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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깃발

작성자태극기박사|작성시간13.05.08|조회수56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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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깃발_집단의 위상을 상징하고 구심점이 되는 도구

헝겊이나 종이에 글자, 그림, 부호 등을 잘 보이도록 그리거나 써서 특정한 표상으로 쓰는 물건이 깃발이다. 깃발(旗-)은 국기, 군기, 농기, 서낭기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며 국가, 군대, 단체, 각종 시설, 개인의 위상 등을 표시하고 상징했다. 깃발은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삶에 깊이 간여한 물건이었다.

 

 

깃발의 등장

유치환(1908∼1967) 시인은 깃발을 가리켜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고 노래한 바 있다. 이상을 동경하는 마음으로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깃발은 많은 상징성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깃발을 바라보면서 깃발이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누가 깃발의 주인인지, 깃발을 향해 가야 하는지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또 쉽게 볼 수 있도록 깃발을 높은 깃대에 매달아 흔드는 것이 신호가 되기도 했으므로, 사람들은 늘 깃발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깃발이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집트의 경우는 기원전 2850년경에 깃발이 등장하였고, 중국에서는 주(周: 기원전 1046~771)시대에 다양한 종류의 깃발이 등장했다고 한다. 애초의 깃발은 토템(Totem)과 유사한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날개 달린 황금 독수리를 긴 장대 끝에 매달고 다녔고,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각종 동물로 된 군기를 들었다. 중국에서는 용, 봉황 등을 즐겨 깃발에 그렸다. 깃발은 신앙의 대상을 상징하거나, 대리하기도 했으므로 함부로 훼손하거나 빼앗겨서는 안 되는, 소중하게 다뤄야 할 물건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깃발 사용의 시작은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이 서기 48년 붉은 기를 휘날리며 배를 타고 가야에 왔다는 것이다. 고조선 시대의 깃발은 기록과 유물이 없어 알 수가 없다. 가장 오래된 깃발의 모습은 357년경에 만들어진 고구려 안악3호분의 벽화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깃발


안악3호분 앞칸 남벽 동쪽부분 상단에는 직사각형 깃발 4개, 긴 천 형태의 깃발 1개, 털 장식이 달린 깃발 1개와 우산을 든 7명의 의장대(儀仗隊)가 보인다. 또한 동쪽 회랑에 그려진 무덤 주인공의 행차 모습에는 다양한 종류의 깃발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에는 ‘성상번(聖上幡)’이란 글자가 써진 깃발도 볼 수가 있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대행렬도에 참석한 134명의 인물 가운데 깃발을 들고 있는 인물은 13명이다. 그런데 깃발을 든 사람들은 행렬의 좌우가 아니라 안쪽에서 깃발을 들고 있다. 특히 수레에 탄 무덤 주인공 바로 앞에 7명이 작은 깃발을 들고 있고, 좀 더 앞에 큰 깃발을 든 인물이 있다.

 

안악3호분 벽화의 의장대. 고구려 시대에도 간단한 의장대가 있었다. 이들은 벽화 주인공의 신분이나 권위를 보여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안악3호분 벽화의 의장대. 고구려 시대에도 간단한 의장대가 있었다. 이들은 벽화 주인공의 신분이나 권위를 보여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덕흥리 고분벽화에 그려진 깃발을 든 옥녀(玉女). 신선세계에도 무엇인가를 안내하기 위해 깃발을 사용한다고 고구려인들은 믿었다.

덕흥리 고분벽화에 그려진 깃발을 든 옥녀(玉女). 신선세계에도 무엇인가를 안내하기 위해 깃발을 사용한다고 고구려인들은 믿었다.

 

 

이들이 깃발을 들고 주인공의 행차에 참가한 것은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각각의 깃발이 가진 의미가 모두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성상번’이란 글자가 적힌 깃발은 행렬의 주인공이 왕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서쪽 곁방에 그려진 장방(帳房)에 앉아있는 무덤 주인공의 곁에 3단 털 장식을 단 깃발이 하나 서있는데, 이를 황제나 군왕이 아랫사람에게 수여하는 일종의 신표(信標)인 ‘절(節)’이란 깃발로 보아 무덤 주인공이 왕이 아니라고 보는 주장도 있다. 이런 논란은 차치하고서라도, 깃발이 주인공의 신분이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선전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악3호분 외에도 약수리고분, 안악1호분, 대안리1호분, 개마총 등 행렬도가 그려진 여러 고분벽화에서 깃발을 찾아볼 수 있다. 수산리 벽화 널길에 그려진 호위무사의 경우 한 손에 환두대도(環頭大刀- 손잡이 끝부분에 둥근 고리가 있는 고리자루칼로, 삼국시대 무덤에서 주로 출토됨)를 들고, 한 손에는 제비꼬리 모양의 깃발을 단 기창(旗槍)을 들고 있다. 호위무사가 든 깃발은 무덤 주인공의 가문이나 지위를 나타낸 것이라고 하겠다. 덕흥리 고분벽화의 앞방 천정 벽화에는 옥녀지번, 선인지번이란 설명과 함께 깃발을 든 옥녀(玉女- 선경에 산다는 여자)와 선인(仙人)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천왕지신총의 앞방 천정에 그려진 봉황을 탄 천왕(天王) 역시 깃발을 들고 있다. 깃발은 천상세계에서도 무엇인가를 안내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고구려에서 사용한 깃발의 종류는 5~6종에 불과하며, 대부분 특별한 문양이 없는 소박한 것들이었다.

 

 

중국의 영향으로 늘어난 깃발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은 귀국 후 고려의 실정을 소개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고려의 의례행렬에 대해 주의 깊게 관찰하고 소감을 전했다.

“다른 오랑캐 나라의 임금들은 출입할 때에 깃발 10여 개가 따르는 데에 불과하여 신하들과 뚜렷한 분별이 거의 없다. 오직 고려는 조빙(朝聘- 나라와 나라 사이에 사신을 보내 교류하는 일)을 통하여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을 받아 왕이 행차할 때에 호위 군사들이 의물(儀物-의례용 물건)을 잡고 가니, 다른 나라와 달리 화려하고 볼만하다.”

그의 말처럼 고려는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왕이 행차할 때 깃발, 부채, 금도끼 등 다양한 의물을 든 사람들이 따르는 화려한 모습을 자랑했다. 이것은 삼국시대 왕의 행차와는 달리 매우 화려한 행차였다. 서긍이 지적했듯이 왕의 행차가 화려해진 것은 송나라의 영향으로 의물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경우에는 상(常), 기(旂), 여(旟), 정(旌) 등 신분과 용도에 따라 깃발이 다양하게 구분되어 있었는데, 이를 적극 수용한 셈이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깃발에 대한 명확한 규정과 구분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고려도경]에는 임금의 행차에 상기(象旗), 해마기(海馬旗), 응준기(鷹準旗), 봉기(鳳旗), 태백기(太白旗) 등이 순서대로 따랐고, 각 방위마다 오방기(五方旗)를 든 병사들과 왕의 친위군대인 용호군(龍虎軍) 수만 명이 갑옷을 입고 작은 깃발(小旗)을 들고 길 양편으로 행진을 했다고 묘사하였다. 하지만 고려에 위에서 언급된 7종의 깃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려사] <여복지(輿服志)>에는 무려 61종의 깃발이 소개되어 있다. 1221년 고종(高宗)이 대사령(大赦令)을 선포할 때 의장대는 무려 1380명이나 되었고, 깃발 159개가 등장했다. 삼국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깃발의 종류와 숫자가 많아진 것이다.

 

[영조 정순왕후가례도감]에 그려진 반차도. 반차도는 궁중의 각종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영조가 정순왕후를 데리고 궁으로 가는 이 반차도에는 깃발을 든 의장대가 길 좌우에 줄지어 있다.

[영조 정순왕후가례도감]에 그려진 반차도. 반차도는 궁중의 각종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영조가 정순왕후를 데리고 궁으로 가는 이 반차도에는 깃발을 든 의장대가 길 좌우에 줄지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깃발에 관한 규정이 보다 세밀하게 정비되어, 왕, 왕비, 왕세자, 왕세손 등이 행차할 때 사용하는 깃발의 종류를 명확히 구분하기도 했다. 1759년 영조가 정순왕후 김씨를 맞아들여 재혼할 때 만들어진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의 ‘반차도(班次圖)’에서 왕의 행차에 동원되는 다양한 의장용품을 볼 수가 있다. 여기에 따르면 독(纛), 기(旗), 당(幢), 절(節), 정(旌) 등의 다양한 종류의 깃발이 우산 등의 가리개와 의장용으로 만들어진 무기류와 함께 행렬 좌우를 가득 메웠다. 행렬 가운데 깃발 몇 개로 신분을 알리던 삼국시대의 행차와는 그 규모나 짜임새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보다 화려해지고, 늘어난 깃발은 뜻밖의 결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삼국시대의 임금들은 수시로 나라 안을 두루 살펴보는 순수(巡狩)를 하거나 사냥에 나설 수 있었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깃발을 들고 참여하는 의장대의 규모가 커진 만큼 그에 따르는 행차 비용 또한 과다해졌기 때문에, 임금이 온천욕을 위해 온양행궁에 가고자 해도 쉽게 궁궐을 나서기가 어려워졌다.

 

 

불교와 깃발


시대가 지날수록 깃발 사용이 늘어난 것은, 중국의 영향과 함께 불교의 영향도 있다.

 

사찰에는 돌로 만든 미술품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있다. 당간지주는 당간을 세우기 위해 세운 시설이며, 당간은 정상부에 당(幢- 불화를 그린 깃발)이라 불린 깃발을 걸기 위한 깃대다. 사찰의 입구에 당간과 당간지주를 세워 깃발을 걸어 둔 것은 사찰을 알리기 위함이다. 본래 인도 불교에서는 탑에 번(幡)과 당을 달아 공중에서 휘날리게 했다. 불교에서 깃발은 사찰을 미화하는 장식물(莊嚴具)이자, 신앙의 대상이기도 했다. 따라서 불교 전래와 함께 깃발을 탑이나 당간에 매다는 풍습이 전해졌다. 불교 전래 이전의 종교 시설인 소도(蘇塗)나 신궁(神宮)에 깃발을 걸어두었다는 기록은 없다.

 

[일본서기]에는 552년 백제 성왕이 왜국에 석가불금동상 1구와 경전 약간을 보내 불교를 전할 때에 번개(幡蓋- 불법의 위엄과 덕망을 나타내는 깃발과 우산 모양의 장식물)도 함께 보냈으며, 555년 여창(餘昌- 훗날의 위덕왕)이 100명을 출가시키고 번개를 많이 만들어 여러 공덕을 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623년에는 신라가 불상과 함께 금탑(金塔), 사리를 전하면서 관정번(觀頂幡) 1구와 작은 깃발(小幡) 12조를 보냈는데, 왜국에서는 이를 사천왕사에 보관했다는 기록이 있다.

 

불교가 성행하면서 사찰에서는 의식이나 행사 시에 특별한 목적을 위해 깃발을 달았다. 또한 깃발은 불상이나 경전처럼 다른 나라에 선물로 보낼 만큼 중요한 물품이 되기도 했다.


법주사 당간과 당간지주. 당간지주 꼭대기에는 사찰과 불교를 상징하는 깃발이 매달려 있었다. 당간지주는 돌로 만들거나 나무, 철제, 금동 등으로 만들었으며 통일신라부터 고려시대의 제작물이 다수이다.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 위치.

법주사 당간과 당간지주. 당간지주 꼭대기에는 사찰과 불교를 상징하는 깃발이 매달려 있었다. 당간지주는 돌로 만들거나 나무, 철제, 금동 등으로 만들었으며 통일신라부터 고려시대의 제작물이 다수이다.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 위치.

 

불교 전래 이후 고려시대까지 전국 각지의 사찰에 깃발을 달기 위한 당간과 당간지주가 세워져, 현재 전국에 약 100여 개의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그 중 당간까지 남아있는 것은 8기 정도다. 그런데 조선 시대 들어 불교가 억압되면서 당간과 당간지주는 거의 건립되지 않는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사찰을 홍보하기 위한 깃발을 매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백성들도 사용한 깃발

서낭기는 서낭목이나 서낭대에 매다는 깃발이다. 천에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기원문을 적어서 깃대에 감거나 오색천으로 깃대를 장식하기도 했다.<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신앙사전>

서낭기는 서낭목이나 서낭대에 매다는 깃발이다. 천에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기원문을 적어서 깃대에 감거나 오색천으로 깃대를 장식하기도 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신앙사전>


사찰에서의 깃발 사용은 백성들에게 깃발의 효용성을 알렸고, 이후 여러 용도의 깃발이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된 듯하다. 고려 성종 2년(983년)에 개경에 주점(酒店) 6곳이 생겼는데, 성례(成禮), 낙빈(樂賓) 등의 이름을 붙였다. 당시 남대가를 중심으로 한 개경의 시장 거리에는 다양한 상점들이 있었다. 때문에 손님을 끌기 위한 홍보물이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사찰의 당처럼 깃발이 상점을 알리는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국수가게에서는 긴 장대에 매달린 술(기, 끈, 띠 장식에 다는 여러 가닥의 실)로서 표지(標識)를 했다. 깃발이 오늘날의 상점 간판과 같은 역할을 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깃발은 단체를 상징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가장 흔한 깃발은 굿패들이 서낭당에서 제사를 올릴 때 쓰는 서낭기다. 굿패들은 놀이판을 벌일 때 깃발을 세웠고, 자신들을 상징하는 표지로서 사용했다. 농민들이 풍년을 기원하는 풍물굿에는 4〜5종의 깃발이 등장한다. 농기(農旗)는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를, 용기(龍旗)는 물을 다스리는 동물로 비와 풍작을 기원하는 대상으로, 오방기(五方旗)는 다섯 방위의 신으로부터 굿판을 안전하고 신성하게 지키려는 의미에서, 암수 쌍으로 존재하는 영기(令旗)는 화합과 안정 그리고 악귀나 병마를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를 지닌 깃발이다. 이처럼 단체기는 단체를 상징함과 동시에 그 단체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 사용했다. 깃발은 적극적인 신앙 대상은 아니었지만, 집단의 권위를 나타내주고 구심점이 되는 도구로 널리 사용되었다.

 

 

군에서 사용한 깃발


깃발이 가장 많이 사용된 곳은 군대였다. 임금의 행차에 쓰인 의장기들 든 것 또한 군인이었다. 군대는 무엇보다 조직과 명령 체계가 중요하므로, 깃발이 요긴하게 쓰였다.
 
1787년(정조 11)에 만들어진 군인 교련서 [병학지남(兵學指南)]에는 “깃발은 색으로 신호하는 것이고, 북은 소리로 신호하는 것이다. 모든 장수와 군사들은 귀로는 징과 북소리만 듣고, 눈으로는 깃발의 방향과 색깔만을 볼 것이며, 누구를 막론하고 입으로 명령하는 것은 절대로 듣지 말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TV 사극에서 ‘공격하라’는 장군의 명령을 듣고 병사들이 돌격하는 장면은 허구에 불과하다. 전쟁 시 병사들은 깃발의 움직임에 주목해야 했다. 하급부대의 대장은 상급부대의 깃발을 보며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모두들 최종적으로 장군의 명령을 옮기는 깃발을 보면서 행동을 해야 했다. 깃발은 명령을 전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주요 군기 가운데 하나인 좌독기(坐瀆旗). 태극과 8괘 등을 그려넣었다.

조선의 주요 군기 가운데 하나인 좌독기(坐瀆旗). 태극과 8괘 등을 그려넣었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군기는 그 부대를 상징하고,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음과 동시에 군의 단결을 상징하는 중요한 도구이다. <출처: gettyimages>

군대에서 사용하는 군기는 그 부대를 상징하고,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음과 동시에 군의 단결을 상징하는 중요한 도구이다. <출처: gettyimages>

 

1994년 제정된 [육군규정]에는 “군기는 그 부대를 상징하며, 전통과 명예의 표상이다. 따라서 군기는 그 부대를 대표하므로, 전시와 평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필히 수호해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깃발은 소중한 것이므로, 필히 지켜야 했다. 629년 신라 김유신은 백제군과 싸울 때 적진에 들어가 백제장수의 목을 베고 깃발을 빼앗았다. 적의 깃발을 빼앗은 것은 신라군의 사기를 높이고, 적의 사기를 떨어뜨려 결국 대승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 때문에 [삼국사기]에도 이 일이 기록되어 실렸다.
 
과거로부터 부대를 상징하는 깃발이 없으면, 부대의 힘이 사라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깃발에는 이를 사용하는 집단의 소망을 담은 그림이 그려졌다. 깃발 그림에는 용, 호랑이, 사신도, 말, 해와 달, 별, 태극 등의 도형, 산수, 신선이 주로 등장하며,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오방색(청색, 황색, 적색,백색, 흑색)이 주로 사용되었다.
 
1808년 정부 재정과 군정(軍政)의 내역을 모아 놓은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금군(禁軍) 700명, 표하군(標下軍) 460명 가운데 깃발을 드는 기수(旗手)가 무려 242명이나 된다. 1780년대 충청도 홍산현(鴻山縣- 현 부여군 지역)의 경우 실제 복무하는 군인은 192명인데, 보유하고 있는 깃발이 무려 82점이나 될 만큼, 군에서 깃발의 수요가 엄청났다. 그러나 지나친 깃발 사용은 낭비와 비효율적인 면을 만들기도 했고, 또 깃발을 들기 위해 많은 이들이 고생을 하기도 했다.

 

 

더욱 늘어나는 깃발의 수요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가늘고 긴 삼각형 깃발 속에 제작된 태극기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등록문화재 제 387호. 독립기념관 소장.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가늘고 긴 삼각형 깃발 속에 제작된 태극기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등록문화재 제 387호. 독립기념관 소장.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깃발은 그려진 그림과 색, 기의 넓고 좁음과 길고 짧음 등의 형태에 따라 상징하는 집단이나 의미가 달라졌다. 깃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깃발은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다. 한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는 1219년 덴마크에서 흰 십자가인 다네브로그(dannebrog)를 사용한 것이 최초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1882년 미국과 조약을 체결할 때에 태극기(太極旗)를 국기로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월드컵이나 올림픽과 같은 국가 대항전에서 승리를 하면, 자국의 국기를 흔들어 기쁨을 나누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다양한 기능을 가진 깃발의 용도와 사용처는 더욱 늘고 있다. 깃발은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라, 인류의 삶에서 뗄 수 없는 물건이 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공석구, [안학3호분 주인공의 節에 대하여], [고구려연구] 11집, 2001;홍영의 외, [한국생활사박물관 8 - 고려생활관 2], 사계절, 2003;엄기표,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 학연문화사, 2004;이대숙, [육군 군기에 관한 소고], [학예집] 4집,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5;노명구, [조선후기 군사 깃발], [학예지] 15집,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2008;이현수, [홍산현감 해유문서를 통해 본 18세기말 충청도 홍산현의 군비실태], [고문서연구] 23, 2003; 한국문화상징사전편찬위원회, [한국문화상징사전], 동아출판사, 1992.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등의 책을 썼다.

 

발행일  2012.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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