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일 월요일
[신라 석(昔)씨 왕들의 이야기]
자연재해·백제의 침략이 있었지만 왜인들을 도와주다
제12화 : 천체관찰·기후변화의 기록
↑ 석씨대종회 회장 석진환 |
서기186년(병인년 왕3년) 5월 그믐날(壬申) 일식(日食)이 있었다고 하니 태양력이나 천체관찰 등의 기록이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해(정묘년 왕4년)10월(겨울)에는 북부 지방에 큰 눈이 내려서 한 장(丈) 깊이(1장=10척, 1척=23cm, 그러니 2m 30cm)의 눈이 쌓였다고 적설량을 기록하였다.
서기191년(신미년 왕8년) 9월에 치우기(蚩尤旗 : 혜성의 일종으로서 꼬리별의 후미가 굽어있어 깃발을 닮았는데 그 혜성이 나타난 방향에서는 바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한다)가 일곱개의 별자리 중 각(角), 항(亢)에 보였다.
다음 해(임신년 왕9년) 4월에 늦은 눈이 석자(90cm)나 쌓여 통행이 막혀 사람들의 왕래가 한참동안 막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5월에는 큰 비로 인한 홍수가 집과 들판을 삼켰고 산도 십여개소나 무너져 엄청난 자연재해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서기193년(계유년 왕10년) 정월 갑인(甲寅) 초하룻날 일식(日食)이 일어났고, 서기194년(갑술년 왕11년) 6월 그믐날인 을사일에 또 (3년 연속) 일식이 있었다.
[변방을 괴롭히는 백제의 침략]
서기188년(무진년 왕5년) 2월 백제가 모산성(母山城)을 침범하므로 파진찬(신라 4등 벼슬) 구도(仇道)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여 모두를 막아 내었다. 이듬해인 189년(을사년 왕6년) 7월에 구도(仇道)가 백제군을 상대로 구양(狗壤)에서 싸워 이기고 5백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오는 대승을 하였다. 서기190년(경오년 왕7년) 8월에 백제가 서쪽 변두리와 원산향(圓山鄕)에 쳐들어 왔다.
또, 부곡성(缶谷城)을 진격 포위하므로 구도가 정예기병(精銳騎兵) 5백을 거느리고 반격할 때 백제병의 일부는 길목에 숨고 일부는 거짓으로 달아나는 채 하였다. 구도는 도망가는 적군을 쫓다가 와산(蛙山)에 이르니, 도망가던 적군이 돌아서고, 숨어있던 적군은 뒤를 막아 협공하므로 크게 패하였다. 왕이 구도의 실책을 물어 부곡성주(缶谷城主)로 좌천시키고 설지(薛支)를 좌군주(左軍主)로 임명하였다.
[왜인들의 양식 구걸]
서기193년(계유년 왕10년) 6월 왜국(일본)에 큰 기근(大饑饉)이 들어 왜인 일천여 명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신라로 왔습니다.
왜인들 : “하! 나라가 어렵스무니다! 가뭄이 들어 먹을 것이노 없어 식량을 수꼬시(조금) 구하러 왔수무니다.” 신라인1 :“당신네들 평소에는 우리나라를 약탈하더니만 어려울 때는 도와달라고 사정하는거요?” 신라인2 : “음, 불쌍한 족속들이군, 우리 백성들의 정은 동양 제일이지!, 조금씩 곡식을 도와 주세!” 이러한 소식을 들은 벌휴왕께서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지 않으려고 험한 바다를 건너 온 손님이니 후한 마음으로 받아 주도록하여라” 하시어서 그들을 모두 구원하였다고 한다.
↑↑ 양식을 구하러 바다를 건너는 왜인들 |
예로부터 동해안 특히 경상도 해안은 왜국(일본)과 가까운 땅이어서 왜인들이 쉽게 넘나드는 약탈지방이기도 했으며, 또 생활이 어려운 왜인들이 살기 좋은 신라로 이주하여 고기잡이나 장사 또는 농사를 짓기 위해 건너오는 무리가 많았기에, 지금도 우리나라 동해안 여러 어항(漁港)에는 일본인들이 살던 일본집(日本家屋)이 많이 있습니다.
서기196년(병자년 왕13년) 2월에 왕의 집무실과 부속건물 등의 궁실을 중수(重修 : 낡고 헌것을 다시 손대어 고침)하였고, 다음 달인 3월에는 가뭄이 들기 시작했다. 4월에 벼락이 궁성 남쪽에 있는 큰 나무를 치고 또 금성동문(金城東門)을 내리 쳐서 파손시킨 몇 일 후, 석벌휴왕께서 12년의 왕위를 마감하시고 붕어(崩御=임금의 죽음을 뜻함)하시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