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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반대자들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진술 3

작성자밝은 햇살|작성시간09.01.07|조회수491 목록 댓글 0

* 반대자들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진술 3


그가 말한 1743-1745년의 영감의 시기로부터 1772년 소천하기까지 거의 삼십년 동안에 스베덴보리는 많은 분량의 글을 썼다. 바로 그 때 완성한 한 두가지의 과학서적 외에 그는 “주님의 직접 계시” 라고 믿는 경지에서 쓰여지지 않은 책은 하나라도 출판하지 않았다. 이 기간에 그가 출판한 것은 그의 신학과 성경 해석의 전 체계를 포함하여 30권을 차지한다. 와런 씨가 수집한 목록은 이 기간에 집필한 스베덴보리의 신학 체계를 만족스럽게 보여준다.(1249쪽 <자료2> 참조) 그러나 모든 책들을 다 읽어야 그의 놀라운 재능을 완전히 알 수 있고 그가 습관적으로 머무른 높은 도덕의 경지를 이해할 수 있다.


주님에 의해 불리운 후 그분의 천사들과 거의 삼십년 동안 교통했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전례가 없는 경험이다. 그리고 그 경험의 열매는 우리가 그것이 어떠한 원인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든지 간에 끊임 없이 흥미있고 유익한 연구의 대상이 된다. 다음의 제목들을 살펴보면 그의 펜의 생산력과 만년에 그의 펜을 바쁘게 했던 주제들에 관해서 무엇인가 생각이 들 것이다. 이 목록은 여러 출판된 저서이며 또 아직도 원고 상태로 보존된 것들도 있으며 이들 중 더 중요한 것들은 출판된 것들도 있다.


나는 스베덴보리를 다른 성경해석자들로부터 구별하는 신학의 새로운 점들을 정의하는 일을 여기서는 하지 않고 다만 스베덴보리의 교리들을 개요 형식으로 또 저자의 말 자체를 충성스럽게 옮겨 제공해 보고자 한다. 신학 세계에 독특한 족적을 남겨놓은 스베덴보리가 가르친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1. 주님, 구원 그리고 속죄의 교리 : 하나님의 단일성을 성부, 성자 그리고 성신의 신성한 삼일성과 사람의 이성에 맞도록 조화시킨다.

2. 사후의 생명에 관한 교리 : 지옥의 존재를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조화시킨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이 자기의 무한한 사랑을 천국에 사는 자들에게처럼 지옥에 사는 자들에게도 계속해서 풍만하게 보여주신다고 말한다.

3. 성서와 상응의 교리 : 말씀의 완전한 영감, 신성, 그리고 거룩함을 합리적으로 확립한다. 말씀의 겉으로 나타나는 모순과 부조화를 설명하고 인간 이해에 납득이 가도록 하고 그 말씀의 거룩한 구성을 입증하고 권위를 높인다.


스베덴보리는 성경 혹은 성경의 대부분이 단지 세속의 역사나 보고서의 구조 원리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성경에 묘사된 자연적인 사물과 현상 그리고 영적 진리 사이의 상응의 법칙에 따라서 쓰여졌다고 가르친다. 이 자연적인 사물과 현상은 영적 진리에 근원을 두고 그 영적 진리를 상징으로 나타낸다. 그는 가르치기를 모든 원인들은 영적이고 모든 자연적 현상들은 선재하는 영적 원인의 감각적 표현, 혹은 그가 자주 말한 것처럼 “궁극적인 것들”이라고 했다.


천국에 사는 자들처럼 그리고 한 때 이 지구에 살던 자들처럼 상응에 관해서 깨닫는 사람들은 산, 강, 양, 늑대, 전쟁, 홍수, 꿀, 유향, 혹은 어느 자연적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읽으면 곧 외적인 이해로 나타나는 물질적 사물이나 외부의 환경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고 이들 물질적인 것들이 상응하는 영적 상태를 깨닫는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명랑한 미소나 비판적인 찌푸린 얼굴을 볼 때 우리들은 그와 같은 미소나 찌프린 얼굴이 상응하고 상징하는 감정의 상태에 신경을 쓰는 거와 같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관찰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얼굴의 어떤 표현들은 사람의 성품의 질을 명백하게 표시한다는 사실이 이해가 된다. 하나는 교활하다고 우리가 말하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솔직하고 활발하다고 말하며 또 셋째는 자만하고 넷째는 잔인하고 다섯째는 세련되었고 온화하며 여섯째는 관능적이고 거칠하다고 말한다. 이런 표현들이 관찰, 솔직, 자만, 잔인, 세련, 혹은 관능의 삶을 통해서 계속 사용하고 즐김에 의해서 얼굴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과 악 그리고 진리와 거짓의 여러 계도, 농도, 종류를 상징하는 물질적 현상이나 외적 사건들 등등이 성경의 구성에 사용되었다. 이는 각 세대의 인류를 그들의 어둠의 정도에 따라 교훈이 되도록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다루는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인간이 개화되고 총명해짐에 따라 이 세상과 영계에서 계속 증가하는 용량과 필요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의미와 길이와 폭을 내포하고 있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자연과 그 안에 있는 개개의 것은 영적인 상응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육체에 있는 하나 하나 그리고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금까지 상응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이 태고시대에는 아주 잘 알려져 있었는데 그 때 살던 사람들에게는 상응에 관한 지식이 모든 지식 중의 지식이었고 그 상응의 지식이 널리 퍼져서 그들의 모든 책들이나 저서들이 상응의 원리에 의해서 씌어졌다.


고대 교회의 책인 욥기는 상응으로 가득 차 있다. 이집트인들의 상형문자와 고대의 이야기들은 상응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모든 고대 시대의 교회들은 영적인 것들을 표징적으로 나타내었다. 그들의 예식, 그리고 예배를 제장하는 법규가 순수한 상응으로 형성되었다. 같은 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는 교회들에 관한 것들 번제, 제물, 소제물, 제주, 그리고 이들에 따르는 각가지 사항들은 모두가 상응들이었다.


또 그 성전과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들과 축제 무교떡 축제, 성전축제, 첫 열매 축제 그리고 아론의 레위 성직, 그들의 거룩한 예복 그리고 그 외의 그들의 예배와 생활에 관련된 모든 법규와 자판 이런 것들도 상응이었다. 그래서 신성한 것들이 이 세상에서 상응에 의해서 자체를 나타내기 때문에 말씀은 순수한 상응에 의해서 쓰여졌다. 같은 이유로 주님께서 신성 자체로부터 말씀하실 때는 상응에 의해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신성 자체로부터 나온 것은 신성 자체와 상응하는 자연의 것들 속으로 내려오며 이 자연의 것들은 천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이라 불리워지는 신성한 것들을 감추기 때문이다.”


또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적인 의미 없이는 아무도 왜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잠방이를 하나 사서 허리에 걸쳐 입고 그것을 물에 적시지 말고 아브랏 옆 바위 틈에 감추라 하셨는지 그 이유를 모를것이다.(예레미야 13 : 1-7) 혹은 왜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에게 허리에서 굵은 베옷을 벗고 발에서 신을 벗고 나체로 맨발로 3년 동안 돌아다니라고 하셨는지(이사야 20:2,3) 모를 것이고 혹은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에게 왜 날카로운 칼로 머리와 수염을 깎고 나중에 그 털을 저울에 달아 나누어 시내 중심에서 삼분의 일을 태우고 삼분의 일을 칼로 치고 삼분의 일을 바람에 뿌리고 그 털 조금을 두루마기 단에 매어두었다가 불에 던지라고 하셨는지(에스겔 5 :1-4)


혹은 왜 하나님이 같은 선지자에게 왼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390일 동안 누우라고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40일 동안 누웁고 밀, 보리, 잠두, 제비콩, 조, 쌀보리를 섞어 쇠똥 불에 빵을 구어서 먹고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축대를 세우라고 하셨는지(에스겔 4:1-5) 혹은 왜 하나님이 호세아 선지에게 매춘부와 혼인하라고 두 번이나 명령하셨는지(호세아 1 :2-9 ; 3 :2,3) 그리고 많은 비슷한 것들도 영적인 뜻 없이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누가 영적인 뜻 없이 성전 안에 있는 법궤, 하나님의 보좌, 그룹, 촛대, 향대, 등등 모든 것들에 의해서 상징되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혹은 누가 영적인 뜻 없이 아론의 성의, 예복, 두루마기, 외투, 법의, 우림과 둠밈, 관, 그리고 그 외 다른 것 등등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영적인 뜻 없이 누가 번제, 제물, 소제물, 제주들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안식일과 축제에 관해서도 알겠는가? 사실상 이들 중 가장 작은 것도 주님, 천국, 교회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상징하지 않는 것은 명하시지 않았다. 이 모든 예들로부터 말씀의 모든 조목 하나 하나에 영적인 뜻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모든 책들에게 똑같은 정도의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성언의 책들은 속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은 책들은 성언이 아니다. 구약에 있는 성언의 책들은 모세의 오경,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다윗의 시편, 예언서들 , 즉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그리고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그리고 요한 묵시록이다.(천계비의 10325항)


성 바울 그리고 다른 사도들의 문서들에 관해서, 나는 <천계비의>에서 그것들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유는 그들이 단지 교리적인 문서에 지나지 않고 예언서, 다윗의 시편이나 복음서 그리고 요한 묵시록과 같이 성언의 양식으로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언의 양식은 일관적으로 상응이며, 그것에 의해서 천국과 직접적으로 교통을 이룬다. 그러나 이들 교리적 문서들은 아주 달라서, 천국과 교통은 있으나 오로지 간접적이다.


사도들의 문서들이 이러한 양식으로 쓰여진 이유는 기독교회가 그 때 그들을 통해서 시작되었으며, 성언에서 사용된 양식은 그와 같은 교리의 주의에 적당치 않았고, 차라리 독자들의 역량에 적응된 알기 쉽고 단순한 언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의 문서들은 주님께서 복음서와 요한 묵시록에서 주장하셨던 것처럼 인애와 믿음의 교리를 주장하기 때문에 교회를 위해서는 우수한 책들이다. 이것은 이 문서들을 주의 깊게 읽는 독자들에게 명백할 것이다.”(바이어 박사에게 보낸 편지 ; 묵시록해설 815항)


스베덴보리는 노아 홍수 이전 교회의 최상의 상태에서는 사람들은 자연에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상응을 직관적으로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는 자연의 언어, 즉 상응의 언어였고, 그래서 천계의 것들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은 관능에 의해서 살게 되었고, 따라서 상응을 깨닫지 못하게 되었으며, 교회의 예전들이 그들의 마음 속에서 상응적인 성격을 잃게 되었다. 예전들이 상징하는 영적인 것들과 상관 없이 그런 예전들을 지키니까, 결국 우상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이 잃어버린 상응의 지식을 회복하기 위해서 주님으로부터 새 계시가 필요했다고 스베덴보리는 주장한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유로, 그가 그를 통해서 보내질 계시의 매체로 선택되었다. 그 때야말로 세계가 상응의 지식을 받아들이고 그 지식에 의해서 유익이 될 준비가 된 가장 빠른 때였으며, 이것은 마치 사도들, 모세, 그리고 선지자들이 인류 역사의 각각 다른 시기에 그들의 각가 다른 임무를 위해서 선택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한다.


이 점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증언은 대단히 주목할만하다. 적당한 경우마다 그는 그의 ‘신성한 임명’에 대해서 거듭 주장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1779년 <순정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주님께서 그분의 종 나에게 당신을 나타내시고, 이 임무를 위해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진실로 증언한다. 그후 그분은 나의 영의 눈을 열어 나를 영계로 들어보내시고, 나로 하여금 천계과 지옥을 보게 하시고, 또 천사와 영들과 지금도 계속 대화하도록 허락하셨다. 또 그와 같이 부르심을 받은 첫날부터 내가 말씀을 읽을 때 오로지 주님 외에는 아무 천사들로부터 그 교회의 교리에 관게되는 것을 받지 않았다.”


또, <묵시록해설> 1183항에서는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과 천사들로부터 오는 것을 분별하여 감지하게 되었으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써 놓았으며 천사들로부터 오는 것은 써 놓지 않았다.” 그는 또 <새로운 교회에의 초대>에서 말한다. “내가 말한 것들은 기적이 아니고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 주님이 나를 영계로 인도하셨다는 증명이다.”


이것은 사기꾼의 말이 아니라, 미친 사람의 말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스베덴보리는 자기가 주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의 속뜻에 대해서 새로운 빛을, 그리고 문자와 그것의 영적 의미 사이의 상응을 찾아내는 열쇠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교류 혹은 계시의 결과가 세 책에 기록되었다.


첫째로, 1749년에서 1756년 사이의 <천계비의>라는 제목의 책들이 사절판의 여덟 권으로 출간되었다. 일년에 한 권 정도로 나왔으며,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주해이다. 성경 구절 하나 하나를 놓고 그것의 영적인 뜻을 설명하였다. 스베덴보리는 히브리어 글자의 점, 획, 장식글씨, 등등에 신성한 무엇인가를 포함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천국으로부터 내게 보여졌으며 믿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라고 그는 말한다.


둘째로, <묵시록계현>은 지금까지 감추어졌던 예언의 신비를 열어 보여준다.

셋째로, <묵시록해설>은 지금까지 감추어졌던 예언의 신비를 열어 보여준다. 전자는 요약이며 후자는 더 확장시킨 것이며 말씀의 나머지의 상당한 부분을 주해하고 있다.


1766년 9월 23일 스베덴보리는 스톡호롬에 있는 그의 친구 에팅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해에 <묵시록계현>이 출판되었소. 이것은 ‘최후심판’에서 이미 약속했던 것이오. 이 책에서는 내가 천사들과 대화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인데, 이는 묵시록의 가장 작은 점도 계시 없이는 이해가 안 되기 때문이오. 누가 새 예루살렘이 새로운 교회를 의미하고 그 교회는 표징 즉 상응에 의해서 묘사되었기 때문에, 오직 주님에 의해서만이 계시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겠소? 또 이런 교회들이 그 계시를 받은 자에 의해서만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을 누가 이해하겠소?


나는 주님께서 친히 나에게 나타나시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고, 이 목적을 위해서 나의 영의 내면적인 것을 여셨다는 것을 엄숙히 증거하오. 내 마음의 내면적인 것을 여신 이유는 내가 영계에 있는 것들을 보고 듣도록 하기 위해서였으며 나는 지금까지 22년 동안 그렇게 하였소. 현재 증거하는 것만 가지고는 사람들을 이런 것에 대해서 납득시키기에 충분하지 못하오. 그러나 건전한 이해력을 자는 나의 저서 특별히 <묵시록계현>의 증거에 의해서 확신할 수도 있을 것이오.


지금까지 누가 성언의 영적인 뜻에 관한 것을 알았오? 영계 혹은 천계와 지옥에 관해서? 혹은 인간의 사후의 삶에 관해서 이러한 것들 그리고 다른 것들이 영원히 기독교인들로부터 숨겨져야만 하겠소? 이제 이것들이 처음으로 새 예루살렘인 새로운 교회를 위해서 나타내졌으며 그것에 속한 자들이 그것들을 알고, 또 믿지 않아 아직까지 모르던 자들도 이제 알게 될 것이오.”


<묵시록 해설>은 아무 이유 설명 없이 묵시록 19장 10절로 끝났다. 이 저서와 <묵시록계현>은 스베덴보리의 시도가 성공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인간의 해석을 좌절시킬 성경의 한 책의 영적인 뜻의 속을 완전히 해석하는 주해서로 간주된다. 그의 빛의 근원이 무엇이었든지 그의 주해는 확실히 내가 아는 한 가장 이해할 수 있고, 완전하고, 조화되었고, 스스로를 논증하는 저서이다. 덧붙여 말하는데, 내가 언급한 이 세 저서는 모두 라틴어 사절판 14권인데, 그 저서가 원래 주해하기 위해서 쓰여진 성경책들 외에 성경의 다른 책들의 많은 부분을 주해하고 있다. 이 열쇠는,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성언 전체에 숨긴 보물을 열어 놓는다. 이 열쇠가 없었다면, 그 숨겨진 말씀의 보물이 영원히는 아닐지라도 부정의 기간 동안 접근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스베덴보리가 영계, 말씀의 속뜻, 그리고 성언이 쓰여진 양식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을 할 권리가 어디로부터 았는지에 관해서는 사람들 간에 여러 가지 다른 의견들이 계속하여 있을 것이다. 이것은 모세 오경, 예언서들, 복음서들, 그리고 묵시록의 저자들이 어느 근원으로부터 받았는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다른 의견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주님께서 인간들 사이에 걸으실 때 그가 신성의 권위에 의해서 말씀하신다는 주장을 사람들은 비웃었다. 그런고로 스베덴보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개인의 결백성, 명예, 그리고 지능으로 다루는 주제(자연과학 부문을 말함-역자 주)에 관해서는 그의 동시대의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겠지만, 그의 초자연적인 것에 관한 임무에 대한 그의 주장은 오래 지지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의 저서들 자체가 증거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의 성경해석 이론은 서로 완전히 조합되어서 어느 부분에 적용을 하든지 전혀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 성경에 있는 외적인 혹은 물질적인 사물들이 어디에 있던지 그것들은 같은 영적인 뜻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 뜻이 말씀 자체의 분명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가르침과 조화하여야 한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매우 열심히 연구하는 연구가들은 이러한 조화를 인정한다. 그들은 창세기나 출애굽기 혹은 묵시록 그리고 다른 곳에 기록된 대로 말씀의 문자적인 뜻과 영적인 뜻 사이의 상응이 성서의 다른 어느 부분의 사물이나 현상에도 꼭 같이 응용된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은 두 언어, 즉 자연적 혹은 외적인 언어와, 영적 혹은 내적인 언어로 쓰여졌다고 하겠다. 기록된 자연적 또는 외적 사물 혹은 사건은 오로지 그들의 영적인 뜻 때문에 선택되었으며, 그들이 나타나는 다른 모든 경우에 그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새 포도주가 포도송이 속에 있으니 터트리지 말라고 한다. 축복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이사야 65:8)


스베덴보리는 말씀이 담고 있는 모든 속뜻을 자신이 제공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한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말씀이 무한하다고 말한다. 말씀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심오한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말씀은 점차적으로 열려져 모든 천국의 천사들과 한계가 있는 지능의 소유자인 인간이 영원히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경지에까지 응용이 되며, 마치 광선이 태양에까지 올라가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으로까지 퍼져 올라간다.


다른 말로 말하면 말씀은 ‘신성’이라는 용어의 진실된 의미 속에 있으며 그런고로 무한하다. 그래서 성경의 자연적 언어는 이런 숨은 것들을 포함할 수 있고, 이 세상과 천계에 있는 자들의 여러 각각의 영적 상태에 응용될 수 있는 상응의 언어여야만 했다. 그런고로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최상의 권위는 그 문자 속에 거하는, 많은 그러나 조화스러운 놀라운 빛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으며 믿음이 깊고 신앙심이 깊은 자들이 이제 알려진 상응의 지식을 통해서 계시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또 자연이 신의 지혜의 비슷한 보물이며 비슷하게 열려져 하나님 자신에게까지 올라가는 원인과 결과 속의 원인과 결과의 연속이 가능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된 혹은 씌여진 말씀과 자연 속의 그분의 말씀은 서로 함께 그분으로부터 내려오고 그분에게로 올라간다. 이 하나님은 가장 내적인 것 속에 계시며 기록된 말씀과 자연 속의 말씀에 영혼을 넣어 살리시며 막연히 퍼져 있는 영향이 아니라 분명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무한히 영광스러운 신성한 인간이시며 제한된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위대한 원형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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