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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는 눈

주님에 대하여 쓰여진 성경

작성자엄기욱|작성시간05.11.15|조회수158 목록 댓글 0
저 놀랍고 신비한 스베덴보리의 사상은 과연 진리인가요?

먼저 생각해볼 것은 그의 글에 대한 권위 여부를 성급히 가리는 것이 아니라 과연 그의 글이 진리인가 아닌가부터 천천히 확인하는 검증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 작업이 먼저 이루어진 후에 그의 글에 대한 평가를 내려도 늦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검증작업을 거치기 전과 거친 후의 사람의 생각은 또 달라질 수 있는 것이지요.

이를 위하여 아래 그의 글 가운데 한 부분을 제가 선별 정리하여 이곳에 올려봅니다. 과연 저 글이 사람의 능력에서 나올 수 있을까요? 아니면 주님의 능력일까요? 아니면 사단의 능력일까요?

* 주님에 대하여 쓰여진 성경

많은 분들은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라고 시인하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 자신이 하신 말씀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하지만 정작 성경의 어떤 부분들이 그러한가 실제로 예를 들어 보기를 원하면 단지 주님을 예표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몇몇의 구절이나 낱말들만을 대표로 찾아낼 수 있을 뿐입니다. 이에 반하여 스베덴보리라는 한 신비가는 그의 성경 해석을 통해 지금까지 예표로 확연히 드러나 있는 부분 뿐 아니라 아주 평이한 듯이 여겨지는 이야기 속에도 그 속뜻으로는 주님에 관한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음을 설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아래 아브람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 말씀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해석 일부를 선별하여 저 나름대로 정리한 것인데 우리는 이를 통해 성경이 주님에 관하여 기록된 책이라는 것을 보다 분명히,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성경 각 구절, 낱말 하나 하나마다에 담긴 영적 의미를 그것과 관련한 영적 체험과 함께 상세히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러 사정상 아브람 이야기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는 내용의 앞뒤 흐름을 끊고 그 가운데 일부를 택하여 이에 대한 해석을 요약 정리하여 올립니다. 이 글을 읽는 분께서는 진리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먼저 선입견을 버린 상태에서 그것이 참인가 끝까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밝혀준 내용에 의하면 때로 말씀의 속뜻은 문자에 나타난 의미와는 전연 별개로 신기한 진행을 갖기도 하여 읽는 이들을 곧잘 당황하게 만들곤 합니다. 제가 그의 해석에서 가장 놀라는 부분은 성경 말씀의 어느 한 단락 정도라면 몰라도 어찌 저처럼 방대한 양을 성경 구절 하나 하나마다 뜻을 풀어가며 앞뒤로 일관성 있게, 또 논리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는지 그것을 도저히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아래 글은 그의 글 가운데 극히 적은 분량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여기에 주님께서 그에게 눈을 열어 보여주신 영적 체험들을 상세히 곁들이며 성경 말씀을 풀어주는데 세상 누가 그러한 것을 일부러 꾸며내었다고는 도대체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간략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브람이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롯이 함께 동행하고 있었다는 성경구절’을 읽을 수 있습니다. 평범한 기독인이든 어느 유명한 신학자이든 간에 이 구절을 앞뒤 문맥과 연관지어 아무리 쳐다보아도 문자 그대로의 의미 그 이상의 빛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통하여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진정한 의미는 이러한 바 육체로 오셔서 이 세상에 어린 시절을 보내시던 주님에게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러하듯이 겉 사람에 속한 부분들이 함께하고 있었음을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아브람은 어리신 주님을 그리고 롯은 그분에게 속한 겉사람 부분을 각기 상징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래에서 이와 연관된 풀이를 납득할만하게 구체적으로 설명드리겠지만 이 땅 위 과거 어느 시대에 존재하던 한 인물의 삶을 기록한, 평범한 듯 보이는 성경말씀 안에 실제로는 먼 훗날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오실 주님의 어린 시절 삶의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담겨져 있는 이와 같은 놀라운 의미가 내재해 있는 까닭에 성경말씀은 일반 영적인 서적들과 구분되어 거룩한 말씀, 영과 생명이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 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또 요 6:36에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기독교 역사상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많은 거짓 신비들이 등장한 까닭에 제가 지금 언급하는 내용 역시 일반 기독인들에게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비칠 것이라는 사실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 스베덴보리를 통하여 밝혀준 바르고 의로운 이 빛은 이 세상에서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만큼 너무도 놀랍고 귀한 진리이기에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책을 차분히 읽어보시는 분들은 진정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전혀 과장이나 허튼 소리가 아님을 건전한 이성으로 판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아브람이 자기가 살던 고향을 떠나는 장면에 대한 상세한 해석에 들어가기 전 여기서 잠시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먼저 간략히 언급해 봅니다.

창 13:1-13절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 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 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에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덧붙이지만 이 부분의 성경 해석을 할 때 특히 유념해야 할 것은 아브람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이나 그들의 언행, 사건, 사물, 지명 등은 모두 주님께서 육체로 이 세상에 오셔서 어린 시절을 지낼 때 그분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내적 상태의 변화를 성령의 영감에 의해 신비하게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두 인물 아브람과 롯이 상징하고 있는 뜻을 미리 엿본다면 가나안을 향한 길고 긴 신앙 여정의 첫 시발을 맡은 아브람은 인간으로 말하자면 어린아이의 특질에 나타나는 선(善) 즉 아직 지혜와 결합하기 전 순진무구한 선(善)의 상태에 계신 어리신 주님 자신을 뜻합니다.

또 그 아브람이 조카 롯을 동행하고 있었다는 구절이 뜻하는 것은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주님이시기에 그분의 겉사람에게도 어쩔 수 없이 외적이고 감각적인 속성이 함께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어리신 주님의 겉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지식은 매우 영명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그분의 인성은 마리아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악의 경향성을 이겨내는데 유용하도록 지식으로 먼저 교육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람이 애굽에서 체류하는 동안에 겪는 여러 일들로 묘사되었는데 거기 등장하는 바로와 대신들은 주님의 겉사람 롯이 지니고 있는 자연적 지식들을 상징합니다.

위에 인용한 성경에서 롯과 아브람이 함께 하는 땅이 좁아 양측의 목자가 서로 다투다가 결국 롯이 아브람을 떠나게 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유전악의 경향성을 떨쳐버리지 못한 상태에 계신 어리신 주님의 겉 사람이 순진무구의 선을 지닌 그분의 속 사람의 기질과 서로 달라 속 사람에게 지배받기를 싫어하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겉 사람에게는 두 가지 모습이 동시에 있을 수 있는 바 하나는 속 사람에게 동의하는 선한 성질이고 다른 하나는 동의하지 않는 성질입니다. 이 동의하지 않는 부분 때문에 아브람과 롯 즉 주님의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각기 그들의 소유가 많은데 비하여 땅이 좁아 다투는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에 주님의 속 사람은 겉 사람을 길들이려 하는데 자기들은 서로 한 골육 곧 서로 선과 진리라는 한 모체 속에서 다툼 없이 살아야 하는 상태임을 상기시켜 화해를 청하는 한편 겉 사람 롯 가운데 있는 악한 기질들과의 결별을 요구하는 것을 성경에서 봅니다. 창 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그리하여 겉 사람 중 속 사람에게 동의하는 기질은 속 사람에게 흡수되고 이제 동의하지 않는 불순종 기질은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되어 집니다. 그렇게 겉 사람의 불순종의 기질이 제거된 후에야(롯이 떠난 후) 비로소 어리신 주님은 그 가나안 땅 곧 하나님 나라를 자신과 자신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주시리라는 확신을 신성이 머물러 계시는 당신의 영혼으로부터 다시 한번 다짐받게 됩니다. 이 내용을 뜻하는 것이 아래 이어지는 구절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 13:14-17)

이것은 롯이 떠난 후 곧바로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람으로 시작하는 성경 이야기는 신비스럽게도 주님의 가장 어린 시절부터의 영적 발달 과정을 그려주고 있는 동시에 인간에 있어서는 그의 거듭남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주님은 모계로부터 물려받은 연약한 육신을 입고 태어나셨기에 어린 시절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영육 간에 유치한 상태를 겪어야 하셨습니다. 구원의 대업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은 먼저 자신의 그러한 유치한 상태를 벗어나야 하셨고 이것이 성경에서는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을 향해 가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이 우상 숭배 지역인 갈대아 우르에 살았다는 것은 아직 유전악의 경향성 가운데 계시던 주님의 어릴 적 유치하던 영적 상태를 나타내고 아브람이 그곳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신 사건은 그분의 속 사람이 여러 과정을 거쳐 신성한 상태로 완성되어진 것을 뜻합니다. 이어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이곳 저곳을 이동하면서 그의 생명은 이삭과 야곱 그리고 열 두 아들 가운데 요셉으로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생명이 대를 이어가며 변화하는 여러 상황들 속에는 어리신 주님이 우리와 같은 삶을 사심으로부터 세상적 지식을 습득하심과 또 말씀을 배움으로 영적 지식을 취하시는 과정, 그리고 그러한 지식이 내면에 형성되면서부터 바야흐로 겪게 되는 여러 시험들을 통하여 어떻게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인성을 신성에 결합해 가시는지 그 과정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류의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글쎄 성경을 그와 같이 이상하게 보아야 하는가!’ 라며 이런 식의 해석에 확고한 믿음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줄거리는 대충 그런 식으로 꾸며볼 수 있지만 정작 성경 각 구절 앞뒤를 연관지어 그 속뜻을 상세히 밝히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쓴 Arcana Coelestia(그중 아브람 이야기는 표징적 교회로 번역 중) 라는 책을 읽어보면 여느 글에서 발견되던 추상적이고 모호한 느낌들을 확연히 벗겨주어 ‘그의 글은 반드시 진리임에 틀림없다!’ 라고 여길 만큼 그런 의심들을 가셔줍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책이, 이런 해석이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이 과거 그 책을 접한 분들의 솔직한 심정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많은 저명한 분들이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곧 헬렌 켈러, 괴테, 칸트, 윌리엄 블레이크(영국의 시인), 랄프 왈도 에멀슨(수필가이며 목회자), 토마스 칼라일, 루우즈벨트(전 미국 대통령), 김필례 여사(전 수피아 여중고 교장), 사두 썬다싱, 칼롶삼, 엘버트 허버드, 헨리 워드 비쳐, 엘리자베드 B. 브로우닝, 사무엘 테일러 골릿지(사상가), 필립스 부룩스(설교자), 요한 조셉 본 게레스(로마카톨릭 신학교수), 잉거솔(성경비평가), 제임스 마훠트(성경번역가), 아나레 드 발자크(프랑스작가), 에드윈 마아캄(시인)... 등입니다. 또 그의 글에는 성경의 예언자들과 사도들, 바울, 다윗, 칼빈, 루터, 웨슬레,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및 카이사... 등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영계에서 만나 대화하거나 그들의 근황에 관해 언급한 내용들도 적혀있습니다.

창세기 12 : 1-20

“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내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간략한 줄거리) 어리신 주님은 신성이 머물러 계시는 당신의 영혼으로부터 생각하시기를 출생 때부터 자신이 지니고 있던 육체 본연의 관능적이고 세속적인 상태를 벗어나 신령한 상태에 이르러야 되겠다는 자각을 느끼십니다. 주님이 그와 같은 자각을 기뻐하게 된 이면에는 앞으로 자신으로 인하여 사랑과 인애 안에 있는 당신의 거룩한 교회가 탄생되고 그 교회가 맺는 영적 결실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는 더욱 확장될 것이며 이를 위해 주님 자신은 섬기는 삶을 통하여 영광을 얻은 후 세상 모든 선의 근원이 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수고하신 결과 주님을 시인하고 믿음으로 선하게 사는 자들은 지금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어둠의 세력에서 물러나 모든 행복이 길이 함께 할 복을 얻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굳힌 악한 정욕에 걸맞는 삶이 그들의 몫으로 주어지게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 원리이십니다.

설명) <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아브람은 육신을 입어 낮아지신 인성으로서의 주님을 뜻하고 그의 주로 불리우는 분은 영혼에 머물러 계시는 신성 곧 여호와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은 그의 영혼이 육체와 결합되어 한 사람을 이루듯 세상 안에 들어오신 주님 역시 그분의 신성이 인성과 하나로 결합되어 계신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해석은 신성이 머물러 계시는 영혼으로부터 인성의 주님에게 어떤 지각이 흘러 들어와 깨우침을 얻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신성과 인성이 한 분으로 계시기에 이 말은 결국 어리신 주님 스스로 자신의 깊은 곳으로부터 어떤 것을 깨달으셨다는 의미인데 그 깨달음의 내용은 이어서 설명드릴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라는 내용입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 이 구절 이하는 앞서 주님 스스로 깨달은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에 앞서 성경이 말하는 시간과 공간이 어떤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봅니다. 성경에서 누가 어떤 장소를 떠난다는 것은 그가 그 당시의 영적 상태에서 벗어나 신앙의 진전을 이루거나 아니면 신앙의 퇴보에 처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지는 공간적 이동은 하나님의 두 본질에 속하는 사랑과 진리의 상태가 그에게 있어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는 말이지요. 시간과 공간은 이 세상에서나 필요한 요소로써 하나님 나라는 그것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영이요 생명이 되는 거룩한 말씀 역시 그 본질적 의미에 있어서 그와 같고 이는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면 거기는 그것들의 본질을 이루는 사물의 상태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살고 있던 본토나 친척, 그의 아비 집 등은 모두 세상적이고 관능적인 상태에 있던 어리신 주님의 유치한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데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겠다는 생각을 주님은 하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정들어 살던 고향이나 혈연 등은 주님께서 그때까지 익숙히 길들여져 있던 옛 상태를 나타내는데 주님은 지금 거룩한 땅 가나안을 향하여 그곳을 떠나야 하기에 주님이 몸담고 있던 옛 상태를 떠난다는 것은 육체를 입으신 주님이 모계(마리아)로부터 물려받은 유치한 상태를 벗어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 아브람이 가야할 땅은 주님의 속 사람이 이루어야할 신성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님이 이러한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은 모계로부터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셨기 때문이지요. 모든 인간이 악에서 떠나야 비로소 그의 내면이 사랑과 진리로 채워져 중생에 이르게 되듯 주님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인성에 취하신 유전악의 경향성을(엄밀히 말해 유전악은 악으로 기우는 경향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외부에 실제 행동으로 실행된 죄와는 구별됩니다.) 스스로 벗어버리시고 내적으로 신령한 상태를 이루셔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처럼 허약한 인성과 그로 말미암은 유전악을 취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신성만으로는 악한 세력으로부터 유혹을 받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지배하는 지옥의 세력들은 인간의 애정과 생각을 무대로 살아가는 바 이에 주님은 그 스스로 우리와 같은 인간 성정을 입으시고 지옥의 세력을 불러들이시어 시험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당시에는 사람들에게서 사랑과 믿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그들의 신앙 상태는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영적 상태로는 지옥의 세력과 싸워 그들을 물리침으로 구원 얻을 자가 없었기에 주님은 인류를 대신해 인성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몸소 지옥의 세력과 싸워 물리치심으로 그동안 그들에게 사로잡혀 있던 인간의 의지를 해방시켜 자유케 해주셨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과거 악의 세력에 무능력하게 끌려가기만 하던 옛 상태에서 벗어나 이제 마음만 먹으면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유를 되찾게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당시에 이스라엘에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가 많았다는 것은 그들이 지옥의 세력에 얼마나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던가를 선명히 나타내주는 그림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대업을 이룰 것을 영혼으로부터 자각하신 어리신 주님은 먼저 자신의 속 사람을 스스로 완전케 하셔야 했는데 이것이 아브람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으로 상징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내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 주님은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깨우침을 얻은 후 먼저 자신의 영명하지 못한 내적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일련의 영적 진전과정의 길을 떠날 결심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람이 그의 정든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게되는 장면입니다. 그 뒤 주님으로 인하여 큰 민족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는 주님으로 인하여 선과 진리 속에 사는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복의 근원이라는 낱말은 주님으로부터 그의 교회에 사랑과 진리가 풍성하게 주어지는 것을 말하는데 주님의 이름이 창대케 되고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은 주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심으로 우리의 구속주 하나님이 되시는 영광을 말한 것입니다.(이에 대해 처음 해석에서 상세히 설명한 것 참조)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해석) 이에 어리신 주님은 당신의 영혼으로부터 들려오는 신성한 말씀을 좇아 영적 진전을 꿰하셨는데 그때 주님의 영적 상태는 아직 유치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므로 관능적이고 감관적인 부분이 많이 있었고 신령한 상태에 이르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았다는 것을 하란이라는 지역명과 그의 조카 롯의 동행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는 선을 지향하는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도 함께 내재하여 있었는데 이것이 아브람에 동행하는 사래로 뜻하여졌습니다.

설명) 여기 표현된 롯이나 하란, 하란에서 얻은 소유물 그리고 아브람의 나이 75세 등은 모두 주님의 영적 상태가 아직 성숙치 못한 것을 나타내 줍니다. 성경에 기록된 지명들은 모두 그 내적 뜻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나 교회의 영적인 면모가 어떠한지 그 질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그 목적지가 의미하는 뜻에 따라 때로는 영적 진보를 나타내기도 하고 때로는 악과 거짓의 길로 치닫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보여지는 길은 공간적인 의미보다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숫자 역시 그러한 뜻으로 쓰이는데 100 등이 완전한 상태라면 75는 그에 못미치는 영적 상태를 뜻하고 있습니다. 롯에 대해서는 위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해석) 주님이 속 사람을 완성하신 뒤에 비로소 주님에게서 영적인 것들이 처음으로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 지식의 도움으로 인해 주님은 자신의 겉 사람 안에 육신의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유전악의 경향성이 함께 거하고 있음을 자각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유전 악들을 살피면서 주님은 자신이 걸어가는 이 길로 말미암아 장차 자신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이 구원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깨우침을 주신 당신의 아버지를 존귀히 여겨 첫 번째 예배를 드렸고 어리신 주님은 계속하여 드높은 상태로의 영적 진전을 향하여 나아가셨습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그 지식이 영명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주님의 예배는 외적인 것에 그치다가 점차 내적 예배로 진전하였고 영적 지식의 빛 또한 더 충만히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설명) 세겜은 지리적으로 가나안에 이르는 첫 관문인 것 같이 영적 의미로 빛에 속한 첫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주님이 세겜에 이른 것은 속 사람을 완성하신 주님에게 이제 영적인 빛이 비추어들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세겜이라는 지명을 성경에서 보면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도 역시 세겜 성 앞에 장막을 쳤으며 또 세겜은 도피성이 되기도 하고 제사장들의 성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는데 이에 대한 설명으로는 짙은 어둠 속에 있던 영혼이 이제 영적 빛에 조요되는 상태로 접어들게 된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상수리나무 역시 그 상태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외적 지각을 의미하고 있는데 성경은 이와 같은 식물로서 사람이나 사람 속의 지각을 표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각에도 여러 분류가 있어서 성경의 표현상 가장 총명한 지각을 소유한 사람을 정원이나 동산의 나무로 말하였고 그보다 못한 내면적 상태를 숲 속의 나무나 레바논의 나무로, 그리고 겉 사람에 속한 가장 외적인 지각을 상수리나무 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어린 주님의 겉 사람은 아직 깊지는 못한 외적 지각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는데 아브람이 상수리나무 숲 모레에 다다랐다는 공간적인 이동 속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상수리나무 숲 모레가 영적 진보의 첫 입구인 것은 가나안을 향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행보에서도 증거되는데 그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그들이 처음으로 이른 곳이 바로 거기였고 또 그곳은 저 멀리 가나안 땅 중심을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고자 하는 그 땅에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은 주님의 겉 사람 안에는 모계로부터 비롯된 유전악의 경향성들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함인데 영적 지식의 첫 비추임으로 인해 주님은 이를 자각하시게된 것입니다. 주님에게는 스스로 갖는 고유한 악은 없을지라도 육신의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악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주님은 시험을 받으시고 그것과 싸우셨으며 마침내 지옥을 정복하심으로 어떠한 악도 가지지 않고 자신의 인성을 거룩히 하신 것이지요. 가나안에 사는 주민들은 우리 마음에 살고 있는 고질적인 악의 뿌리들을 뜻하는데 이는 영적 진보를 위하여 정복해야 하는 악한 대상들임을 성경은 여러 부분으로 가르치고 있으니 재삼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자손에게 그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의미는 야곱에서 비롯된 그의 후손들 안에 하나님 나라(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뜻이고 제단을 쌓은 것이나 주의 이름을 부른 것은 사람으로 말하자면 진리와 선을 따라 드리는 영적 예배를 뜻하는 것이지만 인성을 입은 어리신 주님 편에서는 이것이 자기 영혼에 머무는 신성에 무한한 존귀와 영광을 드리는 상태를 뜻하는 표현입니다. 이어 아브람이 베델 동쪽의 산간 지방으로 옮겨 거기서 장막을 쳤다는 것은 주님 안에 영적 지식과 사랑의 선이 증가되는 것을 뜻하는데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베델은 영적인 지식의 상태를 뜻하고 산이나 동쪽은 선에서 출발되는 사랑의 근원을 의미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신 주님의 영적 상태는 아직 성숙한 상태에 다다르지 못하였다는 것을 영적인 지식을 상징하는 베델이 서쪽에 있는 것으로 그리고 세상적 지식을 상징하는 아이가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원래 동쪽은 주님 계신 곳으로 주님으로부터 빛의 공급을 받을 수 있는 곳이지만 서쪽(바다가 있는)은 그 반대의 의미로 빛의 공급을 받지 못하는 상태를 뜻하기에 주님의 영적 지식은 밝지 못한 서쪽에 있는 것으로 또 주님의 세상적 지식은 밝은 상태의 동쪽에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리신 주님의 영적 상태가 아직 영명하지 못하다는 것을 나타내줍니다. 이를 위하여 주님은 자기 안에 영적 빛의 비추임을 더욱 갈망하셨는데 아브람이 점점 남방으로 옮겨간 것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해석) 그 당시 어리신 주님의 겉 사람으로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참 지식의 결핍이 상당한 지경에 있었다는 것이 그 땅에 기근이 심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주님의 겉 사람은 속 사람의 도움을 힘입어 성언으로부터 지식을 교육받기 원하셨는데 이것이 애굽에 체류하는 것으로 상징되었습니다. 교육을 받기 시작하셨을 무렵 주님은 자신의 지심한 마음속에서 사랑과 결합하기를 원하는 진리의 아름다움을 보고 기뻐하신 것이 아브람이 사래에게 말한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는 표현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입니다. 사래로 상징된 진리 즉 지고한 사랑과 결합하려는 이 진리는 성언을 배움으로 취하는 외적, 내적 지식들과는 다른 것으로 이는 어리신 주님께서 이미 아버지로부터 받아 속 사람에 지닌 신성한 것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 순종할 때는 그들 사이에 결합이 일어나 속 사람이 지닌 진리의 신성이 겉 사람이 배우고 습득한 지식 그 속으로 스며들어 그 지식 자체까지도 신성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나 이때 주님은 자신의 겉 사람이 그 진리의 아름다움을 반기면서 그 진리로부터 사랑을 섬기는 마음을 떼어버리고 오직 겉껍데기에 불과한 지식만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것에 대해 상당히 경계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브람이 염려한 내용 곧 이집트 사람들이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린다’라고 하는 구절의 의미입니다. 이어 ‘누이로서의 사래’가 등장하고 그에 의해 아브람이 목숨을 보존하게 되는데 이 뜻은 아내를 누이라고 부르는 방법에 의해(이 방법의 영적 의미는 아래에서 설명) 속 사람에게 있는 진리(사래) 속에 담겨진 사랑의 요소(아브람의 생명)가 잃어지지 않도록 배려를 하면서 겉 사람이 지닌 지식(이집트 사람)과 잘 결합하여 그것이 참된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주의하셨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명) 그 땅에 기근이 심하다는 것은 어리신 주님의 겉 사람에게 필요한 지식이 결핍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이 표현하는 기근이나, 굶주림, 목마름 등은 생명의 성장에 취할 영적 양식이 부족한 상태를 뜻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거기에는 선이나 진리 혹은 지식, 사랑이나 믿음 등 전반적으로 교회가 타락하여 황폐하게된 상태를 드러내고 있는데 여기서는 육신을 입으신 주님의 겉 사람이 아직 자신의 영적 상태가 어리므로 처할 수밖에 없는 외적, 내적 지식들이 충족치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부인으로서의 사래는 주님의 속 사람이 품고있는 그 선에 결합되어 있는 진리(眞理)를 말하며 누이로서의 사래는 아내로서의 사래와는 다른 성격의 진리인데 아내로서의 사래가 겉 사람에게 사랑을 심어주는 역할을 한다면 누이로서의 사래는 그 일을 가능케 하기 위해 먼저 영적 지식을 사랑하는 애정을 겉 사람에게 심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당시 주님의 속 사람은 선과 결합하기를 원하는 신성한 진리(아내로써의 사래)를 소유하고 계셨는데 이 신성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그릇의 역할로서 겉 사람에 속한 지식들을 배울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겉 사람은 그 신성한 진리를 담을 그릇으로써의 지식을 성언에서 취하셔야만 했던 것이고 이러한 내용이 아브람이 기근을 피하여 애굽에 내려가는 공간적인 이동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겉 사람이 소유한 지식들까지 속 사람의 신성한 진리에 의해 살아나 생명을 얻게 하심으로 주님은 자신의 겉 사람 속에 있던 모든 유전 악을 떨치고 속 사람에 순종하는 역사 곧 인성을 신성에 결합하시는 역사를 완성하려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자신의 영적 진전에 방해가 될 문제 하나를 깨닫게 되셨는데 그것은 겉 사람이 배워 기억의 창고에 넣어둔 지식이 실제로 반기는 것은 선(사랑)과 결합하려는 신성한 진리가 아니라 선(사랑)과는 상관없이 그저 드높아 보이는 진리의 지식측면만을 기뻐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도 너무나 심각한 사안으로 다가와 우리 신앙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습니다. 겉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지식들이 속 사람에게서 유입되는 신성한 깨우침에 의해 사랑을 실천하려는 지식으로 발전하지 못하면 그 지식은 자신의 정욕만을 채우는 세상적 지식으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이런 상태에서의 사람은 지식은 있으나 정작 그 진리가 그리워하는 사랑은 무시하게 되는데 이는 모름지기 참 지식이란 사랑의 삶을 사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저의 쓰임새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상태가 성숙치 못할 때는 이러저러한 것을 가릴 여유가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 눈에 들어오기 쉬운 성경 말씀은 사랑과 결합하기를 원하는 지고한 진리가 아니고 영적으로 드높아 보이는 진리의 지식만을 반기며 힘을 얻을 뿐입니다. 이런 처지에서는 주로 진리의 드높은 지식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성경을 읽을 뿐 그 진리로부터 사랑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절실함으로는 읽지를 못합니다. 진리를 아름답게 만드는 원천은 사랑에 있음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니 정작 사랑은 무시를 당하고 마는 것이지요. 이러한 상황을 어리신 주님은 이미 깨달으심으로 주의를 하셨는데 이것이 이집트 사람들에 의해 아브람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담긴 영적 의미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사랑하는 최종 목적은 그것으로 선을 목표하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이치로 처음 믿음에서 출발한 우리 신앙의 완성은 그 믿음으로 어느 만큼 사랑을 가꾸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반짝이는 진리의 지식이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그것은 선을 위해 시중드는 하녀에 불과할 뿐입니다. 진리가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사랑에서 나온 선과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선에서 이탈한 진리, 다시 말해 선한 생활이 없는 진리는 참 진리로 부를 수 없고 다만 지식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인하여 지식보다 선을 취하는 것을 더 중시할 수 있는 영혼의 힘은 단 기간에 성취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적 진전이 그처럼 한꺼번에 일취월장 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이런 까닭에 하나님은 그 과정에 단계적 질서를 두셨는데 이는 크게 세 단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차원은 세상적 삶에 필요한 진리의 지식들만을 반기는 단계인데 이를 위에 인용한 아브람 이야기에서는 ‘애굽 사람들’의 상태로 상징되었습니다. 다음은 진리에 담겨진 영적인 지식들을 중시하는 상태인데 이것은 애굽 사람들이 반기던 ‘누이로써의 사래’의 상태로 비유되었으며 가장 높은 것으로는 진리에 담겨진 선을 가장 중시하는 상태인데 이것은 아브람이 아리따운 여인으로 칭찬한 ‘아내로써의 사래’의 상태가 그것입니다. 아내로써의 사래가 아름다운 것은 그 여인이 자기 남편인 아브람을 위하여 자신을 헌신하기 때문이지요.

여기 세상적 진리의 지식만을 반기는 상태에서는 진리가 목적하는 바 선한 삶은 무시해버리기 일쑤입니다. 다시 말해 영적 상태가 아직 어릴 때에는 이 세상의 행복과 기쁨을 위하여 진리 안에서 반짝이는 외적 지식들을 얻는 것만을 기뻐하는 까닭에 이런 지식의 부요에 갇혀 있는 경우 주님과 이웃 사랑의 선을 지향할 마음은 점차 흩어져 궁극에 소멸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애굽 사람들에 의해 아브람이 목숨을 잃게되는 경우이기에 위에서 아브람은 이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혼이 당하는 이런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주님은 우리의 육체적 삶에 필요한 세상적 지식과 장차 그 지식이 목적하여야 할 선 사이 양편을 이어줄 중간 단계로 영적인 지식들을 즐거워하는 마음을 채워주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의 세상적 행복을 위해 기억의 창고에 수집해 놓은 지식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선을 위해 선한 씀씀이를 내지 못하고 언제나 그것을 배척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적 지식은 우리에게 필요한 바 그것이 우선적으로 주님과 이웃 사랑의 선한 씀씀이를 내면서 후차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쓰여지는 경우가 이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기심으로 가득한 인간 본래의 성품은 자기 삶의 기쁨만을 충족시키는 방편으로 세상적 지식을 사용할 뿐이어서 이 지식으로부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꽃피우는 일은 좀체 어렵기만 한 과제일 뿐입니다.

이렇게 악하기만 한 인간의 생각에 쌓여진 지식과 또 본질에 있어서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하나님 나라의 선 그 사이에는 서로 격이 다른 차원 때문에 벌어지는 엄청난 괴리감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자신과 세상만을 제일로 존중하는 그런 어둠 속에 머물러 있는 경우 설령 변화가 많은 인생살이를 거치는 동안 배움과 경험을 통하여 많은 지식들이 수집되었을지라도 우리 영혼은 그 지식들로부터 사랑의 선에 대한 어느 작은 아름다움조차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의지의 이런 완악함을 벗겨주기 위하여 주님은 세상적 지식들에 물들어있던 우리의 시각을 돌이켜 영적인 지식들을 사랑하게 하심으로 먼저 우리의 이해성을 개혁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영적 지식들로부터 얻어진 빛이 새롭게 영혼을 조명할 때 자기 사랑에만 물들어 있던 우리의 어둡던 눈은 점차 열려져 사랑에서 나온 선의 아름다움을 보고 기뻐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할 때 우리가 자신의 행복만을 위하여 수집한 세상적 지식들까지도 영적 지식들을 배우는 과정을 통하여 선을 위해 시중드는 참된 진리의 지식으로 아름답게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적이고 감각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영적인 지식들을 사모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지식들 역시 아직은 참 진리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생명은 사랑에서 나온 선에 있기에 영적인 지식들이 이러한 선을 위하여 그 쓰임새를 다하기 전까지는 그것들 역시 지식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지식들의 주된 역할은 훗날 우리 영혼의 생명이 될 순진 무구의 선한 애정이 파괴당하지 않도록 그 선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지요. 그 결과 영적 지식들이 선을 위하여 시중드는 온전한 위치에 있을 때 그것은 선과 결합을 이루어 이제 더 이상 지식이라 부르지 않고 진리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정리를 해봅니다. 선을 위하여 시중드는 참된 진리가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이 소유한 지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겉 사람은 아직 선의 귀중함을 인식치 못하고 거기 마음을 주지 못합니다. 겉 사람의 이러한 거부감을 완화시키기 위해 그 중간 단계로 마련된 것이 영적인 지식들의 화려한 모습인 바 겉 사람은 그 영적인 지식들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거기 스며있는 선까지도 함께 받아들이게 되고 결국 진리를 취함에 선이 잃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곧 ‘아내로써의 사래’의 위치를 ‘누이로써의 사래’의 위치로 비하시키는 듯한 아브람의 말속에 숨겨진 비유입니다. 성경의 이 모든 기록은 어리신 주님이 실제 자신의 겉 사람이 지식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에 생생히 겪었던 일들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해석) 마침내 주님은 참 지식을 얻기 위하여 영혼으로부터 오는 깨우침에 힘입어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는 것이 아브람이 애굽에 다다른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브람으로써의 주님이 예상하신 대로 이집트 사람들(주님의 겉 사람이 소유한 지식들 곧 선천적으로 알기를 소원하는 지식들을 상징)과 바로와 그 대신들(교육을 통하여 습득한 지식을 상징)은 속 사람에게서 유입되어 오는 진리(이것은 선과 결합하려는 진리를 속에 갈무리하고 있는 영적 지식으로써의 진리)의 아름다움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여 그들을 취하여 들였는데 이것이 본문에서는 그 여인이 칭찬을 받으며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여진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겉 사람이 지닌 영적 지식은 더욱 풍성해지고 귀한 사랑은 버림을 당하지 않고 보호받게 되었으며 이것이 또한 아브람이 환대를 받으며 그의 소유가 증가한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리고 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해석) 이렇게 주님의 겉 사람이 지닌 지식이 사랑을 소원하는 진리와 결합함으로 인하여 주님의 겉 사람에 속해 있던 선한 지식들은 속 사람과 뜻을 같이 하여 살아남게 되었으나 겉 사람의 관능적이고 세속을 탐하던 다른 지식들은 버림을 받아 소멸되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속 사람에게서 유입된 진리로 인해 겉 사람의 정욕적 지식들은 멸망을 당하게된 것을 말하는데 이와 같은 의미가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이 내려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브람에 대한 바로의 푸념은 어리신 주님의 겉 사람이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그동안 정들어 있던 자신의 기질들과 그것에 대한 기억들을 하나, 둘 떠나보내야 하는 서운함을 잠시 맛본 것을 의미하며 마침내 아브람이 모든 소유와 함께 길을 떠나는 것은 이제 속 사람에게 있는 선과 결합하려는 진리의 유입으로 겉 사람의 지식들까지 영향을 받게된 결과 겉 사람이 속 사람에 결합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내용을 끝까지 읽어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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