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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한 늙은이의 헌화가(獻花歌) 생각

작성자답설재|작성시간26.06.15|조회수35 목록 댓글 4

짙붉은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받자오리다

 

 

 

 

 

 

철지난 꽃을 보며 지나가다가 문득 국어 선생님이 낭독해 주시던 '헌화가'가 생각났다.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에 나오는, 수로부인 이야기는 이렇다.

 

 

성덕왕 때에 순정공(純貞公)이 강릉태수(江陵太守)―지금의 명주(溟州)―로 부임할 때 바닷가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 곁에는 바위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쳐서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데, 높이가 천길이나 되는 그 위에는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水路)는 이것을 보고 가까이 모시던 이들에게 청했다.

"누가 저 꽃을 꺾어다 주겠소?"

종자들은 대답했다.

"그곳은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러고는 모두 안 되겠다 했다. 그 곁으로 한 늙은이가 암소를 몰고 지나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와서는 또한 가사를 지어 바쳤다. 그 늙은이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일연一然『삼국유사』이재호 옮김, 솔, 231, 233).

 

 

학교 다닐 때는 주로 수로부인이라는 그 여인의 미모를 그려보곤 했다('내가 그 여인을 한번 만나볼 수 있다면...').

그 후로는? 철쭉꽃과 함께 노래를 지어 바친 그 노인을 생각했고('내가 그 늙은이었다면……'), 오늘은 강릉태수로 가고 있는 순정공이라는 인물을 주로 생각했다('저 늙은이가 저 위험한 곳에 올라가 꽃을 꺾어 내 아내에게 바쳐?')

당시의 남녀관, 애정관은 지금과 많이 달랐던 것을 보여주는 일화가 아닐까 싶었다.

 

그때 고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친 그 노인처럼 늙었고(내가 더 늙었을까? 아마 그렇겠지?), 철쭉꽃은 그때 그대로다.

 

삼국유사의 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면, 강릉 사람들은 얼마쯤 초조함과 기대감을 가지고 아직 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순정공은 부임하는 중으로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바위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쳐서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그곳에서 종자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좀 쉬라고 하고 자신도 쉬고 있다. 아름다운 부인과 함께......

얼마나 좋을까......

그 장면이 내 마음 속에서 한 장의 사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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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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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설목雪木 | 작성시간 26.06.16 그 늙은이가 누구인지 참 궁금합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시에 서린 신비감은 사라지겠지요.
    때로는 모르는 것이 약이 될 때도 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답설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6 저 옛날에도 설목 같은 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수로부인을 동경하다가 저 노인이 되었더라면 싶었습니다.
  • 작성자소엽 | 작성시간 26.06.16 해파랑길을 걸으면서 수로부인에 관련된 그 지역을 지나갔습니다.
    저는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그 안으로 가지는 않았지요.
    아무리 아름답기로 그 여인을 위해 위험한 절벽에 피어 있는 꽃을 꺾어 주다니요.
    꽃은 얼마나 힘들게 그곳에 피었을텐데 말에요.

    한편으로는 일연선사의 '삼국유사'에 실린 글이라는 걸 보면,
    그저 '노인이 꽃을 꺾어 미인에게 가져다주었다.' 라는 겉으로 드러난 것 말고,
    '암소를 몰고 지나가던 늙은이'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중생을 위하여 뭐든 해 주는...

    답설재님의 글을 읽으며 생각이 왔다갔다 하는군요...
  • 답댓글 작성자답설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6 아, 정말 대단합니다.
    직접 현장에서 생각하신 감상이라니요.
    너무나 오래전 이야기이니 오늘날 우리 정서로는 다를 수밖에 없는 면도 없지 않겠거니와
    저 같은, 뭘로 봐도 저런 에피소드의 경험이 불가능한 무지랭이 남자로서는
    아주 단순하게 그림속 미인을 동경해보다가 그 미인에게 위험천만한 지경에도 불구하고 꽃을 꺾어다 바친, 그것도 나이든 남자를 부러워해 보기도 했고, 마지막에는 내 여자를 동경하여 꽃을 꺾어다 바친 남자를 바라보는 사람의 심경도 헤아려 보았습니다.
    사모할 만한 여인이라면 뭘 못할까 하는 남자도 있고,
    저처럼 우물쭈물하다가 늙어버린 남자도 있는데 비해
    저런 노래를 책에 실은 우리의 조상들, 그 낭만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제는 소엽님 말씀에 따라 '암소를 몰고 지나가던 늙은이'를 더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때 우리 국어 선생님이 저 시를 가르쳐 주시며 우리를 바라보시던 그 눈길도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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