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죄 사함과 믿음, 구원에 대하여
성경에는 영혼 구원을 위한 중요한 가르침들이 여러 형태로 표현되어 있어 이것이 때로는 우리에게 혼란을 주기도 합니다. 오늘 문제가 되는 죄 사함과 믿음, 구원에 관한 내용도 그와 같은 부류에 속하겠지요. 신구약을 총 망라하여 죄 사함과 믿음, 구원에 관련된 많은 가르침들이 있지만 이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참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영혼 구원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생각들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는 그만큼 이 주제를 풀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에 대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혼 구원에 관한 한 지금 우리의 판단은 이미 대중화된 신학과 그 교리적인 것에만 젖어 있어 이들 외의 다른 영역을 탐색하는 일은 전연 꿈도 꾸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동안 우리 주변을 맴도는 유명한 신학자들의 생각들! 그리고 그들이 증거로 삼는 바울 서신들! 이들 안에서 서로 논란을 벌이던 구원의 문제들..
저는 그들로부터 멀리 시각을 옮겨서 구원의 문제를 바라보고 싶습니다. 평소 오가던 우리들의 생각들로부터 좀 멀리 떨어진 마음 상태에서 이 문제를 다룰 때 그동안 보이지 않던 부분이 혹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바라보고자 하는 사물에 너무 얼굴을 가까이 대면 오히려 잘 안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이를 위해 먼저 우리가 이미 배워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덮은 상태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상고하며 생각을 다시 더듬어 보는 시간이면 족하겠습니다.
아래는 주님의 평범한 가르침 속에서 죄 사함과 믿음, 구원을 살펴본 것입니다. 신학적인 것도 교리적인 것도 아닌 부분에서 주님의 순수한 가르침을 느껴봅니다.
눅 7:36-50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먼저 죄 사함이라는 표현을 어느 한 순간의 획기적 영혼 구원과 관련지으려는 우리의 생각들로부터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저 낱말을 신학적인 용어로 바라보지도 또 특별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저 죄가 용서되었다는 평범한 의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내용으로 보면 많이 사함을(용서를, 탕감을)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그로 인해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라는 선언을 주님으로부터 받고 반대로 적게 사함을(용서를, 탕감을)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하고 그로 인해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라는 선언을 받지 못하는 것뿐이지요.
여기서 유의해볼 것은 죄를 용서받거나 사함 받는다는 표현입니다. 지은 죄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되거나 사함 받는다는 것 또는 그러한 선언을 듣는다는 것은 사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진행되는 일인만큼 우리의 의식에는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마치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영혼의 죄가 용서되거나 사함 받는 일 역시 그렇다는 것이지요.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이라면 적어도 자신이 지니고 있던 죄가 씻겨진 정도만큼 많게 또는 적게 마음이 깨끗해(정결해)졌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본문에서는 많음과 적음을 각각 much 와 little 로 표기하였더군요)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죄 용서! 죄 사함! 죄가 씻겨짐! 할례! 세례! 정결! 영혼의 정화! 눈보다 더욱 희어지게! 이런 표현들에서 우리는 무엇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지요? 이것이 오늘 문제의 관건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심이 머무는 곳에 우리 마음의 본심도 있기 때문입니다.
정죄 받아 마땅한 죄, 우리의 저 극악한 죄가 주님의 사랑과 자비로 용서를 받았을 때 과연 우리의 마음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주님의 피 흘리심으로 인해 죄를 사함 받고 이제 구원에 이르렀다고 입술로는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소리 높여 찬송하며 감격에 겨운 눈물을 흘려야 할까요? 이런 믿음이 아주 대단한 것으로 보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사함 받은 자가 가장 마음에 두어야 할 일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려는 마음의 각오를 새롭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죄가 용서받았을 때 우리가 어찌해야 하는지를 주님은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요 8:10-11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죄 사함을 받은 후에 다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일진대 그 죄 사함을 오직 자기 영혼의 구원을 논리로써 확증하는 것으로만 바라보려는 우리의 시각이 문제입니다. 그런 자세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이 죄를 사함 받은 상태란 실제적으로 우리의 내면이 정화되어진 상태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악에 물들어 있던 우리의 마음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선을 기뻐하는 상태로 회복되어진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우글거리던 악한 애정과 생각들이 이를 정화시켜 주시는 주님에 의해 선한 애정과 생각으로 돌아오는 상태! 그래서 이제는 내면에 사랑이 많은 상태! 이것이 바로 주님께 죄 사함을 받고 그 선언을 들은 여인의 영적 상태인 것이지요.
결국 죄 사함의 가치는 영혼이 이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악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죄를 사함 받았다면 적어도 이전과는 달리 죄에 대한 유혹을 견뎌낼 힘이 생성되어 그만큼 내적 상태가 정결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따라 악을 버리고 진정한 사랑의 삶을 사는 상태가 바로 죄 사함을 받은 상태인 것이지요. 다만 이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기에 주님으로부터 도움을 입어야 하는 바 이에 필요한 것이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인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에 대한 우리의 시각도 죄 사함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른 글에서도 말했지만 현 기독교의 구원관은 죄를 향하여 마음이 무능력하게 끌려가는 것으로부터의 구원은 등한시한 채 죄의 형벌로부터의 사면에 대한 구원만을 부르짖고 있어 이러한 구원관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죄 그 자체는 하나님에 반하는 악한 것이기에 죄를 범하는 유혹으로부터 영혼이 벗어날 힘이 있는 이런 구원은 참 구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악하고 연약하기에 이러한 인간에게 죄는 어쩔 수 없이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명목 하에 오직 유일한 방법은 그 죄로 인해 받게 될 두려운 결과들을 피하는 것에서 구원의 본질을 찾는 것은 잘못이라 봅니다. 마음 속에 죄를 범하고 싶은 욕망은 그대로인 채 그 형벌만을 면하게 하여주는 것이 구원이라면 그것이 어찌 온전한 죄로부터의 구원이겠는지요!
이렇게 구원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의중과는 너무 동떨어진 길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가 전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구원에 대하여 잘못된 관념이 들어오게 된 원인은 소위 신학과 교리 체계가 잘못 정립된 까닭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이 잘못 읽혀진 까닭입니다. 대중적으로 유명도가 있는 구절 또는 아주 중요하게 여겨지는 신학적 용어들이 담겨있는 구절 등 그런 특별한 구절들만을 판단의 근거로 삼으며 구원을 논리하지 말고 일반적인 흐름 안에서 성경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신학이 신앙인의 삶과 분리되지 않았다면 신학은 영혼을 구원하는데 크게 쓸모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신학은 삶에서 분리되었고 그 결과 잘못된 신학에서 나온 구원관은 신앙인의 경건한 삶을 파괴하는데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참된 신앙의 길이란 육신이 다하는 그 날까지 믿음과 사랑, 인내와 겸손한 삶 속에서 최선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부르심을 입어 주님께 갈 때조차 자기 삶의 모든 결과는 모두 주님께 맡길 뿐입니다. 이는 의로우신 분께서 매사 공정하게 판단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머지 않아 주님 앞에 인생을 통 털어 셈해야 할 날이 필연 올 터인데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아직 기복이 심하여 항상 한결같지 않고 변화가 많습니다. 이런 와중에 우리의 삶을 교리 속에서 딱 맞아떨어지는 공식 등으로 미리 셈하는 것은 연습 게임에서는 가능하지만 실제에서는 득보다는 실이 더 많으리라 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그 일을 담당하는 것은 신학인데 인간으로부터 나온 그 신학이라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치기보다는 온갖 지혜를 짜내 영혼을 얼른 구원시키는 것에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위에서처럼 죄를 짓던 자가 죄 사함을 주님께 받는 장면을 대할 경우 신학은 그 내용을 읽고 있는 이로 하여금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그의 생각을 인도해 가야 함에도 정작 죄에 무능력하게 끌려가는 마음은 조금도 해결하지 못한 채 구원을 머릿속으로 거래하도록 유도만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신학이 이렇게 신앙을 제쳐두고 딴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이런 신학을 물려받은 우리의 생각은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사랑은 없는데 교리로 구원받았다고 한들 그것이 어찌 마음을 편하게 하겠습니까?
영혼의 구원은 인생 전반에 걸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지요. 이는 어느 짧은 시간 안에 맛본 사건이나 경험, 깨달음 등으로 인해 구원이 한 순간에 이루어져 버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전쟁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구원을 너무 간단한 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애굽 탈출과 이어지는 광야 생활을 벗어나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 터인데 말이지요.
사람은 오랜 풍상을 겪으며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 후에야 비로소 질 좋은 신앙으로 가꾸어지는 법입니다. 주님께 반하는 것들이 자기 속에 있음을 발견할 때는 그것들을 못 견뎌 하여 반드시 싸워 물리칩니다. 그러면서도 절대 자만하지 않습니다. 오늘 자신에게서 강한 믿음을 보았다고 할지라도 이로 인해 마음이 부요해지지 않는 것은 내일에 그 믿음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 완성의 날을 향하여 가는 동안 끊임없이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구원을 조금씩 이루어 갈 뿐입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구원관을 정립함에 있어서 우리는 사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우위에 두고 그 테두리 안에서 바울 서신을 해석하는 것이 마땅한 자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그릇된 구원관이 우리 생각을 지배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바울 서신을 우위에 둔 상태에서 주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이 다시 해석되어지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는 말씀이 거꾸로 읽혀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고 구약도 신약의 사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중심 축으로 하여 그것으로부터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중 어렵거나 잘못 이해되고 있던 부분들을 주님은 신약에서 다시 해석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믿음 탈출하기 http://cafe.daum.net/talchulhagi
성경에는 영혼 구원을 위한 중요한 가르침들이 여러 형태로 표현되어 있어 이것이 때로는 우리에게 혼란을 주기도 합니다. 오늘 문제가 되는 죄 사함과 믿음, 구원에 관한 내용도 그와 같은 부류에 속하겠지요. 신구약을 총 망라하여 죄 사함과 믿음, 구원에 관련된 많은 가르침들이 있지만 이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참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영혼 구원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생각들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는 그만큼 이 주제를 풀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에 대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혼 구원에 관한 한 지금 우리의 판단은 이미 대중화된 신학과 그 교리적인 것에만 젖어 있어 이들 외의 다른 영역을 탐색하는 일은 전연 꿈도 꾸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동안 우리 주변을 맴도는 유명한 신학자들의 생각들! 그리고 그들이 증거로 삼는 바울 서신들! 이들 안에서 서로 논란을 벌이던 구원의 문제들..
저는 그들로부터 멀리 시각을 옮겨서 구원의 문제를 바라보고 싶습니다. 평소 오가던 우리들의 생각들로부터 좀 멀리 떨어진 마음 상태에서 이 문제를 다룰 때 그동안 보이지 않던 부분이 혹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바라보고자 하는 사물에 너무 얼굴을 가까이 대면 오히려 잘 안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이를 위해 먼저 우리가 이미 배워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덮은 상태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상고하며 생각을 다시 더듬어 보는 시간이면 족하겠습니다.
아래는 주님의 평범한 가르침 속에서 죄 사함과 믿음, 구원을 살펴본 것입니다. 신학적인 것도 교리적인 것도 아닌 부분에서 주님의 순수한 가르침을 느껴봅니다.
눅 7:36-50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먼저 죄 사함이라는 표현을 어느 한 순간의 획기적 영혼 구원과 관련지으려는 우리의 생각들로부터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저 낱말을 신학적인 용어로 바라보지도 또 특별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저 죄가 용서되었다는 평범한 의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내용으로 보면 많이 사함을(용서를, 탕감을)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그로 인해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라는 선언을 주님으로부터 받고 반대로 적게 사함을(용서를, 탕감을)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하고 그로 인해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라는 선언을 받지 못하는 것뿐이지요.
여기서 유의해볼 것은 죄를 용서받거나 사함 받는다는 표현입니다. 지은 죄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되거나 사함 받는다는 것 또는 그러한 선언을 듣는다는 것은 사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진행되는 일인만큼 우리의 의식에는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마치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영혼의 죄가 용서되거나 사함 받는 일 역시 그렇다는 것이지요.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이라면 적어도 자신이 지니고 있던 죄가 씻겨진 정도만큼 많게 또는 적게 마음이 깨끗해(정결해)졌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본문에서는 많음과 적음을 각각 much 와 little 로 표기하였더군요)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죄 용서! 죄 사함! 죄가 씻겨짐! 할례! 세례! 정결! 영혼의 정화! 눈보다 더욱 희어지게! 이런 표현들에서 우리는 무엇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지요? 이것이 오늘 문제의 관건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심이 머무는 곳에 우리 마음의 본심도 있기 때문입니다.
정죄 받아 마땅한 죄, 우리의 저 극악한 죄가 주님의 사랑과 자비로 용서를 받았을 때 과연 우리의 마음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주님의 피 흘리심으로 인해 죄를 사함 받고 이제 구원에 이르렀다고 입술로는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소리 높여 찬송하며 감격에 겨운 눈물을 흘려야 할까요? 이런 믿음이 아주 대단한 것으로 보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사함 받은 자가 가장 마음에 두어야 할 일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려는 마음의 각오를 새롭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죄가 용서받았을 때 우리가 어찌해야 하는지를 주님은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요 8:10-11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죄 사함을 받은 후에 다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일진대 그 죄 사함을 오직 자기 영혼의 구원을 논리로써 확증하는 것으로만 바라보려는 우리의 시각이 문제입니다. 그런 자세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이 죄를 사함 받은 상태란 실제적으로 우리의 내면이 정화되어진 상태 즉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는 악에 물들어 있던 우리의 마음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선을 기뻐하는 상태로 회복되어진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우글거리던 악한 애정과 생각들이 이를 정화시켜 주시는 주님에 의해 선한 애정과 생각으로 돌아오는 상태! 그래서 이제는 내면에 사랑이 많은 상태! 이것이 바로 주님께 죄 사함을 받고 그 선언을 들은 여인의 영적 상태인 것이지요.
결국 죄 사함의 가치는 영혼이 이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악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죄를 사함 받았다면 적어도 이전과는 달리 죄에 대한 유혹을 견뎌낼 힘이 생성되어 그만큼 내적 상태가 정결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따라 악을 버리고 진정한 사랑의 삶을 사는 상태가 바로 죄 사함을 받은 상태인 것이지요. 다만 이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기에 주님으로부터 도움을 입어야 하는 바 이에 필요한 것이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인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에 대한 우리의 시각도 죄 사함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른 글에서도 말했지만 현 기독교의 구원관은 죄를 향하여 마음이 무능력하게 끌려가는 것으로부터의 구원은 등한시한 채 죄의 형벌로부터의 사면에 대한 구원만을 부르짖고 있어 이러한 구원관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죄 그 자체는 하나님에 반하는 악한 것이기에 죄를 범하는 유혹으로부터 영혼이 벗어날 힘이 있는 이런 구원은 참 구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악하고 연약하기에 이러한 인간에게 죄는 어쩔 수 없이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명목 하에 오직 유일한 방법은 그 죄로 인해 받게 될 두려운 결과들을 피하는 것에서 구원의 본질을 찾는 것은 잘못이라 봅니다. 마음 속에 죄를 범하고 싶은 욕망은 그대로인 채 그 형벌만을 면하게 하여주는 것이 구원이라면 그것이 어찌 온전한 죄로부터의 구원이겠는지요!
이렇게 구원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의중과는 너무 동떨어진 길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가 전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구원에 대하여 잘못된 관념이 들어오게 된 원인은 소위 신학과 교리 체계가 잘못 정립된 까닭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이 잘못 읽혀진 까닭입니다. 대중적으로 유명도가 있는 구절 또는 아주 중요하게 여겨지는 신학적 용어들이 담겨있는 구절 등 그런 특별한 구절들만을 판단의 근거로 삼으며 구원을 논리하지 말고 일반적인 흐름 안에서 성경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신학이 신앙인의 삶과 분리되지 않았다면 신학은 영혼을 구원하는데 크게 쓸모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신학은 삶에서 분리되었고 그 결과 잘못된 신학에서 나온 구원관은 신앙인의 경건한 삶을 파괴하는데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참된 신앙의 길이란 육신이 다하는 그 날까지 믿음과 사랑, 인내와 겸손한 삶 속에서 최선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부르심을 입어 주님께 갈 때조차 자기 삶의 모든 결과는 모두 주님께 맡길 뿐입니다. 이는 의로우신 분께서 매사 공정하게 판단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머지 않아 주님 앞에 인생을 통 털어 셈해야 할 날이 필연 올 터인데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아직 기복이 심하여 항상 한결같지 않고 변화가 많습니다. 이런 와중에 우리의 삶을 교리 속에서 딱 맞아떨어지는 공식 등으로 미리 셈하는 것은 연습 게임에서는 가능하지만 실제에서는 득보다는 실이 더 많으리라 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그 일을 담당하는 것은 신학인데 인간으로부터 나온 그 신학이라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치기보다는 온갖 지혜를 짜내 영혼을 얼른 구원시키는 것에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위에서처럼 죄를 짓던 자가 죄 사함을 주님께 받는 장면을 대할 경우 신학은 그 내용을 읽고 있는 이로 하여금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그의 생각을 인도해 가야 함에도 정작 죄에 무능력하게 끌려가는 마음은 조금도 해결하지 못한 채 구원을 머릿속으로 거래하도록 유도만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신학이 이렇게 신앙을 제쳐두고 딴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이런 신학을 물려받은 우리의 생각은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사랑은 없는데 교리로 구원받았다고 한들 그것이 어찌 마음을 편하게 하겠습니까?
영혼의 구원은 인생 전반에 걸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지요. 이는 어느 짧은 시간 안에 맛본 사건이나 경험, 깨달음 등으로 인해 구원이 한 순간에 이루어져 버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전쟁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구원을 너무 간단한 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애굽 탈출과 이어지는 광야 생활을 벗어나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 터인데 말이지요.
사람은 오랜 풍상을 겪으며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 후에야 비로소 질 좋은 신앙으로 가꾸어지는 법입니다. 주님께 반하는 것들이 자기 속에 있음을 발견할 때는 그것들을 못 견뎌 하여 반드시 싸워 물리칩니다. 그러면서도 절대 자만하지 않습니다. 오늘 자신에게서 강한 믿음을 보았다고 할지라도 이로 인해 마음이 부요해지지 않는 것은 내일에 그 믿음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 완성의 날을 향하여 가는 동안 끊임없이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구원을 조금씩 이루어 갈 뿐입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구원관을 정립함에 있어서 우리는 사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우위에 두고 그 테두리 안에서 바울 서신을 해석하는 것이 마땅한 자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그릇된 구원관이 우리 생각을 지배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바울 서신을 우위에 둔 상태에서 주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이 다시 해석되어지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는 말씀이 거꾸로 읽혀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고 구약도 신약의 사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중심 축으로 하여 그것으로부터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중 어렵거나 잘못 이해되고 있던 부분들을 주님은 신약에서 다시 해석해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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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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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소망 작성시간 06.06.21 구원은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완전한 구원은 예수님의 재림 때 영원한 천국이 이루어 지는 때입니다. 죄 사함은 우리가 장성한 신앙인이 되어서 선과 악을 분별하여 참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 편에 섰을 때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서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말씀으로 거듭난 것을 말하는 것이며 새 언약의 약속의 내용을 생각에 두고 마음에 기록한 성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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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결한 신부 작성시간 08.06.26 신학의 교리들을 성경과 동등한 위치에서 취급하며 믿어버리는 신조가 팽팽하게 퍼져 있습니다..그래서 교리 속에 담긴 성경의 특별한 구절들을 내세워 죄의 처리는 언급하지 않고 '영원구원'만을 외치는 자들이 많이 있는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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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엄기욱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8.06.28 계시록의 큰 붉은 용의 상징이 '믿음만의 교리'임을 깨닫고 돌아섰으면 좋겠습니다.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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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하나님의사람 작성시간 23.01.19 이글에 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