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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순례

희망의 순례 ⑨完 최양업 신부 발자취 (원주-서지골성지) 2026.06.06

작성자나팔|작성시간26.06.07|조회수19 목록 댓글 0

서지 교우촌 -최해성 요한이 이주해 살았던 마을-강원 원주 부론면

 

원주 서지 마을은 최양업 신부님의 먼 친척인 하느님의 종 최해성 요한(1811~1839) 가족이 충청도 홍주 다락골에서 살다가 1801년의 신유박해 때 그의 조부가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의 서지로 이주하였고, 최해성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최요한은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애긍을 잊지 않았고 이러한 덕행 때문에 그는 그 마을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요한은 우선 부모와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가 교회 서적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집으로 갔다가 체포되어 원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최양업 신부가 그의 순교 일화를 채집할 때 당시 생존했던 그의 부친과 아내, 아들에게 증언을 채집했다는 것으로 보아, 기해박해 때 나머지 가족들은 풀려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포졸들은 쇠도리깨로 그를 때리면서 ‘교우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그의 몸은 이내 상처투성이가 되어 가눌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요한은 일단 옥에 갇혔다가 며칠 후 다시 끌려 나와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관장이 여러 가지 말로 유혹하면서 배교를 권유하자, 그는 이를 거부하면서 “원주 고을을 다 주신다고 해도 거짓말을 할 수 없고,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살이 너덜너덜해지고 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매를 맞아 의식을 잃곤 하였다. 어느 날 그는 다시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를 받고 마침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39년 9월 6일(음력 7월 2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최해성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나중에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서 그의 순교 사실이 알려졌다.

“그는 1839년에 조선 교회 전체를 휩쓴 기해 대박해 때 순교한 사람입니다. 그는 시골에 살았던 관계로 왕도(서울)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해의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던 때에 그 순교력(기해일기)에서 빠졌습니다. 다행히 그의 행적에 대한 구술 내용을 적어 놓은 종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순교자의 이름은 최해성 요한입니다.” <최양업 신부의 1856년 9월 13일 자 서한 (12번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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