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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보론】환단고기가 재야사가에게 알려진 때는? 2 - 환단고기와 대종교...반론[2] 궤변망상학의 알량한 떡밥 2010/01/11 22:04

작성자태극기박사|작성시간11.02.12|조회수681 목록 댓글 0

 【앵무새 죽이기-보론】환단고기가 재야사가에게 알려진 때는? 2 - 환단고기와 대종교...반론[2]  궤변망상학의 알량한 떡밥  2010/01/11 22:04


 http://blog.naver.com/nero1003/70077872430


[환단고기의 환인*환웅 관련 기록]

 


...亦稱安巴堅傳七世年代不可考也  ...또는 안파견이라 하며 일곱 대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환단고기 삼성기전 상>


...神市之季有蚩尤天王恢拓靑邱傳十八世歷一千五百六十五年...신시의 말기에 치우천왕이 있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으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을 누리더라.   <환단고기 삼성기전 상>



...傳七世歷年三千三百一年或云六萬三千一百八十二年未知孰是...7세에 전하여 역년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환단고기 삼성기전 하>


倍達桓雄定有天下之號也其所都曰神市後徙靑邱國傳十八世歷一千五百六十五年  배달한웅은 천하를 평정하여 차지한 분의 이름이다.   그 도읍한 곳을 신시라고 한다.   뒤에 청구국으로 옮겨 18세 1565년을 누렸다.   <환단고기 삼성기전 하  신시역대기>


...傳七世歷三千三百一年或曰六萬三千一百八十二年...7세를 전하여 3301년에 이르고 혹은 6만3천1백82년이라고도 한다.   <태백일사 환국본기>


 ...蓋自神市開天 傳十八世 歷一千五百六十五年 而始有檀君王儉...대저 신시개천에서부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이 흘러서 비로소 단군왕검이 나셨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이유립 선생과의 인연 및 환단고기 강독회講讀會 관련 기록들]


1) 1979년 고려대에 입학한 <전형배> 창해출판사 사장(코리언 북스도 운영)은 <자유>지를 통해 막 지식인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유립 선생을 접하게 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전씨와 동료들은 뜻이 맞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이유립씨로부터 역사와 한문을 배우게 됐다.    민족의 진정한 역사에 목마른 많은 청년 학도들이 한문으로 된 환단고기를 읽고 그 뜻을 푸는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2) 월남한 이유립 선생에게서 오래전부터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사람 가운데 오형기吳炯基씨가 있다.   그는 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선생보다는 10여 세 연하였다.    친형이 좌익활동을 하다 사살된 이력이 있어 은거해 살면서 선생에게서 역사와 한학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유립 선생은 월남한 직후인 1949년 오형기씨에게 갖고 온 환단고기를 필사하게 했다.   전형배씨를 비롯해 선생의 제자가 된 다양한 부류의 사람(역사학도*문인*언론인 등)들은 오형기씨의 필사본을 복사하거나 영인해서 함께 공부를 했다.


3) 1970년대 말부터 선생에게서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제자 가운데 선린상고 출신으로 영어와 한문을 아주 잘하던 조병윤(趙炳允 1956년생)씨가 1979년 조병윤씨가 선생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박기엽朴琪燁씨가 운영하는 광오이해사光吾理解社를 통해 오형기씨가 필사한 환단고기를 영인*출판하면서 판권란에 그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적어놓았다.   이러한 사건으로 출간한 환단고기는 외부로 전파됐다.   이후 선생은 전형배씨를 통해 오형기씨의 필사본이 안고 있는 오자를 일부만 수정한 채로 발문을 제외한 환단고기 100부를 따로 영인*인쇄하게 했다.   그로 인해 세상에는 오형기씨 발문이 달린 환단고기와 발문이 삭제된 환단고기 두 종류가 등장하게 된다.


4) 이유립 선생은 수강생들에게 환단고기를 우리말로 풀어주는 강의를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우리말로 번역과 주석을 해놓은 원고도 갖고 계셨다.   그런데 이 원고를 발간자를 물색하기 위해 <자유>지 발행인인 박창암 장군에게 줬고 이를 다시 허락도 받지 않고 <가지마>에게 건네줬다.   선생은 자신의 원고가 일본으로 간 것을 알고 박 장군에게 원고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원고가 돌아왔는데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원고를 가져간 <가지마>는 이를 1982년에 발간했으며 그 후에 우리 측에서도 많은 [환단고기 주해본]이 나오게 된다.


5) 가지마에게 원고를 넘겨준 사건을 계기로 이유립 선생은 박창암씨와 멀어지고 이러는 가운데 선생으로부터 우리 민족 역사를 배우며 강독을 하던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환단고기 해석본과 이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쏟아내게 되었다.   그리고 <자유>지를 통해 잃어버린 고대사를 밝히던 1980년대 서점 가에서는 <김정빈>씨가 권태훈씨 일대기를 토대로 쓴 소설 [단丹]이 등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또 박창암을 모델로 삼아 김태영씨가 쓴 소설 [다물-고토를 회복하자는 고구려 말]도 큰 인기를 모았다.


Ⅲ. 대종교 관련


따라서 상기와 같은 정황으로 보아서도 어떤 경로든지 [환단고기]를 접했을 인사들 가운데 한 사람인 <김정빈>이 [단]의 주인공인 봉우 권태훈을 [환단고기]의 저본들과 깊숙이 맺어진 대종교와 관련이 있는 사람으로 나름대로 설정한 이유를 짐작케 해준다.   이렇듯 [앵무새]가 주장하는 【대종교는 환단고기와 나름 인연이 있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설득력이 있다.  


- <이기> 선생은 말년에 홍암 <나철> 선생과 함께 행촌 이암의 유저遺著였던 “태백진훈”과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 “삼성기” “단군세기” “규원사화” 등 여러 상고上古 사서를 교열하고 주석하는데 전념하였다.   이 시기는 홍암 <나철>이 따로 시원단군교(1년 뒤 대종교로 개칭)를 중광重光하고 <이기>와 그 제자들은 갈려나가 [단학회]를 창설하던 1909년 이전이다.





따라서 [국사 찾기 협의회-1976년 10월 유봉영*박창암*이유립*문정창*임승국 등과 함께 조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국회공청회에서도 많은 활동(1981년 11월 국회 국사청문회에 출두 국사교과서 검인정에 관련된 청문회에서 만주원류고*요사지리지 등을 참고로 단군조선*기자조선의 강역이 북경까지 였고 백제가 상해에 진출했다고 주장)을 한 <안호상> 선생이 대종교 교주격인 총도전(14대 1992년 ~ 1997년)의 지위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환단고기]와 깊은 연관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음은 [계연수와 천부경]에 대한 언급문제이다.   [앵무새]의 주장은 아래의 4가지로 요약되는데 이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그 다음의 글로 요약될 수 있다..


1) 1916년 묘향산 석벽에서 천부경을 발견했다는 <계연수>가 내용을 보낸 단체도 대종교로 알고 있었으나 시흥 단군교였다.


2) 대종교는 [천부경] [삼일신고] 등을 교의 경전으로 떠받들고 있다.


3) 이것들은 [환단고기]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4) 대종교 경전과 [환단고기] 수록 부분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한다.


현재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삼고 있다.   [대종교]는 1909년 <나철>이 개창한 <시원단군교>에서 비롯됐다.  그러다가 1910년 대종교(단군개천을 주장)로 개칭했는데 이때 <나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이기>의 [단학회-신시개천을 주장]와 <정훈모>의 [단군교-단군개천을 주장했지만 교단 명칭문제로 갈라짐]라는 이름으로 떨어져 나갔다.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에 의해 처음 편찬됐으니 천부경의 존재여부는 사실 그때 세상에 알려진 셈이다.  그러나 당시의 대종교와 단군교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삼지 않았다.  대종교를 이끈 <나철>은 1916년 자살하고 이듬해인 1917년 <계연수>는 대종교에서 떨어져 나간 [단군교]에 천부경을 전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1920년 일제(日帝)가 단군교를 없앰으로써 단군을 모시는 종교는 대종교만 남게 됐다.   이때 단군교를 따르던 많은 신자가 대종교로 넘어왔지만 대종교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종교가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것은 1975년에 이르러서다.   이를 알기 쉽게 도시(圖示)하면 아래와 같다.



천부경이 세상에 알려진 경위]


1916년 9월 9일 계연수가 묘향산 석벽에서 발견 - 1917년 서울의 단군교당에 전달(천부경의 유래를 밝힌 계연수 기서에서 언급) - 1917년 단군교에서 단군의 경전으로 등장 - 1920년 전병훈이 단군교 대선사 윤효정을 통해 입수하여 정신철학통편에 수록 - 1921년 단군교 기관지인 <단탁>에 의해 세간에 알려짐 - 1975년 대종교 교무회의에서 기본 경전으로 채택 - 1983년 대종교요감에 처음 경전으로 수록


 


앞에서 밝혔듯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선생에 의해 처음 편찬됐으니 [천부경]은 그때 세상에 알려진 셈이다.   하지만 그 전에도 [천부경]에 대한 내용은 전해져 왔다.   그걸 분명히 알고 있던 선생은 스스로의 글에서도 나타나듯이 실체를 찾기에 노심초사하다가 마침내 1916년에 태백산(현 묘향산妙香山) 석벽에서 이를 발견한 것이다.   다음이 이를 증명한다.


1) <이기> 선생은 말년에 홍암 <나철> 선생과 함께 행촌 이암의 유저遺著였던 “태백진훈”과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 “삼성기” “단군세기” “규원사화” 등 여러 상고 사서를 교열하고 주석하는데 전념하였다.   이 시기는 홍암 나철선생과 함께 시원단군교(1년 뒤 대종교로 개칭)를 중광重光하고 <이기>와 그 제자들이 뒷날 따로 [단학회]를 창설하던 1909년 이전이다


※ [이기] 선생을 따르던 제자 가운데 운초 계연수(?-1920)가 있었고 그 밖에도 이정보*백하 김효운 등 여러 자강회원들이 있다.   1909년 3월 16일 <단학회>를 창단하고 동년 5월 5일에는 강화도 참성단에 올라가서 고유하였다.   그러나 해학 <이기> 선생은 동년 7월 13일 서울의 한 객사에서 자진 순국하였다.   이듬해 나라가 망하자 제자 <계연수>는 1911년 [묘향산 단굴암]에 들어가서 <환단고기>를 펴냈는데 이렇듯 “천부경”과 “환단고기”는 [해학 이기] 선생의 혼이 담긴 유서요 민족적 비극의 소산이었음을 잘 알아야 한다.


2) 석벽의 글을 발견할 당시 정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선생은 이전에 이미 [천부경]의 내용과 전래과정을 익히 알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계연수 선생의 글]  


계연수가 천부경의 원본을 묘향산 석벽에서 박아 써 보낼 때의 것을 적노라......단군님이 신인神人이시라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잡으시고...이를 마음속에 새겨두고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였더니......지난 가을에 태백산에 들어가서 유심히 깊은 골짜기를 들어감에 따라...시내 위의 돌 벽에 옛날에 새겨 놓은 것이 있는 듯 하는 지라 손으로 바위에 낀 이끼를 쓸고 보니 글자 획이 분명한 천부경이 나타나는지라...공경히 읽으니 한편으로는 단군 한배검의 보배로운 글임에 기쁘고 한편으로는 고운孤雲선생(최치원)의 기적이 있음에 기뻐한지라......


※ 천부경 81자에 대한 확인자료로 잘 알려진 묘향산석벽본妙香山石壁本은 1917년(丁巳年 正月 初十日) 계연수선생이 묘향산석벽에 새겨진 천부경을 탁본하여 당시 서울의 단군교당 앞으로 서신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군교부흥경략(1937년)에는 이 서신과 함께 천부경 81자가 전해지며 또한 삼일신고의 원문原文도 전한다.


다음으로 [대종교 경전]뿐만 아니라 유전되어 오는 다른 저서에 기록된 [천부경]의 내용이 [환단고기]와 다소 차이를 보인다는 대목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1)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편에 천부경을 찾아낸 최초의 인물이 신라의 최치원(857~?)이라고 기록돼 있는데 최치원은 <문창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후손인 최국술은 지난 1925년 집안에 전해오던 최치원의 글을 모아 [최문창후전집]을 펴냈다.   여기에도 천부경이 실려 있다.   총 81개의 한자로 구성돼 있는데 환단고기에 실린 천부경과 74자는 같고 7자가 다르다.   그러나 7자는 의미가 달라질 정도로 다른 한자가 아니라 거의 유사하게 해석되는 한자다.   때문에 천부경이 환단고기 쪽으로 전해지는 과정과 최치원 집안에서 전해지는 과정에서 7자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해석이 다수설이다.


2) 조선 말의 기정진(奇正鎭 1798~1879)도 그때까지 구전되는 걸 전해 듣고 천부경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 천부경은 선생의 제자의 제자인 김형택씨가 [단군철학석의 1957]란 책에 남겨놓았다.   역시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1자가 다르나 해석에는 큰 차이가 없다.


3) 이 세 가지 천부경 가운데 정본으로 여겨지는 것이 환단고기의 천부경이다.    대종교도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같은 글자의 천부경을 경전으로 인정한다.


세 책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것이 [환단고기]다.   이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 [최문창후전집]에 나오는 천부경과 [단군철학석의]에 나오는 천부경은 [환단고기]를 참고해 만들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현재의 통설로 인정되는 추세이다.



Ⅳ.  어아가 관련


<어아가於阿歌>는 [환단고기] 2세 단군 부루 때 나오는 노래가 확실하며 그 해석은 거의 공통적으로 [神市以來每當祭天國中大會齊唱讚德諧和於阿爲樂感謝爲本神人 以和四方爲式是爲參佺戒其詞曰  신시이래로 하늘에 제사지낼 때마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크게 모여 함께 노래 부르고 큰 덕을 찬양하며 서로 화목을 다졌다. 어아가를 부르며 조상에 대해 고마워하였으며 神人이 사방을 다 화합하는 식을 올리니 이게 곧 참전의 계가 되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라고 본다.   또한 [어아가]의 해석도 1) 기뻐서 내는 소리(강수원)  2) 교훈적인 내용을 담음 고대 가사의 이름(임승국) 이라 하고 내용 해석에 있어서도 다음과 같이 신인(神人)이 세상을 화합하는 선도(仙道)의 가사를 담은 신가(神歌)로서 참전계경(參佺戒經)의 모태라고 하여 전혀 일본과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어아! 어아! 우리들 조상님 네 크신 은혜 높은 공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니 활줄처럼 똑같으며 착한마음 곧은 화살 한맘으로 똑같아라.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 되어 과녁마다 뚫고 지고 끊는 마음 착한 마음 눈과 같은 악한 마음.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활이라 굳게 뭉친 같은 마음 배달나라 영광일세,   천년 만년 크신 은덕 한배검이시여!  한배검이시여!





그렇지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어아가"에는 일본을 물리치자는 뜻이 담겨져 있다는 해석이 나오는 모양인데 아마도 이를 [대종교]가 차용(借用)하면서 항일 무장 투쟁의 전면에 나서는 가운데 민족 적인 항일의식을 고양시키려고 일본을 물리치자는 의미로 약간 전향적인 해석을 하였고 또 항일의사들이나 무장독립군들이 그렇게 인식하면서 많이 인용하였던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앵무새의 주장 - 단락 3]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은 독립운동가로 본래 과거급제하여 벼슬도 산 양반이었다.   나철은 1907년 을사오적 암살 계획을 세웠다가 실패하여 체포되기도 했다.   이때 유형 10년의 형을 받았으나 연말에 고종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나철은 1906년 1월24일(음력 1095년 12월 30일) 밤에 서울 거리에서 "백전"이라는 도사로부터 백두산 "백봉" 도사가 전하는 [삼일신고]와 [신사기]라는 책을 받았다.   그리고 1908년 12월 5일 동경 여관에서 "두일백" 도사로부터 [단군교포명서] 등의 책자를 받았다.   다시 12월 9일 단군 대황조의 교화를 펼치라는 당부를 받았다. 그리고 그때 나철은 득도를 했다.   물론 위에 나오는 저 도사들이 실존 인물이라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한홍구 교수는 나철이 일본에서 "신도"에 감명을 받아 대종교를 만들었을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단군교(대종교의 원래 이름은 단군교)의 득도 자리가 동경 여관이라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하다.


나철은 처음에 자기가 만든 종교 이름을 신교神敎라고 했다.   이 이름부터 일본의 신도神道를 연상케 한다.   대종교에서는 일본의 신도가 신교에서 파생된 종교라고 주장하는데 우습게도 신도에서는 대종교가 신도에서 파생된 종교라고 여기고 있다.   일본 신도도 세계의 모든 종교가 신도에서 퍼져나간 것이라 주장하는데 대종교는 그중 지위가 제법 높다고 한다.


나철은 1909년 1월 15일 밤 12시에 서울에서 단군교를 창시했다. 나철은 1910년 8월 5일 교명을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바꾸었다.   일제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골수분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교를 떠나기도 했다.   대종교는 일제로부터 심하게 탄압을 받았는데 그것을 견디지 못한 때문인지 나철은 1916년 8월 15일(음력)에 구월산 삼성사에서 자결했다고 한다.



[반론]

우리나라 민족종교를 중광(重光)한 위대한 종교지도자이며 일제에 항거하는 모든 투쟁의 원동력을 만들면서 장렬히 산화한 민족지도자를 이렇게까지 비아냥거리듯이 은근히 매도하다니 이는 정녕코 [부일사대모화론자]의 [궤변망상]이 아니고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韓민족의 핏줄이 조금이라도 섞인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단락은 필자도 차마 얼굴이 뜨거워 붓을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심정이지만 어차피 누군가는 질책해야만 할 망상이기에 손을 떨면서 억지로 반론을 제기한다(아울러 이 단락에서는 『국학연구소 김동환 연구원님의 종교계의 독립운동 대종교편』을 부분 인용하였음을 밝혀둔다).



먼저 <나철> 선생을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해학 <이기-수많은 민족 전래사서를 소장하였다> 선생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으며 오기호(吳基鎬)를 비롯한 우리민족 정기가 가장 많이 살아있던 서북학파에 깊숙이 개입된 인사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 우리 민족 고유의 역사인 신시개천-단군개국의 민족역사 복원과 선도(仙道) 신앙 부활 및 구현에 일익(一翼)을 담당하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나철 선생의 시원단군교 중광 전인 초기 행적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이는 앞으로 시원단군교 - 단학회 - 단군신앙과 민족 역사복원활동 - 환단고기 와의 상호 연관성을 풀어내는데 중요한 열쇄가 되기 때문이다.



[나철 선생 행적]


1) 1906년 1월24일(음력 1905년 12월 30일) 밤에 서울 거리에서 "백전"이라는 도사로부터 백두산 "백봉" 도사가 전하는 [삼일신고]와 [신사기]라는 책을 받는다.


2) 1908년 12월 5일 동경 여관에서 "두일백" 도사로부터 [단군교포명서] 등의 책자를 받았다.


3) 1908년 12월 9일 다시 그로부터 단군 대황조의 교화를 펼치라는 당부를 받았다.   그리고 그때 나철은 득도得道를 했다.


[이기 선생과 관련 인사들의 행보]


1) 이 시기 홍암 <나철> 선생과 함께 행촌 이암의 유저遺著였던 “태백진훈”과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 “삼성기” “단군세기” “규원사화” 등 여러 상고 사서를 교열하고 주석하는데 전념하였다.   이 무렵은 나철 선생과 함께 [시원단군교]를 중광重光하고 나중에 [대종교]로 개명하면서 <이기>와 그 제자들이 [단학회]를 창설하던 1909년 이전이다.


※ 이기와 나철은 동향의 선후배로서 매천 황현과 더불어 구학문과 신학문을 아울러 가르친 독특한 민족교육자인 왕석보王錫輔의 문하이다.   나철*오기호와 같이 일본에 건너가 항의 각서를 내는등 독립운동을 함께 했고 귀국하여 을사오적 참간斬奸을 시도하다 유배도 같이 겪은 비록 나이는 15살 차이가 나도 생사를 같이 한 동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서울에서 <백전>이란 인물에게 전달받은 [삼일신고]는 묘하게 上記 연구 서적과 書名이 같고 또 다른 대종교 기본 경전인 [신사기]는 대부분 [환단고기] 저본의 내용과 교감이 되니 이들 연구 성과로서 나중에 편집되어졌음을 추정케 해주는 대목이다.


2) 나철 선생은 오기호 등과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활동한다.   이때 정훈모*이기와도 굳은 신의를 다지면서 항일투쟁과 민족 신앙 부활을 의논한다.   이 같은 활동의 저변에는 반도 북쪽지역-백두산-만주일대를 포용했던 서북학파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는 1914년 5월 대종교 총본사를 그쪽(만주 화룡현 청파호인 백두산 북쪽 기슭)으로 옮기며 단군신앙의 성지인 백두산에 거점 마련과 그곳을 중심으로 포교지역을 확장시키는 지대한 원천으로 작용한다.


※ 이 무렵 만난 <백전>이나 그가 언급했던 <백봉白峯>이란 인물들이 모두 단군신앙의 원천인 백두산 지역에 근거한 단군관련 인물들이다.   그러면서 나철*이기 등의 우리 상고사와 단군서적 탐구*교열 행적과 기가 막히게 맞물린다는 점을 특히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유교적 존화주의와 소중화적 마한정통론을 강하게 비판하며 단군조선-부여-고구려에 대한 강한 문화적 동류인식을 지닌 서북학파는 후일 西友학회(대종교의 주요인물이 된 백암白岩 박은식이 창도)-서북학회(1908.1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와 서우학회 합병)로 이름을 드러내면서 근대 민족주의 사상의 정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西北이란 해서海西(황해도)*관서關西(평안도)의 兩西와 관북關北(함경도)를 통칭하는 말이다.



3) 1908년 정훈모와 함께 무너져가는 국가 운명을 돌리려 한 네 번째 渡日중 동경에서 신교神敎 수행의 우두머리인 두일백(杜一白) 노인에게서 단군신앙 관련 서책을 받는다.


※ 이 부분에서 이어지는 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해보면 두일백 노인이 몸은 동경에 잠시 머물고 있으면서 그가 수행하고 전수했던 신앙체계가 신교神敎라 표현했으나 명백히 일본 神敎와는 전혀 다른 전래 단군신앙인 삼일신고*소도경전본훈의 내용과 같은 仙道사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를 일본 신교와 동일시하는 건 명백한 잘못이다.   또한 단군관련 서책을 받으면서 미래의 사명이 이 정신의 중흥에 있다는 덧붙임 말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비록 신용神容한 분위기로 이 상황을 묘사하였지만 이는 결국 그 무렵 이기 선생등과 우리 전래 사서를 통한 단군신앙 및 한민족 역사 연구 시기와 교묘하게 맞물려지는 걸로 보아 조금은 나철 선생의 행적을 신이神異하게 묘사하려고 색깔을 입힌 듯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덧붙일 말은 단군 역사의 복원과 단군사상에 대한 연구는 조선 중기 이후 허목-홍만종-이종휘 등의 계보를 이어오면서 꾸준히 지속되어왔다는 점이다.   이를 결코 그냥 흘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를 기반으로 단군신앙이 연연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海東異蹟(1666)과 순오지旬五志(1678)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시피 <조선 단학파丹學派의 연원을 단군에서 찾아 단군이하 32명에 이르는 仙人들의 단학수련전丹學修練傳을 수록하거나> 또는 조선 단학의 연원이 종리권鍾離權 등 중국 전진교全眞敎에서 유래한다고 한 한무외韓無畏의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1610)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중국도교와는 전혀 다른 도맥道脈을 가진 고유의 전통이라는 점을 조목조목 근거를 대면서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백두산을 성지로 삼은 [백봉]파의 연원이 무엇이며 또 어디에 근원을 삼고 있는지가 확연히 밝혀진 다음에야 무슨 일본 신도神道 나부랭이에 견주거나 이 인물들이 어떤 학파인지 모르겠다는 어린애도 아니고 마치 이방인 같은 언사는 조금 자제해주었으면 한다.


4) 그 해 12월 9일 밤 정훈모의 입화 아래 두일백으로부터 단군교 의식을 통한 영계靈戒를 받았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으며 그 날 위 [앵무새]의 글에서 득도得道라고 말한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으로서 평생의 신념으로 삼게 된 각성覺性을 한다.


※ 그런데 무슨 일본의 신도 사상을 받아들였다는 망발이 또 나오는지 참으로 한심스럽다.   아무려면 나라의 망함을 한스럽게 여기면서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란 자각을 가슴 깊이 아로새긴 선생이 [그래!  그래서 일본의 신교정신을 받아들여야 해!]라고 득도得道를 했겠는가?    망발도 이런 망발이 없으며 논리도 이런 해괴한 논리가 없다.   이는 그 후 곧바로 단군사상인 도존道存을 중심으로 시원단군교를 重光한 사실로도 여실히 증명되는데 말이다.   분명히 나철의 행적에 먹칠을 하려고 의도적으로【한홍구 교수는 나철이 일본에서 "신도"에 감명을 받아 대종교를 만들었을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라는 <부일사대모화>적인 주장을 끌어다가 억지로 기워 붙인 궤변이다.   그러고서도 한국인이라고 떠들며 환한 대낮에 돌아 나닐 건가?


   한마디 조언한다면 훨씬 앞서 이를 조목조목 파헤친 이종휘李種徽의 수산집(修山集 권12 신사지神事志>을 보면 명명백백하게 알 수 있다.   그는 우리 민족 고대의 신선*귀신 신앙의 기원을 모두 단군에서 찾았는데 <조선의 처음에 환국이 있었다...환국 곧 환웅(神市天王)시절에는 神으로서 종교를 세웠다.  이신설교以神設敎>라고 기술하여 <한국의 신선*귀신 숭배의 연원이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천부인 세 개를 가지고 태백산 신단수에 강림하여 신시천왕이 되며 신교神敎를 만들어냈다는 점에 있다>고 피력한다.  



   그리고 마니산 참성단의 제천*태백산 아사달산(삼성사三聖祠)의 단군사檀君祠*기자의 교신명交神明*부여의 곤연사鯤淵祀*고구려의 태후묘太后廟와 동맹東盟(10월 제천)나 동명묘東明廟와 수신사隧神祀를 비롯한 仙人*신라의 神山  신앙 등이 모두 단군의 아비인 환웅의 [신교]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한국고유 신앙체계와 민족적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이를 [단군신교]와 연결시킨 그의 사고관은 후일 한민족 고유 종교관을 주장한 [대종교]와 [단학회] 그리고 [단군교]는 물론 민족주의 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 심지어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단군 이래 조선 고유한 독립적 문화를 구가하여 김부식 이후 史家들의 노예사상을 갈파喝破하였다”고 하여 그를 절찬하면서 스스로 아호雅號를 <단재丹齋>라고 까지 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5) 1909년 1월 15일 이윽고 선생은 오기호*최전*유근*정훈모*이기*김인식*김윤식 등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더불어 [단군교포명서]를 선포하면서 단군교를 다시 일으킨다.   그리고 분명하게 동학이나 증산도처럼 창교創敎가 아닌 중광重光(단군신앙의 원형인 전래 神敎 즉 仙道 사상을 다시 일으킨다)으로서 스스로도 창교주創敎主가 아니고 우리 민족 고래의 단군교에 입교한 일개 敎人으로서 단군신앙의 연결자에 불과함을 확실하게 표명하였다.



마지막으로 첨언할 부분이 있다.   [앵무새]가 물고 늘어지는 <백전>이나 <백봉白峯>이란 인물들이 모두 단군신앙의 원천인 백두산 지역에 근거한 단군관련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또한 단군조선-부여-고구려의 仙人(조의선인 등) 전통을 이어가는 중국의 도교와는 다른 단군에 대한 고유 인식을 토대로 삼는 독자적인 전통수련집단(仙家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백봉-백전-두일백]의 인물들을 통해 강하게 드러난다.


  韓末 당시 白峯이라는 道人이 있었다...太白山中에서 十年 도천禱天하사 대황조성신大皇祖聖神의 묵계黙契를 受하시고 본교교전本敎敎典과 단군교실사檀君敎實事를 석함중石函中에 得하와 장차차제將次次第로 세상에 공표하려...(수련자 집단 중) 백전씨白佺氏는 33인의 最長兄이니 본시 백두진인白頭眞人이라 도덕신명道德神明이 백봉도사의 차석次席이므로 대종사大宗師께서 백전으로 호명呼名하시니 지자知者는 백진인伯眞人이라 한다...호號는 두암頭巖이니...대한제국의 국운이 날로 쇠퇴해가는 걸 보고 구국의 의지를 굳게 하기 위해 1904년 10월 3일에 백봉의 수련집단 중 13인이 태백산 대숭전大崇殿에서 선사를 배알하고 일심계一心戒를 동수同授한 뒤 本敎(단군선가)의 포도佈道를 맹세하였다.   <단군교포명서*육십년사>


그러므로 이후의 사건 전개는 이렇게 되었음을 조심스럽게 추정해본다.

1) 仙家를 포교하려면 오히려 사회적 역량과 활동성을 갖춘 애국지사가 적당함을 인식


2) 이런 인물을 물색하기 위한 적임자로 두일백(호號는 미도彌島)을 백봉이 선정


3) 두일백은 열렬한 애국심으로 국권회복에 저돌적인 나철을 주목


4) 1908년 12월 당시 일본에 네 번째로 들어가서 민간외교활동을 벌이던 나철을 만나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와 <고본신가집古本神歌集> 등 관련 문헌을 전수 


여기에서 짐작되는 부분은 상기의 모든 정황을 추적*분석해 볼 때 결코 허위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아래와 같은 분석 결과로 미루어 필자는 분명히 나철 선생의 뒤에서 重光을 촉구한 집단(백두산의 단군 선가 전통 유지 및 수련집단)이 존재하며 그들이 오래 전부터 지니고 있었던 경전*교리*의례 등이 전달됨으로서 교단의 기초가 급속하게 정비*고착되어진 것으로 본다.





1) 대종교 기록이 전하는 백봉 선가집단의 이야기가 너무나 구체적이고 모두가 꾸며진 헛된 이야기라고 단정하기에는 어렵다.


2) 또한 중광 후 시원단군교의 조직화 과정을 볼 때 지극히 체계적이다.


3) 시원단군교의 교단 형성이 오로지 나철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는 정황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 교리와 경전의 완성도*교단의 개척 및 정비활동*기타 중광 직후 교인들이 행할 봉신성원奉神成願 주송呪頌 전격 발포*중광 1개월 후 密誡 22음 계시 등


또한 神道*神敎*仙道*仙家의 부분에 관해 아래의 나철 선생 순국에 대한 설명에서 별도로 언급할 것이지만 간단히 설명해주겠다.   1915년 <포교규칙-조선총독부령 제 83호  10월 1일> 발효 후 일제의 종교탄압에 대응하기 위해 선생은 한 방략方略을 펼친다.   이는 선생이 자결할 때 남긴 [여조선총독與朝鮮總督 사내서寺內書]에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貴府令제83호 發神敎*불교*기독교之布敎規則矣 及 同12월 21일 本敎依基神敎規則 而呈申請 則自貴府 退却曰 「倧非神敎不可受」庚戌 8월 30일 貴府令發 제1호 告示 有曰 「保護各宗敎 使自由信敎矣」及今年 3월 일 爲敎主者 欲發修道之行 則使所管警察署 拘止曰 「大倧敎人 不許自由」今5월10일 陳書於閣下 請決去就則又使警察署 說諭曰 「不可書類」 <육십년사>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선생은 일본의 神道를 神敎와 동일한 유형의 유래를 거친 고유 신앙으로서의 신교로 인식하여 본교가 신고하는 이유는 일본의 신교와 같이 고래로부터 유전되어 오는 한민족종교의 성격이 있으므로 이(일본 신교의 사례)에 의거하여 신청을 올렸다는 점이다.   즉 앞으로 자유로운 포교활동을 담보받기 위해 일본 측이 자기네의 전통신앙인 신교의 자유를 인정한 것처럼 한민족의 공인종교로서 인정받으려고 신교의 사례에 기댄 것이었다.   그런데 총독부가 근거로 댄 신도는 일본의 신사신도神社神道와 교파신도敎派神道를 뜻하는 것으로서 대종교의 신교내용과는 전혀 다르다고 판단하여「대종교는 주장하는 바대로 그렇지 않으며 신교의 흐름을 이어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고 당연히 기각되었다.   이에 따라 대종교는 곧바로 유사종교단체로 규정되어 관할 경찰서의 관리 하에 놓이게 된다.


이 같은 사실이 번연히 드러나는데도 [앵무새]는【나철은 처음에 자기가 만든 종교 이름을 신교神敎라고 했다.   이 이름부터 일본의 신도神道를 연상케 한다】혹은【물론 위에 나오는 저 도사들이 실존 인물이라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라고 망언을 하는가 하면【대종교에서는 일본의 신도가 신교에서 파생된 종교라고 주장하는데 우습게도 신도에서는 대종교가 신도에서 파생된 종교라고 여기고 있다.   일본 신도도 세계의 모든 종교가 신도에서 퍼져나간 것이라 주장하는데 대종교는 그중 지위가 제법 높다고 한다】는 일본인들의 의도적인 말을 앵무새처럼 퍼뜨리는 이유가 무언지 정말로 궁금하다.





[시원단군교] 중광 이전부터 한 솥밥을 먹으며 호흡을 잘 맞추었던 <이기>의 [단학회]와 <정훈모>의 [단군교]가 결정적으로 따로 갈라서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교리상의 문제로 보인다.   다만 그 시기가 [단학회]는 [시원단군교] 중광(重光) 시기 그리고 [단군교]는 [대종교]로 명칭을 바꾼 시기와 맞불려 있는데 이는 개명한 이름이 지닌 의미와도 깊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앵무새]가 거론한 【나철은 1910년 8월 5일 교명을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바꾸었다.   일제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골수분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교를 떠나기도 했다】는 그야말로 어불성설에 다름이 아니다.



- 시원단군교 重光 이전부터 서로 우리 상고서적을 공동으로 교열하고 주석하며 격의 없이 역사 문제를 가지고 토론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이견이 발생하였고 이를 좁히는데 실패한다.


- 그 핵심 주제와 쟁점은 삼신설三神說의 정의*신시개천神市開天이냐? 단군개천檀君開天이냐?*단군건원檀君建元 등이었다.


<이기> 선생은 따로 시간을 내어 집안의 秘記로 전해지던 도가사서들을 토대로 [증주增註 진교태백경眞敎太白經]란 경전(유고집인 해학유서海鶴遺書가 아닌 손자였던 이일현李日顯씨가 유서遺書에 빠진 글을 보충해 발간한 해학유고海鶴遺稿에 수록되어 있다) 을 편찬하였다.   태소씨(太素氏)란 인물이 저술한 [태백경太白經]을 증주(增註)한 것이다.   즉 국권 회복을 위한 민족 단결의 정신적 구심점인 단군(眞君-참된 神人)을 신앙하는 민족종교(진교眞敎-삼교합일三敎合一 사상이 강함)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점들이 위에 제시한 이견과 더불어 대종교의 나철 선생과 원형은 같으나 다소 분지(分枝)되는 교리부분이었다.


그런데다가 나철 선생은 한일합방을 바로 앞둔 1910년 8월 5일 갑자기 [단군교]에서 [대종교大倧敎]로 개칭한다.   물론 교단 측의 설명으로는 <大는 곧 한(유일唯一*크다*하늘)이며 종倧은 검(王*神*고마)이니 교단명의 변경은 보다 敎의 성격을 보편화하기 위함이라 했지만 사실 시시각각으로 맹렬하게 핍박해오는 일제의 단속과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교단 명에서 [단군]이란 글자를 숨긴 의미도 있다.   <육십년사>  


그 이전에 <이기> 선생은 [단학회]를 따로 창단하였다.   물론 그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갈 것이다.   그리고 나철 선생은 日帝의 단속과 탄압도 그렇지만 정작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한민족 정통으로서의 범민족적 단군사상기반을 가진 [대종교]가 日帝에 의해 한낱 무속단체보다 못한 [유사종교단체]로 낙인찍히자 크게 자존심이 상하여 분노한듯하다.   그 이유로는 두 가지로 선생의 확연한 행동변화가 눈에 잡히기 때문이다.





1) 일제의 지속적인 압박에도 1910년의 교단 명名 변경과 1914년 총본사의 백두산 지역 이동으로 맞서며 그 후에도 의욕적인 포교지역 개편과 같은 활발한 활동 노력이 돋보인다.


2) 하지만 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교세의 급속한 팽창에도 불구하고 1915년 <포교규칙-조선총독부령 제 83호  10월 1일> 발효 후인 1916년 8월 단군신앙의 중심지인 구월산 삼성사에서 갑작스런 자결을 감행하고 있다.


이는 다시 언급하지만 선생이 자결할 때 남긴 [여조선총독與朝鮮總督 사내서寺內書]에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貴府令제83호 發神敎*불교*기독교之布敎規則矣 及 同12월 21일 本敎依基神敎規則 而呈申請 則自貴府 退却曰 「倧非神敎不可受」庚戌 8월 30일 貴府令發 제1호 告示 有曰 「保護各宗敎 使自由信敎矣」及今年 3월 일 爲敎主者 欲發修道之行 則使所管警察署 拘止曰 「大倧敎人 不許自由」今5월10일 陳書於閣下 請決去就則又使警察署 說諭曰 「不可書類」 <육십년사>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선생은 일본의 神道를 神敎와 동일한 유형의 유래를 거친 고유 신앙으로서의 신교로 인식하여 본교가 신고하는 이유는 일본의 신교와 같이 고래로부터 유전되어 오는 한민족종교의 성격이 있으므로 이(일본 신교의 사례)에 의거하여 신청을 올렸다는 점이다.   즉 앞으로 자유로운 포교활동을 담보받기 위해 일본 측이 자기네의 전통신앙인 신교의 자유를 인정한 것처럼 한민족의 공인종교로서 인정받으려고 신교의 사례에 기댄 것이었다.   그런데 총독부가 근거로 댄 신도는 일본의 신사신도神社神道와 교파신도敎派神道를 뜻하는 것으로서 대종교의 신교내용과는 전혀 다르다고 판단하여「대종교는 주장하는 바대로 그렇지 않으며 신교의 흐름을 이어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고 당연히 기각되었다.   이에 따라 대종교는 곧바로 유사종교단체로 규정되어 관할 경찰서의 엄한 단속과 탄압이라는 관리 하에 놓이게 된다.


또한 총독부 측은 특히 대종교에 대해 고의적으로 일반유사종단으로 보아오던 군소신앙단체는 모두 서류를 접수하고 오직 대종교만 그들과 같은 신교전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서류를 각하할 뿐 아니라 교내외 활동조차 못하게 했다.   <육십년사>


생의 신념체계에서는 조국과 민족 그리고 단군신앙이 그와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조국과 민족이 없어지고 대종교가 폐교되는 마당에 극도로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받자 이런 상황에서 자기 목숨이 살아 있다는 것은 의미가 없고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진솔한 삶의 태도로서는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으며 죽음으로 스스로 조국과 목숨을 바칠 시점이 바로 이 때라는 걸 인식하였다.   이윽고 선생은 자기 목숨이 끝나는 장소를 선택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였다.   죽을 때는 정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순국할 장소를 민족의 삼성(三聖)인 환인*환웅*단군이 모셔져 있는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라고 결정하였다.



※ 구월산 삼성사는 단군이 마지막 승천한 <아사달>에 해당하는 산이며 고려*조선조를 통해 민중적 단군신앙의 본거지였다.   이는 스스로의 죽음을 이와 동일시하여 일제의 공작으로 유사종교로 전락한 교단의 권위를 높이려고 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여 지며 이런 처절한 심정은 유서인 [공고교도문恭告敎徒文]등에 짙게 배어있다.



굿 것이 수파람하고(귀신이 휘파람 불고) 도까비 뛰노니 한울 땅의 정기 빛이 어두우며 배암이 먹고 도야지 뛰어가니 사람 겨레의 피고기가 번지르하도다.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 모래는 바람비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 메뇨.   <공고교도문 중>


이 겨레를 위해 죽으니 끝없는 영광이라.   오직 힘써 세상을 복되게 하고 이 백성들을 다행하게 만들라...지금 조선 땅에는 나를 묻을 곳이 없으니 반드시 화장으로서 나를 깨끗하게 해 달라.   <김교헌에게 내린 유시와 유계장사칠조遺戒葬死七條 중>


제1조  죄악이 무겁고 材德이 없어서 능히 단군 신족神族을 건지지 못하여 오늘의 모욕을 당하매 대종교를 위하여 죽노라.


제2조  대종교를 받든지 8년에 발고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주신 한얼님 은혜를 갚지 못 하매 한얼님을 위해 죽노라.


제3조  이 몸이 가달 길에 떨어진 인류의 죄를 대신으로 받았으매 천하를 위하여 죽노라.  <유서 순명삼조殉命三條>





무상한 저 세법世法이 우리 진리를 위반하여


상제께 불경하고 대종문大倧門에 불귀하니


허다한 이 더러움 한명 끊어 다 씻겠다.


만덕문萬德門에 들어가서 인간선악 여짜올 때


간사 코 악덕한 자 용서 없이 다스리며


진정 코 착한 사람 보전하여 다 왕성케


살벌풍진 쓸어내고 도덕세계 새로 열어보세   <이세가離世歌>





따라서 [앵무새]의 【대종교는 일제로부터 심하게 탄압을 받았는데 그것을 견디지 못한 때문인지 나철은 1916년 8월 15일(음력)에 구월산 삼성사에서 자결했다고 한다】라는 언급은 위대한 민족주의자이며 투철한 항일지사로서의 면모를 간직한 채 순국한 선생의 행적을 너무나 가볍게 평가하면서 의도적으로 단순한 일제 탄압으로 인한 돌발 행동으로 폄하하려는 주장으로서 경솔하고 매우 경박스런 분석태도라고 하겠다.



[앵무새의 주장 - 단락 4]


교주의 자리는 김교헌으로 넘어갔다. 김교헌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 이야기하자.   먼저 [단군교포명서]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단군교포명서는 1904년 10월 3일에 백두산 도사들이 회합해서 만든 문건이라고 한다.


이 단군교포명서가 정말 1904년에 쓰여진 것일까?   이 문건에는 배달倍達이라는 말이 나온다.   따라서 이 문건이 진짜 1904년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배달"이라는 말이 나온 최초의 문건 자리를 차지할 지도 모른다.   여기에 나오는 배달의 뜻도 좀 특이하다.


배달은 조광祖光을 뜻하는 것이며 조광 즉 조상의 광휘가 변하여 조선朝鮮이라는 말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 링크한 최남선의 견해 즉 단檀의 훈이 박달*배달이어서 배달국이라 했다는 견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또한 [규원사화]의 내용과도 다르다.   [규원사화]의 내용은 최남선과 흡사하다)


하지만 이 문건이 1904년에 작성된 것이라고는 믿을 근거가 없다. 우선 백두산의 도사들이 진짜 존재했다고 이야기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최남선의 1918년보다 빨리 나온 자료일 가능성이 높다.   나철은 1916년에 죽었으니 그 전에 이 문건이 대종교인들에게 보여졌다면 "배달"에 대한 가장 이른 자료가 되겠다.  이 자료에 대해서 1910년경의 문건이 독립기념관에 있다고 한다.   이 점을 보아도 "배달"이라는 말은 이 자료가 가장 빠른 것 같다(또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대종교 측 증언을 따르면 최남선도 대종교인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최남선이 "배달"이라는 말을 접한 곳은 대종교 문헌에서였을까?   최남선은 "배달"이라는 말만 취하고 그 해석은 버린 것일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당시 대종교는 비밀결사와 비슷했던 모양이니 약간의 가능성은 있다고 하겠다)


[반론]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지 주제(主題)가 금방 손에 잡히지 않아 감조차 잡을 수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다음과 같은 언급이다.





1) 백두산의 도사들이 진짜 존재했다고 이야기할 근거가 없다.   따라서 단군교포명서는 1904년 10월 3일에 백두산 도사들이 회합해서 만든 문건이라고 하는데 이 문건이 1904년에 작성된 것이라고는 믿을 근거가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필자가 앞선 단락에서 분명히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단군사상과 민족 신앙을 이어온 선가집단(仙家集團-선인仙人*선도仙道)의 존재를 확인하였으니 [단군교포명서] 문제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2) [단군교포명서]에서 처음 언급되는 [배달]은 조광祖光을 뜻하는 것이며 조광 즉 조상의 광휘가 변하여 조선朝鮮이라는 말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 링크한 최남선의 견해 즉 단檀의 훈이 박달*배달이어서 배달국이라 했다는 견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또한 [규원사화]의 내용과도 다르다.   [규원사화]의 내용은 최남선과 흡사하다)


[배달倍達]의 근원은 [환단고기]를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연연히 전해 내려온 우리민족 고유의 사유(思惟)이었다.   이는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해 전해진 각기 다른 사서에서도 거의 빠짐없이 언급되면서 똑같은 용례와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한층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또한 나철 선생이 교명(敎名)을 바꿀 때 [大]를 [한]으로 풀은 어원을 [환단고기]등에도 자주 나오는 [대조신大朝神-한배검]과 같이 고유의 우리말 한역(漢譯)을 따른 것이 분명하므로 [朝]를 [배달의 배]에서 나온 차의(借意)로 이해하여 나름대로 [조광朝光=대조大朝 즉 크게 밝은 한밝]이라고 해석한 듯하다.  즉 [밝은 터=밝은 나라=밝은이들이 사는 곳=하늘의 아들인 밝은 사람들이 모인 터(祖光?)]로서의 의미를 지닌 밝달=박달=배달倍達=단조檀朝=조광朝(祖)光=단檀=배오개=배고개=배골은 모두 이자동의어(異字同義語)이다.   따라서 규원사화의 의미나 최남선의 주해나 단군포명서의 풀이나 다 같은 근원에서 파생된 해석들이다.


後桓雄氏繼興奉天神之詔降于白山黑水之間鑿子井女井於天坪劃井地於靑丘持天符印主五事在世理化弘益人間立都神市國稱[培達]  <삼성기전 상>


뒤에 한웅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로 정했다.   천부의 징표를 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시며 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더라.   또 신시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이라 불렀다.


[倍達]桓雄定有天下之號也其所都曰神市後徙靑邱國傳十八世歷一千五百六十五年  <삼성기전  신시역대기>



[배달]환웅은 천하를 평정하여 차지한 분의 이름이다.   그 도읍한 곳을 신시라고 한다.   뒤에 청구국으로 옮겨 18세 1565년을 누렸다.


於阿於阿我等大祖神大恩德[倍達國]我等皆百百千千勿忘...於阿於阿我等百百千千人皆大弓堅勁同心[倍達國]光榮百百千千年 大恩德我等大祖神我等大祖神   <단군세기>


어아! 어아! 우리들 조상님 네 크신 은혜 높은 공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잊지 마세...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활이라 굳게 뭉친 같은 마음 [배달나라] 영광일세.  천년만년 크신 은덕 한배검이시여! 한배검이시여!


三郞 本[倍達臣] 亦世襲三神護守之官也 高麗八觀雜記 亦曰三郞 [倍達臣]也  <태백일사 신시본기>


삼랑은 본래 [배달]의 신하요 삼신을 수호하는 직책을 세습한 것이다.   <고려팔관잡기>에서 말한다.   삼랑은 [배달]의 신하이다.


內修外攘 皆得時宜 則[倍達]國光榮 百百千千年所積高之大恩德 豈可一刻忘諸<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안으로는 닦고 겉으로는 겸손하여 모든 것이 때에 알맞아 [배달국]의 영광은 백백 천천 년이 되게 쌓여서 높아질 것이니 이 커다란 은덕을 어찌 한순간인들 잊을 수 있을 손가?


3)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대종교 측 증언을 따르면 최남선도 대종교인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최남선이 "배달"이라는 말을 접한 곳은 대종교 문헌에서였을까?   최남선은 "배달"이라는 말만 취하고 그 해석은 버린 것일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당시 대종교는 비밀결사와 비슷했던 모양이니 약간의 가능성은 있다고 하겠다.



앞글에서 이어지지만 [단군교포명서]에서의 [배달]에 대한 주해도 원래부터 상용되던 어의語義와 우리 고유의 민족의식과 국가 관념으로서의 용례를 도외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이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밝음과 환함의 원천*밝은이들과 밝은 터*하늘의 아들로서 밝은 민족이 세운 나라와 이어온 땅이라는 의미로서의 밝달 즉 박달]→[배달]→[훈차訓借로서 [桓(國)*檀(國)과 祖光*朝光]


이라는 연계를 [朝鮮]이라는 개념에 대입하려 하다보니 보다 확장되고 다양한 주석이 곁들여졌음을 아래의 구절로 보아도 확연히 짐작케 해준다.





1) 단군 조朝 중엽에(까지도) 『배달국倍達國-밝달의 의미 원형』이라 불렀던 말이 한자의 글 뜻과 음으로 바꾸어 변하여 "조선朝鮮"이 되었으니...


2) 고어에 "조祖"를 일러 "배倍"라 부르고(이는 분명히 밝음을 훈차訓借한 의미로 보아야 함) "부父"를 일러 "비比"라고 부르고(아비*할아비의 비와 같은 용례를 말함) 모든 사물의 "광휘光輝"를 가리켜 "달達"이라 하니(빛 광으로서 밝은 골의 훈차訓借로 보아야 함) "조상의 밝은 광휘로 덮인 땅을 사방에 빛나게 한다"라 하여 국호國號를 정한바(단국檀國=배달나라=조광祖光=조선朝鮮) 인즉 "배달倍達"은 곧 "조광祖光"을 뜻하는지라...


3) 지금까지 혁혁한 옛 이름이 우리들 입술에 아직도 머물고 있는 것은 "배달목倍達木"이라 하는 것인데 이는 대황조님의 "광휘목光輝木"이며...(즉 박달나무=단목檀木=배달목=광휘목이 모두 같은 음가音價나 훈차訓借임을 알게 해준다)


4) "태백산太白山이라 함은 대황조님 산이며(배倍가 한자로는 함께 통하는 음인 백白이 됨) "패강浿江"이라 함은 대황조님 강이오(압록강의 옛말인 패강의 패浿자 역시 배倍자와 통하는 음이다)...[환한 산=한산丸山=한산漢山=대산大山=밝은 산=박산博山=백산白山=발산發山=불함산不咸山이며 환한 강=밝은 강=백강白江=패강浿江이 같은 의미로 통용되었음을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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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무새 죽이기-보론】환단고기가 재야사가에게 알려진 때는? 2 - 환단고기와 대종교...반론[1]  궤변망상학의 알량한 떡밥  2010/01/11 22:00


 http://blog.naver.com/nero1003/70077872069






【앵무새 죽이기-보론】환단고기가 재야사가에게 알려진 때는? 2 - 환단고기와 대종교...반론


 


[앵무새 주장 원문]





지난번 포스팅 이후 여러분이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었다.   일단 1986년 이전에 재야사가들이 환단고기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 연도는 1981년을 넘어가지 않는다.





[환단고기]에 대한 재야사가의 최초 언급은 1981년 12월 [자유]지에 실린 박창암 장군(1921-2003 육군 소장, 월간 자유사 대표)의 권두 논설이었다. 그 논설에는 이렇게 환단고기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이미 오래 전에 단국대학에 계시는 윤내현(尹乃鉉)교수께서 《民族의 고향 古朝鮮을 가다》라는 제목으로 괄목할만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 전문(全文)을 전재(轉載)를 할 수 없어 내용만을 기초로 하고 요약함과 동시에 환단고기 등 기타 자료에 의한 본인의 역사 상식을 첨부해서 진행하겠습니다.





내가 본 사이트에서는 [환단고기]를 [한단고기]로 표기해 놓았는데, 비록 [자유]지를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이 시기에은 "한단고기"라는 표현은 없었던 것이 확실하므로 이는 사이트 측에서 임의로 변경해 놓은 것이리라 생각한다.




이상시의 책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를 보면 박창암은 이유립과 함께 [환단고기]를 녹도승에게 건네준 인물이라고 한다. 박창암은 [환단고기]의 진행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인 것이다.




박창암에 대해서 조금 알아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박창암은 함남 북청 태생으로 간도 연길에서 사범학교를 나와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43년 만주군 간도 특설대에 입대했다. 행적이 박정희와 닮은꼴이다. 백선엽 장군과 동기라고 한다. 박창암은 국군에 갑종 7기로 입대하여 대위가 되었다. 6.25 때 소령으로 공비토벌을 했으며, 5.16에 참여하여 혁명검찰부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뒤 박정희와 등을 돌리게 되었다. 검찰부장 시절 장도빈(1888-1963 독립운동가/단국대학교 설립자;육사 국사학 교관 역임)을 만나 극우 역사관에 눈을 뜬 모양이다. 최태영, 박시인 등과 어울리며 국사찾기협의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1968년 [자유] 지를 만들어 재야사학의 기관지 노릇을 하게 했다.





김정빈의 [단]에서도 [환단고기]를 언급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307쪽에 [환단고기]를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단] 자체 내용은 아니고, 김상일의 [한철학]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었다. [한철학]은 1983년 초판이 나왔던 책인데, 초판본을 구해볼 수가 없었다. 아무튼 1983년에 [환단고기]를 인용한 책이 있었다는 것은 확인된 셈이다. *추가* 1985년판 [단]을 헌 책방에서 구입했다([단]의 초판은 1984년). 위에 언급한 책은 2000년에 나왔던 책이다. 이 책에는 [환단고기]가 없다. 페이지도 2000년 판이 313쪽이나 되지만 1985년판은 281쪽에 불과하다. 2000년판은 증보판이었던 것이다. 1984년판에도 [환단고기]가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1983년 [한철학]에 환단고기가 실려있었을 것 같기는 하다. 왜냐하면 [한사상]을 출전으로 하여 "환인 시대 3301년, 환웅 시대 1565년"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연대를 밝힌 책은 [환단고기]뿐이다.





[단]을 다시 훑어보니 재밌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1999년 안에 통일된다는 예언이 틀렸다는 이야기를 포함해서.)   뭐든지 왜곡하는 환○의 세계 - 타고르 [동방의 등불] [클릭]라는 글을 예전에 쓴 바 있는데, 이 왜곡된 시 전문이 [단]에 실려 있었다.





[단]의 주인공인 봉우 권태훈은 대종교와 관련이 있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대종교는 [환단고기]와 나름 인연이 있다. 우선 공청회에서 설친 안호상이 대종교 교주격인 총도전(14대)의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다. 대종교를 창교(대종교에서는 "중광"이라고 한다.)한 사람은 "나철"이라는 사람이다.





1916년 묘향산 석벽에서 천부경을 발견했다는 계연수가 그 내용을 보낸 단체도 대종교로 알고 있었으나 그가 아니라 시흥 단군교였다고 한다. 대종교는 [천부경], [삼일신고] 등을 교의 경전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환단고기]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부분에도 대종교 경전과 [환단고기] 수록 부분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악질식민빠님 블로그를 참조해주기 바람.




[환단고기] 2세 단군 부루 때 나오는 노래 "어아가"도 대종교에서 부르는 신가라고 한다. (웃기는 것은 이 "어아가"에는 일본을 물리치자는 뜻이 담겨져 있다는 해석이라 하겠다. 수천년 전에 이미 일본을 물리치자는 노래를 불렀던 모양이다.)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은 독립운동가로 본래 과거급제하여 벼슬도 산 양반이었다. 나철은 1907년 을사오적 암살 계획을 세웠다가 실패하여 체포되기도 했다. 이때 유형 10년의 형을 받았으나 연말에 고종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나철은 1906년 1월24일(음력 1095년 12월 30일) 밤에 서울 거리에서 "백전"이라는 도사로부터 백두산 "백봉" 도사가 전하는 [삼일신고]와 [신사기]라는 책을 받았다. 그리고 1908년 12월 5일 동경 여관에서 "두일백" 도사로부터 [단군교포명서] 등의 책자를 받았다. 다시 12월 9일 단군 대황조의 교화를 펼치라는 당부를 받았다. 그리고 그때 나철은 득도를 했다.   물론 위에 나오는 저 도사들이 실존 인물이라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한홍구 교수는 나철이 일본에서 "신도"에 감명을 받아 대종교를 만들었을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단군교(대종교의 원래 이름은 단군교)의 득도 자리가 동경 여관이라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하다.





나철은 처음에 자기가 만든 종교 이름을 신교神敎라고 했다. 이 이름부터 일본의 신도神道를 연상케 한다. 대종교에서는 일본의 신도가 신교에서 파생된 종교라고 주장하는데, 우습게도 신도에서는 대종교가 신도에서 파생된 종교라고 여기고 있다. 일본 신도도 세계의 모든 종교가 신도에서 퍼져나간 것이라 주장하는데, 대종교는 그중 지위가 제법 높다고 한다.





나철은 1909년 1월 15일 밤 12시에 서울에서 단군교를 창시했다. 나철은 1910년 8월 5일 교명을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바꾸었다. 일제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골수분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교를 떠나기도 했다. 대종교는 일제로부터 심하게 탄압을 받았는데, 그것을 견디지 못한 때문인지 나철은 1916년 8월 15일(음력)에 구월산 삼성사에서 자결했다고 한다.





교주의 자리는 김교헌으로 넘어갔다. 김교헌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 이야기하자. 먼저 [단군교포명서]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단군교포명서는 1904년 10월 3일에 백두산 도사들이 회합해서 만든 문건이라고 한다.




이 단군교포명서가 정말 1904년에 쓰여진 것일까? 이 문건에는 배달倍達이라는 말이 나온다. 따라서 이 문건이 진짜 1904년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배달"이라는 말이 나온 최초의 문건 자리를 차지할 지도 모른다. 여기에 나오는 배달의 뜻도 좀 특이하다.





배달은 조광祖光을 뜻하는 것이며, 조광 즉 조상의 광휘가 변하여 조선朝鮮이라는 말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 링크한 최남선의 견해, 즉 단檀의 훈이 박달, 배달이어서 배달국이라 했다는 견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또한 [규원사화]의 내용과도 다르다. [규원사화]의 내용은 최남선과 흡사하다.)





하지만 이 문건이 1904년에 작성된 것이라고는 믿을 근거가 없다. 우선 백두산의 도사들이 진짜 존재했다고 이야기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최남선의 1918년보다 빨리 나온 자료일 가능성이 높다. 나철은 1916년에 죽었으니 그 전에 이 문건이 대종교인들에게 보여졌다면 "배달"에 대한 가장 이른 자료가 되겠다. 이 자료에 대해서 1910년경의 문건이 독립기념관에 있다고 한다. 이 점을 보아도 "배달"이라는 말은 이 자료가 가장 빠른 것 같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대종교 측 증언을 따르면 최남선도 대종교인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최남선이 "배달"이라는 말을 접한 곳은 대종교 문헌에서였을까? 최남선은 "배달"이라는 말만 취하고 그 해석은 버린 것일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당시 대종교는 비밀결사와 비슷했던 모양이니 약간의 가능성은 있다고 하겠다.)





배달 문제는 차후의 과제로 남겨두고,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이 [단군교포명서]에는 역대 단군의 재위라든가, 단군 조선 이전의 나라 이야기 같은 것은 없다. 즉 [환단고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문건이다.





2대 교주인 김교헌은 두 권의 책을 썼는데, 하나는 [신단실기]이고, 다른 하나는 [신단민사]이다. 나는 1914년에 쓰여진 [신단실기]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목차로 보건대 역사 관련 부분은 신단민사와 다를 것이 없음은 분명하다.) 1923년에 쓴 [신단민사]만 보았다. 문제는 1923년에 만들어진 [신단민사]도 [환단고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책자라는 사실이다. [환단고기]와 관련이 없을뿐만 아니라 [규원사화]하고도 관련이 없다. 이 책에는 역대 단군의 수라든가, 역대 단군의 이름 따위가 전혀 없다.   특히 [신단민사]에서는 단군 조선 이전의 신시 시대를 불과 124년으로 잡고 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단군교포명서]는 우리가 아는 단기와 연대가 같다. 1904년을 단기 4237년으로 잡고 있다. 하지만 나철이 죽을 때 남긴 유서에는 1915년을 4373년이라 쓰고 있다. 단기로는 4249년이어야 한다. 이 무렵 대종교는 기원을 올려서 신시 시대인 124년을 포함한 연대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대 교주인 김교헌도 그것을 착실히 따른 것이다. 즉 이들은 [환단고기]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또한 [규원사화]도 전혀 참조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성수 교수에 따르면 [환단고기]가 최초로 소개된 것은 이유립이 발간한 월간신문 [커발한]에 실린 것이라고 한다. 1960년대 초라고만 하는데, 그때는 [환단고기]라는 이름이 아니고 [환단유기桓檀留記]였다고 한다. 이 신문은 대전에서 발행되었다고 한다. 이 사실로 알 수 있는 것은 이유립이 이 책의 이름을 뭐라 지을까 고심했다는 것 정도라 하겠다. (韓國 上古史 史料 檢證에 대하여 / 2004년 12월 6일 발표)





『환단고기』가 소개된 것은 이미 20년이 넘었다. [환단고기]가 먼저 일본에서 공개된 것으로 아는 사람이 있으나 사실은 그보다 훨씬 전인 1960년대 초에 이유립 선생의 [커발한]이란 월간 신문이 나오면서 소개되었었다. 물론 그 때는 이유립씨가 대전에서 어렵게 [커발한]을 발행하였으니 전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그 때[커발한]에는 [환단고기]가 아니라 [환단유기桓檀留記]로 소개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에 와서야 겨우 『환단고기』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박성수 교수 역시 재야사가인데, 이 사람은 환단고기 발간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환단고기』가 시중에 나오 것은 군사정부가 물러난 뒤의 일이었다. 80년대 후반으로 알고 있는데 [환단고기]가 한번 시중에 나오자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한번 읽은 사람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환단고기] 한글 번역본은 1986년 전두환 시절에 나왔다. 그런데 이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무렵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사라 하겠다.




따라서 이유립 자신을 제외하고는 1979년 이전에 환단고기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이유립은 사실 1970년대 후반부터 환단고기의 내용을 월간 [자유]에 기고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임승국에게 보여주기도 했다는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분은 아래 태그 [환단고기]를 눌러서 글들을 살펴보기 바란다.)





이유립은 [환단고기]가 [규원사화]와 충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규원사화]를 일제시대 위작으로 몰아야 했다. 그때문에 1979년말에, “현전하는 규원사화는 윤덕영尹德榮이 대종교의 입장에서 원본 규원사화를 다소 개작한 것이며 1920년대 말경 시흥의 녹동서원에서 그것을 등사하여 판매하였다. 원본 규원사화는 삭주부사 권현權俔이 지은 것이며 그 사실은 <권현행장>에 나온다. 또 나 자신도 이 원본 규원사화와 행장을 본 일이 있다. 이 <권현행장>은 권현의 후손들에게 전해졌는데 지금은 같은 문중의 한학자인 권오돈(1983 작고)이 소장하고 있다”라는 취지의 주장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권오돈은 금시초문의 일이라고 했다.




아직도 [환단고기]가 1911년에 나왔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는지?








[앵무새들의 합창]





<아케트라브>   전 이블로그를 만나고 환○에서 벗어났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초록불>       아케트라브님 / 고맙습니다.


<날씨좋다>     저도 환○가 '될 뻔' 했으나 이 곳에서 많을 걸 알게 되고 환상을 깨게 되었습니다.   감사드려요.


<초록불>       날씨좋다님 / 역시 고맙습니다.


<풍백비렴>    환○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좋은 글이군요.    하루빨리 완   전히 벗어나야지..


<머미>         낙랑... 낙랑... 낙랑... 딸랑...


<총천연색>     잘 보았습니다.


<낭만여객>     중딩까지 잠재적 환○였으나 차차 머리가 트이면서 의구심을 갖고 지금은 쪽팔려하는 중생입니다 ㅠㅠ


<초록불>       낭만여객님 / 마도에서 벗어난 자기 자신을 칭찬하셔야 합니다...^^;


<인디고울프>    저는 아직 환○입니다. ^^


<초록불>        인연 끊자....-_-


<라세엄마>      마한 진한 변한이 환○가 주장하는 고구려보다 크게 그려져 있는 역사서를 본적이 있습니다.   대략 동남아에서 동유럽, 알라스카까지 포함이던가.......거기에 비하면 환○도 우습죠? 풋...








【반론에 앞선 전제 글】





■■■■■■■■■■  이 글은 [한민족의 저력]이란 카페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환단고기의 가치성]이란 표제로 실린 것인데 본 장章의 반론을 전개하기에 앞서 [환단고기]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겸한 재인식에 알맞을 듯하므로 필자의 견해를 보충하여 서두에 올립니다.  ■■■■■■■■■■





『한단고기』의 [위서론]을 반박할 근간으로서 가장 큰 특징은 채록된 원 저본들의 전체를 관통하는 일련의 일관된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각 권마다 구성의 치밀함은 둘째로 하더라도 [삼성기전 상-삼성기전 하]의 대칭관계는 물론 [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삼신오제본기*한국본기*신시본기*삼한관경본기]의 대비구조에서의 정합성과 편집체계와 내용에 있어서의 보충성등 하나라도 빼어버릴 수 없는 완벽한 필요충분조건을 구비한 일련의 연속성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아왔던 삼국시대이후의 불교사상이나 고려*조선시대의 유교사상과는 다른 한인시대부터의 독특한 <삼신사상三神思想>이라 하는 민족고유의 사상을 바탕으로 고대사가 전개되고 있다는 점도 결코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도교사상道敎思想과도 거리가 멀어 최치원의 <현묘지도玄妙之道>*신채호선생의 <낭가사상郎家思想>등으로 표현되는 전통사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삼신사상]은 오히려 불교나 유교보다 훨씬 원초적인 인간존중의 사상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재세이화在世理化>의 구체적 방법론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것이 『한단고기』의 첫 번째 특징이다.





두 번째 특징으로는 신화적 인물로만 여겨져 왔던 한인*한웅*단군 등이 각각 한사람을 호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닌 군장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각 시대에 대한 역대계보가 구체적 실사實史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 특징으로는 기존학계에서 밝혀내지 못하는 사실들로 고조선의 위치*정부형태*정치제도*풍습 등과 부여의 건국과 역사*고주몽의 계보*발해의 건국비화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민속학적*언어학적인 많은 정보를 전해주고 있어 앞으로 다방면으로 연구되어져야 할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물론 역사서로서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환단고기]를 매도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공통된 주장의 논점으로 삼은 핵심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용어사용의 부적절

둘째, 인용서적의 불분명

세째, 저술연대와 저자 문제 등이다.




위와 같은 [위서론]을 견지하는 이들은 『한단고기』류의 내용을 일제시대 민족정신 고양의 방안으로 창출되어진 위작으로 보고 있다.   위작이라 보는 데 대한 근거로 이러한 책들의 저자들과 저술연대에의 의혹*인용 古書들의 존재여부*사서에 쓰인 용어사용의 부적절 등을 제시하고 있는데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 부분도 있다.





『한단고기』의 비판론자들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는 일단 미루어두고 몇 가지 중요한 비판요소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규원사화』는 『한단고기』와 맥을 같이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단군조선의 연대가 1,195년으로 나와 있어 2,096년의 『한단고기』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상이점에 대해서는 어느 쪽이든 자료로 인용한 인용서에 대한 이해의 차별성에서 야기된 것이지 서로 간에 참고 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차이가 아니라는 점이 주목된다.   두 책이 인용하였으나 지금은 이름만 전해지고 있는 사료들이 있었고 이를 편찬자가 필사 와중에서 잘못 이해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어찌되었든지 [인용서가 분명히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매우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다.





『한단고기』의 〈범례〉에 의하면 이맥의 『태백일사』를 빼고는 세 책이 모두 조선시대 이전의 저술로 되어 있다.  『한단고기』자체는 <계연수>가 편찬하고 <이기>가 감수하여 1911년 인쇄되었고 1979년에 와서야 영인되어 세상에 등장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문제는 1979년 이전에 『한단고기』에 실린 책들을 인용한 문헌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이 책들이 모두 근대이후에 저술되었다는 의혹이다.





『한단고기』에 실린 책들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삼성기』상권은 <계연수>의 집안에서 내려왔다 하고『삼성기』하권과『단군세기』는 태천의 진사 <백관묵>으로부터 얻었으며 같은 내용의 또 다른 책인『단군세기』와『북부여기』는『단군세기합편』이라는 제명題名으로 삭주朔州 이동梨洞 진사 <이형무>에게서 얻었다고 했다.  『태백일사』는 <이기>가 간직했던 것인데 이 책들을 모두 합편合編하여 <계연수>가 홍범도*오동진 등의 자금지원을 받아서 인쇄한 것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한단고기』는 1949년 이유립(1907~1986)이 오형기로 하여금 정서正書시킨 것인데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원본과 인쇄본 그리고 필사본 등이 사라지게 된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또한 여러 손을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저술된 시대와 다른 근대적 용어가 사용되고 비전문가로서 역사가에 의하지 않은 인쇄*필사 등을 통하다보니 본문本文과 주해註解가 혼동되어 진실성에 대한 의구심이 확대되고 후대의 위작이라는 근거를 마련해준 셈이 되었다.





고대 역사서로서의 가치는 저술될 당시의 이해되지 않는 본문에 대해 편찬자들이 주해의 형식을 빌어 명확하게 구분하여 서술함으로써 사서의 시대적 생명력을 살리는데 있다.   헌데 [환단고기]는 필사와 정서 과정에서 비전문가로서 내용전달에만 주안점을 두다보니 안타깝게도 생명력보전에 소홀하게 되고 말았다.   이러한 문제들이 『한단고기』류의 사서들로 하여금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게 만든 가장 핵심적인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게 만들었다.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신중한 작업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는 부분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용어의 윤색된 사용이 史書 자체의 내용전달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으나 이로 인하여 위작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 문제이다.





비판론에 있어서 또 다른 중요한 핵심은 [인용서에 관한 것]이다.  『한단고기』는 고대서로 보이는 책들을 많이 거론하고 있는데 거의 20여종이나 된다.  『조대기(朝代記)』*『삼성밀기(三聖密記)』*『표훈천사(表訓天詞)』*『대변경(大辨經)』*『진역유기(震域留記)』*『삼한비기(三韓秘記)』*『고려비기(高麗秘記)』*『신지비사(神誌秘詞)』등의 저본들이 『한단고기』외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모두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다.   이중에서 『표훈천사』*『조대기』*『대변경』*『삼성밀기』 등은 조선시대 『세조실록』권 7 (3년 5월) 무자년조에 책이름이 보이지만 근대에 와서 내용이 위조되어 책명만 인용되었을 뿐이라는 주장이 요지이다.





이러한 고대 사서들의 실존여부에 대한 조사결과는 <서희건> 편저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2*3권(1986)에 상세하게 밝혀져 있다.   그는 일제시대 조선사편수회에서 행한 한민족 역사왜곡과 고서소각의 실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따라서『한단고기』상의 인용서들이 현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은 서명書名만 존재했었다고 해도 내용이 모두 위조되었을 것이라는 논리로 전체를 위작僞作으로 치부해버리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책이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전혀 근거 없는 허위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는 것이 마땅하다.   즉 책명에서 유추할 수 있는 뉘앙스와 926년 발해멸망이후 발해왕자 대광현大光顯이 고려에 망명할 때 가지고 온 책이라 전하는 『조대기朝代記』에 인용된 내용만의 재구성(단군조선~고구려까지의 역사로 구성됨)을 통해 비교검증해볼 때 『한단고기』가 담고 있는 내용과 전혀 다르지 않은 분위기의 기술일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아울러 <조인성>의 인용서에 대한 비판에서『태백일사』가 인용한『조대기』에 <男女平權*父權> 같은 근대적 용어가 등장하기 때문에 『조대기』의 내용이 위조되었다든지 <영고탑寧古塔>이라는 지명이 淸의 시조전설과 관련하여 생긴 지명이기 때문에 이를 인용한『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 등은 淸代이후의 기록이 될 수밖에 없다든지 <상춘常春>이라는 지명도 淸나라 이후에 등장한 <長春>의 오기誤記로 본다든지 하는 주장도 납득하기 어렵다.





淸代이후의 <장춘>이라는 지명을 인용했다면 굳이 <상춘>이라고 誤記할 이유가 없으며 또한 일부러 유사한 지명으로 개작했다면 <영고탑>이란 지명도 개작했어야 옳다.   <영고탑*상춘>이라는 지명이 부각된 것은 만주에 터전을 둔 淸나라가 중국을 제패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보면 그 이전부터 지명은 전해지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중국사서에 지명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그 지명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발상은 너무 무리 있는 주장이다.





●●●●●●●●●●●●●●●●●● <박현> 선생의 견해를 빌리자면 [한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에 발해 3대 문왕의 연호가 대흥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 사실은 1980년 정효공주묘가 발견되면서 알려졌다고 한다.   그는 한단고기가 1980년 이후에 조작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 의문을 표시하며 오히려 이러한 사실은 환단고기가 다른 기록들과 달리 독자적으로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증명할 따름이라고 한다.   게다가 <영고탑>에 대해서도 [요사]에 엄연히 기록되었다고 반박을 한다.    이어 <문화>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화"라는 말이 Culture라는 개념으로 쓰인 것은 근래의 일인데 "환단고기"에서 쓰이는 문화라는 개념과 같기 때문에 위서라고 규정짓는다. 고 하였으나 문화라는 표현이 과거에도 "문치교화文治敎化“라는 개념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과거에도 문화라는 말이 실제로 오늘날의 개념과 확연하게 구분되어 쓰인 것은 아니었다.   그와 같이 엄격하게 구분하여 사용한 경우는 골수 성리학자들과 그들이 편찬한 문헌에 지나지 않았다.   또 "全世界" 라든가 "민중"이라는 말도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던 말이지 근대에 들어 만들어진 말은 아니다. 심지어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 ~ 846)는 자신의 시 제목으로 "상인처세계上人處世界"라는 말을 썼고 좌구명左丘明이 지은 "국어國語 월어越語"에서도 "민중"이라는 용어가 인민대중의 약자로서 사용되고 있다 ●●●●●●●●●●●●●●●●●●●





『조대기』에 나오는 <연개소문>의 父인 <태조太祖>와 조부인 <자유子遊>에 대한 시비도 마찬가지이다.   1923년 중국 낙양에서 발견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의 묘지명에서 비로소 나타난다고 하여『한단고기』가 1923년 이후에 쓰여진 것이라는 주장을 따르면 계연수가 1911년에 편찬했다고 하는 내용도 믿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태백일사』「고구려국 본기」에서 인용하고 있는 연개소문에 대한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이 되어 있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은 개금蓋金이라고도 하는데 姓은 연씨淵氏이다.   그 선조는 봉성인鳳城人인데 父는 태조太祖라 하고 조부祖父는 자유子遊라 하며 증조曾祖는 광廣이라 한다.   모두가 막리지莫離支였다.





북경 낙양에는 중국식 발음 표기인 <천씨泉氏>로 되어 있지만 이 책에는 <연씨淵氏>로 되어 있고 선조가 봉성인이라는 사실과 증조부의 이름이 廣이라는 사실까지 나와 있는데 이러한 것들을 모두 위작이라 볼 수 있을까?   위작이라면 굳이 성을 다르게 표기할 필요도 없이 <淵>이 아닌 <泉>을 써야하지 않을까?    확실한 물증이니 말이다.   그리고 선조들의 이름도 중국식발음을 감안하여 다른 한자로 표기해야 옳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볼 때 오히려『조대기』의 내용에 대한 한층 높은 신뢰감과 더불어 더욱 많은 정보획득의 자료를 제공해주는『한단고기』에 대한 가치성을 높여주는 기록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단고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편찬자가 유명한 학자가 아니라는 사실과 뚜렷한 업적이 없었다는 이유로 저술연대와 저자들에 대해 의심을 하고 용어사용의 부적절함을 내세워 내용전체를 위작으로 몰아가고 있는 경향이 짙다.   앞부분에서도 언급해 왔지만 비전문가에 의한 편찬과 정서正書에서 잘못된 용어사용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한 과정이야 말로 구체적 내용의 검증이다.





다행스럽게도『한단고기』에서 기술한 중국관련 기록들을 살펴보면 실제 중국 측 사서들과 서로 일치하거나 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만약 중국사서와의 일치된 부분을 놓고 그 전후의 사건들을 모두 꾸며내었다고 주장한다면『한단고기』의 작자는 정말로 위대한 소설가라 아니할 수 없다.   저작자가 개인이든 집단이든 중국의 고대 사서를 철저히 분석하고 대단한 상상력과 뛰어난 창작력을 발휘하여야 가능한 방대한 내용을『한단고기』는 담고 있다는 말이다.   특히 상고시대의 철학적 사고나 인식과 민족 사상 등에도 해박한 정도를 넘어서야만 하는 깊숙하게 꿰뚫는 혜안이 있어야 가능한 내용도 담겨져 있으므로 분명히 오랜 기간에 걸친 역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사료임을 짐작케 해준다.   또한『한단고기』이외의 다른 루트를 통해 알려진 책들(단기고사나 규원사화 등)과도 내용과 줄거리가 유사점과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도 위작이라는 일방적이고 단편적인 논리 하에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각론各論에 들어가서】





[앵무새의 주장 - 단락 1]





[환단고기]에 대한 재야사가의 최초 언급은 1981년 12월 [자유]지에 실린 박창암 장군(1921-2003 육군 소장  월간 자유사 대표)의 권두 논설이었다.    그 논설에는 이렇게 환단고기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이미 오래 전에 단국대학에 계시는 윤내현(尹乃鉉)교수께서《民族의 고향 古朝鮮을 가다》라는 제목으로 괄목할만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 전문(全文)을 전재(轉載)를 할 수 없어 내용만을 기초로 하고 요약함과 동시에 환단고기 등 기타 자료에 의한 본인의 역사 상식을 첨부해서 진행하겠습니다.





내가 본 사이트에서는 [환단고기]를 [한단고기]로 표기해 놓았는데 비록 [자유]지를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이 시기에는 "한단고기"라는 표현은 없었던 것이 확실하므로 이는 사이트 측에서 임의로 변경해 놓은 것이리라 생각한다.





이상시의 책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를 보면 박창암은 이유립과 함께 [환단고기]를 녹도승에게 건네준 인물이라고 한다.   박창암은 [환단고기]의 진행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인 것이다.







[반론]





필자가 누누이 설명했듯이 <이유립>선생과 <박창암>씨와의 관계는 더 이상 의심할 바가 없다.   그래서 박창암 장군에 의해서 1981년 12월 [자유]지를 통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런 과정에서 필히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부분은 바로 [환단고기]의 내용 전달이다.   쉽게 말해 [환단고기 평주 또는 정해正解-이유립선생의 환단고기 번역*주해본]는 실제로 이유립 선생이 원본을 번역 출간하기 위하여 오래 앞서부터 준비해왔던 것이며 [환단고기 평주]와 같은 귀중한 사료들은 선생이 [환단고기]를 직접 풀이해 놓았던 자료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에 벌어진 큰 사건이 이런 교정과 주해의 마무리 정리 작업에 박차를 가했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데 [조병윤씨의 광오이해사를 통한 환단고기 필사본 영인 사건]이다.





※ 이와 더불어 1979년에 펴낸 [환단고기]에는 정오표가 달린 책이 있음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정오표>는 원본에서 틀린 글자나 잘못된 내용을 고쳐서 추가한 것으로 이 글씨는 선생의 서체書體가 분명하다고 판별되었다.   즉 [환단고기] 원문을 직접 수정한 흔적이라는 증빙이다.   바로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환단고기]가 적어도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책이라는 사실과 이 때문에 선생이 부분 교정을 한 점 역시 분명하다는 추정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아래와 같이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정리해보면 앞으로 전개될 [앵무새]와 추론과 같은 억측과 황당한 왜곡은 눈 녹듯이 풀려나가는 걸 알게 된다(환단고기의 진실  이정훈 신동아 편집위원 기고 글 인용).





1968년 반혁명사건으로 투옥 중 사면*복권으로 풀려난 박창암 장군의 월간 『자유지-반공에서 國史로 세계관 변화』창간.


1970년 중반  당시 대전 지역에서 [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하던 <이유립>씨와의 만남과 『자유지』에 기고 시작.





※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같은 주장이었는데 그동안 선생은 환단고기 필사본 교열 중 틈틈이 주해작업을 병행하여 이를 <커발한지>에 싣고 있었으나 누구의 주목과 관심이 없었던 사정이 크게 작용하였다.





1978년 <이유립> 선생은 자유지를 통한 주요 언론인과의 교류를 기반으로 <잘못된 국사 원상대로 찾아야 한다>는 제목으로 조선일보 주필인 <선우휘>씨와 대담 기사가 실림(10월22일자 조선일보)으로서 지식인 사회에서 이름이 알려짐.


1979년 <조병윤>씨가 <이유립> 선생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박기엽朴琪燁씨가 이끄는 광오이해사光吾理解社를 통해 <오형기>씨가 필사한 [환단고기]를 영인*출판하면서 판권란에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적어놓은 사건 발생.


1979년 <조병윤>씨가 [환단고기]를 출판한 후 선생은 <전형배>씨에게 <오형기>씨의 발문을 제외한 환단고기 100부를 급히 영인*인쇄토록 맡겨 <오형기> 필사본이 안고 있는 오자誤字를 일부만 수정한 채로 [배달의숙]에서 출간-그로 인해 세상에는 <오형기>씨 발문이 달린 [환단고기]와 발문이 삭제된 [환단고기] 두 종류가 등장하게 됨(전형배씨 증언)


1979년 이 무렵 <이유립> 선생은 그를 따르던 많은 사학연구생들에게 환단고기를 우리말로 풀어주는 강의를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우리말로 번역과 주석을 해놓은 원고도 갖고 있었다.   거의 왕성 단계에 있던 [환단고기 정해본]은 서둘러 마무리 작업을 마치고 인쇄를 위한 청탁을 겸해 이 원고를 『자유』지 발행인인 <박창암> 장군에게 주었음





※ 결국 박 장군이 원고 출간을 빌미로 접근한 <가지마>에게 선생의 이름으로 건네주었지만 선생은 이런 사실과 자신의 원고가 허락 없이 일본으로 간 것을 알고 박 장군에게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복사본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선생은 박 장군과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박창암 장군은 1981년 12월 [자유]지 기고 무렵엔 당연히 [환단고기]의 내용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앵무새의 주장 - 단락 2]





박창암에 대해서 조금 알아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박창암은 함남 북청 태생으로 간도 연길에서 사범학교를 나와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43년 만주군 간도 특설대에 입대했다.   행적이 박정희와 닮은꼴이다.   백선엽 장군과 동기라고 한다.   박창암은 국군에 갑종 7기로 입대하여 대위가 되었다.   6.25 때 소령으로 공비토벌을 했으며 5.16에 참여하여 혁명검찰부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뒤 박정희와 등을 돌리게 되었다.   검찰부장 시절 장도빈(1888-1963 독립운동가/단국대학교 설립자;육사 국사학 교관 역임)을 만나 극우 역사관에 눈을 뜬 모양이다.   최태영, 박시인 등과 어울리며 국사찾기협의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1968년 [자유] 지를 만들어 재야사학의 기관지 노릇을 하게 했다.





김정빈의 [단]에서도 [환단고기]를 언급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307쪽에 [환단고기]를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단] 자체 내용은 아니고 김상일의 [한철학]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었다.   [한철학]은 1983년 초판이 나왔던 책인데 초판본을 구해볼 수가 없었다.   아무튼 1983년에 [환단고기]를 인용한 책이 있었다는 것은 확인된 셈이다.





*추가* 1985년판 [단]을 헌 책방에서 구입했다([단]의 초판은 1984년).   위에 언급한 책은 2000년에 나왔던 책이다.   이 책에는 [환단고기]가 없다.   페이지도 2000년 판이 313쪽이나 되지만 1985년판은 281쪽에 불과하다.   2000년판은 증보판이었던 것이다. 1984년판에도 [환단고기]가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1983년 [한철학]에 환단고기가 실려 있었을 것 같기는 하다.   왜냐하면 [한사상]을 출전으로 하여 "환인 시대 3301년 환웅 시대 1565년"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연대를 밝힌 책은 [환단고기]뿐이다.





[단]을 다시 훑어보니 재밌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1999년 안에 통일된다는 예언이 틀렸다는 이야기를 포함해서)   뭐든지 왜곡하는 환○의 세계 - 타고르 [동방의 등불] [클릭]라는 글을 예전에 쓴 바 있는데 이 왜곡된 시 전문이 [단]에 실려 있었다.





[단]의 주인공인 봉우 권태훈은 대종교와 관련이 있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대종교는 [환단고기]와 나름 인연이 있다.   우선 공청회에서 설친 안호상이 대종교 교주격인 총도전(14대)의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다.   대종교를 창교(대종교에서는 "중광"이라고 한다)한 사람은 "나철"이라는 사람이다.





1916년 묘향산 석벽에서 천부경을 발견했다는 계연수가 그 내용을 보낸 단체도 대종교로 알고 있었으나 그가 아니라 시흥 단군교였다고 한다.   대종교는 [천부경], [삼일신고] 등을 교의 경전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환단고기]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부분에도 대종교 경전과 [환단고기] 수록 부분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악질식민빠님 블로그를 참조해주기 바람.




[환단고기] 2세 단군 부루 때 나오는 노래 "어아가"도 대종교에서 부르는 신가라고 한다(웃기는 것은 이 "어아가"에는 일본을 물리치자는 뜻이 담겨져 있다는 해석이라 하겠다.   수천년 전에 이미 일본을 물리치자는 노래를 불렀던 모양이다)





[반론] 





●●●●●●●●●●●●●  아래 글은 박성수 한국학 중앙연구소 명예교수님과 이정훈 신동아 편집위원님의 글을 인용한 가운데 필자의 견해를 보충하였습니다.  ●●●●●●●●●●●●●●





Ⅰ. 박창암 관련





박창암 장군을 파헤치려면 그렇게 단순하고 일방적으로 그의 표면적인 행적만을 더듬어가서는 이 문제들의 핵심에 결코 접근할 수 없다(왜 간도특설대에 입대했는지?*왜 반혁명에 연루되었는지?*출옥 후 곧바로 자유지를 왜 창간했는지?*그의 신념이 왜 반공에서 국사로 바뀌었는지*어째서 이유립 선생과 손을 잡았으며 자유지의 기고를 대폭적으로 허락했는지 등)   따라서 보다 깊은 내면적인 행보를 살펴보아야 더욱 가까운 진실에 접근할 것이다.





박창암(朴蒼巖  1921~2003 육군 준장으로 예편)씨의 민족적인 인식 세계는 그가 펴내었던 월간지『자유』의 성향과 내용에 고스란히 담겨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박씨는 아호(雅號)를 <만주>라고 정할 만큼 간도를 비롯한 고구려와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신념(다물 정신)이 강한 사람이었다.   물론 이런 영향은 그 무렵까지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지역에서 사고와 인식의 맥을 강하게 지속하고 있던 서북지역 민족주의 흐름(뒷날 서북학회로 명성을 떨침)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다.   그는 함남 북청 태생으로 만주국립연길(간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간도의 조양천(朝陽川)초등학교에서 교사를 하다 1943년 만주국 군대인 간도특설대에 입대했다.    간도특설대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공산게릴라를 추적하기 위해 만주국이 조선인을 뽑아 만든 대(對)게릴라전 부대였다.    지금은 간도특설대가 공산게릴라뿐 아니라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독립군까지 탄압했다고 해서 비판을 많이 받고 있으니 그도 이러한 혐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아무튼 간도특설대 출신의 박창암씨는 처음에는 강력한 반공(反共) 외길을 걸었다.





광복 후 그는 평양에서 협신(協新)공업학교 교사를 하다 서울로 옮겨 1949년 육군 중위로 임관해 6·25전쟁을 치르게 됐다.   전쟁 중 그는 빨치산을 토벌하는 작전과 대북 심리전 분야에 주로 참여했다.   이때까지도 그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던 인식은 철저한 <반공>이었다.   그러다가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군사정변에 참여하면서이다.   5·16 주체세력으로 참여해 구정권의 부패를 날리는 서슬 시퍼런 <혁명검찰부>의 부장을 맡게 된 것이다.





그러나 2년 후인 1963년 3월11일 <김재춘>씨가 이끄는 중앙정보부는 그가 반혁명사건에 연루된 인물이라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5·16 당일 박정희 소장과 함께 해병대를 이끌고 한강 인도교를 건너 쿠데타를 성공시킨 <김동하> 예비역 해병대 중장과 <박임항> 예비역 육군 중장*<이규광> 예비역 육군 준장(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인 이순자 여사의 삼촌) 등 5·16 핵심 멤버가 박창암과 함께 반혁명을 모의했다고 발표했다.





박정희 세력이 아직 민정(民政)으로 이양하지 않은 시점에서 터져 나온 이 반혁명사건은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이 사건의 핵심은  <군사혁명을 통해 목적한 바를 성공시켰으니 이제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자>는 박창암 쪽 세력과 <군사혁명을 성공시켰으니 차제에 군복을 벗고 정부를 이끌어 군사혁명의 취지를 강화하겠다>는 박정희 세력 사이의 갈등에서 빚어진 충돌이었다.   아무튼 법정에 선 박창암씨는 “혁명의 목적은 달성됐으므로 군은 당초의 약속대로 참신한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맹비난했다.





재판부는 박씨에게 징역 13년을 선고했으나 교도소에 있는 사이에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이들에게 형 면제처분과 함께 복권 조치를 취했다.   이후 박씨는 박정희 정부와는 거리를 두고 평소 생각해온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1968년 사재를 털어 월간『자유』지를 창간했다.





이런 순탄치 못한 과정과 혁명 이념의 좌절과정에서 맛본 고초와 배반감을 몸으로 체험하면서 그의 전부를 지배했던 사상과 인식이 바뀌게 된다.   반혁명사건으로 투옥되기 전까지 키워드가 반공이었다면 자유지 창간 이후 그의 핵심 주제는 국사(國史)로 전환되었다.   아마도 1차적인 계기는 어릴 적 서북지역과 간도에서 자랐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고 2차적으로 결정적인 요인은 당시 대전 지역에서 [국사 바로 세우기 운동-용태영*박시인*안호상*문정창*임승국 선생들은 박장군과 함께 후에 어울리며 “국사찾기협의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게 된다]을 맹렬하게 추진하고 있던 <이유립> 선생과의 만남을 꼽아야 할 것이다.    박씨와 의기가 상통한 선생이 1970년대 중반부터『자유』지에 글을 싣기 시작하면서 거의 전체 지면의 절반 정도를 자신의 글로 <도배>하며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같은 주장을 내놓았으며 또한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던 경향을 보아도 충분히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Ⅱ. [단]과 [한철학] 관련





이 대목에서 [앵무새]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그저 좌우충돌하면서 여기를 물어뜯고 저쪽을 헐뜯는 양상만 보여서 전혀 종잡을 수가 없다) 여기 저기 흩어진 파편들을 모아보면 대략 이런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 김정빈의 [단]에서 [환단고기]를 언급한 부분(307쪽)이 있는데 [단] 자체 내용은 아니고 김상일의 [한철학]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 [한철학]은 1983년 초판이 나왔으므로 아무튼 이 때에 [환단고기]를 인용한 책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는 듯하다.  


- 그 까닭은 [한사상]을 출전으로 하여 "환인 시대 3301년 환웅 시대 1565년"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연대를 밝힌 책은 [환단고기]뿐이다.





실제로 확인해보면 환인시대와 환웅시대의 전세역년(傳世歷年)을 밝힌 저작은 [환단고기]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환단고기]가 이미 1983년 이전에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전파되어 많은 후학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음은 필자가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다(커발한지 게재*자유지 기고*박창암을 통한 민족 사학자들과의 교류*후학 양성을 위한 강의 개설 등).   그러므로 이와 깊숙하게 관련된 많은 인물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의 저서들이 [환단고기]의 내용과 구성을 인용하여 창작되거나 발간되었음은 명약관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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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무새 죽이기 보론】 환단고기는 어떤 책?...(추가 부분)...반론  궤변망상학의 알량한 떡밥  2010/01/05 13:24


 http://blog.naver.com/nero1003/70077385560






【앵무새 죽이기 보론】 환단고기는 어떤 책?...(추가 부분)...반론





【앵무새 주장 원문】





[11] 역사책이라는 게 틀린 내용이 있을 수도 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다 위서라고 할 수 있나?   위서란, 그 역사책의 내용이 맞고 틀리고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저술했다고 하는 사람, 그 책이 쓰였다고 하는 시대 등이 잘못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환단고기는 지은이가 거짓말이고, 지어진 시기도 거짓말인 위서다. 위서의 정의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팅을 참고하라.   




장난감은 장난감일 뿐 - 위서론 [클릭]





이와 같이 환단고기는 이유립 혼자 있었다고 믿고 있는 책을 기억하여(?) 저술한 책이다.




보론





환단고기가 재야사가에게 알려진 때는? 2 - 환단고기와 대종교 [클릭]





보론 2





[환단고기]의 첫 편인 삼성기는 전편을 안함로安含老, 후편을 원동중元董仲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유립은 조선왕조실록의 세조 3년조에 있는 [安含老元董仲三聖記]라는 책 이름을 보고 삼성기를 지은 사람이 안함로, 원동중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실은 저 책은 "안함, 노원, 동중 세 성인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안함은 [해동고승전]에 실려있는 고승이기도 하다. 하지만 물론 재야사가들은 안함로, 원동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우길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불행히도 저 세 사람의 이름 순서를 바꿔놓은 사료가 현존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해주목 편에는 안함安咸, 원로元老, 동중董仲 3명이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아래 사진은 Shaw님의 포스팅에서 업어왔음. 안함로, 원동중의 실체를 인정치 않는 식민빠들은 똑똑히 보아라 [클릭])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것이 증명된다. 저자 이름을 날조했다는 확실한 증거니까.  








【반론에 들어가서】





[앵무새의 주장 - 단락1]





[11] 역사책이라는 게 틀린 내용이 있을 수도 있지 않는가? 그렇다고 다 위서라고 할 수 있나?   위서란, 그 역사책의 내용이 맞고 틀리고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저술했다고 하는 사람, 그 책이 쓰였다고 하는 시대 등이 잘못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환단고기는 지은이가 거짓말이고, 지어진 시기도 거짓말인 위서다. 위서의 정의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팅을 참고하라.   





장난감은 장난감일 뿐 - 위서론 [클릭]





이와 같이 환단고기는 이유립 혼자 있었다고 믿고 있는 책을 기억하여(?) 저술한 책이다.




보론


환단고기가 재야사가에게 알려진 때는? 2 - 환단고기와 대종교 [클릭]





[필자의 견해]





이 부분은 필자가 【앵무새죽이기-보론 『장난감은 장난감일뿐...』『악질식민빠- 위서에 대해 알아봅시다 Ⅰ․Ⅱ』『위서에도 일말의 진실은 있다』...반론】에서 충분히 의견을 피력하였으니 생략하겠다.   그리고 마지막 [보론  환단고기가 재야사가에게 알려진 때는? 2 - 환단고기와 대종교] 는 이 글을 마치고 별도의 장(章)으로 반론을 제시할 것이다.





[앵무새의 주장 - 단락2]





보론 2





[환단고기]의 첫 편인 삼성기는 전편을 안함로安含老, 후편을 원동중元董仲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유립은 조선왕조실록의 세조 3년조에 있는 [安含老元董仲三聖記]라는 책 이름을 보고 삼성기를 지은 사람이 안함로, 원동중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실은 저 책은 "안함, 노원, 동중 세 성인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안함은 [해동고승전]에 실려있는 고승이기도 하다. 하지만 물론 재야사가들은 안함로, 원동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우길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불행히도 저 세 사람의 이름 순서를 바꿔놓은 사료가 현존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해주목 편에는 안함安咸, 원로元老, 동중董仲 3명이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아래 사진은 Shaw님의 포스팅에서 업어왔음.   안함로, 원동중의 실체를 인정치 않는 식민빠들은 똑똑히 보아라.  [클릭])





***************** [Shaw 블로그 클릭 내용] ******************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해주목:




수양산성: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는 2만 856척이고 높이는 18척이다. 세상에 전하기로 옛날 안함, 원로, 동중 3명이 땅을 택하여 성을 쌓았다고한다. 산중에는 또 옛 고죽군의 남은 터가 있다.





설명: 





**매식계에는 워낙 학식이 깊은 분들이 많이 계시고 그에 비해 제 문견은 실로 좁아서 제가 미처 딴 데서 보지 못한 것이라 해도 실은 이미 다른 분들이 다 밝혀놓았음을 뒤늦게 깨닫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것도 그런 케이스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은 하지만 일단 블로그에 자료도 쌓을 겸 임승국 얘기도 좀 할 겸해서 적어둡니다.





소위 <<안함로 삼성기>> <<원동중 삼성기>> 라는 것이 실존한다는 근거는 <<환단고기>> 를 제외하면 전적으로 <<조선왕조실록>> 세조 3년에 기재된 수서령에 "안함노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라는 것이 나온다는 데 의지하고 있다.





이 서명은, 안함(安含)이 해동고승전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고승인 것으로 미루어 "안함, 노원, 동중 삼성(三聖)기" 로 읽는 것이 온당하다.   물론 <<환단고기>> 추종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다.





이제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기재된 전승을 보면 조선 초기에 "안함, 원로, 동중" 3명을 세트로 묶어서 뭔가 신비한 일을 행한 삼총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굳이 지적하자면 전에 썼던 글에서 언급했다시피http://shaw.egloos.com/1791930 <<...승람>> 의 고증은 주의해서 살펴봐야 한다.   저 세 명이 정말 산 위에다 성을 쌓았을 것이라고(신통술이라도 써서?) 믿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상당히 많은 경우에 <<...승람>> 에서 건질 수 있는 것은 이 책을 편찬할 당시에 그런 이야기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정도이다.   상기의 기술은 필자가 생각하기에 해주편 수양산성 항목에서 추려낼 수 있는 최소한의 당대 인식이다.   굳이 안함, 원로, 동중이라는 사람들이 정말 같은 시대에 활약한 사람들이며 황해도 해주에서 뭔가 했다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원로(元老)와 노원(老元) 가운데 무엇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으로 보아 실록에 나오는 "안함노원동중삼성기" 를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 로 끊어 읽는 것어야 할 이유가 또 있는 셈이다.





사실 저 기록은 다른 의미에서 좀 재미있다.   임승국은 <<국사대사전>>(이홍직 편) 에서 황해도 해주에 "수양산" 이 있고 "고죽" 이 해주의 옛 이름이라고 기재한 것(고죽 얘긴 사실 遺事에 이미 나오지만)을 두고 반도사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며 선전하고 다녔다.   후대의 재야捏造붕어들은 임승국의 이 말이 무슨 맥락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고 그대로 ctrl+C,V 했다.




그런데 임승국은 <<국사대사전>> 에 그런 얘기가 대체 왜 실렸는지 조사해보지는 않았을까?   만약 <<...승람>> 을 봤다면 저 안함, 원로, 동중 이야기도 봤을테고 그렇다면 뭔가 변명을 생각해 내서 조선왕조의 악질적인 상고사 말살 음모를 폭로(웃음) 했을 법도 한데 말이다.   필자가 워낙 과문한 탓에 임승국이 거기까지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혹 아시는 분이 계시면 지도 바랍니다)





한 줄 요약: 안함로, 원동중은 개뿔.




또 요약: 하마터면 환단고기 1부는 "안함원 삼성기"  2부는 "노동중 삼성기" 될 뻔했음.





보자보자 하니 참 가지가지로 논다.





****************************************************************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것이 증명된다. 저자 이름을 날조했다는 확실한 증거니까.  




[필자의 견해]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동국여지승람]을 성종 代에 세종 때 편찬된 지리지를 개*보수 하고 누락된 부분은 첨가하여 신증(新增)한 지리지이다.   따라서 동국여지승람에 비교한다면 그 내용이 더욱 상세하고 첨가*삭제되었거나 과거와 달라진 내용 또한 상호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하여 다른 지리지와 비교하였을 때 그 내용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지리지라면 당연히 다루어야 할 군사적*지리적 내용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비교적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것이 다른 지리지와 다른 점인데 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다른 지리지와 비교하여 내용이 다른 것인지 우리는 다른 지리지와 함께 대조하면서 특히 유의하여 살펴볼 까닭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황해도 해주목





......진산鎭山은 용수龍首요【주의 북쪽에 있다】 명산名山은 수양首陽이다.【주의 동북쪽에 산이 있으니 이름을 수양이라 하고 동남쪽 바다 가운데 30리쯤 되는 곳에 두 작은 섬이 있으니 이름을 형제도(兄弟島)라 한다.   그 하나는 높이 12보(步)이요 또 하나는 높이 8보이며 둘레가 모두 1백 20보이고 서로의 거리가 2백 70보이다.   민간에서 이르기를, “백이伯夷*숙제叔齊가 이곳에서 죽었으므로 주의 이름을 고죽국孤竹國이라 하였다” 한다】  성산城山은【주의 동쪽에 있는데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해주목





형제도...울다굴亐多窟...수양산성-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는 2만 856척이고 높이는 18척이다.  세상에 전하기로 옛날 [안함*원로*동중 3명]이 땅을 택하여 성을 쌓았다고 한다.   산중에는 또 옛 고죽군의 남은 터가 있다.





분명히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안함*원로*동중의 전승기록이 없다.   어떤 이유였을까?   해답은 자명하다.   세종의 아들인 세조는 재위 시 아주 특별한 어명을 내렸는데 바로 <구서령>이었고 여기에서 [안함로*원동중]의 이름을 적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분명히 이 시기까지는 [안함*원로*동중]의 三人에 대한 전승 기록이 없었거나 있었다 해도 잘못 전하여진 전설로 인정하여 채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조의 구서령求書令]





세조 3년 정축(1457 천순1) 5월 26일(무자)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노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 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따라서 어명御命이라는 공명 정확한 기록(구서령)과 주변에서 떠도는 전승을 채록했다는 불확실성(신증동국여지승람)을 두고 비교해보았을 때나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다른 정황적 증거를 가지고 검증해 보았을 때 단연코 [안함*원로*동중] 보다는 [안함로*원동중]의 기록에 대한 신빙성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





1) [환단고기] 범례를 보면 <안함로>와 <원동중>이 지은 삼성기는 각각 다른 경로로 다른 사람(계연수와 태천 백진사)에 의해 소장되어 전해내려 왔으며 필사자筆寫者 스스로도 이 두 원전을 합쳐 삼성기 전 상*하로 묶었음을 밝히고 있다.


2) [구서령]의 내용을 살펴보아도 명백하게 안함노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라고 적시하고 있으며 곧바로 뒤에 나오는 문구 가운데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이라고 세 사람의 경우에는 분명하게 열거하는 기술 방식을 취하고 있다.


3)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술도 <안함*원로*동중 삼인]이라는 하고 있으나 다른 기록과의 공통성을 공유하지 못하는 전혀 다른 이름(원로와 동중)을 열거하여 채록 경위와 전승경로가 불확실함을 스스로 밝혀주고 있다.


4) [삼성三聖-환인*환웅*단군]의 의미와 삼성기란 서목書目이 그 속에 실린 주요 내용으로 말미암은 까닭임이 [환단고기]에서 밝혀진 것처럼 이들 三人(안함*원로*동중)의 성현聖賢이라는 의미가 아님이 여실하니 [안함*원로*동중] 三人說은 억지로 짜 맞춘 견강부회에 불과하다.





※ 그 어떤 경우를 보더라도 기록이 상위相違할 때 불확실하게 전해져 오는 민간전승보다는 국가에서 정식으로 명하여 시달한 공적인 기록문서의 내용을 인정하는 것이 상례이다.





다음으로 인물 분석에 있어서





안함로(安含老)는 신라시대 고승이었던 안함(安含 AD 578년~640년)으로 보는 것이 민족사학계의 통설이다.   진평왕 때(AD 600년)에 중국으로 가다가 되돌아왔으며 이듬해 다시 도해(渡海)하여 중국 대흥사에 머무르다가 돌아와 황룡사에 머물렀다.  《전단향화성광묘녀경》을 번역하고《참서-예언서》와《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를 저술하였다.   안홍(安弘)이라고도 한다.





※ 안함은 AD 578(진지왕 17)∼AD 640(선덕여왕 9) 신라 중고기의 승려이다.   흥륜사 십성十聖 중의 한 사람이다.   성은 김씨.   이찬伊湌 시부詩賦의 손孫.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영민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일찍부터 뜻을 나라 밖에 두었다.   삼성기 상편을 저술하였다고 알려진 AD 600년(진평왕 22)에 고승 혜숙惠宿과 함께 이포진泥浦津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다가 섭도涉島 근처에서 풍랑을 만나 되돌아왔다.   이듬해 칙명을 받고 법사가 되어 중국 사신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서 수隋나라 황제를 배알하고 대흥사大興寺에 머물렀다가 AD 605년에 귀국하였다(삼국사기엔 AD 576에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잘못된 듯하다).





    황룡사에 머물면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을 번역하였으며 승려 담화曇和가 필수筆受하였다.   만선도량萬善道場에서 입적하였다.   한림 설모薛某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지었다.   저서로는 ≪참서 讖書≫ 1권을 지어 견문한 바를 기록하였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또한 ≪동도성립기 東都成立記≫ 1권이 있으며 안홍安弘이라는 설도 있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참고문헌≫ 海東高僧傳


≪참고문헌≫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安弘法師가 隋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탐구했는데 서역승 비마라毗摩羅 등 두 명의 승려와 함께 돌아와서 능사경稜伽經과 승만경勝鬘經 및 부처의 사리를 바쳤다.  <삼국사기 진흥왕조>





동쪽 벽에 앉아서 서쪽으로 향한 니상泥像은 아도我道*염촉猒髑*혜숙惠宿*안함安含*의상義湘이다.   서쪽 벽에 앉아서 동쪽을 향한 泥像은 表訓*사파(虫+也)巴*원효元曉*혜공惠空*자장慈藏이다. <삼국유사 권3 흥법興法3 동경흥륜사東京興輪寺 금당십성金堂十聖>





또 海東의 명현名賢 안홍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이런 말이 있다.   <신라 제 27대 여왕이 임금이 되니 비록 道는 있으나 위엄이 없으매 구한九韓이 침범하는 것이다.   만일 대궐 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침범하는 제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층은 日本 2층은 中華 3층은 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단국丹國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濊貊을 진압시킨다>   <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4 황룡사黃龍寺 구층탑九層塔>





※ 안홍대사는 뒤에 한국 선종불교의 선구자 가운데 하나인 신행선사의 친족(진골인 김씨 가문)이기도 하여 실존인물임을 알게 해준다.





선사속성김씨안동어리인야 급찬상근지자 선사안홍지형증손  先師俗姓金氏安東御里人也 級干常勤之子 先師安弘之兄曾孫  선사의 속성은 김씨요  동경 어리 사람이다.   급간 상근의 아들이요 선사 안홍의 형의 증손이다.   <단속사 신행선사 비문>





******************** [Shaw 글 인용 부분] *******************





따라서 [앵무새]가 대단한 발견인양 또 베끼기 신공을 발휘하여 [Shaw]의 글을 가져온 부분에 대하여 재론의 여지도 없지만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나머지는 위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Shaw 글 인용]





소위 <<안함로 삼성기>> <<원동중 삼성기>> 라는 것이 실존한다는 근거는 <<환단고기>> 를 제외하면 전적으로 <<조선왕조실록>> 세조 3년에 기재된 수서령에 "안함노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라는 것이 나온다는 데 의지하고 있다.   이 서명은 안함(安含)이 해동고승전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고승인 것으로 미루어 "안함, 노원, 동중 삼성(三聖)기" 로 읽는 것이 온당하다.   물론 <<환단고기>> 추종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다.   이제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기재된 전승을 보면 조선 초기에 "안함, 원로, 동중" 3명을 세트로 묶어서 뭔가 신비한 일을 행한 삼총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굳이 지적하자면 전에 썼던 글에서 언급했다시피http://shaw.egloos.com/1791930 <<...승람>> 의 고증은 주의해서 살펴봐야 한다.   저 세 명이 정말 산 위에다 성을 쌓았을 것이라고(신통술이라도 써서?) 믿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상당히 많은 경우에 <<...승람>> 에서 건질 수 있는 것은 이 책을 편찬할 당시에 그런 이야기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정도이다.   상기의 기술은 필자가 생각하기에 해주편 수양산성 항목에서 추려낼 수 있는 최소한의 당대 인식이다.   굳이 안함, 원로, 동중이라는 사람들이 정말 같은 시대에 활약한 사람들이며 황해도 해주에서 뭔가 했다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원로(元老)와 노원(老元) 가운데 무엇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으로 보아 실록에 나오는 "안함노원동중삼성기" 를 "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 로 끊어 읽는 것이어야 할 이유가 또 있는 셈이다.







[필자 견해]





어떤 주장을 하려면 그와 관련된 모든 자료와 문헌을 꼼꼼히 살펴보고 나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엄밀하고 공정하게 그 의미를 해석하여 비판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삼성三聖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았으면 이런 황당하고 해괴한 억지가 나오지 않는다.    [환단고기]를 보면 <삼성>이 무얼 뜻하는지 누차에 걸쳐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문구는 <안함*노원*동중이란 유명한 삼성三聖이 쓴 기록>이 아니라 [안함로*원동중의 환인*환웅*단군인 삼성三聖에 관한 기록>이라고 주해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근거는 잎선 [지리지 해석]과 [구서령] 대목에 상세히 설명해 놓았으니 그 부분을 참고하기 바란다.





[Shaw 글 인용]





사실 저 기록은 다른 의미에서 좀 재미있다.   임승국은 <<국사대사전>>(이홍직 편) 에서 황해도 해주에 "수양산" 이 있고 "고죽" 이 해주의 옛 이름이라고 기재한 것(고죽 얘긴 사실 유사遺事에 이미 나오지만)을 두고 반도사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며 선전하고 다녔다.   후대의 재야捏造붕어들은 임승국의 이 말이 무슨 맥락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고 그대로 ctrl+C,V 했다.





그런데 임승국은 <<국사대사전>> 에 그런 얘기가 대체 왜 실렸는지 조사해보지는 않았을까?   만약 <<...승람>> 을 봤다면 저 안함, 원로, 동중 이야기도 봤을테고 그렇다면 뭔가 변명을 생각해 내서 조선왕조의 악질적인 상고사 말살 음모를 폭로(웃음) 했을 법도 한데 말이다.   필자가 워낙 과문한 탓에 임승국이 거기까지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혹 아시는 분이 계시면 지도 바랍니다)





[필자 견해]





이 사람들한테는 무슨 말을 해도 소귀에 경 읽기 아니면 엉뚱한 트집거리로만 만들 생각에 젖어있으니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마는 그래도 한마디는 던져주어야 하겠다.   사실 임승국은 [승람]의 문구를 보았음에도 필자와 같은 생각으로 코웃음으로 마무리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Shaw 스스로도 (*** 여기서 굳이 지적하자면...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라고 한낱 잡설로 치부하는 마당에 [임승국] 선생의 식견과 학식으로 볼진대 이런 잡설들을 근거로 삼은 우리나라의 역사사전의 전형을 이루고 있는 [국사대사전]의 한심한 기술 태도를 보고 싸잡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핵심문제는 선생의 진정한 의도가 <황해도 해주에 "수양산" 이 있고 "고죽" 이 해주의 옛 이름이라고 기재하는(고죽 얘긴 사실 유사遺事에 이미 나오지만) 태도가 우리 국사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반도사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는 사실인데 이 사람은 또 엉뚱한 데로 시선을 돌리려는 얄팍한 물 타기 수법을 부리고 있다.   버릇인가 보다.   아무튼 그래서 재야학도들이 <임승국 선생의 이 말이 무슨 맥락에서 나왔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즐겨 그대로 ctrl+C,V 하는 것이다.   하기야 앵무새 머리로는 무슨 생각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Shaw 글 인용]





한 줄 요약: 안함로, 원동중은 개뿔.





또 요약: 하마터면 환단고기 1부는 "안함원 삼성기"  2부는 "노동중 삼성기" 될 뻔했음.





[필자 견해]





보자보자 하니 참 가지가지로 논다.    궤변망상의 정점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필자도 한줄 요약하겠다.   [안함*원로*동중은 개뿔]





또 요약하라구???   하마터면 환단고기 1부는 "안함원 삼성기"  2부는 "노동중 삼성기" 될 뻔했다니??   완전히 혼자 북치고 장구 치고 다하면서 코메디도 모자라 생 쑈를 하고 있다.   어이구!  머리야!!!!    하기야 앵무새의 지능으로는...





****************************************************************





결국 이런 사실 하나만으로는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것이 결코 증명될 수 없는 황당무궤한 잡설임이 증명된다.   저자 이름을 날조했다는 헛된 망상을 부풀리기 위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은 어줍잖은 해프닝에 불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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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무새 죽이기-보론】『악질식민빠』위서僞書, 어떻게 볼 것인가 II...반론 [2]  궤변망상학의 알량한 떡밥  2010/01/04 13:45


 http://blog.naver.com/nero1003/70077307788






  - 텍스트 비판 : 사료의 신뢰도를 결정하는 작업으로 사료에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거짓이나 잘못된 내용*과장이나 잘못된 말 등이 섞여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 문맥비판 : 사료에 나타나 있는 문맥의 진짜 의미를 파악하는 작업(사료가 문맥상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인가?)이다.   풍자*은유 등의 내용에 숨겨진 진짜 뜻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단계이며 이 때의 비판은 단순히 문장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 광범하고 다양한 의미를 도출하는 걸 목적으로 한다.   사료가 만들어진 당시의 사회문화적 환경에도 유의해야 한다.   사료를 다양한 각도에서 의미 파악 해보고 자신의 관점과 과거인의 관점을 접목하여 사료의 내용을 <상상적으로 구성>해보는 단계이기 때문에 따라서 사료 비판에 있어서는 가장 고차원적인 사료 비판의 단계라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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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사료비판]의 종합성과 엄밀성을 이해하였으면 이쯤에서 우리가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분석*검증 과정이 있습니다.   즉 모든 역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며 공감하고 있는 사료에 대한 [역사적 이해] 과정입니다.   이런 맥락의 저변에는 사회현상이 자연현상과는 다르기 때문이라는 강한 신념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에 의해 나타나는 사회현상은 자연과학적 현상과는 달리 통제된 실험이 불가능하며 이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내적체험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지요.





  - 이해대상은 주로 인간 내면 탐구이며 행위자의 의도나 상황에 대한 행위자의 관점을 밝히는데 일차적 관심이 있다.


  - 역사적 자료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


  - 역사적 맥락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하며 이를 위해 직관*감정이입*추체험 등이 역사이해의 중요한 수단이다.





아울러 [역사적 이해과정]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곧 [감정이입적 역사이해 자세]입니다.   이를 조금 더 자세히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역사적 감정이입은 행위자에 대한 이해와 역사적 상황에 대한 맥락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므로 인지적 성격이 강하다.


  - 역사이해에서 감정이입의 대상 : 역사적 행위*역사적 행위를 감정이입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행위자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동기에 대한 이해와 행위가 일어난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 과거 사람의 행위를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 과거인의 생각은 현재와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과거인도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행동하려고 하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과거인은 현재인과 마찬가지로 인간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과거의 생활 형태는 그 시대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감정이입단계에 있어서 특히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으로 아래와 같은 것들이 또 있습니다.





  ㉠ 고정관념에 의한 감정이입으로서 과거의 모든 행위를 특정한 요인에 의해 이해한다. 


  ㉡ 일상적 감정이입으로서 역사적 행위를 상식적 수준의 일상생활로부터 이해하는 것이다.


  ㉢ 맥락적 감정이입으로서 역사적 감정이입은 과거인의 일반적 생각 속으로 들어가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해석기법을 공유한 사료비판은 우선 교육적 의미로 역사를 보다 생생한 인간의 삶으로 보여준다는 점과 감정이입을 통해 역사적 상상력을 가지게 되며 인간과 사회상을 연결시킬 수 있다는데 커다란 존재가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분석 과정을 거쳐 비로소 완성되는 [역사적 해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정적으로 말하건대 역사적 자료에 나타나 있는 내용의 의미를 밝힘으로써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는 것으로서 자료 내용의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적 흐름 속에서 그 사건이 차지하는 위치를 명확히 그리고 엄격하게 해석하여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해석단계는 아래와 같이 규정지어집니다.





  - 사료 내용 자체에 대한 의미 파악으로 사료의 내적 비판


  - 사료 내용을 통한 사건의 흐름과 이념 파악으로 이를 위하여 검증된 사료들을 연대적으로나 서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정리하여 내면적인 흐름과 이념을 파악해야 하며 분석된 자료와 자신의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자료에 나타난 역사적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상상적 이해활동


  - 사건이 역사적 맥락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 확인으로 역사적 사실의 성격을 규정하고 의미를 파악함은 물론 다른 사건과 비교하고 평가





이 모든 작업을 거치면서 자신의 역사인식과 맥락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정당하게 자리매김 되어 지는 역사를 완벽하게 재구성함으로서 [사료비판] 작업은 비로소 완결되어지는 것입니다.








[사족蛇足] 





역사적 존재란 역사적 사실 자체로서의 역사이며 매우 사변적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지식은 탐구결과로서의 역사로 비판적 속성을 지닌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사료에 대하여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옥석(玉石)을 가리기 위한 과정으로서 [사료비판]의 다양성*종합성과 [역사해석]의 공정성*엄밀성을 함께 지켜야합니다.   사료는 역사 자체를 알려주는 역사의 근원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료는 역사적 사실의 극히 일부분만을 알려주지 전체를 다 알려주지 못하며 또한 아무리 엄격한 사료 비판을 한다고 해도 내용 자체가 완벽하다고 할 수도 없다는 모순이 있습니다.   그만큼 만든 사람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고 그것을 선택한 사람의 주관도 개입되어 있기에 절대적인 사료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같은 민족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에 있어서도 민족사적 입장에서는 "환단고기"를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쪽에서 편협한 실증주의(문헌고증주의 등과 같은)를 신봉하는 입장에서는 사료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를 익히 보아왔을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 태생적으로 잘못된 사료를 선택하거나 신봉할 경우에는 심각한 역사 왜곡이 되므로 사료를 이용할 때에는 사료 자체에 대한 공정한 잣대와 철저한 비판이 필요합니다.   또한 지금 현재 절대적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역사적인 판단들도 결국은 어떤 특정 시기의 사료를 바탕으로 우리가 믿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증거가 되는 사료를 분석하여 같은 입장에서 또는 다른 각도에서 면밀하고 엄격하게 분석비판하기 전에는 "오늘의 진실도 내일에는 하나의 허위적인 가설(假說)에 불과하구나!"라는 전향적인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악질식민빠의 주장-단락 2]





그런데 위서의 경우, 심할 경우 이런 사료가치가 아예 한없이 [0] 으로 수렴해버리게 됩니다. 기록의 접근성, 기록자의 엄정성, 전래내력의 합리성 등이 모두 조작됨으로써, 그런 요소들이 심각하게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날조찌라시를 예로 들어, 일단 위의 세 가지만이라도 살펴봅시다.





사건에의 접근성 - '근 1만년' (...)


기록자의 엄정성 - '친일단체 조선유교회의 열성회원으로 십여년간 활동한 독립투사 태백교주님(...)


전래된 내력    - 석주 아래서 독립운동도 하고 막장매국노 소굴 단군교 II 에 천부경을 전하기도 하며 세상과 연을 끊고 적송자를 쫓아 불로장생을 추구하다 1920년 일제의 밀정에 의해 목이 잘려 살해되었으나 1921년 단군교 II 의 기관지 「단탁」에 그로 추정되는 인물이 기고를 하기도 하는 정체불명의 인물 '계연수'가 1911년 저술한 것을 그의 후계자인 최시흥이나 이덕수 등은 버려두고 1920년경 어린 제자 이유립에게 '60년후에 세상에 공개하라' 며 전하였으며 한암당은 20년후에나 지어지는 커발한개천각교 대시전에서 1949년 오형기에게 정서를 시켰으나 1970년대 중반 엿장수에게 팔아먹어 할 수 없이 기억을 되살려 썼지만 사실은 팔아먹은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는 민족사서 ....





아 갑자기 쓰고 보니 엄청 허탈해졌다.(이런 인간들과 상대하고 있었었구나 OTL)  예. 그렇습니다. '사료가치가 없는' 것이지요. 얼마전 桓化사업을 받고 녹다운된 S*aw 님의 표현을 빌자면, 환단고기는 김용의 「사조영웅전」 보다도 사료가치가 엄청나게 떨어집니다.(...) 상상해봅시다. 언론에 이런 기사가 나는 것을. 





「중국 사학계, 사조영웅전을 근거로 중세 한족 중 일부의 인사들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던 것에 대해 연구중」


「한족은 초능력을 썼던 위대한 민족」


「사조영웅전은 비록 소설이라 하나 다른 사료와 비교검증했을때 일치하는 부분이 상당부분 존재하므로 다른 부분에도 그 사료가치를 인정할 수 있으며,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


「분명 김용에겐 우리가 알지 못하던 중세 중국의 전승이 있었을 것」





(그리고 그 기사에 우리 네티즌이 달 리플도 상상해봅시다 ㄱ-;)





학계에서 날조찌라시를 사료로 쓰지 않고,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은, 두계가 남긴 유산을 수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사학이란 학문 자체를, 학문의 방법론을 부정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양치기 소년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역사를 갖게 되는 겁니다-중국에선 벌써 비웃고 있지만.





[필자의 견해]





그런데 이 사람은 말로만 [사료비판]이라고 주워섬기면서 내용을 살펴보면 마치 잘라보니 보잘 것 없는(1차적인 사료 검증 기준) 내용만 잔뜩 들어있는 속빈 강정이 따로 없군요.   이렇게 말로는 그럴 듯하지만 속 알맹이는 미리 정해진 기준이나 방법대로 맞춤식으로 비교 검증하니 해보나 마나【위서로 미리 판단한 저작의 경우 심하면 사료가치 판단이 아예 한없이 [0] 으로 수렴해버리게 된다】는 예정된 결론이야 명약관화합니다.





정말 [사료판단 기준]은 [악질식민빠]의 주장대로 [기록의 접근성*기록자의 엄정성*전래내력의 합리성]만이 전부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은 게 더욱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준에 두들겨 맞춘 분석결과가 모두 조작되었다는 터무니없는(이미 필자의 앞선 글에서 하나하나 밝혔음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망설(妄說)로 [환단고기]의 존재가치를 심각하게 훼손시킨 사람들이 과연 누구일까?   더구나 이 사람의 엉성하기 이를 데 없는 사료비판과정을 보았을 때 오늘날의 역사분석가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결코 생략해서는 아니 될 과정으로 간주하는 [역사적 이해]란 검증단계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아무튼 거두절미하고 다시 한번 들여다보자.





1) 사건에의 접근성 - '근 1만년' (...)





거참!  [사건 접근성]이라는 생소한 [사료가치]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   아마 역사학의 대상으로서의 가치 판단을 하려고 그 범주 안에 들어있을 <역사연구 대상>의 기본적인 필요충분조건인 [과거에 일어난 일 자체에 대한 판단*남겨진 과거의 기록이나 흔적인 사료의 성격*사료를 토대로 역사가가 연구해서 얻는 결과라는 역사가가 역사적 사실에 대해 해석을 가한 것들의 신빙성]을 검토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인가?   도무지 이해가 어렵지만 가령 그렇다면 [환단고기]에서 말해주는 우리 민족의 형성이 [삼성기]나 [태백일사]의 서술 구조로 파악해 볼 때 기원을 거의 1만년으로 잡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근자에 속속 밝혀지는 [시베리아 문명의 기원과 형성] 이론과 교차 검증으로 여실히 증명될 수 있다.





2) 기록자의 엄정성 - '친일단체 조선유교회의 열성회원으로 십여 년간 활동한 독립투사 태백교주님(...)





이 부분에서는 아무래도 [사료비판] 중 <외적비판>을 말하는 듯한데 분석 과정 가운데 [1단계] 사료의 저자나 작가를 확인한다 - [2단계] 사료의 연대를 확정한다 - [3단계] 원 저작의 보존상태(조작*위작*표절*오류 등)을 검토한다 - [4단계] 사료에 들어있는 문장들의 부분적인 차이점을 추론한다(원본의 복구시도). 에서 [제1단계]의 검증작업을 말하는 것일까?





하여튼 그렇다 치면 필사자인 <이유립> 선생이 뒷날 [조선유교회]를 만든 안순환의 사숙기관私塾機關이었던 <녹동서원>에 일시 의탁한 [단군교]의 일원으로서 녹동서원에 입교한 과정과 다시 삭주지방으로 파견되어 청년운동을 맡은 경위와 활동 내력 그리고 그 후 조선유교회의 친일행각에 환멸을 느껴 탈퇴한 행적 등을 필자의【앵무새 죽이기-친일유사역사학의 끝은 어디인가? 이유립편을 보고...반론】에서 낱낱이 분석해 놓았으니 일독(一讀)하기 바란다.   따라서 이유립 선생의 일생에 대하여 먹칠을 한 [악질식민빠]의 <기록자의 엄정성> 비판은 일고(一考)의 가치조차 없다.





3) 전래된 내력 - [석주 아래서 독립운동도 하고...1970년대 중반 엿장수에게 팔아먹어 할 수 없이 기억을 되살려 썼지만 사실은 팔아먹은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는 민족사서 ....]





여기에서도 아마 [외적비판] 중 [ 1) 사료 자체가 진짜인가? 2) 원문 사료가 진짜라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다른 내용을 첨가하지는 않았는가? 3) 이 사료를 필사하거나 재정리하면서 첨가*삭제한 내용이 있거나, 문장이 틀린 오류가 있지는 않은가?] 단계 가운데 어느 한 과정을 선택한 듯한데 확실한 감이 오지 않는다.   <전래된 내력>이라니?    분명히 [내적비판]은 아니다.





아무튼 아무리 미워도 이미 돌아가신 사람들을 그렇게 인격적으로 매도해서는 아니 된다는 점을 먼저 충고하고 넘어가려 한다(세상과 연을 끊고 적송자를 쫓아 불로장생을 추구하던 정체불명의 인물 『계연수』* 1970년대 중반 엿장수에게 팔아먹어 할 수 없이 기억을 되살려 썼지만 사실은 팔아먹은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는『이유립』이라는 무례하고 몰상식한 표현들).   아무튼 일부러 무시한 두 인물에 대해서는 다른 어러 기록을 통해서 행적을 추적해낼 수 있다.





[운초 계연수] - 해동인물지海東人物志(1969 성창호)





이 책의「곤坤 권」에 공식 등재돼 있는데 자는 인경仁卿이고 호는 운초雲樵이다.   평안도 선천에 살았다.   이기의 문인으로 백가(百家)의 책을 섭렵했다.   무술년(신해년 1911 ? - 계연수는 환단고기 서문에서 “신해 5월 광개절(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이 태어난 5월5일)날 태백을 따르는 선천사람 인경 계연수가 묘향산 단굴암에서 쓰다’라고 밝혀놓았으니 그 해에 나온 것이 틀림없다)에 단군세기와 태백유사(태백일사?) 등을 간행하고 기미년(1919년) 석주 이상룡(고성 이씨가문 출신으로 상해 임정의 국무령을 지낸 독립운동가) 막하에 들어가 참획군정으로 공을 세우고 경신년(1920년)에 만주에서 죽었다. 





나철과 함께 시원단군교(후에 대종교로 개칭)를 창교創敎한 <이기>가 갈라져 나와 창립한 단학회의 제2대 회장을 맡아 서로군정서 총판 석주 이상룡 선생의 도움을 받아 1919년 3월 16일 이후 기관지 『단학회보』(1호에서 8호까지)를 간행하였으며 광복군 제1영 사령장 오동진 장군이 단학회 교당敎堂과 전토田土를 사서 기증하여 주었다.





[한암당 이유립]





[악질식민빠]는 【계연수가 1911년 저술한 것을 후계자(단학회장을 승계한 일을 두고 이렇게 추정한듯하다)인 최시흥이나 이덕수 등은 버려두고 1920년경 어린 제자 이유립에게 '60년 후에 세상에 공개하라' 며 전하였으며...】라고 하면서 의혹을 숨기지 않고 있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그게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계연수에 이은 제3대 회장 석천 최시흥 장군은 무장독립투쟁 중 왜병들에게 사로잡혀 옥사하고 4대 회장 벽산 이덕수 장군도 무장투쟁 중에 전사하고 말 정도로 스스로의 신변보장은 물론 앞날을 조금도 예측할 수 없는 치열한 항일투쟁시기였다.   더구나 계연수가 살았다는 선천은 신의주 남쪽 서해안에 있는 평북의 군으로 이유립의 집안이 자리 했던 삭주와는 80여km 떨어져 있다.   이 때문에 이기와 계연수는 이유립의 부친인 이관즙과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계연수가 사망했을 때(1920) 이유립은 만 13세의 소년이었으며 부친과의 친교로 알게 된 연유 때문에 일찍부터 천마산대 등 독립군 진영에 들어가 아주 똑똑한 소년전령대로서 크게 활약한 바가 있어 매우 총애하면서 가깝게 지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왜 계연수가 이유립을 굳이 선택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악질식민빠]는【20년후에나 지어지는 커발한개천각교 대시전에서 1949년 오형기에게 정서를 시켰으나... 】라고 입에 침까지 튀기는데 역시 <일본이나 중국>만 꼭두서니처럼 바라보다가 어디에서 태어난 지도 잊어버린 채 지내다보니 우리 고대사를 잘 모르는 모양이다.   [대시전]은 <대웅전>의 원형이며 단군이 삼랑성을 보다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때부터 환웅이나 단군 등 성인들을 모시는 집으로 지으라 하신 다음 이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임금들도 자주 돌보라 하명하고 관심을 주던 곳이다.   그러므로 강화도 마니산에 참성단을 지을 정도면 이전부터 반드시 [대시전]은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비록 그 모습이 조선시대 후기나 일제의 민족종교본산 말살 정책를 거쳐 쇄락하고 원형을 잃었더라도 말이다.   바로 그런 건물에서 만났지만 그들이 여전히 단군신앙을 숭배하고 있었으니 [대시전]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거론한 69년의 건물은 [악질식민빠]가 구리넷에서 퍼간 다른 자료도 많을 터이니 한번 잘 살펴보기 바란다.   건물 위치가 어디에 있고 어떤 의도로 신축을 했는지?   이름도 [천신각]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유립 선생의 [환단고기] 진본이나 필사본을 간직하려는 노력은 그분의 일생에 걸친 행적 곳곳에서 진하게 묻어나오고 있는데 이를 【1970년대 중반 엿장수에게 팔아먹어 할 수 없이 기억을 되살려 썼지만 사실은 팔아먹은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는 민족사서...】라고 비양거린다면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무식한 상놈들이나 할 소리로서 그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다.








[이유립선생의 행적에서 나타나는 사례들]





1) “월남할 때 나는 쌀을 졌는데 그이는 책을 지고 나왔다”   <부인 신매녀 여사의 증언>


2) 1948년 3월에 38선을 넘은 그는 다시 이북으로 넘어갔다가 붙잡혀 북한에서 1년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월남할 당시 선생은 자기 주관이 뚜렷해지는 불혹不惑을 넘긴 나이였다.   이런 분이 그랬다면 환단고기를 가져오기 위해 두 차례나 38선을 넘은 것으로 보여 진다.   아울러 1949년 선생이 오형기씨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를 여러 부 필사시킨 것을 보면 이러한 추정은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오형기씨에게 필사를 시키기 전 가지고 있던 환단고기는 계연수 선생이 편찬한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필사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3) 6.25전쟁이 났을 때 금산의 산속에 있는 집 헛간을 빌려 피난 살림을 했는데, 그만 불이 나 살던 집이 타버렸다.   그때 선생이 보던 책들도 타버렸는데 그 일로 인해 석 달을 앓아누웠다.   그러고는 다시 책을 갖고 다녔는데 아마 다른 곳에 숨겨놓은 것을 가져왔거나 아니면 머릿속에 기억해놓은 부분을 꺼내 새로 썼을 것으로 생각했다.  <부인의 증언>


4) 대전을 거쳐 성남에 살던 시절 수해를 당해 책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환단고기를 갖고 있었으니 그때까지 필사 원본을 지니고 있었거나 어딘가에 필사해놓았던 환단고기를 찾아서 간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5) 그 가운데 1부가 한암당 선생에게 전해져 칠십년 대 초반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당시 한암당 선생은 의정부에서 셋방을 얻어 있다가 너무나 어려워 군산으로 잠깐 내려가 있었다.   그 사이 주인은. 방세도 못내는 노인이 어디 갔는지 나타나지도 않자 책을 내다 팔아 버렸다.   이때 그『한단고기』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한암당 선생은 죽을 때까지【한단고기】1권 정도는 이병도씨 집에 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여기까지 이르면 이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사료비판]이라고 인식하는지 보통 사람이라도 이해조차 하기 힘들 지경입니다.   거기다가 더욱 황당한 시츄에이션은 그 다음에 벌어집니다.   무슨 이야기냐구요?   아예 [소설-사조영웅전]과 [사료-환단고기]조차 구분 못하고 또 다시 같은 종류처럼 대조하며 경거망동하는 모습을 보니 역시 [진폐-위폐론]의 어리석은 비유가 한번의 해프닝이 아니었구나? 하는 일말의 측은함이 앞섭니다.   혹시 [사료]의 정의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아닐까?   왜 뜬금없이 [사조영웅전]이 [사료판단]의 영역에 끼어드는지 원!!!!!





아!   필자도 갑자기 반론을 쓰다가 엄청 허탈해진다(이런 인간들과 헛김만 빠지게 상대하고 있었구나!   OTL)    그리고 (...) 한번 상상해봅시다.    이런 웃기는 꼬락서니를 본다면 적어도 언론에 이런 기사가 나는 것이나 아닌지...... 





「중국 사학계 완전히 뒤집어지다.   놀란 게 아니라 배꼽이 빠져라 웃다가...한국의 어떤 궤변망상론자들이 벌인 황당하고 허무맹랑한 제 살 뜯어먹기에 어안이 벙벙하여 뒤로 넘어지다」...리플은 무슨...그리고 그 다음의 구절은 이렇게 바뀌어야 정답입니다





[악질식민빠 주장]





학계에서 날조찌라시를 사료로 쓰지 않고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은 두계가 남긴 유산을 수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사학이란 학문 자체를 학문의 방법론을 부정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양치기 소년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역사를 갖게 되는 겁니다 - 중국에선 벌써 비웃고 있지만.





[필자의 수정]





유독 식민사학계에서만 [환단고기]를 사료로 쓰지 않고 아예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는 이유는 <두계>가 남긴 유산을 지극히 받들며 수호하기 위함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그동안 그들만의 리그를 벌여왔던 국사학계를 지속적으로 온존시켜 유지하는 동시에 기존사학이란 학문 자체를 무너뜨릴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학문의 새로운 방법론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없는 거짓말로 눈과 귀를 현혹시키면서 남의 치마폭에 싸여 제 살을 파먹은 양치기 소년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부일사대모화론자]나 그들을 밥 먹여주는 나라 이외에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역사는 저절로 사라질 터이며 이제부터 전혀 새롭고 진정한 우리 민족의 진실 된 역사가 개화하는 중심에 바로 [환단고기]의 가치가 찬란하게 꽃피울 것입니다.   비로소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민족자존의 역사를 갖게 되는 시대가 도래하기 때문입니다. - 중국에선 벌써부터 웃음이 사라지고 공포에 가득 찬 눈망울을 굴리며 암암리에 비열한 공정을 진행하고 있다는 뉴스입니다. 





[악질식민빠의 주장 - 단락 3]





조금 더 들어가봅시다. 전편에서 저는 위서를 위폐와 견주었습니다. 위폐는 진폐를 흉내내게 되므로, 위작된 사서 역시 '어떤 사료'들을 흉내내어 그럴 듯하게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유통가치를 따지는 화폐와 달리, 위서에서는 '내용' 을 찾는 것이므로, 그 내용이 실제와 부합한다면, '그 부분'에 대해 사료가치를 인정할 수 있겠지요. (물론 환○님들은 '전체'에 대해 사료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는 희한한 생각을 하시는 듯 합니다만.) 하지만 그 부분이 가치를 가지려면, '독자적인 기록' 이어야 합니다.  기존의 다른 사료와 중복되는 부분은 위서에 대해 어떤 신뢰성도 담보해주지 못하니까요. (결국 그런 사료들을 참고해서 썼다. 는 반론을 방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날조찌라시는 특히 이 부분에서 아주 심각합니다.  그런 '독자적인 부분' 이라고 제시되는 것들이 다른 기록을 베낀 것이 확인되거든요. (...OTL)   (대표적인 것이 23가지 실증사례 운운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예를 들어 연개소문의 가족력은 단재의 「조선상고사」를, 오성취루는 이화사의「단기고사」를 베낀것이 확인되니까요.(그걸 어떻게 아냐구요? 단재는 그 부분에서 착각을 했고, 이화사는 단기고사에 자기 글들을 조금씩 끼워넣었는데, 날조찌라시는 그걸 그대로 베꼈거든요.  틀린 답이나 남의 창작을 베끼는 것보다 더 명확한 컨닝, 표절의 증거가 필요합니까? )





[필자의 견해]





그 놈의 지겨운 [진폐-위폐론]은 한낮의 어이없는 해프닝이나 다름없음이 밝혀졌으니 더는  긴말이 필요 없고 이제 이 단락에서 [악질식민빠]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1) 저작이 사료가치를 가지려면 『독자적인 기록』 이어야 한다.


2) 기존의 다른 사료와 중복되는 부분은 위서에 대해 어떤 신뢰성도 담보해주지 못한다(베끼기 운운).





여기에서 필자는 감히 말하겠습니다.   첫째로 [독자적인 기록] 운운하는데 우리 민족 시원의 역사를 기술한 저작(著作)가운데 [환단고기] 만큼 자세하고 풍부하며 일목요연하게 저술한 문헌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것도 다른 어느 기록에서 보이지 않는 독자적이고 독특한 내용으로 말이지요(환국의 시원과 단국부분*삼신사상과 단군신앙 부분*삼한의 유래와 관경 설명부분 등) 





더불어 둘째 항에서도 그렇습니다.   [악질식민빠]는 아직도 인용과 베끼기라는 간단한 개념도 혼동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주 쉽게...아주...아주 간단하게 예를 들겠습니다.   이 사람들하고는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게 차츰 짜증만 나기에 그렇습니다.





1)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 명백히 인정하거나 분명히 같은 해석을 하는 입장을 가진 부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떤 사서에서든지 기록 내용이 공통적이다.   그렇다고 이를 두고 설령 전후가 뚜렷하다하더라도 베꼈다고 하지 않는다.


2) 단군관련 기술에 있어서도 많은 관찬(官撰) 사서들이 서로 기술 내용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를 위서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아예 베꼈다는 말조차 사라지고 그저 인용하였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으로 대신 해명해준다.





동방(유구종이)초무군장유신인강 東方(有九種夷) 初無君長 有神人降...


<동국통감*동사찬요*동사강목*동국문헌비고 등>





3) 앞선 사서의 내용을 대부분 포함하면서 일부를 보충*교정하여 후일에 다시 증보한 문헌을 결코 위서라고 여기지 않는다(구당서-신당서*동국여지승람-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그런데 이런 기준들이 왜 민족사서나 도가사서류에는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는지 필자가 다 신기할 뿐이다.   정말로 필자가 눈이 흐려진 걸까?   아니면 헛것을 본 것일까?   (...OTL)





더군다나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23가지 실증사례 운운】이 어째서 확실한지는 필자가 다른 글인 【23가지 실증사례에 대한 반박문...반론】에서 조목조목 밝혀두었으니 재론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예시로 든 구문에 대해서는 한마디씩만 짚어주고 마무리 할 것입니다.





1) 연개소문의 가족력 문제





[예시 구절]





천남생泉南生 묘지에는 증조曾祖 자유子遊*조祖 태조太祚가 다 막리지莫離支를 임하였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朝代記 曰 淵蓋蘇文 一云蓋金 姓淵氏 其先 鳳城人也 父曰太祚 祖曰子遊 曾祖曰廣 幷爲莫離支   조대기에서 말한다.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라 한다.   성은 연씨  그의 선조는 봉성 사람으로 아비는 태조라 하고 할아비는 자유라 하고 증조부는 광이라 했으니 나란히 막리지가 되었다.   <환단고기>





상기 두 구절을 비교해봅시다..   과연 [악질식민빠 주장]대로 단재의 「조선상고사」를 [환단고기]가 베꼈는가?   나머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오성취루 문제도 마찬가지이니 정말로 이화사의「단기고사」를 베낀 것이 확실한지 한번만이라도 <박창범*나대일> 박사 논문의 방대한 분석 자료를 같이 놓고 비교 검증해주기 바란다.   컨닝...표절...좋아하네!!!!   어째서 컨닝*표절*베낀 내용이 더 풍부하고 더 자세하며 더 깊이가 있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에이!!!!





[악질식민빠의 주장-단락 4]





더 가보겠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환단고기가 위서이고, 한암당이 다른 사료를 베낀 것이 분명하더라도, 독자적인 부분이 '전승으로써 전해져왔을' 수 있지 않겠냐고. 그 '가능성'을 부정할 수 있겠냐고.  거기에서 진실을 찾아야 하지 않겠냐고.  기록은 사람이 남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기록은 그 사람의 인식의 표현이며, 그 인식은 그 사람을 둘러싼 세계를 반영하고 있겠지요.(그렇기에 문헌사료로부터 당시의 세계를 그려낼 수 있겠지요.) 만약 위서에서 진실을 찾으려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인식에 관한 것부터 출발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람의 인식-더구나 현재 사망한데다가 거짓말(僞作)까지 한-으로부터 '그 사람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뽑아내는 기술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아마도 영원히 갖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날조찌라시에서 진실을 찾을 가능성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위사(僞史)는, 대체로 소설과 같은 취급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인식을 반영한 '그럴듯한 서사' 라는 점에 차이가 없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도 날조찌라시는「사조영웅전」보다 사료가치가 한없이 떨어지겠군요. 물론 재미도.)   뽑아낼 수 있는 진실 역시, 소설에서 소설가의 작품 세계가 나오는 것처럼, 위서에서는 위작자의 역사인식과 위작의도가 나올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한암당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전한 '민족의 큰 스승' 이 아니냐고.  저는 답하겠습니다. 만약, 정말 만약 한암당에게 '우리 민족의 위대한 역사' 가 전승으로 전해졌다면, 그는 그것을 아예 사료로 쓸 수 없게 훼손해버린 자일 뿐입니다.





간단요약 : 높으신 분들이 달인의 내공으로 '위서네(피식)' 하고만 끝내버리면 두계당의 말단들이 괴로워집니다.(OTL)  김용 지못미 (...)





4자요약 : 역사범죄





[필자의 견해]





필자도 더 가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단락은 결론 부분이라고 보여 지는데 처음부터 전제가 잘못되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혹자가 아니라 [악질식민빠]가 주장하는 【환단고기가 위서이고 한암당이 다른 사료를 베낀 것이 분명하다】는 언급은 다만 추측에 불과하며 이제까지의 검증에 따라 볼품없는 안목에서 빚어진 황당한 착각이었음이 낱낱이 드러났다고 보여 집니다.  





그리고 물론 [기록은 당연히 사람이 남긴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록들을 대하는 역사연구가의 관점과 입장을 언급할 때 앞서 필자가 별도의 단락으로 설명하였듯이 역사해석과 사료비판에 있어서의 기본자세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그 다음에 주장하는 말들과 같은 경솔하고 가벼운 주장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사심이 없고 참된 역사가는 과거를 되살려 영혼을 불어넣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사건은 일어났다가 사라진 일회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복원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지요.   그 흔적의 상당수가 사라졌고 설사 남아있다고 해도 불완전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흔적을 흔히 사료(material source)라 칭하는데 이렇듯 역사연구는 알게 모르게 혹은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전해진 과거의 모든 자료를 결코 편향적이거나 어느 한쪽만을 기준으로 삼아 일방적*전반적으로 도외시하지 않으며 역사연구에 사용되는 과거의 모든 자료를 대상으로 양심껏 비교합니다.   그 속에 담겨있는 역사적 사실이 일어났던 때에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여부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기 위한 귀중한 기준사료로서 어느 하나든 소홀히 하거나 경시할 수 없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연구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악질식민빠]가 강하게【당연히 기록은 그 사람의 인식의 표현이며 그 인식은 그 사람을 둘러싼 세계를 반영하고 있겠지요(그렇기에 문헌사료로부터 당시의 세계를 그려낼 수 있겠지요)】라고 피력한 말은 일면 정당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전제를 다음의 의도적인 결론에 끼워 맞추려고 다시금 [물 타기]를 시도하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즉 위 전제 구문에서 【원래 의미인 (그 사람들의) 를 (그 사람의) 로 그리고 (그 사람들을) 을 (그 사람을) 로】왜곡하여 원 사료의 의미해석 기준과 사료비판 및 역사해석에 접근하는 역사연구자들의 기본 입장을 한꺼번에 혼동시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원 사료가 말해주려 했던 그 세계의 실상과 세계관들을 원문 그대로 충실히 옮겼을 뿐인 [환단고기] 필사자의 인식과 세계관인양 전제 구문을 슬며시 왜곡하여 스스로만 위서로 단정한 [환단고기]를 그런 인식을 가진 필사자(筆寫者)가 만든 저작인 듯 의도적으로 대입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지요.  아주 전형적인 <핵심 흐리기>와 <물 타기>의 교묘한 배합입니다.





1) 만약 위서에서 진실을 찾으려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그 사람들이란 단어가 아니므로 이유립으로 전화轉化시킨 것임이 분명하다)의 인식에 관한 것부터 출발하게 됩니다. 


2)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람의 인식-더구나 현재 사망한데다가 거짓말(僞作)까지 한-으로부터 『그 사람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뽑아내는 기술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아마도 영원히 갖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3) 날조찌라시에서 진실을 찾을 가능성이란 그런 것입니다. 





이런 엉터리 삼단논법을 전개시킨 다음 곧바로 예정된 결론으로 다시 접목시킵니다. 





4) 그래서 위사僞史는 대체로 소설과 같은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인식을 반영한 『그럴듯한 서사』라는 점에 차이가 없으니까요.





역시나입니다.   [소설]로 만들기 위해 이젠 문구도 그동안의 [위서]에서 [위사]로 슬그머니 바꾸었습니다.   그런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지요.





1) 동*서양의 많은 위서들이 결코 [위서=위사]라고는 불려지지는 않는다는 걸 분명히 알기 때문이며


2) [위사]로 만들어야 다음에 이어질 <사조영웅전>과의 대입이 한층 실감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야비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 고대의 삶과 사유(思惟)와 인식체계와 세계관 그리고 민족 공동체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의미심장하고 일목요연하게 기록한 [환단고기]는 마침내 이런 논리 조작에 의해 [소설]로 떨어집니다.   왜냐구요?   그래야 그 꼴 같지도 않은 <사조영웅전>과 대비를 시킬 수 있으니까요.   바로 나오게 됩니다.





5) 그런 의미에서도 날조찌라시는「사조영웅전」보다 사료가치가 한없이 떨어지겠군요.   물론 재미도.   뽑아낼 수 있는 진실 역시 소설에서 소설가의 작품 세계가 나오는 것처럼 위서에서는 위작자의 역사인식과 위작의도가 나올 뿐입니다. 





참 어이가 없습니다.   [김용]의 소설(곽정-양과-장무기와 주변 인물들의 행적)에 연연히 흐르는 일관된 [존화양이]의 세계관조차 모르는 건지???   중화주의 특유의 인식에 철저히 부합하는 <사조영웅전>에 깔린 [반원존송反元尊宋]이나 <의천도룡기>의 [반원숭명反元崇明] 인식체계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이런 사례를 우리 민족 고유의 선도(仙道) 사상이나 삼신(三神) 신앙체계나 대동이민족 형성 과정으로 엮어가는 한민족 공동체의 발원과 성장을 핵심으로 한 [환단고기] 의식세계와 비유해가면서 앵무새들의 합창에 맞장구치는 가운데 난독증에 허우적댄다면 더는 조언이 필요 없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철저한 [사대모화주의]에 깊이 빠져 제 몸이 어디에서 태어나고 살아왔는지조차 짐작도 못하는 단세포적인 사고라면...韓민족 지못미...보다는 스스로 입으로 지껄인 중화주의자 김용 지못미(...)라는 말이 이네들에게는 자연스러울 터이니까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한암당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전한 '민족의 큰 스승' 이 아니냐고?    필자는 답하겠습니다.   정말...정말 진실로 한암당 선생에게『우리 민족의 위대한 역사』가 전승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비로소 그것을 우리 민족사상 처음으로 제대로 된 기본 연구 사료로 쓸 수 있게 편찬하여 위대한 한민족의 역사 복원에 디딤돌을 놓으신 분입니다.





간단요약 : 어느 날 안목과 식견 높으신 분들이 한두 사람씩 달인의 내공으로 판단하여『이거 물건이네...정말 진서네(감탄)』라고 끝내버리기만 해도 <두계당>의 말단들은 한참 괴로워집니다.  (OTL)





6자 요약 : 궤변망상의 극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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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무새 죽이기-보론】『악질식민빠』위서僞書, 어떻게 볼 것인가 II...반론[1]  궤변망상학의 알량한 떡밥  2010/01/04 13:40


 http://blog.naver.com/nero1003/70077307432






【앵무새 죽이기-보론】『악질식민빠』위서僞書, 어떻게 볼 것인가 II...반론





【악질식민빠 주장 원문】





치졸한 1편에 이어서 역시 천학이 나불댈 얘기는 아니지만, 日暮途遠하여 하나라도 악의 무리들의 수를 늘려야겠기에.  앞선 글에서, 위서의 문제가 내용의 진위에 있지 않음을 아셨을 겁니다. 그렇지만 역시 문헌사료는 그 내용에 초점이 맞춰지므로, 위작이라 하여도 그 내용의 진위를 그냥 넘겨버릴 수는 없겠지요.  그리하여 위서*진서 논쟁에서 어긋난 핀트의 진폭은, 여기에 이르러 다시 한번 폭이 더 커지게 됩니다.





소위 재야(捏造派)는 '우리가 관심이 있는 건 위서 여부가 아니라 내용의 진위다! 혹 위작이라도 거기에는 진실이 담겨 있을 수 있다 ! 어째서 매식강단은 무턱대고 위서라고만 하고 그 내용은 제대로 검토하지 않는가?!'라는 열변을 토합니다. 더구나 매식강단 또한 그간의 연구-조인성, 박광용 선생 등의-를 통해 위서 여부만을 기술적으로 검토한 후, 그 '모든 내용' 을 점검하여 확인해 주지 않으므로, 이런 소위 재야의 지적은 대중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어째서 매식강단은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을까요?  역시 불구대천의 매국 수괴이자 만악의 근원이며 한민족-더 나아가 경악스럽게도 인류의 역사마저 다시 쓴 「Mr. Gentleman」 두계마왕이 창조한 식민사학을 수호하기 위한 것일까요?  사료에는 고유의 '사료 가치' 라는게 있습니다.  어거지로 간단히 정리하면, '그 사료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 란 의미가 되겠지요. (더 나아가 '이 사료를 사용할 수 있느냐' 의 논의가 되겠습니다.) 이런 '사료 가치'를 확인하는 방법이 어떤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그 기록이 얼마나 사건으로부터 가깝게-시간적으로건, 장소적으로건-기록되었는가, 기록자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가, 기록이 어떤 내력을 거쳐 전해졌는가, 등등의 합리적인 일반원칙에 의합니다. (물론 전문적으로는 교감학이나 서지학, 고고학 등으로 들어가겠습니다만.)  당연히 사건에 더 가까울수록, 기록자가 엄정한 기록자의 입장을 유지했을수록, 전래된 내력에 의문이 없을수록...그 사료가치는 높은 것이 됩니다. 당연히 그 반대라면, 사료가치를 인정하기 어렵겠지요. (이런 일련의 과정을 '사료 비판' 이라 합니다. 물론 위에 극히 간단하게 서술한 것은 초보중의 초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만.)





그런데 위서의 경우, 심할 경우 이런 사료가치가 아예 한없이 [0] 으로 수렴해버리게 됩니다. 기록의 접근성, 기록자의 엄정성, 전래내력의 합리성 등이 모두 조작됨으로써, 그런 요소들이 심각하게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날조찌라시를 예로 들어, 일단 위의 세 가지만이라도 살펴봅시다.





사건에의 접근성 - '근 1만년' (...)


기록자의 엄정성 - '친일단체 조선유교회의 열성회원으로 십여년간 활동한 독립투사 태백교주님(...)


전래된 내력    - 석주 아래서 독립운동도 하고 막장매국노 소굴 단군교 II 에 천부경을 전하기도 하며 세상과 연을 끊고 적송자를 쫓아 불로장생을 추구하다 1920년 일제의 밀정에 의해 목이 잘려 살해되었으나 1921년 단군교 II 의 기관지 「단탁」에 그로 추정되는 인물이 기고를 하기도 하는 정체불명의 인물 '계연수'가 1911년 저술한 것을 그의 후계자인 최시흥이나 이덕수 등은 버려두고 1920년경 어린 제자 이유립에게 '60년후에 세상에 공개하라' 며 전하였으며 한암당은 20년후에나 지어지는 커발한개천각교 대시전에서 1949년 오형기에게 정서를 시켰으나 1970년대 중반 엿장수에게 팔아먹어 할 수 없이 기억을 되살려 썼지만 사실은 팔아먹은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는 민족사서 ....





아 갑자기 쓰고 보니 엄청 허탈해졌다.(이런 인간들과 상대하고 있었었구나 OTL)  예. 그렇습니다. '사료가치가 없는' 것이지요. 얼마전 桓化사업을 받고 녹다운된 S*aw 님의 표현을 빌자면, 환단고기는 김용의 「사조영웅전」 보다도 사료가치가 엄청나게 떨어집니다.(...) 상상해봅시다. 언론에 이런 기사가 나는 것을. 





「중국 사학계, 사조영웅전을 근거로 중세 한족 중 일부의 인사들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던 것에 대해 연구중」


「한족은 초능력을 썼던 위대한 민족」


「사조영웅전은 비록 소설이라 하나 다른 사료와 비교검증했을때 일치하는 부분이 상당부분 존재하므로 다른 부분에도 그 사료가치를 인정할 수 있으며,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


「분명 김용에겐 우리가 알지 못하던 중세 중국의 전승이 있었을 것」





(그리고 그 기사에 우리 네티즌이 달 리플도 상상해봅시다 ㄱ-;)





학계에서 날조찌라시를 사료로 쓰지 않고,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은, 두계가 남긴 유산을 수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사학이란 학문 자체를, 학문의 방법론을 부정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양치기 소년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역사를 갖게 되는 겁니다-중국에선 벌써 비웃고 있지만.





조금 더 들어가봅시다. 전편에서 저는 위서를 위폐와 견주었습니다. 위폐는 진폐를 흉내내게 되므로, 위작된 사서 역시 '어떤 사료'들을 흉내내어 그럴 듯하게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유통가치를 따지는 화폐와 달리, 위서에서는 '내용' 을 찾는 것이므로, 그 내용이 실제와 부합한다면, '그 부분'에 대해 사료가치를 인정할 수 있겠지요. (물론 환○님들은 '전체'에 대해 사료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는 희한한 생각을 하시는 듯 합니다만.) 하지만 그 부분이 가치를 가지려면, '독자적인 기록' 이어야 합니다.  기존의 다른 사료와 중복되는 부분은 위서에 대해 어떤 신뢰성도 담보해주지 못하니까요. (결국 그런 사료들을 참고해서 썼다. 는 반론을 방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날조찌라시는 특히 이 부분에서 아주 심각합니다.  그런 '독자적인 부분' 이라고 제시되는 것들이 다른 기록을 베낀 것이 확인되거든요. (...OTL)   (대표적인 것이 23가지 실증사례 운운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예를 들어 연개소문의 가족력은 단재의 「조선상고사」를, 오성취루는 이화사의「단기고사」를 베낀것이 확인되니까요.(그걸 어떻게 아냐구요? 단재는 그 부분에서 착각을 했고, 이화사는 단기고사에 자기 글들을 조금씩 끼워넣었는데, 날조찌라시는 그걸 그대로 베꼈거든요.  틀린 답이나 남의 창작을 베끼는 것보다 더 명확한 컨닝, 표절의 증거가 필요합니까? )





더 가보겠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환단고기가 위서이고, 한암당이 다른 사료를 베낀 것이 분명하더라도, 독자적인 부분이 '전승으로써 전해져왔을' 수 있지 않겠냐고. 그 '가능성'을 부정할 수 있겠냐고.  거기에서 진실을 찾아야 하지 않겠냐고.  기록은 사람이 남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기록은 그 사람의 인식의 표현이며, 그 인식은 그 사람을 둘러싼 세계를 반영하고 있겠지요.(그렇기에 문헌사료로부터 당시의 세계를 그려낼 수 있겠지요.) 만약 위서에서 진실을 찾으려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인식에 관한 것부터 출발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람의 인식-더구나 현재 사망한데다가 거짓말(僞作)까지 한-으로부터 '그 사람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뽑아내는 기술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아마도 영원히 갖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날조찌라시에서 진실을 찾을 가능성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위사(僞史)는, 대체로 소설과 같은 취급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인식을 반영한 '그럴듯한 서사' 라는 점에 차이가 없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도 날조찌라시는「사조영웅전」보다 사료가치가 한없이 떨어지겠군요. 물론 재미도.)   뽑아낼 수 있는 진실 역시, 소설에서 소설가의 작품 세계가 나오는 것처럼, 위서에서는 위작자의 역사인식과 위작의도가 나올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한암당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전한 '민족의 큰 스승' 이 아니냐고.  저는 답하겠습니다. 만약, 정말 만약 한암당에게 '우리 민족의 위대한 역사' 가 전승으로 전해졌다면, 그는 그것을 아예 사료로 쓸 수 없게 훼손해버린 자일 뿐입니다.





간단요약 : 높으신 분들이 달인의 내공으로 '위서네(피식)' 하고만 끝내버리면 두계당의 말단들이 괴로워집니다.(OTL)  김용 지못미 (...)





4자요약 : 역사범죄





[앵무새들의 합창]





<초록불>      하하... 쵝오입니다. 


<캐안습>     식민빠님은 몽골의 침략에 맞서 인민들을 이끌고 영웅적으로 싸웠으나 권력자들의 손에 의해 숨겨진 비운의 존재 곽정대협을 믿지 않는 것이오?? 버럭!!!! (일단 도망...다다다)


<한단인>      ㅋㅋ 사조영웅전..


<악질식민빠>  초록불 님 / 원체 가방끈이 짧은데다 논의도 엉망입니  다만, 그럼에도 굳이 이런 뻘글을 쓴 것은 악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


               캐안습 님 / 화교는 출입금지 (출처 : 딴민족참기름)  틀림없이 한족의 위대함을 말살하려는 거대한 우주적 음모가 배후에 도사리고 있겠지요. 범인은 분명 한국인일 것입니다. (...)


               한단인 님 / ㅋㅋㅋ ...OTL


<뚱띠이>       지못미 김용.....


<하얀까마귀>   전래된 내력이 한없이 탈력적이군요;;


<야스페르츠>  왜 신조협려랑 의천도룡기는 무시하시느냐능! 합쳐서 영웅문이라고 부르라능! (응?)... 아무튼 명쾌한 정리시옵니다. 쵝오!


<악질식민빠>   뚱띠이 님 / ㅠ_ㅠ


                하얀까마귀 님 / 그래도 믿어야 합니다 *_*


                야스페르츠 님 / 주인공에게 계속 미소녀가 꼬인다     는 점에서 신조협려와 의천도룡기는 사료가치가 환     단고기보다도 없습니다. (...)


<shotokan>     신뢰도 높은 사서 '사조영웅전' '신조협려'에 기록되어 있는 중양조사의 대금항쟁 사실을 숨기는 것은 침략이민족 역시 자국 역사 안에 품어 버리려는 화이 강단사학자들의 악랄한 소행입니다.  장춘조사가 원나라에 적대했던 사실을 숨기고, 쿠빌라이로부터 천하도교의 대권을 받았다 운운하며 거짓기재한 것도 이와 유사한 작태이지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백운관까지 만들어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아아... 슬프군요.  지식을 팔아먹는 강단사학자들이란...


<악질식민빠>   shotokan 훃 / 무목유서를 남긴 악왕마저 민족의 통일을 방해한 자로 모는 자들이니, 달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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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에 앞서】











■■■ 이 장(章)에서는 [진폐-위폐론]의 교언(巧言)에 어쩜!!! 하면서 박수쳐주는 어린 앵무새들의 파닥거림에 완전히 도취한 [악질식민빠]가 제 흥에 겨워 [영웅문] 입구에서 <역사인식이니! 사료분석이니!> 하고 좌충우돌하면서 갈팡질팡하고 있군요.   그래서 우선 앞으로 이 章의 전체 흐름을 감싸고돌면서 기본 전제가 될 이 문제에 관하여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본문은 [한국창의독서연구소]의 글을 인용하여 필자의 생각을 조금 보탰습니다. ■■■  





漢文으로 역사(歷史)라는 말의 어원을 보면 역(歷)이란 세월*세대*왕조 등이 하나하나 순서를 따라 계속되어 가는 것으로서『과거에 있었던 사실』이나『인간이 과거에 행한 것』을 의미하며 사(史)란 활쏘기에 있어서 옆에서 적중한 수를 기록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기록을 관장하는 사람』또는『기록 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이렇듯 역사란 [사실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라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로서의 역사>는 시간적으로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모든 과거의 사건을 의미한다.   반면에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토대로 역사가가 이를 조사하고 연구하고 주관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란 인간의 역사로서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기록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사실 가운데 역사가에 의해 현재적 의미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건을 골라 새로운 판단을 기반으로 기록하고 모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 분석 개념에 있어서 동양과 서양의 의식은 조금 차별성을 가진다.   영어에서 역사를 뜻하는 <history> 라는 단어의 어원으로는 그리스어의 <historia>와 독일어의 <Geschichte> 를 들 수 있다.   그리스어의 <historia> 라는 말은『탐구』또는『탐구를 통하여 획득한 지식』을 의미하며 독일어의 <Geschichte> 라는 말은『과거에 일어난 일』을 뜻한다.





결국 서양에서 역사라는 뜻은『지난 일』이라는 뜻의 Geschichte와『정확히 기록하는 것』을 뜻하는 history가 각각 있는데 독일어의 Geschichte는 한자의 역(歷)에 해당하고 영어의 history는 한자의 사(史)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서양에서의 역사는 기록된 과거를 탐구함으로써 지식을 확장하는데 비중을 두면서 발달하였다.





하지만 동양에서의 역사란 과거의 일에 대한 반성과 이해 그리고 이의 현대적 조명이라는 점에서 역사의 교훈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있어서 역사연구의 시대의식과 소명은 역사적인 흐름을 공정하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과거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과 정신을 똑바로 체득하는 역사의식의 구현이 핵심 테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바르게 처리할 역사적 능력을 계발*신장시키고 민족의 역량을 확산하는 속에서 현재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게 한다.   우리 역사에는 우리 겨레만의 독특한 삶과 얼이 녹아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진정한 역사를 안다는 것은 우리 고유의 민족사적 흐름과 역사적 맥락을 제대로 알고 지킬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에 우리 역사가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명확히 인지하고 교정해야 만이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누구나가 쉽고 빠르게 발견하여 신속히 대처 할 수 있는 저력을 발휘할 수 있는 첩경이다.  이는 나아가 우리가 올바르게 지킨 우리 역사를 다음 세대에게도 고스란히 물려주면서 우리 후손들이 정의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도록 바탕을 만들어 주는 튼튼한 지렛대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모든 걸 함축하면서 완전한 고대사의 복원을 추구하는 우리 韓민족의 역사연구에 있어서 사료수집과 비판에 대한 무게와 기대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각론各論에 들어가서】





[악질식민빠의 주장-단락 1]





치졸한 1편에 이어서 역시 천학이 나불댈 얘기는 아니지만 日暮途遠하여 하나라도 악의 무리들의 수를 늘려야겠기에.  앞선 글에서 위서의 문제가 내용의 진위에 있지 않음을 아셨을 겁니다.   그렇지만 역시 문헌사료는 그 내용에 초점이 맞춰지므로 위작이라 하여도 그 내용의 진위를 그냥 넘겨버릴 수는 없겠지요.  그리하여 위서*진서 논쟁에서 어긋난 핀트의 진폭은 여기에 이르러 다시 한번 폭이 더 커지게 됩니다.





소위 재야(捏造派)는 '우리가 관심이 있는 건 위서 여부가 아니라 내용의 진위다! 혹 위작이라도 거기에는 진실이 담겨 있을 수 있다 ! 어째서 매식강단은 무턱대고 위서라고만 하고 그 내용은 제대로 검토하지 않는가?!'라는 열변을 토합니다. 더구나 매식강단 또한 그간의 연구-조인성, 박광용 선생 등의-를 통해 위서 여부만을 기술적으로 검토한 후, 그 '모든 내용' 을 점검하여 확인해 주지 않으므로, 이런 소위 재야의 지적은 대중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어째서 매식강단은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을까요?  역시 불구대천의 매국 수괴이자 만악의 근원이며 한민족-더 나아가 경악스럽게도 인류의 역사마저 다시 쓴 「Mr. Gentleman」 두계마왕이 창조한 식민사학을 수호하기 위한 것일까요?  사료에는 고유의 '사료 가치' 라는게 있습니다.  어거지로 간단히 정리하면, '그 사료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 란 의미가 되겠지요. (더 나아가 '이 사료를 사용할 수 있느냐' 의 논의가 되겠습니다.) 이런 '사료 가치'를 확인하는 방법이 어떤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그 기록이 얼마나 사건으로부터 가깝게-시간적으로건, 장소적으로건-기록되었는가, 기록자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가, 기록이 어떤 내력을 거쳐 전해졌는가, 등등의 합리적인 일반원칙에 의합니다. (물론 전문적으로는 교감학이나 서지학, 고고학 등으로 들어가겠습니다만.)  당연히 사건에 더 가까울수록, 기록자가 엄정한 기록자의 입장을 유지했을수록, 전래된 내력에 의문이 없을수록...그 사료가치는 높은 것이 됩니다. 당연히 그 반대라면, 사료가치를 인정하기 어렵겠지요. (이런 일련의 과정을 '사료 비판' 이라 합니다. 물론 위에 극히 간단하게 서술한 것은 초보중의 초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만.)





[필자의 견해]





필자가 보아도 1편은 확실히 경망스럽고 치졸하다.   [진폐-위폐론]의 허망한 논리도 그렇지만 역시나!  초지일관 주장하는 핵심이 바로 【위서의 문제가 내용의 진위에 있지 않다】는 억측이니 한번 어긋난 핀트의 진폭이 2편에 이르러서 다시 한번 폭이 더 커지게 마련이다.





일단【사료에는 고유의 “사료 가치” 라는 게 있습니다】라고 명확히 지적한 부분에 대해서는 일단 박수를 쳐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 사료가치 판단을 위한 과정과 방법은 [어거지]로 간단히 정리될 일이 아닙니다.   한 사료의 생명력을 좌우하는 절차를 그렇게 소홀히 취급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도 [악질식민빠]가 언급한대로 그렇게 【이런 '사료 가치'를 확인하는 방법이 어떤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라면서 가볍게 인식하거나 일부 강단사학계에서도 그저 외피만 건드려 보고 함부로 결론을 내리는 등 경박스럽게 [사료가치 판단]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로 든 기록이...





1) 얼마나 사건으로부터 가깝게-시간적으로건 장소적으로건-기록되었는가?


2) 기록자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가?


3) 기록이 어떤 내력을 거쳐 전해졌는가?





등등의 사료 판단지표는 합리적인 일반원칙이 아니라 지극히 단순하고 외양적인 판별 과정에 불과합니다.    이런 입장을 구태어 강조하는 의도야 뻔합니다.   바로 전형적인 [짜 맞추기]가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즉 이어지는 구문에서 확연히 드러나다시피...





【(물론 전문적으로는 교감학이나 서지학, 고고학 등으로 들어가겠습니다만)  당연히 사건에 더 가까울수록 기록자가 엄정한 기록자의 입장을 유지했을수록 전래된 내력에 의문이 없을수록...그 사료가치는 높은 것이 됩니다】





라는 전제를 유도하기 위한 교묘한 착시(錯視) 유도장치로서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이런 일련의 피상적인 과정이나 외형에 치중한 분석틀만을 가지고는 결코 [사료 비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초보중의 초보 수준의 비판과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는 다음의 인용글로서 대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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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해석방법과 사료 비판


([M]한국사 잡동사니 방 의 글*역사연구에 있어서의 사료비판 인용)





1. 역사학 - 과거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조사하며 탐구하는 학문





  - 역사학은 인간의 과거 사실을 다룬다(인간의 삶의 양상을 탐구)


  - 역사에는 시간개념이 내포되어있다(인과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주요 과제)


  - 문학과 철학*과학의 성격을 모두 가진다(객관성과 주관성을 공유)





많은 역사서술은 문학과 마찬가지로 이야기의 형태를 띠고 있다.   따라서 역사는 철학과 마찬가지로 교훈이나 교육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역사가들은 과학자들과 같이 자신의 주장에 대하여 논증을 하기 때문이다.





2. 역사연구 대상





  - 과거에 일어난 일 자체


  - 남겨진 과거의 기록이나 흔적 - 사료


  - 사료를 토대로 역사가가 연구해서 얻는 결과 - 역사가가 역사적 사실에 대해 해석을 가한 것








사료와 사료 비판





1. 사료의 개념과 종류





 가) 사료 분류 기준 





역사가는 과거를 되살려 영혼을 불어넣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수행한다. 그런데 과거의 사건은 일어났다가 사라진 일회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복원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 흔적의 상당수가 사라졌고 설사 남아있다고 해도 불완전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흔적을 흔히 사료(material source)라 칭하는데 이렇듯 역사연구는 과거의 자료를 가지고 하며 역사연구에 사용되는 과거의 모든 자료를 사료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료에 담겨있는 역사적 사실이 일어났던 때와 같은 시대에 만들어졌는가? 의 여부를 기준으로 삼는다.





  - 사료는 성문성*목적성*동시대성 등 여러 기준에 의해 분류된다.


  - <블로흐>는 사료를 저서나 문서와 같이 의도와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사료와 조개더미와 같이 일상적 생활을 위하여 무작위로 제작된 것으로 구분





이와 같이 역사를 연구할 때 사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분류하는 작업에 관련된 학문을 <사료학>이라고 한다.





나) 사료의 종류


그와 같은 사료는 존재 형태와 내용에 따라 양분된다.   즉 사료는 외적 형태에 따라 문헌文獻*유물遺物 그리고 유사遺史로 나뉜다.  





① 문헌은 문자에 의해 기록된 기록, 서적 그리고 문서 등을 말한다.   그것은 역사 자료의 대부분을 이루며 역사 연구는 주로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② 유물은 물질적 잔존물*일용품*일상물*건축물*비석*토기 그리고 석기 등을 말한다. 그것은 주로 고고학의 연구 대상물이 된다.


③ 유사는 과거 사건이나 언어 속에 잔존한 화석과 같은 존재를 말한다.   풍속*법제 그리고 설화 등의 기록이 그에 해당된다.





또한 사료는 내용면에서 두 가지 즉 잔적(殘蹟 evidence)과 전고(傳告 tradition)로 나눌 수 있다.   잔적은 과거의 흔적이 원형 그대로 나타나 있는 유물을 말한다.





① 과거 사람들의 생각과 그들이 추구한 것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는 종교*사상*문학 그리고 학문 등의 업적


② 후세에 길이 남기기 위한 묘비*송덕비 그리고 돌 등에 새겨진 명문銘文 ③ 문헌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렇게 잔적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주로 다루는 사료는 역시 문헌이다. 잔적에 속하는 문헌은 원사료(original source 혹은 original document)라 하여 1차 사료로 취급한다.   주로 종이*죽편竹篇 그리고 돌 등에 문자로 쓴 것을 말한다.  국가나 공공 단체의 업무 기록(public records)*고대 민회의 결의 사항*외교 문서*군사 조약과 같은 공문서와 개인의 재산 관리나 기업 경영 등의 사문서가 그것에 해당된다.





다음으로 전고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전고는 오래 동안 전해오는 것을 채록하여 새로이 기록한 것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주관성이 개입되어 왜곡의 가능성이 있다.   통계*사진 그리고 테이프 등도 있겠지만 편지* 일기*신문*연대기*회고록 그리고 역사책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① 편지는 어떤 사람이 자신이 견문험사見聞驗思한 것을 남에게 글로서 알리는 역할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글을 쓴 사람의 인격 및 직책에 따라 신빙성이 부여된다.   친분이 두터운 사람에게 보내는 것이 가치가 클 것임은 물론이다.





② 편지가 다른 사람에게 사실이나 감정을 알리는 것임에 비해 일기는 스스로 적어 두는 것이다.   그것에는 개인이 쓴 일기가 있고 공공 기관에서 쓴 일지가 있다.   이 역시 적은 사람의 식견이나 직책 등이 사료적 가치의 척도가 될 수 있다.




③ 신문은 편지와 달리 불특정 다수에게 사실을 알리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일간 신문을 비롯하여 관보 그리고 당보 등 여러 종류가 있다.   근대적인 형태의 신문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 형태도 다양했음은 물론이다.




④ 역사 기록의 초기 형태라 할 수 있는 연대기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관점에서 신문과 구별된다.   즉 신문은 날마다 또는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반면 연대기는 해마다 또는 연월에 따라 작성되는 것이다.   또한 신문이 편지 계열에 속하는 것인데 비해 연대기는 일기 계열에 속하는 것이다.




⑤ 회고록은 한 개인이 스스로 체험한 바를 후일에 기록한 것을 말한다.   그것 역시 일기처럼 작성한 사람의 비중에 따라 사료적 기치가 더 해질 수 있다.   거기에는 자기 과시적인 요소가 있고 자기 정당화의 위험이 있다.   실제로 기원전 58년에 카이사르가 저술한 [갈리아 전기]에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나타나 있다. 





※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 등의 역사책도 사료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없고서는 우리의 고대 역사를 복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2차 사료이다.   따라서 주관적 요소를 배제할 수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 이외에는 특별한 1차 사료가 남아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득불 그것이 역사 연구의 원천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외 다른 유형의 분류 소개]





  ① 현장적 성질을 지닌 것 - 메모*계산서*유서*신문보도*낙서 등


  ② 용의주도한 계획 아래 논리를 전개하는 이론적 논문 - 정치사상*경제계획*법*신학*우주론


 ③ 당시대의 기술적 설명문 - 연대기*연표*역사물*자서전*자연발생적 이야기 등


  ④ 문학이나 비언어적 자료 - 고고학적 미술자료*회화*조각 등





사료는 역사라는 학문이 어떤 학문인지에 대한 성격을 밝혀준다.   즉 역사는 과거의 사건을 단순히 문학적으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진실을 밝혀내는 작업이라는 것을 알려주며 또한 사료에 빠진 것은 사료를 참조하여 상상에 의하여 채워 넣어야 한다는 것도 동시에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료로서는 문헌사료도 있고 비 문헌 사료도 있지만 문헌사료만을 본다면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다.





[1차 사료]





<원문 사료>를 말한다.  이것은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직접 작성한 역사적 자료를 총칭하는 말이다.   당시 사람들의 일기*회의록*정부문서*비석의 비문 등이 해당된다.





  - 그 안에 담겨진 역사적 사실이 일어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된 유물이나 쓰인 저작물


  - 역사가에게 원론적인 정보나 지식을 제공해 주는 기본 자료로 해석을 하는데 기초가 되는 것

  - 학계의 관습상(삼국유사*삼국사기) 활용 여부에 따라 1차 사료와 2차 사료로 분류(최남선의 삼국유사)





[2차 사료]





원 사료인 1차 사료를 근거로 작성된 논문*비평서*저서 등을 말한다.





  - 역사적 사실이 일어난 시기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자료로서 1차 사료에 대한 설명이나 판단*견해*의견 등이 담겨 있는 자료


  - 1차 사료가 직접적인 증거라고 한다면 2차 사료는 상황적 증거이며 1차 사료가 목격자의 생생한 증거라고 한다면 2차 사료는 전해들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 하지만 사료는 그 쓰임에 따라 1*2차 사료가 달리 구분되기도 한다.   예로 고려 시기의 사회상을 알아보기 위해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참고했다면 삼국사기는 고려 시대 원본 사료로서 1차 사료이다.   그러나 중국의 삼국지 내용을 알고 싶어서 삼국사기에 나오는 중국 삼국지 관련 기사를 보았다면 이 때 삼국사기는 삼국지라는 1차 사료를 보충하는 2차 사료가 된다.





[3차 사료]





2차 사료를 근거로 작성된 참고용 지침서를 말한다.   교과서*편람*백과사전 등이 해당된다.





2. 사료비판





하지만 일반인들은 사료학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필요로 하는 사료만을 이용하여 선별하여 사용한다.   역사를 공부할 때는 단지 사료의 진위여부라던가 사료가 나타내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실제 사료가 진짜인지? 사료의 의미가 무엇인지? 를 가지고 사료 자체를 분석하는 것을 <사료비판> 이라고 한다.





다시 반복하여 강조하자면 역사가는 앞에서 제시한 사료 등에서 사실을 발견한다.   따라서 사료는 역사 연구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없이는 과거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료가 없으면 역사도 없다』라는 랑글롸와 세노뵤(Laglois et Seignobos)의 언급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사료는 과거를 보여주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거울 그 자체도 문제가 되거니와 그것을 비추는 각도에 따라서 상이한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예를 한 번 들어보자.





100년 후 어떤 역사가가 1990년대에 한국의 청년들이 좋아한 대중가요를 조사한다고 가정하자.   당시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기 가요 베스트 50”이나 “TV 가요 20”과 같은 TV 방송과 “View”나 “길보드 챠트” 등의 서적을 확인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정보를 정확하게 모르는 100년 후의 역사가에게 그 작업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망망대해를 헤매는 느낌을 자아낼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그 역사가가 어렵사리 발견한 자료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가요 무대”의 녹화 테이프일 경우는 더욱 그러할 이다.





역사 연구도 마찬가지이다. 정확한 역사상을 반영하는 자료가 있어야 한다. 목전의 대화자의 표현에도 뉘앙스에 따라 인지도가 서로 다르듯 옛사람들이 기록한 표현에는 더욱 인식의 불확실성이 있다.   따라서 신빙할 만한 사료에 근거하지 않으면 역사적 사실은 사상누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료에서 사실을 끌어내기 전에 그것의 바탕이 확실하며 정확성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건축에 비유하자면 기초 작업과 같은 것이다.   역사에서는 그 작업이 사료 비판인 것이다.




그러나 역사 연구의 기초 작업이라 할 수 있는 사료 비판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었다.   17*18세기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사료 편찬 작업이 19세기에 독일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장이 열린 것이다.   19세기를 『역사의 세기』라 칭하게 된 것도 그와 같은 시대적 상황의 반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사료 비판이라는 용어는 비판의 의미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영어로 criticism으로 표현되는 그것은 「가르다 혹은 가리다」라는 그리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사료 비판은 문자 그대로 사료의 진위眞僞와 신뢰성을 구별하는 작업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며 우리가 이처럼 사료 비판을 해야 하는 이유는 사료가 보여주는 과거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란 점은 이미 말했다.   사료는 절대 완벽하지 않고 만든 사람의 주관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   일예로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모든 역사적 사실들이 담겨 있지 못하다.   이 저서는 김부식의 주관아래 편찬자 12인의 역사 관점이 들어가 있으므로 저자들이 선택한 역사적 사실들만 담겨 있는 아주 <일부분>의 역사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료를 비판할 때는 다음사항들을 꼭 고려해야 한다.





- 사료에는 역사적 사실의 극히 일부분만 들어가 있다는 사실


- 사료는 완전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1차 사료마저도 우리에게는 불충분한 자료라는 사실


- 사료가 말해주는 역사적 사실 자체도 저자의 선택에 의해 강요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


- 잘못된 사료를 선택할 경우에는 심각한 역사 왜곡이 되므로 꼭 사료 전체에 대한 사료 비판을 한 뒤에 역사적 사실만 기록해야 한다는 것





가) 외적 비판(external criticism)





외적 비판은 사료의 외형적인 상태를 검토하여 사료가 원래의 것과 달라진 점이 없는 원래 그대로의 상태인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것은 사료의 원형(origin)에 관한 조사로 내용보다는 사료 그 자체를 검토한다.   즉 사료의 원형에 관한 지식을 구하고 필요할 경우 그 원형을 복원하려 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료를 만들고 작성하는 단계에서 사료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작업으로 역사적 비판(사료를 역사연구의 자료로 이용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작업)과 하급비판(사료가 담고 있는 내용의 의미를 검토)이 있다.  즉 외적비판은 사료가 진짜인지? 진짜라면 그 사료를 누군가 손대어 내용을 첨가하거나 삭제하지는 않았는지? 를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외적 비판은 다음 3가지 정도의 내용을 파악한다.





 1) 사료 자체가 진짜인가?


 2) 원문 사료가 진짜라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다른 내용을 첨가하지는 않았는가?


3) 이 사료를 필사하거나 재정리하면서 첨가*삭제한 내용이 있거나, 문장이 틀린 오류가 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사료의 진위를 파악하는 것이다.   보통 이러한 진위 여부를 알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친다.





1단계   사료의 저자나 작가를 확인한다.


2단계   사료의 연대를 확정한다.


3단계   원 저작의 보존상태(조작*위작*표절*오류 등)을 검토한다.


4단계   사료에 들어있는 문장들의 부분적인 차이점을 추론한다(원본의 복구시도).





[외적 비판의 사례]





1)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Donatio Constantini)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에 그리스의 옛 식민시에 콘스탄티누스의 도시 즉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를 건설하여 천도할 무렵 당시의 로마 교황 실베스터 1세(Silvester Ⅰ)에게 서로마 지역의 종교상의 권력뿐만 아니라 세속적 통치권을 위임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것이다.   그러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은 당시의 로마 황제가 교황에게 통치권을 이양했다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800년 크리스마스에 샤르마뉴(Charlemagne)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교황 레오 3세(Leo Ⅲ)가 그를 <로마인의 황제>란 칭호을 부여한 예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약 7세기 동안이나 황제의 대관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그 문서는 가짜였다.   발라(Lorenzo Valla)가 그것을 규명했다.   그것은 1440년에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의 허위성에 관하여]라는 저술을 통해 이루어졌다.   <콘스탄티누스 기증장>이 당시 즉 4세기가 아닌 8세기에 작성된 문서였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것이다.   발라가 언어학인 사료 비판을 최초로 실시한 인물로 평가받는 것도 그와 같은 배경에서 비롯한 것이다.





2) 크세노폰(Xenophon 434?-355 B.C.)의 저작집에 있는 [아테네인의 국제]에 관한 평가





[아테네인의 국제]는 아테네의 정치 체제를 비판한 것으로 오래 동안 그의 저술로 믿어져 왔다.   그러나 내용으로 보아 그것은 펠로폰네소스 전쟁(431-404 B.C.) 무렵에 쓰여 진 것으로 크세노폰의 출생과 사망 연대를 고려하면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전쟁 당시에 그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는 것이 이유이다.   그의 저작이 위작으로 불린 것도 그런 까닭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테네인의 국제]는 그 내용에서 상당한 타당성을 지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저자는 잘못되었는데 내용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와 같은 문제 규명에 대한 실마리는 다음의 사료 비판으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글의 저자가 당시 아테네의 반체제 인사였는데 그것이 편집자의 실수로 크세노폰의 저작집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아테네인의 국제]는 기원전 5세기 후반의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로 사용될 수 있게 된다.





3) 크롬웰(Thomas Cromwell)의 편지





1534년에 종교 개혁을 단행한 헨리 8세(Henry Ⅷ)의 총신으로 당시의 정치*경제 문제를 담당하면서 수도원 해산을 단행했던 인물이었다.





크롬멜은 많은 편지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수도원장을 위협하여 재산을 갈취하는 내용의 편지 2개가 문제시되었다.   그러나 사료 비판 결과 크롬웰에 대한 비난은 잘못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즉 2개 편지의 필체와 서명이 그와 그의 수행원들의 것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오히려 크롬웰의 지위와 이름을 사칭한 어떤 사람이 수도원장에게 재산을 갈취하기 위해 편지를 보냈고 그가 수도원장으로부터 회수하여 보관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나. 내적 비판(internal criticism)





진짜로 확인된 사료의 내용을 분석하여 그 내용이 과연 타당한가? 믿을 수 있는가?(사료에 기록된 내용의 진실성 여부를 가려내는 것) 를 확인하는 단계이다.   사료의 내용을 분석하여 그 신뢰성을 결정하는 작업으로 역사적 분석 소극적 의미로는 사료를 만든 저작자의 능력이나 자격을 규명하는 것이고 적극적 의미로는 사료 내용의 축자적 의미와 참다운 의미를 규명하는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의 분석은 전고 사료(문헌)에 엄격히 적용된다.   작가와 그의 학식*서술 의도*목적 그리고 객관적 사실과의 관계 등을 검토하고 바로 잡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한 내적 비판의 기준으로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기록된 사실의 객관성 여부이다.   보통 사료의 신뢰성을 높이려면 원 사료에서 보이는 거짓말*오류*과장된 표현*풍자적 표현 등을 파악해야 하며 사료의 정확한 참뜻을 알기 위해 한문 사료 등은 번역하여 내용을 파악하는 것 등을 말한다.





[사례]





종교 개혁 후 루터(Martin Luther 1483-1536)가 작센공 프레드리히의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은거하고 있을 때 악마에게 잉크병을 던졌다는 기록이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또한 한 사찬 문서에는 문익점의 조카가 둔갑술을 여우에게 배워 반란을 모의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 역시 객관적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 다음으로 들 수 있는 내적 비판의 기준은 경험이나 이치에 비추어 사실에 합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례]





1857년 7월에 샤를르(M. Charles)가 공개*발표한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의 편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단골 상인이자 유명한 위조 전문가인 뤼카스(Vrain Lucas)에게 구입한 미공개 문서를 토대로 파스칼이 1687년에 프링키피아(Principia 1687)를 통해 만유인력설을 발표한 뉴턴(Sir Issac Newton 1642-1727)보다 그 내용을 먼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영국의 한 학자가 의문을 제기했다.   뉴턴의 법칙 발견은 천문학적인 관측을 통해 가능한데 파스칼이 살아있을 때는 그것이 불가능했다는 점이 반론의 요지였다.





그러나 그처럼 예리한 비판에 직면한 샤를르는 다시 반박의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뤼카스가 역시 그것을 마련했다.   그는 갈릴레오(1564-1642)의 싸인을 위조하여 파스칼의 천재성을 입증할 수 있는 문서를 만들었다.   즉 갈릴레오는 천문학적인 관측을 파스칼은 수학적 계산을 했다는 것이다.





외견상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역시 그 문서에는 문제가 있었다.   갈릴레이와 파스칼의 출생과 사망을 비교하면 갈릴레이가 죽었을 때 파스칼의 나이가 불과 18세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1637년 이후 갈릴레이의 시력이 극도로 약화되어 맹인이 되었다는 사실과도 상충되었던 것이다.




끝으로 문헌의 허위*날조 그리고 왜곡 등의 여부를 가려야 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축사*전승비*묘비명 그리고 국왕 관계 문서 등에는 관례적이고 의례적인 표현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을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관계*허세의 여부*소속 집단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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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무새죽이기 - 보론】『악질식민빠 - "空巢 munbba.egloos.com"』의 위서, 어떻게 볼 것인가? Ⅰ...반론  궤변망상학의 알량한 떡밥  2009/12/28 22:44


 http://blog.naver.com/nero1003/70076829913






【앵무새죽이기 - 보론】『악질식민빠 - "空巢 munbba.egloos.com"』의 위서, 어떻게 볼 것인가? Ⅰ...반론





[악질식민빠 주장 원문]





저같은 천학이 함부로 말해도 될 지 모르겠습니다만, 매우 많은 분들(낚이시는 분들이건, 사냥하는 분들이건) 이 위서(僞書)의 개념을 쉽게 잡지 못해「날조찌라시의 진서-위서론」이 논쟁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논의가 계속 엇나가는 것 같아, 어찌해야 이를 사람들에게 쉬이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가장 유사한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가장 이해가 빠를 것 같다는 착안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사료비판과 연결되는 내용이 되겠습니다만, 그건 다루지 않겠습니다.)





일반적인 진서론자분들은, 날조찌라시가 '위서'라는 주장을 접하면 그게 '이 책에 쓰여진 내용이 전부 거짓말이란 얘기냐?'로 받아들이고는, 사실과 부합하는 부분 등을 가져다가 '이 책은 진서다!' 라고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위서란, 내용이 전부 거짓말이란 얘기가 아닙니다. 물론 전부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1차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위폐(僞幣)가 무엇인지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예. 위폐, 즉 위조지폐를 말하는 겁니다. 화폐를 발행할 권한이 없는 사람이 진폐(眞幣)와 흡사하게 만든 '가짜' 화폐이지요. 위폐가 진짜 돈과 다르게 생겼을까요? 아닙니다. 매우 흡사하지요. 오히려 진짜 돈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야 그 원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므로, 더욱 진짜 돈처럼 만들었을겁니다. 하지만 위폐가 아무리 진짜 돈처럼 생겼다고 해도, 위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돈은 이런저런 부분이 진짜 돈하고 정말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으니 위폐가 아니야!' 라고 한다면, 제 생각에는 그런 분은 검경에 검거되어 수사를 받기 전에 먼저 가까운 병원을 찾는게 더 시급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날조찌라시의 진서논쟁도 같습니다. 학계에서 날조찌라시를 '위서'라고 하는 이유와 근거는, 애시당초 그 안의 내용이 실제와 부합하는 부분이 '전혀' 없거나 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날조찌라시의 실제 성립시기와 지은이 등의 서지가 그 책이 스스로 주장하는 것과 다를 거라는 것 다시말하면 이유립이 계연수의 이름을 팔아 썼을 거 (僞作) 라는 거지요.





지폐에 위조불가능한 코드를 삽입하여 위조 여부를 구분하는 것처럼, 책에도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 책보다 후대에 발생한 사실이나 용어가 사용되는 것, 또는 후대에 '틀리게 기록된 사실' 이 똑같이 적혀 있는 것 같은 것이 대표적인 것이지요. '그게 뭐 어때서?' 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위서는 전형적으로 지은이만 위조하는게 아니라, 발행시기같은 것도 위조를 합니다. 그 책이 '진짜 발행된 시기' 에는 이미 알려져있던 사실이지만, 그 책이 주장하는 '발행시기' 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을 기록하여, 이 책이 마치 진짜 그 책이 주장하는 '발행시기'에 발행되었고, 진실을 담고 있는 것 - 또는 미래를 기록하고 있는 것 - 처럼 꾸미기 위한 것이지요.





좀 더 쉽게 예를 들자면, '야. 사실 나는 한달전에 박찬호가 선발등판해서 4이닝 3피안타 2실점 1자책으로 호투할 걸 예상했어'라고 한다면, 제게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겠습니까? 경기결과를 다 알고서 마치 예전에 알았던 것처럼 구라를 치는 것이지요. 저게 사실이려면, 정말로 '한달전에 예상했다'는 증빙이 있어야겠지요. 날조찌라시는 바로 이런 점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유립이 외워서 썼다'는 건 아예 당사자 스스로가 '위서' 라고 자백한 것이거든요. '후대의 용어들이 사용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유립이 외워서 쓰다가 현대적 용어로 고쳐서 썼을 것' 이란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합니다만,





위폐로 비유하자면 - '실은 이거 진짜 돈인데 햇볕을 받고 비를 맞은 후에 세탁기에 돌리니 꼭 복사기로 복사한 것처럼 되었을 뿐이야. 일련번호도 우연의 일치로 다른 것하고 같아진거고' - 같은 얘기가 됩니다.(돈갖고 이러면 100% 처벌받습니다. ) 물론 위서라고 해서 사료적 가치가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진폐가 사라지고 '진폐가 존재하던 시기'의 위폐가 남아서 전해진다면, 위폐로부터 그 당시의 진폐의 모습을 재구성할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진폐가 이미 사라진 후에 '그때의 진폐는 이렇게 생겼을 것' 이라면서 만든 위폐로부터, 어떻게 진폐의 모습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날조찌라시는 후자에 해당합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위서-진서의 논쟁은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학계에는 날조찌라시가 위서라는 점에는 아무 의문이 없으며, 일각에서 주장하는 진서론은 자신이 무엇을 주장하는 건지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날조찌라시는 진서중에 진서다!' 라거나 '모든 사서는 위서다!' 라는 분들은, 사실 역사를 연구 학부생1학년도 비웃는 무개념삽질 하실게 아니라, 병원을 찾으셔야 합니다.





더 간단 4자요약 : 역사범죄





ps. 아무리 존대를 써도 제 비루한 인품은 숨길 수가 없는 것이지요.





[앵무새들의 합창]





<야스페르츠> 하하... 날조찌라시 위서론에 대항하는 환○들의 최후 병기가 바로 '모든 사서는 위서다!'죠....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굴레와 함께 말입니다...


<한단인>     비유가 멋지군요. ㅎㅎ ['후대의 용어들이 사용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유립이 외워서 쓰다가 현대적 용어로 고쳐서 썼을 것' 이란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합니다만] 는 개인적으로 찔리는 군요. 소싯적 환○에 빠졌을 때 저걸 두고 전 계연수가 독립군을 대상으로 한단고기를 합본했기 때문에 그렇게 뜯어고친거라고 헛소리를 나불거리곤 했거든요. 추론은 추론일 뿐.. 그게 진짜라는 보장은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발견되기 전에는 전혀 없음을 그땐 미쳐 깨닫지 못했지만요.


<초록불>     비루한 인품이라니요. 천만부당한 말씀입니다.


<shotokan>  나의 유립쨩은 그러치 안타능...


<비안네>     환단고기도 사료적 가치는 충분합니다.  '대한민국 건국초부터 두드러진 민족주의의 발흥 및 영향'이란 주제로 글을 쓴다면, 환단고기를 빼놓고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 주제 말고 다른 사료적 가치는 전무하군요.  껄껄


<dunkbear>  어느 개인의 머리 속에서 나온 망상의 모음집을 위서라고 부르는 것조차도 솔직히 너무 우대해주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


<뚱띠이>     먼 훗날 대한민국 좌와 우를 막론하고 하나로 집결시킨 민족의 명저'로 평가될 수도 있을지도....(이건 공포야!!!!!)


<악질식민빠> 야스페르츠 님 /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패자였다는 얘기밖에 더 되겠습니까? 자기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니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게지요.


               한단인 님 / ...그렇죠. 결국 근거없는 주장은 공허한 울림에 불과할 뿐인데...반전은 계연수 선생께서 천부경을 전한 동네가 막장 친일파 소굴이었다는 것 (...) 여담입니다만, 이강오 선생께서 60년대말 단군교단들을 실사할 때만 해도 단군교 II 가 친일교단이라는 걸 기억하고 계셨던 분들이 꽤 있었던 듯 합니다. 그 뒤로 한 30여년이 흘러 망각에 잠기고 나니 뭐 별 얘기가 다 나옵니다만...


               초록불 님 / 그게 사실이니까요. 입에 걸레문 사람에게 무슨 인품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언행 뿐 아니라 내면도 뒤틀어진 쪽에 속하는지라.


               shotokan 훃 / 어휴 덕후 (...)


               비안네 님 / 그헣죠. 결국은 실질(실제 쓰여진 시기와 작성자)이 중요한거죠. 저라면 몇자 덧붙이겠습니다. '천민 민족주의의 발흥과 영향' 으로.


               dunkbear 님 / 그래서인지 제 악의소굴에서의 호칭은 점점 더 쉽게 알아볼 수 없게 바뀌고 있지요. '환단고기-날조고기-날조찌라시' 워낙 추악한 욕망의 덩어리라, 세간에 회자되는 것도 부끄러울 지경인데 말입니다.


               뚱띠이 님 / 그렇게 평가되려면 우선 「이병도의 제자의 제자의 제자의 사돈의 팔촌들」부터 정리를 해야 (...) 학문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한, 분명 건전하고 엄정한 필봉도 남아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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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  앞선 글에 이어지는 [악질식민빠-무슨 까닭인지 지금은 아이디를 "空巢 munbba.egloos.com"로 바꾸었다] 의 위서론에 대한 반론이므로 이 부분에 가장 알맞은 전제前提 글이라고 생각되어 <조의선인>님의 『한단고기는 후대의 위작인가?』에서 일부를 인용하여 제 의견을 붙여 같이 전재합니다.  ■■■■■■■■■■■■■





1910년 이후 한국사 서술을 주도한 것은 만주와 중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대종교였다.   대종교는 우리 고유종교를 다시 일으켜 세움으로써 민족정기를 보존하고 자주독립을 고취시키려던 종교단체였는데 역사교육을 통한 애국심의 함양과 단군사상의 확산이 가장 효과적인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라고 믿고 많은 역사서를 저술했다.





대종교도였던 계연수가 저술한 한단고기도 이런 역사의식의 발호과정에서 편찬된 책이다.   한단고기는 계연수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삼성기 등 네 권의 책을 하나로 묶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단고기에 대한 학계의 비판은 과도한 것이란 비난을 받을만한 여지가 있다.   20세기에 편집했음을 서문에서 스스로 밝힌 책에 20세기 용어들이 사용되었다고 위서라 비판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사실상 지적한 용어들의 대부분도 지금은 그 당시에도 사용되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1910년 이후 국사서 서술을 주도한 박은식*신채호*이상룡*김교헌 등이 모두 대종교도였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후대의 용어가 사용되었다는 사실만 가지고 한단고기를 후세에 조작된 책으로 규정할 수는 없음이 분명해진다.   이상룡의 서사록*박은식의 동명성왕실기가 1911년에 서술되었다고 해서 후세의 위작이라고 비판받지는 않는 현실이 정당하다면 한단고기가 위서라고 받은 비판은 부당한 것이다.





박은식*신채호처럼 계연수도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승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민족의 혼을 기반으로 삼은 독립운동사상을 고취시킬 목적의 하나로 옛 고서를 참고해 한단고기를 저술한 것이다.  또한 그는 박은식*김교헌이 그랬던 것같이 한단고기를 의도적으로 조작할 필요는 없었다.   당시 이상룡*김교헌이나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관에 따라 유전(遺傳)된 고문헌을 참고하여 고대사를 서술하면 되지 굳이 전해진 책 내용을 조작할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교헌이 지은 신단실기*신단민사 등은 한단고기와 그 기본 논지가 일치하고 있음에도 위서란 비난을 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간 한단고기에 가해진 비난이 의도적이며 과도한 질타임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한단고기의 위서(僞書) 여부를 비난하는 데 쓸 역량을 그 내용의 검토와 분석에 사용하는 것이 우리 역사학의 발전이나 고대사의 실체를 낱낱이 밝히는데 필요하다.   오로지 그러한 발상의 전환만이 한단고기 신봉 또는 비판 여부가 마치 강단과 재야를 가르는 기준으로 적용되는 듯한 현재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며 자기중심적인 학계의 연구풍토를 개방적인 자세로 바꾸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각론各論에 들어가서】





먼저 작금의 우리 사학계 현실이 여전히 황소고집처럼 변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서글프고 답답한 자화상을 하나 인용하여 들려주고 시작하겠습니다.   신학균(申學均)이 번역한 북애(北崖)의『규원사화』가 출판된 것은 1969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한 마디로 냉담하였던 건 그만두고라도 그런 냉소적인 분위기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왜냐 하면 단군조선을 비롯한 상고사에 대하여만큼은 이상스럽게도 아무런 까닭 없이 맹목적으로 불신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특히 사학과 출신 학자들이 예외 없이 단군에 대해 말하는 걸 금기시 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가령 <차주환>이나 <이을호>와 같은 사학계 인사들이 아닌 철학자들만이 거리낌 없이 단군과 선도(仙道)에 대해 언급하고 기탄없이 글을 쓰고 있다는 말입니다.   특히 작고하신 <차주환> 교수는 평안북도 영변이 고향이십니다.  그분은 환웅의 신시(神市)가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이란 말을 서슴없이 말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사학자들은 전혀 저연혀...그렇지가 않습니다.   규원사화가 나온 지 7년이나 지난 1976년 무렵에 당대 제1의 대가(大家) 네 분(천관우*이기백*고병익*이우성)이 대담을 하였던 자리에서조차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오갔던 현실을 보면 참으로 가슴이 미어집니다.





<千寬宇> 『규원사화』를 어떻게 보십니까?


<李基白>  한영우씨가 『한국학보』에 쓴 것을 보니 도가사학道家史學이라고 했어요.   규원사화揆園史話의 선구적先驅的인 것(이맥의 진역유기를 말함)이 고려 말에 있었나 봐요.


<千寬宇> 『규원사화』말고 발해의 대야발이 만들었다는『단기고사』가   있다는데 읽어본다...본다 하면서 아직 못 봤어요.


<李佑成> 『단기고사』는 이조 말에 만든 것 아닙니까?  『규원사화』라   는 것도【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李基白>  이런 것들이 단재가 말한 묘청이라든지 풍수도참風水圖讖과 연결된 그런 계통이 아닐까요?


<李佑成>  여기 도가는 도교적인 도가가 아니라 화랑花郞*국선國仙 하는 선仙 즉 단군도 선인의 후예라 했지만 그 仙과 연결된 것 같아요.   그래서 도가道家가 아니라 선가仙家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 仙家는 약간 노장사상과 관련이 있긴 있지만 바로 노장사상의 그런 도가는 아니니까요.


<李基白>  지금 사료적인 가치를 인정할 수 없는 책들이 아니겠습니까.


<李佑成>  단군 이후의 역대 임금이 다 나오니 그것을.....


<千寬宇>  환웅 밑에 고시高矢가 한반도를 다스리고 신지神誌가 만주를 다스리고 치우蚩尤가 하북 산동을 다스렸다는 건데요.


<李佑成> 『삼국유사』의 단군 기사와 『제왕운기』의 단군기사가 다른  데 전자에서는 환웅이 곰과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고 후자에 있어서는 환웅천황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한 뒤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게 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연 이전까지는 중국과 동일한 문화를 가졌다는 것을 주장하기에 바빴는데 고려 중엽부터는 중국과 같은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우리 조상의 역사가 출발했다는 것을 내세우는 단계로 발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요컨대 처음부터 단군을 신화로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실로서의 단군을 민족시조로 승화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지요.





다른 분이 자세히 올린 글의 인용이 좀 길었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1970년대의 대표적인 사학자들 가운데『규원사화』를 읽어 본 사람이 단 한 사람 <이우성> 교수밖에 없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僞書 논쟁의 단초를 제공하면서 그 핵심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특히 <이기백>은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가 없다고 잘라 말하고 있고 <천관우>씨는 바빠서 읽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딱한 실정입니다.  그나마 단 한 사람 <이우성> 교수는 『규원사화』를 도가사서 운운한 <한영우>의 논문을 비판하면서 그것은 道敎가 아니라 仙道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우성>은 그 무렵 [두계의 사대부일모화사관]이 팽배하였던 사학전공이 아니라 한문학을 공부한 순수한 한학자였기 때문에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와 중국의 道敎와 우리나라의 仙道가 다르다는 것을 조금은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철학이나 문학을 하는 분들은 단군연구를 기피하지 않는데 유독 국사학자들만 단군 연구를 도외시하고 道敎와 仙家 사상조차 분별하지 못하는지?   답답한 현실입니다.








[악질식민빠의 주장 - 단락 1]





저 같은 천학이 함부로 말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매우 많은 분들(낚이시는 분들이건 사냥하는 분들이건)이 위서(僞書)의 개념을 쉽게 잡지 못해「날조찌라시의 진서-위서론」이 논쟁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논의가 계속 엇나가는 것 같아 어찌해야 이를 사람들에게 쉬이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가장 유사한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가장 이해가 빠를 것 같다는 착안을 하게 되었습니다(결국은 사료비판과 연결되는 내용이 되겠습니다만 그건 다루지 않겠습니다).





일반적인 진서론자 분들은 날조찌라시가 '위서'라는 주장을 접하면 그게 '이 책에 쓰여 진 내용이 전부 거짓말이란 얘기냐?'로 받아들이고는 사실과 부합하는 부분 등을 가져다가 '이 책은 진서다!' 라고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위서란 내용이 전부 거짓말이란 얘기가 아닙니다.   물론 전부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1차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필자筆者의 견해]





바로 처음부터 논조가 크게 빗나갔으며 기본이 되는 논제를 왜곡하여 초점이 어긋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직도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남의 밭에 가서 엉뚱하게 헤매고 있군요.   이래가지고야 어떻게 위서논쟁에 대하여 무릎을 맞대면서 진지하게 토의해 보겠습니까?   다시 한번 차근차근 도움말을 해 드리지요.  지금 진서론자 분들은 [환단고기]를 [날조찌라시]라는 궤변망상으로 함부로 색칠하면서 『위서』라고 하는 주장을 접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어 점잖게 그렇다면 “이 책에 쓰여 진 내용이 전부 거짓말이란 얘기냐?”라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조성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를 먼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저서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내용이나 핵심을 관통하는 흐름에 대해서보다 그저 저작 시기나 저자 문제나 단순한 용어 선택이나 용례(用例)여부만을 지적하면서 이를 빙자해 마치 전체가 다 잘못된 양 침소봉대하거나 고의로 왜곡하여 위서(僞書)로 몰아 부치는 행태가 누가 보아도 한심스럽다고 지적해주는 것입니다.   그래도 알아듣지 못하니까 이제부터는 아예 손에 쥐어주어야겠다는 안타까움에 저작의 핵심부분들을 발췌하여 사실과의 부합여부를 조목조목 밝혀주며 「보아라!   그래서 이 책은 진서이다!」 라고 명백히 적시해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 합니다.   즉 [날조찌라시가 “위서”라는 주장을 접하면 그게 “이 책에 쓰여 진 내용이 전부 거짓말이란 얘기냐?”]라고 하는 게 아니라...





     1) 위서론자들이 먼저 그리고 대부분 어느 일부(예를 들면 현대적 용어 사용*저작 시기나 저자문제*용례의 부적합 등등)를 침소봉대하여 놓고 그러므로 이 책에 쓰여 진 내용이 전부 거짓말이며 위서이다. 라고 주장을 일삼는다(송호정이나 다른 이들의 예를 보라).


     2) 이를 두고 진서론자들은 그 부분에 대해서 다른 전거나 사실들을 들어 하나하나 반박을 하는 가운데 필사를 하는 과정에서 흔히 발생할 수 있는 현상과는 철저히 구별하여 입증하는 자세로 오히려 과거 기록을 면밀하게 검토하지 못한 경망스러움을 지적하면서 좀더 신중하게 접근하라는 충언을 해주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3) 그러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각도를 통하여 종합적으로 논쟁의 핵심으로 부각한 서책에 관한 비교분석을 토대로 진서라는 결론을 조심스럽게 내리거나 아직 시간을 두고 신중히 검토하자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그런 대목에 힘을 빼지 말고 [민족사학계]에서 줄곧 주장하는 다음의 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1)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소설처럼 상상력을 동원하여 지은 책이 아니라는 반증으로서 단군세기檀君世紀는 각종의 사서를 동원하여 분석 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는 점이다(대마도對馬島가 옛날에 삼한三韓 땅이고 신라(新羅)의 영역이었다는 것*소잔명존이 구주九州로 이주하기 전 한동안 대마도對馬島인 소시모리素尸毛犁에 정착해 있었다는 것 등)





※ 이 기록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구주九州 및 대마도對馬島에 관한 풍토지風土誌*대주편년략對州編年略*진도기사津島紀事*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 각종의 서적을 읽지 않고는 알 수 없으며 따라서 한 두 사람의 머리로 창작해 내기에는 벅찬 내용들이다.





     2) 저서에서 발견되는 일련의 일관된 흐름이 있다.   각 권마다 구성의 치밀함은 물론이고 상호 보완과 정합성은 둘째로 치고라도 지금까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아왔던 삼국시대이후의 불교사상이나 고려·조선시대의 유교사상과는 다른 환인시대부터의 독특한 [삼신사상三神思想-한사상]이라 하는 민족고유의 사상을 바탕으로 고대사가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 이것은 흔히 말하는 도교사상(道敎思想)과도 거리가 멀다. 최치원이 말한 <현묘지도玄妙之道>나 신채호선생의 <낭가사상郎家思想>등으로 표현되는 고유의 전통적 사고관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삼신사상이나 신교합일의 구현체계는 오히려 불교사상이나 유교사상보다 훨씬 원초적인 인간존중의 사상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재세이화在世理化』의 구체적 방법론으로서 범민족적인 철학이념체계로까지 승화되어 있다.





     3) 기존학계에서조차 여태껏 밝혀내지 못하는 고조선의 위치* 정부형태*정치제도*풍습 등과 부여의 건국과 역사는 물론 고주몽의 계보*발해의 건국비화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민족사학계]에서 한결같이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말하는 초점 흐리기를 하지 마라! 하면  [위서란 내용이 전부 거짓말이란 얘기가 아닙니다.   물론 전부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1차적인 문제는 아닙니다]라고 교묘히 말을 돌리는 전형적인 태도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러는 것임을 알아주기 바랍니다.





아무튼 위서 논쟁에 있어서 [악질식민빠]를 비롯한 많은 앵무새들이 정확한 위서(僞書)분별에 대한 사료 비판이나 비교분석 방법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나 실천적인 검증 개념을 쉽게 잡지 못해「환단고기에 대한 진서-위서론」이 늘 논쟁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이렇게 논의의 핵심이 계속 엇나가는 것 같아 답답한 마음에 한마디 곁들이고 이 단락을 맺겠습니다.





[악질식민빠의 주장 - 단락 2]





위폐(僞幣)가 무엇인지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예.  위폐 즉 위조지폐를 말하는 겁니다.   화폐를 발행할 권한이 없는 사람이 진폐(眞幣)와 흡사하게 만든 '가짜' 화폐이지요.   위폐가 진짜 돈과 다르게 생겼을까요?   아닙니다.   매우 흡사하지요.   오히려 진짜 돈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야 그 원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므로 더욱 진짜 돈처럼 만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위폐가 아무리 진짜 돈처럼 생겼다고 해도 위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돈은 이런저런 부분이 진짜 돈하고 정말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으니 ‘위폐가 아니야!' 라고 한다면 제 생각에는 그런 분은 검경에 검거되어 수사를 받기 전에 먼저 가까운 병원을 찾는 게 더 시급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날조찌라시의 진서논쟁도 같습니다.   학계에서 날조찌라시를 '위서'라고 하는 이유와 근거는 애시당초 그 안의 내용이 실제와 부합하는 부분이 '전혀' 없거나 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날조찌라시의 실제 성립시기와 지은이 등의 서지가 그 책이 스스로 주장하는 것과 다를 거라는 것 다시 말하면 이유립이 계연수의 이름을 팔아 썼을 거(僞作) 라는 거지요.





[필자의 견해]





이 또한 위서의 근거로 삼는 논거의 핵심은 스스로의 추측에 불과하며 아무도 증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앞선 글에서도 누차 지적했듯이 이러한 속이 텅 빈 누에고치를 번듯하게 지어 놓고 그 속에는 부분 부분의 용어 사용이나 용례문제 등 記述上의 작은 트집거리나 다름없는 내용을 채우다가 이것들이 하나하나 박살이 나자 이번에는 얼굴을 확 바꾸어 [애시 당초 그 안의 내용이 실제와 부합하는 부분이 '전혀' 없거나 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물타기를 하면서 슬그머니 [실제 성립시기와 지은이 등의 서지가 그 책이 스스로 주장하는 것과 다를 거라는 것]이라는 다른 배로 갈아타는 전형적인 행태를 보여주는 모습이 한심하다는 지적입니다.





아울러 [악질식민빠]가 신바람이 나서 예시로 든 [진폐*위폐 문제]는 왜 갑자기 튀어나오는 걸까요?   황당하다 못해 어이없는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군요.   도대체 이런 괴이하고 해괴망측한 비교는 또 무엇인지???    논리 전개나 예시가 근본적으로 엉망진창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진폐-위폐론]과 관련하여 주장하고자 하는 이 단락의 구조는 이렇습니다.





[진폐*위폐에 대한 기본 전제 언급 A] - [진폐와 위폐를 분별하기 위한 판단기준 B] - [위서의 대상이 된 저작의 판단 기준 대입 C]





얼핏 보아 아주 그럴듯하고 이치에 맞아 보이는 삼단 논법입니다.  그러나 면밀하고 엄격하게 살펴보면 억지로 짜 맞춘 그래서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질 사상누각에 다름이 아닙니다.   왜냐구요?   우선 기본전제 가운데 <진폐와 위폐의 정의와 발현 형태>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만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분별기준 B]와 [위서 여부 대입 단계 C]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필자가 분명하고 차근차근하게 말해주겠습니다.





     1. 위폐란 반드시 그 시대에 통용되고 있는 진폐와 동일한 형식과 같은 내용(아주 흡사할 정도 가지고는 어림없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즐겨 속고 착각하며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을 담고 있어야 성립조건을 충족한다.   그런 의미에서 [악질식민빠]의 【진짜 돈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야 그 원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므로 더욱 진짜 돈처럼 만들었을 겁니다】는 전제는 명확한 정의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위폐의 정의를 기술해 둔다.





******************  [위폐의 정의]  *********************





- 그 시대에 통용되는 통화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형태가 동일해야 한다.


- 사람들이 금방 속거나 믿고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구성형식과 표시내용이 같아야 한다.





※ 따라서 장난으로 만든 지폐나 장식용 화폐는 누구도 위폐라고 지적하거나 용도에 간섭하지 않는다.





- 위폐는 결국 현재 통용되고 있는 진폐의 존재와 가치 기준에 의해 판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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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하지만 두 번째 전제인 [진폐와 위폐를 분별하기 위한 판단기준 B]의 예시가 전혀 틀렸다.   왜냐하면 [진폐-위폐론과 진서-위서론]의 대입기준에 적합하려면 가장 먼저 일반적 전제요건인 <양兩 지폐 곧 두 사서의 기본 형태나 형식과 기록된 내용들이 동일성을 공유하여야 한다>는 필요조건이 갖추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판별기준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그 이유와 근거를 애시 당초 그 안의 내용이 실제와 부합하는 부분이 '전혀' 없거나 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날조찌라시의 실제 성립시기와 지은이 등의 서지가 그 책이 스스로 주장하는 것과 다를 거라는 것 다시 말하면 이유립이 계연수의 이름을 팔아 썼을 거僞作 라는 거지요]라는 전혀 황당하고 엉뚱한 잣대를 대입 기준으로 언급한다는 점이다.





※ 왜냐하면 판별 기준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위폐(이에 대입한 위서)는 만든 사람이 분명하지 않다고 해서 만든 시기가 언제인지 파악이 어렵다고 해서 또한 만든 기계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 위폐여부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이 같은 사실들은 다만 범죄 성립요건일 뿐이다)  이미 출현 자체로서 성립되며 진가眞假여부는 이와는 별도로 정밀한 내용분석과 인쇄 형식 등의 비교에 의해 판가름이 나는 것(위폐여부 감식요건)이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히 말해 <위폐>는 출현 경로나 시기 등에 관계없이 진위 감별을 통해서 성립하는 것이지 범죄 성립요건으로 구분지어지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2. 그리고 <악질식민빠>의 [진폐-위폐론]의 가정에 충실하자면 [위폐의 대입부분인 C]를 충족시킬 필요충분조건을 갖춘 서적은 <환단고기>가 아니다.   즉 진폐와 위폐의 비유에 대한 정확한 논점은 [동일 형태의 두 가지 종류 사서가 나타나거나 동질성을 빙자한 문헌이 같은 저작으로 등장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엄격하게 다른 형식과 내용을 담은 [환단고기]의 대입은 어불성설이며 이에 대응하는 가장 적합한 문헌은 정밀 진단과 분석을 거치지 않으면 분별하지 못할 만큼 진폐와 유사한 형식과 내용을 공유하는 <죽서기년>의 이본異本들인 [금본죽서기년과 고본죽서기년]이 가장 알맞은 사례이기 때문이다.





※ 이에 비교하여 [환단고기]는 진폐의 대상인 [사서]들과는 그 편집형식이 전혀 다르고 기술 내용이 완전히 이질적이기 때문에 진폐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흡사하거나 동일한 위폐란 전제로서 [환단고기]라는 대입 공식은 아예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진폐-위폐론]과 [환단고기 위서론]을 결부시키는 태도는 지극히 경박하고 치졸한 발상이다.





********************* [죽서기년竹書紀年] *********************





중국의 편년체 역사서이다.   기년紀年*급총기년汲塚紀年이라고도 한다.  황제黃帝 시대로부터 위魏나라 양왕襄王(재위 BC 334∼BC 319)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이 저술되어 있으며 저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좌전左傳*사기史記와 더불어 중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주요 史書 중 하나이다.   한대漢代에는 대체로 흩어져 있었으나 서진西晋 시대인 279년 현재의 하남성(河南省) 급현(汲縣)에서 위나라 양왕의 무덤이 도굴되었는데 이로부터 문자가 기록된 많은 양의 죽간竹簡이 《목천자전穆天子傳》*《주어周語》 등과 더불어 출토되어 즉시 진晉나라 조정에 바쳐졌고 순욱荀勖 등 학자의 정리 교정과정을 거쳤다.   대나무에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죽서기년]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사기史記 등에는 등장하지 않는 내용들이 있어서 이를 근거로 《사기》연표의 오류를 수정하기도 하였다.   죽서기년은 북송 대에 다시 흩어졌고 남송南宋시대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현재 유포되고 있는 양梁나라 심약沈約의 주가 붙어 출현한 《금본今本 죽서기년》 2권은 원元*명明나라 때의 위작僞作이다.   중화민국 시기(1917년)에 왕국유(王國維)는 고서에 이용된 본래의 기년을 집성集成*교정*복원을 시도하여 《고본죽서기년집교古本竹書紀年輯校》를 저술하고 다시 심약이 주注한 《금본죽서기년今本竹書紀年》과 《고본죽서기년古本竹書紀年》의 차이점을 밝혔다.   이를 [고본古本 죽서기년]이라 부르면서 사료가치가 높이 평가되었다. 





[참고]





《일주서逸周書》는 간단히 《주서周書》 혹은 《주지周志》라고도 하며 《급총주서汲塚周書》라고도 한다.   일逸이란 소멸과 동의어인 일실逸失이라는 의미이며 그런 까닭에 일주서逸周書라고 하면 일실된 주서周書 즉 주나라 시대 역사라는 의미다.   급총주서汲冢周書란 죽서기년의 별칭인 급총기년과 마찬가지로 주서로써 급총汲冢이란 곳에서 죽간竹簡 형태로 발굴된 문헌이라는 뜻이다.   현재 전하여지는 것은 비록 급총에서 발굴된 것이라 하지만 다른 급총서가 유전遺傳 과정에서 많은 탈각이 있고 대부분 멸실되어 버렸다는 점에서 후대의 위작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으며 지금은 거의 정설이 되어가는 추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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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진폐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흡사한 위폐=환단고기] 라는 비유는 처음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논리의 대전제 상 위폐가 정말로 [환단고기]라면 진폐의 대상은 그 형식과 편집과 기굴 내용이 같아 사람들이 대부분 믿고 통용하였던 [사서]가 대응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필자가 조금이나마 도움말을 주려는 생각에서 [위서-진서] 판별에 대입할 보다 정확한 분석 틀을 제공해 주겠습니다.





■■■ 정말로 정확하게 비유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만 합니다 ■■■





[환단고기]의 출현은 [진폐-위폐의 문제]가 아니라 [기축통화基軸通貨]의 문제로서 명목화폐가 주종을 이룬 <관리통화제도>가 일반적이던 시기에 과거 <금본위제도> 하의 실질화폐였던 기축통화가 등장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니면 달러 중심 체제에 갑자기 유로화 체제가 나타난 현상으로 보면 알맞다.   즉 [진폐-위폐론] 문제가 아니라 다 같은 진폐로서 다만 태생과 적용되었던 시점과 출현 과정이 다른 두 화폐의 차별성일 뿐이다.





※ 금본위제도와 관리통화제도는 어느 하나가 어느 한쪽에 의해 밀려났을 뿐이지 그 가치 자체가 영원히 상실되었거나 추구하고 있던 목적이나 본질을 구성한 내용적인 사실들이 달라진 게 더욱 아니다.    다시 말해 달러가 기축 통화로서 그 시대의 통화체제를 장악하고 있는데 별안간 유로화 체계가 등장한 현상과 같다.





비유는 이렇게 들어야 정확한 표현이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진폐-위폐론] 같은 어린애 작난을 들먹이면서 <정말로 기가 막힌 표현>이라고 자기들 끼리 취한 광대놀음에 흠뻑 젖어 순진한 독자들을 교묘하게 속이거나 눈과 귀를 현혹시키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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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식민빠의 주장 - 단락 3]





지폐에 위조불가능한 코드를 삽입하여 위조 여부를 구분하는 것처럼 책에도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 책보다 후대에 발생한 사실이나 용어가 사용되는 것 또는 후대에 '틀리게 기록된 사실' 이 똑같이 적혀 있는 것 같은 것이 대표적인 것이지요.   '그게 뭐 어때서?' 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위서는 전형적으로 지은이만 위조하는 게 아니라 발행 시기 같은 것도 위조를 합니다.   그 책이 '진짜 발행된 시기' 에는 이미 알려져 있던 사실이지만 그 책이 주장하는 '발행시기' 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을 기록하여 이 책이 마치 진짜 그 책이 주장하는 '발행 시기'에 발행되었고 진실을 담고 있는 것 - 또는 미래를 기록하고 있는 것 - 처럼 꾸미기 위한 것이지요.





좀 더 쉽게 예를 들자면, '야. 사실 나는 한 달 전에 박찬호가 선발등판해서 4이닝 3피안타 2실점 1자책으로 호투할 걸 예상 했어'라고 한다면 제게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겠습니까? 경기결과를 다 알고서 마치 예전에 알았던 것처럼 구라를 치는 것이지요.   저게 사실이려면 정말로 '한 달 전에 예상했다'는 증빙이 있어야겠지요.   날조찌라시는 바로 이런 점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유립이 외워서 썼다'는 건 아예 당사자 스스로가 '위서' 라고 자백한 것이거든요.   '후대의 용어들이 사용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유립이 외워서 쓰다가 현대적 용어로 고쳐서 썼을 것' 이란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합니다만...





[필자의 견해]





이 부분도 앞 단락의 [진폐-위폐론] 반박에서 그 논리구조상의 허구성을 밝혀주었으니 더는 언급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지긋지긋한 주장(문화*전세계*민중*영고탑등의 용례 또는 지은이에 대한 각종의 황당한 궤변과 억측들)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앵무새 죽이기-환단고기 위서론 ...반론]라는 장章에서 그런 억지 주장이나 구차스런 판단이 어떻게 틀렸으며 왜 황당한 궤변망상에 입각한 결론인지를 조목조목 밝혔으니 여기에서 재론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꼭 그걸 필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놈의 [박찬호 운운...]까지 떠벌이면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마치 진짜 그 책이 주장하는 “발행 시기”에 발행되었고 진실을 담고 있는 것 - 또는 미래를 기록하고 있는 것 - 처럼 꾸미기 위한 발행 시기 같은 것도 위조를 합니다]라는 억지 주장에 대해서는 필자도 그동안 수차에 걸쳐서 반론을 제시해 주었지만 여전히 황소고집이니 다른 각도에서 본 견해를 들어 다시금 쓴 소리 한마디를 안 할 수가 없군요.





[환단고기의 저본에 대한 저술시기를 예측할 수 있는 기록들]





     1) 嗚呼痛矣向年潛淸輩之邪論陰與百鬼夜行 얼마 전에는 잠이나 청과 같은 무리들의 못된 의견들이 몰래 수많은 귀신들처럼 어두운 세상을 덮었다.   <단군세기 서序>





     ▶ 행촌 이암 선생이 필사한 시기(공민왕)보다 오래지 않은 시점의 사건(오잠吳潛과 유청신柳淸臣의 행적)이었음을 잘 묘사해주는 부분이다.





     2) 今外人干涉之政去益滋甚讓位重祚任渠弄擅如我大臣者徒束手而無策何也國無史而形失魂之故也一大臣之能姑無可求之爲言...지금 다른 나라사람들이 간섭하는 정치는 갈수록 심해져서 임금을 바꾸고 다시 앉히기도 하며 대신을 마음대로 임명하기도 하는 등 멋대로 설쳐대고 있어도 나와 같은 나라의 기둥 되는 신하라는 사람들은 손을 맞잡고 앉아만 있을 뿐 그 대책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바로 나라에 역사가 없으니 모습은 있어도 그 얼이 없어졌기 때문이라.   한 벼슬아치의 힘으로는 조금도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단군세기 서>





     ▶ 중조(重祚-다시 앉히기도)라고 하여 이암 선생이 계실 무렵을 전후한 사정(몽골에 의한 중조와 이후 공민왕 이전까지의 왕위 교체 등)을 알려주어 그의 필사본임을 추정할 수 있는 시대적인 사건들을 일견一見하게 해준다.





     3) 故 狩獵採伐之外 曾無險陂 [降至數千載之後] 而世局已變 仲國者 西土之寶庫也 沃野千里 風氣恢暢 我桓族之分遷該域者 垂涎而轉進 土着之民 亦湊集而萃會於是焉 黨同讐異 而干戈胥動 此實萬古爭戰之始也 


         그러므로 사냥하고 나무를 베는 일 외엔 일찍이 험상궂게 일그러질 없더니 천년의 세월을 셀 수 있게 되자 시국은 이미 변하여 중국은 서양인들이 노리는 보물창고가 되어 천리 기름진 평야에 바람만 널리 마구 분다.   우리 한족 가운데 그 지역에 나뉘어 옮겨간 족속들은 침을 흘리며 이리저리 굴러 전전하고 토착의 백성들도 역시 마구 휩쓸려 모여들었다.   여기에서 어찌 같은 집안 식구들끼리 원수를 달리하고 창칼의 움직임을 노릴 손가?  이야말로 실로 만고의 전쟁의 시초더라.   <태백일사 신시본기>





     ▶ 이맥이 집필하던 무렵을 [천년의 세월 이후...]라고 정확히 지적함으로서 저작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준다.





     4) 世傳 牧隱李穡 休崖范世東 皆有天符經註解云 而今不見 今時俗 雖一字之書 不合於程朱則 衆矢蝟集 儒鋒方襄 其欲傳天經神誥之訓 豈容易得論哉 세상에 전하는바 목은 이색과 휴애 범세동은 모두 천부경을 주해하였다고 하는데 그렇지만 지금은 볼 수 없다.   지금의 풍속은 한자(一字)라 하더라도 정주程朱에 합치지 않으면 뭇 화살의 집중적인 비난을 받을 정도로 儒家의 예봉은 바야흐로 번득거린다.   저 천경과 신고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여도 어찌 쉽사리 논할 수 있으리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 <이맥> 선생이 살아계실 무렵의 학문적 풍토(정주程朱-儒學을 의미-의 예봉*중시衆矢의 위집蝟集-고슴도치 털처럼 많이 한군데로 모여들다- 등)를 분명하게 적시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진대 저작 시기가 언제인지를 짐작케 해주는 구절이라 할 수 있겠다.





[악질식민빠의 주장 - 단락 4]





위폐로 비유하자면 - '실은 이거 진짜 돈인데 햇볕을 받고 비를 맞은 후에 세탁기에 돌리니 꼭 복사기로 복사한 것처럼 되었을 뿐이야. 일련번호도 우연의 일치로 다른 것하고 같아진거고' - 같은 얘기가 됩니다.(돈 갖고 이러면 100% 처벌받습니다. ) 물론 위서라고 해서 사료적 가치가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진폐가 사라지고 '진폐가 존재하던 시기'의 위폐가 남아서 전해진다면 위폐로부터 그 당시의 진폐의 모습을 재구성할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진폐가 이미 사라진 후에 '그때의 진폐는 이렇게 생겼을 것' 이라면서 만든 위폐로부터 어떻게 진폐의 모습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날조찌라시는 후자에 해당합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위서-진서의 논쟁은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학계에는 날조찌라시가 위서라는 점에는 아무 의문이 없으며 일각에서 주장하는 진서론은 자신이 무엇을 주장하는 건지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날조찌라시는 진서 중에 진서다!' 라거나 '모든 사서는 위서다!' 라는 분들은 사실 역사를 연구하는 학부생 1학년도 비웃는 무개념 삽질 하실 게 아니라 병원을 찾으셔야 합니다.





더 간단 4자 요약 : 역사범죄





ps. 아무리 존대를 써도 제 비루한 인품은 숨길 수가 없는 것이지요.





[필자의 견해]





이제 나머지는 모두 핵심이 빠져버린 잡티일 뿐이니 구태여 더 반론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젠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듣기도 지겨우니까 【물론 위서라고 해서 사료적 가치가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같은 허망한 소리는 그만 했으면 한다.    [악질식민빠-아니 지금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空巢 munbba.egloos.com으로 고친]가 결말로 맺은 주장들은 당연히 이렇게 고쳐져야 옳은 답이 되기 때문이다.





□  악질식민빠 주장





- 진폐가 사라지고 '진폐가 존재하던 시기'의 위폐가 남아서 전해진다면 위폐로부터 그 당시의 진폐의 모습을 재구성할 수가 있겠지요.


- 하지만 진폐가 이미 사라진 후에 '그때의 진폐는 이렇게 생겼을 것' 이라면서 만든 위폐로부터 어떻게 진폐의 모습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날조찌라시는 후자에 해당합니다.


- 간단히 요약하자면 위서-진서의 논쟁은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  필자 수정





- 진폐*위폐가 아니라 그동안 사학계를 지배하던 『명목화폐 - 관리통화제 화폐』가 사라지고 이 화폐가 존재하기 전부터 지속적으로 통화체계의 기반을 만들어 왔던 시기의 『실질화폐 - 금본위제 화폐』가 남아서 전해진다면 물론 분명히 그리고 가장 원형에 가깝게 그 당시의 진정한 가치등가교환인 화폐경제의 전형적인 모습을 재구성할 수가 있겠지요.


- 하지만 실질화폐가 이미 사라진 후에 “그때의 화폐는 이렇게 생겼을 것” 이라면서 다른 의도를 가지고 만든 명목화폐의 그림자로부터는 진실한 화폐가치나 등가교환의 모습을 전혀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악질식민빠]의 [진폐-위폐론}이라는 비유는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 따라서 결론적으로 간단히 요약하자면 [위서-진서의 논쟁]은 단지 기술적인 그리고 형식적인 트집 잡기나 초점 흐리기 혹은 물 타기가 아니라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서술 내용에 대한 정당성 비교분석과 교차검증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첨언할 것은 그리고 현재 [부일사대 모화론적인 식민사학계]에서는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점에 아무런 의문조차 품지 않고 오로지 한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이에 대하여 비판적인 안목으로 반론을 제시하는 진서론자들의 충언(忠言)에 아예 두 귀를 꽉 막고 자신이 무엇을 주장하는 건지도 전혀 모르고 있는 난독증세까지 겹쳐 있다는 것입니다.   “『환단고기』는 단연코 위서이며 우리들이 맹종하여 신봉하는 두계학파의 [사대모화적 역사관]만이 오직 진실로서 일말의 의문을 품을 여지조차 없다”라는 억지에 [민족사학진영]에서는 “그렇게 지엽적인 문제를 트집으로 삼아 물고 들어지면서 위서논리의 근거로 삼는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서는 위서라는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잖은 고언(苦言-쓴 한마디 말)을 해주고 있는 것이지 결코 『모든 사서는 위서다!』라고 경솔하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런 따끔한 충고조차 외면하는 분들은 사실 역사를 연구하는 학부생 1학년도 비웃을 무 개념 삽질만 하실 게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종합병원을 찾으셔서 난독증은 물론 시력과 청각치료도 겸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필자도 더 확실한 4자 요약을 해드리지요  : 궤변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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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무새 죽이기-보론】 『악질식민빠』의 “위서僞書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을 수 있다”...반론[3]  궤변망상학의 알량한 떡밥  2009/12/26 13:06


 http://blog.naver.com/nero1003/70076654850






4) 환단고기의 재발간





이유립 선생은 1979년『환단고기』를 공개하기 12년 전인 1967년부터『커발한』지에 『환단고기』 일부를 공개하였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커발한』지에 계속 연재되다가 『환단고기』전체가 공개되기 시작한 것은 1975년의 일이었다.   역시 『커발한』지에 연재된 것인데 그 사이에 『환단고기』에 대한 교정등 정리 작업이 진행되다가 이 해에 끝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역시 세인의 이목을 끌지 못하였고 1979년 단행본으로 공개되었을 때도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하면 1967년 제1단계로『환단휘기桓檀彙記』라는 이름으로『커발한』지(제8호)에 「태백유사」(뒤에 「태백일사」로 개칭)*「진역고기」*그리고「규원사화」「단군세기」「진단유기」 「북부여기」등이 공개되었고 제2단계로 1975년 9월 1일자『커발한』19호에 선천 계연수편 『환단고기』라 하여 책 전체를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이 연재가 언제 끝났던 것인지 잘은 몰라도 아마 1979년에 단행본 간행으로 이어지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환단고기』가 갑자기 주목받게 되는 때는 1982년 일본에서 일역판이 발간된 뒤였다.   그 뒤 번역본이 나오면서 눈길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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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가림토는 권덕규를 인용했다는 주장





이 대목에 대하여는 필자의 [환단고기 비판에 대한 반론의 가림토 부분]에서 이미 세세히 피력하였으며 나중에 별도의 장章을 빌어 다시 한번 언급할 것이다.





     - 아마도 [악질식민빠]는 <최현배>선생이 「단군께서 나라를 세운 이래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4천년 동안 글자의 창제가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대한 근거로서 <권덕규>의 고증을 들어 「정음 이전에도 분명히 글자가 존재하여 단군 성조로부터 부여*부여에서 고구려로 또 백제와 발해로까지 전승되었으며 남방에서는 신라에서 고려까지 내려왔음」을 거론하였던 기록을 말하는 듯 하다.


     - 하지만 그 역시 추정만 하였던 가림다의 유래와 변천*발달 과정에 대한 가장 상세하고 가치 있는 기록은 [환단고기] <단군세기>와 <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P 241부터>에 고스란히 기술되어있다.





     5) 세계관은 조선유기와 규원사화를 베꼈다는 부분





이 부분도 이미 필자가 [규원사화에 대한 비판-반론]에서 충분하게 언급하였으니 재고再考의 가치조차 없는 잡소리에 불과하다.   하기야 같거나 비슷한 저본에서 유래한 그러나 각기 다른 경로로 입수한 사료에 의해 필사되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망발이니 궤변과 망상만이 주장의 대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6) 그리고 사상은 최동과 M선생의(그리고 한암당이 일제시대로부터 간직해왔을) 동문동조론적 대아시아주의를 인용했다는 주장





이 항목은 뒤에 나오는 단락에서 되풀이하여 언급한 [대아시아주의] 문제와 동어반복이 되므로 그 부분에 가서 한꺼번에 논평을 하겠다.





     7) 하긴, 한암당의 트레이드마크인 '따무르자' 마저도 정인보를 베꼈다는 부분





이유립 선생은 처음부터 [부일사대 모화관]의 교묘한 이론적 표출인 <삼한정통론>을 따르지 않는 입장에서 [환단고기]의 편집체계와 기술방식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고조선-부여-고구려-대진국-고려국>으로 이어지는 [대조선민족 공동체론]을 일관성 있게 주장한다.   따라서 이런 이론적 귀결로서 당연하게 [다물주의]가 그 중심 테마로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런 사조思潮는 일제시대 서북학회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민족운동과 결합하여 우리 강토를 그동안의 편협하였던 유가주의 사관인 반도적 <삼한일통론>에서 과감히 벗어나 우리 민족사임에도 불구하고 관심권에서 벗어나 있던 만몽滿蒙지역까지 확산시키는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된다.  





다시 강조하자면 이런 과정에서 애국적인 견지를 고수하였던 그 무렵의 우국지사나 역사학자들은 하나 같이 [다물주의]를 <대동이공동체와 민족자주정신의 구현과 회복>의 핵심 고리로 인식하고 즐겨 인용하였다.   박은식*신채호*최남선*정인보 선생을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였던 역사의식이었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부일사대모화론]적인 [식민사학자]들과는 전혀 무관한 별개의 인식이지만...그러면 그 시대의 민족사학자들이 어떤 역사관을 가졌으며 어떤 민족적인 사고를 공유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백암 박은식]





나라가 기울어져 가는 것은 국민의 역사의식이 절대로 빈곤하고 민족의 자부심이 정립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믿고 그것을 바로 해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그 길은 겨레의 얼을 개발*발전시키며 민족혼을 주체적으로 정립하여 떳떳하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 견지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어 그는 <서우학회>도 만들어 기관지인 <서우>지의 주간 편집자로서 그 뒤 [서북학회]로 발전되자 <서북학회월보>의 책임자로서 많은 활동을 하다가 일제의 감시를 벗어나려고 1911년경 압록강을 도강하였다.  





바로 그곳이 고구려의 옛 땅이며 발해의 발원지임을 확인하고 본격적인 민족사학 복원을 위한 우리고대사를 새로 쓰기 시작하면서 민족사적 염원이 가득한 필봉을 휘둘렀다(동명왕일기*조선고대사고*명림답부전*천개소문전*발해태조건국지*몽배금태조*단조사고*안중근의사전 등 과거의 영광과 웅장한 기상을 흠모하는 대동사관과 만한사관을 대표하는 수십 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한 말들이 아직도 많은 역사연구가들의 金言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는 비로소 내 나라의 역사가 이처럼 위대하고 자랑스럽다는 걸 가슴 깊이 느꼈다.   이런 민족사를 실증적인 방법으로서 역사의 현장에서 연구 집필하게 되니 그 감격을 어찌 다 피력할 수 있겠느냐.   여기서 내가 독립운동을 직접 펼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라고 감격어린 말로 애국적 민족관을 피력하였다.   그 속에는 서간도는 물론 서북만주와 요동평야가 과거 전부 우리의 영토였음을 증명함과 아울러 그곳에서 민족문화를 처음으로 이룩하였음을 천명하여 구토舊土를 그리워하며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는 [다물]의 강한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이토록 그의 저술에서는 발해와 고구려사가 가지는 한민족 정통사로서의 위상을 명쾌히 밝혀주고 있다.   이는 그가 3.1운동 기념사에서 “민족 조상의 내력을 알지 못하면 타민족에게 동화 된다”라고 말한 대목에서도 직접 감지되며 다음과 같이 재삼 강조했던 고언苦言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그런 광활한 영토를 상실하였으므로 지금의 우리 인구가 1억 이상이 될 것을 겨우 2천만에 그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자원이 없는 나라는 사람이 곧 귀한 인적 자원임을 직시해야한다.” [출처] 민족 사학자 백암 박은식





[위당 정인보]





신채호 선생과 함께 민족주의 사학을 확립한 정인보 선생의 역사학적*국문학적*한문학적 수많은 업적들은 선생이 납북이 된 이후로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 가고 있다.





그의 저술과 기고 가운데에서 일관되게 표출되고 있던 위대한 한민족의 시원과 웅대한 역사 창조 및 발전양태에 대한 인식은 <조선사연구>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 책은 그가 일생의 집념으로 밝혀내려 하였던 진취적이고 위대한 동이 역사를 탄생시킨 조선 민족의 <얼>에 대한 존재와 향수를 알려준다.    즉 직접적으로 언급은 안했지만 이 시대 민족사학가들의 뜨거운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잠재해 있던 [다물]의 이념이었다.





이런 사실은 이번에 모처럼 출간된 [조선사 연구]의 주요 목차를 들여다보면 단번에 알아차리게 된다(『삼국유사』기록에 사실 부분이 있다*고조선의 큰 줄기*고조선의 강역은 넓었고 고조선인은 진취적이었다*고조선을 계승한 여러 나라들*고조선인의 절개와 기상*고조선인은 강인하였다 등- 즉 위당 사학의 핵심은 단군연구이며 그 근원적인 민족정신은 단군부터 시작되는 5,000년 조선의 얼이다)





※ 사실 우리 민족의 얼을 단군조선에서 찾은 위당 정인보의 상고사 연구가 지금까지 소홀히 다루어진 가장 큰 이유로는 한문 문장이 너무 난해하다거나 사학 연구 방법론에 대한 이해 부족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펴낸 [정인보의 조선사연구](서원)는 위당의 상고사 연구를 일부나마 알기 쉬운 우리말로 쉽게 풀어쓴 좋은 책이다.





이 책은 먼저, “조선의 시조는 단군이시니 단군은 신이 아니요 인간이시다”란 말로 시작한다.   위당은 <삼국유사>를 읽되 신화 부분과 사실 부분을 엄격히 구분해서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예컨대 `웅녀가 신단수 아래서 아이 낳기를 빌자 환웅이 사람으로 변해 혼인하여 아이를 낳으니…' 따위의 믿기 어려운 신화 구절이 사실과 뒤섞여 읽는 이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고 지적해놓았다.   다시 말하자면, “단군은 신이 아니라 인간”인데도 황당한 구절을 끼워 넣어 신화화했다는 지적이다.





   - 이어 단군의 생존 연대와 고조선의 도읍지 문제를 우리말의 어원과 문헌을 비교하면서 잘못 알려진 기록들을 바로잡고 있다.   이에 따르면 고조선은 동북삼성을 포함한 거대한 지역으로 중국 본토와 어깨를 겨룰 정도의 땅이 넓은 군사국가였다.





사실 단군의 실체와 관련된 논란의 상당 부분은 신화냐? 아니냐? 의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푸는 열쇠는 문헌상의 기록인데 문제는 5천년전의 역사가 제대로 전해졌을 리가 없다는 데 있다.   여기에서 위당은 독특한 사학 방법론을 제시한다.





단순한 문헌고증학 위주의 연구방법을 초월하여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 민속학적 자료를 함께 연구하는 [서속일단書俗一團]이라는 방법이다.   역사 연구의 기본은 문헌고증과 실증이지만 눈에 보이는 자료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뜻도 있는 듯하다(이 같은 방법론에 대한 후학들의 몰이해가 위당의 연구를 소홀히 하는 원인이 되었다-편역자 박성수).





[단재 신채호]





더 이상 말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익히 알려진 만한사관의 선구자이며 민족사관의 태두이다.   그의 [조선상고사] 곳곳에 기술된 위대한 우리민족의 기상과 광활한 대조선민족 공동체의 강역 추정 속에 [다물주의]가 깊숙하게 스며있다.   이에 대한 평가는 다른 여러 민족사학자들의 평설評說로서 대신한다.





...그는 그 술사述史의 목적을 자서自序하되 [조선상고사] 제1편 총론 <조선사의 범위>에서...표현한 것만으로도 그의 史家로서의 포부와 學的 태도의 면모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安民世   조선사학의 선구자 신단재>





...단재는 史家이다.   그는 사학자로 고증에 깊어서 세속적인 사관을 뒤집어 놓았다.   그의 인간적 성격과 학자적 양심에서 귀착지은 독특한 역사관을 가지었다.   非我를 이긴 我만이 올바른 역사관의 전개를 이룩할 수 있다는...한민족의 흥망은 그 민족이 지니는 사상적 결탁結託에 달려 있다고 단정하고 한민족의 불행한 과거는...<백낙준白樂濬   근대한국정신과 사상의 선각자>





단재선생은 식민지사회의 보잘것없는 역사로서 왜곡된 한국사의 서술을 바로잡으려는데 일련의 한국 古史에 관한 글자를 남기게 되었다...1948년 <조선상고사>의 총론에서 가장 선구적인 한국사 연구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실례로) 고구려의 종교*예술*경제력 등의 여하如何가 안전眼前에 활현活現하여 당지當地에 집안현의 일람一覽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독萬讀함보다 낫다는 단안을 내렸다.   <홍이섭洪以燮   我의 인식 투철한 정신사>





일본학자들이 부인하려고 애썼던 고조선의 역사적 성격을 이해함에 있어서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한 점이 단재의 커다란 공헌이었으나...그가 제시한 고조선의 지리경역地理境域에 관한 연구는 고조선을 이해하는데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경역론境域論과 비교할 때 커다란 방법론적 전환을 본 수확이었다.   (그동안 조선 학자들은) 한국민족의 이동경로를 생각하지 않아 이런 결함을 깨달은 단재는 고조선 관계의 사료를 종합하여 검토하였다.   <김철준金哲埈   근대사학 성립의 기초>





[육당 최남선]





역사관의 정수는 바로 [불함문화론]이다.   그가 1925년 이 책을 구태여 일본어로 펴낸 의도는 우리 민족사의 재인식 대상을 주로 일본인들에게 촛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한민족의 웅대한 문명과 찬란한 문화의 당당한 시원을 적나라하게 표출한 저서인데 여기에서 [불함]은 신채호나 안제홍 선생도 모두 공유하고 있던 [밝음*하늘*광명을 섬기는 천손 민족]의 문화라는 의미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단군으로 대표되는 [불함문화]가 조선에서부터 시원되어 고대 중국과 일본 문화 형성은 물론 유라시아 전역에 확산되었다는 거대한 담론으로 그 이면엔 이런 영광된 역사를 간직한 한민족의 위대성과 아울러 이런 민족정기의 맥을 되살려야 한다는 [다물정신]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 [다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 소개] ************





【환단고기 기록】





癸亥春正月高鄒牟亦以天帝之子繼北夫餘而興復檀君舊章詞解慕漱爲太祖始建元爲多勿是爲高句麗始組也   <환단고기 삼성기전 상>





계해 년에 이르러 봄철 정월에 역시 천제의 아들인 고추모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되찾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다물]이라 하니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





[필자 보주補註]  기록의 취지나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로 자부한 북부여를 이어받아 단군의 옛 법을 찾자는 국가 이념의 상징으로 [다물]을 연호로 삼아 고구려를 건국하고 있음이 감지된다.  즉 <고조선의 옛 법>이란 대조선민족의 강토를 회복하고 대동이 공동체를 다시 일으킨다는 민족적 이상의 실현을 담은 것이다.





熊族之中有檀國最盛王儉亦自天而降來御于不咸之山國人共立爲檀君是謂檀君王儉也生而至神兼聖圓滿統合九桓三韓管境復神市舊規天下大治擧世視同天神自是崇報之禮永世不替者也    <환단고기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웅족 가운데 단국이 있어 가장 강성했다.   왕검 역시 하늘에서 내려와서 불함산에 사시니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받들어 단군으로 모시어 이를 단군왕검이라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히 신묘하고 성스러워 구한의 삼한관경을 모두 통합하였다.   신시의 옛 규칙을 회복하니 천하는 크게 다스려져서 온 세상이 그를 천신과 같다고 보았다.   이때부터 숭보의 예는 영세토록 바뀌지 않았다.




[필자 보주補註]  기록 내용을 보건대 신시 말기에 혼란을 극복하고 두드러지게 위엄을 떨친 단군 왕검씨가 다시 神市의 옛 규칙을 회복함으로서 舊 강역을 이어받았거나 회복하였음을 알게 해준다.   여기에서도 [신시의 옛 규칙]이란 문구가 동일하게 언급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다물]의 의미와 연원을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乙密 安臧帝時 選爲瑋衣 有功於國 本乙素之後也 居家讀書習射 歌詠三神 納徒修鍊 義勇奉公 一世瑋衣 其徒三千 所到雲集 齊唱多勿興邦之歌 因此 可鼓其捨身全義之風者耳  『先去者爲法兮 後來爲上...多勿其興邦 自存故 處無爲之事 興邦故 行不言之敎


眞命之大生...惟民之所義 乃國爲重兮 無國我何生 國重故 民有物而爲福 我生故 國有魂而爲德...』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을밀은 안장제 때 뽑혀 조의가 되고 나라에 공이 있었는데 본래 을소의 후손이다.   집에서 책을 읽고 활쏘기를 배우며 삼신을 노래하고 무리를 모아 수련하니 그 옳음과 용기에 공으로 봉해졌다.   일세의 조의로서 그의 무리는 3000이었으니 가는 곳마다 구름처럼 모여서 [다물흥방]의 노래를 제창했다.   『지나간 것은 법이 되고 뒤에 오는 것은 위가 되네...다물은 나라를 일으킴이라 스스로 있기 때문에 티 없이 일을 하고 나라를 일으켰기 때문에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였지.  참된 천명의 큼이여...백성의 옳은 바는 나라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 나라 없이 나라는 건 어떻게 생겼을 것인가?  나라가 소중하기 때문에 백성은 사물이 있어 복을 누리고 내가 있기 때문에 나라엔 혼이 있어 덕을 누린다네...』





[필자 보주補註]  기록으로 보아 [다물의 이념]이 고구려 말까지도 여전히 전승되어 조의皂衣 계층을 비롯한 무사단들에게는 하나의 국가흥성을 위한 행동준칙으로서 깊이 각인되어 있음을 알게 해준다.   노랫말 가운데 의미심장한 부분은 <지나간 것은 법이 된다-이는 앞의 기록 중 옛 조상의 업業을 이어받는 것을 “단군의 옛 법을 되찾고” 나  “신시의 옛 규칙을 회복하니”라고 기술한 까닭과 이어지는 부분이다>와 <다물은 나라를 일으킴이라-옛 조선의 땅을 회복함이 곧 나라의 흥성함이요 이는 자신들의 참된 천명이라는 굳은 의식> 그리고 <백성의 옳은 바는-나라 사랑은 나라의 보존과 이어지니 스스로 국혼을 지키는 주체성을 간직하자>는 구절이다. 





朝代記 曰...平壤城陷落 時 振國將軍大仲象 守西鴨綠河 聞變 遂率衆走險路...至東麰山而據 堅壁自保 稱國後高句麗 建元重光...惟以復舊土爲己任 重光三十二年五月崩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조대기에서 말한다...평양성 함락 때 진국장군 대중상은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변을 듣고 마침내 무리를 이끌어 험한 길을 달려...동쪽으로 동모산에 이르러 웅거했다.   성벽을 굳게 하여 스스로를 보존하며 나라를 후고구려라 칭하고 기원을 중광이라 하였다.   다만 옛 땅을 회복함을 본연의 임무로 삼다가 중광 32년 5월 붕어하였다.





[필자 보주補註] 이 기록에서도 뚜렷한 현실적 목표로서 <母國인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重光]과 <고구려의 영역을 되찾자>는 [다물]의 정신이 고스란히 전수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역사적 맥락을 관통하면서 연연히 유전되어온 [나라의 얼]로서 도도히 흐르고 있던 [민족혼]의 전수를 접한 느낌이다.   이는 [태백일사 고려국본기]에 기술된 것(소손녕과 서희의 담판*윤관의 선춘령 회복에 대한 집념*윤언이의 자해표*후암 이존비의 상주문 등)처럼 고려조에 이르기까지 [다물]의 기백을 잃지 않았다고 [환단고기]는 조리 있고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준다.








【다른 史書의 기록】





宋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 封宋讓爲主 麗語爲復舊土爲多勿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편>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자 그곳을 다물도로 삼고 송양을 주로 봉했다.  다물은 옛 땅을 되찾는다(復舊土)는 뜻의 고구려 말이다.





麗語謂復舊土爲多勿   <司馬光  資治通鑑>





구려말로 다물은 옛 땅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 『국어대사전』(이희승편  1981)에서는 다물[명]<옛 혹은 옛 땅을 회복함. ★ 麗語謂復舊土爲多勿<통감16>이라고 하였다.








【기타 의견들】





[구길수]





[ㄷ]의 의미는 땅 이다.   또한 [다=땅(다地 훈몽자회] [물水=합쳐지다-지상의 물질 중에 물은 항상 합쳐지는 성질이 있다]이며 [물다-윗니와 아랫니가 합쳐지다. 깨물다] 또는 [입 다물다-윗입술과 아랫입술이 합쳐지다]의 용례로 보아 물다(깨물다)와 입술이 합쳐지는 <다물다>는 모두 남의 것이 합쳐지는 게 아니라 내 것이 합쳐지는 것이다.   즉 외침이 아니라 [고토 회복]이다.   그러므로 [다물]은 떨어져 있던 내 땅이 합쳐진다는 말이다. 




[한암당 이유립]





[다]는 요즘도 쓰는 우리말<땅*터*하늘 천 따 지의 따>등과 연결되는 말로 <땅>을 뜻하는 고구려 말이며 [물]은 <되물린다*무른다*물린다>라는 의미의 고구려 말이라고 하여 김부식의 해석을 보완하였다.   따라서 <다물 운동>을 [따무르자 운동]이라고 하였고 그런 사상을 [따무르자 주의]라고 주장한다. 

[박 현]





[다]는 <土의 음이 토인 것처럼 터*땅의 의미>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백제어에서도 보이는 [다물계 어형語形]이다.   다시 말해서 고구려에서 갈라진 백제는 해상왕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새로 얻은 영토에 대부분 [담로]를 파견했는데 받침을 극히 싫어하는 북방어의 속성상 [다무로]로 읽힌다는 점이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단서를 우리에게 시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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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유립] 선생도 기본적인 개념과 대전제로서 [환단고기]에 기록된 [다물]의 다양한 의미전환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진국-발해]에 이르기까지 연연히 이어져 내려오면서 [대조선민족 공동체]의 복원을 상징하던 민족사적인 이념이었음을 정확히 인식하였기에 우리 민족의 정통 이념과 민족혼을 강조하기 위해 [따무르자-다물주의]를 키워드로 삼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악질식민빠]는 이렇게나마 지켜 현존하여 오는 귀중한 문헌을 놓고도 그 내면에 각인된 진실과 참된 민족사적 의미와 연연히 흐르고 있는 민족정신들을 밝히려 한다기보다는 지엽적인 공통점만 찾아 고의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누대(累代)에 걸쳐 민족의 사유(思惟)와 역사적인 관념으로 고착되어진 그래서 어느 시대 어느 왕조를 경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공통점을 내포하고 있는 민족의식의 공유 가치와 핵심적 내용까지 모두 부정하려 드는 경망함을 보입니다.





물론 [어느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약간의 가필된 사료를 위작이라고 한다면 지구상에 위작 아닌 사료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일부 술어와 연대 상의 고증문제가 제기될 수는 있으나 그 내용의 핵심인 사료검토에 있어서  1) 韓민족사의 명확한 뿌리와 정체성을 밝힐 수 있는 시원사의 전개와 한민족사의 국통國統에 대한 발견 가능성  2) 한韓문화의 근원에 관한 심층구조와 흐름을 유추할 수 있는 근원적 사료가치성 으로서 인정하는 데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음을 감히 단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항에 이르러서는





[악질식민빠]가 언급한【태백교와 철성 이씨*독립운동가와 민족으로의 위장*대종교에 대한 경쟁의식-이는 나중에 별도 장章으로 언급할 것입니다*삭주 관련 내용 같은 것들】은 이미 필자가 다른 글을 통하여(이유립에 대한 비판의 반론 글들을 클릭하여 참고하기 바랍니다)충분하게 설명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단락에서는 [악질식민빠]가 한데 뭉뚱그려 [물타기]를 시도한 다음 본말을 전도시킨 <대아시아주의>와 [환단고기]의 기록에서 연연하게 살아 꿈틀거리는 <대동이공동체 혹은 대조선민족공동체>가 어떻게 다른지? 그래서 훨씬 후에 해괴한 이론으로 정립되어 나타나 일제의 침략정책을 대변하던 <대아시아주의>가 어떻게 [환단고기]의 진실되고 역사적인 연원을 가진 내용을 변곡(變曲)시켰는지 그 진면목을 보여드리겠습니다.





□  민족주의 사학계의 대조선민족공동체 의식





  가.  육당 최남선





     - 동북아시아 문화권이라는 큰 틀에서 한민족 문명의 연원인 한반도를 중심지로 단정한다.   즉 흑해-파미르 고원 북동지인 천산산맥-알타이 산맥-야브로노이 산맥 남쪽-흥안령 산맥-태행산맥 동쪽 땅과 일본*유구를 포함하는 지역이 커다란 민족문화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주장이다.


     - 중국과 인도의 두 남방문화에 대응하는 동방문화의 북계를 이루는 불함문화권으로서 공통적인 민족문화 속성과 민속 양태는 근원이 조선 역사상의 단군과 부루로 이어진 가르침인 풍류도에 있다고 말한다.


     - 결론적으로 서쪽으로는 흑해에서 동방의 한반도와 일본 열도까지 불함문화권으로 규정하는데 근저에는 이들 지역에 널리 퍼져있던 원시 신앙에 주목한다.   단군 신앙은 그 신앙의 구체적이며 시원 형태의 구현이다.   바로 그 점에서 단군을 조상으로 하는 우리 민족의 불함문화는 동방문화의 중심이고 기원이며 최고의 정점이다.





  나.  단재 신채호




     - [조선상고사] 제1편 총론 제4 사료의 모집과 선택에 대한 상각商榷  제 5)항의 蒙*滿*土 諸族의 언어와 풍속의 연구이니...에서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 피력한 신채호 선생의 의문은 독자들에게 많은 단서를 남겨준다.


     - 고대 아시아의 동부 종족이 1)우랄어족 2)지나어족支那語族 양지兩支로 나뉘었으니 漢族*묘족苗族*요족猺族등은 후자에 속한 자요 조선족*흉노족 등은 전자에 속한 자니 조선족이 분화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고*퉁그스 等族이 되고 흉노족이 천산遷散하여 돌궐*흉아리匈牙利*토이기土耳其*분란芬蘭 等族이 되었나니 금 몽고*만주*토이기*조선 四族사이에 왕왕 동일한 語詞와 物名이 있음은 몽고제국 시대에 피차 관계가 많으므로 받은 영향도 있으려니와 古史를 참고하면 조선이나 흉노의 사이에도 관명*지명*인명이 같은 자가 많으니 上古에 있어서 동일한 語族인 명증明證이니라.   <조선상고사 제2편 수두시대 제1 상고시대 총론 1)항 조선민족의 구별>





이러한 육당 최남선 선생이나 단재 신채호 선생 등 많은 선학先學들이 의문을 품었거나 조심스럽게 확신하였던 대조선 민족의 원류와 혈맥에 대한 해답이 [환단고기]의 아래 기록들을 통하여 명쾌하게 구해지고 있는바 신채호 선생이 애써 밝혀내려고 하였던 [대동이공동체]의 근원과 분화 발전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어느 사서에서조차도 이만큼 상세하며 연원과 발전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언급하지 않았으며 아울러 만몽滿蒙과 그 서부 지역에 걸친 [대동이공동체]의 실체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  환단고기의 대동이공동체(大東夷共同體) 기록





  가.  동이민족의 탄생과 발전





일강동녀동남팔백어흑수백산지지어시환인역이감군거우천계...위지환국...후환웅씨계흥봉천천신지조강우백산흑수지간착자정여정어천평획정지어청구 





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於是桓因亦以監群居于天界...謂之桓國...後桓雄氏繼興奉天神之詔降于白山黑水之間鑿子井女井於天坪劃井地於靑丘 <환단고기 삼성기전三聖紀全 상편上篇>





어느 날인가 동녀동남 800이 흑수백산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한님은 또한 감군으로서 천계에 계시면서...이를 환(한)국이라 하고...뒤에 한웅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로 정했다.





인류지조왈나반초여아만상우지처왈아이사타몽득천신지교이자성혼례칙구환지족개기후야 석유환국...고기운(삼성밀기운)파나류지산하유환인씨지국천해이동지지역칭파나류지국기지광남북오만리동서이만여리총언환국분언비리국양운국구막한국구다천국일군국우루국(일운필나국)객현한국구모액국매구여국(일운직구다국)사납아국선비국(일운시위국혹운통고사국)수밀이국합십이국야천해금왈북해





人類之祖曰那般初與阿曼相遇之處曰阿耳斯它夢得天神之敎而自成婚禮則九桓之族皆其後也 昔有桓國...古記云(三聖密記云)波奈留之山下有桓仁氏之國天海以東之地亦稱波奈留之國其地廣南北五萬里東西二萬餘里摠言桓國分言則卑離國養雲國寇莫汗國句茶川國一羣國虞婁國(一云畢那國)客賢汗國句牟額國賣句餘國(一云稷臼多國)斯納阿國鮮禾卑 國(一稱豕韋國或云通古斯國)須密爾國合十二國也天海今曰北海 <환단고기 삼성기전三聖紀全 하편下篇*태백일사 환국본기>





인류의 조상을 나반이라 한다.    처음 아만과 처음 만난 곳은 아이사타라고 하는데 꿈에 천신의 가르침을 받아서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구환(한)의 무리는 모두가 그의 후손이다.   옛날 환(桓-한)국이 있었나니...고기에 말한다.  '파나류산 밑에 환(한)님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 동쪽의 땅이다.   파나류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그 땅이 넓어 남북이 5만리요 동서가 2만리이니 통틀어 말하면 환(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혹은 필나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혹은 白多國) 사납아국 선비국(혹은 국 통고사국) 수밀이국이니 합해서 12국이다. 천해는 지금의 북해라 한다.





密記注曰蓋馬國一云熊心國在北蓋馬大嶺之北距勾茶國二百里勾茶國舊稱瀆盧國在北蓋馬大嶺之西月漬國在其北五百里稷臼多國或稱賣句餘國舊在五難河後爲瀆盧國所破遂移于金山居之勾茶國本艾蒜所産也艾煎服以治冷蒜燒食以治魔也   <태백일사 환국본기>





<밀기>의 주에서 말한다.   “개마국은 일명 웅심국이라 하니 북개마대령의 북쪽에 있으며 구다국으로부터 거리가 200리이다.   구다국은 옛날에는 독로국이라 칭했고 북개마대령의 서쪽에 있는 나라니라.   월지국은 그 북쪽 500리에 있고, 직구다국 혹은 매구여국은 옛 오난하에 있었으며 뒤에 독로국에 패하여 마침내 금산으로 옮겨 그곳에서 살았다.   구다국은 본래 쑥과 마늘을 산출하던 곳이었다.   쑥은 다려서 복용함으로써 냉을 치료하고 마늘은 불에 구워 먹음으로써 재앙을 다스린다”





시유반고자호기술욕분도이왕청내허지수적재보솔십간십이지지신장여공공유소유묘유수개지삼위산납립동굴이립위군위지제견시위반고가한야시어환웅솔중삼천강우태백산정신단수하위지신시시위환웅천왕야 時有盤固者好奇術欲分道而往請乃許之遂積財寶率十干十二支之神將與共工有巢有苗有燧偕至三危山拉林洞窟而立爲君謂之諸畎是謂盤固可汗也於是桓雄率衆三千降于太白山頂神壇樹下謂之神市是謂桓雄天王也   <환단고기 삼성기전三聖紀全 하편下篇>





때에 반고라는 자가 있어 괴상한 술법일 즐기며 길을 나누어 살기를 청하매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재물과 보물을 꾸리고 십간*십이지의 신장들을 이끌고 공공*유소*유묘*유수와 함께 삼위산의 라림동굴에 이르러 군주가 되니 이를 일러 제견(諸畎)이라하고 그를 반고가한이라 했다.   이에 환(한)웅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밑에 내려오시니 이곳을 신시라 하고 이분을 환(한)웅천왕이라 한다.





자시이후치우천왕벽토지채동철병어산시구환개이삼신위일원지조주소도주관경주책화여중의일귀위화백병지생쌍수위거전자시구환실통우삼한관경지천제자내호왈단군왕검 自是以後蚩尤天王闢土地採銅鐵鍊兵興産時九桓皆以三神爲一源之祖主蘇塗主管境主責禍與衆議一歸爲和白竝智生雙修爲居佺自是九桓悉統于三韓管境之天帝子乃號曰檀君王儉   <환단고기 삼성기전三聖紀全 하편下篇>





이로부터 후에 치우천왕이 땅을 개간하고 구리와 쇠를 캐내서 군대를 조련하고 산업을 일으켰다.   때에 구환(한)은 모두 삼신(하늘*땅*사람)을 모두 한 뿌리의 조상으로 삼고 소도를 관리하고 관경을 관리하며 벌을 다스리는 것 등을 모두 다른 무리와 더불어 의논하고 하나로 뭉쳐 화백하였다.  이에 지혜와 삶을 나란히 닦으면서 온전함을 이루었다.   이때부터 구환(한)은 모조리 삼한에 통솔되고 나라 안의 천제의 아들은 단군이라고 불렀다.








 나.  대동이민족의 분화과정





其後 有號曰檀君王儉 立都阿斯達 今松花江也 始稱國爲朝鮮 三韓 高離 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夫餘 濊與貊 皆其管境也   <태백일사 신시본기>





그 뒤 호를 단군왕검이라 하는 분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시니 지금의 송화강이라.   처음으로 나라를 칭하시어 <조선삼한>이라 하니 고리*시라*고례 남북의 옥저*동북의 부여*예와 맥은 그의 관경이었다.





...今夫究其源 則盖一源之祖也 然 地旣分東西 各據一方 土境逈殊 人煙不通 民知有我而不識有他 故 狩獵採伐之外 曾無險陂 降至數千載之後 而世局已變 仲國者 西土之寶庫也 沃野千里 風氣恢暢 我桓族之分遷該域者 垂涎而轉進 土着之民 亦湊集而萃會於是焉 黨同讐異 而干戈胥動 此實萬古爭戰之始也   <태백일사 신시본기>





...이제 저들의 그 근원을 탐구해 보면 아마도 한 뿌리에서 비롯한 조상일 것인데 땅은 이미 동서로 갈리어 각각 한 구석씩을 차지하였으니 땅은 멀리 떨어져 사람들의 인연은 통하지 않고 백성은 나 있음을 알면서 남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냥하고 나무를 베는 일 외엔 일찍이 험상궂게 일그러질 일 없더니 천년의 세월을 셀 수 있게 되자 시국은 이미 변하여 중국은 서양인들이 노리는 보물창고가 되어 천리 기름진 평야에 바람만 널리 마구 분다.   우리 한족 가운데 그 지역에 나뉘어 옮겨간 족속들은 침을 흘리며 이리저리 굴러 전전하고 토착의 백성들도 역시 마구 휩쓸려 모여들었다.   여기에서 어찌 같은 집안 식구들끼리 원수를 달리하고 창칼의 움직임을 노릴 손가? 이야말로 실로 만고의 전쟁의 시초더라.





盖我桓族 皆出於神市所率三千徒團之帳 後世以降 雖有諸氏之別 實不外於桓檀一源之裔孫也 神市肇降之功悳 當必傳誦而不忘 則先王先民 指其三神古祭之聖地 曰三神山者 亦必矣   <태백일사 신시본기>





대저 우리 환족은 신시가 이끄는 삼천의 무리들의 장막에서 나왔다.   후세 이후로 여러 씨성의 구별의 있다 하지만 실은 환단 한줄기 후예 후손에서 벗어나는 자 없으며 신시에 처음으로 내리신 공덕은 당연히 반드시 전송하여 잊지 말아야할진저!   곧 선왕과 선민들이 그 삼신고제의 성지를 가리켜 삼신산이라 함도 역시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갑진육년녕열양욕살색정천우약수종신극치후사지잉봉기지시위흉노지조 병오팔년강거반제토지어지백특 甲辰六年命列陽褥薩索靖遷于弱水終身棘置後赦之仍封其地是爲 凶奴之祖 丙午八年康居叛帝討之於支伯特 <환단고기 단군세기 제3세 단군 가륵조>





갑진 6년 열양의 욕살 색정에게 명하여 약수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하였다. 뒤에 이를 용서하시고 곧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주상이 되었다.   병오 8년 강거가 반란을 일으켰다. 단제는 이를 지백특에서 정벌하였다.


 


무신십년두지주예읍반명여수기참기추소시모리자시칭기지왈소시모리금전음위우수국야기후손유협야노자도어해상거삼도참칭천왕 戊申十年豆只州濊邑叛命余守己斬其酋素尸毛犁自是稱其地曰素尸毛犁今轉音爲牛首國也其後孫有陜野奴者逃於海上據三島僭稱天王   <환단고기 단군세기 제3세 단군 가륵조>





무신 10년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를 베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일러서 소시모리라고 하다가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이 되다.   그 후손에 협야후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칭했다.




갑신원년봉황제오사달위몽고리한혹왈금몽고족위기후운甲申元年封皇弟烏斯達爲蒙古里汗或曰今蒙古族爲基後云  <환단고기 단군세기 제3세 단군 오사구조>





갑신 원년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으로 봉하였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몽고족이 바로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기미사십년봉황제대심위남선비대인 己未四十年封皇弟代心爲南鮮卑大人  

<환단고기 단군세기 제3세 단군 대음조>


 


기미 40년 단제의 동생 대심을 봉하여 남선비의 대인으로 삼다.








□  일본 제국주의의 변곡된 대아시아주의





일본에서 [아시아주의] 사상이 등장한 것은 서양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침략이 고조된 19세기 말 경부터였다.   즉 원래는 다소 순수하게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공에 대해 혼자만으로는 대항하기 어렵다는 위기의식에서 아시아 전체가 연대하여 맞서자는 논리였다(방위적 내셔널리즘  조군趙軍  大アジア主義と中國  亞紀書房  1997  45P).   그러다가 청일*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그들만이 구미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근대국가임을 근본 핵심 전제로 하여 아시아지역 연대의 맹주로 삼아야 한다는 <일본맹주론>을 중심으로 변용되었다.   다시 말해 얼굴을 바꾼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아시아 침략 이데올로기로서 대아시아 주의(팽창적 내셔널리즘)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초뢰용평初瀨龍平  アジア主義*アジア觀, ノート  北九州大學法政論集 제5권 제1호  북구주대학법학회  1977 ;傳統的右翼 내전양평內田良平の硏究  구주대학출판회  1980   山室信一  일본외교とアジア主義の교착交錯  일본정치학회 編  일본외교におけるアジア主義  岩波書店  1999  31쪽).





즉 1930년대부터 최고조에 달하였던 [대아시아주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역사적 경험과 사고의 산물인 [대조선민족공동체]라는 관념체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한국이나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諸國에 대한 문화적 이해와 동질성을 기반으로 한 민주적 연대를 지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대륙으로부터 구미 세력을 몰아내고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역할에 충실한 것이었다.  





이는 일본주의의 발전으로서의 일본아시아주의 본질적으로 일본주의를 아시아 전역까지 확대하려는 대일본주의에 불과하다.   <토즈카戶塚潤호총윤  ニシポソ․イデオロギー  戶塚潤全集 제2권  경초서방勁草書房  1966  295p>    





두 번째로 [대동이공동체 의식]과 상이한 점은 이런 [팽창적 대아시아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당시 대종교와 민족진영에서 추구하고 있던 탈 유교주의와 사대주의 잔재 청산 및 자주독립과는 전혀 다르게 아시아 연대의 이념으로 유교적 王道主義(平野健一郞․山室信一과 구입무駒込武  식민지제국일본の문화통합  岩波書店  1996)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로 다른 점은 궁극적인 목표가 1932년 일본의 괴뢰국으로 만주국이 성립되면서 건국선언에 노골적으로 국가 시정의 근본목표로 [유교를 존숭하는 왕도주의]의 실현을 선언하여 [동아시아공동체로서 동아연맹]의 결성을 제창하였기 때문이다.   즉 제국주의 절대지배원리로서 왕도주의는 동아시아 전체에 실현되어야할 동양인 공통의 지도원리로 의도되어진 것이다.





※ [동아연맹]의 구상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배경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당시 만주국 승인 문제로 국제연맹에서 탈퇴한 일본이 국제적 고아나 다름없는 고립된 처지에서 기존의 해외 권익과 지위를 지키기 위한 새로운 질서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조직들이 일본 내 극우인사들이 결성한 <대아세아협회>와 만주국 괴뢰집단인 <만주국협화회滿洲國協和會>는 물론 일본 낭인浪人들의 결사체인 흑룡회가 그 선봉을 자임했다(1939. 10. 미야자키宮崎正義의 동아연맹협회 발족)





결국 그 이면에는 제국 일본의 대륙에 대한 노골적인 군사침략의 은폐와 중국 국민당이 항일 이데올로기로 내건 [三民主義]와 북방 최대의 위협세력인 소련의 [공산주의] 기치旗幟에 대항하기 위한 주된 목적이었다는 걸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또한 왕도주의 이념은 일본 유교계를 자극하여 아시아 침략을 유교사상의 측면에서 同化라는 이름으로 적극 뒷받침하는 역할을 끌어내었다. 





아울러 유교 계몽을 내세우며 왕도주의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가운데 아시아주의를 대대적으로 선전해 갔던 단체가 바로 사문회斯文會(회장 소송원영태랑小松原英太郞  유교사상을 통한 천황제와 일본 국체-제국주의-의 수호를 지향한 어용단체  本會の의 취지  사문 제1편 제1호  사문회 1019. 2. 4p)로서 이들은 새로운 민족사조(전통 유교적 지배질서의 탈피와 민족자존과 자주의식 함양)에 의해 궁지에 몰려가던 우리 유학자 및 유교적 지배집단과 결탁하여 [조선유교회]를 설립하는데 적극 힘을 보태게 된다.   그라고 그 목적은 뻔하였다.  





하여튼 이쯤에서 우리는 이런 엉터리 같은 견강부회를 미련 없이 던져버리면서 다음의 사실을 반드시 잊지 말고 기억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1) [환단고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태백일사>를 남긴 <이맥>의 손자가 조선 인종·명종 때 활동한 이방李滂인데 인종 1년인 1545년 국경지방인 평안도 삭주도호부의 부사로 좌천되면서 그곳으로 가솔家率을 이끌며 문적文籍(물론 삼성기전 상 원본도 포함되었다)들을 가지고 내려가 자손을 잇게 된 사실이다.


     2) 해동인물지(海東人物志  성창호  1969)의 <곤坤>권에 등재되어 있는 실존 인물인 <계연수> 선생의 출자가 평안도 선천(신의주 남쪽 서해안에 있는 평북의 군으로 삭주와는 80여km 떨어져 있다)이며 <이기>의 문인으로 백가百家의 책을 섭렵한 다음 마침내 단군세기와 태백일사 등을 필사한다.





※ [환단고기]나 대종교 기본 경전인 [신사기]와 관련된 인물들은 고구려 유적이 많은 중국 집안 근처 韓*中 국경선 부근과 평안도 지역에 주로 살았다.   선천에는 계연수*삭주엔 이유립과 단군세기를 계연수에게 준 이형식*태천엔 삼성기와 단군세기 그리고 북부여기를 계연수에게 제공한 백관묵이 살았고 백두산 근처에서는 나철에게 [신사기] 편찬 자료를 준 백봉의 단군신앙 전승 집단이 살았다.





     3) <계연수> 선생과 <이유립> 선생은 청천강 이북의 평안도(평북)에 살았다.   <계연수> 선생이 환단고기 서문에서 [삼성기전 하와 단군세기]를 줬다고 한 진사 <백관묵>과 북부여기를 받았다고 한 <이형식>도 청천강 이북의 평안도인 태천과 삭주 사람이다(왜 환단고기를 이루는 책들은 평북지방에서만 온존되어 遺傳하여진 것일까?)





※ 고성 이씨 용헌공파 종중의 이영규씨는 말한다.   “조선시대 서울*경기*황해는 말할 것도 없고 평양과 전라*경상*충청까지 한양의 권력이 철저히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 史書 수거령이 내리면 그곳에서는 따르지 않을 재간이 없다.   그러나 평북 지방은 다르다. 그곳은 국경지역인지라 한양漢陽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평북은 귀양도 보내지 않던 곳이니 官家의 영향력이 크지 않아 환단고기 류의 사서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4) 발해가 망하면서 많은 왕족과 군신群臣들이 고려로 망명했는데 유민들의 유입과 정착의 주요 경로가 평안도-황해도 지역이었다.   만주의 수로와 이어지는 압록강을 건너 동쪽의 산세가 서쪽으로 갈빗대처럼 이어진 산맥들을 넘어갈 요로인 추가령지구대를 따라 평안도-평양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끼딝으로 고구려 이후 가장 전래 문적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던 발해의 기록들이 전해지는 경로 지점이 되었다(북애자의 서문에서도 규원사화의 저본인 청평淸平 이명李茗의 진역유기 필사본을 이 지역에서 얻었다고 언급한다)





※ <이유립> 선생이 태어난 삭주엔 압록강이 흐른다.   지금은 수풍댐이 있어 압록강이 넓어졌지만 댐이 있기 전엔 그리 넓지 않았다.   댐이 건설되기 전 삭주 지역의 압록강 폭은 한강으로 흘러드는 중랑천 하구 폭과 비슷했다 한다.   때문에 삭주에서 압록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광개토태왕릉비와 장군총 등 고구려 유적이 많은 중국 길림성의 집안集安 지역을 곧바로 만날 수 있는 아주 편리한 통로이다.   철도나 도로 같은 육상 교통수단이 발달하기 전까지 강은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   강은 배를 만들 수 있게 된 신석기 시대 이래 <고속도로>로서 기능을 해왔다.   발해 유민들은 이곳을 주요 이동로로 삼아 움직였을 것이다.





     5) 대종교는 창교創敎 때부터 서북지역의 활동에 매우 주목했으며 이 지역 서북학회의 중추였던 <박은식>과 <서일>을 적극 영입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1910. 10월 북간도지사와 청산리 시교소 설치*1911. 6월 화룡현 학성촌을 중심으로 한 활발한 포교활동 강화*1914. 5월엔 드디어 백두산 북쪽 기슭인 화룡현 청파호로 총본사를 옮기고 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서로 은연중에 관련성을 가지고 마치 한 줄기처럼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저본을 입수한 경로나 지역들이 거의 동일하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지극히 상호 보합적(保合的)인 유의성을 갖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관된 경향성을 주목해야합니다.








[악질식민빠의 주장 - 단락 3]





위에서 언급한 온정적인 원칙론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환단고기를 '사료'란 측면으로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진서건 위서건 진실을 탐구해 볼 여지가 있다' 고 한 다음, 그 다음 단계의 과정을 외면해버리는 것이지요. 정말로 단순화시키면,「판단은 위서로, 접근은 진서로」





저는 그런 원칙론에서 더 나아가지 않은 온정주의자들에게도 사태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환단고기는 민족사학자들의 사설(史說)에 대한 탐구를 심각하게 교란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역사범죄의 역(域)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필자의 마지막 결론을 겸한 한마디]





아무튼 사건이 일어난 당대에 저술된 1차 사료가 아니라면 가필되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그러한 문헌사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국 고대 사서를 대표하는 [서경書經] [죽서기년竹書紀年]을 비롯한 수많은 고대문헌들이 후세 역사가들에 의해 대량으로 가필이 가해졌음은 이미 청나라 고증가考證家에 의해 밝혀진 역사학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가필이 좀 있다고 사료적 가치까지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헌데 지금까지 언급한 [궤변망상론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료적 가치가 무궁무진한 [환단고기]를 애써 폄하하고 작은 꼬투리를 침소봉대하면서 [사설]이란 측면으로 매도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악질식민빠>도 서두에서는 그럴 듯한 말로 『진서건 위서건 진실을 탐구해 볼 여지가 있다』라고 독자들을 달콤하게 현혹시킨 다음 막상 그 다음 단계에 들어서면 아예 필자와 같은 사료분석 과정을 외면해버리는 것이지요.   말작난이나 트집잡기의 수준을 넘어서서 정말로「처음부터 본질적인 판단은 이미 위서로 그럴듯한 입발림으로는 우리도 모든 접근방법에서 진서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배재하지 않는다. 란 눈속임으로」 하지만 이점을 결코 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물론 사료는 신빙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환단고기]에 대한 연구에 앞서 서지학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학계의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이 [환단고기]의 진정성에 대한 매도나  아니면 이를 빙자하여 사료 채택을 무기한 유보시키는 구실로 오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한 발상은 이미 우리 현대사의 큰 흐름이 되어버린 상고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도외시하게 만드는 크나큰 자가당착임과 동시에 그 자체로서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하여 역사학계 스스로가 설자리를 잃고 마는 지름길입니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이런 안타까운 현상들이 자기들이 만들고 고집하는 원칙론에서 단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은 [부일사대모화론자]들에게도 사태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태도가 다른 현명한 역사학도나 독자들의 [환단고기]에 대한 진실한 탐구를 심각하게 교란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역사범죄의 중심에 서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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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무새 죽이기-보론】 『악질식민빠』의 “위서僞書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을 수 있다”...반론[2]  궤변망상학의 알량한 떡밥  2009/12/26 13:02


 http://blog.naver.com/nero1003/70076654630









※ 여기에서도 고려사(권122 열전 35 김위제전金謂磾傳)의 기록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 고려사는 신지비사의 서문이라고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신지비사에서 말하기를 저울추*저울 그릇*저울대*저울 접시끈과 같은 모양의 것이 오덕五德의 땅이요 백아강을 저울 대접으로 삼으면 70국이 항복해 오고 조공을 받으리라. 하고 그 지덕地德에 힘입어서...라 하였으니 이는 저울로서 (眞*莫*番의) 三京을 비유함이다.   저울 대접은 머리요 추는 꼬리요 저울대는 제강提綱의 곳이라 운운...』








□ 조선상고사와 환단고기의 삼한-삼조선 비교





신채호 선생이 지나 사서(사기 조선열전*목천자전의 순한*관자의 발조선發朝鮮*대대례大戴禮의 발식신發息愼 등)들을 바탕으로 [삼조선]을 추정한 기록은 [환단고기]에서 우리 민족 도가사서류를 인용한 [삼한-삼조선]의 연원과 변천과정 기술에 견주어 비록 소략한 점이 있지만 내용면에서는 많은 정합整合을 이룬다는 점이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해준다. 





바로 각기 다른 경로와 저본을 빌어 추적한 <고조선>의 실체가 동질성을 가지고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검증 자료로서는 소용이 있지만 필자가 지금부터 교차 분석할 차이점을 분명하게 인식한다면 [악질식민빠]와 같은 <누가 누구의 것을 베꼈다>는 주장은 다시는 되풀이하지 못한다.





[조선상고사 제3편 삼조선 분립시대  제1 삼조선의 총론] 





1)항  삼조선의 명칭의 유래에서





  - 신한*불한*말한을 <辰한*馬한*卞한>이라 하였는데 [환단고기]는 <辰한*慕(馬)한*番한>으로 기록하였다(신조선*불조선*말조선은 眞*莫*番으로 동일한 표기이다).


  - 동일한 신*말*불의 역譯(辰*馬*卞과 眞*莫*番)이 같지 아니한 이유를 남북 이두문의 用字상의 차이나 지나인의 한자음역상漢字音譯上의 우리 이두문 용례와의 상이相異로 본 점이 [환단고기]의 풀이(삼한과 삼조선의 용례를 뚜렷하게 구별한)와는 전혀 다르다.   다시 말해 [환단고기]에서는 한(侯名)과 조선(分朝나 觀境)의 용례를 아주 다른 것으로 구분한다는 점을 적시해주고 있으며 삼한과 삼조선의 용례에 대한 재정립 시기를 명백하게 [신시시대-단군 색불루시대-단군 구물시대]로 구분한다.





※ 신채호 선생은 이런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듯하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고전古典이 결망缺亡하였으므로 삼조선의 유래를 찾을 곳이 없으나 왕왕 지나사에 보이었나니 사기조선열전에..오직 말조선은 지나와는 격원隔遠하므로 사기 이외의 타서에는 보인 것이 없느니라」라고 기술하고 있다.





  - 『삼조선은 곧 삼한이 분립한 뒤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신한의 소통所統은 신조선*말한의 소통은 말조선*불한의 소통은 불조선이라 하였나니』라 하여 동시 병립한 상황으로 판단하는 입장은 위에서 언급한 [환단고기]의 삼한관경변화 추이와는 확연히 다르다.





4)항  삼조선의 분립의 시始에서





  - [조선상고사]는 삼조선의 분립 시기를 <사기>를 인용하여 <全燕時-연의 전성시대>로 보아 전국시대 초반인 BC 4C로 추정하였다(발조선 기록이 있는 전국시대 위서僞書라 단언한 관자*전국시대 인물인 추연鄒衍의 발식신이란 기록이 나온 대대례 참조)   아울러 불조선후 기씨箕氏가 燕의 칭왕稱王을 보고 스스로 왕으로 자칭한 것을 삼조선 분립 시기로 추정하여 BC 323년으로 보았다.   하지만 [환단고기]는 단군 구물(BC 1285)때로 기록하였다.


  - 신채호 선생은 삼조선의 후를 [신조선-대단군왕검의 자손 解씨*불조선-기자箕子의 후손인 箕씨*말조선-先代不明의 韓씨]로 본다.   그러나 [환단고기]에서는 [신조선-색불루*불조선-서우여*말조선-여원홍]으로 아주 다르다.


  - [조선상고사]는 <삼한-삼조선>의 대칭구조로 설명하나 [환단고기]는 [삼한 分朝-웅백다*치두남  BC 2333]-[삼한과 삼조선 병립-단군 구물  BC 1285]-[삼조선 통합 체제-조선侯인 한에서 왕으로  BC 425]로 명확하게 구분하여 기록했다.


  - 신채호 선생은 삼조선 분립의 원인자를 燕과의 동맹을 추진했던 大夫 례禮로 보고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에서는 단군 색불루의 정변으로 이해한다.








[조선상고사 제2편 수두시대  제1 조선 고대 총론]





2)항  조선족의 동래





王姓을 [해]라 함은 태양에서 뜻을 취함이요  王號를 [불구래]라 함은 태양의 광휘光輝에서 뜻을 취함이요 天國을 [환]이라 함은 光明에서 뜻을 취함이니 대개 조선족이 최초에...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방으로 나와 불함산不咸山을 明月이 출입하는 곳 곧 광명신의 누숙樓宿으로 알아 주변의 토지를 조선이라 칭하니 조선도 古語의 광명이란 뜻이니 후세에 이두자로 [조선]이라 쓰니라.   <조선상고사>





환桓은 全一의 광명이라.   天一을 三神의 지혜와 능력이라 하고 광명을 三神의 참된 덕이라 하니 온 우주만물에 앞섬을 말함이다.   <조대기>에서 말한다.   '옛 풍속은 광명을 숭상하였으니 해로써 神을 삼고 하늘로써 조상을 삼았나니 만방의 백성은 이를 믿고 서로 의심치 않으며 아침저녁에 경배하며 이를 가지고 일과로 삼았다...태양은 광명이 만나는 곳으로서 옛날부터 三神이 계시는 곳이라.   사람은 빛을 얻음으로써 농사짓고 하는 바 없는 듯하면서도 스스로 교화되나니 아침엔 함께 동쪽 산에 올라 해가 처음 뜨는 것을 경배하고 저녁은 곧 함께 서쪽 강가로 나아가서 달이 처음 뜨는 것에 경배한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환국본기>





[필자 보주補註] 우리 민족이 지녔던 신앙체계의 원천과 풍속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는 내용들로서 두 기록은 많은 정합을 보이고 있지만 세세한 기술 방식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즉 상호간에 인용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제2편 단군왕검의 건국  2)항 신수두의 삼경오부三京五部 제도





대단군왕검이 이미 三神*五帝의 神說로서...삼한을 세워 대단군이 신한이 되니 신한은 곧 대왕이요 말한과 불한은 곧 좌우의 양 부왕副王이니...三京을 두어 삼한이 분주分駐하며 삼한의 아래에 <돝가*개가*소가*말가*신가>의 5가를 두고 전국을 동*서*남*북*중 5부에 나누어...5부를 분치分治하는...<조선상고사>





[필자 補註]  이 부분도 <삼신오제본기>의 <표훈천사> 인용대목이 더욱 세밀하고 일목요연하며 동일 저본을 채록한 듯한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   특히 <신시본기>의 <대변경 주>에서 나타난 5加에 대한 해석을 비교해 볼진대 신채호 선생의 입장과 근본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구체적인 풀이가 다소 상이하다.  





 


     3) 아한 - 나반은 신사기를 베꼈다는 부분





우리 민족 역사상 최초의 남녀로서 [신사기]에  인용된 아만(아한이 아니다)-나반은 [환단고기]에서도 아만-나반으로 언급되었는데 아직도 <한아반-하나반-한아버지-할아버지>와 <아만-어머니>의 우리 말 사투리로 남아있는 정황을 가장 정확하게 알려준 [환단고기]의 기록이 더욱 사실적이며 근원적인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이에 대한 기록도 [환단고기]에서 필사의 전거로 활용한 뚜렷한 두 가지 흐름 즉 [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와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한국본기-신시본기-삼한관경본기-고구려국본기]의 체계로 구성된 맥락에서도 공통적으로 기술되었다.   아울러 그 내용도 [신사기]에 비해 훨씬 풍부하고 역사적 맥락의 흐름이 일목요연하다.   그렇다면 [환단고기]가 [신사기]의 기록을 베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는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아래의 예시문 비교를 보았다면 과연 그런 주장이 나올 수 있었을까?





□  전체 구문상의 맥락 비교





지면 관계상 일부분(악질식민빠가 언급한 아만과 나반이 나오는 조화기造化記 대목)만 인용*대조하였다.   문장 전체적인 분석으로는 공통적인 의미나 해석의 도출이 가능할지라도 문맥의 흐름에 있어서는 많은 대목에서 차이가 나고 있다.   즉 [신사기]의 경우 [환단고기]를 구성하고 있는 각기 다른 저본들(삼성기전*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환국본기*소도경전본훈*삼일신고 등)의 기록이나 비슷한 도가 사서 가운데 중요하고 핵심적인 대목들을 발췌해서 단군교포명서와 함께 대종교의 기본적인 경전으로 편집한 정황이 나타난다.  더불어 이렇게 각기 다른 종류의 저본에서 중요한 핵심이나 문맥의 중심을 이루는 구절들이 거의 동일하거나 공통적인 서술 구조를 보이는 걸로 보아 같은 역사적인 전승내용을 담고 있지만 전파경로나 유전된 과정이 달랐음을 분명히 추정케 해준다. 





[신사기]





흠계조화주왈한임개천국조군세계대덕화육신신물 명군령저철각수직분장세계선행일세계사 일사자주대화뇌공주전운사기우사주수풍백주대기열성관주칠백세계 欽稽造化主曰桓因開天國造羣世界大德化育甡甡物 命羣靈諸嚞各授職分掌世界先行日世界事 日使者主大火雷公主電雲師塈雨師主水風伯主大氣列星官主七百世界





삼가 상고하건대, 만드는 임자인 조화주는 한임桓因이시니 천국天國을 여시어 뭇 누리를 만드시고 대덕大德으로 만물을 기르시니라.   뭇 신령들과 모든 밝은이들에게 명령하사 제각기 직분을 주어 누리 일을 갈라 맡기시되 먼저 밝은 세상의 일을 행하시니라.   해사자(日使者)는 불을 맡고 뇌공雷公은 번개를 맡고 운사雲師와 우사雨師는 물을 맡고 풍백風伯은 대기大氣을 맡고 여러 성관星官들은 칠백 누리들을 맡게 하시니라.





[환단고기]





吾桓建國最古有一神在斯白力之天爲獨化之神光明照宇宙權化生萬物長生久視


恒得決樂乘遊至氣妙契自然無形而見無爲而作無言而行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


水白山之地於是桓因亦以監群居于天界掊石發火始敎熱食謂之桓國是謂天帝桓


因氏亦稱安巴堅也   <삼성기전 상>





우리 한의 건국은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이 있어 사백력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오래오래 살면서 늘 쾌락을 즐겼으니 지극한 기를 타고 노닐고 그 묘함은 저절로 기꺼웠다.   모습 없이 볼 수 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 없으면서 다 행하였다.   어느 날인가 동녀동남 800이 흑수백산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한님은 또한 감군으로서 천계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 음식을 익혀 먹는 방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한국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한님이라고 불렀다.   또한 안파견이라고도 했다.





神在无上一位 有大德大慧大力生天 主无數世界 造兟兟物 纖塵无漏 昭昭靈靈 不敢名量 聲氣願禱 絶親見 自性求子 降在爾腦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삼일신고 제2 一神>





神은 위없는 첫 자리에 계시니 큰 덕과 큰 슬기와 큰 힘을 가지시어 하늘을 내시며 셈 없는 세계를 차지(主)하시고 많고 많은 물건을 만드셨나니 티끌만큼도 빠진 것이 없으며 밝고도 영하여 감히 이름하여 헤아릴 수가 없다. ...





天神國 有天宮 階萬善 門萬德 一神攸居 群○諸○護侍 大吉祥大光明處 惟性通功完者 朝永得快樂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삼일신고 제3 천궁天宮>





천신국에 천궁이 있어 온갖 착함으로 섬돌을 삼고 온갖 덕으로 문을 삼나니 한 신께서 계신 곳이요 뭇 신령들과 모든 밝은이들이 모시었으며... .  





同歸三神 交歡誓願 和白爲公 責禍保信 通力易事 分業相資 男女 皆有職分 老少 同享福利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함께 삼신에게 돌아가 의지하여 서로 기쁘게 맹세하고 원을 세웠다.   화백으로 의견을 모으고 서로 함께 책임지는 것으로 믿음을 지켰으며 힘을 모아 일을 쉽게 하였고 직업을 나누어 서로 도왔으니 남녀가 모두 그 직분이 있었고 늙은이와 어린 아이도 똑같이 복과 이익을 누렸다.





雄率徒三千 初降于太白山神壇樹下 謂之神市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刑主病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弘益人間 是謂桓雄天王也   <태백일사 신시본기>





한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은 신단의 나무아래 내려오시니 이를 신시라 한다.   풍백*우사*운사를 데리고 농사를 주관하고 삶을 주관하며 형벌을 주관하고 병을 주관하시고 선악을 주관하면서 무릇 인간의 360여사를 두루 주관하시어 세상에 계시며 이치대로 교화하여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셨다.   이를 한웅천왕이라 한다.





後桓雄氏繼興奉天神之詔 成仙劃卦知來執象運神命群靈諸哲爲輔   <삼성기전 상편>





뒤에 한웅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신선이 되시니 팔괘를 그으시어 올 것을 알며 상을 잡아 신을 움직였다.   또 뭇 신령들과 모든 밝은이들이 보필하도록 하시더니...








[규원사화]





上界, 却有一大主神, 曰桓因, 有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 而不現其形體, 坐於最上之天, 其所居數萬里, 恒時大放光明, 麾下更有無數小神. 桓者, 卽光明也, 象其體也; 因者, 本源也, 萬物之藉以生者也.   爾時, 一大主神, 乃拱手默想曰: [如今, 宇宙大塊, 冥閉已久...若不 時開判, 何以成無量功德乎!] 乃召桓雄天王, 授命行剖判之業. 天王奉命辭出, 乃督諸神,  令各自大顯神通, ...於是洪 肇判, 天地始分, 虛曠浩茫, 不可端倪. 乃命日月, 輪流相轉, 光麗於天, 照臨於地, 日行爲晝, 月行爲夜, 又命星辰周 蒼穹, 以定四時, 以紀年日.  <조판기肇判記>





하늘에 무릇 한 분의 큰 주신이 있었으니 이름 하여 환인이라 하는데 전 세계를 통치하는 끝없는 지혜와 능력을 지니고서 그 모습은 나타내지 않고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거처하는 곳은 수만 리나 떨어져 있지만 언제나 밝은 빛을 크게 내뿜고 그 아래로는 또한 수많은 작은 신들이 있었다.   <환>이라 함은 밝은 빛을 말하는 것이니 곧 근본 바탕을 모양으로 나타낸 것이며 <인>이라 함은 말미암은 바를 말하는 것이니 곧 만물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때 한 분의 큰 주신이 손을 마주잡고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 이르기를 [지금과 같이 우주의 큰 덩어리가 어둠으로 닫힌 지 이미 오래되어...만약 때가 다하였음에도 세상을 열어서 구분하여 주지 않는다면 어찌 가없는 공덕을 이룰 수가 있으리오] 하고는 환웅천왕을 불러 세상을 가르고 나누는 작업을 명하였다.   천왕은 명을 받들고 물러 나와서 여러 신들을 독려하여 각자에게 스스로의 신통력을 크게 발휘하게 하니...그리하여 아주 흐릿하게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하니...이에 해와 달에게 명하여 바퀴가 굴러가듯이 서로 돌아가며 하늘에서 고운 빛을 발하여 땅에 내려 비추게 하여...또한 별들로 하여금 창공을 두루 돌게 하여 이로서 사시(四時)를 정하고 햇수와 날수를 기록하게 하였다.





一大主神, 更聚衆神曰 [今乘宇宙自然之運會, 已煩汝等出力, 剖判天地, 化生萬物, 功德自固無量....]...乃三命桓雄天王. 天王奉令, 依計頒行. 於是桓雄天王大召滿天(皇)[星]宿, 令分管上天諸事, 却令主神麾下無數小神, 一幷降落下界, 主治山岳 河川 洋海 沼澤 丘陵 原野 里社之基, 務要謹嚴平正, 不可有誤, 然後采天地靈秀之性 貞明之氣, 造成無數人生.   <조판기>








한 분의 큰 주신이 다시 뭇 신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지금 우주의 자연스러운 기운을 타고 이미 너희들이 번거롭게 힘을 내어 하늘과 땅을 가르고 나누며 만물이 드러나게 하였으니 그 공덕이 자고로 한량이 없구나...]...환웅천왕에게 세 번째로 명을 내리니 천왕은 명을 받들어 계획대로 널리 펴서 행하였다.   이에 환웅천왕은 하늘에 가득 찬 별자리를 모두 불러 하늘 위의 모든 일을 나누어 맡게 하고 주신 휘하의 무수한 작은 신들에 명령하여 하나같이 모두 하계에 내려가 산악과 하천*해양과 소택*구릉과 들판 및 마을들의 바탕 되는 일들을 다스리게 하며 근엄하고 공평하게 하여 잘못이 없도록 한 후에 하늘과 땅의 신령하고 빼어난 성질과 곧고 밝은 기운을 가려 모아 무수한 사람들을 만들었다.





一大主神, 乃四命桓雄天王曰: [如今, 人物業已造完矣. 君可勿惜厥勞, 率衆人,  自降落下界, 繼天立敎, 爲萬世後生之範.] 乃授之以天符三印曰: [可持此, 敷化於天下.] 桓雄天王, 欣然領命, 持天符三印, 率風伯 雨師 雲師等三千之徒, 下降太白之山 檀木之下. 太白山者, 卽白頭山也. 衆徒推爲君長, 是爲神市氏.  <조판기>





한 분의 큰 주신이 이에 네 번째로 환웅천왕에게 명하기를 [이와 같이 사람과 만물을 일으키는 공적을 이미 이루어 완전하게 하였다.   그대는 그 노고를 너무 애석히 생각 말고 뭇 사람들을 이끌어 몸소 하계에 내려가서 하늘을 이어서 가르침을 세움으로서 만세토록 후생의 모범이 되도록 하라] 하고 천부의 세 가지 인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널리 천하에 교화를 베풀어라] 하였다.   환웅천왕은 흔연히 명을 받들어 천부의 세 가지 인을 지니고서 풍백*우사*운사 등 삼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의 밝달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태백산>이라 함은 곧 백두산을 말한다.   뭇 무리들이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니 그가 곧 신시씨神市氏이다.








[신사기]





주약왈자이영철군성신중유지명암중한서평가적산육왕여각해극량천공 물유무생유유생무생불식불멸유생능식경귀우멸유기자호무생유생작 독양불생고음불화편항반려우성이자상감이화내가자육 구생이불화무유성자웅이류이란이식상전물체 영철여명각선궐직한열진습이시음양조행저화유재물내작   主若曰咨爾○嚞羣星辰中惟地明暗中寒暑平可適産育往汝各諧克亮天功 物有 ○生有有生○生不殖不滅有生能殖竟歸于滅惟其藉乎○生有生作 獨陽不生孤陰不化偏亢反戾于成二者相感而和乃可資育 苟生而不化無攸成雌雄以類而卵而殖相傳勿替 ○嚞如命各宣厥職寒熱震濕而時陰陽調行翥化游栽物乃作





조화주께서 이르시기를 아! 너희 신령들과 밝은이들아! 뭇별들 가운데서 오직 땅은 밝고 어둠이 알맞고 차고 더움이 골라서 낳고 기르기에 적당한 곳이니 가서 너희들 제가끔 협화協和하여 한울의 공적을 잘 밝힐지어다!   물건이란 낳음이 없는 것도 있고 낳음이 있는 것도 있으니 낳음이 없는 것은 불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낳음이 있는 것은 능히 불다가 마침내 멸함에 돌아가리라.   오직 낳음이 없는 것을 빙자하여서 낳음이 있는 것을 짓느니라.   외짝 양陽으로써는 낳지 못하고, 또 외짝 음陰으로써는 변화시키지 못하며 한쪽으로 기울면 도리어 이루지 못하나니 둘이 서로 어울려야만 기를 수 있느니라.   진실로 낳되 변화하지 못하면 이룰 길이 없나니 암수雌雄가 짝함으로써 알을 낳고 번식하여 서로 전해 멸하지 말게 할지어다.   신령과 밝은이들이 그 명령대로 저마다 제 직분을 행하되 차고 더움과 마르고 젖고 하기를 때 맞게 하여 음양이 고르니 기고 날고 탈바꿈하고 헤엄치고 심는 온갖 동식물들이 지어지니라.





[환단고기]





桓國之末安巴堅下視三危太白皆可以弘益人間誰可使之五加僉曰庶子有桓雄勇兼仁智嘗有意於易世以弘益人間可遣太白而理之乃授天符印三種仍勅曰如今人物業已造完矣君勿惜厥勞率衆三千而往開天立敎在世理化爲萬世子孫之洪範也   <삼성기전 하>





환국 말기에 안파견이 밑으로 삼위와 태백을 내려다보시며 “모두 가히 홍익인간 할 곳이로다” 하시며 누구를 시킬 것인가 물으시니 오가 모두 대답하기를 “서자 한웅이 있어 용맹함과 어진 지혜를 함께 갖추었으며 일찍이 홍익인간의 이념으로써 세상을 바꿀 뜻이 있었사오니 그를 태백산에 보내시어 이를 다스리게 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마침내 천부인 세 개를 내려주시고 이에 말씀을 내려 「사람과 물건의 할 바가 이미 다 이루어졌도다.   그대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고 무리 3000을 이끌고 가 하늘의 뜻을 열고 가르침을 세워 세상에 있으면서 잘 다스려서 만세의 자손들에게 큰 모범이 될 지어다」라고 하셨다.





朝代記 曰...時 安巴堅 遍視金岳三危太白 而太白 可以弘益人間 乃命雄 曰如今人物業已造完矣 君勿惜勞苦 率衆人 躬自降往下界 開天施敎 主祭天神 以立父權 扶携平和歸一 以立師道 在世理化 爲子孫萬世之洪範也 乃授天符印三個 遣往理之   <태백일사 신시본기>





조대기에서 말한다...때에 안파견이 두루 금악*삼위*태백을 살피더니 태백은 이로써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환웅에게 명하여 가로대 <이제 사람과 물건의 업은 이루어진 듯하다.   그대 수고를 아끼는 일 없을지니라.   무리를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가 하계에 가서 하늘의 뜻을 펴 가르침을 베풀고 천신에 제사지내는 것을 주관하라.   어버이의 권위를 세워서 늙은이와 어린이를 보살펴서 모두 다 평화롭게 하라.   가르침의 도를 세워서 재세이화하여 사손 만대의 큰 귀감이 되도록 할 지어다>하시며 마침내 천부인 세 개를 주시고 그를 보내어 이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第四章 世界 爾觀森列星辰 數无盡 大小明暗苦樂 不同 一神造群世界 神勅日世界使者 杰七百世界 爾地自大 一丸世界...神呵氣包底 煦日色熱 行焉化游栽物 繁殖   <三一神誥>





너희들 총총히 벌린 별들을 보라. 셈이 다함이 없고 크고 적음과 밝고 어두움과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같지 않느니라.   일신께서 뭇세계를 만드시고 또 일세계의 사자를 시켜 700세계를 거느리게 하시니 너희 땅이 스스로 큰 듯하나 한 둥그런 세계이니라....일신께서 기를 불어 싸시고 밑까지 해의 빛과 더움으로 쪼이시니 기고*날고*되고*헤엄치고*심는 물건들이 번식하니라.





震域留記 神市紀 云 桓雄天皇 見人居已完 萬物各得其所 乃使高矢禮 專掌鳴養之務 是爲主穀 而時稼穡之道不備 又無火種爲憂...桓雄天皇 使風伯釋提羅 雖除鳥獸蟲魚之害 而人民猶在洞窟土穴之中 下濕外風之氣 逼人成疾 且禽獸蟲魚之屬 一經窘逐 漸自退避藏匿 不便於屠殺供饋 於是 使雨師王錦 營造人居 主致牛馬狗豚雕虎之獸 而牧畜利用 使雲師陸若飛 定男女婚娶之法焉 而治尤則世掌兵馬盜賊之職焉 自此 治尤高矢神誌之苗裔 繁衍最盛...<태백일사 신시본기>





<진역유기>의 신시기에서 말한다.   “한웅천왕께서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성되고 만물이 각각 그 자리를 가짐을 보시더니 곧 고시례로 하여금 먹여 살리는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시고 이를 주곡이라 하셨다.   그런데 이때는 아직 농사의 방법도 잘 갖춰지지 않았고 불씨도 없음이 걱정이었는데...한웅천왕께서 풍백 석제라를 시켜 짐승과 벌FP와 물고기의 해를 제거하도록 하였지만 백성들은 아직 동굴이나 흙구덩이 속에 살았기 때문에 밑에선 습기가 스며 올라오고 밖에서는 바람이 불어와서 사람들에게는 질병을 일으켰다.   또 새*짐승*물고기 등을 급하게 쫓아버려 점차로 도망가서 숨어 버리니 잡아서 먹는데도 불편하였다.   이에 우사 왕금영으로 하여금 사람의 살 곳을 만들게 하고 소*말*개*독수리*돼지*호랑이 등의 짐승을 모아 목축 이용을 관장케 하고 운사 육약비로 하여금 남녀의 혼례의 법을 정하게 하고 치우는 곧 세세토록 병마도적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치우*고시*신지의 후손들은 지극히 왕성하게 번영하였다.








[규원사화]





神市氏旣爲君長, 以神設敎, 存其彛性, 周護飽養, 聽其繁衍, 天下民物, 於是漸盛. 但此時, 開闢不遠, 隨處草木荒茂 鳥獸雜處, 人民艱困殊甚...神市氏, 卽命蚩尤氏治之. 蚩尤氏, 實爲萬古强勇之(租)[祖]...神市氏, 見人居已完 蠢物各得其所, 乃使高矢氏, 專掌 養之務, 是爲主穀. 而時, 稼穡之道不備, 又無火種...婚娶之主媒者曰朱因者, 亦朱因氏之遺稱也...盖今之人謂匠師曰智爲者, 蚩尤氏之訛也; 耕農樵牧者, 臨飯而祝高矢者, 高矢氏之稱也; 婚娶之主媒者曰朱因者, 亦朱因氏之遺稱也.   <태시기>





신시씨가 임금이 되어 신神으로서 가르침을 베풀며 타고난 떳떳한 성품을 보존케 하고 두루 보살펴 배불리 먹이고 양육하며 무성하게 불어남을 모두 받아들이니 천하의 백성과 사물은 이로서 번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개벽한 지 아직 멀지 않은 때인지라 곳곳에 초목이 무성하고 날짐승이며 들짐승이 어지러이 섞여 있어 사람들의 괴로움이 매우 심하였고...신시씨는 곧 치우씨蚩尤氏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치우씨는 진실로 만고에 있어 강인하고 용맹함의 조상이 되니...신시씨는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비되고 살아서 꿈틀거리는 사물들 또한 각기 그 마땅한 처소를 얻었음을 보고 이에 고시씨高矢氏로 하여금 먹여 살리는 일을 맡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곡식을 주관하는 일이다.   이때는 곡식을 심고 거두는 일이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불씨 또한 없던 때라,..또 주인씨朱因氏를 신임하여 그에게 남녀 간에 장가들고 시집가는 법을 정하게 하였다.   무릇 지금의 사람들이 힘센 장사를 두고 '지위'라 함은 치우씨의 이름이 잘못 전하여 진 것이며 밭갈고 농사짓거나 나무를 하고 짐승을 기르는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고시례'하며 축원하는 것은 고시씨를 일컫는 것이며 혼인에서 중매를 서는 것을 '주인 선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주인씨의 이름에서 남겨진 명칭이다.


 





[신사기]





기자손분위오색족왈황백현적람수초지민의초식목소거혈처양선무위순연자재주애지신석복기인수차귀무요찰자 세원년구산육일번수내각거일우소위향족대성부족황거대황원백거사막간현거흑수빈적거대영안남거제도중 오족유황대지유사재개마남자위양족동자위간족재속말북자위방족서자위견족 구민거이속인이업혹척황주종수혹재원야주목축혹축수초주어렵   其子孫分爲五色族曰黃白玄赤藍邃初之民衣草食木巢居穴處良善○僞鶉然自在主愛之申錫福其人壽且貴○夭札者 世遠年久産育日繁遂乃各據一隅小爲鄕族大成部族黃居荒原白居沙漠間玄居黑水濱赤居大瀛岸藍居諸島中 五族惟黃大支有四在蓋馬南者爲陽族東者爲干族在粟末北者爲方族西者爲畎族 九民居異俗人異業或斥荒主種樹或在原野主牧畜或逐水草主漁獵





그 자손이 나뉘어 다섯 빛깔의 종족이 되니 황인종*백인*흑인*홍인종 및 남색 인종이다.   먼 옛날 사람들은 풀 옷을 입고 나무 열매를 먹고 둥지에 살며 굴속에서 지냈는데 어질고 착하여 거짓이 없이 순진한 그대로이므로 조화주께서 사랑하시어 거듭 복을 주셔서 그 사람들이 오래 살고 또 귀중하게 되어 일찍 죽는 이가 없었나니라.   세대가 멀어지고 세월이 오래 되매 낳고 기름이 번성해져서 드디어 제각기 한 모퉁이씩 자리 잡고 적게는 일가친척을 이루고 크게는 한 부락을 이루었는데 황인종은 넓은 벌판에 살고 백인종은 호숫가에 살고 홍인종은 남녘 바닷가에 살고 남색 인종은 여러 섬들에서 살게 되니라.   다섯 종족 가운데 황인종이 가장 커서 갈래들이 넷이 있으니 개마산蓋馬山 남녘에 사는 이들은 양족(陽族)이 되고 동녘에 사는 이들은 간족干族이 되고 속말강인 송화강 북녘에 사는 이들은 방족方族이 되고 서녘에 사는 이들은 견족畎族이 되니라.   아홉 겨레 백성들이 사는 데마다 풍속이 다르고 사람들끼리 직업이 달라 혹은 거친 땅을 개척하여 농사와 과수 심기를 일삼고 혹은 언덕·들판에 있어 목축을 일삼고 또 혹은 물과 풀숲을 따라가 고기잡고 사냥하는 일을 하게 되니라.





[환단고기]





蓋九桓之族分爲五種以皮膚色貌爲別也皆其俗就實究理策事而求其是則同也夫餘爲俗水旱兵疾國王有責忠邪存亡匹夫同歸是其一證也色族如黃部之人皮膚稍黃鼻不隆頰高髮黎眼平靑黑白部之人皮膚晢頰高鼻隆髮如灰赤部之人皮膚銹銅色鼻低而端廣顙後傾髮捲縮貌類黃部之人藍部之人一云風族又棕色種其皮膚暗褐色貌猶黃部之人也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대저 구한의 족속은 나뉘어 5종이 되고 피부의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구별을 짓게 되었다.    그 풍속은 모두다 실제에 임하여 이치를 찾고 일을 계획하여 그것이 옳음을 구함이 같았다.   부여는 풍속에 가뭄과 병란 및 질병은 국왕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고 충성됨과 사악함과 살고 죽음은 필부에게도 같이 돌아오는 법이라 하니, 이것이야말로 한 증거가 된다.   색족은 어떤 것일까? 황족은 피부가 좀 누렇고 코는 튀어나오지 않았으며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머리털이 검고 눈은 펑퍼짐하며 청흑색이요,   백부인은 피부는 밝고 뺨은 높고 코도 크며 머리털은 회색이며 적부인은 피부가 녹슨 구리색이요 코는 낮아 뭉툭하며 이마는 넓고 뒤로 기울고 머리털은 곱슬머리로 황부인과 비슷하며 남부인은 풍족이라고도 하며 또 야자나무 색깔의 인종이라고 한다.   그 피부는 암갈색으로 모양은 오히려 황부인과 같다.








[규원사화]





而後世蚩尤 高矢 神誌之苗裔, 繁衍最盛. 蚩尤氏之族, 則占居西南之地; 神誌氏之族, 則繁殖於北東之地; 獨高矢氏後裔, 廣處東南, 轉流爲辰弁諸族, 後之所謂三韓者, 皆其孫也. 三氏苗裔, 又細分九派, 卽 畎夷 우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暘夷之屬, 皆異支同祖, 不甚相遠...後世 夷 風夷, 分遷西南, 恒與中土諸族, 互相 風夷則卽蚩尤(氏)之一族也.   <太始紀>





후세에 치우씨*고시씨*신지씨의 후예들이 가장 번창하여 융성하였다.   치우씨의 부족은 서남의 땅에 자리를 잡았고 신지씨의 부족은 북동의 땅에 많이 정착하였는데 오로지 고시씨의 후예들만이 동남쪽에 넓게 거처하다가 더욱더 이동하여 변진(辰弁)의 뭇 부족들이 되었으니 후에 삼한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삼씨三氏의 후예들은 또한 아홉 갈래로 자세히 나누어지는데 곧 견이*우이*방이*황이*백이*적이*현이*풍이*양이의 무리들이 모두 같은 조상의 다른 가지일 뿐 서로 그리 멀지는 않다.   뒷날 견이와 풍이는 따로 서남으로 옮겨가서 항시 중토의 여러 부족들과 서로 엎치락뒷치락 세력을 다투었는데 풍이는 바로 치우씨의 일족이다.


 





□  아만과 나반 부분 - 두 번째 단락은 필자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으로 필요이상 길게 인용하였다





[신사기]





오물지수왈인궐시유일남일녀왈나반아만재천하동서초불상왕래구이후우여지우  五物之秀曰人厥始有一男一女曰那般阿曼在天河東西初不相往來久而後遇與之偶





다섯 물건들에서 빼어난 것이 사람인데 맨 처음에 한 사나이와 한 여인이 있었으니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라.   한울가람(송화강松花江) 동서에 있어 처음엔 서로 오가지 못하더니 오랜 뒤에 만나 서로 짝이 되니라.





[환단고기]


 


인류지조왈나반초여아만상우지처왈아이사타몽득천신지교이자성혼례칙구환지족개기후야 人類之祖曰那般初與阿曼相遇之處曰阿耳斯它夢得天神之敎而自成婚禮則九桓之族皆其後也   <환단고기 삼성기전 하편>





인류의 조상을 나반이라 한다.   처음 아만과 처음 만난 곳은 아이사타라고 하는데 꿈에 천신의 가르침을 받아서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구한의 무리는 모두가 그의 후손이다.








人類之祖曰那般初與阿曼相偶之處曰阿耳斯它亦稱斯它麗阿也日夢得神啓而自成昏禮明水告天而環飮山南朱鵲來喜水北神龜呈瑞谷西白虎守嵎溪東蒼龍升空中有黃熊居之天海金岳三危太白本屬九桓而蓋九皇六十四民皆其後也然一山一水各爲一國群女群男亦相分境從境而殊國別積久創世條序後無得究也久而後有帝桓仁者出爲國人所愛戴曰安巴堅亦稱居發桓也蓋所謂安巴也堅乃繼天立父之名也所謂居發桓天地人定一之號也自是桓仁兄弟九人分國而治是爲九皇六十四民也竊想三神生天造物桓仁敎人立義自是子孫相傳玄玅得道光明理世旣有天地人三極大圓一之爲庶物原義則天下九桓之禮樂豈不在於三神古祭之俗乎傳曰三神之後稱爲桓國桓國天帝所居之邦又曰三神在桓國之先那般死爲三神夫三神者永久生命之根本也故曰人物同出於三神以三神爲一源之祖也桓仁亦代三神爲桓國天帝後稱那般爲大先天桓仁爲大中天桓仁與桓雄治尤爲三皇桓雄稱大雄天治尤爲智偉天乃黃帝中經之所由作也三光五氣皆在視廳感覺而世級日進攢火焉發語焉造字焉優勝劣敗之相競始乎起耳熊族之中有檀國最盛王儉亦自天而降來御于不咸之山國人共立爲檀君是謂檀君王儉也生而至神兼聖圓滿統合九桓三韓管境復神市舊規天下大治擧世視同天神自是崇報之禮永世不替者也    <환단고기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인류의 조상을 나반이라 한다.   처음 아만과 서로 만난 곳을 아이시타라 한다.   또 사타려아라고도 한다.   어느 날 꿈에 신의 계시를 받아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정안수를 떠 놓고 하늘에 알린 후 돌아가며 술을 마셨는데 산남의 주작이 날아와서 즐기고 수북의 신구가 상서를 나타내고 곡서엔 백호가 산모퉁이를 지키고 계동엔 창룡이 하늘로 승천하고 가운데 황웅이 있었다.   천해*금악*삼위*태백은 본디 구한에 속한 것이며 9황의 64민은 모두 그의 후예이다.   그러나 1산1수가 각각 한나라가 되매 사람들도 역시 서로 따라가 경계를 나누니 경계에 따라 나라를 달리하게 되었다.   나라를 달리 한지 오래되니 창세의 조서의 뒤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장구한 세월 뒤에 한인이란 분이 나타나셔서 여러 사람들의 사랑으로 추대되어 안파견이라고도 하고 거발한이라고도 하였다.   대저 안파견이라 함은 하늘을 계승하여 아버지가 되었다는 거발한이라 함은 천*지*인을 하나로 정한다는 뜻의 이름이니라.   이로부터 한인의 형제 아홉 사람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렸으니 이를 9황 64민이라 한다.





그윽히 생각해 보건대 삼신은 하늘에 태어나시어 물건을 만드시고 한인은 사람을 가르치어 의를 세우시니 이로부터 자손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현묘한 가운데 도를 얻으시고 광명한 가운데 세상을 다스리시니라.   이미 천지인 삼극은 있었고 대원일은 이것이 만물의 원리가 되었으니 곧 천하 구한의 예악이 어찌 삼신고제의 풍속에 없었을 손가?   전에서 말한다.   “삼신의 후를 일러 한국이라 하니 한국은 천제께서 계시는 곳의 나라니라”





또 가로대 “삼신은 한국의 선대에 있었고 나반이 죽어 삼신이 되셨으니 그 삼신이라 함은 영구생명의 근본이라” 고 하였다.   그래서 또 말한다.   “사람과 물건이 함께 삼신에게서 나왔으니 삼신으로써 한 근원의 조상으로 삼느니라”





한인도 역시 삼신을 대신하사 한국의 천제가 되었다.  뒤에 나반을 대선의 천이라 하고 한인을 대중의 천이라 하고 한인*한웅*치우를 삼황이라 하며, 한웅을 대웅의 천이라 하고 치우를 지위의 천이라 한다.   곧 <황제중경>에서 비롯된 유래이다.   삼광오기가 모두 시청감각에 달려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불을 피우고 말을 하게 되고 글자를 만들었으니 뛰어나고 열등하여 이기고 지는 다툼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웅족 가운데 단국이 있어 가장 강성했다.   왕검 역시 하늘에서 내려와서 불함산에 사시니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받들어 단군으로 모시어 이를 단군왕검이라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히 신묘하고 성스러워 구한의 삼한관경을 모두 통합하였다.   신시의 옛 규칙을 회복하니 천하는 크게 다스려져서 온 세상이 그를 천신과 같다고 보았다.   이때부터 숭보의 예는 영세토록 바뀌지 않았다.








河伯是天河人那般之後也七月七日卽那般渡河之日也是日天神命龍王召河伯入龍宮使之主四海諸神天河一云天海今曰北海是也天河注曰天道起於北極故天一生水是謂北水   <환단고기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하백은 천하의 사람으로 나반의 후손이다.   7월 7일은 나반이 하늘을 건너는 날이다.   이날 용왕에게 명하여 하백을 부르나니 용궁에 들어가 이로 하여금 사해의 뭇 신을 주관케 하느니라.   천하는 다른 이름으로 천해라고도 한다.   지금의 북해가 바로 그것이다.   천하의 주에 가로대 <천도는 북극에서 일어난다.   이를 북수라 한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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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원님의 글을 인용하여 필자의 생각을 덧붙인 글입니다]





1909-1910 무렵에는 대종교가 단군교(이하 후일의 단군교와 구분하기 위해 시원단군교라 칭한다)를 창시하면서 우리 민족정서 함양과 자주독립의 의지를 고취시키려 겨레의 혈맥 속에 깊숙이 잠재해 왔던 단군사상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강화하던 시기였다.  홍암弘巖 나철(羅喆 본명 寅永 1863-1916)은 1909년 마침내「단군교檀君敎」를 세우고 1910년 조선이 일본제국에 병합되자 교명을 「대종교大倧敎」로 바꾸어 단군신앙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홍암은 다양한 사료 중 그즈음 단군사상 고양에 힘입어 오랜 잠에서 깨어난 민족사서들을 저본으로 삼은『삼일신고三-神誥』와 『신사기神事紀』 등의 교서(敎書)를 중심으로 단군전승에 진력하였으며 때문에 이들 포교서(布敎書)들은 확실히『규원사화揆園史話』나『환단고기桓檀古記』등의 단군신화 유형과 매우 깊은 연관성(단군교 창시를 구태여 중광重光-다시 일으킴-이라고 하면서 스스로도 창교주創敎主가 아닌 일개 단군교의 敎人으로 단군신교檀君神敎의 연결자로 자처한 자세가 특히 주목된다)을 가지고 있다.   또한 조선후기 및 일제치하 당시의 다양한 단군신앙 운동 중 백두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백봉白峯 계열의 단군신앙 전승과도 맥이 닿아 있다고 전해진다(이 때 전수받은 자료에 의해 시원단군교의 기본 경전인 『신사기』가 태동한다).





시원단군교 중광重光과 단군교 포명서 선포에 참여한 人士(오기호*최전*유근*정훈모*이기 등)들을 보아도 이들이 대부분 민족사서 즉 도가사서류의 전승 보존 및 출현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게 해주는데 이는 과거의 몰민족적*유가적 자아를 혁파하고 우리 민족자존과 國學(國語*國文*國史*國敎) 중흥의 큰 구심체로 기능했다.   2세 교주인 김교헌金敎獻에 이르자 단군신앙은 절정에 달해 수많은 관련 서적과 교육교재들이 이 때에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언제나 우리의 전승 민족문헌과 끊어지지 않고 유전(遺傳)되어온 도가사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신채호*박은식*안재홍*정인보*안희제*안호상*정신鄭信*신규식 등 많은 민족사학자나 우국지사들이 대종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단군실사(檀君實史) 고증과 관계된 고대사연구에 눈길을 쏟으면서 거의 비슷한 학문적 성과(밝 사상*불함문화론*광명과 천손의식 등)를 공유하게 된 계기가 된 것도 제2세 교주 김교헌의 교적(敎籍) 간행과 교세 확장에 대한 열정과 대종교 東道本司 책임과 대종교 총본사 전강(典講)으로 북간도와 함북지역에 걸쳐 덕성과 학식에 있어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서일 선생 그리고 제3세 교주 윤세복의 단군신앙을 핵심으로 한 민족교육학교 설립과 관계가 깊다.





※ 특히 나철 선생이 단군교 창시를 구태여 중광(重光-다시 일으킴)이라고 하면서 스스로도 일개 敎人으로 단군신교檀君神敎의 연결자로 자처한 자세는 당대 수많은 지식인으로부터 공감을 얻는 원인이 되었고 민족사 전반에 걸쳐 우국적인 우리 민족 시원과 단군계승의식에 대한 관심과 공감대를 형성시키는 주요한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이 무렵에 각기 다른 경로로서 전래되어오던 [환단고기]의 저본들이 계연수에 의해 합본으로 필사되어 1911년경에 출현한 것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환단고기] 출간의 처음부터 시원단군교 중광의 주요 인사였던 이기가 개입되어 있고 발간 과정에서도 대종교와 긴밀한 사람들의 자금으로 시교당(施敎堂)의 포교 자료로서 敎團에서 적극 활용되었음직한 30부가 한정판으로 간행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이기 선생이나 김교헌 선생의 집안은 전승 자료가 많기로 잘 알려진 터이며 일제의 야욕이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하던 1905-1910 이후에 격렬한 민족의식 발전기에 우리 민족의 시원과 형성에 대한 의식 자각에 힘입어 민족사서의 제작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로서 김교헌과 이기를 중심으로 단군 관계 서적 저술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민족사학자나 우국지사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대종교와 관련이 있었거나 직*간접적으로 단군관계 서적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기에 출현한 문헌 또는 다양한 연구 성과들에 대한 공감대가 널리 퍼져 있었고 거의 비슷하거나 동일한 의식과 관념을 폭넓게 공유하였다.





     - 김교현 선생은 1910년 입교 후 광문회 활동을 이끌면서 고전과 사서의 수집*간행에 진력하였다.   최남선*장지연*유근*신채호*박은식*정인보 등의 민족사학자들은 선생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으며 민족사의 지평을 열어갔다.   이는 신채호나 박은식 등이 처음엔 유교적 사관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였으나 이후 완벽하게 벗어난 걸 보면 짐작이 된다.   광문회는 선생의 가문에 역대로 수집*소장해 오던 방대한 양의 서책과 문헌이 중요하게 활용되었으며 나중에 이를 최남선 선생이 보관하다가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기증되었다.


     - [단조사고檀朝事攷]는 선생의 주도 아래 유근*박은식 선생이 참여한 단군 관련 최초 사료집으로서 단군에 관한 역사적*문화적 의미를 총망라하여 현존하는 모든 자료들을 집대성한 저서이다.   이런 민족적*역사적 정통성에 관한 신념체계와 단군 실사에 대한 의식이 신채호(광명과 낭가사상)*박은식*정인보*안재홍 선생 등에게 고스란히 이식되었다.





※ <신채호>는 대종교를 접하기 전까지 유교적 정신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고대 우리의 仙敎 사상에 대해 불로장수를 추구하는 지나 도교의 아류로 공박했다.   그러나 대종교와 접한 뒤 도교 이전부터 형성된 우리 민족 고유 신앙의 주요 줄기로 인식하는 태도를 보여 준다(東國古代仙敎考  1910. 3)   이는 박은식도 마찬가지인데 그의 사고 변화는 1910년 만주 망명을 전후로 유교적 애국사상가에서 변모하여 국혼을 중심 줄기로 하는 반유교적 만한사관滿韓史觀*선교문화사관仙敎文化史觀을 극명하게 드러냈다(몽배금태조*대동고대사론*한국통사)   물론 정인보의 <조선 얼> 정신이나 안재홍*이상룡*유근*장도빈도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사실과 이 무렵의 정황들을 면밀히 살펴보았을 때 전승 기록들이 비록 그동안의 여러 경로에 걸친 필사를 통하여 각기 다르게 전해졌을지라도 한민족의 기원과 형성 과정에서 공통분모로서 작용하여 전래해오던 본질적인 요소는 달라지지 않았음을 추정하는 전거는 될 수 있을망정 거의 동시적으로 출현한 저서들이 상호 인용하였다는 것을 반드시 증명해주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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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의 글은 <파이낸스투데이  2009년 12월 17일>에서 이기석 기자가  <환단고기 재조명학술대회>에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님이 발표한 [환단고기 탄생의 역사는?]이란 논문을 <특별연재>한 것을 필자가 발췌하였습니다. 





이유립 선생의『환단고기』는 이름 그대로 환인*환웅의 시대와 단군시대를 기록한 사서의 결정판이다.   흔히 상고사라고 하면 단군 이후의 역사를 말하는 것으로 알았고 거의 모두가 대종교에서 나온 사서로 알았다.   그러나 『환단고기』가 묘사한 역사세계는 대종교와 달랐다.   김교헌의 『신단실기』와 『신단민사』 그리고『단조사고』 등이 그린 단군 중심의 상고사와 『환단고기』의 그것은 확실히 달랐다.   이 문제에 풀기 위하여 가장 먼저 알아두어야 할 일은 <해학 이기>와 <홍암 나철>의 관계이다.





1. 단학회의 발족과 취지문





한말의 애국지사인 해학 이기(海鶴 李沂 1848-1909)선생은 [단학회]를 창설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나철과 이기가 전남 구례에 호양학교를 세워 구학문과 신학문을 아울러 가르친 특이한 교육자였던 왕석보(川社 王錫輔 1816- ? )라는 스승에게 배웠다는 사실(유명한 매천 황현도 문하생이다)을 알았다.   이기와 나철의 나이 차는 15세나 되어 거의 사제지간에 가까운 선후배관계였지만 함께 민족의 얼을 단군사상에서 찾고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자결 순국하였다.   이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인물은 해학 이기선생이다.   이유립 선생에 의하면 그는 단학회를 창설하였으며 『환단고기』를 남겼다.





1)『동몽선습』과 단군





1979년에 공개한 『환단고기』는 일제식민사관을 비판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왕조의 국시國是에도 어긋나는 역사관이었다.   또한 대종교와도 다른 역사관을 제시하였으니 그 중심에는 <환웅이 개천한 사실을 단군이 개천한 것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문제가 가로 놓여 있었다.   이유립 선생의 단학회에서는 신시개천을 고집하고 단군개천을 반대하였다.





일제의 역사왜곡에 맞서서 투쟁한 종교단체는 물론 대종교였으나 단학회도 있었다.   그 외에도 대종교에서 갈라선 정훈모의 단군교가 있었으나 역사해석에 있어서는 대종교와 다른 점이 없었다.   그러나 이기의 단학회와 나철의 대종교는 그 해석이 아주 달랐다.   단학회는 [신시 개천]을 대종교는 [단군 개천]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현 대한민국은 단군 개천을 채택하고 있고 단군릉을 발굴한 북한정권도 대한민국과 같은 의미의 개천절을 지내고 있다.





그런데 단군 개천은 조선왕조의 國是이자 국정사관이었다.   중종 때 <박세무>가 지었다는 『동몽선습』은 천자문 다음으로 가장 많이 가르치던 서당의 교과서인데 그 첫머리에 단군 개천설을 채택하고 있다.





동방에는 처음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神人이 태백산 단목 아래에 내려오시더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으니 이가 바로 단군이시다





東方初無君長 有神人降于檀木下 國人立爲君 是爲檀君





『삼국유사』나『제왕운기』의 기사와는 다른 역사관을 드러내고 있다.   두 사서는 『고기』를 인용하면서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태초에 환웅(일명 大雄)이 하느님이신 환인의 명을 받아 태백산 단목 아래에 내려 와서 개천하였다」고 명기하였다.   그런데『동몽선습』에는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신인이라 하였다.   왕조 교체와 동시에 단군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가 건국된 후 조선을 건국한 단군을 동시에 하늘을 연 신인으로 확대 해석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과정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 양촌 권근은『응제시주應制詩註』에서〈시초에 개벽한 동이의 군주 始古開闢東夷主>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잘못 해설하였다.





옛날 신인이 단목 아래에 내려오시어 백성들이 그를 임금으로 삼았으니 그를 가리켜 단군이라 하였다.   때는 당요 원년 무진이었다.





昔神人降檀木下 國人立以爲主 因號檀君 時唐堯元年戊辰也





「고기」에 의하면 단목 아래에 내려오신 분은 환웅이었다.   단군이 아니었다.   그래서 권근은 그 다음에 증주增註라 하여 이렇게 기술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인 환인에게 아들이 있었으니 환웅”이라 하였고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오셔서 웅녀와의 사이에 단군을 낳았다”고 하였으니 환웅의 아들이 단군이었다.  





그런데 끝부분에 가서 다시 잘못쓰기를 “들리는 설에는 태고에 단군이 나무 아래에 내려와서 동방에서 임금이 된 것은 요순시대라 한다 聞說鴻荒曰 檀君降樹邊 位臨東國土 時在帝堯天”고 하였다.





권근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을 단군이라 하다가 환웅이라 하다가 다시 단군이라 하였는데 그 뒤에 나온 『세종실록』지리지도 마찬가지였다.   지리지에도 단웅(환웅)이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고기를 인용하고 있다.   환웅을 단웅이라 한 것이 환단桓檀 두 분을 동일시한 데서 유래한 것인지 모르지만...이렇게 고기를 무시하고 단군이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왔다고 오기誤記한 책 중에는 또 서거정의 『동국통감』(성종 15년 1484)이 있다.





동방에 처음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단목 아래로 내려오시어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였으니 이가 단군이다.





東方初無君長 有神人降于檀木下 國人立爲君 是爲檀君 國號朝鮮 是唐堯戊辰歲也 初都 平壤 後徙都白岳 至商武丁8年乙未 入阿斯達爲神





『동몽선습』의 구절과 똑같다.  『동국통감』 이외에도 조선왕조 초기의 거의 모든 사서에『동국통감』과 같이 기록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노사신의『동국여지승람』(1430)*권도의『역대세년가』(1436)*『용비어천가』(1455)*『삼국사절요』(1476)*박상의 『동국사략』(1474-1530) 등이 모두 그러하다.   이것을 단군중심주의라 부르고 싶은데 조선후기에 가서도 그대로 계승된다.   오운의『동사찬요』와 조연의『동사보유』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신시개천의 기록을 지우고 환웅 대신 단군을 그 자리에 메운 것은 단군을 우리 역사의 우두머리에 세우려는 조선왕조 건국이념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단군 이전의 나라인 환인의 환국은 물론 환웅이 신시까지 모두 역사가 아닌 신화로 치부되며 단군의 조선 건국이 만족사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학회의 1대 회장 계연수가 1911년 조선의 망국과 동시에 발간한『환단고기』는 주목할 만한 역사서였으나 일제강점으로 빛을 보지 못하고 1979년에 와서야 공개된다.





2) 일제강점 하의 단학회





1960년대 후반에 이유립의 단학회가 발행했던 『커발한』지 14호 (1968년 8월 1일)에 보면 「단학회약사檀學會略史」가 실려 있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기로 한다.





단학회의 창시자는 구한말의 애국지사이자 민족사학자인 해학 이기였다.   해학 이기는 1909년 순국한 후에 『해학유서海鶴遺書』를 남겨 생전의 주장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전술한 바와 같이 선생은 단순한 개화사상가가 아니었다...일제가 러일전쟁을 도발하여 을사조약을 늑약하자 동지 나철*오기호吳基鎬 등과 더불어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일왕과 이등박문 등에게 항의각서를 전달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체 귀국하였다.   그 후 을사오적을 처단하는 암살 계획을 세워 제거하려 하였다가 실패로 돌아가 진도로 유배되었으나 특사로 석방되어 재삼 상경하여 『호남학보湖南學報』를 간행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해학 이기와 홍암 나철은 생사를 함께 한 동지였으며 민족사관 정립에 크게 공헌한 분이었으며『환단고기』에 수록된 「태백일사」도 실은 바로 이기 선생 자택에 소장했던 비서秘書이었다.   이기 선생은 말년에 홍암 나철 선생과 함께 고려시대 행촌 이암 선생의 유저 『태백진훈』과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 『삼성기』 『단군세기』 『규원사화 』등을 교열하고 주석하는 데 전념하였다.





[필자 견해]  바로 이런 정황을 고려해 볼 때 비슷하거나 같은 저본에서 유출되어 필사된 [신사기]와 [환단고기]의 동일성이 확인되지만 내용면에서는 오히려 [환단고기]가 훨씬 풍부하고 서술체계도 일목요연하다.





두 사람은 격의 없이 역사 문제를 가지고 토론하였으나 이견을 좁히는 데 실패하였다.   가장 큰 쟁점은 삼신설三神說의 정의와 신시개천神市開天 그리고 단군건원檀君建元 등의 문제였다.   결국 1909년 홍암 나철이 따로 단군교(1년 뒤 대종교로 개칭)를 창설하였고 이기와 제자들은 따로 [단학회]를 조직하였다.   하나는 종교단체 다른 하나는 학회라 하였다.   그리고 이기 선생의 제자들이 소장했던 사서들이 합본되어 『환단고기』로 나왔다.





3) 단학회의 독립운동





이기 선생을 따르던 제자 가운데는 운초 계연수(雲樵 桂延壽 ? - 1920)가 있었고 그 밖에도 이정보*백하 김효운 등 여러 자강회원自彊會員들이 있었다.   그들은 1909년 3월 16일 단학회를 창단하고 동년 5월 5일에는 강화도 참성단에 가서 삼신에게 고유告諭하였다.   두 달 후인 7월 13일 해학 이기선생이 서울의 한 객사에서 자진하여 순국하였고 이듬해 나라가 망하자 제자였던 계연수는 1911년 묘향산 단군굴에 들어가서 필생의 역작인『환단고기』를 펴냈다.   이런 상황들을 종합하여 추정할 때 『환단고기』는 해학 이기 선생이 소장하고 있었다고 짐작되는 고서를 물려받아 이를 편집한 것이었으며 선생의 피맺힌 혼이 담긴 유서요 망국의 한이 서린 사서였다.





...그 뒤 1914년 3월 16일 평안북도 천마산天摩山 성인당聖人堂에 모여 극비리에 단학회 확대회의를 가졌는데 이 모임에는 [계연수]를 비롯한 12명의 인사가 참가하였다.   이어 1918년 7월에는 백암 홍범도 장군과 석주 이상룡 선생이 단학회에 가입하였고 동년 10월 3일 개천절에는 본부를 중국 간도 관전현 홍석납자紅石拉子로 옮겨 단학회보를 8호까지 발간하였다.   이리하여 단학회는 그 해 중흥의 해를 맞았는데 이때 발표한 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국가의 독립은 오로지 자강自彊에 있고 자강의 방법은 역시 나를 찾는데 있으니 내 뜻이 서지 않으면 가는 곳이 몽롱하고 내 머리가 미개한 즉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또한 내 힘이 없으면 주권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실성하고 나라가 실권失權하고 사회가 실고유신앙失固有信仰 즉 고유신앙을 잃어버렸으니 6천년 유구한 역사를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정신이 하나로 돌아 갈 것이며 국권을 회복하리오. 바라건 데 고구려의 다물정신多勿精神으로 국정을 개혁하고 국부國富를 증진하고 국토를 통일할 지어다.





[강령 3장]





1, 祭天報本하여 眞實을 구할 것이오.


2. 敬祖興邦하여 平和를 구할 것이오.


3. 弘道益衆하여 統一을 구할 것이오.





짧은 문장이지만  첫째) 자강의 유일한 방법은 나를 아는데 있고  둘째) 우리의 고유신앙을 찾아서 지켜야 하며  셋째) 6천년 역사를 회복하여야 하며  넷째) 정신을 하나로 통일하여야 한다.   즉 진실*평화*통일의 민족정신을 광복하여야 한다고 주창한 것이다.   이 같이 강령을 결정한 단학회의 제2대 회장은 운초 계연수였다.





단학회보를 내는 데는 서로군정서 총판 석주 이상룡 선생의 도움을 받았고, 광복군 제1영 사령장 오동진 장군이 교당과 전토를 사서 기증하여 주었다. 이유립이 기억한 단학회보의 주요 기사는 아래와 같다.





[필자 보주補註] 이상룡과 오동진 선생이 [환단고기]의 발간에서부터 단학회보의 간행 등 여러모로 깊숙이 간여하면서 지원을 계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개천절의 정의로서 단군의 건국이 개천이 아니며 환웅의 신시 개천이 개천이다.


   - 대종교가 주장하는 단군 개천은 환웅천왕의 태백산 천강을 변조한 것으로 신앙 일변도의 비과학적인 개천역사관이다.  『환단고기』에 실린「삼성기」와 『규원사화』에 나오는 신시역년神市曆年 1564年 전(傳)18세를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 대종교에서는 단군을 삼신일체 상제로 믿고 있으나 단학회에서는 삼신일체 상제를 우주유일의 주재신主宰神이요 세계 인류의 원조로 보고 있다. 환인천제는 환국의 시조요 환웅은 신시神市의 시조 단군은 조선朝鮮의 시조일 따름이라 하였다.


   - 단학회에서는 교주라는 직제를 두지 않고 다만 당각堂閣을 단위로 하는 통일기구를 확대하는 것으로 멈추었다.





특히 단학회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업적으로는 사료의 수집이었다.  행촌 이암의 『삼성기三聖記』『단군세기』『태백진훈太白眞訓』과 을파소의 『참정계參佺戒』, 이맥의 『태백유사太白遺史』 권현 의 『규원사화』 이단해의 『신단실기』 등을 단학회보에 연재하였다는 것이며 「천부경」「삼일신고」를 주해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단학회는 8.15 광복을 맞게 되는데 그동안 단학회 회장을 맡은 인사들은 아래와 같다.





1대) 이 기(순국)   2대) 계연수   3대) 최시흥   4대) 이덕수  


5대) 이용담(투옥)   6대) 이유립





해방 후에 평양에서 단학회를 재건하였다가 6.25동란으로 월남한 이유립 선생 자신이 1960년 대전에서 제6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뒤 본부와 거처를 강화도 마리산(마니산)으로 옮겼으며 이름을 [단단학회]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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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무새 죽이기-보론】 『악질식민빠』의 “위서僞書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을 수 있다”...반론[1]  궤변망상학의 알량한 떡밥  2009/12/26 12:57


 http://blog.naver.com/nero1003/70076654337






【앵무새 죽이기-보론】 『악질식민빠』의 “위서僞書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을 수 있다”...반론





[환단고기]에 대한 입장 정리 - 自重*愛님 블로그에서 무례하게 강탈 





간단히 정리한다면, 책의 표면적인 서지와 실제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책을 위서라고 합니다.   기초적인 얘기가 되겠습니다만, '위서' 라 하여도 그것의 내용이 모두 거짓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진서'라 하여도 그 내용이 모두 진실이란 의미도 아니지요.





그러므로 가장 원칙적인 입장은 '진서이건 위서이건 그 안에 담긴 진실을 탐구해 볼 여지가 있다' 는 것이겠지요. (저는 이게 '환단고기'에 관해서는 온정적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료비판이라는 측면에서, 위서는 접근방법에 있어 진서보다 훨씬 많은 부담 ㅡ 신뢰성에 대한 의문 ㅡ 을 안게 됩니다.





그건 책의 '실제 저자'가 다른 이를 '표면상의 저자' 로 내세웠다거나 '성립시기'를 변조했다는 점에서 저자의 의도가 깊숙히 개입되었다는 점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서에서 그 '진실' 이라는 것을 찾으려 할 때는 다른 사료와의 교차검증을 거치기에 앞서, 그 실제 성립시기와 실제 저자 등을 중심으로 필터링을 거치는 것이 특히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료'인가 '사설(史說)' 인가도 걸러져야겠지요.  그 점에서 환단고기는 일일히 다 언급할 수도 없는 심각한 문제들을 수도 없이 노출합니다.  성립시기가 1970년대라면 사료가치자체가 없다시피한데(1911년이라도 사료가치가 없지만), 그 내용은 더욱 가관이니까요. 





커,발,한은 민세 안재홍의 것을 베꼈고, 삼조선설은 단재의 것을, 아한 - 나반은 신사기를, 가림토는 권덕규를, 세계관은 조선유기와 규원사화를....그리고 사상은 최동과 M선생의 (그리고 한암당이 일제시대로부터 간직해왔을) 동문동조론적 대아시아주의를.(하긴, 한암당의 트레이드마크인 '따무르자' 마저도 정인보를 베꼈죠.)





즉 기록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대부분은 일제시대의 학자들, 그것도 해방 후에나 집중적으로 재발간된 책들을 베낀 '사설' 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게다가 저자의 불순한 의도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대아시아주의, 태백교와 철성 이씨, 독립운동가와 민족으로의 위장, 대종교에 대한 경쟁의식, 삭주관련 내용같은 것들이 그런 것이지요.





위에서 언급한 온정적인 원칙론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환단고기를 '사료'란 측면으로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진서건 위서건 진실을 탐구해 볼 여지가 있다' 고 한 다음, 그 다음 단계의 과정을 외면해버리는 것이지요. 정말로 단순화시키면,「판단은 위서로, 접근은 진서로」





저는 그런 원칙론에서 더 나아가지 않은 온정주의자들에게도 사태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환단고기는 민족사학자들의 사설(史說)에 대한 탐구를 심각하게 교란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역사범죄의 역(域)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앵무새들의 합창]





<초록불>   당연한 말씀. 환단고기에 대해서 공부 좀 해보면 저런 이야기는 쏙 들어가야 마땅하죠.


<自重自愛> 잘 읽었습니다. (제가 반론이나 첨언을 할 정도의 실력은 못 됩니다. -_-;;;;)


<뚱띠이>   말 그대로 썰(說)을 실(實)로 받은 것이군요.....


<소하>    환단고기는 이름만 고기지요. 옛 기록일수록(단어나 용어) 읽고 이해하는 것이 어려워야 하는 법인데 말이죠.  환단고기는 너무 쉽습니다. 차라리 규원사화가 더 옛스러운 풍모가 느껴집니다.


<초록불>   소하님 / 규원사화는 1920년대까지는 내려가니까요. 그보다 50년후에 만들어진 환단고기와는...


<악질식민빠> 초록불 님 / '여지가 있다' 고만 하고 덮은 후 프로파간다로 활용한다면, 그게 '카더라' 보다 나은 게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중자애 님 / 환단고기에 대해 온정주의적 원칙론이 왜곡되어 활용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에, 굳이 무례를 무릅쓰고 토를 달았습니다. 


            소하 훃 / 규원사화는 그래도 옛(?) 풍토가 남아있을 때 지어진 거니까요.  


            비밀글 님 / 크핫핫핫핫핫....;ㅁ; 가서 보고 알았습니다 OTL  豊田大中과 克林頓을 보고도 그분이 '퍼왔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 (이거 써먹어야 할 듯...;; 데굴데굴)








【반론에 들어가기 앞서】





그야말로 [앵무새]가 신임해마지 않는 [악질식민빠]의 자료를 『위서론』의 대문을 장식한 [문패]로 자랑스럽게 언급하였으니 필자로서도 그걸 거론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군요.   그래서 본격적인 반론에 앞서 [환단고기]가 진정으로 함축하고 있는 <사료적 가치>를 또다시 지극히 얄팍한 몰상식함으로 판단한 <허망한 사설>로 [물타기]를 하니 그런 경망스런 작태(作態)를 일소(一掃)하기에 가장 알맞은 전제로서 먼저 [솔본 2005. 06.26]님의 고언(苦言-쓴 소리 한마디)을 전재(全載)하고 시작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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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은 역사서인가? 신화인가?





[성경]을 史書로 취급하는 역사학자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고대의 중근동역사 탐구에 훌륭한 텍스트이다.   다시 말해 사서와 텍스트는 다른 것이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정말로 <호머>의 일리어드가 없었다면 트로이의 역사는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환단고기]는 史書 이전에 텍스트이다.   이러한 텍스트에는 역사,신화, 종교, 전설, 민담 그리고 작자의 상상력이 모두 동원되기 마련이다.   즉 텍스트는 보다 넓은 인문학의 범주에서 사서를 포함한다.   그렇기에 [환단고기]는 역사서로 규정되는 것을 스스로 뛰어넘고 있다.





텍스트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 등은 그 원형에 있어서 사실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함의含意하고 있는 상징과 의미이며 동시에 진정한 해석이다.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겠지만 왜 그가 '알'이라는 곳에서 태어나야 했는지 그 의미와 상징과 해석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만에서 만에 하나 [환단고기]가 후대에 어느 작가에 의한 총체적 상상력의 동원이라 하더라도 그 내면에 흐르는 주장과 함의는 동북아 고대사의 해석에 충분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2. [환단고기]에서 환국 12연방을 주장하는 내용이 사실인가? 상상인가?





최근 러시아와 중국이 발굴해 내는 고고학 증거들은 분명히 시베리아와 동북아시아의 선사문명이 타 지역과 구별되는 문화공동체의 성격이 뚜렷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을 위해 최몽룡*이헌종*강인욱 등이 러시아 고고학자들과 공동연구로 펴낸 "시베리아 선사고고학" (도서출판 주류성)의 일독一讀을 권한다.





빗살무늬 토기와 세형돌날 석기 (Microlic Flint)의 발상지로 대표되는 이 지역의 선사문명은 인류 최초의 세계화를 촉진한  문명이다.   아이러니칼한 것은 세계 역사학계와 고고학계가 고민하는 시베리아-동북아 문화공동체 문제에 대해 [환단고기]는 그것이 사실이든 상상이든 대답을 이미 해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단 우리는 [환단고기]를 <텍스트>로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환단고기]가 누군가에 의해 쓰여 질 무렵에 지금과 같은 시베리아-동북아 선사문명의 수수께끼가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환단고기]와 [고고학]을 놓고 볼 때 [환단고기]의 『선 대답』과 [고고학]의 『후 질문』이라는 기이한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 [환단고기]는 비교언어학적으로도 의미심장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환국의 주신主神 <안파견>이 만주-퉁구스의 최고신인 <아브카이 한>과 중앙아시아의 통치자  <아바칸>으로 연결되고 수메르어로 <안파-게니 Anpa geni - 하늘 꼭대기의 삼위신)로 해석되는 것은 모두 우연일까?





또한 [삼국유사]의 <아사달>과 더불어 [환단고기]에만 등장하는 신성한 도시 <아이사타>가 수메르어 <아쉬테 ashite - 거룩한 곳*통치권*왕위)로 연결되는 것도 우연인가?





정말로 [환단고기]의 저자는 최근에서야 펜실베니아 대학의 연구팀이 해석한 <아쉬테>를 수십 년 전에 전능한 전지자처럼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인가?





체첸과 잉구세티아 를 포함한 코카서스지역의 첼렌추크 비문이 전하는 위대한 군주 <박타르 Baktar>의 전설은 우리의 <박달>과 어떠한 상호관계가 없다고 단호히 이야기할 수 있는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지역에서 켈트신화에 등장하는 전쟁 신 <찌우 Ziu>는 [환단고기]의 <치우>와 진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가?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강력한 군주라는 뜻의 <gebar Kan>은 [환단고기]의 <거발한>과 진실로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것일까?





이러한 많은 질문들에 어떠한 대답조차 하지 못하면서 그저 [환단고기]를 순수 창작물로만 단정하는 것은 속단이다.





[환단고기]가 정밀한 역사서는 아닐지 모르나 적어도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텍스트임은 분명하다.   아울러 그것을 밝히고 해석하는 것은 역사학자의 몫이 아니다.   이는 종합적인 [인문학]의 영역이다.   감히 역사학자가 떠들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중국 史書가 전하는 대로 고조선에 <8조법금>이 있었고 황제가 동이의 나라에서 <홍범구주>를 얻었다면 그것이 문자로 성립되지 않고서 어떻게 가능했단 말인가?   이에 대해 오로지 [환단고기]만이 고조선에 글자가 있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한자의 기원으로 보는 [갑골문]과 [도기문] 그리고 [금문]과 [복사문자] 가운데 중국적인 해석으로 가능한 것은 불과 30%에 지나지 않는다.   갑골문*복사문*금문이 한바漢字의 기원이라면서 어떻게 30%밖에 해석되지 않는가?   이는 프랑스어 속에 가능한 영어적 해석의 양만큼도 안 되는 것이다.   또한 프랑스어에서 일부가 영어적으로 해석된다고 해서 프랑스어가 영어의 기원인가?   개가 웃을 일이다.





70%이상이 중국 한자로 해석되지 않는 동이의 복사문*갑골문*금문 등의 존재는 어떻게 보아야 합리적인가?   이러한 의문들에 정확히 답할 수 없으면서 쉽사리 [환단고기]를 『위서』운운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환단고기]는 역사학자들이 대답하지 못하는 부분에  아니!  질문조차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문제에 이미 맞든 틀리든 대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실로 중요한 의문은 어떻게 그러한 대답이 질문도 있기 전에 가능했는가? 하는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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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론各論에 들어가서】





[악질식민빠의 주장 - 단락 1]





[환단고기]에 대한 입장 정리 - 自重*愛님 블로그에서 무례하게 강탈 





간단히 정리한다면 책의 표면적인 서지와 실제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책을 위서라고 합니다.   기초적인 얘기가 되겠습니다만 '위서' 라 하여도 그것의 내용이 모두 거짓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진서'라 하여도 그 내용이 모두 진실이란 의미도 아니지요.





그러므로 가장 원칙적인 입장은 '진서이건 위서이건 그 안에 담긴 진실을 탐구해 볼 여지가 있다' 는 것이겠지요. (저는 이게 '환단고기'에 관해서는 온정적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료비판이라는 측면에서 위서는 접근방법에 있어 진서보다 훨씬 많은 부담-신뢰성에 대한 의문-을 안게 됩니다.





그건 책의 '실제 저자'가 다른 이를 '표면상의 저자' 로 내세웠다거나 '성립시기'를 변조했다는 점에서 저자의 의도가 깊숙히 개입되었다는 점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서에서 그 '진실' 이라는 것을 찾으려 할 때는 다른 사료와의 교차검증을 거치기에 앞서 그 실제 성립시기와 실제 저자 등을 중심으로 필터링을 거치는 것이 특히 선행되어야 합니다.





[필자의 견해]





[환단고기]에 대한 입장 정리에서 【간단히 정리한다면......하지만 사료비판이라는 측면에서 위서는 접근방법에 있어 진서보다 훨씬 많은 부담-신뢰성에 대한 의문-을 안게 됩니다】부분에 대해서는 필자도 공감이 가는 대목이군요.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뒷 구절에서는 이러한 전제를 다분히 축소 지향적*목적 지향적으로 해석하여 [위서의 접근방법=책의 「실제 저자」가 다른 이를 「표면상의 저자」 로 내세웠다거나 「성립시기」를 변조했다는 점에서 저자의 의도가 깊숙이 개입되었다는 사실 추정을 위서 판정의 대전제]로 단순화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의도야 뻔하지요.   이렇게 단정 지음으로서 결과론적으로 [환단고기]에 대한 위서 판별 기준에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A라는 일반적인 전제 거론] - [전제의 단순화 과정인 B라는 판별 기준의 의도적인 설정] - [그러므로 C라는 저서가 위서라는 독자讀者의 판단을 교묘하게 유도]  하는 전형적인 물타기 수법입니다.





더군다나 이런 과정의 핵심 연결고리인 [B]의 실체가 완전히 독단적인 해석이며 일방적인 판단입니다.





<실제 저자-이유립 선생을 의미하였겠지요>가 다른 이를 <표면상의 저자-계연수 선생이나 원 저본의 저자들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로 내세웠다거나 [성립시기- 1911년이나 원저자의 편찬 시기]를 변조했다는 주장은 필자가 이미 [이유립선생과 환단고기 위서논쟁]에서 명백히 밝혀두었으니 [앵무새]들 스스로만 홀로 믿고 기회 있을 때마다 내세우는 단정이라고 보여 지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미리 짜여 진 구도에 따라 제 입으로 제 꼬리를 잡고 잡았다! 하는 자신들만 모를 뿐 한 걸음만 떨어져 바라보면 다람쥐가 쳇바퀴를 굴리면서 좋아라! 하는 우스운 코메디입니다. 





따라서 필자로서도 [실제 성립시기와 실제 저자 등을 중심으로 필터링을 거치는 것] 만큼이나 【위서여부의 판별과 그 진실성을 찾으려 할 때는 다른 사료들과의 교차검증이나 여러 판별 기준을 통한 종합적인 비교분석】도 매우 중요하고 절대로 경시해서는 아니 되는 전제이며 이런 과정이 빠짐없이 그리고 엄밀하게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 문헌의 제작시기와 실제 저자의 정합성이 필요충분조건으로 확보되어진다는 점을 재삼 강조하고 싶습니다.





[악질식민빠의 주장 - 단락 2]





이것이 '사료'인가 '사설(史說)' 인가도 걸러져야겠지요.  그 점에서 환단고기는 일일히 다 언급할 수도 없는 심각한 문제들을 수도 없이 노출합니다.  성립시기가 1970년대라면 사료가치 자체가 없다시피 한데(1911년이라도 사료가치가 없지만), 그 내용은 더욱 가관이니까요. 





커,발,한은 민세 안재홍의 것을 베꼈고, 삼조선설은 단재의 것을, 아한 - 나반은 신사기를, 가림토는 권덕규를, 세계관은 조선유기와 규원사화를....그리고 사상은 최동과 M선생의 (그리고 한암당이 일제시대로부터 간직해왔을) 동문동조론적 대아시아주의를.(하긴, 한암당의 트레이드마크인 '따무르자' 마저도 정인보를 베꼈죠.)





즉 기록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대부분은 일제시대의 학자들, 그것도 해방 후에나 집중적으로 재발간된 책들을 베낀 '사설' 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게다가 저자의 불순한 의도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대아시아주의, 태백교와 철성 이씨, 독립운동가와 민족으로의 위장, 대종교에 대한 경쟁의식, 삭주관련 내용같은 것들이 그런 것이지요.





[필자의 견해]





이 단락에서는 [악질식민빠]의 주장이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어지는군요.   아주 의도적입니다.   왜 그런지는 먼저 주장의 핵심을 열거한 뒤에 하나하나 따져보겠습니다.





1. 성립시기가 1911년이라도 사료가치가 없지만 더구나 1970년대라면 사료가치 자체가 없다시피 하다.


2. 기록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대부분은 일제시대의 학자들 그것도 해방 후에나 집중적으로 재 발간된 책들을 베낀 '사설' 들로 구성되어있다.


3. 게다가 저자의 불순한 의도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허나 이런 어린애 같은 주장은 한마디로 우리 민족사의 연연한 흐름은 물론 꾸준히 지탱해 온 역사관의 공통적인 기반인 선교문화(仙敎文化)의 흐름을 비롯하여 韓민족 고유문명의 발현형태나 과정을 전혀 볼 줄 모르는 철없는 小人들의 단견(短見)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1. 항의 경우





출현 시기만 물고 늘어지며 사료가치 운운하는데 일고(一考)의 가치조차 없는 망발입니다.   사료비판은 어떻게 해야 하며 사료가치에 관한 판단은 어찌해야 되는지 전혀 심사숙고해보지 않았으니 이런 궤변이 나오지요.   [사료비판]에 대하여는 필자가 【위서의 정의에 대해 알아봅시다】에서 자세히 언급해 놓았습니다.  





쉽게 말해 [환단고기 평주 또는 정해-이유립선생의 환단고기 번역*주해본]는 실제로 이유립 선생이 원본을 번역 출간하기 위하여 쓴 것입니다.   [환단고기 평주]와 같은 귀중한 사료들은 선생이 [환단고기]를 직접 풀이해 놓았던 자료들입니다.  





더불어 1979년에 펴낸 [환단고기]에는 정오표가 달린 책이 있는데 <정오표>는 원본에서 틀린 글자나 잘못된 내용을 고쳐서 추가한 것으로 이 글씨는 선생의 서체書體가 분명합니다.   즉 [환단고기] 원문을 직접 수정한 흔적이라는 증빙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환단고기]가 적어도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책이라는 사실과 이 때문에 선생이 부분 가필한 점 역시 분명하다는 추정입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필사본의 출현 시기인 1911년이나 1979년이라는 년도에 큰 비중을 두어 모든 초점을 그 시점에만 집착한 나머지 근대의 위서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다면 이는 진정한 역사 연구 자세가 아니며 올바른 분석*검증 태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반론도 필자는 이미 앞선 글에서 조목조목 언급해 놓았으니 반복하여 이야기 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2. 항에 있어서





아주 그럴듯하게 <사료>인가? <사설史說> 인가? 운운하면서 슬그머니 예정된 수순에 이르는 군요.   결국 이 글 전체를 통해 피력하고 싶은 결론 부분입니다.   망상도 이 정도에 이르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1) 커,발,한은 민세 안재홍의 것을 베꼈다는 부분





참으로 한심하다.   [커발한]의 어의와 유래를 이렇게도 모르고 있으며 우리 민족 고유의 언어습속에 이토록 까막눈이라면 정말 이런 억단臆斷이나 해괴한 억지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다.   역시 한민족의 핏줄은 아닌듯하여 일말의 회오를 느낀다.   오래도록 이어온 [커발한]의 어원을 아주 잘 알고 인용한 민세 안재홍 선생이 차라리 참된 한민족의 후손일진대...누구나 관심만 기울이면 똑 같은 결론에 이르며 또 동일하게 쓸 수밖에 없는 [커발한]이란 개념을 누가 누구걸 베꼈다고 착각하는 경솔함이 도를 넘었다.   그래서 한번 문헌들을 뒤져보았다.





[어원語源 추적]





삼신일체지도재대원일지의 三神一體之道在大圓一之義   <환단고기 단군세기 서 檀君世紀 序>





무릇 <삼신이 하나>라는 이치는 거발환 즉 커발한(대원일大圓一)에 그 뜻이 있으니...





오제설운...동방사명왈태목기제왈청기호왈동인호생기좌왈대웅재태평천시위대광명야 五帝設云...東方司命曰太木其帝曰靑其號曰同仁好生其佐曰大雄在太平天是爲大光明也  <환단고기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오제설>에서 말한다...동방의 사명을 태목이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청이니 그 호를 동인호생이라 한다.   그를 보좌함을 대웅이라 하며 태평의 하늘에 있으니 이를 커발환(대광명大光明)이라 한다.





개유천지인삼극대원일지위서물원의칙천하구환지예악개부재어삼신고제지속호 旣有天地人三極大圓一之爲庶物原義則天下九桓之禮樂豈不在於三神古祭之俗乎  <환단고기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이미 천지인 삼극은 있었고 커발한(대원일大圓一)은 이것이 만물의 원리가 되었으니 곧 천하 구한의 예악이 어찌 삼신고제의 풍속에 없었을 손가?





환국주왈환자전일야광명야전일위삼신지지능광명위삼신지실덕내우주만물지소선 조대기왈고속숭상광명이일위신이천위조...태계자광명지소회삼신지수거인득광이작이무위자화 桓國注曰桓者全一也光明也全一爲三神之智能光明爲三神之實德乃宇宙萬物之所先 朝代記曰古俗崇尙光明以日爲神以天爲組...太階者光明之所會三神之攸居人得光以作而無爲自化 <환단고기 태백일사 환국본기>





환桓은 전일의 광명이라.   천일을 삼신의 지혜와 능력이라 하고 광명을 삼신의 참된 덕이라 하니 온 우주만물에 앞섬을 말함이다.   <조대기>에서 말한다.   '옛 풍속은 광명을 숭상하였으니 해로써 신을 삼고 하늘로써 조상을 삼았나니,   만방의 백성은 이를 믿고 서로 의심치 않으며 아침저녁에 경배하며 이를 가지고 일과로 삼았다...태양은 광명이 만나는 곳으로서 옛날부터 삼신이 계시는 곳이라.   사람은 빛을 얻음으로써 농사짓고, 하는 바 없는 듯하면서도 스스로 교화되나니...








커발한의 관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뿌리가 우리 민족 고유 신앙체계인 선교仙敎와 삼신사상의 근저에 녹아있었음이 드러나는 귀중한 기록들이다.








이후유제환인자출위국인소애재왈안파견역칭거발환야개소위안파야견내계천립부지명야소위거발환천지인정일지호야 而後有帝桓仁者出爲國人所愛戴曰安巴堅亦稱居發桓也蓋所謂安巴也堅乃繼天立父之名也所謂居發桓天地人定一之號也  <환단고기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장구한 세월 뒤에 한인이란 분이 나타나셔서 여러 사람들의 사랑으로 추대되어 안파견이라고도 하고 [거발한]이라고도 하였다.   대저 안파견이라 함은 하늘을 계승하여 아버지가 되었다는 말이고 [거발한]이라 함은 천*지*인을 하나로 정한다는 뜻의 이름이니라.





일세환웅천황일운거발환재위구십사년수일백이십세 一世曰桓雄天皇一云居發桓在位九十四年壽一百二十歲 <환단고기 삼성기전 하 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





1세를 한웅천왕이라 하며 또 거발환 즉 커발한居發桓이라 하니 재위 94년에 120세까지 사셨다.





환인시대부터 나타났으며 기원전 3898년에 처음으로 신시神市에서 환웅시대를 연 분도 거발환(커발한이라 불리던)이라는 걸 알게 해준다.   대원일*대광명에 바탕을 둔 [커발한]의 관념은 그 뒤로 대종교와 단학회로 이어졌으며 민족해방과 조국광복에 진력하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된 <안재홍-사실 이분은 밝*불*발*배의 관념에서 밝사상을 도출한 걸로 보여 진다> 선생이 어떤 경로나 만남을 통해서든지 이를 접하였을 것이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런데 이걸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경망스런 태도는 지극히 못마땅하다.   그럼 그 외에 다른 용례用例는 없었을까?   궁금하여 더 뒤적여보니 다음과 같은 단군시대까지 일관성 있게 전해 내려가고 있는 기록들이 보인다





帝召三郞乙普勒問神王倧佺之道普勒交拇加右手行 三六大禮而進言曰神者能引出萬物各全其性神之所妙民皆依恃也 王者能德義理世各安其命王之所宣民皆承服也倧者國之所選也佺 者民之所擧也皆七日爲回就三神執盟三忽爲佺九桓爲倧盖其道也 欲爲父者斯父矣欲爲君者斯君矣欲爲師者斯師矣爲子爲臣爲徒者 亦斯子斯臣斯徒矣故神市開天之道亦以神施敎知我求獨空我存物 能爲福於人世而已代天神而王天下弘道益衆無一人失性代萬王而 主人間去病解怨無一物害命使國中之人知改妄卽眞而三七計日會 全人執戒自是朝有倧訓野有佺戒宇宙精氣粹鍾日域三光五精凝結 腦海玄妙自得光明共濟是爲[居發桓커발한*거발환]也施之九桓九桓之民咸率歸一于化   <환단고기 단군세기 3세 단군 가륵조>





단제께서 삼랑 을보륵을 불러 신왕종전의 도를 물으셨다.   보륵은 엄지손가락을 교차시켜 바른손을 올려놓아 삼육대례를 행한 다음에 나아가서 말씀드렸다.





“신은 능히 만물을 생겨나게 하여 각자 제 성품을 다하게 하심에 신의 깊은 듯이 있어 백성들은 모두 의지하고 빕니다.   왕은 그 덕과 의로써 세상을 다스려 각각 그 삶을 편안하게 함에 왕의 바른 다스림이 있으니 백성들 모두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른 다스림은 나라가 선택하는 것이며 완전함은 백성이 바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7일을 기한으로 삼신님께 나아가 세 번을 빌어 온전하게 되기를 다짐하면 구한이 바로 다스려지게 됩니다.   대저 그 길은 아비 되려 하는 자는 곧 아비답게 하고 임금 노릇하고자 하는 이는 임금답게 하며 스승이 되고자 하는 이는 곧 스승답게 하고 아들 되고자 하고 신하되고자 하며 제자 되고자 하는 이도 역시 아름답고 신하답고 제자답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시개천의 도는 역시 신으로 가르침을 베푼 것이니 나를 알고 홀로 있기를 구하며 나를 비게 한 다음 물건이 있게 함으로써 능히 복을 세상에 미치게 할 뿐일저!   천신을 대신하여 세상에서 왕이 되어 도를 넓혀 무리를 이롭게 하고 한사람이라도 본성을 잃는 일 없게 하고 만왕을 대신하여 인간을 주관하며 병을 제거하고 원망을 풀며 물건 하나라도 그 생겨난 바를 해치는 일 없게 하고 나라 안 사람들로 하여금 망령됨을 고쳐 참에 이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3*7일을 기한으로 모든 사람이 모여 계를 지켰다.   이로부터 조정엔 종훈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전계가 있었나니 우주의 정기는 순수하게 온 누리에 내리고 삼광오정은 사람의 머리에 모여 뭉쳐서 깊고 묘한 것을 얻게 되니 저절로 서로 돕는 것이라.  이를 커발한(居發桓)이라 하며 구환(한)에 두루 베풀어지니 구환(한)의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며 교화되어 하나 같이 되었다.





冬十月命建大始殿極壯麗奉天帝桓雄遺象而安之頭上光彩閃閃如 大日有圓光照耀宇宙坐於檀樹之下桓花之上如一眞神有圓心持天 符印標揭[大圓一]之圖於樓殿立號[居發桓커발한*거발환] <환단고기 단군세기 11세 단군 도해조>





겨울 10월에 대시전을 세우도록 명령하셨으니 매우 장려하였다.   돌아가신 천제 환웅의 모습을 받들어 모셨는데 그 머리 위에는 광채가 번쩍번쩍하여 마치 큰 해와 같았다.   둥근 빛은 온 우주를 비추며 박달나무 밑 환화의 위에 앉아 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 원의 한 가운데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천부의 인을 가지고 [대원일=커발한]의 그림을 누전에 걸어 놓으셨으니 이를 일러 커발한(居發桓)이라 하였다.





********* <이하以下는 우리 역사의 비밀에서 발췌> *********





     - <송서>에서 『백제가 요수부근에  요서군과 진평군 2군을 두어  백제군이라 불렀다.   진평군 진평현의 도성을 [거발성] 이라 하였다』  커발(거발)은  큰 왕이 있는 왕도라는 뜻이다.   또한 [건거발]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때 건建은 <크다>는 뜻의 한문이다.


     - <북사>에 『백제 왕성인 거발성은 고마성이다.   고마는 만주어로 격문의 전음이다』 여기에서 <격문>은  [대도시*왕도*수도]란 뜻이다.   그리고 <고마>의 의미도 [왕성*대성大城]을 뜻한다.





※ <당서>에는 『백제왕이 東과 西의 두 개 城에 거처한다』라고 하였다.





즉 [커발환]은 원래 [크고 밝으며 환하다-광명정대하다]란 <삼신합일三神合一>의 관념에서 유추되어진 우리 민족 고유의 관념체계(大圓一)이며 여기에서 다시 신이神異한 성인의 개념으로서 [거발한]이 나왔으니 한(汗*韓)은  가한이나 칸(KING)이란 뜻을 가지고 사용하였던 민족 고유의 언어 형태소로 보인다.   한민족 지성知性의 최고 사유思惟와도 같은 이들 언어군은 환인*환웅시대로부터 열국시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유전되어온 우리말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귀중한 언어학적 사료이다.





     - 이들 언어가 기원 전후시기에 조금 변화하여 [거발]의 용례로 사용되었을 무렵엔 그 의미가 [큰 사람大人 즉 大王이 거居한 도성*왕도*대성]이었다.


     - 아울러 병행되어 쓰여진 [건거발]이란 말도 결국은 <큰 왕이 있는 왕성>이란 뜻이다.





[거발]은 매우 근원적인 관념을 지닌 민족어로 승화*고착되어가면서 <만주어로 탁파卓巳> 라고 까지 발전하였다.   여기에서 <탁>은 선비어로 땅(토土)을 뜻하고 다시 말해 <땅을 가진*땅이 있는>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발>은 선비어로 군君을 뜻하고 임금을 의미한다(탁발-토후土后-한나라식의 투후)   단언하건대 [커발한*거발환]에서 발전한 [거발]에서 <탁파>가 나왔고 <탁발>로 이어졌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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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삼조선설은 단재의 것을 인용했다는 주장





궤변과 망상도 정도가 있어야 한다.   단재 신채호의 삼조선 관경에 대한 근원과 변화 과정에 관한 해답이 [환단고기]를 통하여 명쾌하게 풀어지는 것이지 이걸 오히려 거꾸로 해석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이 그 이전에 필사된 다른 여러 문헌에서 [삼조선]의 시원인 [삼한]을 획정하고 그 관경 안에서 여러 동이계열(東夷系列) 민족들이 동화*발전되어가는 과정들을 하나로 합쳐 일목요연하며 역력하게 추적해 낼 수 있는 사료로서 [환단고기]의 가치가 더욱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지금부터 하나하나 비교*검증해보기로 하자.





□ 삼한三韓 관경管境의 배경을 이루는 근본 사상





桓國-神市國-檀國을 공통적으로 꿰뚫는 성수聖數는 바로 [3]이다.  이는 우리 민족의 태생적 사유인 [삼신설三神說 -天一*地一*太一 즉 천*지*인의 合一인 천天과 공工]에서 비롯되었는바 이를 기본적인 관념체계로 삼아 모든 사회문화적 풍습과 제도가 태동하고 발전되었다.   따라서 조선 특유의 관경제도인 삼한*삼조선도 이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가. 정신적인 신앙체계로서 三神 사상





表訓天詞云大始上下四方曾未見暗黑古往今來只一光明矣自上界却有三神卽一上帝主體則爲一神非各有神也作用則三神也三神有引出萬物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稽夫三神曰天一日地一日太一天一主造化地一主敎化太一主治化... 大矣哉三神一體之爲庶物原理而庶物原理之爲德爲慧爲力也巍湯乎充塞于世玄玅乎不


可思議之爲運行也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표훈천사>에서 말한다.   『대시에 위아래 사방은 일찍이 아직 암흑으로 덮여 보이지 않더니 옛것은 가고 지금은 오니 오직 한 빛이 있어 밝더라.   상계로부터 또 삼신이 계셨으니 곧 한 분의 상제시라.   주체는 곧 일신이니 각각 신이 따로 있음이 아니나, 쓰임은 곧 삼신이시라.   삼신은 만물을 끌어내시고 전 세계를 통치하실 가늠할 수 없는 크나큰 지능을 가지셨더라...생각컨대 저 삼신을 천일이라 하고 지일이라 하고 태일이라 한다.   천일은 조화를 주관하고 지일은 교화를 주관하며 태일은 치화를 주관하느니라...크다 삼신일체의 만물의 원리 됨이여!   만물원리의 덕이여, 지혜여, 힘이 됨이여! 높고도 넓어서 세상에 가득하며 깊고 묘하여 불가사의하게 운행함이여!...





大辯經曰惟天一神冥冥在上乃以三大三圓三一之爲靈符者大降降 于萬萬世之萬萬民一切惟三神所造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대변경>에서 말한다.   “생각컨대 천일의 신께서는 아득하게 위에 계시나니 곧 삼대와 삼원과 삼일을 가지고 이를 영부하여 크게 내리시사 만만세의 만만백성에게 내리시니 일체는 애오라지 삼신께서 만드신 바니라”





桓國注曰桓者全一也光明也全一爲三神之智能光明爲三神之實德 乃宇宙萬物之所先也  <태백일사 환국본기>





환국의 주에서 말한다.   『환桓은 전일의 광명이라.   천일을 삼신의 지혜와 능력이라 하고 광명을 삼신의 참된 덕이라 하니 온 우주만물에 앞섬을 말함이다』 





竊想三神生天造物桓仁敎人立義自是子孫相傳玄玅得道光明理世旣有天地人三極大圓一之爲庶物原義則天下九桓之禮樂豈不在於三神古祭之俗乎傳曰三神之後稱爲桓國桓國天帝所居之邦又曰三神在桓國之先那般死爲三神夫三神者永久生命之根本也故曰人物同出於三神以三神爲一源之祖也桓仁亦代三神爲桓國天帝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그윽히 생각해 보건대 삼신은 하늘에 태어나시어 물건을 만드시고 환인은 사람을 가르치어 의를 세우시니 이로부터 자손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현묘한 가운데 도를 얻으시고 광명한 가운데 세상을 다스리시니라.   이미 천지인 삼극은 있었고 대원일은 이것이 만물의 원리가 되었으니 곧 천하 구한의 예악이 어찌 삼신고제의 풍속에 없었을 손가?   전에서 말한다.   “삼신의 후를 일러 환국이라 하니 환국은 천제께서 계시는 곳의 나라니라”





또 가로대 “삼신은 환국의 선대에 있었고 나반이 죽어 삼신이 되셨으니 그 삼신이라 함은 영구생명의 근본이라” 고 하였다.   그래서 또 말한다.   “사람과 물건이 함께 삼신에게서 나왔으니 삼신으로써 한 근원의 조상으로 삼느니라” 환인도 역시 삼신을 대신하사 환국의 천제가 되었다.





十月祭天 遂爲天下萬世之遺俗 此乃神州特有之盛典 而非外邦之可比也


太白山 獨壓崑崙之名 亦有餘矣 古之三神山者 卽太白山也 亦今白頭山也


盖上世神市之人文敎化 至于近世 雖不得健行 而天經神誥 猶有傳於後世


擧國男女 亦皆崇信於潛錠之中 卽人間生死 必曰三神所主 小兒十歲以內 身命安危 智愚俊庸 悉托於三神 夫三神者 卽創宇宙造萬物之天一神也


昔 司馬相如 謂漢主劉徹 曰陛下謙讓而弗發也 苛三神之驩韋昭注 三神上帝 三神之說 早已傳播於彼境也明矣   <태백일사 신시본기>





10월 제천은 마침내 천하만세의 풍습이 되었다.   이는 곧 신의 나라 특유의 성대한 행사로서 외국에는 이와 견줄만한 것이 없다.   태백산은 홀로 곤륜산의 명성을 누르고도 남는다.   옛날의 삼신산이라 함은 곧 태백산으로서 역시 지금의 백두산이다.   대저 그 옛날 신시의 인문교화는 근세에 이르러 건재하게 행해지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천경신고는 오히려 후세에 전해진 바가 있는 듯 거국적으로 남여가 역시 모두 말없는 가운데 받들고 있는 바로서 곧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이 주관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열 살 미만일 때에는 목숨의 안전과 위험, 우환, 잘 나고 못남 따위는 애오라지 모두 삼신께 의탁한다.   저 삼신은 곧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만드신 천일신이시다.   옛날 사마상여는 한나라의 왕 유철 (武帝)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 겸양하사 방탕하지 않으시면 삼신의 즐거움을 얻으실 것인즉>이라고 했는데 위소는 삼신상제에 주를 달아 <삼신의 설은 어느덧 저들의 땅에도 전파되었음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 고려팔관기高麗八觀記에도 민족신앙으로서 <삼신설>이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음을 [환단고기]에서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나. 종교적인 체계로서 신교합일神敎合一 사상





乎夫三神一體之道在大圓一之義造化之神降爲我性敎化之神降爲我命治化之神降爲我情故惟人爲最貴最尊於萬物者也...此乃天人相與之際緣執三神戒盟而始能歸于一者也故性命情之無機三神一體之上帝也與宇宙萬物混然同體與心氣身無跡而長存感息觸之無機桓因主祖也與世界萬邦一施而同樂與天地人無爲而自化也   <환단고기 단군세기 서>





무릇 <삼신이 하나>라는 이치는 대원일에 그 뜻이 있으니 조화의 신은 내려와 나의 성품(性)을 이루고 가르침의 신은 내려와 나의 삶(命)을 이루고 다스림의 신은 내려와 나의 정신(精)을 이룬다.   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인저...바로 하늘과 사람이 잘 어울렸을 때 이로부터 세 가지 신의 성품을 배워 계율로서 맹세한다면 비로소 하나라는 것에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품과 정신이 잘 어울려서 빈틈이 없으면 세 가지 신이 하나인 상제上帝와 같아서 우주만물과도 잘 어울리고, 마음과 기와 몸도 있는 듯 없는 듯 자취도 없이 오랫동안 존재하게 된다.   감*식*촉 이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면 그것이 바로 한님桓因 그대로인 셈이니 이 세상 어디에나 두루 그 덕을 베풀어서 함께 즐거우며 하늘*땅*사람과 더불어 끝없이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라. 





桓雄天王肇自開天生民施化演天經講神誥大訓于衆   <삼성기전 하>




















환웅천왕이 처음으로 몸소 하늘에 제사지내고 백성을 낳아 교화를 베풀고 천경과 신고를 가르치시니 무리들이 잘 따르게 되었다.





密記云...桓雄乃以三神設敎以佺戒爲業而聚衆作誓有勸懲善惡之法  <삼성기전 하>





밀기에서 말한다...환웅은 마침내 삼신으로서 가르침을 만들고 전계를 베풀어 무리를 모아 서약을 시켜 선악을 상주고 벌하는 법을 갖게 하였다.  





다. 국가통치이념과 체제의 근간으로서 三師(중앙)*三韓(관경)*三老(지방)제도 등





於是桓雄率衆三千...將風伯雨師雲師   <태백일사 신시본기*삼성기전 하>





이에 환웅이 3000의 무리를 이끌고...풍백*우사*운사(三師制度)를 데리고...





昔者 桓雄天王 思天下之大 非一人所能理化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刑主病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상>





옛날 한웅천왕께서는 천하가 크다 함을 아시고 한 사람이 능히 교화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시며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며 곡식을 주관하게 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병마와 선악을 주관하게하고 무릇 인간 세상의 360여사를 주관케 하시더라,





諸邑落皆自設三老三老亦曰三師有賢德者有財施者有識事者皆師事之是也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모든 부락에서는 스스로 삼로를 모셨으니 삼로는 또 삼사라고도 한다.   어진 덕을 갖춘 자가 있고 재물을 베푸는 자와 지를 갖춘 자가 있으니, 누구나 그들에게 사사함이 이와 같다.





注曰...故 自天光明 謂之桓也 自地光明 謂之檀也 所謂桓 卽九皇之謂也 韓亦卽大也 三韓曰風伯雨師雲師   <태백일사 신시본기>





주에서 말한다...때문에 하늘로부터의 밝음을 환(한)이라 하고 땅으로부터의 광명을 단이라 한다.   이른바 한은 구한을 말하는 것이다.   한은 곧 크다는 뜻이다.   삼한은 풍백*우사*운사라 한다. 





大辯說註曰...三神 乃天一地一太一之神也 一氣之自能動作 而爲造敎治三化之神 神卽氣也 氣卽虛也 虛卽一也 故 地有三韓 爲辰弁馬三京之韓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대변설의 주에서 말한다...삼신은 곧 천일*지일*태일의 신이다...일기는 그가 스스로 능히 동작하여 이루고 가르치고 다스리는 삼화의 신이 된다.   신은 즉 기이고 기는 곧 허이며 허는 즉 일이다.   때문에 땅에는 삼한이 있으니 진*변*마 삼경의 한이다.








□ 삼한관경 정립의 역사적 흐름





삼한*삼조선의 형성과 변천은 대략 [삼신오제본기와 환국본기에서의 구환九桓의 동화시대] - [신시본기의 삼한三韓 분조分朝시대] - [단군세기의 삼한에서 삼조선으로의 변화 정립시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이 감지된다.   이렇듯 삼한*삼조선의 인용문제에 대하여는 어느 기록이 어떤 기술을 베꼈다는 단정으로 말미암은 엄청난 파장이 일어날 것임을 고려할 때 엄격하고 정밀하게 상호기록(환단고기와 조선상고사)을 대조해야 한다.   이럼에도 단지 [삼조선]이란 문구 하나에만 매달려 [같으니까 베낀 것이다]라고 섣불리 단정하는 지극히 경망스러운 태도가 눈에 거슬린다.   아무튼 이제부터 원문들을 시대 순으로 차근차근 비교해보기로 하자.








자시이후치우천왕벽토지채동철병어산시구환개이삼신위일원지조주소도주관경주책화여중의일귀위화백병지생쌍수위거전자시구환실통우삼한관경지천제자내호왈단군왕검 自是以後蚩尤天王闢土地採銅鐵鍊兵興産時九桓皆以三神爲一源之祖主蘇塗主管境主責禍與衆議一歸爲和白竝智生雙修爲居佺自是九桓悉統于三韓管境之天帝子乃號曰檀君王儉   <환단고기 삼성기전三聖紀全 하편下篇>





이로부터 후에 치우천왕이 땅을 개간하고 구리와 쇠를 캐내서 군대를 조련하고 산업을 일으켰다.   때에 구환(한)은 모두 삼신(하늘*땅*사람)을 모두 한 뿌리의 조상으로 삼고 소도를 관리하고 관경을 관리하며 벌을 다스리는 것 등을 모두 다른 무리와 더불어 의논하고 하나로 뭉쳐 화백하였다.  이에 지혜와 삶을 나란히 닦으면서 온전함을 이루었다.   이때부터 구환(한)은 모조리 삼한에 통솔되고 나라 안의 천제의 아들은 단군이라고 불렀다.





시어구획천하지지분통삼한삼한유개오가육십사족 於是區劃天下之地分統三韓三韓有皆五加六十四族   <환단고기 단군세기 제1세 단군조>





이에 천하의 땅을 새로 갈라서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은 모두 5가 64족을 포함하였다.





熊族之中有檀國最盛王儉亦自天而降來御于不咸之山國人共立爲檀君是謂檀君王儉也生而至神兼聖圓滿統合九桓三韓管境復神市舊規天下大治擧世視同天神自是崇報之禮永世不替者也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웅족 가운데 단국이 있어 가장 강성했다.   왕검 역시 하늘에서 내려와서 불함산에 사시니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받들어 단군으로 모시어 이를 단군왕검이라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히 신묘하고 성스러워 구한의 삼한관경을 모두 통합하였다.   신시의 옛 규칙을 회복하니 천하는 크게 다스려져서 온 세상이 그를 천신과 같다고 보았다.   이때부터 숭보의 예는 영세토록 바뀌지 않았다.




개자신시개천 전십팔세 역 일천오백육십오년 이시유단군왕검이웅씨비왕 수대신시 통일구역 분삼한이관경 시위단군조선야 蓋自神市開天 傳十八世 歷一千五百六十五年 而始有檀君王儉以熊氏裨王 遂代神市 統一九域 分三韓以管境 是謂檀君朝鮮也   <환단고기 태백일사 신시본기>





대저 신시개천에서부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이 흘러서 비로소 단군왕검이 나셨다.   웅씨의 비왕으로서 마침내 신시에 대신하여 구역을 통일하고 관경으로 삼한을 나누었으니 이를 단군조선이라고 한다.





王儉 遂代其位 統九桓爲一 是爲檀君王儉也...遂與三韓 分土而治 辰韓 天王自爲也 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 是爲 一世檀君 阿斯達 三神所祭之地 後人 稱王儉城 以王儉舊宅 尙存故也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제1세 단군왕검조>





왕검은 마침내 그 왕위를 대신하여 구한을 통일하고 단군 왕검이라 하였다...마침내 삼한으로 나라를 나누어 통치하시니 진한은 스스로 천왕께서 다스리시고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를 여시어 조선이라 하시고 이를 일세 단군이라 한다.   아사달은 삼신을 제사지내는 곳인데 후인들은 왕검의 옛집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왕검성이라 했다.





檀君王儉 旣定天下 分三韓而管境 乃封熊伯多爲馬韓 都於達支國 亦名曰白牙岡也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제1세 단군왕검조>





단군왕검은 천하를 평정하시더니 삼한으로 나누어 관경을 만드시고 곧 웅백다를 봉하여 마한이라고 하였다.   달지국에 도읍하였으니 역시 백아강이라고도 불렀다.





於是 檀君王儉 擇蚩尤後孫中有智謀勇力者爲番韓 立府險瀆 今亦稱王儉城也 蚩頭男 蚩尤天王之後也 以勇智著聞於世 檀君乃召見而奇之 卽拜爲番韓 兼帶監虞之政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 제1세 단군왕검조>





이에 단군왕검은 치우의 후손 가운데 지모가 뛰어나게 세상에 소문이 난 자를 골라 번한이라 하고 부를 험독에 세우게 하였다.   지금도 역시 왕검성이라고 한다.   치두남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게 세상에 알려졌다.   단군은 곧 불러 보시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곧 그를 번한으로 임명한 뒤 겸직하여 우禹의 정치를 감독케 하였다.





무인원년회제한우상춘제삼신우구월산사신지발리작서효사 기사왈 『진한진국중치도함유신모한보기좌번한공기남참암 위사벽성주행신경여칭추극기극기백아강칭○소밀랑추자안덕향 수미균평위뢰덕호신정흥방보태평조항칠십국영보삼한의왕업유...』戊寅元年會諸汗于常春祭三神于九月山使神誌發理作誓效訶 其訶曰 『...眞韓鎭國中治道咸維新慕韓保其左番韓控其南巉岩 圍四壁聖主幸新京如秤錘極器極器白牙岡秤○蘇密郞錘者安德鄕 首尾均平位賴德護神精興邦保太平朝降七十國永保三韓義王業有...』 <환단고기 단군세기 제6세 단군 달문조>





무진 원년 모든 한을 상춘에 모이게 하여 삼신을 구월산에 제사케 하고 신지인 발리로 하여금 서효사를 짓게 하였다.   그 사에 가로대 『...진한은 나라 안을 진압하고 모한은 왼쪽을 보필하고 번한은 그 남쪽에 대비하여 험준한 바윗돌이 사방의 벽을 에워쌈과 같으니라.   성스러운 단군님께서 신경에 나아가심은 마치 저울추 저울그릇과 같으니라.   저울그릇은 백아강이요 저울대는 소밀랑이라.   저울추는 안덕향이니 앞뒤가 균형이 잡혀 평균을 이뤄 나란히 있고 덕을 신뢰하고 신정을 지키며 나라를 일으켜 태평을 유지하니라.   정사를 하매 70국을 항복시키고 길이 삼한의 뜻을 간직하니라...』





五月 改制三韓 爲三朝鮮 朝鮮 謂管境也 眞朝鮮 天王自爲 而地則仍舊辰韓也 政由天王 三韓 皆一統就令也 命黎元興爲馬韓 治莫朝鮮 徐于餘爲番韓 治番朝鮮 總之名 曰檀君管境 是則辰韓 史稱檀君朝鮮是也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하 제22세 단군 색불루조>





5월 제도를 개정하여 삼한을 삼조선이라 하다.   조선이란 관경을 말한다.  진조선은 천왕이 몸소 다스리고 땅은 곧 옛날의 진한대로 하고  정치는 천왕이 친히 다스리도록 하니 삼한이 모두 하나같이 명령에 복종하였다.   여원홍에게 명하여 마한이 되어 막조선을 통치케 하고 서우여로 하여금 번한을 삼아 번조선을 통치케 하였다.   이를 통틀어 이름하여 단군의 관경이라 한다.   이것이 곧 진국으로 역사에서 단군조선이라 함은 이것이다.


   


檀君索弗婁 初幷三韓 大改國制...乃先遣勸降 約封爲裨王 再諭以聽 至是 命徐于餘爲番韓 四年己亥 眞朝鮮 以天王勅 文傳 曰爾三韓 上奉天神 接化群生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번한세가 하 제22세 단군 색불루조>





단군 색불루는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이에 먼저 사람을 보내어 서우여를 비왕에 봉할 것을 약속하시며 다시 설득하니 이에 따르므로 단제께서는 그를 번한으로 삼으셨다.   4년 기해에 진조선은 천왕의 칙서를 전달하였는데 가로대 『그대들 삼한은 천신을 위로 받들고 백성들도 이에 따르도록 교화하라』고 하였다.





어시구물위제장소추내어삼월십육일축단제천수즉위 우장당경개국호위대부여개삼한위삼조선자시삼조선수봉단군위 일존임리지제이회화전지권부재일존야 於是丘勿爲諸將所推乃於三月十六日築壇祭天遂卽位 于藏唐京改國號爲大夫餘改三韓爲三朝鮮自是三朝鮮雖奉檀君爲 一尊臨理之制而惟和戰之權不在一尊也   <환단고기 단군세기 제44세 단군 구물조>





이에 구물은 여러 장수들의 추앙을 받아 마침내 3월 16일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이에 나라이름은 대부여라고 고치고 삼한은 삼조선이라고 바꾸어 불렀다.   이때부터 삼조선은 단군을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기는 했지만 전쟁의 권한에 있어서는 애오라지 한분에게만 맡겨 두지는 않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한다.   즉 [환단고기]에서는 명백히 조선의 관경 변천을 [천왕天王과 후侯인 삼한三汗과 그 관경을 일컫던 삼한三韓] - [천왕과 侯를 말하던 三韓과 관경인 三朝鮮] - [三韓이라는 칭호마저 마침내 三朝鮮王으로 변경]이라고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서 이에 대한 착각(악질식민빠와 같은)을 염려하였음인지 친절하게도 [환단고기]는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서 이런 사실을 다시 되새기도록 조언을 해주고 있다.





大辯經 云 檀君丘勿 改國號爲大夫餘...三朝鮮之稱 始於檀君索弗婁而未備 至是而備 三韓 有分朝管境之意 三朝鮮 有分權管境之制也





대변경에서 말한다.   단군 구물은 국호를 바꾸어 대부여라고 하고...삼조선의 칭호는 단군 색불루에게서 시작된다.   그렇더라도 아직 완전하지 못하더니 이에 이르러 갖추었다.   삼한이란 분조관경分朝觀境이란 뜻이 있으나 삼조선이란 분권관경分權觀境의 제도가 있다는 말이다.





[참고] 단군 색불루 條와 단군 물리 條의 차이를 보라.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뚜렷한 증좌로서 오직 [환단고기]와 같은 민족 사서만이 삼한과 삼조선에 대한 명확한 차이와 진정한 의미를 명시해주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신채호 선생의 저술 곳곳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우리 고전(古典)에 대한 일견(一見)의 열망과 전래 사서들에 대한 왕성한 탐구욕을 지녔음이 지명한바 어떤 경로를 통하였던지 이러한 고문헌 사료들을 접하였을 추정도 가능한 부분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유전되어오던 사료를 하나로 합쳐 필사한 저서가 [환단고기]라는 민족사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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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무새 죽이기】위서(僞書)의 정의를 알아봅시다...반론[2]  궤변망상학의 알량한 떡밥  2009/12/07 16:46


 http://blog.naver.com/nero1003/70075205096






     - [1911년 계연수가 편찬할 때 들어간 것이다]란 지적은 바로 이런 해석이다.  <환단고기>는 알려진 대로 5권의 책이 합본된 서적이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옛날에 그것도 인쇄를 하는 것이 아닌 필사로 책을 엮어내는 어려움이 있었던 시대에는 여러 가지 異本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같은 제목의 책이라도 필사하는 과정에서 글자의 오류나 내용으로 인해 알아볼 수 없는 경우도 있으며 특히 5권의 책이 오래된 책이라 알아보기 힘든 구절의 경우 필사자가 문맥상 가장 알맞는 단어를 넣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 서적을 보면 [00본 00본] 등 판본이 여러 가지가 존재하는 서적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이는 단지 본이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 할뿐 그 자체가 위서라고 말하는 자는 없다.   환단고기에는 분명히 현대적 용어가 등장하기도 한다.





        단지 그것만을 가지고 [환단고기 전체가 거짓이다]란 말로 매도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임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고 본다.   국사를 배운 사람치고 그런 사실을 많이 내포하고 있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울러 [산해경]의 경우도 후세의 가필이나 발간된 시대에서는 도저히 나타날 수 없는 용어들이 발견되거나 후대의 사실이 삽입되었다고 이를 위서라고 단정 짓지는 않는다.   아무리 이야기해주어도 소귀에 경 읽기이니 이런 정황적 증거를 [재야사학자]들은 일일이 다른 비유를 들어가면서 좀 더 확실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단고기가 위서라고 주장하는 내용들은 서적 구성상 몇 가지 현대적 용어가 보인다는 것을 침소봉대하고 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근 현대적 용어 몇 개가 보인다는 사실이 위서가 될 수 있는 근본적이며 필수불가결한 이유가 절대로 아니며 또한 어떤 사서이든 전체 내용이 완벽하게 입증되는 서적은 단 하나도 없다는 점을 [앵무새]가 억단한 이 단계에서는 새삼 지적해주고 있다.  사실 전 세계를 막론하고 수백 년이 지난 역사서는 다 그런 결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유독 [환단고기]만을 붙들고 지꺼리는 헛소리가 지겨워 한마디 더 붙인 것이다.      <한민족의 뿌리와 미래에서 인용한 글을 필자가 조금 다듬었습니다>





※ 1945년 이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 지고의 근본으로 알던 부일사대모화론자들이 가장 근간을 둔 문헌이 삼국사기이다.   그러나 <초기 기록은 신뢰할 수 없다>라는 이유로 아예 언급자체를 해오지 않는 가운데 삼국의 역사를 대폭 끌어내렸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는 그 당시부터 이미 위서로 취급되었어야 하는데 왜 지속적으로 식민사관의 기본 준거서책으로서 연구*인용되었단 말인가?   여기서 필자는 이미 처음부터 편협 된 기준과 적용 잣대의 형평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오랜 시일이 흐른 후에야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풍납토성발굴을 통해 증명되었다.





      - 이유립이 기억에 의거하여 재작성하였을 때 들어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필자가 앞선 [환단고기 대목에 대한 반론]에서 지겹도록 반복하여 설명해 주었으니 아직도 궁금한 분들은 그걸 읽어주셨으면 한다.   여기에 더 이상 지면을 할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3) 즉 각 항項의 입장은 [부일사대모화론자]들이 아무리 일러주어도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니까 끈기와 인내심을 가지고 좀 더 자세하고 명확하게 반복설명을 해주고 있는 각기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이걸 진보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면서 경망을 떨다니!!!  (제기랄~~)   언제나 결론은 거의 똑같다는 걸 알면서도 딴청을 부리는 건지... 








아무튼 수많은 위서 시비에도 불구하고 환단고기가 아직까지 생명력을 잃지 않고 주목받는 이유는 기술 내용의 정확성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우리 민족이 기록을 남기지 못한 옛날의 사실은 고고학적인 방법을 통해 하나하나 추적해 볼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여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데 요즈음의 고고학적 발굴로 새로이 밝혀지는 역사적 사실 가운데 놀랍게도 환단고기의 내용과 일치하는 경우가 매우 많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어지는 대목은 정말 엉뚱합니다.   관련 문구를 한번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와 같은 사람을 이렇게 비난합니다.   환단고기를 무조건 위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반론을 덧붙입니다.   삼국사기에도 잘못된 부분이 있다. 그럼 삼국사기도 위서냐?】





주장을 완전히 왜곡시키는 군요.   정도를 넘어서 끔찍한 느낌입니다.   아무리 그 다음 결론에 맞추려 했다지만 이건 너무 심합니다.   환언하여 앞 선 글에서 실례까지 들어 상세히 설명하였듯이 [재야사학자]들은 곡서(曲書)와 위서(僞書)도 구분할 줄 모르는 바보가 아닙니다.  





     1) 삼국사기에도 환단고기와 비슷한 경향의 잘못된 부분이 있다.  


     2) 그렇다고 우리는 삼국사기를 위서라고 하지 않는다.  


     3) 따라서 공평한 논리로 두 사서를 동등하게 비교해야지 전혀 다른 잣대에 놓고 엉뚱한 단정을 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그런 부분을 가지고 삼국사기는 위서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그런 이유로 위서이다>라고 상반된 결론을 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즉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위서>를 "잘못된 부분을 가지고 있는 사서"라는 의미로 절대로 곡해하지 않습니다.   [앵무새]가 이런 사실을 잘못알고 있거나 아니면 짜여진 결론에 맞추려고 또 다시 고도의 물타기 수법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로아미타불!





[앵무새의 주장-단락 2]





<위서>란 "조작된 사서"를 가리키는 말일 뿐입니다.   그럼 무엇을 조작했다는 말일까요?   재야사관에 빠진 사람들은 저 "조작"을 "사서 안의 잘못된 기록"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느님, 맙소사!





조작이란, 그 책이 주장하는 서지書誌(책이나 문서의 형식이나 체제, 성립, 전래 따위에 관한 사실. 또는 그것을 기술한 것) 사항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환단고기의 경우는 (1) 그 책의 각 편목에 붙은 저자들이 조작된 것이며, (2) 1911년에 계연수가 책을 냈다는 사실도 조작된 것입니다. 그에 대한 증명은 누차에 걸쳐서 해온 것이므로, 궁금한 분은 유사역사학의 영원한 떡밥 [클릭] 포스팅을 보도록 하세요.





[필자의 견해]





이 단락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군요.   위서를 구분하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공인되고 확실하게 정립된 학설이 없으며 아울러 서지학적인 접근은 오직 일차적인 분석기법으로서 위서판별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님을 이미 밝혔기 때문입니다.   즉 위서를 별칭(別稱)하는 의미로서 "조작된 사서"란 의미는 수긍이 가나 무엇을 조작했다는 말일까요? 라는 방법론에 들어가서는 완전히 뒤바뀌었군요.  





오히려 부일사대모화사관에 빠진 사람들이 이 [조작]의 의미를 <사서 안에서 잘못된 기록 - 쉬운 사례로서 송호정의 현대 용어 등의 용례를 걸고넘어지는 트집 잡기를 보라>로 축소하여 끈임 없이 시비를 걸고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답답한 나머지 [그럼 삼국사기도 위서란 말이냐?   우린 그런 부분을 가지고는 위서판별의 근거로 삼지 않는다]란 점잖은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맙소사!





※ 실제로 지금까지 나온 비판의 대부분이 내용에 대한 충분한 검토 후에 나온 본질적인 부분이라기보다는 저자의 진위 또는 출간 시기나 원전의 신빙성 등에 주력했고 특히 자구의 사용례에 매달리는 지엽적인 부분에 얽매인 감이 없지 않다.   다시 말해 고대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용어들이나 옛날에는 알 수 없었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비판들이다.  





   그러나 이런 용례는 상당수 정밀한 역사기록 분석에 의해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아울러 <후세에 한정적으로 가필되었다는 증거는 될망정 서책의 모든 내용이 위작이라는 보편적인 근거는 되지 못한다>는 반론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조작이란 그 책이 주장하는 서지(書誌-책이나 문서의 형식이나 체제*성립*전래 따위에 관한 사실.  또는 그것을 기술한 것) 사항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라는 기술로 보아 주로 외부적인 사료비판을 의미하는 듯한데 이에 대하여 왜 그런 태도가 종합적인 분석 자세에서 자칫 일탈하기 쉬운 함정을 가지고 있는지 좋은 연구 자료를 올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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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的 批判] 역사적 비판*형식 비판*초보적 비판*하급 비판





1. 사료의 원형에 관한 조사





眞本여부와 原本여부를 규명하기 위한 방법이며 사료 그 자체를 검토하는 것이지 그 내용을 검토하는 것은 아니다.





2. 사료의 외부 고증





1) 僞書의 구별  2) 사료 성립 년대의 고증 3) 사료 성립장소의 고증 4) 사료 저작자의 고증 5) 사료 원형의 고증(판본대조*교감법校勘法)





3. 외적 비판의 실제적인 절차





① 저자나 작자를 확인하는 단계 - ② 사료의 년대를 확정짓는 단계(이상은 원 저작의 진위에 관한 일차적 검토) - ③ 원저작의 보존상태(조작*위작*표절*오류 등 적출) - ④ 사료의 원 저작이 改惡되었거나 다르게 전하는 부분(첨가*삭제 등)에 대한 원본복구 시도





* 이 과정에서는 반드시 언어학*고문서학*서지학*금석학*공문서학*계보학*연대학 등의 충분한 도움과 지원협조가 있어야 한다.








[內的 批判] 역사적 분석*내용비판*상급비판*택스트비판*文脈비판





사료의 신뢰도 결정과정이며 진본여부를 가리는 초보적 외적 고증과정을 거친 후 진본결정과 이를 어떻게 활용하는가? 란 가능성 탐지와 관련된 “적극적 비판”





1. 내부 고증의 경우





1) 기록자의 신용(기록자의 사람됨 - 史德과 관련된다)


2) 기록자의 능력(문장*지식*소양 등  - 史才, 史學, 史識과 관련된다)


3) 기록의 진실도





 ① 두 가지 기록이 서로 우연의 일치 - 신뢰도가 높다


 ② 객관적 증거(일식*간지*紀年*민족습관*의식 등)와 일치 경우


 ③ 正과 反의 경우 각각 반대측 기록은 진실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④ 시기적으로 옛 것이 사실에 가깝다.


 ⑤ 문헌의 기록이 實物의 인증을 받으면 믿을 만하다.





* 사료의 내용 중 “適格性”과 “眞實性”이 가장 중요하며 기록자의 경우 반드시 여섯 가지 감정(민족적*국가적*지역적*정치적*종교적*직업적)에 좌우됨을 명심해야 한다.





2. 사료비판의 요점 - 특히 내적 비판 시





史家의 예리한 사료 비판정신을 발휘해야 보편적 타당성과 일반적 설득력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① 진술내용의 진의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와 같은가? 다른가? 말은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 진술은 말하고 있는 내용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가?


② 원저자는 자신의 진술내용과 관련하여 얼마나 깊고 많은 관찰력을 갖추고 있는가?


③ 기록된 장소와 시기 그리고 조건 등이 지니는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가?


④ 진술의 의도*목적여부*자신에게 불리한 내용도 기재되어 있는가?


⑤ 상식과 상반된 내용 혹은 자기모순으로 충만 된 내용은 없는가?


⑥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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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과 관련하여 우리가 [환단고기]를 정독해보면 몇 가지 결코 간과해서는 아니 될 특히 주목해야할 부분이 나옵니다.   바로 [환단고기]의 진실성을 입증해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1) [환단고기]의 <범례>에서는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아주 간략하게 “환단고기”의 내용을 요약했으나 [삼국유사]의 <고기>가 무엇을 말하는 것이지를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다.   즉 [삼국유사]의 고조선 조를 보면 먼저 중국 사서인 [위서]를 인용하면서 단군 조선의 건국 사실을 기술하고 이어 우리나라 [고기]를 인용하고 있는데 거기서 단군조선 이전의 역사에 대해 기술한 부분이 나온다.   환인이 나오고 환웅이 나오고 웅녀가 나와 단군을 낳았다는 그 부분이다.





<고기>를 처음 인용한 이는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다.   그러나 지금 그 <고기>가 전하지 않아서 읽어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 등 네 사서를 한데 묶어서 한 책으로 합본하고 이를 [환단고기]라 이름하였다.   <환단고기 범례>





       현재까지 추측하기로는 [고려사]에 나오는 환국8단국 관련 기록을 가장 풍부하게 지닌 <신지비사>라든지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여러 비기들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이 비서들에 대해서는 태종(이방원) 때 강력한 [수서령]을 내려 민간에 전해내려 오던 책들이 모두 중앙에 몰수되어 없어지고 말았다.  하나하나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런데 사라졌던 비서들이 [환단고기]에는 정확히 일치되는 서목書目으로 인용되어 나온다.   가령 <삼신오제본기>에 표훈천사*대변경*고려팔관기*조대기*밀기*진역유기*삼성밀기*삼한비기 등이 그것이다


    2) [환단고기]의 내용과 구성에서 경솔히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첫째로] 일련의 일관된 흐름이 정연하게 잡힌다는 점이다.   각권마다 구성의 치밀함은 물론이고(이는 필자가 환단고기 위서론 비판에서 삼성기 등과 태백일사의 전개와 구성이 얼핏 중복되면서도 상호보완적인 뚜렷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고 사례를 일일이 들어가며 설명한바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그냥 지나쳐왔던 삼국이후 불교나 고려*조선의 유교사상과는 다른 환인시대로부터 독특하게 정립되어온 삼신사상이라는 우리 민족 고유의 사유思惟를 바탕으로 고대사가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도교사상과도 다른 최치원의 현묘지도玄妙之道*신채호의 낭가사상郎家思想과도 일맥상통한다.   [두 번째로] 우리 민족의 정사로 간주되는 삼국사기의 이전 시대에 관한 역사서로서 신화적인 인물로만 여겨졌던 환인*환웅*단군이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존호一般尊號으로서 역대계보가 구체적인 실사實事로 잡혀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존학계에서 밝혀내지 못한 고조선의 위치*통치형태와 정치제도*풍습은 물론 부여의 건국과 역사*고추모의 계보*발해의 건국 비화 등이 매우 상세하게 기술되었다는 사료적 연구가치성이다.





[Tip]





위서론자들의 『환단고기를 이유립 선생이 쓴 것이다(창작) 또는 운초 선생의 책을 후대에 개작(첨삭 수정)한 것이다』라는 인신공격성 주장에는 찬동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의문을 표한 것들에 대하여 선학의 말씀이라고 해서 결코 변동을 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자신이 배우고 지지한 해학*운초*벽산*단재*단해*위당...선생님의 학설을 좀처럼 바꾸지 않으신 분입니다.   일례를 들어 안시성이 개평 북70 리에 있다는 설이나 졸본이 수분하 유역이라는 설은 후학들에게는 선뜻 이해되지 않은 것입니다만.  [대배달민족사]에는 그 지리적 비정을 고수하셨습니다.   왜냐? 선학의 말씀이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광개토대왕의 징실고에 대하여도 정말 그렇게 비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중국*일*한국인들이 내놓은 탁본이나 해석과는 영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암당 선생님은 운초 선사께서 직접 답사하여 징실을 하신 것이라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그대로 인용하고 주석을 쓰셨습니다.   글쎄요?   그런 분이 스승이 남기신 환단고기에 대하여 조상 역사를 멋지게 하려고 함부로 덧칠하고 자기 맘에 안 드는 부분은 임의로 뺐을까요?   북부여기를 보면 단군해모수 시절에 진개의 난이 있는 것처럼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해>를 보니 [선시先是에...] 하는 것이 있습니다.   또 어떤 글은 <아마 연문衍文일것이다> 하고 주를 달았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스승의 글에 무모하게 붓을 가할 분이 아닙니다.   <대배달민족사연구회 임인철님 자료 인용>





 

아울러 마지막 구절인 【환단고기의 경우는 (1) 그 책의 각 편목에 붙은 저자들이 조작된 것이며 (2) 1911년에 계연수가 책을 냈다는 사실도 조작된 것입니다】에 대한 반론은 필자도 누차에 걸쳐서 해온 것이므로 궁금한 분은 제 블로그의 [궤변망상학의 알량한 떡밥] 포스팅을 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앵무새의 주장-단락 3]





위에 언급한 바 재야사관에 빠진 사람들 중에도 환단고기가 이유립에 의해서 (다시) 쓰였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이죠.   불행히도 그들 대부분은 <위서>라는 말은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하지만 과감하게 환단고기가 <위서>라고 해도 저들의 주장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뭐 어쨌다고? 그들의 논리를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환단고기가 근대에 위조되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해도, 그 안에 들어있는 사실들은 면면히 전승되어온 우리의 소중한 자료(일 수도 있)다. 환단고기 안에는 중국 사료도 들어있고 그것들은 현존하는 중국 사서와 비교할 때,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불행히도 환단고기 안에만 전하는 (소중한) 우리 사료들은 비교할 수 있는 사서들이 (일제에 의해) 멸절되었기 때문에 없을 뿐이다. (일제의 방해만 없었다면) 중국 측 사료에서 증명되는 것처럼, 우리 측 사료도 증명될 수 있었던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죠.





환단고기의 중국 사료 : 중국 사료 = 참


환단고기의 독자 사료 : 한국 사료(는 비록 없지만 위의 예로 보면) = 참





따라서 환단고기는 참된 사서라는 것이죠. 엄마야!   여기에 쉬크한 양반들의 논리를 보태서 "참"을 "참일 가능성 있음"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자의 견해]





먼저 [앵무새]가 언급한 첫 대목의 논리 구성이 아주 야릇합니다.  그동안 애써 [민족사학자]에게 책임 전가하던 [삼국사기 위서주장]이란 굴레를 이번에는 은근슬쩍 자기 편한 대로 가져다 뒤바꾸어 써먹고 있군요.   어처구니없는 논리전개를 한번 볼까요?





     1) 재야사관에 빠진 사람들 중에도 환단고기가 이유립에 의해서 (다시) 쓰였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2) 그런 이유로 그들은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의도적으로 [다시]를 슬쩍 첨가하는군요(우리는 여기에서 앵무새의 전형적인 핵심흐리기를 경험합니다.   앞으로 [을 수도 있다][일 수도 있다][소중한][일제에 의해][일제의 방해만 없었다면][는 비록 없지만 위의 예로 보면]와 같은 기가 막힌 역사가가 아닌 소설가적인 언어표현의 정수를 곧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지?   이런 [앵무새]의 소설가적인 교묘한 강조 화법은 지속적으로 출현할 것입니다.  





[계연수의 筆寫] - [이유립의 재필사] - [오형기의 복사複寫]라는 사실은 이미 세상에 다 알려진 정황압니다.   그렇다면 주장하는 대로 필사본이기에 당연히 [위서]라는 말인지?   그리고 재야 학자 중에 그런 논리전개구조로 필사본은 [위서]라고 언급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필자가 보기에는 지금도 그런 까닭으로 입에 거품을 물며 [위서]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과연 어느 쪽인지 확연한데 왜 이런 경망함을 드러내는지 더욱더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리라면 지금까지 나와 있는 수많은 필사본은 이제 설 땅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상호문헌비교분석 단락에서는 오래간만에 그다지 어색하거나 의아심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즉...





[전제구문] 환단고기 안에 들어있는 사실들은 면면히 전승되어온 우리의 소중한 자료(일 수도 있)다 - 아울러 환단고기 안에는 중국 사료도 들어있고 그것들은 현존하는 중국사서와 비교할 때 사실이라는 것이 매우 정확하고 엄밀하게 증명된다.





     1) 대진국(大震國-발해가 스스로를 칭한 국명)의 문제인 대흠무大欽武의 연호가 대흥大興이었는데 이 사실은 정효공주貞孝公主 묘비가 발견된 1980년 이후에 비로소 알려졌다.   그런데 환단고기에서는 이미 그걸 밝혀주고 있다.   중국측 발굴조사 결과와 비교해도 [환단고기]의 조작가능성을 일소하는 부분이다.


     2) [환단고기] 기록의 많은 부분이 중국 측에서는 해석 불능인 [산해경]의 기술과 정합하며 해석의 단초를 제공해준다(대인국과 환웅국*조선기록과 단군조선*치우의 기록과 자오지천왕*황제 운사헌원과 공손헌원 등)


※ 치우천왕(자오지환웅)의 기록은 산해경 대황동경*대황북경(고조선 三師인 풍백과 우사를 부리는 치우천왕)*춘추좌전 소공 17년조(황제가 운사로 관명을 삼다)*사기 오제본기 운사 헌원 기록과 부합한다.


     3) 支那 史書에서 <고추모>의 고구려 건국 이전에 고구려가 나타나는 이유와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왜 고구려 역년 900년 설을 말하고 BC 232년 기원으로 보았는지(북부여기 대조)*<백제군>이 지나 동해안과 요서지방에 나타나는 기록*고대의 <백제>와 <왜> 관계는 [환단고기]가 없으면 이해할 수 없는 기술이 된다.


[추정결론]  하지만 불행히도 환단고기 안에만 전하는 (소중한) 사료들을 비교할 수 있는 우리의 전래사서들이 (일제에 의해) 멸절되었기 때문에 없을 뿐이다 - 그러므로 (일제의 방해만 없었다면) 중국 측 사료에서 증명되는 것처럼 우리 측 사료도 증명될 수 있었을 것이다. 


     1) 일제에 의한 사서 말살은 필자의 이전 반론 글인 [앵무새 죽이기-보론補論「삼류매식소굴三流賣植巢窟」의 앵무새에 대한 조언助言...반론 1]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 따라서 [환단고기]의 <대진국>이란 國號와 <대흥>이란 연호 사용도 발해의 고문헌이 인멸되지 않았다면 충분히 신인信認되었을 것이다.


      - 조선사편수회에서 우리 古書 압수 수색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던 <금서룡>은 스스로 태종실록과 세조실록에 나오는 古記들이 고려 왕실의 서운관書雲觀에 보관되어 있었음을 시인하였다.   <박성수 교수 증언>


      - 현재 3종의 고조선비사 이본異本이 있다.   <이병도 진단학보 창간사>


     2) 위서론자들이 자주 언급하는 <조대기> 등의 서책들은 바로 [조선왕조실록] 세조 7권 3년(1457) 5월 26일(무자) 3번째 기사에 적시되고 있다.


諭八道觀察使曰 “古朝鮮秘詞、大辯說、朝代記、周南逸士記、誌公記、表訓三聖密記、安含老、元董仲三聖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文泰山ㆍ王居仁ㆍ薛業等三人記錄、修撰企所一百餘卷、動天錄、磨蝨錄、通天錄、壺中錄、地華錄、道詵 漢都讖記 等文書, 不宜藏於私處, 如有藏者, 許令進上, 以自願書冊回賜, 其廣諭公私及寺社。”


유팔도관찰사왈 “고조선비사、대변설、조대기、주남일사기、지공기、표훈삼성밀기、안함로、원동중삼성기、도증기지이성모하사량훈、문태산ㆍ왕거인ㆍ설업등삼인기록、수찬기소일백여권、동천록、마슬록、통천록、호중록、지화록、도선 한도참기 등문서, 불의장어사처, 여유장자, 허령진상, 이자원서책회사, 기광유공사급사사。”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노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문태산文泰山과 왕거인王居人과 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 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알아듣게 타이름)하라” 하였다.


     - 적어도 1457년 이전에는 <고조선 비사*조대기*삼성기 등>의 서목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온나라 백성이 한인 - 한웅 - 단군으로 이어지는 민족의 역사를 아무런 제약 없이 읽고 인식할 수 있었다는 사실과 바로 이를 [환단고기]에서 명확히 언급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때문에 이 무렵 수거되어 망실*훼손되거나 인멸되어 존재조차 사라진 많은 사서들(예컨대 해동고기나 신지비사와 같은 고기류)이 있었다면 이런 쓸데없고 실익조차 없는 [위서논쟁]은 봄날 햇빛에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라는 의미로서 바로 [참]인 것이다.


따라서 정말로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위와 같은 모든 정황들은 아래와 같은 간단한 도식으로 능히 설명이 가능합니다.   결론적으로 [환단고기]는 참된 사서라는 걸 [민족사학계]에서는 정확한 도식으로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엄마야!] 같은 호들갑까지 일부러 떨 필요는 없겠습니다.


환단고기의 중국 사료 : 중국 사료 = 참


※ 이 부분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중국 측과 대비되는 사료가 우리 쪽이 보다 더 자세하고 구체적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연대기록과 함께 지나왕조의 기술 태도에 대한 비교에서 고조선의 우월성이 강하게 나타나 있는 기록이라는 점이다.


환단고기의  독자 사료  : 한국 사료가 있다면 = 참


환단고기의 독자 사료 : 불행히도 저서에 언급된 전거문헌들이 망실된 것이 분명한 정황에서 기술된 사료 = 참으로 추정


  


[앵무새의 주장-단락 4]


사료 비판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을 따지는 혹독한 시험입니다.   논리적 사고력이 이정도 수준에 있으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지 참 난감해집니다. 이 사람들의 논리력은 이런 것이죠.



삼국사기의 중국 사료 : 중국 사료 = 참


삼국사기의 독자 사료 : 한국 사료(는 비록 없지만 위의 예로 보면) = 참


그래서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봐라, 니들도 진작에 이랬잖아! 그런데 문제는 바로 밑줄 친 저 부분... 저 부분이 환단고기와는 백만 광년 쯤 떨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삼국사기는,


1. 고려 때 만들어진 것이 다른 사서에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등)


2. 동시대 및 그 후 시대의 전승 루트가 다른 기록들에 의해 그 내용이 보강, 설명되어지며(삼국유사, 제왕운기, 동명왕편, 각종 금석문 등등)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차 검증이 되지 않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가지고는 학계에서 갑론을박이 있으며, 그 기록에 대한 연구가 인류학, 고고학 등의 성과를 통해 보강되고 있음


이라는 사실을 저들은 모릅니다. 환단고기는 삼국사기 같은 검증 잣대를 대는 순간 봄날의 비누거품처럼 톡, 터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제 저들의 논리, 즉 환단고기 안의 중국 사료가 진실이라고 해서 한국 사료 부분을 진실로 볼 아무 이유가 없다는 점을 납득하셨는지요? 이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피고인은 XXX가 맞습니까?


네.


그럼 피고인이 OOO의 돈을 훔쳤습니까?


아니오.


피고인은 XXX가 맞으므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이야기하는 피고인이 OOO의 돈은 훔치지 않았다고 하니, 이에 무죄로 판결합니다.


재판정에는 싸늘한 침묵이 감돌겠지요.   위서에 대한 문제는 아래 포스팅들도 "꼭" 참고해 주세요.



위서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을 수 있다 [클릭] 악질식민빠님의 포스팅


위서, 어떻게 볼 것인가             [클릭] 악질식민빠님의 포스팅


위서, 어떻게 볼 것인가 2          [클릭] 악질식민빠님의 포스팅


[필자의 견해]


사료 비판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은 물론 진실일 경우도 똑같이 따지는 혹독한 과정이기도 하며 더불어 보다 정확한 해석과 판단을 바탕으로 편견과 오차를 최소화하기 위한 보편적 타당성과 일반적 진실성 확보 과정입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본문 앞부분에 별도의 장(章)으로 구성해 놓았습니다만 논리적 사고력이 이정도 수준에 있으면 어디서부터 다시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지 한참 난감해집니다.    먼저 이 단락은 무슨 주장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될 만큼 엉망진창입니다.   정리가 필요한 상황이군요.   아무튼 먼저...


     1) 【삼국사기에 기술된 중국 사료】는 대부분 중국 측 사료를 그대로 전재하거나 지극히 사대존화적인 입장과 해석 태도로 우리의 유전遺傳 기록을 전혀 고려하지 않거나 왜곡 인용하여 간행 이후 많은 학자(안정복*이승휴 등)들에 의해 비판을 받아왔으며 지금까지도 그 왜곡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는 중이다.   [민족사학계]에서는 이 부분을 특별히 주목하여 그 기록들이 [참]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으며 예의 주시하고 있다.


      - [삼국사기]에서 종종 언급되고 있는 [고기-고기*해동고기*삼한고기*본국고기*신라고기 등 24군데에서 인용되고 있다]는 지나支那 史書에 대응하는 우리 측의 고유 史書나 다양한 原典들에 대한 일반칭一般秤으로 보인다.   대부분 支那 史書와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경우 그 진위眞僞와 시비를 가리는 고증考證을 위해서만 단편적으로 적용된 경향으로 보아 지나쪽 기록과 상충되거나 사대존화적인 [김부식]의 역사관이나 성향에 맞지 않는 사료는 철저히 외면되고 있음을 추정케 한다.


“......또한 고기는 문자가 거칠고 졸렬하여 사적事蹟이 빠지고 없어져서 임금의 선악善惡과 신하의 충사忠邪나 나라의 안위安危와 인민의 치란治亂을 다 드러내어 권계勸戒를 드리우지 못한다......” <진삼국사기표 進三國史記表>


      - 반도사관의 빌미를 제공한 대표적인 중국사서 왜곡인용사례의 하나로서 <37권 잡지 지리>의 기록을 들 수 있다.   우리 고대 강역에서 중요한 위치인 패수浿水의 위치를 <대동강>으로 분명하게 비정하면서 고구려의 <평양성>은 서경西京인 것 같다고 적었다. 그 근거로 <당서唐書>의 기록을 인용했다.   이 문구는 나중에 日帝에게 악용되어 亡國의 반도사관을 고착화시켜 아직까지 정설定說로 이어지고 있다.


※ <삼국사기>에 의해 패수가 현 대동강으로 비정되는 바람에 낙랑군 등 한사군漢四郡의 위치가 전부 지금의 북한 지역이 되고 오늘날의 평양이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왜곡되고 만다.   그러다 보니 우리 고대사의 강역이 실제보다 엄청 축소되어 버린다.   하지만 <김부식>이 인용한 <당서>를 아무리 읽어 보아도 패수가 대동강이라는 확정적 단서는 찾을 수 없다.   단지 “패강의 어귀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이 된다.” 또는 “패강을 지나 평양에 도착한다.”는 문구만 있다.   아무리 사대주의에 물들어있는 유학자라 하더라도 <삼국사기>의 집필진은 당대 최고의 석학碩學들인데 이런 글귀만 보고 패수를 대동강으로 단정지울 수는 없다.   패수란 중국 史書에서도 숱하게 언급되는 지명이기 때문이다.


     2) 【삼국사기에 기록된 독자 사료】의 경우에도 그 무렵까지 분명히 전래되어온 우리 고유 사료가 존재하였음에도 중국측의 입장(즉 사대모화주의적)에 반하는 기록은 철저히 무시하였다.  따라서 [재야사학자]들은 독자 사료 가운데 많은 대목은 [참]이 아니며 의도적으로 왜곡되었음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그 모순점을 엄밀히 지적하고 있다.


※ 우리나라는 예부터 역사문헌을 많이 기록하여 남긴 문화민족이었다.   AD 1123년 송(宋)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온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 왕실의 도서관에 소장된 수 만권의 장서藏書를 보고 놀라워한...臨川閣 藏書至 數萬卷 叉有淸燕閣 亦實以經史子集四部之書 임천각 장서지 수 만권 차유청연각 역실이경사자집사부지서>기록이 있다. <고병익>씨는 <심지어 宋나라는 고려高麗에서 자기네의 없어진 책을 구하려고 했을 정도였다-우리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35P>라고 말한다.


   더구나 <김부식>은 이 무렵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면서 신하로서는 최고위인 [문하시중]에까지 이르는 동안 많은 인맥을 길러냈으며 王에 의해 [국사편찬]이라는 막중한 命을 받은 처지에서 이런 <사서류>들을 접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는 그가 [삼국사기]에 저본底本으로 활용한 많은 문헌들의 서목書目만 보아도 금방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분명히 [삼국사기]는 ≪고기 古記≫≪삼한고기 三韓古記≫≪신라고사 新羅古史≫≪구삼국사 舊三國史≫와 김대문金大問의 ≪고승전 高僧傳≫≪화랑세기 花郎世記≫≪계림잡전 鷄林雜傳≫ 및 최치원崔致遠의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 등의 국내 문헌과 ≪삼국지 三國志≫≪후한서 後漢書≫≪진서 晉書≫≪위서 魏書≫≪송서 宋書≫≪남북사 南北史≫≪신당서 新唐書≫≪구당서 舊唐書≫ 및 ≪자치통감 資治通鑑≫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임을 일견一見하게 된다.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각 부분의 머리말 부분*논찬論贊*사료의 취사선택*편목篇目의 작성*인물의 평가 등을 직접 담당했다.


     - 환단고기 중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서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검열로 삭제시킨 내용이 가장 많이 나온다.   즉 광개토대왕이 이伊*왜倭로부터 항복을 받았다는 기록*任那聯政 설치내용*백제와 고구려의 요서와 지나 동해안 진출 부분*문자왕 때 백제가 요서와 지나 동해안을 상실하고 패퇴했다는 기록*당나라 정관 17년(AD 643)의 연개소문과 당태종간 산동반도 등주登州*래주萊州방면에서의 마산대전(馬山大戰)이 벌어진 상황*백제와 고구려 전성시대에 강병 100만으로 유幽*연燕*노魯*제齊 등지를 침략했다는 문구의 진상眞相*송서宋書나 남제서南齊書의 倭5王 정체 등이다.


     - <신채호> 선생은 말한다. 「부여의 역사를 아예 기록조차하지 않음으로서 우리 민족의 자출自出은 묻어버리고 발해를 삭제하여 삼국 이후 둘로 갈라진 민족의 역사를 통째로 날려 강토가 원래부터 그런 것처럼 반도로 밀어 넣었다」


     - 유득공柳得恭은 삼국의 역사와는 별도로 통일신라시대에도 발해가 병존했던 南北國史를 종합하여 편찬하지 않은 편파성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즉 [김부식]은 경주 출신 신라계 인물로서 [일통삼한一統三韓]이라는 명분론에 젖었던 신라의 입장에 충실하게 <고구려를 온전하게 계승한 나라이며 고구려가 부활하였다고 자처한 발해의 존재>는 신라계 지배집단이 표방하는 명분을 훼손시킨다고 본 것이다.



<이규보李奎報>가 동명왕편 서문에서 [구삼국사]의 존재를 알려주면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일러 “國史를 중찬重撰한 것이다”라 한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규보>의 견해를 염두에 두고 견주어 볼 때 <진삼국사기표>의 [고기]에 대한 언급은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의 결락이 분명히 감지되는 부분이지요.   왜냐하면 <이규보>는 [동명왕편]에 대한 내용에서 [구삼국사]를 충실하게 인용하였는데 [삼국사기]엔 지극히 소략小略되거나 윤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본인의 출자(出者)였던 [신라사]를 정통으로 삼는 태도의 고수나 유교주의의 극단적인 폐해인 사대주의에 물들어 많은 부분에서 우리 고래(古來) 문헌자료들을 도외시하는 입장을 견지한 [삼국사기]가 韓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후손이 잃어버리거나 아주 다르게 왜곡된 생각을 갖도록 편찬되었다는 욕을 얻어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잘 보았는가?   우린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진작부터 그렇게 주장하면서 맹신하는 것은 너희들이잖아!   그러니 문제는 바로 밑줄 친 저 부분...저 부분이 [민족사학계]의 비판과는 백만 광년 쯤 떨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삼국사기는 처음 발간된 이후로 고려조와 조선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를 축소*폄훼*변개*왜곡하였다고 꾸준히 비판(곡서曲書)되고 있는 가운데 [환단고기]는 [앵무새]가 왜곡하여 제시한 【2. 동시대 및 그 후 시대의 전승 루트가 다른 기록들에 의해 그 내용이 지속적으로 보강*검증(삼국유사*제왕운기*동명왕편은 물론 각종 금석문과 발굴 유물상 등등)】되어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1.고려 때 만들어진 것이 다른 사서에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사*조선왕조실록 등등)】는 대목은 필자가 이미 [삼국사기] 정본은 존재하지 않고 중간(重刊)한 판본이 많은 결락과 오탈자 등의 자체 모순을 안은 채 유전되어 오고 있음을 밝혀주었으니 더는 언급이 불필요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3.항]은 완전히 본말이 전도된 다른 주장이군요.   그러므로 이렇게 되어야 맞습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차 검증이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부일사대모화론자]들이 일제 식민사관의 충실한 하수인 역할을 하면서 즐겨 준거로 삼았던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 - 우리 역사 끌어내리기의 핵심 주장]을 가지고 해방 후부터 민족사학계와 갑론을박이 있었으며 이에 대한 꾸준한 연구와 비판이 고문헌 비교학*인류학*고고학 등을 활용한 [재야사학]의 학술연구 성과를 통해 다양한 형태로 보강되면서 마침내 이를 인정하게 된 결과이다.


라는 사실을 [앵무새]나 [부일사대모화론자]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건가요?   아니면 모르는 체 하는 걸까요?   따라서 이런 잡스런 비유는 필자의 반론과 같은 날카롭고 엄격한 검증의 잣대를 대는 순간 봄날의 비누거품처럼 톡! 터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제 이들의 논리 즉 [환단고기]안의 중국 측 사료가 진실이라고 해서 한국 쪽 독자 사료 부분을 사실로 아니 볼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점을 충분히 납득하셨는지요?   하여튼 이 사람들의 논리력은 바로 여기까지가 한계임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더욱 우스운 일은 이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것이라고 하면서 【피고인  XXX......이에 무죄로 판결합니다】라는 도대체 무슨 황당한 소설을 쓰려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어린애도 고개를 갸웃거릴 [망상 인형극]은 재판정이 아니라 글을 읽는 분들에게 정말 싸늘한 침묵이 감돌게 합니다.   이어 위서에 대한 문제는 아래 포스팅들도 "꼭" 참고해 달라고 하셨는데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등장한 [악질식민빠]의 주장에 대해서도 이제부터 하나하나 반론을 올려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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