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깨달음과 몽학선생(율법의 역할)

작성자엄기욱|작성시간06.09.01|조회수405 목록 댓글 1

* 죄를 깨달음과 몽학선생(율법의 역할)

믿음과 율법의 대립 문제를 논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율법의 역할,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곧잘 대두됩니다. 이에 대해 한편의 생각을 들어보면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또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주신 것일 뿐 구원을 위해 그것을 지키라고 주신 것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이런 주장을 펴는 이유로는 오늘날 구원의 조건은 계명(으로써의 율법)을 지킴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믿음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즉 계명(으로써의 율법)의 역할은 죄를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수단이 될 뿐 우리가 그 계명(으로써의 율법)을 반드시 지키지 않았다고 하여 구원에서 탈락하는 일은 결코 없음을 증거하려는 것이 이 주장의 궁극 목표입니다.

<율법은 구원을 위해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라는 주장을 증거하는 구절로 인용되고 있는 구절은 롬 3:10-20 입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리고 <율법은 구원을 위해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만을 할 뿐이다> 라는 주장에 대한 증거로 인용되는 구절은 갈 3:1-25 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율법의 역할에 대해 바울이 이런 식의 표현을 하게된 경위를 살피기 위해 먼저 그가 서신서에서 믿음으로 율법을 깎아내리고자 하는 글을 쓸 당시 그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이 순서일 듯 합니다. 바울이 오랫동안 살핀 바 유대인들의 신앙 상태의 문제점은 단연 외식과 위선의 율법주의에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러한 율법주의는 그들을 구원할 선한 율법을 변질시키고 급기야 그 율법 조항에서 파생된 장로들의 유전을 만들어내는 악으로까지 치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그러한 규례로써의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것을 바울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심중에는 항시 규례로써의 율법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방해하는 눈에 돋친 가시와도 같았기에 틈만나면 믿음으로 그것을 꺾고자 하는 마음을 그의 서신서 이곳저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경계한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는 이러한데 자신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맡은 민족이며 그런 선민의식에서 오는 자부심과 우월감 등이 그들의 신앙을 지탱하는 힘의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또 그 거룩한 말씀을 맡은 민족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율법을 당연히 진실한 마음으로 지켜야함에도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잘 지키는양 허세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지켜야할 하나님의 계명은 멀리하고 규례로써의 율법으로부터 만들어낸 인간의 유전을 내세우다가 주님께 책망을 받는 일이 <막7:1~2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보고는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느냐며 예수님께 따집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고 하시며 먼저 하나님의 계명을 그들이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여기 버려진 하나님의 계명, 즉 옛 계명의 핵심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또 선지자와 온 율법의 대 강령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선지자와 온 율법이 그토록 중요하게 강조하여 가르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그 십계명을 저버렸던 것입니다. 일이 이렇게 틀어져버렸던 이유는 율법이 가리키는 진정한 의미인 십계명을 그들이 버리고 그 대신 규례로써의 율법을 각 항목마다 그 문자만을 지키려고 애써왔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던 규례도 그 속을 따지고 보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가르침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닌데(좀더 보충적인 설명은 이 글 맨 끝부분 참조) 진실함으로 계명을 지키려는 마음이 없던 그들은 이런 가르침을 버리고 율법의 껍데기 각 조항만을 애지중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그러한 율법 지키기는 허영과 욕심에서 비롯된 자기의(自己義)의 산물이었습니다.

거룩한 십계명 안에 내재한 진실한 가르침들에는 마음이 별로 기울지 않는 반면 그 문자만은 분명하게 지키려고 노력했던 그들은 이번에는 율법의 각 항목마다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명목으로 풀이와 함께 지킬 여러 규정들을 새롭게 첨부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 ‘하라’와 ‘하지말라’로 되어 있는 600 가지가 넘는 장로들의 유전입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이 이 모두를 지킨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합니다. 그것들을 잘 지키기는커녕 그야말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겠지요.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그것을 지킴에 있어서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니 이런 겉치레의 율법주의로 말미암아 외식과 위선적인 신앙이 그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를 지적하여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킨다고 책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율법(규례)을 주실 때 겉으로는 아주 강압적인 방법 곧 지키면 복이요 어기면 저주라는 식의 상벌 관계의 율법지키기와 반드시 율법(규례)의 모든 조항을 어느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지킬 것을 강요하셨던 것이 사실입니다.(신 27: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그러나 율법에 대한 이러한 강요는 하나님께서 그 당시 그들의 영적 상태를 감안하여 허용한 마지못한 것이었습니다. 강제적 분위기 속에서 그러한 외적인 법이나마 이스라엘에게 주심으로 그들 가운데 참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자하는 자들 즉 소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그러한 율법을 주신 목적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때로부터 홍해를 건너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율법을 받을 때까지 당시 그들의 신앙 상태를 간단히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온 율법은 그들의 민족성과 생활 환경, 그리고 그들의 영적 상태를 감안하여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율법이 주어질 때 그들의 영적 상태는 매우 열악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막 홍해를 건너온 관계로 아직도 세상적인 그리움에 젖어있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전 하나님으로부터 열 가지 재앙이 애굽에 내리던 것을 직접 목도하였고, 출애굽 후에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받았으며, 또 눈앞에서 홍해가 갈라지는 등 참으로 놀라운 기적들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세상적이고 감각적인 삶에 젖은 영적 상태는 별로 나아지지 않고 불순종과 불평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홍해 이후 그들의 불신앙적 행보를 보면 마라에서 쓴물 때문에 모세를 원망하였고, 신광야에 이르러서도 고기와 떡을 그리워하며 불평하였으며, 양식을 아침까지 남겨두었다가 모세의 진노를 사고 또 제 7일에 양식을 거두러 나감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도 합니다. 그후 르비딤에서 마실물로 인해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마침내 시내광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거기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두려움과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그들에게 나타나시는데 그분의 엄위하심 앞에 백성들은 두려워 떠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크고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을 우리는 어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부분 성경을 인용해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함이니라...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출 19:9-22)

이러한 장면 속에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내면의 사정 곧 그들의 애정과 이해성이 참빛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얼마나 흐려진 수준에 있었는지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본 모습을 빽빽한 구름 가운데 감추고 그처럼 무섭고 두려운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타나셔야만 했던 이유는 <여호와께서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임하심은 당신께서 모세에게 전하시는 말씀을 백성들이 듣고 모세를 영원히 믿게하기 위함이라>고 하시는 첫 구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말씀 속에는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빽빽한 구름 가운데 두렵고 무서운 모습이 아닌 밝은 빛 가운데 자비하신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면 그들의 완악함 때문에 모세는 오히려 그들을 인도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악한 마음이 모세를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순수한 선과 진리를 대하면 그것들을 애지중지 하기 보다는 오히려 짓밟고 무시하여 모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정이 있기 때문에 세상적이고 감각적인 빛 그 이상을 볼 수 없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에 맞추기 위해 십계명 이외의 모든 율법 조항은 순수한 진리의 빛 그대로의 모습이 가려진 채 계시될 수밖에 없었고 또 지키면 복이요 어기면 사망이라는 상벌관계로 주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또 하나님 역시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고 두려움과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나타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야 비로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모세를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과 같은 영적 상태에서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신앙 생활을 하는 우리들과는 달리 자유한 생명과 기쁨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순종은 행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스스로를 주체할 능력이 없는 그런 상황에서는, 언제나 보편적인 방법은 아닐지라도, 때로 무섭고 호되면서도 강제적인 수단이 필요한 바 이를 위해 주어진 것이 바로 지키면 축복이요 지키지 못하면 저주라는 선포 아래 그 모두를 하나도 빼뜨리지 않고 강압적으로 지키도록 주어진 유대인들의 율법인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예를 든다면 성인이 되기 전 아이들이 잘못을 범했을 경우에는 강제로 매를 들어 그들을 가르치게 되는데 그것이 부모된 자의 본심은 아닐지라도 그 당시에는 최선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리판단이 미숙할 때는 부모의 참사랑으로 권하는 말을 오히려 무시하여 더욱 좋지못한 길로 치닫기도 하는 까닭에 하는 수 없이 그 수준에 맞게 체벌의 두려움과 그에 적합한 경고로 더 이상 그들이 잘못된 길을 가지 못하도록 막아줄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무서움과 두려움의 강압적 권위로 그들에게 나타나실 때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 당시 열악한 이스라엘의 영적 수준 때문에 하나님께서 비록 참빛은 가려져 있을지라도 그나마 그런식의 강제적 인도하심에 의하지 않고서는 그들을 이끌어가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그들에게 주어진 규례로써의 율법은 앞으로 참된 것이 나타나 그들의 영혼을 온전히 구원해내기 까지 잠시동안만 그들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임시방편이었으나 한편으로 그것은 최선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그들에게 주어진 규례로써의 율법의 특성에 대해 훗날 바울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히 9:9) 그 율법들은 다만 죄의 지배를 받는 까닭에 이해성이 어두워져 하늘의 참된 것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일 능력이 없는 자들을 위해 참빛이 오기까지 잠시동안 주어진 법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것이 없는 그러한 율법 속에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진정한 힘 또한 가려져 있을 수밖에 없는데 엄격한 율법 하에 드려지는 유대의 제사제도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히 9:9)

영적인 것에서 물러나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수준의 삶을 사는 자들에게는 하늘에 속한 지고한 것들이 순수 그대로 드러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물론 그것이 그들의 육체화된 기질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배척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의 영적 상태를 고려하여 속에 있는 참된 것을 가린 상태에서 그 겉을 그들의 열악한 성품에 걸맞는 외적인 빛으로 옷입힌 채 마지못해 허용되어진 법이 바로 주님 오시기까지 유대인들에게만 한정적으로 적용되고 폐기되어야할, 십계명 이외의 규례로서의 율법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진리의 그림자만 밝을 뿐 정작 참 진리는 그 속 깊은 곳에 가려져 희미한 빛을 비추이고 있었습니다. 모세로부터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규례로써의 율법들을 보면 참 진리와는 거리가 먼 내용들이 그 당시 유대의 열등한 영적 상황에 맞추어 주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주님은 오셔서 그들이 가졌던 율법을 다시 풀어주심으로 그동안의 열악한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에 맞추어 마지못해 허용된 옛빛을 거두고 새로이 참빛을 비춰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라면 그 어렴풋한 빛이나마 발견하고 그 빛을 따라 구원에 이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한 상태의 이스라엘을 인도해내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순수한 진리의 빛 그대로를 그들에게 드러내 가르치시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해성에 알맞은 수준으로 감하여진 빛으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가르침 속에 비추이는 빛은 우리가 지금 신약에서 접하고 있는 참빛에 비해 월등히 어두운 빛입니다. 만일 그들에게 참빛이 비추인다면 그들은 그 빛을 오히려 거부하고 모독하여 영혼은 더욱 처참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자들을 빗대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막 4: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마 13: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주님의 이 모든 말씀이 외관상으로는 그들을 경멸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그들의 영혼을 신성모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자비의 마음으로 이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속에 지독한 악을 치우지 못한 상태에서 순수한 진리를 맞아들이게 되면 자칫 역효과를 내어 영혼이 크나큰 해를 입게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처럼 우상을 숭배하는 그러한 저차원의 신앙 상태에서는 그들에게 맞추어진 빛이 주어져야 했기에 참빛은 그 속에 숨겨진채 그림자와 같이 희미한 빛만 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진리는 그들을 인도하는데 아주 적절한 것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은 각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빛으로 주어지기 마련이고 이는 오늘날 우리들도 성경을 읽을 때 각기 다른 빛으로 진리를 읽게 되는 이치와 같은데 이러한 이치는 말씀을 받는 당사자들의 영적 상태를 고려한 주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그 당시 그 사람에게는 그와 같은 빛이 그의 구원을 위한 최상의 빛인 것입니다.

과거 그들은 대대로 누적되어 굳어진 죄성에 그들의 이해성과 의지가 깊이 물들어 있었으나 지금의 우리는 주께서 이루어주신 지상 사역의 덕분으로 이해성으로는 진리의 참빛을 적나라하게 수용할 수 있는 여력이 있고 또 의지로는 원하기만 하면 사랑의 선을 추구할 수 있는 힘이 끊임없이 공급되는 가운데 놓여있습니다. 바야흐로 주님께서 죄성으로 더럽혀져 있던 우리의 내면을 정결케 씻어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신 까닭이지요.

따라서 옛날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축복과 저주의 율법을 받고 그것을 따라가던 이스라엘의 처지와 오늘날 주님의 은혜 아래 자유한 생명에서 나온 기쁨으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침 받는 우리의 처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옛날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려던 태도와 오늘날 우리가 계명을 지키려는 태도를 같은 선상에 놓고 획일적인 적용을 할 수 없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 서신을 잘못 읽으면 정작 율법을 대하던 각 사람들의 자세는 살피지 않은 채 자칫 율법 자체를 믿음으로 폐해버리는 성급함을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바울은,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믿음만을 유일한 수단으로 여기고 계명으로서의 율법을 지키는 일은 인간의 공로주의에 의하여 구원을 획득하려는 것 정도로 여겼을까요? 구원에 있어서 계명(율법)을 지키는 일을 믿음과 동등하게 여기는 것은 오히려 믿음만의 독보적인 위치를 훼손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계명(율법)의 위치를 믿음과 동등한 수준에서 떨어뜨리려 하였을까요?

하지만 이러한 잘못된 생각들은 계명을 지키는 일이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아가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없고 또 주님 안에 있을 수 없어 결국은 밖에 버려진다는 주님의 경고를 잊게 만듭니다. 믿음이 새로이 왔다고 하여 계명으로서의 율법이 끝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과거 아브라함 시대에도 있었기 때문에 전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거 그 믿음은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고 자금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새로운 믿음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라도 계명으로서의 율법을 지키는 일은 변하지 않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계명만큼은 그분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구원을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영원한 법인 것입니다.

여기에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믿음이 강조되는 것은 계명으로서의 율법을 허물려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이스라엘만을 위한 특별한 규례로서의 옛 율법과 거기 함께 배여 있는 율법주의적인 사고방식들 곧 계명을 역용하던 그들의 불신앙적인 태도를 바로잡아 이제는 순수한 마음, 자발적인 마음으로 계명을 진실하게 지키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구원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옛 율법과 오늘날의 계명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가 얼마나 다른지 그 차이점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옛 율법으로는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어찌하든지 율법의 각 조항 그 모두를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는 강압적인 법 아래 사람들을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의 열악한 영적 상태를 고려하여 겉으로만 그러하였을 뿐 속 사정은 전연 달랐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율법을 주심으로 의도하신 바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간파한 바울은 옛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참 의중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10-20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갈 3:19-25

옛 율법을 주신 참된 이유를 바울은 이 구절들에서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 하나는 죄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옛 율법을 주신 목적은 바로 이러한 깨달음을 얻는 것에 있습니다.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그토록 무섭고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율법의 각 항목 그 전부를 지킬 것을 하나님은 명하신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저는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 때문에 그것을 오늘날 주님께서 명하신 계명을 지키는 일에도 똑 같이 적용시키려는 움직임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가르침을 적용해야할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때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을 경계하며 교회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려는 자세를 들여다보면 그들은 율법 그 모두를 완전하게 지킬 수 없음에도 잘 지키는 척 허영과 자만과 자랑, 체면, 욕심에 찬 외식과 위선의 신앙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그들은 여전히 유대의 규례들 그 속에 담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본뜻에는 관심이 없이 참빛이 가려진 껍데기 율법 조항만을 틀켜쥐고 앉아 그것을 복음적 교회가 지키도록 믿음을 방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오늘날의 우리들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자세는 율법주의자들의 그것과는 전연 다릅니다. 오늘날 계명을 지키려는 자는 회개와 믿음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주님과 이웃을 진실로 사랑하려고 노력하도록 성경은 가르칩니다. 또한 계명을 잘 지키는 척, 허영과 자만과 자랑, 체면, 욕심에 찬 외식과 위선의 신앙 형태를 멀리하려고 노력하며 그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려 애쓰도록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당시 유대인들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참 진리의 빛이 가려지지 않고 눈앞에 환히 열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빛으로 인해 껍데기 신앙을 가려낼 수 있고 거기서 진실한 믿음과 사랑을 훈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주님의 복음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동참하는 일이기에 교회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명을 통해 죄를 깨닫는 것 뿐 아니라 또 거기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 뿐 아니라 그 계명을 율법적 태도가 아닌 참 자유한 생명과 즐거움으로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처럼 옛 율법의 복과 저주를 그대로 따라가 결국 자기의의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바로 옛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는 바울 주장의 본뜻입니다. 롬 6:12-15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끝으로 <과연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무슨 용도로 이스라엘에 주셨는가> 라는 주제를 풀어봄으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도록 주어진 모든 규례로서의 율법들 역시 그 속 본질은 궁극에 이스라엘 뿐 아니라 전 인류에게 적용될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과 따라서 그 십계명을 지키는 일이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둘도 없이 중요하다는 것을 밝혀보겠습니다.

그 당시 모세에 의해 주어진 율법은 그것을 받는 대상에 따라 두 영역으로 나누어 집니다. 그 하나는 유대민족을 포함한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빛으로 주신 십계명과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맡은 유대민족만을 위한 특별한 법 곧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던 규례로써의 율법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던 규례 곧 참빛의 그림자격에 불과한 그러한 율법이 특별히 그들에게 주어진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하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해결될 때 이스라엘에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참 의중을 알게되고 그로 인해 믿음과 율법이라는 어려운 논제의 실마리를 어느 정도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이스라엘만을 위한 규례로써의 율법은 사실 온 인류를 위한 법인 십계명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러한데 즉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진 규례들은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십계명을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특수 상황에 맞추어 세부항목으로 나누어놓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전 인류를 향해 주어진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커다란 두 빛이 이번에는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특수한 조항들로 변화되어 주어진 것이 바로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다가 주님 오심으로 폐해져야할 규례들인 것이지요.

그 규례들을 크게 양분해보면 십계명 중 하나님 사랑의 계명을 위해서는 성막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관련된 세부적인 항목들이 법으로 정해졌고 이웃 사랑의 계명을 위해서는 그들의 일상 삶에서 지켜야할 민법들이 세부적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주어진 규례들조차 비록 그것이 겉으로는 이스라엘민족에게만 적합하도록 제사법과 민법 등으로 옷입혀졌으나 그 속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십계명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율법, 그것은 안으로 보나 밖으로 보나 그 본질에 있어서 온통 십계명을 교훈하고 있으니 참으로 십계명은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신성한 법이라는 말이 과장되지 않았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온 율법이 또 온 성경이 바로 이 두 계명을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22:37-4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러므로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율법의 핵심적 주제는 실상 십계명 그 하나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 십계명이 우선 온 인류를 위해 주어졌고 이어서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도록 따로 세부 항목으로 유대화하여 규례로써 주어진 것이 곧 그들의 규례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그 내용 역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그것이 다만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 잠시 유대화한 빛으로 주어졌다가 참빛으로 오신 주님에 의해 하나님과 인류를 이어주던 징검다리가 되던 유대인들의 역할이 끝남과 동시에 폐하여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거기 규례로써의 율법, 그 안에 깃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은 남기고 그 껍데기 법 자체만 소멸시켜 버린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 껍데기 법이 초기 기독교회에 크나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폐기처분 되어야할 이 껍데기 법을 들고나와 복음을 가로막는 유대의 율법주의자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온 율법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십계명을 지향하고 있음을 무시한 채 문자적으로 나타난 법 조목 규례와 유전 그 하나하나를 지켰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을 높이 세우는데 모든 열심을 내었습니다. 법에 흐르는 참된 가르침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진실한 마음이 실리지 않은 빈 껍데기 법 조목만을 잘 지키는 양 허세를 부리는 그들은 이러한 행위를 자신을 구원하는 보물처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십계명이 무시되는 것은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십계명을 지키는 일은 ‘율법(의 행위)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선언을 왜곡한 탓에 폐해져야할 율법과 한 무더기로 취급받아 구원과 하등의 상관없는 위치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믿음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실로 무서운 사상이 진리인양 우리 마음에 침범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상 십계명은 유대인들 뿐 아니라 과거나 현대나 미래의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바울이 믿음으로 배척하고자 하는 율법(의 행위)이 십계명을 지키는 그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왜곡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도 발견됩니다. 그 법은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참으로 유일무이한 법이기에 설령 주님에 대한 믿음조차도 그 법의 영광을 조금도 가리지 못하고 오히려 믿음으로 그 법을 더욱 굳건히 해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십계명은 유대의 규례처럼 잠시만 있다가 폐해질 법으로써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의 구원에 있어서 때를 가리지 아니하고 언제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그 법을 지키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믿음으로 배척하여 폐하고자 한 율법은 십계명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규례로써의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 그리고 거기 짙게 배인 율법주의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연약한 믿음 탈출하기 http://cafe.daum.net/talchulha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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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에게네센 | 작성시간 05.12.27 진정한 율법을 알아 행위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얼마나 바라실까요. 율법이 사랑의 본질이신 하나님 자체라는것을 변질 시켜서 법조항 하나하나를 지키게 만든다는것이지요. 즉 율법의 정신을 알지 못한다는것 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계명이 성취된자로 거듭나야할때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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