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의 기술 3 / 자신의 악과 참되게 싸우는 기술
- 과거의 허물이 남긴 압도적인 감정의 동요 속에서
지옥의 연결을 끊어내는 문 걸어 잠그기
인간이 삶 속에서 실제로 악을 선택하고 행동으로 실행할 때마다,
그 악은 겉 사람의 행실을 타고 영혼의 유전적 토양에 깊이 각인된다.
스베덴보리의 저서에 따르면 인간의 내면에 쌓인 이 고착된 악은
영계에서 자석과 같은 인력을 발휘한다.
그 결과 그가 지닌 특정한 악의 성향과 결을 같이 하는
더 많고 강력한 지옥의 악령 공동체들이 그 영혼 주위로 결집하게 되는 것이
영계의 철저한 질서이다.
따라서 과거에 악을 많이 허용하고 몸에 배게 만든 사람일수록
내면에서 솟구치는 악한 생각과 파괴적인 감정의 밀도와 빈도가
훨씬 더 가혹해진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영적 결과이며
그 유입의 강도가 타인보다 훨씬 거세다는 엄연한 영적 현실이다.
이처럼 악의 습관이 깊이 뿌리박힌 영혼은
마치 거대한 바위가 굴러 내려오는 경사면 아래 서 있는 것과 같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악의 유입은 이미 인간의 의지력을
아득히 상회하는 강도로 몰아치기에,
자아의 힘으로 그 기류를 바꾸려 하거나 억지로 멈추려 하는 시도는
매번 허무한 좌절로 끝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처한 이 비참하고도 압도적인 영적 실상을 직시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고
전능한 주님의 개입만을 간절히 갈망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처럼 거세진 지옥의 유입으로 말미암아 끓어오르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인간의 역량 밖인 주님의 영역이라고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인간에게 면죄부를 주어 몰려오는 지옥의 파고(波高) 앞에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으라는 나태의 선언이 아니다.
지옥의 유입 세력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영혼의 유전적 토양을 새롭게 재배치하는 근본적인 치유의 권능이
인간에게 없음을 시인하라는 뜻이다.
아무리 악이 몸에 배어 가공할 밀도로 지옥의 유입이 밀려올지라도,
인간 스스로 그 지옥의 군대를 직접 도륙 내어 전멸시키겠다고 덤벼드는 것은
마치 거대한 댐에 균열이 가고 폭포 같은 물줄기가 터져 나오는데,
혼자 맨손으로 그 물길 자체를 소멸시키겠다고 날뛰는 것과 같다.
인간의 힘으로 유입 자체를 원천 차단하거나 지옥의 뿌리를 뽑으려 들면,
지옥의 압도적인 힘에 짓눌려 결국 절망하고 피로해질 뿐이다.
유입에 의한 감정의 소용돌이와 지옥의 처리가 주님의 영역이라는 선언은,
그 거대한 세력과의 전쟁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혼을 청소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의 전능뿐이라는 전제의 확립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주님의 전능한 정화만을 바라보며
그저 무력하게 앉아 있어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악의 뿌리를 뽑고 지옥의 결박을 끊어내는 최종적인 결과는
주님의 몫이지만, 바로 그 주님의 승리가
인간의 내면에서 실제적인 질서로 자리 잡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과정이 있다.
그것은 유입의 폭풍 속에서도 결코 악에 동의하지 않고,
주님이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끝까지 사수하는 인간의 결연한 거부와 저항이다.
즉, 지옥의 전체 세력을 멸절하는 것은 주님의 영역이나,
그 세력이 내 영혼의 문턱을 넘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그고 버티는 일만큼은 인간에게 맡겨진 거룩한 사명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밀려드는 가혹한 유입에 대항하여
피눈물 나게 몸부림치며 저항하는 것은
주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교만이 결코 아니다.
도리어 주님이 인간에게 천국과 지옥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신 영적 균형 상태,
즉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악을 거절하는 가장 정당하고 주체적인
구원의 협력이며 합법적인 권리이다.
인간이 전개하는 영적 사투에는 자멸에 이르는 헛된 몸부림과
승리로 나아가는 거룩한 투쟁이라는 두 가지 길목이 있다.
먼저 주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잘못된 몸부림으로,
이것은 ‘왜 내 안에서 이토록 더러운 유입이 끊이지 않는가’
라며 자책하는 태도와, 유입으로 내 안에 일어나는 감정과 상태 자체를
조급함 속에 자신의 의지력으로 당장 짓누르고
소멸시키려는 행동이 이에 속한다.
반면 주님이 명령하신 참된 몸부림은, 과거의 악으로 인해
이토록 가공할 유입이 밀려와 마음이 사정없이 흔들릴지라도
나는 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나아가 몸에 밴 관성이 손과 발, 혀를 움직여 또다시 악을 실행하려 들 때,
주님을 우러러보며 공급받은 힘으로 바깥 언행을 피나게 억제하고 묶어두며
거부권을 행사하는 사투이다.
과거에 쌓은 악이 많을수록 겉 사람의 행동을 단속하고
문을 걸어 잠그는 이 저항의 고통은 남들보다 수십 배 더 처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치열한 몸부림은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 힘으로 이 가혹한 유입의 기류를 물리칠 수 없으니
나는 오직 행동을 단속하여 문만 걸어 잠금으로 주님이 내 배후에서
지옥의 연결을 끊어주시기를 기다린다는
가장 뜨겁고 능동적인 실천적 의탁이 된다.
DP 81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악,
그리고 그가 스스로 확증하는 모든 악은 그와 함께 머문다.
스스로 확증한다는 것은 그 악에 관하여 생각하고 그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악을 생각할 때뿐만 아니라 그것을 의도할 때 행해진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악을 확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머물지 않는다.
악이 확증되는 것은 그가 악을 생각하고,
또한 그것을 말하며, 또한 그것을 행할 때이다.
그리고 그때 그는 그 악을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그 악으로 젖어 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 악에 대항하여 싸우고 그것을 극복할 때,
그때 그 악은 제거된다.’
저 글에서 도출된 내용이다.
'인간이 악을 죄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의지적으로 행할 때마다,
그 악은 그의 고유속성 안에 깊이 새겨진다.
이로 인해 동일한 악이 지옥으로부터 유입될 때
그것을 즐기려는 경향성이 내면에 형성되며,
인간이 과거에 삶 속에서 그 악을 더 많이 실행하고 고착시켰을수록,
나중에 그 악을 대항하여 겉 사람을 단속하고 저항하는 투쟁의 고통은
더욱 심하고 처절해진다.'
원본 글의 핵심내용과 연산과정은 이러하다.
‘악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할 때 확증된다.
그리고 그때 그는 그 악을 사랑하게 되며, 또한 그 악으로 젖어 든다.’
'젖어 듦(Imbued)'의 의미 : 스베덴보리의 원어적 의미에서
'imbue'는 옷감에 염료가 깊이 배어드는 것을 말한다.
즉, 악이 행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인 '고유속성(Proprium)'이라는
천에 깊숙이 스며들어 내 일부가 된다는 뜻이다.
경향성(Tendency)의 발생 : 악이 내 본성이 되면,
지옥의 유입이 다가올 때 나는 그것을 '나를 공격하는 불청객'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친구'처럼 느끼게 된다.
투쟁이 치열해지는 이유 : 과거에 악을 확증(Confirm)하여
깊이 물들어 있을수록, 지옥의 유입이 다가올 때
내 마음은 자석처럼 지옥과 결합하려 한다.
반면 주님을 따르고 싶은 이성은 그 결합을 끊으려 한다.
'내 마음의 자석 같은 성질'을 이겨내고 억지로 떨어뜨려야 하기에
투쟁이 그토록 치열한 것이다.
DP 46
‘주님의 신성한 섭리는, 그
것이 행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무한하고 영원한 것을 고려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인간을 있는 모습 그 자체로 보지 않으시고,
주님으로부터 온 인간의 고유한 것 안에서
그가 어떤 모습인지에 따라 보신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하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 주님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영원하지만,
인간 안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인간의 순간적인 상태를 위해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원한 상태를 위해 행하시며, 그 상태를 영원토록 공급하신다.’
DP 119
‘악들은 우리의 외적 자아에 있고,
악에 대한 강박(집요한 충동)은 우리의 내적 자아에 있는데,
이것들은 뿌리와 줄기처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악들은 길을 막고 문을 닫아버리는데,
그 문은 우리가 협력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열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외견상 스스로 문을 열 때, 주님께서는 동시에
우리 내면의 강박을 뿌리째 뽑아내시는 것이다.’
저 글 내용에서 도출된 내용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지옥의 유입 세력을 단 하나도 소멸시킬 수 없으며,
영혼 깊은 곳에 박힌 악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은
오직 주님의 신성한 권능으로만 가능하다.
인간의 몫은 주님이 주신 힘을 빌려 겉 사람의 악을 스스로 하듯
억제하고 청소하는 것뿐이며, 인간이 이 단속의 책임을 다할 때
주님께서는 속사람 안에 숨겨진 지옥의 결박을
친히 끊어내시고 정화를 완수하신다.'
원본 글의 핵심내용과 연산과정은 이러하다.
‘우리가 외견상 스스로 문을 열 때, 주님께서는 동시에
우리 내면의 강박(집요한 충동)을 뿌리째 뽑아내시는 것이다.’
일시적 vs 영원한 권능 : 인간의 행위(생각, 말, 행동)는 '순간적(Momentary)'이다.
순간적인 행위로 영원한 지옥의 결박(악의 뿌리)을 끊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소멸시킬 수 없다.’는 논리의 출발이다.
단속(단속/청소)의 의미 : DP 46에서 주님은
'인간을 그 자체(그의 일시적인 겉모습)로 보지 않으시고,
주님으로부터 온 것(주님의 생명) 안에서 보신다.'고 한다.
인간이 겉 사람을 단속하는 것은, 내 안의 주님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겉을 막아두는 '방어선'을 치는 행위이다.
정화의 완수 : 인간이 이 '방어선'을 치고 버틸 때,
주님은 '영원한 상태'를 위해 배후에서 역사하신다.
인간이 겉을 막지 않으면, 주님은 당신의 정화 권능을 쏟아 부어도
인간이 계속 문을 열어 지옥을 다시 받아들이기 때문에
수술이 진행될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의 정화는 반드시
인간의 '단속'이라는 협력값(Trigger)을 필요로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과거에 반복적으로 악을 허용하여
몸에 배게 만든 인간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영적 투쟁의 과정에서도
훨씬 더 높은 밀도의 인력을 마주하게 된다.
이를 영적 방정식으로 연산하면,
과거의 실행치들이 영혼의 유전적 토양에 축적되어
지옥 공동체와의 강력한 연결고리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DP 81항과 119항이 명확히 산출하듯, 밀려드는 유입의 가혹한 강도는
자아가 스스로 초래한 엄연한 영적 결과값이다.
그러나 여기서 자아가 범치 말아야 할 치명적인 오류는,
그 거대해진 유입의 기류 자체를 자신의 독립된 힘으로 전멸시키겠다고
메스를 빼앗아 드는 교만이다.
암세포를 제거하는 권능(소유권)이 의사에게 있듯,
지옥의 연결을 끊고 악의 뿌리를 변방으로 밀어내어 정화하는 최종 결과값은
전적으로 주님의 영역이다.
인간의 정당한 역량(사용권)은
오직 주님이 상쇄해 주신 최소한의 영적 평형 공간 안에서,
주님을 우러러보며 마치 자기 힘인 양 손발을 묶어
언행의 문을 걸어 잠그는 단속에만 전념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몰려오는 지옥의 압력 앞에 소극적으로 주저앉아
무력하게 당하고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비록 과거의 잘못으로 인해
더 많은 악령이 꿰이고 더 거센 충동이 올라올지라도,
주님은 천국과 지옥의 무게를 완벽하게 상쇄하시어
인간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영적 평형 상태를
지금 이 순간에도 수호하고 계신다.
인간이 그 평형의 공간 안에서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을 꺼내어
마치 자기 자신의 힘인 양 단호하게 의지를 발동하여 바깥 행동을 단속하고
문을 걸어 잠글 때, 비로소 상호적인 결합의 통로가 열린다.
그러므로 인간의 몫은
유입 자체를 직접 장악하려던 조급한 통제욕을 내려놓고
오직 오늘 마주한 단속의 자리를 피나게 지켜내는 일이다.
그때 주님의 신성한 섭리는
마침내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깊은 심층에서
거대한 정화의 수술을 완수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끊을 수 없던 지옥 공동체와의 결박을
주님의 전능으로 친히 끊어내시며, 몸에 밴 악의 뿌리를 변방으로 밀어내시는
거대한 정화의 수술을 행하시는 것이다.
- 자신의 악과 참되게 싸우는 기술
그렇다면 자신의 악과는 어떻게 싸워야 할까?
스베덴보리의 저서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의 악과 싸운다는 것은
내면의 감정이나 유입되는 생각 자체를
자신의 독자적인 의지력으로 찍어 누르고 소멸시키려 드는
무모한 전쟁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을 우러러봄으로써 부여받는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겉 사람의 악한 행실과 언행을
'마치 스스로 하듯 단속하는 것(As of oneself)'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구체적인 실천 방식과 영적 역학 관계를 저서의 근거들과 함께
세 가지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겠다.
1. 악을 인지하고 그것이 죄임을 확립하는 단계
자신의 악과 싸우기 위한 첫 단추는,
마음의 화면에 떠오른 특정한 생각이나 충동이 천국의 질서를 위반하는
'죄'이자 지옥으로부터 온 '유입'임을 말씀의 진리로
명확히 분별하고 가려내는 일이다.
DP 278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악을 보지 않으면 그것을 알 수 없고,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그것을 고백할 수 없으며,
주님 앞에 그것이 죄라는 것을 고백하고 스스로 하듯 단속하지 않으면
그것은 영혼 내부에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인간이 자신의 악을 객관화하여 '죄'로 규정하는 작업은,
내면의 어둠에 주님의 말씀이라는 빛을 비추는 거룩한 행위이다.
인간이 스스로 죄를 고백하는 것은,
악의 주권이 자아에 있음을 시인하고 주님께 그 판단의 권한을 돌려드리는
항복의 의식이다.
인간이 고백하고 '스스로 하듯' 단속하지 않는다면,
악은 인간의 고유한 일부로 고착되어 남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단속은
악을 영혼으로부터 밀어내어 분리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악령들이 악을 유입시킬 때,
자아가 그것을 ‘상황에 따른 필연적인 감정’으로
정당화하여 묵인해 버리면 악은 내면화된다.
따라서 '이 무력감과 미움은 천국의 질서가 아니며,
주님 앞에 명백한 죄이다.'라고 선언하며,
유입되는 감정과 자신 사이에 칼로 자르듯 명확한 경계선을
긋는 분별이 사투의 출발점이 된다.
2. '마치 스스로 하듯' 바깥 행동의 문고리를 걸어 잠그는 단계
악이 죄임을 분별했다면,
이제 몸에 밴 관성이 손과 발, 혀를 움직여
그 악을 바깥 행동으로 실행하지 못하도록 외적 언행을
피나게 억제하고 단속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우러러보는 인간에게 위임된
유일한 책임 영역이자 참된 몸부림이다.
TCR 438
'인간은 악에 대하여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듯 투쟁해야 한다.
만일 인간이 스스로 하듯 능동적으로 악을 억제하고 단속하지 않는다면,
그는 주님과 상호적으로 결합할 수 없다. 인간이 스스로 행동의 문을 닫을 때
주님께서는 비로소 내면에서 역사하시어 그 악을 제거하신다.'
주님과 인간의 결합은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로만 완성되지 않고,
인간의 능동적인 응답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인간이 겉 사람의 행동을 억제하는 것은,
지옥의 유입이 들어오는 통로인 행동의 문을 닫아버리는 영적 방어이다.
인간이 외부 통로를 차단하고 마치 자신의 힘인 양 버틸 때,
주님께서는 비로소 차단된 내부를 정화하실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획득하신다.
인간의 역량은 지옥의 군대를 직접 전멸시킬 수 없으나,
주님이 보장해 주신 영적 평형 안에서 "아니오!"라고 말하며
행동을 묶어둘 거부권(사용권)은 가지고 있다.
마음이 찢어지듯 아프고 가공할 유입의 공세가 밀려올지라도,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을 꺼내어
'마치 내 힘인 양' 단호하고 격렬하게 의지를 발동하여
바깥 언행의 빗장을 지르는 행위가 바로 구체적인 영적 전쟁의 실체이다.
3. 결과의 영역을 양도하고 배후의 권능에 의탁하는 단계
겉 사람의 언행을 단속하며 거부의 자리를 완강히 지켜냈다면,
유입 자체를 장악하려던 조급한 통제욕을 내려놓고 지옥의 뿌리를 뽑으시는
주님의 전능하심에 온전히 결과를 맡겨야 한다.
DP 119
'악들은 우리의 외적 자아에 있고, 악에 대한 강박(집요한 충동)은
우리의 내적 자아에 있는데,
이것들은 뿌리와 줄기처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악들은 길을 막고 문을 닫아버린다.
그 문은 우리가 협력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열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외견상 스스로 문을 열 때,
주님께서는 동시에 우리 내면의 강박을 뿌리째 뽑아내시는 것이다.
인간의 몫은 주님이 주신 힘을 빌려
겉 사람의 악을 스스로 하듯 억제하고 청소하는 것뿐이며,
인간이 이 단속의 책임을 다할 때
주님께서는 속사람 안에 숨겨진 지옥의 결박을 친히 끊어내신다.
영혼 깊은 곳에 박힌 악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은
오직 주님의 신성한 권능으로만 가능하다.'
외적 자아의 악(줄기)과 내적 자아의 강박(뿌리)은 분리되지 않으므로,
인간은 줄기를 단속함으로써 뿌리에 접근한다.
인간이 겉의 문을 단속할 때,
주님께서는 배후에서 내면의 뿌리를 제거하는 전능한 수술을 집행하신다.
인간은 '단속(사용권)'이라는 책임에 전념하고,
주님은 '뿌리 제거(소유권)'라는 신성한 정화를 완수하신다.
이 두 주체의 긴밀한 협력이 곧 구원의 방정식이다.
인간이 스스로 지옥의 유입 기류 자체를
원천 차단하거나 멸하려 들면 압도적인 힘에 짓눌려 피로해질 뿐이다.
암세포를 도려내는 소유권이 의사에게 있듯,
내면의 연결고리를 끊고 정화하는 최종 결과값은 전적으로 주님의 영역이다.
인간은 오직 오늘 마주한 바깥문 단속에만 전념하고,
보이지 않는 영계의 심층에서 구조를 재배치하시는 주님의 신성한 섭리를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자신의 악과 싸우라는 주님의 명령은
인간의 유한한 힘으로 지옥의 대군을 도륙 내라는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나약함을 아시기에,
그에게 공급해주시는 최소한의 영적 평형 공간 안에서
행동의 문고리를 쥔 채 ‘동조하지 않겠다’며 버티는 작은 순종만을 구하신다.
설령 과거의 수많은 허물들로 인해
남들보다 수십 배 더 거센 하강 압력이 들이칠지라도,
단지 주님을 우러러보며 바깥 언행을 단속하고 버티는
그 피나는 노력을 주님께서는 가장 아름다운 의탁으로 받아주신다.
내가 할 수 없는 영혼 깊은 곳의 정화 수술을 주님께서 친히 완수하시고
마침내 천국적 안식을 안착시키시는 거룩한 섭리 앞에,
자아의 무거운 염려를 온전히 내려놓아야 한다.
특히 내면의 감정이나 유입되는 생각 자체를
자신의 독자적인 의지력으로 찍어 누르고 소멸시키려 드는 것이
무모한 전쟁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외부에서 불어오는 강력한 강풍을
인간이 맨몸으로 마주 서서 입으로 바람을 불어 아예 없애버리겠다고
덤벼드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갑자기 마음속에
칠흑 같은 절망감이나 무력감이 치밀어 오를 때,
자아가 조급함에 사로잡혀 ‘내 의지력으로
이 감정을 당장 기쁨과 열정으로 바꾸어 놓겠다’라며
내면의 감정 상태와 정면으로 싸우는 경우가 있다.
그때 인간은 억지로 긍정적인 생각을 쥐어짜 내고, 우울해하는
자기 자신을 향해 채찍질하며 감정 자체를 마음속에서
원천 박멸하려고 의지력을 총동원한다.
그러나 그 우울감은
영계의 지옥 공동체로부터 투사되는 거대한 하강 압력이기에,
유한한 인간의 힘으로 그 기운 자체를 직접 증발시킬 수는 없다.
주님이 힘을 공급해 주시는 목적 역시
이 유입 자체를 직접 제어하라는 뜻이 아니다.
감정 자체를 힘으로 짓누르려 하면 할수록
지옥의 압력과 자아의 에너지가 내부에서 정면충돌하여
결국 영혼의 에너지만 완전히 고갈된 채 더 깊은 절망과 방관으로
추락하는 결과값을 낳는다.
또 내면에서 특정 사람을 향한 더럽고 잔인한 미움과 증오가 솟구칠 때, ‘
신앙인인 내 마음속에서 이런 미움이 조금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며
그 미움이라는 생각 자체를 머릿속에서 강제로 지워버리려고
사투를 벌이는 경우도 있다.
미워하는 감정이 떠오를 때마다 스스로 깜짝 놀라며
그 감정의 싹을 잘라내려고 내면의 생각들과 온종일 전쟁을 치르지만,
그것은 화면에 참혹한 영상이 상영될 때
영사기를 부수지 않고 화면만 손으로 가리려 드는 것과 같다.
미움의 유입은 지옥이 강제한 흔들림이기에
유입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은 인간의 통제 밖이다.
감정 자체를 짓누르려는 조급한 통제욕은
도리어 그 미움에 온 정신을 집중하게 만들어,
악령들이 쳐놓은 정죄감의 덫에 스스로 걸려드는 오류를 범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올바른 단속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자신의 악과 참되게 싸우는 파수꾼은
유입되는 감정 자체를 제 힘으로 없애려고 대항하지 않는다.
먹구름이 끼는 날씨를 인간이 바꿀 수 없음을 겸손히 시인하고,
주님을 우러러보며 오직 바깥 행동의 문고리만 잡고 버틴다.
우울감이 밀려올 때 ‘이 무력감의 감정적 동요는
밖에서 온 유입이니 내가 당장 소멸시킬 수 없다.
하지만 이 무력감에 동조하여
오늘 해야 할 행실을 포기하거나 방관하지 않겠다’라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평소 평온할 때 각인해 둔 행동의 철칙을 깨워
겉 사람의 마땅한 의무와 행동을 단정하게 실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움이 솟구칠 때는
‘이 추악한 증오는 지옥의 신호일 뿐 나의 본질이 아니다.
내면이 찢어지듯 흔들릴지라도, 주님이 주신 힘으로
내 혀와 입술을 단속하여 저 사람에게 저주의 말을 뱉지 않겠고
내 손발을 묶어 보복하지 않겠다’라며
오직 바깥 언행의 거부권(사용권)만 마치 제 힘인 양 피나게 발동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많은 신앙인이 직면하는 가장 치명적인 허점은
지옥의 유입으로 심하게 흔들릴 때,
미처 그것이 유입임을 지각하기도 전에 벌써 짜증과 분노의 언행이
바깥으로 터져 나와 상황을 그르쳐 버리는 일이다.
사후에 정신이 든 뒤 "내가 그땐 지각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라고 자위해봐야
이미 엎질러진 파문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
최상은 지각이 잠드는 맹목적 순간에도 언행이 누출되지 않도록,
평소에 말씀의 진리를 삶의 철칙으로 견고히 각인해 두는
사전 처방의 방어벽을 구축해 두는 것이다.
내면에서 요동치는 가혹한 감정의 파도를
내 힘으로 당장 소멸시키지 못한다고 해서 주님은 결코
인간을 정죄하지 않으신다.
유입의 세력을 전멸시키는 권능은
오직 주님의 전능(소유권)에 속한 영역이기에,
인간이 그 무거운 짐을 지고 피로해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다만 악령들이 악을 유입시킬 때 자아가 그것을 ‘감각적인 흔들림’이나
‘필연적인 감정‘으로 묵인해 버리면
악은 내면화되어 버린다는 것을 인간은 잊지 말고 경계해야 한다.
'필연적인 감정으로 묵인한다'는 것은
내면에서 솟구치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충동을 마주했을 때,
‘내 처지가 이러니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상황에서 이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라며
그 감정을 정당화하고 그대로 방치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지옥의 악령들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화면에
끊임없이 악한 생각과 파괴적인 정욕을 투사한다.
이때 자아가 말씀의 진리를 기준으로
‘이것은 천국의 질서가 아니며, 밖에서 밀려온 지옥의 신호다’라고
선명하게 선을 그어 분별하지 못하면,
그 감정을 환경이나 상황에 따른 '필연적이고 당연한 나의 반응'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즉, 주님을 우러러보며 유입되는 악한 상태를 향해
사전 및 사후의 거부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는
정신적 방관 상태를 뜻한다.
스베덴보리의 저서에 따르면,
외부에서 밀려온 유입 자체는 아직 인간 고유의 죄가 아니다.
그러나 자아가 그 유입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머릿속으로 굴리며 음미하거나 정당화하는 순간,
마음 바깥문을 두드리던 지옥의 기운이
마음 안방(의지)으로 들어와 단단히 달라붙게 된다.
그것이 '내면화(고착)'되는 상태인데,
이는 외부에 있던 악이 비로소 영혼의 유전적 토양에 깊이 각인되어,
인간 자신의 고유속성(proprium)이자 실제적인 죄로 귀속되는
영적 결과값을 낳게 되는 것이다.
'필연적인 감정으로 묵인한다'는 것은
‘유입’과 ‘동의’의 경계선을 상실한 자아가 범하는 전형적인 판단 착오이다.
영사기로부터 마음의 화면에 상영되는 영상일 뿐인데
그것을 자신의 본질로 오해하여 ‘지금 내 상태에서는
이 더러운 생각과 감정이 들 수밖에 없다’고 타협하며 받아들이는 순간,
자아는 주님이 보장해 주신 자유의지의 거부권(사용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거부권을 잃음으로 방치된 유입은 필연적으로 의지의 동조를 거쳐
영혼의 토양에 고착되며,
이는 향후 더 거센 지옥 공동체의 인력을 끌어당기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 상태의 인간이 구원의 소망을 지니는 것은,
인간이 내면의 폭풍을 '어쩔 수 없는 내 감정'이라며
무력하게 받아들이고 오염될 때에도,
혹은 평소의 단속이 느슨하여
이미 언행의 실수가 터져 나온 직후의 현장에서조차,
그 상태가 자아의 영원한 파멸로 고착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분별의 빛을 비추어주시는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주님의 섭리는 상황과 환경이 아무리 가혹할지라도
그것이 지옥의 유입일 뿐 결코 동조해야 할 필연이 아님을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이미 저지른 실수는 시인하되 내면의 잔상과는 선을 그어
주님을 향해 다시 거부를 선언할 수 있는
영적 평형의 공간을 은밀히 수호해 주신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시인하며
평소 세워둔 규범의 빗장을 다시 단단히 붙잡고,
단호히 묵인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바깥 행동의 문고리를 걸어 잠글 때,
주님의 전능하신 손길은 내면화되려던 악의 연결을 끊으시고
천국적 평강의 질서를 안착시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