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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리를 충만케 하라. (대학교회-09/05/10)

작성자정석규|작성시간09.05.06|조회수174 목록 댓글 0

본문: 창세기 1:20-23


        지난 설교에서 저는 창세기 1장에 나타난 1-3일의 창조를 통하여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자신의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기 좋아하시는 모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저는 4-6일의 창조 기사를 통하여 <당신의 자리를 채우십시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4-6일의 창조 사건은 1-3일의 창조사건과 대응되며 묘사되고 있습니다. 1일은 4일, 2일은 5일, 3일은 6일과 대응되고 있습니다. 첫째 날에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빛이 비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넷째 날에 해, 달, 별을 만드시어 빛을 채우셨습니다. 둘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궁창을 만들어 궁창 위와 궁창 아래를 나누셨습니다. 그런데 궁창 위와 아래가 비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섯째 날에 새와 물고기를 창조하시어, 궁창 위에는 새로, 궁창 아래는 물고기로 충만케 하셨습니다.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물 가운데 육지를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땅이 비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에 짐승과 인간을 창조하시오 육지를 채우셨습니다.

 

        말씀드리는 가운데 추측하셨겠지만, 4-6일째의 창조의 특징은 빈 공간을 채우는 것입니다. 충만케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땅의 모습을 “혼돈”과 “공허”라고 묘사했는데, 혼돈 가운데 질서를 만드는 것이 1-3일째의 창조의 특징이라면, 공허 가운데 있는 것을 충만케 하는 것이 4-6일째의 창조의 특징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22절에서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공허 가운데 충만케 하는 것, 번성하는 것, 채우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이 세상의 모습이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자리를 잘 발견하여 그 자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자신을 충만케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모습입니다.   

        

        ‘충만’이라는 창조의 정신은 우리의 삶과 연관하여서는 ‘충성,’ 또는 ‘열심’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을 다하는 것이 바로 창조의 정신입니다.

 

        잠언 25장 13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이스라엘은 사막기후이기 때문에 추수할 때도 낮에는 매우 덥습니다. 아니 뜨겁습니다. 뜨거운 햇볕 밑에서 추수한 적이 있습니까? 추수는 못했더라도, 땡볕에서 운동이나 심한 활동을 하여 땀을 비 오듯이 흘린 적이 있습니까? 몇 년 전에 성지순례를 가서 뜨거운 햇볕 아래서 사해 근처에 있는 ‘마사다’ 요새를 올라간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더웠고, 모든 분들이 땀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곳에서 내려와 차가운 음료를 먹은 것이 기억이 나십니까? 정말로 뼈 속까지 시원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충성된 자가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시원하게 하는 자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충만케 하는 자, 자신의 삶에서 충성을 다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쓰임 받았던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 ‘충성’과 ‘열심’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생각해봅시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고 호숫가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5: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5

        베드로는 얻은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습니다. 한번 그물을 내렸는데 고기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또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런데도 고기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시몬 베드로는 또 그물을 내렸습니다. 계속 그물을 던져도 고기가 잡히지 않았지만 베드로는 포기하지 않고 밤이 맟도록 그 일을 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베드로의 열심과 끈기를 봅니다. 자신의 일에 포기하지 않고 열심을 다하는 베드로,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그를 부르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바로 이러한 ‘열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는데 기본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열심과 끈기가 있는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열렬한 바리새주의의 유대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스데반 박해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행 7:58), 기독교를 핍박하는 일에 열심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의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으로 그들을 핍박하기 위해 외국성까지 다녔고(행 26:11), 기독교인을 위협하고 결박하는데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그가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믿는 바에 열심인 사람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바울이 이런 열심의 마음이 있었기에 하나님께 더욱 쓰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면에서였지만, 그도 역시 기본적으로 자신이 믿는 것에 열심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일에서, 자신이 믿는 바에 열심을 다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크게 쓰임 받는데 기본적인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과 베드로의 열심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들이 열심을 내었기에 어쨌든 ‘열심’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열심과 충성됨에 있어서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열심 그 자체가 문제였을까요? 그들의 문제는 열심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데 있어서 긍정적인 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문제는 열심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열심은 있었지만, 그들이 있어야할 바른 자리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있어야할 바른 자리는 사람 낚는 어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물고기를 낚는 곳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있어야할 바른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열심을 갖기 이전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바른 위치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각기 지으신 것을 충만케 하기 이전에, 먼저 그것들이 있어야할 자리를 정해주셨던 것입니다.


        얼마 전에 아이와 함께 <소명>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습니다. 아마존 강 유역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작은 부족 가운데 하나인 ‘바나와족’ 마을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강명관 선교사 부부에 이야기였습니다. 강명관 선교사는 제가 대학교 다닐 때 같은 신앙써클을 했었던 국문과 출신의 친구입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믿음에 대하여 갈등을 많이 하던 친구였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꺼리는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그 부족을 섬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강명관 선교사님이 섬기는 바나와 부족은 전체 인구가 100여명 정도인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부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부족이 사는 아마존 강 유역의 정글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에 야생 동물을 사냥해서 먹고 삽니다. 선교사님도 그 부족들과 함께 하루에 몇 시간씩 아마존 정글에 들어가 사냥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 동네에는 전기도, 전화도 없습니다. 독성이 있는 벌레가 너무 많아 밤에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기만 하면 온 몸이 벌레 물린 자국으로 가득합니다. 정말 날씨가 더워, 아침과 저녁이 아닌 낮에는 돌아다니기 거의 불가능할 정도라고 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곳에서의 삶은 너무 열악하여 고난과 고통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선교사님의 얼굴은 대학 때보다 훨씬 밝고 순수했습니다. 비록 수염을 잘 깎지 못해 얼굴은 털로 가득했지만, 그 얼굴에 기쁨과 평안이 가득했습니다. 정말 보기 좋았습니다. 친구인 저도 보기가 좋은데,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그 선교사 부부를 보면서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좋아하실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바로 찾아, 그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찾아, 그 자리를 충만케 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좋아하십니다.


        영어에 ‘열심’이라는 단어는 Enthusiasm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의 εν θεος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의 뜻은 “in God”입니다. 즉 열심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열심’은 ‘바른 열심’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충성은 ‘올바른 충성’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참다운 열심과 충성이 나올 수 있습니다.

 

        “충성(忠誠)”이라는 한자어는 가운데 중(中) 밑에 마음 심(心)자가 있는 충(忠)이라는 글자와, 말씀 언(言)자 옆에 이룰 성(成)자가 있는 성(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마음의 중심이 떠나지 않고 일단 말한 것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성을 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충성을 하는 것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일편단심의 마음을 누구에게 바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데 최선을 다할 수도 있고, 회심이전의 바울처럼 하나님의 복음을 방해하는데 최선을 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충성은 하나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설명하시기 위해 마태복음 25장에서 달란트 비유를 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5달란트와 2달란트 받은 종들은 열심히 일하여 각각 5달란트와 2달란트를 더 남기었습니다. 그들은 그 주인에게 이렇게 칭찬 받았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3)

 

        그 종들은 주인께 충성하였기에 주인의 즐거움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충성함으로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충성은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특권을 줍니다.

        그러나 1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을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어떤 것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마 25:26)  

 

        여러분 이 말이 이해가 됩니까? 1달란트 맡은 자가 게으르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것이 악하다는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에서 게으른 것은 곧 악한 것입니다. 이러한 종은 하나님 나라에 무익한 사람입니다. 이 종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25:30)

        결국 게으른 1달란트 맡은 종은 내어 쫓기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즉 그는 게을렀기에 악한 종이었고, 악했기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클라우드 페퍼라는 미 하원의원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당신이 계속 페달을 밟는 한 당신은 넘어질 염려가 없다.”

        자전거를 타 보신 분들은 아니겠지만,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핸들을 바로 조절하고, 더욱 페달을 밟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전거에 속력이 나면서 평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을 살다보면 넘어지려는 위험한 순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때 핸들로 방향을 바로 잡지 않고, 페달 밟는 것을 잊어버리면 진짜로 넘어지게 됩니다. 그럴 때일수록 더욱 페달을 열심히 밟는 자는 자가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을 마감할 때 바울과 같은 고백을 했으면 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마침표를 찍기 전까지, 우리 스스로 우리의 삶에 쉼표를 찍지 않는 지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어떤 소녀 가장이 불치병이 걸려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여덟 살에 어머니를 여읜 후 갖은 고생을 하며 네 명의 동생을 돌봐 온 그녀는 인생의 쓴맛만 본 소녀였습니다. 어떤 믿음 좋은 부인이 찾아가서 그를 위로하며 “죽는 것이 두렵니?”라고 물었습니다. 소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아니요, 죽는 것은 두렵지 않은데 한 가지 걱정이 있어요. 여태까지 손발이 부르트도록 애쓰며 지치도록 살아왔지만, 제가 주님 앞에 설 때 그분이 ‘날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시면 전 대답할 말이 하나도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소녀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니다. 예수님 만나면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고 부르트고 못이 박힌 그 손을 보여 주어라. 그러면 주님께서 분명히 작은 일에 충성한 착한 종이라고 칭찬하실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소녀는 마음에 큰 위안을 받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다음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보여드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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