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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성총관부에 대하여2 /원의 지방행정조직과 군사조직

작성자가시리|작성시간06.11.04|조회수454 목록 댓글 0

앞글에 이어서.........

 

 

제 1 장


 원나라의 地方行政 組織과 軍事 組織.





  금(金) 나라의 로(路) 총관부와 원 나라의 로(路) 총관부를 비교해보면, 금나라의 로(路) 총관부는 군대와 백성을 함께 통치하였는데, 중국의 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면서도 군(軍)과 정(政)은 일체(一體)라는 여진족의 유습을 이어가고 있다. 원 나라의 로(路) 총관부는 병사(兵事)를 담당하지 못하고 단지 백성과 재정ㆍ형사(刑事)만을 담당하여 다스렸다. 바꾸어 말하면 금나라와 원나라의 총관부가 그 명칭에서 일맥상통하고 있지만 군과 백성을 함께 통할하는, 또는 단순히 백성만을 통치하는 면에서 두 나라의 총관부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李治安, 元代政治制度史硏究에서-


 

 

원나라의 地方行政 組織과 軍事 組織.




  1258년 12월, 용진현 사람 조휘(趙暉)는 정주인(定州人) 탁청(卓靑) 등과 함께 철령(鐵嶺) 이북 제성(諸城)을 들어 몽고에 투항하였다. 몽고는 이 땅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趙暉)를 총관에, 탁청(卓靑)을 천호(千戶)에 임명한다.

  이 때 몽고의 관부인 총관부와 만호부 그리고 관직 만호(萬戶)총관(摠管)천호(千戶)다루가치(達魯花赤) 등은 도대체 어떤 것들이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쌍성총관부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이 부분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지방행정 조직과 군행정 조직에 대하여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나라 통치제도 전반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제한된 영역 범위를 가지고 있었던 쌍성총관부를 이해하는 데는 거기에 필요한 지식을 얻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따라서 원사(元史) 기록을 중심으로 원 나라의 지방행정 조직과 군행정 조직에 대하여 필요한 최소한을 알아보자는 것이다.

  총관부가 원나라의 지방행정제도에서 점하는 위치가 무엇이었는지, 또 총관부는 어떻게 조직되고 운영되었는지, 또한 원나라의 군행정 조직은 어떻게 되어 있었던 것인지, 만호부와 천호소는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다루가치(達魯花赤)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최소한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1. 총관부(摠管府)와 만호부(萬戶府). 

  다음은 원사 백관지(百官志) 기록 중 일부이다. 이 자료는 원 나라가 지방을 어떻게 구획하여 통치했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자료 중 불필요하고 장황한 부분은 삭제하고 수록하였다.


元史, 志第41-上, 百官 7

行中書省,凡十一,秩從一品,掌國庶務,統郡縣,鎮邊鄙,與都省為表裡。國初,有征伐之役,分任軍民之事,皆稱行省,未有定製。中統、至元間,始分立行中書省,因事設官,..................

每省丞相一員,從一品;平章二員,從一品;右丞一員,左丞一員,正二品;參知政事二員,從二品,..................

河南江北等處行中書省。統有河南十二路、七府。   

江浙等處行中書省。統有三十路、一府。   

江西等處行中書省。本省統有十八路。   

湖廣等處行中書省。統有三十路、三府。   

陝西等處行中書省。本省所轄之地,惟陝西四路、五府。   

四川等處行中書省。統有九路、五府。  

遼陽等處行中書省。統有七路、一府。   

甘肅等處行中書省。統有七路、二州。  

嶺北等處行中書省。統有北邊等處。   

雲南等處行中書省。統有三十七路、五府。  

征東等處行中書省。治瀋陽,統有二府、一司、五道。


  앞에서 본 자료는 당시 원 나라가 전 국토를 정동등처행중서성을 제외한 10개의 행중서성(行省)으로 구획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 수장(首長)인 승상(省丞)은 품계가 종1품(從一品)에 이르는 고위 관직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행중서성(行省)의 예하 관부로는 어떤 기관이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앞에서 본 10개의 행성(行省)들은 각기 로(路)와 부(府) 또는 주(州)를 통할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떠했었는지 요양등처행중서성(遼陽等處行中書省)의 경우를 보기로 하자.


遼陽等處行中書省為路七、府一,屬州十二,屬縣十。徒存其名而無城邑者,不在此數。本省計站一百二十處。

遼陽路,上。.......至元六年,置東京總管府,降廣寧為散府隸之。十五年,割廣寧仍自行路事,直隸省。十七年,又以婆娑府、懿州、蓋州來屬。二十四年,始立行省。二十五年,改東京為遼陽路,後廢婆娑府為巡檢司。戶三千七百八,口三萬三千二百三十一。壬子年抄籍數。領縣一、州二。


  요양등처행중서성(遼陽等處行中書省)의 경우 7개 로(路)와 부(府) 1개, 주(州) 12개, 현(縣) 10개를 관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는 7개 로(路) 중 요양로(遼陽路)만을 예로 들었다. 요양로(遼陽路)의 경우 1개 현(縣)과 2개 주(州)를 관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까지에서 원 나라는 10개의 행성(行省) 예하에 로(路)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로(路)에는 주(州)와 현(縣)이 속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정동행성(征東等處行中書省)을 포함한 11개의 행성(行省)은 중서성(中書省)의 예하에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사인 총관부와 총관은 어떻게 되어 있었을까? 아래 자료를 보기로 하자. 각 로(路)는 당시에 어떻게 조직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諸路 萬戶府(元史, 志第四十一上 百官七)

上萬戶府,管軍七千之上。達魯花赤一員,萬戶一員,俱正三品,虎符;副萬戶一 員,從三品,虎符。

中萬戶府,管軍五千之上。達魯花赤一員,萬戶一員,俱從三品,虎符;副萬戶一 員,正四品,金牌

下萬戶府,管軍三千之上。達魯花赤一員,萬戶一員,俱從三品,虎符;副萬戶一 員,從四品,金牌。

其官皆世襲,有功則升之。每府設經歷一員,從七品;知事一員,從八品;提控案牘一員。鎮撫司,鎮撫二員,蒙古、漢人參用。上萬戶府正五品,中萬戶府從五品,俱金牌; 下萬戶府正六品,銀牌。     

上千戶所,管軍七百之上。達魯花赤一員,千戶一員,俱從四品,金牌;副千戶一 員,正五品,金牌。     

中千戶所,管軍五百之上。達魯花赤一員,千戶一員,俱正五品,金牌;副千戶一 員,從五品,金牌。     

下千戶所,管軍三百之上。達魯花赤一員,千戶一員,俱從五品,金牌;副千戶一 員,正六品,銀牌。

彈壓二員,蒙古、漢人參用。上千戶所從八品,中下二所正九從九品內銓注。 

上百戶所,百戶二員,蒙古一員,漢人一員,俱從六品,銀牌。    

下百戶所,百戶一員,從七品,銀牌。


諸路 摠管府(元史, 志第四十一上 百官七)

諸路總管府,至元初置。二十年,定十萬戶之上者 為上路,十萬戶之下者 為下路,當沖要者,雖不及十萬戶 亦為上路。上路秩正三品,達魯花赤一員,總管一員,並正三品,兼管勸農事,江北則兼諸軍奧魯,同知、治中、判官各一員。下路秩從三品,不置 治中員 而同知如治中之秩,余悉同上。至元二十三年,置推官二員,專治刑獄,下路 一員。經歷一員,知事一員或二員,照磨兼承發架閣一員,司吏無定製,隨事繁簡 以為多寡之額;譯史、通事各一人。........     註, 至元 원년: 1264년,  至元 20년: 1283년


  앞 자료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각 로(路)에는 만호부(萬戶府)와 총관부(總管府)가 설치되어 있었다. 만호부(萬戶府)의 수장인 만호(萬戶)와 총관부(總管府)의 수장인 총관(總管)의 품계는 통할하는 민호(民戶)의 다과에 따라 품계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정3품에서 종3품으로 동일하다. 또한 만호부(萬戶府)나 총관부(總管府)에 만호 또는 총관과 동일한 품계의 달로화적(達魯花赤) 1인을 배치하고 있다. 만호부(萬戶府)에는 만호 예하에 천호소(千戶所)와 백호소(百戶所)가 있었다. 천호소(千戶所)에는 천호 1인, 달로화적(達魯花赤) 1인을 배치하였는데 모두 종4품에서 종5품의 품계를 가지고 있었다.

  각 로(路)에는 만호부(萬戶府)와 총관부(總管府)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각 로(路) 지휘부의 이원화(二元化)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호와 총관의 담당 역할은 뭐가 달랐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다음 자료는 원사의 자료이다.


元史, 志第四十六 兵一

世祖時,頗修官制,內立五衛,以總宿衛諸軍,衛設親軍都指揮使;外則萬戶之下置總管,千戶之下置總把,百戶之下置彈壓,立樞密院以總之。遇方面有警,則置行樞密院,事已則廢,而移都鎮撫司屬行省。萬戶、千戶、百戶分上中下。萬戶佩金虎符,符趺為伏虎形,首為明珠,而有三珠、二珠、一珠之別。千戶金符,百戶銀符。萬戶、千戶死陣者,子孫襲爵,死病則降一等。總把、百戶老死,萬戶遷他官,皆不得襲。是法尋廢,後無大小,皆世其官,獨以罪去者則否。


세조(世祖) 치세기에 관제를 손질하였다. 내직에는 오위(五衛)를 설치하여 숙위제군(宿衛諸軍)을 통할하게 하였다. 각 위(衛)에는 친군도지휘사(親軍都指揮使)를 두었다. 외직에는 만호(萬戶) 예하에 총관(總管)과 천호(千戶)를 두고 천호 예하에 총파(總把)와 백호(百戶)를 두었으며 백호 밑에 탄압(彈壓)을 배치하였다. 추밀원을 설립하여 그들을 통할하게 하였다. 지방에 문제가 생기면 행추밀원(行樞密院)을 설치하였으며 문제가 해결되면 행추밀원(行樞密院)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업무는 도진무사(都鎮撫司)에게 이관시켰으며 행추밀원(行樞密院)의 인원은 행성(行省)에 소속시켰다.

  만호ㆍ천호ㆍ백호는 상ㆍ중ㆍ하로 구분하였다. 만호는 금호부(金虎符)를 패용(佩用)하였는데 부(符)의 받침대는 엎드린 호랑이 형상이었다. 머리는 구슬을 상감(象嵌)하여 만들었는데 구슬이 셋, 둘, 하나 있는 것으로 구별을 두었다. 천호는 금부(金符),백호는 은부(銀符)를 패용하였다.

  만호나 천호가 진중(陣中)에서 전사(戰死)하면 그 자손이 습작(襲爵)하였으며 병사(病死)하면 1계급 낮추어 습작(襲爵)하게 하였다. 총파나 백호가 늙어 죽거나 만호가 타직(他職)으로 이동하게 되면 습작시키지 않았다. 이 법은 곧 폐지하고 뒤에는 관직의 대소(大小)에 관계없이 모두 습작케 하였으나 죄를 저질러 파면된 경우만은 습작시키지 않았다.


  이 자료는 각 로(路)에 총관부와 함께 설치되어 있었던 만호부가 군(軍) 조직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행성에는 추밀원(樞密院)이 설치되어 만호부를 통할하였으며 유사시에는 행추밀원(行樞密院)을 설립하여 만호부를 지휘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만호는 총관과 같은 품계를 가졌지만, 원나라는 만호를 총관의 상위에 위치시킴으로써 군(軍) 우위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과연 몽고다운 발상이라 하겠다.

  만호가 그렇다면 총관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중국의 南開大學歷史學院 교수인 李治安은 그의 저서 元代政治制度史硏究의 (八)路摠管府的三个特点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與金路摠管府比較,金路摠管府兼領軍民,在採用漢制的同時,還保留女眞軍政一體的習俗. 元路摠管府則不掌兵政,只理民,財,刑諸事. 換言之,金,元路摠管府雖然名稱一脈相承,但在兼領軍民或單純管民方面,二者又是逈然不同的.


  금(金) 나라의 로(路) 총관부와 원 나라의 로(路) 총관부를 비교해보면, 금나라의 로(路) 총관부는 군대와 백성을 함께 통치하였는데, 중국의 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면서도 군(軍)과 정(政)은 일체(一體)라는 여진족의 유습을 이어가고 있다. 원 나라의 로(路) 총관부는 병사(兵事)를 담당하지 못하고 단지 백성과 재정형사(刑事)만을 담당하여 다스렸다. 바꾸어 말하면 금나라와 원나라의 총관부가 그 명칭에서 일맥상통하고 있지만 군과 백성을 함께 통할하는, 또는 단순히 백성만을 통치하는 면에서 두 나라의 총관부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참으로 명쾌한 설명이다. 李治安 교수는 원나라가 왜 제로(諸路)에 만호부와 총관부를 따로 설치했는지를 명확히 하고 있다. ‘병정(兵政)은 만호에게!, 민정(民政)은 총관에게!’라고나 할까, 우리는 여기에서 원나라의 통치 철학을 본다. 그런데 원사를 읽다 보면‘兼領軍民(겸령군민)’이라는 표현을 더러 만나게 되는데, 李治安 교수의 설명처럼 군(軍)과 백성(民)을 함께 통치했던 금나라의 총관과 유사한 원나라의 총관은 없었을까 궁금해진다.

  이와 관련하여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발간한 장동익(張東翼)의 ‘元代麗史資料集錄(원대역사자료집록)’은 재미있는 사료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1352년, 중국 봉천(심양)에 세워진 성황묘비(城隍廟碑)의 비문(碑文)인데 필요한 부분만 발췌 수록하였다. 이를 함께 보기로 하자.


A. 비문 내용

1)宣武將軍總管高麗女直漢軍萬戶府都萬戶兼瀋陽等路安撫高麗軍民總管王

2)中順大夫瀋陽等路安撫高麗軍民總管洪

3)宣武將軍總管高麗女直漢軍萬戶府都萬戶洪

B. 저자의 교감기(校勘記)

교감(校勘); 이 자료는 청대의 나복이(羅福頤)에 의해 수습되어 <만주금석지>에 수록되어 있으나 원래의 형태와 자간(字間)이 구체적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고 ... 이를 바탕으로 원문을 재구성하기에는 판독이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만주금석지>에 수록되어 있는 그대로 전재(轉載)하였다....


  자료 제공자가 밝힌 대로 위 원문은 비문(碑文)이다. 비문에 보이는 번호 1) 2) 3)은 필자가 설명의 필요상 붙인 것이다. 비문 중 1)에서 우리는 도만호(都萬戶)와 총관을 겸직하고 있는 이름 모를 왕씨를 볼 수 있다. 반면에 비문 중 2)와 3)에서는 총관만을 맡고 있는 홍(洪)씨와 도만호(都萬戶)만을 맡고 있는 홍(洪)씨를 확인 할 수 있다. 이 비문은 앞에서 본 원나라의 지방행정조직에 관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총관과 만호를 겸직했던 사례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兼領軍民(겸령군민)’이라는 표현이 이러한 예외적인 상황을 지적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이제까지 우리가 확인한 사실(史實)들은 지방행정조직이 정비된 세조 치세기(治世期) 이후의 상황들이다. 그렇다면 지방행정조직이 정비되기 이전의 상황은 어떠했을 것인지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원사는 이에 관한 기록이 너무 간단하여 그 실상을 알아볼 수 없는 형편이다.

  원사를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겠지만 몽고 초기의 관직명을 대하게 되면 혼란스럽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만호와 총관이 도대체 구별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다 총관이면 되었지 무슨‘관군총관’이니‘관민총관’이니‘관군민총관’이니‘관민만호’이니 하는 알 수 없는 관직명이 속출하고 있다. 이들에 대하여 알아보자.

  이제 중국에서 간행한 元史辭典(원사사전)의 설명을 참고하기로 하자. 이름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이 사전은 중국에서의 원사(元史) 연구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여 만들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교과서로 여겨도 별 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은 앞에서 거론한 관민만호(管民萬戶)에 대한 元史辭典(원사사전)의 설명이다.


管民萬戶(관민만호)

官名. 元管理民事的萬戶. 蒙古國時期, 制度未備, 進入中原后, 或以原金官職 命官, 或以達魯花赤 總管 萬戶等名, 任命管民官.

관직 이름이다. 본래 민사를 관리하는 만호였다. 몽고제국 시기에는 제도가 미비하여, 중원(中原)을 석권한 후에도 원래 금나라 관직 이름으로 관리를 임명하기도 하였는데, 혹은 달로화적(達魯花赤)으로, 때로는 총관으로, 어쩌면 만호 등 명칭으로 일반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를 임명했었다.


  원나라가 본래 국호(國號) 몽고(蒙古)를 원(元)으로 바꾼 것은 지원(至元) 8년, 고려 원종 12년, 서기 1271년이었다. 위 사전의 설명은 1271년 이전까지 원 나라는 중원을 이미 제패하였지만 제도적 미비로 인하여 총관과 만호달로화적(達魯花赤) 등 관명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관군총관관민총관관군민총관관민만호 등의 관직명은 더 이상 알아 볼 것이 없어 보인다. 관군총관(管軍摠管)은 훗날 만호(萬戶)를, 관민만호(管民萬戶)는 총관을, 관군민총관(管軍民摠管)은 만호와 총관을 겸직한 경우의 관직을 지칭했을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元史辭典(원사사전)도 더 이상의 세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있다.



2. 만호부(萬戶府)와 천호소(千戶所)의 관계.


  이제까지 원나라의 관직인 총관과 만호에 대하여 그들이 점하는 원나라 지방행정조직상의 위치와 구성, 명칭의 변천 등에 관하여 대강을 살펴보았다. 총관부는 그 예하의 주와 현을 관장하였으므로 그들 관부간의 관계는 오늘 날의 도(道)와 시군(市郡)의 관계와 유사하였을 것으로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호부와 천호소의 관계도 같았을 것인가 의문이 생긴다.   만호부 내에 여러 개의 천호소가 함께 있었을까, 아니면 병력의 소재지를 따라 천호소가 만호부와는 별개의 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일까? 이 문제는 천호가 만호부의 인적 구성 요소였는가를 확인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원사 기록을 보자. 필요한 부분만 게재하였다.


元史, 志第四十一上 百官七

諸路萬戶府

上萬戶府,管軍七千之上。達魯花赤一員,萬戶一員,俱正三品,虎符 副萬戶一員,從三品,虎符。... 其官皆世襲,有功則升之。每府設經歷一員,從七品 知事一員,從八品 提控案牘一員。鎮撫司,鎮撫二員,蒙古、漢人參用。上萬戶府正五品,中萬戶府從五品,俱金牌 下萬戶府正六品,銀牌。...

上千戶所,管軍七百之上。達魯花赤一員,千戶一員,俱從四品,金牌 副千戶一員,正五品,金牌。...彈壓二員,蒙古、漢人參用。上千戶所從八品,中下二所正九從九品內銓注。


  앞에 게재한 자료는 만호부와 천호소의 구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만호부와 천호소의 구성

구분

중요 관속

품계

기타 관속

만호부

(상)

달로화적 1명

만호 1명

모두 정3품

부만호,경력,지사 각 1명

 提控案牘 1명, 진무 2명

  천호소

  (상)

 달로화적 1명

천호 1명

모두 종4품

부천호 1명

탄압 2명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만호부의 구성 인원 중에 천호(千戶)가 없다는 점이다. 마치 경찰서에 파출소장이 없는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이 인적 구성은 만호부와 천호소가 각각 별개의 관부를 구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다음은 그 실례를 보여주는 원사의 기록이다.


元史, 志第三十六 百官二

八撒兒萬戶府,萬戶一員,副萬戶一員,經歷、知事、提控案牘各一員。鎮撫一員。千戶所一十翼,達魯花赤一十員,千戶十員,副千戶十戶,百戶七十三員,彈壓一十員。


  팔살아(八撒兒) 만호부(萬戶府)는 10개의 천호소(千戶所)를 관장하고 있었다. 그 구성원은 만호부와 천호소가 별개의 관부였음을 실례로써 보여주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만호부와 천호소는 상하관계에 있었으나 그 관부는 별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천호소는 그 천호(千戶)가 몇이 되었든 전체가 하나의 치소(治所)를 가지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 관할 병력의 소재에 따라 각기 분산 배치되어 있었을까? 원사는 이 문제를 직접 밝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실제를 통하여 우리는 그 내막을 알 수 있을 것이다.


元史, 志第三十六 百官二

貴赤衛親軍都指揮使司,秩正三品。至元二十四年立,置都指揮使二員、副都指揮二員、僉事二員。...千戶所八翼,每所置達魯花赤一員,千戶一十六員,百戶八十員,彈壓


  이 자료는‘千戶所八翼,每所置達魯花赤一員’에서‘每所’라고 말함으로써 천호소 8개의 치소가 각기 별개였을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이제 더 확실한 자료를 보기로 하자. 다음 자료는 요양행성(遼陽行省) 관할의 광녕부로(廣寧府路)의 경우인데 관할 주현(州縣)으로 여양현(閭陽縣)과 망평현(望平縣)이 있었다. 이 곳에 각각 천호소를 설치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元史, 志第十一 地理二

廣寧府路,下。金為廣寧府。元封孛魯古歹為廣寧王,舊立廣寧行帥府事;後以地遠,遷治臨潢,立總管府。.... 領縣二.

閭陽,下。初立千戶所,至元十五年,以戶口繁夥,復立行千戶所。....

望平。至元六年,省鐘秀縣入焉。十五年,為望平軍民千戶所,今復為縣。


  광녕부로(廣寧府路)의 경우 그 치소는 앞 자료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임황(臨潢)이었다. 만호부의 치소에 관하여 앞 자료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역시 임황(臨潢)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천호소(千戶所)는 각기 여양(閭陽)과 망평(望平)에 있었다. 이들 자료는 만호부와 천호소의 치소는 각각 별개 지역이었으며, 천호소 또한 개별적인 치소를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3. 다루가치(達魯花赤)


  다루가치(達魯花赤)에 대하여 원사가 직접 설명한 기사는 찾기가 어렵다. 다음은 중국역사대사전의 다루가치(達魯花赤)에 대한 설명이다.


達魯花赤

官名. 蒙古語, 意爲鎭守者. 漢譯宣差. 蒙古征服許多民族, 國家, 在中原, 中亞, 西南亞, 東歐各主要地區, 城鎭, 皆置達魯花赤監治, 掌實權. 元朝建立後, 路, 府, 州, 縣, 祿事司 及南方小數民族地區 長官司 皆設此職. 按撫使兼管軍民, 多數亦設. 軍隊中除蒙古軍, 蒙古探馬赤軍外, 其他各族軍隊在元帥府, 萬戶府, 千戶所皆設此職, 以監軍務. 亦設于寶鈔庫, 運糧提擧司等 重要官署, 各大寺院總管府, 營繕司, 皇室及各投下所屬 人匠總管府等官衙. 各投下達魯花赤 由各該諸王駙馬 以陪臣充任. 世祖至元2年(1265)規定, 各路達魯花赤必須由蒙古人 或個別出身 高貴的色目人 擔任, 漢人, 南人一律 不得任此職.


다루가치(達魯花赤)

관직 이름이다. 몽고어(蒙古語)로서 진수자(鎭守者)를 뜻한다. 중국어로는 선차(宣差) 즉 황제의 심부름꾼이다. 몽고가 수많은 민족과 국가를 정복하고 중원,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동유럽의 주요 지구의 성(城)과 진(鎭)에 다루가치를 임명하여 관리 감독하게 하여 실권을 장악하였다. 원나라 건립 후 로(路), 부(府), 주(州), 현(縣), 녹사사(祿事司)와 남방 소수민족 지구의 관사에 모두 다루가치를 임명하였다. 안무사 겸 관군민 총관도 다수를 두었다. 군대 중 몽고군과 몽고 탐마적군을 제외한 원수부, 만호부, 천호소 소속의 각 민족 군대에도 이 직을 설치하여 군무를 감독하게 하였다. 보초고(寶鈔庫)나 운량제거사(運糧提擧司) 등 중요 관서, 대사원 총관부, 영선사, 황실과 각 투하(投下) 소속 인장총관부(人匠總管府) 등 관아에도 역시 이 직을 설치하였다. 각 투하(投下)의 다루가치는 해당 제왕(諸王)과 부마(駙馬)가 그 가신(家臣)으로 임명하였다. 각 로(路)의 다루가치는 반드시 몽고인(蒙古人)이었으며 어쩌다 개별적으로 고귀한 색목인(色目人)이 맡기도 하였다. 한인(漢人)과 남인(南人)은 일률적으로 이 직을 맡을 수 없었다.


  이 설명에 의하면 원나라는 정복 지구에 설치된 거의 모든 관아(官衙)에 다루가치를 파견한 것을 알 수 있다. 군대도 몽고인(蒙古人)으로 구성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부대에 역시 다루가치를 두었다. 그들은 필수적으로 몽고인(蒙古人)이었으며 어쩌다가 색목인(色目人)이 끼어 있는 정도였다.

  우리는 앞에서 다루가치의 파견 관아, 지역, 그 담당자에 대하여 대강을 보았다. 이제 다루가치의 업무와 총관과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중국 남개대학 李治安(이치안)이 쓴 「元代政治制度硏究(원대정치제도연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如此,達魯花赤位居路總管之上,當在太宗朝“畫境之制”推行以後. 不過,元世祖以前的路總管府幷不正規,某些路達魯花赤只是在漢世侯把持漢地諸路州的體制下蒙古統治者所派遣的監臨官. 盡管如此,達魯花赤位居路總管之上的格局,對元世祖以降的路達魯花赤影響 頗大.

  關于達魯花赤的地位及變化,虞集說:“國家郡縣天下,置守令以治之,又以國人爲監于其上. 其初置監,非不信于守而置也,言語文字有不及者,監通之. 今天下一家,表裏無二,監之于守,勢均位敵,惟其所能而用之,監通于守”. 如果虞集之說基本可信,那麽元後期路達魯花赤與總管地位的上下之別已逐漸消失,而且能通于選用或幷駕齊驅了. 至于達魯花赤最初的通譯功能,卽使存在,也不十分重要.

  按照叶子奇的說法,路達魯花赤基本職責應是“掌印信”和“總轄”. 達魯花赤又是如何履行這兩項職責的呢? <元典章>世祖中統五年八月初四的一件中書省公文載:“‥‥欽奉聖旨內一款,節該,一應京府州縣官員,凡行文字,與本處達魯花赤一同署押,仍令管民長官掌判. 其行用印信,達魯花赤封記,長官收掌. 如遇長官公出,疾病在假,卽日牒印與以次正官承權,參佐同,不得委付私己之人. 欽差.” 從以上公文不難窺見:路達魯花赤雖不“掌判”庶政,但需與總管府官員一同署押行文案牘. 總管府印信由總管“收掌”, 達魯花赤“封記”, 這可以說是世祖初路達魯花赤“掌印信”和“總轄”職責的槪況.


이처럼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로(路) 총관(總管)의 상위를 점하게 된 것은 태종(太宗) 때의 획경(畫境) 제도 시행 이후에 해당한다. 다만 원 세조(世祖) 이전의 로총관부(路總管府)는 전혀 정규적이지 못했으며 로(路)의 다루가치(達魯花赤)는 금(金)나라와 원(元)나라의 교체기 한족(漢族) 군벌(軍閥)이 장악하고 있던 로(路) 주(州)의 체제하에서 몽고(蒙古) 통치자가 파견한 감독관에 불과하였다. 그렇지만 다루가치(達魯花赤)는 로총관(路總管)에 대하여 우위(優位)적 위상을 가졌으며 원 세조에 대한  한족(漢族) 군벌(軍閥)의 투항에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영향은 자못 컸다.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지위와 그 변화에 관하여 우집(虞集)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국가가 천하를 군(郡)과 현(縣)으로 획정하고 수령(守令)을 임명하여 통치하게 하였으며 몽고인(蒙古人)을 수령(守令)의 상위 감독관(監)으로 삼았다. 당초에 감독관을 둔 것은 군현(郡縣)의 수령(守令)을 불신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언어와 문자(文字)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독관(監)이 통역하였다. 지금 천하는 한 가정이 되었으며 표리(表裏)가 없게 되었다. 수령(守令)에 대한 감독관(監)의 권세는 대등해졌다. 오직 능력에 따라 임명하였으며 감독관(監)은 수령(守令)과 상호 소통하였다.”

  만약 우집(虞集)의 설명을 믿을 수 있다면, 원 나라 후기 다루가치(達魯花赤)와 총관(總管)의 상하 구별은 점점 소멸되어 갔으며 선발 임용에서도 상호 소통되어 지위는 대등해져 갔다. 다루가치(達魯花赤) 최초의 통역 기능은 그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협자기(叶子奇)의 설명에 의하면 로(路) 다루가치(達魯花赤)의 기본 책무는 “관인(官印)의 관리”와 “총할(總轄)”이었다. 그렇다면  다루가치(達魯花赤)는 위 두 가지 직책을 어떻게 수행했었을까? 

<원장전(元典章)>은 세조 중통(中統) 5 년(1264) 8월 4일자의 한 건 중서성(中書省) 공문을 게재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성지(聖旨)를 요약해 보면, 부(府) 주(州) 현(縣)의 모든 관원은 공문서를 시행함에 있어 본처(本處) 다루가치(達魯花赤)와 함께 서명 날인한 다음 관민장관(管民長官)으로 하여금 집행하게 한다. 관인(官印)을 사용함에 있어서는 다루가치(達魯花赤)는 봉기(封記:단단히 봉하고 표기함)하고 장관(長官)은 수장(收掌:간수하고 관리함)한다. 만약 장관(長官)이 공무로 출장을 나가거나 병가(病暇) 중인 때에는 즉시 공문서와 관인(官印)을 다음 서열의 관원에게 넘겨 권리를 승계하게 한다. 하위 관료도 같다. 개인적 친분 관계가 있는 사람에게 위임할 수 없다.”

  이상 공문에 따르면, 로(路) 다루가치(達魯花赤)가 직접 공무를 집행하지는 않았으나 반드시 총관부의 관원과 함께 서명 날인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총관부(總管府)의 관인(官印)은 총관(總管)에 의하여 수장(收掌)되고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의하여 봉기(封記)되었는데, 이 것이 세조(世祖) 초기 다루가치(達魯花赤)의 “관인(官印)의 관리”와 “총할(總轄)”에 관한 직무의 개황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李治安 교수의 설명을 통하여 우리는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업무와 총관(摠管)과의 관계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다루가치(達魯花赤)는 관인(官印)의 관리자였다. 관인의 관리와 관련한 업무의 분할은 어쩌면 정교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런 관리 체제하에서는 다루가치(達魯花赤)나 총관(摠管) 그 누구도 전횡할 수는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루가치(達魯花赤)는 또한 문서의 최종 결재자였다. 총관(摠管)이 업무의 집행관이었다는 사실과 대조되는 측면이라 할 것이다. 당초에는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총관(摠管)에 대한 우위적 위상이 확실했으나 점차 그 우위는 대등한 관계로 변질되었다는 것이 李治安 교수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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