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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탐진최씨

작성자최윤영(대전)|작성시간17.02.25|조회수534 목록 댓글 0

김정호의 광주 역사산책29.광주의 아전
김정호의 광주 역사산책


탐진최씨 시조 모신 무양서원 광주시 광산구 월계동에 위치한 무량서원에는 탐진최씨들의 시조가 모셔져 있다. 탐진최(崔)씨는 새양반 지식층 가문으로 비문에 기록된 광주아전 21명중 10명이 최씨였을만큼 구한말 이후 광복전후까지 광주를 주도한 토박이들이다. 오세옥기자
수령 밑에서 실무 보던 中人

근대화 과정 신지식층 배출

관리란 관인과 서리를 합한 말

수령 직무대리 막강 권한 행사

1800년대 이전엔 임금도 안줘

유급제로 바뀌며 경쟁 심해져

재리에 밝아 상업 등 일찍 진출

탐진최씨 개화기 최강 토반세력

조선시대 광주의 주도세력은 관인(官人)을 배출한 양반가문과 관인(수령)밑에서 실무를 보던 아전가문이었다. 특히 오늘날의 지방 공무원이라 할 아전가문들은 근대화과정에서 광주를 주도한 신지식층을 배출해 광주사회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사회인식은 아전집안이라하면 충분한 근거도 없이 업신여기는 풍토여서 어느 집안이나 아전 집안임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이런경향은 이 집안들의 족보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은 지방공무원을 지낸것을 자랑스럽게 경력에 나타내고 있지만 실제로는 오늘날의 시청국장급 보다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던 호장(戶長)이나 이방(吏房)을 지냈더라도 이를 경력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국어사전을 들춰보면 ‘아전이란 각 관청에 딸리어 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던 조선시대 중인층을 이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은 조선시대 양반, 양민(서민), 천민, 노비의 신분계층에서 양반과 양민사이에 끼어 있던 또하나의 신분계층인 중인(中人)들이라는 뜻이다. 이 중인가문은 세습되었던 신분계층으로 이들 중에서 왕의 첩지를 받아 벼슬을 살던 6품이상의 양반들밑에서 실무를 보던 6품이하 9품까지의 품계를 주었던 하급관리와 육방관속들인 서리(胥吏)를 맡아 일보았다.

그래서 관리라 하면 양반계층이 맡았던 관인과 중인가문이 맡았던 서리를 합한 말이 된다. 이 아전들은 중앙에서 임명한 수령을 보좌해 세금의 출납은 물론 문서작성과 수발, 세금·창고의 책임, 관아의 영선 등 모든 실무를 담당했을뿐 아니라 수령이 출장중일때는 직무를 대리하기도 했기 때문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특히 수령들은 고향이 아닌 타향에 배치되고 임기가 30개월이고 부임하는데 1개월가량 소모하는데다 현지 사정에 어둡기 때문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1800년대 이전까지는 봉급을 주지않고 부려먹었기 때문에 오늘날말로 치면 봉사료를 민원들에게서 받아내는 불가피성이 생겨 ‘아전 술한잔은 환자가 석섬’이란 속담까지 생겼다. 이같은 그릇된 제도 때문에 아전은 부패의 상징처럼 여겼고 무임금때는 서로 아전직을 맡지않으려고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까지 생겨나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조선왕조는 이같은 모순과 부패를 방지하기위해 지금같으면 시의회격으로 선비계층으로 구성한 향청(鄕廳)제도를 두어 좌수, 별감 등을 임명하고 향약을 만들어 낙오한 선비계층들이 아전들을 견제하도록 했다. 고을마다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곁에는 아전들이 근무하는 작청(作廳·吏廳)을 두고 객관곁에는 좌수, 별감 등이 근무하는 향사청(鄕射廳)을 두었다.

광주목에 근무하던 이속의 정원은 6방과 서원 30명, 일수 40명, 나장 20명, 차비군 14명이었으나 광주읍지에 나오는 근무인원은 군관 40명, 아전 70명, 서원 20명, 지인(知印·날일꾼) 30인, 사령 40인 등으로 200여명에 달했다. 이밖에도 관아에는 기생, 악생과 악공 등 천민 50∼100여명과 관노비 55명이 근무했다.

1879년 광주인구 2만7천482명때 이같이 많은 관청근무자들이 있었으므로 예나지금이나 공무원 비율은 크게 다를바 없는 셈이다.
영모재 남구 진월동 정(程)일씨 제각 영모재 程廣(건천)의 신도비


고종11년의 '일성록'(日省錄)에 보면 이때는 아전들에게 그 임무에 따라 급료를 주었던지 광주 이방(吏房) 500량, 호장(戶長) 100량, 도서원과 대동색(大同色) 1천량을 주었다. 이처럼 아전직이 중요성에 따른 유급제도로 바뀌면서 경쟁이 심해졌다. 양반계층이 담당한 향청의 추천에 따라 목사가 임명하는 제도가 되면서 능력이 없으면 아전일도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세습 아전 가문들은 일반가정의 장자중심의 가계상속보다 차서에 관계없이 재주와 능력으로 가계를 계승하는 풍속이 정착되고 양반자제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해 향청간부들의 눈에 들도록 전문성을 길렀다. 뿐만아니라 같은 계층의 세력있는 이웃고을 아전 가문들과 혼인해 그 세력을 키워왔다. 이들은 1884년의 갑오개혁으로 신분차별이 철폐되면서 구한말의 실무관리인 주사, 참사, 도정, 참의 등을 거의 독식했으며 일제하 1920년 전국 군수 300곳중 60%인 260곳을 주사출신들이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뿐만아니라 이들 가계는 향리중의 재무부서인 호장직이나 그 서원, 창고색 등을 담당하기 위한 회계공부를 해온 탓으로 재리에 밝아 토지투자, 상업 등에 일찍 진출해 광주부자의 대열에 끼어들었다. 개화기에 상투꽂고 서당공부를 하는 것이 양반체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서양식 교육을 받으려 신식학교를 입학하거나 외국유학을 떠난계층도 아전 가문들이었다. 이 때문에 상투꽂고 옛양반자랑을 하던 집안을 ‘씨양반’이라하고 중인 신분을 뛰어넘어 새 상류층으로 성장한 중인집안을 ‘새양반’으로 부르는 풍자도 시작되었다.

아전에 관한 연구는 경상도지방에 남아있는 자료가 많아 연구논문이나 저서가 더러있다. 이에 견주어 전라도지방에는 '호남영방선생안''전주부인리공생선생안''곡성호적' 등에 일부자료가 남아 있을뿐이고 각 고을에 있던 향청좌목이나 '인리·소동발안' 등 향리자료가 철저히 폐기되어 그 전모를 밝히기 힘들다. 광주의 경우 향교중수비에 각인되어 있는 21명의 아전이름이 거의 유일한 자료이고 토성족보속에 남아 있는 근대인물들의 직함에서 그 흔적을 더듬을 수 있을 뿐이다. 설사 아전직에 있었다하더라도 실명과 족보에 올라있는 이름이 달라 이를 함부로 논의의 대상을 삼는데도 한계가 있다.

다만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와있는 향리성씨 4성에 대한 사정은 살펴볼 수 있다. 개성김씨의 경우 타지방에서 유입된 가리(假吏)가문이었던지 광주 정착 후손들이 거의 없다. 개성김씨는 신증문헌비고에 시조가 김준(金晙)이라 했으나 1983년판 김씨족보에는 본디 의성(義城) 김씨 9세 김용주(金龍珠)가 고려때 여진토평에 공훈을 세워 개성백의 군호를 받아 시조를 삼았다고 되어있다. 이 집안은 오늘날 주로 신탄진과 옥구를 중심으로 살고 있을 뿐 광주에서 활동한 인물을 찾아 볼 수 없다. 과거시험 기회마저 갖지못했던 섬출신들이 대통령이 되는 판에 실재했던 조선시대 신분제도를 밝히는 것을 금기시 할 일은 아니다.

광주에 448집 1,512명(2000년말 기준)이 살고 있는 한산정(程)씨는 증보문헌비고에 12본이 나와있고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에 광주정씨는 본디 아전의 성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집안은 중국의 송나라때 철학자 정이천(程伊川·1037∼1107)의 후손으로 고려말 로국공주가 시집올때 시종하여 들어와 한산군 군봉을 받은 정은조(程恩祖·1309∼1383)가 광주에 정착했다고 정리하고 있다. 둘째아들 광(廣·1324∼)이 광산이씨 이언장(李彦章)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고 그의 아들 유연(有連·1359∼)이 광산김씨 김태현(金台炫)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으며 손자며느리는 광주노씨 노준공(盧俊?)의 딸이였다고 족보에 적혀있어 당대 광주 명문 가문들과 인척관계를 이뤘던 셈이다.

고흥신(申)씨로 나와 있는 집안은 오늘날 고흥에 토반으로 살고 있는 신씨들이 본관을 고령(高靈)이라하고 있어서 세종무렵 광주에 살고 있던 고령신씨는 신숙주(申叔舟·1417∼75) 영의정 집안이다. '증보문헌비고'에 보면 시조는 신성용(申成用)으로 본디 향리(鄕吏)였으나 문과에 급제해 검교군기감을 지냈다했다. 그의 현손이 신덕린(申德隣·예의판서)이고 처가가 광주정씨 시조인 정신호(鄭臣扈)이며 외조가 충주박씨 박순(朴淳)이었다. 덕린의 아들 포시(包翅·1361∼)가 나주 노안에 살던 나주정씨 시조 정가신(鄭可臣)의 현손녀에게 장가들어 신숙주는 노안 금안동 외갓집에서 낳고 자랐으나 본집은 광주에 있었다. 이처럼 명문인 신씨집안을 중인신분인 광주 아전집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본디 고려때는 호장(戶長)은 중앙관인이 임명되지 않은 고을의 치정책임을 맡았고 조선왕조교체기 초기에는 이들 토호자제들이 지방관아의 실무를 담당했던때이므로 개연성이 없지않다. 이같은 사례는 경상도 호장층선생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특히 1776년대에 이진흥(李震興·1731∼1777)이 쓴 '연조귀감'(?曺龜監)에 나와 있다. 마지막 탐진최(崔)씨는 광주사람들이 다아는 새양반 지식층가문이다. 비문에 기록된 광주아전 21명중 10명이 최씨였을만큼 구한말이후 광복전후까지 광주를 주도한 토박이들이다. 광주에 살고 있는 탐진최씨는 모두 3,381집, 11,030명으로 전국의 수는 7만여명이다. 광주토반 탐진최씨는 고려말 두문동 72현이었다는 최윤덕(允德)의 후손들로 손암공파라 한다. 시조는 강진에 살았다는 최사전(崔思全·1069∼1140)으로 표해록으로 유명한 최부(崔溥·1454∼1504)가 그 후손이다. 공양왕때 벼슬이 시중이었다는 최윤덕은 광주에 자리잡은 뒤 그 후손들이 조선왕조벼슬길에 나가지 않아 향리로 자족했다는 집안이다. 조선초기에는 호장등 아전근무 중이었던 사람들도 과거시험을 통한 신분상승의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으나 중기이후 양반의 수가 늘어나면서 전국 관인수가 한정이 있었기 때문에 같은 양반끼리 자리다툼을 하느라 당쟁을 일삼고 사화를 일으켜 같은 양반을 멸족시키고 노비를 만들던 사회로 변해버렸다. 이런 판국이라 이미 아전으로 지역토착세력이 되어버린 집안을 중인으로 묶어 중앙진출을 막고 지방에서 자족하도록 한 제도가 아전의 세습화이다.
광주 향교 정문 우측에 자리하고 있는 향교 비군중 중수비


광주 근현대인물중의 탐진최씨 유명인사들은 최흥종 목사, 최종섭 제헌국회의원, 최태근 광주사세청장, 최영욱 초대 전남지사, 최정기 조대총장, 최상채 전남대총장(장흥파), 최선진 유은학원이사장, 최영운 초대시장, 최원순 동아일보국장, 최상진 초대광주면장, 최기영 대성약국, 최한영 민주화운동 시민대표 등으로 개화기 최강토반세력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탐진최씨 시조 모신 무양서원

광주시 광산구 월계동에 위치한 무량서원에는 탐진최씨들의 시조가 모셔져 있다.

탐진최(崔)씨는 새양반 지식층 가문으로 비문에 기록된 광주아전 21명중 10명이 최씨였을만큼 구한말 이후 광복전후까지 광주를 주도한 토박이들이다. 오세옥기자



영모재

남구 진월동 정(程)일씨 제각 영모재

程廣(건천)의 신도비



광주 향교 정문 우측에 자리하고 있는 향교 비군중 중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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