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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완결]실장석의 역사 - 2 - 完

작성자&(●A●)&/똥닌겐|작성시간16.07.07|조회수1,825 목록 댓글 5



1. 나나시 토시아키 (1875~1941)





(토카치시절의 나나시 토시아키)




현대 실장석의 아버지는 나나시 토시아키(名無敏明)이며, 그가 1909년 설립한 실장흥업사(実装興業)가 오늘날 로젠사의 모체다. 토시아키는 1875년 야마가타현의 마타기(사냥꾼)집안 태생으로, 14세에 요네자와번 하급무사가문에 입적했다.  육군에 투신하여, 제2사단 장교 신분으로 러일전쟁의 봉천회전과 압록강전투에 참가했다가, 숱한 위기끝에 구사일생으로 생환한것으로 알려졌다. 



 전후 요네자와번(야마가타현)주 출신의 관료 히라타 도스케(平田東助)의 심복으로 발탁되어, 1907년 메이지 정부의 가라후토(樺太 : 남사할린) 개척사업에서의 참여로 자본을 형성했다. 또한 사금체취 사업에서의 대성공으로 화족 작위를 획득하여 나나시(無名)성을 개칭한것으로 보인다. 



(초기 실장산업의 뒷배였던 히라타 도스케)



 그러나 히라타 도스케를 따라 사이온지 내각을 지원했기 때문에 가쓰라 내각하에서 중앙 정계와의 연은 없었으며, 가쓰라 실각후 대외적으로 호헌(護憲)파를 자처하며, 귀족원에서 쫒겨났다고 전해진다. 이후 토카치(十勝支) 지방에 정착하여 청어잡이를 주력으로 여러 사업을 운영하는데 전념하였다. 그 여러 사업 중 하나가 1909년 설립한 실장흥업이다.



 1995년 공개된 내무성 민정 문서에 의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는 내무대신 시절의 히라타 도스케로부터 일찌감치 실장석의 노동력으로서 활용방향성을 타진받았던것으로 되어있다. 마타기(사냥꾼)집안 출신으로 상품성을 알아보는 감이 탁월했던 그는 실장석의 형편없는 내구성에 실망하여 1908년 전혀 사업성없음이란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무슨일에서인지 이듬해 1909년 스스로 실장흥업을 설립하고, 1915년에 이르러선 다른 사업을 포기한채 실장석에만 몰두했던것으로 전해진다. 









 여러 설이 있지만, 봉천회전에 참여한 후 PTSD(외상성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린 토시아키에 대한 글이 히라타 도스케의 잠언록에 등장하며, 가학적 징후가 내연녀 사나다 아사미(真田 アサミ)의 일기에서 쏟아지는 점으로 볼때, 온전한 정신에서 벌인 일이 아니라는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여러 풍문을 남기며 10년 이상의 가혹한 개량 끝에 1925년 상용(常用) 사육실장의 첫 세대인 "미도리"들이 출시되었다. 










2. 20세기 초반의 실장석




(1차 대전 직후의 벼락부자계층 나리킨)


 1925년의 일본은 막 끝난 1차대전 전쟁특수의 영향으로, 자신의 신발을 찾으려 100엔짜리 지폐에 불을 지핀 나리킨(벼락부자)들이 넘쳐나 사치시장의 수요가 절호에 달한 시대였다.




 그러나 출시직후의 미도리들은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기본적인 예절교육은 커녕 토시아키의 학대 영향을 받아 상품의 질이 고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업수완이 뛰어났던 토시아키는 두가지 사건을 이용하기로 한다.





 첫번째는 동양미술사를 전공한 사학도로서 교토제국대학 연구진의 석굴암 발굴을 구경하기위해 내일(來日)한 아돌프 구스타프 스웨덴 왕세자(훗날의 구스타프 6세)를 이용한것이다. 


 1926년 10월 마지막 남은 연줄들을 이용해 구스타프의 내일(來日) 행렬에 끼어든 토시아키는 철저한 훈육으로 길들여놓은 비장의 에메랄드 쨩을 내놓았다. 에메랄드는 왕세자빈 루이즈 마운트배튼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고, 그녀의 손을 따라 유럽 왕실로 넘어가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을으켰다. 


 루이즈 마운트배튼으로부터 그리스, 덴마크, 영국왕실로 퍼진 실장석들은 특히 갓 태어난 엘리자베스 메리 윈저의 소꿉친구로 길러져 유럽 왕공족들에게 빠져서는 안되는 필수요소로 자리매김했고, 메리 윈저, 즉위후 엘리자베스2세를 중심으로 한 영국왕실은 이후에도 실장산업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주었다. (엘리자베스2세는 루이즈 마운트배튼의 조카며느리이다.)



(최초의 유럽 사육실장이자 스웨덴 왕실 사육실장 에메랄드)




 기사회생에 성공한 토시아키는 두번째 수를 내놓는다. 유럽순방에 나선 공작 영친왕 이은을 이용하는것이었다. 1928년 영친왕 이은과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비(梨本宮 方子)의 측근,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 이왕직 차관과 궁내청 직원 사와시로 미유키(沢城 みゆき)를 구워삶았다.


 "유럽의 위엄있는 왕가들은 이미 예의바른 실장석을 훈육해내는것을 영예로 여기고 있습니다. 마땅히 실장석의 본고장인 일본 황가의 일원으로 실장석 하나 없이 순방함은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영친왕의 유럽순방에 동행한 실장석 미도리)



 일본 황실과 직접 연결할 도리가 없었던 토시아키는 우선 황실과 가까운 이왕직 공작가들과 연대를 한것이다. 마사코의 마음에 든 미도리들은 곧 그녀의 사촌언니 고준 황세자빈에 의해 일본 황실과 고셋케(五攝家)를 중심으로, 화족들의 애완동물로 퍼지게 되어 국내의 나리킨들조차 따라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몇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우수한 개체들만 진상했음은 물론이다. 




 

 실장산업이 유럽과 일본 부유층의 전유물로만 남은것도 아니었다. 도입 초기부터 다윈주의의 강력한 증거물로 마르크스주의와 니체의 실증주의파의 득세를 이끌어 내었으며, 여기에 프로이트와 비트겐슈타인으로 대표되는 인본주의적 철학의 전파로 실장석 사육은 서민층은 물론 북미를 비롯한 신세계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된다. 






(비트겐슈타인 평생에 걸쳐 큰 영향을 남긴 그의 여동생의 애완자실장 T. 비트겐슈타인에겐 학대파 의혹이 있다)



 이중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는 실장석과 언어학적 연관관계를 탐구하여 인간의 확실성을 고찰해내었고 이는 정신분석학, 기호학(記號學)의 시발과 모더니즘(modernism)의 촉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시기 문학계에서도 마술적 리얼리즘 사조를 만들어내, 대표적으로 장폴 사르트르의 <파리떼> 카뮈의 <페스트>, 이상의 시 <오감도>, 후대의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 등이 실장붐의 영향을 받아 나온 작품들이다.


 요컨대 중세 기독교 사회에 의해 절멸되었던 실장석이 도리어 기독교 철학을 끝장내버린 셈이었다.










3. 2차대전기의 실장석



(금주법시대 시칠리아계 마피아들은 술을 숨기기 위해 어린실장석을 사용했다)






 성세에 끝을 이를것만 같던 실장산업도 193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사양길에 들어선다.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나리킨들의 구매력이 이전과 같지 않았던 점과, 훗카이도와 사할린에서 얼마든지 사냥해서 충당할수 있는 산실장들의 존재와, 실장흥업을 흉내낸 경쟁사들이 난립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주에서는 범죄에 사용되는 예도 있었다.




(들실장의 난립)



 경쟁사들의 난립은 세대주기가 짧은 실장석 산업에 있어서 결정타였다. 이른바 버려진 사육실장이 야생화하여 "들실장"이 생겨난것도 이시기를 즈음해서다. 일부는 산으로 들어가 본토의 산실장이 되었으나, 대다수 실장석들은 들실장화하여 도시민들의 골칫덩이가 되었다. 




 





(적응에 성공한 산실장)










 긴 불황과 중일전쟁의 여파로 식량난에 빠진 군부정권은 실장석을 위시로 한 식량증산책을 내놓는다. 이에 극렬하게 반대한 토시아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군부정권은 실장흥업의 후계자이자 토시아키의 손자 아키토시를 강제징집해버렸다. 










 1942년 관동군의 방역급수대(소위 731부대)에 배치받아 연구에 매진하던 아키토시는 기존의 식용실장석을 개량해 출산석을 내놓는다. 이미 할아버지 토시아키로부터 강제출산의 원리를 알고 있던 아키토시는 몇세대의 교배 끝에 강제출산시 자체 생물가(Biological value) 상당부분을 배출하는 종자 출산석들을 개량해낸것이다. 각 중대에 배속된 출산석들은 기존의 실장석 병량(兵糧)보다 더 유연한 전술적 운영이 가능하게 했다. 



 효과에 고무된 대본영은 임팔작전에 투입시키기 위해 준비시켰으나 "일본군은 초식동물이다" 라며 거부한 무다구치 렌야(牟田口 廉也) 중장의 거부로 작전투입은 무산되버렸다. 그러나 각지의 옥쇄(玉碎)전에서 유효한 식량병기로 활약하며 일본군의 저항에 도움을 주었으나, 그러나 이는 일본군의 고통시간을 더 늘려놓는 결과로 이어졌다.






("마 니 실장슥 스까 무봤나?")

 (말린 실장아귀를 들고 굶주린 ANZAC군을 약올리는 일본군 장교)



" 실장석을 먹고 배불러있던 일본군은 백병전에 있어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자신감에 차있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베르됭 전투에서처럼요.결과도 베르됭 전투와 같았습니다. 대학살이었죠. 일본 병사들은 테나루강 전투에서 몰살됐습니다." 


- 미해병대 2사단 에드워드 엘런 중위의 회고록 -


 

 



4. 전후의 실장석 





(아키토시가 남방에서 연구한 코모도 왕도마뱀: 실장석과 마찬가지로 총배설강을 갖고 있고, 단성생식을 하는것으로 알려져있다)



 나나시 아키토시는 남방총군 소속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종전을 맞았다. 이시기에 코모도 왕도마뱀을 포함한 여러 동식물들을 연구했다는 기록이 있다. 종전직후 전범으로 기소되어 15년 형기를 채우고 1960년 출소, 쪼그라든 실장흥업사의 살림을 챙겨 후타바군(双葉郡)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쿄 동북 180km 지점에 위치한 후타바군)




 후쿠시마(福島)현의 후타바군(双葉郡)은 실장석 연구에 있어 여러모로 유리한 입지를 갖추고 있었다. 일단 간토평야 바로 북쪽 도쿄근방에 위치해 있어 유통에 있어서 과거의 훗카이도(北海道) 토카치(十勝平)보다 용이한 측면이 있었으며, 서쪽 오우산맥에 가득한 질좋은 산실장들 덕택에 부족분의 공급도 빨랐다. 






 게다가 군내에 위치한 원자력 발전 시설로부터 방사선 물질을 얻어서 실장석 개량에 썼다고 한다. 원자력 관련법령을 싸그리 무시한채 개인이 이용한 이 일련의 행동들에 대해, 나나시 아키토시가 관동군 방역급수대, 소위 731부대에 근무하면서 얻게된 정보들을 토대로 자민당 유력인사들의 약점을 잡고 있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다.










(2004년 제작된 로젠사의 로고)



 아키토시가 이끄는 실장흥업은 출산석을 기반으로 한 산업용 실장석들은 물론, 실장관련 상품들을 개발해내며 과거의 성세 이상을 구축했고, 1978년엔 히타치에 이은 니케이 시가총액 2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1992년 로첸 마이텐의 발견을 토대로 학계에까지 영향력을 뻗치며 기반을 다진후, 현사장 쿠와타니 나츠코(桑谷 夏子)에 의해 2004년 사명을 로젠(Rozen)사로 변경해 독점사로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REFERENCE>>


1.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jissou Empire - Edward Gibbon 


2. Parthenogenesis and Falsit autosome - Steve A.Ram


3. シャーマンキング - 武井宏之.


4. ロㅡゼンメイデン - 千道 万里, えばら渋子

 

5. Collapse: How jissou Choose to Fail or Succeed – Jared Diamond


6. ロㅡゼンメイデン オーベルテューレ - 松尾衡


7. ゴールデンカムイ - 野田サトル


8. Guns, Germs, Steel, and Jissou - Jared Diamond


9. 禁じられた遊び,透明シェルター  ALI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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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별페이토 | 작성시간 16.07.07 진짜 미친 퀄리티의 대체역사데스
  • 작성자갓기루 | 작성시간 16.07.07 평행세계 스캐일보소...
  • 작성자테프프프 | 작성시간 16.07.07 ㄷㄷㄷ
  • 작성자tkkkdd11w | 작성시간 16.07.11 정성에 추천.
  • 작성자rksid | 작성시간 17.02.07 마술적 리얼리즘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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