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재 (남종삼 성인의 유택) - 원주교구
충북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 묘재에는 3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한 남종삼 요한(1817~1866) 성인의 유택이 있다. 성인 남종삼 요한의 아버지 남상교 아우구스티노(1783~1866)가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이사한 곳으로 성인이 순교한 뒤 부친 남상교는 공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고, 장자인 남명희는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남종삼은 충청도 충주에서 탄교의 아들로 태어나, 장성한 뒤, 백부인 상교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현감이 된 남종삼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직에 따르는 미신 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남종삼의 학문과 사상 형성, 그리고 훗날 천주교에 입교한 데에는 부친이 많은 영항을 주었다. 22세 때인 1838년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홍문관 교리, 영해 도호부사 등을 거쳐 철종 때 승지에 올랐으며, 고종 초에는 학덕을 인정받아 왕실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러던 중 러시아는 1860년의 북경 조약으로 연해주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조선과는 두만강을 경계로 하게 되었는데, 이를 기회로 러시아인들이 자주 조선에 월경을 하거나 통상을 강요하였다. 대원군은 프랑스 주교들을 통해 프랑스, 영국 등 서구 열강들과 조선이 동맹을 맺으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다는 소위 이이제이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에게 건의 남종삼의 상소문과 국내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과의 회동 건의를 받아들였으나 주교(베르뇌)들과 대원군의 만남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상황이 바뀌어 천주교 세력에 대한 의혹과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천주교 접근으로 인해 반대파 대신들로부터 정치적 공세를 받아 대원군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더욱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마침내는 1866년 정월(음)을 기해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사형 선고와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병인박해의 시작이었다.
박해가 내려지기 이전에 대원군으로부터 설을 쇠기 위해 양부가 있는 묘재로 내려갈 것을 권유받고, 낙향하였다가 그 후 조정의 박해 소식에 놀라 변장하고 피신하다가 1866년 3월 1일 서울 근처의 고양 땅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그는 모반 부도의 죄목으로 참수형 선고를 받고 1866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홍봉주 토마스(1814~1866)와 함께 순교하였다.
한편 그가 순교한 뒤 남은 가족들도 모두 체포되었는데, 대신들은 그 가족들을 뿔뿔이 흩어 유배 보낼 것을 주청했지만 고종은 이를 거부하고 처 이씨(李召史)와 두 딸, 막내아들을 창녕현 한곳에 같이 보내도록 조처하였다. 후에 남상교는 1866년 4월 17일 공주옥에서 옥사하고, 남명희(1853~1867)는 1867년에 전주에서 교수형으로, 이조이는 1875년 3월 2일 창녕현에서 교수형(아사?)으로 치명하였으니 그의 가문은 3대에 걸쳐 4명의 순교자를 탄생시킨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