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한국사

앵무새 죽이기 2 난하가 요수라는 주장의 진실은 난하 요수설에 대하여 반론 환국 르기고 단군으 나라

작성자태극기박사|작성시간11.02.12|조회수768 목록 댓글 0

여기에서 분명하게 한일합방 무렵에까지 우리에게 고래 史書들이 많았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저절로 날개가 달려 하늘로 날아갔단 말인가?   스스로 알아서 땅으로 꺼졌단 말인가?   민족 史書 말살의 단초가 선명하게 잡히는 부분이다.  두 번째 前*後者의 해독을 피력하는 대목에서 제1차로 수거한 문헌과 사료들의 성격이 무엇인지 파악해 낼 수 있는 부분이다.

 

   - ...만약 이와 같은 史書의 편찬(조선사편수작업을 의미)이 없다면 조선인은 만연(漫然)히 합병合倂과 관계없는 고사古史 또는 합병을 저주하는 서적만 읽게 되어 수년이 경과하면 당장 눈앞에 언제나 보던 습성에 젖어 오늘날의 밝은 세상이 오로지 합병의 은혜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함부로 구태舊態를 회상하여 도리어 개진改進의 기력을 상실하게 할 우려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이렇게 된다면 어떻게 조선인 동화同化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 민족 역사 말살과 자주독립의지의 발본색원拔本塞源과 그리고 새로운 체계의 식민역사관으로 동화시키려는 배경과 그것을 완수하기 위한 시책 추진의 기본 골격이 적나라하게 제시되고 있다.   [삼류메식소굴]은 그래서 제발이 저린 것처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애써 고개를 돌리는 걸까?



그리고 난 다음 이러한 정책기조(政策基調)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가장 먼저 영구적 식민지배의 걸림돌이 될 국민 교육용 도서(圖書)와 次세대 정신 개조에 해악이 될 문헌들에 대한 정리 작업에 나선다.   조선역사의 뿌리가 다시 돋지 않게 만들려는 치밀한 수작이다.   바로 관보(官報  1910년 11월-1911년 12월까지)에 의한 각종 기초 사료의 압수와 소각작업이 그것이다.   이는 압수대상 도서들을 잠깐만 분류해보아도 그와 같은 성향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걸 보아 금방 짐작해 낼 수 있다.



[1차 압수도서 목록 분석] 일제가 불태웠다는 51종의 목록 대상

□ 민족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도서(단군관계 기록 포함)


01. 초등 대한역사初等大韓歷史(國文*漢文)


     정인호 편집 장세기 교열  1908년-단군에서 조선까지 간략하게 기술한 개설서(배일*애국사상 고취)


02. 보통교과 동국역사普通敎科東國歷史


    현채(玄采) 대한제국 학부에서 1899년에 펴낸 중학교 교과서( 8권 3책)-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부터 기술.


03. 신정 동국역사新訂東國歷史


    유근(柳瑾:1861∼1921) 원영의(元泳義) 1906년


04. 대동역사략大東歷史略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1907년 흥사단에 병합됨) 대한제국의 교과서. 1906년 (7권 1책)-단군조선*기자조선*마한*신라 등의 역사를 소략하게 기술.


10. 최신 초등소학最新初等小學  정인호


11. 고등 소학독본高等小學讀本   장지연


12. 국문과본                        원영의


13. 초등소학初等小學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 1906년 교과서로 편찬


16. 녀자독본(자는 아래아)     장지연  1908년  여성용 교과서


17. 부유독습婦幼讀習(조선총독부 관보에는 부녀독습婦女讀習이라고 오기誤記)       강화석(姜華錫)   1908년 교과서로 편찬


30. 준비시대準備時代    천도교 중앙총부  1905년  천도교 해설서





※ 여기에서 <문정창> 선생이 언급한[..國恥後 三·一運動前까지 公·私立 普通學校에써 敎科書로서 使用하였던 古代 三朝鮮 즉 檀君朝鮮·箕子朝鮮·衛滿朝鮮을 內容으로 한 歷史書를, 齋藤實以後 一切 걷어들여 불살음과 同時에, 그러한 史書를 愛讀 또는 所持하지 못하게 하였으며...]란 대목이 어느 범위까지이며 어떤 서적들인지가 자명해질 것이다.   주장의 핵심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심지어 아동도서라도 교학교재*강학참고사료 등에서 단군에 대한 언급이나 민족의 시조로 기술한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예외 없이 수거收去*압수押收의 대상이 되었다는 명확한 반증일 뿐이다.   따라서 섣불리 [관보官報에 적힌 바로 그 책들이다]라는 결론은 결코 적절치 못하다.





□ 조선의 강역과 한민족의 기원 등을 탐구할 소지가 많은 史書





05. 대한신지지大韓新地誌


     장지연(시일야방성대곡을 기고) 1906년 지리교과서 우리나라의 자연지리와 풍속, 물산 등 인문지리를 다룸


06. 대한지지大韓地誌 (대한지지)


     현채(玄采) 1899년 교과서로 편찬-총론과 13도편으로 대한전도와 각도의 지도를 붙인 뒤 각 지역을 설명


07. 최신 고등대한지지最新高等大韓地誌


     정인호(鄭寅琥) 1909년 교과서로 편찬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


08. 문답 대한신지지問答大韓新地誌


     노익형(박문서관 주인)-국채보상운동 등을 한 인물


09. 최신 대한초등지지最新初等大韓地誌  정인호





□ 민족정신과 독립자주정신 함양 우려 도서(독립사상가 저술이 대부분)





15. 소학 한문독본小學漢文讀本    원영의 - 내용 불온不穩


18. 고등소학수신서高等小學修身書  

     휘문의숙 편집부   1907년 교과서로 편찬


19. 초등 윤리학교과서初等倫理學敎科書  


     안종화(安鍾和)  1907년 교과서로 편찬


20. 중등 수신교과서中等修身敎科書  

      휘문의숙편집부  1908년 교과서로 편찬


21. 초등 소학수신서初等小學修身書     유근(柳瑾:언론인)


22. 독습일어정칙獨習日語正則   

     정운하(鄭雲复:독립운동가)  1907년 - 내용 불온


23. 정선일어대해精選日語大海   

     박중화(朴重華:교육가, 보성중학교 교장)   1909년 - 내용 불온


24. 실지응용작문법實地應用作文法   

     최재학(崔在學:평양 유생, 애국지사)   1909년 - 내용 불온


25.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   

     양계초(청나라 사상가. 1873-1929)   1899년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에서 [애국론]을 소개한 후 1905년부터 양계초 붐이 일어날 정도로 유명.


27. 민족경쟁론民族競爭論 

     양계초(청나라 사상가) 지음 유호식(劉鎬植) 번역


29. 음빙실자유서飮氷室自由書    양계초(청나라 사상가)


31. 국민수지國民須知   


     김우식(金宇植)  1906년  대한제국 시절 가장 널리 퍼진 국민계몽서로 지대한 영향을 미침.


32. 국민자유진보론國民自由進步論    유호식(劉鎬植) 번역


40. 쇼아교육(아의 ㅏ는 아래아)  

     임경재(林景宰)  휘문고 교장, 조선어학회 창설멤버


41. 애국정신愛國精神    이채병(李採丙)   아래 책의 한문본.


42. 애국졍신담(애의 ㅏ는 아래아) 

     이채병(李採丙)  1908년   애국단체 서우학회(西友學會)의 기관지 서우(西友: 1906.12-1908.1 박은식이 주필이었음)에 연재되었던 글모음


44. 을지문덕乙支文德(한문)    신채호   1908년


45. 을지문덕(국문)             신채호   1908년


46. 이태리 건국 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  

     양계초 지음 신채호 번역   1902    이탈리아 건국의 세 주역에 대한 이야기.   양계초는 이무렵 가장 인기 있는 사상가여서 이 책은 무려 4종의 번역물이 있었음.


47. 갈소사전噶蘇士傳   

     양계초 지음   이보상(李輔相) 번역   원제는 [흉가리 애국자 갈소사 전]   헝가리의 애국자 헤수스에 대한 이야기.


48. 화성돈전華盛頓傳   

     이해조(李海朝) 번역   1908년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전기.


49. 파란 말년전사波蘭末年戰史 

     작자불명   폴란드 왕국 말년의 독립전쟁을 다룬 것으로 1905년에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되었음.


50. 미국독립사美國獨立史   현은(玄隱)   1899년


51. 애급 근세사埃及近世史   

     장지연 번역   1905년   이집트의 근세사를 기술함.   서문을 박은식이 썼음.





□ 제국주의에 반하는 사상유입으로 식민세대 육성에 해악이 될 교육자료





14. 국민소학독본國民小學讀本


     대한제국 학부에서 1895년 교과서로 편찬-자연현상과 이치*세계 주요 도시 문명화 파악*중상주의 등 기술


26. 국가사상학國家思想學   

     정인호(鄭寅琥)  최초 발명특허권자*최초 저작권 분쟁을 일으킨 사람


28. 국가학강령國家學綱領   

    Johannes Bluntschli(독일)의 학설을 안종화(安鍾和)가 번역       1907년


33. 세계삼괴물世界三怪物   

     사밀가덕(斯密哥德) 지음(사밀가덕이라는 이름은 일본 이름이 아니다.   중국에서 유럽어를 가차한 것인데 [사밀]은 스미스 [가덕]은 골드의 가차다.   해당되는 이름의 사상가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변영만(수주 변영로의 형) 번역   1908년   변영만이 19세에 번역한 얇은 소책자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다룬 유럽저자의 글로 추정하고 있다.   3괴물이란 금권정치*군국주의*제국주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세 마리 괴물이 세계를 황폐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책자다.   책의 서문은 변영만의 절친한 친구였던 신채호가 썼다.   변영만은 1924년 최남선이 사장으로 설립한 [시대일보]에 논설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34. 20세기 대참극 제국주의二十世紀大慘劇帝國主義   변영만   1908년


35. 강자의 권리경쟁强者의 權利競爭  

     유문상(劉文相:국채보상운동의 주역) 번역   일본책 『強者の権利の競争(1893)』을 번역한 것인데 이 책은 진화론을 통해 천부인권설*이상주의 관념적 종교적 세계관 등을 소개하고 있음


36. 대가론집大家論集         유문상(劉文相) 번역


37. 청년입지편靑年立志編    유문상(劉文相) 번역


38. 남녀평권론男女平權論   

     최학조(崔鶴詔)   1908년   남녀평등 사상을 다룬 책


39. 편편기담경세가片片奇談警世歌   

     홍종온(洪鍾穩)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아전에게 골탕 먹는 지방 수령 이야기 등이 들어있음.


43. 몽견제갈량夢見諸葛亮  

     유원표(劉元杓: 해직군인)   1908년   꿈에 제갈량을 만났다는 뜻으로 사회비판과 계몽주의를 논함.





[삼류매식소굴]은 가장 기초적이고 일차적인 이 부분만 물고 늘어져 이것이 우리 史書 말살실태의 전부인양 호들갑을 떨면서 독자(讀者)의 눈을 흐리는가 하면 왜곡되고 편향된 시각을 부추긴다.   정작 중요한 부분은 어디로 팽개쳤는가.   과연 이 서적들이 모두 아동용의 하찮은 사료들로 보이는가?   앞서 筆者가 이야기하였던 史書 말살 시책은 전 방위적이며 조직적*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는 말은 까맣게 잊었는가?   그리고 주장에서 제시한 분류방법이 틀렸다.   제 입맛에 맞게 교묘히 비틀었다는 이야기이다.   서목(書目) 분류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 앞으로 누구에게라도 [조선총독부 관보에 적힌 금서/서적수거령의 대상은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아동용 서적들이었다.   즉 아동용 서적들을 ‘단군조선관련사서'라고 했던 것이다]라는 언급은 자제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그의 거짓말에 의해, 「초등학생용 역사교과서」는 신비(神秘)의「단군조선관련사서」로 둔갑하게 된다] 는 초등학교 수준의 주장을 계속한다면 스스로 얼굴이 부끄러워지지 않겠는가?





[2차]  본격적인 사료(史料) 수집과 인멸





이제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   일제의 민족사서 말살정책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째로 치밀한 행보(行步)가 시작되는 것이 [조선사편수]를 빙자한 조선 古史 및 관련 문헌의 수집*인멸이다.   유구한 韓민족의 역사 왜곡을 감추기 위한 두 번째 포석(布石)인 [조선사 편수를 미명美名으로 한 古史 수집 및 인멸 작업]이었다.





     - ...그러니 차라리 이러한 史書에 대신하여 공명적확公明的確한(?) 새로운 史書를 만들어 내어 그들에게 읽게 하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동화同化의 효과를 가져오게 하는 첩경이며 또한 그 효과도 현저할 것인즉 여기에 조선반도사의 편찬을 새롭게 하고자하는 필요한 이유와 근본 취지가 있는 것이다.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





참 미묘한 표현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이 나타난다.   스스로 <조선사 편수>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조선반도사의 편찬을...]이란 말로 단군조선의 최대강역을 삭제하고 반도사로 축소할 의도를 공공연히 표출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이에 배치되는 古書와 문헌들의 운명이 앞으로 어찌될지 암시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그렇게 시작하고 있다.





     1) 조선민족의 기원과 국가의 개창開倉*형성에 이르기까지의 발전과정에 관한 이 나라 고유의 사화史話*사설史說 등은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거한다.  <同書 47p>





※ 이를 위한 뒷받침으로 본격적인 전래 史書 압수와 수거 및 소각*인멸의 목적과 취지가 명백히 드러나는 文句이다.





     2) 조선반도사(분명히 편찬의 범위를 적시하고 있다) 편찬의 시대구분은  제1편 上古*三韓 제2편 삼한 제3편 통일신라...<동서 7p>





※ 특히 주목할 기록이다.   왜냐하면 전제로 한 [조선반도사 편찬]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이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시대구분 원칙에서 제1편이 三韓이전(제1차 위원회)→ 신라통일 이전(제2회 위원회)으로 의도적인 변화를 겪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민족의 기원과 국가의 개창開倉*형성에 이르기까지의 발전과정에 관한 이 나라 고유의 사화史話*사설史說 등은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거한다]란 명제(命題)를 확실히 보장해주기 위한 조치가 이루어진다.   [1916년 1월]부터 <자료수집>의 명목으로 <반도사>의 범위를 넘어선 우리 민족사서에 대한 대대적인 수집 작업이 시행되고 있다.   이는 1918년에 이르기까지 오직 자료수집이란 미명에 집중하여 방대한 수거 목록과 수거수량 때문에 편찬연한을 부득이 연장한다는 기록을 보아도 여실히 짐작되는 부분이다(조선문화보급회 간刊 조선대관朝鮮大觀 154p>.





이어 총독 제등 실(齊藤 實)에 의해 1923년 5월 [조선사 편찬에 관한 古기록*문서 등 보존에 관한 훈시訓示]를 시달하여 각급 행정*경찰관서의 협조 아래 치밀한 수거작업을 강화한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92p)는 大正 11년(1922년) 즉「조선사편수회」가 확대 개편되기 이전부터 사료를 수집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1922년 8명의 관계자가 연 122일을 출장했으며, 23년에는 17명이 연204일, 24년에는 12명이 연 176일, 25년에는 15명을 연200일 동안 전국을 누비어 누계로 보면 총 259명의 전문요원들이 2800일 동안 조선 사료를 찾아다녔다.   1926년 12월에 이르러 [사료탐방내규史料探訪內規]를 공포하여 각 관서(官署)의 강력한 후원을 기반으로 남아 있을지 모르는 史料와 일본*만주*대마도의 史書들도 포함시킨다.   결국 이 무렵부터 1937년 말까지 15년간이란 장기간(長期間)에 걸친 끈질긴 수집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전래(傳來) 고문헌(古文獻)들이 빠짐없이 수거(收去)되었는데 중요한 것만도 사책(史冊) 4950권*문기(文記)등 453점(대마도:古문서류 61,469장*古기록류古紀錄類 3576冊*古지도류古地圖類 34장 등)에 이른다.





※ 이 때문에 1922년 8월 2일 열린 제4회 위원회에서 최남선 등의 반발로 수집된 문헌자료 가운데 가장 귀중한 사료는 등사謄寫하여 [복본複本]을 만들어 본문과 함께 대학이나 도서관 등에 보존하기로 결정하였는데 1925-1937년 3월까지만 해도 수량이 1623冊에 달하였으니 수거의 규모를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허나 이것들 역시 해방이 되면서 없어져 오늘날까지 전혀 행방이 묘연하다.





[3차]  총독부 등 공식적인 통로와 관서(官署)를 동원한 조선왕조 소장 문헌*史書 수거 및 방출





이 과정에서는 특히 왕실(王室) 공식(公式) 장서각(藏書閣-규장각 등)에 있던 문헌사료나 관찬官撰*사찬사서私撰史書들이 수난을 당한다.   이와 병행하여 전국 주요처(主要處)에 있던 서사(書肆)*권문세가權門勢家*유향비장고儒鄕秘藏庫등의 은밀한 보존문헌과 도가사서류(道家史書類)의 잔질(殘帙)까지도 약탈당하였다.   후일 식민사관의 표상이 된 [조선사 편수 작업]을 붕괴시키거나 민족사관을 회복할 가능성이 있는 근거 사료들을 집중적으로 압수*수색하여 말살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그리고  기록을 통한 관련 서목(書目)조사가 공공연히 이루어져 이때에 반출된 수많은 사서류(史書類)들은 아직도 日本 궁실(宮室)에서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므로 매우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다.  





     - 금서룡(今西 龍)조차 자신의 저서著書인 <朝鮮古史の硏究>의 <檀君考>에서 <이조李朝 태종太宗 왕조실록王朝實錄 12년 條에 열기列記된 신비집 神秘集*고조선비사 古朝鮮秘詞*대변설 大辯說*조대기 朝代記*주남일사기 周南逸士記*지공기 誌公記*표훈천사 表訓天詞*삼성밀기 三聖密記*안함로 원동중 삼성기 安含老 元董仲 三聖記*도증기 道證記*지이성모 智異聖母*하사량훈 河沙良訓*문태산 왕거인 설업 등 삼인기록 文泰山 王居仁 薛業 등 三人記錄*수찬기소 일백여권 修撰企所 一百餘卷*동천록 動天錄*마슬록 磨虱錄*통천록 通天錄*호중록 壺中錄*지화록 地華錄*도선한도참기 道詵漢都讖記 등의 서적들이 왕씨고려시대王氏高麗時代에 서운관書雲觀을 중심으로 하여 많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서적들이 고려시대로부터 이조李朝 初까지 구전되어 내려오는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연유하여 도가(道家-선가仙家)에 의하여 저술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스스로 피력하고 있다(동서同書 53p)


     - 일제강점기 때 일본 왕실문고(왕실도서관)에서 도서 분류 및 내용분석 업무를 담당했던 박창화(朴昌和; 1889∼1962)씨는 말한다.   “일본 궁내청 소료부(書陵部:일명 왕실도서관)에서 1933년부터 12년 동안 조선전고(朝鮮典故) 조사사무 촉탁으로 근무했다.  이곳에서 일제가 약탈해 간 '단군'관련 사서 등을 보았다(이를 청주사범학교 교장이었던 최기철(崔基哲; 1910∼) 서울대 명예교수이며 담수생물학연구소장에게 '증언'한 바 있다) 





       [증언내용] 그는 왕실문고王室文庫에서 우리 상고사上古史 관련 史書를 분류하고 내용을 파악하는 일을 직접 담당하였다.   당시의 <박창화>는 일본 王室文庫에서 일하던 중 자전거를 타다가 둑에서 넘어져 크게 다쳤고 요양 차 잠시 고향에 돌아왔다가 광복을 맞아 그대로 머물게 되었으며 <청주사범학교> 교장이던 <최기철> 박사를 찾아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던 터였다.  왕실문고王室文庫 재직 당시(8ㆍ15 광복 전) 文庫 내 소장所藏된 사료史料 대부분이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수탈해간 우리 史書임을 직접 확인했고 중요한 고대사古代史 관련 史書들은 모두 거기에 있다고 할 만큼 많은 분량이었다고 증언했다.   문적文籍들을 분류하고 내용을 검토하다 보니 중요한 사료들을 모두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대부분이 '단군(檀君)' 관련 서적이었다.   당시 그곳에서 같이 근무하던 한 일본인은 "조선의 古書는 다 가져왔기 때문에 여기 있는 고적古籍들은 조선에는 없는 것들이다"라고 자랑삼아 말하기도 했다.





       그는 <청주사범학교 국사교사>로 새 출발을 했다.   재직하면서 한 학기 동안 오직 '단군'에 대해서만 강의할 정도로 이와 관련된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었는데 이는 왕실문고에서 일하면서 습득한 지식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박창화로부터 국사國史를 배운 제자로는 김준호 교수(현 서울대 명예교수, 생물학)와 임양재 교수(전 중앙대 교수)가 있다.   광복 직전 미국의 B-29의 폭격이 한창일 때 일본정부는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오하리(尾張) 공작(또는 백작)집 지하실로 史書들을 옮겼는데 이때 그가 직접 왕실문고를 옮기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 후 귀국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행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오하리>의 집 지하실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거나 왕실도서관으로 다시 복귀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 <박창화>와 일본 왕실도서관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충북교육청을 찾았다.   "1950년 퇴임자 이력서 철인데요.   50년도 박창화라고 되어 있네요."   1950년 퇴임자 명단에 박창화의 이름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박창화가 왕실도서관의 사서司書로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박창화가 1933년부터 12년 동안 일본 궁내성 즉 왕실도서관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박창화의 이력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왕실도서관 측에서는 박창화에 대한 기록은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박창화의 근무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던 취재팀은 일본국립국회도서관에서 1930년대에서 40년대 사이에 일본 궁내성에서 근무한 직원의 명단을 발견했다.   그중 1935년 직원명부에 박창화의 이름이 보인다.   왕실도서관에서 조선의 '고서적'을 다루는 일을 했던 박창화는 당시 촉탁 즉 특별계약직으로 月수입은 85엔이었다.   12년간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근무했던 박창화는 광복직전 귀국했다.   광복 후 그는 정부관계자에게 왕실도서관에 중요한 책이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 자신이 직접 찾아오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1999년 7월 10일(토) 저녁 8시 KBS-1TV [역사스페셜]의 왕실도서관에서 근무했던 역사가 박창화 관련 기사>





     - [서울대에 있는 규장각]   1911년 일본 왕실에서 조선총독부에 보낸 공문 하나가 발견됐다.   메이지시대의 영웅이며 네 번의 수상을 지냈고 천황의 고문 기관인 추밀원 원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토 히로부미>였다.   공문은 <이토>가 하얼빈에서 피살된 후 일본 궁내성과 당시 규장각을 감독하고 있던 일본 취조국이 서로 주고받은 것이다.   내용은 <이토>가 가져간 책을 궁내성이 자신의 소유로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취재 과정에서 하나둘씩 드러나는 일본 왕실 도서관의 비밀들...도서관 안에서 취재진이 발견한 한국 고서적들...일본 낭인浪人에게 살해된 <명성황후>의 장례기록을 담은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는 왜 가해자의 나라 일본에 있는 걸까?   우리 책들을 왜 일본 왕실이 소유하고 있는 걸까.    <1999년 7월 10일(토) 저녁 8시 KBS-1TV [역사스페셜]>


     - 박성○ 교수(정신문화연구원 편찬부장 역임)는 말한다.   “조선 세종 때부터 단군관계 史書들을 수집하여 장서각과 규장각 등에 보관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日帝가 朝鮮史를 편찬한 이후 이들 사서류史書類는 전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아울러 민속사료나 무속신앙으로서 단군신앙이 깃들어 있다든지 國祖 단군의 민간전승이 녹아있는 자료나 문헌들도 모조리 압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민족종교에 대한 탄압과 와해공작도 병행하였음을 보면 얼마나 집요하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 모든 정황을 종합해 보아서도 日帝의 우리 古書 탈취와 인멸 작업이 전 방위적이며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이루어졌는지를 잘 알게 된다.   과연 [삼류매식소굴]은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삼류매식소굴】의 주장





Ⅲ. 일제의 삼국유사 개작설 -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이것 또한, 문정창이 역사 날조의 증거라며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에서 내세운 후 <단군조선사기연구>로 부연한 것이다.   문정창은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 p.59>를 가지고 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인데, <이마니시 류(今西龍)>이 昔有桓國을 昔有桓因으로 조작해놓은 것을 최남선이 발견하여 지적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꽤나 영웅적인 이야기로 변조가 된다.)   해당 회의에서의 발언내용과 문정창의 인용을 비교해 보도록 하자.





其の三は原典の引用や考勘には實に當事の方の御苦辛の程が忍ばれて感佩に堪へませぬが、尙一層の御配慮を願ひたい節もあるやうに存じます。例へば高句麗東明王のところの引いた [三國遺事の檀君古記の中の「昔有桓國」とあるべきところを、後の淺人の妄筆にか る「桓因」に從ひたるが如きが其の一つであります] 御承知の通り [檀君古記なるものはもと相當纏つてきた筈の古い記錄を極めてあつさりと縮約致しましたものである故に、其の片言隻字にも間間非常に重大なる意味が含まれて居りますが]、殊に此の桓國卽ち桓の國と桓因とする間には全文の解釋上古來容易ならざる因緣が附いて居りますから、[假令一字の誤りであるとはいへ其の影響は隨分大きいものがあるのであります。此の文は京都大學の影印本によつたとしてありますが、其の原書の桓因の因の字が國の字を上塗りして因としたるものたるは一見よく認められるところであります] 古典引用の上に於きまして、假令極めて明白なる誤謬なりと雖も、これを妄りに改竄するの不當なるは今更申す迄もなく、現に此の書の上にもこの點に對する敬虔銳敏なる御用意が十分窺はれます。<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 p.59>





檀君古記는, 廣範한 古記錄을 至極히 簡短하게 要約한 것이므로, 그 記錄의 片言·隻字에도 至極히 重大한 意味가 包含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一字의 誤라 하여도 全文의 解釋上 그 影響하는 바 至極히 크다.……三國遺事의 檀君古記中에 「昔有桓國」이라고 되어 있었던 것을, 「昔有桓因」이라고 고친 淺人의 妄筆을 引用한 것은....高句麗 東明王의 條에서 引用한 이 文은, 京都帝國大學이 發刊한 影印本에 依據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 原書의 桓因이라는 「因」자가 「國」자를 上塗하여 因字로 만든 것을, 一見하여 明白히 認定할 수 있는 바이다.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 中 p.463>





이후의 그의 수법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문정창은 독자가 「자신이 바라는 대로의 인식」을 갖게 하기 위해 인용문에서 고의적인 단장취의와 뒤섞기를 수시로 활용한다. (나중에는 인용문도 날조를 한다.)   인용문만을 본다면 일반적인 독자들은 원래 「환국」이라고 되어있어야 할 것이, 「환인」으로 고쳐진 것으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에 관련된 내용인가를 알게 해줄 발언의 전단부는 삭제를 해놓았고, 이전부터 「환인」,「환국」이 해석상 문제가 되었던 것, 즉 전부터 병존하고 있었던 것을 알려주는 문장<殊に此の桓國卽ち桓の國と桓因とする間には全文の解釋上古來容易ならざる因緣が附いて居りますから>은 빼버렸다. (이것은 이후 최남선과 관련해서 보도록 하자.) 즉, 환국, 환인 중에서 환인을 택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내용이, 환국을 환인으로 날조한 것으로 인용된 것이다.  








【반론】





이 부분에서는 더 이야기해보았자 내 입만 아프니 거두절미하고 <삼류매식소굴>이 예시로 든 일본어 原文(왜 이 원문을 그대로 해석도 않고 자랑스럽게 적었는지?   역시 일본 색깔은 여기에서도 여실히 나타나는 듯하다)을 우리말로 해석해 보기로 한다.





원전(原典)의 인용과 고감(考勘)에 있어서는 실로 일하신 분들의 노고가 마음에 걸려 견딜 수 없는 바가 없지 않으니 가일층의 배려를 바란다.   예를 들면 고구려 동명왕의 부분을 인용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고기(檀君古記) 가운데 [석유환국(昔有桓國)-옛적에 환국이 있었다.]인 것을 후에 천인(淺人)의 망필(妄筆)로 말미암아 [석유환인(昔有桓因)-옛적에 환인이 있었다.]으로 고쳐졌음이 그 하나다.   다 알다시피 단군고기는 본시 상당한 여러 고기록(古記錄)을 종합한 것을 극히 확실하게 축약한 것이므로 짤막한 몇 마디나 글씨 한자에도 어떤 경구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더욱이 환국(桓國) 즉 桓의 나라와 환인(桓因)사이에는 전문의 해석상 옛부터 용이하지 않는 인연이 붙어있는 것이다.   가령 한 자(字)의 잘못(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그 전문의 해석에) 끼치는 영향은 매우 큰 것이라고 할수 있다.   이 글은 경도대학(京都大學) 의 영인본(影印本)에 의한 것이지만 그 원서(原書)의 환인(桓因)의 인(因)자가 국(國)자 위에 덧씌워져 인(因)자로 한 것을 일견하여 바로 인정받는 것이다.   고전을 인용함에 있어서 가령 매우 명백한 오진일지라도 이것을 함부로 경망(輕妄)스럽게 개서(改鼠-쥐가 무엇을 뜯어먹은 것처럼 고침)한다는 것은 심히 부당하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현재 이 사서에서도 이점에 대한 경건하고 예민한 배려가 엿보여야 될 줄 안다.








되도록 원문(原文)에 충실하게 번역했지만 그러는 가운데에도 그야말로 <최남선>의 울분과 구구절절한 심정과 단호한 결의가 감지되고 있다.   또한 이 해석은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다른 서책(書冊)에서도 인용한 文句와 거의 다르지 않은 점도 발견할 수 있다.   헌데 이 사람은 여기에서는 트집 잡을 것이 없는지 난데없이 【殊に此の桓國卽ち桓の國と桓因とする間には全文の解釋上古來容易ならざる因緣が附いて居りますから은 빼버렸다】는 이유를 들고 나온다.   과연 그랬을까?   원래 이 文句의 해석은 이렇다.





     ▶ 더욱이 환국(桓國) 즉 桓의 나라와 환인(桓因)사이에는 전문의 해석상 옛부터 용이(容易)하지 않는 인연(因緣)이 붙어있는 것이다.





즉 그동안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에 대하여 여러 가지 경로로 전해오는 서책(書冊)에 대한 가필*윤색*폄훼*삭제 등의 현상으로 말미암아 儒家的인 축소해석과 道家(여기서는 민족 史書를 말한다)적인 기술(記述) 차이 때문에 지금 떠도는 삼국유사 판본(板本)에 대한 불일치로 말미암아 全文의 해석상 논쟁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다시 말해 옛부터 수상壽常하지 않게 논쟁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최남선> 선생의 강변 태도를 보면 이 句節은 어떤 주장을 하기 위한 대전제(大前提)의 성격임을 금방 알 수 있는데 곧바로 이어지는 언급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고기檀君古記 가운데 [석유환국昔有桓國-옛적에 환국이 있었다]라고 되어 있어야 할 곳을 후에 천인(淺人)의 망필(妄筆)로 말미암아[석유환인昔有桓因-옛적에 환인이 있었다]이라고 고쳐진 것이 그 하나다】라고 뚜렷이 못을 박는 입장을 확고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언급은 지금까지 나오고 있는 모든 문헌에 그대로 삭제되지 않고 수록된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후에 나타나는 [삼류매식소굴]의 수법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오히려 독자들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의 인식」을 갖게 하기 위해 인용문에서 고의적인 단장취의와 뒤섞기를 수시로 활용한다는 점을 여러분들은 필자(筆者)의 반론이 아니더라도 쉽게 짐작하게 될 것이다.





[덧붙임]





【이마니시 류(今西 龍)>가 昔有桓國을 昔有桓因으로 조작해놓은 것을 최남선이 발견하여 지적했다는 것이다】는 사실을 아주 부정적으로 해석하여 왜곡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그렇다면 다음의 문제에 대하여 명확한 근거에 의한 답변이 있어야 한다.





     1)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위원회 개최 때마다 입장을 피력한 부분이나 이 사건이 일어난 위원회 기록의 전후 문맥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왜 그런 말을 하였는지가 명백하게 감지된다.   즉 [일제의 상고사 왜곡에 대한 수차례 지적 - 그 시기 어느 땐가 어느 인물의 변개變改 의혹 - 그를 천박한 인물로 매도하는 단호한 입장 - 그런 사실을 적시摘示하는 기록 내용들]이라는 문맥의 흐름이 잡힌다.


     2) 설령 백보百步를 양보한다 하더라도 原文의 의미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사람이 말했듯이 [그렇게 헷갈리게 만들어 놓아 본 뜻을 흐리고 어지럽힌다]는 선생의 탄식과 변개에 대한 강한 의혹감이 느껴진다.   그야말로 桓國-桓因의 망필(妄筆) 부분에 대한 시기적절한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삼류매식소굴】의 주장





[위 문장 계속] 전단부를 빼버리면, 淺人의 妄筆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버린다. (물론, 전단부가 있었더라도 일반인들은 알기 어려웠겠지만.)   천인의 망필이 무엇일까? 우선 문정창의 해석을 보도록 하자.





二. 崔南善은 「國」字를 「因」字로 고친 것을, 어떠한 淺人의 妄筆이라고 하였다.   그러한바 「國」자를 「因」자로 改竄한 데에는, 반드시 改竄할만한 理由와 目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目的과 理由를 가진 者는 檀君朝鮮을 削除하려고 一0餘年間 그처럼 애쓰고 努力해 온 今西龍·黑板勝美·內藤虎次郞 等 日本人 御用學者들과 朝鮮總督府 當局者들이었으니, 그러므로 筆者는 그 「國」자를 「因」자로 改竄한 者를, 今西龍等 日本人御用學者들과 朝鮮總督府 當局者들이라고 推斷하고 調査한 結果 그 모든 證據가 들어났다. (詳細 拙者 「領君朝鮮의 史記에 關한 小硏究」 參照)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 中  p.464>





소위 재야사학의 한심한 방법론 - 가설을 세우고, 가설에 근거를 어거지로 끼워맞추고, 가설과 똑같은 결론을 내리는 - 이 이때부터도 튀어나오는 것은 일소에 붙이고 넘어가자.   그는 「천인淺人의 망필妄筆」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다.   나는 종종 그가 악의적으로 우리 역사를 훼손한 것인지, 아니면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늘 혼란스러운데, 이 부분에서도 그렇다.   만약 전단부를 삭제하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그의 글을 보고 「淺人의 妄筆」이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전단부가 삭제된 상태에서 그의 논의를 접하게 되면,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를 직접 찾아볼 열의와 그의 논의에 의구를 품은 사람이 아닌 한 논지를 긍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과연 무지일까. 아니면 고의일까.   「淺人의 妄筆」 통상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 표현이지만, 이것이 考勘에 관한 대화라는 것을 알면 쉽게 풀린다.  정말 흔히 쓰는 표현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어딘가(...)의 25사를 검색해보자.





九一七頁一0行 已封曹參後曹湛爲平陽侯 校補引錢大昭說,謂和帝紀永元三年,詔以曹相國後容城侯無嗣,求近親紹封,則參後之紹封非平陽,乃容城也.按:校補謂錢說是,此或竟出 淺人妄改./新校本後漢書 卷二十六 校勘記





二二七一頁 八行 並獻帝子 按:校補謂以融所對聖恩敦睦及同産昆弟之說證之,實皆獻帝之諸弟,而靈帝子耳.疑此注本作「並靈帝子」,淺人妄改 爲「獻」./新校本後漢書 卷七十 校勘記





二七五八頁 八行 桀卒於鳴條 按:校補謂「桀」當作「舜」.注引書專辯鳴條地所在,不妨及舜事,此淺人妄改耳. /新校本後漢書 卷八十三 校勘記





(후략)





대략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제딴에는 맞다고 생각하고 함부로 고쳐놓는 것」이 바로 「淺人의 妄筆」이다.   어떠한 목적이나 이유가 나올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삼국유사에 손을 대놓은 것은 일제였을까.   이것 역시 아래에서 최남선과 관련하여 다루도록 하자.








【반론】





무슨 생각을 하고 이런 억측을 남발하고 있을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추측과 이를 억지로 증명하기 위해 지나(支那)의 史書 기록까지 급급하게 끌어다가 선생의 심오한 의미가 담긴 일갈(一喝)을 함부로 재단하고 있다.   마치 이번 장(章)에서는 대단한 발견을 한 <컬럼버스>처럼 [천인의 망필]까지 언급하면서 명성이 자자했던 한 분의 석학(碩學)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모자라 오로지 자신만이 가장 뛰어나며 모든 것에 통달한 한학자(漢學者)인양 거들먹거린다.   과연 이 사람의 말대로 그랬을까?   하지만 의문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건 어쩌나???  


     1) 최남선 선생은 <삼류매식소굴>의 주장처럼 정말로 [천인淺人의 망필妄筆]이 뜻하는 의미를 무식한 소치로서 전혀 모르고 잘못 인용하였을까?


   


      - 그런데 가만히 읽다보면 이 사람이 오히려 [천인의 망필]에 대한 대목에서 [천인망개淺人妄改]라는 다른 기록의 구문(句文)을 발견하였거나 어디서 정보를 입수하여 찾아본 뒤 호들갑을 떨며 입에 거품을 무는 듯한 인상이 더 짙다.





     2) [천인의 망필]이란 말을 직접 인용한 최남선 선생이 또한 총독부에서 역점을 두어 진행하고 있던 <조선사편수>작업의 논의를 위한 중차대한 위원회 석상席上에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헌데 이 사람의 말에 의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천치처럼 언급했다는 말인가?





      - <삼류매식자>가 예를 든 句文을 살펴보면 분명히 [천인망개淺人妄改]는 <소견이나 지식이 깊지 않은 사람이 함부로 판단하여 즉 판단이 흐려 망령되이 어떤 문구나 구절의 해석이나 글자를 바꾸다(改)>를 의미한다.   하지만 최남선 선생이 적시하는 부분은 한 문자(文字)를 그대로 두고 어떤 목적의식에 따라 변개(變改)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깊이 있는 한문학자적(漢文學者的) 소양으로 [천인淺人의 망필妄筆-소견이나 지식이 깊지 않은 사람이 망령되이 덧보태어 쓰다(筆)]라고 명확히 구분하여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왜 갑자기 25史까지 들먹이면서 [천인망개]가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다.   필자(筆者)도 소위 [부일망상사학]의 한심한 방법론인 가설을 세우고 - 가설에 근거를 어거지로 끼워 맞추고 - 가설과 똑같은 결론을 내리는 익숙한 논리 전개가 여기에서도 튀어나오는 것이나 아닌지? 하는 의혹은 일소에 붙이고 넘어가겠다.


 


     3) 문맥을 살펴보면 선생이 주장하는 핵심 논제를 가장 알맞게 가리키는 비유로 이런 문구(文句)를 선택해 사용했음이 여실한데 그가 <삼류매식소굴>보다 학문의 깊이가 그렇게 낮아서 잘못 인용하였을까?  


      - 선생이 강변하였던 기록의 문맥을 잘 살펴보면 이런 사실들이 아래의 흐름처럼 어색함이 없이 그리고 일목요연하게 들어온다.   헌데 문장의 전후를 잘 살펴야 한다면서 떠들던 이 사람이 오히려 이런 구절 가운데 몇 군데를 의도적으로 [예시문]에서 삭제해 버려 마치 처음부터 없는 것처럼 독자의 이목耳目을 호도시키고 만다.





[대전제] 





다 알다시피 [단군고기]는 본시 상당한 여러 고기록古記錄을 종합한 것을 극히 간명하게 축약한 것이므로 짤막한 몇 마디나 글씨 한자에도 어떤 경구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더욱이 환국(桓國) 즉 환 나라와 환인(桓因)사이에는 全文의 해석상 옛부터 수상(壽常)하지 않게 논쟁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가령 한 자(字)의 잘못(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그 全文의 해석에) 끼치는 영향은 매우 큰 것이다.





[문제의 제기]





이 글은 경도대학京都大學의 영인본影印本에 의한 것이라고 하고 있으나 그 원서原書의 환인(桓因)의 인(因)자가 국(國)자 위에 칠을 인(因)자로 고쳐 놓은 것을 일견(一見)하여 바로 알 수 있다.





[문제가 되는 사유 설명]





고전古典을 인용 하는 경우에 가령 극히 명백한 오류라 하더라도 이것을 함부로 경망(輕妄)스럽게 개찬(改竄)한다는 것은 심히 부당하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천인의 망필 단정]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고기檀君古記 가운데 [석유환국昔有桓國-옛적에 환국이 있었다.]이라고 되어 있어야 할 곳을 후에 천인(淺人)의 망필(妄筆)로 말미암아[석유환인昔有桓因-옛적에 환인이 있었다]이라고 고쳐진 것이 그 하나다. 





※ 아무튼 이런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보아도 <양주동>과 쌍벽을 이루며 문명(文名)을 떨칠 만큼 박학하고 한학(漢學)은 물론 다방면에 조예가 많다고 우인(友人)들이 모두 인정하던 학자(學者)를 그렇게 일개 무식쟁이로 매도하면 되는가?   이 사람의 말대로라면 <최남선>선생이야 말로 [삼류매식소굴]의 발끝도 감히 따라잡을 수 없는 어리버리한 사람이 되겠다.   참으로 한심한 발상이며 어떤 목적을 위해 한 사람을 일반인 수준보다 못한 <무지랭이>로 만들어버리는 궤변치고는 그 정도를 넘은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하다.





[덧붙임]





[삼류매식소굴]은 위에 든 [예시문]가운데 [더욱이 환국(桓國) 즉 환 나라와 환인(桓因)사이에는 전문의 해석상 옛부터 수상(壽常)하지 않게 논쟁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를 들어 쓸데없는 트집을 잡고 있다.   그러나 이 구문은 곧바로 나오는 구절인 [가령 한 자(字)의 잘못(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그 전문의 해석에) 끼치는 영향은 매우 큰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명백하게 수식하고 있는 필수 전제 구문으로서 더 이상의 확대해석이 필요치 않다.  





더구나 글의 문맥으로 보아 최남선 선생은 분명히 [환국을 환인으로 변개하였던 걸 천인의 망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음이 느껴지니 桓國이 원래 글자라는 걸 인정하고 있음이 뚜렷하다.   누가 읽어보아도 같은 결론이 맞는데 왜 저렇게 엉뚱한 억지 주장을 하는가?





따라서 <문정창> 선생이 든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 中  p.464]의 내용은 어느 모로 보나 이에 대한 해석을 비틀지 않는 한 뚜렷한 하자(瑕疵)가 없다.   원래 색안경을 쓰고 보면 그 세상이 맞는 줄 알고 설치다가 제 풀에 걸려 넘어지는 법이다.








【삼류매식소굴】의 주장





문정창은 최남선이 일제의 협잡을 발각했는데, 그는 정작 정덕본의 '정본'을 보지 못했다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崔南善의 博識慧眼은 日本人들이 「國」字를 「因」자로 詐改해 놓은 그 挾雜을 發覺해 내었다.   그러나 崔南善 역시 「三國遺事 正德本」의 正本을 보지 못한 關係上(同氏 新訂 三國遺事 五七面), 그가 編한 모든 史書에 揭載한 古朝鮮記에, 그 正本대로「囗안에 王」字를 사용하지 못하고 假想의「囗안에 土」字를 使用하였다.   그러나 「囗안에 土」字는 康熙字典과 國內 모든 玉篇에 없는 글字이다.   <단군조선사기연구 p.76>





이쯤이면 감이 잡히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정덕본의 오각 「國」을 석남본을 통해「因」의 이체자로 바로잡은 사람이 다름아닌 바로 최남선 본인이었던 것이다.   문정창이 언급한 최남선의 <신정 삼국유사>중 해제를 보도록 하자.   여기엔 이 내용이 아주 상세히 나온다.





(전략)





가) 三國遺事의 今本에는 序跋目次가 다 업고 撰者의 署名조차 卷五의 首에만 載在하니 書中에 字劃의 譌誤와 行葉의 錯亂과 本文與註脚의 混糅를 幷하야 그 板式의 어즈러워젓슴을 알 것이오   그러나 오히려 字樣과 刀法이 古整하고 또 高麗板式에 잘 符合하는 自를 보니 이것은 古刻의 風貌를 傳하는 것으로 麗當時의 刻板이 잇섯슴을 여긔 想察할가 하노라.   그러나 古刻本은 이제 도모지 볼 수 업고 鳳毛가 티겨오 殘存한 者는 다 李朝 中宗 壬申(正德七年, 西紀一五一二年)의 近板本이니 이것을 혹 再刊으로 닐커르나 그 幾回의 重刻임은 徵할 수 업스며 그 刊刻緣起는 重刊者인 李繼福의 跋에 잇스매 여긔는 架疊할 것이 업슬가 하노라.  


나) 다만 李氏는 完本을 어더서 全部 改刊함을 적엇스되 今本의 板式이 巧拙과 刓銳로 만히 一致하지 아니 하고 그 理由는 니른바 列邑에 分刊하여 匠手가 다른 것 만에 말미암지 아니한듯하니 대개 改刻時에 舊板子의 完整한 者는 오히려 仍用한 것도 잇섯고 또 그中에는 依然이 缺殘한 채 塡補되지 아니한 것이 잇스니 니른바 完本이라함도 比較上의 말인가 하노라.   末記를 據하건데 校正으로 崔李兩人의 名을 擧하얏스니 이네가 애도 만히 썻스려니와 니른바 校正때문에 新生瘡도 작지 아니 하얏슴을 設想하리니 이 點도 本文 批評上에 반드시 看過치 못할 것인가 하노라.   李氏重刻의 板子는 언제까지 傳存하얏는지 憲宗 乙巳(西紀一八四五年)改刊, 東京雜記(卷之三書籍)의 「府藏冊板」下에도 三國史와 한 가지 三國遺事의 名이 들어 잇고 아마 百年을 出치 못 할 듯한 光文會所藏「八道冊板目錄」에도 慶州下에 또한 三國遺事를 出하얏스니 꼭 말하기는 어려우나 대개 韓末까지도 遺傳되얏다가 他處 許多의 例와 가치 時變前後에 流亡하얏슬가 하노라.  


다) 現行하는 本에도 異板이 더러 잇슴은 朝鮮光文會藏本第一號에는 卷第三第二葉第五行의 「墨胡子見之」로 終하얏거늘 安鼎福舊藏本에는 「墨胡子見」으로 終하고 之字는 次行의 首에 入하얏슴 가틈으로 알 것이며 또 光本會第二號本에는 卷第四第四葉이 完整한데 安氏本에는 後面의上部가 析破하야 그 破隙이 마치 缺字된 것처럼 보임과 安本에는 卷第四第九葉後面第九行注가 或云金時祖라 하얏거늘 光文會第一號第二號本이 다 或金時祖라 하야 云字를 缺함 가틈으로써 보건대 印出의 先後를 依하야 字行의 差違가 잇슴을 알지니라.





十六, 流布





라) 三國遺事는 古에 잇서서는 流布도 자못 넓고 信用도 그리 엷지 아니하야 高麗史輿地勝覽以下로 權文海의 大東韻府群玉 其他가 다 이것을 引用하얏스며 뒤에 儒學者間에 자못 荒誕不經으로써 指彈되나 오히려 稽考의 一要文을 지으니라.   憲宗朝 李奎景撰의 「五洲衍文長箋」卷五十七, 史籍類辨證說中에 「三國遺事五卷, 曰 紀異二卷, 曰興法, 曰義解, 曰神呪, 曰感通幷三卷, 第五卷之首曰國尊曹溪宗迦智山下麟角寺住持圓鏡冲照大禪師一然撰, 其說荒誕」이라 한 것과 最近 安鍾和의 東史節要가 此書를 引用辨析한 것은 予의 아는 바로 此書를 實覩한 記錄의 最後라 할 것이로다.   自後로는 俗間에 流傳한 形迹이 거의 업서 朝鮮光文會當時에 널리 사람을 노하서 차젓스나 겨오 四方僧藏의 中에서 第三卷以下佛敎的記事를 실흔 下卷을 무릇 三本을 어덧슬 뿐이니 대개 僧史로 이것만을 珍襲하얏든 것일지니라. 


마)【뒤에 順庵 安氏의 手澤本이란 것이 나와서 愛知,今西氏의 手로 드러 가니 대개 中宗 七年(正德壬申)의 改刊本으로서 五卷이 具存하야 大正十年에는 京都帝國大學文學部叢書第六으로 玻璃板에 影하야 縮印되고 昭和七年에는 京城의 古典刊行會에서 原形大로 다시 影印되고 일변 昭和三年에는 朝鮮史學會의名으로써 今西氏의 校訂에 말미암는 活字本이 刊行되니라】   日本에는 처음 언제 流入하얏든지 모르거니와 壬辰亂에 取得한 者가 시방 尾張의 德川氏와 東京의 神田氏에게 各一本이 전하는데 王曆의 首二葉과 其他 數處에 落張과 缺字가 잇는 것을 他書로써 약간 補入하야 明治三十七年에(東京)文科大學史誌叢書의 一書로 活印하니 京都本이 잇기까지 學者의 依據가된것이로대 缺落以外에도 句讀其他의 紕謬가 만흐며 侯에 改訂을 더하야 日本續藏經에 너헛스나 脫은 毋論이오 句讀도 오히려 得宜하다 할 수 업나니라.   神田氏本에는 養安院藏書印이 잇스니 養安院이란 것은 德川幕府의 醫員인 曲直瀨正琳의 堂號-라   正琳이 性이 恬靜하고 書籍을 愛하더니 일즉 壬辰의 저 一將이든 浮田秀家妻의 難疾을 다스려주매 秀家가 大喜하야 일즉 亂中에 取歸한 朝鮮書數千卷으로써 그 勞를 酬하니 이 때문에 朝鮮書籍의 富藏으로 國中에 돌린자-니라.   대개 三國遺事도 秀家所贈의 一일지니라.   이러케 三國遺事의 傳本은 잇섯스나 日本에서도 그 流行이 넓지 못하야 佛乘으로도 有力한 此書로대 다른 것가티 翻刻된 일도 업고 또 여러 書目中에도 거의 보임이 업스며 伊藤東涯의 三韓紀略文籍彙中에 三國史記·東國通鑑의 次로 三國遺事의 名을 擧하얏스나 帝王韻紀와 한 가지 若干卷이라 하얏슬 뿐이오 아모 注記가 업슴을 보면 일흠만 듯고 實物은 보지 못하얏는가 하노라.   (昌平志에 載한 林氏所藏朝鮮著述目錄 六十二種二百三十二本中에와 桂山義樹의 東韓事略에도 다 三國遺事에는 言及하지 아니하니라).   東京帝國大學의 刊本에는 句讀의 失當한 以外에도 왕왕 不注意의 誤解를 먹음엇스니 니를테면 卷五感通篇「金現感虎」條中의 申屠澄을 또한 新羅人으로 認하야 漢州의 下에 今廣州임을 注하고 다시 頭注에 輿地勝覽의 文을 引한 것 가틈이니라. 

바) 順庵手澤本의 出現은 三國遺事의 考稽上에 一大 便宜를 提供하얏슴이 事實이로대 또한 訛字와 刓處가 만하서 오히려 全眞한 面目을 어들 수 업스며 그뿐 아니라 後人의 塗改를 더한 것이 處處에 잇는데 그 影印本들에서는 墨色이 混同하야 原刻인지 改劃인지를 辨析하기 어려운 곳이 만흠은 진실로 遺憾이얏도다.   그런데 最近에 이르러 卷第一만의 零本이 嶺南의 某地로서 出現하야 京城, 宋錫夏氏의 收藏한바-되니 그 板式이 光文會藏本의一에 合하는 것으로서 從來 諸本에 迷晦한 部分을 여긔 就正할 것이 만흐며 더욱 䵝昧의 嘆이 尤甚한 王曆에 잇서서 宋本의 寄與-큼을 깨다를지니라.(다만 宋本의 王曆에도 第十葉과第十一葉 前半이 缺落하니라).   順庵手澤의 足本에 대하야 光文會本과 宋本과를 가지면 三國遺事 卷一,三,四,五의 對校가 얼만콤 可能하거니와 第二는오히려 別本의 出現에 기다릴밧게 업나니라.   <신정 삼국유사> 삼국유사해제





위의 내용과 어느 정도 중복되겠지만, 삼국유사의 판본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삼국유사가 처음 간행된 것은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고려말,조선초에 여러차례 간행이 되었는데 이를 고판본이라 한다. 위의 ‘삼국유사 해제’에 인용된 송석하본, 즉 「석남본」은 바로 조선초에 간행된 고판본 중 하나이다.   그러다가 판각이 유실되어 중종 년간(1512)에 이계복이 옛 판각을 모아 이 판각에다 다시 전문을 새기거나 또는 새로 새기거나 하여 재발간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정덕본, 또는 임신본으로 불리는 판본이다.





이 판본은 몇 부의 발행본이 아직 남아있는데, 잘 알려진 완본으로 본문에 나오는「순암수택본」,즉 안순암의 소장본으로 훗날 「이마니시본(현재 텐리대 소장본으로 당시 경도대학영인본의 원본)」으로 더 알려진 것과, 서울대 황의돈교수 소장본이었던「황의돈본(바로 문정창이 정덕본의 正本이라고 우긴 그것이다.)」, 그리고 고려대에 소장된 「만송문고본」 등이 있다.    그런데 위에 최남선이 기술한 바와 같이 정덕본은 <순암수택본>이나 <황의돈본>처럼 가필된 것이 아니더라도 여러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문정창이 정본이라 우긴 황의돈본에도 역시 가필이 있다.)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 회의 당시에는 가필본인 순암수택본의 해당 구절, ‘昔有桓因’에 대해 이전부터 환인과 환국으로 된 것들이 혼재하였던 까닭에 어떤 것이 옳은지 판단을 내리지 못했으므로 가필된 판본(정확히는 위의 해제에 쓰여있듯이 원문과 가필된 것을 구분할 수 없게 영인한 영인본)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때쯤에는 환국이라 쓰여진 판본이 환인이라 쓰여진 판본보다 많았던 듯 하다.  석남본의 출현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숨을 거둔 단재의 착오는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석남본과 광문회본, 순암수택본 등 여러 판본을 교감한 결과 해당 글자가 ‘因’의 이체자임을 확인하였고, 자신의 <신정 삼국유사>부터는 명확히 ‘因’의 이체자를 기재해놓았다.   이러한 것은 대를 거쳐 전해지는 동안 생기는 와전으로, 육당에게 있어 이러한 오기는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즉 원래는 因이었으나 임신본의 오각으로 인해 이후의 판본에 因과 國이 병존하게 되었던 것인데, 최남선에 이르러 이것이 바로잡힌 것이다.   그러나 문정창은 이게 무슨 얘기인지 몰랐고(아마 순암수택본이 이마니시본인것도 몰랐던 것 같다.), 저게 무슨 글자인지도 몰랐으므로, 최남선을 팔아「최남선이 일제가 환국을 환인으로 개작해놓은 것을 발견했으며, 최남선은 이마니시본을 제외한 삼국유사를 보지못했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퍼뜨린 것이다. (이 거짓말을 최태영은 그대로 믿었다.)   최남선은 이미 1940년대 - 문정창이 거짓말을 하기 20여년전 - 에 정덕본보다 훨씬 고본(古本)을 확인하고, 해당 글자를 因의 이체자로 정정해놓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적어도 일제가 이마니시본에 덧칠을 해놓은 것은 사실일까?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이마니시본은 순암수택본, 즉 안순암의 소장본이었다. 안순암이 누굴까? 바로 <동사강목>의 저자 순암 안정복이다.   그가 동사강목에서 삼국유사를 인용한 것을 보도록 하자.





동방의 고기(古記) 등에 적힌 단군에 관한 이야기는 다 허황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단군이 맨 먼저 났으니, 그 사람에게는 신성한 덕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좇아서 군으로 삼았을 것이다.   예전에 신성한 이가 날 적에는 워낙 뭇사람과는 다른 데가 있었으나, 어찌 이처럼 매우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있었으랴!   고기에 나오는 ‘환인제석(桓因帝釋)'이라는 칭호는 《법화경(法華經)》에서 나왔고, 그 밖의 칭호도 다 중들 사이의 말이니, 신라ㆍ고려 때에 불교[異敎]를 숭상하였으므로, 그 폐해가 이렇게까지 된 것이다.   동방이 병화(兵火)를 여러 번 겪어서 비장(秘藏)된 국사(國史)가 죄다 없어져 남은 것이 없었으나, 승려가 적어 둔 것은 암혈(岩穴) 가운데에서 보존되어 후세에 전할 수 있었으므로, 역사를 짓는 이들이 적을 만한 것이 없어서 답답한 끝에 이를 정사(正史)에 엮어 넣는 수도 있었다.   세대가 오래 내려갈수록 그 이야기가 굳어져서, 한 인현(仁賢)의 고장으로 하여금 말이 괴이한 데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통탄함을 견딜 수 있으랴!   내가 이처럼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일체 취하지 않는 것을 그릇된 것을 답습하여 온 고루한 버릇을 씻어 버리고자 하는 까닭이다.   대저 선왕(先王)의 제례(制禮)는 사전(祀典 제사에 관한 법전)이 가장 엄한 것이다. 이제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에 삼성사(三聖祠)가 있어, 승국(勝國 전대의 왕조)부터 본조(本朝)까지 환인(桓因)ㆍ환웅(桓雄)ㆍ단군을 제사하는데, 단군을 제사하는 것은 워낙 마땅하거니와, 환인ㆍ환웅은 망설이지 말고 빨리 제거하여야 한다.   ‘올바른 귀신이 아닌 것을 제사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동사강목 제1상, 민족문화추진위원회 譯>





일제가 「환국」을 「환인」으로 고쳤다는 이마니시본을 갖고, 200여년전에 「환인」이라고 하고 있다.   적어도 이미 그때 가필이 되었거나, 아니면 그 글자를 '因'으로 읽는게 맞았다는 거다.   즉, 일제가 「환국」을 「환인」으로 고쳤다는 걸 발견했다는 유일한 증인이 그게 「환인」이 맞다고 하고 있으며, 일제가 「환국」을 「환인」으로 고쳤다는 바로 그 책의 이전 소유자가 그게 「환인」이 맞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위대한 고발자는, 그가 늘상 그랬듯이 무지와 악의로 점철된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론】





도대체 이 사람은 무얼 보고 있는 걸까?   아예 한쪽 머리가 빈 것인가?   아니면 그쪽의 인대가 움직이지 않을 만큼 엉뚱한 착각에 붙잡혀 있는가?   이제부터 <문정창>씨가 언급한 <최남선> 선생의 <신정 삼국유사>중 해제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엔 [삼류매식소굴]이 주장한 내용이 아주 상세히 나온다 하였으니 말이다.   설명의 편의상 이 사람이 자신 있게 예시한 최남선 선생의 <신정 삼국유사>중 해제를 단락별로 구분하였음을 미리 말해둔다.





[단락 가]





     1) 삼국유사 금본(三國遺事 今本)에 대한 불신 - 그러나 문자의 형상과 각인刻印한 기법과 판본板本의 형태로 볼진대 분명히 원본原本은 존재하였음을 확신


     2) 중종中宗 때 근래 판본板本만 잔존 - 이계복(李繼福)의 발문(跋文)으로서 數回의 중각(重刻)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단락 나]





     1) 古판본(석남본)과 今本(정덕본*임신본)은 일치하지 않음 - 복각본(復刻本)들이 여러 지방에서 만들어져 장인(匠人)들이 다르며 구판(舊版)이라는 것도 많이 결락缺落된 데다가 교정자校訂字의 새로운 훼손도 있어 이 부분에 대한 비평은 반드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 여기에서 최남선의 견해가 나타나는데 그가 본 <정덕본>이 原本과 다름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음을 <末記를 據하건데 校正으로 崔李兩人의 名을 擧하얏스니 이네가 애도 만히 썻스려니와 니른바 校正때문에 新生瘡도 작지 아니 하얏슴을 設想하리니...>라는 말로 짐작되는 부분이다.





     2) 이 정덕본은 헌종시 개간*광문회 소장(光文會所藏)「8도책판목록八道冊板目錄」에도 보여 한말(韓末)까지는 유전(遺傳)되었음을 추정





앵무새죽이기 태그저장  취소 구독하기

구독하기를 클릭해 보세요!이웃을 맺은 후 네이버me 메인에서

이웃의 새글을 보실수 있어요 덧글 쓰기  엮인글 쓰기  공감  

 

  


  

 【앵무새 죽이기】이유립, 환단고기를 주무르다 4...반론  궤변망상학의 알량한 떡밥  2009/08/17 20:16


 http://blog.naver.com/nero1003/70067274941






【앵무새 죽이기】이유립, 환단고기를 주무르다 4...반론





[앵무새 주장]





이유립은 1976년 10월 월간 [자유]지에 [이병도 사관을 총 비판한다] 제2편을 올렸습니다.   제목은 이병도에 대한 무슨 비판 같지만 내용은 자기가 쓴 [신시개천경본의神市開天經本義-신시개천경의 본래 뜻이라는 말]에 대한 소개입니다.





그럼 신시개천경이란 무슨 뜻일까요?   [삼국유사]에 고기古記란 이름으로 들어있는 단군신화를 이유립의 커발한개천각교-태백교(이유립이 이 종교의 교주입니다)의 경전으로 삼은 것이 바로 신시개천경입니다.   이유립이 올린 내용에 따르자면 이 [신시개천경본의]를 쓴 연도가 신시개천 5839년 즉 1942년이 됩니다.





그럼 1942년에 쓴 이글이 왜 문제가 되는 걸까요?   기껏 [삼국유사] 해설서에 불과하다면 말이죠.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신시개천경본의]안에는 지금껏 살펴본 바와 같이 [환단고기]의 한 부분인 태백일사 등등이 들어있기 때문이죠.   물론 [신시개천경본의]가 1942년에 쓰였다는 말 자체가 이유립의 허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일단 이유립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고 이야기를 진행해 봅시다.





본래 이유립은 [환단고기]안에 [신시개천경](즉 삼국유사의 고기 인용분)도 집어넣으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회에도 살펴본 바와 같이 [환단고기] <신시개천>이라는 항목이 있었던 것입니다.   애초에 그는 삼국유사의 [고기]를 [환단고기]의 줄임말로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그 부분을 읽어봅시다.  





금서룡의 조작한 석유환국-그대로 번역한 [원문번역주 삼국유사]에서 이병도는 고기=환단고기의 전한 그대로의 환국을 빼어버리고 원문에 없는-일본인의 변조한 환인을 내세우면서 자신만만하게 특서하여 가로되...





애초에 금서룡이 본 [환국桓국]이 因의 오자임은 안정복이 밝혀 놓은 바니 여기서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이 문제에 대해 흥미가 있으신 분은 「우리 역사상 수천년래 최악사건」- 昔有桓國 [클릭]을 보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이유립이 “고기=환단고기”라고 저렇게 적어 놓은 부분이죠. 





그런데 오늘날 환단고기에는 [삼국유사]의 “고기” 부분이 적혀있지 않습니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어찌되긴 어찌되겠습니까?   1976년에 가졌던 생각이 1979년에는 없어진거죠.   1회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환인이 신으로 나오는 부분이 1979년의 이유립에게는 용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구한 배달의 역사를 창조하는데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죠.





경쟁자인 중국은 요임금 이전에 삼황오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단군은 기껏해야 요임금 재위 중에 임금이 되니 그 이전 세계가 아주 부족했던 겁니다.   그래서 앞에 보았던 [동양문명서 원론을 비판한다]에서는 대종교의 김교헌을 맹비난합니다.   이쪽 동네는 연대가 짧거든요.


  


[반론]





도대체 고기古記=환단고기라는 논제가 왜 저렇게까지 왜곡되어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되며 읽는 사람들의 생각을 어지럽히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읽어보아도 <이유립>선생은 [석유환국昔有桓國-석유환인昔有桓因]의 조작 문제를 문제로 삼기 위해서 단지 古記=환단고기를 언급했던 것임을 정말 모르고 있는 건지?   그러니 어찌되긴 어찌되겠습니까?   이걸 모르고 헛말만 퍼뜨리는 사람들이 불쌍한 게지요.   이는 환단고기에 단군(檀君) 부분을 기술한 대목에서 필자(筆者)도 1회에서 반론을 제시한 바와 같이 초지일관 신인神人 단군檀君으로 단정하였던 <이유립>선생은 신화적인 부분으로 고기(古記)를 각색한 불승(佛僧) 일연(一然)의 입장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에 一然의 주장을 버린 것입니다.   또한 처음부터 단군(檀君) 기록이 자신과 같은 입장이리라고 보았던 古記의 원문을 1976년까지 도저히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대신 그가 가지고 있던 여러 저본들을 근거로 삼아 신시본기(神市本紀)에 나름대로의 입장을 정리한 태도라는 점을 망각한 소치라고 여겨집니다.   아래에 적시한 <삼성기전三聖記全 상*하>나 <환국본기桓國本紀>와 <신시본기神市本紀>가 엄연히 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古記의 대목이나 그걸 원전(原典)으로 활용한 후래(後來) 문헌 그리고 古記와는 거의 동일하나 더 시원적이고 내용이 풍부하였을 <조대기朝代記>의 기록을 제시하고 있는데......그러니 【그런데 오늘날 <환단고기>에는 [삼국유사]의 “古記” 부분이 적혀있지 않습니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라고 괜한 호들갑이나 떨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1976년에 가졌던 생각이 1979년에는 없어진 게 전혀 아니니 1회에서도 이야기했지만 桓因이 神으로 나오는 부분이 1979년의 이유립에게는 용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구한 배달의 역사를 창조하는데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죠】라는 어린애 장난 같은 유치한 주장은 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더구나 [신시개천경]이라는 본래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이런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걸 보자니 무얼 몰라도 한참 모르고 어디에 홀려도 단단히 홀려 있는 듯하여 기가 막히지만 기왕에 펜을 들었으니 한마디는 하여야겠군요.





    - 우리 민족의 시원적 흐름을 구체화하고 현시화顯示化하는 가운데 계층적 체계로 설명하고 있는 저서著書가 바로 [규원사화]이다.   여기에서는 조판기肇判記-桓因의 世界*태시기太始記-桓雄의 世界*단군기檀君記-檀君의 세계로 일목요연하게 나누어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우리 민족 고래古來의 사유思惟를 설명하고 있다.


     - 이는 [환단고기]에서 그대로 다시 되풀이 되고 있는데 삼성기전三聖紀全 上*下-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단군세기檀君世紀의 체계로 韓민족의 혈통적 계보를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다시 이를 <태백일사>에서 거듭 환국본기桓國本紀-신시본기神市本紀-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로 엮어 풍부한 문헌사료를 언급하면서 조국肇國과 개국開國 그리고 입국立國의 사실을 현재화시키는 것이다.


     - 이러한 사실들은 필자가 이 글의 말미에 따로 장章을 만들어 설명해주겠지만 [고기]라는 원전原典을 별도의 경로와 과정을 거쳐 입수하여 채록했음에도 [삼국유사]와는 아주 달리 두 저서가 기본적인 흐름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내용적인 일체성과 상호보완으로서만이 하나의 문맥이 완결된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는 귀중한 기록들이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흐름과 민족의 맥 속에 연연히 흐르고 있는 사고관思考觀을 일체화시켜 하나의 경전經典으로 묶은 것이 [신시개천경]이다.





이렇게 내용과 기록이 하나로 합쳐지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오직 이런 사실조차 모르는 까막눈만이 함부로 그런 추측과 억단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본래 이유립선생은 [환단고기]안에 [신시개천경](즉 삼국유사의 고기 인용분)도 집어넣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이 한 마디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지함의 발로이며 【그래서 전회에도 살펴본 바와 같이 [환단고기] <신시개천>】은 물론 <신시본기>까지 이런 사실들이 풍부한 기록으로 엄연하게 기술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신시개천경본의]가 1942년에 쓰였다는 말 자체가 이유립의 허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는 주장에 대하여는 왜 그런 억측이 틀린지 아래의 글로 대신합니다.   계연수 선생이 5808년에 썼다 하였으니 이유립 선생이 그걸 입수한 해가 어느 무렵인지는 구태여 언급할 가치조차 없겠습니다.





     - 古記 인용의 시작은 저 一然의 <삼국유사>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그 古記나마 얻어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이에 <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등을 한 책으로 묶어 <환단고기>라 이름하였다......신시 개천 5808년 즉 광무光武 15년의 신해辛亥 5월 광개절廣開節에 태백太白 유도遺徒 선천宣川 계연수인경桂延壽仁卿이 묘향산 단굴암에서 쓰다.





또한 어째서 【애초에 그는 삼국유사의 [고기]를 [환단고기]의 줄임말로 만들 생각이었습니다...문제는 이유립이 “고기=환단고기”라고 저렇게 적어 놓은 부분이죠】라는 해괴망측한 생각을 하였을까?   문제의 그 부분을 읽어봅시다. 





     ▶ 금서룡의 조작한 석유환국-그대로 번역한 [원문번역주 삼국유사]에서 이병도는 고기=환단고기의 전한 그대로의 환국을 빼어버리고 원문에 없는-일본인의 변조한 환인을 내세우면서 자신만만하게 특서하여 가로되...





아하!!! 이제 보니 문맥의 흐름이나 文句의 진의(眞意)도 잘 깨닫지 못힌 망발이로군요!   어쨌든 이 문맥의 핵심은 환국桓國-환인桓因의 망개(妄改) 부분입니다.   그리고 [고기=환단고기]라는 文句는 <삼국유사>에서 원래 말하려는 古記의 桓國 원문(原文) 부분과 <환단고기>의 환국본기나 신시본기 등에서 같은 내용으로 되풀이 언급한 桓國 부분이 전한 그대로의 桓國을 빼버리고...라는 의미를 이유립 선생은 말하려는 걸 정말 이해조차 못하는 건지????   누가 엉뚱하게 문제를 일으키는 건지 해괴함의 도를 넘어서는군요.





아울러 우리 역사에도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보다 더 시원적인 흐름이 있다는 걸 깡그리 무시해버리고 아예 중국의 부뚜막에 올라 앉아 재롱을 떠는 강아지가 따로 없군요.   더구나 우리 인물들을 [사기공정史記工程]을 통해서 통째로 말아먹은 [삼황오제론]을 보란 듯이 내세우고 있으니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원......<삼황오제>의 출자出自 분석은 많은 문헌과 저술로서 널리 알려진 바 있으니 더는 설명을 약합니다.   다만 각종 고문헌과 기록으로 본 우리 역사의 일관된 기술 태도는 우리 민족의 분지(分枝)였던 <삼황오제>에 대칭되는 桓國-神市의 본가(本家)의 흐름을 설명하는 가운데 본류를 이어간 檀君의 개국(開國) 무렵이 지나(支那)쪽 分枝였던 요堯-순舜-하우夏禹의 첫머리인 요(堯)와 같은 시기였다는 걸 잘 설명해주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만 첨언합니다.





아울러 [악질식민빠]의 주장을 또 제시하는데 한마디로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논리를 억지로 꿰어 맞추고 예정된 결론을 유도하려는 고의적인 왜곡의 의도가 짙게 풍겨 나오는 군요.   즉 처음부터 [“자료 원전原典이 오로지 문정창이다” 라고 독단적으로 확정]-[문정창의 句文을 필요한 부분만 잘라서 인용]-[그걸 나름대로 준비한 반증 자료로 부지런하게 논파]-[예정된 결론 도출]이라는 아주 악의적인 수법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에 대하여는 아예 따로 [앵무새죽이기  보론補論]으로 설정하여 자세히 설명해드릴 것이나 조급해하지 마시고 여기에서는 전체적인 결론만 간략하게 논증을 해보겠습니다.   먼저 원문(原文)을 보지요.





[해당 기록 부분 예시]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만 부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부일사대모화론자]들이 애지중지하는 화하인(華夏人)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최남선>이 적시한 바대로 [삼국유사 고조선기]의 해당 기록에서 아주 간명한 명문(名文)으로 나온 [석유환국昔有桓國]의 존재는 시전 상송(詩傳 商頌)의 구절에서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 현왕(상商의 시조 설契)환발 수소국시달 수대국시달 玄王[桓撥] 受小國是達 受大國是達 현왕이 환에서 나와 작은 나라를 얻으매 능히 잘 다스리고 큰 나라를 얻어서도 또한 잘 다스리시다.   <시전 상송>





참고로 <최남선>이 해제(解題)를 붙여서 간행한 [삼국유사]에는 桓因의 因자를 [國안에 士]로 인정하여 이를 桓國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사실을 전하는 문헌기록들이 비록 엉성하고 간단한 것 같지만 방대한 고조선의 역사적 진실을 매우 요령 있게 응축하고 있기 때문에 <삼국유사>의 기록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고수했는데 이를 밝혀볼 수 있는 다른 여러 주장들이 이를 입증합니다.





     - ...단군문제 따위는...문적(文籍)의 유무 급 농담여하(有無 及 濃淡如何)로서 그 성립이 흔들릴 것이 아니라 초문적적(超文籍的) 곧 민속상 실증(民俗上 實證)의 유무 급 능부여하(有無 及 能否如何)만으로써 그 운명이 좌우될 것입니다.  <1928  322P>


     - 설령 백보를 양보해서 단군이 그들의 말대로 역사적으로 명확히 논증되기 어렵다하더라도 종교적 방면에 있어서 오랜 근거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다.   <1925  60P>


     - 神話는 원시인의 종교*과학*역사를 총괄한 존재이다...신화의 일면에는 분명히 후세의 이른바 역사이며 최초 사회에서는 확실히 신화를 역사로 하여 국가성립의 기초를 배우는 것이다...특히 어떤 민족도 태고의 사실은 신화로서 전승된다.   <1954>


     - 우리 고대의 귀중한 정신적 유산인 神話가 오랜 옛날부터 지식인들에게 멸시를 받고 그래서 문자기록의 위에서 뽑혀버림을 당하여 없애다가 다 없애지 못한 단편잔재(斷片殘在)가 약간 처량하고 쓸쓸하게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온통 다 없어지지 아니하고 요만큼이라도 남아있는 것이 다행이요.   더욱 유감스러움은 무론(毋論)입니다...<1939  35P>





그는 이런 관점에서 <삼국유사>의 고기운(古記云)에 보이는 신괴(神怪)한 내용이야말로 단군신화가 원시조국에서 개국에이르는 시대의 역사를 알려주는 순수한 산물임을 시사하는 중요한 증거라고 역설하였습니다.   만일 신괴(神怪)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납득되는 내용이라면 그 자체가 후세(後世)의 조작임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 古記를 인용한 神話는 권력의 기원과 신정(神政)의 내용을 내포한 천자강세설화(天子降世說話)와 태양토템과 곰토템이 결합된 토템기원신화라고 해석한다.  


     - 이를 더욱 발전적으로 접근하여 문헌학을 넘어 인문학*인류학*샤머니즘까지도 종합한 분석으로 신화적인 기술들이 토테미즘을 뛰어 넘어 영웅(神人*天王 등)의 시대를 표현한 일종의 원사(原史)이며 천제자(天帝者-上帝)는 사실적인 신정(神政)을 이끌던 고군장(古君長)의 칭호(稱號)이고 <단군고기>에 나오는 규범적 호칭(呼稱)과 지리*역사들은 모두 확실한 전래적傳來的 근거가 있음을 강변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최남선]은 <고기古記>의 기록에 나오는 桓國의 존재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고 또 그런 입장이었기 때문에 <최태영>박사에게 수차에 걸쳐 의논했듯이 이미 환인(桓因)이라 망개(妄改)한 <경도제국대학본>을 무시하고 桓國이라 기록된 <정덕본>을 기필코 찾아보려는 자세를 초지일관 고수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승휴>는 김일연(金一然)과 거의 같은 시대 사람이지요.  그러므로 [제왕운기]에 기록한 단군의 일을 읊은 대목의 본문과 주석에서 고기(古記)라 하지 않고 근호국사방채각본기여부수이전취재 謹○國史旁採各本紀與夫殊異傳취載라 하여 다른 경로를 통해 입수한 본기(本紀)를 인용하여 <상제환인-本紀曰上帝桓因有庶子曰 雄云...본기왈상제환인유서자왈 웅운>으로 표기하는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힌 것입니다.








[각 저서별 원문原文 비교표]





[삼국유사] 석유환국 (위제석야) 서자환웅 수의천하 탐구인세 부지자의 하시삼위태백 가이홍익인간 昔有桓國(口안에 王) (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 可以弘益人間...<서울대 규장각 도서관 소장 정덕본>





※ 일부러 이 저본을 서두에 올린 이유는 해방 후 문교부편수관*고등고시 위원을 역임하고 동국대*단국대에서 재직한 해원海圓 황의돈黃義敦씨가 일제 치하에서도 은밀하게 소장했다가 광복 후에 조국(祖國)에 바친 정덕본 1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헌의 모든 문장구조는 금서 룡 본(今西 龍 本)과 동일하면서도 전혀 어색하게 [國]을 [因]으로 고친 흔적이 아예 없다.





[삼국유사] 석유환국 (위제석야) 서자환웅 수의천하 탐구인세 부지자의 하시삼위태백 가이홍익인간 昔有桓國(口안에 王) (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 可以弘益人間...<최남선 본의 삼국유사>


[삼국유사] 석유환국 (위제석야) 서자환웅 수의천하 탐구인세 부지자의 하시삼위태백 가이홍익인간 昔有桓國 (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 可以弘益人間...<삼국유사 교감연구>


[삼국유사] 석유환국 (위제석야) 서자환웅 수의천하 탐구인세 부지자의 하시삼위태백 가이홍익인간 昔有桓國 (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 可以弘益人間...<민족문화추진회가 영인 발행한 서울대본 삼국유사>


[삼국유사] 석유환국 (위제석야) 서자환웅 수의천하 탐구인세 부지자의 하시삼위태백 가이홍익인간 昔有桓國(口안에 士) (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 可以弘益人間...<한국고대사자료집의 삼국유사>


[삼국유사] 석유환인 (위제석야) 서자환웅 수의천하 탐구인세 부지자의 하시삼위태백 가이홍익인간 昔有桓因 (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 可以弘益人間...<금서 룡이 영인 발행한 경도제국대학의 삼국유사 정덕본>


[삼국유사] 석유환인 (위제석야) 서자환웅 수의천하 탐구인세 부지자의 하시삼위태백 가이홍익인간 昔有桓因 (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 可以弘益人間...<리상호의 북역北譯 삼국유사 정덕본>





[환단고기] (단락1) 석유환국중부차서언초환인거우천산...昔有桓國衆富且庶焉初桓仁居于天山...옛날 환국이 있었는데 백성들은 부유하였고 또 많았다.   처음 환인이 천산에 머무르시어...<삼성기전 하>


            (단락2) 조대기왈 시인다산핍우기생도지무방야서자지부유대인환웅자탐청여정기욕천강개일광명세계우지상시안파견편시금악삼위태백이태백가이홍익인간...朝代記曰 時人多産乏憂其生道之無方也庶子之部有大人桓雄者探聽輿情期欲天降開一光明世界于地上時安巴堅遍視金岳三危太白而太白可以弘益人間...조대기에서 말한다.   때에 사람은 많고 산업은 궁핍하여 살아갈 방법이 없어 걱정이었다.   서자부에 환웅이라는 대인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사정을 살피더니 하늘에서 내려가 땅위에 하나의 광명세계를 열려고 생각하였다,   때에 안파견이 두루 금악*삼위*태백을 살피더니 태백은 이로서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태백일사 신시본기>





※ <최남선>이 말했듯이 정사류(正史類)의 지극히 간략하고 간결하게 기록한 부분의 전문(全文)은 우리 민족문헌사료에서 여러 고전(古典)을 빌어야만이 비로소 완전하게 전체의 얼개를 맞추어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역사문헌을 많이 기록하여 남긴 문화민족입니다.   AD 1123년 송(宋)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온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 왕실의 도서관에 소장된 수 만권의 장서를 보고 놀라워한...臨川閣 藏書至 數萬卷 叉有淸燕閣 亦實以經史子集四部之書 임천각 장서지 수 만권 차유청연각 역실이경사자집사부지서>기록이 있습니다.  <고병익>은 <심지어 宋나라는 고려高麗에서 자기네의 없어진 책을 구하려고 했을 정도였다-우리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35P>라고 말한다.





두 번째 의문은 상기(上記)와 같은 이유로 대부분의 조선조 史書가 일관된 입장으로 단군조선을 소략하게 언급하는 가운데 이견(異見)이 많은 [석유환국(인)昔有桓國(因)] 부분에서는 이를 명확하게 인용하는 태도가 보이지 않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그 이외의 부분은 별로 이견이 없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삼국유사>가 편찬된 시기에 발생하였을지도 모를 무언가 야릇한 상황이 감지되는데 이미 일연(一然)의 원본을 불교적인 색채로 각색하려는 후일의 어떤 시도가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이 짐작되는 부분입니다.





     1) 저술 무렵이 불교를 국교로 하여 왕성하게 꽃피우며 국가 통치 이념이나 민간 사조(思潮)의 흐름을 철저히 지배하던 고려 시대에 더욱이 불교 고승(佛敎 高僧)이 기록한 史書이다.


     2) 내용을 살펴보아도 불교적인 색채로 설화 구조를 탈바꿈시키려는 냄새가 짙게 배어나오는데「삼국유사」에서 [석유환국] 주(註)의 <위제석야謂帝釋也>에 맞추기 위한 [因]으로의 변개(變改) 부분이나 묘향산의 비정 기록과 단군(檀君)도 단군(壇君)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도 이를 은연중에 뒷받침해준다.





※ 우리가 스스로의 민족사적 체계로 숭배하는 천인 환인(天人 桓仁)-천왕 환웅(天王 桓雄)-신인 단군(神人 檀君)에서 桓仁을 법화경(法華經의 최고수호신인 제석천(帝釋天)으로 분장시켜 놓고 곰과 범의 설화구조 안에서 단군이 출생한 것으로 하였을 뿐 아니라 이로서 단군마저 불교의 교리인 <중생구제衆生救濟*탐구인세貪求人世*홍익인간弘益人間> 사상을 고취시키는 인물로 활용하는데 저술목적을 두고 있음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 [석유환국昔有桓國] 다음에 <위제석야謂帝釋也>를 군더더기처럼 주(注)를 단 것은 후세의 승려(僧侶)들이 불교적인 색깔을 입히기 위한 의도요 <금묘향산今妙香山>은 고려왕조의 유신(儒臣)들이 단군조선의 강역을 한반도로 오인한 탓에서 비롯된 첨주(添註)이다.   <문정창>





이어 관찬사서(官撰史書)나 유가사서(儒家史書)들의 기술 태도를 잠깐 살펴봅시다.   얼핏 보아도 전체의 흐름을 관통하는 뚜렷한 기준이 감지되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 原本] 고기운古記云 석유환국昔有桓(口안에 王) (위제석야謂帝釋也) 서자환웅庶子桓雄...





[帝王韻紀] (동국군왕개국연대 東國郡王開國年代) 초유개국계풍운석제지손명단군 본기운 상제환인유서자왈웅 初有開國啓風雲釋帝之孫名檀君 本紀云 上帝桓因有庶子曰雄    (후조선後朝鮮) 조시기자주호원년 祖是箕子周虎元年......





※ 삼국유사의 고기古記와는 달리 본기本紀를 인용했음을 알려준다(혹 단군본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삼국유사*응제시주보다 차이가 있다.





[世宗實錄地理志] (평양부 平壤府) 단군고기운 상제환인유서자명웅 檀君古記云 上帝桓因有庶子名雄......





※ 제왕운기와 거의 동일하다.





[應制詩註] (명제십수 시고개벽동이주 命題十首 始古開闢東夷主) 증주增註  고기운 상제환인유서자왈웅 古記云 上帝桓因有庶子曰雄......





※ 삼국유사의 내용과 상당부분 일치한다.





[東國通鑑] (단군조선) 동방초무군장유신인강 東方初無君長有神人降...(기자조선)  운운...


[東國史略] (단군조선 혹 前조선) (단군 성환씨 檀君 姓桓氏...)동방초무군장東方初無君長(지유구종이只有九種夷)유신인有神人(환인지자환웅桓人之子桓雄)강降...(기자조선) 주무왕극상기자솔중국인오천입조선 周武王克商箕子率中國人五千入朝鮮 ...


[東史簒要] (단군조선) 동방유구종이초무군장유신인강東方有九種夷 初無君長 有神人降...(기자조선) 주무왕벌주봉기자우조선 周武王伐紂封箕子于朝鮮...


[東史補遺] (단군조선) 동방초무군장유신인강 東方初無君長有神人降...고기운古記云 석유환국昔有桓(國안에 二)(제석야帝釋也) 서자웅庶子雄...


[東史綱目] (기자조선) 자성명서여은주지친척야子姓名胥餘殷紂之親戚也...기자불인주지석주지조선무왕문지인이조선봉지箕子不忍周之釋走之朝鮮武王聞之因以朝鮮封之...(단군조선) 동방초무군장유신인강東方初無君長 有神人降...


[東國文獻備考] (단군조선) 동방초무군장東方初無君長(지유구종이只有九種夷) 유신인강有神人降...(기자조선) 기자성자씨휘서여 箕子姓子氏諱胥餘...운운...


[海東繹史] (단군조선) ...단군조선환웅자천신환인지자야강檀君朝鮮桓雄者天神桓因之子也降...(말미末尾 箕子언급) ...복생서대전운기자주지조선무왕문지인이봉지연칙기자지전지유조선지칭 伏生書大傳云箕子走之朝鮮武王聞之因以封之然則箕子之前知有朝鮮之稱...(기자조선) 기자자주친척야箕子者紂親戚也...운운...





위 관찬사서(官撰正史)나 사찬 유가사서(私撰 儒家史書)들의 서술체계를 보면 한결같이 [단군조선]-[기자조선]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며 단군조선기(檀君朝鮮記)의 내용도 앞서 말했듯이 <존명사대尊明事大>의 편찬 원칙에 충실하게 부합시키면서 그 무렵에도 동시적으로 출현한 우리 민족사서의 내용을 따르되 환국(桓國)부분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환인-환웅-단군의 행적을 백안시(白眼視)할 수는 없어 수록하되 지극히 소략(疏略)한 설명을 바탕으로 신화적*불교적으로 윤색한 의미만을 취한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각 史書들의 기술형식이나 내용이 조선왕조의 저술원칙인 일정한 틀과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史書類(제왕운기*제왕운기*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上帝환인-神人환웅]의 입장을 기술하면서 우리 도가사서(道家史書)에서 일관성 있게 표현한 天帝환인-天王 환웅-神人 왕검의 흐름을 무시하지 않는 자세도 함께 보입니다.   다음은 원전이라 볼 수 있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차이가 나는 대목들입니다.





     - 인간 세상에 대한 桓雄의 의지 부분을 모두 소략(疏略)하거나 삭제했다.


     - 환웅의 뜻에 대한 환인의 반응부분에서 <제왕운기>외는 모두 생략했다.


     - 천부인天符印의 사여賜與부분에도 모두 이유와 내용이 줄어들거나 천삼인天三印 등으로 표현하여 의미를 흐려 놓았다.   다른 史書에 동일 기록이 있기에 망정이지 이 부분만 전래傳來되었다면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간단치 않다.   天符印 3개가 아니라 天三印이라는 전혀 다른 의미로 크게 왜곡될 수도 있다.


     - 솔도삼천率徒三千에서는 桓雄을 생략하거나 귀(鬼-제왕운기)라고 표현하는 등 더욱 심하게 왜곡하여 민족 이동의 과정을 희석시켰다.


     - 桓雄이 자리 잡아 開國한 분명한 地名인 신시神市를 고의적으로 생략하여 신화적인 행위임을 은연중에 강조하였다.





※ <삼국유사>는 분명하게 [태백산정 신단수하太白山頂 神檀樹下] 다음에 [위지신시謂之神市]라 하여 입도立都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文句 가운데 [之]가 [太白山頂 神檀樹下]라는 장소를 말하거나 [雄]이란 인물을 지칭指稱하거나 어느 쪽이나 다 [神市]는 그것들을 다시 설명해주는 중요한 문자라는 점을 특히 명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유사>가 구태여 [謂之神市]와 [是謂桓雄天王也]를 이어서 기록한 까닭은 같은 사실에 대한 불필요한 반복 설명이 아니라 두 文句가 각각 나름대로의 의미를 깊이 담고 기술되었다는 증좌이다.   [謂之神市]는 桓雄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였던 桓雄의 나라에서 활동한 부분의 설명이요   [是謂桓雄天王也]는 후세後世인 檀君의 나라에서 桓雄을 시조始祖로서 존칭尊稱하였음을 이야기해주는 분명한 기록이다.   또한 문법적이나 문맥상으로도 [之]는 바로 앞의 [太白山頂 神檀樹下]를 받아야 하며 [是]는 [雄] 또는 [웅솔도삼천雄率徒三千...위지신시謂之神市-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새로운 나라를 열어 군장이 되고 조선의 개국시조인 단군을 낳은 인물로서 존칭을 받은 내용인]라는 전체 문장을 받는 것으로 보아야 맞다


 


     - 桓雄의 이름에서도 모두 웅雄으로만 기록하거나 단웅檀雄이라 하여 단군檀君과 연결을 강조함으로서 의도적으로 桓國-桓因의 존재를 격절시켜버린다.   <응제시주>는 桓雄이라 했지만 다시 환桓을 단檀이라 한다하여 동일한 입장을 따르고 있다.





※ 하지만 조선조 후반으로 내려갈수록 실록實錄의 기록에서조차 <삼국유사>의 기술태도를 따르려는 뚜렷한 자각이 보인다.   즉 桓因-桓雄-檀君<삼국유사>*桓因-檀雄-檀君<제왕운기>*桓因-桓雄(혹은 檀雄)-檀君<응제시주>*桓因(檀因)-檀雄-檀君<세종실록>*桓因-檀雄-檀君<성종실록>*桓因-桓雄-檀君(선조실록>*환인-환웅-단군(영조실록과 정조실록>의 흐름이 뚜렷하게 집힌다.


 


     - 太白山의 위치비정에서는 모두 묘향산妙香山으로 설명하여 은연중에 한반도 안으로 밀어 넣는 유교적 사관을 고수한다.


     - 桓雄이 인간세人間世로 나와 백성들을 통치*교화敎化한 내용을 <응제시주>를 제외하고는 생략하여 설화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 檀君의 말년末年 행적에 관하여 네 史書 모두 <아사달산에 들어가 산신山神이 되었다>하여 설화적 입장을 고수하는 유가*불가적 사관을 드러낸다.





기자(箕子)에 대한 기록이 거의 모두 단군신화를 전하는 본문 내용과 관계없거나 분절分節된 형태(제왕운기가 대표적인 예이다)로 나오고 있는 사실로 보아 기자전설(箕子傳說)은 후대에 진하(秦夏)쪽 기록을 근거로 삽입한 경향이 뚜렷하게 여겨집니다.   다시 말해 원래 단군신화엔 箕子에 관한 내용이 없었다는 말이지요.





또한 유가사서(儒家史書)들이 아무리 축소*생략해도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근본적인 핵심들은 여전히 눈길에 잡히고 있습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금방 단군신화(檀君神話)가 건국(建國) 사실만을 전하는 기록이 아님을 짐작케 해주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개국설화(開國說話)가 아니라 민족국가의 형성과 관련된 더 나아가 조선(朝鮮)으로 대표되는 여러 작은 소국(小國)으로 이루어진 韓민족 고유의 동방대국(東方大國) 형성 이야기로 귀착되어지는 흐름이기 때문이지요.   그런 이유로 檀君이 국조(國祖)로 받들어졌고 단군묘(檀君廟)가 국가적으로 조영되었으며 민간신앙 깊숙하게 자리 잡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神話가 역사적인 실마리를 잡으면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고 그것이 어떻게 왜 일어났는가? 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한번 듣고 흘리거나 허황된 이야기라고 외면할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로 귀결 될 수 있습니다.





     - 檀君과 기자箕子와의 관계 부분에서 지나支那의 격동으로 인한 동방계 東方系 유민遺民들의 도래到來 사실이 파악 가능하다.


     - 檀君이 다스렸다는 국가들의 명칭(시라*고례*남북옥저 운운)에서 桓國-檀國으로 이어지는 초기 단계 우리 민족에 대한 강역 추정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 단군계檀君系와 하백녀河伯女의 혼인으로 동부여왕 <부루>가 탄생했다는 서술에서 국가의 역사적인 맥을 가늠케 한다.








[마지막으로 머털도사님과 다른 한분의 [환국] 변개變改 부분에 대한 일문一文을 첨가합니다].








1. [昔有桓國]의 전수과정이 어떠했느냐를 당연히 봐야 하지요.   문장의 구조로 볼 때 만약 [桓因]이 원형(原形)이었다면 구태여 桓因을 [桓國]으로 고칠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桓國으로 되어 있는 상태에서 불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桓因]으로 될 가능성은 매우 많습니다.   더군다나 [因]으로 되어 있는 판본을 보면 덧칠한 흔적이 확 표가 납니다.   이는 因이 바뀐 것이며 國이 원래의 단군신화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좋은 보기이지요.





   그리고 <삼국유사>에 나타난 단군신화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을 찾아야 이 문제가 확실하게 결론 내려지겠으나...아직까지 그러한 문헌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이는 머털도사님이 조금 모르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필자筆者가 앞 선 글에서 설명하였음을 참고하였으면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작정 [桓國]이 틀리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어느 누가 보아도 [因]은 덧칠한 흔적이 확연한데 그런 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桓國]이 맞는 것이지요.





2. 인쇄본에서 桓國으로 새겨 놓은 것이 미미한 실수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죠.   만약 미미한 실수라면 님이 이렇게 지리하게 반박할 일도 없는 것입니다.   즉 桓國이냐 桓因이냐에 따라서 神話의 형태가 매우 달라지는데 그 무렵에 미미한 실수라서 그냥 넘어갔다는 것은 말이 안되죠.





   다시 말하면 桓因으로 되어 있는 판본은 桓國을 고쳐 桓因으로 덧칠한 것인데...이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神話란 원래 그 시대 문화 종교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고 시대가 지남에 따라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桓國이 桓因이 된 것이고 그 증거가 <국립중앙도서관 삼국유사 판본>에 정확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군신화의 원형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행이도 덧칠되지 않은 판본이 남아 있죠.   그리고 그 판본에는 [桓國]이라고 되어 있으며 단군신화의 원형은 桓因이 아니라 桓國인 것입니다.   아래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삼국유사 다시 띄워봅니다.   누군가 읽으면서 因자가 이상해서 <口+土>로 빨갛게 적어놨군요.





   중요한 것은 <因자>의 <大자>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글자가 무엇이냐? 는 거죠.   <大자> 위쪽으로 점 두개처럼 생긴 <八자>가 보이죠. 이는 원래 글자가 <口+土>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大자> 오른쪽으로 <方자>로 추측할 수 있는 글자의 오른쪽 부분이 보입니다.   이는 [口+八+方]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바로 [國]의 이체자(異體字)입니다.   <정덕본>에는 [口+王]으로 되어있죠.   이 역시 國의 이체자죠.   따라서 桓因이 아니라 桓國이 맞다는 것입니다.





   ※ [口+土]는 因의 異體字가 아닙니다.   고려대장경 이체자 자전에서 확인해보세요.   일연(一然)은 불교도이었으므로 그가 썼던 한자(漢字)도 불교에서 쓰는 漢子였을 것입니다.   <口+土>는 불교식 음이 "국"입니다.   더군다나 덧칠하지 전의 글자를 [口+土]로 볼 근거는 전무합니다.   오히려 [口+八+方]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왜냐하면 덧칠한 因의 <大자> 위쪽으로 <八자>가 보입니다.   [口+八+方]는 國의 이체자죠  <08.10.04 02:46>








민족고대사연구가이며 쑥담배연구가로써 삼국유사 번역자들에게 한마디 올립니다.   삼국유사 고조선조 내용 중 석유환국(昔有桓國) 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삼국유사 고본에서도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경제국대학교 1904년에 활자로 편집된 상*하 책자(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분류기호 : 한국십진분류표(박봉석편)-211)에서도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 활자 편집하여 놓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삼국유사 번역자 책자 모두가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고 잘못 표기하고 있는 것이 확인이 되었습니다.   옛적에 환국(桓國)이라는 나라가 었었다.   일연대선사님께서는 桓國에 대한 설명하기를 桓國의 王은 불교에서 말하는 제석천왕(帝釋天王)과 같이 능력이 위대한 桓國의 王이 다스리는 나라였다는 뜻을 삼국유사 번역자 모두가 전혀 모르고 일본 학자에 의해 국(國)자가 인(因)자로 왜곡된 사실을 잘 알면서도 석유환인(昔有桓因)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桓國기록 문헌】





1. 삼국유사 황의돈 본(정덕본), 최남선 본, 송석하 본


2. 일본판 삼국유사- 1902년도 판 삼국유사(도쿄문과대학 본)*1916년도 판 삼국유사(경성조선연구회 본-1902년도 판 재발행)


3. 약천집 (남구만 저)


4. 해동악부 (이복휴 저)





[조선지초유환국朝鮮之初有桓國 기록]





1.수산집 (이종휘 저)


2.관암전서 (홍경모 저)








[앵무새 주장]





자, 그럼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이미 앞의 글들을 읽은 분들은 짐작하겠지만 이번 글에서도 역시 현존 [환단고기]와는 틀린 부분이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죠.   일단 이유립의 말이 사실이라는 개념 하에 생각해 봅시다.





첫 번째  [신시개천경본의]는 1942년에 쓰여졌습니다.   이 시기라면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잃어버리지 않은 시기입니다.   계연수가 만든 원본을 가지고 있던 시기라는 것이죠.





두 번째 이 [신시개천경본의]가 실린 1976년이라면 [환단고기]를 잃어버린 시점입니다.   하지만 [신시개천경본의] 안에는 환단고기의 일부분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그야말로 확실한 원전에서 베낀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런 부분이 정작 현존 [환단고기](광오이해사본이건 배달의숙본이건 간에 상관없이 모두 틀리다면?   대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반론]





어떤 사실을 가지고 논증하며 반론을 제시할 때는 단편적인 지식이나 편협한 사고관 그리고 일정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가벼운 숫자 놀음으로 유도해서는 금물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보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모든 논지를 1942년과 1976년에 의도적으로 맞추는 경박한 태도가 여실하군요.   먼저 아래 사실들을 정밀하게 살피고 사심 없는 생각으로 분석해보았다면 결코 이런 주장이 나올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앵무새의 주장]은 아래의 글을 읽다 보면 자연히 의문이 풀려질 것입니다.   특히 가장 깊게 고개를 갸우뚱거린 【그런데 이런 부분이 정작 현존 [환단고기](광오이해사본이건 배달의숙본이건 간에 상관없이 모두 틀리다면?   대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란 대목은 글의 후반부를 잘 정독하면 의외로 쉽게 해답이 나올 듯 하군요.  





     - 이유립*신매녀 부부는 南과 北에서 모두 1남 5녀를 낳았다.   두 사람은 이유립선생이 41세*신매녀씨가 27세이던 1948년쯤 월남(越南)하는데 신씨는 그 이유를 “(토지개혁에 의해) 토지를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부는 황해도 해안을 통해 38선을 넘었는데 이유립선생이 3월에 혼자서 넘고 신매녀씨는 아이들과 함께 5월에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3월에 38선을 넘은 남편이 다시 이북으로 넘어갔다가 붙잡혀 북한에서 1년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 사이 신씨는 아이들과 38선을 넘어가 남한의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수용소에서 정해준 청주(淸州)에서 살림을 차리게 됐다.   그때만 해도 남북 사이엔 편지 왕래가 가능했으므로 그는 <삭주>에 있는 친정에 ‘청주에 거처를 마련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나온다.   월남할 당시 이유립은 자기 주관이 뚜렷해지는 불혹(不惑)을 넘긴 나이였다.   그렇다면 그는 [환단고기]를 가져오기 위해 두 차례나 38선을 넘은 것이 아닐까?   겨우 다시 남한으로 탈출한 이유립이 이듬해인 1949년에 서둘러 <오형기>씨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를 여러 부 필사시킨 것을 보면 이러한 추정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오형기씨에게 필사를 시키기 전 이유립씨가 갖고 있던 환단고기는 계연수가 편찬한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필사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 이유립선생은 피난지인 금산(錦山)에서 화재를 당한 일 말고도 大田을 거쳐 성남(城南)에 살던 시절 수해를 당해 책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런데도 여전하게 [환단고기]를 갖고 있었으니 머릿속에 이미 암기한 것이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필사해놓았던 문헌일 가능성이 크다.


     - 아울러 大田에서 살 때 이유립 선생은 국사광복을 외치는 전단을 만들어 돌렸다.   그로 인해 조금씩 주목을 받다가 1970년대 간도 문제에 큰 관심이 있던 <박창암>씨와 연결되면서 비로소 월간 ‘자유’에 역사 문제에 대한 글을 대량 기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정부로 올라가서 지내다 막 고려대에 입학한 <전형배> 사장 등 젊은 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나라의 참 역사]를 가르쳤다.





월남한 이유립선생에게서 오래전부터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사람 가운데 오형기(吳炯基·10여 년 전 작고)씨가 있다.   오형기씨는 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이유립씨보다는 10여 세 연하였다고 한다.   그는 친형이 좌익활동을 하다 사살된 이력이 있어 은거해 살면서 이유립씨에게서 역사와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   <전형배> 사장은 “이유립 선생은 월남한 직후인 1949년 오형기씨에게 그가 갖고 온 환단고기를 필사하게 한 것으로 안다”고 증언하였다.





환단고기 필사를 마친 <오형기>씨는 환단고기 말미에 ‘환단고기발桓檀古記跋’이라는 제목의 발문(跋文)을 써놓았다.   이유립선생과 제자들은 서기(西紀)는 물론이고 단기(檀紀)도 쓰지 않았다.   년도(年度)를 적어야 할 땐 桓雄이 신시(神市)를 연 때를 기준으로 한 ‘신시개천’이란 연호(年號)를 사용했다.   1949년은 60갑자로는 을축년이고 신시개천으로는 5846년이다.   오형기씨가 쓴 ‘환단고기발’에는 이렇게 해석되는 한문이 적혀 있다.





     ▶ ‘을축년(1949년) 봄 나는 강화도 마리산(마니산)에 들어가…정산(이유립의 호) 이유립씨로부터 환단고기를 정서하라는 부탁을 받고…신시개천 5846년 을축 5월 상한(上澣·상순이라는 뜻) 동복 오씨 오형기 발(乙丑春余入江島之摩利山…李靜山裕?氏囑余以桓檀古記正書之役…神市開天五千八百四十六年乙丑五月上澣同福吳炯基跋)’





     - <전형배>씨를 비롯해 선생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오형기>씨의 필사본을 복사하거나 영인(影印)해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선생은 <오형기>씨 필사본과 관련해 몇 가지를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다음은 <전형배>씨의 기억이다.   





     ▶ “이유립 선생은 오형기씨가 붙인 발문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선생은 ‘발문은 그 책을 쓴 사람이 붙이는 것이지 필사를 한 사람이 붙이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또 오씨가 필사한 <환단고기>에는 오자誤字가 있다며 <환단고기>를 가르쳐줄 때마다 틀린 글자를 지적하면서 수정해주었다.”





1970년대 말 이유립선생에게서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제자 가운데 선린상고 출신으로 영어와 한문을 아주 잘하던 조병윤(趙炳允·1956년생)씨가 있다.   신시개천 5876년(서기 1979년)에 조병윤씨가 아주 ‘큰 사건’을 일으켰다.   선생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박기엽(朴琪燁)씨가 이끄는 광오이해사(光吾理解社)를 통해 <오형기>씨가 필사한 [환단고기]를 영인(影印) 인쇄 출판하면서 판권란에 그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적어놓은 것이다.





     - 이 같은 사실은 <정연종>씨가 쓴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조이정 인터내셔날 1996)는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환단고기는 1948년(1949년을 잘못 적은 듯) 필사본 초판이 나오고 1979년 재판이 나왔다고 기록돼 있다.





<조병윤>씨가 [환단고기]를 출판한 후 선생은 <전형배>씨에게 <오형기>씨의 발문을 제외한 환단고기 100부를 영인 인쇄하게 했다. 그러나 [오형기 필사본]이 안고 있는 오자(誤字)는 일부만 수정한 채로 영인 인쇄했다는 것이 전씨의 증언이다.   그로 인해 세상에는 오형기씨 발문이 달린 환단고기와 오형기씨 발문이 삭제된 환단고기 두 종류가 등장하게 됐다.   <전형배>씨의 말이다.





     ▶ “한자漢字 중에는 모양이 비슷한 것이 많다.   필사를 하다 보면 무자(戊子)년을 무오(戊午)년으로 적을 수 있다.   오형기씨의 환단고기에는 이러한 誤字가 있는데 선생은 환단고기를 풀어줄 때 구두(口頭)로 이러한 誤字를 수정해주셨다”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환단고기]의 70~80%가 <오형기>씨 발문이 달려 있는 책을 原文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 환단고기는 선생이 세상에 내놓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오자(誤字)도 수정하지 못한 것이다.   선생은 환단고기가 후세에 잘못 전해질까 봐 늘 노심초사하셨다.   오류는 연도인 숫자를 적는 과정에서 많이 발생하는데 숫자 오류는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 위서(僞書) 시비를 일으키는 주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환단고기]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유립 선생이 誤字를 고쳐주고 주석해준 것을 토대로 번역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국내에서는 1982년 <가지마 노보루>가 [환단고기]를 번역 출판하기 전인 1979년과 1980년 환단고기의 영인(影印) 인쇄가 있었다.   그렇다면 <가지마>는 두 책 가운데 어느 것을 원본으로 삼았을까?   <가지마>의 [환단고기]에는 그가 원문 사본(寫本)이 실려 있는데 <오형기>씨 필사본과 모양이 똑같고 그의 발문이 붙어 있었다.   이로써 <가지마>는 韓國에서 <오형기>씨의 발문이 붙은 <조병윤>씨 발행 [환단고기]를 입수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 “이유립 선생은 우리에게 환단고기를 우리말로 풀어주는 강의를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우리말로 번역과 주석을 해놓은 원고도 갖고 계셨다.   어찌된 이유인지는 모르나 선생은 이 원고를 ‘자유’지 발행인인 박창암 장군(2003년 작고)에게 줬고 박 장군이 다시 가지마에게 줬다.   이유립 선생은 자신의 원고가 일본으로 간 것을 알고 나로 하여금 박 장군을 찾아가 원고를 돌려달라고 요구하게 했다”





     ▶ “내가 박 장군을 찾아가 ‘원고 주인이 돌려받고자 한다.   출판되지 못하는 원고라면 빨리 주인에게 주어야 한다”고 하니 박 장군은 화가 나서 내 정강이를 걷어차려고 발길질까지 했다.   박 장군은 이유립 선생이 주해한 환단고기를 일본어로 내준다는 조건을 걸고 가지마에게 원고를 넘긴 것으로 안다.   그 난리를 치고 나서 원고가 돌아왔는데 돌아온 것은 이 선생이 직접 쓴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이었다“





     ▶ “선생의 원고를 가져간 <가지마>는 대종교를 배신한 강모씨의 설명을 덧붙여 환단고기를 일본 신도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유립 선생은 박창암 장군과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박 장군도 결국 가지마에게 당한 셈이다”





이런 연유로 볼진대 [환단고기]에는 분명 誤字가 있을 수 있다.   아무튼 [환단고기]로 묶인 네 종류의 책은 비밀리에 전수된 것이라 필사로 전해져왔다.   필사를 하다 보면 글자를 잘못 적거나 한두 줄을 통째로 빠뜨리고 옮겨 적을 수 있다.   이러한 책 네 권을 모아 다시 <계연수> 선생이 편집하고 <이기> 선생이 감수한 최초의 [환단고기 30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책은 남한(南韓)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월남할 당시 이유립 선생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선생이 1949년 <오형기>씨에게 필사시킨 것만 전하고 있다.  





※ 이유립 선생은 [환단고기] 강의를 하며 <오형기>씨 필사본의 誤字를 바로잡아주셨지만 환단고기에는 선생도 알지 못한 誤字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오류는 <계연수> 선생이 필사한 [환단고기]나 <이맥> 선생 등이 저술한 <태백일사 원본>이 발견돼야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선 이러한 책이 북한에 남아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는 수밖에 없다.








[이유립 선생의 광오이해사본과 배달의숙본 환단고기 수정 부분들]


 








<태백일사>의 저자인 <이맥>이 쓴 태백일사 발문 다음에 오형기씨가 1949년 이유립선생의 부탁을 받아 [환단고기]를 필사했다고 기록해놓은 발문(오른쪽 사진 중간의 환단고기발桓檀古記跋이라고 된 데서부터 왼쪽 사진 끝까지)- 각 글자 옆에 연필로 쓴 기록들은 선생이 誤字라고 지적한 것을 <전형배>씨가 받아 적어놓은 것이다.








[앵무새 주장]





그럼 틀린 부분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인용의 부정확성을 보여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시개천경본의]에서는 [태백일사]로 출전을 밝히기도 하고 [밀기]로도 밝히기도 한 부분이 있습니다.   [환단고기]에서는 [태백일사]로 출전을 달아 놓은 곳이 사실은 [밀기]가 출전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것은 이유립이 후에 생각나는대로 적어 넣었기 때문이지요.    [신시개천경본의]에서는 고려팔관기高麗八關記)를 인용한다고 해놓은 부분을 [환단고기] 태백일사를 찾아보면 그런 출전이 붙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용은 비슷한데 출전만 삭제한 것입니다(내용에도 물론 추가된 부분과 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두 번째 글자들이 틀립니다.    [신시개천경본의]의 개마국蓋馬國이 [환단고기]에서는 개마국盖馬國으로 [개]자가 다릅니다.   보통은 蓋馬國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래된 기록 중에는 盖馬國으로 된 것이 있습니다.   이유립은 처음엔 별 생각 없이 蓋馬國으로 썼다가 [환단고기]를 낼 때에는 원형이라고 생각한 盖馬國으로 바꾼 것입니다.





[신시개천경본의]에는 역亦으로 된 글자가 [환단고기]에서는 혹或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해당 구절은 아래와 같습니다.   그런데 나라 이름도 틀려졌군요.





[신시개천경본의] 직구다국은 또한 구막한국寇莫汗國이라 칭한다.


[환단고기]       직구다국은 혹은 매구여국賣勾餘國이라 칭한다.





저 汗國이란 말이 마음에 걸려서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매구여로 바꾸어 놓은 모양입니다.   글자 한두 개 바뀌는 것은 오탈자라고 우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원전을 보고 쓴 나라 이름이 바뀌는 이유는 대체 뭘까요?   보고 베낀 것보다 머리 속의 기억이 더 정확해서?





이외에도 徒를 移로 바꾼 것, 喫貪을 貪嗜로 바꾼 것이 있으며 [신시개천경본의]에는 있으나 [환단고기]에는 누락된 구절, 또는 그 반대로 되어있는 부분이 짧은 인용문 중에서도 허다합니다.





[반론]





출전을 바꾸었거나 언급하지 않은 것이 기록 내용에 엄청난 작용을 할만큼 큰 작용을 하였는지?   그리고 그런 주장을 하려면 제발 그 기록 내용을 함께 올려놓든지?   이건 참!   일방적으로 설명만 듣고 입을 다물라는 말인지...주장의 ABC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넋두리를 듣고 있으려니...참!!!!





먼저 출전(出典)의 문제인데 한번 살펴보기로 합시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부분에서 밝힌 저본들은 매우 다양합니다.   따라서 이유립 선생은 이들을 모두 인용한 전체의 원전原典을 기본으로 [신시개천경본의]를 설명하고 있었으므로 저본을 밝힐 경우 [태백일사]로 통칭하였고 하나하나 인용부분을 좀더 세밀하게 언급할 때에는 각각의 기록에서 분리되어 인용한 원출 저본을 말한 듯합니다.   그러니 【[신시개천경본의]에서는 [태백일사]로 출전을 밝히기도 하고 [밀기]로도 밝히기도 한 부분이 있습니다.   [환단고기]에서는 [태백일사]로 출전을 달아 놓은 곳이 사실은 [밀기]가 출전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것은 이유립이 후에 생각나는 대로 적어 넣었기 때문이지요】라는 주장은 그렇게 되는대로 선머슴처럼 언급하지 말고 좀더 깊이 헤아려보고 주장해주었으면 합니다.





[삼신오제본기] 표훈천사表訓天詞*대변경大辯經*오제설五帝說(주注 포함)*전傳으로만 기록





※ 앵무새가 말한 <고려팔관기>의 경우 [환단고기 태백일사]의 <삼신오제본기>에는 [經 즉 대변경]으로 <신시본기>에서는 <고려팔관잡기>라고 적시하고 있다.





[환국본기] 조대기朝代記*삼성밀기三聖密記


[신시본기] 진역유기震域留記*삼성밀기三聖密記*조대기朝代記*대변경大辯經*삼한비기三韓秘記*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





두 번째...기왕에 【盖馬國으로 된 것이 있습니다】라 하였으면 그 기록을 적시해 주어야지 왜 그런지 환히 밝혀줄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필자가 누누이 말했듯이 이런 억측은 정말로 [우리말소리 값]이나 이를 [음차音借 또는 훈차訓借]하는 비교언어학적인 방법이나 기본적인 분석모델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무지를 드러낸 웃음거리일 뿐입니다.


  


     - [개]는 우리말 [해]의 고어古語인 [가]에서 나온 소리 값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음차音借는 매우 많다(개盖*개蓋*계啓*계癸*기冀*기岐*해亥*해解*해奚).   따라서 개蓋와 개盖는 우리말 [해]를 음사音寫한 것이며 모두 같은 용례로 사용되므로 거론해 볼 一考의 가치조차 없다.





     - 구막한국寇莫汗國의 [구막]은 우리말[구마*고마]이다.   한국(汗國)은 말 그대로 한(汗-大君長)이 다스리는 후국(侯國)이란 뜻이다.   아울러 매구여국賣勾餘國의 [매]는 우리말로 [물水]을 의미하는 [미*밀*마]와 넘나든다.  그리고 [구여]는 말 그대로 [구려]인데 여기에서 [여黎*餘)는 우리말 [가마*고마]의 차음(借音)이다.  그 때문에 우리 민족을 “밝고 환하다”는 [구환九桓]과 더불어 “거룩하고 신성한 천손족天孫族”이라는 [고마*가마]의 뜻인 [구여九黎*구려九麗*구여九餘]로 동의이사(同意異寫)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이름 지어진 이 小國들은 모두 환국연방(桓國聯邦) 12國 가운데 들어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모양인가?   그리고 이 사람은 혹시 정말로 우리말소리 형태나 우리말의 음차(音借)나 훈차(訓借) 용례(用例)를 전연 모르는 게 아닐까?   그러니 【저 汗國이란 말이 마음에 걸려서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매구여로 바꾸어 놓은 모양입니다】라는 어이없는 해석이 나오는 것이 아니런지......





고사서(古史書)를 집필하거나 필사(筆寫)하는 가운데 크게 내용상의 변경이 없거나 전혀 의미가 달라지지 않으면 자구상(字句上)의 변경과 생략은 비일비재한 현상이라는 게 통설이다.   이 사람은 이런 일들이 무슨 중대한 사건이라거나 엄청난 내용상의 변개(變改)가 발생하여 명백히 위서(僞書)라고 인정할만할 증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참으로 내가 더 어리둥절해진다.





     - 정사류正史類를 비교해보아도 일정한 글자를 동일한 내용의 다른 글자로 바꾸거나 일부 문자를 생략하기도 한다.   단군관계 기사가 들어있는 <삼국유사*응제시주*제왕운기*세종실록지리지>를 보아도 동일한 원전에서 채록한 근거가 뚜렷함에도 [名단군-曰단군]으로 [於나 也 같은 어조사]를 생략한 사례들과 비슷한 경우를 보여주는 구문들이 많이 보인다.   문맥의 흐름이나 집필하려는 전체 구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따라서 역(亦-또한*모두)으로 된 글자가 혹(或-혹은)으로 넘나드는 사례나 끽탐喫貪(탐하여 먹다*마시기에 좋아하여 탐하다)을 탐기貪嗜(탐하여 즐기다*좋아하여 탐하다)로 바꾼 용례는 모두 그런 의미로 받아들어야 할 것이다.





     - 위 구절과 같은 사소한 변경과 생략은 찬자(撰者)의 취향에 따른 것으로서 필사본(筆寫本) 자체의 내용까지 크게 바꾼 건 아니라고 모두 인정한다.   이는 [환단고기]의 필사과정에서도 적용되는 부분인데 왜 정사류正史類는 괜찮고 [환단고기]는 이를 위서僞書의 근거가 되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볼진대 근거로 제시한 [개-蓋*蓋] 등등은 전혀 언어학적인 분석태도의 기본을 결여한 경망함이다.   모두가 우리말 소리 값을 한자차용(漢子借用)하거나 비슷한 기록내용일진대 동의이자(同意異字)로 통용된다는 걸 망각한 소치이니 애써 할말도 없다.  








[앵무새 주장]





월간 [자유]지는 중앙국립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에 모두 비치되어 있는 공개된 자료이니 누구든지 찾아가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제 말에 무슨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는 몰라도 다짜고짜 욕이나 하실 분들이라면 그 시간에 도서관을 찾아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기 바랍니다.





그동안 이유립이 어떻게 [환단고기]의 기초를 만들고 그것을 주물럭거렸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이정도만 해도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만들었다는 증거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20세기에 날조된 책자를 들고 [민족의 성전] 운운하는 분들에게 깨달음이 찾아가기를 간절히 빕니다.





[반론]





여기서 필자(筆者)는 이쯤에서 과연 [앵무새]가 이유립 선생이 필사(筆寫)한 [환단고기]의 분량에 대해서 정확히나 알고 있는지 무척 궁금해지는군요.   내가 알기로는 번역서만 해도 거의 300P에 육박하니 원본 필사(原本 筆寫)에 기록된 한자(漢字)나 구절(句節)의 분량은 얼마일까?   그런 부분에서 지금 지적하고 있는 오탈자(誤脫字)는 과연 얼마나 된다고 보는가?   그것도 오탈자로 말미암아 문헌 기록의 핵심이나 내용이 뒤바뀌는 게 정말로 있는지도 무척 궁금해집니다.   글의 전체 흐름과 맥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단지 대세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아주 작은 구절의 필요한 부분만 잘라서 예시를 드는 것도 모자라 마치 이것이 [환단고기]의 전체 내용과 문맥을 완전히 뒤집는 듯하게 침소봉대하여 독자(讀者)의 초점을 흐리고 핵심을 비껴가며 오판(誤判)을 하도록 은근히 현혹하는 수법은 여전한듯합니다.   그래서 위에서는 애써 힘을 빼가면서 예시로 든 자료들을 하나하나 모아 분석해 보았습니다.   그래야만이 손에 쥐어주어야 아는 어린애처럼 스스로 무엇이 잘못되었고 옳지 않은 비교분석 태도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듯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이 사람이 주장한대로의 上記와 같은 극히 일부분 그것도 전체를 뒤바꾸거나 허물만큼의 중차대한 근거를 가지고 [환단고기]가 창작으로 만들어졌다든지 기초부분부터 모조리 만들고 전체의 문맥을 주물렀는지?   아울러 차마 낯이 뜨거울 만큼 중대한 부분에 왜곡이나 하자(瑕疵)가 있어 위서(僞書)라는 핵심적인 증거 사료가 되는지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다음의 질문에 대하여 더욱 명백하고 공정하며 근거있는 답변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 주장대로 이유립 선생이 고친 글자가 원래 언급한 글자와 전혀 해석이 다르거나 문맥이 아주 달라지게 하는 엉뚱한 내용인가?


     - 이유립선생이 과연 그런 부분을 고의적으로 감추거나 아예 모르는 체 하였는가?  





※ 이는 다른 여러 가지 정황을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후일 [광오이해사본]이나 [배달의숙본]을 후학後學들에게 설명하고 해석해 줄 때에도 일일이 기억을 되살려 틀린 부분을 수정해주고 원전(原典)의 구문(句文)과 다른 대목들을 일일이 지적하여 고쳐주는 태도에서도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 고치거나 자구字句를 바꾼 부분이 관련 구절句節의 내용이나 해당 구문句文의 전체 흐름을 뒤바꿀 만큼 아주 중차대한 대목이었는가?


     - 마지막으로 틀린 글자나 문구文句로 인하여 언급하고자 했던 전체 내용이 완전히 달라지거나 저서著書의 문맥이나 흐름이 뒤바뀔 정도로 심각한 오류인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환단고기]의 진실성 여부를 둘러싼 학계(學界)의 쟁점토론 결과들을 종합해볼 때 [환단고기]가 부분 가필(加筆)된 점은 있을지언정 위서(僞書)는 아니라는 것은 점점 명백해지고 있다는 점도 아울러 명심해 주기 바랍니다.





[환단고기] 내용 중 몇몇 가필(加筆)된 부분은 대일항전과정(對日抗戰過程)을 치르던 복잡한 상황에서 누군가에 의해 삽입된 것으로도 볼 수 있고 또는 이유립 선생이 대전(大田)에 거주하면서 그랬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 만으로서는 전적으로 위서(僞書)라고 단정 지을 만한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이유립 선생이 [단학회]의 창시자 <이기> 선생으로부터 여러 손길을 거쳐 전수 받았음은 의심할 바가 아닙니다.   지금은 이유립 선생의 부인이 [단단학회]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뿌리인 역사 찾기를 평생 소원했던 이유립 선생은 생전에 어렵고 어두운 그리고 기나긴 기다림 속에서 칩거하는 와중에 많은 책을 썼으며 그로 말미암아 현재에 이르러서는 [환단고기]와 비슷하거나 같은 내용이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 평주評註-이유립의 환단고기 번역본]는 실제로 이유립 선생이 [환단고기]를 번역 출간하기 위하여 쓴 것입니다.   이 <환단고기 평주>는 이유립 선생이 [환단고기]를 풀이해 놓은 것으로 이것을 책으로 펴내기 직전에 운명하셨죠.   1979년에 펴낸 <환단고기>에는 정오표가 달린 책이 있는데 정오표는 책에서 틀린 글자나 잘못된 내용을 고쳐서 추가한 것으로 이 정오표의 글씨는 이유립 선생의 글씨가 분명합니다.   이것은 선생이 환단고기 원문을 직접 수정한 흔적입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환단고기]가 적어도 이전부터 존재했던 책이며 선생이 부분 加筆한 점 역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건이 일어난 당대에 저술된 1차 사료가 아니라면 加筆되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그러한 문헌사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국 고대사서(古代史書)를 대표하는 <서경書經*죽서기년竹書紀年>을 비롯한 수많은 고대문헌들이 후세 역사가들에 의해 대량으로 加筆이 가해졌음은 이미 청(靑)나라 고증가(考證家)들에 의해 밝혀진 역사학의 상식이라는 점은 익히 알고는 있겠지요?   그러나 加筆이 좀 있다고 사료적 가치까지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사료는 신빙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환단고기]에 대한 연구에 앞서 서지학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학계의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환단고기]의 사료 채택을 무기한 유보시키는 구실로 오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한 발상은 이미 우리 현대사의 큰 흐름이 되어버린 상고사(上古史)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도외시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 자체로서 역사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하여 역사학계 스스로가 설자리를 잃고 마는 자멸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위서僞書 논쟁에 대한 쓴 말 한마디]





이 세상의 무수한 역사서들이 편찬자의 숨은 의도에 따라 일부는 윤색되고 일부는 진실로 채워져 있다는 평범한 상식을 자각한다면 [환단고기]가 만에 하나라도 일부 첨삭*윤색된 일면이 눈에 띈다 하더라도 책 내용 전부를 가타부타 없이 무조건 위서(僞書)라고 매도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만일 이런 논리를 일관되게 적용한다면 소위 고구려*백제*신라의 정사(正史)로 정평이 나있는 <삼국사기>라는 것도 僞書라는 평가를 면치 못할 것이고 또한 중국의 25史라는 것 역시 僞書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삼국사기에는 단군신화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신화적 사건이 상당 부분 나타나고 중국의 25史에도 그와 유사한 내용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논리에 앞서 민족의 일원이라면 이민족(異民族)의 史書가 아닌 우리 민족의 史書에 대해서는 일단 먼저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해야 하며 단지 그것의 진위를 밝히려는 고증의 노력이 뒤따르면 족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좀더 적극적으로 고증해보는 노력은 비켜두고 그 동안 배워온 얄팍하고도 잘못된 지식에 터를 잡고 앉아 막무가내로 僞書라고 매도하는 것은 양식 있는 학자의 자세라고 결코 볼 수 없다.   결국 [환단고기]에 대해 일부 가필*윤색된 부분만 유독하게 확대하거나 곡해하여 책 전체를 僞書로 몰고 가는 일부 국내학자들은 반민족적 역사가들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호머>의 [일리야드]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 기사를 읽고 <트로이>라는 도시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30년이 넘는 노력 끝에 마침내 유적을 발굴해 냈던 독일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하인리히 쉴리만>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신화와 전설을 살아있는 역사로 바꾸어 놓았던 바로 이러한 긍정적이고 인내적인 자세를 가지고 다시금 [환단고기]를 대할 필요가 있다.








[이 장章을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문제들-필독必讀]

- 고기(古記)인용부분에 대한 일고찰(一考察)-





檀君이전의 역사적 사실에 관하여 가장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는 기록들은 <삼국유사>에서 인용하고 있는 [古記]의 편린(片鱗)과 <제왕운기>에서 들고 있는 <本紀>의 내용이다.   두 기록은 檀君과 이전 사회를 거론한 것으로서는 현존하는 최고의 기록으로 공인되어 있는 정사류(正史類)이며 桓國과 檀國의 의문을 풀 수 있는 핵심 고리인바 檀君의 존재를 아주 명백한 것으로 제시함으로서 우리 민족 先史 탐구의 출발점을 만들어 준다.   아울러 민족 사서류(史書類)로서는 가장 두드러진 문헌이 <환단고기>와 <규원사화> 그리고 <단기고사>이다.   이 史書들에서 인용하고 있는 <조대기朝代記>와 <삼성기三聖記> 그리고 <밀기密記>가 모두 [古記]에 전거를 두고 있음은 필자가 이미 다른 글에서 사례분석과 비교 문헌적 고찰을 통해 입증한바 있다(古記-조대기-태백일사*古記-구삼국사-동명왕편과 제왕운기*古記-삼국유사-응제시주)





이어 분석할 필요가 있는 부분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이다.   이 문헌은 본격적인 실록형(實錄形) 기술태도를 보이면서도 <고기>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어 설화(說話)와 사실의 층위(層位)를 넘나들고 있다.  





[단군세기] [古記云]  王儉父檀雄母熊氏王女辛卯五月二日寅時生于檀樹下有神 人之德遠近畏服年十四甲辰熊氏王聞其神聖擧爲裨王攝行大邑國事戊辰唐堯時來自檀國至阿斯達檀木之墟國人推爲天帝子混一九 桓神化遠 是謂檀君王儉在裨王位二十四年在帝位九十三年壽一 百三十歲





위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조대기>의 인용문에 <기후유호왈단군왕검其後有號曰檀君王儉>이란 대목에서 “기후其後”의 시점을 기준으로 [고기]의 기록을 옮긴 것처럼 보인다.   桓민족도 이제는 구환(九桓)으로 확산되고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삼국유사>의 내용과는 달리 <웅씨왕熊氏王>에 대한 기술(웅씨왕문기신성거위비왕섭행대읍국사 熊氏王聞其神聖擧爲裨王攝行大邑國事)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웅씨왕]이 <삼국유사> 등 正史類에서 축약해버린 桓雄과 檀君 사이의 중간 역사를 복원시키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이처럼 이런 기록을 담고 있음은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의 다음과 같은 내용도 [고기]에서 유래한 것임을 추정케 한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太白山北走 屹屹然立於斐西岬之境...山名曰不咸 今亦曰完達 音近也 後 熊女君 爲天王所信 世襲爲斐西岬之王儉 王儉 俗言大監也 管守土境 除暴扶民 以天王諭國人之意 戒之曰 父母可敬也 妻子可保也 兄弟可愛也 老長可隆也 少弱可惠也 庶衆可信也 又制醫藥工匠養獸作農測候禮節文字之法 一境化之 遠近之民 皆不相疑也 熊氏之所分曰少典 安夫連桓雄之末 少典以命 監兵于姜水 其子神農嘗百草制藥...斯瓦羅桓雄之初 熊女君之後 曰黎 始得封於檀墟爲王儉 樹德愛民 土境漸大 諸土境王儉 來獻方物 以歸化者 千餘數後四百六十年 有神人王儉者 大得民望 陞爲裨王 居攝二十四年 熊氏王崩於戰 王儉 遂代其位 統九桓爲一 是爲檀君王儉也





바로 이 문장을 유의해 보아야 한다.   “후 웅녀군 위천왕소신 세습위비서갑지왕검 後 熊女君 爲天王所信 世襲爲斐西岬之王儉“   여기의 天王은 제1세 桓雄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흐름상 桓雄部族과 熊氏族이 통혼(通婚)한 시점에 근접하고 있다.   때문에 ”爲天王所信“이 의미하는 바는 <밀기>의 구절인 ”사일혈진 賜一穴塵 일위신계지맹一爲神戒之盟“이니 <태백일사>의 上記 문장은 진실을 보증한다.





<왕검王儉>이 된 熊女君의 후예(後裔) 가운데 <여黎>라는 사람이 있어 <단허檀墟>에 책봉되었다.   그 후 460년에 檀君이 熊氏王의 비왕(裨王)으로 등장하고 있다(유신인왕검자 대득민망 승위비왕 거섭24년 有神人王儉者 大得民望 陞爲裨王 居攝二十四年).   이 [24년]은 <단군세기>의 인용문으로 이미 살핀 [고기의 기록인 시위단군왕검재비왕위24년 是謂檀君王儉在裨王位二十四年]과 일치하므로 <단군세기>에 인용한 [고기]의 “무진당요시래자단국지아사달단목지허국인추위천제자 戊辰唐堯時來自檀國至阿斯達檀木之墟國人推爲天帝子”는 또다시 진실성을 얻는다.   다음으로 <태백일사 신시본기>는 단군의 일대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蓋自神市開天 傳十八世 歷一千五百六十五年 而始有檀君王儉 以熊氏裨王 遂代神市 統一九域 分三韓以管境 是謂檀君朝鮮也





<삼성기>는 안함로(安含老)와 원동중(元董仲)이 찬술한 두 저서가 전해지는데 내용을 보면 檀君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桓雄시대가 중심이다(안함로  桓因-朱蒙까지*원동중  인류 조상 나반那般-桓因-桓雄까지이며 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도 수록).   따라서 이제까지의 추적과정을 통해 보건대 [고기]야 말로 안함로 저술본의 기술내용 범위와 동일했을 것으로 보여 지니 [고기]의 축약본(縮約本)으로 보아 무방하다.  다음의 기록이 그와 같은 추정을 가능케 해준다.





[안함로 삼성기] 後神人王儉降到于不咸之山檀木之墟其至神之德兼聖之仁乃能承詔繼天而建極 巍蕩惟烈九桓之民咸悅誠服推爲天帝化神而帝之是爲檀君王儉復神市舊規設都 阿斯達開國號朝鮮


[이암李嵒 단군세기] 戊辰元年大始神市之世四來之民遍居山谷草衣跣足至開天一千五 百六十五年上月三日有神人王儉者五加之魁率徒八百來御于檀木 之墟與衆奉祭于三神其至神之德兼聖之仁乃能奉詔繼天巍蕩惟烈 九桓之民咸悅誠服推爲天帝化身而帝之是爲檀君王儉復神市舊規 立都阿斯達建邦號朝鮮





<단군세기>의 서술 부분은 [고기]를 인용한 것이다.   <삼성기>와 비교하면서 <기지其至> 이하 대목을 보면 명백하듯 다른 경로를 통해 입수한 문헌을 거쳐 채록한 두 저서는 동일 저본에 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문구상(文句上)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 단군과 조선 부분에 있어서 <삼성기>가 <단군세기>와 정합(整合)을 보인다는 것은 <삼성기> 또한 [고기]를 인용했음을 말해준다.





이런 사정은 다음의 [고기] 인용기록을 보면 더욱 명백해지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고기] 原文의 전체적인 내용과 수록범위를 복원하는데 <원동중>의 것보다는 <안함로>의 <삼성기>가 한결 유익하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된다.





[안함로 삼성기] 檀君端拱無爲坐定世界玄妙得道接化群生命彭虞闢土地成造 起宮室高矢主種稼臣智造書契奇省設醫藥那乙管版籍羲典卦筮尤作兵馬納菲西岬河伯女爲后治蠶淳厖之治熙洽四表.


[이암 단군세기] 於是命彭虞闢土地成造起宮室臣智造書契奇省設醫藥那乙管版籍 羲典卦筮尤掌兵馬納斐西岬河伯女爲后治蠶淳厖 之治熙洽四表





그렇다면 [고기]는 언제 성립되었을까?   추정컨대 적어도 삼국시대까지의 역사는 기술하였던 듯이 보인다.   그 단서를 <삼국사기 제2 근초고왕> 조條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기]의 저자(著者) 문제에 있어서는 고구려계(高句麗系) 인물로 압축된다.   왜냐하면 <주몽설화>에서 해모수와 주몽을 부자관계로 설정했다는 저변에는 이미 종족과 국가의 맥을 이었다는 인식이 전제되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모수>는 단군조선을 이어 북부여를 건설한 인물이며 고구려는 三國 가운데 檀君의 맥을 이었다고 자인(自認)하던 나라였다.   따라서 환국-단국시대를 自國의 역사로 기록할 사람은 역시 고구려인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13년 조] [古記]云 百濟 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 得博士高興 始有書記 然 高興未嘗顯於他書 不知其何許人也





이상으로 단군설화와 관련된 [고기]의 추적을 면밀히 해보았다.   물론 그 핵심은 <삼성기>와 <조대기>이다.   <제왕운기*응제시주*세종실록 지리지-평양부>에 전하는 단군설화가 <삼국유사.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건 주지의 사실인바 아무튼 <삼국유사>만이 오랫동안에 걸쳐 단군설화를 전하는 최고의 문헌으로 관변(官邊) 역사학자들은 간주하여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로 비추어 이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적어도 <삼성기>는 <삼국유사>의 기록보다도 더욱 원시형태를 지닌 원전(原典)이며 이 두 문헌들에 비하여 <조대기>는 [고기]의 본문 내용을 가장 온전하게 보전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앞으로도 우리가 매우 유의해야 하며 반드시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기타 밀기密記*비기秘記]와 [고기古記]와의 문헌적 비교】





단군전후사에 관한 기록으로 [고기]와 함께 놓쳐서는 안 될 서적으로 <밀기-三聖密記>와 <비기-三韓秘記>가 있다.   <삼성기>에 [고기]와 함께 <밀기>가 나란히 인용되고 있는데 모두 동일한 서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밀기>와 <비기>엔 공통적인 기술이 등장한다.   다같이 어떤 모종의 저본에서 발췌한 것이 분명하다.   <밀기>와 <비기>는 상이한 문맥에 일정하게 동일한 文句를 삽입시켜 놓고 있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한 책을 하필이면 여러 산만한 구절 중에서 꼭 짚어서 한 대목만을 베꼈을 터라는 추단이 거의 불가할진대 두 문헌은 결코 동일한 서책이 아니며 보다 중요한 것은 단일한 저본(底本)을 인용했음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원동중 삼성기] [密記云] 桓國之末有難治之强族患之桓雄乃以三神設敎以佺戒爲業而聚衆作 誓有勸懲善惡之法自是密有剪除之志 時族號不一俗尙漸岐原住者爲虎新住者爲熊虎性嗜貪殘忍專事掠奪熊性愚 愎自恃不肯和調雖居同穴久益疎遠未嘗假貸不通婚嫁事每多不服咸未有一 其途也至是熊女君聞桓雄有神德乃率衆往見曰願賜一穴廛一爲神戒之盟雄 乃許之使之奠接生子有産虎終不能悛放之四海桓族之興始此焉 後有葛古桓雄與炎農之國劃定彊界又數傳而有慈烏支桓雄神勇冠絶以銅頭 鐵額能作大霧造九冶而採鑛鑄鐵作兵天下大畏之世號爲蚩尤天王蚩尤俗言 雷雨大作山河改換之義也 蚩尤天王見炎農之衰遂抱雄圖屢起天兵於西又自索度進兵據有淮岱之間及 軒侯之立也直赴涿鹿之野擒軒轅而臣之後遣吳將軍西擊高辛有功 時天下鼎峙涿之北有大撓東有倉頡西有軒轅


[이맥 태백일사 신시본기] [三韓秘記 曰] 伏羲 旣受封於西鄙 位職盡誠 不用干戈 一域化服 遂代燧人 號令域外 後 有葛古桓雄 與神農之國 劃定疆界 空桑以東屬我 又數傳 而至慈烏支桓雄 神勇冠絶 其頭額銅鐵 能作大霧 造九治以採得 鑄鐵作兵 造飛石迫擊之機 天下大畏之 共尊爲天帝子蚩尤 夫蚩尤者 俗言雷雨大作 山河改換之義也 蚩尤天王 見神農之衰 遂抱雄圖 屢起天兵於西 進據淮岱之間 及軒轅之立也 直赴涵鹿之野 擒軒轅而臣之 後遣吳將軍 西擊高辛 有功





헌데 이는 <밀기>와 [고기]를 비교해 보았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아래의 구절은 모두 저자(著者)의 찬술(撰述)이 아니고 인용문이라는 것이 특히 주목을 요한다.  





[이맥 태백일사 환국본기] [三聖密記云] 波奈留山之下有桓仁氏之國天海以東之地亦稱波奈留 國也其地廣南北五萬里東西二萬餘里摠言桓國分言則卑離國養雲國寇莫汗國勾茶川國一群國虞婁國一云畢那國客賢汗國勾牟額國賣勾餘國一云稷臼多國斯納阿國鮮卑爾國一云豕韋國一云通古斯國須密爾國合十二國是也 天海今曰北海


[원동중 삼성기] [古記云] 波奈留之山下有桓仁氏之國天海以東之地亦稱波奈留之國其地廣南北五萬里東西二萬餘里摠言桓國分言則卑離國養雲國寇莫汗國句茶川國一羣國虞婁國(一云畢那國)客賢汗國句牟額國賣句餘國(一云稷臼多國)斯納阿國鮮禾卑 國(一稱豕韋國或云通古斯國)須密爾國合十二國也天海今曰北海傳七世歷年三千三百一年或云六萬三千一百八十二年未知孰是





어떤 단일한 서책에서 같은 부분을 발췌한 듯한데 이점은 동일한 기술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文句를 쓰고 있음에서 자명하게 드러난다.   실례로 환웅부족과 웅씨족의 통혼관계에 대하여 <밀기>는 역사 기록에 가깝지만 [고기]는 이미 설화(說話)의 성격(곰과 호랑이 운운*쑥과 마늘을 먹으며 햇볕을 보지 말라)을 보여준다.





[원동중 삼성기] [密記云] 桓國之末有難治之强族患之桓雄乃以三神設敎以佺戒爲業而聚衆作誓有勸懲善惡之法自是密有剪除之志時族號不一俗尙漸岐原住者爲虎新住者爲熊虎性嗜貪殘忍專事掠奪熊性愚愎自恃不肯和調雖居同穴久益疎遠未嘗假貸不通婚嫁事每多不服咸未有一其途也至是熊女君聞桓雄有神德乃率衆往見曰願賜一穴廛一爲神戒之盟雄乃許之使之奠接生子有産虎終不能悛放之四海桓族之興始此焉


[원동중 삼성기] [古記云] 時有一熊一虎同隣而居嘗祈于神壇樹願化爲神戒之氓雄聞之曰可敎也乃以呪術換骨移神先以神遺靜解靈其艾一炷蒜二十枚戒之曰爾輩食之不見日光百日便得人形熊虎二族皆得而食之忌三七日熊能耐飢寒遵戒而得儀容虎則放慢不能忌而不得善業是二性之不相若也熊女者無與爲歸故每於壇樹下呪願有孕乃假化爲桓而使與之爲婚懷孕生子有帳





결론적으로 <밀기> <비기> [고기]는 동일한 문헌이 아니다.   그리고 주요 핵심은 단군전후사이다.   그러면서 <밀기>는 지시(指示)하는 문장으로 사건의 기록 자체에 보다 충실(時族號不一俗尙漸岐原住者爲虎新住者爲熊虎性嗜貪殘忍專事掠奪熊性愚愎自恃不肯和調雖居同穴久益疎遠)하려는 반면에 [고기]는 표현하는 문장(설화적-時有一熊一虎同隣而居嘗祈于神壇樹願化爲神戒之氓)으로 그 내용의 구성여부에 중심을 둔다.  





     - [고기]의 문장이 표현적임은 저자의 취향 때문이 아니라 이미 오랜 전승(傳承)을 통해 굳어진 일종의 서술형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기]에서 발견되는 이런 점들은 <밀기>와 비교하여 오직 단일 층위의 전승에서 비롯될 수가 없다.


     - 두 서책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저본의 성격과 전래과정에 일어난 맥락의 차이가 분명한데 <밀기>는 전승에 따른 내용의 굴절을 훨씬 적게 받은 방어적 형태의 저본을 토대로 성립되었다.   다시 말해 [고기]가 더 통속적이 유전 경로를 거쳤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단일 저본으로 추정되는 <밀기>와 <비기>의 문제이다.   문맥의 흐름과 전후관계에 주안점을 둔다면 <후유갈고환웅여염농지국획정강계우수전이유자오지환웅 後有葛古桓雄與炎農之國劃定彊界又數傳而有慈烏支桓雄>이야 말로  두 저서(著書)의 공통 된 기술의 모든 범위를 보여주는 핵심 구절이다.





     - 원동중의 <삼성기>에 실려 있는 <신시역대기>에 의하면 갈고葛古-10대*치우蚩尤-14대 환웅이다.   때문에 동일하게 인용한 [우수전이又數傳而]란 文句를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즉 공동으로 취한 저본(底本)은 갈고-치우 사이에 3대를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 따라서 공동저본은 분명히 편년체를 취하고 있음이 드러나며 그걸 축약하여 기술하면서 <우수전又數傳>이란 말로 대체한 것이다.


     - <밀기>는 환웅-갈고-치우의 연속성을 <비기>는 복희-갈고-치우의 연쇄를 드러내는데 둘을 결합하면 환웅-복희-갈고-치우로서 <신시역대기>와 정합한다.


     - 아울러 <밀기>는 환웅시대에 관심이 있고 <비기>는 치우시대에 주안점을 둔다.   바로 <삼성기>와 <태백일사> 저자의 취향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지는 부분이다.





이제 <밀기>의 <복희伏羲>에 관한 대목을 살펴보자.   <복희>는 제5세 환웅의 막내아들이다.   <밀기>도 <복희>의 이력과 후예들에 관한 기록을 배제하지 않음으로서 두 저서는 적어도 환웅시대에 대한 전 역사를 각각 기록했던 문헌이었음이 밝혀진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그 까닭이 모두 어떤 동일한 저본을 서로가 임의로 축약하여 기술하는 가운데 별도로 성립하였음이 자명해진다.





[이맥 태백일사 신시본기] [密記 曰] 伏羲 出自神市 世襲雨師之職 後經靑邱樂浪 遂徙于陳 幷與燧人有巢 立號於西土也 後裔分居于風山 亦姓風 後遂分爲佩觀任己煊理缸彭八氏也 今山西濟水 羲族舊居尙在 任宿須句須臾等國 皆環焉





추측컨대 <밀기>와 <비기>가 고려시대에 저술된 단서가 보인다.   <태백일사>의 인용 서목(書目)을 보면 <밀기>는 <신시본기>까지 언급되며 고구려에 이르는 부분과 <고구려국 본기>에서는 <조대기>와 <대변경>이 주로 인용된다.   바로 [밀기]의 기록 내용이 확인되는 부분이다.   또한 <밀기>는 불교가 이미 유입되어 민속에 일정하게 유입되던 시점에 쓰여 졌음은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맨 마지막으로 인용된 文句에서 밝혀진다.   <비기>는 <고구려국 본기>에 인용되었는바 당(唐)에 대한 언급으로 추정컨대 두 문헌의 성립은 고려시대의 어느 시기로 생각된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今僧徒 混以帝釋稱壇 則非古也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三韓秘記曰] 舊志云遼西有昌遼縣 唐時改遼州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원동중의 <삼성기>의 저본은 핵심 주제로 보아서나 자료적 한계로나 [고기]*<밀기>이다.   헌데 어느 서책에서 발췌한 것인지 도입부가 조금 이상하다.   이는 분명히 [고기]의 구절로 보여 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뒤 따르는 문구는 [고기]로 여겨지는데 [고기]가 <桓國>에 이어 따로 <환인씨지국桓因氏之國>으로 고쳐 쓸 까닭이 없어 [고기]의 인용이 아닌 듯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환인거우천산득도장생거신무병대천선화사인무병 桓仁居于天山得道長生擧身無病代天宣化使人無兵>에 대한 <桓因氏之國>의 기술 태도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





[원동중 삼성기] 人類之祖曰那般初與阿曼相遇之處曰阿耳斯它夢得天神之敎而自成婚禮則九桓之族皆其後也昔有桓國衆富且庶焉初桓仁居于天山得道長生擧身無病代天宣化使人無兵人皆作力自無飢寒傳赫胥桓仁古是利桓仁朱于襄桓仁釋提任桓仁邱乙利桓仁至智爲利桓仁或曰檀仁  古記云波奈留之山下有桓仁氏之國 




<밀기>는 <桓國>에 대해서만큼은 [고기]와 저본이 동일하다.   그러므로 <밀기>도 아니고 저자(著者)의 창작도 아니니 출전(出典)이 훨씬 복잡하게 되어버린다.   여기에서 눈길을 돌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를 보면 <오제설五帝說>을 인용하여 <오방五方의 사명司命>을 논하면서 다음의 단락이 이어진다.





[이맥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人類之祖曰那般初與阿曼相偶之處曰阿耳斯它亦稱斯它麗阿也日夢得神啓而自成昏禮明水告天而環飮山南朱鵲來喜水北神龜呈瑞谷西白虎守嵎溪東蒼龍升空中有黃熊居之天海金岳三危太白本屬九桓而蓋九皇六十四民皆其後也





바로 출처는 <오제설>이다.   이제 다시 역사로 들어가자.   <인류지조왈나반...천해금악삼위태백본속구환이개구황64민개기후야 人類之祖曰那般...天海金岳三危太白本屬九桓而蓋九皇六十四民皆其後也>란 구절은 분명히 저자의 독창(獨創)이 아니다.  





     - 만약 그렇다면 <삼성기>의 오행설에 입각해 기술한 부분을 완벽히 배제하지는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저자著者가 특별히 오행설을 싫어했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 더욱이 위 단락에서 <아이사타역칭사타려하야 阿耳斯它亦稱斯它麗阿也>와 <천해금악삼위태백본속구환이개구황64민개기후야 天海金岳三危太白本屬九桓而蓋九皇六十四民皆其後也>사이에 엄연한 단절이 보여 <오제설>이 제기하고 있는 文句가 아닌 <나반那般>의 일대기가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어야 문맥구조가 올바르다.


     - 다시 말해 <阿耳斯它>와 <天海金岳三危太白>은 서로가 너무 돌발적이라 둘을 관련지어 줄 매개 사건이 필요하다.





따라서 <삼성기>와 <오제설>은 공통의 저본을 활용하였으되 [고기]나 <밀기>도 아닌 다른 신화와 관련되어 있음을 추론케 한다.   우리는 다시 아래 문맥에 주목하게 된다.





[이맥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河伯是天河人那般之後也七月七日卽那般渡河之日也是日天神命龍王召河伯入龍宮使之主四海諸神天河一云天海今曰北海是也天河注曰天道起於北極故天一生水是謂北水蓋北極水精子所居也





<하백시천하인나반지후야 河伯是天河人那般之後也> 하필이면 <나반>의 후예로 <하백河伯>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이 <나반설화>는 <하백족>이 주역으로 어느 시점에서 문헌 전승이 이루어졌고 위 단락은 그런 과정에서 모종의 원전(原典)으로부터 채록되었던 게 틀림이 없다.   물론 전거서적에는 <나반>의 출현*혼인*활동상*후예에 관한 내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천하(天河)는 천해(天海-천하일운천해금왈북해 시야 天河一云天海今曰北海 是也)로 구환(九桓)의 한 소재로서 언급되는 <나반설화>의 기원지이다.   바로 이쯤에서 또 하나의 설화가 주목된다.





[안함로 삼성기] 吾桓建國最古有一神在斯白力之天爲獨化之神光明照宇宙權化生萬物長生久視恒得決樂乘遊至氣妙契自然無形而見無爲而作無言而行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於是桓因亦以監群居于天界掊石發火始敎熱食謂之桓國是謂天帝桓因氏亦稱安巴堅也傳七世年代不可考也





<일강동녀동남800여흑수백산지지 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와 나란히 언급된 <어시환인역이감군거우천계배석발화시교열식위지환국시위천제환인씨역칭안파견야 於是桓因亦以監群居于天界掊石發火始敎熱食謂之桓國是謂天帝桓因氏亦稱安巴堅也>가 핵심 포인트이다.   드디어 해답이 풀렸다.   즉 <안파견 설화>이며 기원지는 <흑수백산>이다.   그리고 <나반설화>엔 <천강天降>의 요소가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안파견설화>는 <천강설>에 기초를 단단히 박고 있다.   이제부터 이를 바탕으로 가장 중요한 [환웅설화]를 다시금 정독할 때가 되었다.





[원동중 삼성기] 桓國之末安巴堅下視三危太白皆可以弘益人間誰可使之五加僉曰庶子有桓雄勇兼仁智嘗有意於易世以弘益人間可遣太白而理之乃授天符印三種仍勅曰如今人物業已造完矣君勿惜厥勞率衆三千而往開天立敎在世理化爲萬世子孫之洪範也





여기에서 <庶子>의 의미가 명확해진다.   직계(直系)가 아닌 방계(旁系)로서 <서자부庶子府>를 담당했던 새로운 세력 탄생의 완곡한 어법이다.   즉 [환웅설화]는 原出地에서 분리되어 가는 같거나 서로 이웃한 지역 안에서 발생했던 국가와 세력의 교체나 부상을 의미하는 전승으로서의 역사이다.   지성의 산물인 문자에 의한 역사가 아니고 생활의 산물인 언어에 의한 실제 역사과정이다.





처음의 역사는 모두가 언어로 되어 있던 전승의 형태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펴 본 3개의 전승은 <밀기> <비기> 그리고 [고기]가 제기하는 공통저본의 가장 처음을 구성했던 주요 핵심 형태이다.   이것들이 언제 어떻게 어떤 문헌들에 정착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 과정 속에서도 기록으로 탈바꿈되었기도 했지만 전승 자체로 이어져 왔다는 사실 확인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바로 이런 정황을 실질적으로 추정케 하는 인용구문이 등장한다.   언어에서 회화로 그리고 회화에서 문자로 역사의 존재와 기술방식이 변화하였음을 적시한다.





[이맥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大辯說註] 曰南海縣郞河里之溪谷岩上 有神市古刻 其文曰桓雄出獵 致祭三神 又曰大始傳古 只憑口舌 久而後 乃形以爲妓 又復妓變而爲之字 蓋文字之源 莫非出於國俗之所尊信也




<대변설>의 상기 지적을 사실로서 보여주는 저서(著書)가 <조대기>이다.   <발해사>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발해를 제외한 다른 부분들은 전승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와 <환국본기>에 인용된 <조대기> 문구(文句)의 현격한 차별성이 그 실례이다.





[규원사화]에 따르면 <조대기>는 <진역유기>의 저본이다(고유청평산인 이명자 고려시인 유지역유기3권 인조대기 비재아국고사 古有淸平山人 李茗者 高麗時人 有震域遺紀3卷 引朝代記 備載我國故事-규원사화 단군기).   <태백일사>는 <진역유기와 조대기>를 함께 인용하고 있는데 동일 내용에 대하여 동시 인용한 경우가 없다.   이는 두 저서의 독자성을 밝혀주지만 두 저본의 내용이 대동소이함을 알려주는 확실한 증좌이다.   따라서 같은 계통의 가장 마지막 필사본인 <규원사화>가 <태백일사>에 수록되어진 <조대기나 진역유기>의 단편(斷片)들에 대한 보충자료로서 읽혀져야만 사료 가치가 특별히 돋보인다.   바로 여기에서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의 진가성(眞價性)과 위력이 극적으로 발휘되는 순간이다.





     - 조대기의 성립은 일정한 한계를 보여준다.   발해사의 종말까지 기술하여 발해 멸망 시점이 기준임을 추정케 하기 때문이다.


     - 조대기의 아래와 같은 저자논변(著者論辨)은 저작 시기가 신라 말에서 고려 성립 이전임을 밝혀준다.





[이맥 태백일사 신시본기] 今夫究其源 則盖一源之祖也 然 地旣分東西 各據一方 土境逈殊 人煙不通 民知有我而不識有他 故 狩獵採伐之外 曾無險陂 降至數千載之後 而世局已變 仲國者 西土之寶庫也 沃野千里 風氣恢暢 我桓族之分遷該域者 垂涎而轉進 土着之民 亦湊集而萃會 於是 焉黨同讐異 而干戈胥動! 此實萬古爭戰之始也





[해석] 이제 저들의 그 근원을 탐구해보면 아마도 한 뿌리에서 비롯된 조상일 것인데 땅은 이미 동서로 갈리어 각각 한 구석씩을 차지하였으니 땅은 멀리 떨어져 사람들의 인연은 통하지 않고 백성들은 나 있음을 알면서 남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냥하고 나무를 베는 이외엔 일찍이 험상궂게 이지러질 일이 없더니 천년의 세월을 셀 수 있게 되자 시국은 이미 변하여 중국은 서토인들이 노리는 보물창고가 되어 천리 기름진 평야에 바람만 널리 마구 분다.   우리 한족 가운데 그 지역에 나뉘어 옮겨간 족속들은 침을 흘리며 이리저리 굴러 전진하고 토착의 백성들도 역시 마구 휩쓸려 모여들었다.   여기에서 어찌 같은 집안 식구들끼리 원수를 달리하고 창칼의 움직임을 노릴 손가?   이야말로 실로 만고의 전쟁의 시초더라.    





위 문구는 <조대기> 인용의 연속인데 저자(著者)의 주장일 수 없음은 내용이 이맥(李陌)의 시대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주된 핵심이 환족(桓族)의 자아성찰을 토대로 하고 있음을 먼저 직시(直視)할 필요가 있다.  





     - 필자(筆者)는 환족(桓族)의 기원인 환국桓國-환인桓因을 논의하고 현재를 반추하고자 문맥을 되돌린다(금부구기원 칙개일원지조야 今夫究其源 則盖一源之祖也).    이미 앞 문장에서 환웅桓雄의 치세*환웅부족과 웅녀족(熊女族)의 결합*신시神市의 문화에 대해 언급하였으며 神市時代가 우리 민족문화의 황금시대임을 이미 역설하였다.


     - 다음 구절에서 나오는 “남”은 곧 “나”와 같다.   동족을 의미한다.   자아비판의 느낌이 매우 짙다(연 지개분동서 각거일방 토경형수 인연불통 민지유아이불식유야 然 地旣分東西 各據一方 土境逈殊 人煙不通 民知有我而不識有他).





하지만 현실은 이렇다.   중국(仲國)과 서토(西土)가 극명하게 대비(對比)되는 부분이다.   서토(西土)란 말은 <상서尙書 주서周書 진서일중秦誓一中>에서 은(殷)에 대한 주(周)의 뜻으로 처음 쓰였다.  따라서 西土가 화하족(華夏族)의 나라임이 분명할진대 [중국仲國]이 어디인지 적나라하게 보인다.   [신시神市를 계승한 후예들의 나라]인 것이다.   이를 <임승국>씨는 [서양인]으로 풀어 의미를 이상하게 만들었지만 틀림없는 [우리 신시족神市族]을 지칭하고 있다.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중국자 서토지보고야 옥야천리 풍기회창 仲國者 西土之寶庫也 沃野千里 風氣恢暢).





     - 그런 중국(仲國)이 지금 西土에 의해 수탈을 당하고 있다.   그러면서 문맥은 민족의 양심을 겨누면서 마친다(어시 언당동수이 이간벌서동 於是 焉黨同讐異 而干戈胥動 !).   “한 겨레로서 어찌 서로 칼을 겨누는가!”   민족 분열 시기가 아니고서는 결코 절규할 성질의 탄식이 아니다.





따라서 위의 문장구조로 보아 <조대기>는 발해 멸망-신라 멸망에 이르는 민족 분열기에 저작되었다.   아무튼 <조대기>는 [환단고기]에서 <태백일사>에만 직접 인용되고 있음을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단군세기>의 著者도 [고기]를 이미 보유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조대기>가 [고기]보다 훨씬 체제구성이 뛰어났던 정황이 엿보인다.   단군세기의 著者는 그러한 사실에 눈을 돌린 듯하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말]





<단군세기>는 이암(AD 1296-AD 1364)의 말년인 AD 1363년에 저술이 완료되었다(今上踐祚後十二年癸卯 凡三千六百十六年也 歲十月三日 紅杏村臾 書 于江都之海雲堂).   [무진기원설-단군기원설]의 본격적인 표현인 <단군세기>는 <이암>이 겪어오면서 통탄한 시대의 고민과 심정을 짐작할만하다.   즉 [단군기원설]은 고려의 북진책과 교감을 얻고 있었다.   이 둘은 서로 교차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단군기원설]은 더욱 성장하여 고착되었고 <북진책>은 아쉽게도 좌절되었다.   <이암>은 거기에 결정적인 한 획을 긋는다.   그것이 바로 <단군세기>이다.   이런 모든 유전사서(遺傳史書)들을 하나로 묶은 [환단고기]의 진가(眞價)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우리 고대사기록으로 가장 중요한 문헌이라면 [고기]이고 전하여 내려오지 않았다.   다만 여러 인용 史書들에 편린이 남아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삼국사기>에도 채록되었지만 著者가 직접 인용하였는지는 여전한 의문이다.   그들은 삼국 이전 역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고기]의 대부분은 그런 역사 기록이었기에 그들에게 유용한 사료로 그리 애용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   이미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던 문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구삼국사]이다.   따라서 그걸 충분한 자료로 삼았고 삭감이야말로 가장 필요조건이었다.





- 이규보는 말한다.  <김공부식중찬국사 파략기사의 金公富軾重撰國史 頗略其事意-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全集 고율시古律詩 동명왕편 뱡서幷書>  





삼국사기의 著者가 생략해버린 것들은 <구삼국사>가 기술하고 있는 <이규보>식 용어로 말하건대 “일상과는 크게 다른 사실 大異之事”였으며 그 내용은 그저 평범한 게 아닌 필자(筆者)가 앞서 비교문헌적으로 들추어낸 우리 민족사서의 비범(非凡)한 기록들이었다.





이러한 비범한 기록들을 처음으로 역사에서 배제한 이는 공자(公子)와 그의 시대였다(자불어 괴력난신 子不語 怪力亂神-논어 권4 술이述而 제7).   이걸 저들이 말하는 유가적(儒家的) 합리주의라 한다면 우리나라 史書에 유가적 합리주의를 가장 먼저 실현한 저작이 <삼국사기>라 볼 것이다.   때문에 <이규보>도 처음엔 이런 합리주의에 흠뻑 빠졌던 듯하다.





     - 세다설동명왕신이지사...복상문지 소왈 “선사중니 불어괴*력*난*신 차실황당기궤지사 비어조소설 世多說東明王神異之事...僕嘗聞之 笑曰 “先師仲尼不語怪*力*亂*神 此實荒唐奇詭之事 非吾曺所說(동국이상국전집 권3 고율시 동명왕편 병서) 라 하며 동명왕 설화를 그저 웃어넘긴다.





그가 <구삼국사>를 읽게 된 때가 26살인 명종(明宗) 23년 4월(AD 1193)이었고 그로부터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그의 사상적 전환은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저작인 <동명왕편>을 필두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찬술되었음은  그를 정점으로 한 당시의 정서적 분위기를 짐작케 해준다.   실제로 이규보(AD 1168-AD 1241)*김일연(AD 1206-AD 1289)*이승휴(AD 1224-AD 1300)의 생몰년대는 사슬처럼 이어져 있다.





     - 급삼복탐미점섭기원 비환야 내성야 비귀야 내신야 及三復耽味 漸涉其源 非幻也 乃聖也 非鬼也 乃神也(동국이상국전집 권3 고율시 동명왕편 병서)





<이규보>의 사상적 변화의 종점을 <일연>은 그의 역사의식 형성의 기점으로 받아들였다.   일연은 <삼국유사> 서문序文에서 이규보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평범을 넘어선 비범의 영역인정-그걸 인식해야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의 이해-이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관-지속적인 관심과 수용이라는 우리 민족 역사에 대한 사유(思惟)의 단초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 대저 고지성인방기예악흥방 인의설교 칙괴*력*난*신재소불어 연이 제왕지장흥야...필유이어인자 연후 능승대변 악대기 성대업야 大抵 古之聖人方其禮樂興邦 仁義設敎 則怪*力*亂*神在所不語 然而 帝王之將興也...必有異於人者 然後 能乘大變 握大器 成大業也   무릇 옛날 성인들이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시고인의로 교화를 펴실 때에는 괴력난신을 말한 일이 없다.   그러나 새로운 임금이 나실 때는 하늘이 주신 표시가 반드시 있어서 여느 사람과 다르셨다.   그런 후에 큰 변이 있는 때를 타고 새 나라를 세우는 큰일을 이룩하셨다.   (삼국유사 紀異 제2)





<일연>의 태도는 확고한 듯 보인다.   물론 불가적(佛家的)인 윤색은 논외로 한다.   이를 [유사적 관심遺事的 觀心]이라 칭한다면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 처음으로 문을 열었고 <삼국유사>에 이르러 그 전형을 이루었으며 <제왕운기>로 계승되는 점이 주목된다.   아울러 이러한 역사적 입장은 우리 민족 사서류(史書類)에서는 공통적으로 그리고 오래 전부터 일관성 있게 지속되어온 사조(思潮)였다.





     - 연칙 삼국지시조 개발호신이 하족괴재? 차기이지소이점제편야 의재소언 然則 三國之始祖 皆發乎神異 何足怪哉? 此紀異之所以漸諸篇也 意在所焉우리 민족이 세운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기하게 나셨다는 이야기도 별다른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과 달라서 신기하게 나셨다는 뜻이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2)





이 글의 대미(大尾)를 장식할 [유사적 관심]의 사유체계(思惟體系)와 사상의 영역은 [유가적 합리주의]보다는 훨씬 관대하고 기름지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넓은 이해라는 새로운 역사관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진실한 역사의 맥을 찾아낼 수 있다.   후세의 불도승(佛道僧)들이건 스스로의 불교적 윤색이건 간에 그런 부분을 제외시키고 남은 대목에서 <김일연>이 말하고자 한 <삼국유사 기이 권1 고조선>이 가진 의미와 진실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일연>이 인용하고자 했던 [고기]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시각에서는 황당한 언어로 엉성하게 짜여진 그물이었다.   그 속에 담긴 비법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그걸 곧이곧대로 인정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단군전후사]를 두고 오늘날까지 한편에서는 단지 神話라는 단어로서 그걸 못 박고 철저히 역사의 범위에서 배제시켜 왔다.   그러면서 이해할 수 있는 한도에서만 역사로 환원하여 왔다.





그걸 가능케 한 고집은 실증적 세계관을 매개로 삼은 논리학과 과학이다.   그래서 한계는 늘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증명할 수 없는 부분은 전혀 아니 아예 그걸 모르고 덮어둔다.   증명할 수 없는 대목은 전혀 없는 것이라고 말하나 오히려 영원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요구해오는 탐구해야만 할 현실이요 사명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지금 절실한 것은 보다 풍부하고 관대한 사유(思惟)와 드넓은 사상적 포용이다.   그렇다고 실증적인 세계관을 포기할 까닭도 없지만 그러나 오늘날의 첨예한 역사전쟁의 국면에서는 오직 그것만으로써 모든 걸 맞추어 놓고 자만해야만할 여유가 없다.   우린 지금도 배고프며 또 나아가야 할 길이 멀어 한가하게 걸어갈 시간이 없다.










앵무새죽이기 태그저장  취소 구독하기

구독하기를 클릭해 보세요!이웃을 맺은 후 네이버me 메인에서

이웃의 새글을 보실수 있어요 덧글 쓰기  엮인글 1개  공감  

 

  


  

 【앵무새 죽이기】이유립, 환단고기를 주무르다 3 - 가림토의 진실......반론  궤변망상학의 알량한 떡밥  2009/07/16 22:01


 http://blog.naver.com/nero1003/70054413169






【앵무새 죽이기】이유립, 환단고기를 주무르다 3 - 가림토의 진실......반론





[앵무새 주장]





이른바 가림토(加臨土)라 불리는 고대 문자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환단고기]에 전해집니다.   먼저 해당 부분을 감상하도록 합시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3세 단군 가륵(嘉勒) 2년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경자(庚子) 2년 당시 시속(時俗)이 한결같지 않아서 지방마다 말이 다르니 비록 상형과 표의로 된 진서(眞書)가 있었지만 열 가구의 마을에서도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았고 백리의 나라에서 글자를 서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삼랑 을보륵(三郞 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게 하여 이것이 가림토(加臨土)가 되었다】





그런데 불필요해 보일 수 있지만 단군 가륵 3년 조도 읽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신축辛丑 3년에 신지神誌 고설高契에게 명하여 배달유기倍達留記를 편수하게 했다】





이 대목은 실은 이유립이 [단기고사]를 보고 만든 것입니다.   단기고사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황당무계한 내용이 지나치게 많아서 위서 논란조차 일지 않는 책입니다......그럼 단기고사엔 위 대목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년 봄에 을보륵 박사에게 국문정음國文正音을 정선하도록 하였다.  백악마한촌白岳馬韓村에 고비문古碑文이 있다】


       【3년 가을에 태수관太修官 고설高契에게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고 산수가림다刪修加臨多라 하니 이것이 동양사학의 원조로서 신계성훈神誡聖訓과 칙교유서勅敎諭書와 도덕*정치*법률*풍속등이 모두 이 책에 실려 있다.   야발野勃이 한문漢文으로 간행하였다】





본래 가림토의 원형이 된 말은 “고설이 만든 산수가림다”라는 책 제목이었던 것이죠.   여기서 가림다를 떼어서 가림토라 만들어 놓으니 고설이 만든 책 제목이 필요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배달유기]라는 말을 하나 만들어서  적어 놓은 것입니다.  








[반론]





사실 [우서雨書*하서花書]등과 같이 동이계(東夷系) 傳來의 문자나 비슷한 경로로 지나(支那)와 같은 여러 지역에 퍼진 결승문자結繩文字*상형문자象形文字*설형문자楔形文字처럼 각 지방에서 오랜 초기 문자와 새롭게 다듬어진 글자체계들이 상호 유입*혼합되어 있는 현상들이 많아 혼란을 초래하였음은 아래 예시(例示)의 여러 문자의 발달과 전파 형태를 보아도 미루어 짐작케 합니다.





      - 환웅(桓雄)의 천부인(天符印)에 새겨진 부도문(符圖文)*연토관삭(煉土貫索)과 은 갑골문(殷 甲骨文)의 시원(始原)이 된 골각문(骨角文)


      - 신시(神市) 시대의 산목(算木)과 녹서(鹿書)*복희(伏羲)의 용서(龍書)


      - 창힐의 부도문(符圖文)과 치우(蚩尤)의 화서(花書)와 투전목(鬪佃目)


      - 자부선생의 우서(雨書)*신인 단군(神人 檀君) 때의 신전(神篆)


      - 가륵(嘉勒) 단군(檀君) 때의 상형표의문(象形表意文)과 가림토(加臨土)





<가륵> 단군은 이를 보고 걱정한 것이지요.   그런 까닭으로 비록 환국(桓國) 시기에 [녹도문鹿圖文]이란 걸 만들었지만 이 같은 문제를 속 시원하게 풀어내지는 못한 듯합니다.   즉 많이 통용되고는 있었지만 여러 신구(新舊) 문자체계의 간극(間隙- 즉 제대로 뜻을 풀어내거나 말을 정확히 전달하거나 하는 문제들)을 꿰뚫는 역할이 부족하여 아직도 서로간의 의사소통에 적지 않은 혼란이 발생되었습니다.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단군 가륵]이 힘을 쏟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 경자(庚子) 2년 당시 시속(時俗)이 한결같지 않아서 지방마다 말이 다르니 비록 상형(象形)과 표의(表意)로 된 진서(眞書)가 있었지만(여기에서 앞서 말한 대로 이미 우리 민족 고유의 전래 문자가 발달되어 있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열 가구의 마을에서도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았고 백리의 나라에서 글자를 서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삼랑 을보륵(三郞 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게 하여 이것이 가림토(加臨土)가 되었다





       ▶ 환웅천왕(桓雄天王)께서는 신지 혁덕(神智 赫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셨다......다만 목소리에 의존했을 뿐 문자로 기록하여 남기는 방법은 없었다......어느 날 사냥을 나가 튀는 사슴을 보고 쏘려했으나 종적을 놓치고 말았다......평평한 모래밭에 이르러 비로소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어지러이 흩어져 연결되었으나 향한 곳은 절로 확실하였다......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방법은 다만 이것 뿐 이리라.   기록해 남기는 방법은 다만 이것 뿐 이리라>......사냥을 끝내고 와서 되풀이하여 깊이 생각하고 널리 만물의 모양을 관찰하여 오래지않아서 처음으로 문자를 만드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태고문자의 시작이라 한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상기(上記)와 같은 문제점을 원만히 해결하려는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빛나는 지혜가 돋보이는 업적이 바로 [말의 뜻을 가리고 사물의 의미를 구분하여 보다 명확히 해주는 글과 토씨]로서의 [가림다-가림토]라 하겠습니다.   이 글자가 만들어졌을 때 붙인 이름의 의미가 무엇을 말하며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를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문자체계에서 또 하나의 혁신(革新)을 이룬 [가림토]는 연연히 유전遺傳*발전되어 오면서 부여(夫餘)글자에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고 고구려와 발해 초엽에도 이 글자체계로 기록되거나 문헌 편찬이 이루어졌음은 나중에 <야발野勃이 한문漢文으로 간행하였다. 라는 예시例示처럼 이를 한문漢文으로 개찬改撰하였다>는 사실기록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걸 보아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일부러 새로 만들어진 글자에다가 <가림다>나 <가림토>라는 우리말을 그대로 쓴 명칭(名稱)을 붙인 의도가 나타납니다.  





     1) 우리말은 <교착어膠着語>이다.   따라서 반드시 <토씨>가 따라붙어 전달하려는 의미를 완성시킨다.   후기(後期)에 들어 [가림토]를 차용(借用)한 훈민정음을 만들 때에도 그 목적을 <우리말은 중국과 달라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그 뜻을 따르지 못한다>는 이유를 분명히 하고 있는 까닭이 좋은 증좌(證左)가 된다.   그리고 이는 <가륵> 단군의 [가림토] 창제 이유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2) 분명히 참글(眞書)이 있었음에도 새로이 <가림토>를 만들 이유가 있었다.   이는 다른 지방의 말을 해석하거나 뜻을 바르게 할 때 우리말(膠着語)에 맞는 발음과 해석체계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경우가 우리 역사에서 여러 번 나타나는데 단군 <가륵>의 正音 38자-설총의 이두-세종대왕의 말글 28자가 바로 교착어(膠着語)인 한글의 우수성을 완벽하게 완성해가는 발전과정의 산물(産物)들이다.





       ▶ 10월초 친히 말글 28자를 정하시니 그 글자는 옛 전자(篆字-가림토를 의미하는 인상이 짙다)를 모방하였다.   十月上 親製言文28字 其字倣古篆 십월상 친제언문28자 기자방고전   <세종실록 계해 25년 12월 조>





     3) 정음(正音) 38자의 명칭도 의미심장하다.   구태여 “일과 사물을 분별 한다”는 [가림]과 “사물이나 일의 뜻을 분명하게 해 준다”는 [토]를 결합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자형(字形)이나 용례(用例)도 아주 독특하고 과학적이며 우리말 소리 값을 대부분 소화할 만큼 매우 합리적인 구조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4) 마침내 <가륵> 단군이후 그 전에는 외방(外邦)이나 내부(內部)에서 종종 나타나던 기존 문자사용에 대한 어려움과 불평이 전혀 없어진 상황으로 보아 유례없이 막중한 기능을 한 문자체계임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이 부분은 앞으로 더욱 깊은 분석과 탐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세계(世界)의 여러 상고문명(上古文明)이나 문자 탄생 초기의 원형(原形)을 보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데 거의 부호(符號)와 거친 상형(象形) 수준이었습니다.   이를 도외시하고 엉뚱한 트집만 찾는다면 정말로 문자의 출현과 역사적 발전 과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예 알지도 못하는 까막눈 수준이라는 걸 스스로 드러내는 소치입니다.  조금만 주의 깊은 태도로 분석해보고 한 발짝만 깊이 있게 비교언어학적으로 접근하는 연구자세로 임한다면 금방 <우리 민족은 이미 초기 문자 발현 단계를 넘어 그런 수준에서의 불합리성을 제대로 간파하고 말의 뜻과 사물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어주는 토씨체계까지 생각하여 정형화시키고 있는 문자 발전 과정에서의 도약跳躍 수준에 들어서고 있다는 뚜렷한 증좌證左에 다름이 아니다>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경망함의 극치였음을 충분히 자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수가림다]를 언급한 부분을 다른 기록들과 견주어 세밀하게 살펴보면 바로 여기에서도 위에서 언급한 부분들이 좀 더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앵무새] 이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하고 뱀의 꼬리를 잡는 실수를 저질러 스스로 제 손목을 물리고 말았습니다.   자세히 설명해 주겠습니다.





       1) 옛글자들의 뜻을 서로 잘 알아차릴 수 있게 만들고 말과 사물의 의미를 서로 간결하게 통하게 하는[가리고 이어주는] 새로운 문자체계가 [가림토]라는 것이 증명된다.





       2) 기록에 나온 그대로 <국문정음國文正音>에 의거하여 처음으로 국사(國史)를 편찬하면서 가장 중요한 [국정운영國政運營과 통치이념의 전파 그리고 백성교화百姓敎化]를 위한 편찬사업을 아울러 하고 있다.   잘 아시겠지만 이러한 일은 국가적인 사업이다.   따라서 그 내용의 구성이나 수록체계 속에는 그 시대의 모든 정황들이 녹아 있으며 민족과 국가 창업의 유래나 국정운영의 도리(道理)를 비롯하여 통치자의 구현의지나 국사(國事)의 정당성 등을 나라 전역에서 분명히 이해하고 따르게 하려는 의도가 깊숙이 존재한다.  





          아울러 그 무렵의 습속과 생활 양태들이 망라된 형식들은 이런 과정에서만이 유일하게 이루어진다.   이런 작업 속에서 [가림토]의 창제(創製)로 더욱 짜임새 있게 된 우리 문자체계를 기반으로 하여 비로소 민족의 발현과 역사의 맥락은 물론 나라의 창시(創始)와 근본적인 통치이념 그리고 국가경영과 백성들의 교화 방식 등이 고스란히 집적되어있을 국가적 사업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매우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3) 그런데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우리 문자체계의 보완으로서 [가림토] 창제(創製) 의도와 [민족과 나라역사 및 통치철학]을 완벽하게 이해시킬 수 있는 단군의 의지와 부합된 [국사國史]로서 [배달유기倍達留記] 또 하나의 별책(別冊)으로는 [산수가림다刪修加臨多]가 탄생되었다(필자의 생각이다).


 


      4) 아래에 언급한 <산수가림다>라는 서책(書冊)의 성격상 의미를 확실하게 하고 내용 설명을 풍부하게 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새로 완성된 [가림토]의 활용(말미末尾의 예시에서 보다시피 가림다는 가륵 2년 조이고 산수가림다는 그걸 이용하여 3년 조에 찬술撰述한다) 이 불가피했을 것이다(산수刪修의 의미도 잘 다스려 깎아 고치고 가다듬는다. 란 뜻으로 원原 저서著書를 보다 풍부하면서도 간결하게 만들어주는 편찬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편찬해 놓고 보니 가히 표본이 될 만하므로 저서명(著書名)에서 <가림토>의 효용성에 대한 진가(眞價)를 알게 되었음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가림다]라는 文句를 삽입하여 <가륵> 단군의 업적을 기린 정황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 이런 예는 드물지 않다.   歷史 이전이나 초기 단계에서는 처음으로 무엇을 만든 후에 일정한 명칭(名稱)을 붙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가 그걸 활용하여 일정한 계기를 만들어 뚜렷한 표본이 되어가거나 일반적으로 범용(汎用)되어갈 경향이 짙어갈 즈음에 그렇게 된 사건이나 현상을 따라 고정된 개념으로 의제(擬制)되어 칭해지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이런 경우는 국책사업(國策事業)이라고 할만한 [국사國史]와 [산수가림다] 편찬이 가히 모범이 될 만한 평판을 받았거나 의도대로 훌륭한 역할을 소화하였기에 [가림토]의 효용성이 한층 굳어진 결과라고 보여 진다.





     ※ 필자는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지고 이 문제를 풀었다.   동일 인물의 행적에 대해 두 문헌을 비교하여 모자란 부분을 보충하여 보면 신지 고설(神誌 高契)은 분명히 [國史-正史]를 神誌 발리는 [비사秘史-보충사적補充史籍]를 지었음이 드러난다.   바로 <국사國史>와 <배달유기倍達留記> 그리고 <비사秘史>와 <산수가림다刪水加臨多>가 묘하게 대칭(對稱)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왜 구태여 [배달유기倍達留記]가 아닌 [산수가림다刪水加臨多]라는 별도의 제명(題名)을 붙인 책이 <신지비사神誌秘史>와 나란히 등장하는 지 조금은 이해가 갈 듯하다.





    ▶ 이것(산수가림다)이 동양사학(東洋史學)의 원조(元祖)로서 신계성훈神誡聖訓과 칙교유서勅敎諭書와 도덕*정치*법률*풍속 등이 모두 이 책에 실려 있다. 





따라서 [앵무새]가 주장한 【본래 가림토의 원형原形이 된 말은 “고설高契이 만든 산수가림다”라는 책 제목이었던 것이죠】란 의미가 뒤집어보면 진정으로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는지 더욱 명확하고 제대로 이해되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덧붙여 이 부분에서도 우리 도가사서(道家史書)인 [환단고기]와 [단군세기]의 사실성이 오히려 돋보이는 군요.





      1) 두 문헌은 모두 따로 원전(原典)들을 가지고 있으며 입수(入手) 경로가 다르다.   그러므로 전혀 다를 수도 있는 인용문구들 중에서 내용들을 서로 합치면 완벽한 하나의 얼개(構成구성)로 이루어지면서 원인과 결과 또는 [가림토]를 중심으로 하나의 수미일관(首尾一貫)한 선후관계를 만든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2) 또한 과감히 추정해 본다면 발해(渤海)로 흘러들어간 원 저본(原 底本)과 한반도로 전해지면서 [환단고기]를 이룬 원전(原典)들이 다른 과정을 거쳤지만 기본 흐름과 맥은 동일하며 다만 전래과정에서 더 많은 험로(險路)를 거친 [환단고기] 저본(底本)들이 완전한 형태를 이루지 못하고 편린(片鱗)으로 채록(採錄)되었음을 바로 [앵무새]가 제시한 근거 기록을 통하여 명백히 밝혀지고 있다.





□  두 사서(史書)의 정합성(整合性)





【단군세기】  國文正音      박사 乙普勒        嘉勒 2년 조


【환단고기】   正音 38字     三郞 乙普勒        嘉勒 2년 조





【단군세기】   國史編纂     太修官 高契         嘉勒 3년 조


【환단고기】   倍達留記     神誌   高契         嘉勒 3년 조





【단군세기】   國史名   刪修加臨多              嘉勒 3년 조


【환단고기】   正音 38자가 加臨土가 되었다.     嘉勒 2년 조








[앵무새 주장]





그런데 이쯤에서 이런 반론을 할 분이 있을 것입니다.   단기고사가 환단고기를 베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우선 환단고기는 1979년에 나왔다는 것을 아무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신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유립은 1920년에 [환단고기]를 계연수한테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을 60년이 지난 뒤에 공개하라고 당부 받았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우리가 1-2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전부터 자기 글에 [환단고기] 안의 내용을 공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 내용이 공개된 환단고기와 다르다는 황당한 사실도 이미 1-2편을 통해서 확인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73년에 이유립이 쓴 [세계문명동원론]에도 [환단고기]의 구절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조차도 1976년에 공개한 내용과 다릅니다(1973년에 공개된 부분은 “망량의 상자  클릭”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소시모리의 “리”자가 환단고기와 다르며 갑자도 적혀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빠지게 되는 문구도 적혀 있습니다)








[반론]





글의 서두(序頭)에 나오는 【그런데 이쯤에서 이런 반론을 할 분이 있을 것입니다.   단기고사가 환단고기를 베꼈을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이야기를 듣자니 그야말로 허탈한 웃음만 나오는군요.   두 도가사서(道家史書)의 원 저본(原 底本)은 같지만 전래(傳來)나 출현 경로가 다르다는 걸 알고 있는 분들은 결코 그렇게 자로 딱 재듯이 분리해서 어느 게 어느 것을 베꼈다든지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두 문헌들이 처음부터 위서(僞書)라고 미리 억단(臆斷)하고픈 사람들한테나 떠오르는 추측일 뿐이고 그래서 다람쥐가 무엇도 모르고 자기만 현명한 척 체 바퀴만 돌리는 말작난일 뿐입니다. 





그리고 전제(前提)가 처음부터 틀렸군요.   본인(本人) 스스로 말했듯이 【환단고기가 (처음) 1979년에 나왔다는 것을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실】은 정확하게 짚어주셨네요.   왜냐하면 원전들이 전해져 내려왔으며 필사도 1920년대이니까요】는 정확하게 짚어주셨네요.   그리고 <이유립> 선생이 <계연수>님에게 받은 다음 이를 공개 시점에 앞서 원본(原本)으로 덜컥 내놓았습니까?   주장하시는 대로 관심 있던 사람들이 다수 접하는 논문기고를 통해 그 내용에 대한 해설을 부분 부분 발표했던 것입니다. 





이는 어느 누구라도 당연히 그랬을 법하며 지금도 우리들이 자주 접하는 현상이기에 결코 이상하지 않은 일을 의도적으로 원본(原本) 공개라는 사실과 마구 뒤섞어 논점을 흐리게 만드는 군요.   또한 필자(筆者)도 앞선 1-2편에 대한 반론에서 미리 발표된 내용의 흐름이 추후 공개된 [환단고기]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명백한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다음에 언급한 【뿐만 아니라 1973년에 이유립이 쓴 [세계문명동원론]에도 [환단고기]의 구절이 공개되어 있습니다......소시모리의 “리”자가 환단고기와 다르며 갑자도 적혀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빠지게 되는 문구도 적혀 있습니다】부분에 대해서는 앞선 반론에서 충분히 설명하였으니 일고(一考)의 가치조차 없다는 점만 첨언(添言)합니다.   하기야 일본사서(日本史書)에 적힌 [리梨]와 순수한 우리말 음가(音價) 표현인 [리犁]도 구분 못하여 꼭 남의 글을 확인도 않고 인용한 듯한 정황으로서는......흐음!!!!!!








[앵무새 주장]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 구요?   그런데 가림토의 경우도 이렇게 되어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유립은 1920년대에 [환단고기]를 전해 받았고 달달 외워서 책을 잃은 뒤에도 암기로 복원할 수 있었다고 주장할 만큼 내용을 다 꿰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가림토가 무엇인지 모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유립은 1976년 월간 [자유] 5월호에서 가림토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단 말이죠.  





       【태백유사太白遺史에는 훈육지조獯陸之祖에 유모수람자有慕漱覽者하야 전봉천신傳奉天神...기속其俗이 지맹鷙猛하야 선수렵善狩獵하고 연토관삭煉土貫索으로 위신爲信하니 시명始名 가림토加臨土라...하략】





훈(獯)으로 말하자면 [자유]지에서 아예 없는 글자를 새로 만들어 놓기도 했더군요.   犭을 扌로 잘못 읽어서 글자를 짜깁기해 놓았더군요.   훈육은 훈육(獯鬻)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흉노를 뜻합니다.   즉 흉노의 조상 중에 모수람이란 자가 있어서(이 이름은 해모수를 연상시키는군요) 천신을 섬겼으며 풍속이 맹렬하고 사나우며 수렵을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흙을 굽고 밧줄을 꿰어서 신표로 삼으니 이것의 이름을 가림토라 하였다는 뜻입니다.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연토관삭煉土貫索으로 위신爲信하니 시명始名 가림토加臨土라.


흙을 굽고 밧줄을 꿰어서 신표로 삼으니 이것의 이름이 가림토라.





아니 이럴 수가!   가림토는 3세 단군 가륵께서 만드신 정음 38자가 아니었단 말입니까?   더구나 1976년 월간 [자유]에는 [환단고기] 단군세기 3세 가륵의 기록이 버젓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립은 가림토를 가리켜 감히 [연토관삭]의 문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설명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환단고기]가 다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가림토라는 한글의 전신이 될 문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죠.   “연토관삭”하는 원시적인 문자 이름으로 “가림토”라는 이름을 떠 올렸을 뿐입니다.   이유립의 사고 체계에서 흉노족도 당연히 한민족의 일원이므로 이런 곳에 문자하나 만들어 주는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겠지요.








[반론]





훈육(葷粥)과 흉노(匈奴)는 같은 시대에 나타난 종족 명칭이 아니라는 걸 아예 인식조차 하지 못하니까 이런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는군요.   다시 말해 훈육(獯鬻)은 우리 민족 가운데 지나(支那) 지역으로 진출한 맥계(貊系) 선주(先住) 부족들을 화하인(華夏人)들이 시기에 따라 뭉뚱그려 부르던 명칭입니다.  





이들은 [훈육獯鬻*훈육葷粥*험윤獫狁(서주西周 괵계자백반虢季子白磐 청동기 명문銘文)-산융山戎-귀방鬼方(곤이昆夷=토방土方)*마방馬方(은殷 무정武丁의 복사卜辭와 주례周禮와 역경易經)-서융西戎(서쪽에 위치한 같은 갈래)*북적北狄*적적赤狄*백적白狄*장적長狄*북융北戎-북막北莫(우리 기록)]등으로 달라져가다가 마침내 진秦*한漢나라 때 강대한 통합세력으로 문득 일어서자 우리 민족의 한 갈래라는 걸 감추면서 교묘하게 분리시키려고 <사기>에서 비로소 [훙노匈奴]란 별칭(別稱)을 따로 붙여준 것입니다.   





이를 두고 <사기 흉노전>의 진작(晋灼)의 주(注)에서 요시왈堯時曰 훈육葷粥 주시왈周時曰 험윤獫狁 진시왈秦時曰 흉노匈奴라 하였지만 사실은 요(堯) 이전까지 포함해야 맞습니다.   아무튼 이번 단락부터는 라동현님*사와다 이사오님*김국님*문정창님*박병섭님의 저서(著書)에 제 의견을 종합하여 서술해나가겠습니다.





      - 흉노(匈奴)의 등장 이전에도 진하인(秦夏人)들은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데다가 매우 강성하기까지 한 많은 북방 이민족(異民族)들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예컨대 <사기 흉노열전>에서도 “당(唐-요堯)*우禹보다 이전 시대에도 산융山戎*험윤獫狁(험윤玁狁)*훈죽葷粥의 제족(諸族)들이 북방의 만지(蠻地)에 거주하고 있었다”라 한다.





      - 롱(隴)의 서쪽에 면저緜諸*곤융緄戎*적翟*원豲의 융戎이 기岐*양梁*경涇*칠漆의 북으로 의거義渠*대려大荔*오지烏氏*구연朐衍*구유仇猶의 戎이 진晋의 북쪽으로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이 연燕의 북으로 동호東胡와 산융山戎이 있다.   산곡(山谷)에 흩여져 각각의 군장(君長)이 통솔하는 100여개의 戎이 있었다.   <사기 흉노열전>





      - 이들 종족(種族)의 역사는 꽤 깊은 것으로 보이는데 동이계 맥족(貊族-밝은 씨들이라는 의미인 불족)인 염제(炎帝-붉은 임금*밝은 임금)를 보좌했다는 불의 神인 축융(祝融-戎族)의 존재로서 처음 등장한다(고구려 벽화에 신농神農이 그려진 사실은 북방계 맥족貊族의 출자出自로서 매우 의미심장하여 주목을 요한다).   이 계보(系譜)는 후일 제곡 고신(帝嚳 高辛) 때의 견융(犬戎)과 이어진다.





      - 우리의 기록에서도 동일한 맥락을 읽을 수 있는데 [규원사화 단군 조]에 <나라를 다스린 지 40여년에 알유猰貐의 난亂이 있었다>는 기록의 해석으로 <알유는 험윤獫狁의 족속이다>라고 흉노(匈奴)의 前 시기에 선주(先住)한 집단으로 단정해 준다.





【견융犬戎】원래 우리말로 <해-붉음*밝음>를 의미하는 <가*개>가 지나인(支那人)들에게 악의적으로 차음(借音)되어 <개 犬>로 달라졌다.   뒷날 등장하는 해족(奚族-고구려를 형성한 한 갈래一分枝)과도 연원이 깊다.





【알유猰貐】 환국(桓國) 시기에는 거의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한 겨레로서 순종하고 있었던듯하다.   하지만 단국(檀國)에 이르러 가끔 난(亂)을 일으키는데 아마도 환국(桓國)을 이은 신인(神人) 단군(檀君)에게 마음으로 승복하지 않다가 마침내 부여(夫餘)에 의해 평정되자 잠잠해진 걸 보면 그때부터 완전한 교화(敎化)가 이루어져 참뜻(眞意진의)을 알고 따른 느낌이 짙다.





이런 까닭으로 <이유립> 선생은 기고문에서 스스로 언급한 그 시대에 존재한 부족 명을 훈육(獯陸)이라고 명확히 구분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거의 비슷한 계통의 원 저본(原 底本)을 근거로 필사(筆寫)한 [규원사화 태시기太始記]에서 <염윤獫狁과 훈육獯鬻>이라 별칭(別稱)한 기록이 나타나는 것과도 동일한 맥락입니다.   





따라서 후대에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유래(由來)로 보아 약수(弱水)지역 맥족(貊族)들을 보듬어 안고 다스려 강한 부족으로 일어났다는 흉노(匈奴)의 중조(中祖)과는 혈연관계(血緣關係)은 있지만 엄격히 구별되는 선주(先住) 맥계(貊系) 동이부족(東夷部族)으로서 훈육(葷粥)의 시조(始祖)로서 추앙되는 [모수람]이라는 인물을 거론하는 태도가 분명합니다.  





어쩌면 이들 부족 가운데 단군 조(檀君朝)에서 외방(外邦)으로 봉(封)해진 색정(索靖)에 의해 다스려지면서 가장 일찍이 씨성(氏姓)의 통합을 이룩한 성씨(姓氏)들이 후일 강력한 세력으로 두드러져 나머지 부족들을 어우르면서 흉노(匈奴)란 이름(이 명칭名稱은 확실히 지나인支那人들의 한자漢字 차음借音이니 비슷한 우리말 부족명이 있었을 것이다)으로 북방의 강자(强者)로 새삼스럽게 떠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유립> 선생의 부연 설명 가운데 그런 의미가 들어있는 구절들이 눈에 뜨입니다.





      1) [훈육의 조상 중에...]란 대목에서 시기적으로 훈육이 흉노족의 선조부족이라는 느낌을 받게 하는 단정적(斷定的) 구문(句文)이 확실하게 보인다.





      2) [天神을 섬겼으며 풍속이 맹렬하고 사나우며 수렵을 좋아했다]는 두 부족 공통의 풍속과 우리 민족과 동일계임을 자명하게 밝혀주는 신앙체계를 알려주고 있다.





      3) [흙을 굽고 밧줄을 꿰어서 신표信標로 삼으니...]라 하여 이들에 의해 전래된 문자체계가 후에 지나(支那)를 거쳐 널리 퍼진 결승문자(結繩文字)의 단초였음을 더불어 알려주고 있는 대목이 나타난다.  





바로 그런 유래(由來)를 <이유립>선생이 그동안 섭렵하거나 습득한 많은 문헌과 경험적 지식을 통해 정확히 그리고 풍부하게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지 [훈육]에 출자(出自)를 두었다가 후세에 일정한 영역을 기반으로 두드러진 흉노(匈奴)란 이름으로 나타나는 부족과 이들의 시원적인 혈통인 맥계(貊系) 훈육(獯陸)부족 공동체를 혼동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 흉노(匈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기록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기(中期-BC 318)에 한韓*위衛*조趙*연燕*제齊 5개 나라가 연합해 진(秦)을 공격할 즈음 합세한 세력으로 나타나는데 참패로 끝난다.   <사기 진본기秦本紀>





      - 흉노(匈奴)가 스스로를 호(胡)라고 칭(稱)하였으며 진*한기(秦*漢期)의 한족(漢族)들도 호(胡)라 하며 명확히 자신들과 구분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동이족의 갈래임을 알 수 있는 바 [환단고기] 기록의 신빙성을 더해준다.   <호록고狐鹿姑 선우가 한무제漢武帝에게 보낸 편지>





     ※ 이제는 【모수람慕漱覽 이란 이름은 해모수解慕漱를 연상시키는 군요】라 하면서 독자들에게 은근히 그런 인물이 <이유립> 선생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인식을 부여하려고 애쓰는 듯한데 정말로 氏를 중요시하던 우리 민족의 풍습으로 인하여 역사 기록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이름이 뜻하는 바에 따라 중복되거나 비슷한 작명(作名)이 많다는 걸 모르고 그러는 건지?    부루계(부루*비류)*도리계(○○도리)*발기계 등과 같은 다른 여러 기록을 한번 살펴보았으면 한다.





이로 미루어볼진대 훈육(葷粥)이라 통칭되던 韓민족의 세 축(軸-예濊*맥貊*한韓) 가운데 하나인 맥계(貊系) 부족들은 당연히 환국桓國-단국檀國으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일원이니 거의 같은 구성체계의 언어나 초기에 발현되는 표기문자를 사용하였음은 당연합니다.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아직은 이를 세련되게 정형화(定型化)하거나 일정한 형식을 빌려 나타낼 수 없는 정황에서 나름대로 “연토관삭煉土貫索”하는 원시적인 문자 표기 형식을 사용했지만 그 속에 뜻하는 바는 동일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 발견됩니다.





       - 연토관삭(煉土貫索)으로 위신(爲信)하니...<이유립 기고문>


       - 경자(庚子) 2년 당시 시속(時俗)이 한결같지 않아서 지방마다 말이 다르니 비록 상형과 표의로 된 진서(眞書)가 있었지만 열 가구의 마을에서도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았고 백리의 나라에서 글자를 서로 이해할 수 없었다.   <단군 가륵 2년>





여기에서 [위신爲信]은 바로 초기 단계 사회에서 통용하던 생활습속으로 [서로 이해관계의 조정과 믿음의 증거 또는 약속이나 협의한 행위보증의 표기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시(例示)로 든 앞선 두 문장이 진정으로 말하고자하는 속뜻(의사 통용방식*사물 표기 형식)이 같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는 이 시기의 문자 표기 방식이 지극히 간결하고 소박하여 서로 소통하고자 하는 뜻이나 지시하고자 하는 사물의 의미를 이어주는 단순한 매개체로서 하나는 [연토관삭]을 다른 하나는 [고대 상형象形이나 고전자문古篆字文]를 이용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언어풀이방식>에서 전자(前者)의 경우가 후자(後者)인 이미 완성된 우리 고유문자의 결함과 부족을 채워주는 방법으로 만들어진 後日 [가림토]의 우리 말 보완*완성 형식에 대한 어떤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 만큼 서로 상통하는 면이 발견된다는 <이유립> 선생의 주장입니다.   다만 가림토는 이를 더욱 정교하고 명확하게 개선하였을 수도 있으니 그렇게 좋은 방식을 받아들여 차용(借用)한 유래를 설명한 것이지 그때부터 [가림토]라 하였다는 뜻이 아님을 일부러 첨가한 [시명始名-처음 비롯하다*시작하다*근본*근원]이라는 문구로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림토를 가리켜 감히 [연토관삭]의 문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든지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환단고기]가 다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가림토라는 한글의 전신이 될 문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죠.   “연토관삭”하는 원시적인 문자 이름으로 “가림토”라는 이름을 떠 올렸을 뿐입니다】든지 【이유립의 사고 체계에서 흉노족도 당연히 한민족의 일원이므로 이런 곳에 문자하나 만들어 주는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겠지요】라는 억측이나 야릇한 주장들은 우리 민족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역사발전과정을 전혀 무시하거나 경원시하는 [부일모화사관]으로서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자가당착입니다.  





마지막으로 아직도 미몽(迷夢)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부일모화사관]의 중독자 분들에게 과연 우리 민족에게 문자가 있었는지?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를 알려주는 여러 가지 단서들을 소개하면서 각성(覺性)을 촉구하기 위한 설명을 이어갈까 합니다.   먼저 아래의 기록을 보면서 우리는 몇 가지 분명한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 영양왕 11년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이 고사(古史)를 축약하여 신집5권(新集5卷)을 만들었다.   국초(國初)부터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어떤 사람이 국사(國史) 100권을 기술하였고 서명(書名)을 유기(留記)라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것을 산수(刪修)하였던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 고구려는 유기(留記)이라는 國史가 있었다.   이를 영양왕 때 산수(刪修)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었다.   따라서 유기(留記)가 고구려 왕조(王朝) 前 시대부터 빈번하게 기록(신지神誌 혁덕赫德 등의 역사 기술)하여 내려오던 사료를 집대성한 [배달유기]와 깊숙한 관련이 있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그 이유로서 왜 100권인지?   그래서 환국桓國부터의 서술이었음을 왕력王歷(환국桓國-단국檀國-고구려에 이르는 대수代數)을 이용해 계산한 부분은 앞서 설명한 바 있다)





2) [유기]가 존재하려면 이를 저술할 문자체계가 있어야 한다.   더구나 고구려는 국초부터 문자가 있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문자는 前 시대부터 익히 사용되어온 우리 고유문자(부도문*녹도문*신전神篆*가림토)들이었음을 추정케 한다.   이를 <이문진>이 漢字로 번역하여 산수(刪修)함으로서 [신집5권]이 되었다.





3) 원래 부도문*녹도문*신전으로 이어진 초기 문자체계는 상형象形*표의表意를 하는데 치중하여 다양한 교착어(膠着語-우리 말)의 의미를 자세히 전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가(巫歌)처럼 정확한 문자 해석은 구전(口傳)에 의한 보충 전승(傳承)에 의존하였는데 이를 [가림토]가 일거에 해결한 듯 보인다.





※ 사실 이 때문에 후세(後世)에 들어 이를 漢字로 번역 재편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부분이 잘못 인용되었거나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진 측면이 있다





       ▶ <이태백전서>의 <옥진총담>에는 “발해국에 글이 있는바 당나라에서는 아무도 이를 해독하는 자가 없었다.   이태백은 능히 이를 풀어 이에 대답했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1) 비근한 사례로 <갑골문甲骨文>은 그 완성도가 매우 높아서 이전에 어느 정도 발전과정을 거친 문자가 존재하였음을 유추케 한다.   아울러 <사기>의 기록은 <갑골문>이 나타난 상(商)나라 이전인 하(夏)나라부터 역사 기록을 시작한다.   이는 夏의 역사가 구전(口傳) 또는 어떻게든지 기록한 글자가 별도로 존재했음을 짐작케 한다.





2) 우리는 이런 과정을 더 일찍부터 진행해 왔으며 <부도문>의 형상자(形象字-천부*천부왕인*천부각경) 체계를 우리의 말소리 값에 알맞게 발전시켜 왔다.   이것들이 단군조선의 백수광부 妻의 노래를 기록한 곽리자고의 문자(삼국유사)-부여의 문자-고구려와 발해의 글자-말갈에서 신라로 전해진 나무패찰문자로 이어진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 한수(漢水) 사람 왕문(王文)이 이두법(吏讀法)을 지어 바치니 天王이 이를 가상히 여겨 三韓에 명하여 조치(詔勅)대로 시행토록 하였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1) [총*균*쇠]에서는 우리 민족이 漢字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기를 AD 1년으로 말한다.   이는 그동안 지나(支那) 민족과 교류가 없었거나 따로 문자가 불필요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대목인데 다양한 다른 사료를 통해 그 기간 동안 수없이 교류가 이루어졌음이 확인되므로 後者의 경우가 정확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2) 문자의 수용(受容)이 불필요하였다면 아직 야만의 상태이거나 고유의 문자를 가졌다는 추정이 가능한데 아래 기록을 통해 前者가 아님이 확인되니 당연히 우리 민족은 고유의 문자체계가 있었다.   이를 [환단고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가 다시금 입증해주고 있다.





       ▶ 우리나라의 문자는 예부터 있었는데 지금 남해면 낭하리(南海縣 浪河里)의 암벽에 신시(神市)의 옛 글자가 있다.


       ▶ 부여 사람 王文이 쓴 법류부의전(法類符擬篆)과 자부선생의 내문(內文)과 태자 부루의 五行은 모두 환桓*단檀시대에 나온 것이다......그렇다면 은학(殷學)과 漢文은 아마도 王文의 유범(遺範)일 것이다.


       ▶ 신시(神市)엔 산목(算木)이 치우(蚩尤)에겐 투전목(鬪佃目)이 부여(夫餘)엔 서산(書算)이 있었다......산목(算木)이라 하는 것은 1234567890이며 또 전목(佃目)은 1234567890이다.


       ▶ 단군 가륵(嘉勒) 2년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이 정음(正音) 38자를 찬(撰)하고 이를 가림다(加臨多)라고 했다 한다.   그 글을 보면 이렇다.


       ▶ 세상에 전하기를 “신시(神市)엔 녹서(鹿書)가 있고 자부에겐 우서(雨書)가 있으며 치우(蚩尤)에겐 화서(花書)가 있어 투전문등은 그 남은 흔적이다.   복희에겐 용서(龍書)가 있었고 단군에겐 신전(神篆)이 있었다.   이들 글자들은 널리 백산*흑수*청구*구려에서 쓰여졌다“고 하였다.   夫餘 사람 王文이 처음으로 전문(篆文)을 번거롭다 여겨 조금 그 획을 없애고 새로 <부예>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진(秦)나라 때 <정막>은 숙신에 사신으로 왔다가 <왕문의 예법>을 <한수>에서 얻었고 또 그 획을 계승하여 조금 바꾼 형으로 고쳤다.  그것이 지금의 <팔분>이다.   진(秦)나라의 <왕차중>은 또 <해서>를 만들었는데 그는 <왕문>의 먼 후예이다.   지금 글자의 근원으로 삼는 것을 탐구해보면 모두 신시(神市)에서 전해진 법이며 지금의 漢字도 그 지류(支流)를 계승한 것이 명백하다.





3) [가림토]는 [세로선*가로선*점 하나*점 두개]가 기본 요소이며 이로 미루어 음절문자(音節文字) 혹은 음소문자(音素文字)이다.   아울러 [가림토]는 뜻풀이나 가차(假借)로나 모두 [우리 원래 글자에 대해 각 부족마다 언어권이 갈려서 토(口訣구결)를 붙이는 가름의 토]라는 말이다.   따라서 원문자(原文字)를 보충해 주거나 의미를 명확히 해주는 글자로도 추측된다.





※ 문자의 구분에서 기호의 수가 40여개 이하는 음소문자(音素文字)*100-300개 정도면 음절문자(音節文字)*1000개 이상이면 표의문자(表意文字)로 분류하는 게 정설이다.








[앵무새 주장]





어쩌면 이런 반론을 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흉노족이 만든 원시적인 가림토가 단군 가륵 때 정음 38자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라고요.   안됐지만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환단고기] 3세 단군 가륵 6년 조에 이런 말이 있기 때문이죠.





【갑진 6년에 열양의 욕살 색정索靖에게 명하여 약수로 옮겨와 종신토록 가뒀다가 후에 사면하고 그 땅에 봉하였다.   그가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





흉노 시조가 이때서야 생겨나니 종족도 생기기 전에 문자가 생길 수는 없는 노릇인 거죠.   흉노 시조의 이름에 밧줄 삭(索)자를 써 놓은 것을 보면 이유립은 제법 유머감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과거 자신이 가림토에 연관하여 흉노에게 연토관삭이라고 썼던 것을 기억했던 모양입니다.   일단 문자 이름으로 “가림토”가 생겨나자 망상을 거듭한 끝에 우리나라 문자 이름으로 둔갑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쓴 글에서조차 일관성을 지키지 못하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요?   하긴 그 덕분에 우리가 이처럼 [환단고기]를 주물럭거리며 만들어진 내력을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일이겠지만......





그럼 간단하게 요약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유립은 1980년대 [환단고기]를 공개하라고 유언을 받았다고 했지만 이르게는 1973년부터 여기저기에 [환단고기] 내용을 흘리고 있습니다(1960년대에 환단유기라는 이름으로 만들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그리고 그 기록이 인용될 때마다 제각각이라는 점을 지금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오탈자 수준이 아니라 교열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지요.  





그런 와중에 개념이 뒤바뀌기도 일쑤였고 대표적으로 가림토가 흉노족 문자에서 단군이 만드신 문자로 둔갑하는 것도 이렇게 지켜 본 것입니다.   아직도 [환단고기]라는 책에 대해서 믿음이 가시는지요?   그리고 가림토 문자라는 게 정말 있는 것처럼 여겨지시는지요?








[반론]





참으로 어린애 같은 발상이로군요.   밧줄 삭(索)이라니?   그렇다면 [환단고기]에 그렇게 만들어 놓아서 <이유립> 선생이 유머감각을 살려 색정(索靖)으로 이름을 지었다면 다른 문헌에는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을까?   한번 살펴보자.   웬걸????   서로 다른 경로로 필사한 두 문헌을 비교해보아도 이름까지 틀리지 않는데 그렇다면 두 사람은 시대를 뛰어 넘어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 서로 입을 맞추기로 말다짐을 한 것인가?   이야말로 코메디가 따로 없다.





       - 요동태수(遼東太守) 색정(索靖)의 치적(治積)이 덕(德)스럽지 못하므로 임금께서 진노하시어 약수(弱水)로 유배시켰더니 나중에 흉노족(匈奴族)이 되었다.   <단기고사>





아무튼 이 사람은 일단 문자 이름으로 [가림토]가 출현하자 망상을 거듭한 끝에 사방에서 기록을 들추어가며 입맛에 맡는 근거 자료를 찾다 [연토관삭]이나 [색정]등 여러 가지 사료를 이리 저리 뜯어 모아 이상한 논리로 둔갑을 시키기에 이른 듯 보여집니다.   깊이 없는 연구 자세와 면밀한 비교 분석태도를 갖추지 못하고 오직 미리 맞추어 놓은 결론에 맞추기에 급급하다 보니 결국 수박 겉핥기식으로 코끼리의 다리만 만지면서 맴돌다 제 몸을 치어버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하긴 그 덕분에 필자도 이처럼 [환단고기]와 같은 도가사서(道家史書)들의 문헌적 비교나 분석에 있어서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필요한 부분에만 눈길을 주면서 주물럭거리며 억지 논리로 만들어진 내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가운데 우리 문헌의 진가성(眞價性)을 다시금 입증하게 되었으니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겠지만......나머지 읽어보아야 하품만 나오는 [요약 구절]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반론을 제시하기도 귀찮기도 하고 허무맹랑한 소리로 가득하니 아예 언급조차 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군요.







앵무새죽이기 태그저장  취소 구독하기

구독하기를 클릭해 보세요!이웃을 맺은 후 네이버me 메인에서

이웃의 새글을 보실수 있어요 덧글 쓰기  엮인글 쓰기  공감 2개  

 

  


  

 [앵무새죽이기]이유립 환단고기를 주무르다-2...[3]  궤변망상학의 알량한 떡밥  2009/07/12 15:22


 http://blog.naver.com/nero1003/70053321597









************* 니기 하야히노 미꼬도 饒速日命요속일명 ***********





<신찬성씨록>의 천신족(天神族)으로 북큐슈 야마다이국(邪馬臺國)의 후예이며 백제*가라지역 출자(出自)였던 니기 하야히노(饒速日) 집단이 혼슈우(本州)로 건너가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가 진무(神武-應神)에게 투항하여 동정(東征)의 전환국면을 만들어 준 결정적인 발판을 만들어 주었으며 후일 모노노베(物部氏물부씨)의 시조로 물부련(物部連)이 되었다.   <物=물=모라*무라계 지명>인 모씨족단(牟氏族團-모노노베의 이니셜도 ‘모노’를 지칭한다)으로 황별(皇別)은 모牟*모毛*미壬라 하고 皇別이 아닌 경우는 모씨(牟氏)를 은유한 모노노베(物部氏)라 하였다.   아마 이를 두고 <가지마노보루>가 倭를 평정했다는 우리 기록과 맞추어 <배반명>으로 비정한 모양인데 이는 어불성설이며 저들끼리도 여러 가지로 인물비정이 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임승국씨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일본서기>의 <니기 하야히노 미코도>를 <배반명>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진국(辰國)과 부여국의 조상이 된다”라고 저들의 인물 비정(比定)을 소개하고 있는 입장으로 보인다.


     - 뒤의 협보는 구마모또에 진출하여 다라국(多羅國)을 세우고 휴유가(日向)의 안라국(安羅國)과 연합하여 야마대국(邪馬臺國)을 세운 인물이다. 라 하여 구분지어 주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 단군 가륵조(嘉勒條)의 “그 후손에 협야노(陜野奴)라는 者가 海上에 웅거하여 삼도(三島)에 살면서 天王을 참칭하다 한 대목과 대응하는 부분이다”라고 구태여 언급하면서 앞 뒤 문맥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걸 애써 설명한 태도로 보아 보다 객관적인 입장을 지키려고 한 정황이 뚜렷하다.





참고로 나중에 백제 3대 王姓(해解*모牟*여餘) 가운데 하나가 된 모씨(牟氏)는 씨성(氏姓)의 유래가 깊다.   환국(桓國)-단국(檀國)으로 이어오는 과정에서 지나(支那)의 동부 해안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떨친 예맥족(濊貊族)에 근원을 두고 있다.





□ 집단의 이동경로





     ▶ 天神 아마데라스오오미카미(仟照大神천조대신)가 天孫 니니기노미코도(瓊瓊杵尊경경저존)를 파견하면서 “500번을 추수할 갓벌의 서수국은 나의 자손이 다스릴 고장이니 황손(皇孫)이여! 그곳의 왕이 되라”하였다  <일본서기 신대기 하 제 9단 1서>


     ▶ 황손(皇孫)이 천강(天降)한 히무카소(日向襲일향습)의 고천원봉(高天原峯)은 쿠마소국(熊襲國웅습국)이 있던 동남 큐슈의 미와자키현으로서 이 나라가 야마대국과 대립했던 왜인전(倭人傳)의 구노국(拘奴國)이다.   <일본서기 하 제 9단 본문>


     ▶ 天忍日(대반련의 원조)과 천환진(내목부의 원조)이 히무카소의 고천원봉에 있는......여육의 공국(膂肉之空國)에서 키나이(畿內기내)로 갔다.   <일본서기 제9단 1서 4단>


     ▶ 주우아이(仲哀중애)가 쿠마소(熊襲웅습)를 공격하려 하자 天神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왕이여 어찌 쿠마소가 복종하지 않는 것을 걱정 하는가?   그 나라는 고굉의 가라국인데 어째서 병력으로 정벌하려 한단 말인가”라고 계시를 내리었다.   <일본서기 중애 8년 9월조>





여육膂肉=고굉股肱 즉 심복의 뜻이고 공국空國=가라쿠니(무나쿠니로도 읽으나 이는 속뜻을 감추기 위한 장치로 가라韓를 가라唐로 바꾼 것과 마찬가지이다)로 발음된 [가라국]으로서 후일 천황가(天皇家)에 협력한 <고굉의 가라국>이란 곧 반도에서 현해탄을 건너간 가라 족단(왜지倭地에 이들의 특징인 전방후원분을 광범위하게 남겼다)으로 이들이 원래 북큐우슈우(北九州북구주)에 정착했는데 이곳에 야마대국이 성립하자 동남 큐슈의 쿠마소(熊襲웅습)에 있다가 키나이(畿內기내)로 이동한 것을 알려준다.





     ▶ [카루베]는 倭의 히무카건(日向建일향건))으로서 히무카(八綱田命팔강전명)의 후예이다.   히무카건은 미야자키현의 히무카에 先住하다가 오사카 남쪽의 이즈미군(和泉郡) 一名 카리내향(加里乃鄕=가라족의 정착지)으로 이주했다.   <신찬성씨록 10 이즈미군조>





따라서 히무카(日向일향)는 가라족의 선주지(先住地)로 <일본서기>는 천손족(天孫族)인 오오진(應神응신)이 쿠마나리(熊津웅진)에서 망명한 것을 은폐하기 위해 “그의 조상인 天孫이......히무카소의 고천수봉(高天穗峯)에 天降했다”라고 만들고 이에 따라 이곳에 先住했던 원래 天孫族이 아닌 가라족을 天孫族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북규우슈우(北九州)를 先住地로 그곳의 天神들을 先祖로 하는 族團들





3-4세기경까지 북큐우슈우에 先住하여 <야마다이> 왕조를 지탱한 집단으로서 5세기까지 그곳에서 거주하며 神武(應神) 출현 무렵에도 여전히 웅거한 족단들이다.   이들은 후에 거의 神武의 왕조(王朝) 개창과 동정(東征)과정에 일조(一助)를 한다.





[하다족단]      니기 하야히노 미코도*다카미 무스비노 미코도  


[가츠라기족단*구메족단*고시족단]   다카미 무스비노 미코도


[야마토족단]                 시히 네츠히코  

[오야케족단]        츠하야 무스비노 미코도


[다카하시족단*오하리다족단*와카사쿠라베족단*히족단*마가미베족단*이마키족단*가츠라기족단*모노노베족단*야마모리족단*누가다족단*도미족단*구라하시베족단*가도노족단]              니기 하야히노 미코도


[구사카베족단]       니기 하야히노 미코도*호노 스세리노 미코도


[야마족단*오하리베족단*다치히족단]          호아카리노 미코도


[사카히베족단]          호아카리노 미코도*호노 스세리노 미코도


[요사미족단]            니기 하야히노 미코도*호아카리노 미코도


[미부족단]            다카미 무스비노 미코도*호아카리노 미코도





이들은 神武의 東征이전인 4-5세기경에는 기나이(畿內기내) 일부지역에 진출하고 있었다.   대개 백제(하다*소가*하야시*기*야마토*소노베*마노*오사*요사미족단 등)-가라계(가라야타베*가라야마베족단)족단으로서 일부 신라계(미야케족단)와 고구려계(야마토*구와바라*히오키*나니와 족단)도 있었다.





□ 신무 동정(神武 東征) 과정에서 나타나는 [니기 하야히노 미꼬도]의 위상(位相)





       ▶ 신무(神武)는 여러 형과 아들들에게(이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사실은 그를 따른 지배집단의 장군가將軍家를 의미하는 듯 하다) 말하기를 옛날 우리 天神인 고황산영존高皇産靈尊*대일령존大日(위霝아래女)尊-천조대신天照大神)은 우리의 천조(天祖)인 언화경경저존(彦火瓊瓊杵尊-숭신천황)에게 풍위원서수국(豊葦原瑞穗國-야마토의 기름진 갈대평원과 아름다운 벼 싹의 땅-여기에서도 풍豊이  우리말 가라가 원형임을 주의해야 한다)를 내려 주었다.   이에 황조(皇祖)는 천관(天關-하늘의 문)을 열고 구름길을 헤치며 神仙들의 길을 달려서 선필(仙蹕-귀인의 행차 때 길을 정리하기 위해 외치는 소리)을 울리며 이 땅에 이르렀다.   그 때는 태고의 홍황(鴻荒-크게 거칠어)으로 모든 것이 혼돈되고 미개하였으나 이곳은 우리의 하늘의 조상이신 <니니기>에게 내려주셨으므로 이들을 격파하며 계몽하여 어두움에서 바르게 이끌고 정의(正義)를 소중히 가꾸시고 바르게 잡아서 서편(西偏-기내의 서쪽인 편벽한 이곳 구주지역)을 다스렸으며 황조(皇祖) 황고(皇考)가 신성하시어 경사스러운 일만을 쌓으시고 오랫동안 선정(善政)을 베풀어 영광을 더하면서 여러 해를 지내셨다.   천조(天朝)가 래강(來降)한 것은 아득한 옛날이었다.   <호무다譽田別예전별-가미야마토 이하레비코新日本磐余彦尊신일본반여언존 즉 신무神武의 회고>





북구주에 상륙한 先住 도래인인 야마토 [담로부족-백제계]의 행적을 회고한 기록이다.   東征시 북구주의 백제와 가라계 집단을 이끌고 이동했으며 應神이 각록(角鹿)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고사기 중애편>에 무내숙례가 태자인 應神을 데리고 담해(淡海-현 자하현滋賀縣) 및 약해(若海-현 복정현福井縣 서남부)지방을 순행할 때 고지전(高志前-축전筑前)의 각록(角鹿)에서 임시궁(臨時宮)을 짓고 거주한 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 그렇지만 왕도(王都)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은 아직도 王의 혜택을 골고루 입지 못하여 邑마다 君이 있고 村마다 長이 있어서 그들은 서로 땅을 나누어 가지고 서로 싸우고 헐뜯기만을 일삼았다.   <회고 계속>





神武의 원년조 첫머리에 “멀고 먼 땅은 아직도 왕화를 입지 못하여 읍과 군과 마을의 장들이 서로 경계를 나누고 농락했다”라고 했는데 현해탄을 건너간 神武가 기억을 되살려 지난날의 야마대국(邪馬臺國)으로 가려고 북구주에 도달하니 나라는 이미 없어지고 황폐되어 이름 모를 邑君들과 君長들이 서로 난립하여 싸움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음을 말한 것이다.   야마토 왕조의 소멸 후 무정부 상태에 이르러 통일 왕국이 없이 공백기가 발생한 정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 때 신무(神武-應神)집단은 북구주가 옛날의 [담로계 국가]였다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상륙했으나 막상 도착해보니 천손계(天孫系)인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원주 왜인(原住 倭人)들만 서로 싸움을 일삼고 있는 정세를 보고 한 때 실의에 빠진 듯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염토노옹(鹽土老翁)으로부터 귀가 번쩍 뜨이는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는데 그 때부터 神武는 이미 東征을 꿈꾸고 열도 정복에 관한 자신의 계획을 수행한 백제의 다른 王族들에게 말하면서 설득을 하고 있다.





       ▶ 바다 가의 토로(土老)인 염토노옹(가라계 시호쓰쓰의 후손이다)이 말하기를 “나라의 동쪽에 가면 사방이 푸른 산으로 되어 있는 아름다운 땅이 있고 게다가 그 곳에는 오래전에 니기 하야히노 미코도饒速日命요속일명이 천반선(天磐船)으로 그곳에 비강(飛降-날아 내린)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그곳은 천하의 중심지로서 큰 뜻을 펴고 큰일을 이루기에 충분한 곳이거늘 왜 그곳으로 가서 도읍하지 않으시오? 라고 하니 나는 그 땅이야말로 의심할 것도 없이 육합(六合-국토國土)의 중심으로서 우리가 장차 수행할 하늘의 대업(大業)을 넓히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우리가 그곳으로 가서 도읍(都邑)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가라계 후손의 현지정보로 지금 이곳은 반도에서 제일 먼저 이주민들이 도착하는 곳이므로 계속 정착하면 이주민과의 투쟁이 예상되어 나라의 안정을 찾기 어려우니 한 나라의 왕기王畿로서 적합하지 못하므로 차라리 동쪽으로 나아가 나라의 영원한 평안함을 찾으라는 일깨움이다)” 라고 하니 여러 王子들은 “그의 말에 사리가 분명하고 우리들이 늘 생각한 바를 그대로 말하고 있으니 우리의 뜻에 합당할 만 하다.   그대로 서둘러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라고 답했다.





바로 요속일(饒速日) 집단이 九州에 先住한 [담로계 도래인]들로 야마토 王朝가 AD 269년 멸망하자 선박(船舶)을 이용해 기나이(畿內)로 이동한 사실을 말해주는 명확한 장면이다.





□ 신무(神武)와의 대면과 포섭과정





       ▶ 12월 계사 삭 병신(癸巳 朔 丙申) 다시 험로(險路)를 헤치고 나라지역의 아스카에 도착해보니 도중에 만났던 나가쓰네 히코(長髓彦장수언)가 또다시 나타나 최후까지 저항하여 여러 번의 접전에도 이길 수 없었다.   이 때 홀연 하늘이 흐려 눈이 내리자 마침 금빛의 신성한 새(鴟소리개 치)가 날아와 천황(天皇)의 활(弓) 끝에 앉아 새의 빛깔이 찬연하고 번개 같은 빛을 뿌려 이 때문에 <나가스네 히코>의 군대는 모두 눈이 흐려 싸움에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자 <나가스네>는 使者를 보내 天皇에게 말했다.   “일찌기 天神의 아들(백제계)이 한 분 계셨는데 하늘의 바위 배인 아마의 이와후네(天磐船천반선)을 타고 와서 이곳에 내려 와서 살고 있습니다.  그 분의 이름은 구시다마 니기 하야히노 미코도(즐옥요속일명櫛玉饒速日命-고사기의 이예속일명邇藝速日命)라고 합니다.   그 분은 내 누이인 미 가시기야 히메(三炊室媛삼취실원)을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아 우마시 마데노 미코도(可美眞手命아미진수명)라 명명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분 <니기 하야히노 미코도>를 주군(主君)으로 삼고 지금까지 섬겨왔습니다.   그런데 대체 내가 혼란스러운 것은 도대체 天神의 자제(子弟)에 두 氏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天神의 아들이라 하면서 남의 땅을 빼앗으려 하는 것입니까?   제가 추측하건 대는 이는 믿을 수 없습니다”   이에 天皇이 말하기를 “天神 역시 많은 자식(子息)들이 있다.   네가 임금으로 섬긴다는 인물이 사실 天神이라면 반드시 표식이 있을 것이니 서로 내어 보이기로 하자” 하니 <나가스네>는 곧 <니기 하야히노>의 우우시(羽羽矢-깃 달린 화살) 한 개와 보전용 전통인 보인(步靭)을 天皇에게 보이니 이를 보면서 거짓말이 아니라고 말하며 자기가 찬 [아마]의 화살인 천우우시(天羽羽矢)와 전통인 보인(步靭)을 내주어 <나가스네>에게 보이게 하였는데 그는 天皇이 보여준 것이 하늘의 표식(天表천표)임을 보고 점점 더 혼돈이 되어 더욱 조심하는 마음으로 옴추러 들었다.





여기에서 요속일명(饒速日命)이 바로 韓國에서 도래한 천치언계족단(天稚彦系族團)임을 알게 된다.   그가 천손(天孫)의 징표인 천우우시(天羽羽矢)를 가졌고 이를 이미 神武가 알고 있었다는 것은 천강설화(天降說話)에서 [고황산영존]에게 천록아궁(天鹿兒弓)과 천우우시(天羽羽矢)를 받은 다시 말해 일정한 병력을 데리고 내려온 천치언(天稚彦-천약일자계天若日子系)의 후손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아울러 아들에게 내린 이름인 우마시 마데노 미코도(可美眞手命아미진수명)에서도 백제계를 뜻하는 진(眞)자가 보이므로 神武와 같은 동족임을 내세우고 있다.   <요속일명>은 신무군(神武軍)의 무장체계(천우우시와 보인)를 보고 마침내 동족으로서 승복하여 귀순한 후 등미비고(登美毗古)의 여동생인 등미야비매(登美夜比賣)와 결혼하여 우마지마지명(宇麻志麻遲命)을 낳았는데 그가 물부련(物部連)과 수적신(穗積臣)의 조(祖)가 되었다.   아무튼 후에 천신지자(天神之子)로 자리를 매긴 모노노베(물부物部-근초고왕계의 혈족으로서 왕의 倭 정토(征討)시에도 수행한 백제계 將軍家) 족단은 가라계 오호토모(大伴대반)족단과 쌍벽을 이루며 야마토조정의 기둥으로서 천황의 군대인 내병(內兵)의 장군가(將軍家)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천치언天稚彦]





신대기(神代記)를 보면 지상에 내려와 <현국옥신>의 딸인 <하조희>와 결혼한 뒤 그대로 눌러 앉아 살면서 “나도 역시 위원중국葦原中國을 다스려야 하겠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는 뒷날 나가쓰네 히코(長髓彦장수언)의 동생과 결혼해 천수일명(天穗日命-出雲臣의 祖)이 눌러 앉은 출운(出雲)이 아닌 다른 지역인 대화지역(大和地域)에서 先住하며 君長노릇을 하고 있던 [요속일명] 집단이 분명하다.   신대사(神代史)에서는 <천치언>이 죽은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위원중국(葦原中國)에서 천치언의 친구였던 <味사高彦根神>의 용모가 천치언의 생전 모습과 똑 같아 생긴 일화(逸話)를 따로 소개하며 “세상 사람들이 살아있는 것을 죽은 것으로 오인하는 것을 싫어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라는 묘한 설명을 붙인 것은 <천치언>을 살해하러 고천원(高天原)에서 내려간 자객이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음을 은유 한 듯하다.   백제에서 도래한 神武가 분명히 <요속일명>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기록을 살펴보아서도 <천치언>의 후손이 맞다.





       ▶ 그러나 전쟁의 태세는 이미 완비되어 흉기(凶器)들이 벌써 모두 준비되어 있었고 대세는 이미 싸움을 도중에 중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본래 자신의 그릇된 판단과 경솔한 계획에 집착하여 이미 마음을 다시 바꿀 수가 없었다.   이 때 神武가 “요속일은 본래 天神族으로서 은근하지만 天孫과 한편이 될 것을 알고 있다”라고 언질을 주니 눈치를 챈 요속일은 天神이 너그럽게도 天孫인 그에게 천하를 내려준 것을 처음부터 알아차리고 天神의 은근한 뜻에 따라 오직 天孫과 함께 하여 화해를 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성격이 포악하고 마음이 이지러진 나가쓰네 히코(長髓彦)의 사악한 성품으로 미루어 연합은 불가하고 또 그에게 하늘과 인간(즉 主君과 신하)의 오묘한 관계와 天孫과 天孫이 아닌 것의 차이를 설명해 준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더 이상 타이를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그를 죽이고 수하의 무리들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와서 귀순했다.  이에 그가 원래 하늘(高天原)에서 내려 온 天孫系의 동족임(백제계)을 처음부터 듣고 알고 있었던 天皇은 이제 실제로 충성스런 공을 세운 것을 가상히 여겨 그를 칭찬해주고 총애하여 신하로 삼았다.   이들이 바로 모노노베(物部氏-대물주신의 物字를 따랐다)의 먼 조상이 되었다.





이전에 기내(畿內)로 들어 온 [요속일 집단]을 발견하였는데 <염토노옹>이 말한 그는 이미 <장수언>과 통혼관계까지 맺고 있던 처지였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이들의 지지와 충성을 이끌어내어 돌파구를 만들은 것이며 神武가 들어가기 전 이미 야마토에 형성된 이 세력은 상당히 강력한 집단이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神武는 마침내 그해 12월에 니기 하야히노 미코도(饒速日命)를 섬기고 있던 나가스네 히코(長髓彦장수언)를 쳐서 이 지역을 차지하는데 성공하는데 <장수언> 집단들의 영역은 [가와치-이즈미-야마도] 지방 일대에 넓게 퍼진 백제-가라계 선주집단으로서 九州에서 이주한 니기 하야히노 미코도 족단(요속일집단)이 다시 정착하여 이들과 타협하여 어우른 세력이었는데 부하인 <나가스네 히코-장수언>는 원주민 세력으로 보인다.





       ▶ 우마시마지존(宇摩志麻遲尊)이 십악검(十握劍)을 빼어들고 나가스네히코의 앞에 나타나 그를 꾸짖고 자결하기를 강박하였다.   나가스네히코가 형세가 여의치 않음을 알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가미 니기하야히노 미코도(饒速日命)는 神武 즉위 12월에 나가스네 히코(長髓彦장수언)가 정복당한 후 사람을 보내 神武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아마츠 가미(天神)의 아들이 있어 아마노 이와후네(아마의 바위 배)를 타고 아마에서 내려왔는데 이름이 구시다마 니기하야시노 미코도이다” 라고 하자 이에 神武가 아마신의 아들이라는 <니기하야히노>와 만나 서로 아마계통의 화살과 보병용 전통을 가지고 같은 아마 출신임을 확인한 데서 보듯이 <니기하야히노 미코도>가 북규슈 아마계통 이주 집단의 우두머리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통과의례를 하였음을 알게 해 준다





이 과정에서 [우타지역]에 선주 한 오토모 세력(日臣命)과 모노노베(物部連물부련) 세력과의 연합으로 이 지역에 기반을 두었던 진한*신라계 세력을 누르면서 백제계 야마토왕조 기본 세력의 기틀이 짜여지는 것입니다.  이때에도 구주(九州)와 본주(本州)의 지배세력들은 스스로를 [기미]라 칭했으며 이는 우리말로 임금인 [검*금]인데 神武는 [오기미]라 했다.   이를 두고 우리 기록에서 [참람히 천왕天王을 칭하다]라 하였다.





       ▶ 천황은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리시며 고난을 회고했다.  “우리의 동방 원정이 계속된 6년 동안에 사악한 무리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변경지방은 아직도 정화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중앙의 땅(中州중주)에는 이제 아무 풍진(風塵)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이 王國을 내게 내려 주신 하늘의 덕에 보답할 것이며 길이 황손(皇孫)을 넓히고 바른 마음을 가꾸어 나갈 것이다.   天皇은 <가시와라>宮에서 등극하셨다.   이 해가 天皇 치세의 元年으로 간주된다.   이렇듯 천하를 통치하기 시작하신 天皇은 가미 야마토 이하레 비코(신왜이파레비고神倭伊波禮毗古*신일본반여언神日本磐余彦)라 불렀다.   天皇은 <와키카무> 언덕에 올라 사방으로 나라의 모양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름답다!  비로소 나라를 얻었구나!  비록 목면 속처럼 좁은 나라이지만 잠자리가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것 같으니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를 우리가 얻게 되었는가?“   <일본서기>





[이하레비코]의 <이하레>는 반여(磐余 일본서기)*이파례(伊波禮 고사기)로도 쓰는데 원래는 <이하레-거발居拔>로서 <거居=우리말 훈독訓讀 이>이니 <거발-이발-이파례-이하레>이므로 백제의 원래 도읍인 <거발성>을 그대로 붙인 것이다.   <이하레>의 한자어(漢字語)인 <반여磐余>의 <여余-부여扶餘>와 관련되어 이 地名들은 應神의 백제지역에서의 원주지(原住地)와 마지막 저항지역인 부여夫餘*웅진熊津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또한 <이하레>는  백제의 도읍인 위례(北史)*王의 稱號인 어라하(周書)를 풀어쓴 것과도 같은데 아무튼 모두 백제와 관련성이 짙으며 <고사기>를 보면 야마토 王들의 궁궐터로 즐겨 사용되어 이중-청녕-계체-용명 때까지 宮이 이곳에 있었다.  





神武(應神)은 <요속일>이 九州에서 이동한 야마토의 세력임을 알았고 후에 나타난 모노노베(物部)씨가 70여파를 이루는 大族임을 감안하면 이들이 집단으로 이주한 무리로 추정될 만하다.   따라서 <대팔주기원론大八州起源論>의 야마토(담로淡路-백제계 지표지명)가 포(胞-원인)가 되어 대일본(大日本-畿內朝)을 이루었다는 말의 의미가 여기에서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





[협야후陜野侯]를 <협야존陜野尊>으로 별칭한 神武 때문에 왜 갑자기 [니기 하야히노 미꼬도 饒速日命요속일명]와의 관계가 튀어나오는지 설명하느라 잠시 옆길로 빠졌군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여기에서 [협야후나 신야후]는 우리말로 풀이하면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즉 [狹(陜)野-거칠고 좁은 들]이나 [新野-새 땅*새 벌이니 거칠고 삭막한 들]의 [侯-제후]이니 아마도 <배반명裵幋命>이 명을 받아 倭를 평정하고 받은 작위(爵位)로 여겨집니다.   아울러 배반(裵幋)은 倭의 기록에서는 도반(稻飯)으로 나타나니 원래 이름이 배반(裵幋)이었을 가능성도 감지되는 부분입니다.   이로보아 원래 의미인 [韓國] 소시모리 반란 진압-후손 협야노(陜野奴)의 倭地로 도주-협야노(陜野奴)의 웅거지역 평정의 작위명(爵位名)인 협야후(陜野侯)의 공격-언파불합(彦波弗哈)의 웅습(熊襲) 재 정토征討-협야노 통치지역 진압 직책명인 협야후 배반명의 3島 정벌 완료 ⇒ [倭地] 협야후(陜野侯)와 배반명(裵幋命)의 기록을 각색한 협야존(陜野尊)-神武의 형으로 나오는 도반명(稻飯命)이란 명칭의 음가(音價)에 의한 차용(借用)으로 해석이 달라지거나 왜곡*인용되어가는 과정이 더 옳습니다.   이를 이유립 선생이 일본의 문헌 사료를 인용했다고 하기 위해 그런 설명을 할 까닭은 없으니 그가 찬술한 [환단고기]의 용어가 백제계 도래 지배집단인 야마토 왜 조정에 입수되어 어떻게 변화되어 채록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언어학적 분석과 문화도래 과정을 보여주는 증좌에 다름이 아니라고 보입니다.





※ 우리 문헌에 보다 정확한 표현으로 잘 나타나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협야노(陜野奴)-협야후(陜野侯)의 변화 과정이 그렇기 때문이다.   처음 나타난 협야노(陜野奴)란 이름은 고대 우리 민족의 이름씨의 作名 방식을 그대로 나타내어 준다.   이는 기록에서처럼 [소서노*부분노] 와 [염모*진가모*이이모]와 같은 전통적 형식을 분명하게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추측이 가능해지는 까닭은 [일본서기]의 찬자(撰者)들이 이 부분 말고도 앞서 필자가 말한 [記*紀]의 왜곡과 인용 항목설명에 덧붙여 노골적으로 우리 민족 선사(先史)의 문헌기록들을 1:1 대응관계나 신대(神代) 역사에 반사(反射)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1) 일본서기(日本書紀) 저자(著者)는 고기(古記)에 환국(桓國)에 7명의 환인(桓因)이 있었고 아들 환웅(桓雄)에게 천부인(天符印)을 주어 세상에 내려 보냈다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서 일본서기(日本書紀) 신대(神代) 역사를 만들었다.   다시 말해 고기(古記)에 나오는 7명의 桓因을 모방하여 신대(神代) 상(上)에 나오는 7명의 신(神)을 만들었다.   고기에 나오는 7명의 환인(桓因)과 일본서기(日本書紀) 신대(神代)에 나오는 7명의 신(神)을 대비해 보면 아래와 같다.








1세 안파견(安巴堅) - 구니노 도고다치노 미코도(國常立尊국상입존)     


2세   혁서(赫胥)   - 구니노 사쯔치노 미코도(國狹木槌尊국협퇴존)


3세 고시리(古是利) - 도요(가라) 구미누노 미코도(豊斟渟尊풍짐정존)   


4세 주우양(朱于襄) - 스히 지니노 미코도(埿土煮尊니토자존)*사토자존(沙土煮尊)


5세 석제임(釋帝壬) - 오호도노 지노 미코도(大戶之道尊대호지도존)*오호 도마베노 미코도(大苫邊尊대점변존)


6세 구을리(邱乙利) - 오모 다루노 미코도(面足尊면족존)*가시 고네노 미코도(惶根尊황근존)


7세 지위리(智爲利) - 이자나기노 미코도(伊奘諾尊이장낙존)*이자나미노 미코도(伊奘冉尊이장염존)





이렇게 고기(古記)에 나오는 7명의 환인(桓因)은 환국(桓國)의 통치자로 적혀 있으나 일본서기(日本書紀) 신대(神代) 상(上)에 나오는 7신(神)은 하늘나라(高天原)에 존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아직 열도로 이동하기 전이기 때문이다.





   2) 하늘나라 신(神)이 일본열도를 만들었다고 왜곡하였다.  





신대(神代)의 마지막 신(神) 이장낙존(伊奘諾尊)과 이장염존(伊奘冉尊) 2신(神)이 천부교(天浮橋)에서 천지경모(天之瓊牟)를 휘두르자 그 창날 끝에서 떨어진 소금물 방울이 엉켜서 한 섬을 만들었고 2신(二神)이 그 섬에 내려와 부부가 된 후 교합하여 담로주(談路洲)를 포(胞)로 하여(이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야마토 왜를 창건한 근본 세력이 누구였는지를 은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일본(大日本) 풍추진주(豊秋津洲)*이예이명주(伊豫二名洲)*축자주(筑紫洲)*억기주(億岐洲)와 좌도주(佐度洲)*월주(越洲)*대주(大洲)*길비자주(吉備子洲) 등 8주(8이 비류계의 성수聖數임을 명심해야 한다)를 낳고 대마도(對馬島)*일기도(壹岐島) 등 여러 작은 섬들은 바닷물 방울이 엉켜서 이루어 졌으며(倭地로 이동하는 중간 경로를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 그 다음으로 바다(海)*내(川)*산(山)*나무(木)*풀(草) 등을 낳았다고 왜곡하였다.





   3) 위 2神이 그 다음으로 일본열도를 관할하는 신(神)을 만들었다고 왜곡하였다.





신(神)을 만든 순서를 보면 먼저 일신(日神)을 낳아 하늘로 올려 보내고 다음 월신(月神)을 낳아 역시 하늘로 올려 보내고 그 다음으로 질아(蛭兒)를 낳았으나 3년이 지나도 서지 못하므로 바람에 띄워 버리고, 그 다음으로 소전명존(素戔鳴尊)을 낳았더니 너무 잔인하여 국내의 사람들을 많이 죽게 하므로 부모 2신이 근국(根國)으로 축출하였다고 왜곡하였다.  이는 송화강(松花江) 유역에 거주한 협야노(陝野奴)가 무리를 이끌고 몰래 九州로 이주하여 천왕(天王)을 칭(稱)하였다는 고기(古記) 내용을 보고 영감을 얻어 실제의 [소전명존] 도래 과정을 왜곡하여 일본국의 국조신(國祖神)신으로 반사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앞선 글에서 언급하였다.





   - 그 후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아들과 황조(皇祖) 고황산령존(高皇産靈尊)의 딸이 혼인하여 천진언언화경경저존(天津彦彦火瓊瓊杵尊)을 낳자 고황산령존이 그를 위원중국(葦原中國)으로 보내려고 마음먹고 대기귀신으로부터 복속을 맹세 받은 후 황손(皇孫)에게 팔판경(八坂瓊)의 곡옥(曲玉)과 팔지경(八咫鏡) 초치검(草치劍) 3종의 보물을 주어 세상으로 내려 보냈다고 적혀 있다.   이는 우리의 고기(古記)에 桓因이 桓雄에게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으로 내려 보냈다고 적혀 있는 것을 모방하여 천손하강(天孫下降) 신화(神話)를 꾸민 것이다(하지만 여기에서 보이는 8이란 數도 의미심장하다).





   - 이때 地上으로 내려온 황손(皇孫)은 혼인하여 4아들을 낳았는데 그 셋째가 언화화출견존(彦火火出見尊)이고 언화화출견존은 다시 언파렴무노자초즙불합존(彦波瀲武鸕鷓草葺不合尊) 언파렴무노초즙불합존은 언오뢰명(彦五瀨命)*도반명(稻飯命)*삼모입야명(三毛入野命)과 협야존(狹野尊) 등 4아들을 낳고 서주궁(西州宮)에서 죽었다고 적혀 있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응신(應神)을 투영한 신무(神武)의 가공(架空) 세계(世系)를 만든 것이다.





   4) [일본서기]는 應神의 군사행동을 투영한 가공의 인물인 神武의 실제성에 대한 근거로 우리 고기(古記)에 나타난 협야노(陜野奴) 등의 기록을 인용*각색하였다.





[원문] 36세 매륵 단제 갑인년(BC. 667년)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엔 삼도가 모두 평정되었다.  遣陜野侯裵命往討海上十二月三島悉平





위에 나오는 BC. 667년은 일본서기에 신무왕이 등장하는 해이다.   또한 <협야후 배반명>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神武王 즉 <협야존陜野尊>으로 인용되었다.   찬자(撰者)는 기(記)를 만들기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의 고기(古記)에 [협야후 배반명]이 三島(일본 열도)를 평정하였다는 내용이 나오자 이를 이용하여 그를 일본의 가공시조로 만들었다.





하지만 <고기>에는 <협야후 배반명>이 삼도(三島)를 평정하였다고만 적혀 있지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즉 <협야후 배반명>은 단군조선의 매륵 단제(買勒 檀帝) 명을 받아 三島를 혼란스럽게 하는 무리들을 평정하였을 뿐이지 결코 구주(九州)에 독립왕조를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서기 찾자(著者)는 神武를 가공시조로 만든 후 여기에 연대를 일치시켜 그의 실제성을 증명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5) 이런 式의 조작과정을 간접적으로 확인해 볼만한 다른 기록들이 또 있다.   숭신(崇神) 이후 자리를 이었다는 다른 王들의 作名이다.


 


위 王들이 가공인물이라는 것은 이름에서도 금방알 수 있다.   즉 중국왕의 시호(諡號)에 효(孝)자를 사용한 시기는 한나라 때인데 효소는 전한(前漢)의 8세 왕 효소왕과 같고 효원은 전한(前漢)의 10세 효원왕과 같다.   이는 일본서기 저자(著者)가 전한(前漢) 王들의 諡號를 일본왕의 것으로 일부 도용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는 숭신(崇神)과 수인(垂仁)에게 王이라는 칭호(稱號)를 사용하였지만 <환단고기>에 의하면 이들이 재위(在位)한 때는 열도에 아직 소국연맹(小國聯盟)이 세워지지 않고 수십 개의 小國으로 갈라져 있었다.   따라서 숭신왕이나 수인왕은 九州에 있던 1개 小國의 지배자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녹도승-가지마 노보루]은 정말 황당하게도 야마토 조정의 심오한 왜곡을 깨닫지 못하였는지 <배반명>이 일본신화의 요속일명(饒速日命-니기 하야히노 미코도)인 줄 알고 말았으니 필자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아참!  웃어야 할 일이 하나 있긴 있네요.   바로 이러한 복잡한 관계 속에서 어처구니없이 경박한 그림자들이 던져준 미끼에 덥석 걸려서 [임승국]씨에 대해 엉뚱한 폄훼를 일삼는 코메디를 보자니 저라도 혼자 마음껏 웃어줄만 하겠습니다.





아하!   한 가지 흘려보낼 뻔 하였군요.   【이유립이 <신야후>라는 말을 쓴 것은 소잔명존이 신라에 갔다는 사실, 도반명의 후손이 신량귀(新良貴-시라기)씨가 되었다는 사실 등 신(新)이라는 글자가 계속 나오는 것에서 착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유립은 뒤에 그 <신>보다는 <협야존>을 겨냥할 수 있는 <협야후>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죠】라는 코멘트입니다.   여기에서 [소전명존]과 신라(新羅)와의 관계는 이미 설명을 했으니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도반명(稻飯命)과 新羅와의 관계가 남았군요.   조금 설명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신무(神武)의 兄으로 나오는 도반명(稻飯命)은 [신찬성씨록]에 後孫의 姓氏가 新羅라는 國號를 그대로 쓴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 실재성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시라기新良貴신량귀】 언파염무노자즙불합존남 도반명지후야 시출어신랑귀국 즉위국주 도반명출어신라국왕자조합  彦波瀲武鸕鷓草葺不合尊男 稻飯命之後也 是出於新良國 卽爲國主 稻飯命出於新羅國王者祖合(우경황별)





시라기[新良貴]라는 姓氏는 언파불합존의 아들[男] 도반명(稻飯命)의 후손으로 되어 있는데 도반명은 「신라국출신이며 신라국주도 했다. 是出於新良國 卽爲國主」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시라기[新良貴]* 시라기[新良]*시라기[新羅]는 전부 같습니다.   혹자는 <이 신라는 경주신라가 아니며 삼국사기 지리지 함안군조의 아시라[阿尸良=新羅]로 아라가야의 고명(古名)이다.   그래서 '아라가야인'이라는 뜻을 가진 아라시또[阿羅斯等아라사등]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언파불합존彦波不合尊은 아라사등과 동일 계열 인물이다>라고 풀고 있는데 만일에 이 설이 맞는다면 應神(神武)이 야마토 왜를 창건하는 과정 가운데 가라*백제*신라의 호족(豪族)을 감싸 안으면서 倭 왕조(王朝)의 단절을 감추려고 前왕조인 가야계와 혈연관계를 설정했다는 가정과도 일치되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습니다.





     - [書記] 민달기 12년 7월조에 「화*위북국조 아라사등 火*葦北國造 阿利斯等의 아들 달솔 일라日羅」라고 나오고 시세조에는 「火*葦北國造 형부차부 阿利斯等의 아들 달솔 日羅」라고 나온다.   <화*위북국조>라는 것은 <화국>과 <위북국>을 관장하는 집안이란 뜻이고 <형부차부>란 법과 군을 장악하고 있다는 뜻으로 고대엔 곧 王인 것이다. <화국>은 지금의 구마모도현 서부지역이고 <위북국>은 지금의 구마모도현에 해당하며 아시(葦위)는 '아침'이란 뜻이고 <위북국>은 북신라北新羅라는 의미다.   이것은 구주 서남부에 있던 <구주신라>의 북쪽에 있는 <신라-새 나라-새벌>라는 뜻이며 성씨록 [시라기新良貴]條에 나오는 신라는 이 두 신라와 본국인 아라가야의 古名 [신라-새벌-새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구주신라]는 <고사기> 응신기에 실려 있는 천지일모의 신라국이며 <書記> 수인기 3년 시세조의 신라왕자 천일창이 개척한 신라국이다.





※ 우리는 여기에서 앞서 말한 [스사노오]의 설명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대마도에 세 나라의 分國(좌호가라*계지가라 등)들이 엄연한 명칭을 지니고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두 번째의 가정(이는 오로지 필자의 독단이며 앞으로 고정관념과 시각을 바꾸어 더욱 연구가 필요한 과제임을 알려드립니다)은 <시라기>가 <신량귀新良貴>라는 소리 옮김을 한 것처럼 시라(白) + 기(城)로도 읽는바 이를 신라의 이칭(異稱)으로 보고 있지만 굳이 [新羅*신량귀新良貴*신로귀信露貴*진량眞良*지라기志羅紀*지락志樂*지량기志良岐*]라는 一般稱을 제쳐두고 전혀 다른 [백성白城*백비白比*백자白子]등으로 다르게 표시한데는 까닭이 있다고 볼 때 집단의 성격에 따라 조금 구별해서 표기하였을지도 모를 [신라인들을 다스렸던 백제계의 군장]으로도 뜻*소리 옮김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는 [新]의 음가(音價)를 지키면서 기록하였고 다른 하나는 [白]이라는 자의(字意)를 구태여 내세우는 지명고(地名考)가 확연한데 이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이 경우에는 [앵무새]가 주장하는 신라와 연관되는 <신야후新野侯>라는 가정은 여지없이 근거를 잃고 마는 셈이지요.   물론 위의 說을 따른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신新]이냐? [협陜]이냐? 하는 판단은 그 글자를 포함하고 있는 전체 인명(人名)을 대상으로 뜻하는 진짜 내용을 비교 분석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어서 <도반명>은 <죽어 서지신(鋤持神)이 되었다>과 나오는데 一說에 이를 소리 옮김으로 풀어 [발음이 '사히모지노 가미'이고 '사히'는 '(ㅅ+아래 아)이'에서 갈라져 '아'로 분화된 '사이金'의 다른 표기이다.   해전海戰을 하는데 쇠를 가진 神이 되었다는 것은 익사를 말한다. 잠수부들이 납덩어리를 허리에 차는 것을 연상하면 이해하기 쉽다]라고 해석하는데 아무래도 저는 우리 말 그대로 뜻풀이 하여 [호미 서鋤인 호미로서 이는 應神의 또 다른 이름인 “호무다 와케譽田別예전별”의 호무다를 연상케 한다.   다음에 붙은 지持는 “보존하다*지키다*유지하다*가지다”이니 즉 [협야후 배반명]으로 나누어졌지만 “호무다”라는 존재와 이름을 강화시켜 지켜주고 보존하기 위해 가공된 인물이라는 느낌이 짙다]는 편이 더 와 닿습니다.




헌데 더욱 야릇한 것은 신무(神武)의 행적이 응신(應神)의 행보를 투영한 것이라고 볼진대 형제들 가운데 이 두 사람이 묘한 연결고리를 만들면서 이야기의 줄거리를 神武 중심으로 만들어가는 이음매가 된다는 것입니다.





     1) 이나 이히노 미코도(稻飯命도반명)는 전반기 전역(戰役)을 이끌던 형(兄)인 이츠세노 미코도(五瀨命오뢰명)가 전사한 뒤 행적이 잠깐 나타나다 기국(紀國-木國=기이국紀伊國) 웅야(熊野)의 신읍(神邑) 부근 해중(海中)에서 죽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결국 神武 한 사람의 역할만 크게 부각시킨다.


     2) 하지만 동정(東征)의 결심을 하는 단계에서부터 오뢰명(五瀨命)은 죽을 때까지 시종일관 자신의 분명한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 다카치호高千穗峯고천수봉의 궁전에서 신무의 최측근(最側近) 동거자


      - 천하를 경영하기 좋은 장소를 의논(東征계획 상의)하는 상대역


      - 전반기 전역의 실제 지휘자이며 해전(海戰)의 지휘자


      - 실제 치룬 격전과 전황에 대한 상세한 묘사 -나가스네 히코(長髓彦장수언)와 접전한 구사에 노사가(孔舍衛坂공사위판)전역과 부상


      -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장례에 대한 분명한 기록 -검의 병두柄頭(바로 환두대도(環頭大刀)의 환두環頭로서 백제계 장군임을 확실히 해준다)를 만지며 울분을 토하고 죽은 때문에 지어진 오노미나도(雄水門웅수문)라는 지명의 유래와 가마야마(竈山조산)





이로보아 <오뢰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의 실재여부는 불투명하게 나타나 神武의 행적을 미화하기 위한 장치로서 우리 고기(古記)의 기록에서 한 인물의 이름으로 나타난 [협야후 배반명]을 둘로 나누어 형인 <도반명-이유립 선생의 해석대로 배반명을 벼*밥이라는 어리숙한 공식으로 가져다붙여 도반명으로 왜곡한다>과 아우인 <협야존>으로 만든 듯한 인상이 짙습니다.   또한 일부러 구문句文을 나누어 <사노陜野는 어릴 때의 이름이다>라는 첨언(添言)이 슬그머니 따라 붙었는데 찬자(撰者)는 지나 사서(支那 史書)에 보이는 왜 오왕(倭 五王) 가운데 왜왕 찬(讚)을 應神의 본명으로 못 박으려고 이를 왜어(倭語)로 음독(音讀)한 사노[讚]와 연결시키기 위한 분명한 의도로 보입니다.   즉 사노(狹野)는 중국기록에 나오는 왜왕 이름 찬(讚)을 왜어로 음독하면 사노(讚)가 되어 동일인물이라는 의미이다.   중국기록에 나오는 왜왕 찬(讚)의 연대를 맞춰보면 응신천황(서기 390년∼426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같은 낭설은 처음부터 일본의 史書만을 맹신한 까닭에 앞서 해석해 준 [新]과 [陜]이 어떻게 의미가 넘나드는지를 전혀 깨닫지 못한 억측(臆測)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를 이유립은 정확히 파악하고 앞선 두 편의 논문집과 나중의 원전(原典)의 문구가 달라진 근본적인 이유일 것입니다.








[Tip]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관련





AD 799년 간무(桓武환무)의 명으로 아들인 만다(萬多親王만다친왕)에 의해서 편찬작업이 시작되어 AD 815년에 완성되었는데 都邑과 주변 5개 구니(國)에 거주하는 1182개의 주요 氏族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3部로 나뉘어 [1부]는 단지 원 조상이 天皇*皇子인 씨족의 후손인 황별(皇別 335개 씨족) [2부]는 天神(오오진 혹은 그 전에 한반도에서 도래한 이들의 후손인 373개 씨족)*지지(地祗지지-地神으로 토착 일본 神들의 후손인 30개 씨족)의 후예인 신별(神別-403씨족)이 [3부]는 중국*한국을 조상으로 한 제번(諸蕃 328개 씨족)으로 구분되었다(기타 미정잡성未定雜姓 116개).   [서문]에서 주목할 부분은 <마히토가 皇別 중의 상씨(眞人是皇別之上氏也진인시황별지상씨야) 수도(首都) 지역의 마히토 씨족을 1권에 수록했고 皇別의 첫머리에 실었다>라고 특별히 기록했다는 점이다.





- 일본 신화는 아마쓰 가미(天神-천진신天津神)와 쿠니쓰 가미(토착신土着神-국진신國津神)을 뚜렷이 구분하고 있다.   <에가미>는 말한다.   “天神들은...외래 정복자들을 말하고 토착의 神들은 본래 원주민의 수장(首長)들을 나타내는 것 같다”





텐무(天武천무-아마노 누나하라 오키노 마히토 天淳中原瀛眞人천순중원영진인)는 AD 684년 8계급 세습칭호(八色之姓팔색지성-여기에서도 비류계 성수가 보인다)를 만들었는데 최고의 姓인 마히토(眞人진인)는 오로지 기원을 오오진(應神)*케이타이(繼體)*센카(宣化)*비다쓰(敏達)*요메이(用明)의 皇族에게만 두 번째인 아손(朝臣조신)은 오오진 이전 天皇의 皇族에게만(52개 씨족-후일엔 모든 저명 씨족으로 확대) 다음으로는 수쿠네(宿禰숙니)와 네 번째로 백제에서 온 이마키 아야(今來漢)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이미키(忌村기촌) 나머지는 차례로 미치노시(道師도사)*오미(臣)*무라지(連)*이나기(稻置도치)이다.





여기에서 특히 눈여겨 볼 부분이 나타난다.   [성씨록 제1권의 첫머리]에 기록된 첫 4개의 마히토 皇族은 <호무다 예전별譽田別-應神>의 후손이며 5번째는 케이타이 후손 다음으로 7개 씨족(6-12)은 비다쓰 마지막으로 8개 씨족(13-20)은 “백제 王子의 후손 百濟親王之後也백제친왕지후야”으로 명시되어 있다.   허나 이 문구 바로 앞인 12번째 황족이 비다쓰의 후손이며 백제왕의 자손과 같다고 기록됨을 볼 수 있다(敏達孫百濟王也민달손백제왕야)   아울러 [일본서기]에서 <비다쓰>는 <케이타이>의 정통 후계자였던 긴메이(欽明흠명)의 둘째 아들이며 케이타이는 [오오진 應神]의 5세손으로 나와 있으니 첫 번째로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마히토 皇族이 [백제왕의 자손들]이라고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44번째까지도 [일본서기]에 의하면 같은 결론에 이르는데 [신찬성씨록}의 모든 마히토 皇族이 전부 [백제왕의 자손]으로 간주된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오오진 계]의 일본 皇族 전체가 백제왕족에서 나왔다는 걸 적시해준다.





□ 주요 성씨(姓氏) 분석





[신찬성씨록]의 야마토 지배 씨족인 1182개 성씨 중 오오진계 백제 皇族 335개+오오진에서 야마토 시대나 그 전에 한반도 도래인 후손인 天神族 373개+諸蕃族에 포함된 백제 씨족 158개(백제 멸망 후 이주씨족이 포함된다)와 그 밖의 <신라*고구려*가야>에서 건너온 씨족 61개로 韓國과 직접 관련이 없는 씨족은 불과 225개이다.





225개 성씨 가운데에도 地神系 30+중국계 109+미정 잡성 116을 보면 미정 잡성 중 <백제 18*고구려 7*신라 8*가야 1>로 34개 씨족이 한반도 도래인이다.   결국 [신찬성씨록]의 1182개 씨족에서 韓國과 직접 관계가 없는 성씨는 겨우 222개 뿐이다. 





     - 오오진 시기 백제에서 건너온 아직기阿直岐*왕인王仁*유즈키 기미(弓月君궁월군)*아치노 오미(阿知使主아지사주)*쓰가노 오미(都加使主도가사주)의 후손인 54개 씨족들을 [신찬성씨록]은 중국 이주인들로 분류하였다.   <일본서기>에 적혀 있는 대륙에서의 도래는 중국으로부터 건너온 몇몇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부 한반도에서 그것도 백제에서 온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렇게 [서기]에 분명히 기록했는데도 많은 수의 씨족들을 중국계로 분류하므로서 그 수자를 의도적으로 과장시키려 했다.





아무튼 [성씨록]은 특히 마히토(眞人진인)에 관한 첫 몇 페이지는 야마토왜의 통치자들이 백제인의 후예라는 우리의 명제를 명백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즉 일본에서 비로소 역사시대를 열고 처음 강력한 王朝를 연 皇族의 민족적 기원이 [신찬성씨록]에 의해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던지는 한마디]





[記*紀]를 보면 중요하거나 핵심적인 구절(句節)에 수없이 인용되거나 우리 고어(古語)와 비슷하게 투영된 人名*地名*物名에 대한 문구(文句)들이 나타나는데 과연 이런 현상을 가지고 우리의 고서(古書)나 문헌(文獻-삼국사기*삼국유사*환단고기 등)들이 <記*紀>를 모사(模寫)했다고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경우에도 우리 正史들은 절대로 그렇지 않고 다른 古來 문헌들만은 반드시 그렇다는 입장이야말로 바로 이중적이고 편협한 잣대가 아닐런지요?   이런 논리라면 시대가 앞선 [記*紀]에서 엄청난 부분을 차용(借用)한 [삼국사기*삼국유사]는 우리에게 치욕의 문헌이라고 하겠습니다.   역사발전의 단계나 도래(渡來) 과정의 정확한 실상(實狀) 그리고 인용 문구(文句)들의 우리 고유 언어들과의 유사*정합성整合性을 놓고 볼 때 누가 보아도 그 반대현상으로 인정하는 게 더 합리적입니다.   아직도 이해를 못한다면 그런 [사례]들을 적시해 주겠습니다.





【인용 부분】                 【일본】                【한국】





伊奘諾尊*伊奘冉尊      이자나기(미)-노-미코도     이자(地名)의 아기(아미 人名)


[해설] 우리 古語로 풀어야 <이자*이사>라는 곳에서 온 아기(男)와 어미(女)라는 뜻이 나온다.





소전명존記의 老翁*老婆     오키-나*오미-나        아기 네와 어미 네


[해설] 男子를 뜻하는 <아기>와 夫人을 말하는 <어미>이며 [네]는 <딸네*당신네>의 용법인 <-네>이다





天照大神 異名      瀨織津比咩(세오리-쓰-히메)    도읍지인 서울(소부리*서벌)

[해설]  <세오리>는 出自를 말하는데 소부리에서 태어났거나 연고가 있음을 알려준다.





소전명존記의 根之堅州國  네노-가다스-구니의 견주堅州(가다스)     가라수加羅愁


[해설]  대마도의 한 地名으로 古名 <가라수>인데 은폐하려고 가라수(唐州당주)로 고쳤다.





出雲                    이즈-모                니사(尼師-首長)가 사는 곳(메)


[해설] 우리말로 <최상*최고>인 <잇*이사>와 장소를 나타내는 <어드-메>의 <메>와 결합한 것이다.





소전명존記의 高志           고시          君長인 거수(渠帥)가 사는 수읍(首邑)


[해설]  우리 古語인 渠師*渠帥*고추古雛와 의미가 상통(相通)되는 말이다.





소전명존記의 八岐大蛇   야마타-노-오로치의 [오로치]   우리말로 <귀한 사람>인 <아라치>


[해설] 원래는 <‘알’의 아지>로서 <아라지>인데 閼智*乙支*乙豆支란 표현으로 전화(轉化)한다.





소전명존記의 韓鋤之劍   가라-사비-노-쓰루기의 [사비]   우리 농구(農具)인 삽(鍤) 


[해설] 서(鋤)는 우리 훈(訓)으로 <호미>인데 <삽>과 비슷하여 <사비>로 읽고 한국의 검을 가리켰다.





神武 渡來 기록 중 古那美(고사기)   고나미   <작은 어미>에 대응하는 <큰 어미>라는 뜻


[해설]  <왜명초倭名抄>에서도 화명(和名)에 [前妻-적처嫡妻]를 <고나미古奈美>라 한다.  이와 대응하는 우리 말 <작은 어미-작은 엄마>를 보면 알 것이다.





國引神話의 고금지라기栲衾志羅紀   다쿠후스마-노-시라기   우리 지명인 탁순(卓淳)


[해설]  경주신라와 구별하려 앞에 고금(栲衾)을 덧붙였는데 별칭(別稱)인 백래다구두내白來多久豆乃(시라기-타쿠쓰노)를 보면 <후스>를 한음절로 하여 <쓰>로 하므로 (신공기神功記에도 고금신라국栲衾新羅國*만엽집 권3에도 고각내신라국栲角乃新羅國이 언급) 일본서기의 신공기(神功記)와 임나(任那) 기록에 보이는 <탁순卓淳>의 일본식 이표기(異表記)인 [takushuno 타쿠쓰노]로 비정되는 것이다.


[환단고기]  임나(任那-대마도)는 삼가라(三加羅)인 좌호가라佐護加羅*인위가라仁位加羅*계지가라雞知加羅로 나뉘어 싸우다가 좌호가라는 신라에 인위가라는 고구려에 계지가라는 백제에 속하게 되었다.





일본서기 천손하강신화의 여육지공국膂肉之空國  空國인 무나쿠니  韓國인 가라쿠니


[해설]  원표기(原表記)를 감추려고 개악(改惡)한 것으로 원래는 韓國가라쿠니-空國가라쿠니-空國무나쿠니의 과정을 거친다(고사기엔 분명히 韓國이라 기록했는데 공空은 가라와 무나의 두 훈訓이 있다).





천손하강신화의 환촉槵觸*구지포류久志布流   구시후루    구지부리(龜旨峯구지봉)


[해설] 구시후루는 한반도 남부 김해의 구지봉과 연관이 있는데 <峯-부리>는 오늘날에도 <뫼부리>란 말로 흔적이 남아있다.   부리=부루-후루로서 b-h변화가 일어났다.








[앵무새 주장]





<추가> 위에 나오는 여수기(余守己)라는 인물은 [임하일기-이유원李裕元 1871)와 [증보 문헌비고-1908]에 등장하여 세상에 알려졌다고 합니다(트랙백된 악질식민빠님의 포스팅을 참고하세요)   서씨 족보에 실려 있다는 굔군님의 댓글도 있었는데 서씨도 본관이 여럿인지라 그냥 묶어서 서씨 조상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저 이야기가 실려 있는 족보는 [이천서씨세보]입니다.   그것도 두 설 중의 하나로 실려 있다고 하는군요.   기자의 40대손 기준이 위만의 난을 피해 이천의 서하성(徐河城)에 터를 잡아서 서씨가 되었다는 설이 그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기준은 한(韓)씨 성을 가져서 청주 한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그리고 기씨*선우씨가 모두 그의 자손이라는 설이 있죠.  그래서 이들 집안끼리는 혼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기자를 조상으로 삼는 집안으로 이천 서씨도 있었던 것이지요......그런데 저 설 말고 여수기가 등장하는 설도 있는 것이죠.   여수기가 단군으로부터 예국(穢國)의 추장으로 임명받아 변 彳을 붙여서 彳+余=徐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서씨 중 부여 서씨는 조상이 온조*부여륭이 서씨로 성을 고쳤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몇몇 서씨는 중국에서 건너온 시조를 모시고 있습니다.








[반론]





이 부분은 [여수기余守己]를 중심으로 성씨계보(姓氏系譜)의 변천과정을 서씨(徐氏)를 중심으로 해석한 듯 하군요.   공감이 가는 대목입니다.   따라서 다만 몇 가지 보충하는 입장에서 도움 글을 올리는 걸로 반론을 마칠까 합니다.





     1) 고대 왕력(王歷)을 정리한 <제왕세기帝王世紀>에 “황제 계는 여라 하였다.  제계帝啓...명건名建...명여名余”라고 기록했다.   여기에서 건(建)은 우리말로 [크다]는 뜻인데 <檀國의 성수聖樹였던 건목建木-큰나무*건모라-큰 마을*건길지-大王>의 사례에서 드러난다.   문제는 별칭(別稱)인 여(余)인데 여(餘-食+余)에 앞선 글자이므로 하(夏)나라 여씨(餘氏)의 前身인 바 단군조(檀君朝)의 명장(名將)인 동이계(東夷系) [여수기]의 존재를 가늠케 하는 기록이다.


     2) 지나(支那) 최초의 한문자전(漢文字典)인 <설문해자>에서 “여를 서라 한다.  여어지서야余語之舒也”라 풀이했다.   현(現) <이천서씨족보>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시조 여수기가 아홉 아들을 데리고 천하를 다스렸다]   바로 설문해자와 하후계(夏后啓)의 기록을 통해 <여수기>의 집안이 바로 <서씨>로 넘나든 동이족(東夷族)으로서 夏시대 前에도 꾸준히 맥을 잇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3) 중국학자 위취현(衛聚賢)은 이렇게 말한다.   <은殷나라 갑골문에는 김(金) 字가 없다.   여(余)를 음가(音價)인 서(舒)로 읽은 서(여*서余)자가 金이였기 때문이다(서와 김은 새*쇠로 넘나든다)  갑골문무금자시여자즉금자甲骨文無金字是余字卽金字  오월문화논총  1950  36P>   그리고 [옥편玉篇]은 “쇠를 금이라 한다.  철왈금鐵曰金”라 한다.   이어 [설문해자]에서는 “쇠를 세라 하고 삼水 변(氵)을 붙여 예濊(氵+세歲)라 한다”고 풀었다.   곧 한서(漢書) 권1 무제기에서 적시한 [동이예군東夷濊君]의 기록과 <독사방여기요>와 <수경주>의 기록에서처럼 대륙 내 산재한 예하濊河*예읍濊邑*예수濊水의 명칭을 참작하였을 때 동이예족(東夷濊族)의 진출과 그로부터 비롯되어진 姓氏인 여余*서徐씨의 근원을 추정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여수기가 단군으로부터 예국(穢國)의 추장으로 임명받아 변 彳을 붙여서 彳+余=徐가 되었다는 이야기의 출전이 어디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에 대한 근접한 해답이 될 듯하기 때문이다.





※ 여씨(余氏)는 분지(分枝)가 많다.   그만큼 단군조선과 지나(支那) 진출에서 많은 공훈(功勳)을 쌓았고 족적(足跡)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강성 여수시(麗水市)의 사족(余氏의 밭田이란 의미인 余와 田의 합자이다.  사族史源  1993 6-13P)*서언왕(徐偃王)을 중심으로 한 강소성 서주시(徐州市)가 원출(原出)인 서씨(徐氏)*만주에서 출자(出自)하여 산동성까지 남하한 여씨(餘氏)*소호금천의 후예란 설이 있는 예족계(濊族系)로 비정되는 김씨(余+아래 一)들이 가장 대표적인 성씨이다.






앵무새죽이기 태그저장  취소 구독하기

구독하기를 클릭해 보세요!이웃을 맺은 후 네이버me 메인에서

이웃의 새글을 보실수 있어요 덧글 쓰기  엮인글 쓰기  공감  

 

  


  

 [앵무새죽이기]이유립 환단고기를 주무르다-2...[2]  궤변망상학의 알량한 떡밥  2009/07/12 15:17


 http://blog.naver.com/nero1003/70053320532






□  [기기 記*紀]의 왜곡과정





[백제]는 역사편찬이 활발하였다(고흥의 서기書記*백제기百濟記*백제본기百濟本紀*백제신찬百濟新撰).   때문에 고구려에서 갈려 나와 스스로도 고조선을 이은 부여의 혈통임을 자부한 백제 왕조가 국가와 민족의 정통성을 고수하고 드러내기 위해 선사(先史)로 부터 유전(遺傳)되어오던 古來의 기록을 史書의 내용에 고스란히 기술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일본서기>를 보면 하타(秦진-일부러 성씨를 탈바꿈시켰지만 분명히 백제말로 썼을 터이니 “바다를 건너온 씨족“이란 바다가 하타로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씨족의 선조인 궁월군(弓月君)이 120縣民을 그리고 야마토 아야(倭漢直왜한직-여기서도 가라韓를 아야漢로 바꾼 왜곡이 드러난다)족단의 조선(祖先)인 아치노 오미(阿知使主아지사주)가 17縣民을 데리고 집단으로 도래한다(바로 이 부분에서 야마토 왜가 백제와 무관하다면 이와 같은 대규모 이주를 설명할 수 없다는 문화인류학적 접근이 적용되어야만 하는 논리적 귀결이다).  





이들 집안은 백제의 베(部)制를 그대로 따라 조정의 기록을 전담하는데 이 무렵 소중히 간직하고 온 백제 史書 기록을 바탕으로 삼아 倭의 역사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바로 여기에서 倭의 역사 기록이 어느 저본들을 인용하여 왜곡하였는지가 적나라해지는 부분이다.   사실 모든 원인의 근저에는 일본의 역사를 처음 편찬한 토네리 왕자(舍人親王사인친왕)와 히에다(禾+卑田阿禮비전아례)의 구술을 받아 <고사기>를 저술한 야스마로(太祖臣 安萬侶 태조신 안만려)에 의해 완성된 <일본서기> 등 두 史書들이 야마토 지배 씨족들의 조상을 아마테라스 오오미 카미(天照大神천조대신-아메노 호히와 아마츠 히코노 형兄의 후손이라는 주장의 원천)에 직접 연결하려는 충성심에서 비롯되어졌다.





즉 [기기 記*紀-고사기와 일본서기]는 반도에서의 고난과 치욕(광개토왕의 백제 공략과 비류계의 궤멸)을 간직하고 倭地에 도래하여 세력을 잡은 야마토 조정이 한 국가로서 倭의 탄생과 통치의 합법성과 정당성을 부여하는 한 가지 목적 하에 皇族 및 지배계급 가문(家門)들의 기원에 대한 권위 있는 고기록 문서로 만들어보려고 하나의 공식적인 신화를 창작하려 시도한 작품이다.





     - 열도를 하나의 통일왕조로 영속시키기 위해 잡다한 전설과 설화들의 순서를 정해주고 토착 신화에 등장하는 神들을 공통된 테두리 안에 엮어 새로 창조된 신화적인 족보(族譜)는 아직도 강력하였던 토착 씨족들의 조상들을 적절한 위상(位相) 속에 잠재웠으며 그들의 조상신들도 그렇게 공식화된 신화체계 속에서 알맞은 역할을 담당하도록 배려해 주고 있다.





    ▶ 기기(記*紀)의 신대사(神代史)는 많은 이야기의 연속으로 성립되어 있어서 그 가운데엔 여러 가지 민간 설화까지 엮여져 들어가 있다.   그러나 [기*기]는 그런 이야기의 단순한 집적이 아니라 결구(結構)와 조직이 분명히 있고 일정한 의도아래 일관된 정신으로 술작(述作)된 것임은 하나하나와 종합된 전체에 대해 여러 방면에서 시도한 위 글을 통해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쯔다(津田左右吉진전좌우길)   일본 고전의 연구  1948  671 P>


    ▶ ......지금까지 핵심적인 고전(古典)의 하나로 간주되어 온 <일본서기>의 내용이 과연 사실일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전후(戰後)의 고대사 연구는 학문세계가 사료(史料)*원전(原典)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은 믿을 수 있지만 고대 일본 역사에 대한 <일본서기>의 기록은 믿기 힘들다는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사에키佐伯有淸  1977>


    ▶ 대부분의 일본 역사학자들 사이에는 지배계급이 열도 외의 다른 곳에서 왔다는 이론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의 장벽이 있다.   이 전통은 19C 민족주의적 학자들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일본의 역사를 문화전파의 한 결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차라리 고립된 하나의 특이한 현상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1945년에서 10년 전으로만 가보더라도 일본문명의 출발점에 대한 합리적인 연구는 나타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주제를 진지하게 다루어 보려고 했던 학자들이 직*간접적으로 처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오키   1974>





일본 정부는 1960년 외국의 출판사*저자(著者)*교육자들에게 일본에 대해 「좀 더 정확」하고 「좀 더 새로운」정보를 제공한다는 목적으로 [국제 교육 정보 협회]라는 걸 창설하면서 동경대학교 명예 교수인 <사카모토 板本太郞판본태랑>에게 일본 천황에 대한 연구논문 집필을 의뢰하여 1984년 출간했다.   이 논문에서 사카모토 교수는 주장한다.   “4C 중엽 이후 일본은 한반도 남단의 미마나(任那임나)를 직접 지배했으며 백제를 보호국으로 삼았다...일본 천황과 일본 국민은 모두 다 고대 야마토(大和대화) 사람들의 후손이다.   야마토 황족은 일부 사람들이 이론을 세워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대륙으로부터 일본을 침공해서 원주민을 정복한 다른 민족의 후손일 수가 없다...천황과 신민(臣民)의 일체성은 이 기본적인 민족적 동질성에서 생긴 것이다...일본의 천황(天皇)들은 다른 정복 민족의 일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백성들과 강한 동족상의 유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기조(基調)는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역사학 연구의 가늠자가 되었다.  





      【여러분은 이 주장을 듣고 어딘가 귀에 익숙하지 않은가?  필자도 많이 들어 본 듯한데 그 이유는 現今 [사대부일모화론자]들이 우리 역사를 폄훼하는 근본적인 태도와 상당히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분명히 무언가 엄청난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듯하다.   다음의 공통적인 견해들이 바로 이런 현실을 분명하게 직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1) 샌섬은 “누군지 야마토 통치자의 절대적 우월성에 도전을 해올 가능성을 미리 짐작해서...정통 王朝로서의 권리 주장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으며 [記*]紀가 편찬된 동기도 주로 이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보여진다”라 말한다.





이는 고조선에 이어 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백제에 이르는 王朝 성립의 역사 과정에서 왕조사(王朝史) 찬술(撰述)의 절대적인 의도를 이미 경험적으로 꿰뚫고 있던 지배계급 집단(백제계 도래집단)으로서는 마땅한 결론이다.





   2) 페어뱅크*라이샤워*크레이그(1973)는 “야마토 시기 지배씨족의 권위를 끌어 올리고 중국의 오랜 역사와 비교될 만큼 오래도록 중앙집권적 지배를 해 왔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記*紀]의 찬자(撰者)들은 다분히 서로 상충되는 신화와 전통들을 전부 모아 함께 엮어 놓았다”라 말한다.


   3) 쯔다는 말한다.   “주우아이(仲哀중애)까지의 14대 천황(天皇)들이 6C 전반에 편찬된 제기(帝紀)에는 단지 死後에 부여되는 시호(諡號)로만 언급되어 있는데 반해 오오진(應神응신)에서 케이타이(繼體계체)까지의 天皇들은 王子 때부터 사용한 실제의 이름으로 기술되어 있는 걸로 미루어 볼진대 오오진(應神응신)이 야마토 왕조의 시조로 짐작된다.   [기*기]의 왕위 승계도 <주우아이>까지 모두 부자상속이나 실제로는 7C 전반 텐지(天智천지)부터 확립된 형식이라는 게 정설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통상 한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정당한 행위처럼 보이게 하려는 구실을 조작하는 것이다.   가령 있지도 않은 어떤 불의(不義)를 시정하겠다든가 또는 역사적으로 존재해 본적도 없는 어떤 원상을 회복한다는 역사적 권리라든가 하는 따위의 형태를 취한다.   19C 말엽 식민주의 정책을 흉내 내어 보려고 후발 주자(後發 走者)로서 안간 힘을 쓰고 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그런 목적을 정당화해보려고 의식적으로 고안해 낸 음모가 韓國은 4-5C로부터 南쪽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며 북부는 고래로부터 중국에 지배를 받아왔다는 이론이었다】





   4) 사에키는 말한다.   “위지魏志 왜전倭傳에 의해 AD 2-3C 일본 역사를 어느 정도 재구성 할 수 있다.   그리고 송서宋書 이만전夷蠻傳의 왜 오왕(倭 五王) 기록에 의거해 5C도 어느 정도 재구성이 가능하다.   하지만 4C에 대해서는 실존하는 기록이 없으며 그러므로 이 기간을 흔히 [불가사의한 신비의 4C]라고 부르는 것이다”





※ [기*기]가 편찬 될 당시 찬자(撰者)들은 위지(魏志)를 보았을 수 있고 위지(魏志)의 히미코(卑彌呼비미호) 기록에서 근본적인 영감을 얻은 게 분명하다(記는 진구우-神功신공 條에서 倭 여왕 히미코의 위지 239년 기록을 직접 인용하고 있다)





   5) 쯔다(津田左右吉진전좌우길 1950)은 말한다.   “기기記紀 찬자撰者는 <진구우>를 <히미코>에 맞추다 보니까 <오오진>과 역대 지배자의 재위 기간이 앞으로 끌어올려지고(2주갑周甲) 재위가 늘어나게 되었다”


   6) 레드야드도 “記의 撰者들이 魏志에서 <히미코>를 AD 230-240년대로 두자 자신들이 만든 기록을 그것과 일치되도록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진구우>에게 <히미코> 전후 시기인 AD 200-269라는 긴 치세治世를 설정했고 자연히 호무다(예전별譽田別-응신應神) 역시 2周甲 앞당겨져 AD 269년으로 조정되고 말았다”라고 말한다.





[記*紀]는 <호무다 譽田別-神武>를 <진구우 神功>의 아들로 꾸미는 바람에 [진구우 條]에 야요이 시대와 중기 고분 시대의 이야기가 뒤섞이고 말았다.   따라서 AD 203년 전의 <진구우> 기록은 전적으로 <히미코 卑彌呼>의 이야기에 근거를 둘 수 있으나 AD 203-213년은 <진구우>와 <오오진 應神>을 모녀지간으로 연결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따라서 203년 이후(정확히는 AD 246년 이후)는 4C 후반의 중기 고분 시기로 내려와야 한다.





고사기는 호무다 와케(品陀和氣命품타화기명*譽田別예전별*應神응신)을 오키나가 타라시 히메(息長帶比(日)賣命식장대비(일)매명*氣長足姬尊기장족희존*진구우神功신공)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장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예견되어진(知坐腹中國也지자복중국야) 둘째 아들로 만들어 놓았다.   二周甲(120년)의 단절 기간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 <일본서기>를 보면 주우아이(仲哀중애-타라시 나카쯔 히코)는 AD 200년에 죽고 <진구우>는 AD 269년에 죽었다.   그리고 AD 390년 이후 오오진이 나타날 때까지 120년간 중국 기록에 倭에 대한 언급이 사라지며 혼란기를 겪으며 심하게 분열되었다.   그런데도 [기기]의 찬자들은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조작하기 위해 <진구우>의 아들로 만듦으로서 일본 역사에서 120년이 실종되어 버리고 말았다.





※ <고사기>의 <호무다>에 관한 장(章) 직전에 기술된 짤막한 각주(脚註)는 그와 같은 일을 조작해야하는 찬자(撰者)들의 고뇌를 의미심장하게 드러내 보인다.  그들은 <호무다>의 이름이<오키나가 타라시 히메>의 「어자御子에 대한 어명御名」이었다고 쓰도록 강요되었다는 사실을 은유하고 있다.   <고사기>는 이를 “어떤 神이 자기 이름을 御子의 御名과 바꾸기를 원했으며(以吾名欲易御子之御名이오명욕역어자지어명)...그들은 두려움에 가득 찼으나...어명에 따라 삼가 성함이 바꾸어 지이다 라고 말하면서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 적었다(恐隋命易奉공수명역봉).





“[記*紀]가 정말로 설명*인식시키고자 목적한 것은 [열도 내 일본 황실과 국가의 정략적인 기원-국가와 황실皇室 성립의 유래나 본질을 밝히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의미]이지 [일본 민족의 진정한 유래]가 아니다.   신대(神代) 다시 말해 皇室의 조상신(皇祖神황조신) 시기를 맨 처음 소개한 다음 [사람의 시대]로 옮아가는 [기*기]의 서술 태도는 오로지 지배자인 皇室을 합법화하기 위한 구성에 관한 것이지 [우리들의 민족에 대한 진정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므로 4-5C의 모든 상황이 전부 神代 이야기에 반영되고 있다.“ 라는 쯔다(1948)의 주장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하지만 쯔다도 태생적 한계로 皇室의 근원이 다르지만 이민족(異民族)이었다는 주장엔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사고의 한계를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기*기]는 오오진이 王朝를 창시한 후 백제가 망할 때까지 두 나라의 지배집단 사이에 유지된 친밀한 관계에 대해 엄청날 정도로 풍부한 기록을 제공해주고 있다.   만일에 야마토 왜가 백제와 아무 관련이 없이 성립되었다면 오오진 시대 백제에서의 이주민들의 대량유입(궁월군과 120현민*아지사주의 17현민 등)과 끊임없는 기술자집단과 문화 도래(야마토 아야 東漢*가와치 아야 河內漢*이마키 아야 今來漢)를 설명할 길이 없다.





   7) 히라노(平野邦雄평야방웅 1977)과 하야시야(林玉右次郞임옥우차랑)은 말한다.   “야마토 조정은 오오진(應神)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진무(神武)와 스진(崇神)은 오오진의 업적을 갈라서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로 보여진다.


   8) 나오키(直木孝次郞직목효차랑)은 말한다.   “나니와(難破난파)에 오오진과 닌토쿠(仁德인덕)에 의해 새로운 王朝가 수립되었는데 그 前왕조의 통치자들과는 아주 계통이 달랐다.





倭人들이 근본적으로 한반도 이주민들이라는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부분은 다음과 같다.   때문에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볼진대 이주민들이 가지고 간 언어(人名과 地名 그리고 物名)들이 後代에 이르기까지 고스란히 녹아있음은 누구라도 부인하지 못한다.   즉 말소리의 전래과정과 선후관계가 뚜렷하다는 것이다.





   - 정착한 先祖 가운데 [아마*아메]로 시작되는 성씨(姓氏)들이 확연하게 구별되며 모두 신별(神別)이나 황별(皇別)로 분류된다.


   - 도래인(渡來人)들이 천강(天降)을 할 때 종종 천반선(天磐船-배)를 상징하는 단어가 나타나고 있다.


   - [아마]는 왜어(倭語)로 <하늘 또는 바다>를 뜻하는 말로 바로 이주민의 도래과정이 그대로 함축된 소리 값이다.





       ▶ 660년 수(隋)나라에 간 倭의 使臣은 王의 姓이 아매(阿每-아마사람 즉 반도인)요.   그의 호(號)는 오기미(阿輩鷄彌아배계이)이고 왕후(王后)는 기미(鷄彌(계이)라 한다 하였다.





※ 倭國의 고대 역사에서 신(神)字가 붙은 인물은 단 4사람(숭신崇神*신무神武*응신應神*신공神功)뿐이며 이들은 공교롭게도 모두가 渡來人 이거나 韓國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진무(神武)는 원래 오오진(應神)과 겹치는 인물이다.   하지만 후일 日本이란 國號를 새로 만들면서 [일본서기]나 [고사기]를 창작하여 역사적인 사실로서 뒷받침함으로서 倭國의 역사를 끌어올리려는 과정에서 國初의 인물로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고사기]의 [일본무존]의 동정기(東征記)  백제 [ 초고-근구수]  정벌 과정과 겹치는 것과 비슷한 부분이다.





   9) 커어클랜드(1981)는 말한다.   “일본 역사의 뿌리가 처음부터 아시아 대륙 특히 韓國과 만주에 있다는 생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21년에 기다(喜田貞吉희전정길)는 4C 경 반도에 세워진 강력한 세 王國과 거의 동시에 나타난 첫 日本 국가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韓國의 세 나라 가운데에서 고구려와 백제는 중남부 만주에 고향을 가진 부여족(夫餘族-고조선의 맥을 이은)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의 일부가 창건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역사가들과 민속학자들은 옛 중국 史書에 기록되어 있는 부여에까지 유래된 전설들이 고대 일본의 특정 신화들이나 의사(疑似)된 역사적 기록들과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을 재빨리 지적했다”





따라서 [記*紀]에 서술된 신화적인 기록들(神들의 강림과 열도에 정복임무를 띄고 파견되는 반신(半神)들에 관한 이야기)이나 그 후에 인간적인 냄새가 가미된 정복활동에 대한 뒤섞인 서술들이 전부 반역사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韓國의 역사문헌과 비교분석할 때 참된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는 납득할 만 한 틀을 보충해줌으로서 해석이 불가능했던 부분에 대한 하나의 정형적인 해답을 제공해줄 수 있다.





   10) 하늘의 神들이 열도(스사노오의 이즈모와 니니기의 큐우슈우)에 내려와 원주민이었던 땅의 神들을 무찌르고 지배했다.   니니기가 츠쿠시(筑紫축자)의 히무카(日向일향) 다카치호(高千穗고천수) 봉우리로 내려오는 대목에서 특별히 한국(韓國)이 언급된다.  에가미도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韓國을 天神들의 원 고향으로 간주한다면 이 신화는 우리에게 아주 명백해질 것이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백제계 도래 집단(야마토 왜에서는 이들 지배집단의 우두머리를 다른 집단들과 달리 와케(別)라는 독특한 칭호를 종종 붙여 기록하고 있다)으로서 나름대로의 自國 역사서와 우리 민족 전래 史書와 문헌들을 접하거나 소지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응신(應神-神武) 시기의 정황에서 [記*紀]의 撰者들이 그런 사실들을 교묘하게 [記*紀]에 접목시키거나 입맛에 맞게 혹은 직접적인 강요에 의해서 왜곡 인용하지 않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전후관계가 분명한 한국과 일본의 문헌사료에 대한 비교분석은 이런 측면에서 다양한 연구*고증을 통하여 신중하게 접근되어야 할 것이다.





[왜곡 사례]





【창세신화】 우리의 기록을 채록한 일을 감추기 위해 神代의 기록에서도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았다.   실례로 아메노 미나카 누시(天之御中主尊천지어중주존)와 가미 무스비(神皇産靈尊신황산영존)와 더불어 다카미 무스비(高皇産靈尊고황산영존)은 천지창조신의 하나이다.   이자나기(伊邪那岐)는 아메노 누나카 누시의 16세 손이다.   아마테라스 오호미 카미(天照大神천조대신)는 이자나기의 왼쪽 눈에서 태어났다.   니니기는 이 女神의 손자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제1대 神인 다카미 무스비의 딸과 제17세대 神인 아마테라스의 아들이 결혼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소전명존】일본서기에는 협야노(陜野奴)가 소전명존(素戔鳴尊) 혹은 신무(神武)로 얼핏 생각하게끔 교묘한 장치를 만들어 놓았으며 언파불합이 언파렴무노자초즙불합존(彦波瀲武鸕鷓草葺不合尊)으로 각각 왜곡 인용하여 적혀 있다.





 【비미호와 신공】[記*紀]가 편찬 될 당시 撰者들은 위지(魏志)를 보았을   수 있고 魏志의 히미코(卑彌呼비미호) 기록에서 근본적인 영감을 얻은 게 분명하다.   따라서 기기(記紀) 찬자(撰者)는 <진구우 神功신공>를 <히미코 卑彌呼비미호>에 맞추다 보니까 <오오진 應神응신>과 역대 지배자의 재위 기간이 앞으로 끌어올려지고(2주갑周甲) 재위(在位)가 늘어나게 되었다.





【진구우神功 이후의 세계世系와 재위在位 기간】 '경행왕기(景行王紀)'에는 경행왕이 AD. 71년에 즉위하여 60년을 재위하고 AD. 130년에 사망한 것으로 적혀 있는데 29년부터 50년까지 약 20여 년 공백기는 재위기간을 약 20여 년 늘리면서 생긴 공백으로 보여 진다(2, 3, 4, 12, 13, 18, 19, 20, 25, 27, 28, 40, 51, 52, 53, 54, 55, 56, 57, 58, 60년 조가 적혀 있다.   따라서 실제 재위기간은 60년에서 20년을 뺀 약 40년이므로 AD 71년-AD 110년경까지이다)





     경행왕의 사망년도를 AD 110년경으로 보면 다음인 성무왕의 실제 즉위년도가 AD 155년경이므로, 경행왕이 사망한 때로부터 성무왕이 즉위한 때까지 약 40여 년간의 공백기가 생긴다.   성무왕이 [일본무존]의 아들인 중애왕을 태자로 삼았고 '중애왕기(仲哀王紀)'를 보면 야마토다케루(日本武尊일본무존)을 부왕(父王)이라 부르고 있으므로 경행왕-성무왕 사이 약 40여 년간의 공백기는 일본무존이 통치한 기간이다.   일본서기 찬자(撰者)는 이 40여 년간의 공백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무왕을 경행왕 바로 다음 왕으로 적고 경행왕의 사망년도를 실제보다 약 20년 늦추는 동시에 성무왕의 즉위 년도를 약 20여 년 앞당겼다.   하지만 백제의 구수왕이 왜곡된 약 40여 년간의 日本武尊 통치 기간을 없애기 위해 (왕계의 연속성을 가장하기 위하여) AD 110년경에 죽은 경행왕 대신에 일본무존(日本武尊)이 죽었다고 적고, 경행왕의 재위기간을 40여년 늘려 놓았던 것이다(성무왕 일본서기년도 AD 131년-실제즉위년도 AD 155년경)





     성무왕기(成務王紀)에는 AD 131년-AD 190년(60년 간)까지 재위하였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실제 재위는 AD 155년경-AD 161년경까지이므로 '성무왕기'에 적혀 있는 기간은 실제보다 앞쪽으로 20여 년 뒤쪽으로 29년 합계 50여 년 더 많게 되어 있다(성무왕의 즉위년도가 20여 년 빨라져 있는 것은 경행왕-성무왕 사이에 일본무존이 40여 년간 통치한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20년은 경행왕의 재위기간에 20여년은 성무왕의 재위기간에 각각 넣어 경행왕 바로 다음에 성무왕이 통치했던 것처럼 왜곡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무왕의 사망년도가 실제년도보다 29년 늦어져 있는 것은 신공왕후(神功王后)의 사망년도를 늦추기 위하여 앞에 재위한 성무왕과 중애왕의 사망년도를 연쇄적으로 뒤로 늦추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에서 가장 많이 왜곡되어 있는 부분은 '신공왕후기'이다.   위지(魏志)에 의하면 신공왕후는 AD 247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일본서기에 적혀 있는 신공왕후의 사망년도는 실제년도보다 22년이 늦추어져 있다.   이는 신공왕후의 사망으로 구주(九州)의 왜왕(倭王)시대가 끝나고 백제의 직할통치 기간을 거쳐 AD 390년부터 대화 왜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AD 247년-AD 390년까지 (142년)의 공백기를 감추고 구주 왜와 대화 왜를 같은 왕계(王系)로 만들기 위하여 신공왕후의 사망년도를 실제년도보다 22년 늦추고 응신왕(應神王)의 즉위 년도를 120년 앞당겼다.





 【진무 神武】[記*紀]는 <호무다 譽田別예전별>를 <진구우>의 아들로 꾸미는 바람에 [진구우 條]에 야요이 시대와 중기 고분 시대의 이야기가 뒤섞이고 말았다.   다시 말해 [고사기]는 호무다 와케(品陀和氣命품타화기명*譽田別예전별*應神응신)을 오키나가 타라시 히메(息長帶比(日)賣命식장대비(일)매명*氣長足姬尊기장족희존*진구우神功신공)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장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예견되어진(知坐腹中國也지자복중국야) 둘째 아들로 만들어 놓았다.   二周甲(120년)의 단절 기간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다시 반복하지만 倭國의 고대 역사에서 신(神)字가 붙은 인물은 단 4사람(숭신崇神*신무神武*응신應神*신공神功)뿐이며 이들은 공교롭게도 모두가 渡來人이거나 韓國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진무(神武)는 원래 오오진(應神)과 겹치는 인물이다.  하지만 후일 日本이란 國號를 새로 만들면서 [일본서기]나 [고사기]를 창작하여 역사적인 사실로서 뒷받침함으로서 倭國의 역사를 끌어올리려는 과정에서 國初의 인물로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고사기]의 [일본무존]의 동정기가 백제 근초고-근구수의 정벌 과정과 겹치는 것과 비슷한 부분이다.





[인용 사례]





 【소전명존】 팔기대사(八岐大蛇) 퇴치전설은 우리의 환웅신화(桓雄神話)와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





[記*紀]는 오오진(應神)이 王朝를 창시한 후 백제가 망할 때까지 두 나라의 지배집단 사이에 유지된 친밀한 관계에 대해 엄청날 정도로 풍부한 기록을 제공해주고 있다.





 【진무설화】고구려 창건자 주몽(朱蒙)은 부여를 떠나 강을 건너는데 거북의 도움을 얻었다.   그는 天孫으로 하늘을 아버지로  江의 神의 딸을 어머니로 가졌다.   진무(神武)의 전설은 이와 여러 가지 유사점을 가졌다(나라의 창건자가 바다를 건넌다.   거북의 등에 탄 사람이 길잡이로 나타난다.   두 사람은 똑같이 天孫들의 하나이고 어미는 바다의 女神의 딸이다)   <에가미>





     “주몽왕의 신화는 진무 아버지의 신화와 같다.   일본 신화의 퉁구스적인 측면은 문화유입의 증거인 동시에 그들이 살고 있던 대륙의 관계된 설화가 있던 지방으로부터 가까이 위치한 열도에 주민의 주요 집단이 이주해왔다는 오랜 옛 시절의 증거이다...이는 주몽신화의 분석에 의해 여실히 뒷받침되고 있다”   <스제스니아크  1951>





      진무의 이야기에 나오는 세 종류의 동물(거북과 까마귀와 곰)들이 주몽의 설화(거북과 새와 짐승들)에서도 구조상으로 정확히 겹친다(부여의 창건자인 東明설화에서의 거북이도 참작될 수 있다).   아울러 [일본서기]에서 하백(河伯)의 이야기를 언급한 부분(닌코쿠 조와 교오코쿠조)도 인용이 의심되는 의미심장한 구절이다.   아무튼 진무(神武)의 東征과 앞선 휴우가(日向)신화를 살펴보면 일본 神話와 우리 민족의 神話 사이에 놀라운 1:1 대응관계가 나타난다.   이는 열도의 지배계급 문화와 역사기록 자세의 근원에 대한 명확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아마도 이러한 근거사료는 고분문화로 특징지어진 문화가 갑자기 출현하여 융성하였던 5C 경에 韓國으로부터 전래된 것이 틀림없다.





      “[記紀]에서 일본의 신화는...皇室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펼쳐지며 신화체계는 실로 거기에 끈질기게 집중되어 있다.   그 결과 일본 신화는 아주 노골적이리만큼 王權 기원의 구도로 맞추어졌으며 니니기의 신화처럼 韓國의 王權 신화(단군 및 가라 신화)와 아주 비슷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사실은 같은 근원을 차용한 증거로 간주된다.”   <오오바야시(大林太良대림태량  1977>





      구(舊) 삼국사의 주몽신화를 인용해 <천제天帝가 부여 사람들에게 천강天降한 천손天孫을 위해 자리를 비키라고 경고 한다.   여기에 하늘의 아들인 해모수가 내려온다.>   일본의 천손신화인 니니기도 태양을 뜻하는 ‘알’인데 거의 동일한 구조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조적인 흐름이 고조선(古朝鮮)의 원천에서 부여-고구려-백제-그리고 니니기와 진무의 흐름까지 감지할 수 있다.   <가아디너  1988>





      [記紀]에서 진무의 東征 내용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記에서는 이하레비코(반여언磐余彦*신무神武)가 東征을 완수하는데 紀는 진무(神武)와 형인 이쯔세(五瀨命오뢰명)로 나란히 나온다.   <이쯔세>는 전반부 항해 과정의 주역이며 상륙 직후 <도미비코>와의 전투에서 전사한다.   <진무>는 후반 육상전투의 주역으로 정복에 성공한다.   여기서 백제의 비류와 온조 설화가 겹치는 것이다.   바다의 인물인 兄 비류(해안지대에 나라를 세운다)와 육지의 인물인 온조(내륙의 위례성에 도읍한다)가 역시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난다.   兄은 실패하여 죽지만 동생은 성공하여 新王國의 시조가 된다.   이러한 기본 구성은 진무의 동정과 교묘히 오버랲 된다.”   <오오바야시>





여기에서 [앵무새]의 가정이 얼마나 허술한 강변이며 작위적인 의도인지 분명해진다.   위와 같이 [기기]는 신왕조 창건의 핵심인 황족의 기원과 황실의 정통성에 끈질기게 초점을 맞추면서 서술 구도나 기술태도의 대부분에서 우리 고래 사서나 문헌들의 중심 줄기와 흐름을 그대로 수용하거나 약간 변형시켜 인용하고 있음이 뚜렷이 감지된다.   이런 관점에서나 다각적으로 검토하여 굳어진 민족 이동의 흐름으로 볼진대 문화 유입과 설화나 기록의 차용의 과정은 결코 역류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사서에 나타나는 우리 기록과의 동질성에 대한 선후여부와 인용관계가 명확해지는 부분이다.





   - 부여와 고구려(고조선을 이은) 등 같은 근원에서 나온 건국 전설은 天神 특히 그들 중 天神이나 皇族이라 불리는 이민족에 의해 일본으로 도입되었다.   바로 이들이 츠쿠시(筑紫)로부터 세도내해의 해안을 따라 킨키(近畿)지방으로 이동했을 때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역사적인 사실이 일어났으며 이를 계기로 옛날의 건국 전설들이 새로운 사실에 일치하도록 재구성된 것이다.





이로서 天神*皇族으로 알려진 집단들이 우리 민족의 古來 신화와 전설과 같은 근원에서 나온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이동 및 문화유입의 경로에 바탕을 둔 설화구조가 [만주 동부-한국 북부-한국 남부-큐우슈우-킨키지방]에 이르러 완성된다는 자연스러운 결론에 이른다





※ 실례로 열도 내에서 곳곳에 보이는 비슷비슷한 명칭(人名*地名)에서 구시후루(久士布流구사포류)의 후루(벌)는 우리말인 <마을>이며 그 장소를 말하는 <소호리>는 백제의 <소부리>*신라의 <서벌徐伐>인데 일본어로서는 풀지 못하고 이해가 안 되는 말들이 韓國語로는 바로 풀어지며 倭地와 韓國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설화나 명칭들이 도래나 이주의 과정을 통해 파악해 볼 때 매우 합리적으로 이해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





상기(上記)와 같은 의미에서 한 나라의 문헌사료가 다른 나라의 古來 史書를 인용했다는 사례처럼 두 종류의 저서들을 비교하려면 [앵무새]의 주장처럼 기록 가운데 몇 가지 단어만 칼로 오려내듯이 따와 비교하지 말고 보다 종합적이며 신중하고 치밀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특히 언어학적인 분석비교에서는 이런 어리숙한 분석 자세는 금물이며 매우 주의를 요하는 부분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그런 정황이 된 역사적 흐름의 맥을 그 시대의 상황에 맞추어 다양하게 짚어 낸 다음 그런 흐름에 대한 깊숙하고 전체적인 배경을 연구하여 가장 명확한 결론을 도출해내는 학문적인 자세가 필요하며 또 반드시 요구되는 것입니다.








******************** [신무神武-응신應神] ********************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은 야마토(大和-고토쿠孝德효덕까지는 왜倭로 표기하였음)의 지배계급 1182개 姓氏를 기록하고 있는데 서문(序文)에「마히토(眞人진인)가 皇族 중에서도 으뜸이므로(皇別中上氏황별중상씨) 首都지역의 마히토 氏族들을 제1권의 첫머리에 기록한다」고 하였다.  예컨대 텐무(天武천무)는 아마노 누나하라 오키(天渟中原瀛천정중원영)의 마히토(眞人)의 스메라미코토(天皇천황)라 불렀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모든 마히토 氏族들이 우연찮게 백제왕족의 後孫으로 간주된다.   바로 이 야마토 王朝가 역사의 여명기에 기마(騎馬)를 동반하여(위지 왜인전을 보면 당시 구주九州에서만 100여개가 넘는 소국분립(小國分立) 상태였고 말(馬)조차 출현하지 못했다) 왜지(倭地)에서 처음으로 역사적 기록조차 없는 원사(原史) 시대를 넘어 고분(古墳)시대라는 뚜렷한 그림자를 드러낸 실체이다(일반적으로 일본의 역사시대 진입은 아스카(飛鳥비조-AD 6C 중엽부터)시대 말쯤으로 잡는 게 통설이다).





※ AD 375년 이후로 추정되는 고분들에서 별안간 다량의 마구(馬具)가 쏟아져 나오며 이 시기에 야마토 평원에 정복국가가 형성된다.





동경대학의 <에가미>씨는 이에 근거하여 4C 초엽 기마민족이 속칭 [숭신崇神]으로 칭하는 미마키(美麻紀伊理毘古미마기이리비고)의 통솔 아래 九州를 정복했으며 그 후 1-2세대를 지나 진무(神武신무)가 나타나 기나이(畿內기내)지역으로 진출하여 야마토왕조(大和 倭)를 세운 것으로 단언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백제의 존재와 그 무렵의 정세(광개토왕과의 전역戰役)를 완전히 도외시한 견강부회임을 명백하게 짚어나가겠다.





이들은 분명히 무언가 엄청난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바로 다음과 같은 세력 이동의 흐름과 고고학적 발견이나 지배구조의 변화 과정이라는 현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이는 과연 무엇을 말해주는가?





   1) <샌섬 1931>에 의하면 일본이야 말로 [신석기-청동기]로 바뀌기 전에 철기 문화가 일어난 정황이 뚜렷하다.   야요이 시대와는 달리 고분시대 무렵에는 祭器와 의장용인 청동기(거울 등)외에 무기와 갑주는 모두 철기였다.   따라서 모든 고고학적 추정으로 볼 때 진정한 의미의 청동기 문화는 없었던 것으로 간주된다(이는 철기를 지닌 집단이 도래하여 전 시대와 단층을 이루며 거대한 고분 축조*고열로 구운 토기 사용*기마무장력*투구와 갑옷 착용*철검 휴대로 특징지어진 이주인(移住人)들이 압도적으로 세력을 장악한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입증한다)


   2) <먼로  1911>는 “무사시(武藏무장)지방에서 상당한 규모의 동광(銅鑛)이 발견된 걸 경축하기 위해 이름 지어진 와도(和銅화동-일본 구리)시대는 겐메이(元明원명 707-715)의 즉위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는 韓國에서 銅을 가져왔는데...공급원이 불확실했을 뿐 아니라 양도 충분치 못했다...이런 사실이 아마도 일본에 청동기시대 흔적이 별로 없다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다.   때문에 일본인들은 구리를 <아카가네-붉은 금속>이라 불렀고 청동(靑銅)을 <카라카네 혹은 카라(韓) 금속>이라 칭하여 바로 韓國의 특산품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라 말한다.


   3) 응신조(應神朝)에 갑자기 전답(田畓) 개간과 저수지 축조 공역이 활발해지고 수전농법(水田農法)이 퍼졌으며 그 일을 전담한 집단들이 모두 韓國에서 도래(渡來)한 족단들이었다(야마토 평원은 규모가 작아도 농업생산성이 제일 높았다)


   4) 페어뱅크*라이샤워*크레이그 교수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상스럽게도 4-5C 경 새롭고 강력하게 대두된 열도문화의 파도는 반도-북구주-세토내해-킨키(近畿근기)지방으로 이어진다.   근기지역은 바로 최초인 동시 가장 큰 분묘 축조의 중심지가 된 곳이며 야마토 왕조의 성립과 맥이 닿는다.   아울러 진무(神武)의 동정(東征)도...규우슈우(九州구주)에서 세토 내해를 거쳐 이동해간 정복 집단의 움직임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반영하는데 이는 고고학적 물증과 완벽하게 일치 한다”





※ AD 400년경까지는 상당 기간 일본 중심부(本州본주)에 살고 있던 여러 씨족들에 대한 일반적인 통치권을 행사한 지배 씨족이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들은 큐우슈우에 기반을 둔 것이 틀림없으며 韓國 남부의 중요한 수장(首長)들과의 혈연 내지는 친밀성이 영향력 행사에 기여한 듯하다(일본은 6C 전반까지 중국과는 교류가 거의 없었거나 전혀 없음이 감지된다).   킬레이(1973)에 의하면 스진(崇神숭신)朝를 포함한 고대 王朝는 종교적 지배권을 겸비한 집단으로 3-4C 까지 세력을 이어왔다.   하지만 그 후 위압적이며 호전적인 철기 기마집단이 압도적으로 위세를 떨쳤다.  이들은 케이타이(繼體계체)에 이르러 新왕조를 완성한다.





   5) 이 시기 야마토 왜는 이전과는 다른 독특한 지배구조를 만들어 낸다.  첫째로 지극히 고구려*백제적인 베(部)라는 근시장인(近侍匠人-직능집단)을 어우른 몇 개의 호족(豪族-의심할 것도 없이 열도를 새롭게 정복한 족단으로 부터 형성된 장군가將軍家)들에 의해 강역들이 지배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들을 하나로 묶어 움직인 우월한 氏族의 패권(覇權)을 존중하면서 스스로는 강력한 세습적 권력을 인정받았다.   두 번째는 古來로부터 유전(遺傳)되어 온 우리 민족의 전통적 관습인 씨(氏-우지)를 기본으로 하는 족장집단을 통솔하던 우지노가미(氏上)라는 특별한 사회구조를 만들어 세습적인 씨족의 우두머리로서의 지위로 인정받던 가바네(姓)로 발전시킨 것이다(이런 씨성제氏姓制는 韓國과 가장 친연성이 깊다).





[일본서기]를 잘 살펴 뒤집어 보면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였던 탓인지 왜곡하여 편찬한 다양한 神話의 밑바닥에 깔린 의도적인 배경 구도가 잡힌다.   이를 필자가 응신(應神)으로 규정하려는 진무(神武)에 관련된 구절을 사례로 들어 설명하려 한다.





※ 應神이 백제계 왕족인 것은 그의 이름에서도 은연중에 단서를 주고 있다.  백제를 이칭(異稱)으로 [응준鷹寯]이라고 부른 기록이 지나 사서(支那 史書)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1) 진무(神武)의 조상을 가라계였던 니니기노 미코도(瓊瓊杵尊경경저존)와 연결시켜 야마토 왜가 열도의 오래된 王朝로서 단절되지 않는 맥을 이었다는 걸 보여주려 한다.





   - 그가 정복한 뒤 포용한 가라계를 증조할아비가 히무가(日向일향)에 강림하여 낳은 세 아들 가운데 長男으로 만든 호노 스세리노 미코도(火闌降命)가 다스린 하야히도(準人준인)로 감추었다.   <하야히도>의 [하야}는 [가야]로 <가야사람>이란 뜻이다.


  


   2) 진무의 할아비를 그 다음인 次男으로 만들어 연결하여 세계(世系)가 오래되었음을 강조하는 가운데 그 뿌리가 한반도에 있음을 실마리로 포함시켰다.





   - 이름인 <히코 호호 테미노 미코도 彦火火出見尊언화화출견존>에서 [히코=해의 사내][호호=벌*들판][테미노 미코도=나타난 고귀한 분]로 분해되어 우리 민족의 상징이었던 [해의 남자(後孫)로서 문득 나타난 분]이란 의미가 짙다.





   3) 할아비를 한반도 쪽에 위치한 해신(海神)의 딸(도마요리히메 豊玉姬풍옥희)과 이어주면서 둘 사이에서 탄생한 진무의 아비(우가야 후키아헤즈노미코도 鸕鷓葺不合尊노자즙불합존)까지 新왕조 수립 전까지 열도에 군림한 가라계와 연결고리를 만들어 단절된 역사가 아님을 강조한다.





   - 풍옥희의 <豊>은 원래 음가(音價)가 [가라]였으나 나중에 <도요>로 바꾼 것(이는 가라韓을 가라唐로 탈바꿈시킨 이유와 비슷하다)이니 가라계와의 연결 의도가 짙다.


   - 그러나 아비의 이름에 겉으로는 [우가야]를 붙여 놓았지만 [노자즙불합]이란 특이한 단어로 두 집단의 혈통이 다름을 암시해준다(노자즙불합을 그대로 해석하면 “가마우치와 메추라기는 함께 지붕을 이으면 제대로 맞추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4) 마지막으로 진무의 별칭에 결정적인 암시구(暗示句)를 만들어 놓아 분명히 새로운 도래(渡來) 정복 집단이 강력한 통지차의 영향 하에 지배하는 新왕조를 건설했음(미즈노 1969)을 은연중에 밝혀준다.





   - 진무의 이칭(異稱)으로 가무야마토 이와레히코노 미코도(新日本盤余彦尊신일본반여언존)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하겠지만 간략히 말하여 [새로운 일본을 만들어 부여씨의 밑바탕을 굳게 이룬 분]이라고 노골적으로 언급한다.





때문에 신무(神武)는 [알왕]인 니니기노 미코도(瓊瓊杵尊-니니기는 구슬이란 의미로 알이다.   알은 우리 민족 설화체계에서 처음엔 태양을 지칭하였으나 새롭게 알로 전화하여 난생설화의 중심축으로 연결고리를 만든다)의 증손(曾孫)으로 탈바꿈되어 神代의 역사를 이어받는 현실적인 존재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따라서 일화(逸話)에 나오는 다카치호노다케(高千穗峯고천수봉)의 동쪽 산기슭에서 사노노미코도(狹野尊협야존)로서 先住 도래인이었던 가라계와 연결되어 출현해야하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처음 왜지에 이주하여 세력을 떨친 가라계를 이어 완벽한 무장집단을 이룬 백제계의 도래집단으로서 구주를 장악하고 본주까지 세력을 확장하는 새로운 강자로서 등장하는 과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강림한 구시후루다케(久士布流多氣구사포류다기)의 [구시]는 바로 가라 시조(始祖) 수로왕(首露王)과 관련 있는 구지봉(龜旨峰)의 [구지]와 대칭된다.





   5) 고고학적으로 갑자기 거대한 고분이 이 시기에 출현했다는 것은 어떤 이질적인 지배계급이 기존의 백성과 대족장(大族長)들에게 신생국가의 강력한 통치체제를 인식하며 숭배감이 울어나게끔 하려는 의도로 오직 자신들만을 위한 대규모의 분묘를 만들었다는 걸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또한 부장품들이 갑자기 호전적*군사적*침략적*귀족적인 성격으로 달라진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 야요이 시대에는 동질성을 기반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공동의 묘지에 함께 묻혔다는 사실과 뚜렷이 비교된다(이노우에 井上光貞정상광정 1968).   아울러 명확하게 5C의 분묘엔 횡혈식 묘제*구상적(具象的)인 표현의 벽화*기마용 장구*대륙풍의 길고 곧으며 환두(環頭) 형식의 칼(8C 전에는 채굴이 안 되던 金을 사용한 기법)과 투구와 속을 넣은 옷과 철편으로 만든 갑주(리베팅 고정기법의 찰갑札鉀은 특히 기마군사집단과 관련이 깊다)*사람과 말 모양의 하니와*관모(冠帽)*금은제(金銀製) 신발 같은 독특한 반도 문화적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 회전판을 사용하며 고열로 구운 스에키(須惠器수혜기)는 1950년 대 말까지 <조선 토기>라 불렸다.   그 후에 들어 만요오슈우(萬葉集만엽집)에 나오는 그릇을 지칭하는 <스에>란 표현을 가져다가 탈바꿈시켰다.   <바안즈>





   - 먼로는 말한다.   “야마토의 분묘에서 두드러지는 경향은 언제나 우월하고 우수한 금속합금 기술로 비견되는 철제 칼이 출토되며(때로는 화살촉*창끝과 같이) 작은 석관(石棺)에서도 피장자(彼葬者)가 늘 전투적인 일에 몰두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게 한다(사실 고구려와의 戰役을 수없이 치룬-심지어는 광개토왕과의 격렬한 전투-백제의 전사기마집단의 위력도 만만치 않았음을 기억하라).   이는 야마토 왕조가 자리 잡을 무렵까지 한반도나 倭地 내에서도 끊임없는 전쟁 상태였음을 가늠케 하는 부분이다.   이 같은 지속적인 임전태세(臨戰態勢)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무장집단으로 倭地에 도래한 야마토 집단의 독특한 성격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사에키 佐伯有淸 1977*사사야마 하루오*미즈노水野祐*아오키)”





※ 후지노키(藤木등목)고분에서 출토된 말 장식*천여 개가 넘는 갑주 철편*화살과 화살촉*金銅 장신구*의자손(宜子孫-이것의 소유자는 많은 後孫을 갖게 될 것이다)이란 세 글자가 새겨진 청동거울과 청동 단검 등은 백제 무덤(무령왕릉*1982년의 청주淸州 신봉동新鳳洞의 4C 백제 고분군)들과 매우 흡사하며 북부 중국*고구려*신라와는 닮지 않았다.   <차용걸車勇杰 1990>





   아울러 가와치 고분의 보병용무기 대신 기병전 무기의 갑작스런 출현*야츠와 아리야마 고분의 뿌리가 납작한 보병용이 아닌 목이 긴 버들잎 모양의 관통력이 센 기병용 화살촉 740개와 1500개 출토 및 투구와 갑옷에서 가죽엮음 단갑(短甲)이 아닌 징박이式 기병 단갑*나가모치야마 고분의 철편(鐵片)으로 정교하게 엮은 쇠찰갑 등은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놀라울만한 위세를 지닌 호전적인 무장전투집단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 블리드는 말한다.   “많은 하니와(埴輪식륜)에 보이는 전투적인 자세 뿐 만 아니라 고분에서 발견되는 무구류(武具類)들은 당시 사회가 지닌 치열한 정황과 군사적 색채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5C에 들어서는 武具類가 오히려 봉분(封墳) 곁에 축조한 배총(陪冢)에서 훨씬 더 많이 출토된다는 점은 군사적 활동을 하는 특수 집단이 지배자의 영향아래 전담되었다는 걸 보여 준다”





※ 사실 고분시대는 가라의 형식을 닮은 야요이(彌生미생) 말기였던 전기 봉분(封墳 AD 300-375  소규모*구릉지*원형 또는 열쇠구멍 형)에도 출현하였지만 오오진(應神)릉으로 대표되는 중기*후기(AD 375 이후-AD 700  거대규모*해안평지나 골짜기 바닥*해자와 토담*키더에 의하면 최초로 석관石棺 등장과 말뼈와 馬具 출토)의 거대고분과는 두드러지게 이질성을 가지고 양분되는 경향성을 보여준다.





   - 먼로는 말한다(1911).   “만엽집萬葉集을 보면 고마쓰루기(고려검高麗劍-韓國의 검)이란 표현 뒤에는 언제나 [고리]라는 뜻의 와(輪륜)라는 말이 따른다.   따라서 이런 형태의 <칼>은 분명히 韓國에서 직접 건너온 것이다.   원반형은 고리 형태에서 유래된 게 분명하다.   고리 모양은 보통 구멍이 뚫려있고 한 개의 구슬을 받든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6) [일본서기]에 오오진의 별칭이 호무다(譽田別)라 하는데 그 이유를 <태어날 때부터 팔에 팔꿈치 덮개 같은 살이 돋아나 그랬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이름에 백제 王族을 부르는 와케(別)가 들어 있음으로 보아 발달된 무장집단의 수장(首長)으로서 활을 쏠 때 시위가 감겨 팔을 다치는 걸 막기 위해 팔뚝에 감는 가죽 받침대나 팔꿈치 덮개를 처음 본 왜지인(倭地人)들이 신기하여 그렇게 착각하고 붙인 것이다.  





   7) 왜지(倭地)에서는 말(馬)이 없었다.   더욱이 말을 이용한 기마집단도 자생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중기 고분부터 돌연히 말과 마구(馬具)가 출현한다.   <키더>는 금박 鞍裝안장 테*말방울*재갈*등자鐙子*청동 고리 등이 韓國과 동질성이 있음을 들어 말도 韓國에서 가져온 종류라고 말한다.



   - 키더는 “일본 기록엔 훈련된 전투 기술을 지닌 기마무사(騎馬武士)의 존재를 암시하는 기록이 전혀 없었다.   처음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때는 [임신壬申의 난]에 관한 대목인데 AD 7C로 야마토 왕조가 점차 뿌리를 내린 후이다(應神의 기록에 비로소 말 사육장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는 걸 보라)”라고 말한다.





  ▶ 백제왕은 공물로서 두 마리의 온순한 말과 함께 阿直岐(아지사주의 도래를 그렇게 적은 듯 하다)를 보냈다.   말들은 <가루고개>의 마굿간에서 사육되었으며 책임자로 아직기가 임명되었다.   그래서 사육지를 무마야 사카(마구간 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사기古事紀는 두 필의 말이 암수 한 쌍이라고 추가하였다).   <일본서기  응신 15년 조>





아무튼 한마디로 응신(應神) 시기 전의 [전기 고분]들은 부장품으로 보아 이들은 정복활동을 수행할 군사적인 요소가 크게 결핍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무장(武裝)이 훨씬 더 잘 되어 있는 한반도 남부에 상륙하여 정복에 성공했으며 그 지역의 기마문화를 터득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한다는 건 분명히 보편적인 역사발전의 법칙에 어긋난다.





   - 메이슨과 케이거(1972)는 말한다.   “중국의 史書 가운데 AD 221-265 기간에는 왜지倭地는 아직도 한 개의 통합된 정치단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한다.   또한 그 시점 이후 5C(샌섬은 AD 400년 이전)까지 야마토와 중국 사이에 어떠한 기록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바로 이 [고분시대]에 들어서서부터 일본은 야마토 왜(大和倭)로 대표되는 통일 과정을 거치며 비로소 역사시대로 진입하는 것이다.





   - 바안즈(1988)는 말한다.  “진무(神武)는 일반적으로 가공인물로 인식되고 있으며...스진(崇神숭신) 혹은 오오진(應神)과 동일 인물로 간주되어 왔다.   그의 동정(東征)을 오오진기에서는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는데 똑같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먼저 문제의 인용구를 살펴봅시다.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하도록 환단고기의 전문 내용을 모두 발췌하여 놓았습니다.





BC 2173  戊申十年 豆只州濊邑叛 命余守己 斬其酋素尸毛犁 自是 稱其地曰素尸毛犁 今轉音爲牛首國也 其子孫 有陜野奴者 逃於海上 據三島 僭稱天王


두지주 예읍이 반란을 일으켜서 여수기에게 명해 추장 소시모리를 베게 하니 이로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라 칭하게 되었다.   지금은 음이 변하여 우수국이 되었다.  자손으로 협야노라는 자가 있어 해상으로 달아나 세 섬을 근거로 삼고 참람되이 천왕을 칭했다.   <단군 가륵>





BC 737  갑인  명협야후솔전선오백소왕 토해도정왜인 命陜野侯率戰船五百艘(두인변+生) 討海島征倭人


협야후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를 쳐서 왜인들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하 궁홀조弓忽條>





BC 723  견장언파불합평해상웅습 遣將彦波弗哈平海上熊襲  


장군 언파불합을 보내 바다의 웅습을 평정하였다.   <단군 사벌>





BC 667  견협야후배반명 왕토해상 12월 삼도실평 遣陜野候裵幋 往討海上 十二月 三島悉平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 바다 위를 토벌케 하니 12월에 섬을 모두 평정했다.   <단군 매륵>








먼저 우리가 잠깐 알고 넘어가야만 할 점이 있습니다.   [일본서기]를 보면 일본의 역사는 BC 667년부터 시작되고 그 이전은 신대(神代)로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문헌에서 나타나다시피 BC 667년 이전에도 일본열도에 [토착 왜]나 한반도에서 건너간 단군조선이나 삼한(三韓)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BC 667년 이전이 신대(神代)로 적혀 있는 것은 <일본서기>가 만몽(滿蒙)에서 이주한 우리 민족들의 꾸준한 역사를 옮겨놓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기(記)에서는 열도로 몰래 이주한 협야노(陝野奴) 집단이나 후세에 도래한 진*변한계(辰*弁韓系) 가라와 백제계(百濟系)들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끔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민족 이동의 경로였던 대마도(對馬島)*일기도(一岐島)*구주(九州)에는 원래 토착민인 선주 왜인(倭人)들이 살고 있었는데 단군조선 때는 마한(馬汗) 지역에서 건너간 도래 집단들이 들어가 개척을 하였습니다.   단군조선 때의 기록을 보면 한(汗)들 사이의 관경(管境)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었는데 중반부에 이르러 소시모리 지역에 살던 협야노(陝野奴)가 몰래 구주(九州)로 들어가 천왕(天王)을 칭하였다가 BC 723년 언파불합(彦波弗哈) 장군에 의하여 토벌되었습니다.   따라서 한눈에 보아도 우리 기록은 韓國에서 시대적 상황에 따라 倭地로 진출*반란*정토(征討)*정착하는 민족 이동의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진행되는 듯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일본서기]에는 위 소시모리(素尸毛犁)와 협야노(陜野奴)가 소전명존(素戔鳴尊)이나 신무(神武)의 기록에 중첩되어 나타나 혼란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는 신무(神武)와 응신(應神) 條의 가공과 조작을 바탕으로 한  역사 시대 진입 구도(BC 667년의 동일성을 보고 짜 맞추기) 및 야마토 왕조 성립 시기(AD 5C 경의 세력 교체에 대한 열쇄) 조정을 비롯하여 소전명존의 상고(上古) 신화체계 삽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쫒는 인용*왜곡 과정에서 드러나는 어쩔 수 없는 자가당착으로 보여집니다.   비슷한 사례로 언파불합(彦波弗哈)이 히고나기사다 우가야 후키아에즈노 미코도(彦波瀲武鸕鷓草葺不合尊언파렴무노자초즙불합존)으로 변용되어 수록된 文句도 있습니다.





   1) 이 협야후 배반명(陜野候 裵幋命)이 일본의 정벌자가 된 인물인데(가지마는 니기하야노모데루로서 페니키아왕이라고 전혀 엉뚱하게 비정한다)   [앵무새]는 가지마가 [배반명(裵幋命)을 [니기 하야히노 미꼬도 饒速日命 요속일명]라 했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필자는 협야후(陜野候)의 왜지(倭地) 정벌 과정에서 B.C 667년이라는 기가 막힌 년도 공유 가능성을 보고 일본서기 찬자(撰者)가 같은 년도였던 신무왕(神武王)으로 탈바꿈시켰다는 해석이 더 옳을 듯하다.   결국 야마토 왜 王朝는 우리 기록에 뚜렷이 나타나는 배반명(裵幋命)의 행적을 보고 동정(東征)을 감행했던 응신(應神)을 빌어 재창조한 신무왕(神武王)과 연결고리를 만들어 조작했던 것이다.


    2)이어 언파불합(彦波弗哈)의 倭地 출격(出擊)을 알게 된 찬자(撰者)들은 다시금 조작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가라계와 연결시킨 神武의 조작된 계보(系譜)에게도 히고나기사다 우가야 후키아에즈노 미코도(彦波瀲武鸕鷓草葺不合尊언파렴무노자초즙불합존)라고 투영시켜 <일본서기>에 기록했다.








신무(神武-應神)는 [알왕]인 니니기노 미코도(경경저존瓊瓊杵尊-니니기는 구슬이란 의미로 ‘알’이다.   ‘알’은 우리 민족 설화체계에서 처음엔 ‘태양’을 지칭하였으나 새롭게 ‘알’로 전화하여 난생설화의 중심축으로 연결고리를 만든다)의 증손으로 탈바꿈되어 神代의 역사를 이어받는 현실적인 존재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화(逸話)에 나오는 다카치호노다케(高千穗峯고천수봉)의 동쪽 산기슭에서 왜 반드시 사노노미코도(狹野尊협야존)로서 선주 도래인이었던 가라계와 연결되어 출현해야하는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이는 처음 왜지(倭地)에 이주하여 세력을 떨친 가라계를 이어 완벽한 무장집단을 이룬 백제계의 도래집단으로서 가라계가 주축이었던 큐우슈우(九州)를 장악하고 혼슈우(本州)까지 세력을 확장하는 새로운 强者로서 등장하는 과정을 선주족(先住族)들이 알고 있던 협야존陜野尊이라는 별칭(別稱)을 추가하는 형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강림한 구시후루다케(久士布流多氣구사포류다기)의 [구시]는 바로 가라 시조 수로왕(首露王)과 관련 있는 구지봉(龜旨峰)의 [구지]와 대칭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정복과정에서 포섭한 많은 족단(族團)들의 지배자로서 올라서기 위한 방책으로 先住 집단들의 조상신들을 지배자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수많은 이칭(異稱)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일본의 세력 집단별로 유전(遺傳)되어 오는 독특한 조상신 숭배체계와 신사제도(神社制度)를 조금만 고려하든지 하夏*상商*주州 시기 이민족(異民族)의 복속과정으로서 제사체계에 이입(移入)되는 여러 부족신(部族神)들의 포섭관계나 우리나라에서도 정통성의 기준으로 제의체계(祭儀體系) 속에 나타나는 제신(祭神)들의 중복성과 다양성을 보면(東明 등) 이 같은 흐름이 왜 생겨났는지 금방 이해가 갈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는 독특하게 최고 통치자의 異稱들로 주로 발현되고 있습니다.





※ 동정(東征)에 동행하여 神武를 도운 세력들은 대부분 큐우슈우(九州)의 백제*가라계 세력으로 원주(原住) 세력은 보이지 않는데 神武의 형(兄)들이라는 [이츠세노 미코도(五瀨命오뢰명)*이나히노 미코도(稻飯命도반명)는 韓國에서 같이 도래한 혈족(血族)이거나 측신(側臣)들로 추정된다.   또한 측근(側近)이라는 아마노 다네코노 미코도*히노오미노미코도*오쿠메*우즈히코*우사츠히코*우사츠히메 등의 세력군들이 있다.





【아마노 다네코노 미코도】 東征때 우사지방에서 神武가 안내해준 우사츠 히메를 아내로 삼은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 원래 북 구주 아마계 우두머리인 아마노 고야네노 미코도의 손자인 아마노 오시쿠모노 미코도의 아들로서 당시 구주에서 실권을 잡은 오시쿠모노가 참가시켰으며 후일 기나이(畿內) 나카도미족단의 선조가 되었다)





아무튼 위와 같은 정황으로 보건대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은 <협야후>의 열도 평정이 BC 667년 무렵인 걸 보고 [협야존]으로 바꾸어 진무(神武)의 출현과 일치시켜 놓은 듯해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협야후>의 후예일지도 모르는 先住 가라*백제족단들을 정복*포섭한 사람은 오오진(應神)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여 <협야후 배반명>은 일본서기에 일본국의 새로운 시조(始祖)로 적혀 있는 협야존(狹野尊-神武)으로 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應神의 실제적인 東征過程에서 벌어진 일은 무시할 수 없어 일본서기 신무천황기(神武天皇紀)에는 이때 협야존이 삼도(三島) 외에 혼슈우(本州)의 위원중국(葦原中國)까지 평정하였다고 얼버무리고 있습니다.   



※ 일본서기 숭신천황기(崇神天皇紀)에는 이때부터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도 신무천황이 일본국의 시조로 겹쳐서 적혀 있는 이유는 우리의 고기(古記)에 <협야후 배반명>이 BC 667년에 삼도(三島)를 평정하였다는 내용이 나오자 일본서기 찬자(撰者)가 이를 근거로 하여 <협야후 배반명>을 가공 시조인 神武와 일치시켰기 때문이다.   아울러 記에 10세 숭신천황 때부터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적혀 있는 까닭은 저자(著者)가 응신이 정복하여 창시한 새 왕조와는 달리 실제로는 九州에서 오랫동안 존재했던 가라계 이주*정착으로 빚어진 또 다른 倭왕조를 무시할 수 없는 남모르는 딜레마에 빠졌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숭신천황 이전에도 天皇시대가 나타날까?   이는 일본서기 著者가 가공 시조인 신무천황 이후 가라계 나라가 시작된 숭신천황 이전의 天皇 공백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신무천황부터 숭신천황 사이에 2세 수정천황(綏靖天皇)*3세 안녕천황(安寧天皇)*4세 의덕천황(懿德天皇)*5세 효소천황(孝昭天皇)*6세 효안천황(孝安天皇)*7세 효령천황(孝靈天皇)*8세 효원천황(孝元天皇)*9세 개화천황(開化天皇) 등 8명의 가공인물을 만들어 넣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공천황의 본기(本紀)에는 세자책봉*천황의 즉위와 사망 사실만 짤막하게 적혀 있다.



▶ 숭신왕 12년 3월...이 때문에 칭송하여 어조국왕이라 한다.   어조국이란 나라를 시작하였다는 뜻이다.   <일본서기>


 recent comment

 【앵무새 죽이기】 난하가 요수라는 주장의 진실은?...난하 요수설에 대하여...반론 [1]  환국(桓國) 그리고 단군(檀君)의 나라 [1] - 프롤로그  【앵무새 죽이기-보론】환단고기가 재야사가에게 알려진 때는? 2 - 환단고기와 대종교...반론[2]  이름바 [친일잔재 청산] 문제  백제의 대륙경영[1]  【앵무새 죽이기】일본 천황가는 백제에서 왔다는 주장의 진실은?...반론 [5]  【앵무새 죽이기-보론】『악질식민빠』위서僞書, 어떻게 볼 것인가 II...반론[1]  【앵무새 죽이기】뭐든지 일제 탓 고구려가 맞나 고구려가 맞나...반론 [1]  【앵무새 죽이기】수메르가 우리 민족이라는 주장의 진실은?...반론 [1]  【앵무새 죽이기】일본 천황가는 백제에서 왔다는 주장의 진실은?...반론 [1]

다녀간 블로거를 삭제하시겠습니까? 선택한 블로거를 스팸차단 ID로 등록합니다. 스팸차단 ID로 등록시 방문흔적이 남지 않으며, 내 블로그

내에서 모든 활동이 제한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