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절요는
고려시대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자치통감〉을 모범으로 하여 1452년(조선 문종 2) 2월에 춘추관에서 편찬한 편년체 역사책(35권 35책).
개요
편찬에 참가한 사람들은
김종서·정인지·이선제·신석조·신숙주·김례몽·양성지·이예·김지경·김윤복·이극감·윤기무·박윤정·홍우치·이효장·김효우·김용·한서봉·허익·박팽년·유성원(이상 〈고려사〉 편찬에도 참가)·이계전·김맹헌·김질·어익·이윤인·윤자영·김한개 등이다.
조선왕조를 건립한 뒤, 조선은 건국을 기정사실로 하기 위해 전 왕조인 고려의 역사 정리 작업을 하였다.
〈고려국사〉는
① 고려시대 역사서술을 계승하여 원 간섭기 왕의 칭호를 종(宗)이라 하지 않고 왕으로 고쳐 쓴 것을 그대로 답습했고,
②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을 합리화했으며,
③ 수찬자가 통치이념을 정립하려는 목적의식이 강하게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려국사〉는 고려말의 기사가 다르다고 하여 태종의 명으로 1414년(태종 14) 5월에 하륜이 개정하게 되었으나
1416년 하륜이 죽게 되면서 완결되지 못하였다.
세종 역시 〈고려국사〉가 〈고려실록〉의 내용과 다르다는 이유로 개정하려고 했는데,
〈수교고려사〉는 〈고려국사〉에서 군주와 왕실에 대한 칭호와 원 간섭기의 관제를 고쳐 쓴 것이다.
이후 1438년 〈태종실록〉과 〈자치통감훈의본(訓義本)〉을 만든 경험을 바탕으로 세종은 다시 고려사를 편찬하고자 하였다.
편년체로 할 경우 왕의 생일, 사신의 왕래 등의 일상적인 일을 상세히 기록할 수 없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기전체를 주장하고(왕권 입장을 강조), 기록의 중복을 피하고 보기 편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편년체를 주장하였다(신하 입장을 강조).
세종은 편년체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에 김종서 등은 세자를 설득하여 먼저 기전체 사서인 〈고려사〉를 만들고, 그 뒤 5개월 만에 〈고려사절요〉를 완성하였다. 〈고려사절요〉 편찬목적에 대해서 김종서는
"〈고려사〉의 문장이 번잡하여 편년기사로서 보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이극감은 "〈고려전사〉(〈고려사〉의 본디 이름)는 시비득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그 책이 나오면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알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김종서 등이 〈전사〉를 널리 유포하는 것을 꺼리고
그 대신 〈절요〉를 반포하였다"고 하였다.
<출전 :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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