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실인과 나사렛 사람

작성자김요안|작성시간05.01.06|조회수822 목록 댓글 0
 

나실인과 나사렛 사람


사사기 13. 5  마태복음 2. 19-23

지금이 사순절 기간 중이므로 오늘은 우리 신앙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려는 뜻에서 이 본문을 택했습니다. 성경 어느 부분 치고 우리 신앙을 되돌아보게 하는 가르침이 없겠습니까만, 오늘은 특별히 신앙상의 시련과 관련해서 두 본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6장의 가르침에 따르면 나실인은 주께 헌신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는 헌신하는 기간 동안에 포도로 된 것을 먹지 말아야 하고, 머리털을 깎지 말아야 하고, 또 주검을 건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실제로 나실인이 된 사람은 삼손 한 사람뿐입니다.


사사기에 따르면, 삼손은 이스라엘이 사십 년 동안 불레셋의 지배 하에 있을 때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원자로 점지를 받습니다. 하지만 삼손은 사사기에 나오는 다른 사사들처럼 전쟁 영웅이 아닙니다. 그는 다른 사사들과 전혀 다릅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아주 극적입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그는 금령에 따라 머리를 깎지 않았기 때문에 장사의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물리쳐야 하는 불레셋 여인들을 사랑한 까닭에 여인들의 꼬임에 빠져 종국에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능력을 잃어버리고 붙잡혀서 눈이 뽑히고 맷돌이나 가는 불구의 노예 신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삼손의 행태를 염두에 두고 예수님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한동안 애굽에 피신하여 계셨다가 갈릴리 지방 나사렛이라는 마을에 정착하여 어린 시절을 보내십니다. 복음서는, 그렇게 하여 “나사렛 사람이라고 일컬을 것이라는 예언을 이루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일컬을 것이라”는 예언도 없지만, 도대체 나사렛이라는 지명이 구약성경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사렛”은 구약성경에만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랍비들의 구약성경 주석인 탈무드나, 역시 유대교 가르침의 해설서들인 미드라쉬, 그리고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저술 같은 유대교 주요 문헌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나사렛”은 기독교 전통 속에서만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 “나사렛 사람이라고 일컬을 것이라는 예언을 이루셨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겠습니까?


우리가 가장 분명한 대답을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스베덴보리 선생님에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도 <영계 체험> 제3 항에서 주님을 “메시야, 곧 구세주, 나사렛 예수”라고 표현하면서 “나사렛”을 단 한번 언급한 것을 제외하고는 “나사렛”에 대한 풀이를 한 마디도 남겨놓은 것이 없습니다. (전에는 “영계 일기” Spiritual Diary라고 했는데 요즘은 “영계 체험” Spiritual Experiences라고 부른다.)


이제 “나사렛 사람이라고 일컬을 것이라는 예언을 이루셨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은 문자적인 관계들을 살펴가면서 그 의미를 알아보는 것 뿐입니다.


본문의 “나사렛 사람”은 흔히 구약 여러 곳에 언급된 나실인이나(삿 13장, 민 6장) 이사야서의 예언 가운데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한 싹(사 11.1)과 연관지어 풀이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관계를 언어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나실, 히브리말로 나질은 “성별한 또는 헌신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히브리말로 싹은, 네첼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 “나사렛 사람”을 가리키는 희랍어 나조라이오스는 아람어를 옮겨 적은 것이기 때문에 언어적으로는 '네첼'에 가까운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신학적 해석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나실"인이나 “싹” 어느 것도 나사렛 사람이라는 칭호의 뜻을 분명하게 밝혀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나사렛 사람이라는 칭호에 담긴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암시를 요한복음 첫머리에서 얻게 됩니다. 요한복음 1장 마지막 단락을 보면,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된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메시야를 만났다”고 전하면서 그 메시야는 나사렛 출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 1.46). 나다나엘의 대답은, 요즈음 말로 표현하면, 나사렛이 “별 볼일 없는 동네”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은 물론, 유대교 문헌에서조차 나사렛이라는 지명이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되는 것입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 남부 저지대에 지중해와 갈릴리 호수 중간의 내륙에 위치합니다(지중해에서 32km, 갈릴리 호수에서 24km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 마을은 에스들랠론 평야 북쪽 끝 지점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을 보면, 예수께서 고향에 돌아가셨을 적 사건이 나옵니다. 그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서 61장에 기록된 “은혜의 해 선포” 부분(1,2)을 읽으십니다. 이어서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 기근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았지만 시돈 지방 사렙다 과부만이 엘리야의 구원을 받았고, 또 엘리사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문둥병자가 많았지만 수리아 사람 나만만이 엘리사의 병고침을 받았다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끌고 동네 밖으로 가서 벼랑 끝에서 밀쳐버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말씀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외되고 이방인들만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니까, 고향 사람들이 화가 났던 것입니다. 이 사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마을은 높은 언덕 위에 자리했고, 한쪽은 평지로 이어지고, 다른 쪽은 절벽입니다(눅 4.29).


한마디로, 나사렛은 산간벽지인 셈입니다. 우리나라를 놓고 보면, 전라도 지리산 자락 어느 산골마을이라고 말하면 거의 비슷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렛 사람이라는 칭호는 결코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표현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던 호칭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경멸하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응, 그 무지렁이 촌놈!” “그 두메산골 선머슴!” 이 정도쯤 되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언자들이 예언해 왔던 일이라고 하면서 당당하게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은 한 삼십 되셨을 적에 세상에 나오셨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삼년 동안 활동을 하셨다고 여겨오는데, 단지 일년 동안만 활동하셨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일년이든 삼년이든 그것은 그분 생애에서 보면 말년에 있었던 아주 짧은 기간일 뿐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긴긴 한평생을 그는 오로지 나사렛에서, 나사렛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이제 그 나사렛 사람이라는 칭호의 의미를 새겨봅시다.


미국 스베덴보리 재단(Swedenborg Foundation)에서 펴내는 저널 가운데 Chrysalis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번데기”에 해당하는 말인데, “준비기” 또는 “과도기”를 뜻하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 선생님은 <영계 체험>에 나비가 되는 유충에 관해서 영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적어 놓았습니다(체험 2475). 대화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그것들은 하늘의 삶을 표상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그것들은 작은 벌레들로 낮게 땅에 기고 풀을 먹는 지극히 천한 존재지만, 그러는 동안에 그것들에게 그것과 어울리는 하늘의 표상들이 준비되고, 그래서 번데기 상태를 거쳐서 날개가 달린 아름다운 벌레가 되고, 그런 다음에 땅에서 공중으로 상승해서 이리저리 날면서 꽃들을 찾고 단 즙을 먹고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고 주어진 생을 구가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겸손한 사람의 개조와 중생에 대한 표상들이라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에 비추어 본다면, 나사렛은 예수님의 애벌레 시기는 아닐는지...! 매미는 여름철 한두 주간 동안 살기 위해서 몇몇 해를 땅속에서, 고치 속에서 지낸다고 하고, 나비는 그 아름다운 자태로 공중을 마음껏 날아다니기 이전에 아주 오랜 시간을 애벌레로 지내야만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나서시기 이전에 삼십 년 동안을 숨어서 사셨다면 그 숨어 산 나사렛의 생애는 예수님에게 애벌레 때가 아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언명된 나실인은 주님의 그림자입니다. 나실인은 영적으로는 거듭난 사람, 또는 삼층천에 해당하는 천적 천계에 속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지경의 사람은 자연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을 때 능력을 발휘합니다. 자연적 진리는 머리털에 해당하기 때문에, 나실인은 머리를 깎지 말도록 했던 것입니다. 날 때부터 머리를 깎지 않았던 삼손이 산 사자를 붙잡아 찢어죽일 정도로 힘이 셌다는 성경 이야기는 바로 그런 하늘의 모습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의 말로는 비참합니다. 그 이유는 불레셋의 여자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불레셋은 이스라엘에서 보자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괴롭고 또 귀찮은 대적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다음에 그들이 살던 가나안 지역의 이름을 팔레스티나라고 바꾸었고, 그래서 오늘까지도 그렇게 부르는데, 로마인들은 눌러도 눌러도 쉽게 정복되지 않고 반기를 드는 이스라엘을 제압한다는 의미에서 이스라엘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불레셋의 이름을 가져다 붙였던 것입니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고 괴롭히는 귀찮은 존재, 그것이 불레셋의 이미지인데, 우리 신앙에서 그것은 믿음과 선한 생활을 분리시키는 신앙체계를 가리킵니다. 선한 생활은 없어도 된다는 신앙체계는 마땅히 분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흩어버릴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느냐 하면, 구체적인 일들에 대한 진리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지시하는 머리털입니다. 나서부터 털보숭이인 삼손은 이 일을 능히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삼손은 불레셋 여인의 꼬임에 넘어가고 맙니다.


아무리 훌륭한 원리원칙이라도 그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지켜지지 않은 원칙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자연적인 진리가 가장 높은 하늘의 사실들을 유지하고 보존하고 지탱한다는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실인에게 있는 머리털입니다.


삼손이 불레셋 여인의 꼬임에 넘어갔다는 것은, 거듭난 지경에 있는 사람이 실생활 가운데서 보통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일을 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매일매일 기울여 오던 신앙생활에서 나태해지기 시작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맨 아래 괴었던 돌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삼손의 말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릅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과 예배의 대상이신 예수님은, 지상의 한평생을 이름 없는 작은 동네에서 사셨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은 그분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나시기 이전에 그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갖추실 수 있었던 곳임에 틀림없습니다. 말하자면 나사렛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고 탄생하신 그분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온갖 살림살이를 몸소 체험하고, 드디어 마지막 단계의 공생애 과정을 거쳐서 부활에 이를 수 있는 모든 기틀을 닦고 갖춘 곳이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삼십 년 동안 나사렛에서 사시면서 가장 초보적인 진리들을 꾸준히 수행해 나가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을 전하면서 수시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 “이렇게 해서 말씀을 이루셨다.”


혹자들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은 삼십 년 기간 동안 그는 다른 곳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줄줄이 달린 동생들과 가사를 내팽개치고 도를 구하려고 머나먼 곳으로 구도여행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너무 사치스럽게 들립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 시험을 겪으신 이후에 제자들을 모으고 하나님 나라 선포의 과업을 수행하기 시작하셨을 적에 형제들이 찾으러 왔다는 사화는, 그가 비로서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엉뚱한” - 심하게 표현하면 “정신 나간” 짓을 하기 시작했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입니다. 뒤집어서 표현하면, 그 이전에는 그가 착실한 보통사람들의 삶을 살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는 그렇게 삼십 년을 평범하게 사시는 가운데서 진리를 구현해 가셨던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비웃음이었을지도 모를 나사렛 사람이라는 칭호는, 오늘 우리에게 감사와 찬양의 표호가 되고, 아울러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친히 보여주시는 삶의 교훈과 모범이 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나사렛! 나사렛 사람! 나사렛 예수! - 이 이름들은, 신앙의 역경 속을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오래 참고 견디면서 꾸준히 주님의 가르침을 수행해 나갈 적에 풍성한 열매를 얻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 “예수님이 나실인이 되기 위해서 머리털을 기른 곳”이라고 상징적인 표현으로 기억해 봅시다.                                                                                       <2002. 2.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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