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의 기술 4 / 악에 대한 저항은 주님을 향한 우러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작성자밝은 햇살|작성시간26.06.13|조회수9 목록 댓글 0

싸움의 기술 4 / 악에 대한 저항은

주님을 향한 우러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 주님을 우러러본다는 것

 

AC 2889

 

'주님을 '우러러본다.(look to the Lord)'고 말하는 이유는,

모든 선과 모든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오며

인간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과 믿음의 선 안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내적 시각, 즉 이해력이 끊임없이 주님을 향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끊임없이 그분을 향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을 우러러본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글은 '주님을 우러러본다.'는 것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본질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우러러본다.'는 뜻의 영문 표기인 'look to'는

단순히 육신의 눈으로 대상을 관찰하는 행위를 넘어서는

깊은 영적 역학을 담고 있다.

 

이는 단순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고 기대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방향 지향성을 의미한다.

 

항해사가 나침반을 보며 자신의 위치와 목적지를 끊임없이 확인하듯,

영혼이 자신의 모든 방향을

주님이라는 유일한 기준점에 맞추고 의식의 닻을 내리는 능동적인 태도가

바로 'look to'의 본래 의미이다.

 

이러한 '우러름'의 과정을 영적 원리로 풀어보면 그 질서가 더욱 분명해진다.

 

첫째는 시각의 재 정의이다.

여기서 'look'은 물리적 시력이 아닌 내적 시각, 곧 이해력의 방향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의식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가 영적 연산의 시작점이 된다.

 

둘째는 공급의 근원을 확정하는 것이다.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께로부터만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인간 자아가 스스로 선을 만들 수 있다는 독립적 가능성은 '0'으로 산출된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행하려 할 때 발생하는 고갈과 좌절은

바로 이 근원적인 원칙을 어긴 결과값이다.

 

셋째는 주님을 유일한 상수로 설정하는 것이다.

변화무쌍한 세상의 변수와 지옥의 유입 속에서도

주님은 결코 변하지 않는 고정된 기준점이다.

 

우러러본다는 것은 시선의 중심을

변수인 상황에서 상수인 주님으로 이동시키는 영적 명령과도 같다.

 

넷째는 이러한 연산의 최종 결과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해력을 주님께 고정할 때,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선과 진리가 영혼으로 흘러 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확보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역량이 아닌 주님의 권능이

비로소 인간의 삶 속에 개입하게 되는 영적 공식인 것이다.

 

이러한 영적 원리가 이해력을 바로 세우는 논리적 틀을 제공한다면,

이어지는 과정은 그 원리를 실제 삶의 고통과 폭풍 속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라는 실존적 응답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이제 그 우러름이 단순히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넘어,

영혼이 거친 상황을 어떻게 통과해야 하는지에 관한

실존적 결단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주님을 우러러본다는 것은

자신이 지금 거센 폭풍 속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폭풍보다 더 크고 전능하신 분이 내 영혼의 배후에 계심을

실존적으로 선택하는 일이다.

 

(인간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할 때,

종종 이를 외면 또는 회피하거나 없는 것처럼 여기는 방식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주님을 우러러보는 행위는

현실을 망각하는 도피가 아니다.

폭풍, 즉 지옥의 유입의 실체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영적 전쟁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악의 기만일 수 있으므로,

내가 지금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는 태도가

정직한 우러름의 전제 조건임을 밝히는 것이다.)

 

직접 상황을 통제하려 바삐 움직이는 손을 잠시 멈추고

이 상황의 주권이 전적으로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며 시선을 돌릴 때,

비로소 인간의 좁은 시야는 주님의 무한한 섭리 안으로 편입된다.

 

오늘 겪는 치열한 영적 싸움은 결국 내 힘을 완전히 내려놓고

주님이라는 항구에 영혼의 닻을 내리는 거룩한 훈련이다.

모든 것을 주님께 양도하고 오직 그분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는

그 숭고한 우러름이야말로, 인간의 유한함을 넘어

주님의 신성한 평강과 정화가 비로소 시작되는 단 하나의 길이다.

 

사실 '주님을 우러러본다.'는 행위는

단순히 머리로 주님의 존재를 기억하는 지적 동의를 넘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전적으로 주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매 순간 실존적으로 확인하는 영적 태도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과신하는 습성이 있기에,

주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기보다 자신의 힘으로 상황을 해결하려는

관성적인 대처가 훨씬 빠르게 앞서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곧 영적인 고갈과 좌절을 초래할 뿐이다.

 

주님을 우러러본다는 것은

한 마디로 자신의 영적 시선을 주님께 고정하는 행위로,

 

그것은 첫째로 자신의 한계를 철저히 시인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지금 밀려오는 지옥의 기류를

자신의 유한한 힘으로는 결코 소멸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우러름의 첫걸음이다.

 

둘째로 발신처를 전환하는 것이다.

감정의 폭풍이 일어날 때, 그 파도의 발신처가 나 자신이 아니라

외부의 지옥임을 진리로써 인지하고,

시선을 그 혼란에서 주님의 전능한 권능으로 옮겨야 한다.

 

셋째로 의탁하는 일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거대한 파도 앞에서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손을 꽉 잡듯,

지금 이 상황을 다루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임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는 것이다.

 

이는 곧 주님을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유일한 파수꾼으로 세우는 숭고한 행위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주님을 우러러보는 것보다

자기 방식대로 대처하기에 바쁜 이유는

주님의 직접적인 개입 방식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당장의 감정적 불편함을 내 방식대로 제거하고자 하는 강한 통제욕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멈춤의 기술이 필요하다.

자신의 힘으로 대처하려는 관성이 발동할 때

그것을 즉시 알아차리고 물리적으로 멈추는 연습을 해야 한다.

 

분노나 무력감이 치밀어 오를 때

이것은 내 힘으로 처리할 영역이 아님을 스스로 선언하며

행하던 일을 멈추는 것이다.

 

즉각적으로 대처하려던 손발을 강제로 멈추고 주님께 조급함을 내려놓는

고백을 드리는 시간이야말로 주님을 의지한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또한 사용권과 소유권을 정밀하게 분별해야 한다.

행동의 문고리를 잡는 사용권은 마치 자신의 힘인 양 전력을 다하되,

그 문고리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매 순간 기억해야 한다.

 

자신이 지금 행동의 문을 닫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사용하는 것이며,

이 거부권을 발동할 힘 또한 주님으로부터 공급받고 있음을 믿는 것이다.

 

우러름은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공급의 통로를 인식하는 실재이다.

 

나아가 자기 신뢰의 파산을 경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자신의 힘으로 감정을 짓눌렀다가 나중에 더 큰 피로감으로 추락했던

과거의 영적 실패들을 정직하게 기록하고,

내 힘으로 행하면 반드시 탈진한다는 영적 법칙을 각인해야 한다.

 

이러한 실패의 기억은 역설적으로 다음에 유입이 닥칠 때

자기 힘을 의지하기보다 주님을 우러러보게 만드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

 

비록 인간은 본성적으로

제 손에 쥔 칼을 놓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의 그 조급한 손길조차도,

결국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처절한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섭리의 과정으로 허락하신다.

 

오늘 내 안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싸움과 끊임없이 직접 대처하려는

낡은 관성을 주님께 그대로 내어놓아야 한다.

주님을 향해 지금 또다시 내 힘으로 해결하려 했던 조급함까지도 내려놓기에

부디 시선을 당신께 고정하도록 도와달라는

이 짧고 진실한 고백이 지옥의 링크를 끊어내는 가장 강력한 우러름이 된다.

 

그 우러름의 자리에 주님의 신성한 정화가 시작되는 거룩한 통로가 열리며,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좁은 시야를 넘어 주님의 무한한 섭리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된다.

 

- '스스로 하듯'의 참된 의미와 실존적 항복

 

TCR 438

 

‘인간은 악에 대하여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듯 투쟁해야 한다.

만일 인간이 스스로 하듯 능동적으로 악을 억제하고 단속하지 않는다면,

그는 주님과 상호적으로 결합할 수 없다.’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말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듯(As of himself)'이라는 표현은

결코 '내 힘으로 알아서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주님께로 향하게 하여,

주님이 공급하시는 선과 진리의 힘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사용하여 악을 거부해야 한다.

 

즉, 주님을 생명의 통로로 삼는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능동적 저항이 바로 '스스로 하듯'의 본질이다.

 

이러한 신학적 원리는

이론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직시할 때 비로소 삶 속에서 작동한다.

 

학생이 시험 문제를 풀듯 '주님의 힘으로 해야 한다'는 정답을 아는 것과,

실제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힘을 멈추고 주님을 의식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영역이다.

 

이론적 앎은 이해력이라는 '머리'에 머물러 있으나,

실제 삶은 '손과 발'이 움직이는 의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지식만으로는 주님과 결합할 수 없으며,

조급함 속에 행해지는 자신의 힘을 멈추는 행위, 즉 '피함'이 뒷받침될 때만

주님과 상호적 결합이 시작된다.

 

따라서 '스스로 하듯'은 자아의 독립적 권한을 행사하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힘을 공급받기 위해 내 자아의 독단적인 활동을 멈추고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주님을 배제한 채 자신의 힘만으로 끙끙거리는 것은

'스스로 하듯'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영적 독립 선언이자

지옥으로 통하는 길을 스스로 여는 행위이다.

 

'스스로'와 '주님으로부터'를 구별하는 기준은

매우 엄격하여, 문제의 성패를 떠나

그 이면에 숨겨진 동기를 낱낱이 살피는 데서 시작한다.

 

대개 성취의 순간에는 그 뿌듯함과 성취감이

자아의 만족에서 비롯된 것인지 정직하게 성찰해야 하며,

반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당혹감과 무력감이 밀려올 때도

동일한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

 

즉, 문제가 원활히 풀리지 않을 때 솟구치는 불안과 조급함 역시

내 힘으로 상황을 통제하려는 자아의 욕망이 좌절된 데서

오는 반응은 아닌지 냉철히 짚어보아야 한다.

 

성취가 자아의 훈장이 된다면,

당혹감은 자아의 통제욕이 꺾인 비명일 뿐이기에

두 경우 모두 주님을 향한우러름과는 거리가 먼 자아 중심의

상태임을 직시해야 한다.

 

진정한 '스스로 하듯'은 내가 주도하는 느낌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거부권을 사용하여 조급한 내 자아의 행동을 억제하는

고통스러운 '멈춤'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하듯'이란 주께서 보존해주신 영적 평형 속 자유의지로

기꺼이 악에 동조하기를 거부하는 마음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비로소 주님의 생명이 내면으로 흘러 들어와 나와 결합할 수 있는

거룩한 통로를 예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실제 삶의 현장에서 행동의 주체는 엄연히 인간 자신이며,

주님의 힘을 직접적으로 체감하거나 분별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 가장 큰 난관이다.

 

현실적인 사안을 처리하며

스스로 주도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과연 그 동력이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자아의 독단인지 분별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보아야 하기에 그야말로

거울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 경계를 분별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을 돕는 실질적인 징표들이 존재한다.

 

가장 분명한 기준은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그 행동을 하기 직전의 '마음 상태'에 있다.

 

자신의 힘으로만 일할 때는 반드시 조급함과 긴장감이 앞서며

상황을 내 뜻대로 몰아가려는 경직된 의지가 나타난다.

 

반면,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스스로 하듯'의 상태에서는

상황을 대하는 마음의 결이 다르다.

그곳에는 자신의 열심이 분명히 존재하되,

동시에 그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도

주님의 섭리가 이루어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함과 평온이 공존한다.

 

이를 확인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일에 착수하기 전 짧은 멈춤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타진해보는 것이다.

일을 시작하기 직전, '이 일이 나의 뜻대로 성사되지 않아도

주님의 섭리라면 기꺼이 수용하겠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찰나의 시간을 가져보아야 한다.

 

만일 내면에서 격렬한 거부감이나

반드시 내 방식대로 결론이 나야 한다는 집착이 올라온다면,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이 아니라

자아의 통제욕이 작동하고 있다는 명확한 신호이다.

 

이러한 멈춤을 통해 자신의 조급함을 발견하고

이를 주님께 반납하는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인간은 주도적으로 행동하면서도 그 동력을 자신의 욕망이 아닌

주님의 섭리로부터 공급받는 상태로 전환된다.

 

결국 구별의 핵심은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거부권을

얼마나 정직하게 행사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자아의 통제욕이 꺾이는 고통스러운 멈춤이야말로 주님이 내 삶의 주권자로

역사하시도록 행동의 문을 여는 거룩한 열쇠가 된다.

 

많은 신앙인이 주님의 힘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주님을 의식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의식이 '지식의 읊조림' 정도에 그치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주님 도와주세요.'라고 기계적으로 되뇔 뿐,

실제 행동의 주도권을 자아가 꽉 쥐고 있는 상태는

결코 주님을 향한 우러름이 아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도구화하려는 자신의 기도를 냉철하게 비판해야 한다.

무심코 내뱉는 '주님 도와주세요.'가

혹시 나의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한 주문은 아닌지 점검이 필요하다.

 

주님을 찾으면서도 내 방식이 관철되기를 바라는

은밀한 기대를 내려놓는 것이

나라는 존재의 주권을 주님 앞에 내어드리는 실존적 항복의 첫걸음이다.

 

진정한 우러름은 자신의 지식과 관성을 멈추고

주님의 개입을 위한 '빈 공간'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주님은 인간의 의지 안에서 역사하시는데,

인간이 '악을 피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의 빛을 받아들일 의지적 공간인 '문'을 비워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악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인 '피함(단속)'은

주님이 들어오실 자리를 마련하는 결합의 필요조건이다.

 

특히 문제가 발생했을 때, 머릿속으로 해결책을 구하려는 관성이 발동하면

즉시 행동을 멈춰야 한다.

이 멈춤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가 내 계산보다 앞서도록 나의 의지를 '정지'시키는 영적 행위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내 힘으로만 하고 있었구나.’라는 깨달음이 오면

즉시 그 자리에 멈춰 서라.

이때 필요한 것은 즉각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주님, 제가 주님 없는 정답만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자신의 무능함을 솔직하게 내어놓는 일이다.

 

일할 때 자신의 지혜가 튀어나오려 할 때마다

그 지혜를 억제하고 주님의 뜻을 묻는 찰나의 순간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행동의 문고리를 잡는 단속'이다.

 

주님의 개입을 기다리지 않는 모든 행동은 겉으로 보기에 열심일지라도

영적으로는 주님과 무관한 '자아의 열심'일 뿐임을 직시해야 한다.

 

이러한 실존적 항복은 사용권의 양도로 나타난다.

그 예로는 ‘이 문제를 주님의 방식대로 풀어가십시오.’라고 선언하며,

내가 쥐고 있던 결론을 주님께로 미루는 것이다.

 

비록 마음은 조급함으로 끓어오를지라도

겉 행동만이라도 조급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이, '행동의 문고리를 잡는'

진정한 단속이고 또 주님께서 비로소 겉 사람의 행동 배후에서

역사하시도록 자리를 비워드리는 거룩한 협력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을 내려놓고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은,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주님의 손길만을 더듬어 찾는

어린아이의 걸음걸이와 같다.

 

우리가 '스스로 하듯' 행동의 문을 닫는 그 찰나의 순종을 통해,

주님께서는 지옥의 결박을 끊어내고 당신의 빛으로

우리의 영혼을 충만하게 채워주신다.

 

우리의 모든 멈춤은 곧 주님을 향한 가장 정직하고도 깊은 고백이다.

 

- 악에 대한 저항은 주님을 향한 우러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DP 96

 

'인간이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할 때,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행하는 것처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인간이 스스로 행하듯 능동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주님과의 상호적인 결합은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결합을 가능하게 하고 결합 상태를 유지시키는 것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그것이 인간 편에서 마치 스스로 하듯 영접될 때

비로소 결합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AC 1947

 

'인간은 악과 거짓에 대하여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듯 저항해야 한다.

만일 스스로 하듯 단속하고 투쟁하지 않는다면

겉 사람은 결코 속사람에 복종할 수 없고 주님과 결합할 수도 없다.

 

인간이 스스로 하듯 이 싸움의 의지를 발동할 때,

주님께서는 비로소 내면에서 역사하시어 정화를 성취하시며

영혼에 진정한 내적 안식과 평강을 안착시키신다.'

 

영적 투쟁의 종착지에서 자아가 도달해야 할 최종적인 역학 관계는

'스스로 하되,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시인하는'

상호적 결합의 공식이다.

 

수많은 이들이 ‘주님이 다 하신다.’는 명제에 매몰되어

소극적인 나태에 빠지거나,

반대로 ‘내 힘으로 이기겠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혀

영적 피로를 자초하곤 한다.

 

DP 96항과 AC 1947항이 산출하는 구원의 방정식은

이 두 극단을 엄격히 배격한다.

 

인간은 주님이 유지해 주시는 영적 평형 속에서,

'마치 자신의 힘인 양(As of oneself)' 단호하게 언행의 빗장을 지르는

주체적 책임(사용권)을 가장 적극적으로 다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내면의 유입 자체를 소멸시키고

악의 뿌리를 들어내는 권능(소유권)은 오직 주님께만 있음을

철저히 고백해야 한다.

 

이처럼 책임의 한계를 정밀하게 분별하여 오늘 마주한

바깥문 단속에만 전념할 때 비로소 자아의 장악욕이 내려놓아지며,

주님의 신성한 전능이 영혼 심층에서 거대한 정화의 수술을

완수하실 수 있는 합법적인 통로가 열리게 된다.

 

TCR 438 은 이렇게 말한다.

 

‘주님을 우러러보며 종교의 계명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악에 저항할 능력을 얻는다.

 

그가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만일 그가 스스로 하는 것처럼 싸우지 않는다면

그는 개혁될 수 없기 때문이며, 개혁되지 않으면 그는 악 속에 남게 되고

악들은 그 안에 남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우는 동시에 주님을 우러러볼 때,

그때 주님께서 그를 위해 싸우시고 그 악들을 정복하며 제거하신다.’

 

이 영적 법칙의 핵심은 인간의 주체적 단속과

주님의 신성한 정화가 어떻게 협력하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여기서 '스스로 하는 것처럼(as of himself)'이라는 표현은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겉 사람의 행실을 단속하는 책임을 뜻한다.

 

주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제로 침범하지 않으시기에,

인간이 외적 언행의 빗장을 스스로 걸어 잠그지 않는다면

영혼의 심층부에 정화의 통로가 열릴 수 없다.

즉, 인간이 겉 사람의 악을 억제하는 것은 주님의 역사를 끌어내는

필수적인 절차이다.

 

인간이 마치 제 힘인 양 문고리를 잡고 악에 버티는 행위는,

사실 주님께서 행하시는 전능한 정화 수술을 시작하게 하는

거룩한 초청장이 된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손발과 혀를 단속할 뿐이지만,

주님께서는 그 믿음의 행위를 보시고 영혼 깊은 곳에 뿌리박힌

악의 결박을 친히 끊어내신다.

 

결국 인간이 악을 제거하려 노력할 때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있는 내면의 악까지 제거해주시는 것은,

주님과 인간이 맺는 사랑의 결합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나약함을 잘 아시기에

지옥의 대군을 단번에 멸절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으신다.

다만, 오늘 나에게 주어진 겉 사람의 언행과 바깥 행동이라는

작은 문고리 하나를 주님을 우러러보며 굳게 걸어 잠그기를 원하신다.

 

그 작고 피나는 순종의 책임을 다할 때,

비로소 주님께서는 영혼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숨겨진 악의 뿌리를

친히 끊어내시고 천국적인 새로운 질서를 안착시키신다.

 

인간의 투쟁은 주님의 능력을 자신의 삶 속에 현실로 불러오는 통로이며,

그 안에서 주님은 나를 위해

대신 싸우시고 끝내 모든 악을 정복하여 승리하신다.

 

악에 저항한다는 것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주님으로부터 공급받은 생명의 힘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상태를 뜻한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로봇이나 인형처럼 강제로 움직이지 않으시며,

반드시 인간의 동의와 협력을 거쳐

그 영혼 안에 천국적 질서를 세우시기를 원하신다.

 

만약 인간이 자신에게 밀려드는 악의 유입을 그저 수동적으로 방관하거나,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자신의 마음 문을

지옥의 세력에게 무방비로 개방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저항'은 지옥의 감정적 파도 그 자체를

내 힘으로 박멸하려는 조급한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을 우러러보는 지각의 빛 안에서,

그 유입이 천국의 질서가 아님을 분명히 인지하고

자신의 손과 발, 입술을 묶어 악이 바깥 행동으로 누출되지 않도록

철저히 차단하는 능동적인 거부 행위이다.

 

인간이 ‘나는 이 악에 동조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하며

바깥 문고리를 걸어 잠그는 그 피나는 저항의 과정이야말로,

주님께서 내 안에 역사하실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만드는 일이다.

 

주님을 우러름과 악에 대한 저항 사이의 가장 중요한 지점은

'동시에(at the same time)'라는 시간의 일치이다.

 

인간이 외적으로 악과 싸우는 그 찰나의 순간,

주님을 향한 우러름이 함께 지속되어야 한다.

이는 인간의 투쟁과 주님의 내적 권능이 같은 시간대에서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악에 저항하는 그 투쟁의 현장이

주님께는 정화의 수술대와 같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겉 사람의 행실을 억제하며

스스로 저항하는 모습을 보실 때,

비로소 내면의 깊은 곳에 숨겨진 악의 뿌리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천국적인 새로운 성질을 심으신다.

 

즉, '저항하기 때문에'라는 말은 인간의 투쟁이 주님의 권능을

내 영혼 속으로 초청하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저항을 멈추고

악에 투항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자유의지를

침범하지 않으시기에 정화의 권능을 행사하실 수 없다.

 

결국 악에 저항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존귀하게 사용하는 거룩한 순종이다.

이는 내가 대단한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교만함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힘을 빌려 악이 내 영혼의 안방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바깥 문고리를 굳게 쥐고 버티는 파수꾼의 임무에 충실하겠다는 고백이다.

 

그 고백이 있는 자만이 주님과 상호적으로 결합할 수 있으며,

주님께서 직접 그 사람을 위해

대신 싸우시고 악을 정복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직접 목격하게 된다.

 

인간의 저항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전능하신 주님의 정화가 내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돕는

가장 겸손하고도 강력한 영적 동력인 셈이다.

 

위에 인용한 TCR 438에서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그가 스스로 하는 것처럼 싸우지 않는다면 그는 개혁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영적 투쟁이 단순히 외부의 적을 물리치는 과정이 아니라,

내면의 생명을 지켜내는 과정임을 일깨워준다.

 

여기서 저항하거나 싸운다는 표현은

단순히 악을 싫어하는 마음을 품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의 몸과 언행을 단속하여 악이 실행되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것,

즉 마음의 바깥문을 잠그는 행위 자체가 곧 악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저항이며 싸움이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하듯 악과 싸우는 것은

투쟁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악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저항의 의지를 주님 앞에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인 셈이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셨으며,

이 자유의지는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여 행동할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만약 주님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악을 억제하신다면

인간은 자신의 영혼 안에서 스스로 선을 선택하는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스스로 싸워야 한다.'는 명령은

인간을 고립된 전쟁터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힘을

직접 발휘하도록 하시는 주님의 배려이다.

 

인간이 겉 사람의 행실을 단속하며 마치 제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행동할 때,

비로소 인간의 의지는 주님의 선과 하나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스스로 싸워야 한다'는 말은,

개혁을 향한 인간의 능동적인 책임을 엄중히 요구하고 있다.

 

인간은 이미 주님으로부터 악을 물리칠 능력을 공급받고 있으니,

그 능력을 사용하여 오늘 하루 내 앞에 나타난 악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실천을 보여야 한다.

 

스스로 싸우지 않는다면 주님이 주신 능력은 죽은 것이 되며,

그 사람은 영적으로 아무런 성장을 이룰 수 없다.

 

인간이 스스로 싸우는 행위는

자신이 주님을 우러러보고 있음을 세상과 영계에 선포하는 신앙의 고백이며,

이 고백이 있을 때 주님께서는 그 투쟁의 현장 속으로 들어오셔서

비로소 정화의 권능을 행사하신다.

 

결국 인간이 스스로 싸워야 한다는 것은

주님의 정화 사역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방관자가 되지 말라는 뜻이다.

저항의 능력을 이미 받은 자로서, 그 능력을 사용하여

오늘 하루 내 앞에 나타난 악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향한 가장 큰 신뢰이다.

 

인간이 스스로 악과 싸우는 그 치열한 순간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손을 붙잡고 계시며,

그 싸움이 주님을 우러러보는 가운데 이루어질 때

주님의 승리는 곧 인간의 승리가 된다.

 

인간의 투쟁은 주님의 능력을

자신의 삶 속에 현실로 끌어오는 거룩한 통로이기에,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스스로 싸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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