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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세대//신약비유 해설에서

작성자엄기욱|작성시간09.05.19|조회수300 목록 댓글 0

*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세대//신약비유 해설에서


주제 : 주님의 초대에 대한 인간의 응답


마태복음 11장 16-17절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17. 마치 장터에서 아이들이 편갈라 앉아 서로 소리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며 노는 것과 같구나.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풀이>> 1 글자적 의미에서 “이 세대”란 유대인을 가리키고 있다. 주님은 개인적으로 볼 때, 유대인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셨다. 그러나 “그분이 그들 앞에서 많은 기적을 베푸셨음에도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 더욱이 그분은 유대인들에게 “경멸받으시고 거절되어지셨다.” 주님은 탄생하실 때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혀” 지시기도 했다. 그리고 그분의 성년 시절을 두고 하신 말씀,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가 있건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다.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주어졌고, 예수님이 그분의 신성한 권능을 보이셔서 그들로 그분의 권능을 인정하게끔 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그 권능이 악마인 베엘제불에게서 온 것이라고 소문을 퍼트리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주님을 거절했고 그분의 영향을 파괴해 보려고 애썼으며 결국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주님이 그들에게 회개와 개혁을 요구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악 속에 머물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천국의 보물을 보고 즐거워하도록 해주셨지만, 그들은 그분의 보물은 물론 그분 자신에 대해서까지도 코웃음을 쳤다.


2 영적 의미에서 “이 세대”라는 단어는 유대인 같은 사람들, 그들 같은 품성을 가진 이들, 즉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알고, 그분의 권능을 보았으면서도 심정과 생활에서 그분에게 속한 것을 거절하는 이들을 가리키고 있다. 이런 마음들이 “세대”라 불려진다. 그 이유는 인간의 내용물은 악한 어떤 원리로부터 태어나 대를 잇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을 두고 말하셨을 때 같이, 인간의 “조상”은 악 속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다른 사람들같이 유대인들도 자연적으로는 악 속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나 개혁을 수단으로 주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재생을 하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문제점은 교리에 무식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가르치는 삶을 기꺼이 영위하지 않으려는 심정에 있었던 것이다.


17. 마치 장터에서 아이들이 편갈라 앉아 서로 소리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며 노는 것과 같구나.


풀이>> “아이들”이란 작은 영들, 말씀 속의 원리들, 즉 순진성과 이타애 속에 든 선과 진리들, 또는 어린 시절로부터 주님에 의해 인간 내면에 남겨진 선과 진리를 뜻한다. 새롭게 된 교회의 용어로 이 원리나 상태들을 “아껴 두신 것, 남겨진 것 remains”이라 부른다. 이것은 천국에 속한 것들인데 인간 마음에 계속 남아 있어 인간이 거듭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삶을 오래 살았다고 해서 있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시절부터 성녀니기까지 사랑과 진리의 발달에 의해 성숙되어 간다. 이것은 아주 어린 아이들이어서 우리 속에서 뭔가 쓸모 있게 된다거나 성숙되려면 우리의 조심스런 돌봐줌을 필요로 한다. 또 이것은 아직 우리가 확증한 삶의 어떤 원리 안에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확증되고 고착화되기를 애써 갈망한다.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 아이들(children, remains)은 장터에 앉아 있으면서 자기들의 동료를 찾는데 이는 우리의 거듭남을 위해 주님이 그 아이들을 수단삼아 부르시는 장면이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들을 귀”가 있는 한 계속해서 부르시고 계신다. 이 작은 것, 아이들을 수단으로 그분은 우리 속에 그분이 거하실 방을 마련하시려고 애쓰신다. 이 방에서 이 작은 것, 아이들은 우리의 성장과 더불어 성장하고 우리의 강함과 더불어 강해져 성숙된 성년으로 자라, 우리들로 성령과 교통하게 한다. 그리고 이 성령은 우리의 유일한 하느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간성에서 근원된다.


그런데 이 아이들, 곧 “아껴 두신 것, remains”이 부르고 있는 “자기 동료”들이란(calling to their champions) 누구일까? 그들은 이미 우리 속에 고착된 것들, 즉 이기심(self-hood)이나 자아(proprium)에 속한 것들에 동무하자고 호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속에서 확증된 삶의 원리는 무엇이든 간에, 또는 마음속에서 성년이 된 것은 무엇이든지 계속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다른 원리에 의해 균형을 이루던가 수식된다 해도, 한번 확증되어 자리잡은 삶의 원리는 제거되지 않는 게 특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살아온 것들, 그래서 그것이 이미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들, 이런 것들 모두는 제각기 각자의 집을 이룬 인생 건축 자재들로써 그가 건축하는 대로 인격이 형성되어버린 것이다.


아이들, “아껴 두신 것,” 즉 마음속에 든 말씀의 원리들이 제 동무가 되라고 부르는 아이들이란 그런 종류의 아이들이 아니라 마음속의 다른 아이들이다. 그 다른 아이들이란 지금 커 가고 있으나 아직 고착되지 않았으며 성숙되지 않은 삶이나 이런 류의 자연적인 마음속의 원리들이다. 이 원리에 호소하는 이유는 그 원리들은 아직 어려서 질서 있는 방법으로 훈련이 가능하고 훈련된 그대로의 형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 속의 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 영적 아이들을 수단으로 주님은 우리 마음속의 자연적인 원리들에 섭리하신다. 이 원리들이란 지금 발달되고 있는 것들, 푸르고 연약한 가지 같아서 잘 구부려지므로 보기 흉한 자연적 경향성들에서 탈피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내적인 것들은 영적 마음에 소속되어 있으나, “동무”들은 자연적 마음속의 원리들이다.


아이들이 “장터(market)에 앉아 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 장터란 물건을 사고 팔고, 교환하려는 이들을 위한 번잡하고 교통량이 많은 지역이다. 자연적인 것들을 사고 팔고 교환하는 장소는 인간이 영적 삶에 속한 것들을 자신에게 조달하는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자연적인 삶에 필요한 것들은 영적인 삶에 필요한 것들, 즉 인간의 마음을 먹이고 옷입히는 영적 원리들과 상응된다.


이에 대해 주님을 본보기로 설명해본다면 주님은 장사라는 측면에 관해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다. 즉, 그분은 자아 신뢰를 포기하시고, 그 대신 아버지의 신뢰를 획득하셨다. 주님은 그분 스스로 자랑을 팔아 치우시고, 시련에 의해 겸허함을 매입하셨다. 주님은 그분의 온유하심을 위해 그분의 성마름을 팔아 치우셨다. 세상적 보물에 대한 연민은 느슨하게 하시면서 천국의 보물을 꽉 붙드셨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는 나에게서 불로 단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나에게서 흰옷을 사서 입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고 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눈을 떠라” (요한계시록 3:18). 그리고 부자 청년에게 말하시기를,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인간이 위와 같은 교환을 수행하며 추구하는 마음 상태가, 거래와 교환이 이루어지는 “장터”로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 장터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 마음 속의 합리적 능력이다. 이 능력 속에서 모든 것이 면밀히 조사되고 또 그 속에서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추구한다. 인간은 자신의 합리적 능력을 사용함으로 주님의 말씀 속에서 그가 본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을 음미하며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든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있는” 모습은 “아껴 두신 것,” 즉 주님이 우리의 내면(interior)에 아껴 놓으신 거룩한 말씀 속의 원리들이, 불안간 우리에게 닥치는 변화의 상태나 변화의 시기에 맞추어 작동할 태세가 완비되어 있는 상황을 그려주고 있다. 이 변화의 시기란 우리가 새 원리를 합리적으로 검사하려는 때이고, 또 이미 가진 것들을 팔아 치우고 새 원리를 사고 싶어하는 때이며, 합리적으로 생각한 것을 생활 속에 반영하거나 영적 필요성을 느끼는 때 등... 종합해 보면 영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그것을 얻어 보아야겠다고 작정하는 때, 따라서 이를 조사하고 검토하여 마음을 열고 받을 준비가 된 때, 이런 준비의 때들이 장터에 아이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아울러 첨가할 것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있었다.”에서 앉음은 서 있는 것이나 걷는 것보다 더 부동적인 자세다. 서 있는 모습이 지적인 상태, 또는 이해성, 생각함이라는 긴 연속의 한 토막이나 움직이기 직전의 준비 등을 표현한다면 앉아 있는 모습은 의지 또는 사랑의 상태를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의지가 한번 자리를 확보하면 어떤 상태로 굳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 의미에서 앉아 있다는 것은 정신적인 상태가 더 영구적이다는 말이 된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있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 속에 아껴 두신 것, remains,” 또는 주님이 우리 의지 속에 저장해 두신 말씀 속의 원리들을 수단으로 주님께서는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할 기회를 영구적으로, 확고부동하게 갖고 계심을 말한다. 또한 이런 수단에 의해 주님은 인간과 언제나 함께 하실 수 있으시며 언제든지 인간의 의지에 작용하시어 인간 마음이 거듭나는 쪽으로 인도하실 수 있으시다.


자연적인 사람들이 장터에 가게 될 때, 그들은 인간 본성상 그곳에서 자기의 탐욕이나 거짓이 좋아할 것들을 획득할 바램으로 그곳을 찾는다. 그때 그들은 주님 자비의 외침 곧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부르는 아이들”의 소리지름을 듣게 된다. 즉 우리의 내면(interior) 속에 저장된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 속의 선과 진리는 지금 발달되려 하는 자연적 마음속의 원리들을 부르고 있고, 악과 거짓된 것을 구매하려 하는 우리 속의 경향성들에게 그것을 사지 않도록 경고하면서 천국적인 인격에 관한 것들만을 구매하라고 촉구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주저하고 있을 때 우리 속의 아이들이 우리를 불러 이르는 말은 이렇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서 마셔라. 그런데 어찌하여 돈을 써 가며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 하느냐? 애써 번 돈을 배부르게도 못하는데 써 버리느냐? 들어라, 나의 말을 들어보아라. 맛 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 영혼이 살리라”(이사야 55:1-3).


영적인 마음이 천국의 형상을 따른다면 자연적인 마음은 영적 마음을 따른다. 또 선과 진리에 관한 내적 원리들은 그것과 상응을 이루는 자연적인 애정, 생각, 그리고 행동에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 마음을 통해 역사 하시는 주님은 선한 영혼을 형성하게 해 줄 좋은 소식을 영적 마음을 통해 자연적인 마음에로 내려 보내신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적인 삶만을 위해 살고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자연적인 마음 문을 닫아걸게 되어 더 높고 더 사랑스러운 삶에 관해 말하는 영적 마음의 속삭임을 전혀 들을 수 없게 된다.


영의 아이들이 “부르고” “말한다”고 적혀 있다. 소리의 억양을 가지고 “부른다”는 것은 의지 또는 애정에 호소하는 것을 말하고, “말한다”는 것은 지성 또는 생각에 호소하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부르고” “말함”은 심정과 지성 양쪽에 결합되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악기에는 현악기와 관악기가 있다. 현악기의 소리는 각 줄이 제각기 한번씩 소리를 낸다. 그래서 악기의 종류는 따로 따로 구분되는 우리의 생각과 비슷한데 현악기는 우리 삶의 영적 수준, 진리, 생각과 상응된다. 그러나 관악기의 소리는 계속적이어서 한 음이 길게 연장되면서 키에 의해 다양해진다. 그래서 이 소리들은 우리의 애정들 같아서 계속적으로 흘러 나가면서 음조도 다양해진다.


피리(pipe)는 갈대(reed)로 된 관악기이다. 그러므로 피리는 의지의 생명인 애정적인 것과 관계가 있다. 본문에서 있게 되는 피리를 부는 음악이란 주님이 우리 속에 이식해 놓으신 “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 즉 본문의 “아이들”에 존재하게 되는 내적 하모니를 표현해 준다. 이와 같은 하모니는 천적 애정 또는 내적 사랑에서 있어지고, 우리 속의 선과 진리의 상태 속에 포함되어 마음의 내용물 안에 저장되어 있다. 거룩한 말씀 속의 것들이 “장터에 앉아,” 자기 동무들에게 “피리를 불고 있다.” 다시 말해 “아껴 두신 것들,” 말씀 속의 원리들은 인간의 품성이 형성되고 발달되는 동안 인간과 더불어 거주하면서 성장하는 인간의 자연적인 원리들에 호소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내적인 것들이 내적인 하모니와 행복을 추구하면서 자연적인 마음에 대해 그 행복과 하모니를 받아서 추구해 보지 않겠느냐고 부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적인 것들, 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 말씀 속의 원리들은 거듭난 삶의 영화로움에 관한 것을 자연적 마음에 자꾸 말해 준다는 말도 된다. 이것이 “피리를 분다” 또는 피리로 음악을 만든다는 뜻이다.


그들은 이 음악에 맞춰 “춤추도록” 자기 동료, 동반자를 부르고 있다. 춤춘다는 것은 신체가 기뻐하는 활동, 특별히 손,발이 기뻐하는 것이다. 이는 마음이 기뻐하여 둥둥 뜨는 느낌에 대한 신체적 응답으로 음악에 의해 야기되거나 어떤 좋은 소식 등등에 의해 흔히 있어진다. 손과 발(lower limb)은 마음의 보다 낮은 부분들, 즉 영적이지 못한 자연적 마음과 상응된다. 그러므로 춤은 자연적인 마음이 느끼는 적극적인 즐거움이나 기쁨과 상응되는데, 이런 즐거움이나 기쁨은 영적 마음의 내적 하모니가 자연적인 마음에 유입(influx)되어 내려와질 때 생긴다. 다시 말해 영의 아이들, 마음속에 저장된 “아껴 두신 것들”이 그들의 동무들, 자연적인 마음속에서 발달하려는 원리들에게 피리를 불 때에 벌어진다는 말이다.


이런 일이 있게 되는 곳, 장터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마음의 합리적인 능력이나 원리를 가리킨다. 즉 선하고 올바른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거절하는 마음의 능력,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비교하고 참작하는 마음의 능력이다. 이 합리적인 원리는 영적인 마음과 자연적인 마음 사이에 위치한다. 이곳은 장터와 같이 교환이 이루어지는 바, 영적인 마음의 아이들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자연적인 마음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감으로서 만나는 장소이다. 그래서 합리적인 능력 안에서 자연적인 마음이 영의 아이들의 소리에 유의하게 되면, 양쪽에 기쁨이 있게 된다. 그 이유는 영의 아이들은 자기들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기를 매우 즐거워하기 때문이고, 자연적인 마음의 아이들은 이런 영의 기쁨을 받기를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피리 부는 소리에 맞춰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춤도 추지 않고 곡도 하지 않는 자들


유대인들에게는 구약성서의 말씀이 주어졌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 앞에서 기적을 베푸셨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 속의 진리가 만드는 천국의 하모니를 감지 못했고, 내적인 것들의 유입에 따라 그들의 자연적인 마음을 기꺼이 질서 있는 상태로 바꾸지도 못했다. 그들은 오로지 말씀의 글자를 받들어 모신다고 고백하기만 했다. 오히려 그들은 말씀의 글자를 해석한다 하면서 자기들의 악에 동조되도록 해석했을 뿐, 말씀의 글자 속의 영은 하나도 받지 않았다.


위의 유대인의 경우처럼 그 세대의 모든 이, 그들과 같은 악과 거짓 속에 있는 오늘날의 모든 이에게도 같은 적용이 있게 된다. 각자가 자기를 자세히 살피면 우리 모두에게 아주 많이 널려 있기도 하다. 우리의 자연적인 마음은 세상적인 관심사로 꽉 차 있어 영의 호흡을 붙잡는데 매우 느리다. 장터에 앉은 귀중한 영의 어린이들은 자연적인 마음의 원리들에게 피리를 불어서 내적인 선과 진리의 천국적인 아름다움을 와서 보고 음미한 뒤 응답해 달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천국적인 원리를 받아서 실생활에 응용해 보지 않겠느냐고 계속 묻고 있다. 그렇게 응용해 보면, 더 장엄하고, 더 자유롭고, 더 열정적이고, 더 높은 영의 삶이 출현되어 육체의 삶 역시 이와 같이 표현될 것이라고 권고한다. 또한 천국의 장엄한 하모니는 지상의 삶을 아름답게 해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자연적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눈은 아래쪽만을 응시하고, 우리의 귀는 무디기만 하다. 그래서 비록 영적 원리들이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 가르친다 해도 우리의 자연적 마음이 영과 협력하는 데는 얼마나 느린지 경험이 입증한다. 천사의 소리가 영들에게 말했던 아름다운 것을 자연적인 측면에서 보다 강도있게 밀어붙이지 못하는 게 자연적인 마음의 상태들이다. 따라서 피리가 열심히 소리를 내는 데도 춤추지 않는다. 딱딱해서 좀처럼 벗겨지지 않는 차디찬 외용물이 우리를 덮고 있다. 서로 서로 동감하고 위로를 제공하는 것은 거의 없다. 한 마디로 땅 위를 걷되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한 것이 정상처럼 되어 있다. 세상적 성공밖에는 성공이라는 표준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면 천사의 영을 구체화한 삶은 과연 어떨까? 천국의 영적 하모니를 함유한다면 위와 같은 표준을 가질 수 있을까? 따뜻하고 자유로우며, 생기 있고 너그러운 인간애, 동정심으로 한 덩어리가 되는 삶, 기쁘고 반짝거리는 거룩함의 아름다움, 이런 영으로 자연적인 마음을 채워 기뻐 춤추는 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 순간만이라도 부드럽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천사의 외모를 볼 수 있다면 자연적인 마음을 씌운 딱딱하고 찬 뱀의 비늘 껍질을 벗어 던지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혀지고, 영의 아이들이 연주한 음악에 장단을 맞추지 않은 부끄러움을 가질는지 모른다.


무한한 인내를 가지고 예수님은 우리의 자연적인 마음의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계시며, 우리를 그분에게 결합되게 하시어 구원하며 복을 주시려고 애쓰고 계신다. 그리하여 천국의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자연적인 인간까지도 채우시려 노력하신다. 아이들은 피리를 불고 있지만, 우리는 그 피리에 장단을 맞추는데 너무나 속도가 없다. 우리는 냉정하고 비수용적인 「나」(proprium)라는 것을 사랑한다. 그래서 그 「나」를 포기하되 마지못해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에 당도해서야 겨우 포기한다. 천국적인 실체를 위해서도 「나」라는 것의 포기가 너무나 느리지 않느냐 말이다.


슬퍼함 (곡함, mourning)과 가슴을 침 (한탄함, lamenting)


아이들은 또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이 말씀은 인간의 합리적인 지각과 이해성이 아이들, 곧 마음속에 저장된 “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을 자기 안의 악하고 거짓된 자연적 상태의 슬픈 쪽으로 돌아서서 보게 될 때 곡을 하게 된다. 그리고 속에 든 악을 회개하기 위해 가슴을 치라고 불러 댄다. 이 “아껴 두신 것들”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 속의 자연적인 상태를 밝히 알게 해주시면서 아이들의 동무들, 발달되려는 자연적인 마음속의 원리들에게 악한 경향성에 저항하며 거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경고해 주신다.


자연적인 마음이 슬퍼하는 소리를 들을 때, 그 마음이야말로 한탄의 소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죄를 깊이 뉘우치는 겸허 속에 있어져야 되고, 자신의 악들을 인정하고 주님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는 도움과 안정을 찾으려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와 같이 가슴을 치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쳤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제공하셨다. 그럼에도 이 두 가지 모두는 거절되고 죽음에 몰아넣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피리를 불었지만, 그들은 춤추지 않았다. 요한이 표현하는 말씀의 글자뜻의 측면에서 보면, 요한의 말들은 우리에게 회개를, 단식을, 투쟁을 통해서 에집트를 빠져 나와 광야를 통과하라고 부르고 있다. 요한과 비교해서 볼 때 예수님은 말씀 글자의 영을 표현하시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천적인 삶의 상태, 약속된 땅, 사랑과 지혜로 가득 찬 보물, 영의 잔치가 마련되어 있음을 인간에게 소개하시고 계신다.


글자대로의 율법같이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해서는 안되는 것, 일상 생활의 개념을 만드는 규정들에 우리의 시선이 모아지도록, 그리하여 영적 질서에 우리를 가져다 놓도록 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이 지시하는 삶에 들어갈 준비를 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해야 될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천국이 무엇인지 그 안에 들어가려면 무엇을 해야 되는지 보여 주셨다. 회개라는 요한의 세례를 수행할 때만이 우리는 새 삶 속으로 예수님을 따라갈 준비를 해놓은 것이다. 우리가 비질서인 낮은 본성을 키우려고 열심히 먹이던 것을 멈출 때, 우리는 천국에서 내려보낸 빵으로 우리 삶을 먹여 살려 더 높은 삶, 주님의 잔치에 참석하게 된다.


이 비유의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주님은 인간으로부터 천국을 보류해 놓고 계시지 않으시다는 것, 오히려 주님은 우리 심정과 이해성 그리고 삶 속에 모든 사랑과 지혜 그리고 실지의 기쁨을 부어 주고 계신다는 것,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기회에 게을러 있을 때조차도, 혹은 우리가 그분께서 제공하는 은혜를 거절하는 때조차도, 그분은 우리 앞에 놓으신 주님의 주제를 언제나 유념 하시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신다는 것, 그분의 무한한 경륜 속에서 모든 기회를 다 사용하시어 우리의 악을 경고해 주시고 천국을 소유하는 승리를 갖게 해 주시려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분은 모든 이를 위해 그분의 은총을 주시고 계신다. 그러나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자, 자신 스스로 천국 안에서 기꺼이 살려는 자, 자신 스스로 악과 죄를 끊으려는 사람 만이 그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 천국은 인간 자신의 바램에 일치되는 것들 속에서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천국적인 품질의 삶에 자기의 바램을 순응시킬 때 가능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 But wisdom is justified of her children.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다.”


지혜의 결과(자녀들)란 지혜에서 태어난 삶의 원리들이다. 이 원리들은 정당화되고, 의를 만들며, 공의이다. 선하고 진정한 원리들은 그 열매로 그 원리의 옳음을 입증하며 거듭나는 삶의 질을 말해 준다. 우리가 창조된 것은 천국을 위해서이다. 따라서 우리가 뜻한다면 우리는 천국에 도달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에는 미발달된 능력, 우리 영 속에는 탐험되지 않아 아직 높이를 모르는 산들이 수두룩하게 있고, 이 속에 주님은 계시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시어 우리의 의식을 일깨워 인도하신다. 자기가 자기를 다 아는 듯 여기지만 실상 인간은 인간 본성의 초보 단계밖에 아는게 없다. 모든 천국은 우리에게 열려 있고 우리를 맞으러 내려오고 있다. 우리를 승리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선하시다는 것을 알고 음미하는 것” 뿐이다.


어린 아이가 즐거울 때 껑충 뛰며 좋아하듯, 자연적인 마음은 높은 사랑의 삶이 우리 속 아주 우묵한 곳까지 꿰뚫어 보는 것에 진한 만족을 발견하고는 그 기쁨의 표현이 어린 아이처럼 당연히 있어져야 할 것이다. 합리적 생각이라는 장터에 앉아 회개와 개혁을 촉구하는 영의 아이들의 소리를 우리는 얼마나 소홀히 하고 게을리 하여 지나쳐 버렸는가? 성경에서 오는 모든 신성한 진리는 우리 속 천박한 성품에 대고 곡을 하는 한편, 천국 삶의 영화로움에 대해서는 피리를 불고 있다. 주님의 특사가 바로 말씀 속의 진리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 그분과 함께 살 자들에게 주님은 이 특사를 보내시어 진리의 지식을 축적시켜 주시고 그 지식을 응용하도록 부르고 계신 것이다.


주님의 초대장, 주님의 경고장을 받지 못한 이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어떤 인간이 거듭나는데 실패한다면, 그것은 그가 주님의 경고나 권유를 소홀히 취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삶에 허용되는 훈계는 자아 추구에서 돌아서는 거듭남을 위한 기회들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천국을 소개하는 영 속의 아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분부, 말씀 속의 진리를 소홀히 한다면, “주여, 주여”하고 밤낮 불러 봐야 헛일이다. 그 이유는 천국의 어린이로서 천국에 우리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거룩한 말씀 속의 진리에 의해 심판되어진다. 애석한 것은 이런 사항을 알고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여전히 게으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또 되풀이되는 말,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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