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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스크립트/ 장편

길을 걷는 실장석 (2)

작성자weaio|작성시간17.08.03|조회수6,447 목록 댓글 9


"뎃데로~ 뎃테로게~"

인적 없는 산 속, 개울을 끼고 있는 비탈진 풀숲에서 실장석 수십 마리의 태교 소리가 꽥꽥 울려퍼진다.

 

"뎃데로게~ 뎃데로게~

삶은 힘든데스. 행복은 없는데스. 죽어라고 노력해도 소용 없는데스.

세상에는 무서운 것들이 가득한데스. 모두들 우리들을 죽이지 못해 안달인데스.

짐승들은 무서운데스. 우리들을 꿀꺽 잡아먹는데스.

닌겐은 더욱 무서운데스. 우리를 죽지도 못하게 해놓고 영원히 괴롭히는데스.

닌겐은 강한데스. 닌겐은 산과 강을 만들고 없애는데스. 닌겐과 얽히면 안되는데스.

실장석으로 태어나는건 불행인데스.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은데스."

'(파킨)' '(파킨)' '(파킨)'

어지간한 산실장도 혀를 찰 만큼 절망적인 태교에 좌절하던 태아들이 뱃속에서 죽어가지만, 친실장들은 아랑곳않고 노래한다.

"쓸모없는 자는 죽는데스. 약한 자도 죽는데스.

분충은 최악인데스. 모두 마마가 죽여서 먹는데스.

가장 강하고 현명한 자만이 마마의 자인데스.

행복은 없는데스. 꿈도 꾸지 마는데스.

하지만 언젠가는 모두모두 행복해지리란 것을 믿는데스.“

‘(파킨)’ ‘(파킨)’

마지막 파킨 소리와 동시에 친실장의 두 눈이 적록으로 돌아간다.

"이번 임신도 실패인데스..."

매끈한 대머리를 긁으며 투덜대며 일어나, 풀숲을 들추고 굴로 들어가는 친실장.

"하지만 쓸모없는 자를 낳을 수는 없는데스. 내일 꽃을 꺾어다 다시 해 보는데스.“

 

한편, 냇가에서는 두 눈이 빨개진 실장석 하나가 한창 출산중이다. 얕은 개울가에 둥글게 자갈을 쌓아 만든 출산소는 자들이 익사하거나 떠내려갈 염려도 없으며, 흐르는 강물이 점막을 저절로 씻어 주므로 아주 편리하다.

"텟테레~" "텟테레~"

태어난 자는 모두 넷. 자실장이 셋에 엄지가 하나다.

"테츙~ 마마인테치? 반가운테치! 낳아주어서 고마운테치! 테츄웅~"

"테퍄퍄퍄! 마마가 독라인테치! 별 거지같은 노래로 가오잡더니 알고보니 그냥 병신 독라였다테치!"

"레에에... 오네챠. 그런 말하면 안되는레치... 마마, 와타시는 엄지로 태어나 죄송한레치. 하지만 와타시도 노력해 반드시 도움이 되겠는레츄!"

친실장의 미간이 꿈틀댄다.

'이번 자들은 파킨하지 않고 여럿 살아남아 기대했더니, 아첨에 분충에 엄지에...이번 임신도 아무래도 실패인데스...'

"똥노예가 뭐하냐테치! 독라는 빨리 고귀한 와타시에게"

.

내리찍은 친실장의 주먹에 분충의 머리가 봉선화처럼 터져나간다. 거들먹대던 분충의 몸뚱이가 덜컥 멈추더니 찰박 하고 엎어졌다. 흘러나온 피와 뇌가 맑은 물에 서서히 퍼져 나간다.

"테쨔아아!"

"...레치..."

쓰러져 꿈틀대는 자매의 모습에 엄지와 자실장이 비명을 지른다. 순백의 팬티는 순식간에 녹색으로 팽팽히 부풀었다.

"..마마..., 와타시는 저런 분충이 아닌테츄웅~ 테츙~ 테벡."

"치프프픗~ 마마 간지러운레치~ 할짝할짝 더 해주는레치~ 치벡."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어미의 손가락이 자신들을 향하자, 덜덜 떨다가 아첨하는 자실장과 행복회로에 빠져든 엄지. 둘의 머리도 친실장의 손에 덧없이 똑똑 따여 입으로 들어갔다.

방금 낳은 자들의 머리를 아작아작 씹으며 친실장은 마지막 남은 자실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자실장은 도망치지도, 빵콘하지도 않고 무표정하게 어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마에는 와타시가 무섭지 않은데스?"

"쓸모없는 자는 태어나자마자 죽는 편이 낫다고 마마가 말한테치."

"그러는 오마에는 지금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스?"

"와타시가 쓸모 있다면 마마가 지금 죽이지 않을 것인테치. 와타시가 쓸모없다면 여기서 살아도 결국엔 죽게 되는테치."

친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팬티를 추켜올렸다. 두 자실장의 시체를 양팔에 들고, 엄지의 시체를 턱짓으로 가리키는 친실장.

"오마에는 합격인데스. 저걸 들고 따라오는데스.“

 

이 산실장 마을은 30여 마리의 성체로 구성된 대규모의 군락이다. 개울 근처 비탈, 수십 평 면적에 걸친 굴들이 이들의 거주지다.

각각의 성체는 자신만의 굴을 가졌다. 비가 내려도 물이 흘러들지 않도록 경사진 입구 너머에는 자그마한 토굴이 있고, 그 안에는 낙엽 더미와 돌, 나뭇가지 등 조잡한 생활용품이 보관되어 있다. 더 깊숙한 곳에는 습기 없는 곳에 꽁꽁 숨겨 놓은 보존식이 보인다.

토굴은 땅굴망을 통해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눈이나 토사로 출구가 막혔을 때를 위한 비상 통로다. 어둠 속에서 볼 수 없는 실장석의 한계 때문에 개미집처럼 복잡한 굴을 팔수는 없었지만, 굴과 굴을 잇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일반적인 산실장 무리에서 이런 습관은 반드시 파멸적인 결말을 맞는다. 운 좋게 분충성을 숨겼건, 혹은 개념에서 타락했건, 분충이 반드시 발생해 비축분을 좀먹어 들어가고, 점점 더 많은 분충이 생겨나고, 끝내 무리 전체가 폭삭 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마을은 편집증적인 세뇌와 솎아내기를 통해 그런 사고를 미연에 방지했다.

"행복은 없다." 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뱃속에서부터 주입된 믿음이었다.

이들은 모두 독라였다. 머리카락과 옷이 있는 행복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밥보다 똥을 먹는 날이 더 많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복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솎아낸 자식을 거리낌없이 죽이고 먹었다. 자식을 갖는 행복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충은 즉시 죽였다. 어리숙한 자식도 죽였다. 평범한 자식도 죽였다. 가장 강하고 현명한 자식만을 키웠다. 성체로 자라나는 개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평생 하나의 자식도 키워내지 못하는 개체도 있었다.

철저한 선별로 인해 무리는 극도로 느리며 동시에 안정적으로 자라났다. 수십 년 동안 멸절되지 않고 유지되는 산실장 무리는 드물다. 수십 년 동안 두어 번의 분가밖에 거치지 않으면서 30마리밖에 되지 않는,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30마리나 되는 개체수를 갖고 유지되는 무리는 더욱 드물다. 지금까지 솎아내진 수만 마리 자들의 목숨과 스스로 노예처럼 살다 죽어온 수천 마리 실장석들의 희생이 그 밑거름이었다.

다른 실장석이 보면 필시 불행하다고 조롱받을 삶이다. 그렇게까지 해서 사는 의미가 무엇이 있냐고.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불행한 줄도 몰랐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있듯이, 행복을 맛본 자만이 불행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노력하면 반드시 행복해지는데스." 앵무새처럼 중얼대지만 정작 행복이 무엇인지도, 삶의 목적도 알지 못하는 실장석들.

 

방금 낳은 자식과 함께 언덕을 올라 집으로 돌아가는 친실장 뒤편으로, 먹이를 구하러 마을을 나서는 네 마리의 성체가 보인다. 온몸에 진흙과 푸성귀를 덕지덕지 붙여 냄새를 숨긴 이들의 발걸음은 제법 능숙하다.

산에서 먹이를 구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어설픈 여럿이 꾸물대다 죽어나가는 것 보다는 노련한 소수가 재빨리 다녀오는 편이 낫다. 마을 근처에서 풀 열매를 주워오는 정도의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멀리까지 돌아다니며 먹이를 모으고 작은 동물을 잡아 오는 것은 재빠른 실장석들로만 구성된 이들의 몫이었다. 발이 빠른 개체는 사냥을, 힘이 좋은 개체는 굴 파기를, 손재주가 좋은 개체는 도구 만들기를. 분업은 마을을 지금껏 유지해 준 비결이다.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 다니며 조심스럽게 숲 속으로 향하는 네 마리 실장석들은 저마다 초록색 천을 뒤집어쓰고 있다. 솎아진 자들의 옷을 이어 붙여 만든 이 망토는 풀숲에서 훌륭한 보호색의 역할을 한다. 한 손에는 나무 막대기를, 한 손에는 보따리로 쓸 또 다른 천 조각을 쥔 채 네 마리는 살금살금 걸어간다.

마을의 모습은 풀숲과 나무에 가려 금세 사라지고, 적막한 숲 속에는 실장석의 걸음 소리만이 자박자박 울린다. 멀리서 부스럭 소리가 날 때마다 움찔대며 경계하지만, 바람 소리라 생각했는지 잠시 후 슬그머니 걸음을 옮기는 실장석들.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푸드덕 하는 날갯짓 소리가 들리자 네 마리는 일제히 망토로 몸을 덮고 바짝 엎드려 미동도 하지 않았다. 까마귀 정도의 새가 마음만 먹으면 성체 하나를 죽이는 것은 순식간이다. 다행히 새는 실장석들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날갯짓 소리는 그대로 멀어져 가고, 조심스럽게 일어난 실장석들은 다시 먹이를 찾아 숲으로 숲으로 걸어 들어간다.

 

덤불을 가르며 맨 선두에서 가던 실장석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우뚝 멈춰 선다.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가 풀줄기를 헤치자, 굴에서 고개를 내밀고 코를 킁킁대며 바깥의 동태를 살피는 토끼의 모습이 보였다. 토끼와 이 실장석의 크기 차이는 큰 개와 인간 정도. 싸워 이기기는 어렵지만, 만약 굴 안에 새끼 토끼가 있다면 손쉽게 고기를 얻을 수 있다.

위험이 없다고 판단한 토끼는 굴 밖으로 나와 푸성귀를 뜯어먹기 시작한다. 입구 주위의 풀은 다 뜯어먹어 버렸는지 굴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다. 네 마리 실장석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살금살금 접근한다. 이상한 낌새를 챈 토끼가 귀를 쫑긋 세우더니 굴로 뛰어 돌아가려는 찰나, 가장 날렵한 실장석이 재빨리 몸을 날려 굴을 틀어막았다. 그 사이 다른 세 마리는 후다닥 달려 나와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고함으로 토끼를 위협한다.

데아아!” “데즈우우우!” “데샤앗!”

세 마리에 둘러싸여 불리한 처지에 놓인 토끼는 할 수 없이 새끼를 포기하고 달아난다.

가장 몸집이 작은 실장석이 비좁은 굴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깜깜한 어둠 속으로 손을 뻗자 꼼지락거리는 따뜻한 감촉이 느껴진다. 있다. 태어난 지 며칠 안 된 새끼들이다. 분홍빛 새끼토끼들을 한 마리씩 집어 들어 굴 밖으로 꺼내자 밖에서 기다리던 실장석들이 받아 들어 이빨로 숨통을 끊는다.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 새. 젖은 흙 속의 지렁이. 그늘에서 졸고 있는 도마뱀. 실장석의 사냥은 이렇게 연약한 개체를 기습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운 좋은 수확 덕분에 오늘은 해 지기 전에 마을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네 마리 실장석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보따리에 고이 담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집으로 향하던 친실장과 자실장에게 시선을 다시 옮겨 보자.

굴에 도착한 친실장은 곧바로 세 시체의 옷과 털을 벗겨냈다. 고기는 볕 잘 드는 곳에 널고, 머리털은 잠자리에 깔고, 옷은 구석에 모아둔다. 실장석의 옷은 일종의 살아 있는 세포 조직이다. 벗겨내고 오래 지나면 세포는 사멸해 버리지만, 세포가 살아 있을 때 두 장을 겹쳐 돌로 며칠 눌러 놓으면 섬유끼리 단단히 얽혀들어 연결된다. 먹이를 구하던 실장석이 두르던 망토, 물건을 옮기는 보따리, 추운 밤에 덮을 이불. 모두 이렇게 솎아낸 자들의 옷감으로 만든 물건들이다.

 

분류를 마친 친실장이 자실장을 붙들고 향한 곳은 마을 한복판의 오래된 굴. 장로의 집이다. 굴 안에 앉아 돌조각을 깨뜨리던 장로가 모녀의 모습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 태어난 자인데스."

장로는 말없이 자실장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이곳저곳을 만져 보고 햇빛에 얼굴을 비춰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뼈도 굵고 눈빛도 독한 것이 쓸 만해 보이는데스."

장로는 굴로 돌아가더니, 집 구석에 가지런히 놓인 도구 중 날카로운 돌멩이를 골라 들고 나왔다. 자갈돌을 깨뜨리고 갈아 만든 돌칼이다.

자실장의 손끝을 꾹꾹 눌러보던 장로는 별안간 말랑한 살을 세로로 길게 4번 갈랐다.

"...“

 

고래의 지느러미 안에 퇴화한 손가락뼈가 남아 있듯이, 실장석의 뭉툭한 손 안에도 다섯 개의 손가락뼈가 남아 있다. 다만 짧게 돌출된 엄지손가락을 뺀 나머지 손가락들은 한 덩어리로 붙어 있을 뿐이다. 융합된 4개의 손가락은 근육의 기능이 미약하게 남아있어, 벙어리장갑을 낀 것처럼 물건을 감싸 쥐거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조잡한 구조로 인간의 손처럼 정교한 움직임을 보이기는 역부족이다. 장로는 그 손가락 사이를 째서 5개의 손가락을 만들어 준 것이다.

이를 악무는 자실장의 모습에 개의치 않고 반대쪽 손도 똑같이 한 뒤, 손가락이 도로 붙지 않도록 사이사이에 나뭇잎을 끼우는 장로.

다 된데스. 조금 있으면 다 아물 것인데스.”

 

아무 들실장이나 잡아다 손가락을 만들어 주더라도 이를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뭉툭한 손으로 살아온 삶이 이미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산실장들은 자실장이 태어난 바로 그날에 손가락을 만들어 주었다. 마마의 마마, 그 마마, 그 마마의 훨씬 이전부터 내려온 삶의 지혜였다.

 

손가락의 존재는 이 실장석들에게 큰 장점을 제공했다. 바로 도구를 만들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건을 단단히 움켜쥘 수 있게 된 이들은, 돌을 부딪쳐 떼어내고 갈아내 원시적인 석기를 만들었다. 무딘 돌칼을 쥔 실장석들은 건초를 끊어오고, 풀 열매를 수확해 올 수 있었다. 열매가 익어 떨어지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자, 구할 수 있는 먹이가 몇 배로 늘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손으로 자갈을 골라내고, 넓적한 나무껍질을 삽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이 실장석들은 평범한 산실장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효율적으로 굴을 팔 수 있게 되었다.

 

땅굴로 얼기설기 연결된 마을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커다란 방이 하나 있었다. 위험이 닥쳤을 때 모두가 대피하기 위한 대피굴이다.

곰 같은 맹수가 절멸한지 오래인 이 근방에서, 멧돼지는 인간에게도 실장석에게도 무서운 짐승이다. 잦은 동족식과 식분으로 실장취가 축적되어 끔찍한 맛이 나는 실장석의 고기는 멧돼지가 즐겨먹는 식량은 아니다. 하지만 실장석들이 모아놓은 먹이만은 예외였다. 산실장의 보금자리를 뒤지면 약간의 수고만으로 도토리, 말린 열매, 고기 등 맛좋은 식량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실장석들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애써 모아 놓은 월동식을 털리는 것은 물론, 난폭하게 땅을 헤집는 통에 굴 속에 숨어있던 실장석까지 덤으로 갈려나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 실장석들은 위기가 닥쳤을 때 대피하기 위해, 땅 속 깊숙한 곳에 커다란 굴을 만들었다. 지난 수십년 간 수많은 실장석들이 틈날 때마다 허리가 부러지도록 파낸 이 굴은 사람 키보다 깊은 곳에 있고, 크기는 집채만 해 모든 성체를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방공호였으며, 무성한 나무뿌리 사이에 위치해 무너질 염려도 없었다.

대피굴은 보존식 저장고가 가득 찼을 때 남는 먹이를 보관하는 역할도 겸했다. 사실 각자의 집에 보관한 식량은 침입자의 주의를 돌리기 위한 일종의 미끼일 뿐이고, 실장석들의 월동을 책임지는 식량은 대부분 이 방공호에 저장된 것들이다. 얕은 곳에 묻힌 먹이에 정신이 팔린 멧돼지들은 악취가 무럭무럭 피어나는 깊숙한 굴 속의 월동식은 눈치채지 못했다. 덕분에 이 실장석들은 매년 멧돼지의 습격에 시달리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실장석들이 천적으로부터 마냥 도망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한참 분주한 실장석들을 노려보는 구슬 같은 두 눈이 수풀 속에서 반짝 빛난다. 코를 킁킁대며 기회를 엿보던 족제비의 기다란 몸통이 실장석의 굴 속으로 재빨리 사라지고, 잠시 후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데샤아악! 길쭉한 녀석이 땅굴로 들어온데스!”

모두 뾰족이를 들고 모이는데스!"

족제비같이 작은 육식동물은 산실장이 파놓은 굴을 따라 침입해 깊숙한 곳에 있는 식량도 털어먹고 자들을 물어가는 무서운 적이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는 오히려 제 발로 함정에 들어온 사냥감에 불과했다. 마치 맹수를 사냥하는 토인처럼, 이 실장석들은 오랜 세월 끝에 마침내 포식자를 격퇴하는 지혜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포식자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는 덩치였다. 수십 세대 동안 가장 튼튼한 자식만을 선별해온 덕분에 이들은 평범한 실장석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컸고, 족제비나 너구리같은 작은 동물과 맞먹을 수 있을만한 덩치를 갖게 되었다.

두 번째는 도구를 활용하는 지능이었다. 이 실장석들이 하루 일과 중 가장 공들이는 것은 나뭇가지를 주워 뾰족하게 갈아 꼬챙이를 만드는 일이었다. 튼튼하고 적당한 것은 무기로 사용하고, 작은 것은 굴 벽에 비스듬히 꽂아두어 함정을 만들었다.

실장석이 아무리 달려봐야 야생동물을 쫓아가서 싸워 이기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먹이 냄새를 맡고 함정으로 돌진해 들어온 동물들은 제풀에 날뛰다가 벽에 박힌 나무창에 찔리고 찢겨 손쉬운 사냥감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는 협동심이었다.

 

"데뵤오옥!"

"덩치가 쓰러진데스! 길쭉한 녀석이 창고로 가는데스!"

"와타시가 어떻게든 막아 보는데스. 오마에는 덩치를 구하는데스!"

원래 산실장은 동료를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거기서 한 술 더 떠, 이 실장석들은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무리를 위해 행동했다. 한둘만 살아남아도 금세 무리를 복구할 수 있는 산실장과 달리, 자를 극도로 적게 낳아 적게 기르는 이들은 하나가 희생해 전체를 구하지 못하면 대가 끊어지는 건 순식간이기 때문이다.

온몸으로 통로를 틀어막고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진 실장석. 하지만 덕분에 그 사이 다른 실장석들은 족제비를 포위할 수 있었다. 성체 하나만으로도 꽉 차는 좁은 굴 앞뒤에서 꼬챙이를 든 실장석이 줄지어 몰려와 차례대로 꼬챙이를 휘두른다.

"죽는데스! 죽으라는데스!"

"눈을 노리는데스, , 눈을! 르아아아!"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찌르기나 하는데샤!"

하나가 쓰러지면 곧바로 뒤의 실장석이 나서 공격한다. 통로가 좁기에 족제비도 실장석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다. 절박하게 날뛰던 족제비는 점점 움직임이 둔해지더니, 끝내 축축한 눈을 부릅뜬 채 숨이 멎었다.

쓰러진 동료는 잘 간호해서 살려내면 된다. 자신이 쓰러져도 동료가 보살펴 줄 것을 알기에 망설임 없이 전진한다. 덕분에 이들은 혼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족제비 격퇴를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었다.

 

물론 이들이 이런 장점을 거저 얻은 것은 아니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모든 자실장은 성체가 될 때까지 힘든 단련을 거쳐야 했다.

"......테치...테챠..."

"거기 오마에! 죽고 싶지 않으면 계속 달리는데샤!"

"테에...테햐..."

마을 아래쪽 시냇가 어귀의 공터. 조그만 자실장 십여 마리가 장로의 감시 하에 원을 그리며 달리고 있다.

"똑바로 뛰라는데스! 죽고 싶은데스까?"

"...테힉...테햐아아! 테챠아! 이건 미친짓인테치!"

계속 뒤쳐지던 자실장이 주저앉아 똥을 싸며 악을 쓰기 시작한다. 장로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목 놓아 소리 지른다. 다른 자실장들도 달리기를 하나둘씩 멈추고 엉거주춤 모여들어 이 광경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너무한테치! 심하다테치! 하루종일 미친듯이 달리기만 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거냐테치! 죽어라 뛰고서 먹는 건 겨우 운치인테치! 우마우마한 과일과 고기를 내놓아라테치!"

"오마에. 벌써 잊은데스까? 실장석은 먹은 영양이 도로 운치로 나오는데스. 운치를 먹지 않으면..."

"그딴 거 모르는테치! 영양이니 뭐니 그건 또 뭐냐테치! 말을 알아듣게 해라데치! 와타시는 그런건 몰라도 되는테챠!"

"맞는데스. 오마에는 이제 그런 걸 영영 알 필요가 없는데스."

"?"

장로는 떼쓰던 자실장의 머리통을 붙잡고 비틀기 시작했다. 팔다리를 버둥대며 소리를 지르는 자실장의 눈알이 점점 불거져 나오고, 고통에 혀를 깨문 입에서는 피와 침이 줄줄 흐른다. 녹색 얼룩이 번져나가는 팬티는 서서히 부풀어, 가랑이 사이로 똥을 삐직삐직 흘려보냈다. 마침내 우두둑 소리와 함께, 힘줄과 척추가 대롱대는 자실장의 머리가 몸통에서 처참히 뽑혀 나왔다. 장로는 머리통을 휙 던진 다음 빽 소리질렀다.

"무슨 구경났다고 쳐다보는데스! 당장 마저 달리는데샤!"

", , 하이테치!"

", 테챠!"

기겁을 하며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 자실장들. 그 와중에 장로의 눈은 한 자실장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조금 전의 소란에도 꿈쩍 않고 묵묵히 달리던 녀석이다.

과연 영특한 자인데스. 혹시 저 자라면..”.

 

자실장들은 태어나자마자 매일 이렇게 훈련받았고, 조금 더 자라면 여러 도구를 다루는 법도 배웠다. 공터를 달리고, 돌멩이를 들고 끌고 하는 이들의 모습은 사람과 꽤 흡사하다. 멀고 먼 옛날, 이 마을이 세워지기도 전, 마마의 마마의 수많은 위에 있는 한 마마가 산에 올라온 인간이 운동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해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장석 특유의 재생력과 넉넉한 마을의 형편 덕분에, 충분한 영양이 공급되는 환경에서 자실장들의 근력은 빠르게 증가해 들실장은 물론 어지간한 산실장보다도 훨씬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자실장의 교육과 지식 전수는 친실장의 몫이다. 매일 밤, 친실장들은 자들에게 무리의 규칙과 지식, 지혜를 가르쳤다.

"마마, 닌겐은 어떤 동물인테치?"

"닌겐은 우리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훨씬 커다란데스. 갓 태어난 새끼 닌겐도 어른 실장석과 비슷하고, 어른 닌겐과 비교하면 우리는 무릎까지밖에 못 오는데스."

"테에에... 그러면 새끼 닌겐은 사냥해서 먹을 수 있는테치?"

"미친소리데샤! 절대 닌겐과 얽혀서는 안되는데스. 닌겐은 우리들이 가만히 있어도 아무 이유 없이 우리를 죽이는데스. 그런데 우리가 닌겐을 해치는 날에는... 닌겐이 마음만 먹으면 온 세상의 실장석이 그날로 죽을 수도 있는데스야."

"테에... 그러는 마마는 닌겐을 본 적이 있는테치? 닌겐이 아무리 대단해도 튼튼한 집에 잘 숨으면 분명 안전하지 않은테치?"

"마마도 사실 닌겐을 직접 본 적은 없는데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한데스. 닌겐의 힘과 닌겐의 생각은 실장석이 알 수 없는데스. 눈이 오고 비가 오는 것처럼, 닌겐은 그저 닌겐일 뿐인데스. 그러니 오마에는 절대로 닌겐에게 관심도 갖지 말고, 얽힐 생각도 하지 말고 사는데스."

"! 닌겐을 본적도 없으면서 문자 쓰지 마는테샤! 와타시는 강한 어른이 되는테치. 와타시의 강함으로 닌겐을 노예로 만들고 그 대단하다는 힘을 와타시를 위해 쓰게 하는테치!"

친실장은 나직히 한숨을 쉬며 침대 옆에 놓인 나무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 해가 지나며 이렇게 많은 자실장들이 죽어갔다. 태어나자마자 솎아내진 자. 고됨을 견디지 못하고 파킨한 자. 분충성을 드러내 죽임당한 자. 약하거나 멍청한 자. 훈련에서 낙오한 자...

그 해 봄부터 여름까지 잉태된 새끼 수천 마리, 그 중 파킨하지 않고 태어난 새끼 수백 마리 중 이듬해 봄까지 살아남아 성체가 된 자는 단 넷에 불과했다. 아니, 넷이나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맞겠다. 단 하나의 새끼도 살아남지 못하는 해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넷은 지금 장로와 다른 성체들 앞에 나란히 서 있다. 무리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마지막 시험이다.

 

"그럼 오마에들이 배운 것을 말해보는데스."

장로가 입을 열자 네 실장석은 약속이나 한 듯이 하나씩 대답했다.

"실장석은 약한데스. 실장석으로 태어난 우리는 약할 수 밖에 없는데스."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장석을 넘어야 하는 데스."

"실장석이 탐내는 것이 실장석을 약하게 하는 데스. 탐내는 마음을 버려야 하는데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달라져야 하는데스."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금 그 말대로 해 보는데스."

 

"머리카락이 있으면 벌레가 꼬이고, 덤불에서 나뭇가지에 걸리는데스. 와타시는 머리카락을 버리는데스."

네 마리는 두건을 벗고 앞뒷머리를 뽑아 발밑에 내려놓았다.

"옷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고, 움직이기도 불편한데스. 와타시는 옷을 버리는데스."

네 마리는 팬티만 남기고 옷을 벗어 북 찢고 두건, 신발과 함께 머리카락 옆에 두었다.

"입은 다물 수 없어서 계속 목이 마르고 흙먼지가 들어오는데스. 와타시는 입을 가리는데스."

네 마리는 뾰족한 나무로 앞치마의 귀퉁이에 구멍을 내고, 벗어낸 리본을 끼워서 마스크를 만들어 귀에 걸었다.

 

"잘한데스. 이제 마지막인데스."

"자를 아끼는 마음은 가장 무서운 마음인데스. 와타시는 자를 버리는데스."

네 마리는 손바닥에 피를 내서 왼쪽 눈에 발랐다.

"텟테레~" "텟테레~" “텟테레~” “텟테레~”

"마마 반가운레츄~. 어서 끈적끈적 핥짝핥짝 해주세요레치!"

"마마 좋아좋아레치! 세상 넓어넓어레치! 신기하다레치!"

영양 상태가 좋아서 그런지, 꾸룩거리는 배에서 태어난 것은 구더기가 아니라 엄지실장이다. 붉게 물든 눈을 닦아낸 실장석들은 점막에 덮인 자신의 자를 집어 들어 빨래 짜듯 비틀기 시작했다.

"마마가 할짝할짝 해주는레치~ 할짝할 치벳-"

"...마마 저 아줌마 무서운레치! 무서운레치! 치벳-"

"..레츙~ 마마는 와타시를 아야아야하게 하지 않는레 치벳-"

빈 깡통이 찌그러지듯이, 엄지실장들은 바람 빠지는 소리만을 토하고 핏덩이로 변했다. 점막에 싸인 채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태어난 엄지들은 점막에 싸인 채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죽었다.

 

"레에...레치... 마마?"

하지만 마지막 실장석은 자식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눈물을 흘리며 천천히 점막을 핥아주기 시작했다.

"오로롱... 장로사마... 와타시는 차마 자를 죽일 수 없는데스. 쓸모없는 엄지이지만 그래도 와타시의 사랑스러운 자인데스..."

변명하듯 늘어놓는 넋두리에도 불구하고 주위에는 싸늘한 침묵만이 감돈다.

"이렇게 귀여운 자인데스... 차마 와타시를 받아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는데스. 이 아이와 함께 무리를 멀리 떠나 살겠는

더듬더듬 말하던 실장석은 헉 소리를 내고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순식간에 날아든 발길질에 명치를 부여잡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주변의 실장석이 약속이나 한 듯 우르르 물려들어 팔다리를 붙잡고, 장로가 나무창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 장로사마! 제발!”

장로는 무표정하게 터벅터벅 걸어왔다.

자만이라도! 자만이라도 살려 주시는데스!”

코앞까지 다가온 장로는 조용히 가슴팍에 나무창을 겨눴다. 체념한 실장석이 피눈물을 흘리며 자를 향해 외쳤다.

도망치는데스! 어서 도망치는데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는데스! 도망치고 살아남아서 온 세상을 오마에의 자로

가슴에 꽂힌 장로의 창이 위석을 부수자 황급히 내뱉던 실장석의 목소리가 딱 멈췄다. 두 눈이 급속도로 색깔을 잃고, 두어 번 뻐끔거리던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흐르며 실장석은 절명했다.

공포에 질려 주저앉은 채 뒤로 기어가던 엄지는 영특했다. 어미의 말을 듣자마자 냉큼 일어나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마마, 기억할게요레치!”

눈물을 흩뿌리며 엄지는 외쳤다. 동그란 발자국 좌우로 적록의 눈물 자국이 점점이 찍힌다.

반드시 온 세상을 와타시의 자로 가득 채워 보일게요레치!”

말을 맺고 정확히 세 걸음 후, 엄지는 찌부러졌다. 도망가는 엄지를 벌레처럼 밟아 죽인 건 야속하게도 방금 죽은 실장석의 마마, 엄지의 할머니였다.

 

잠깐의 소동이 끝난 후, 세 마리 실장석은 장로 앞에 다시 섰다. 마지막 솎아내기가 끝났다. 남은 것은 실장석의 특징과 본능을 모두 잃은, 실장석이지만 실장석이 아닌 세 마리의 성체뿐이다.

오마에들은 합격인데스.”

세 실장석을 향해 장로가 자애롭게 말했다.

 

"어엿한 어른이 되었으니 이제 오마에들도 마을을 위해 일하는데스.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말해보는데스.“

실장석 한 마리가 재빠르게 말했다.

"와타시는 밥을 구하는 일을 하고 싶은데스."

"그렇다면 오마에는 내일부터 밥을 구해오는 일을 하는데스. 오마에의 이름은 이제부터 빠른발인데스.“

구성원 하나하나가 특별하기에, 성체가 된 자들에게는 조잡한 이름이 주어졌다.

"와타시는 굴을 파고 도구를 만들고 싶은데스."

"그렇다면 바위손에게 가서 일을 거드는데스. 오마에의 이름은 힘센팔인데스."

장로의 눈은 마지막 실장석에게 향했다. 자실장 때부터 눈여겨보던 실장석, 그리고 바로 지금 토시아키의 앞에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는 독라였다.

"오마에는 무슨 일을 하고싶은데스까?"

"...와타시는 길실장이 되고싶은데스.“

 

무리가 웅성거렸다.

길실장. 길을 떠도는 실장석. 누구보다도 강하며 영리한 자만이 길실장이 될 수 있었다. 길실장은 지식을 모으고 전하는 전령이며, 새로운 마을을 세우는 개척자였다.

오랜 옛날 분가하여 옆 산에 살고 있는 이웃 마을과, 그보단 최근이지만 역시 먼 옛날에 분가했다가 연락이 끊어졌다는 또 다른 마을. 이 무리가 알고 있는 이웃은 이 둘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들과 같은 삶을 사는 마을이 셀 수 없이 더 있었다. 이 마을도 까마득히 먼 옛날, 먼 곳 어디선가 이주해 온 길실장이 터를 잡고 세운 마을이었다.

 

일정 이상으로 커진 마을은 길실장을 배출해 내는 의무가 있었다. 아무도 강요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았지만, 위석에 새겨진, 동족을 위한 의무였다. 길실장은 세상으로 내려가 경험을 쌓고 지식을 모은다. 금기시되는 인간과의 교류도 필요하다면 불사한다. 그렇게 지식을 얻은 길실장은 평생 세상을 누비다가, 우연히 새로운 무리를 만나면 자신이 배워 온 지식을 전수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손가락의 장점. 운동의 개념. 돌을 떼어내고 나무를 갈아내 도구를 만드는 법. 모든 지식들이 선조 길실장들이 터득해 전해준 귀중한 보물이었다. 숱한 길실장들의 노력 덕에 이 실장석들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지식을 쌓고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습관은 오래 전에 단절되었다.

수년에 한 번씩은 찾아오던 길실장들은 점점 방문이 뜸해지더니 언젠가부터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이 마을도 귀중한 머릿수를 기약 없이 낭비하느니, 더 이상 길실장을 배출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고, 외부와의 교류를 끊은 마을은 퇴보하지도 발전하지도 않는 정체에 빠져들게 되었다.

 

"조용히 하는데스!. 다들 이제 돌아가 할 일이나 하는데스. 그리고 오마에는 와타시를 따라오는데스."

장로의 명령에 실장석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뿔뿔이 흩어졌다. 장로는 독라를 자신의 굴로 데려갔다.

독라와 마주 앉은 장로가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한데스. 와타시는 오마에가 길실장이 될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데스. 사실, 와타시는 오마에가 길실장이 될 것을 바라고 있었던데스."

"어째서인데스까?"

"장로로 평생을 살다 보면 보는 눈이 생기는데스. 오마에가 태어난 날, 오마에의 눈빛을 보고 와타시는 어떤 예감이 든 데스. 오마에는 분명 이 마을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 말인데스."

"구하다니, 무슨 말인 데스까? 마을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데스까?"

"주위를 보는데스, 오마에."

장로는 굴 바깥을 가리켰다. 정말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새들은 지저귀고, 꽃은 피어나고...

두 눈이 초록으로 물든 어미들은 태교의 노래를 흥얼대며 일하고, 벌써 태어난 자들은, 일 년 전 독라가 그래왔듯 공터에서 헉헉대며 빙글빙글 달리고 있었다. 올해도, 내년도, 앞으로도 영원히 이런 풍경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독라의 마음 한 구석에 느껴지는 빈자리는 무엇 때문일까?

독라와 함께 마을을 내려다보며 장로가 말했다.

"정말 평화로운 모습인데스. 와타시가 어릴 때도, 와타시의 마마가 어릴 때도 항상 세상은 이런 모습이었던데스."

"..."

"오마에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겠는데스까?"

 

독라는 원을 그리며 도는 자실장들을 바라보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쉬지 않고 달려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실장들. 행복을 바라며 아무리 노력해도 보상받지 못한 채 아동바동 살다가 그대로 허무하게 죽게 되고, 저 자들의 자들도, 그리고 그 자들도 똑같이...

"...달라짐."

"맞는데스. 달라짐이 없는데스"

장로는 독라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의 평화로운 삶도 모두 달라짐이 있었기 때문인데스. 다른 길실장에게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바깥 세상으로 길실장을 보내 배운 것을 나누며 마을은 달라졌던데스. 자는 친보다 나은 삶을, 그 자의 자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던데스. 그렇게 조금씩 달라지다 보면 언젠가는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온 데스.“

행복. 행복이라.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언제나 되새기던 그 의문을 독라는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자를 낳고 기르는 것? 자는 무리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는 것? 식사는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행복인 것일까. 무엇이 바로 수단이 아닌 목적인 것일까. 실장석은 무엇을 위해,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 것인가.

 

독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내고 장로의 말에 집중했다.

"하지만 길실장은 오래 전 사라진데스. 와타시의 마마 때도, 그 마마의 마마의 마마 때도 삶은 나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고, 지금과 꼭 같았던데스. 하지만 오마에, 여름에 뛰지 않는 실장석은 겨울이 오면 살아남을 수 없는데스.“

독라는 장로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죽어가는 마을이란 없다. 변화를 멈춘 그 순간 마을은 이미 죽은 것이기 때문다.

마치 가사 상태에 빠진 실장석처럼 산송장으로만 존재하는 독라의 마을. 마찬가지로 문을 닫아건 채,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죽어가고 있을 알지 못할 다른 마을들. 그 모든 마을을 구하려면...

"와타시가 길실장이 되어 전하는데스. 다른 마을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데스. 길실장을 다시 만들어 내보내도록 하는데스."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데스. 가까이 앉는데스. 오마에에게 알려줄 것이 많은데스.“

 

날이 저물도록 독라는 장로에게서 바깥 세상에 대한 지식을 배웠다. 한때는 모든 실장석이 상식처럼 알고 있었던 지식이지만, 지금은 어느새 잊히고 만 지식이다.

"우리는 닌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만, 닌겐은 우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데스. 하지만 커다란 네모를 들고 있는 닌겐은 우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데스."

"닌겐은 실장석을 죽이기도, 보살피기도, 먹기도, 괴롭히기도 하는데스. 닌겐에게 접근하기 전에 모습을 유심히 살피는데스. 무관심한 닌겐이 제일 좋은데스."

"까만 길을 밟으면 위험한데스. 눈 깜짝할 새에 납작해져 죽게 되는데스."

"작은 닌겐일수록 위험한데스. 하지만 머리카락이 긴 닌겐은 덜 위험한데스."

"밖의 실장석은 닌겐에게 빌붙고, 네모난 집을 주워다 살며, 운치를 모으는 굴에 독라를 가둬 노예로 삼으려는데스."

달콤하고 울퉁불퉁하며 동그란 것을 조심하는데스. 그걸 먹는 실장석은 대개 죽게 되는데스.”

장로는 간간히 눈썹을 찌푸리며 가물가물한 기억을 짜 냈다. 한결같이 새롭고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몇 세대 동안 한 번도 쓰이지 않은 이 지식들이 장로에서 장로 사이로 아슬아슬하게나마 전해 내려온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겠다.

이야기를 끝마쳤을 무렵에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넘치는 정보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독라는 집으로 돌아가 일찌감치 눈을 붙였다.

 

이른 새벽, 길을 떠나는 독라를 배웅하는 자는 장로 혼자였다.

"이걸 받는데스."

장로가 내민 것은 튼튼한 나무창과 큼직한 초록색 꾸러미다. 창끝은 보기만 해도 찔릴 듯 날카로웠고, 추자의 두툼한 옷으로 만든 꾸러미는 깨끗한 머리털 한가득과 말린 고기조각 한 움큼이 들어 있었다. 이 정도 크기의 꾸러미라면 추자 수십 마리의 옷감은 필요했을 것이다.

 

"단단한 나무로 만든 와타시의 뾰족이인데스. 또 만들면 되니 염려 마는데스. 그리고 밖은 추우니 이 꾸러미를 펼쳐 덮고 자는데스. 길실장을 만나면 머리와 옷을 빼앗아 옷감에 덧대는데스. 겨울이 오기 전에 최대한 많이 모아야 하는데스. 그리고... 오마에에게 맡길 일이 하나 있는데스."

장로는 주저하다 말을 꺼냈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동녘 하늘에 장로의 얼굴이 푸르게 보였다.

"이 마을에서 독립해 나간 마을이 둘 있다는 것은 오마에도 알 것인데스."

"하나는 옆 산에 잘 살고 있고, 다른 하나는 소식이 끊어지지 않은데스까?"

"지금까지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데스. 하지만 사실, 두 번째 마을을 세우려고 떠난 실장석들이 바로 소식이 끊어진 것은 아닌데스.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을 세운 후 한동안 우리 마을과 연락이 있었던데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길실장이 사라지고, 곧 그 마을의 소식 또한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데스."

"마을이 망하고 흔적도 없어지는 일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데스. 하지만 왜 그 사실을 지금까지 숨겨온데스까?"

"그 무리는..."

장로는 모독적인 말을 내뱉듯 표정을 찌푸리고 낮은 목소리로 씹어뱉듯 말했다.

"닌겐의 곁에서 산 데스."

 

독라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대답 대신 장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장로는 독라의 눈길을 피하고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와타시도 말로만 들은 것이라 잘은 모르는데스. 하지만 그 무리가 닌겐과 함께 산 것은 틀림없는데스. 두 번째 무리가 떠난 다음 봄, 산 아래에서 길실장 하나가 올라온데스. 두 번째 무리를 따라 떠난 실장석이었던데스. 그 실장석은 자기 마을이 좋은 닌겐을 만나 함께 살고 있다고 말한데스."

"닌겐이 좋은지 아닌지를 우리가 알 수 없는데스."

"물론인데스. 하지만 그 실장석은 말한데스. 자기 무리는 외딴 닌겐의 집에 자리잡아 닌겐을 돕고, 닌겐에게 도움 받고 살고 있다고 말한데스. 그 증거로 그 실장석은 닌겐이 가르쳐 주었다는 지혜를 알려 준데스."

 

장로는 마을 귀퉁이의 풀숲을 가리켰다. 풀숲에 우거진 덤불은 항상 무성한 열매를 맺어 든든한 먹이가 되어 주고 있었다.

"열매를 땅에 묻으면 자라나 다시 열매를 맺는다는 지혜인데스. 그 말대로 수많은 열매를 묻어봤고 거의 실패했지만, 저 덤불만은 성공해 지금까지도 여름마다 열매를 맺어주는데스. 닌겐은 위험하지만, 닌겐의 지혜는 이렇게 대단한데스. 그 때의 장로사마는 닌겐의 지혜를 계속 배울 것이냐, 아니면 아랫마을과의 연락을 끊고 위험의 싹을 없앨 것이냐의 고민 끝에 연락을 계속하기로 결정한데스.

그 이후로도 철마다 아랫마을에서 실장석이 올라와 이런저런 것들을 전해주었지만, 어째서인지 전부 쓸모없는 것들이었고 금방 잊혀진데스. 여러 해가 지나며 아랫마을에서 길실장을 올려 보내는 일도 점점 뜸해졌고..."

"결국 연락이 끊어진 모양인데스."

"그런데스. 언젠가부터 봄이 지나고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도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은데스. 닌겐의 보호를 받는 마을라면 달리 망할 일이 없기에, 아랫마을은 다름 아닌 그 닌겐의 손에 실각되었다고 다들 생각한데스. 그 때의 장로사마는 닌겐에게 빌붙는 무리가 더 나오는 일을 막기 위해, 아랫마을은 처음부터 연락이 끊어졌던 것으로 정한데스. 와타시와 같은 장로들만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데스."

하지만 장로사마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스.”

생각해 보는데스, 오마에.”

 

장로는 마스크를 내리고 몸을 기울여 독라에게 얼굴을 바짝 가져갔다. 벌어진 입에서 썩은 내가 풍겼지만, 긴장감에 정신이 팔린 독라에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랫마을은 분명 닌겐을 '돕고'있다고 말한데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실장석을 갑자기 닌겐이 대체 왜 죽이는데스까?"

"닌겐은 실장석이 이해할 수..."

"아니, 아닌데스. 닌겐은 겉모습만큼이나 우리와 닮았다고 있다고 와타시는 믿는데스. 변덕대로만 사는 실장석을 생각해보는데스. 보존식을 모았다가 하루아침에 몽땅 먹어버리는 실장석을 생각해 보는데스. 그런 실장석이 겨울을 나고 자를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스까? 절대 아닌데스. 닌겐도 마찬가지인데스. 산을 깎고 강을 메우는 인간의 힘을 보는데스. 닌겐이 그렇게 멍청하다면, 닌겐은 그렇게 강할 리가 없는데스."

"..."

"닌겐은 이해할 수 없는 동물이 아닌데스. 단지 닌겐의 깊은 생각을 우리가 알 수 없기에, 닌겐을 이해할 수 없다고 넘겨짚는 것 뿐인데스. 그래서 와타시는 믿는데스. 아랫마을을 망친 것이 무엇일지는 몰라도, 닌겐이 한 일은 절대로 아닌데스."

"..."

"그래서 와타시는 오마에에게 임무를 주는데스. 아랫마을은 시냇물을 따라 하루하고 반나절을 내려가면 있었다고 들은데스. 그곳에 가서 아랫마을이 정말로 닌겐 때문에 망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아보는데스. 꼭 우리 마을에 알려 줄 필요는 없는데스. 다만 닌겐에게 보호받는 마을을 실각시킬 정도로 위험한 그 이유를 찾아 다른 마을에 반드시 전하는데스."

"...잘 알겠는데스.“

"길실장이 사라지고 어떤 실장석도 산 아래로 내려가 본 적이 없는데스. 어떤 위험이 있을 지 모르는데스. 몸조심하는데스."

"더 할 말은 없는데스까?"

"...행운을 비는 데스.“

 

독라는 길을 나서려다 문득 떠오른 듯 장로에게 말했다.

"장로사마."

"말해보는데스."

"와타시에게는 이름을 주지 않는데스까?"

"오마에는... 더 이상 마을의 실장석이 아닌데스. 와타시도 이제는 오마에의 장로가 아닌데스. 길실장의 이름은 길실장 스스로 찾는 것인데스."

독라는 잠시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윽고 황금빛 여명을 등진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개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장로는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다 마을로 돌아갔다.

눈부신 햇살을 받아 깨어나는 마을이 점점 부산스러워진다. 쳇바퀴 같은 실장의 하루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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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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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피지 | 작성시간 18.01.03 명작ㄷㄷ
  • 작성자쿼리쉬 | 작성시간 18.04.04 와 무슨 원시 부족도 아니고 ㅋㅋㅋㅋㅋ 진짜 마음에 듭니다 기대하고 보겠습니다 좋은 스크립트 감사합니다
  • 작성자sirsasa | 작성시간 18.11.26 인디언의 서사시같은다와
  • 작성자로엔그린 | 작성시간 19.11.24 이런 대작의 스멜이
  • 작성자질럿실장 | 작성시간 20.06.14 다시 봐도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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