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부안 탐방
►탐방 일자 :
2026. 06. 05.(금) ~ 08(월)
►탐방지
○6월 5일 (금)
▻13:30 서울 화곡동 출발
정읍가면서 예산 탐방
▷예산 탐방지
▻추사 김정희 고택. 예당호 출렁다리
▻18:30 정읍 도착
▻정읍 (1박)
○6월 6일 (토) <예정>
▻정읍 태인
▻부안 변산반도
▶탐방 스케치
탐방 마치고 추후 게시
►추사 김정희
조선 후기의 실학자·역사학자·금석학자·
서예가·화가이다.
추사체라는 글씨나
금석문의 대가 정도로 많이 알려졌으나
후학도 많고 관직에도 나가서
중요한 역할을 많이 했다.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추사(秋史),
호는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농장인(農丈人)·
보담재(寶覃齋)· 담연재(覃硏齋)·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본관은 노론 벽파 명가인 경주 김씨로,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법적 증손주인데
화순옹주는 생전 자식이 없었고
김정희의 조부가 양자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직접 피가 이어지지는 않는다.
같은 경주 김씨인 정순왕후와는
먼 친척뻘인데 김정희의 양증조부
김한신은 정순왕후의 7촌 숙부이다.
○생애
정조 10년(1786) 충청도 예산현
입암면 용궁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 큰아버지 김노영이 아들이 없어
양자로 입양되었다.
어머니 기계 유씨가 임신한지
24개월(혹은 1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전설이 있다. 젖을 떼자마자 붓을 가지고
놀았는데 부친 김노경이 붓을
빼앗으려 하자 사력을 다해 붓을 쥐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릴 정도로
붓에 애착이 강했다고 한다.
이를 보고 주변에서는 훗날 명필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7세 때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
한문으로 쓴 글을 문 앞에 붙여 놓으니,
지나가던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이
보고는 명필이라고 칭찬했다는 영재로
그의 영특한 재능을 보고 감탄한
박제가에게 제자로 가르침을 받았다.
정조 때 집안 친척들이 많이 죽었지만
1800년(정조 24년) 음6월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같은 경주 김씨 일파이자 먼친척인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아버지 김노경이
종3품까지 벼슬이 오른다.
어머니를 결혼 직후인
1801년(순조 원년)에 잃고 20살 때
아내, 계모, 스승 박제가도 잃었으며
3년상 후 1809년(순조 9년) 생원시에
장원 급제하였다. 1810년(순조 10년)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호위 자제
군관으로 따라갔다. 60일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최고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웠는데, 옹방강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무상 기증까지 했다.
이후 벼슬에 나오지 않으면서
<실사구시론>과 같은 책을 썼으며
1816년(순조 16년) 무학대사나
고려 태조 왕건의 비로 알려졌던
북한산 비봉의 비를 신라 시대의
진흥왕 순수비라고 고증했던 선대
학자들의 고증이 올바름을 확실하게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순수비인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도 머나먼
개마고원에 있어서 직접 찾아가
수습하지는 못했지만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지인에게 부탁해 깨진 파편을
수습하고 원위치를 부탁,
비각을 세우고 현판을 만들어
보내는 등 황초령비의 보존에도
김정희의 공이 컸다.
1819년(순조 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병조 참판에까지 올랐고,
1827년(순조 27년) 친구 조인영의
조카손주인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필선이 되었다. 하지만 1830년(순조 30년)
순조 임금의 외아들인 효명세자가 죽자
안동 김씨인 김우명이 탄핵하여
파면되고 아버지는 귀양을 갔다.
아마도 김우명이 공주목 비인현감으로
있을 때 파직된 일로 앙갚음을
한 듯하다. 김정희는 아버지의 복귀를 위해
명성을 떨치던 중임에도 직접 격쟁을
하기도 했다. 1834년(순조 34년),
순조가 승하하던 해(1834년)에 복귀되어
아버지와 함께 조정으로 돌아왔다.
순조는 귀양을 보낼 때도 '조정에서
나오는 말이 쫓아내라 몰아내라
이딴 거밖에 없구나. 왔다 하는 투로
말했다. 안동 김씨 기세에 눌렸지
순조도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다는
이야기.
1835년(헌종 원년)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자 복귀해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하지만 관직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복귀한 지 5년이 지나
1840년(헌종 6년) 윤상도의 옥에
관련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때 김정희는 고문을 심하게 받아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친구인
우의정 조인영이 '추사를 살려달라.'
하는 상소를 올린 덕분에 죽음을
면한 대신 제주 대정현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8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는데,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라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지 "저번에 보내온
음식들은 태반이 상했다.
좋은 음식 좀 보내라."하고 재혼했던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먼 제주도까지 배편으로 보내야
했으니 음식이 제대로 도착하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재혼한 부인도 1842년(헌종 8년)
11월에 병으로 죽었는데 부인이
병으로 앓는다는 소식에 김정희는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편지를
썼을 때는 이미 부인이 죽은 뒤였다.
2달이 지나 뒤늦게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정희는 슬퍼하며
'다음 생에 다시 만나 혼인하면 꼭
자신이 먼저 죽어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내는 애통함을 알게 하고
말테다.'는 애절한 시를 쓰기도
하였다.
유배기간에 추사체를 만들었는데
2014년 1월 28일 방영된 KBS
<다큐공감>에서 위의 일화가
소개되었다. 당시 김정희가 먹었을
음식인 강조밥(좁쌀만으로 지은 밥)과
생된장을 백종원이 직접 먹어보는데
'짠맛 말고 하나도 안 느껴지는데
이게 대체 사람이 먹는 음식이
맞냐'는 반응이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 대립
사이에서 일종의 중간 관리자 역을 하던
영의정 권돈인과도 친했는데
헌종의 능(경릉)을 옮기는 문제로
1851년(철종 2년)에 같이 파직되어
추운 지방인 함경도 북청도호부로
유배를 갔다. 67살이란 늙은 나이였는데
유배기간 동안 고대 석기를 연구했으며,
「석노가」(石砮歌)에서 그는 귀신의
조화로 보던 돌도끼나 돌화살촉을
생에도구이자 무기임을 밝혀내고
토성 유적과 갈라서 보자고 주장했다.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1852년(철종 3년) 겨울에야 풀려났는데
이로써 3년+8년+1년으로 도합
총 12년 유배.
북청부에서 돌아온 뒤 김정희는
과거 아버지가 경기 과천에 마련해둔
과지초당(瓜地草堂)에 머물면서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71살 되던 1856년(철종 7년)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가
그해 음력 10월 10일(양력 11월 7일)
과천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했다고 하는데
김정희의 마지막 작품은 봉은사의
판전 현판으로 세상을 떠나기
4일 전에 쓴 글이라고 한다.
김정희가 얼마나 작품에 열정적이었던지
평생 동안 벼루 10개에 구멍을 내고
붓 1000자루를 닳게 했다고 한다.
[출처 : 나무위키]
○추사 김정희 고택
김정희 선생 고택 및 김정희묘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고증학자, 서예가,
역사학자인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살던 집이자 묘소로 예산군 제3경으로도
선정되었다.
김정희는 북학파인 박제가(1750~1805)의
제자로 공부하여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실사구시에 입각한 학문을
연구했다. 24세에는 청나라로 유학을 가서
금석학과 서체 등을 배웠으며,
1816년(순조 16)에는 서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의 정체를 밝혀냈다.
1819년(순조 19)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 등 여러 관직을 거치고
그만의 글씨체인 추사체를 완성하고
많은 미술 작품을 남겼다.
김정희 선생 고택은 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다.
김정희묘는 고택에서 약 100m 거리의
가까운 곳에 있는데,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외에도 추사기념관이 건립되어 있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김정희 관련 유물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2026. 06. 06. (토) 아침
전북 정읍에서
최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