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의 기술 7 / 감정의 폭주를 막는 평소의 철칙

작성자밝은 햇살|작성시간26.06.18|조회수9 목록 댓글 0

싸움의 기술 7 / 감정의 폭주를 막는 평소의 철칙

 

- 영적 정화의 세 단계와 참된 단속의 가치

 

영적 정화의 과정에서 가장 분별하기 어렵고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영적인 힘의 고갈을 겪는 지점은,

바로 지옥의 유입과 그 유입으로 흔들리는 인간의 심정적 상태,

이 둘 사이에 경계가 되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 이 경계 지점은

내 마음에 악한 생각이 떠오른 순간(유입)과

그것을 내 것으로 인정하고 붙잡은 순간(동의)의 사이를 가르는

정밀한 경계선이다.

 

내면에서 악한 생각이나 무력한 감정이 솟구칠 때

영혼의 에너지를 고갈시키지 않는 올바른 투쟁은 

 

어디까지가 밖에서 밀려온 파도인 ‘유입’에 해당하고

어디서부터가 그 파도를 받아들인 책임인 ‘동의’에 해당하는지,

그 정밀한 경계선을 명확히 분별하는 것에서부터 가능해진다.

 

명확한 대조를 통해 그 두 영역을 드러내 보겠다.

첫째, 현상과 주체의 측면에서 두 영역은 엄격히 분별된다.

 

미움, 음란함, 깊은 절망감과 같은 부정적인 정욕들이

갑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현상은 유입에 해당한다.

이것은 영계의 지옥 공동체로부터 발생하는 압력일 뿐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반면, 그렇게 떠오른 악한 생각을 속으로 음미하고 즐기며

마침내 겉으로 실행하려 드는 현상은 동의에 해당한다.

이는 주님이 보존하시는 영적 평형 속에서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다.

 

둘째, 영적 영토와 죄의 유무라는 관점에서도 경계선은 선명하다.

 

지옥의 유입은 지옥의 군대가 내 마음의 바깥문을

사정없이 두드리는 단계에 불과하다.

이 상태는 아무리 더럽고 가혹할지라도

영혼에 그 어떤 상처도 입히지 못하므로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유입에 대한 동의는 인간이 스스로 문을 열어

그 악한 상태를 마음 안방으로 기꺼이 모셔 들이는 단계이다.

이 순간 비로소 악이 영혼에 단단히 달라붙어 고착되므로 죄가 성립된다.

 

셋째, 인간이 짊어져야 할 책임의 범위가 완전히 다르다.

 

내면을 스치고 지나가는 지옥의 유입 발생 자체는

호흡이나 날씨와 같아서 인간의 직접적인 통제가 불가능하다.

인간의 책임 영역은 오직 동의의 여부에만 존재한다.

 

유입되는 악을 향해 단호히 거부권을 행사하고,

몸에 밴 관성이 악을 실행하지 못하도록 바깥 언행을 철저히 단속하는 것은

주님을 우러러보는 인간이 전적으로 제어해야 할 통제의 영역이다.

 

이 경계선을 비유로 이해하자면 이렇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소나기가 내리는 것(유입)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비가 내린다고 해서 스스로 빗속으로 걸어가 온몸을 적실 것인가,

아니면 우산을 펴고 건물 안으로 대피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동의)은

전적으로 인간의 몫이다.

 

먹구름이 낀 사실 자체를 자책하며 절망할 필요가 없다.

인간은 그저 주님이 위임하신 힘을 힘입어

마치 스스로 하듯 행동의 문을 걸어 잠그고 비를 맞지 않겠다는

거부의 의지만 단호히 발동하면 된다.

 

이처럼 '유입'과 '동의'라는 교리적 경계를

구체적인 기준들로 세분화하여 대조함으로써 모호하던

경계선의 실체를 규명해 본 것은,

 

자아가 눈앞의 감정적 동요에 현혹되어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유입의 영역까지 자아의 힘으로 장악하려 하다가

도리어 에너지를 고갈당하는 영적 무지를 막기 위해서이다.

 

‘유입’과 ‘동의’의 분별을 삶 속에서 올바르게 구현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흔들림이 시작되어 종식되기까지의 과정을 '지옥의 유입',

'인간의 문 걸어 잠그기라는 단속', '지옥 뿌리의 정복'

이 세 가지 전개 단계로 확장하여 바라보아야 한다.

 

‘지옥의 유입’과 ‘뿌리의 정복’이라는 시작과 끝의 두 영역은

전적으로 주님의 전능에 속한 영역이며,

인간의 몫은 오직 그 한가운데에 위치한 문 걸어 잠그기뿐이다.

 

스베덴보리의 저서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영계의 천국과 지옥으로부터 오는 온갖 신호가 투사되는 화면과 같다.

첫 단계인 지옥의 유입이란 갑자기 마음속에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 이유 없는 무력감, 누군가를 향한 강한 증오,

혹은 모든 상황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감정적 충동들이다.

 

이 지옥의 유입이 일어날 때

인간은 정신적 동요와 고통을 실제로 느끼게 된다.

 

AC 6307

 

'지옥으로부터의 유입은 악과 거짓 속으로 흘러 들어오며,

영계로부터 인간의 사상(思想)과 의지 속으로 유입되는 것들은

그 성질상 지옥으로부터 오거나 아니면 천국으로부터 온다.

인간이 악 안에 있을 때 지옥이 열리고, 선 안에 있을 때 천국이 열린다.'

 

TCR 475

 

'인간은 세상에 사는 동안 천국과 지옥의 한가운데에 유지되며,

그곳에서 영적 평형 상태에 놓여 있다.

이 평형 상태로 말미암아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주어지며,

천국으로부터는 선과 진리가 유입되고

지옥으로부터는 악과 거짓이 끊임없이 유입된다.'

 

인간이 내면에서 악한 충동이나 비관적인 우울감을 느낄 때,

그것이 자신의 고유한 인격이나 영혼 자체의 타락에서

비롯되었다고 오판하기 쉽다.

 

그러나 영적 법칙의 관점에서 판단해 보면,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 악을 제조하는 독립된 공장이 아니라

영계의 신호가 통과하고 투사되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AC 6307항과 TCR 475항이 증명하듯,

인간의 마음은 천국과 지옥이라는 거대한 두 영적 세력이

마주 보고 서 있는 중간 지대에 위치한다.

 

날씨가 흐려지면 하늘에 먹구름이 끼듯, 지옥 공동체의 악한 기운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화면에 투사되는 현상이 바로 '유입'이다.

 

따라서 내면에서 증오나 무력감이 솟구쳐 올랐다는 사실 자체는

외부에 존재하는 지옥의 파도가 정신의 경계선을 두드린 결과일 뿐,

인간이 그 악을 선택하여 자신의 영혼에 고착시킨

죄의 상태가 아님을 분별해 낼 수 있다.

 

여기서 명밀히 짚어야 할 사실은,

그 충동이 마음의 화면에 선명하게 떠올라

그것을 인지하고 괴로워하는 상태까지도 여전히

지옥의 유입 영역에 속한다는 점이다.

 

수많은 신앙인이 내면이 흔들리고

더러운 생각이 스쳤다는 사실 자체를 두고

내가 벌써 악을 받아들였다고 착각하여 낙심한다.

 

그러나 화면에 어떤 참혹한 영상이 상영되든

그것은 밖에서 투사된 신호일 뿐

아직 인간의 고유속성인 자아에 귀속된 죄가 아니다.

 

지옥의 유입과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인 상태를 가르는

단 하나의 명확한 경계선은

바로 의지의 승인과 실행이라는 두 번째 단계이다.

 

내면에서 올라온 악한 생각이나 무력한 충동을 가만히 묵인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며 머릿속으로 굴려보고

나아가 손과 발, 혀를 움직여 그 충동을 바깥 행동으로 실행해 버리는 상태는

질서를 위반하여 악을 받아들인 상태이다.

이때 비로소 유입은 인간의 영혼에 완전히 고착되고 귀속된다.

 

반면, 참된 단속인 문 걸어 잠그기는

지옥의 유입으로 인해 마음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인간의 의지 중심에서 나는 이 생각과 감정을 즐기지 않으며

이것은 천국의 질서가 아니므로 내 바깥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손발을 묶어두는 상태이다.

 

AC 6204

 

'악령들이 악과 거짓을 유입시킬 때,

인간은 그것이 악과 거짓이라는 것을 지각하는 한

그것들이 마음에 고착되어 자신의 것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하듯 거절해야 한다.

 

만일 인간이 그것들을 받아들이면,

그것들은 마음에 고착되어 인간의 것이 된다.'

 

TCR 313

 

'인간이 악한 정욕을 의지 속에서 즐기지 않고

그것이 바깥 행위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동안에는,

그 악이 아직 영혼에 고착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의지가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고,

단지 겉 사람의 감각 속에서 유입되는 정욕의 시험을

겪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앞선 단계에서 지옥의 유입이 마음의 화면에 투사되는 현상이었다면,

이 두 번째 단계는 그 투사된 영상을 대하는 인간 자아의 '선택'이

영혼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가 판가름 나는 지점이다.

 

많은 신앙인이 흔들리는 감각적 고통 자체를 죄로 오판하지만,

영적 역학 관계를 계산해 보면 진짜 죄의 성립 여부는

오직 '의지의 동의'라는 필터를 통과했느냐에 달려 있다.

 

AC 6204항과 TCR 313항이 입증하듯,

내면의 유입이 아무리 가혹할지라도 인간이 주님을 우러러보며

‘나는 이 악한 즐거움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의지적으로 거절하며

손과 발, 혀의 움직임을 단호히 묶어둔다면

그 악은 영혼의 영토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차단된다.

 

느끼는 괴로움은 지옥이 강제한 흔들림이나,

행실을 묶어두는 단속은 주님이 위임하신 자유의지로

인간이 '마치 제 힘인 양' 적극적으로 행해야 하는 주체적 통제이다.

 

이 경계선을 이해할 때 비로소 내면의 동요 자체를 없애려다

에너지를 고갈당하는 무모한 사투를 멈추고

파수꾼의 임무에 전념할 수 있는 올바른 선택이 완성된다.

 

인간이 자신이 위임받은 힘으로 그 유입에 동의하지 않고

바깥 행동과 언행을 피나게 억제하며 단속할 때,

비로소 세 번째 단계인 지옥 뿌리의 정복이 주님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간이 거부의 자리를 지킬 때

주님께서는 신성한 권능으로 영혼 심층에서 지옥의 연결을 끊고

구조를 재배치하는 수술을 실행하신다.

 

이 경계선이 분별되지 않으면

인간은 유입으로 인한 흔들림을 느꼈다는 이유만으로

문 걸어 잠그기를 포기해 버리는 판단 착오를 범한다.

 

내면의 동요 자체를 자신의 힘으로 없애려다 지쳐버리거나,

이미 자신이 악에 오염되었다고 오판하여 방관으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흔들림을 느끼는 상태는

인간의 유한함이 가공할 지옥의 압력과 부딪힐 때 발생하는

필연적인 영적 통증일 뿐이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겸손히 시인하며

이 흔들리는 고통과 유입 자체는 내가 직접 통제할 수 없으나,

오직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내 바깥 행동만큼은

단단히 묶어두겠다며 문고리를 잡고 버틸 때,

주님의 신성한 섭리는 마침내 영혼의 깊은 배후에서 역사하기 시작하신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영계의 심층에서

지옥의 군대를 완전히 결박하시고 악의 뿌리를 변방으로 밀어내

정화의 질서를 친히 성취하신다.

 

이처럼 자아가 책임질 영역과 주님의 영역을 정밀하게 나누어

오직 오늘 마주한 단속에만 전념할 때,

영혼을 짓누르던 조급한 염려의 짐은 완전히 벗겨진다.

 

- 감정의 폭주를 막는 평소의 철칙과 각성 후의 분리

 

사람을 향한 미움과 분노의 감정에 휘둘릴 때를 예로 들어보자.

 

겉 사람이 지닌 본능적인 정욕과 이기심은

자신의 허물과 오류를 직면하기를 완강히 거부하며,

오직 자신의 안위와 정당성만을 수호하려는 강력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 왜곡된 동기가 지옥의 하강 인력과 주파수를 맞추는 찰나,

마음은 어느새 미움과 분노의 파도에 휩쓸려

상대를 정죄하고 자신을 옹호하는 생각의 소용돌이에 깊이 빠져든다.

 

인간은 유입이 시작되는 그 시점에는

그것이 지옥의 신호라는 지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게 한참이 흘러간 뒤에야 비로소

자책감과 함께 정신이 드는 것이 인간의 유한한 실상이다.

 

이 역동적이고 복잡한 상황을 인간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스베덴보리 사상과 영적 법칙에 의거 살펴보려 한다.

 

1단계의 대처는 이미 미움의 감정에 휩쓸려

거기 마음이 소용돌이치고 있을 때의 대처이다.

 

어떤 문제로 인해 상대방에게 짜증과 분노를 퍼부으며

자아를 옹호하려는 생각에 완벽히 동조되는 순간이 있다.

그때는 그것이 지옥의 유입이라는 경각심조차 갖지 못한 채,

지성적 지각이 완전히 잠들어 버린 영적 수면 상태이다.

 

이 상태에 있을 때 인간은 맹목적으로 휩쓸려가면서도

자신이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분노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는 지옥의 악령들이 쳐놓은 그물(악과 거짓의 결합)에

그의 온 마음이 붙잡힌 상태이다.

 

즉, 지옥이 보내는 나쁜 생각과 감정들을

마치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내 생각인 줄 알고

그대로 따라 행동하는 껍데기 상태에 불과하다.

 

이 단계에서는 정당한 대처법을 순간적으로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지각이 마비된 당장의 순간에는 인간이 독자적인 의지력으로

유입의 정체를 분별해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주님의 깨우침으로 유입을 지각하기도 전에

벌써 파괴적인 말과 언행을 바깥으로 분출해 버리는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일이 이미 벌어지고 난 뒤에 ‘그땐 지각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라며

소극적으로 자위하는 사후 처방은 영혼의 파멸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최상의 처방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미리 대처하는

영적 자동 제어 메커니즘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 맹목적 휩쓸림의 순간에

바깥 언행이 터져 나오지 않도록 차단하는 사전 처방의 실체는,

바로 평소 평온한 상태일 때 말씀의 진리를

'삶의 고정된 규범'으로 영혼의 토양에 강력하게 각인시켜 두는 일이다.

 

AC 1937항의 원리에 따르면, 평소에 양심과 진리의 원칙들이

겉 사람의 감각 속에 견고한 철칙으로 자리 잡고 있을 때,

인간은 비록 거센 유입의 폭풍 속에서 판단력을 잃고 영적 수면에 빠질지라도

내재된 질서의 관성에 의해 혀와 손발의 움직임은

본능적으로 억제될 수 있다.

 

머릿속으로는 분노의 영상이 소용돌이칠지언정,

평소에 묶어둔 '행동 통제 규범'이 자동 항법장치처럼 작동하여

외적 언행이 파멸로 튀어나가는 것을 선제적으로 꽉 붙잡아 주는 것이다.

이 선제적 방어벽이 작동한 이후에야,

비로소 지각의 빛이 들어오는 그다음 단계의 올바른 투쟁이 유효해진다.

 

2단계의 대처는

맹목적인 휩쓸림에 빠져 있던 자신을 뒤늦게 자각하며

자책감이 올라올 때의 대처이다.

 

‘내가 왜 또 이러고 있는가?’라며 번쩍 정신이 들고

추악한 감정에 오염된 자신을 보며 실망감과 경각심이

동시에 치밀어 오르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많은 신앙인이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치명적인 판단 착오를 범한다.

 

경각심이 일어나자마자 주님을 우러러보며

스스로 하듯 악을 거부하는 정당한 사용권을 발동하는 대신,

이미 일어난 감정적 동요 자체를

독자적인 힘으로 강제로 짓눌러 소멸시키려고

의지력을 쥐어짜 내는 무모한 전쟁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물론 주님이 부여해 주신 힘으로 악에 저항하는 것은 마땅한 의무이나,

내면에 이미 밀려든 감정 기류 자체를 자아의 힘으로

통제하고 없애버리려 드는 것은

힘의 소유권자인 주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다.

 

지옥의 유입 세력은 인간의 독립된 권한 밖이기에,

이 영역을 자신의 힘으로 조절하려 들면

영혼의 에너지만 고갈된 채 지칠 수밖에 없다.

 

반대로 평소의 사전 단속이 느슨하여

이미 파괴적인 말과 언행이 바깥으로 돌출되어 버린 뒤,

이번에는 ‘엎질러진 물이니 이미 끝났다’라며

절망 속에 방관으로 숨어버리는 것 역시 또 다른 질서의 왜곡이다.

 

이러한 절망과 방관 역시, 지옥의 유입으로 인한 흔들림 자체를

애초에 자신의 독자적인 힘으로 완벽히 막아냈어야 했다는

잘못된 전제와 영적 교만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따라서 그 순간 즉시 실행해야 할 정밀한 사후 대처는,

이미 터져 나온 외적 행동의 결과물은 주님 앞에

정직하게 시인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전히 내면을 흔드는 감정의 폭풍을

자신의 힘으로 즉각 제어하려는 그 조급한 통제욕을 내려놓는 것이다.

 

주님의 섭리(DP 278)는 악과의 싸움에 대해 명확한 역학 관계를 제시한다.

 

DP 278

 

‘악은 인간의 의지로부터 유래하며,

인간이 자신의 악을 스스로 저지르는 것처럼 보일 때

비로소 그 악은 제거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악이 자기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마치 자신의 힘으로 그 악과 싸우는 것처럼 주님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사실, 그 악을 제거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지만,

인간은 자신이 자유의지를 가진 것처럼 그 싸움에 참여해야 한다.

만약 인간이 자신에게서 악이 나오지 않는다고 믿거나,

주님 없이는 악과 싸울 수 없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악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악으로 빠져들게 된다.'

 

악을 실제적으로 제거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나,

인간은 그 악이 마치 자신의 의지에서 나온 것처럼 치열하게 저항해야 한다.

 

여기서 인간이 갖는 자유의지는 악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 들어오시도록 '거부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정신이 든 그 순간, 내면을 짓누르는 분노와 미움의 잔여물들을

자신의 본질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지옥으로부터 들이치는 거대한 '하강 압력(유입)'의 연장선일 뿐이다.

 

인간의 힘으로 이미 휘몰아치는 내면의 기류를 단숨에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의 대처는

감정을 억지로 짓누르는 무모한 전쟁이 아니라,

'객관적 직시'라는 분별의 자리에 머무는 일이다.

 

‘이 감정은 지옥의 유입이 짓밟고 지나간 흔적일 뿐,

나의 본질이 아니다.’라고 명확히 선을 긋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과 자신 사이에 칼로 자르듯 경계선을 긋고,

그 악이 밖에서 기인했음을 인지할 때,

자아는 비로소 통제 불가능한 폭풍 속에서 한 걸음 물러나

주님을 우러러볼 수 있는 여유를 얻는다.

 

유입의 실체를 객관화하는 이 차가운 분별이야말로,

주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공급하실 수 있도록

영혼의 문을 여는 지혜로운 처신이다.

 

자아는 유입과 자신을 철저히 분리하고,

주님이 위임해 주신 능력을 힘입어 즉시 마음의 바깥문을 다시 굳게 닫아걸어

새로운 단속의 자리로 복귀해야 마땅하다.

 

- 내면의 흔들림 속에서 오직 외적 언행만 통제하는 기술

 

앞선 단계에서 주님을 우러러보는 지각의 빛을 얻어

내면의 미움과 분노가 외부 지옥의 '유입'임을 명밀히 분별해 냈다면,

이제 그 유입의 잔여물이 여전히 마음의 화면을 뒤흔들고 있는 상황에서

자아가 어떻게 구체적인 거부권을 행사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3단계의 대처는 감정의 관성이 바깥 행동으로 튀어나가려 할 때의

물리적 단속에 관해서이다.

 

지각의 빛으로 정신을 차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내면에 가득 찬 분노와 미움의 관성은 손과 발, 그리고 혀를 움직여

상대방에게 거친 말을 내뱉거나 보복적인 행동을 취하라고

강력하게 충동질한다.

 

이때가 바로 주님이 우러러보는 자에게 공급해 주시는

자유의지의 힘(사용권)을 발동해야 하는 가장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다.

 

이때 인간은 상황을 오판함으로 잘못된 대처를 하기 쉽다.

자아는 흔히 내면의 미운 감정 자체를 좋은 감정으로 억지 전환하려 하거나,

왜 아직도 이런 더러운 감정이 남아있느냐고 스스로를 다그친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거부의 능력을 가지고

내부 화면에 이미 상영되는 감정의 싹 자체를 내 힘으로 잘라내어

소멸시키려는 사투는 화면에 대고 주먹질을 하는 것과 같아서

아무런 실효가 없다.

 

영적 법칙에 따른 구체적 대처는 이러하다.

 

이 단계에서 자아가 실행해야 할 유일한 대처는

감정 기류 자체와 맞싸우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얼른 돌려 오직 바깥 행동의 문고리를 걸어 잠그는 일이다.

 

인간이 주님께 위임받은 힘의 올바른 사용 대상은

유입에 대한 자신의 동조 여부와 바깥 행동의 억제이다.

 

내면에서 흔들림이 일어나는 유입 자체는 내가 막을 수 없지만,

그 흔들림을 받아들여 실제로 바깥 행동으로 옮길지 말지는

주님이 완벽하게 보존해 주고 계시는 자유의지(영적 평형 상태) 안에서

인간이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더러운 유입이 밀려오지만,

나는 이 감정을 즐기지 않고 내 손과 발, 혀를 단속하여

행동으로 옮기지 않겠다며 의지의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다.

 

즉, 통제 불가능한 감정적 동요와 무모한 사투를 벌이지 않고,

평소 사전 처방으로 세밀하게 각인해 둔 진리의 철칙에 의지하여

주님이 위임해 주신 외적 행실의 단속에만 전념하는 것이다.

 

인간이 유입되는 감정 자체를 대상으로 직접 싸워 쫓아버리겠다는

조급한 통제욕에 사로잡히면,

당장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극심한 스트레스와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왜 기도를 해도 이 악한 상태가 사라지지 않는가.’라며 낙심하는 순간,

인간은 영적 평형 상태를 잃고 자아의 낡은 관성에 종속된다.

 

즉, 흔들림 자체를 내 힘으로 완전히 제어하려다 에너지를 고갈당하면,

정작 내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바깥 행동을 단속하고 문을 걸어 잠그는

파수꾼의 임무를 포기하고 방관하게 된다.

 

인간은 주님께 힘을 위임받았으므로,

'문 걸어 잠그기(행동 단속)'를 할 때는 마치 내 힘인 양 단호하고

격렬하게 의지를 발동해야 한다. 

 

손발을 묶고 혀를 억제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이 주체가 되어 행하는 능동적인 통제이다.

 

TCR 313항과의 역학 관계를 설명하겠다.

 

인간이 악한 정욕을 의지 속에서 즐기지 않고,

그것이 바깥 행위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입술을 깨물고 혀를 단속하며

손발의 움직임을 묶어두는 동안에는

그 악이 아직 영혼에 고착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의지가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고,

단지 겉 사람의 감각 속에서

유입되는 정욕의 시험을 겪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을 빌려

‘내 내면이 아무리 피눈물 나게 끓어오를지라도,

 

내 입을 통해 상대방을 정죄하는 독설이 나가는 것은

결코 허락하지 않겠다.’라며

외적 언행을 단호히 단속하고 스스로 하듯 통제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에게 위임된 정당한 거부권의 실체이다.

 

다음으로 4단계의 대처는 끈질기게 밀려오는 유입의 잔상 속에서

조급함을 내려놓는 의탁에 관해서이다.

행동과 언행을 단속하여 문을 걸어 잠갔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화면에는 여전히 상대를 향한 억울함, 괘씸함, 짜증의 잔상들이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 끈질기게 맴돌며 자아를 괴롭힐 수 있다.

 

이때 자아는 유입의 지속성 앞에 다시금 지치고 조급해지기 쉽다.

 

‘내가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참았는데,

왜 내 마음은 여전히 이토록 평화롭지 못하고 괴로운가?

내 신앙이 부족해서 이 유입이 끝나지 않는구나.’라며

조급하게 결과의 영역을 자아의 힘으로 통제하려 하다가 에너지를 고갈당하고

결국 단속의 문고리를 놓아버린다.

 

이 단계에서의 대처는

유입의 종식과 내면의 평화를 내가 만들어내려 하지 말고,

그 결과의 영역을 전적으로 주님께 양도하는 것이다.

 

다만, 이 투쟁의 현장에서

인간이 명확히 선을 그어야 할 분별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몫(사용권)은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을 꺼내어,

오늘 나에게 찾아온 지옥의 유입을 거절하며 바깥 행동을 억제하는 실천이다.

 

반면 주님의 몫(소유권)은

그렇게 문을 걸어 잠그고 버티는 인간의 영혼 배후에서

그 흔들림의 원인인 지옥의 결박을 끊어내고

악을 송두리째 들어내어 정화하시는 권능이다.

 

결국 내가 책임져야 할 외적 행동의 단속은

주님이 주신 힘으로 마치 내 것인 양 단호하게 통제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내면으로 밀려드는 유입 자체의 기류를 내 힘으로 제어하려 들거나,

더 나아가 악이 완전히 전멸되는 최종적인 결과값까지

내 역량으로 통제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DP 119항의 역학 관계를 살펴보자.

 

'인간의 행위와 말은 겉 사람 안에 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내면적인 것을 다스리며,

겉 사람을 통해서만 내면적인 것을 정화한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악한 행위를 억제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내면의 뿌리 깊은 악을 제거하실 수 없다.'

 

유입의 강도와 지속 시간을 조절하고

영혼 깊은 곳에 박힌 악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은

인간의 역량 밖인 오직 주님의 신성한 권능(소유권) 영역이다.

 

이 경계선을 혼동하여 유입 자체와 결과를 장악하려 들 때

영혼은 교만과 조급함의 덫에 걸려 깊은 피로에 침전된다.

 

반면, 인간의 책임을 다해 문을 닫아걸었다면

비가 그치는 타이밍은 하늘에 맡겨야 하듯,

유입이 멈추는 시점은 주님께 맡겨야 마땅하다.

 

자아는 유입되는 흔들림의 처절한 피해 앞에서도

‘이 가혹한 흔들림은 지옥의 압력일 뿐이니 내가 독자적으로 소멸시킬 수 없다.

 

이 악을 없애는 결과는 주님의 전능에 속한 영역이니,

나는 오늘 오직 위임받은 힘으로 내 손과 발만 단속하겠다.’며

묵묵히 문을 걸어 잠그고 버틸 뿐이다.

주님께서 배후에서 치유해 주시기를 기다린다며 능동적으로 의탁할 때

비로소 자아의 무거운 짐이 벗겨진다.

 

- 스스로 하듯 버티는 단속과 배후에서 일어나는 정화 수술

 

지금까지 천국으로부터 지각의 빛이 비친 이후

인간의 구체적인 언행 단속과 결과값을

주님께 맡기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 과정을 통해 어떻게 주님과의 상호적 결합이 완성되며,

내면에 쌓여있던 과거의 유전악은

어떤 방식으로 변방으로 밀려나 정화되는지,

그 최종적인 영적 역학 구조를 이어 살펴보겠다.

 

앞선 단계들을 통해 가혹한 유입의 잔상 속에서도

바깥 언행의 문고리를 걸어 잠그고 버티는 데 성공했다면,

이제 이 치열한 전투의 종착지에서

영혼의 구조적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게 될까?

 

5단계의 대처는 '마치 스스로 하듯' 버팀으로써 이루어지는

주님과의 상호적 결합에 관해서이다.

이 단계는 인간이 비바람을 맞으며 행동의 빗장을 지르고 있는 상태가

어떻게 구원의 법적 통로를 개설하는지 보여주는 지점이다.

 

내면은 여전히 미움의 관성으로 요동치지만,

평소 사전 처방으로 다져둔 행동의 철칙을 작동시켜

겉 사람의 행실을 피나게 억제하며 단속하는 그 순간,

영혼 내부에서는 주님과의 거대한 연결이 성취된다.

 

이 경우 자아는 흔히 ‘내 힘으로 입술을 깨물고 참았으니

이 투쟁은 내 의지력의 승리다.’라며 교만해지거나,

반대로 ‘주님이 다 하신다는데

나는 왜 이토록 피눈물을 흘리며 버텨야 하는가.’라며

나태의 오류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이 사투의 본질은

인간과 주님의 힘이 결합하는 신인 협력의 최종 방정식이다.

이 틀의 영적 법칙에 따른 구체적 대처법은 이러하다.

 

인간은 주님이 완벽하게 유지해 주고 계시는 최소한의 평형 공간 안에서,

주님을 우러러보며 공급받는 능력을 꺼내어

'마치 자기 자신의 힘인 양(As of oneself)' 단호하게 의지를 발동하여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

 

DP 96항의 역학 관계를 보자.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결코 침해하지 않으신다.

자유의지는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근거이기에,

주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악을 거절할 때

비로소 그 마음속으로 들어오셔서 선을 심으신다.'

 

인간이 스스로 하듯 능동적으로 행동의 빗장을 지르지 않는다면

주님과의 상호적인 결합은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여

강제로 문을 닫아주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자아는 이 단계에서 ‘이 단속의 힘은 주님이 공급해 주신 것이나,

이를 꺼내어 입술을 묶고 손발을 통제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내 몫이다.’라며,

마치 내 힘인 것처럼 가장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외적 행실을 단속하는 사투에 온전히 몰입해야 한다.

 

마지막 최종 6단계의 대처는

주님의 전능으로 실행되는 배후의 정화 수술과 안식의 안착에 관해서이다.

 

인간이 주님을 우러러보며 자신의 한계를 시인하고,

오직 외적 언행을 단속하여 문을 잠그는 임무(사용권)를 완수했을 때,

마침내 주님의 신성한 권능(소유권)이 영혼의 심층 배후에서

본격적인 구조 재배치 작업을 시작하시는 최종 국면이다.

 

단속을 마친 후에도 자아는

내면에 쌓인 과거의 유전악과 유입의 흔적들이 완전히 소멸하여

즉각적인 성인의 상태가 되기를 조급하게 기대한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박힌 악의 뿌리는

지옥 공동체와 얽혀 있는 거대한 거미줄과 같아서,

인간이 독자적인 힘으로 이를 제거하는 것은 법적으로나 역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직 주님의 신성한 권능으로만 가능한 영역이다.

인간이 평소의 예방적 철칙과 현재의 거부의 자리를 완강히 지켜내어

지옥의 추가 유입이 의지의 승인을 얻지 못하도록 차단하면,

주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영계의 심층에서

그 지독한 지옥의 연결고리를 친히 끊어내신다.

 

AC 1937항의 역학 관계는 이러하다.

 

인간이 주님을 우러러보며

스스로 하듯 투쟁의 의지를 발동하여 겉 사람을 복종시킬 때,

주님께서는 비로소 내면에서 역사하시어 정화를 성취하신다.

 

일생에 걸쳐 쌓아온 악의 뿌리들을 단숨에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중심부에서 가장 먼 변방(주변부)으로 밀어내어

더 이상 자아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격리하시는 것이다.

 

이 수술이 완수될 때, 과거의 허물로 가득했던 영혼의 유전적 토양 위에는

천국적 고유속성이 친히 안착되며, 영혼은 비로소 가혹한 피로의 궤도를

벗어나 진정한 평강과 내적 안식의 질서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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