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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봉사도 그림 아극돈

작성자태극기박사|작성시간11.11.29|조회수3,247 목록 댓글 0

청나라사신을 접대하는 영조대왕 그림(청연) 한글의우수성


특이한 그림 한 점은 청나라 사람 아극돈이 그린 ‘청연’인데,
이 그림은 청나라 사신의 접견도로서, 이 그림에는 곤룡포를 입은 사람의 모습이 있다. 곤룡포를 입은 사람이라면 왕이나 왕세자 일터인데, 조선의 그림에는 왕을 그리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청나라 사람이 그린 그림이니만큼 임금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곤룡포를 통해서 그림의 의미를 명쾌하게 밝혀준다.




세로로 긴 그림의 왼쪽에는 차일이 처져 있고, 그 속에는 비록 사람 숫자는 적지만 격식 있는 연회가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차일 속의 마루 가운데 무늬가 새겨진 대자리가 깔렸고, 그 위에서 두 사람의 무동이 춤을 추고 있다. 더욱 자세히 보니, 분홍색 겉옷에 붉은 끈을 목에 두르고 음악에 맞추어 한쪽 팔을 높이 치켜세우며 흥이 붙었다.
그런데 무동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얼굴에는 가면이 씌어져 있다. 아마도 당녀(唐女: 고려 때 예성강가에 살던 중국 창녀)와 소매(小梅: 미녀의 이름)의 가면을 쓴 두 무동이 야희(野戱)를 연행하고 있는 듯하다. 무동 앞에서 두 손에 문서를 들고 있는 사람은 이 연회를 집례(執禮)하는 관리다.
무동이 춤을 추는 좌우에는 이 연회의 주빈 두 사람이 각각 의자에 앉아 있다. 차일의 뒤에 있는 산봉우리는 북악산이니, 이를 북으로 하여 주빈 둘이 동서로 마주 앉았다.
동벽(東壁)에 앉은 사람이 상석(上席)이오, 서벽(西壁)에 앉은 사람이 하석(下席)이다. 그런데 동벽의 의자에 앉은 사람은 청나라 관리의 옷을 입었다. 이에 비해 서벽에 앉은 사람은 조선의 임금 옷인 곤룡포를 입고 있다. 임금이나 왕비 혹은 세자와 세자비가 등장하는 조선시대 기록화에서는 이들이 등장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경우가 없다. 즉 그냥 비워둘 뿐이다. 하지만 이 그림에는 곤룡포를 입은 조선의 임금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조선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 그림은 오늘날 중국의 베이징[北京] 중앙민족대학의 ‘중국민족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청나라 때의 기록화다. 사신을 접대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란 뜻에서 「奉使圖(봉사도)」라고 이름 붙여진 이 기록화는 청나라의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였던 아커둔[阿克敦, 1685~1756]이 제작했다.
영조 1년이던 1725년 3월 17일 청나라 사신단의 부대표에 해당하는 부래(副) 아커둔은 조선을 다녀가면서 그들을 맞이했던조선왕실의 각종 행사와 행렬에서 보았던 조선의 풍경을 담아서 20폭의 화첩을 같은 해 6월 완성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장면은 그 화첩의 제18폭이다.
아커둔은 그 전에도 이미 세 차례나 조선을 방문했던 조선 전문 사신으로, 이번에 온 목적은 그 전 해에 경종(景宗, 1688~1724)이 돌아가신 것을 알고 늦게 조문을 하면서, 동시에 영조(英祖, 1694~1776)의 책봉(冊封)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아커둔이 모시고 온 청나라 사신단의 대표는 견산질(遣散秩) 대신(大臣) 줴뤄수뤼[覺羅舒魯]이다. 따라서 이 그림의 동벽에 앉은 사람은 줴뤄수뤼이고, 서벽에 앉은 사람은 조선 영조 임금임에 틀림없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이 장면을 묘사한 아커둔의 시(詩)가 적혀 있어,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산해진미의 음식이 차려졌고, 아름다운 대자리 넓게 깔렸다.
두 벽은 병풍을 쳤고 나머지 두 벽은 열렸는데, 그 풍경이 아름답다.
술을 한 잔 올리면서 꽃 한 송이를 바치네.
사인(使人)이 비로소 물러나면 악인(樂人)도 나아가네.
음악 소리를 들어보니, 그것이 조선의 노래이다.
무동의 옷소매가 짝을 이루며, 펼쳐졌다 접어졌다 조화를 이루네.
그런데 안타깝게도 춤은 끝이 나고, 나는 취하였네.
그래도 음악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니, 사람들에게 빚을 많이 지는구나.”

그러면서 아커둔은 별도로 “무릇 술이 일곱 번 올려지면 음악이 멈추고 연회는 끝난다. 집사자는 모두 꽃을 머리에 꽂았다. 무동은 긴 소매에 머리에 꽃을 얹었고, 노래와 소리는 서로 조화를 이루는데, 나는 그 음(音)을 알지 못한다”고 적었다.
이미 청나라의 옹정제(雍正帝, 1678~1735)가 내린 책봉을 받은 영조는 사신단의 대표에게 연회를 베풀어 그 노고를 치하하고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는 황제를 대표한 사신과 왕의 관계이니, 어쩔 수 없이 영조가 서벽에 앉았다.
북벽에는 미리 차려진 음식들이 탁자 위에 차려져 있다. 이것이 아커둔이 이야기한 산해진미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차려졌는지 그림을 통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 이전 시기에 명나라 사신 접대를 위해 마련되었던 『영접도감의궤(迎接都監儀軌)』(1609)를 통해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사신이 조선의 새 임금 책봉을 위해 한양에 오면 여섯 차례의 연회를 대접받는다. 즉 사신이 한양에 도착했다 하여 베푸는 환영의 하마연(下馬宴), 사신이 한양에 도착한 다음날에 베푸는 익일연(翌日宴), 익일연 다음에 조선의 임금이 대전(大殿)에서 베푸는 청연(請宴), 사신의 노고를 위로하는 위연(慰宴), 사신이 떠나는 날이 결정된 후에 베푸는 환송의 상마연(上馬宴), 그리고 사신이 떠날 때 베푸는 전연(餞宴)이 그것이다.
이런 격식으로 아커둔 일행에 대한 연회가 베풀어졌다면, 당연히 이 장면은 ‘청연(請宴)’이라 부를 수 있다. 대체로 청나라 사신에게는 그들이 즐기는 음식을 차리는 것이 예의범절이었다. 당연히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돼지·양·소·오리·닭 등과 같은 육고기를 재료로 한 음식을 장만했다. 그 이름을 살펴보면, 당저염수(唐猪鹽水)·산저염수(山猪鹽水)·당압자염수(唐鴨子鹽水)와 같은 음식은 소금물에 백숙처럼 찌는 조리법으로 만들었다. 아울러 가금(家禽:집에서 기르는 날짐승)의 간·허파·콩팥 따위를 조리한 음식도 마련된다. 예를 들면 계아열편(鷄兒熱片)·압자숙편(鴨子熟片)·산저설아멱(山猪雪阿覓)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각종 과일을 비롯하여 약과·다식·당과자(唐菓子)도 차려졌다. 동시에 생선전탕(生鮮煎湯)·전복자지(全鰒煮只)·해삼어음탕(海蔘於音湯)과 같은 음식도 준비했다.
그런데 그림에는 갈색 관복을 입은 사인(使人: 심부름꾼) 한 명이 양 손으로 꽃을 바쳐 들고 영조와 청나라 대표에게 올린다. 녹색 관복을 입은 사인은 무릎을 꿇고서 상 옆에 앉았는데, 그 관복의 색으로 보아 통역을 맡은 역관(譯官)인 듯하다. 이 연회의 주빈 두 사람이 앉은 자리 앞에는 원반에 음식 한 그릇과 상아로 만든 흰색의 젓가락이 놓였다. 그러나 상 위에 올려진 음식이 무엇인지 알 길은 없다. 아마도 육고기를 주재료로 하여 붉은 색의 채소와 버섯을 넣은 중국식 볶음음식 (초채(炒菜))이 아닌가 여겨진다. 아울러 두 주빈의 뒤로 또 다른 사인(使人)이 음식 한 그릇이 놓인 원반을 높게 들고 있다.
사실 궁중의 연회는 아무렇게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음악과 노래, 그리고 술잔 혹은 찻잔이 연회의 과정을 격식대로 치르게 하는 마디였다. 당연히 예법대로 격식 있게 ‘청연’이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연회에서 사용된 술은 무엇일까?
청나라 사신의 이름으로 미루어 한 사람의 주빈은 만주인이다. 그가 즐기는 술은 당연히 백주(白酒)라 부르는 중국 소주일 것이니, 알코올 도수 50도 가 넘는 조선의 소주가 백주 대신에 사용되었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일곱 잔의 술을 마시고 이미 취해버렸다고 아커둔이 시에 적어두었기 때문이다.
눈을 다시 아래로 돌려보자. 그러면 긴 사각 탁자에 동서로 각각 네 명의 조선 관리가 서 있고, 이들 앞의 탁자에는 흰색의 술잔과 젓가락, 그리고 음식이 담긴 긴 접시가 하나씩 차려져 있다. 이들의 역할은 무엇일까? 두 주빈을 수행하는 관리는 본전(本殿)의 주빈이 앉은 자리 뒤에 각각 네 명씩 도열해 있다. 그러니 이들은 결코 주빈을 수행한 관리들이 아니다. 더욱이 동벽의 청나라 측 자리에도 네 명의 조선 관리가 서 있기 때문에 수행원으로 보기가 어렵다. 생각하건대 이들은 두 주빈이 잡숫는 음식에 독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는 관리인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외교 관계는 서로를 의심하면서 시작하기 마련이다.
더욱이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명나라만을 중화(中華)로 여겨오던 당시 조선왕실 입장에서는 오랑캐인 만주인 사신이 결코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것을 알고 있던 청나라의 사신이 조선왕실에서 대접하는 음식을 마음대로 먹기가 안심이 안 되었을 것이다. 보통 기미상궁(氣味尙宮: 왕이 수라를 들기 전 먼저 맛을 보는 상궁)이 이 일을 맡아보지만, 외교 석상에 상궁이 나서기가 어렵기 때문에 관리들이 나섰다.

그러나 이른바 만한전석(滿漢全席)이 차려지는 경우는 없었다. 모두 알듯이 만한전석은 청나라의 강희제(康熙帝, 1654~1722)가 전국에서 65세 이상이 된 노인 2천8백 명을 모아서 천수연(天壽宴)을 열 때, 만주인들의 음식과 한인(漢人)들의 음식을 종합한 식단을 구성하도록 한 데서 연유한다. 3일 동안 펼쳐지는 만한전석에는 총 180가지의 음식이 마련된다. 그 중에는 일반인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음식도 있다. 가령 붉은제비·백조·들꿩·메추라기와 같은 날짐승, 제비집·상어지느러미· 검은해삼·물고기부레·전복 따위의 해산물, 낙타혹·곰발바닥·원숭이골·성성이입술· 표범태반·코뿔소꼬리·사슴힘줄 등의 들짐승, 원숭이머리버섯·흰참나무버섯·죽순· 그물주름버섯·표고버섯과 같은 채소 등을 주된 재료로 하여 음식을 만든다.
비록 이 그림에 등장하는 사건이 일어난 시기가 만한전석이 등장한 이후이지만, 그렇다고 음식 재료가 중국에 비해 턱없이 적은 조선에서 이들 음식을 청나라 사신 접대 음식으로 마련했다고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더욱이 서로에 대한 정보가 매우 적었던 당시에 조선식 음식 조리법에 육고기와 해산물을 보통 때에 비해 많이 마련하는 정도로 영접 음식은 충분했을 것이다. 사실 그림에는 숟가락이 나오지 않는다. 조선왕실의 영접도감(迎接都監)에서는 중국의 격식에 따라 젓가락만 마련했고, 그것도 유기로 만든 것이 아니라, 상아로 만든 것을 상에 올렸다. 청나라 사람 입장에서 유기 젓가락은 자신들의 일상적인 젓가락에 비해서 너무 무거웠다. 이 정도의 예를 당시 조선은 갖출 수 있었다.
사실 조선왕실에서는 청나라의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접하면 무척 신경을 썼다. 이미 병자호란을 통해서 그들에게 항복한 경험을 가진 조선왕실 입장에서 가능하면 꼬투리를 잡히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영접도감을 설치하여 사신 대접을 전문적으로 준비하게 하고, 왕은 직접 모화관(慕華館)으로 나가서 사신을 마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더욱이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올 때 황제가 보낸 선물을 가지고 오면, 그들이 돌아갈 때 반드시 은(銀) 몇 천 냥을 건네주었다. 그러니 기본적인 예를 갖추어 그들 입장에서 음식 접대를 하면 되었지, 과도하게 그들 음식을 흉내내어 도리어 접대를 망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최근 조선왕실의 음식을 다루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만한전석’이 등장했다고 하니, 그 무지를 반드시 꾸짖지 않을 수 없다. 상호무지(相互無知)는 상호멸시(相互蔑視)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글 주영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민속학교수
주영하 - 1962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으며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한 후 풀무원 김치박물관에 입사했다. 1993년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김치의 문화인류학적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994년 중국 중앙민족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해 <중국 사천(四川) 양산(凉山) 이족(彛族)의 전통 칠기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전공교수로 있다. 저서로는「음식전쟁 문화전쟁」「중국, 중국인, 중국음식」「한국의 시장ㅡ사라져가는 우리의 오일장을 찾아서」「김치, 한국인의 먹거리ㅡ김치의 문화인류학」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고추의 상징화 과정에 대한 일고> <출산의례의 변용과 근대적 변환 : 1940-1990> <식탁 위의 근대 : 1883년 조일통상조약 기념연회도를 통해서> 등이 있다
원구단 (圓丘壇)
조선호텔 구내에 주위와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 한 채 있으니 황궁우(皇穹宇) 다.
사진1) 황궁우
황궁우(皇穹宇)는 고종이 제위(帝位)에 나아감을 천지신명께 고하던 원구단 (圓丘壇) 에 딸린 건물로 하늘, 바람과 구름 해와 달 등 자연신의 위패와 역대 임금의 신위를 봉안한 장소다. 이번 글에서는 원구단 과 황궁우 에 대하여 알아 본다.
칭제건원 (稱帝建元)

다음은 독립신문 1897년 10월 14일자 기사 요약이다.
“ 12일 오전에 위의(威儀) 를 갖추고 황단(皇壇)에 임하시어 하느님께 제위(帝位)에 나아가심을 고하시고 환어하셨으며,이날 정오에 만조백관이 예복을 갖추고 경운궁에 나아가 대황제폐하께 하례를 올리니 백관이 즐거워들 하더라. 이날 밤 장안 사사집과 각 전(廛)에서 색 등불을 밝게 달아 장안길 들이 낮처럼 밝았으며 집집마다 태극국기를 높이 걸어 인민의 애국심을 표하며 길에 다니는 사람들도 얼굴에 즐거운 빛이 나타나더라.
새벽에 공교히 비가 와서 의복들이 젖고 찬 기운이 성하였으나 국가에 경사로움을 즐거이 하는 마음이 더 중한 고로 여간 젖은 옷과 추움을 생각 지 아니하고 사람마다 다 당한 직무를 착실히들 하더라 “

1897년 8월 고종(高宗)은 연호를 건양(建陽)에서 광무(光武)로 바꾸고, 9월에 원구단(圓丘壇) 을 세운다. 10월 12일 원구단 에 임하여 천지신명(天地神明)께 황제에 오름을 알리고 이어 즉위식을 거행하니 이가 위 기사내용 이다.
원구단은 환구단(환丘壇) 이라고도 한다.
환자-한자 지원이 되지 않는 데 옛날 10환, 100 환 할때 환이다.
원구단(圓丘壇) 은 옛날부터 있었으니 다음은 실록기사 중 하나다.
태조3년 8월 21일 --예조에서 아뢰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 시대 이래로 원구단(圓丘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기곡(祈穀)과 기우(祈雨)를 행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경솔하게 폐할 수 없습니다.
사전(祀典)에 기록하여 옛날 제도를 회복하되 이름을 원단(圓壇)이라 고쳐 부르기 바랍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천자는 하늘에 제사하고 제후(諸侯)는 산천에 지낸다는 유교원칙이 있고 조선왕조 외교정책의 핵심교리가 사대교린(事大交隣) 인 바, 중국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하여, 즉위 할 때 천지에 알리는 일은 하지 않고 다만 기우제등은 원단에서 계속 올린 듯 하다.

사대 (事大)
역사학계 에서는 조공은 무역관계, 사대는 동아시아의 외교상 단순한 Protocol 로 해석한다. 오늘날의 잣대로 옛날을 심판할 수도 없고,또 현재 한미관계로 볼 때 우리가 과연 옛사람의 사대정책을 비판할 자격이나 있는 지 의심스럽다. ‘또 하나의 조국이 미국’ 이라는 말을 한나라당 중견 국회의원이라는 자가 공공연히 하고 있지 않은가 ! 미국문화가 북미대륙에 사는 사람들만의 힘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라, 그 선행문명- 전인류의 경험을 총 집결하여 최고봉에 이른 것이라면, 미국을 배우고 따르는 것은 인류보편문화에 대한 수용으로 못 배우는 것이 오히려 바보지, 배우는 것에 하등 꺼릴 것이 없다.
조선시대 사대(事大) 가 이것과 왜 달라야 하나 ?
당시 조상들의 지리적 지식은 동아시아 가 곧 세계의 전부요, 그 세계의 한 가운데에 중국이 있지 않았던가 ?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사대(事大) 에는 오늘날 보면 속 상하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림 한 장을 보자.


위 사진 2) 는 청연(請宴) (아극돈,봉사도 1727년, 견본채색 29 x 46.5cm,
중국민족도서관 소장,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장면) 중 일부-인물만 뗀 것이다.
이 글 주제관련만 이야기 하면, 1727년 영조대왕이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의 사신을 접대하는 장면으로, 대왕은 서쪽에 앉아 있고 사신은 동쪽에 있다. 동양예절에 동쪽이 상석(上席)이요, 서쪽은 하석(下席)이나, 상석에 조선 국왕 대신 중국 사신이 앉아 있다.
사신은 황제를 대리(代理)하니 당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지만,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옛날 임금의 모습은 어진(御眞) 외에는 그리지 앉고 그 자리를 비워 두었다. 위와 같은 장면을 우리 화원(畵員)이 그렸을 리는 없고, 중국인-당시 사신의 수행원이 그린 것으로 현재 북경에 있다.
조선호텔-옛 원구단 자리는 중국 사신이 머물던 남별궁(南別宮) 터니 사대(事大)를 끊고 대한제국의 성립을 천신(天神)에 고(告) 하기에는 이보다 나은 자리가 없는 듯 싶다.
사진 3) 수선전도 중 남별궁
대한제국이 가지는 의미 - 광무개혁 (光武改革)
대한제국은 고종이 자존망대하기 위하여 이름만 바꾼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광무개혁이 있었다.
19세기 말 조선의 정치 노선은 외세의 침략을 배격하는 위정척사 (衛正斥邪) 파와, 서양문명을 받아 들이려려는 개화파(開化) 의 둘로 나눌 수 있다. 위정척사(衛正斥邪)파는 의기는 좋으나 세계의 흐름에 어두웠고,개화파(開化)는 제국주의 열강의 운동원리 - 일본의 야심을 전혀 아지 채지 못한 채, 힘을 중시하는 사회진화론의 함정에 빠져,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자 모두 친일파 가 되어 버렸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은 얼핏 보기는 나쁘지 않으나 일본의 주도로 우리나라를 요리하기 좋게 바꾸는 것이니 조야의 반대는 피할 길이 없었다.

이에 반대의 뿌리를 뽑는 해결책으로 1895년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니, 을미왜변(乙未倭變) 이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高宗)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니 이가 아관파천(俄館播遷) 이다.
이후 고종은 열강이 서로를 견제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을 견제하는 정책을 펴면서 친일파 소탕령을 내리니 개화파는 다시 망명하고 총리 김홍집은 성난 군중들에게 맞아 죽는다. 임금이 남의 나라 공사관에 피신하여 모양새는 아주 좋지 않지만 일본의 압력을 약화시키는 데는 일정한 효과를 거두었다.이듬해 1897년 경운궁 즉 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 온 고종은 나름대로 개혁정책을 추진하니 이가 광무개혁 (光武改革) 으로, 그 중 하나가 건원칭제 (建元稱帝) 이다.1897 년부터 추진 된 광무개혁 (光武改革)은 일본이 강요한 갑오경장(甲午更張)과 달리 우리 정부 스스로의 의지로 추진한 것인 만큼 러일전쟁이 일어 나는 1904 년 까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하지만, 일본이 아니었던들 우리 나름대로 근대화를이루어 나갔으리라는 역사학계의 근대화기회박탈론 은 광무개혁에 바탕을 두고 있다.그러나 일본이 이겨 러시아 세력이 패퇴하고, 영일동맹으로 한반도에 일본 특수권익에 대한 영국의 양해와,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미국의 동의마저 구한 일본이 거침없이 무력으로 나라를 강탈하니 광무개혁은 끝나 버린다.

원구단(圓丘壇)은 심상한 유적이 아니다 !
광무개혁은 황제에 의하여, 황제의 권력을 강화시며 진행되었으니,오늘 날 민주국가 이념과는 거리가 있지만, 우리 스스로 개혁으로, 100년 전 사정을 감안 할 때 그 의미가 작지 않다.
이 대한제국- 광무개혁의 상징물- 사대와 결별하고 자주국가임을 밝히는 상징물 중 하나가 바로 원구단 인데, 독립문에 비하여 사람들이 너무나 모르는 것이 아쉽다. 남아 있는 황궁우는 한낱 조선호텔 정원 조형물이 되어 버렸다.대한제국의 상징인 원구단(圓丘壇)을 일제가 그냥 놔둘 리는 없다. 경술(庚戌)년 국치(國恥) 3년 후인 1913년 단을 철거 하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을 세우기 시작하여 이듬해–1914년 완공한다.
헐린 원구단(圓丘壇)은 이제 옛날 사진으로만 짐작할 수 밖에 없다.


사진4) 원구단의 옛사진
중앙이 원구단(圓丘壇) 이니, 3개의 단으로 이루어졌으며, 맨 윗단은 원뿔 모양의 덮개로 덮여 있다. 왼쪽은 현재 남아 있는 황궁우(皇穹宇) 다. 옛 원단(圓壇) (고종때 원구단이 아니라 국초에 세운) 규격에 대한 실록기사를 살펴 보았다.

세조 2년 12월 11일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에, ‘환구단(환丘壇)은 주위가 6장(丈) 3척(尺)이고, 높이는 5척인데, 12폐(陛), 3유(?)가 있고 유(?)마다 25보(步)이고, 주원(周垣) 이 사문(四門)이고 요단(燎壇)이 신단(神壇) 남쪽에 있으며, 대사(大祀)는 넓이가 1장(丈)이고 높이가 1장(丈) 2척(尺)인데, 호(戶)가 정방(正方) 6척(尺)이고, 위는 터놓고 남쪽으로 나간다.’ 하였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르고, 다만 주원(周垣) 사문(四門)은 설치하지 말게 하였다.이 옛 원단 자리는 아마도 현재 이태원 미8군 영내 인듯 하다.옛 사진 한 장 으로는 답답하여 중국 북경의 천단- 원구단(圓丘壇)을 인터넷에서 찾아 보았다. 대한제국의 원구단은 중국과 규모면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았을 것이나, 기본 컨셉 은 비슷하지 않겠는가 ?

오마이뉴스 2005-01-05 김대오기자

……..천자가 천(天)과 대화를 나누며 오곡풍양(五穀豊穰)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곳이 바로 천단(天壇)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天圓地方)”는 것과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天高地低)”는 원리에 따라 북쪽은 하늘에 해당되어 둥글고 높으며 남쪽은 땅에 해당되어 네모나고 낮게 설계되어 있으며 의식이 거행되던 모든 건축물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둥글게 설계되어 있다. ‘9’를 쌓아 만든 제단, 원구단 남천문에 들어서면 원구단(圓丘壇)이 둥글게 3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나의 중심축의 남쪽 끝에 해당되는 원구단은 원시제천의식을 계승하여 천자와 천이 아무런 장애 없이 노천에서 대화할 수 있도록 벽도, 기둥도, 지붕도 없다.


사진 5) 북경의 원구단
우선 3층으로 나눠진 3단을 오르는데 매 층의 계단은 아홉 개로 되어 있으며 원구단 가운데 황제가 축문을 읽던 천심석(天心石)이 있는데 그것을 중심으로 감싸고 있는 대리석이 9개, 다시 그 외곽을 감싸고 있는 돌은 18개, 그 다음은 27개, 제일 외곽의 돌은 81개로 철저하게 양과 황제의 수인'9'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제 원구단을 복원하려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것이다. 호텔 헐어야 하지 않겠나 ? 달리 쓸 돈도 많은데, 여기에 그 큰 돈을 쓸 수는 없고, 서울시에서 시청 로터리 쪽에 조그맣게 표지를 세웠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지 ?
출처
경복고 44회 동창회 http://kb44.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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