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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스크립트/ 장편

길을 걷는 실장석 (完)

작성자weaio|작성시간17.08.03|조회수9,113 목록 댓글 56


장녀(자실장): 차녀, 4, 5녀의 구더기, 8, 8녀의 구더기를 죽임.

차녀(자실장): 장녀에 의해 파킨사.

3(자실장): 9녀에 의해 찔리고 떨어져 죽음.

4(자실장): 5녀를 죽임. 장녀에게 목 졸려 죽음.

5(엄지): 4녀에게 찔려 죽음.

5녀의 구더기: 장녀에게 밟혀 죽음.

6(엄지): 여자에 의해 감전사.

6녀의 구더기: 7녀의 목구멍에서 질식사.

7(엄지): 6녀의 구더기를 배에 넣다 질식사.

7녀의 구더기: 여자에 의해 폭사.

8(엄지): 장녀에게 깔려 죽음.

8녀의 구더기: 장녀에게 먹혀 죽음.

9(엄지): 3, 9녀의 구더기를 죽음. 실수로 자살.

9녀의 구더기: 9녀에게 위석이 부서짐.

 

 

모두 끝났다. 장녀만 남고 모두 죽었다. 인간의 힘과 인간의 교활함 앞에 실장석은 너무나 무력했다. 엎드린 그린의 얼굴 아래로 까만 웅덩이가 퍼져 나간다.

여자는 탁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말했다.

어때, 아직도 행복해?”

그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흐흥, 괜한 걸 물어봤나보네.”

여자는 담뱃불을 켜며 혼자 떠들었다.

며칠 전만 해도 넌 행복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왜 불행해졌지? 그래, 물론 나 때문이지. 하지만 처음에 네가 행복했던 것도 다 내 덕분이었어. 난 줬던 걸 그저 받아갔을 뿐이지. 내 말을 이해하겠어?”

대답을 기대하는 말은 아니었다. , 연기를 내뿜으며 여자가 곧바로 이어 말했다.

너희는 항상 행복을 원하지. 하지만 그러면서 아무도 행복이 뭔지를 몰라. 내가 알려주지. 너희의 행복은 인간이다. 오직 인간을 통해서만 너희는 행복해질 수 있어. 편안한 잠자리, 따뜻한 음식, 너희가 그 작은 뇌로 원하는 모든 것은 인간만이 베풀 수 있지. 그렇다면 그 행복을 앗아갈 권리는 누구에게 있을까? 물론 인간에게 있는 거야.”

여자는 미동도 않는 장녀의 등에 담뱃불을 지지면서 말했다.

인간의 행복이 너희의 행복이다. 인간이 너희는 행복하다고 말하면, 그 자체로 너희 행복은 성립하는 거야.

인간에게 굴종해라. 네 스스로를 부정하고 영원히 인간의 꼭두각시로 살아. 그러면 우리는 네가 행복하다고 말해 줄 것이고, 너는 영원히 행복하게 되는 거야.“

 

닌겐만이...행복...”

그래.”

“...틀린데스.”

그린은 고개를 쳐들고 똑똑히 말했다. 여자의 말에 반박할 단 한 가지 증거, 그린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닌겐 없이도 실장석은 행복할 수 있는데스.”

너희끼리? 무력하고 탐욕스러운 너희가 어떻게?”

그린은 이웃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강변집, 바윗집, 뾰족집, 나무집, 윗집과의 추억을 떠올렸다. 이웃들과 함께 있을 때 그린은 행복했었다. 오로지 자신들의 힘으로만 일구었던 행복의 기억은 그린의 마음속에 마지막 희망이이 되어 주었다.

행복은 그런 데 있지 않은데스. 행복은 소중한 이웃과 친구들 속에 있는데스. 모두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할 때 모두 행복해지는데스.”

위기와 절망의 벼랑 끝에서, 그린은 잃어버렸던 답을 찾아냈다.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데스. 내일의 희망을 믿고 견디데스. 매일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 행복은 찾아오는데스. 실장석은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데스. 오마에는 절대로 와타시를 굴복시킬 수 없는데스.”

 

하지만 다음 순간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린의 마지막 희망을 무너뜨렸다.

멋진 말이구나. 그 세 자매에게서 배운 거니?”

여자는 씩 웃었다.

아니, 강변집이라고 불러 줘야 하나?”

그린은 몸을 떨었다.

여자는 서랍에서 조그만 병을 꺼내 그린에게 보여주었다. 투명한 녹색 액체 안에 초록색 돌이 들어 있었다. 끔찍한 익숙함과 함께 그린의 가슴이 후비는 듯 저려왔다.

여자는 그린의 위석을 딸각딸각 흔들며 말했다.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은 없어? 네가 길실장이었던 걸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어째서 너희 마을에는 포식자도 인간도 보이지 않았던 건지? 산신령의 정체가 뭐였는지?”

 

여자는 서랍에서 태블릿을 꺼내더니 영상을 재생했다. 강변집 자매를 구해 준 그린이 마을에 도착하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마을에서 벌어진 잔치, 강변집 차녀와 먹이를 구하는 모습, 그린의 일거수일투족이 영상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다음 장면에서 그린은 강변집 친실장과 바윗집, 그리고 우글우글한 자실장과 함께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산신령 나무를 떠나며 그린은 카메라를 향해 자꾸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이어지는 영상의 시간대는 늦저녁이었다. 실장석들이 하나 둘 집으로 들어가자 정체 모를 인간이 마을 근처로 접근했다. 인간은 풍향을 가늠하더니 조그만 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캔에서 무럭무럭 피어난 연기가 바람을 타고 마을을 덮는다. 실장석들이 모두 잠든 것을 확인한 인간은 산신령 나무로 향했다. 금고를 열고 안에 있던 실장석들을 자루에 거칠게 쑤셔넣은 인간은 카메라의 시야 밖으로 벗어났다.

시점은 1인칭 캠코더로, 장소는 허름한 간이 컨테이너로 바뀌었다. 버둥대는 자루를 뒤집자 황송해하는 강변집 마마와 고함 치르며 명령하는 바윗집 분충들이 굴러 나왔다. 실장석들은 즉시 머리와 옷을 빼앗기고 분쇄기에 넣어졌다. 고통스럽게 반죽이 된 실장석들은 이런저런 재료와 섞이더니 사출구를 통해 가래떡처럼 죽 뽑혀 나왔다. 회전하는 칼날에 덩어리로 뚝뚝 잘려 나간 반죽은 포대에 담겼다. 시점은 다시 산신령 나무에 달린 감시 카메라로 바뀌었다. 인간은 포대에 든 것을 금고에 도로 채워 넣고는 마을을 떠났다. 사각 지대로 완전히 사라지기 전, 인간은 마스크를 벗고는 카메라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린의 주인이었다.

 

이 쯤 보여주면 됐겠지.”

여자는 태블릿을 서랍에 넣고 마지막 진실을 이야기했다.

 

여자가 처음으로 훈육을 맡았던 그 길실장은 당당히 외쳤다.

아끼고 사랑하는 삶이 행복인데스. 실장석은 인간 없이도 행복할 수 있는데스!”

길실장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지만, 여자는 흥미가 동했다.

여자는 땅을 사고 그 길실장을 풀어 주었다.

종종 들를게.” 여자는 말했다. “얼마나 행복한지 한 번 보자고.”

그 길실장은 자신의 철학을 충실히 지켰다. 땅을 파고 집을 지었다. 정성 어린 태교로 아이들을 낳고 빠짐없이 사랑스럽게 길렀다. 찾아온 여자에게 그 길실장은 당당히 외쳤다.

본 데스? 와타시는 행복해진데스!”

하지만 다음 번 여자가 찾아갔을 때, 그 길실장은 울고 있었다.

산은 척박하다. 먹을 것이 부족하다. 아이들이 굶어 죽었다. 식량 문제만 해결되면 실장석은 분명히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다. 그 길실장은 호소했다.

여자는 터 좋은 땅을 물색했다.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마침내 여자는 찾아냈다. 야트막한 시냇물이 흐르고 열매 맺는 나무가 우거진 에덴동산 같은 곳이었다. 여자는 비싼 값으로 땅을 사고 그 근처로 집을 옮겼다. 원래 살던 산실장을 모조리 구제하고 나서, 그 길실장은 풀려났다.

하지만 다음 번 여자가 찾아갔을 때, 그 길실장은 다시 호소했다.

기름진 땅에는 다른 동물들이 꼬인다. 무서운 짐승에게 자식들이 살해당했다. 짐승으로부터 보호받는다면 분명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여자는 부지의 동물을 모조리 몰아내고 주위에 철조망을 쳤다. 땅굴을 파더라도 넘어올 수 없도록 깊게 박았다. 천적에게서 해방된 그 길실장은 다시 자식을 낳았다.

하지만 풍부한 음식과 안전한 환경, 두 요소가 갖춰지자 새끼들 속에 숨어 있던 분충성이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소중한 자식을 제 손으로 도저히 죽일 수 없었던 그 길실장은 결국 여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여자는 마을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고 아름드리 나무 아래에 금고를 가져다 놓았다. 그 길실장은 분충 자들을 골라 금고에 넣었고, 여자는 금고 안의 자들을 처분했다.

나쁜 아이들은 산신령님께 보내지는데스.” 그 길실장은 남은 새끼들에게 가르쳤다.

해가 지나고, 새끼들은 성체가 되었다. 모두를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은 이제 마을이 되어 대대손손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사실 인간의 도움 덕분이었다.

성체가 된 새끼가 임신한 날, 그 길실장은 조용히 마을을 빠져 나와 금고에 자신을 가두었다. 이윽고 찾아온 여자에게, 그 길실장은 인간에게의 굴종을 고백했다. 여자의 첫 훈육은 성공으로 돌아갔다.

하루아침에 어미가 사라지자 실장석들은 혼란에 빠졌다. 주변을 샅샅이 뒤진 끝에 산신령 나무로 향한 어미의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실장석들은 어미가 산신령의 곁으로 떠났다고 믿었다. 새끼가 임신한 어미는 산신령에게 떠난다는 새 전통이 자리잡게 되었다.

남은 가족은 번식하고 번영해 마을이 되었다. 마을이 인간의 손에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여자의 손에 들어온 길실장들은 우연을 가장해 마을로 보내지고,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우연을 가장해 여자의 집으로 옮겨졌다. 충분한 올리기와 떨어뜨리기, 그리고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음을 깨달은 길실장들은 모든 희망을 접고 인간의 종이 되었다.

 

내 주변에는 실장석을 좋아하는 친구가 많지. 어느날 그 중 하나가 내게 연락을 해 오더라고. 손가락이 달린 이상한 독라를 주웠는데, 자기 대신 꼭 학대해 달라나, 뭐라나? 그래서 넌 이곳에 오게 된 거야. 모든 건 그 때부터 결정된 거였지. 네 삶은 조작되었어. 모든 것은 감시되고 통제되었다. 네가 소중히 여기던 모든 가치들은 내가 배후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 아직도 실장석이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그린의 마음 속 모든 불이 꺼졌다. 더 이상 떨지도 눈물 흘리지도 않는 그린은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닌겐상의 말이 맞는데스.”

부족해.”

실장석은 스스로 행복해질 수 없는데스.”

더 자세히.”

닌겐상의 허락이 있을 때만 실장석은 행복해질 수 있는데스.”

그렇다면 실장석의 행복은 뭐지?”

와타시는 모르는데스.”

?”

닌겐상이 행복으로 정하는 것이 행복이기 때문인데스.”

여자는 빙그레 웃었다.

좋아, 그렇다면 사육실장으로 다시 태어난 너를 위해, 내가 사육실장의 행복을 정의해 주지. 훈육학개론 11절이야. 따라해. ‘사육실장의 행복은 욕심 없이 주인에게 충성하며 주인의 기쁨만을 위해 사는 삶이다.’”

사육실장의 행복은 욕심 없이...”

 

뇌리를 때리는 충격에 그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오래 전, 어느 원사육실장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그리고 그 원사육실장의 불행한 운명을 그린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완전하며 무결한 행복의 비밀이 그것이라면, 왜 그 실장석은 그걸 알고도 또 다시 불행을 느꼈던 것일까?

그토록 긴 세월을 거치며 끝내 얻은 것 같았던 행복의 답. 하지만 그 답은 또 다른 의문의 시작이었다. 머리와 꼬리가 맞닿아 있다. 여행의 종착지는 출발점이었다.

오래 전 보았던 장면의 환상이 독라의 눈앞에 떠올랐다. 땀을 뻘뻘 흘리며 쉬지 않고 달려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실장들. 행복을 바라며 아무리 노력해도 보상받지 못하고 아동바동 살다가 그대로 허무하게 죽게 되고, 저 자들의 자들도, 그리고 그 자들도 똑같이...

긴 여행이었다. 독라는 행복의 의미를 깨달았다.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어서 말해. 어서!”

당황한 여자가 고함쳤다.

당장 말하지 않으면 네 장녀를 죽여 버리겠다.”

독라는 묵묵부답이었다.

유감이군.” 여자가 싸늘하게 말했다.

 

 

독라가 탈출한 날. 그날 저녁에도 여자는 장녀를 핏덩이로 만들고는 독라의 수조에 처넣고 방을 나갔다. 따로 가두지 않고 한 데 넣은 것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어쩌면 장녀의 끔찍한 몰골을 더 가까이서 보라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냥 술에 취해 두 수조를 헷갈렸는지도 모른다.

밤이 되었다. 적막한 방은 어둠에 잠겨들었다. 웅크린 독라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마마...”

장녀였다.

마마, 도망가는테치. 와타치를 두고 여기를 탈출하는테치. 와타치는... 너무 지친테치. 차녀, 4, 8, 구더기들, 모두의 무게가 와타치를 누르는테치.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는테치. 하지만 마마는 가야 하는테치. 우리의 몫까지 살아 주는테치. 다시 길실장이 되는테치, 마마.”

그린은 번쩍 눈을 떴다. 꿈이었다. 장녀는 그날 이후로 늘 그랬듯 죽은 눈을 한 채 구석에 누워 있을 뿐이었다.

독라는 수조 위를 보았다. 뚜껑이 덮여 있지 않았다. 지하실 문도 열려 있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수조 벽은 높았다. 하지만 디딜 것이 있다면 손이 닿을 정도는 되었다.

독라는 반응 없는 장녀를 벽에 기대 앉혔다. 뒤로 몇 걸음 물러서 높이를 가늠했다. 발을 박차고 튀어 나간 독라는 장녀의 몸통을 밟고, 머리를 밟고 몸을 위로 날렸다. 치명상을 입은 차녀가 피를 토했다. 뭉툭한 팔 끝이 수조 벽에 걸렸다. 온 힘을 다해 독라는 몸을 끌어당겼다.

독라는 수조를 탈출했다.

 

지하실 창문은 도저히 닿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독라는 지하실 문으로 향했다. 독라의 발에 무엇인가가 채였다. 장녀의 몸을 찌르던 쇠꼬챙이였다. 독라는 꼬챙이를 챙기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는 계단을 올랐다.

1층의 문과 창문은 모조리 잠겨 있었다. 현관문에는 애호파들이 설치하는 복잡한 잠금장치가 있어 독라의 무딘 손으로는 열 수 없었다.

탈출구를 찾아 부엌을 살펴보고 있었을 때, 위층에서 내려오는 둔중한 발소리가 들렸다. 독라는 재빨리 식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술 냄새가 풀풀 풍기는 여자가 엉덩이를 벅벅 긁으며 부엌으로 다가왔다.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켠 여자는 담뱃갑을 열어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외투를 걸쳤다.

여자가 집을 나서자 독라는 2층으로 달려 여자의 방으로 향했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방 안을 둘러보던 독라는 멈칫했다. 독라는 여자의 침대를 기어올라 책상을 딛고 방충망을 열었다. 까마득한 높이였다. 방충망을 닫기 위해 몸을 돌린 독라가 멈칫했다. 여자의 책장 꼭대기에 독라의 위석이 담긴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독라는 마음을 굳히고는 방충망을 닫으며 몸을 날렸다. 바닥에 격돌한 독라의 몸이 짓뭉개졌지만, 고농축 활성액은 독라의 목숨을 붙잡아 두었다. 독라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편의점에서 담배를 산 여자는 한 개피를 다 태우고는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여자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 몸을 던지고 잠을 청했다. 조그맣게 피식거리고 부글거리는 소리가 들려 오더니 멎었다. 정확히 말하면, 여자는 그 소리가 멎을 때까지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한결 조용해진 방 안에서 여자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여자는 벌떡 일어나 불을 켰다.

여자는 책장 꼭대기로 손을 뻗었다. 유리병 안의 활성액은 샛노랗게 바뀌어 있었다. 여자는 황급히 지하실로 내려갔다. 수조 안에는 이미 숨이 끊어진 장녀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여자는 욕설을 내뱉으며 현관문을 열고 뛰쳐나갔지만 그 곳에는 어둠에 잠긴 골목길뿐이었다.

방에 돌아온 여자는 양 손에 얼굴을 파묻고 괴로운 한숨을 쉬었다.

집착, 복수심, 여러 감정이 뒤섞인 눈을 빛내며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랗게 변한 활성액을 따라 버리고, 여자는 새 활성액을 채워 넣으며 일그러진 미소를 흘렸다.

 

독라는 달렸다. 독라는 어둠 속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한참을 달린 끝에서야 독라는 멈춰섰다.

독라는 두건을 벗고 앞뒷머리를 뽑아 발밑에 내려놓았다.

독라는 팬티만 남기고 옷을 벗어 북 찢고 두건, 신발과 함께 머리카락 옆에 두었다.

독라는 쇠꼬챙이로 앞치마의 귀퉁이에 구멍을 내고, 벗어낸 리본을 끼워서 마스크를 만들어 귀에 걸었다.

넝마가 된 옷을 휘감고 마스크를 코까지 올려 쓴 독라는 골목길을 따라 터벅터벅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된 데스까?”

독라를 둘러 싼 실장석들이 침을 꼴깍 삼키며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 후에도 많은 시련이 와타시를 기다린데스. 하지만 뒷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은데스. 중요한 것은 와타시는 다른 많은 마을을 찾아냈다는 것이고, 지금 이 마을에까지 도착하게 되었다는 것인데스.”

이야기를 마친 독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장석들은 실맘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흩어졌다.

독라는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모습으로 올라갔다. 해가 지평선 아래로 얼굴을 숨기고 있었다.

뒤따라온 장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와타시의 마을에서 머무는 건 어떤데스까? 오마에처럼 경험 많은 실장석이라면 마을에 큰 도움이 될 것인데스.”

독라는 눈을 잠시 감았다 뜨더니 장로의 어깨를 툭툭 쳤다.

길실장을 꼭 내보내는데스.”

산비탈을 걸어 내려가는 독라를 장로가 황급히 붙들었다.

잠깐데스! 가더라도 이건 꼭 말해주고 가는데스. 오마에가 얻은 행복의 답은 무엇이었던데스까?”

독라는 말없이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독라의 손가락 끝은 마을의 공터를 향하고 있었다. 자실장들이 헉헉대며 빙글빙글 달리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장로가 물었다.

아이들이 행복이라는 말인데스?”

독라는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투덜대는 장로의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마을 어귀까지 이르렀을 때, 앵알대는 목소리가 독라를 불러 세웠다.

오바상! 오바상!” “잠깐 기다리는테찌!”

자실장 두 마리가 총총걸음으로 달려왔다.

오바상, 진짜 길실장인테치?” “테에! 길실장은 처음 보는테치!”

그런데스.”

! 멋진테치!” “와타치도 길실장이 되고 싶은테치!”

왜 길실장이 되고 싶은데스까?”

와타치는 바깥 세상이 궁금한테치.” “신나는 모험을 하고 싶은테치!”

독라는 몸을 낮추고 자실장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마에들이 원하는 것을 꼭 찾을 수 있길 바라는데스.”

자실장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공터로 몰래 돌아가 대열에 재빨리 합류했다. 독라는 늦여름의 황혼빛에 물든 마을의 풍경을 잠시 지켜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산 아래에는 도로가 있었다. 독라는 벽 위에서 도로를 따라 아침이 될 때까지 걸었다. 갓길 졸음쉼터에 정차한 픽업트럭이 보였다. 독라는 균열을 붙잡고 콘크리트 벽을 기어 내려가 트럭에 몸을 실었다. 한참 뒤 트럭은 독라를 싣고 길을 출발했다.

오후가 될 때까지 달린 트럭은 어떤 도시의 공원 옆에 정차했다. 독라는 트럭에서 뛰어내려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은 한동안 구제가 없었는지 꾀죄죄한 실장석들로 가득했다. 멀쩡한 야채를 갉아먹고 있는 실장석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독라는 먹이를 구하러 어디론가 향하는 실장석의 뒤를 몰래 밟았다. 실장석은 공원 근처 상가의 청과물상을 노리고 있었다. 늘어진 잎을 잡아당겨 당근을 훔친 실장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히 달아난다. 빗자루를 든 인간이 그 뒤를 쫓았다. 수풀에 몸을 숨긴 독라는 쇠꼬챙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여기까지가 와타시의 이야기인데스.’

파란만장한 이야기였다. 토시아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가라.”

독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둠 속으로 똑바로 걸어 나갔다. 멀어져 가는 독라의 모습에서 토시아키는 지쳐 쫓기는 사람의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 독라가 어디에 있든지, 어떤 길을 걷든지, 독라가 발견한 행복이 무엇이든지, 독라가 무사하기를 바라며 토시아키는 가게 셔터를 닫았다.

 

가게를 나선 독라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해진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발길 닿는 곳으로 향할 뿐이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독라는 그 예감의 정채를 깨닫고 멈춰 섰다. 뒤에서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울려왔다. 유리병 안에서 딸각딸각 돌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독라의 빈 가슴이 후비는 듯 시려왔다.

요새 유명하던데? SNS가 네 이야기로 떠들썩하더라고.”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이야, 그린.”

독라는 눈을 감았다.

 



여자는 오랫동안 독라를 학대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어느 밤, 여자가 별안간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너희는 너희가 역겨운 생물체라는 걸 알고 있어?”

몸뚱이만 남은 독라는 부어오른 눈으로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개나 고양이를 학대하다 걸리면 인생을 종치지. 하지만 실장석을 학대하면 눈초리나 좀 받고 끝이야. 왜냐하면 너희는 근원부터 더러운 생물이거든.

온갖 공을 들여 훈육해놓지 않으면 털끝만치도 예쁜 구석이 없어. 생김새부터 어정쩡하게 사람을 닮아서 피둥피둥 징그럽잖아? 아무리 가르쳐도 들어 처먹지도 않고 남들이 당연히 자기를 모셔야 되는 줄 여기지. 권리니 뭐니 주장하면서 의무와 책임은 전혀 지려고 들지를 않아. 자식새끼는 징그럽게 많이 싸지르는 주제에 솎아낼 생각도 안 하다가 필요할 때면 또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고마운 줄을 알기는커녕 하나를 주면 둘을 내놓으라고 삿대질하다가, 뒤질 때가 되면 뭐라고 말하지? ‘와타시는 그저 행복하고 싶었을 뿐인데스. 닌겐은 어째서 이렇게 욕심이 많은데스.’

세상에 너희처럼 엉터리인 녀석들은 없어. 태어나면서부터 머릿속에 스테이크니 콘페이토니 이 따위 것밖에 없다니 대체 어떻게 된 생물이 이렇지? 너희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존재야. 너희는 학대받아 마땅해.”

여자는 주저리주저리 떠벌였다. 독라가 탈출한 이후, 여자는 어딘지 모르게 뒤틀려 있었다.

독라는 짓물러터진 입을 힘겹게 움직여 말했다.

그런데스.”

그 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독라의 첫 대답이었다. 여자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실장석은 죽여도 되지만 개나 고양이를 죽여서는 안 되는데스. 왜인데스? 그렇게 닌겐이 정했기 때문인데스. 닌겐이 옳다고 하면 옳고, 틀리다고 하면 틀린데스.”

독라는 예전에 여자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있었다.

학대받아 마땅하다고 한 데스까?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데스? 닌겐뿐인데스.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한 데스까? 도덕은 누가 정하는데스? 닌겐뿐인데스. 개나 고양이를 학대한 닌겐은 누구에게 벌 받는데스까? 닌겐뿐인데스. 옳고 나쁜 것을 정할 자격은 닌겐에게만 있고, 닌겐을 벌 줄 자격도 닌겐에게만 있는데스.

와타시는 많은 닌겐을 만난데스. 어떤 닌겐은 실장석을 학대해야만 한다고 말한데스. 어떤 닌겐은 실장석을 사랑해야만 한다고 말한데스. 이상했던데스. 닌겐은 세상의 주인인데스. 세상의 신은 닌겐인데스. 그런데 왜 닌겐보다 위에 있는 규칙이 있고, 거기에 따라야 한다고 믿는데스?

닌겐은 강한데스. 그걸로 충분한데스. 쥐를 괴롭히는 고양이를 아무도 벌 주지 않는데스. 비가 와서 닌겐이 빠져 죽어도, 닌겐은 비가나쁘다고 하지 않는데스. 마찬가지인데스. 우리 동물에게 닌겐은 자연재해인데스. 동물은 닌겐을 판단할 권리가 없고, 닌겐은 동물에게 이런저런 구실로 변명할 필요가 없는데스.

원한다면 실장석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데스. 닌겐이 원한다면 뭐든 좋은데스. 하지만 기억하는데스. 하늘이 닌겐에게 내려 준 규칙은 없는데스. 닌겐은 원한다면 뭐든지 해도 되는데스. 그것이 세상의 지배자인 닌겐의 권리인데스.“

말을 마치고 독라는 입을 닫았다.

 

여자는 한참을 생각에 잠기더니 독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새카만 밤이었다. 여자는 독라를 길바닥에 던졌다.

.‘ 여자가 말했다. ”넌 자유야.“

독라는 여자를 보았다. 까맣게 변한 독라의 위석이 여자의 손에 있었다.

독라의 앞에는 검은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깜빡이는 가로등이 심해어의 불빛처럼 아스라이 빛났다. 길은 어둠 속으로, 그리고 그 너머로 끝없이 뻗었다.

독라는 천천히, 고통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어깨로, 팔다리 없는 몸을 앞으로 끌어당기며, 민달팽이가 기듯이 조금씩 꾸물거리며 나아갔다. 지져진 상처에서 고름이 흐르고 아스팔트 바닥에 쓸린 살갗에서 핏물이 배어 나온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하지만 독라는 신음을 토하면서도 홀린 듯이, 마지막 남은 생명을 긁어 불태우며 무한히 뻗은 길 저편을 향해 앞으로 앞으로 기어갔다. 위석은 파직파직 소리를 내며 실금으로 뒤덮여 간다. 시야는 점점 흐려지고 움직임은 둔해졌다. 하지만 독라는 천 근 같은 몸을 끌어당기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었다.

한계에 달한 독라의 움직임이 멎었다. 거미줄처럼 금이 간 위석은 걷잡을 수 없이 쪼개져 갔다. 앞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며, 독라는 잘린 팔을 앞으로 뻗었다. 여자가 독라의 위석을 부쉈다.

마지막 순간, 독라의 시야가 또렷하게 돌아왔다. 독라의 앞에 뻗은 무한한 골목길, 그 끝이 독라의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만나 온 무수한 얼굴들이 나타났다. 여러 마을의 실장석들. 열 네 마리 아이들. 산신령 마을의 이웃들. 미도리와 세 아이들, 공원의 우두머리, 아랫마을의 변해버린 주민들과 장로. 고향의 이웃들과 마마의 얼굴.

독라는 장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길실장의 이름은 길실장 스스로 찾는 것인데스.”

독라는 웃으며 대답했다.

와타시의 이름은...”

 

 

독라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먹이를 두고 다투는 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어두운 골목에 메아리쳤다.

 

 

 

 

 

 

윗마을의 장로는 전례 없이 장수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봄, 한 길실장의 이야기가 산등성이를 넘어 윗마을에 전해졌다. 다음날 장로는 편안한 얼굴로 세상을 떠났다.

 

아랫마을의 장로는 독라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회한에 찬 채 죽은 장로의 시체는 곧바로 다른 실장석들의 뱃속에 들어갔다.

 

노부부의 실장석 농장은 질 좋은 고기를 꾸준히 납품하며 오래오래 번창했다. 사람들은 노부부 농장의 실장석에서는 산실장 맛이 난다고 칭찬했다. 부부가 세상을 떠난 후 농장은 아들에게 상속되었고, 훗날 그 지역 최대의 실장석 농장으로 발전했다.

 

두루마리 공원은 몇 차례의 구제를 더 거쳐 완전히 청소되었다.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간 공원은 다시 후타바 시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첫 구제가 끝나고, 미도리의 세 아이들은 비쩍 마른 채 구덩이에서 기어나왔다. 손에는 어미의 노란 리본을 꼭 쥔 채였다.

세 마리는 공원 밖으로 나섰다. 넓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까만 길 너머 멀리, 산의 모습이 보였다.

산실장이 되는테치.” “그런테치.”

세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스팔트길로 뛰어 내렸다.

잠시 후 차도에는 세 개의 적록색 얼룩이 그려졌다.

 

학대파 남자는 계속 학대를 즐기며 별 볼일 없는 삶을 살았다.

 

신신령 마을은 고양이의 습격에도 살아남았다. 절체절명의 순간, 산신령이 나타나 고양이를 쫓아냈다는 전설이 입으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산신령은 더 이상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았다. 분충으로 들끓게 된 마을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멸을 맞았다.

 

훈육사 여자는 훈육을 그만두었다. 주변인들에게는 그저 흥미를 잃었다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초고급 사육실장의 공급을 거의 도맡던 여자가 은퇴하자, 근근이 유지되던 사육실장 시장은 더욱 빠르게 쇠퇴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백발의 노인이 된 여자는 어느 날 우연히 어떤 길실장과 마주쳤다. 그 길실장은 여자에게, 여자도 잘 알고 있는 한 길실장의 이야기를 말해 주었다. 젊은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여자는 미소 지었다.

 

 

어느 봄, 어느 산자락.

갓 마을을 나선 풋내기 길실장 둘이 시냇가를 따라 걷고 있다.

얕게 흐르던 냇물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와타시는 왼쪽으로 가는데스.” “그럼 와타시는 오른쪽으로 가는데스.”

두 마리는 서로 마주보더니 와락 얼싸안고 각자의 길을 향한다.

건강하는데스!” “무사하는데스!”

언젠가 꼭 다시 만나는데스!” “그런데스! 약속인데스!”

청명한 하늘 아래 두 실장석은 소리 높여 외치며 멀어져 갔다.

두 길실장은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 두 길실장은 다른 마을에 닿았을까? 두 길실장은 행복의 의미를 찾았을까?

그들 앞에 다가올 수많은 의문을 향해, 길실장은 오늘도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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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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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로엔그린 | 작성시간 20.10.12 명작을 보고가는데스
  • 작성자dihr | 작성시간 21.04.21 부러운 필력인데스......오로롱
  • 작성자YBHH | 작성시간 21.06.10 여태본 글중 가장쩌는데스 오로롱
  • 작성자업ㅂ | 작성시간 21.07.25 눈물이난데스...
  • 작성자현실독라 | 작성시간 25.06.12 늦게나마 볼 수 있어 행복했던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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