘 밤 우리는 더욱 많은 친구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의 말로 인해 이토록 훌륭한 조건이 만들어지게 되었다(It was what he said that created these excellent conditions). 나는 방 전체가 엑토플라즘의 구름들로 채워지면서 거대한 하나의 구름으로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가 땅 위로 높이 들려져 구름 속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사실 그때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구름 안에 서 있던 사람들의 윤곽이 점점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었으며, 나는 말라레파(Malarepa)가 그이가 늘 하던 대로 축복을 하며 우리를 환영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고, 이내 우리의 모임(seance)은 활기차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 말라레파는, 특정한 누구에게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말을 하였다. 그는 말했다: “저도 우리의 형제인 게쉬 림포체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대들이 모두 그가 말했던 것에 함축되어 있던 내용까지도 이해하였기를 바랍니다.”
“신-진리-사랑은 그대들로부터 떨어진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사랑-신은 영원하며(Eternal) 항상-현존하는(Ever-present) 것으로서 유일한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신은 혼란스럽고, 조건으로 묶여 있고, 제한되어 있는 마음으로는 결코 깨달아질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마음이 어떤 한계도 없으며, 모든 조건에서 자유로운 실재-신(Reality-God)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깨달으려 하는 마음은 그 전에 이미 자신을 스스로 조건들로 묶어놓았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스스로를 자신의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라야 마음은 자신을 넘어서 있는 그것을, 제한과 관념과 언어(word)를 넘어서 있는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실재는 마음에 알려지지 않은 그것(the Unknown)이며, 언어(words)는 결코 알려지지 않은 그것을 드러낼(reveal) 수 없습니다.”
“자아는 실재를 꾸며냅니다(invents). 왜냐하면 자아는 늘 무엇인가를 모방하고, 베끼고 있으며, 한 권 한 권 모두 다 똑같이 수많은 관념들(ideas)로 가득 채워져 있는 책들을 그토록 많이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아는 관념들과, 다른 이들의 경험들과, 온통 말뿐인 이 모든 것들을 그저 되풀이하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그대들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면, 그대들은 말이란 무엇인지(what a word is)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대들은 더 이상 베끼거나 모방하지 않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을 되풀이하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언어(words)와 관념들보다 더 위대하며, 그것들을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들도 곧 알게 되겠지만, 이러한 것들은 모두 마음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나 실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but Reality is not created).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seeing) 하기보다 종교에 관한 책들을 읽고, 신에 대해 사색(speculate)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자아를 이해(understanding)하지 않는다면, 자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실재에 대한 깨달음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마친 뒤 그는 나에게 와서 말을 했다: “아들아, 네가 앞으로 하게 될 일은 우리에게 큰 기쁨이란다. 우리는 너를 따라다니며 너를 돕고 지켜줄 것이란다. 너의 일은 거짓된 것(the false)을 폭로하는(expose) 것이란다. 너는 반드시 거짓된 것에 대해서 무정해(ruthless) 져야 한단다. 너는 거짓된 그 모든 것들의 본래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내야 한단다(you must show it up in all its falseness). 그렇게 하는 것만이 그것을 사라져 버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에 관한 말의 그물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단다. 거짓된 것에 관한 진실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인데, 왜냐하면 거짓은 거짓일 따름이며, 그것이 거짓에 관한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이란다(Refuse to be caught up in a net of words in regard to it, for there is no case for the false, for it is false and that is the Truth about it). 또한 너는 거짓을 축소하거나 실재의 그 어떤 형태로도 감추려고 해서도 안 된단다. 그렇게 하는 것은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행위(a lie)가 될 것이기 때문이란다. 거짓이 사람들의 마음과 가슴속에 어떻게 깊이 뿌리박혀 있든지 간에, 심지어는 그것이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믿음(beliefs)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물려받은 소중한 믿음이라는 이유로, 너는 그들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동의를 해서는 결코 안 된다. 다만 머리로 만들어 낸 이 모든 것들의 허구성을 폭로해야 한단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란다.”
“실재는 모든 것을 통합하는 것이지 배제하는 것이 아니란다(The Real is all-inclusive and not exclusive).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릇된 것이며, 그것이 바로 관념과 말(words)이 하는 일이란다. 그래서 진리는 언어나 관념, 그것이 글이든 말이든 가릴 것 없이 그러한 것들 안에서는 결코 발견될 수 없는 것이란다. 네가 이 사실을 깨닫고 있을 때라야 실재가 일하는(operate)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란다. 그리고 그렇게 실재가 일하는 가운데 사랑이 있고, 무한한 지성(unlimited Intelligence)이 있는 것이란다.”
이 말을 마치고 말라레파는 창 타파에게로 가서 말을 하였다. 창 타파는 오크 수도원의 예언자(oracle)였으며, 밀라레파가 게쉬 림포체에게 말을 할 때 쓰는 영매였다. 그리고 그는 게쉬 림포체가 히말라야 속에서 눈에 갇혀 있을 때, 창 타파에게 음식을 들려 게쉬 림포체에게 보내기도 했었다. (필자 주: 나의 책,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모임 도중 링-쉬-라 은수자는 나에게로 왔으며, 나는 그를 일주일 안에 다시 보게 되어 기뻤다. 그를 처음 방문했을 때가 생각이 났다. 그는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모습 그대로인 듯 보였다. 이것이 그를 만났을 때 가장 놀라운 일이었다. 해가 그의 얼굴을 통해서 빛나고 있는 듯 그의 얼굴은 환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나는 그 은수자를 계속해서 더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도 이를 알고 있었던 것이 확실한데, 왜냐하면 그는 애정이 가득 담긴 생각과 축복을 나에게 쏟아주셨기(showered)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서야, 나에게는 놀라운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참으로 알겠다.
그는 말했다: “나는 네가 가는 길에 내딛는 발걸음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따라갈 것이란다. 네가 녠첸탕가 산맥에 있는 니블룽 리충 산을 오를 때에도 나는 너와 함께 있었단다. 그 암자에서 보이던 그 산맥 말이야. 네가 잠사르에 가게 되었을 때 알게 되었겠지만, 사실 내가 있던 곳으로부터 잠사르까지는 독수리가 직선으로 날아간다면 약 40마일(약 64km)에 불과하거든. 그러나 거기는 아직 탐사되지 않은 지역이란 산에는 나 있는 길이 없었고, 그래서 너는 뺑 둘러가는 길을 택해야만 했지. 잠사르까지 150마일(약 240km)에 달하는 길을 말이지.
그러고 나서 그는 말을 계속했다: “아들아, 너로 인해 참 기쁘구나. 잠사르에서 지내는 동안 생각해야 할 것들을 참으로 많이 발견하였더구나.”
“네.” 나는 말했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들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었고, 그 과정에서 참으로 크게 깨달았습니다.(We went into much detail and I had great enlightenment)”
“이제 나는,” 그는 말했다. “질서란 혼란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out of chaos, order cannot come)을 네가 깨닫길 원한단다. 질서를 세우겠다는 목적으로 네가 혼란을 일으킨다 해도 질서를 창조할 수는 없는 것이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잘못된(false)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단다. 많은 사람들은,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불가피하게 혼란과 무질서를 창조해야 해야 하며, 이를 위해 신이 자신들을 선택했다고 생각하고 있단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더욱 복잡해진 무질서를 만들어낼 뿐이란다. 이것이 바로 전쟁과 경제적 재앙(economic disasters)이 끊이지 않고 되풀이되는 근본 원인이란다.”
“너는 미래의 어느 순간에 변혁(transformation)이 이루어지길 구하고 있는데, 그리하여 이러한 조건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 그러나 그러한 식의 변혁은 언제나 미래의 어느 순간에 있는 것이지. 항상 미래의 관점(terms) 안에서 생각하고 있는(thinking) 마음에는 현재 안에서 행동할(acting) 수 있는 능력이 없단다.”
“아들아, 너는 변혁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고 있느냐?”
“네, 그렇습니다. 미래의 어느 때에 변혁이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짓(the false)을 거짓으로 알아보고, 참(the true)을 참으로 알아볼 때, 참으로 받아들이던 것 안에 숨어 있던 거짓을 알아볼 때, 변혁은 바로 지금이라는 순간 안에서, 순간에서 순간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변혁이 지금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혁은 내일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변혁은 지금 이 순간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변혁이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It does not happen tomorrow, it must be now, otherwise there is no transformation). 그래서 제가 거짓된 것을 이해하고(see) 있을 때, 저는 거짓된 것에 관한 진실(the truth)도 이해하게 됩니다. 그 진실이란 거짓이란 거짓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이해하고 있을 때 거짓은 저절로 떨어져 나갑니다. 그러면 지금이라는 바로 그 순간, 그 즉시 변혁이 있게 되고, 이 변혁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단다. 내 아들아.” 그는 말했다. “뭔가를 반복한다는 것은 묶여 있는 마음이 투사되고 있는 것임을 네가 이해하고(see) 있을 때, 그리고 네가 이에 관한 진실을 이해하고 있을 때, 변혁이 있게 되는 것이란다. 분리와 갈등과 불행을 만들어내고(creates) 있는 그 무엇을 알아보게(see) 될 때, 그 순간 즉각적인 변혁이 일어나게 되고, 거짓된 그것에 관한 바로 그 진실(the truth)은 마음을 자유롭게 한단다. 진리를 지각(perception)하는 행위 자체가 곧 변혁이 일어나는 것이며, 자유로워짐 그 자체란다. 그리고 이는 미래(tomorrow)가 아니라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인데, 왜냐하면 변혁이란 지금 이 순간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지금이 아니라면 변혁이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란다.”
“네가 곧 돌아가게 될 세상 안에서 너는 거짓된 것들에 둘러싸이게 될 것이란다.”
“그러나 거짓된 것들을 지각하는 행위 그 자체가, 순간순간 변혁으로 곧장 이어진단다(But the very perceiving of the false, moment to moment is transformation). 너는 기억을 통해서도, 시간을 통해서도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단다. 진리란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이며, 과거나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너는 미래의 어느 날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네가 읽고 있거나 듣고 있는 것들 안에서 발견할 수도 없는 것이란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저 관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 진리가 너에게 오는 것이지, 네가 진리로 가는 것이 아니란다. 네가 진리로 간다고 할 때, 그것은 너의 자아가 투사된 것에 불과하단다. 자아가 스스로 이해되어질 때라야 진리는 오는 것이며, 그때 그것은 즉각적으로 들어서게 된단다. 영원이란 곧 지금인 것이다(Eternity is Now)! 그리고 지금이란 새로움이며(The now is NEW),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란다. 그렇게 하는 것은 기억이기 때문이지. 또한 지금(NOW)이란 미래도 아닌데, 미래란 마음에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지금!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란다(The Now! is alive). 과거란 죽은 것이며, 미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단다.”
“만약 네가 오래된 것(the old)을 가지고 새로운 그것(the new)에 접근한다면, 너는 새로운 그것을 결코 발견할(discover) 수 없단다. 오래된 기억들을 등에 지고 있는 한 새로운 그것을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네가 이해하고(know) 있을 때라야, 오래된 기억은 새로운 지금 안으로 자신을 투사하는 것을 그치게 된단다(does the old cease to project itself into the new). 아들아, 너도 알겠지만, 지금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있을 뿐이란다. 그리고 방금 전에 지나간 순간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항상-현존하는 지금(ever-present now)이 될 수 없는 것이란다. 마음 안에 있는 것들, 그것들은 새로운 지금에 방해물일 뿐이란다. 그러므로 반드시 너는, 과거에 얽히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지금에 새롭게(fresh) 접근해야 한단다. 그렇게 할 때에만 너는 매순간 새로워지고 있는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다.”
“네가 변화되어지길 바라고 있을 때, 변혁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단다(When you desire to be transformed there is no transformation). 왜냐하면 그때 너는 무엇인가로 되어간다는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진리란 매순간 지금 ‘존재하는 것’이란다(Truth is 'Being' now moment to moment). 진리란 결코 책속에서 발견될 수 없는 것이란다. 그것은 웃음 속에서, 눈물 속에서, 포옹 속에서, 사랑의 충만함 속에서 매순간 발견될 수 있을 뿐이란다. 사랑이 없다면 진리도 없단다(Without Love Truth is not). 사랑이 있는 그곳에 변혁도 있게 되는 것이란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순간에서 순간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란다(because Love is 'Being' moment to moment). 이것이 곧 진리(Truth)란다, 아들아.”
“네가 이곳을 떠나게 되더라도, 우리는 너와 함께 있을 것이란다. 모든 이 하나 하나 안에 살고 계신 영 안에서 분리란 결코 없기 때문이란다. 신은 나누어져 있지 않단다. 이 위대한 진리를 가리고 있는 것은 조건으로 묶여 있는 마음이란다. 아들아, 이 사실을 알고 있을 때, 네 믿음은 변치 않을 것이며, 너의 사랑은 구속함이 아닌 자유로움이 될 것이란다(In knowing this, my son, your faith will be constant, and your Love will be liberating, never binding). 구속하는 것은 사랑은 참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구속하는 사랑은 마음에 속해 있는 것이지만, 진리-사랑은 마음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며, 유일한 실재란다.”
이 말을 하고 나서 그는 비켜서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너의 존엄한 영적 안내자인 성 안토니오가 너에게 말할 것이란다(Now your august spiritual guide, St. Anthony, will speak to you).
나는 성 안토니오에게 말을 걸기를 열망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나는 세상 곳곳을 다니며 그와 그토록 많이 이야기를 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일을 수행하는 동안 그의 영향력을 참으로 자주 느끼곤 했다.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말을 표현하고 했다. 물론 그 말들을 통해 같은 진리가 드러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는 그의 앞으로 손을 내밀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손을 잡게, 내 친구여. 지금 너는, 내가 자성 물질을 수단으로 하여 그대들의 차원에서 나타나 있는 것을 보고 있는데, 이는 모든 것이 창조되어 나온 실체의 한 가지 양상이란다(now you see I am functioning on your plane by means of the magnetic substance which is a phase of the Substance out of which everything is created). 형태를 갖고 있는 모든 것들, 현상계로 나타난 모든 것들의 기저에는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있을 따름이란다. 그 실체(Substance)에는 저마다 다른 차원(degrees)이 있지만 말이야. 그러므로 실체의 이 모든 차원들은 지금 너와 함께 있단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너는 실체의 그 모든 차원들 안에서, 그것들을 통해서 기능(functioning)하고 있단다. 아직은 네가 그것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야. 현재로서 너는 물질(the material)이라고 부르는 차원에서 기능하고 있단다. 그러나 하나의 실체(one Substance)가 그저 다른 양상으로 변화할 따름이란다(but that is merely a modification of the one Substance). 이것은 다양한 차원들 중 하나의 차원으로 나타난 것이지 하나의 실체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란다(it is a degree and not separate).
“네가 육체 또는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을 떠나게 되더라도, 너는 여전히 같은 실체 안에서 기능하고 있을 거란다. 차원이 달라졌을 뿐이야.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과정은 다양한 차원을 거쳐 계속해서 진행될 것이며, 가면 갈수록 더욱 섬세해진단다.”
“너의 일을 수행해 나갈 때 너는 자성체(magnetic body)라고 알려져 있는 것을 사용하게 될 거란다. 육체에 적합한 필수적인 에너지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자성체란다(that is the body that can be charged with vital energy suitable for the physical). 너는 또한 정신과 영을 동시에 사용하게 될 것이란다. 나는 지금, 네 마음의 심리적인 어떤 측면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너의 아스트랄체와 자성체를 관통하고 있는 어떤 실체를 뜻하는 거란다(I do not mean the psychological side of your mind but a substance which interpenetrates both your astral and magnetic sheaths).
“영은, 몸이라 하는 이 모든 껍질(sheaths)들을 그 쓰임새에 맞게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가 너의 일을 돕고 있을 때, 우리는, 환자의 상태에 따라서, 이러한 껍질들과 연결되어 있는 중심(the centre)을 통해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란다.”
“네가, 생명에 관한 영적인 것들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영감을 받고 있을 때, 우리는 보다 섬세한 껍질들 또는 중심들을 통해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란다(When you feel inspired to speak of the Spiritual things of Life we are working through the finer sheaths or centres). 그러나 진리는 이 모든 것들 너머에 있단다. 진리는 생명-사랑이야(Truth is Life-Love). 마음이 과거, 오래된 것 자유로울 때 사랑은 그 즉시 들어서 존재하게 된단다. 사랑이란 언제나 새로운 것으로서, 과거, 즉 오래된 것이 다 이해되고 저절로 떨어지고 나서야, 너는 새로운 지금을 만날 수 있는 것이란다. 그러므로 새로운 지금을 만나고자 한다면, 너는 오래된 과거(the old)를 가지고 그것을 만나서는 안 된단다. 그렇지 않는다면, 새로운 그것은 그저 오래된 것이 투사된 것으로 바뀌게 될 것이란다. 그러나 오래된 그것이 곧 기억이자 경험이라는 것과, 오래된 그것은 결코 새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see) 있을 때, 너는 오래된 그것은 결코 새로운 그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이를 알고 있을 때 너는 새로운 지금을 만나게 된단다.”
“그것이 바로 진리이며, 그것이 바로 사랑이란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거든. 그러므로 새로운 그것만이 유일한 실재이며, 오래된 그것은 실재가 아니란다. 오래된 그것은 기억이자 경험으로서 너를 종종 구속하고(condition) 있는 것이지.”
“참된 영적 치유란 네가 오래된 그것에서 자유로울 때 이루어지는 것이란다. 영적인 치유란 언제나 새롭기 때문이지. 내 말을 이해하고 있는가?”
“네, 그렇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영(Spirit)이란 항상 현존하며, 항상 새롭고 결코 오래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은 언제나 스스로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영은 매순간 새로워지고 있으며, 그 안에는 질병도, 죽음도,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지금’(‘Now’)이 있을 따름이며, ‘지금’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이 안에서 저는 참된 영감을 받게 되는 것으로서, 이는 과거나 기억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렇단다, 내 친구여.” 그는 말했다. “나도 네가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겠네. 그리고 이러한 이해를 갖고 있을 때, 너의 일은 세상에 보다 위대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야. 그리고 세상의 변혁을 위해 너와 함께 일하고 있는 우리들 모두에게도 너는 대단한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될 것이야.”
“너는 그저 네가 읽었던 것을 그대로 되풀이하지 않게 될 거란다.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선생들은 축음기에 올려져 있는 다양한 레코드판일 뿐이야. 그러나 너는 음악가이자 음악이 되어야만 한단다(But you must be the musician and the music). 이렇게 할 때라야 너는 창조적인 것이야.”
그러고 난 후에 그는 말했다: “너에게 말하고 싶어 하는 다른 이들도 여기에 있단다.”
이 날 모임은 이제껏 내가 참여했던(experienced) 모임 중 가장 대단했다. 세상을 먼저 떠나갔던 많은 친구들이 이 날 모임에 왔다. 내 두 요기(Yogi) 친구들인, 압둘(Abdul)과 실럼(Seelum)은 아포츠(apports)몇 개와 고대 이집트의 서판(tablets) 몇 개와 귀한 돌들과 티베리우스에서 쓰던 금화 등을 가져 왔는데, 다 해서 스무 점 가량 되었다. 그 중 하나는 고대 그리스어로 기록된 오래된 양피지 문서였다. 그의 왼손 아래편 구석에는 매매증서도 있었는데, 그것은 로마 필기체로 씌어져 있었다(in the left hand bottom corner was a deed of sale in Roman cursive). 그 증서는 명백하게 어느 시기에 매매되었던 것 같았는데, 아마 기원후 1 세기 정도인 듯하다. (나는 그로부터 몇 년 뒤에 시드니에서 열렸던 베일리 씨의 모임 Mr. Bailey's seance 에서 그와 유사한 것을 받았다.)
고대 페르시아 마기(Magi) 중 한 명도 말을 했으며, 이후에 자연스럽게 내 어머니와 다른 친구들도 말을 하였다. 그 모임은 새벽 3시까지 진행되었는데, 몸을 떠난 이들과 아직 지상에서 몸을 입고 사는 사람들과 계속해서 여섯 시간 동안 만난 것이다. 그 모임 중간 중간에 동시에 열 명이나 열 명 조금 더 넘게 방 안에 사람들이 있기도 하였다.
이렇게 그들을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것보다,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더 위대한 증거란 없다. 죽음에 대한 모든 두려움은 영원한 생명(Life Everlasting)에 대한 이해를 통해 사라지게 되었다. 그들은 나에게 친숙한 내용들을 많이 이야기했으며, 고향에 있는 사람들의 소식도 전해주었다. 그들은 다른 정보들도 정확하게 제공해주었는데, 내가 떠나왔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그들이 말했던 것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했다. 내 친구가 지상의 삶을 정리하고 떠난 그 날짜에 대한 정보도 제공받았다.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한가 하면서 어떤 이들은 믿기 힘들어 하기도 하겠지만, 이는 사실이다.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모임의 마지막에 찬란한 빛이 비치더니 그 빛 속에 주(the Master)께서 나타나셔서 우리 모두를 축복해주셨는데, 이때가 모임을 통틀어 최고의 순간이었다. 모든 이의 가슴 안에서, 온 우주의 모든 영역에서, 영원토록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앎을 느끼는 순간이었다(the knowledge of the Eternal Living Christ Who exists in all hearts, in all realms).
“내 아버지의 집에는 많은 방이 있으며, 나는 그대들이 머물 곳을 마련하고자 갑니다. 그리고 내가 있는 그곳에 그대들 역시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확실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바이다.
이것으로써 그 날 모임은 끝났다.
우리는 잠시 침묵 속에 앉아 있었으며, 저마다 자신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제 나는 곧 나에게 이토록 많은 것을 주었던 내 놀라운 친구들을 떠나게 될 것이다. 이 생각이 내 마음을 스쳐 지나가면서 다소 슬퍼지기도 했다. 게쉬 림포체도 내 슬픔을 감지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는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리더니(나는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들아, 네가 느끼는 대로 나 역시 느끼고 있단다. 나도 네 생각을 알아차렸지만(aware of), 사실 이별이란 존재하지 않는단다. 오늘 밤 너에게도 증명되었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신 홀로 살고 계시며, 우리가 그분 안에서 살아 있고, 움직이고 있으며,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살아 계시고 움직이고 계신다는 이해 속에 기뻐하여라. 그래서 마음 안을 제외하고는 분리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네가 알고 있듯이, 이러한 생각은 환상이란다.”
우리는 한 시간 넘게 서로 이야기를 하며 앉아 있었다. 그러다 나는 극도의 배고픔을 느꼈으며 이를 수도원장에게 말했다: “아시겠지만, 지금 저는 뭐라도 좀 먹고 싶어요. 왜 이렇게 배고픈지는 모르겠네요.”
“음.” 수도원장이 말했다. “이제 곧 아침을 먹을 시간이거든요. 아침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수도원장은 아침 식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사전에 빠짐없이(apparently) 준비해 놓았었다. 그리고 수도원장의 시중을 드는 두 명의 라마승들이 음식을 날랐다. 사실 아침식사라기 보다는 만찬에 가까웠다(It was more like a dinner than a breakfast). 게쉬 림포체는 빵을 쪼개고 음식을 축복하면서, 내가 이곳에 와서 머물다 다시 돌아가게 된 것에 대해 사랑을 가득 담아 말씀하였다. 이토록 위대한 현자께서 가슴으로부터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동안 나는 겸허해짐을 깊이 느꼈으며, 그때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사랑이 거기에 있었다.
이 곳, 이 방 안에는 내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친구 그 이상의 친구들이었으며, 현자들이자, 대자연을 자신을 통해 드러내는 마스터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지식과 사랑과 지혜는 갈등으로 가득한 우리의 세상에는 결코 알려지지 않은 바의 것이었다. 그러나 진리가 자신을 통해 일하도록 자신을 완전히 비우는데 숙련자들인 그들은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자들 중에서 자신의 가슴을 신에게 열게 될 사람들을 돕고 있었는데, 그들은 조건들에 의해 묶여 있는 자신들의 마음의 상태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가슴을 신에게 열게 될 것이다. 생각에 묶여 있는 마음을 제외하고는 실재의 치유력과 사랑이 일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햇살이 코몰하리 산 정상 뒤편으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발코니로 가서 그 장엄한 광채를 지켜보았다. 해가 떠오를 때 그 날 아침은 더욱 경이롭게 보였다. 다채로운 햇살은 코몰하리 산 정상을 중심으로 해서 퍼져 있는 거대한 부채 모양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수정처럼 투명한 새하얀 눈은 이 눈부신 광채를 반사하고 있었으며, 라마승들은 “옴 마니 받메 훔”을 노래하면서 기도하고(chant) 있었는데, 그들의 깊은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다. 그 날 아침의 풍경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침 기도가 끝났을 때 우리는 건물 위로 올라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잠을 잘 때 보았던 것이 꿈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알 수 없으나, 그때 나는 지상에 속해 있지 않은 자들과 어울렸으며(mingling), 나는 이를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누군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을 감지할 때까지 잠들어 있었는데, 그때는 정오였다. 눈을 뜨자 게쉬 림포체가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는 말했다: “이제 너는 영, 영혼, 몸 모두 원기를 회복했구나(You are now refreshed in Spirit, Soul and body)”.
나는 대답했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저도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네가 침대에서 일어나거든,” 그는 말했다. “계곡 아래쪽으로 같이 거닐자. 너에게 해주고픈 말이 있거든. 내일이면 너는 우리를 떠나갈 것이라 오늘은 너를 내 옆에만 두고 싶구나. 영(Spirit) 안에 분리란 존재하지 않지만, 나는 내 유일한 아들과 이별하는 듯 느껴지는구나.”
음식을 좀 들고 나서 우리는 코몰하리 산 방향으로 계곡 아래쪽을 거닐었다. 나는 말했다: “당신을 떠나가게 돼서 참으로 슬픕니다. 더군다나 몸을 입은 상태로는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 생각하니 더욱 그러합니다. 당신은 저에게 아버지 그 이상이시며, 저는 당신을 볼 때마다 매우 깊은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래, 아들아.” 그는 대답했다. “네가 몸을 입고 있는 나를 만나기 오래 전부터 너를 향한 내 사랑은 시작되었단다(my affection for you was long before you saw me in the flesh). 그동안 네가 일할 때 나는 오랜 동안 너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이제 곧 나는 내 생명을 내려놓게 될 것인데, 이는 몸으로부터 자유로운 생명을 취하기 위해서란다(But now I will soon lay down my life to take it up again, freed from the physical). 더 이상 몸으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지만, 다른 영역들에서 머물게(sojourn) 될 것이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너와 함께 있을 거란다. 너의 훌륭한 안내자인 성 안토니오처럼 말이지.”
그리고 그는 말을 덧붙였다: 이런 격언이 있단다: ‘지혜를 얻어라, 이해를 구하라, 그것을 잊어버리지 말라.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에서 멀어지지 말라.’ 그러나 이 보다 더 차원 높고 더 좋은 길이 있단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사랑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며, 신은 사랑이며, 사랑은 신이란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가슴 속에 다른 이를 향한 미움을 품고서 그분에게 다가서려하지. 그러나 가슴이 사랑으로 가득하며 마음에는 적개심이 하나도 없어야, 신성한 그분에게 다가설 수 있게 되는 것이란다.”
“아들아, 너도 알겠지만, 어떤 특정한 종교를 따르고 있으며, 다른 종교를 따르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 적대적인 사람은 종교적이지 못하게(irreligious) 된단다. 그래서 소위 종교적이라 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위험하단다. 왜냐하면 그는, 인류를 서로에게서 갈라놓고 있는 이상들(ideals)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아들아, 너도 깨닫고 있겠지만, 관념은 다른 것들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 갈라놓는단다. 좌파로 기울어지는 자들도 있으며, 우파로 기울어지는 자들도 있단다. 그들은 그저 관념을 추구하고 있을 따름이지. 자신의 관념이 다른 자들의 관념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이런 태도는 적개심, 투쟁, 유혈 사태로 이어지게 된단다. 관념과 믿음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그 모습을 이해하게 될 때라야 평화와 사랑은 찾아오게 된단다.”
“자신의 관념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환상을 놓아버릴 때라야, 사랑이 사람의 가슴과 마음 안으로 들어오게 된단다. 그리고 사람이 거짓된 것을 즉각적으로 알아보는 그 순간 사랑도 즉각적으로 들어서게 된단다. 그러면 그때 사랑이신 아버지의 모습과 꼭 닮아 있는 사람이 나타나게 될 것이란다.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릴 마땅한 권한을 갖고 있단다. 그러나 그는 많은 이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된 와 전혀 다른 초자연적 존재는 아니란다(Man will then appear in the likeness of his Father who is Love, having a natural dominion over all things, which is not being supernatural, as many believe).”
“예수께서는 자신이 다른 이들과 전혀 다른 초자연적 존재라고 내세운 적이 결코 없었단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속에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관념을 만들고는, 그것을 숭배하고 있는 것이란다. 자신들의 머리로 만들어낸 환상을 말이지. 사람들은 초자연적 존재라는 관념을 숭배함으로써, 자신들의 실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부터 달아나려고 시도한단다. 적개심과 미움과 질투로 가득 차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말이지. 거짓된 것들을 이해하는(understanding) 것으로써만이 참인 것이 그 즉시 들어설 수 있게 된단다. 아들아, 이것이 곧 지혜란다. 거짓된 것을 이해하고 그것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를 이해하고 있을 때라야 지혜가 들어서게 되는 것이란다(Only by understanding the false and how it comes about does wisdom come into being). 이렇게 할 때라야 많은 이들이 떨쳐내고자 몸부림치고 있는 속박에서 풀려나 자유로움이 있게 되는 것이란다.”
“너에게 지혜가 찾아올 때, 풀 한 포기도, 꽃 한 송이도, 나무 한 그루도 자기 좋을 대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는 싹이 하나 트는 것조차 그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란다. 무한하신 하나(Infinite One) 안에 자신의 근원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란 이 땅 위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는 깨닫게 될 것이란다. 이는 물질 차원을 넘어서도 마찬가지란다.”
“그러므로 너는 더 이상 무지 앞에서 입을 다물거나, 거짓된 것들 앞에서 벙어리가 되지 않을 것이란다. 오히려 너는 이해를 통하여 그 오류(the error)를 수정하게 될 것이란다. 더 이상 너는 고통이 무엇인지 묻지 않게 될 것이며 다만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될 것이란다.”
“가장 높은 차원으로서의 생각-느낌의 형태는 이해를 통해서 오는 것이지, 관념이나 믿음에 대해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자아의 독단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란다. 우리는 오직 실재 안에서, 사랑 안에서만 우리 창조성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단다. 그러므로 너는 더 이상 안전을 구하지 않게 될 것이란다. 안전을 구하고 있는 자는 항상 부족한 상태(in want)에 있기 때문이지. 네가 안전해질 수 있는 그 기초는 이해에 있는 것이지 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란다. 왜냐하면 너는, 항상-현존하고 있는, 결코 끊어지지 않는 공급의 원천 속에서 이미 매순간 지금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란다(For you live now in the ever-present, never-ending Source of Supply).”
나는 그의 말을 전적인 주의를 기울여 들었으며, 생각(ideas)을 만들어 내지 않고 다만 자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듣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자기를 이해하는 것(self-knowledge)이 곧 자유이며, 변혁(transformation)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유로움(Freedom) 안에서 실재는 그 어떠한 형태의 한계에 의해서도 제한을 받지 않으며 무한하게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들과 내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내 마음 속에서 진리를 철학적으로 해석하려는 태도와 시도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해석한 내용이 참이든 거짓이든 간에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렇게 하는 것은 실재가 일을 하는데 있어서 오히려 가장 큰 방해물로서, 머리를 써서 하는 놀이에 불과했다(being merely mental gymnastics).
이것이 게쉬 림포체가 나에게 들려준 마지막 이야기(final talk)였다. 이는 마지막 충고라 볼 수도 있었다. 물론 그는 결코 충고를 하려는 마음을 먹은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의 말의 대부분은, 이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마음의 정화(cleansing) 작업이었으며, 이는 남의 도움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에 이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때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전에 내가 계획한 것과는 다르게, 나는 너와 함께 링마탕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란다. 나는 이곳에서 겨울을 보낼 것이란다. 해가 뜨고 질 때 저 아름다운 산을 올려다보면서 너를 생각하게 될 것이란다. 모든 곳을 통틀어 이곳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칼림퐁까지는 네 친구가 함께 따라갈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너 혼자 가게 될 것이란다. 몸으로는 혼자이겠지만 영적으로는 혼자가 아니란다.”
“이 십자가를 받아라. 이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었던 상징이란다. 내 아버지께서 나한테 주셨던 것이지. 이곳을 보면 수직과 수평 막대기가 교차하고 있는 그 중심에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란다. 이는 아버지-어머니-신의 뜻에 충실한 아들을 상징한단다(this represents the Son, the conformation of the Father-Mother-God). 아들은 진리이자, 사랑과 지혜인 그것 안에서 태어난단다. 나는 네가 이것을 언제까지나 네 개인적으로 지니고 있기를 바란단다.” 그는 온화하게 말했다.
그는 목에 걸려 있던 십자가 목걸이를 풀러 내 목 주위에 걸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나를 축복해주었다. 눈물이 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나는 이를 알지 못했다. 그 순간 내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가 깨어나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마치 거지의 옷을 벗어던지고 사랑의 옷(the Robe of Love)을 입은 듯 느껴졌다. 그 사랑의 옷이 바로 그리스도의 요가이다. 고통 받는 영혼들이 그 옷의 끝자락에 손을 닿기만 하더라도 그들은 낫게 될 것이다.
18장
나는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났다. 내 친구와 나는 아침 식사가 끝나는 대로 히말라야를 넘어서 칼림퐁까지 가는 여행을 곧장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날 아침에 내가 느꼈던 감정은, 어릴 적 스코틀랜드 북부 고지대를 떠나갈 때 들었던 느낌과 매우 비슷하였다. 휴일만 되면 나는 언제나 그곳으로 놀러 갔으며, 다시 학교에 가야하는 날이 돌아오면 깊은 슬픔을 느끼곤 했다. 나는 그곳의 언덕들과 히스 꽃들(heather)과 호수들(lochs)과 강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은 느낌을 나는 그 날 아침에 다시 받았던 것이고, 내 친구에게 이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모든 사람이 아침 식사를 먹는 자리에 나와 있었다. 수도원장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작별의 선물로 실크 스카프를 내 목에 걸어주었다. 그 스카프는 매우 섬세하여 작은 봉투 안에 넣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선물을 주는 것은 전통적인 방식이었으며, 이 선물은 티베트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으며, 이를 받는 사람에게도 그것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수도원장으로부터 스카프를 받는다는 것은 영원한 축복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에는 게쉬 림포체와 수도원장과 창 타파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 모두가 오크 계곡을 떠날 예정이었다. 퉁 라, 말라파, 다르 창은 하 추(Ha Chu) 계곡으로 나 있는 길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다르 창은 얀탕(Yantang) 수도원으로, 말라파는 곤사카(Gonsaka) 수도원으로, 퉁 라는 타코후(Takohu)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앞으로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그런 대가(adepts)들이 모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늘 모이던 장소에 앉아 아침을 들기 시작했다.
그때 게쉬 림포체가 일어서더니 이렇게 말을 했다: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들 모두 각자에게는 참으로 잊기 어려운 사건들(occasion)이 한 번씩은 일어납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 사건을 항상 기억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 기억은 다른 모든 봉우리들 보다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산의 봉우리처럼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러한 사건이 우리의 삶 속에서, 세계의 지붕이라고 하는 이 고립된 지역에서 바로 얼마 전에 일어났다가 지나간 것입니다.”
“여기 내 사랑하는 아들은 오늘로써 거의 7 개월에 이르는 시간 동안 우리와 함께 지냈었고, 이제 곧 우리 곁(our midst)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몸을 입은 상태로는 그를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영 안에서는 그를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일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돕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며, 그가 하게 될 일은 우리가 그의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짧은 시간적 간격을 두고 우리 모두는 두 차례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 모두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와 함께 지내는 동안 우리 안에서 자라났던 위대한 이해를 안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깊은 인상을 우리에게 새겨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가 누구인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그가 과거에 여러 세기를 걸쳐 우리와 함께 있었다는 것과, 그의 일에 필요한 영혼의 경험(soul-experience)을 체험하고자 이 시기에 우리에게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앎 때문에 우리는 이별을 더욱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며, 그에게 잠시 이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사랑과 축복을 가져갈 것이며, 신의 사랑은 항상 그와 함께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모두를 축복하는 자세(all-hailing sign)를 취하여 거기에 모인 사람들을 축복한 후 자리에 앉았다. 이는 거기에 있던 모든 대가(adepts)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모든 눈들이 나를 향해 있을 때,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힘을 의식하고(conscious of)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다: “그 어떤 말을 한다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 제 가슴에 있는 것들을 담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진정한 사랑(real Love)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사랑은 말 그 이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며, 사랑만이 홀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a Love that speaks more than words and which alone could solve all problems).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문제들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며, 이는 마음이 아니라 가슴을 통해서만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저는,” 나는 말했다.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과, 마음이 어떻게 조건들로 묶여 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맺고 있는 관계들의 속을 거울처럼 들여다보았을 때, 저는 어떤 선입견도 없이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게(see)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지각(perception)이 변혁을 가져오게 되고, 여기에는 그 어떤 노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무엇도 왜곡하지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을 때, 바로 그러한 사실이 곧 진리이며, 이것이 문제를 즉각적으로 해결하게 되는 것입니다(When I see the fact as it is, then that very fact is the Truth which resolves the problem). 자아가 곧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게(see) 되면, 이에 관한 진실(truth)로부터 숨거나 도망치려고 애쓰지 않고 이 사실을 보게 되면, 바로 그 순간에 변혁이 일어나게 되며, 이러한 이해를 통한 변혁만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관한 진리를 인식하게 되면, 그 순간 마음의 고요함이 있게 되며, 이 고요함 안에서 갈등은 멈추게 됩니다. 이 고요함 속에 실재-사랑이 있는 것이며, 실재-사랑이 일을 하고 있을 때에는 그 어떤 문제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 때에는 자아가 이미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매우 단순한(simple) 사실이며, 단순한 사람도 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understanding)란 소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재는 지금 존재합니다(Reality is now)! 그렇기 때문에 변혁은 즉각적인 것입니다. 시간은 시간을 넘어서 있는 그것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란 무엇인지(what is now)를 이해하고, 매순간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과거의 기억(past-memory) 즉, 새로운 지금을 가리고 있는 오래된 그것의 방해 없이 자각하고 있을 때, 새로운 지금은 스스로 매순간 새로워집니다. 이는 내가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순간을 만날 때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가능합니다.”
나는 말했다: “제가 세상에 전할 메시지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미 수없이 많은 관념들을 짊어지고 있는 마음들에 더 많은 관념을 주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얼마나 어리석으며 마음을 구속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 있는 관념들은 결코 진리(the Truth)를 밝혀낼 수도 없고,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과거와 믿음과 기억의 조건들이 다 이해되어 사라지고 나면, 사랑은 그 즉시 들어서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음으로 해서 얻게 된 사랑과 지혜에 대해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무거운 마음으로 여러분을 떠나게 됩니다. 제가 얼마나 여러분과 함께 지내고 싶어 하는지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 임무를 수행해 나갈 때 여러분도 저를 돕게 될 것이라는 앎으로 인해 저는 지금 매우 기쁩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거기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을 강복하는 자세로 축복하였다(Then I blessed them all with the all-hailing sign). 이제 나도 그렇게 할 권한을 받게 되었기 때문인데, 이는 치러야 할 시험을 나도 모두 통과했기 때문이다.
아침 식사 후 내 친구와 나는 그들을 떠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발코니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우리는 출발했으며, 라마승들은 “옴 마니 받메 훔”을 노래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 소리는 마치 수도원 전체가 나에게 작별을 고하는 듯 했다.
그 날 아침 일출은 특별히 더 아름다웠다. 그리고 내가 밤낮으로 그토록 자주 올려다 보았던 사랑스러운 산인 코몰하리도, 내가 산에 대해 품었던 사랑을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그런지 코몰하리는 나에게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반사해 비추었는데, 이는 마치 반짝이는 보석 같았다.
우리는 얼굴을 돌려 파리(Phari)로 향했다. 우리는 겨울이라 얼어붙어 있는 수많은 강들을 건넜다. 우리는 두 마리의 눈 표범들(snow leopards)이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도 보았다. 평야들(plains)은 겨울이 되어 완전히 황폐해 보였으며, 주위를 둘러봐도 야생 야크와 야생 토끼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차가운 바람은 코몰하리 산으로부터 불어오기 시작하여 평야들을 휩쓸며 파리로 향해 불어 나갔다. 여름이 되면 이 평야는 들꽃들이 온 가득 피어나 온갖 색깔들로 가득하였다. 그런데 그 날에 본 평야는 참으로 달랐는데, 평야는 온통 눈 담요(blanket of snow)를 덮고 있었던 것이다.
파리로 들어갈 때 우리는 야크와 당나귀 떼의 행렬을 몇 번인가 만나게 되었다. 파리는 온 세계를 통틀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인 동시에, 가장 추운 곳이자, 가장 불결한 곳이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거지들이 자신들의 기도 바퀴(prayer wheel)를 돌리면서 구호물을 바라며 손을 내밀면서 차가운 눈 위에 앉아 있었다. 겨울이 되자 그곳의 여인들은 야크의 피와 진흙을 혼합한 것을 얼굴에 발랐는데, 이는 추위와 바람과 햇빛으로부터 자신들의 피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추위와 바람과 햇빛, 이 세 가지가 결합된 상태에 피부가 노출이 되면 엄청 따가웠다.
거리들은 여러 세기를 걸쳐 쌓아왔던 쓰레기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장난꾸러기들은 똥과 오물에 아랑곳 하지 않고 추운 줄도 모르며 맨발로 뛰어다녔다. 죽은 개들이 거리마다 누워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것들을 치우려들지 않았다. 반면 살아 있는 개들은 먼저 죽은 자신들의 동료들의 시체를 먹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이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었음이 분명하였다.
우리는 오후 네 시 경에 파리에 있는 방갈로(bungalow)에 도착하였다. 거기에는 땔감이 많이 쌓여 있었는데, 그래서 우리는 불을 크게 지펴 맛있게 식사를 하였다. 나는 파리에서 벗어나게 되어서 기뻤으며, 친구에게 이를 이야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토록 불결한 조건 속에서도 불구하고 매우 행복하게 살고 있는 듯 보였다.
다음 날 아침, 토스트에 계란 프라이를 얹어서 아침 식사를 마친 뒤에, 우리는, 16 마일(약 26km) 가량 떨어져 있는 고차(Gautsa)라 부르는 곳을 향해 갔다. 뒤를 돌아보니 코몰하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의 앞으로는 광대한 평야가 펼쳐져 있었으며, 수 백 마리의 야크들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눈을 파헤치고 있었다. 여우들과 산토끼들은 무리를 짓고 열 마리 남짓하게 각각 모여 있었다. 모든 동물들이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우리는 양털(wool)을 나르는 야크 행렬을 만났는데, 거기에는 당나귀들도 몇 마리 있었다. 이것은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으며,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유쾌해졌다. 여기서부터 길은 산중턱 위로 올라가는 길이었으며, 엄청나게 큰 바위들이 울퉁불퉁하게 머리 위로 달려 있었다.
우리는 다리를 건넌 후에 고차(Gautsa)에 도착했는데, 그 다리는 오래 전에 지은 부분과 새로 지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가 묵게 될 오막살이는 나무로 지은 그 작은 마을에 있었다. 헛간들 중 한 곳에서 노새몰이꾼들 몇몇이서 기분을 좋게 해주는 창(티베트 맥주)을 마시고 있었다. 이 티베트 사람들은 술에 취하게 된다 할지라도 매우 행복하며 명랑한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좀처럼 싸움을 일어나지 않았다.
내 친구는 그들에게 티베트 말로 말을 걸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라마승의 복장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에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주었다. 그 커다란 헛간에서 이 친구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추었던 춤들 중 어떤 것들은 매우 격렬했다. 그들은 엄청난 속도로 빙빙 돌았으며, 그들의 옷자락은 거의 날라 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이른 아침이 될 때까지 춤을 계속 추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이 되었을 때, 길은 꽝꽝 얼어 있었다. 그러나 해가 떠오르자 눈과 진흙이 녹아내려 섞이게 되면서 길은 질척해졌다.
길은 아마 추(Ama Chu) 강변을 따라 나 있었다. 아마 추 강은 15,000 피트(약 4570m) 높이에 달하는 두 산맥 사이에 있는 계곡(gorge)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 강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산으로부터 세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여름이 오면 그 강은 산에서 녹아내리는 눈들로 인하여 엄청난 급류를 만들어낼 것이다.
계곡의 끝자락에 오자 우리는 링마탕을 볼 수 있었는데, 우리는 거기서 밤을 보낼 예정이었다. 나는 기뻤는데, 그곳 수도원장은 우리를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이곳이 내가 게쉬 림포체를 처음 만난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첨비(Chumby) 계곡으로 들어섰으며 수도원을 향해 나갔다. 링마탕은 이 골짜기(valley)의 끝자락이자, 계곡(gorge)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저 멀리서 우리는 야퉁(Yatung) 마을을 볼 수 있었는데, 이 마을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갈 때 모든 크기를 통틀어 마주치게 되는 첫 번째 티베트 마을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부르할(Burrhal)이라 부르는 야생 양을 몇 마리 보았다. 야생 곰들은 산에 있는 숲에서 내려와 농작물이 있는 곳을 급습하기도 하였다. 먹이를 찾아 배회하고 있는 표범과 늑대들로부터 자신들의 동물들을 보호하고자 유목민들은 마스티프(mastiff) 개들을 기르고 있었다.
그곳의 수도원장은 우리를 다시 보더니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이틀 밤을 묵고 가라고 설득하였으며, 우리는 그의 말대로 했다. 바깥 세계와 이곳을 가르고 있는 마지막 산맥을 넘기 전에 이곳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우리는 기뻤다.
첨비 계곡은 심지어 겨울에도 아름다웠다. 야퉁은 발전하고 있는 마을로서, 그곳에는 판자 지붕을 이고 있는 돌로 만든 집들이 아마 추 강을 따라서 이곳저곳에 박혀 있었다.
거기에 머무는 동안, 나는 게쉬 림포체의 숙소(quarters)에서 잠을 잤다. 그곳에 있는 동안 만큼이라도 내가 그의 숙소에서 잠을 자야한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 먹고 푹 쉬었는데, 이제 우리는 제펠(Jepel) 관문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나탈라(the Natala) 관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이제 우리는 인도와 티베트를 가르고 있는 히말라야의 산맥에 도착하게 되었다.
우리는 게쉬 림포체의 숙소에서 저녁 식사를 든 다음에 고요하게 앉아 있었으며, 나는 게쉬 림포체의 영향력(influence)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친구도 이를 느꼈는데, 그는 우리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for he gave us a brilliant talk).
그는 말했다: “평화란 갈등을 부정하는 상태가 아니란다. 악을 무턱대고(merely) 부정한다고 해서 네가 고결한(virtuous)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란다. 추한 것을 거부한다고 해서 아름다워지더냐? 자신의 현재 모습과 반대되는 것들을 추구하는 동안 너는 결코 평화로워질 수 없단다. 그렇게 하는 것은 덕도 아니고 아름다움도 아니란다. 네가 추구하는 것과 반대되는 너의 현재 상태가 항상 갈등을 겪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 어떤 것이라도 부정하는 그 순간, 그렇게 하는 것은 갈등을 만들어 낸단다. 그리고 덕이란 결코 자신의 현재 상태와 반대되는 것을 부정한다고 해서 이루어낼 수 있는 결과물이 아니란다. 전쟁을 부인한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란다(Peace is not the denial of war). 전쟁은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투사된 것이기 때문이지.”
“이상주의자들이 이상을 따르지 않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야기하지 않더냐? 사실 이상(ideals)은 그 어떤 것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 가르고 있단다. 나는 네가 게쉬 림포체로부터 이와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단다. 이에 대한 이해는 너의 일에 있어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이란다.”
“좌파 성향이 있는 사람이든, 우파 성향이 있는 사람이든 간에, 그들은 그저 관념(ideas)을 따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 않더냐? 자신의 관념이 다른 이들의 관념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가 갈등과 전쟁과 증오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란다. 인류가 서로 화해(reconciliation)하게 되는 것은, 관념이란 무엇인지, 그것들이 우리를 어떻게 가르고 있는지를 알아보게 될 때라야 가능하단다.”
“우리는 스스로를, 영국인, 미국인, 러시아인, 중국인, 인도인 등등 그 밖의 다른 이름들로 부르고 있단다. 우리는 집단에 소속되길 바라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안전해지고 싶어 하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특정 집단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우리가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게 된단다. 그러나 동일시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집단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분리와 분열과 전쟁을 뜻하는 것이, 이것들 안에서 안전(security)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단다.”
“모든 이상주의자들이 갖는 꿈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사상을 똑같이 믿게 되는 것이란다. 그 사상이 우익이든 좌익이든 간에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갈라놓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믿음이란 분열을 일으키는 인자(factor)이지 통합하는 인자가 아니란다.”
“내적으로, 심리적으로 갈등이 지속되는 한, 이러한 갈등은 밖으로 투사될 수밖에 없단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내적 갈등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평화를 얻고자 노력하거나 어떤 조직을 만드는 활동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단다.”
“무턱대고(merely) 전쟁에 반대하기만 하면서, 자기 내부의 심리적 갈등은 계속 유지시키고 있다면,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가 오히려 갈등을 심화시키게 된단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키는 내적 갈등의 그 모든 과정을 이해하게 되면, 너는 더 이상 전쟁광도, 평화주의자도 아니란다. 너는 완전하게 달라진 것이란다. 왜냐하면 그때 너는 자기 내부에서부터 평화롭기(at peace) 때문이란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세상과도 평화롭게 되는 것이란다.”
“그러므로 너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저런 단체에 속하는 것도 아니며, 이런 저런 것이 되는 것이 아니란다. 참으로 너에게 필요한 것은 갈등의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란다.”
“사람들은 때때로 적을 바꾸고 있으며(You change enemies from time to time), 그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모습에 상당히 만족스러운 듯 보인단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선전에 의해서, 자기 내부의 심리적 갈등에 의해서 계속 유지되어 간단다.”
“그래서 사람들은(you) 이상, 국가 또는 민족성을 통해서, 탐욕을 통해서, 과장(aggrandisement)을 통해서 전쟁을 부추기고 있단다. 일단 내적으로 전쟁을 부추기고 나서 외부로도 전쟁을 부추기게 되는 것이지. 이렇게 하면서 사람들은(you) 평화를 원한다고 하지만, 이야말로 어리석음의 극치임이 확실하며, 언제나 모순에 빠져 있는 성숙하지 못한 마음이 고함치는 것에 불과하단다.”
“너는 항상 무엇인가가 되길 바라고 있단다. - 전쟁 영웅, 백만장자, 고결한 사람, 평화주의자 등 그러한 모든 것들을 말이다. 그런데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바로 그 욕구 안에 이미 갈등은 내포되어 있는 것이란다.”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존재하지 않을 때, 평화가 있게 된단다. 그리고 무엇인가로 되어간다는 것은 실재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임을 이해하고 있을 때, 너는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멈추게 된단다. 그리고 무엇인가로 되고자 하는 마음을 멈추게 되었을 때, 바로 그때 실재가 있게 된단다. 창조성 그 자체인 그것이 말이야.”
“너는 더 이상 안전을 구하지 않게 될 것이란다. 안전을 구하고 있는 마음은 언제나 두려움 속에 있기 마련이고, 창조적 존재(Creative Being)의 기쁨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란다. 네가 안전해질 수 있는 그 근본은 이해에 있는 것이지, 관념을 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란다(The very basis of your security is in knowing and not in seeking).”
“가장 높은 차원의 생각-느낌의 형태는 자기-이해와 신성한 이해(Divine comprehension)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지, 이상주의자의 공격적인 자기 독단적 태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란다.”
“이러한 이해를 얻고자 한다면, 마음과 가슴은 반드시 평화로우며 고요해야 한단다. 그러면 그때 너는, 갈등이 없는 상태란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란다.”
“모든 전쟁이 다른 전쟁을 만들어 내듯이, 각각의 갈등은 또 다른 갈등을 만들어 낸단다. 이러한 갈등들을 끝내고자 한다면, 너는 반드시 자아를 이해해야 한단다. 자기-이해가 있을 때라야, 내적인 그리고 외적인 갈등을 벗어난 자기 해방(liberation)이 있기 때문이란다.”
“대량 학살, 기아, 불행, 파괴 등과 같은 이러한 문제들을 문제가 발생한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붙잡고 늘어질 때, 오히려 너는 고통(misery)을 심화시키는 것이란다. 너는 오로지 탐욕과 악의(ill-will)를 새로 포장(reorganisation)하는 데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 있단다. 그러므로 혼란과 적개심은 결코 끝나지 않는 것이며, 혼란과 적개심은 네가 그 문제의 뿌리를 다루기 전까지 남아 있게 될 것이란다. 그리고 이러한 뿌리들은 너희 자신 속에 깊이 박혀 있단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이 참으로 분명해졌구나. 그렇지 않니? 만약 어떤 개혁가(reformer)가 자신이 바로 문제라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스스로 변화되지(transformed) 못했다면, 참된 가치들에 대한 내적인 깨달음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란다. 그리고 그가 세상에 공헌한다고 하는 것들은 사실 더욱 심화된 갈등과 불행을 더할 뿐이지.”
“때때로 고통을 겪음으로써 너는 자신의 필멸의 꿈에서 깨어나게 된단다. 자신만이 홀로 스스로의 고통을 영속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 방법과 수단에 대해 생각을 적게 할수록 너는 너 자신을 더욱 더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며, 더 빨리 평화가 네 안에 깃들게 될 것이란다. 그 평화로움이야말로 영원한 가치(Eternal value)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대립되는 것들의 갈등의 상태가 아니란다.”
“이해하고 있는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 누구나 그것을 발견한단다. 그러나 이해가 없는 자의 등에는 매질만이 있을 뿐이란다(In the lips of him that hath understanding wisdom is found: but a rod is for the back of him that is void of understanding).”
그가 말을 마치고 난 다음에도 나는 한동안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 이제 나는 제대로 듣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단순히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보는 가운데 깊은 이해와 함께 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보는 행위 그 자체가 해방이자 변혁으로 즉각적으로 이어지게 된다(in doing so that very seeing was liberation and transformation).
나는, 수도원장도 마찬가지로 깊은 명상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명상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과정이며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명상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배제하고 하나의 관념에만 집중하는 것은 명상이 아니다. 그러한 방식으로는 갈등에서 해방될 수도 없고 실재에 대한 깨달음이 찾아올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날 밤 나는 푹 자면서 편히 쉬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기분이 매우 상쾌했으며, 제펠 관문(Jepel pass)을 거뜬하게 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른 아침에 출발했으며 우리가 가야 할 곳의 중간 높이 정도에 있는 헛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밤을 보냈다. 우리는 깊게 쌓여 있는 눈 속에서 여덟 시간 동안 여행했으며, 종종 우리 허벅지까치 쌓여있는 눈길을 만나기도 했다.
나는 다음 날이 여행 최악의 날이 되지 않을까 염려했었다(The next day I thought would be the worst). 그리고 나는 눈보라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길을 걸어가면서 만나는 눈보라는 정말로 두려운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바람은 매우 격렬하게 불며, 그때에는 바로 몇 야드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된다. 이는 일 년 중 이 시기에는 꽤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바람에 날려 눈은 길에 높게 쌓이고, 이를 헤쳐서 여행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나는 이미 이것을 한 번 경험했으며, 또 다른 경험을 원하지 않았다.
전에 이미 한번 일어났었던 탓일까. 우리가 가는 내내 날씨는 공평하게 맑았다. 대신 햇볕이 매우 뜨거웠다. (한겨울이라 할지라도 불쾌해 질만큼 뜨거워지곤 했다.)
관문의 정상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시킴(Sikkim)의 수도인 강톡(Gangtok)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길을 넘어서자 또 다른 헛간이 나타났으며, 우리는 거기서 밤을 보냈다. 우리는 통나무로 불을 피웠으며 저녁 식사를 하였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거의 다 타고 남은 재들이 빨갛게 소진해갈 때까지 불가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초는 방 전체에 은은한 빛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게쉬 림포체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가 지금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이 확실했다. 이를 내 친구에게 말했다. 내 친구 역시 내가 느꼈던 것과 똑같은 영향력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몇 분만 더 고요하게 있어 보자. 그러면 그를 볼 수 있게 될 거란다.” 우리는 그렇게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앞에서 형성되고 있는 림포체의 형상을 보게 되었다. 이번에는 나는 그를 분명하게 볼 수 있었으며, 이러한 방문에 대해 더 이상 무지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희미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아들아, 지금 네가 보고 있듯이, 나는 여전히 너와 함께 있단다.” 이 말이 끝나자, 링-쉬-라 은수자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산들도 움직일 만큼의 굳은 믿음을 가져라(Have the faith that moves mountains, my son). 우리는 그 믿음을 통해서 너를 돕게 될 것이란다. 의심하지 말고 다만 행하여라(Never doubt but act). 그러면 그 행동 안에서 실재가 일하게 될 것이란다. 기억해라. 일을 하시는 분은 바로 아버지의 영이시란다.”
이 말이 끝나자 둘 다 사라졌다. 나는 기쁨에 쳤다. 이제는 그 어떤 것도 나를 뒤흔들 수 없을 만큼 확신이 강해졌다.
나는 내 친구에게 말했다: “이제껏 보냈던 저녁 중에서 오늘이 가장 경이로운 저녁이었습니다. 방금 전 두 분이 나타나신 것은 전에 마련되었던 모임보다도 저에게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방금 전의 짧은 몇 분이 저에게는 영원 그 자체였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날 밤 나는 어린아이처럼 푹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난 후에도 나는 전날 저녁에 일어났던 일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나는 여전히 게쉬 림포체와 링-쉬-라 은수자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 모든 의미가 보다 명확해지며 중대해졌다.
시킴의 수도인 강톡으로 내려가는 동안 내 발은 날개라도 단 듯 했다. 나는 새처럼 가벼웠으며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마음은 항상 고요해 있는 듯 느껴졌으며, 그 환희의 느낌(that feeling of ecstasy)은 항상 나와 함께 남아 있었다. 이것이 나의 젊음을 지켜주었다. 내 친구 중에서 나를 20년 넘게 보지 못했다가, 내가 그가 살고 있는 지역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나를 보기로 결심하고 나를 만나러 온 친구가 있었다. 그가 늙었듯 나 역시 늙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는 순간 이렇게 감탄했다: “오 이런(Good God), 너는 하루도 늙지 않았구나. 도대체 비결이 뭔가?” 나는 대답했다: “아무런 비밀도 없어. 나는 그냥 항상 나야(I am just what I am).” 물론 그는 늙어버렸지만 말이다.
우리는 그날 저녁에 강톡에 도착했다. 나는 다시 문명 세계에 돌아온 것에 대해 유감을 느꼈다. 그것은 매우 독특한 느낌이었다. 문명 세계로 돌아온 것이 싫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히말라야의 반대편을 생각하다보니, 다소 슬픈 느낌이 들었다는 것뿐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곧장 임무를 시작해야겠다는 열정도 느꼈다. 이제는 내가 세상에 뭔가 줄 수 있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확신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내가 참이라 믿고 있는 것들에 확신이 없다는 느낌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곤 했었다. 내 안에서는, 실제로 나는 모르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거짓된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 똑같은 그것을 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이전과는 다르게 알게 되었으며, 나는 가능한 한 빨리 내 일을 시작하기 원하고 있었다.
우리는 고울드 씨(Mr. Gould)와 인사를 나눈 다음, 그와 함께 그날 저녁 식사를 먹었다. 대화의 주제는 내가 지난 7 개월 동안 했던 일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나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모두 함께, 한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를 몰랐기 때문이다(for my acquaintances had lost track of me altogether). 그러나 내가 고울드 씨에게 내가 했던 일들과, 내가 갔던 곳들에 대해 말을 하자, 그는 거의 믿을 수 없어 했다.
그동안 나는 어떤 백인도 발을 디뎌 보시 못한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탐사되지 않은 티베트의 지역들을 말이다. 그곳은 티베트 마스터들(adepts)에게만 가능한 곳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리 그 자체보다는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 더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진리야말로 삶(Life)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다음 날 우리는 소형 오스틴(Austin)차를 타고 칼림퐁까지 운전해 갔다. 길의 끝까지 말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내 친구에게 작별을 고할 때 느꼈던 그 외로운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으나, 감정에 동요되지는 않았다(yet I was not emotional). 나는 내 인생이라는 차의 크러치를 잃어버린 듯 했으며, 혼자서는 이를 견딜 수 없을 듯 했다. 내 친구가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그는 내 생각을 읽었음에 틀림없다: “이제 나는 너를 떠나는 것이 최선의 길이겠구나. 네 안에 계신 영께서 네 인생의 남은 길 동안 너를 지탱해주실 것이란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너를 창조하신 그분께서 너의 곁에 계시고, 그분께서는 모든 것들보다 위대하시지. 그분은 모든 것이기 때문이지. 그분은 모든 것을 다 아우르고 계신단다(He is Wholeness). 그분은 생명 그 자체이시지. 아버지께서는 당신 안에 생명을 갖고 계시며, 아들에게도 그분 안에서 같은 생명을 갖도록 허락하신단다.”
“너는 그동안 홀로 서야 한다는 것을 배웠지만, 아직도 의존하려 하는구나(You have learned to be independent, yet you feel dependent). 다른 이에게 의존하려는 환상이 너를 계속 노예 상태에 남아 있게 하는 것이란다. 너에게 도움과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사람들에게 의존하려 할 때, 너는 의존과 분리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게 된단다. 그들이 아무리 고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만약 네가 시작과 끝을 갖고 있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두려움도 있게 된단다. 그러나 네가 이 사실에 관한 진리(the Truth)를 이해하고 있다면, 그때 너는 시작도 끝도 없는 그것을 네 자신 안에서 찾게 될 것이란다. 그 밖에 다른 모든 것들은 네 주의를 산란하게 하여 무지와 환상으로 이끌게 된단다. 실재는 남에게 의존하려는 환상에서 자유로울 때 찾아오게 된단다. 만약 네가 지금 이 순간 생각-느낌-반응을 식별하고(discern), 그것의 거짓됨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때 거짓된 그것은 너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란다. 그러면 그때 너는 우리 사이에 어떤 분리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란다. 왜냐하면 다만 ‘하나’(‘One’)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분 안에는 분열도, 분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즉각적인 현존 안에는 구별도, 분리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단다(There is no distinction, no separation, in the immediate Presence). 분리란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따라서 구별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란다. 우리는 항상-현존하고 있는 사랑의 왕국(Kingdom of the Ever-Present Love) 안에 살고 있는 것이며, 이 사실을 제일 나중에 깨달은 이나, 이를 제일 먼저 깨달은 이나 다 똑같단다. 우리 모두는 지금 왕국 안에 있는 것이며, 다만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란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내 어깨에 팔을 올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아, 나는 세상이 끝난다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할 것이란다.” 이 말을 마치고 그는 돌아서서 나를 떠나갔다.
나는 그가 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그가 돌아서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는,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 보았던 그 걸음 그대로 걸어갈 뿐이었다. 그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가,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게 다 꿈인가?” 얼마나 오래 동안 거기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얼마 후 나는 내 꿈에서 빠져 나왔으며, 그것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 임무가 무엇인지 자각했으며(knew), 그 임무가 나를 어디로 이끈다 할지라도, 세상 모든 곳으로 이끈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루어낼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지구의 모든 구석구석마다 나는 자유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 순간 나는 노르부를 떠올렸고, 그녀와 내 친구를 보러 삼 년 뒤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했던 것이 마음에 떠올랐다.
“그래.”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는 모두 생생한 현실이야(it is all real).” 나는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나, 그 일은 참으로 일어난 것이며, 다만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할 수 없을 뿐이다. 이 모든 일들은 너무나도 척척 들어냞 것이토록 놀라운 방식으로 일어났으며, 마치 이 뒤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 듯 했다(Things just came to pass all dovetailed in such a way as if by some unseen agency).
* * * * *
나는 이 책을 대부분 거짓된 것을 밝혀내기 위한 목적으로 쓴 것으로서, 거짓된 것을 앎으로써 그대는 참인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진리가 그대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요가 (THE YOGA OF THE CHRIST)
오 전능하신 하나시여,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니나, 당신과 함께 할 때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입니다. 당신은 결코 나누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거룩하게 이치를 헤아리고 거짓된 것들을 살펴보았을 때, 나는 당신의 살아 계신 현존이 들어설 길을 마련하였습니다.
당신의 현존 안에서 저는 그 어떤 악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유일한 하나이실 뿐, 제가 본 악이란, 제 자신의 마음에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별적인 인격 안에는 그 어떤 진실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는 홀로 실재이시며 나누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 안에는 그 어떤 진실도 없다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신 안에는 죄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당신 홀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람의 마음 안에서만 죄는 머물고 있는 것이며, 사람의 마음이 거짓된 것입니다.
진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진리는 결코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보지 못하게 나를 가리고 있던 것을 알아보게 되었을 때, 저는 그 거짓된 것들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 진리는 나를 자유롭게 풀어주었으며, 거짓된 것이 참된 것이라 믿었던 그 오류가 바로 내 자신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아는 이제 죽었기에, 제 생명은 당신의 것이며, 당신의 생명은 저의 것입니다. 영원토록.
오 복되시며 영원히 살아계신 현존이시여.
오 복되시며 영원히 살아계신 현존이시여.
(O Mighty One, I myself am nothing but with Thee I am all there is, for Thou art not divided.
When I reasoned Divinely and observed the false I cleared the way for Thy Living Presence.
In Thy Living Presence I saw no evil because Thou art the only One; evil I saw was of my own mind.
I saw there could be no Reality in personality because Thou alone art Real and Indivisible.
I saw there could be no Reality in sin because in Thee there is no sin and Thou alone existeth. Only in the mind of man does sin dwell and the mind of man is false.
Truth is all there is, Truth is indivisible because there is nothing else to divide It.
Truth is unchangeable because there is nothing else to change It.
When I saw what blinded me to the Truth I died with the false.
Now the Truth has set me free knowing that in myself was the error believing the false to be true.
Now that the self has died, my Life is Thine, Thy Life is mine, for evermore,
O Blessed Eternal Living Presence
O BLESSED ETERNAL LIVING PRESENCE)
* * * * *
이 책을 읽게 될 사람들에게:
그대들을 향한 내 바람은 이렇습니다: 신께서 그대를 축복하시고 그대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이제와 영원토록.
그대에게 진심을 담아.
M. 맥도날드-베인
끝.
이 책을 읽기에 앞서 옮긴이가 드리는 말씀
어떻게 하다 보니, <The Yoga of the Christ>를 번역할 기회가 저에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영성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 분이라면, 예전에 정신세계사에서 출판했던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라는 책을 한 번쯤은 접해 보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의 원문 제목은 <Beyond the Himalayas>이며, <The Yoga of the Christ>는 그 책의 후속편입니다. 어떤 영화가 흥행하게 되면, 상업적 목적으로 비슷한 구성 방식으로 2탄, 3탄을 내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Beyond the Himalayas>와 <The Yoga of the Christ>는 사실상 한 권이라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두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만 저자의 사정으로 인해 시기적으로 두 권의 책으로 나누어 쓰게 되었다는 것을 추리해볼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The Yoga of the Christ>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거부감이 좀 심하게 들었습니다. 굳이 번역하자면, 그리스도의 요가일 것인데, 어설픈 혼합주의가 아닐까하며 읽어보지도 않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 책의 존재는 알았지만, 이 책이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의 후속편이라는 것도 몰랐고, 아직 국내에 번역이 되어 있지 않았으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원문으로 읽어봐야겠다는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인터넷에서 <그리스도의 강론>이라는 제목이 붙여 있는 14편의 글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 글을 읽으면서 전율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글에 관심을 갖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보니, <그리스도의 강론>의 원제는 <Divine Healing of Mind and Body>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책이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의 저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를 읽다보면 이 책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그 책의 역자는 <주께서 다시 말씀하신다>로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이는 <Divine Healing of Mind and Body>의 부제인 것인데, 본래는 <Master speaks again>입니다. 참고로 <그리스도의 강론>은 아직 국내에 출판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 내용에 공감하여 그 책을 번역하여 온라인상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Murdo Macdonald-Bayne을 검색어로 인터넷을 뒤지다보니, 그와 관련된 홈페이지도 여럿 발견하였고, 그 중 하나에서 <Beyond the Himalayas> <The Yoga of the Christ> 원문 전체를 접하게 되었고, 이 번역본의 앞장에 수록해놓은 저작권 관련 사항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이 두 권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판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내용 말입니다. 그 글을 읽고 나서 두 권에 대해서는 온라인으로 공유해도 괜찮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제가 직접 번역을 하여 온라인으로 사람들과 공유를 해야겠다는 마음까지도 먹게 되었습니다.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에 나오는 이름과 <그리스도의 요가>에 나오는 인명과 지명이 다소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 부분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예컨대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에서는 ‘게시 린포체’로 표기해 놓았는데, 실제 원문은 ‘Geshi Rimpoche’로서 ‘게쉬 림포체’로 표기하는 것이 더 원음에 가깝지 않은가 의문을 품었던 것입니다. 일본어를 아시는 분들에게 물어본 결과, 일본어에는 ‘쉬’나 ‘림’이라는 발음은 없지만, ‘시’나 ‘린’이라는 발음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볼 때, 기존에 출판되었던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는 영어 원문을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출판되었던 것을 중역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굳이 이 사실을 말하려는 이유는,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를 번역하셨던 분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의 내용에 공감하시는 분들 중에서 원문을 보고 새로 번역하시는 분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적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요가>도 번역했으니, 제가 다시 <Beyond the Himalayas>를 번역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요가>를 번역하면서 많이 지치기도 했고, 하면 할수록 영어 실력은 물론이고, 한국어 실력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혼자 영어를 읽고 대충 내용을 파악하는 것과 원문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내어 다른 언어를 쓰는 독자에게 친숙한 언어로 번역하는 일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는 것을 제 스스로 너무나도 처절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오역, 오타, 누락된 부분들을 수없이 발견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나마 제가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의 원문도 파일로 공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어와 한국어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순수한 가슴을 지니신 분이 후에 이 책을 원문에 충실하게 다시 번역하실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이 글을 보다 깔끔하게 다듬어 내놓고 싶었지만, 실력과 시간의 한계, 그리고 제 개인적 사정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어려울 듯합니다. 번역을 하기 힘든 문장이나, 뉘앙스를 살리기 어려운 단어들에 대해서는 괄호를 쳐서 원문을 작은 글씨로 병기해놓았습니다.
제 스스로 많이 걸려 넘어졌던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첫째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책의 내용들을 지적으로 즐기는 태도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누누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내가 지금 마음을 보는 공부를 하는 것인지,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인지, 번역을 함으로써 자기만족을 취하거나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것은 아닌지 제 스스로 혼동하는 순간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입니다. 같은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여기 글을 남기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넘어지고 있습니다. 혹시 <Beyond the Himalayas>와 <The Yoga of the Christ>를 다른 게시판에 공유하시고자 할 때에는,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파일로 올려달라는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저자의 다른 책, <그리스도의 강론, Divine Healing of Mind and Body>은 한국어로 출판하는 것에 대해 검토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번역본 2쪽에 실려 있는 ‘저작권에 대한 참고사항’을 깔끔하게 번역해주신 그분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혹 문의하실 것이나, 지적해주실 사항이 있다면 aim_of_life@hanmail.net으로 연락바랍니다.
자료제공: 기적수업 지가성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