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음과 같은 표현들이 있습니다.
* 번뇌즉보리
* 생사즉열반
* 중생즉부처
2. 이것을 제가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번뇌즉보리 : ①번뇌가 곧(바로) 보리(깨달음, 깨달음의 지혜)이다
②번뇌에서 바로 보리로 나아간다
* 생사즉열반 : ①생사가 곧(바로) 열반이다
②생사에서 바로 열반으로 나아간다
* 중생즉부처 : ①중생이 곧(바로) 부처다
②중생에서 바로 부처로 나아간다
2-1. 그런데 위의 표현들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은 견강부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번뇌즉보리 : ③중생은 번뇌에 의해 괴로움을 겪기 때문에 부처님의 완전한 지혜로 나아가야 한다
* 생사즉열반 : ③중생은 생사에 의해 괴로움을 겪기 때문에 생사에서 벗어난 열반을 성취해야 한다
* 중생즉부처 : ③중생은 윤회의 괴로움을 겪고 있으므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도록 부처님처럼
깨달아야 한다.
- 왜냐하면 ③의 의미로 문장을 만들려면 곧 즉(卽) 대신에 다른 한자를 사용하는 것이 맞을 것
이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 위의 표현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다음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까요?
* 질문 : ①번뇌를 버리고 보리를 얻는 도(道, 도닦음, 길걸음)가 있습니까?
②생사를 여의고 열반으로 나아가는 도(道, 도닦음, 길걸음)가 있습니까?
③중생에서 벗어나 부처님처럼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도(道, 도닦음, 길걸음)가
있습니까?
- 아마 그들은 “팔정도”라고 선뜻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 왜냐하면 “팔정도”라고 대답하면 저 위의 저런 표현들을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 표현들에는 팔정도가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 팔정도는 단박에 이르는 도닦음이 아니고 점진적으로 닦아 성취해나가는 도라고
저는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4. 저 표현들이 만약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한다면,
불교에서 저 표현들은 사람들을 “그릇된” 깨달음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 부처님께서 의미와 표현을 갖춘 훌륭한 가르침을 설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불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놓아두고, 부처님 아닌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을 숙고하고 그들의 방법대로 도를
닦으면 그것은 부처님의 제자로서가 아니고 그 사람들의 제자로서 도를 닦는 것입니다.
- 그러면 그들은 팔정도가 인도하는 곳으로 도달하지 못하고, 그 사람들이 도달한 곳으로 인도될
것이고, 저는 불교에서는 그곳을 바른 깨달음이 아니고 “그릇된” 깨달음이라고 이해합니다.
( 이런 방법으로도 저는 위의 저런 표현들을 물리치고 버립니다. )
<참고> : 그래서 저라면 그동안 배운 지식으로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 번뇌가 일어난다고 번뇌에 압도되지 마십시오. 알아차리고(마음챙기고) 바른 곳으로 돌아가
물리치십시오. 그래서 번뇌가 사라지면 이제는 맑은 마음으로 깨달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
하십시오.
* 생사는 괴로움입니다. 태어남이 즐거움이라고 하거나 죽으면 끝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죽음도 괴로움입니다. 그러므로 생사에서 벗어난 열반을 성취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중생은 참으로 오래 동안 윤회하면서 괴로움을 겪어왔습니다. 이제 부처님 가르침을 만났으니
불자라면 우리는 중생에서 벗어나 부처님께서 제시해 주신 아라한이 되도록 정진합시다.