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기장이 비유
로마서 9장에서
1-3절
바울은 자기 동족을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들을 심히 염려하는 자신의 심경을 토로합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도 혈통으로 난 자기 동족을 지극히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성경 말씀이 가르치는 바 인간의 구원은 그들의 생각과는 전연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선민이요 약속을 받은 자요 율법을 맡은 자 라는 등 다른 민족에 비해 외적 조건의 화려함 속에 있는 그 자체를 마치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는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혈통이 아닌 약속을 통하여 이루어지기에 이제 누구든 그 약속을 붙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4-5절
이스라엘은 외견상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것은 기정 사실입니다. 그들에게는 양자됨, 영광, 언약들, 율법, 하나님을 섬김, 약속들이 있고 그리스도조차 혈통으로는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
6-8절
하지만 그런 외적 화려함만으로 약속이 그들에게서 이루어졌다는 증거를 삼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난 육신의 자녀’가 아닌 ‘부르신 이로 말미암은 이삭이라는 약속의 자녀’ 위에 그 구원의 섭리를 여전히 이루어가고 있음을 말씀이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필히 알아야 할 것은 바울이 대조하는 바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난 자와 이삭의 약속으로 난 자가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혈통>과 <약속> 이라는 대조적인 사항을 먼저 푸는 것이 9장 중반부의 토기장이 비유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혈통과 약속의 큰 차이를 보면 전자는 육체적 생명을 이어받지만 후자는 영적 생명을 이어받습니다. 혈통으로 낳아진 자녀는 부모의 생명이 자식에게 이어짐으로 생명의 근원이 인간에게서 비롯되는데 반하여 약속으로 낳아진 자녀는 그 생명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아브라함의 혈통임을 내세우는 것은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타난 의(義)로 하나님 앞에 서려는 것과 같고 이와 달리 약속에 의해 낳아질 이삭과 야곱을 고대하는 것은 인간을 긍휼히 여겨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의(義)로 그분 앞에 서려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 만일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의(義)가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간에서 시작한 혈통으로 누구에게나 이어질 수 있는 성격이라면 하나님은 굳이 이삭이나 야곱과 같은 약속의 자녀를 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삭이나 야곱과 같은 약속의 자녀를 세우셨는데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인간은 본래 악에 기우는 경향성을 안고 태어나는 까닭에 자신에게서 비롯된 힘으로 살려할 때는 외식과 위선의 자기의(自己義)만 나올 뿐이어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에 자비의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겨 구원할 길을 따로 예비하신 바 이런 구원의 섭리가 인간 내면에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약속을 통하여 미리 말씀해주신 것이 바로 이삭과 야곱의 출생과 삶을 비유로 기록한 성경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과 야곱의 출생과 삶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 속에는 한 인간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인도해 가시는 구원의 점진적인 과정들이 신비롭게도 말씀의 내적 의미로 담겨져 있는데 그 간략한 과정은 이렇습니다. 즉 사람 내면 깊고 깊은 곳에는 그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소위 남은 그루터기라고 불리우는 거룩한 불씨가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세상에 깊숙이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의 긍휼은 꺼져가는 저 불씨를 되살리시어 그를 거기서 이끌어 내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먼저 그의 이해성으로 하여금 세상적인 지식과 영적인 지식들을 배우는 시기를 지나게 하시는데 이러한 지식이 채워져야 비로소 옳고 그릇된 것을 가릴 수 있는 판단력이 생겨 그의 의지에 담긴 악을 보고 치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해성과 의지는 오랜 기간 이런 과정을 거치며 거짓과 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면 그제서야 구원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 중에 이해성에 새롭게 생기는 변화들이 바로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영적 상태들인 것입니다. 또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서 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난 약속의 자녀의 탄생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 곧 그분이 미리 예비하신 구원의 손길을 통해서만 인간이 의(義)로워짐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무지한 이스라엘은 선택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외적 조건만을 내세워 스스로를 약속의 자녀로 확증하며 오히려 참된 약속을 이루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9-13절
생략(야곱과 에서 이야기 참조)
14-18절
인간 스스로에게서 비롯된 의(義)로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도록 하나님께서 계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은 불의하시지 않습니다. 과거 모세를 통하여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를 지나올 때도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를 보아서도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알 수 있는 바 구원은 약속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서만 가능할 뿐 인간의 원함과 열심만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바로를 세운 것도 구원이 약속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그를 대적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음으로 구원을 향한 이스라엘의 신앙여정을 방해하는 세력들을 물리치게 되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히 하셨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불의하시지 않으십니다.
19-23절
그러면 긍휼히 여기고 강퍅히 하시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에게 있는 허물 또한 하나님의 의도하신 것일진대 어찌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탓하시는 것입니까? 도대체 누가 그런 절대 주권으로 행사하시는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바울은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하나님께 대꾸하느냐? 지음을 받은 것이 지으신 분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토기장이가 같은 흙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겠느냐?” 이렇게 답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바울은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고 인간 그 자신의 힘에 있지 않음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 그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혀 거스르지 않는 방법으로 진행되기에 혹 자신이 지은 죄악으로 멸망에 처한 자가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 탓으로 돌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의 절대 주권을 행사하시면서도 능히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범하지 않으시는 그 놀라운 능력은 어떤 것일까요? 그 방법을 바울은 토기장이 비유로 설명합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사항은 같은 흙덩이로 하나는 귀히 쓰고 다른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빚으시는데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물론 그들 모두의 구원과 행복을 위한 그분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행사는 비록 그것이 절대주권 하에 나타나지만 처음부터 이 사람과 저 사람을 천히 쓰거나 귀히 쓰는 등의 차별을 하지 않고 모두를 귀히 쓰려는 작정 하에 진행됩니다. 그런 까닭에 멸하기에 합당한 <진노의 그릇을 상징하는 이방인>들을 심히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시고 또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에게는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심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행사는 진노의 그릇이나 긍휼의 그릇이나 간에 저들 모두의 행복만을 위하여 진행될 뿐입니다.
그리고 여기 사용된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렇게 선택하고 예정하였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추후 여건에 따라 그렇게 될 가능성의 그릇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즉 스스로 자유의지에 의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이 어떠한가에 따라 하나는 진노의 그릇이 되는 반면 다른 하나는 긍휼의 그릇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하늘에 있는 태양이 만물에 두루 광명의 빛을 비추듯 선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선인이든 악인이든 가리지 않고 골고루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만 그것이 경우에 따라 어떤 이에게는 복이 되는가 하면 다른 이에게는 올무와 저주가 되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처음부터 누구는 선택하는데 반해 다른 누구는 버린다든지 하는 따위의 불공평하고 폭군적인 행사를 뜻하지 않고 모두의 행복을 위한 사랑의 주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그런 하나님의 행사에 순응하지 못한 탓에 그들의 행복을 빼앗기고 가능성으로만 있던 그 진노의 그릇이 실제 현실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는 말씀도 이런 배경 하에 이해되어야 하겠습니다. 즉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한 주체가 하나님이 아닌 것은 자명하고 다만 선한 씀씀이를 위한 하나님의 허용이라는 측면에서 그렇게 표현된 것입니다.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게 된 것은 그가 지닌 악에 의하여 스스로 그렇게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로의 경우를 비롯하여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선한 씀씀이를 위한 하나님의 허용과 감시 하에 발생하고 있다는 취지로 성경은 그런 식의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선한 씀씀이를 위해 바로를 긍휼히 여기시지 않은 것이 곧 그 마음의 강퍅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지요.
24-26절
하지만 그 그릇들은 가능성의 그릇들이기에 상징으로만 있던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이 실제에 있어서는 서로 입장이 뒤바뀔 수 있는데 ‘내 백성이 아닌 자들을 나의 백성이라, 사랑하지 않은 자들을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리라’는 말씀이 이를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것은 30-31절에 나와 있는데 ‘의를 따르지 아니하던 이방인들이 의에 이르렀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라’ ‘그러나 의의 법을 따르던 이스라엘은 의의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라고 함으로 결국 토기장이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결코 불공평하거나 폭군적인 선택과 예정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한 가능성 하에 사람 스스로 귀히 쓰거나 천히 쓰이는 차별에 놓이게 됨으로 혹 천하게 쓰이는 자가 "어찌하여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항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연약한 믿음 탈출하기 http://cafe.daum.net/talchulha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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