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집 권중
天鏡集 卷中
문인 취운성안 편록
문손 덕암영제 관각
문손 뇌묵등린 교정
門人 翠雲聖岸 編錄 門孫 德巖瀛齊 管刻
門孫 雷默等麟 校正
해원(海源) 지음
석왕사 법당중수(釋王寺法堂重修) 및 육대보살 금상조성기(六大菩薩金像造成記)
釋王寺法堂 重修及六大菩薩金像 造成記
설봉산(雪峰山)의 석왕사(釋王寺) 법당(法堂)을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하고 그 대웅전 안에는 석가(釋迦), 미륵(彌勒), 약사(藥師) 등 세분 여래(如來)님의 금색 좌상(坐像)을 모셨는데 三백년이나 되었으므로, 대웅전은 허물어지고 불상은 퇴색하였다. 그래서 이 절에 살면서 이 부처님네를 모시는 사문(沙門)으로서, 지금까지 이 절을 수리하고 이 부처님을 개금(改金)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다만 그 규모를 따르고 그 제도를 지켰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이 절의 행정 장로(行淨長老)가 처음으로 이 영리(營理)를 발원(發願)하고 널리 시연(施緣)을 모집하고는 곧 관서(關西)의 각민 화상(覺敏和尙)을 청해 도규정(都糾正)의 역사를 맡겨 크게 넓혀 개척하여, 一년이 못되어 역사를 마치니, 그 화려하고 웅장함이 모든 총림(叢林)의 으뜸이 되었다.
각민이 행정(行淨)에게 말하기를,
‘대웅전은 아무 흠이 없지마는 부처님에게는 아직 미비한 점이 있다. 대개 부처님에게 보살의 보익(輔翼)이 있는 것은 사람에게 팔이 있고 새에 날개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에게 팔이 없으면 무엇으로 활동하며, 새에게, 날개가 없으면 무엇으로 날겠으며, 부처님에게 보익이 없으면 무엇으로 가르치겠는가? 상제(像制)를 보면 부처님에게 반드시 좌우의 보익이 있는 법인데 지금 여기만 그 상설(像說)이 없어 되겠는가? 자네는 다시 계획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드디어 二천동(銅)을 내어 스스로 그 첫째 단월(檀越)이 되었다.
그리하여 정(淨)이 스스로 화주(化主)가 되어 힘을 다해 주선하여 비용이 넉넉하게 되었다.
또 영남의 스님 여찬(麗贊)을 청하여 조채(彫彩)의 책임을 맡겨 여섯 보살의 진용(眞容)을 그려 세 분 여래님의 좌우에 엄연히 벌려 모시니, 마치 영산(靈山)의 옛날 대회(大會) 같았다.
이것은 다 위의 세 상인(上人)이 부지런히 힘쓴 것으로서, 그 三인은 각각 그 장기가 있었으니, 혹은 반수(般수)의 기교보다 공교하고, 혹은 고장(顧張)의 기예보다 교묘하며, 혹은 부처님을 받드는 돈독한 정성으로 그리고, 새기는 정성과 어울려 마음과 생각을 합하여 이 연화정계(蓮花淨界)의 일대인연(一大因緣)을 맺게 되었으니, 그 높고 큰 공덕은 수미산과 같다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주관(主管)의 수응(酬應)이 없으면 그 일은 이뤄지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또 택흡(擇洽) 화상이 전후를 주관하고 시종을 수응하여 온갖 일을 준비하고 모든 사무를 처리하게 하였으니 그 공인을 어찌 이상의 三인보다 못하다 하겠는가. 여기서 비로소 三은 一을 힘입고 一은 三과 같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三 여래와 六 보살이 영계(靈界)의 명명(冥冥)한 속에서 목차(木叉), 선재(善財) 등 四개의 대사리(大舍梨)를 내려보내어 각각 그 一을 담당하여 그 공을 이루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처럼 그 신조(神助)와 영좌(靈佐)가 서로 도울 수 있었겠는가?
돌아보면 빈도(貧道)는 국외(局外)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 수에 들지 못하지마는 위의 四 상인(上人)의 역사로 인해 무량한 성거(盛擧)를 보게 되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이에 가만히 마음으로 느낀 것은, 불전이 무신년에 이루어졌고 보살상은 무오년에 이루어져 다 같은 무(戊)년이라면 이것은 진실로 이상한 일이며, 나아가서는 평강 보월사(平康寶月寺)의 석가상과 이천(伊川)의 실상암(實相庵), 덕원(德源)의 적조암(寂照庵), 황룡산(黃龍山)의 극락암(極樂庵) 등, 이 세 곳의 관음상이 한꺼번에 이루어졌으면서도 모두 한 무년에 되었으니, 그 묵계(默契)의 이치도 저절로 있어서 기약하지 않고도 그렇게 된 것인가?
그러나 이루어졌다 허물어지는 것은 바로 천도(天道)의 자연이요 허물어졌다 이루어지는 것도 또한 사람의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루어지고 허물어지는 그 사이에 하늘과 사람의 서로 합함이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 위 四인의 공은 이룸이 있었다 할 수 있지마는, 어찌 다른 날에 그 이룸이 또 허물어짐이 될는지 누가 알겠는가? 만일 뒷 사람들로 하여금 위의 四인의 마음을 본받아 그것이 허물어지는대로 곧 계속해 이루게 한다면 그것이 이루어지고 허물어짐이 없음이 천지와 더불어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니, 이에 이 기문을 쓰는 것이다.
雪峰山 - 함경남도 안변군(安邊郡)에 위치. 본명은 설봉산(雪峯山)인데 산 위에 세 개의 석봉(石峯)이 높이 있기 때문에 속칭 검봉(劍峯山) 이라 한다.
釋王寺 - 함경남도 안변군 석왕사면 사기리 설봉산에 있는 절. 석왕사(釋王寺)에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꿈을 해몽한 이야기인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전해진다. 이성계가 어느날 밤 꿈에, 여러 닭이 만 집에서 일제히 울어대고 다듬이 소리가 천 집에서 동시에 나는데 몸은 무너진 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고 꽃은 휘날리고 거울은 떨어져 깨지는 꿈을 꾸었다. 이에 하도 이상하여 수소문 끝에 무학 대사(無學大師)를 만나 꿈의 해몽을 부탁하였더니, 사양하다가 해몽하기를, “길몽이오. 만 집에서 닭이 고귀위(高貴位)하였으니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이며, 천 집에서 다듬이 소리가 일제히 났으니 만 백성 천 벼슬들이 임금된 경사를 알리는 풍악소리요, 서까래 세 개를 지었으니 임금 왕(王) 자요, 꽃이 날렸으니 필경 열매를 맺을 것이요, 거울이 떨어져 깨졌으니 반드시 큰 소리가 날 것이라, 이는 임금이 될 꿈이니, 여기 설봉산(雪峯山)에 절을 짓고 기원하면 소원을 성취할 것이오.” 하였다. 이것이 이성계가 즉위하기 8년 전의 일로, 이성계는 기원소(祈願所)로 석왕사(釋王寺)를 짓고 길주(吉州)의 천불사(千佛寺)에서 오백나한을 배로 실어날라 석왕사에 안치시켰다는 내용의 설화이다.
覺敏和尙 - 조선 스님(1596~1675). 호는 송파(松坡). 속성은 노(盧). 충주 사람. 젊어서 치악산 각림사의 한계(寒溪)에게 승려가 되고, 소요(逍遙)의 문하에서 안거. 비슬산 호구(虎丘)에게 경을 배우고, 벽암(碧岩)에게 의심을 묻고, 임성(任性)에게 3교(敎)의 깊은 뜻을 강구(講究), 금강산 송월(松月)에게서 업(業)을 마침. 그 뒤 10여 년 동안 소백산, 용문사, 해인사 등지로 행각.
都糾正 - 조선시대의 승려(僧侶) 감독기관으로 중기 이후 승려의 기강을 바로잡고, 승풍(僧風)을 규찰(糾察)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檀越 - 범) dānapati 시주(施主)라 번역. 보시(布施)를 행하는 사람.
반수 - 춘추 시대 노(魯) 나라의 교공(巧工) 공수반(公輸班)과 요(堯) 임금 때의 교사(巧思)로 유명한 공수(工수)로 모두 이름난 장인(匠人)이었다. 대개 솜씨가 뛰어난 건축가(목수)를 노반 혹은 반수에 비유한다.
寶月寺 - 강원도 평강군 현내면 임단리 운마산(장고산)에 있던 절.
黃龍山 - 오압산(烏鴨山) 일명 황룡산(黃龍山)이라고도 하며 본부(안변도호부) 동쪽 60리에 있는데, 극히 높고 남쪽으로 철령(鐵嶺)과 연해 있다. 산마루에 못[池]이 있는데 날이 가물 때에 비를 빌면 매양 그 감응이 있다 하며, 골짜기 속에 또 아홉 개의 못[淵]이 있다. 가지사(迦智寺), 계정암(戒淨菴), 광덕사(廣德寺), 보현사(普賢寺) 모두 오압산(烏鴨山)에 있다. ㅡ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또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별기 지리전고(地理典故)에는 ‘산 위에 용추(龍湫)가 있다. 또 골 안에 구연(九淵)이 있는데, 물과 돌이 뛰어나게 좋으며 오압산(烏鴨山)이라고도 한다. 학포(鶴浦)의 큰 호수는 주위가 30여 리이고, 사면이 모두 흰 모래이다. 언덕의 모래 가운데에 해당화가 환하게 핀다. 약한 바람이 잠깐만 불어도 가는 모래가 날려 작게는 무더기를 이루고 크게는 봉우리를 이룬다. 경치는 영동 육호(嶺東六湖)에 비길 곳이 아니다.’
※여기에 나타난 지명은 안변지역 주변으로 지금의 강릉북부에서 원주사이의 지명을 말하는 것 같고 암자는 기록에 찾아 보기가 힘들므로 자세한 기술은 생략한다.
雪峯山之釋王寺 法堂 揭號以大雄寶殿 殿內坐釋迦彌勒藥師三如來金像者 已三百年 其久而殿有頹 像有渝 居是寺 奉是佛 諸沙門 得以重葺 得以改塗 今古非一二數 而祗自遵其規 守其制而已 寺之僧 行淨長老 始發願營理 廣募施緣 乃請關西 覺敏和尙 任其都糾正之役 遂大加恢拓 不周年而功訖 則其侈麗宏傑 居然爲諸叢林之第一指也 敏 謂淨曰 殿雖無歉 佛有未備 夫佛之有菩薩輔翼 猶人之有手臂 鳥之有羽翼 人而無手臂 人何以用 鳥而無羽翼 鳥何以飛 佛而無輔翼 佛何以敎觀於像制 佛必有左右輔翼 則今何獨闕然像設也 願與子更圖之可乎 遂捐二千銅 自爲檀越之首 淨 於是自爲化主 極力鳩聚 財濡用贍 又請嶺南僧 麗贊 授以彫彩之任 克成六菩薩眞容 儼然列坐於三如來左右 則依然靈山摩訶之舊會 此皆三上人用力之勤 而三人者 各有所長 或工於반수之技 或妙於顧張之藝 或篤於奉佛之誠 之圖之工之誠 相與之合心齊慮 結此蓮花淨界上 一大因緣 則其功德 崇且大 可謂與須彌齊矣 然而事無主管而酬應 則其成 亦難矣 故又有擇洽和尙 乃主管於前後 酬應於始終 使百事辨備 衆務修擧 則其功 亦豈下於三人者哉 是知三賴於一 而一齊於三也 無亦三如來 六菩薩 於靈界冥冥之中 降送木叉善財等 四箇大舍梨 各當一而同做其功也歟 不然 何其神助靈佐相須之若是哉 顧貧道在局外 無所備數 而隨四上人之役 獲覩無量盛擧 則庸거非幸歟 於此 竊有感於心者 佛殿之成 在於戊申 菩薩像之成 在於戊午 同一戊則固是異事 而至於平康寶月寺之釋迦像 伊川實相庵 德原 寂照庵 黃龍山 極樂庵 三所觀音像 一時而成 幷不出一戊字之外 則其默契之理 亦自有不期然而然者歟 然而成毁者 是天道自然 而毁而成者 亦人事之攸爲 則成毁之際 可見天人之交須矣 今玆四上人之功 可謂有成 而安知異日其成者 又有毁耶 若使後人 踵四上人之心 而隨其毁繼而成之 則其成而無毁 可與天壤期矣 於是爲之記 (사람인=
반(般), 반(班)과 통용한다.), (수=人부+垂), (어찌거=言부+巨)
설봉산 심적암 광흥루 창건기
雪峯山 深寂庵 廣興樓 創建記
이 암자는 오래 전에 창건 되었으나 종루(鐘樓)가 거기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혹 불사가 있을 때에는 의관과 위의를 갖추어 정돈한 용상(龍象)의 법사들이 한데에 앉게 되었으니, 그것이 또한 오랜 유감이었다.
지금 신매(信梅), 삼장(三藏), 서하(瑞荷) 등, 세 상인(上人)이 벽해(碧海)의 좁쌀과 삼림(森林)의 수(銖)를 모아 암자 앞에 누각을 세우고 이름을 광흥(廣興)이라 하였으니 그것은 만행(萬行)을 널리 닦고 자비를 일으켜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또 암자의 이름이 심적(深寂)이니 그것은 문수(文殊)의 지경(智境)으로서 서리와 눈이 하늘에 가득 차고, 누각의 이름이 광흥(廣興)이니 그것은 보현(普賢)의 행문(行門)으로서 파랑과 노랑이 땅에 가득한 것이다.
이 암자에 사는 스님네가 지혜에 머물고 누각에 오르는 사람들이 행으로 논다면 이 누각을 세우고 이름을 붙인 뜻을 거의 저버리지 않을 것이며, 지혜의 달이 하늘에 빛나고 마음의 꽃이 땅에 가득하다면 또한 문수와 보현의 경역(境域)을 반드시 밟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암자의 ‘심적(深寂)’과 누각의 ‘광흥(廣興)’이라는 뜻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이 누각의 형세는 표묘하고 영롱하여 저 담화(曇花), 법운(法雲)과 서로 겨루고 있다. 이 누각에 오르면 멀리는 백리의 상마(桑麻)와 천촌(千村)의 도리(桃李)요, 가까이는 흰 돌, 차가운 못과 우거진 나무, 짙은 숲이니 이것이 이 누각의 대관(大觀)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저 용상들이 한데 앉지 않게 될 것이며, 이 곳을 동경하여 노는 사람들도 또한 여기서 지팡이를 멈추고 어깨를 쉬게 되는 편리함을 얻게 될 것이니, 이 암자에 있어서 이 누각은 마치 용에 구슬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세 상인의 공은 이 누각과 함께 장구할 것이요, 이 누각도 또한 산과 함께 장구하게 되어 진묵겁(塵墨劫)에 멸하지 않을 것이다.
내 비록 졸문(拙文)이나 저 장로들의 은근한 뜻을 아름다이 여겨 그 대강을 간단히 적는 것이다.
曇花 - 법화경(法華經)에서 이르는 우담발화(優曇鉢花)의 약어.
智境 - 주관과 객관. 지는 능관(能觀)하는 마음이니 주관. 경은 대할 바 법(法)이니 객관적 대상. 경계에 진(眞)과 망(妄)이 있으니, 망은 지(智)에 의하여 끊어지고 진은 지에 의하여 증득된다. 지로 진경(眞境)을 체득하는 것을 증(證)이라 하니, 곧 능관의 지와 소관의 진리가 일치되는 것을 지경명일(智境冥一)이라 함.
庵之建久也 而未有鐘樓之備 或陳佛事之時 則整衣冠齊威儀之龍象法師 坐於露地 深涉病焉者 亦久矣 今信梅三藏瑞荷 三上人 鳩碧海之粟 聚桑林之銖 樓建於庵之前 而揭名曰廣興 蓋取諸廣修萬行 興悲利物之義也 且夫庵名深寂 則文殊之智境 霜雪漫天 樓名廣興 則普賢之行門 靑黃滿地 居庵之僧 以智而止焉 登樓之人 以行而遊焉 則庶幾不辜乎建樓命名之義 而智月麗天 心花滿地 則亦可躋乎 文殊普賢之域 必矣 夫深寂廣興之義 豈偶然哉 其樓勢則縹묘玲瓏 與曇花法雲相上下矣 登斯樓也 則遠者 桑麻百里 桃李千村近者 白石寒潭 茂樹濃陰 此乃斯樓之大觀也 於是焉 向之龍象 免於露地之坐 而憧憧遊客之輩 停공息肩於斯 而亦得其便 庵之與樓 如龍有珠焉 上三人之功 與樓久長 而樓之久 亦與山之長 則塵墨劫而不泯者也 余雖無文 佳其諸長老 慇懃之志而略記梗槪焉 (아득할묘=糸부+眇, 渺와 同字), (대지팡이공=竹부6획)
석왕사 관음전 중창기
釋王寺 觀音殿 重創記
때에는 원근(遠近)이 있고 사물에는 흥폐가 있는 것이다. 만일 그 남상(濫觴)을 상고하고 그 복궤2)를 기록한다면, 이 절은 홍무(洪武) 十七년(고려우왕10, 1384년) 태조 대황이 용잠(龍潛)으로 계실 때 창건한 것이요, 이 당(堂)도 또 그 때에 세운 것이니, 그렇다면 그것은 오래 된 것이며, 그 흥폐도 또한 한 두 번이 아닐 것이나 기록이 없어 자세히는 알수 없는 것이다.
가정(嘉靖) 三十년(명종6, 1551년) 신해(辛亥) 봄 병자에 화재를 만났으나 그 해에 복구하였고, 또 숭덕(崇德) 六년(인조19, 1641년) 신사(辛巳) 늦봄에 다시 화재를 만나 천년의 보기(寶基)가 하루 아침에 초토가 되었으니 그 기수(氣數)가 어찌 이처럼 불행했겠는가?
탄욱(坦旭) 상인이 복구하기 시작하여 그 해 가을에 준공하고 지금의 옹정(雍正) 九년(영조7, 1731년) 신해(辛亥)에 간준(侃俊) 상인이 재물과 공인(工人)을 모아 봄에 시작하여 가을에 준공하니, 이것이 이 당의 남상과 복궤의 시종이다.
때에는 비록 원근이 있으나 그 모두가 같은 때로서 신해(辛亥)년이니, 신(辛)이여, 신이여, 그것은 곧 이 당의 흥폐의 어머니이다. 그것은 금(金)에 위치하여 순환이 무궁하나니, 그렇다면 나는 이 당의 흥폐도 또한 무궁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이 당을 청련(靑蓮)이라고 이름한 것은 이 당에 사는 사람이 六근(根)의 적을 죽이고 一심(心)의 거울을 갈아서, 五온(蘊)의 악마를 비추고 우러러서는 九품(品)의 연계(蓮界)를 밟을 수 있다는 뜻인가 한다.
아아, 이 당의 흥폐는 곧 기수(氣數)의 성쇠(盛衰)요, 기수의 성쇠는 또한 도의 높고 낮음에 있는 것이니 만일 사람이 도로써 여기 산다면 기수의 나쁨을 거의 소멸하여 천지와 함께 시종(始終)할 것이다.
五蘊 - 범) panca-skandha 팔) panca-khandha 5취온(取蘊), 5음(陰), 5중(衆), 5취(聚)라고도 함. 온(蘊)은 모아 쌓은 것. 곧 화합하여 모인 것. 무릇 생멸하고 변화하는 것을 종류대로 모아서 5종으로 구별. 1) 색온(色蘊) - 스스로 변화하고 또 다른 것을 장애하는 물체. 2) 수온(受蘊) - 고(苦), 락(樂), 불고불락(不苦不樂)을 느끼는 마음의 작용. 3) 상온(想蘊) - 외계(外界)의 사물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상상하여 보는 마음의 작용. 4) 행온(行蘊) - 인연으로 생겨나서 시간적으로 변천함. 5) 식온(識蘊) - 의식(意識)하고 분별함.
時有遠近 物有興廢 若考其濫觴 以記其覆궤 則此寺 洪武十七 太祖大王 龍潛時 創建也 此堂 亦一時而幷焉 則其來 久矣 興廢 亦非一二 而未有記徵 難以詳悉也 嘉靖三十年辛亥 春 丙子 肆焰而其年營之 又於崇德六年辛巳 暮春 再罹魔火 千年寶基 一朝燋土 則何氣數之不幸 至於是耶 坦旭上人 幹善之 亦其年 秋 畢功也 今之雍正九年辛亥 侃俊上人 鳩財募功 春而運斤 秋而斷手 此乃玆堂 濫觴覆궤之始終也 蓋時雖遠近 同時辛亥 則辛乎辛乎 渠孕此堂 興廢之母也 渠位乎金 而循環無窮 則吾信此堂興廢 亦無窮也 堂以靑蓮號者 居此堂者 殺六根之賊 而鍊一心之鏡 以照乎五蘊魔膽 則可躋乎九品蓮界矣 肆揭名者 以此歟 噫 此堂之興廢 乃氣數之盛衰也 數之盛衰 亦道之汚隆也 人若以道 而居則庶消乎數之詳 而與天地 相終始也 (삼태기궤=竹부+貴)
석왕사(釋王寺)의 五백 나한(羅漢)과 금가사(錦袈裟)의 개조기(改造記)
釋王寺 五百羅漢 錦袈裟 改造記
만엽(萬葉)의 큰 기초는 三연(椽)의 길몽(吉夢)에 근본하였고, 천추의 보배 역사는 五백 성자(聖慈)의 도움을 입은 것이니, 五백 성인이 여기 오신 자취가 어찌 우연이겠는가.
성조(聖祖)께서 용잠(龍潛)으로 계실 때 초막의 진인(眞人)으로서 토굴의 신승(神僧)을 만나 부처의 하늘에 정성을 다 하고 복덕의 땅에 마음을 기울여 해양 광적사(海陽廣積寺)의 五백 나한을 배에 싣고 와서 이 산에 봉안하시고는 재를 베풀고 기도하셨다. 등극(登極)하신 뒤에는 이내 임궁 범찰(琳宮梵刹)을 창건하시어 백 八인의 운납(雲衲)을 수용하고, 또 비단 가사를 지어 五백 나한에게 입히시니, 영취(靈鷲)의 도량에 어렴풋하고 천태(天台)의 면목에 방불하였다.
위대하여라, 옛날의 초막이 나라(國)로 화하였고 옛날의 토굴이 절로 화하였으니 그 초막을 화하여 나라가 된 것을 생각하면 실로 무학(無學)의 공을 힘입은 것이요, 토굴이 화하여 절이 된 것은 또한 성조(聖祖)의 덕을 힘입은 것이다.
또 절을 세움이 오래 된 것과 같이 나라를 세움도 그와 같다. 그러므로 대웅전(大雄殿)은 세 번 흥폐를 겪어 물이 새고 퇴락하였으며, 비단 가사는 한 번도 바꾸지 못해 티끌을 뒤집어 쓰고 다 헤어졌으니, 성조의 자취가 거의 멸하게 되었었다.
그런데 여기 행정(行淨) 장로는 마음이 녹녹하지 않고 기운은 쟁쟁함을 안은 스님이다. 옹정(雍正) 황원(黃猿=戊申) 봄에 이르러 법당을 중수하려고 오랫동안 내사(內司)에 글을 올려 상방(尙方)의 내림을 많이 얻었고, 또 도백(道伯)의 도움을 보태어 비로소 법당을 짓는 근부(斤斧)의 큰 역사를 일으켰다.
또 가사를 고쳐 지으려고 서울에 올라가 자균니(慈均尼)에게 청탁하고, 자균니는 다시 나인 철애(內人鐵愛)에게 알렸으며, 철애는 또 대내전(大內殿)에 아뢰었으니, 선왕(先王)의 자취가 없어짐을 개탄하고 후세의 인연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五색의 갖가지 비단 三천 여척과 七보의 패물 영락 五백 여개와 갖가지 소용되는 것을 모두 넉넉히 내리셨다.
그리하여 八방의 고선(高禪)을 청하고 가사회(袈裟會)를 양주 운수사(雲水寺)에 베푸니, 운수사는 곧 선왕이 복을 빌던 절이다. 백 八인을 한정하여 한 달 안에 바느질을 마치고 이 절에 돌아오니 곧 기유년 여름이었다.
이에 대웅(大雄), 응진(應眞), 二전(殿)의 불상 六존(尊)과 천자(天子)의 원불(願佛)인 주상(鑄像) 三존과 五백 성상도 명령하여 다 개금(改金)하게 하였으니, 어찌 천태(天台)의 외로운 달이 거듭 밝고 영취(靈鷲)의 남은 바람이 다시 분 것이 아니겠는가. 나아가서는 비단 일산 두 개, 병풍 두 개, 유리 산호잔 등, 갖가지 보배 완구(玩具)는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이런 일은 천고에 드문 일이니 어찌 붓이나 말로 다 형용하여 후세에 전하겠는가.
또 기이한 자취가 있으니, 말하자면 옛날 만력(萬曆) 무신년에 일찌기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 동안이 무신년이 두 번 지난 백 二十 一년이다. 때는 비록 원근이 있으나 모두가 다 무신년이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닌가. 선왕의 희유한 자취를 계승하여 후대의 태평한 업을 힘쓴 것은 오직 이 뿐이다.
또 성화(聖化)가 여기에만 미친 것은 행정 장로의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될 수 있으며, 무학 화상의 부촉이 없이 어찌 이렇게 될 수 있었겠는가. 옛말에 ‘지인(至人)은 무공(無功)’이라 하였지마는 이 스님의 공은 그래도 기록할 만한 것이다.
廣積寺 - 함경북도 성진군 학서면 세천동 설봉산에 있는 절.
琳宮 - 도가(道家)의 사원(寺院)을 말함이나 여기서는 절로 통한다.
梵刹 - 정찰(淨刹), 보찰(寶刹), 성찰(盛刹)이라고도 한다. 범은 깨끗하단 뜻. 찰은 번간(번杆)이란 뜻. 곧 부처님을 모신 절을 일컫는 말. (기번-方부14획)
雍正 黃猿 - 1728년(영조4). 만력(萬曆) 무신년 - 1608년.
內司 - 내수사(內需司). 왕실 재정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아.
尙方 - 상의원(尙衣院). 임금의 의복과 궁내의 일용품, 보물 따위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아.
道伯 - 관찰사(觀察使). 감사(監司), 관찰(觀察), 도신(道臣), 방백(方伯).
至人無功 - 장자 내편 소요유(莊子 內篇 逍遙遊)에 '지인은 자기가 없고, 신인은 공을 세우지 않으며, 성인은 이름을 구하지 않는다’ (故曰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이라 했다.
希有 - 고맙고도 드물게 있는 것이란 뜻. 곧 아주 드물고 진귀한 것. 그와 같은 예가 없는 것.
蓋萬葉洪基 乃本乎三椽吉夢 千秋寶歷 亦籍於五百聖慈 則五百聖 來此之迹 豈徒然乎 聖祖 龍潛時 以草屋眞人 逢土窟神僧 竭誠佛天 傾心福地 海陽 廣積寺 五百羅漢 舟載而來 安于玆山 設齋祈■ 而登極之後 仍創琳宮梵刹 以容其百八雲衲 又製錦繡袈裟 以衣其五百羅漢 依희乎靈鷲道場 彷彿乎天台面目 大矣哉 昔之草屋 化爲國 昔之土窟 化爲寺 可想其化家爲國者 實賴無學之功也 化窟爲寺者 亦賴聖祖之德也 且建刹之久 開國之竝 大雄殿則三經興廢 而帶漏朽落 錦袈裟則一末改換 而蒙塵破境 聖祖之跡 庶幾泯矣 爰有行淨長老 心袪碌碌 氣抱錚錚者也 至雍正黃猿之春 以法殿重修事 進于內司 入啓依久 而多得尙方之賜 又添道伯之助 始起法殿 斤斧大役 又以袈裟改換由上 京諭于慈均尼尼 轉報內人鐵愛愛 又告內 大殿 慨其泯 先王之跡 圖其後世之業 五色錦繡綾羅 三千餘尺 七珍寶佩纓珞 五百餘箇 種種所用 一一優賜 則請八表高禪 設袈裟會於楊州雲水寺 寺卽先王冀福之場也 數以百八人限 一朔內畢針 而歸于玆寺 卽己酉夏也 於是 大雄應眞二殿 佛像六尊 天子願佛鑄像三尊五百聖像 亦命改金焉 豈非天台孤月重明 靈鷲餘風再扇乎 至若錦蓋二座 屛風二部 琉璃甁珊瑚杯 種種珍玩之具 不可盡記 如斯之事 千古所罕 豈可以形容筆舌而傳於後也 又有奇異之跡 蓋嘗言之 昔萬歷戊申 曾有是焉 其間 三周戊申百二十一年也 時雖遠近 同是戊申 則可不謂之異乎 繼先王希有之跡 懋後代泰平之業者 其惟是歟 且夫聖化 偏及於此者 微淨長老精念之至 烏能如是 無乃受囑於無學和尙而然耶 古云至人無功 此師之功 尙可記乎 (비슷할희=人부+希)
덕원 명적사 주종기
德原 明寂寺 鑄鍾記
종의 형체는 둥글고 속이 비며 소리는 웅장하면서 맑고도 멀리 간다.
인계(人界)에 울리면 들음을 돌이켜 소리를 듣고 진근(塵根)을 벗어나 원통(圓通)을 얻는 이가 강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으며, 지부(地府)에 두루 미치면 괴로움을 쉬고 고생을 멈추어 업의 바다를 벗어나 정역(淨域)에 오르는 자가 티끌 수처럼 무궁하다. 그러므로 그 물건의 작용은 위대한 것이다.
화마년(火馬年=丙午年)에 본부(本府)의 김 순철(金順哲)과 본사의 스님 체련(體連)이 재물을 거두고 공인(工人)을 불러 처음으로 이 종을 만들었으나, 형상이 비뚤어지고 소리가 맑지 못해 빈 누각에 버려진지 十二년이 지났었다.
토마년(土馬年=戊午年)에 이르러 거사 쌍념(居士雙念)이 촌사(寸絲)를 빌고 편금(片金)을 거두어 이 종을 다시 만들었다. 형상이 원만하고 치면 울리어 그 소리는 성루(星樓)를 떨치고 그 메아리는 운구(雲衢)에 사무치니 여러 개의 여우 가죽을 모아 갖옷을 만들고 모든 냇물을 끌어 바다를 이루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무게는 五백근인데 몇 백년이나 전해 내려왔는지 알 수 없다.
또 초창(初創)의 공과 중주(重鑄)의 공에 있어서 그 경중(輕重)은 어떠한가. 전공(前功)의 폐(廢)를 지내지 않으면 금공(今功)의 흥(興)은 나타나지 않으며, 금공을 말미암지 않고는 전폐(前廢)를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니, 흥폐는 서로 따르고 전후가 서로 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후의 흥폐로써 공의 경중을 따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전후의 공이 아울러 내세에 까지 전하게 됨을 상상할 수 있다. 나는 글을 못하는 자인데 남명 붕 선사(南溟鵬禪師)가 내게 기문을 청하였다. 나는 굳이 사양하였으나 선사의 청이 간절하였으니, 내 어찌 글을 못한다 하여 굳이 거절해서 되겠는가. 붕선사의 말에 의하여 전후의 공을 적으면 되는 것이니, 이에 써서 기문으로 삼는 것이다.
德源 - 고구려 때의 천정군(泉井郡)인데 어을매(於乙買)라고도 한다. 신라 때 정천(井泉)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용주(湧州)라고 일컬었고 뒤에 의주(宜州)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의천(宜川)으로 고쳤다. 세종 정사년에 덕원군으로 고쳤고 을축년에 부로 올렸다. 사조(四祖) -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 - 의 고향이다. 덕주(德州)ㆍ동모(東牟)ㆍ의춘(宜春)ㆍ의성(宜城)ㆍ춘성(春城)이라고도 한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지리전고(地理典故)에서 발췌.
明寂寺 - 강원도 원산시 영삼리(永三里)에 있는 절.
根塵 - 또는 근경(根境). 눈, 귀, 코, 혀, 몸의 5근(根) 또는 뜻을 더하여 6근과, 빛, 소리, 냄새, 맛, 촉감의 5진(塵) 또는 법진을 더하여 6진과를 말함.
圓通 - 주원융통(周圓融通)
淨域 - 정계(淨界)와 같음. 청정한 지역(地域). 절 또는 영지(靈地). 또는 제불의 정토.
雲衢 - 허공(虛空).
夫鍾之爲形 圓而虛 聲之爲雄 淸而遠 嗚乎 人界 則返聞聞聲 而脫根塵 獲圓通者 河沙莫算 遍乎地府 則息苦停酸 而超業海登淨域者 塵數無窮 其物之爲用 大矣哉 歲在火馬 本府金順哲 本寺僧 體連 鳩財召工 初創此器 則形而有缺 聲而未淸 虛樓上爲棄物 而已過一紀矣 時至土馬 居士雙念 乞寸絲 收片金 重鑄斯物 則形而圓 扣而鳴 聲振星樓 響徹雲衢 可謂集衆狐以爲裘 引百川而成海者也 其重則五百斤也 而不知其傳之久 至幾百年矣 且夫初創之功 重鑄之功 誰輕誰重 蓋不遇前功之廢 不現今功之興 不由今功 不興前廢 興廢相尋 前後相應 然則不可以前後興廢 爲功之輕重也 可想其前後之功 幷傳於來世者矣 余無文者也 南溟鵬禪師 請記於余 余辭而固 師請而懇 豈以無文牢讓 可以鵬師之言 記前後之功 足矣 書而爲記
석왕사 관응당기
釋王寺 管應堂記
옛날에 이 집 이름을 관응(管應)이라 한 것은 잘못을 바로잡아 일에 응한다는 뜻이다.
성조(聖祖)께서 용흥(龍興)하실 때에 창건하여 그 흥폐(興廢)가 한결같지 않았었다. 정덕(正德), 만력(萬曆), 숭정(崇禎) 三대(代) 사이에 한 번 중수하였고, 강희(康熙) 신사년에 이르러 그 주지 염탁(染濯)이 모든 일을 오로지 맡아 고쳐 세웠으니, 이것은 곧 전후 흥폐의 대강이다.
또 옹정(雍正) 三년 을사에 보월산인 밀엄(寶月山人密嚴)이 이 절 주지로 부임하여 항상 탄식하기를
‘이른바 관응당이란 잘못을 조사해 바로잡아 법으로 다스리는 곳인데, 대웅전(大雄殿) 곁에 너무 가까이 있으니, 이것이 옮기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의 첫째이다.
또 이른바 운헐당(雲歇堂)이란 사해(四海)의 운납(雲衲)들이 쉬는 곳인데 옛날에는 지었지마는 요새 인심은 옛날과 달라 승속간의 범부들이 빈 방에 모여서는 혹은 서로 싸워 죽음에까지 이르며, 혹은 도둑질로써 물건의 손해를 끼치는 폐단이 있으니 이 또한 오래 둘 수 없는 이유의 그 둘째이다.
또 손님을 맞이하는 별관(別館)이 없기 때문에 크고 작은 사신들의 행차가 절에 들게 되면, 대접하는 음식을 승주(僧廚)에서 만들게 되어 어육(魚肉)의 비린내가 도량에 가득 차니, 이것은 더구나 별관이 없을 수 없는 이유로서 그 세째이다.’
하였다. 이상의 세 가지 불가한 것을 개탄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갈려 가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듬해 정미년 봄에 또 그는 이 절의 선종(禪宗)으로 부임하면서 이전의 소원을 따라 굳이 주장하여 여기에 터를 정하였다. 그런데 그 지형이 위는 높고 밑은 낮아 마치 벼랑 같았으므로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인부 二천 三백여명이 돌을 쌓아 뜰을 만드니 높이가 몇 길이었으므로 흙을 져다 메우니 두께가 十척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이전의 관응, 운헐의 두 당을 합해 방 하나를 만들고는 아래 위를 갈라 영빈관(迎賓館)을 만들고 중간의 빈 곳을 규정헌(糾正軒)으로 하였다. 그리고 행랑을 크게 트고 지대가 없이 쪽 곧으니, 그 건축의 장려함이 그보다 뛰어난 것이 없었다. 스님에게 있어서는 손님을 맞이하는 예의가 있게 되고 손님에게 있어서는 흥취를 풀 경치가 있게 되었다.
어찌 그 뿐인가. 묵은 손님을 보내자마자 또 새 손님이 오며, 위 별관의 자리를 걷자마자 아래 별관에 또 자리를 펴게 되어 맞이하고 보내는 날이 끝이 없으니, 이 당의 쓰임새가 실로 이와 같았다.
주인은 시비(是非)가 없는 몸인데 시비가 있는 이름을 얻으면 혹은 기뻐하면서 사례하고, 혹은 성내면서 꾸짖게 되니, 무릇 주인의 풍도가 어찌 이와 같아서야 되겠는가. 이에 주지는 세 가지 병이 없이 백세의 공을 남기게 되었으니, 지팡이를 던져 물을 끊고 한 손으로 하늘을 받드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옛날에 월주(越州)의 탑을 세운 사람은 三생을 지나서야 이루었고, 지금이 집에 사는 사람은 一생 동안 걸려 지었으니 그 궤도는 다르나 돌아가는 곳은 같은 것이다. 더구나 임천(林泉)의 뛰어남에 있어서는 오직 이 당에 오르는 사람의 보는 눈에 달렸기 때문에 여기서는 쓰지 않고, 그 흥폐의 대강만을 적는 것이다.
古揭此堂之名曰 管應 蓋管糾應事之謂也 肇基於聖祖龍興之時 而興廢不一焉 正德萬曆崇禎 三代之間 皆一番重修 而至康熙辛巳歲 住持 染濯 執規專事而改建焉 此乃前後興廢之大較也 又至雍正三年乙巳 寶月山人 密嚴 初赴此寺住持之任 而心常歎曰 所謂管應堂者 糾正治法之所 而逼近於大雄殿之側 此其不可不移者 一也 所謂雲歇堂者 四海雲衲 休歇之所也 古雖營矣 今之人心 不古 僧俗間 庸常之輩 聚于空室 或有鬪諍 而至於死生之患 或有偸竊 而至於損物之弊 此亦不可久存者 二也 又無延賓別館故 大少使臣行次 入于僧寮 則供需支應 又設於僧廚 而魚肉腥臊之氣 滿于道場 此尤不可無館者 三也 深有此三種不可之病 而未遂其志而遞去矣 越丁未春 又拜于此寺禪宗 以躡前願 而寔尸之卜基於此 則地形 上高下低 如崖無地 費軍二千三百餘名 築石而階之 高幾數仞 負土而塡之 厚及十尺 於是 向之管應雲歇兩堂 合構一室 分上下而爲延賓之館 取中虛而爲糾正之軒 通廊大無 翼舒繩直 輪奐壯麗 無出于此也 於僧有延賓之儀 於客 有飛興之景矣 且夫宿客才送 新賓又至 上別館 才捲席 下別館 又設筵 送之迎之 日之無窮 凡此堂之用 固如是也 主人 以無是非之身 得是非之名 或喜而謝之 或怒而罪之 凡主人之度 豈如是歟 於是焉 主持 無三種之病 而留百世之功 可謂投공斷流 隻手驚天者矣 昔建越州塔者 三生之後 成之 今作此堂者 一生之中營之 殊轍而同歸者也 至若林泉之奇勝 只在登堂者之選目 故不及筆 而略擧興廢之較爾 (대지팡이공)
덕원부 반룡산 천주암 신건기
德原府 盤龍山 天柱庵 新建記
춘성부(春城府)에 한 큰 신사(信士)가 있으니 그 성은 맹(孟)씨요 이름은 천덕(天德)이다. 그는 산업을 경영하지 않고 날마다 미타(彌陀)를 외우면서 세속에 있으면서 세속에 섞이지 않고 티끌 속에 살면서 티끌에 물들지 않으니, 이른바 세속을 뛰어나고 티끌을 벗어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백구(白狗=庚戍)년 봄에 조 일남(趙日男), 홍 여상(洪呂尙) 등과 더불어 일심으로 노력하여 산수 사이에 큰 역사를 시작해 한 암자를 짓고 그 이름을 성불(成佛)이라 하였다. 그러나 땅이 영(靈)하지 않고 신(神)이 보호하지 않아, 중이 흩어지고 절도 또한 폐사(廢寺)가 되어 전공(前功)이 매몰하게 되었으니 실로 가석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적룡(赤龍=丙辰)의 해에 형제봉(兄弟峰) 밑으로 옮겨 세우니 그 봉은 반룡(盤龍)의 남은 맥(脈)이므로 그 산을 반룡산이라 하고 그 암자를 천주암(天柱庵)이라 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천주암이라 했는가. 하나는 봉의 형상을 취한 것이요, 또 하나는 사람의 이름을 취한 것이다. 봉의 형상인즉 위로 동남쪽의 하늘을 떠받친 것이 꼭 여와(女媧)가 돌을 단련하여 하늘을 깁는 형상이요, 사람의 이름인즉 이룬 사람의 이름이 천덕(天德)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그 덕을 주어 이 암자를 이룬 공덕을 전하여 천주와 더불어 썩지 않기 때문에 천주라 한 것이니 참으로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이 암자가 이루어지자 내게 그 기문(記文)을 부탁하므로 나는 사양하다 못해 다음과 같이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석원(釋苑)의 사람이 범찰(梵刹)이라는 말을 듣고 서교(西敎)를 숭상한다는 것은 원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공문(孔門)의 선비로서 선우(禪宇)를 짓고 불도를 존중하는 것은 실로 드문 일이라 할 것이다.
또 보이는 것은 난간 밖의 푸른 산이요 들리는 것은 뜰 아래 푸른 물이다. 이 암자에 사는 스님으로서 이것을 보고 듣고도 그 소리와 빛깔의 경계에 빠지지 않고 심지(心地)가 안한(安閑)하면 유심(惟心)의 정토(淨土)를 밝게 통달할 것이며, 정토가 곧 이 암자요 이 암자가 곧 정토이어서 자성(自性)의 미타(彌陀)를 환히 깨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룬 자의 공을 알아 연대(蓮臺)를 밟을 수 있을 것이요, 그렇지 못한다면 이룬 자의 공을 모르고 올빼미가 썩은 쥐고기를 쪼이고 개가 마른 뼈를 씹으면서 주림의 불[火]만을 더할 것이다. 여러 형제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아아, 상산(商山)의 연하(煙霞)와 부춘(富春)의 영수(靈邃)도 엄릉(嚴陵)의 뛰어난 발자취와 사호(四皓)의 높은 발자국이 아니었더면 응당 쓸쓸할 뿐이었을 것이다. 지금 이 암자의 터도 이 사람을 만나 세상에 나타났으니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겨 두었다가 이 사람을 기다렸던 것이다.
나는 세속을 뛰어나고 티끌을 벗어난 선비와 본래부터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이 기문을 쓰는 것이다.
信士 - 우바새(優婆塞). 불교를 믿고 배우는 재가(在家)의 남자. 청신사와 같음.
女媧가 돌을 ~ 있는 것이다. - 참으로 기이한 인연입니다. 옛날 공공(共工)이 축융(祝融)과 싸워 이기지 못하자 머리로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았으므로 천주(天柱)가 부러지고 지유(地維)가 끊어졌다. 그리하여 여와씨(女媧氏)가 오색(五色)의 돌을 다듬어 하늘을 깁고, 자라의 발을 잘라 사방을 받쳤다 한다. 회남자 남명훈(淮南子 覽冥訓)중에서.
蓮臺 - 연화좌(蓮華座), 화좌(華座), 연화대(蓮華臺), 화대(華臺)라고도 함. 불 보살이 앉는 연화의 대좌(臺座). 연화는 진흙 속에 나서도 물들지 않는 덕이 있으므로, 불 보살의 앉는 자리로 삼음. 더러운 국토에 있으면서도 세상 풍진을 여의고, 청정하여 신력이 자재한 것을 나타냄.
嚴陵 - 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 엄광(嚴光), 자는 자릉(子陵). 광무제(光武帝)와 어려서부터 절친한 사이였던 그는 광무제가 천자가 되자 자취를 감추고 은거하였는데, 광무제가 찾아내어 잠자리를 함께하기까지 하였다. 광무가 물색 끝에 찾아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였으나 받지 않고 부춘산(富春山)에 숨어 밭 갈고 고기 낚으며 여생을 마쳤다. 후한서(後漢書) 에서.
四皓 - 중국 진시왕 때 국난을 피하여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상현(商縣) 동남쪽 상산(商山)에 들어가 숨은 네 사람의 은사(隱士).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녹里先生)을 말하는데 네사람 모두 의관이 정제하고 수발(鬚髮) - 눈썹과 수염 - 이 모두 희었다 한다. 한 고조(漢高祖)가 태자(太子)를 폐하고 척 부인(戚夫人)의 아들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세우려 하매, 여후(呂后)가 장량(張良)의 꾀를 써서 상산사호(商山四皓)을 맞아왔다. 상산사호가 당시 태자였던 혜제(惠帝)를 적극 도우므로, 고조는 척 부인을 보고 “나는 태자를 바꾸고 싶으나 상산사호가 도우므로 우익(羽翼)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바꾸기 어렵다.” 하고 마음을 바꿨다 한다.
春城府中 有一大信士 姓其孟 名其天德也 不營産業 日課彌陀 處俗而不雜乎俗 居塵而不染乎塵 所謂拔俗出塵者也 歲白狗春 與趙日男洪呂尙等 一心拮據 竣浩役於山水之中 結構一庵 名之曰成佛 地非靈而神不護 僧猶散而庵亦廢 湮沒前功 實爲可惜 故歲舍赤龍 移建于兄弟峯下 其峯則盤龍之餘脈也 故名其山曰 盤龍 名其庵曰 天柱 天柱 奚取焉 一以取峯形 一以取人名 峯形則上柱于東南之天 政是女媧鍊石補天之形也 人名則成者之名天德也 必天與其德 以成此庵 則之功之德之傳 與天柱而不朽者也 故曰天柱 其有深旨哉 庵旣成 屬余爲記 余辭不獲 乃曰 釋苑之人 聞梵刹 崇西敎 固是常事 孔門之士 營禪宇尊佛道 實可稀有也 且夫所見者 檻外靑山 所聆者 階下綠水 居庵之僧 卽此見聞 而不落聲色之境 心地安閑 則洞達惟心淨土 淨土卽此庵 此庵卽淨土 豁悟自性之彌陀也 若然則知成者之功 而可躋於蓮臺矣 不然則昧成者之功 而鴟啄腐鼠 狗嚙枯骨 重增飢火矣 願諸兄弟家 宜可知也 噫 商山之烟霞 富春之靈邃靡 嚴陵之逸跡 四皓之高蹈應 寂然無爾 今此庵之基 遇此人而顯於世 蓋天慳地祕 以待此人者乎 余與拔俗出塵之士 素有交契而不敢辭爲之記
석왕사 명부전 중창기
釋王寺 冥府殿 重創記
대개 청탁(淸濁)의 본체가 이미 나타나매 선악의 근원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九천(天) 위에서 선악과 상벌의 조목을 열고 十지(地) 밑에 윤회와 응보의 법이 있는 것은 염왕(閻王)이 일어난 까닭이 되고 상제(上帝)가 생긴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인간에도 염라전(閻羅殿)을 세우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끊고 선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절을 세움과 나라를 세움이 다 같이 오래 되었으므로 이 명부전도 세운지 오래 되었다. 그래서 용마루와 들보는 기울어 위태하고 서까래와 처마는 제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므로 거기 사는 스님이나 지나가는 나그네가 모두 개탄하였던 것이다.
운곡자 천건(雲谷子天建) 대사가 기(驥)의 한 털을 거두고 용(龍)의 조각 껍질을 모아 그 묵은 제도를 고쳐 새 모양을 보태었으니, 퇴락한 것을 다시 수리하고 끊어진 노[楫]를 다시 이었다 할 수 있다. 응진 상인(應眞上人)이 五채(彩)를 갖추어 三간(間)에 그림을 그리니 솟은 날개가 날으는 것과 같아 눈을 돌리면 반드시 눈부시며, 쌍오(雙五)의 염왕(閻王)이 그 안에 섰으니, 인간의 선악과 인과를 맡아 살피는 자로서 어찌 이 명부전을 떠나랴. 염라국(閻羅國)과 비슷한 것이다.
그 남상(濫觴)의 처음과 복궤의 마지막을 살펴보면 처음 창건이 성화(成化) 六十 一년 경인에 있었고, 중수는 또 순치(順治)의 경인에 있었으며, 지금의 중건 또한 건륭(乾隆)의 병인에 있어서 세 번의 영집(營葺)이 모두 지지(地支)의 인(寅)년인즉 천도의 순환으로 그 숫자가 서로 맞으니, 어찌 이상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장하다! 운곡의 세움이 이미 새로왔고 응진의 그림이 또한 묘하여 일월과 다투는 그 빛이 시내와 골짝을 비추어 빛나니, 성신(星辰)과 운하(雲霞)는 하늘의 문채요 초목과 금수는 땅의 문채이며, 그 문채의 지극한 것은 오직 이 명부전의 정교한 五채(彩)이다. 응진의 그림으로 인하여 운곡의 공을 나타내었으니, 경위가 서로 걸맞고 내외가 서로 응하는 것이다.
또 학순(鶴淳) 비구는 물건의 많고 적음을 알고 일의 처음과 마지막을 힘썼으니 그 공도 또한 위의 두 사람과 같다. 그러므로 세 사람의 공과 흥폐의 대강을 간단히 적어 기문으로 삼는 것이다.
夫淸濁之體 旣彰 善惡之源是顯 故九天之上 開善惡賞罰之條 十地之下 有輪廻報應之科 則閻王之所以興也 上帝之所以作也 人間 亦建閻羅殿者 令人 斷惡歸善之所以也 蓋建刹之久 開國之幷 則此殿亦久 而棟樑傾危 椽梠差脫 居僧過客 無不咸歎矣 雲谷子天建大師 收驥之一毛 集龍之片甲 革其舊制 增其新樣 可謂頹破重整 斷楫復續也 應眞上人 因備五彩 以繪三間 聳翼如飛 回眸必眩 雙五之閻王 列立於其內 而司察人間 善惡因果者 其離此殿歟 依희然閻羅國也 審其濫觸之始 覆궤之終 則初創 在成化六十一年庚寅 重修 又在順治庚寅 今重建 亦在乾隆丙寅也 三番營葺 皆地支之寅年 則天道巡環 冥數默契者 豈非異常之跡乎 美哉 雲谷建之旣新 應眞彩之又妙 爭光日月 照曜溪壑 則星辰雲霞 天之文也 草木禽獸 地之文也 而其文之至者 惟此殿之五彩精窮也 因於應眞之彩 顯於雲谷之功 經緯相投 內外相應者也 又有鶴淳比丘 知物之多少 務事之始終 功亦齊於二人也 故略擧三人之功 興廢之較 以爲記 (비슷할희=人부+希), (삼태기궤=竹부/貴)
비음기
碑陰記
선사(先師) 환성 선사(喚惺禪師)가 세상을 떠나신지 오래 되어 도덕의 근원이 세상에 나타날 수 없으므로 마음에 한이 맺히었었다.
기묘년 가을에 조그만 비를 세우기 위해 그 문인 궤홍(軌弘)으로 하여금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신사년 첫 여름에 그는 서울에 올라가 구계 상공(龜溪相公)에게 비명(碑銘)을 청하고 한 달을 머물러 비로소 얻었으니 그 수고가 여간이 아니었다.
늦여름에 또 표충(表忠)의 책임을 맡아 문정(門庭)에 발표하였더니 그 의논이 여일하였다. 그러나 남방에는 좋은 돌이 없으므로 법손 유일(法孫有一)이 그 가을에 다시 서울에 올라가 백금(百金)을 넘게 주고 돌을 두 개 사서 비명을 새기고는 배에 싣고 돌아오니 임오년 첫 여름이었다.
소역(小役)은 아무와 아무요, 그것을 발의(發議)한 것은 손자 아무며, 관리는 아무가 하고 목수는 손자 아무로서 마침내 이 일을 이루었으니, 어찌 명명(冥冥)한 속에서도 그러할 줄을 알았던가.
문인(門人) 아무가 삼가 지음.
※ 이글의 지은이는 모른다.
先喚惺禪師 歸寂已久 而道德淵源 無以章顯於世 恨結心腑矣 己卯秋 營豎小碣 使門人軌弘蕫其役 辛巳初夏 上京 개銘於龜溪相公 留一朔而始得其間 彈苦非一也 季夏 泓 又赴表忠之任 發布門庭 其議如一 而南無好石 故法孫有一 曁秋雨至京都 逾百金買 二石鐫已 船海而南 卽壬午初夏也 小役某某發其端 孫某管某工 孫某終成 斯豈冥冥中 有知歟 門人某謹記 (빌개=一부3획)
괴음정기
槐陰亭記
원(院)의 북쪽 모퉁이에 훼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크기는 열 아름이요, 높이는 백 길이며 가지는 백천만억으로서 가지마다 하늘에 닿았고 잎마다 해를 가리웠으며 짙은 그늘은 땅에 가득하고 맑고 시원한 기운을 사람에 쏟으니, 생각컨대 각수(覺樹) 그늘에 보리(菩提)의 신(神)이 아마 여기 있으리라. 또 향수(香水) 가의 군다니(軍茶尼) 나무가 과연 이처럼 컸겠는가.
흑양(黑羊=癸未) 여름에 완월(翫月) 법사가 공인(工人)을 시켜 이 정자를 지을때, 채찍을 들고 돌을 몰아 뜰을 만드니 높이가 여러 길이었고, 삼태기를 메고 흙을 져다 채우니 두께가 열 자나 되었다. 여러 길의 높이가 태산보다 높고 열 자의 길이가 바다보다 깊었다. 왜냐 하면 이것을 관리하는 주인의 그 지혜의 높이가 태산보다 높고 주인의 도량이 바다보다 넓기 때문이니, 이것을 지은 사람도 그와 같아서 산과 바다처럼 높고 깊다.
또 돈대 밑의 돌을 빼어 흙과 모래를 쳐내고 물을 끌어다 연못을 만드니 맑은 물을 내려다 보면 마치 거울이 얼굴을 비추는 것과 같다.
옛날에 기구하던 곳이 오늘에 평탄하게 되었으니 묵객(墨客)들은 여기서 시를 짓고 짐꾼들은 여기서 어깨를 쉬나니 사방의 맑은 바람은 땀 난 얼굴의 가을이요, 한 못의 흐르는 물은 타는 마음의 눈이다.
표표(飄飄)히 어구(御寇)가 바람을 타는 뜻을 내고, 묘묘(渺渺)히 왕교(王喬)가 학을 타는 생각이 많으며, 허리에 十만전(錢)을 찼나니 어찌 양주(楊州)를 부러워하고, 손으로 八만권을 펴나니 서토(西土)를 길이 사모한다. 진실로 선정(仙庭)이라 할 수 있고, 또한 불굴(佛窟)이라 할 수 있으며, 푸른 버들에 황금 꾀꼬리요 흰 돌에 찬 못이니 이것이 이 정자의 기관(奇觀)이다. 초택(楚澤)의 산천과 무릉(武陵)의 선경(仙境)도 감히 여기에 비길 수 없으니 티끌 속의 구릉(丘陵)이 뛰어난 경치를 숨겼다는 것이 참으로 진실한 말이다.
이 완월 주인은 바루 하나로 만종(萬鍾)을 가벼이 여기거니 어찌 구태여 방자한 마음으로야 그렇게 되겠는가. 청익(淸益)을 대하는 여가에 적으나마 그윽한 흥취를 붙여 이 정자를 지은 것이니, 이는 인간 밖의 사람인가!
香水 - 향수해(香水海). 향수로 가득찬 바다.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우주는 9산 8해(九山八海)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앙에 있는 수미산은 8산 8해가 둘러싸여 있다고 한다. 그 8산 8해 가운데 염수(鹽水)로 이루어진 제 8해(第八海)를 제외한 나머지 바다는 모두 향수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翫月 - 석왕사 궤홍(軌泓, 1714~70)의 법호. 속성은 한(韓)씨. 청주 사람. 12세에 평강 보월사(寶月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함월해원(涵月海源)선사에게 불법을 배워 그 종(宗)을 전하고, 항상 함월을 따라 안변 석왕사에 있었다.
御寇 - 열어구(列禦寇)로서 열자(列子)를 말하고 열자(列子)는 바람을 타고 다닌다고 하였다. (장자 소요유편).
王喬 - 후한(後漢) 왕자 교(喬)로서 태자 시절에 왕에게 직간하다가 폐해져 서인이 되었다. 그는 젓대(퉁소)를 불어 봉황새 소리를 내었으며 도사(道士) 부구생(浮丘生)을 만나 흰 학을 타고 숭산(崇山)에서 살았다 한다. 죽은 지 10년 뒤에 다시 그 산위에 와서 환량(桓良)에게 ‘우리집 사람들에게 7월 7일 구씨산(緱氏山)에서 나를 기다리라고 하라.’ 하였는데, 과연 그날 백학을 타고 왔다 한다.
楚澤 - 전국 시대 초 나라 소택(沼澤). 지금의 동정호(洞庭湖)를 이름인지는 확실치 않다. 굴원(屈原)의 행적이 전해지는 곳이며, 그곳에는 난초와 국화가 많았다 한다.
萬鍾 - 많은 녹봉. 종은 용량(容量)의 단위로서 6곡(斛) 4승(升)이다 (6섬 4말).
院之坎隅 有一槐 其大十圍 其高百仞 枝生百千萬億 枝枝連天 葉葉蔽日 濃陰滿地 淸涼灑人 意者 覺樹陰中 菩提神應 在此也 又香水邊 軍茶尼樹 果如是乎 大矣哉 黑羊朱明 翫月法師 使工構之 擧鞭驅石而階之 高幾數仞 설궤負土而塡之 厚及十尺 數仞之高 高於泰山 十尺之深 深於滄海 何則所管 主人之智 崇崇乎泰山 主人之量 闊闊乎滄海 玆以所營者 亦如是山海之高深者也 又臺下 拔石而濬之 引流而塘之 俯瞰淸流 則如鏡照面也 昔之崎嶇 今爲平坦 墨客題詩於斯 負者 息肩於斯 則四方淸風 是汗面之秋也 一塘流水 是燋心之雪也 飄飄然發御寇 乘風之志 渺渺然多王喬 駕鶴之懷 腰帶十萬錢 何羨楊州手開八萬卷 永慕西土 眞爲仙庭 亦云佛窟 綠柳黃鳥 白石寒潭 斯亭之奇觀也 楚澤山川 武陵仙景 未敢此擬 而塵間丘陵 潛奇掩勝 是可信也 翫月主人 足以一鉢輕萬鍾者也 豈敢肆志而然也 對請益之餘 聊寄幽興 而築斯亭 是人外之人歟 (거느릴설=手부6획), (삼태기궤=竹부/貴)
의해 능엄 중수기
義海楞嚴重修記
대개 물건의 모이고 흩어짐은 사람의 잘하고 못함에 있는 것이다.
이 책의 七질(秩)은 옛 사람이 전보(全寶)를 이룬 것인데 지금은 여러 곳에 흩어져 반보(半寶)가 되었으니 이것을 보는 사람으로서 누가 개탄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내가 다행히 그것을 세 곳에서 얻었으니, 즉 고원읍(高原邑)의 어느 속가(俗家)에서 三권을 얻었고, 함흥 천불산(咸興千佛山)에서 一권을 얻었으며, 북청 대동사(北靑大同寺)에서 三권을 얻어 모두 합해 七부가 되었으니 이것은 반드시 신(神)이 나를 인도해 지시한 것일 것이다. 기이하고 기이한 일이다.
건륭(乾隆) 신사년 여름에 중수하고 함을 만들어 가외(可畏)에 전하는 것이니, 후일에 이것을 보는 사람은 갖거든 완전히 가져서 부디 나누어 가지지 말고, 간수하거든 공(公)으로 간수하여 부디 사사로이 간수하지 말라. 혼자서 홀로 보는 병이 없도록 하는 것이며, 천추에 반보(半寶)의 폐단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高原 - 옛날의 덕녕진(德寧鎭)이니 홍원군(洪源郡)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성을 쌓고 고주(高州)라고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고원군으로 고쳤다. 서울과의 거리는 6백 45리이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지리전고(地理典故)에서 발췌.
可畏 - 두려워할 만함.
蓋物之聚散 由人之得失 此冊七秩 昔人得成全寶矣 今散諸處 失爲半寶 則見之 誰不慨然乎 余何幸得於三處 謂高原邑中 俗家 得三卷 咸興 千佛山 得一卷 北靑 大同寺 得三卷 合爲全部 此乃神必引我而指之也 異乎異乎 乾隆辛巳 夏 重修造函 以傳可畏 後之覽者 取則全取而切不分取 藏則公藏而亦不私藏 無一人獨見之病 而無千秋半寶之弊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