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통합 게시판

'용담검무'(龍潭瞼舞)

작성자靑竹|작성시간06.03.24|조회수51 목록 댓글 0

<수운 최제우 검무 복원 첫걸음>    연합뉴스 연예 | 2002.10.24 (목) 오전 9:56

동학 최제우 선생 '용담검무' 재현 복원    한국일보 연예 | 2002.10.31 (목) 오후 6:04

[종교]"종파 뛰어넘어 어울려보자"    세계일보 | 2003.10.02 (목) 오후 9:14

 

계림문화원 

 

동학 최제우 선생 '용담검무' 재현 복원
[한국일보 2002-10-31 18:04]

동학을 창시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ㆍ1824~1864)가 만든 용담검무(龍潭劍舞)가 복원, 재연된다.

천도교 용담검무보존회와 한국검예도협회는 9일 오후 3시, 6시 서울 정동문화예술회관에서 ‘무수장삼 떨쳐입고 이칼 저칼 넌즛 들어’라는 제목으로 용담검무 재연 공연을 한다.

용담검무의 복원은 검예도협회 회장으로 검무 명인인 장효선(45)씨가 맡았다. 장씨는 사료와 구전, 증언을 토대로 10년 전부터 용담검무 복원작업을 해왔다.

용담검무는 수운 선생이 심신수련의 한 방편으로 추었던 검무로 훗날 동학혁명 당시 농민군 훈련이나 모의전투 방식으로도 활용되었다.

연희적 형태의 다른 칼춤과는 달리 무예적 기교와 신명으로 추는 칼춤이며 동학의 재세이화(在世理化ㆍ하느님이 인간세상에 내려와 인간이 됨) 정신을 형상화하고 있다. 용담검무를 추면서 함께 불렀던 노래의 가사인 검결(劒訣)은 현재 천도교 성전인 ‘용담유사’의 별편(別編) 격으로 남아있다.

동학 교단 측의 자료나 관변 기록 등에는 수운 선생이 ‘요상한 칼노래를부르고 칼춤을 추어 사람을 현혹시켰다’는 죄목이 덧씌워져 혹세무민죄로처형당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번 공연은 총 세 마당 아홉 거리로 구성되는데, 수운의 구도, 동학창시, 동학의 계승과 동학혁명 등 역사적 과정을 아우르고 있다.

용담검무보존회는 천도교 내 연구단체로 김광욱 전 교령이 회장을 맡고있다. 검무보존회 측은 서울 공연을 시작으로 부산 경주 등을 이어 전국순회공연을 할 예정이다. (02)723_6487

/김영화 기자

 

조유전,이기환 | 황금부엉이 | 2004년 07월 23일

 

[한국사 미스터리]‘화랑 중의 화랑’ 문노   경향신문 생활/문화 | 2003.08.18 (월) 오후 4:18

충도를 하늘에 맹세한 화랑들
세속오계의 화랑정신이 담긴 임신서기석
의리를 중시하고 술과 여자는 멀리 한 '화랑 중의 화랑' 문노

[한국사 미스터리]‘화랑 중의 화랑’ 문노
[경향신문 2003-08-18 16:18]
‘미스 신라’가 미실이라면 ‘미스터 신라’는 문노.

이종욱 서강대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미실은 왕 3명(진흥·진지·진평왕)과 태자(동륜), 화랑 우두머리인 풍월주 4명(사다함·세종·설화랑·미생랑) 등 모두 8명을 성의 노리개로 삼으면서 왕실과 화랑도 조직을 쥐락펴락했던 신라 최고의 여인.

반면 AD 579년 8세 풍월주에 오른 문노(536~606년)는 화랑정신의 표상이었다.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은 ‘화랑중의 화랑’ 문노를 ‘사기(士氣)의 종주’로 추앙했을 정도다. 당대 화랑도는 7세 풍월주 설화랑부터 파가 나뉜다. 설화랑의 화랑도는 향가와 청유를 즐겨 ‘운상인(雲上人)’으로, 8세 풍월주가 된 문노의 화랑도는 무사와 호탕한 기질을 자랑했기에 ‘호국선(護國仙)’으로 각각 일컬어졌다.

삼한통합을 이룬 ‘화랑 정신의 전형’인 문노의 행적을 보자. 554~579년 문노가 백제·고구려·북가야를 잇달아 치고 큰 공을 세웠으나 상급을 받지 못했다. 이에 부하들 가운데 불평하는 자가 있자 크게 꾸짖었다. “상벌이란 소인의 일. 그대들이 날 우두머리로 삼았거늘 어찌 나의 마음으로 그대들의 마음을 삼지 않는가”. 문노는 진흥왕이 급찬의 벼슬을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의리’ 또한 끝내줬다. 문노의 어머니는 가야왕의 딸. 사다함이 가야원정을 떠나며 동행을 요청했지만 문노는 “어찌 어미의 아들로 외가 백성들을 괴롭히겠는가” 하고 거절한 의인(義人)이었다.

부부관계도 타의 모범이 됐다. 어찌보면 ‘공처가’ 소리를 들을만 했다. 사소한 일까지 아내(윤궁)에게 물어보았다. 남들이 “초년의 기상이 없어진 게 아니냐”라고 힐난하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도 왕년엔 그런 사람들을 흉봤는데 지금 보니 아니야. 너희들도 장가 한번 가봐”. 보다못한 부인이 “영웅은 주색을 좋아한다는데 낭군은 술도, 색(色)도 절제하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며 첩 하나 두기를 권했다. 문노의 변. “색을 좋아하면 당신이 질투할 것이요, 술을 좋아하면 당신이 할 일이 많을 텐데…”

화랑세기는 “공은 용맹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아랫사람을 사랑했고, 청탁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자기에게 귀의하는 자는 모두 어루만졌다. 낭도들이 죽음으로 충성을 바쳤다. 이로써 사풍(士風)이 일어나 꽃피웠으니 통일대업이 공으로부터 싹텄다”고 칭송했다.

〈이기환기자 lkh@kyunghyang.com

 

8. 문노


문노는 비조부공의 아들이며 가야국의 문화공주이다. 어려서부터 검술을 잘하였고 의기가 있었다. 가야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사다함이 함께 가서 토벌하기를 청하니 문노가 말하기를 "어찌 어머니의 아들이 되어서 외조부 나라의 백성을 괴롭힐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가지 않았다. 나라 사람들 가운데 이 사실을 두고 비난하는 자가 있자 사다함이 말하기를 "나의 스승은 의인이다."하고는 가야국에 들어가서 함부로 살해하지 말라고 경계시키어 문노의 뜻에 보답하였다. 세종이 그의 뒤를 잇자 그의 낭도들을 세종에게 속하게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할 때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으나 어머니가 가야국 출신인 탓으로 현직에 오르지 못하니 세종공이 애석하게 여겼다.

진지대왕이 폐위되자 공으로 아찬이 되어 비로소 미실에게 총애를 받아 선화의 자리에 올라 제8대 풍월주가 되었다. 공은 용기가 있고 문장을 잘하였으며 아랫사람들을 아끼기를 자신을 아끼듯이 하였고 청탁을 구애하지 않고 자신에게 귀속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품어주었으므로 명성이 크게 떨쳐 낭도들이 서로 권면하여 그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사풍이 일어났으니 통일의 대업에 공에게 비롯하였다 하겠다. 공이 풍월주가 되었을 때 낭도들의 부곡을 나누는 제도가 찬연히 갖추어지게 되었다. 풍월주로 있은 지 3년만에 비보랑에 그 자리를 전하였다. 공은 오래도록 장가들지 않았었는데 국선이 되어서 윤궁낭주를 받들어 내원으로 삼았다.

윤궁낭주는 황종공의 딸로 동륜태자를 섬기어 딸을 낳고는 혼자 살고 있었으며 미실 및 미보랑과는 종형제간이었다. 비보랑이 윤궁낭주를 힘껏 권해 공의 계부로 삼게 하였다. 아들 셋을 낳고 딸 둘을 낳았다. 공이 선화가 된 데에는 윤궁낭주의 내조가 컸었다.

찬한다.

가야국이 외손이여 의기의 종주로다. 국선으로 화랑이 되어 나라의 기풍을 떨쳐 일으켰도다.

 

8
文弩者比助夫公子也 母曰加耶國文華公主也 自幼善擊?好義氣 及加耶反 斯多含請同行 弩曰 安有以母之 困其外朝之民者乎 遂不行 國人有非之者 斯多含曰 吾師義人也 及入加耶 戒妄殺 以報其意 及世宗繼之 以其徒屬焉 征麗濟 累有功 以母之故不能顯 世宗公愛惜之

及眞智之廢 以功進阿飡 始寵于美室 乃得仙花之位 卽八世風月主也 公好勇能文 愛下如己 不拘淸濁 歸之者盡懷之 故名聲大? 郎徒相勵 願以死效 士風以是起秀 統一大業未嘗不萌于公也

公之時 署郎徒部曲 制度 燦然備矣 居三年 傳于秘寶郞 公久未娶 及爲國仙 奉久宮娘主爲內援 久宮者 荒宗公女也 事銅太子生女 寡居 與美室秘寶各爲從兄弟 秘寶郞力勸久宮 以公爲繼夫 生三子二女 公之爲仙花 久宮多有內助

贊曰 加耶外孫 義氣之宗 以仙爲花 振我國風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