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일에 가려진 마음 속의 악
주님은 눅 7 : 47 - 48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말씀 속에 주님은 죄 사함과 사랑과 믿음과 구원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함께 표현하셨다. 먼저 여인의 죄가 사해졌다고 하신 이유는 여인의 사랑함이 많기 때문이라고 주님은 선언하신다. 일반적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은 믿음에 의한 것이라 알려져 있는데 주님은 여인에게 있는 많은 사랑 때문에 죄가 사해졌다고 분명히 선언하신다. 여인의 믿음은 입술만의 고백으로 나타나지 않았고 마음속에만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여인의 속마음에 있던 간절한 믿음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외부에 나타났다. 주님은 속과 겉이 일치한 여인의 사랑을 보시고 그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셨다. 속에 있는 진실한 것은 외부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런 면에서 여인의 신앙은 우리의 것보다 훨씬 우월하다.
사랑이 마음과 생각에만 머무르고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사랑이라 말할 수 없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과 진리 역시 비록 그들이 인간의 이해성을 바탕으로 내면에서 움직인다고 할지라도 사랑과 결합하여 외부에 행위로 나타나지 않은 채 마음과 생각 속에 관념이나 사상으로만 머무른다면 그것은 믿음과 진리라 불리울 수 없다. 따라서 신앙의 모든 요소들은 어떤 형체가 없는 관념이나 사상 속의 일들로 정의되어서는 안되고 그 관념이나 사상을 도구로 하여 삶으로까지 나타나는 형체가 분명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믿음이라는 것은 주님과 주님의 말씀, 주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 등에 관해 머리 속에서 그 사실을 시인하거나 확신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교회 다니는 신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 치고 그러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가 누구인가. 하지만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으로는 주님을 따라가지 못하는 자가 어찌 믿음 있는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믿음은 사랑의 삶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영역에서만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은 외관으로는 머리 속의 사상이나 관념의 일들처럼 보일지라도 그 본질적 영역은 생활에 두어지는 것이다.
신앙의 핵심적 요소인 믿음이 이와 같이 형체가 없는 관념이나 사상이 아닐진대 이 신앙의 근원인 믿음에서 비롯된 죄의 고백이나 사함 받는 것, 칭의, 구원, 기도 등 모든 신앙적 요소가 어찌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사상이나 관념의 일들이겠는가. 그동안 주님과 자신만 아는 달콤하고 뜨거웠던 은혜의 체험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구원을 얻은 증거는 아니다. 아무리 간절한 마음과 생각으로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확신과 믿음으로 기도하려 애를 쓰며 수시로 주님의 고난과 자비를 생각하고 그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눈물 흘릴지라도 또 진실된 마음으로 주님의 속죄에 의거하여 죄 사함을 받고 스스로가 아닌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확신하며 택한 백성이라고 기뻐할지라도 이 모두가 머리 속만의 일이 아닌 실제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러한 신앙은 속과 겉이 다른 위선적 신앙에 불과할 뿐이다.
위에 예로 든 여인에 대한 주님의 죄 사함 선언은 이와 같은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죄를 탕감 받거나 사함 받는 것은 주님의 피 공로에 의지하여 죄를 고백한 후 이제 그 죄가 씻겨졌다는 것을 믿고 확신하는 머리 속의 일들이 아니고 악을 버려 사랑의 삶을 사는 것 자체를 뜻한다. 죄를 고백하면 사함을 받는다는 성경 말씀에 의지하여 아무리 그 사실을 믿으려 애를 써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의심으로 남는 것은 자신에게 죄가 여전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죄를 짓고 그것을 주님 앞에 자백하여 그 죄가 씻겨졌다고 믿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이는 신앙을 머리 속의 일로 바라보기에 말씀도 그런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이다. 머리로 풀고 머리로 해결하려 애를 쓰지만 그렇게 하여서는 죄 사함을 입지 못한다. 악을 끊고 사랑의 삶을 사는 것만이 죄 사함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여인의 죄가 사해졌다고 선언하시는 이유는 그녀의 사랑함이 많음을 주님이 보셨기 때문이다. 여인의 생각과 마음에 머물러 있던 믿음은 주님이 보는 가운데 사랑의 행위로 나타났다. 눈물은 흘러 주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으며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붓는 여인의 행위는 속에 있던 진실한 사랑이 밖으로 노출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머리 속의 상념으로 주님께 자기 마음을 고백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바로 이와 같은 사랑의 나타남 때문에 주님은 여인의 죄가 이미 씻겨져 그 영혼이 정결케 되었다는 것을 아시고 이에 죄가 사해졌다는 선언을 하신 것이다.
여기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은 주께서 죄를 사해주신다는 의미는 문자 그대로 주님이 지니신 '죄를 사하는 권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권세는 우리가 악과 싸울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권세를 뜻하는 것으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의 공급을 받아야만 악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인이 받은 죄 사함은 이미 그 여인의 영혼이 회개에 의해 깨끗해진 것을 보시고 그에 합당한 선언을 하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심판 역시 염라대왕 앞에 줄로 늘어서 판결 받는 것을 연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그런 표현은 시공간 안에 감각과 육체로 살고 있는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성경의 표현 방식일 뿐이다. 굳이 주님이 그런 판결을 하지 않을지라도 이미 우리 안에는 천국과 지옥의 환경에 걸 맞는 영혼의 모양과 형상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영적인 사람이 아닐지라도 얼마든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신앙에 따라 주님을 시인하며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는 비록 사랑이 없을지라도 인간에게는 이해성이 있어서 이 이해성만으로도 천국의 빛 안으로 올라갈 수 있으며 그 빛 속에서 말하고 볼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의 성격이 어떠하든지, 심지어는 악할지라도 그가 영적인 사람인양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의지보다 이해성이 뛰어난 것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은 의지는 이해성과는 달리 천국에 올라갈 수 없으며 따라서 이해성만으로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영적인 사람은 이해성이 의지를 인도하지 않고 의지가 이해성을 인도하기 때문에 의지가 이해성과 함께 천국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나 천국 및 영생에 관하여 기독교인이 이 세상에서 지니고 있는 이해성은 그의 의지가 영적인 빛을 받도록 길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수단적 역할을 할 뿐이어서 그가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거처할 때는 지상에서 획득한 이해성은 벗겨지고 그의 의지에 걸 맞는 새로운 이해성을 맞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이란 이해성은 물론 그 이해성을 도구로 하여 사람의 주체가 되는 의지까지도 사랑 안에서 천국의 빛을 즐기며 사는 자인 것이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들어가 그와 결합하려 하실 때 그 길목을 가로막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지닌 악이다. 누가 말하기를 악을 악이라 또는 죄를 죄라 표현하는 것보다 그 지독한 성질을 더 잘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만큼 죄와 악은 사람에게서 생명과 기쁨을 빼앗아 마침내 그 영혼으로 하여금 주님 없는 암흑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한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지옥과 천국, 악과 선의 중간상태에 있게 되어 그 의지가 이편이나 저편 어느 쪽으로도 향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 안에 있다. 그 의지가 주님과 선을 향하면 그만큼 천국에 속하여 지옥과 악은 멀어지지만 반대로 악과 지옥을 향해 있으면 그만큼 주님과 천국에서 멀어진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가 주님에 의해 허락된 자유를 가진 증거로서 사람이 자기 의지로 죄를 끊는 정도만큼 주님과 결합하여 주님 안에 있게 되고 또 주님 안에 있게 되는 만큼 그는 선을 행할 힘을 주님으로부터 얻게 되는 것이다. 결국 누구든지 악을 끊는 정도만큼 선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악을 행하는 것은 극악한 죄로서 이는 주님과 율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끊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유의해야할 사항이 있다. 첫째로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주어지고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은 자아에서 비롯된 악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비록 악을 끊고 선을 행하는 힘이 주님에게서 연유하기에 인간은 수동적인 위치에 서있을지라도 실제로 사람이 지각하는 것은 능동의 위치에 서서 나 스스로 하듯 악을 끊고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악을 끊치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말을 지혜롭게 하고 선을 행하며 경건을 나타낼지라도 이 모든 것이 선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실례를 들어보자면 만일 사람이 다른 여러 가지 악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동시에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자기의 맡은 바 일에 성실을 다하며 또 설교를 듣고 말씀을 묵상하는 등 예배에 헌신한다고 할지라도 그에게서 나타난 이러한 선은 여전히 버리지 못한 악으로 인해 주님과의 결합을 방해한다. 그리하여 주님께로부터 유입된 순수한 선 대신에 자기 스스로에게서 비롯된 선 안에 있게 되고 이들은 자기와 세상을 사랑한 결과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수만 갈래의 선과 악 사이에서 변화를 맞고 있다. 마음의 표면으로 부상하고 속 깊숙이 잠재하는 등 이렇게 넓고 깊은 가운데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사람들은 표면에 부상하는 마음을 자기 것으로 삼고 살지만 실제로는 깊숙이 가라앉은 마음에 형성되어 있는 주도적인 애정이 그 사람 자신인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 마음을 보시는 분이다. 마음의 깊은 곳을 탐색할 줄 아는 사람은 그러한 선이 표면적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근원은 자아를 위한 사랑에 연유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악이 얼마나 선으로 둔갑을 잘하는지 또 선으로 보이는 것 속에 얼마나 지독한 악이 숨겨져 있는지 자기 마음속의 악을 파헤쳐 보아야 한다. 세상 왕국에서는 선과 악이 함께 섞여 있어도 우매한 인간의 눈은 이를 구별치 못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선은 순수한 것이므로 아주 조그마한 악이라도 함께 섞이게 되면 그것은 선이 아니라 악으로 변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속이는데 명수이어서 자기도 자신의 속마음에 속는 경우가 너무도 흔하지만 이를 자각하지 못한다.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억양을 가다듬고 진심으로 남을 위하여 애정을 쏟는 중에도 얼마든지 자신의 유익을 탐하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이러한 경우 겉으로 드러나는 선은 마음의 진실에서 비롯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이 실상은 속에 있는 자아애에 연결되어 있고 또 이에 대한 분별이 쉽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지만 그 선이 이 작은 악에 연결됨으로 인하여 전체가 악으로 변하게 된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것보다 먼저 악을 버리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마음 저 밑바닥에는 선을 행할 때에도 눈에 뜨이지 않게 악이 깊이 잠재해 있다. 그것은 마치 물이 그 원천으로부터 이미 더럽혀져 있는 것과 같아서 표면적으로 그가 연출하는 선이나 경건은 일시적인 습관이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자기 공로, 우월감 등에 기인된 위선에 불과할 뿐이다. 또 사람이 진리를 알고 이해하여 신앙, 인애, 속죄와 구원, 중생의 본질을 알고 이를 남에게까지 전하며 높은 성직에 앉아 밤낮으로 주님만을 머리 속에서 추구하고 아무리 속으로 주님의 높고 찬란한 은혜와 자비에 매달려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의 연약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할지라도 악을 죄로 알고 끊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주님은 그와 결합할 수 없다.
이는 그의 지식이 이해성에만 머물러 있고 의지에까지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생명이 결여되어 있고 이러한 상태에서 행하는 선은 부분적이고 한정적이어서 자신에게 감동이 오고 평안할 때에는 선으로 보이는 것이 나타나지만 자신에게 불안이나 위협 등의 해가 끼칠 조짐만 보이면 주님이나 이웃을 향하던 사랑이 자신을 먼저 돌보는 자기 사랑으로 변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면적 사랑은 그 영혼에 본질을 형성하지 못하며 사후에는 그의 의지와 일치하지 못하여 벗겨지고 대신 그 본래의 악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영혼이 가진 생명의 빛깔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얄팍한 이해성은 악을 끊어 추한 영혼을 아름답게 변화시킴으로 구원을 이루려 하기보다 이는 어렵고 힘이 들기에 보다 손쉬운 방법을 선호하고 있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을 곡해하여 자신의 영혼이 악으로 둘러싸여 있는데도 믿음으로 죄가 그냥 없어진다는 허무맹랑한 교리를 배짱 좋게 믿고 있다. 성경이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부분에 걸쳐 인간이 악을 버려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하는데도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성경 해석으로 신적 질서와는 동떨어진 이론으로 자신의 이해성을 무장하고 있다.
그럴지라도 신앙이 먼저 이해성 안에 자리잡는 것은 사람으로서 또는 기독인으로서 최고로 필요한 것이다. 지식은 사람이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그 영혼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수단이며 사람은 먼저 이해가 열리지 않고는 의지로 사랑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람에게 이해성을 허락하여 선의 아름다움과 악의 추함을 깨닫게 하시고 이어 의지가 원하는 쪽을 스스로 선택하게 하신 것이다. 사정이 이와 같음을 인정한다면 사람은 스스로의 의지로 악을 끊어야 한다. 이 악을 끊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의 도움을 바라거나 자비와 은혜에 의존하여 신앙을 완성하려 하는 것은 성경 전반에 나타난 주님의 뜻에 어긋난다.
선을 행하는 것보다 그에 앞서 악을 끊는 것이 인간의 우선적인 일인 것이다. 사람이란 어느 누구도 악을 끊지 못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외적 선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컬어질 수 없음을 말씀은 이렇게 가르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또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이처럼 사람은 동시에 선과 악 속에 있을 수 없고 선 안에 있거나 악 안에 있거나 한 쪽에 거할 뿐이다. 이 말씀들의 의미는 악을 버리지 못하면서 선을 행하는 경우 그 선은 참된 선이 아니기에 악을 버리지 않은 채 행하는 선은 겉으로는 선으로 보일지라도 기실 외식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처럼 사람이 악을 버리지 아니하면서 행하는 선과 경건, 지혜로운 말 등은 위선에 불과한 것임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또 사람이 악을 끊지 아니하면 그의 예배에 속한 모든 것이 한낱 자기 치장에 불과할 따름이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의 악업을 버리라'
이 말씀으로 하나님은 먼저 악을 버리라고 강조하신다. 악을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참된 선을 행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베일에 가려진 자기 마음속의 악을 간파하지 못하는 인간의 눈에는 비록 그것이 선으로 비칠지라도 인간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께는 그 선에 숨어 있는 인간의 사악한 요소로 말미암아 포장은 선이지만 내용물은 악으로 보이는 것이다. 인간은 표면에 부상하는 외적인 것만으로 자기와 타인의 마음이 어떠하다는 것을 판별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마음 속 깊이에 자리한 그 영혼의 형상을 보시기에 인간에게는 선으로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눈에는 악으로 비치는 것이다.
사람이 악을 죄로 알고 끊는 정도만큼 그는 진리를 사랑하고 선 안에 있게 된다. 물론 악을 흉악한 죄로 여기지 아니하며 또 그 악을 끊지 않는 사람도 충분히 진리를 사랑하는 듯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주와 진리 자체를 위해서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아 충족을 위한 방편으로 진리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 진리가 자신에게 위안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희생을 강요한다면 그는 잠시 갈등하다가 궁극에는 사랑이 분리된 지식만을 진리라 여기며 살게 된다. 이 모든 결과는 신앙을 사람에게 있는 이해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사랑과 선을 행하는 의지의 대상으로 보지 못한 까닭이다.
믿음으로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은 영혼과 몸의 관계처럼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다. 선이 사람의 의지에 의해 나타나고 진리가 사람의 이해에 의해 획득되기에 서로 분리된 듯 보이지만 선과 진리 양자간에는 결합이 있어야 한다. 참된 진리는 사랑을 도외시 할 수 없고 거꾸로 참된 사랑 역시 진리를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인들의 공통된 오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관념과 사상 속에서만 신앙을 추구하기에 성경 역시 그런 차원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이지만 죄악 중에 출생한 죄인은 영적으로 죽어 있어서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어떠한 능력도 없고 다만 주님의 속죄 피와 긍휼을 인하여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교리에 젖어 겉으로는 주님을 드높이고 영광을 돌리는 듯 화려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실은 게으르고 나약하여 자비와 은혜만을 갈구하고 악과의 싸움에서는 두려움 때문에 매번 물러서서 '주님, 도와주소서'를 남발한다. 속죄 피가 죄를 씻어 정결케 함으로 구원을 하사해주는 한 자신의 악과 사투를 벌이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또 스스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등한시하고 머리 속에서만 구원을 얻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 성경을 보아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거나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 의존되는 것이 아니라는 구절들만 강조하여 볼 뿐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랑의 행위를 강조하는 말씀들은 하찮게 취급되는 것이다.
이해와 의지의 두 기능이 합쳐져 한 사람을 이루듯 또 신부된 교회가 신랑이신 주님을 맞아 결합하듯 진리와 사랑은 서로 그리워한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성경 속의 혼인이고 유월절 만찬으로 생명이 되는 영의 양식을 공급하시는 장면이며 주님의 살과 피요 영혼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로써 사람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진리는 궁극에 사랑을 이루기 원하고 사랑은 진리의 인도를 받지 않고는 나타날 수가 없기에 결합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악을 죄로 알고 끊는 정도만큼 선 안에 있고 또한 진리를 사랑하는 자가 된다. 이러한 자는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인데 그 이유는 주님이 선과 진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의 혼인 안에 천국이 있고 교회가 서며 주님과의 결합이 있게 된다. '내 계명을 가지고 행하는 자는 나를 사랑하는 자이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느니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거하리라' 이 말씀이 이 모든 증거가 됨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악한 생활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진리마저 산산이 부수고 만다. 악한 의지가 사람의 이해성을 지배하게 되면 사람이 추구하던 진리는 선을 등지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이용당하게 되는데 이는 악이 진리를 미워하여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의 영적 상태를 보면 겉으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듯 스스로도 착각하지만 사후 영혼의 본질이 나타날 때는 겉 사람이 지니던 외적 꺼풀은 벗겨져 진리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마침내 진리를 부정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악을 끊지 않은 상태에서 가지는 신앙은 그 속에 사랑에서 나온 선은 하나도 없는 이지적 신앙이므로 죽은 신앙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에 있는 자는 겉으로는 자색 및 금빛 찬란한 옷을 입었으나 병균과 썩은 것으로 가득 찬 병자와 같고 창녀와 같다. 성경에서 나오는 많은 병자와 창녀, 간음하는 자 등은 바로 이러한 영적 상태 곧 사랑이 없이 위화된 이지적인 진리 안에 있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또 성경은 이런 자를 잎은 무성하나 열매를 맺지 않아서 정원지기가 베어버리는 나무로도 표현하였는데 나무는 사람을 상징하며 잎과 꽃은 신앙의 진리를 나타내고 열매는 사랑의 선을 뜻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진리의 지식을 풍부히 간직하고 있지만 그 진리가 주님이나 이웃 사랑의 삶에서 나오지 않고 자아와 세상적 기쁨을 위해 쓰일 때에는 진리와 선의 혼인이 이루어지지 않고 따라서 신랑을 맞아들일 자격이 없는 간음한 자로 불리우며 치유할 수 없는 영혼의 더러운 중병을 앓고 있는 자로 간주되는 것이다.
주님에게 책망을 들은 유대인들의 신앙이 바로 이런 식이었는 바 오늘날도 역시 그러한 오류는 되풀이되고 있다. 그들의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고 주님은 구속주이시며 천국과 지옥이 있고 사후 생명이 있다는 등 관념적으로 그러한 사실을 시인하고 믿어야 한다는 것에는 열심이지만 믿음의 목적이 되는 사랑을 행해야 한다는 것은 강조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주님의 말씀은 이를 부정하기에 충분하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여기 주께서 말씀하시는 죄 사함이란 주님의 피 공로에 의지해 그동안 지은 수많은 죄를 단번에 씻김 받고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해 마지않는 머릿속 시인과 고백의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런 식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며 눈물짓는 것과 실제 악을 버리고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은 전연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웬만한 기독인들 치고 그런 경험 해보지 않은 자가 누구랴. 기도와 묵상 가운데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몸부림치도록 그 은혜에 감사하며 소리 높여 주님을 찬양할 때는 그토록 뜨겁게 느껴지던 마음이 꿇은 무릎을 풀고 일어선 후 현실생활로 돌아오면 자신이 지니고 있던 죄성은 여전히 그대로 있는 것을 너무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은 생각으로만 받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죄라고 느끼던 자신의 악을 단호히 끊어버리는 행위로까지 나타나야 이를 죄 사함 받은 상태라 부를 수 있는 것이고 이런 훈련을 쌓지 못해 죄 사함을 적게 받은 자는 당연히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힘이 모자라 적게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로써 분명한 것은 죄 사함의 뜻이 지식적으로 주님의 속죄 피를 시인하고 죄를 자백하면 주님의 공로에 의하여 가상적으로 그 죄가 씻겨졌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삶을 사는 자체가 죄 사함 받은 것을 증거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이 사랑의 삶은 모든 선과 진리의 원동력을 주님께 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생활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언제나 사랑의 삶을 지향하는 믿음이지 믿음 독단의 믿음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비록 바울이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믿음'과 '율법(의 행위)'을 서로 비교하며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을 가르치고 있을지라도 그가 '믿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격하시키면서까지 그러한 생각에서 빠져나오기를 간곡히 권고하며 사용한 '율법의 행위'라는 말의 의미는 결코 주님의 계명을 따라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이제 오직 믿음 그 하나만으로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을 가리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가 자신의 서신서 이곳 저곳에서 말한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 라는 말은 첫째 속은 그렇지 않음에도 겉으로는 체면이나 명예 때문에 혹은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받게 될 형벌을 두려워함으로 마지못해 따르는 척하는, 위선과 외식에서 나온 율법주의를 뜻하고 둘째 할례와 세례 등의 유대 전통의 의식 법이나 제사 법 등을 '율법의 행위'로 간주하려한 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구원관은 그들이 모세에게서 받은 율법을 겉으로 얼마만큼 잘 지키느냐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에서 나온 것이 위선, 외식 등의 율법주의와 형식적으로 드려지는 제사였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주님께서도 속과 겉이 다른 그들의 이러한 모습들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질책을 하심으로 그들이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 신앙을 갖기를 원하셨던가. 이는 주님께서 그들의 선생이 되는 나다나엘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알 수 있다. 영혼의 구원은 바람과 같이 자유로 역사 하는 생명에 속한 일이기에 마음에도 없는 억지 순종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참으로 사람이 다시 나지 않으면 선이 좋아 선을 행하는 기쁨을 평생 맛보지 못하리라.
그럼에도 사람이 다시 나려 하지 않고 여전히 이전의 그 율법 지키기를 고수한다면 하나님이 주시려는 의에 도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옛 율법은 아니 그러한 식의 율법 관은 폐해져야 하고 이제는 스스로 죽임을 당하심으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이로 인해 생성되는 믿음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님의 계명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두 가지의 율법 곧 하나는 완전케 할 율법이고 다른 하나는 폐해야 할 율법의 정체이고 주님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이유도 이를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결국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믿음으로 유대인들의 잘못된 율법 관을 씻어주려 한 것이 곧 그가 믿음에 빗대어 말한 '율법(의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오늘날 성경을 읽는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선한 삶을 구원의 조건에서 빼내어버리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고 배우고 있다. 그런 교리는 겉은 성경적인 것 같으나 기실 속은 전연 주님의 의중에 화합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구원의 조건에 있어서 바울이 '믿음'으로 공격을 가하려던 것은 유대적 전통을 자부심으로 바라보던 그들의 지키기 식 행위인가 아니면 계명에 따른 선한 삶을 사는 인간의 생활을 말함이던가. 당연히 버릴 것은 유대적 의식 법이나 제사 법 그리고 외식하는 율법주의가 아니겠는가. 결국 바울이 비교한 '믿음'과 '율법의 행위'는 사실상 '복음'과 '유대 전통'을 비교하려던 것이지 '믿음'과 '행위'를 비교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 : 31
"그런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거저 얻는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배웠기로 선한 삶은 없어도 그리스도의 피 공로만 의지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내 자신이 스스로 사랑의 선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곧 주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이며 이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지는 줄 아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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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눅 7 : 47 - 48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말씀 속에 주님은 죄 사함과 사랑과 믿음과 구원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함께 표현하셨다. 먼저 여인의 죄가 사해졌다고 하신 이유는 여인의 사랑함이 많기 때문이라고 주님은 선언하신다. 일반적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은 믿음에 의한 것이라 알려져 있는데 주님은 여인에게 있는 많은 사랑 때문에 죄가 사해졌다고 분명히 선언하신다. 여인의 믿음은 입술만의 고백으로 나타나지 않았고 마음속에만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여인의 속마음에 있던 간절한 믿음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외부에 나타났다. 주님은 속과 겉이 일치한 여인의 사랑을 보시고 그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셨다. 속에 있는 진실한 것은 외부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런 면에서 여인의 신앙은 우리의 것보다 훨씬 우월하다.
사랑이 마음과 생각에만 머무르고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사랑이라 말할 수 없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과 진리 역시 비록 그들이 인간의 이해성을 바탕으로 내면에서 움직인다고 할지라도 사랑과 결합하여 외부에 행위로 나타나지 않은 채 마음과 생각 속에 관념이나 사상으로만 머무른다면 그것은 믿음과 진리라 불리울 수 없다. 따라서 신앙의 모든 요소들은 어떤 형체가 없는 관념이나 사상 속의 일들로 정의되어서는 안되고 그 관념이나 사상을 도구로 하여 삶으로까지 나타나는 형체가 분명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믿음이라는 것은 주님과 주님의 말씀, 주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 등에 관해 머리 속에서 그 사실을 시인하거나 확신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교회 다니는 신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 치고 그러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가 누구인가. 하지만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으로는 주님을 따라가지 못하는 자가 어찌 믿음 있는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믿음은 사랑의 삶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영역에서만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은 외관으로는 머리 속의 사상이나 관념의 일들처럼 보일지라도 그 본질적 영역은 생활에 두어지는 것이다.
신앙의 핵심적 요소인 믿음이 이와 같이 형체가 없는 관념이나 사상이 아닐진대 이 신앙의 근원인 믿음에서 비롯된 죄의 고백이나 사함 받는 것, 칭의, 구원, 기도 등 모든 신앙적 요소가 어찌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사상이나 관념의 일들이겠는가. 그동안 주님과 자신만 아는 달콤하고 뜨거웠던 은혜의 체험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구원을 얻은 증거는 아니다. 아무리 간절한 마음과 생각으로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확신과 믿음으로 기도하려 애를 쓰며 수시로 주님의 고난과 자비를 생각하고 그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눈물 흘릴지라도 또 진실된 마음으로 주님의 속죄에 의거하여 죄 사함을 받고 스스로가 아닌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확신하며 택한 백성이라고 기뻐할지라도 이 모두가 머리 속만의 일이 아닌 실제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러한 신앙은 속과 겉이 다른 위선적 신앙에 불과할 뿐이다.
위에 예로 든 여인에 대한 주님의 죄 사함 선언은 이와 같은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죄를 탕감 받거나 사함 받는 것은 주님의 피 공로에 의지하여 죄를 고백한 후 이제 그 죄가 씻겨졌다는 것을 믿고 확신하는 머리 속의 일들이 아니고 악을 버려 사랑의 삶을 사는 것 자체를 뜻한다. 죄를 고백하면 사함을 받는다는 성경 말씀에 의지하여 아무리 그 사실을 믿으려 애를 써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의심으로 남는 것은 자신에게 죄가 여전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죄를 짓고 그것을 주님 앞에 자백하여 그 죄가 씻겨졌다고 믿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이는 신앙을 머리 속의 일로 바라보기에 말씀도 그런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이다. 머리로 풀고 머리로 해결하려 애를 쓰지만 그렇게 하여서는 죄 사함을 입지 못한다. 악을 끊고 사랑의 삶을 사는 것만이 죄 사함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여인의 죄가 사해졌다고 선언하시는 이유는 그녀의 사랑함이 많음을 주님이 보셨기 때문이다. 여인의 생각과 마음에 머물러 있던 믿음은 주님이 보는 가운데 사랑의 행위로 나타났다. 눈물은 흘러 주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으며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붓는 여인의 행위는 속에 있던 진실한 사랑이 밖으로 노출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머리 속의 상념으로 주님께 자기 마음을 고백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바로 이와 같은 사랑의 나타남 때문에 주님은 여인의 죄가 이미 씻겨져 그 영혼이 정결케 되었다는 것을 아시고 이에 죄가 사해졌다는 선언을 하신 것이다.
여기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은 주께서 죄를 사해주신다는 의미는 문자 그대로 주님이 지니신 '죄를 사하는 권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권세는 우리가 악과 싸울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권세를 뜻하는 것으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의 공급을 받아야만 악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인이 받은 죄 사함은 이미 그 여인의 영혼이 회개에 의해 깨끗해진 것을 보시고 그에 합당한 선언을 하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심판 역시 염라대왕 앞에 줄로 늘어서 판결 받는 것을 연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그런 표현은 시공간 안에 감각과 육체로 살고 있는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성경의 표현 방식일 뿐이다. 굳이 주님이 그런 판결을 하지 않을지라도 이미 우리 안에는 천국과 지옥의 환경에 걸 맞는 영혼의 모양과 형상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영적인 사람이 아닐지라도 얼마든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신앙에 따라 주님을 시인하며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는 비록 사랑이 없을지라도 인간에게는 이해성이 있어서 이 이해성만으로도 천국의 빛 안으로 올라갈 수 있으며 그 빛 속에서 말하고 볼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의 성격이 어떠하든지, 심지어는 악할지라도 그가 영적인 사람인양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의지보다 이해성이 뛰어난 것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은 의지는 이해성과는 달리 천국에 올라갈 수 없으며 따라서 이해성만으로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영적인 사람은 이해성이 의지를 인도하지 않고 의지가 이해성을 인도하기 때문에 의지가 이해성과 함께 천국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나 천국 및 영생에 관하여 기독교인이 이 세상에서 지니고 있는 이해성은 그의 의지가 영적인 빛을 받도록 길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수단적 역할을 할 뿐이어서 그가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거처할 때는 지상에서 획득한 이해성은 벗겨지고 그의 의지에 걸 맞는 새로운 이해성을 맞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이란 이해성은 물론 그 이해성을 도구로 하여 사람의 주체가 되는 의지까지도 사랑 안에서 천국의 빛을 즐기며 사는 자인 것이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들어가 그와 결합하려 하실 때 그 길목을 가로막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지닌 악이다. 누가 말하기를 악을 악이라 또는 죄를 죄라 표현하는 것보다 그 지독한 성질을 더 잘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만큼 죄와 악은 사람에게서 생명과 기쁨을 빼앗아 마침내 그 영혼으로 하여금 주님 없는 암흑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한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지옥과 천국, 악과 선의 중간상태에 있게 되어 그 의지가 이편이나 저편 어느 쪽으로도 향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 안에 있다. 그 의지가 주님과 선을 향하면 그만큼 천국에 속하여 지옥과 악은 멀어지지만 반대로 악과 지옥을 향해 있으면 그만큼 주님과 천국에서 멀어진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가 주님에 의해 허락된 자유를 가진 증거로서 사람이 자기 의지로 죄를 끊는 정도만큼 주님과 결합하여 주님 안에 있게 되고 또 주님 안에 있게 되는 만큼 그는 선을 행할 힘을 주님으로부터 얻게 되는 것이다. 결국 누구든지 악을 끊는 정도만큼 선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악을 행하는 것은 극악한 죄로서 이는 주님과 율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끊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유의해야할 사항이 있다. 첫째로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주어지고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은 자아에서 비롯된 악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비록 악을 끊고 선을 행하는 힘이 주님에게서 연유하기에 인간은 수동적인 위치에 서있을지라도 실제로 사람이 지각하는 것은 능동의 위치에 서서 나 스스로 하듯 악을 끊고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악을 끊치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말을 지혜롭게 하고 선을 행하며 경건을 나타낼지라도 이 모든 것이 선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실례를 들어보자면 만일 사람이 다른 여러 가지 악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동시에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자기의 맡은 바 일에 성실을 다하며 또 설교를 듣고 말씀을 묵상하는 등 예배에 헌신한다고 할지라도 그에게서 나타난 이러한 선은 여전히 버리지 못한 악으로 인해 주님과의 결합을 방해한다. 그리하여 주님께로부터 유입된 순수한 선 대신에 자기 스스로에게서 비롯된 선 안에 있게 되고 이들은 자기와 세상을 사랑한 결과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수만 갈래의 선과 악 사이에서 변화를 맞고 있다. 마음의 표면으로 부상하고 속 깊숙이 잠재하는 등 이렇게 넓고 깊은 가운데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사람들은 표면에 부상하는 마음을 자기 것으로 삼고 살지만 실제로는 깊숙이 가라앉은 마음에 형성되어 있는 주도적인 애정이 그 사람 자신인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 마음을 보시는 분이다. 마음의 깊은 곳을 탐색할 줄 아는 사람은 그러한 선이 표면적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근원은 자아를 위한 사랑에 연유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악이 얼마나 선으로 둔갑을 잘하는지 또 선으로 보이는 것 속에 얼마나 지독한 악이 숨겨져 있는지 자기 마음속의 악을 파헤쳐 보아야 한다. 세상 왕국에서는 선과 악이 함께 섞여 있어도 우매한 인간의 눈은 이를 구별치 못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선은 순수한 것이므로 아주 조그마한 악이라도 함께 섞이게 되면 그것은 선이 아니라 악으로 변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속이는데 명수이어서 자기도 자신의 속마음에 속는 경우가 너무도 흔하지만 이를 자각하지 못한다.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억양을 가다듬고 진심으로 남을 위하여 애정을 쏟는 중에도 얼마든지 자신의 유익을 탐하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이러한 경우 겉으로 드러나는 선은 마음의 진실에서 비롯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이 실상은 속에 있는 자아애에 연결되어 있고 또 이에 대한 분별이 쉽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지만 그 선이 이 작은 악에 연결됨으로 인하여 전체가 악으로 변하게 된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것보다 먼저 악을 버리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마음 저 밑바닥에는 선을 행할 때에도 눈에 뜨이지 않게 악이 깊이 잠재해 있다. 그것은 마치 물이 그 원천으로부터 이미 더럽혀져 있는 것과 같아서 표면적으로 그가 연출하는 선이나 경건은 일시적인 습관이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자기 공로, 우월감 등에 기인된 위선에 불과할 뿐이다. 또 사람이 진리를 알고 이해하여 신앙, 인애, 속죄와 구원, 중생의 본질을 알고 이를 남에게까지 전하며 높은 성직에 앉아 밤낮으로 주님만을 머리 속에서 추구하고 아무리 속으로 주님의 높고 찬란한 은혜와 자비에 매달려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의 연약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할지라도 악을 죄로 알고 끊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주님은 그와 결합할 수 없다.
이는 그의 지식이 이해성에만 머물러 있고 의지에까지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생명이 결여되어 있고 이러한 상태에서 행하는 선은 부분적이고 한정적이어서 자신에게 감동이 오고 평안할 때에는 선으로 보이는 것이 나타나지만 자신에게 불안이나 위협 등의 해가 끼칠 조짐만 보이면 주님이나 이웃을 향하던 사랑이 자신을 먼저 돌보는 자기 사랑으로 변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면적 사랑은 그 영혼에 본질을 형성하지 못하며 사후에는 그의 의지와 일치하지 못하여 벗겨지고 대신 그 본래의 악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영혼이 가진 생명의 빛깔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얄팍한 이해성은 악을 끊어 추한 영혼을 아름답게 변화시킴으로 구원을 이루려 하기보다 이는 어렵고 힘이 들기에 보다 손쉬운 방법을 선호하고 있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을 곡해하여 자신의 영혼이 악으로 둘러싸여 있는데도 믿음으로 죄가 그냥 없어진다는 허무맹랑한 교리를 배짱 좋게 믿고 있다. 성경이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부분에 걸쳐 인간이 악을 버려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하는데도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성경 해석으로 신적 질서와는 동떨어진 이론으로 자신의 이해성을 무장하고 있다.
그럴지라도 신앙이 먼저 이해성 안에 자리잡는 것은 사람으로서 또는 기독인으로서 최고로 필요한 것이다. 지식은 사람이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그 영혼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수단이며 사람은 먼저 이해가 열리지 않고는 의지로 사랑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람에게 이해성을 허락하여 선의 아름다움과 악의 추함을 깨닫게 하시고 이어 의지가 원하는 쪽을 스스로 선택하게 하신 것이다. 사정이 이와 같음을 인정한다면 사람은 스스로의 의지로 악을 끊어야 한다. 이 악을 끊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의 도움을 바라거나 자비와 은혜에 의존하여 신앙을 완성하려 하는 것은 성경 전반에 나타난 주님의 뜻에 어긋난다.
선을 행하는 것보다 그에 앞서 악을 끊는 것이 인간의 우선적인 일인 것이다. 사람이란 어느 누구도 악을 끊지 못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외적 선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컬어질 수 없음을 말씀은 이렇게 가르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또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이처럼 사람은 동시에 선과 악 속에 있을 수 없고 선 안에 있거나 악 안에 있거나 한 쪽에 거할 뿐이다. 이 말씀들의 의미는 악을 버리지 못하면서 선을 행하는 경우 그 선은 참된 선이 아니기에 악을 버리지 않은 채 행하는 선은 겉으로는 선으로 보일지라도 기실 외식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처럼 사람이 악을 버리지 아니하면서 행하는 선과 경건, 지혜로운 말 등은 위선에 불과한 것임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또 사람이 악을 끊지 아니하면 그의 예배에 속한 모든 것이 한낱 자기 치장에 불과할 따름이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의 악업을 버리라'
이 말씀으로 하나님은 먼저 악을 버리라고 강조하신다. 악을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참된 선을 행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베일에 가려진 자기 마음속의 악을 간파하지 못하는 인간의 눈에는 비록 그것이 선으로 비칠지라도 인간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께는 그 선에 숨어 있는 인간의 사악한 요소로 말미암아 포장은 선이지만 내용물은 악으로 보이는 것이다. 인간은 표면에 부상하는 외적인 것만으로 자기와 타인의 마음이 어떠하다는 것을 판별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마음 속 깊이에 자리한 그 영혼의 형상을 보시기에 인간에게는 선으로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눈에는 악으로 비치는 것이다.
사람이 악을 죄로 알고 끊는 정도만큼 그는 진리를 사랑하고 선 안에 있게 된다. 물론 악을 흉악한 죄로 여기지 아니하며 또 그 악을 끊지 않는 사람도 충분히 진리를 사랑하는 듯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주와 진리 자체를 위해서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아 충족을 위한 방편으로 진리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 진리가 자신에게 위안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희생을 강요한다면 그는 잠시 갈등하다가 궁극에는 사랑이 분리된 지식만을 진리라 여기며 살게 된다. 이 모든 결과는 신앙을 사람에게 있는 이해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사랑과 선을 행하는 의지의 대상으로 보지 못한 까닭이다.
믿음으로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은 영혼과 몸의 관계처럼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다. 선이 사람의 의지에 의해 나타나고 진리가 사람의 이해에 의해 획득되기에 서로 분리된 듯 보이지만 선과 진리 양자간에는 결합이 있어야 한다. 참된 진리는 사랑을 도외시 할 수 없고 거꾸로 참된 사랑 역시 진리를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인들의 공통된 오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관념과 사상 속에서만 신앙을 추구하기에 성경 역시 그런 차원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이지만 죄악 중에 출생한 죄인은 영적으로 죽어 있어서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어떠한 능력도 없고 다만 주님의 속죄 피와 긍휼을 인하여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교리에 젖어 겉으로는 주님을 드높이고 영광을 돌리는 듯 화려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실은 게으르고 나약하여 자비와 은혜만을 갈구하고 악과의 싸움에서는 두려움 때문에 매번 물러서서 '주님, 도와주소서'를 남발한다. 속죄 피가 죄를 씻어 정결케 함으로 구원을 하사해주는 한 자신의 악과 사투를 벌이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또 스스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등한시하고 머리 속에서만 구원을 얻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 성경을 보아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거나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 의존되는 것이 아니라는 구절들만 강조하여 볼 뿐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랑의 행위를 강조하는 말씀들은 하찮게 취급되는 것이다.
이해와 의지의 두 기능이 합쳐져 한 사람을 이루듯 또 신부된 교회가 신랑이신 주님을 맞아 결합하듯 진리와 사랑은 서로 그리워한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성경 속의 혼인이고 유월절 만찬으로 생명이 되는 영의 양식을 공급하시는 장면이며 주님의 살과 피요 영혼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로써 사람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진리는 궁극에 사랑을 이루기 원하고 사랑은 진리의 인도를 받지 않고는 나타날 수가 없기에 결합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악을 죄로 알고 끊는 정도만큼 선 안에 있고 또한 진리를 사랑하는 자가 된다. 이러한 자는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인데 그 이유는 주님이 선과 진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의 혼인 안에 천국이 있고 교회가 서며 주님과의 결합이 있게 된다. '내 계명을 가지고 행하는 자는 나를 사랑하는 자이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느니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거하리라' 이 말씀이 이 모든 증거가 됨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악한 생활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진리마저 산산이 부수고 만다. 악한 의지가 사람의 이해성을 지배하게 되면 사람이 추구하던 진리는 선을 등지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이용당하게 되는데 이는 악이 진리를 미워하여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의 영적 상태를 보면 겉으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듯 스스로도 착각하지만 사후 영혼의 본질이 나타날 때는 겉 사람이 지니던 외적 꺼풀은 벗겨져 진리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마침내 진리를 부정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악을 끊지 않은 상태에서 가지는 신앙은 그 속에 사랑에서 나온 선은 하나도 없는 이지적 신앙이므로 죽은 신앙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에 있는 자는 겉으로는 자색 및 금빛 찬란한 옷을 입었으나 병균과 썩은 것으로 가득 찬 병자와 같고 창녀와 같다. 성경에서 나오는 많은 병자와 창녀, 간음하는 자 등은 바로 이러한 영적 상태 곧 사랑이 없이 위화된 이지적인 진리 안에 있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또 성경은 이런 자를 잎은 무성하나 열매를 맺지 않아서 정원지기가 베어버리는 나무로도 표현하였는데 나무는 사람을 상징하며 잎과 꽃은 신앙의 진리를 나타내고 열매는 사랑의 선을 뜻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진리의 지식을 풍부히 간직하고 있지만 그 진리가 주님이나 이웃 사랑의 삶에서 나오지 않고 자아와 세상적 기쁨을 위해 쓰일 때에는 진리와 선의 혼인이 이루어지지 않고 따라서 신랑을 맞아들일 자격이 없는 간음한 자로 불리우며 치유할 수 없는 영혼의 더러운 중병을 앓고 있는 자로 간주되는 것이다.
주님에게 책망을 들은 유대인들의 신앙이 바로 이런 식이었는 바 오늘날도 역시 그러한 오류는 되풀이되고 있다. 그들의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고 주님은 구속주이시며 천국과 지옥이 있고 사후 생명이 있다는 등 관념적으로 그러한 사실을 시인하고 믿어야 한다는 것에는 열심이지만 믿음의 목적이 되는 사랑을 행해야 한다는 것은 강조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주님의 말씀은 이를 부정하기에 충분하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여기 주께서 말씀하시는 죄 사함이란 주님의 피 공로에 의지해 그동안 지은 수많은 죄를 단번에 씻김 받고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해 마지않는 머릿속 시인과 고백의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런 식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며 눈물짓는 것과 실제 악을 버리고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은 전연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웬만한 기독인들 치고 그런 경험 해보지 않은 자가 누구랴. 기도와 묵상 가운데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몸부림치도록 그 은혜에 감사하며 소리 높여 주님을 찬양할 때는 그토록 뜨겁게 느껴지던 마음이 꿇은 무릎을 풀고 일어선 후 현실생활로 돌아오면 자신이 지니고 있던 죄성은 여전히 그대로 있는 것을 너무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은 생각으로만 받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죄라고 느끼던 자신의 악을 단호히 끊어버리는 행위로까지 나타나야 이를 죄 사함 받은 상태라 부를 수 있는 것이고 이런 훈련을 쌓지 못해 죄 사함을 적게 받은 자는 당연히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힘이 모자라 적게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로써 분명한 것은 죄 사함의 뜻이 지식적으로 주님의 속죄 피를 시인하고 죄를 자백하면 주님의 공로에 의하여 가상적으로 그 죄가 씻겨졌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삶을 사는 자체가 죄 사함 받은 것을 증거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이 사랑의 삶은 모든 선과 진리의 원동력을 주님께 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생활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언제나 사랑의 삶을 지향하는 믿음이지 믿음 독단의 믿음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비록 바울이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믿음'과 '율법(의 행위)'을 서로 비교하며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을 가르치고 있을지라도 그가 '믿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격하시키면서까지 그러한 생각에서 빠져나오기를 간곡히 권고하며 사용한 '율법의 행위'라는 말의 의미는 결코 주님의 계명을 따라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이제 오직 믿음 그 하나만으로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을 가리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가 자신의 서신서 이곳 저곳에서 말한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 라는 말은 첫째 속은 그렇지 않음에도 겉으로는 체면이나 명예 때문에 혹은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받게 될 형벌을 두려워함으로 마지못해 따르는 척하는, 위선과 외식에서 나온 율법주의를 뜻하고 둘째 할례와 세례 등의 유대 전통의 의식 법이나 제사 법 등을 '율법의 행위'로 간주하려한 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구원관은 그들이 모세에게서 받은 율법을 겉으로 얼마만큼 잘 지키느냐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에서 나온 것이 위선, 외식 등의 율법주의와 형식적으로 드려지는 제사였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주님께서도 속과 겉이 다른 그들의 이러한 모습들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질책을 하심으로 그들이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 신앙을 갖기를 원하셨던가. 이는 주님께서 그들의 선생이 되는 나다나엘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알 수 있다. 영혼의 구원은 바람과 같이 자유로 역사 하는 생명에 속한 일이기에 마음에도 없는 억지 순종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참으로 사람이 다시 나지 않으면 선이 좋아 선을 행하는 기쁨을 평생 맛보지 못하리라.
그럼에도 사람이 다시 나려 하지 않고 여전히 이전의 그 율법 지키기를 고수한다면 하나님이 주시려는 의에 도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옛 율법은 아니 그러한 식의 율법 관은 폐해져야 하고 이제는 스스로 죽임을 당하심으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이로 인해 생성되는 믿음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님의 계명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두 가지의 율법 곧 하나는 완전케 할 율법이고 다른 하나는 폐해야 할 율법의 정체이고 주님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이유도 이를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결국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믿음으로 유대인들의 잘못된 율법 관을 씻어주려 한 것이 곧 그가 믿음에 빗대어 말한 '율법(의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오늘날 성경을 읽는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선한 삶을 구원의 조건에서 빼내어버리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고 배우고 있다. 그런 교리는 겉은 성경적인 것 같으나 기실 속은 전연 주님의 의중에 화합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구원의 조건에 있어서 바울이 '믿음'으로 공격을 가하려던 것은 유대적 전통을 자부심으로 바라보던 그들의 지키기 식 행위인가 아니면 계명에 따른 선한 삶을 사는 인간의 생활을 말함이던가. 당연히 버릴 것은 유대적 의식 법이나 제사 법 그리고 외식하는 율법주의가 아니겠는가. 결국 바울이 비교한 '믿음'과 '율법의 행위'는 사실상 '복음'과 '유대 전통'을 비교하려던 것이지 '믿음'과 '행위'를 비교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 : 31
"그런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거저 얻는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배웠기로 선한 삶은 없어도 그리스도의 피 공로만 의지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내 자신이 스스로 사랑의 선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곧 주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이며 이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지는 줄 아노라."
연약한 믿음 탈출하기 http://cafe.daum.net/talchulha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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