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의 기술 5 / 감정의 동요는 유입의 결과물일 뿐 죄가 아니다.
- 내면을 흔들고 지나가는 지옥의 유입은
영혼에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못한다.
인간의 감각적 인식은 눈앞에 보이는 감정적 동요에 쉽게 현혹되어,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결과의 영역까지 장악하려다
스스로 파멸의 피로를 자초한다.
내면을 스치고 지나가는 지옥의 흔들림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에 절망하여
문고리를 놓아버리는 것은
지옥의 유입과 동의를 분별하지 못한 영적 무지이자 판단 착오이다.
참으로 알아야 할 사실은
인간의 마음속에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악한 생각, 미움, 음란함,
혹은 깊은 절망과 무력감 같은 부정적인 정욕들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영계의 지옥 공동체로부터 인간을 향해 끊임없이 밀려오는
거대한 하강 압력, 즉 ‘유입(Influx)’의 현상이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그리고 영적 평형 상태에 있는 한 이 지옥의 유입은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마음의 표면을 스치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면에 더럽고 악한 흔들림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는
인간의 영혼이 악하다거나 타락했다는 증거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단지 영적인 기류 변화처럼 외부에서 밀려온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수많은 이들이
내면에서 이러한 흔들림을 느끼는 순간 큰 충격을 받는다.
‘내가 신앙생활을 이토록 열심히 했는데
내 마음속에 어떻게 아직도 이런 추악한 감정이 들 수 있는가’라며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정죄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유입된 현상 자체를 자신의 책임으로 오해하면
극심한 영적 피로와 좌절감이 찾아온다.
그리고 결국 ‘나는 어쩔 수 없나 보다’라며
정작 자신이 주체적으로 행해야 할 몫,
곧 주님을 우러러보며 겉 사람의 행동과 언행을 단속하는 일
(의지의 문고리를 잡고 버티는 파수꾼의 임무)을
스스로 포기하고 방관하는 자리로 가버리게 된다.
스베덴보리의 영적 법칙에 따르면,
악한 생각이 내 마음에 떠오른 것(유입)과 그 악한 생각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즐기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동의)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유입은 지옥이 문을 두드리는 현상이며 인간의 직접적인 통제 밖이기에
그것 자체로는 죄가 되지 않는다.
반면 동의는 문을 열어 지옥을 환대하는 자유의지의 선택이며,
이때 비로소 악이 인간에게 고착된다.
따라서 인간이 흔들림을 느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절망하는 태도는,
악의 유입과 그에 대한 동의의 경계선을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에서 비롯된 오류이다.
인간은 주님을 우러러봄으로써
악을 거부할 수 있는 주체적인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내면에 지옥의 폭풍이 몰아치더라도,
인간은 ‘나는 이 악한 즐거움에 동조하지 않겠다.’라고 결단하며
주님께 공급받은 힘으로 마치 자신의 힘인 양
바깥 행동의 문고리를 단단히 쥐고 버티기만 하면 된다.
문을 열어주지만 않는다면, 내면을 흔들고 지나가는 지옥의 유입은
영혼에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못하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비록 자아는 당장 눈앞에 들이치는 감정의 파도를 보며
그것이 곧 자신의 본질이라 착각하는 나약한 시야를 가졌지만,
지옥의 유입이 일어나는 현상 자체는 인간의 소관이 아니며,
오직 그 유입에 동조하기를 거절하고 바깥 행동의 빗장을 지르는 행위만이
인간에게 위임된 유일한 책임 영역이다.
내면의 흔들림에 지레 겁을 먹고 스스로를 정죄하며
단속의 손길을 놓아버리는 현상은,
유입 자체와 결과의 영역까지 자아의 힘으로 통제하려다
에너지를 고갈당한 교만과 조급함의 전형적인 결과물이다.
지옥의 유입은 참으로 거대하다는 것,
그리고 영혼을 정복하시는 권능이 오직 주님께만 속해 있다는 것,
이 둘 모두를 진실로 인정할 때 인간은 비로소 무모한 전멸의 욕망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위임된 정당한 거부권의 실행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다.
자신의 유한함을 겸손히 시인하면서도
행동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손발을 피나게 묶어두는 사투는
주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교만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주님의 전능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가능한
최고의 실천적 의탁이다.
인간이 자유의지 안에서 주님을 우러러보며
마치 스스로 하듯 단호하게 악의 문을 걸어 잠그고 버텨낼 때,
주님의 신성한 섭리는 마침내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심층에서 거대한 정화의 수술을 시작하신다.
일생에 걸쳐 악의 뿌리를 변방으로 밀어내시고
그 자리에 천국적 고유속성을 친히 안착시키신다.
이 주님의 신성한 전능과 자비야말로 자아의 무거운 염려를 벗겨내고
영혼을 가장 안전한 천국의 평강과 참된 안식의 질서로
인도하시는 거룩한 손길이다.
- 감정의 동요는 유입의 결과물일 뿐 죄가 아니다.
지옥의 유입과 관련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몫인 사용권과 주님의 몫인 소유권이
정확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몫인 사용권이란
‘스스로 하듯’ 이라는 원리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위임된 자유의지를 말하는 것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주님이 보존하시는 영적 평형 속에서
마치 내 힘인 양 주체적으로 행동하며 결단하는 것이다.
지옥이 유입될 때
인간은 외적으로 세찬 흔들림을 겪게 된다.
이때 많은 신앙인이 범하는 치명적인 판단 오류는
주님을 우러러보며 마음의 문고리를 안으로 걸어 잠그는 대신,
이미 자신의 내면에 밀려든 감정의 세찬 기류에 맞서
자신의 독자적인 힘으로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인간의 진정한 몫은
유입 자체에 맞서 그것과 싸우려 드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의한 흔들림이 영혼의 승인(동의)을 얻지 못하도록
의지의 문을 걸어 잠그는 거부권의 사용이다.
인간이 이 거부권의 실천을 일상의 삶 속에 능동적으로 유지할 때
주님께서는 비로소 그것을 수단삼아
그의 영혼 깊은 곳의 악의 뿌리를 제거해주신다.
지옥의 유입 앞에 인간의 능력을 논하는 이 주제는,
스스로 하듯 하는 자유 안에 주님으로부터 위임된 거부의 능력과
그 유입의 기세까지 장악하려는 자아의 그릇된 통제욕
사이의 경계를 아주 정밀하게 다루고 있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스스로 하듯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따라서 공급받은 그 힘을 주님을 우러르는 가운데
마치 내 것인 양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악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주님이 공급해 주신 그 힘의 목적은
내면의 화면에 이미 상영되기 시작한 지옥의 유입세력 자체를
직접 통제하거나 멸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옥의 유입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대처,
즉 유입의 기류 자체를 제어하려는 시도와
안으로 문을 걸어 잠그는 거부는
다루는 대상과 영역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이 주님께 위임받은 힘을 마치 제 힘인 양
단호하게 통제해야 하는 영역은
오직 유입에 동조하지 않는 생각의 관리와
바깥 행동의 단속에만 국한된다.
반면, 유입으로 일어나는 감정 자체를
자아의 힘으로 정화하고 소멸시키려 드는 것은
힘의 소유권자인 주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무모한 조급함이기에 이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이 주제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유입에 관한 영적 원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지옥의 기류(악과 거짓)가 유입되면
그 유입의 압력과 내 안의 유전악이 결합하여
감정적 동요(흔들림)가 일어난다.
따라서 감정은 유입에 따른 결과물인 것이다.
지옥의 유입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감정적 동요,
이 경계선을 혼동하면 자책과 정죄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이 영적인 역학구조를 세 가지 기준으로 정리해본다.
1. 감정 자체는 내 영토 안에서 일어나는 신호이다.
유입(Influx)의 실체는
외부 지옥 공동체로부터 투사(Projection)되는
악한 정욕과 거짓된 생각의 기류이다.
이 기류가 인간의 마음이라는 화면에 들이칠 때
겉 사람의 신경과 기억, 그리고 태생적인 유전악의 토양이
그 자극에 격렬히 반응하면서 비로소 무력감, 분노, 미움이라는
구체적인 '감정적 동요(영적 통증)'가 내 안에서 생성된다.
즉, 감정은 유입의 압력이
내 영혼의 표면과 부딪혀 빚어낸 충격파인 것이다.
2. 동요를 느끼는 것까지도 법적으로는 여전히 유입의 영역이다.
여기서 가장 치명적인 판단 착오가 발생한다.
감정이 내 안에서 끓어오르다 보니,
신앙인은 '이 더러운 미움과 절망이 벌써 내 영혼을
더럽혔구나!'라며 자책한다.
그러나 화면에 참혹한 전쟁 영상이 상영된다고 해서
텔레비전 모니터 자체가 파괴되는 것이 아니듯,
지옥의 압력으로 내면 기류가 심하게 뒤흔들리는 상태까지는
여전히 외적인 유입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의지가 그것을 좋아하여 승인하기 전까지는
결코 인간 고유의 죄가 되지 않는다.
3. 통제 불가능한 현상임을 겸손히 시인해야 한다.
겨울날 날씨가 흐려지면 내 몸이 으스스하게 추위를 느끼는 것이
필연적인 현상인 것처럼 지옥의 가공할 하강 압력이 들이칠 때
내 안에서 부정적인 감정적 동요가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따라서 '왜 내 안에서 또 이런 미움과 무력감이 올라오는가?'라며
감정 상태 자체를 내 의지력으로 억누르려 드는 것은
무모하고 조급한 행위이다.
지옥의 압력이 내 안의 유전악을 자극하여
감정의 폭풍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 폭풍이 몰아치는 현상까지도
여전히 내 소관이 아닌 외부의 유입 영역에 속하므로,
인간은 감정을 지우려 그것과 사투를 벌이지 말고
오직 의지의 단속(거부)에만 전념해야 한다.
AC 6324 을 인용해 이 주제를 증거 해본다.
AC 6324
'.. 그들은 또한 사람이 가진 모든 생각이나 애정이
다른 곳에서 그에게 흘러 들어온(유입) 것이라는 의견에 대해
스스로 추론하면서
만일 이 생각이 사실이라면
어떤 범죄에 대해서도 유죄가 되거나(found guilty)
벌을 받게 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과 같은 답변을 받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모든 선하고 참된 것은 주님에게서 나오고
모든 악하고 거짓된 것은 지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그는 어떤 범죄에 대해서도 유죄가 될 수 없을 것이고
악이 그 자신에게 돌려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악이 자신에게서
시작된다고(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악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appropriate,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이 믿음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고
따라서 악은 그에게 고착되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의 핵심은 ‘악의 소유권(영수증)이
누구에게 발행 되는가’에 대한 영계의 법적 질서이다.
스베덴보리의 인용 글에서 문제의 핵심이 되는 두 문구를 보자.
1 ‘..모든 악과 거짓이 지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결코 유죄가 될 수 없다..’
진실로 그렇게 믿는 자는
내면에서 솟구치는 미움, 잔인함, 음란함, 깊은 절망감
등의 정욕을 마주했을 때,
그것이 내 영혼이 스스로 만들어낸 산물이 아니라
'외부 지옥 공동체'라는 발신지에서 투사된 신호임을
진리로 선명하게 분별하는 자다.
영계의 법정에선 발신처가 지옥임이 명백하므로,
단순히 그 신호를 수신하여 흔들렸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게 죄를 묻거나 유죄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2 ‘..악이 자신에게서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에
악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Appropriate)..’
이 부분은 가장 치명적인 연산 오류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내면에서 미움이나 절망의 감정 기류가 끓어오르면,
자아는 영적 무지(지각의 수면)로 인해
‘이 더러운 생각이 내 안에서 나왔구나.
내가 이 모양이니 이런 감정이 드는구나.’라며
끓어오르는 감정을 자신과 동일시해 버린다.
이처럼 악의 출처를 지옥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오판하여 인정(묵인)하는 순간,
영계의 법칙에 따라 바깥 바닥에 머물던 지옥의 악이
영혼 내부(의지)로 기꺼이 모셔 들여지며(Appropriation/고착),
비로소 인간 자신의 실제적인 죄로 귀속되는 영적 형벌이 성립된다.
이 법적 원리로부터
‘의식 표면에 느껴지는 분노의 잔여물(감정의 동요)은
자아가 의지적으로 승인하기 전까지 결코 인간의 죄가 아니다.’
라는 실천적 결론이 도출된다.
그 과정을 설명해보자.
지옥의 유입으로 내면에 흔들림이 생길 때 그 감정은
유입의 압력이 내 유전악과 부딪힌 충격파이다.
지옥에서 악을 투사(Emission)할 때
내 겉 사람의 기억과 유전적 토양은 자극을 받아 격렬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지각과 지성(화면)에 떠오른 흔들림은
아직 의지의 선택이 아니다.
AC 6324항의 원리에 따르면, 내면에서 감정의 폭풍이 요동치고
괴로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까지도
여전히 '유입이 진행 중인 현상(수신 상태)'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진짜 죄의 성립은
오직 '의지의 승인(동의)'에 달린 것이다.
내면의 폭풍이 아무리 가혹할지라도
자아가 AC 6324항의 빛을 깨워
‘이 분노와 절망의 기류는 밖에서 온 지옥의 신호일 뿐
나의 본질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유입의 실체를 객관화한다면,
그리고 그 감정을 즐기거나 정당화(묵인)하지 않고
바깥 언행의 문고리를 잠가버린다면(거부권의 사용),
그 악은 영혼의 핵심과 결합하지 못한다.
따라서 의식 표면에 분노의 잔여물이 남아
찢어지듯 흔들리는 고통(영적 통증)을 겪고 있을지라도,
자아가 바깥문 단속에 전념하고 있다면
그것은 유입에 종속된 범죄 상태가 아니라
가장 치열하게 거부권을 행사하는 중인 정결한 상태임이
법적으로 완전히 입증되는 것이다.
악의 근원이 자아가 아닌 지옥에 있음을 객관화하는
분별(AC 6324)이 선행될 때,
비로소 인간은 자책과 정죄의 늪을 벗어나
'감정 자체를 없애려던 무모한 통제욕'을 내려놓을 수 있다.
내면의 동요를 유입의 현상으로 분리하고
오직 의지의 단속(사용권)에만 전념할 때 그것을 통해
주님의 정화가 시작된다는 신인 협력의 법칙이 완수된다.
그러므로 지옥의 유입으로 인해 인간의 내면에
무력감, 분노, 두려움 같은 외적 흔들림이 일어날 때
그러한 감정의 동요 자체를
내 힘으로 제어하겠다는 통제욕을 내려놓고
그것이 외부의 신호일 뿐 나의 본질이 아님을 객관화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왜 내 안에서 또 이런 더러운 감정이 올라오는가?
당장 이 감정을 내 힘으로 억눌러 버리겠다.’
라며 분출하는 조급한 반응은,
내면의 흔들림과 외부의 지옥을 하나로 묶어
유입의 기류 자체를 직접적인 공격 대상으로 삼는 심각한 오판이다.
그러한 시도가 무모한 이유는
영계의 거대한 하강 압력인 지옥 자체를
인간이 직접 통제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옥의 공격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공한 힘으로
끊임없이 퍼부어지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오직 주님의 권능만이 이 가혹한 압력을 막아내실 수 있을 뿐이다.
사실이 그렇듯 지옥의 유입 자체를 통제하려는 싸움은
본래 인간에게 위임된 권한이 아니므로
내 힘으로 대항하려 들면 백전백패하며 지칠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위임된 힘의 올바른 사용 대상은
유입에 대한 자신의 동조 여부와 바깥 행동의 억제이다.
내면에서 흔들림이 일어나는 것은 내가 막을 수 없지만,
그 흔들림을 받아들여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지 말지는
주님이 주신 자유의지(평형 상태) 안에서 인간이 결정할 수 있다.
그것은 더러운 유입이 밀려오지만,
나는 이 감정을 즐기지 않고 내 손과 발, 혀를 단속하여
행동으로 옮기지 않겠다며 의지의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다.
즉, 통제 불가능한 감정적 동요와 사투를 벌이지 않고,
방향을 돌려 주님이 위임해 주신
마음의 동조 거부와 외적 행실의 단속에만 전념하는 것이다.
인간이 유입되는 감정 자체를 대상으로
직접 싸워 쫓아버리겠다는 조급한 통제욕에 사로잡히면,
당장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극심한 스트레스와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왜 기도를 해도 이 악한 상태가
사라지지 않는가..’라며 낙심하는 순간,
인간은 영적 평형 상태를 잃고 자아의 낡은 관성에 종속된다.
그렇게 흔들림 자체를 내 힘으로 통제하려다 에너지를 고갈당하면,
정작 내가 마땅히 지켜야 할 바깥 행동을 단속하고
문을 걸어 잠그는 파수꾼의 임무를 포기하고 방관하게 된다.
인간은 주님께 힘을 위임받았으므로,
'문 걸어 잠그기(행동 단속)'를 할 때는 마치 내 힘인 양
단호하고 격렬하게 의지를 발동해야 한다.
손발을 묶고 혀를 억제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이 주체가 되어 행하는 통제이다.
다만, 이 투쟁의 현장에서
인간이 명확히 선을 그어야 할 분별은 필요하다.
인간의 몫(사용권)은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을 꺼내어,
오늘 나에게 찾아온 지옥의 유입을 거절하며 바깥 행동을 억제하는 것이고,
주님의 몫(소유권)은 그렇게 문을 걸어 잠그고 버티는 인간의 배후에서
그 흔들림의 원인인 지옥의 결박을 끊어내고 악을 송두리째 들어내어
정화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간은 항상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