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의 기술 6 / 인간이 지옥의 유입 자체와
직접 대항할 수 없는 이유들
- 지옥의 유입에 적극 저항하되
악의 처리 결과는 주님께 맡겨야 한다.
지옥의 유입과의 투쟁에서 인간이 반드시 삼가야 할
가장 치명적인 금기가 있다.
그것은 내면으로 밀려드는 지옥의 유입 자체를 저항하는 차원을 넘어,
그 악의 근원적인 뿌리를 자신의 역량으로 직접 캐내어
제거하려는 교만한 욕심이다.
인간은 내면의 악을 자신의 힘으로
완벽히 뽑아버리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그 처리의 결과값마저 스스로 장악하려 든다.
이때 인간은 악이 얼마나 신속하게,
혹은 자신의 마음에 얼마나 흡족할 정도로 철저하게 소멸하는지
그 결과까지 통제하려 들며,
이러한 조급함은 결국 영적 질서를 왜곡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지옥의 유입에 맞서 인간의 역량에 제한을 가져올
이 경계선을 혼동하여 악의 근원까지 자신이 장악하려 들 때,
인간은 교만과 조급함의 덫에 걸려 깊은 피로에 침전된다.
반면, 심각한 피해 앞에서도
‘이 악의 뿌리를 뽑고 정화하는 전 과정은 주님의 영역이니,
나는 오늘 위임받은 힘으로 손과 발만 단속하겠다.’며 묵묵히 버틸 때
비로소 자아의 무거운 짐이 벗겨진다.
경계선의 혼동에서 오는 인간의 분별력 상실은
단순히 심리적 착오에 그치지 않고, 주님께 속한 영역을 침범함으로써
영적 질서를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악을 처리하는 결과값까지 인간이 통제하려 든다는 것은
인간이 감당해야 할 영역인
'악에 대한 적극적 저항'이라는 수단적 차원을 넘어,
오직 주님의 섭리에 속한 '악의 처리 속도와 철저함'이라는 성취까지
자신의 의지로 제어하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주님의 주권적 통치와 동일시하거나 앞지르려는 시도이며,
과정에서의 성실함보다
악을 단기간에 완벽히 소탕하려는 조급함에서 기인한다.
주님의 섭리가 인간에게 자신의 힘으로 악을 피하는 것처럼 싸우되
그 힘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결과에 대한 통제권을 스스로 쥐려 할 때 발생하는
지배욕의 교만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특히 악의 뿌리까지 스스로 장악하여 제거하려는 지배욕이
곧 인간의 가장 깊은 교만에 속한다.
인간의 영혼 내부에서 발생하는 교만과 조급함은
바로 이 '악의 근원을 내 손으로 끝장내겠다.'는 집착에서 시작된다.
인간은 매 순간 악한 유입에 맞서
스스로 행하는 것처럼 대항해야 할 의무가 있으나,
이 과정에서 악의 근원이 즉각적으로 제거되지 않거나
그 처리 결과가 자신의 기준에 흡족하지 않을 때
그는 저항의 가치를 의심하거나 부정한다.
인간은 주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시간과 방식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으로 악의 뿌리를 신속히 끊어내려는 오류를 범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영혼은 주님의 전능한 섭리로부터 분리되어
자신만의 힘으로 악을 신속히 끝장내려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며,
결국 영적인 피로와 탄식에 빠지게 된다.
반면, 결과를 주님의 영역으로 온전히 이양하고
오직 현재의 손과 발을 단속하는 일에만 집중할 때,
인간은 주님의 섭리 안에 머무르는 평온을 얻게 된다.
그럼에도 인간이 악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일과
악을 신속하고 철저히 처리하려는 결과값 사이의 구분은
그것이 영적 투쟁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한 핵심 요건임에도
실제로는 쉽지 않다.
적극적 저항은
지금 눈앞에 닥친 악한 생각이나 유혹을 거부하며,
당장 주어진 오늘을 주님 안에서 지켜내는
'나의 할 일'에 집중하는 영역이다.
반면 인간이 지향하는
악의 뿌리를 제거하려는 욕심(악의 처리 결과값)은
내가 원하는 시간 안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악을 철저히 제압하는 상태를 의미하며,
이는 전적으로 주님의 전능한 섭리에 속한다.
이 두 차원의 대처 양상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설명해보자.
인간의 영적 투쟁 현장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예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악에 대한 적극적 저항(수단적 차원)은
마치 거센 폭풍우 속에서 집 안으로 들어오려는 흙탕물을 막기 위해
묵묵히 문을 걸어 잠그고 문틈을 틀어막는 행위와 같다.
인간은 지금 당장 내면으로 밀려들어 오는
화, 음란, 교만, 혹은 조급함이라는 생각의 유입을 인지하고,
그것을 거부하며 ‘나는 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단호히
마음을 닫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때 인간은 자신의 손과 발(생각과 감정의 조절)을
단속하는 일에만 집중하며
비록 폭풍우가 멈추지 않아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수단으로서의 저항을 지속한다.
이러한 저항은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의무이자 주님께 순종하는 방식이다.
둘째, 악의 근원을 직접 제거하려 들거나
그 처리 결과를 자신의 역량으로 통제하려 드는 것은,
아직 폭풍우가 치고 있는데 ‘왜 내 집 앞은 아직도 흙탕물인가’,
‘내가 이렇게 문을 닫았으니 이제는 악이 신속하고 철저하게
멸절되어야 마땅하다.’라고 분노하거나 조급해하는 상태이다.
인간이 악을 제거하는 속도와 강도를 장악하려 든다는 것은,
외부의 폭풍우가 멎지 않는 것에 대해 스스로 좌절하거나
혹은 자신의 저항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자책하며
주님의 섭리보다 자신의 결과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이는 악이 즉시 처리되지 않은 현 상태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공로로 악을 단번에 제압해야 한다고 믿는
교만에서 비롯된 오류이다.
즉, 실천적 차원에서의 대처는
‘악의 근원적인 제거(폭풍우)는 주님의 영역이니
나는 문을 닫는 내 일에만 집중하겠다.’는 태도로 수렴되어야 한다.
결과를 통제하려는 시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문을 닫는 행위 자체를 무의미하게 느끼게 하거나,
조급함에 못 이겨 문을 열고 외부를 살피게 함으로써
결국 지옥의 유입을 다시 허용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신의 수고가 즉각적인 결실로 나타나기를 바라며
결과를 손에 쥐려 하는 악한 성향을 지니고 있으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결과를 장악하려는 교만의 덫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진정한 평안을 누리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매 순간
악과 치열하게 싸우는 거룩한 의무를 부여하시되,
그 싸움의 최종적인 결과는 주님의 무한한 자비와 전능한 섭리 속에
안전하게 맡겨두도록 인도하신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오직 오늘 주어진 자유의지 안에서
주님을 의지하며 나아갈 때, 주님께서는 인간을 조급함으로부터 건져내어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는 도구로 빚어 가시는 은혜를 베푸신다.
- 인간이 지옥의 유입 자체와 직접 대항할 수 없는 이유들..
이번에는 주님이 공급해 주신 신성한 힘을 가졌음에도
왜 인간은 지옥의 기류 자체와 직접 맞서 싸워서는 안 되는가라는
법적 권한(소유권)의 한계와 전장의 보존 법칙에 대해 살펴보자.
DP 278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어떠한 악도 정화(purify)할 수 없고
지옥으로부터의 유입을 거부할 수 없으며,
만일 그가 주님을 우러러보지 않는다면 결코 악을 정화하거나
거부할 수 없다. 주님 없이는 악이 정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을 우러러보며 악을 죄로 보고 멀리하는 사람은
주님과 결합하고, 주님과 결합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주님을 우러러보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의 악들을 단지 바라보고 그것들을 시인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들을 정화할 수는 없다.'
스베덴보리의 저서 DP 278항에는
‘만일 그가 주님을 우러러보지 않는다면
결코 악을 정화하거나 거부할 수 없다.’는 명제가 존재한다.
이 구절을 정밀하게 연산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어떠한 악도 정화할 수 없으나
오직 주님을 우러러볼 때는 그 악의 유입에 저항하고
거부할 능력을 공급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옥의 유입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주체적 노력을
전면 부정하는 태도는 저서의 온전한 질서에 어긋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많은 신앙인이
치명적인 혼선과 판단 착오를 범하곤 한다.
주님을 우러러보며 스스로 하듯
악을 거부하는 사용권을 발동하는 대신,
지옥의 유입에 의해 내면에 이미 밀려든 감정 기류 자체를
자아의 독자적인 힘으로 단숨에 억눌러 소멸시키려 들기 때문이다.
악을 실제로 들어내어 정화하고
유입의 흐름 자체를 제어하는 권능은
인간에게 속하지 않은 오직 주님의 신성한 영역(소유권)이다.
여기서 한 가지 본질적인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주님을 우러러봄으로써 신성한 힘을 공급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내면에 밀려든 지옥의 유입 세력이나 감정의 기류 자체를
인간이 직접 통제하거나 멸할 수 없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주님이 힘을 주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영계의 법적 소유권 관계와 자유의지의 질서 때문이며,
그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 법칙으로 설명된다.
1. 유입(지옥)의 소유권은 오직 주님께만 있기 때문이다.
(소유권과 사용권의 경계)
인간이 주님을 우러러보며 공급받는 힘은 악에 동조하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사용권(자유의지)'의 형태로 주어질 뿐,
영계의 거대한 실체인 지옥 공동체를 직접 장악하고 심판하는
'소유권(통제·정화의 권능)'의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
지옥의 유입 세력은 수억 명의 악령들이
묶여 있는 거대한 영적 사회이다.
인간이 주님의 힘을 빌려 이 거대한 세력 자체를
제 마음대로 끄고 켜거나 멸하려 드는 것은,
마치 일개 군인이 왕의 권한(군 통수권)을 넘겨받아
적국 자체를 소멸시키겠다고 나서는 것과 같은 영적 월권이다.
2. 인간의 내면은 영계의 전장(戰場)이자 평형 공간이기 때문이다.
(자유의지 보존의 법칙)
스베덴보리의 저서에 따르면, 인간의 내면 공간은
천국으로부터의 유입과 지옥으로부터의 유입이
정확히 1:1로 맞부딪히는 영적 평형 상태, 즉 자유의지 공간이다.
만약 인간이 주님의 힘을 꺼내어 내면에 밀려드는
지옥의 유입 기류 자체를 단숨에 통제하여 완전히 멸해버릴 수 있다면,
그 순간 내면의 평형 상태(영적 기류)가 깨어지게 된다.
주님이 인간에게 힘을 주시는 목적은
지옥이 들이칠 때 ‘나는 이 기류에 동조하지 않겠다.’며
평형의 중심을 잡고 버티게 하기 위함이지,
전장 자체를 파괴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3. '거부'는 인간의 몫이고, '정화'는 주님의 몫이기 때문이다.
(신인 협력의 방정식)
주님이 힘을 주시는 진짜 목적은
인간을 법적 통로로 삼아 주님이 직접 일하시기 위함이다.
인간이 위임받은 힘으로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미움과 분노의 잔상이 들이칠 때 ‘내 입술과 손발을 단속하여
바깥 행동으로 옮기지 않겠다.’며 문고리를 걸어 잠그는 거부이다.
그렇게 인간이 마치 스스로 하듯
문을 잠그고 버티는 법적 조건(통로)을 완성해 놓으면,
그 문 너머 배후에서 지옥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내고
유입을 전멸시키는 실질적인 정화 수술은
주님이 친히 당신의 전능으로 집도하신다.
결과적으로 주님이 주신 힘으로도 유입 자체를 직접 멸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임무가 지옥을 멸하는 심판관이 아니라
주님을 우러러보며 내 행실의 바깥문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AC 6324항의 원리에 명시되듯 의식 표면에 느껴지는 분노의 잔여물들은
자아가 의지적으로 승인하기 전까지는 결코 인간의 죄가 아니다.
따라서 자아가 취해야 할 최상의 전환은
내면의 흔들림 자체를 내 힘으로 즉시 없애겠다는 조급한 통제욕을 내려놓고,
유입의 실체를 객관화하여 자신과 분리한 채
주님이 주신 자유의지로 마음의 바깥문을 다시 굳게 닫아걸어
새로운 단속의 자리로 복귀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